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6월 21일 가해 연중 제11주간 토요일(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dariaofs 2014. 6. 21. 06:27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또는 알로이시오)는 1568년 3월 9일 이탈리아 북부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의 후작 페란테(Ferrante Gonzaga)와 마르타 타나 산테나(Marta Tana Santena)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다소 야만적이고 부도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깊은 사랑으로 알로이시우스를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알로이시우스의 아버지는 그가 군인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가정 교사였던 피에르프란체스코(Pierfrancesco del Turco)는 알로이시우스의 영혼과 정신을 길러 주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577년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Felipe II, 1556-1598)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는, 알로이시우스를 피렌체(Firenze)의 대공 프란치스코 데 메디치(Francesco de Medici) 궁의 시동(侍童)으로 보냈다. 2년 후인 1579년에 알로이시우스와 그의 동생 로돌포(Rodolfo)를 브레시아(Brescia) 지방 만토바(Mantova)로 옮겼다.

 

1581년 알로이시우스의 가족은 마드리드(Madrid)로 갔고, 알로이시우스는 펠리페 2세 궁정에서 왕자 돈 디에고(Don Diego)의 시동으로 지내면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왕자가 사망하자 1583년 8월 15일 알로이시우스는 예수회에 입회할 것을 결심하였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하며,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아들을 설득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온갖 방법으로 알로이시우스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585년 11월 2일 로마(Roma)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한 성 알로이시우스는 밀라노(Milano)의 예수회 분원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만토바에서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 2월 15일 아버지가 사망하여 잠시 집에 들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 돌아온 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는 나폴리(Napoli)에 머물면서 형이상학을 공부하였고, 로마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다. 1587년 11월 25일 첫 서원을 한 뒤 곧바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를 가르치던 교수들 중에는 당시의 유명한 학자 바스케스(G. Vazquez, 1549-1604)가 있었으며, 훗날 성인이 된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9월 17일)가 알로이시우스의 영성지도 신부였다.

성 알로이시우스가 신학을 공부한 지 4년째 되던 1590년 도시 전체에는 흑사병이 퍼졌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병자들을 돌보던 알로이시우스는 이듬해 3월 초 이 병에 전염되어 6월 21일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 이냐시오(Ignatius)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시중하고 분별력 있게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하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긍정적이고 관찰력이 탁월하였던 알로이시우스는 철학과 신학의 전 과목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어려서부터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고, 어떠한 반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특별히 정결에 대한 은사를 받은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이기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하였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162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12월 31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 후 3년 후 알로이시우스 성인은 젊은이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강론   :   (마태 6,24-34)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이 말씀은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지 마라."입니다.

재물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하느님처럼 섬기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만' 섬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물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재물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주님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이 우리 인생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은 우리 인생을 재물의 지배 아래 두는 일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이 말씀에서 "걱정하지 마라."는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를 먹이고 입히는 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된다고

자녀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신앙인이 가장 먼저 걱정해야 할 일은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 6,26)"

 

이 말씀은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를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노동'이나 '저축'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실하게 노동해야 하고, 저축도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일을 하지 않고 얻어먹기만 하면서

이웃에게 폐를 끼치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훈계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먹이기 위해서 '만나'를 내려 주셨을 때에도

그것을 거두어들여서 음식으로 만드는 일은 사람들이 직접 했습니다(탈출 16장).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마태 6,31-32ㄱ)."

 

'다른 민족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만 걱정하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보호를 믿고 있습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고(마태 14,14),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셨고(마태 15,32),

그리고 사람들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마음도 믿어야 하고,

그렇다면 우리의 딱한 사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걱정하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함께 나누어 먹는 일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오천 명에게 빵 다섯 개를 주어도

다투거나 싸우지 않고 나누어 먹을 것입니다.

(서로 양보를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러나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다면,

다섯 명에게 빵 오천 개를 주어도 부족하다고 불평할 것이고,

서로 자기 혼자 먹겠다고 다툴 것입니다.

자기만 살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 먹고,

남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만 먹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2ㄴ-33)."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을 하시기 때문에

사람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는 말은

그것들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처럼 직접 주실 수도 있고,

교회를 통해서, 또는 천사나 마음 착한 사람을 통해서 주실 수도 있고...)

 

우리는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하느님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 쪽에서도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

또 하느님의 의로움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은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한가? 썩어 없어질 육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우리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힘으로 하면 되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하늘만 쳐다보는 것은 게으른 것이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까지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