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지금여기 강론대- [신종호 신부] 일치의 길로 저희를 이끄소서

dariaofs 2014. 6. 7. 01:00

6월 8일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사도 2,1-11

 

 

큰 상처를 입고 큰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람이 두렵습니다.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하고 슬픔에 빠지지만 그 상황을 더 낫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스스로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참사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이나 인간적인 모멸감을 경험한 사람들이나,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나 모두에게 상처가 생겨납니다.

 

지하철 참사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이나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나 세월호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 모두 그러합니다.

 

이것을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군가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아픔과 상처를 함께 아파하지 않는다면 대개의 경우에 자신 안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숨기 마련입니다. 고립됩니다.

 

사람들과의 일치의 경험이 하느님 나라를 예표하 듯이 홀로 고립되는 것은 지옥의 상태를 예표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고립감은 실로 그분을 지옥에 떨어뜨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이, 잃어버린 가족을 기억하고 그들이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을 살아나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사라져 버리고 의미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우리들과 그분들의 삶에 의미를 줍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이, 그리고 효율과 경쟁만을 중시하는 사회를 우리가 용인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때입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의 많은 당선이 바로 우리 사회의 그런 연대성(사회적 관심 38항)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 지난 4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봉헌된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자들과 모든 이웃을 위한 참회의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기도하고 있다. ⓒ정현진 기자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두려움에 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웠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육체적인 죽음과 고통이 두려웠을까요? 그리고 스승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이 그들로 하여금 빗장인 문을 잠가 놓고 있도록 만들었을까요?

 

영락없이 죄를 짓고 도망가는 도망자의 신세입니다. 죄책감과 그에 상응하는 회한 때문일 겁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제자들은 지금 지옥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십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십니다. 평화, 이 평화는 세상의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요한 14,27)입니다.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통해서 그 평화가 어떠한 평화인지가 드러납니다.

 

죽음의 상처, 그리스도의 평화는 모든 것이 평안한 상태의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 속에서 주어지는 평화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두려웠지만 이제는 기쁩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주어질 적의와 고통이 두려웠다면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그리스도를 뵈옵는 것이 그 기쁨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스승과의 만남과 스승 예수님과의 어렴풋한 일치의 경험이 서서히 제자들의 공동체를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상처받은 치유자이십니다. 고통과 관계없는 분이 아니라 고통의 한가운데 서 계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자신의 것을 아무 것도 내어놓지 않고 그냥 말로써 던지는 평화가 아니라 당신의 온 존재를 내어놓고 주는 평화이기에 이 평화는 참된 평화입니다.

 

당신의 손과 옆구리라는 상처로, 어떤 것일지 모르지만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죄책감에 갇혀 있는 제자들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평화를 기원하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숨을 불어 넣으십니다. 이 숨,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부활의 생명력입니다.

 

마치 인간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신 바로 그 생명의 숨결과도 같은 숨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제자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새로운 숨을 불어 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번쯤은 왜 나를 버리고 도망쳤느냐고 책망하실 법도 한데 한 번의 책망도 없으십니다. 마치 세관장 자캐오를 만난 주님께서 그의 죄책을 따지지 않으셨듯이 말입니다(루카 19,1-10 참조).

 

숨, 주님의 숨은 바로 주님의 생명이고 그것은 주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최상의 선물 성령입니다. 죄는 용서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새로운 창조 속에서 그냥 주어지는 선물이네요.

 

제자들의 배반의 죄가 그리스도 주님의 이 성령으로 인해 어느 순간 사라졌듯이. 사실 죄의 용서는 용서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참 귀한 일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거룩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거룩함으로 이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용서 받은 죄인인 제자 공동체는 용서에 대한 과업을 예수님께 받아 안습니다.

 

용서를 통해 고립(지옥)이 아니라 일치(하느님 나라)로 이끌어야 되는 과업입니다. 죄가 있어 용서가 필요한 곳, 일치를 회복해야 할 장소에 파견되는 일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누군가로부터 도망가고 싶게 만듭니다(요한 12,46-48 참조). 처음으로 죄를 짓고 도망을 가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아담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도망, 그것은 자신의 짝인 하와와의 분열을, 하느님과의 분열을, 그리고 피조물과의 분열을 가져 왔습니다(창세 3,7-11; 사목헌장 16항 참조). 그리고 이 분열의 절정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보자면 죄를 용서함은 바로 분열을 이겨내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 다른 말의 극복(사도 2,5-11 참조)은 바로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용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말이 통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통교라면 용서는 통교가 이루어지는 시작이 됩니다.

 

결국 죄의 용서는 소통의 시작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예전 분열되었던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람과 환경 사이의 통교입니다. 통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요한 17,21-23 참조).

 

그리고 그것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하나가 되는 통교입니다(요한 17,23-26 참조).

육체적인 죽음과 고립,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성령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새 생명(새 창조)으로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숨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용서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통해서 사람들을, 자연을, 하느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길로 인도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쉽지 않지만 용서의 길로, 사랑의 길로, 일치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저희의 발길을 이끄소서.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요한 15,19; 17,14.16;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 참조) 자유의 길로 저희를 이끄소서.

 

세상 안에서 고립의 지옥이 아니라 일치의 천국으로 이끌 수 있도록 저희를 내어놓고 헌신하게 이끄소서. 홀로 고통 속에 갇혀 있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소서.


 

신종호 신부 (분도)
대구대교구 옥계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