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자 료 실

암몬족

dariaofs 2012. 10. 5. 19:29

 

 

 

암 몬

 

사해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모압의 북동쪽에 자리 잡은 암몬족이 어디에서 기원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기록상으로는 암몬의 역사가 기원전 8세기경 아시리아 제국의 연대기에 가서야 언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발굴의 결과로 미루어 볼 때, 북쪽이나 남쪽에서 이동해 온 셈족 유목민의 일부가 기원전 13세기 초에 라빠 암몬을 중심으로 모여 살다가, 기원전 11세기 무렵에 조직된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떠돌아다니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진입해 들어갈 당시, 암몬 왕국은 아모리족이 세운 시혼 왕국처럼 이스라엘의 정복대상으로 직접 다루어지지 않는다.

 

시혼의 동쪽에 접경해 있는 암몬은 남쪽에 접경해 있는 모압과는 달리 시혼과의 국경이 뚜렷한 지형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시혼과의 싸움이 곧바로 암몬에게 번질 가능성이 다분히 많았다.

 

그런데도 암몬은 가나안에 진입하는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이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를 당시까지만 해도 암몬이 도시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지 않고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고고학적인 발굴로 볼 때 암몬은 이 시기에 이미 도시국가를 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시혼과 싸움을 벌이면서도 암몬과는 싸우지 않았다는 설명(신명 2,19)은 후대의 상황이 투영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진입할 당시에는 특별할 것 없는 도시국가에 불과했지만, 성서가 기록될 때에는 아람 치세 하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암몬을 이스라엘이 감히 정복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아르논에서 야뽁에 이르는 그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암몬 백성의 지경은 넘지 않았다. 암몬 백성의 지경은 수비가 튼튼하였기 때문이다”(민수 21,24).

 

암몬이 이스라엘과 군사적으로 충돌한 것은 판관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모압 왕 에글론이 이스라엘에 쳐들어가 종려나무 도시(=예리고?)를 점령할 때에 암몬은 아말렉과 합세하여 모압을 지원하였다(판관 3, 13).

 

이후로 암몬은 간접적인 군사지원에만 그치지 않고, 국경지대를 커다란 돌 모양으로 견고한 요새를 만들고는 직접 이스라엘에 여러 차례 쳐들어 왔다.

 

이런 일련의 군사 행동으로 암몬의 영토는 점차 팽창되어서 길르앗을 점령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요르단강 서편까지 넘보게 되었다.

 

그들은 요르단강 건너편 길르앗 지방 아모리 땅에 사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십팔 년 동안 억압하며 짓밟았다. 

 

암몬 백성은 또 요르단강을 건너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을 쳤다“(판관10,9). 판관시대를 거쳐 왕정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스라엘과 암몬의 싸움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암몬 왕 나하스는 이스라엘에 아직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틈을 타, 갈릴래아 호수 남쪽 방면에 있는 야베스 길르앗까지 쳐들어가는 등 영토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1사무 11,1).

 

하지만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사울에게 승리를 안겨 줌으로써 이스라엘 왕인 사울의 위치만 확고히 해주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암몬은 이스라엘에 왕권이 확립된 후에는 에돔과 모압 등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위세에 눌려 지내야만 했다.

 

 “사울은 모압, 암몬 백성, 에돔, 소바 왕, 불레셋 등 사방에 있는 원수들과 싸울 때 마다 승리를 거두어 이스라엘 왕위를 굳혔다”(1사무 14,47).

 

급기야 나하스의 아들 하눈이 암몬을 다스릴 때에, 다윗이 보낸 조문 사절단을 모욕한 사건을 빌미로 삼아 쳐들어 온 다윗에게 수도 라빠 암몬까지 점령당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2사무 10-12장).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가 다윗의 음모에 말려들어 전사한 곳도 바로 이 라빠 암몬 전투에서다.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내분으로 다윗이 압살롬에 쫓겨 피난길에 올랐을 때에 암몬 땅 라빠에서 나하스의 아들 소비가 나와 맞으며 다윗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 했던 것(2사무 17,27)을 보면, 다윗의 암몬 정복으로 말미암아 암몬의 옛 왕가가 단절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누리던 솔로몬 시절에도 암몬은 여전히 이스라엘에 예속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솔로몬 왕이 취한 결혼외교로 말미암아 외국인 왕비들이 믿고 있던 종교제의가 행해질 때에(1열왕 11,1-8), 암몬인들이 섬기던 밀곰과 몰록 숭배도 이스라엘 안에 영향을 끼쳤다.

 

1세기 동안을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죽어지냈던 암몬이 기세를 펼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9세기경이다.

 

아람과 한 편이 되어 시리아와 맞서 싸움으로써 사막의 대상무역의 이권을 취 했는가 하면, 모압과 에돔과 연합해서 유다의 여호사밧을 침공해 들어오기도 했다(2역대 20,1).

 

하지만 우찌야와 요담이 유다를 다스리던 시절에는 세력이 꺾여 조공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2역대 26,8; 27,5).

 

이렇게 늘 힘겨루기에 따라 서로간의 위상을 정립하였던 군소국가 유다와 암몬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그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암몬은 아시리아의 보호를 받으며 사막의 대상무역을 계속하면서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원전 652년에 아수르바니팔의 왕위권 쟁탈을 둘러싸고 아시리아 전역에 내란이 벌어짐으로써, 암몬은 아시리아에 반기를 등 아랍 족 속의 의협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위협에 자력으로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던 암몬은 신흥대국인 신바빌로니아의 세력권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암몬은 기원전 601년에는 신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든 유다의 여호야킴을 바빌론군과 시리아군과 모압군과 연합하여 공격하기도 하고(2열왕 24,1-2),

 

유다가 멸망한 후에는 유다가 다스리던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자 게달리야를 암살했던 이스마엘 일행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예레 41,10.15).

 

암몬의 역사가 언제 끝났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기원전 6세기 중엽 이전에 인구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보아 유다와 마찬가지로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했을 것이다.

 

“너 사람아, 바빌론 왕이 칼을 빼들고 한 길로 가다가 두 갈래로 갈리게 되는 길목에 방향 표지판을 새겨 세워라. 그 칼이 암몬 도시 라빠로도 갈 수 있고, 유다 중심부에 자리 잡은 예루살렘으로도 갈 수 있게 표지판을 새겨 세워라.

 

바빌론 왕이 그 길목에 멈추어 서서 점을 칠 것이다”(에제 21,24-26). 이 점궤에 따라서 유다가 먼저 멸망당했지만, 암몬 또한 그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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