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1,25-30)
<사랑>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말씀에서 바로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그들은(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이 무겁고 힘겨운 짐을 나르고 있을 때
조금도 도와주지 않고, 도와주기는커녕 더 무거운 짐을 올려놓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겁고 힘겨운 짐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고,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 주일미사 참례를 '의무'로만 생각하고,
고해성사를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교리를 잘못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주일미사는 '기쁨'의 잔치이고, 고해성사는 '치유의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안식을 얻는 일입니다.
짐이 아닌 것을 짐으로 만들어서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는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에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사제 생활의 기쁨'은 말하지 않고,
'사제의 의무'만 가르친다면,
아마도 모든 신학생들이 숨이 막혀서 사제가 되기를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이 말씀은 무겁고 힘든 멍에와 짐 대신에
가볍고 편한 멍에와 짐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멍에와 짐 자체를 없애고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조선시대 감방 같은 아주 나쁜 교도소에서
현대화되어서 시설이 아주 좋은 교도소로 옮겨 준다면,
몸은 좀 더 편하게 되겠지만, 그것을 해방과 안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교도소에서 풀어주면서도 어떤 주택에 격리시키고 계속 감시를 한다면,
몸은 훨씬 더 편안해지겠지만, 그것도 역시 해방과 안식은 아닙니다.
모든 억압을 없애고 자유를 주는 것이 진정한 해방과 안식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들만 가르쳤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구원'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도
'의무'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일부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명절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가는 일이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 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명절을 싫어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는 심정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간다면, 그 길은 '기쁨의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순전히 '의무' 라면,
그래서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일이라면,
지옥에 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인용하면서
"그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이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 하는 무거운 멍에와 짐이라면,
안식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모순됩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총알을 맞아도 살 수 있도록 방탄복을 입혀 주는데,
만일에 방탄복이 무겁고 불편하다고 해서 입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죽겠다는 뜻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세속의 공격을 이겨내기 위한,
또 하느님 나라에 안전하게 들어가기 위한 방탄복 같은 것입니다.
좀 무거울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많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살고 싶다면 입어야 합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경축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사랑'마저도 '의무'로 변질되는 것을 봅니다.
('사랑'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게 되는 '기쁜 일'입니다.
사랑을 받는 일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모두 의무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하게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사실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율법'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담스러운 멍에와 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멍에와 짐이 아니라 사랑을 주셨는데,
우리 쪽에서 멍에와 짐으로 변질시킨다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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