강 론 말 씀

2013년 12월 6일 가해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성 니콜라오 주교)

dariaofs 2013. 12. 6. 01:18

 

 

소아시아 리키아(Lycia)의 파타라(Patara)에서 태어난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집안이 매우 유복하였다. 그가 성덕과 신심 그리고 기적 등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미라의 주교 때였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동안에는 그 역시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석방되었고,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단죄한 니케아(Nicaea)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뛰어난 행적으로 인한 전설과 비공식 전기 등은 매우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파타라 출신인데 돈 많은 양친이 사망하면서부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헌신함과 동시에 자신의 막대한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자선활동을 위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행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어느 가난한 세 처녀에 관한 것이다. 그녀의 부친이 딸들의 지참금 문제에 얽혀 사랑스런 딸들을 매춘부로 넘겨야 할 곤경에 처했음을 알고, 니콜라우스는 세 번에 걸쳐 그 집에 금이 든 자루 세 개를 몰래 넣어 주었고, 마침내 이 세 자매는 정당하게 혼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교 신전을 부수었으며, 지방 관리인 에우스타시우스(Eustasius)를 몰아세워서 무죄한 죄수 3명을 사형 직전에 직접 구출했는가 하면, 콘스탄틴 황제의 꿈에 나타나서 무죄한 정부관리 3명의 무죄 사실을 알려 그들이 석방되게 했다는 등 수많은 전설이 전해온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전 서방에 퍼져나갔고, 1087년에 그의 유해를 바리(Bari)로 이전하여 경당을 세우자 유럽 최대의 순례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흔히 바리의 성 니콜라우스로 불린다. 죄수들과 어린이들의 수호성인인 그는 또한 리키아 연안의 뱃사람들을 극적으로 구출했던 사실 때문에 폭풍우에 갇힌 뱃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성탄절 때 어린이들에게 성 니콜라우스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는 관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성 니콜라우스는 네덜란드에서는 '신터 클레스'(Sinter Claes), 영어권에서는 '산타 클로스'(Santa Claus)로 불려졌다.

 

그러나 주의할 사실은 산타 클로스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 독일의 신인 토르(Thor)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신은 겨울과 유울 로그(Yule Log, 성탄전야에 때는 큰 장작) 그리고 크랙커와 그나셜이라 부르는 염소들이 끄는 마차와 관련되는 토속적인 신인 것이다. 이것은 니콜라우스를 토착화시킨 형태라고 보는 것이다. 어쨌든 성 니콜라우스는 그리스, 시칠리아(Sicilia), 풀리아(Puglia), 로렌(Lorraine) 그리고 러시아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강론   :   (마태 9,27-31)

 

<너희는 믿느냐?>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아마도 그들은 구걸을 하면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지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는 말은

몇 푼의 돈을 청하는 말이지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청하는 자비는 눈을 뜨는 것,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또 영혼의 구원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 두 사람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만 듣고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믿음을 확인하는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28)"

'그런 일'이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대로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일,

새로운 인생을 주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 등을 뜻합니다.

 

지금 이 질문은 "나를 믿느냐?"가 아니라, "나의 권능을 믿느냐?"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과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사악의 탄생을 예고하셨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아브라함과 내가 모두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창세 18,12).

그때 하느님께서는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라고 꾸짖으셨습니다(창세 18,14).

사라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믿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사라처럼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부족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예수님의 권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몰랐고 믿음도 부족했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너희는 믿느냐?" 라는 질문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고쳐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마르 8,22).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믿음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믿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그들에게 스스로 고백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입으로 직접 고백하는 일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원래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혼자 속으로(마음만으로, 또는 생각만으로)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자기의 믿음을 겉으로 고백해야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박해 때에 속마음으로는 믿고 있지만 그것을 감추고,

안 믿는다고 거짓말을 해서 살아남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은 그냥 배교자가 됩니다.

자기는 안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그 행위 자체가 배교라는 것입니다.

박해자들이 그것을 노리고

"거짓말이더라도 안 믿는다고 말하면 풀어 주겠다."

라고 유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믿느냐는 질문에 최소한 침묵이라도 지키면

살려 주겠다고 유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마음으로는 안 믿으면서도

믿는다고 말해서 죽은 경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죽을 사람은 실제로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있었다면 그것은 순교가 아니라 자살입니다.)

 

또 믿음은 고백을 통해서 더욱 강한 믿음이 됩니다.

이것은 지금이라도, 또 누구라도 금방 체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반대로 자기의 믿음을 감추면 감출수록 믿음이 더욱 약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사람들에게 "너희는 믿느냐?"

라고 물으신 이유 가운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기 위해서 그런 질문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놓치면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일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니고,

삶 전체가 고백이 되어야 하고, 증언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신앙 고백은 '삶'으로 구체화되어야 하고(실현되어야 하고),

그래서 신앙인의 삶 자체가 고백과 증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질적인, 또는 세속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삶은 그렇지 않은데 말로만 믿음을 고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선거에서 당선될 목적으로,

또는 교회가 시행하는 어떤 공사를 맡으려고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내세우는 경우 등이 그것인데,

그것은 입술로만 고백하고

주님의 뜻은 실행하지 않는 죄가 될 뿐입니다(마태 7,21-23).>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