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하느님의 다스림, 곧 하느님 나라의 심장이다. 하느님 정의의 변혁하는 특성에 대한 살아 있는 증언은 하느님 백성에게 부여된 우선적인 의무이다.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평화를 이루기’(peacemaking)를 추구하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님은 당시 현존하던 제도 권력의 세 가지 중요한 형태에 맞서 대결하셨다. 즉 그분은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인 권위, 헤로데 가문의 정치적 권위, 로마의 제국주의적이고 군사적인 권위 모두에 비판적이셨다.
역사의 예수님은 당시 현존하던 제도 권력의 세 가지 중요한 형태에 맞서 대결하셨다. 즉 그분은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인 권위, 헤로데 가문의 정치적 권위, 로마의 제국주의적이고 군사적인 권위 모두에 비판적이셨다.
예수님이 견지하신 정치적 비판의 기본적인 전제는 궁극적인 통치권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의 권력 행사가 평가되어야 할 척도이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권력에 대하여 비판적이셨지만, 거룩한 땅(Holy Land)으로부터 로마인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추방하려 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이 로마 제국의 통제에 무관심하셨다든지 그것에 찬성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권력에 대하여 비판적이셨지만, 거룩한 땅(Holy Land)으로부터 로마인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추방하려 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이 로마 제국의 통제에 무관심하셨다든지 그것에 찬성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라는 정치적 이슈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이미 평화와 안정의 황금시대를 시작했다는 로마 제국의 선전에 대한 거부를 전제한다.
로마 제국은 세계를 힘에 의해 평화롭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평화로 간주하지 않으셨다.
로마 제국의 평화(Pax Romana)는 거짓 평화(pseudo-peace)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로마 제국 질서의 기초인 억압과 불의에 도전하셨고, 현존하는 거짓 평화의 질서를 동요시키는 것을 당신의 사명으로 삼으셨다.(마태 10,34-35 루카 23,1-2)
예수님은 당시 현존하던 체제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분은 로마 제국의 잔인한 폭력성을 정확하게 인식하셨다.
예수님은 당시 현존하던 체제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분은 로마 제국의 잔인한 폭력성을 정확하게 인식하셨다.
그분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무자비함(루카 13,1)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로마 제국이 어떻게 통치하는지(루카 22,24-27)에 대하여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유다인 사회의 표면 아래에서 뒤끓던 폭력을 잘 알고 계셨다.(마태 23,29-36 루카 9,7-9.19 13,31-35 마르 13,9-13)
하느님 나라의 정의라는 예수님의 메시지와 실천에 의해 위협받던 권력의 자리에 있는 이들은 결국 그분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다.
기존의 질서가 당신의 일에 반대하여 잔인한 폭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은 세 가지의 가능한 선택을 가지고 계셨다.
기존의 질서가 당신의 일에 반대하여 잔인한 폭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은 세 가지의 가능한 선택을 가지고 계셨다.
첫째, 예수님은 군사적 힘으로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자 한 열혈당의 혁명적 선택(revolutionary option)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부패한 주변 사회로부터 떠나 광야로 갔던 에세네파의 물러남의 선택(withdrawal option)이 있었다.
셋째, 불공평한 질서에 협력하고 타협함으로써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했던 성전 지도자들의 권력 체제적 선택(establishment option)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선택 모두를 거부하셨다.
그 대신에 그분은 비폭력적이고 희생적이며 평화를 이루는(peacemaking) 사랑의 길을 선택하셨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하셨다.(마태 5,38-48)
이와 같이 예수님은 폭력과 전쟁을 거절하셨다. 즉 그분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는데 있어 폭력과 전쟁이 그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거부하셨다.
폭력과 보복의 포기를 통한 ‘평화를 이루기’는 정의의 추구에 있어 예수님의 독창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예수님의 선택은 원수 사랑에서 최고조에 이른다.(마태 5,43-45)
폭력과 보복의 포기를 통한 ‘평화를 이루기’는 정의의 추구에 있어 예수님의 독창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예수님의 선택은 원수 사랑에서 최고조에 이른다.(마태 5,43-45)
정의는 회복하고 치유하고 모든 것을 바르게 만들기 때문에 기쁨을 가져온다. 성경의 정의는 결국 기쁨의 정의이지 냉혹한 정의가 아니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창현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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