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왕국을 멸망시킨 아시리아
아시리아가 기원된 곳은 우리에게 바벨탑 이야기로 잘 알려진 시날 지방이다. “그의 나라는 시날 지방인 바벨과 에렉과 아깟과 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아시리아로 나와서 니느웨와 르호봇성과 갈라를 세웠다”(창세 10,10). 여기서 시날은 수메르를 가리키며, 현재 이라크의 남부 지방에 해당된다.
고대 아시리아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해 있어서 농경하기에 적합한 비옥한 충적토가 니느웨에서 앗수르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긴 했지만, 그 남쪽으로는 비가 별로 내리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이로 볼 때, 세부내용 없이 이름만 나열되는 초기 아시리아 왕들이 한결같이 ‘천막에 사는’ 것으로 제시됨은 아마도 유목생활을 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아시리아가 역사적으로 비로소 드러나게 된 것은 이 지역을 다스리던 우르 제3왕조(기원전 21세기)가 망하고 나서부터이다.
아시리아는 바빌론의 함무라비와 같은 시대인 샴시 아닷 1세(기원전 19세기) 때에 전성기를 맞아 마리 왕국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후리족이 세운 미탄니 및 바빌로니아의 봉신이 되고 말았다.
아마르나 시대인 기원전 14세기에 다시 독립을 쟁취한 아시리아는 투쿨티니누르타 1세(기원전 13세기) 시절에 바빌로니아에게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는 개가를 올리는데,
이로 말미암아 변두리에 위치해 있던 아시리아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문명의 핵심권에 있는 바빌로니아의 영향을,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많이 받게 되었다.
한편 이시기에는 아시리아의 남서쪽 방면인 팔레스티나에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는데, 해양민족인 불레셋족이 이집트로 쳐들어왔다가 패한 후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는가 하면, 아마도 여호수아가 연관되어 있었을 아람인들의 이동도 이 무렵에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기원전 1000년경에는 떠돌아다니던 아람인들의 압력이 특히 심해져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도시들은 시시때때로 약탈을 당해야만 했다. 이런 현상은 아람인들이 나라를 세워 정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람인들이 나라를 세운 뒤에 아시리아는 본격적으로 영토 팽창 정책을 펼쳐, 아슈르 나시르 아플리 2세(기원전 883-859)와 살마네셀 3세(기원전858-824)때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 두 왕은 직접적으로는 시리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오므리에서 아합, 예후로 이어지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외정책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시 말해서 시리아 벤하닷의 이스라엘 침공은 아시리아의 아슈르 니스르 아플 리가 아람인들이 세운 빗 아다니 왕국(메데덴; 아모 1,5)을 쳐부수고 시리아 북쪽을 거쳐서 지중해에 이르는 길을 닦게 됨으로써 유발된 것으로 보인다.
수도 다마스커스로 통하는 북방 무역로가 아시리아에 의해서 차단되자 남방 무역로라도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1열왕 20,2 이하).
이 시기에 아합이 시돈의 이세벨과 정략결혼한것도 교역량이 급격히 늘어난 띠로와 시돈과의 무역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1 열왕 16,31)...
아시리아는 살마네셀 3세 시절에 시리아를 거쳐 지중해로 통하는 무역로를 더욱 강화시키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연합하여 기원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와 대접전을 벌임으로써 살마네셀 3세의 목적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스라엘에서 각각 혁명이 일어나 왕조가 바뀌는 와중에 두 나라 사이의 협력관계가 틀어져 아시리아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되자,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해 지지기반이 허약했던 예후는 재빠르게 아시리아 왕 살마네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침으로써 허약한 자기 왕권을 유지시켜 나가는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8세기 초에는 아시리아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우라르트 왕국의 세력이 위축되었다.
그 틈을 타 디글랏 빌레셀 3세(=불)가 기원전 746년에 혁명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자, 아시리아에서 벗어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이스라엘의 므나헴이 반기를 들지만
아시리아의 즉각적인 침공을 받아 “왕의 자리를 지키도록 도와 달라고 하며 은 천 달란트를”(2열왕 15,19) 바치는 굴욕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아시리아의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애썼으나 당시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탓에 계속해서 아시리아에 무릎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와 연합하여 친아시리아 정책을 표방하는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다가 베가가 폐위되는가 하면, 그 뒤를 이은 호세아도 이집트의 사주를 받아 아시리아에 대항하다가
살마네셀 5세(기원전727-722)의 침입을 받아 기원전 722년에 나라 전체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고야 말았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반역의 뿌리를 근절시키고자 3년간 성 안에서 아시리아에 끈질기게 대항한 사마리아의 주민을 대거 다른 나라로 이주시켰고,
대신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사마리아 성읍들에 이주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 곳에서 자리 잡고 살게 하였다”(2열왕 17,24).
이렇게 정복지의 주민들을 서로 맞바꾸는 아시리아의 이주정책은 훗날 팔레스티나에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반복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지만,
다른 편으로는 서로 다른 나라의 문화에 접하게 함으로써 고대 근동의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의 초석이 되었다.
한편 아시리아의 속국이었던 우라르트 및 바빌로니아 역시 독립을 쟁취하려고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삼마네셀 5세 이후 왕위에 올랐던 사르곤 2세와 산헤립은 끊임없는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에 유다 왕 히즈키야도 아시리아가 반대편에서 일으킨 바빌로니아의 므로닥 발라단(2열왕 20,12)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팔레스티나에 신경을 쓰지 못하리라는 생각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기원전 701년에 신헤립의 침공을 받고야 말았다.
이후 아시리아는 에살하똔을 거쳐 아수르바니팔 시절에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국력을 소모하다가,
기원전 629년에 아수르바니팔이 죽고 나자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수습하지 못해 기원전 612년 바빌로니아와 메대의 연합군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점령당하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아시리아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회생하려고 고군분투하였으나 기원전 605년에 가르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게 완전히 꺾임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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