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4월 7일 가해 사순 제5주간 월요일(성 요한 밥티스타 드라살 사제 기념 허용)

dariaofs 2014. 4. 7. 01:30

 

 

성 요한 세례자 드 라 살(Joannes Baptista de la Salle)은 1651년 4월 30일 랭스(Reims)에서 고대 왕가 귀족 가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심 깊은 어머니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는 불과 11세 때에 삭발례를 받았고, 16세 때에 랭스 주교좌성당 참사회원이 되었으며, 소르본(Sorbonne) 대학교와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1678년 27세 때에 사제품을 받았다.

귀족 가문에서의 성장과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그는 루앙(Rouen)의 니엘(M. Nyel)이라는 신자와의 만남을 통해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자선 학교를 세우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먼저 그의 고향에 자선 학교를 세우고 차차 그 주변으로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 하느님이 마련한 소명임을 깨달은 그는 가정과 가족을 떠나 참사회원직마저 버리고 이 일에 전심으로 투신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넘겨주고 가난한 사람들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었다. 그는 교사들을 훈련시키며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엄격한 자기 수련 생활을 따르도록 권유했는데, 이러한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육에 헌신하는 수도 단체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결국 요한은 오랜 숙고 끝에 1684년 삼위일체 대축일에 12명의 학교 교사들과 함께 1년 동안 수련기를 가진 다음,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라는 이름의 독특한 수도복을 입는 수도회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교육을 위해 평신도들을 훈련시킬 생각으로 1686년에 최초의 정규 학교를 랭스에 설립하였으며 이어 또 하나를 파리(Paris)에 설립하였다. 1688년 랭스에서 파리로 수도회 본부를 옮긴 수도회는 전국적인 성격을 갖고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였다.

 

초기에 파리의 대주교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의 수도회는 날로 확장되어 지금은 17,000여명의 회원들이 세계 도처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최초로 교사 교육을 실시한 인물이며, 교사들에게 자부적인 사랑을 불어넣은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교육 철학은 1720년에 출판된 "학교들의 지침서"(The Conduct of Schools)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루앙에서 중류 사회 상인들의 자녀들을 위한 기숙사 학교를 설립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보다 모국어를 바탕으로 실용적인 과목을 제공해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루앙의 기숙사 학교는 18세기 수도회에 의해 성공적으로 설립된 다른 많은 학교들의 표준이 되었다.

 

그는 1719년 4월 7일 성 금요일에 루앙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1950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모든 교사들의 주보성인으로 공포되었다.

 

 

강론   :   (요한 8,1-11)

 

<회개>

 

4월 7일의 독서 말씀은 다니엘서 13장, '다니엘이 수산나를 구하다.'이고,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8장 1절-11절, '간음하다 잡힌 여자'입니다.

두 이야기는 한 여자를 처형하려는 상황은 같지만,

수산나는 죄가 없는 사람이고, 복음 말씀의 여자는 죄가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이 수산나를 구하는 이야기는 '하느님의 정의'가 핵심 주제이고,

진짜 죄인이 누구인지 밝혀서 처형하는 정의로운 하느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자비'가 핵심 주제이고,

죄가 있어도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죄인을 처형하려는 사람들의 입장에 있다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죄를 묻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죄부터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실제 현실에서는 "나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여자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는 정말로 죄가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죄를 감추려고 '죄 없는 척' 하면서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위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떠나버린 사람들은(요한 8,9)

솔직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반대로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 서 있었던 그 여자의 입장이라면?

복음 말씀에 나오는 여자를 보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잘못했다는 말도, 용서해 달라는 말도, 또는 억울하다는 말도,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죄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어서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죄를 인정하는 모습이고, 처벌을 감수하려는 모습입니다.

살려 달라고 빌 수도 있겠지만,

뭔가 변명하려고 하다가는 그 변명 때문에 죄가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여자를 구하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처벌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그 여자를 회개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용서가 먼저 있었고,

여자의 회개는 그 용서에 대한 응답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사람들 가운데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에게 죄가 없다면 돌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회개는 그들 자신들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여자에게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 8,10)" 라고 물으셨을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는데...

예수님의 질문은 아마도

"너를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너는 깨달았느냐?"

또는, "왜 사람들이 모두 그냥 가버렸는지 너는 그 이유를 알겠느냐?"

또는, "입장을 바꿔서, 너라면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느냐?"

라는 뜻일 것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라는 여자의 대답도 의미심장합니다.

여자를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은, 여자 자신까지 포함해서,

아무도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예수님)만이 사람을 단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죄와 처벌의 관점에서, 지금 그 자리에는 여자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예수님)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 8,11)."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자에게(또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합니다.

"나만 너를 단죄할 수 있지만(단죄해야 하지만), 나는 하지 않겠다."

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받은 사람이 해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용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양심 성찰을 하고, 통회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고백하고,

보속까지 한 다음에 다시 똑같은 죄를 짓는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한 번 용서하신 일을 취소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받은 용서의 은총을 우리 스스로 잃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또다시 회개하고, 고백하고, 보속하고... 노력하면 되지만,

습관적으로 그게 반복이 되면 회개는 거짓 회개가 되고,

고해성사는 형식적인(위선적인) 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