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22
2년 전 지역에 계신 신부님들과 함께 필리핀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넓게 펼쳐져서 그냥 놀고 있는 땅을 보면서 한 신부님께서 “우리 한국 사람이라면 저 땅을 저렇게 놀리지는 않을 텐데……”라고 하시며 농담처럼 아쉬워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민족은 참 부지런합니다. 조그마한 땅뙈기라도 있으면 뭐라도 부쳐 먹으려고 심고 가꾸면서 땅을 이용하지 않나요?
그런데 얼마 전 국무총리로 내정된 사람이 엉뚱한 소리를 교회 강연에서 했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게으르고 의존적이어서 일제의 침략이 필요했다는 이야기지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건들지 말아야 되는 어떤 역린 같은 것이 있다면 아마 우리 민족의 역린은 일제의 침략에 대한 동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보적인 생각이나 보수적인 생각을 막론하고 우리 민족 모두가 거부하는 생각일 겁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역린을 건드렸고 많은 시민들이 분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가 되면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고 순리가 아닌가요? 그는 아마도 ‘큰 사람’이 되고 싶었을 모양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권위를 드러내 보이고 위세를 부리고 싶은 ‘큰 사람’이 되고 싶은가 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마태 17,22-23)를 접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왔고 물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그리고 이 제일 큰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주님의 답변과 가르침이 마태오 복음 18장에 걸쳐서 이어집니다.
하늘나라에서 제일 큰 사람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그 하늘나라를 자신의 것으로 삼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누굴까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5,3),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5.10). 하늘나라는 바로 그들의 것입니다.
영으로 가난함, 의로움으로 인해 박해를 받음,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제일 큰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18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이 조건들을 볼까요?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는 것과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18,4-5)입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자신을 낮추고 힘없고 낮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라 하시니까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라 하심인데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계속해서 볼까요? 작은 이라 하여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18,6-9). 작은 이들 한 명이라도 그들이 작고 보잘 것 없고 가난하다 하여 업신여기지 않아야 합니다(18.10).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18,12-14).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그를 찾아가 타일러야 합니다(18,15-17).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청하는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둘이 마음을 모아 청해야 합니다(18,19). 무엇을 청해야 하나요? 그들 형제(18,15-17)의 회개를, 용서를 청해야 되지 않을까요?
베드로 사도께서 물으십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오.”(18,21-22)
하지만 이어지는 복음에서 형제를 용서하는 것에 앞선 자세를 우리는 배웁니다.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모두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겨야 할 줄 몰랐더냐?”(18,33)
누군가를 용서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용서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가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기에 우리도 자비를 구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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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해>, 야체크 말체프스키 | ||
그렇다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먼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치 그리스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있는 자들에게 용서를 청하셨듯이(루카 23,34) 우리 역시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60여 년 전의 전쟁의 아픔과 상흔이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서로의 잘못과 서로의 아픔에 대해 분노하고 밟고 이겨내려고만 하는 체제의 경쟁 속에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과 북은 삶과 가치를 공유(간추린 사회 교리 386항)하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갈라진 것은 다시 원래였던 하나의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길에 있어서의 자세에 대해 오늘 복음에서 그 원리와 길을 찾습니다. 상대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끊임없이 용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니, 용서하기 이전에 우리 사회와 역사 안에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부분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요?
신종호 신부 (분도)
대구대교구 옥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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