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는 제자들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이야기로 들려준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분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을 인상적으로 형상화한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간 것은 안식일이 끝난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이었다.(요한 20,1-10) 그 무덤은 확실히 예수님의 무덤이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간 것은 안식일이 끝난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이었다.(요한 20,1-10) 그 무덤은 확실히 예수님의 무덤이었다.
왜냐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뒤 어느 무덤에 안장되었는지를 분명히 보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19,21)
그녀가 예상한 예수님은 돌로 입구가 막힌 캄캄한 무덤 안에서 차갑고도 경직된 몸의 상태로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을 시신의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현재의 인물이 아닌 지난 과거 시간의 인물, 죽은 몸이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어서 그녀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갔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무덤으로 오게 된다. 그러나 그 무덤에서 그들은 발견하고자한 예수님의 몸을 찾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시신으로 누워있을 것으로 예상한 그분의 몸은 무덤 속에 없었다. 그들이 무덤으로 달려 온 바로 그 길로 예수님은 이미 지나가셨다.
닫힌 무덤에서 열린 공간으로, 캄캄한 어둠에서 찬란한 빛으로, 차갑고도 경직된 몸은 다시 살아난 생명의 몸으로, 지난 과거의 인물에서 현재 살아계신 분으로 지나가셨다.
이 지나가심으로 무덤이라는 종착점에 다다르신 역사의 예수님(Jesus of history)은 이제 그 무덤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가 되신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찾는다.(요한 20,11-18)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가 찾던 죽은 몸으로서의 예수님은 그 무덤 안에서 없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찾는다.(요한 20,11-18)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가 찾던 죽은 몸으로서의 예수님은 그 무덤 안에서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운다. 단순히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그곳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그러나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과거 죽음 이전의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죽은 몸으로서의 예수님을 그 무덤 안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몸의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은 그분이 그녀를 “마리아!”라고 부르시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다름 아닌 그녀의 이름으로 부르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당신이 이전에 그녀를 부르셨던 바로 그 이름으로 부르신다.
그러자 그녀는 예수님을 “라뿌니!”, 곧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서 오고가는 말들을 통해 우리는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 부활 이후의 예수님은 서로 다른 분이 아니라 같은 분, 동일하신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예수님(Historical Jesus)과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 사이에서 연속성(continuity)을 발견한다. 이 연속성은 제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예수님(Historical Jesus)과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 사이에서 연속성(continuity)을 발견한다. 이 연속성은 제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역사의 예수님을 뒤따랐고 하느님 나라 운동의 증인들인 제자들이 이제 다시 살아나신 새로운 몸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증인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예수님의 일, 즉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도전하는 대안적 공동체 운동으로서, 사회 정의와 생태 정의를 실천하고 샬롬과 살림을 실현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의 완성이고 승리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예수님의 일, 즉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도전하는 대안적 공동체 운동으로서, 사회 정의와 생태 정의를 실천하고 샬롬과 살림을 실현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의 완성이고 승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개인적, 교회적, 사회적, 생태적 변혁(transformation)을 위한 희망의 근거가 되고, 마침내 “창조 세계를 다시 새롭게 하기”(renewal of creation)와 지속 가능한 미래(sustainable future)를 위한 토대가 된다.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창현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창현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성 경 자 료 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의세계] 83. 필리피 - 신은근 신부 (0) | 2017.01.02 |
---|---|
<생태영성으로> 샬롬과 살림의 성경읽기 (91·끝) 사회 - 경제적 정의 (0) | 2016.12.31 |
<생태영성으로> 샬롬과 살림의 성경읽기 (89) ‘함께 아파하기’의 사회적 영성 (0) | 2016.12.29 |
<생태영성으로> 샬롬과 살림의 성경읽기 (88) 샬롬의 살림살이 (0) | 2016.12.28 |
<생태영성으로> 샬롬과 살림의 성경읽기 (87) 해방의 영성 (0) | 2016.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