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6월 19일 가해 연중 제11주간 목요일(성 로무알도 아빠스)

dariaofs 2014. 6. 19. 10:53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오스티네 귀족 출신인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또는 로무알도)는 부친의 살인 사건 때문에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가, 20여세 때에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수도원을 떠나 베네치아(Venezia) 교외에 살던 마리누스(Marinus)라 부르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독인 성 베드로 우르세올루스(Petrus Urseolus, 1월 10일)가 마리누스와 성 로무알두스를 쿡사(Cuxa)로 데리고 와서 베네딕토 회원이 되게 하자, 이들은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그는 부친이 회개하여 수도자가 되었음을 알고 부친을 만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갔으며, 이때 오토 3세 황제는 그를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2년 뒤에 사임하고는 페레움(Pereum) 교외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 후 헝가리의 마자르인(Magyars)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강제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령에 따른 질병으로 인하여 1027년 6월 19일 파비아노 교외의 발 디 카스트로(Val di Castro)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세운 다섯 개의 은둔소들 가운데 카마돌리에 세운 것은 후일 카말돌리회의 모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강론   :   (마태 6,7-15)

 

<주님의 기도, 우리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바치는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늘에만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고 보살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하느님은 주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라는 말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하느님은 우리를 심판하고 처벌하기만 하는 무서운 독재자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시고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있는 '우리' 라는 말은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되는,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이 '우리' 라는 말은 믿는 사람들만의 '우리'가 아니고, 인류 전체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나'는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와 '우리'만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한 개인이 자신의 복을 비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함께 바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만 살겠다고 달아나는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언급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8,14).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죽어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서 받는 구원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또 아버지는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사랑은 없고 이기심만 가득하다면 아버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모든 사람이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남들은 다 죽어도 나만 살면 그만인 나라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청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청이고,

우리도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먹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입으로 바치는 기도와 다르게

속마음으로는 '내가 먹을 양식만' 청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기도가 아니라 '사탄의 기도'가 되어버립니다.

(사랑 없는 기도는 기도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이 말은 '오늘 먹을 양식'이라는 뜻이고,

날마다 자신의 삶을 주님께 온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하루살이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의 재물이 아니라 주님만 믿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한 개인이, 또 한 집안이 부를 독점한 채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나눔을 실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거짓 기도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라는 구절은

'잘못과 죄'의 연대 책임과 '용서와 구원'의 공동체성을 나타냅니다.

"저희가 용서하오니" 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 용서한다는 뜻인데,

서로 용서한다는 말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 받아야 할 사람이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는 구절에서 '저희 죄' 라는 말은

"나의 죄와 우리의 죄"를 뜻합니다.

'나는 죄가 없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죄인들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속으로는 "나는 죄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면, 그것은 거짓 기도입니다.

자기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를 청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거짓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요한 13,34).

서로 용서하고, 함께 회개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는 것도,

또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 함께 싸우는 것도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