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마태 21,1-11; 26,14-27,66
세상 속의 갈등 관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의 모든 것의 원인이 힘과 권력이 아닐까요?
“왜 당신은 내가 원하는 이런 것을 하지 않아요? 내가 생각할 때 이것이 맞는데 왜 나의 의지와 나의 뜻을 따르지 않나요?”
보통 이렇게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종종 힘과 권력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상대방 역시 자신의 뜻이 관철되기를 바라고 있어서 그것을 위한 힘과 권력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갈등, 싸움이 일어나고 더 큰 힘과 권력을 얻기 위해 많은 경우에 애를 쓰고 있지 않은지요.
더 큰 것이 있으면 상대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대의 힘은 자본(금력)이기에 더 큰 자본을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공개된 대기업 임원들의 고액 연봉을 그들 스스로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 예상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갈등을 극복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양심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하느님께서 살아 숨 쉬는 지성소이니까요. 이기기 위해서는 권력과 금력이 있어야 할지 모르지만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도 우리의 양심은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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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루살렘 입성>, 랭브르 형제 작품 세부 | ||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음으로 시작되는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복음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신 이유는―주님을 따랐던 군중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이지만―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져서 조롱당하고 채찍질 당하며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사흘 만에 일으켜지기 위해서”(마태 20,18-19)였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필리 2,8) 매여 있는 어린 암나귀, 순결한 그 어린 암나귀를 선택하십니다. 한 번도 그 무엇을 자신의 몸뚱이에 태워본 적이 없는, 그래서 힘과 권력의 정반대편 자리에 있는 그 나귀를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파스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몰이해에 대해서 마태오 복음에서는 처음으로 당신 스스로를 “주님”으로 호칭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마태 21,11)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견된 두 명의 제자들은 이해되지 않는 주님의 파견의 말씀에도 순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얹어 놓은 겉옷, 그리고 그 나귀의 등에 올라앉으십니다. 그러자 대단히 많은 군중들이 자기네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이들 군중은 필경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마태 19,1-2 참조)일 것입니다.
겉옷은 설령 이웃의 그것을 담보로 잡았다 하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할(탈출 22,25; 신명 22,3; 24,13) 광야 생활을 하는 사람의 소중한 소지품입니다.
겉옷은 그 주인의 권위를 나타내는(1열왕 19,19 참조) 귀중한 물건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벗어서 길에다 깔았습니다. 아주 귀중하고 소중한 것을 길에다 깔았던 셈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미 겉옷을 바닥에 깐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예후의 발 밑 층계에 겉옷을 깔았었지요. 예후는 하느님의 명에 따른 엘리사에 의해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임금으로 도유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였지요.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왕후 이제벨로부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신앙을 지켜낸 예언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예후에게 사람들이 겉옷을 깐 이유는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신앙의 정통성을 회복시켜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서였겠군요. 아마도 예수님을 따랐던 이 군중들도 그러한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한 가지를 더 확인하면 좀 더 분명해질 듯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무에서 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습니다. 역시 구약에서 이미 나뭇가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잠깐 볼까요?
“그렇게 하여 그들은 나뭇잎으로 장식한 지팡이와 아름다운 나뭇가지와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당신의 거처를 정화하도록 잘 이끌어 주신 그분께 찬미가를 올렸다.” (2마카 10,7)
마카베오 가문의 의한 성전의 정화에 기뻐하면서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들고 하느님께 찬미가를 올렸습니다.
이스라엘 정통 신앙의 회복, 성전의 정화,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처음으로 하신 일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신(마태 21,12-17) 성전 정화였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엘리야, 엘리사, 예후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마카베오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대제관들과 바리사이파를 위시한 이스라엘의 기득권 집단들―사실 이들이 바로 힘과 권력의 화신이기도 합니다―이 훼손한 이스라엘 정통 신앙의 정화만으로 충분한가요? 아마도 군중들은 그렇다고 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던 그들의 행동을 보면 군중은 이스라엘 신앙의 정화에 기대를 걸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더구나 군중은, 예수님을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마태 21,9)으로, 또 “예언자”(마태 21,11)로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리코의 눈 먼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 메시아라고 부르고 있건만 눈 뜬 군중은 이런 외침을 꾸짖고 있었으니 메시아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를 못 내게 막고 있는 형국입니다(마태 20,29-31 참조).
하지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길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필리 2,8)시고자 하는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길에서 매여 있던 보잘것없는 약한 존재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것을 ‘풀어서’(마태 21,2) 끌고 오라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 그리고 부활의 길에서 우리에게 매여 있는 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시지 않을까요? 보잘것없어 보일지언정 그래서 매어 놓고 풀고 싶지 않은 우리의 그 무엇을, 필요로 하시지 않을까요?
그것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인 사도직의 가장 독특한 형태로서 신자들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이 시대의 가장 적합한 표지는 믿음, 바람, 사랑에서 나오는 평신도 생활 전체의 증거”라고 가르칩니다(평신도 교령 16항).
신종호 신부 (분도)
대구대교구 옥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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