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생명, 사랑, 자유를 선포한다. 그런데 흔히 이 복음은 오직 영성적인 질서와 관련 있는 개인주의적인 용어들의 모음으로 축소되곤 한다.
성경의 투쟁, 생명, 해방의 메시지는 수동성, 체념, 복종으로 바뀌어 읽혀지곤 한다. 복음은 생명을 선포한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그러나 현실은 가난, 비참한, 죽음으로 가득하다. 복음은 사랑을 선포한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그러나 현실은 억압과 착취로 점철된다. 복음은 자유를 선포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그러나 현실에는 다양한 속박이 존재한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다. 하느님 나라는 현존하는 세계 질서를 뒤엎는 것이고 정의가 실재(reality)가 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다. 하느님 나라는 현존하는 세계 질서를 뒤엎는 것이고 정의가 실재(reality)가 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비전(vision)은 이 하느님 나라의 가치가 먼저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실천되고, 나아가 그들의 영향을 통해 더 넓은 사회 안에서 실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배타적으로 사후(死後)의 삶에 집중하는 것은 하느님이 이 세상의 삶에서 기대하는 것의 중요성을 축소하게 된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도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가난하고 변두리로 내몰린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불의에 도전하며 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인간의 영혼을 돌보신 것이 아니라 항상 전인적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돌보신다. 이와 같이 복음의 예수님은 세상의 변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진정한 사회 변혁은 변화된 인간에 의해 가능하다.
즉 변혁적인 하느님 나라를 선도하는 모든 민족의 제자들(마태 28,19)인 변화된 인간에 의해 세상의 변혁이 가능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복음이 되도록 초대받았다.
즉 변혁적인 하느님 나라를 선도하는 모든 민족의 제자들(마태 28,19)인 변화된 인간에 의해 세상의 변혁이 가능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복음이 되도록 초대받았다.
이 복음은 총체적인 복음으로서 개인들의 개별적인 구원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사회 혁명(social revolution)을 의미한다.
루카 4,16-30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당신은 누구이시고 왜 오셨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것은 메시아와 그분의 다가오는 나라를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한 위대한 약속이다.
루카 4,16-30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당신은 누구이시고 왜 오셨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것은 메시아와 그분의 다가오는 나라를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한 위대한 약속이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이다. 복음은 아파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한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를 포함한다. 그리고 복음은 인간의 영적인 조건 뿐 아니라 육체적인 안녕(well-being)을 위한 관심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병자들과 신체 불구자들을 고쳐주셨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함께 아파하기를 보여주셨으며, 배고픈 이들을 먹이셨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셨다.
그분은 가난, 질병, 인간적인 부서짐을 돌보신다. 따라서 복음은 정의를 위한 장엄한 투신이다.
예수님은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 (루카 4,18-19) 하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은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 (루카 4,18-19) 하기 위하여 오셨다.
기원후 1세기 당시 잡혀간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암시는 분명히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사는 이들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더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의의 희생이 되는 이는 누구든지 이들 안에 포함된다.
인간의 영적인, 신체적인, 사회적인 차원에 관심을 가지는 총체적 복음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다.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사회 변혁을 위한 토대이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간의 영적인, 신체적인, 사회적인 차원에 관심을 가지는 총체적 복음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다.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사회 변혁을 위한 토대이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창현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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