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칸티우스(Joannes Cantius, 또는 요한 칸시오)는 1390년 6월 23일 폴란드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의 켕티에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형편인 아버지 스타니슬라우스(Stanislaus)와 어머니 안나(An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한은 태어난 마을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1413년 크라쿠프(Krakow) 대학에 입학하여 1417년에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그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1439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모교에서 성서 강의를 맡았다. 1443년경에 그는 터키에서 순교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예루살렘을 순례했으며, 네 차례에 걸쳐 로마(Roma)를 걸어서 순례하였다.
그는 설교로 매우 유명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비해 명성이 너무 높아 그만큼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올쿠스즈의 본당사제로 봉직하게 되었다. 영혼들을 돌보는 사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는 재차 크라쿠프 대학의 성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운명할 때까지 평생 동안 대학에서 성서학을 가르치면서 16권의 방대한 강의록을 남겼다. 또한 그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처신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과 교수 그리고 생활의 엄격성은 물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증거하며 살았다.
켕티의 요한은 1690년 시복되었으며, 1737년에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폴란드(Poland)와 리투아니아(Lithuania)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767년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크라쿠프(Krakow)의 성 안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강론 : (루카 1,57-66)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아이를 못 낳고 있던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이웃과 친척들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만 생각하고
자기 자신들에게도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6-17)."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예언자이기 때문에
그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자비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아직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즈카르야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통해서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과
메시아께서 하시게 될 일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은 다음 두 절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루카 1,76-77)."
어떻든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나중에 어떤 인물이 될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기의 이름을 관습대로 지으려고 하고,
엘리사벳은 아기를 요한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루카 1,59-60).
(즈카르야가 말은 못하고 있었어도 글씨는 쓸 수 있었으니
글을 통해서 엘리사벳에게 천사가 한 말들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야훼께서 은혜를 베푸셨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다시 즈카르야에게 묻는 것은(루카 1,62)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은 원래 아버지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모두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루카 1,63).
여기서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은 이상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즈카르야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은 것은
이제 그가 확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 순간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게 되는데,
그의 입이 열리면서 그가 처음 한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었습니다(루카 1,64).
즈카르야의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은
아마도 '즈카르야의 노래'를 가리킬 것입니다.
(자신이 말을 못하고 있다가 다시 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찬미가 아니라,
메시아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찬미입니다.)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는 말은(루카 1,65)
사람들이 하느님의 힘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이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고,
주님의 손길이 아기를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꼈고,
또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했다는 것은(루카 1,65-66)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이 태어날 때부터 화제가 되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일은
나중에 그가 회개 선포 활동을 할 때 사람들이 좀 더 쉽게
그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작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시나리오대로 일이 진행되고,
사람들은 주연이든 조연이든 그 시나리오에 정해져 있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만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계획을(미래의 일을) 모르고 있고,
그저 나중에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성경의 내용이 다 그렇지만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도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묵상과 해석을 거쳐서 기록한 것입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의 인생도 실제로는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운명에서,
(또는 자기들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그대로 따라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예언은 정해져 있는 운명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달한 일이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요한은
정해져 있는 시나리오대로 연기를 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인생은(또는 운명은)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이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하신 것도 아니고,
또 하느님 없이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또는 운명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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