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복치아니코에서 출생한 성 카밀루스(또는 가밀로)는 군인으로서 터키인들을 대항한 베네치아(Venezia)를 위하여 전투에 참가하였고, 도박에 빠졌으며, 1574년경에는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 나폴리(Napoli)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는 몸이 건장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1575년 우연히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 두 번씩이나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려고 노력했으나 일생동안 그를 괴롭힌 다리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로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정력을 쏟았으며, 로마(Roma)의 산 자코모 병원에 자원으로 봉사하다가 곧 그 병원의 회계를 맡았다.
이러한 경험은 병원의 놀라운 상황과 제 문제점들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이던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의 권고를 받아들여 158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이미 사제와 평수사들로 회를 구성하였던 병자들의 봉사자회(The Camellians)를 세웠다.
그들은 로마의 주요 병원에서 사목하다가 1585년에는 자신들의 병원을 세웠으며, 특히 로마 항의 배들을 통하여 전염되는 흑사병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치료하였다.
그는 항상 창문을 열어 놓고, 적당한 음식물을 먹게 하고, 전염병일 경우는 격리하는 방법을 그는 활용하였고, 그의 사제들은 항상 숨을 거두는 환자들 곁에 있었으며, 임종자들의 장례 등에도 큰 관심을 보이게 하여 세인들의 칭송이 높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도저히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1607년에 자신의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늘 환자들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죽는 날까지 그렇게 하다가 제노바(Genova)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742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746년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또한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천주의 성 요한(Joannes, 3월 8일)과 함께 모든 병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고, 교황 비오 11세(Pius XI)로부터는 모든 간호사와 간호 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강론 : (마태 10,34-11,1)
<이산가족이 되지 않으려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내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이고,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세상의 거짓 평화를 물리치고
하느님의 참 평화를 얻게 하는 칼을 주러 왔다."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사실상 사탄이 주는 평화입니다.
사탄이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예수님을 유혹한 일이 있습니다(마태 4,8-9).
사탄에게 경배해서 얻게 되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이 바로
사탄이 주는 평화이고, 세상이 주는 평화이고, 거짓 평화입니다.
그것을 얻게 되면 세속적인 쾌락과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지만,
하느님의 반대쪽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평화 자체가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느님의 참 평화'를 얻으려면
사탄이 주는 거짓 평화를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이 필요합니다.
이 칼은 '성령의 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칼, 즉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몸은 좀 고달프게 될 수도 있겠지만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려고 할 때에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예가 베드로 사도의 경우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말리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16,23)." 라고 혼났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베드로 사도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일을 인간적으로만 판단하고,
인간적인 애정만 앞세우다가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이 원수가 된 것은 아니고,
그의 행동이 원수 같은 행동이 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에서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 비교가 아니라 절대적인 판단과 실행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가족만(또는 세상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경우에도 평화처럼 '세상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이 다릅니다.
'세상의 사랑'은 하느님과 상관없이 인간적인 애정만을 생각하는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은 모두가 함께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베드로 사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당신의 뒤를 따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와 함께 같은 길을 가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바로 쫓아내셨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처음에는 '세상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랬다가 나중에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가족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의 사랑과 가정의 행복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을 위해서 무조건 가족을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 사랑과 참 행복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식구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나쁘다고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해야만 하는 일이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면,
그런 인간적인 행복은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안 식구가 어떤 범죄를 저지를 때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범죄 행위를 함께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범죄를 막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 범죄를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식구들을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는 것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되지 않으려면...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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