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민족들>
오랜 역사를 지닌 이집트
4대문명의 발생지는 모두 강을 끼고 있다.
물을 얻기 쉬울 뿐 아니라, 정기적인 범란으로 강 하류에 비옥한 충적토가 조성되는 관계로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또한 나일강이 만들어낸 지중해변의 비옥한 삼각주를 기반으로 일찍부터 문명의 꽃을 피웠으므로 그 역사가 장구하다.
기원전 3000년경에 첫 왕조가 시작된 이래로 기원전 4세기 중반에 페르샤의 지배를 받기까지 30왕조가 멸망했다.
이집트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구분된다.
상이집트는 비옥한 삼각주로 이루어진 평야지대인 반면에, 하이집트는 좁다란 계곡이 깊게 패여 있는 구름지대이다.
이렇듯 지형상의 현저한 차이로 서로 독립적으로 생활해 오던
상.하 이집트를 통일시켜 멤피스를 수도로 제1왕조가 들어섬으로써, 이집트의 국력은 더욱 강대해질 수 있었다.
그후 이집트는 비옥한 삼각주에서 생산되는 풍족한 생산물에다가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고왕국(3-6왕조) 시절에 전성기를 맞았다.
강력하게 확립된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파라오는 신격화 되었고,
그런 믿음이 온 백성을 통원해 왕의 무덤을 거대한 피라밋으로 건설하게끔 하였다.
현 세상에서 백성들을 다스렸듯이 죽은 후에도 신이 되어 저승세계를 다스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과도한 국력 소모로 중앙 정부의 힘이 점차 약해져
지방 귀족들이 득세하게 된 다음부터는 파라오가 불사불멸할 것으로 믿던 믿음도 약해졌다.
그에 따라 기원전 22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친 제1중간기(7-10왕조)에는 거대한 피라밋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지방 귀족들의 패권 싸움에서 도시국가 테베가 승리를 거두어 이집트를 재통일함으로써 중왕국(11-12왕조) 시대를 열었다.
12왕조는 대규모의 관계 사업을 벌이는가 하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경제적으로 좌우하기도 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는 소명을 받고 팔레스티나에 와 유랑하던 아브라함시대가 이 무렵이다.
아브라함이 흉년을 맞아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내려갔듯(창세 12,10), 이 시기 유목민들도 상거래를 하기위해 이집트를 오갔다.
중왕국이 와해되면서 시작된 제2중간기(13-17왕조)는 기원전 18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에 걸쳐 있는데,
이 시기에 힉소스족이 대거 침입하여, 이집트인들을 하이집트로 몰아내고 상이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이때에는 외래 민족이 통치하던 시절이라 능력만 있으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높이 등용될 수 있었다.
“너만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나의 온 왕궁을 네 수하에 두겠다”(창세 41,39-40)며
선뜻 요셉에게 총리대신 자리를 맡길 수 있었던 것(창세 41,1-45)은
힉소스족이 이집트를 다스리던 시기(기원전 1720-1570년)라 가능했을 것이다.
힉소스족을 물리친 후에 신왕국(18-29왕조)이 시작되었다.
약 150년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체험은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각성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투트모세 3세는 17번이나 전쟁을 벌여 시리아 북방까지 영토를 늘렸다.
이들 정복지에서 들어오는 풍요로운 부로 말미암아,
이집트인들음 아마르나 시대(기원전1375-1300년)에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군사력 방면에 힘을 기울이지 않은 관계로 팔레스티나의 군주들이 제국에서 이탈해 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새로 들어선 19왕조는 내륙에 있는 테베보다는
삼각주 부근의 라므세스(출애 1,11)에 주로 머물면서, 북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을 강제노동으로 내어 몬 “요셉의 사적을 모르는 왕”(출애 1,8)은
팔레스티나 정벌을 자주 나갔던 19왕조의 세티 1세나 라므세스 2세였을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빠져나온 후 “불레셋 땅으로 가는 길”(출애 13,17)로 접어들지 않은 것은
이집트인들이 취한 북방정책으로 국경수비대가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리비아인들을 포함한 ‘바다 백성들’의 침입이 있었지만, 라므세스 3세를 비롯한 역대 파라오들은 그들을 내어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티나에서 완전히 내어 몰 수는 없어 그들 중의 일부가 불레셋을 세웠다(바다에서 온 불레셋족 참조).
이집트는 라므세스 3세가 죽고 나서는 팔레스티나 지역을 모두 잃어버리고 이집트 영토 안으로 움추러 들었다.
신 왕국이 막을 내린 다음부터 이집트는 예전의 세력권을 다시 회복할 수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하나로 융화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외부적으로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마케도니아 등의 강대국이 북방에서 위세를 떨쳤기 때문이다.
다만 이스라엘과 유대를 비롯한 팔레스티나의 군소 국가를 부추겨 북방에서 발원한 대제국들과 맞서 싸우게 했을 뿐이다.
아시리아 시종장관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며 히즈키아 왕에게 전하라고 했던 “네가 믿는 이집트는 부러진 갈대에 불과하다.
그것을 지팡이처럼 믿는다마는 그것을 잡았다가는 도리어 손만 베일뿐이다.
이집트 왕 파라오는 자기를 믿는 모든 자들을 그렇게 대한다”(2열왕 18,21)는 말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본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했던 유대 왕들은 이집트를 믿고
북방세력에 눌리던 이집트는 급기야 기원전 671년에 아시리아 왕 에살하똔의 침입을 받아 삼각주 지방을 속주로 빼앗기고 말았다.
아시리아가 약해지자 옛 세력권을 탈환하고자 출정한 이집트 왕 느고는
유대 왕 요시아만 꺾었을 뿐(2열왕 23,29), 기원전 605년 가르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게 참패를 당했다.
이후 이집트는 신흥 강대국 페르샤와 마케도니아 손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지만,
악티움 해전에서 패한 후 로마의 속국으로 전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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