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억압과 해방의 반복되는 체험들을 기록한다. 억압과 해방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서로 갈등 관계에 있다. 억압이 있을 때에만 해방이 가능하기 때문에, 억압은 해방을 위한 하나의 조건이다. 이런 측면에서 억압과 해방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이 둘이 갈등 관계에 있는 이유는 억압이 죄라면 해방은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압에서 해방에로의 이행은 투쟁을 요구한다. 억압을 지속시키려는 세력과 자유를 추구하는 세력 사이에 투쟁이 일어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방은 대결과 갈등을 포함한다.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해방은 성경 안에서 억압, 해방, 새롭고 정의로운 질서라는 세 단계의 맥락 안에 위치한다.
신약 성경에서 해방을 위한 희망은 성취된다. 역사의 예수님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최상의 자기 계시 덕분에 여기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해방을 위한 희망은 성취된다. 역사의 예수님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최상의 자기 계시 덕분에 여기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나자렛 예수님을 통하여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은 이제 인간 역사의 모든 억압받는 이들과 존재론적 연대 안에 있게 된다.
그리고 해방은 유다인들의 좁은 세계 안에 제한되지 않고 보편적인 것이 된다.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진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의 실재(reality)가 된다.
성경에서 복음은 매우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다. 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가난과 착취의 상황이 현재 있는 그대로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 착취, 억압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복음은 매우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다. 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가난과 착취의 상황이 현재 있는 그대로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 착취, 억압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은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수준에서, 그리고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수준에서의 억압이라는 더 큰 죄를 덮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축소될 수는 없다.
복음의 메시지는 인간을 종살이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것, 그 누구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기쁨과 희망을 가져오는 근본 이유이다.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는 개인이 경험하는 도덕적 변화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의 재구성(restructuring)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그리고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도 복음을 해방에 대한 약속의 실현으로 본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70-71)
이 소식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복음이다. 복음은 총체적인 변화를 위한 희망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기쁨의 이유가 된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전하며 주님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가난한 이들인 목자들은 천사의 소식에 기뻐했으며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었다.
그러나 이 복음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헤로데 대왕은 동방 박사들에게서 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 복음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헤로데 대왕은 동방 박사들에게서 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마태 2,16)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에 관한 복음은 억압자들을 기쁘게 할 수는 없다. 억압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계속 착취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복음은 더 정의로운 사회로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기쁨이다.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사회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이들은 배고픔, 억압, 가난에 고통당하는 이들이다.
복음은 더 정의로운 사회로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기쁨이다.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사회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이들은 배고픔, 억압, 가난에 고통당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복음은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게 방향 지워진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당신의 사명으로 삼으셨다.(루카 4,18)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창현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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