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자 료 실

천연요새로 둘러싸인 모압

dariaofs 2012. 10. 3. 03:35

 

 

 

 

<성경의 민족들>

 

천연요새로 둘러싸인 모압

 

사해 동편 지역에 자리 잡은 모압 왕국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발굴 결과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인 단절 현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외부에서 어떤 민족이 들어와서 새 왕국을 건설했다기보다는 그 지역의 유목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기원전 13세기경에 강력한 문명을 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모압의 영토는 지형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동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에 접경해 있고, 서쪽으로는 사해와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세레드강이 흐르고 있어서 외부 세계와 모압을 차단시켜 주는 천연요새 역할을 한다.

 

이에 반해 북쪽은 강이나 사막과 같이 뚜렷한 지형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외부 세력과 자주 맞부딪쳤고, 그 힘겨루기의 결과에 따라 경계선이 곧잘 바뀌었다.

 

하지만 사해에서 흘러나와 모압 중앙을 관통하는 아르논강이 중간 방어선 역할을 하였으므로, 웬만해서는 모압 전역이 적의 침입에 휘말리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집트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이 에돔의 국경을 돌아 나오다가 진을 쳤던 곳은 바로 모압의 두 강가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레드 개울에 진을 쳤다가 또 그 곳을 떠나 아르논강 건너편에 이르러 진을 쳤다.

아르논강은 아모라인들의 지경에서 시작되어 광야를 지나 모압과 아모리 사이 모압 국경을 흐르는 강이다”(민수 21,12-13).

 

아르논강은 사해 가운데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강을 지난 후에는 사해 방면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당시 그 영토는 아모리 왕 시혼이 다스리고 있었다.

 

원래는 모압 땅이었지만, 시혼이 “전에 모압 왕을 치고 그의 영토를 아르논에 이르기까지”(민수 21,26) 빼앗았던 것이다.

 

덕분에 모압은 광야에서 유랑하던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싸움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부수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발람을 불러다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청한다.

 

이때 성서에서 처음으로 모압 왕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그가 바로 발락이다(민수 22,2-6).

 

하지만 모압 왕 발락의 우려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진입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으므로, 아르논강을 넘어서 모압을 넘볼 여유가 없었다.

 

다만 아모리 왕 시혼이 다스리던 아르논강 북부인 엣 모압 영토를 르우벤 지파가 할당받아 굳게 지킬 뿐이었다(여호 13,15-21). 이후 성서에서 두 번째로 언급되는 모압 왕은 판관시대의 에글론이다.

 

그는 “암몬과 아말렉 백성과 합세하여 이스라엘에 쳐들어 와 종려나무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 동안 섬기게 되었다“(판관 3,13-14).

 

여기서 종려나무 도시가 예리고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즈음에 모압은 이전에 아모리 왕 시혼에게 빼앗겼다가 이스라엘에게 넘어간 아르논강 북부 영토를 회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해 동편 전역을 모압이 차지하였다기보다는 그중의 일부분을 다스렸을 것이다. 이후 모압은 판관들의 시대를 지나 왕정으로 들어간 이스라엘에게 예속되기 시작하였다.

 

“사울은 모압, 암몬 백성, 에돔, 소바 왕, 불레셋 등 사방에 있는 원수들과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어 이스라엘 왕위를 굳혔다”(1사무 14,47).

 

더구나 다윗이 다스리던 시절에 “모압은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었다”(2사무 8,2). 이런 체제는 솔로몬 치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분단되었을 때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다만 남북으로 분단된 후에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런 체제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아합 왕이 죽고나서이다(2열왕 1,1; 3,5).

 

모압 왕 메사는 권력 승계에 따른 누수현상과 왕위를 계승한 아하지야가 병마에 시달리는 기회에 이스라엘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하지만 아하지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람이 유다군과 에돔군을 끌어들여 쳐들어옴으로써, 이들 연합군과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패전을 거듭하였고 급기야는 키르하레셋에서 포위되기까지 하였다(2열왕 3,7-27).

 

하지만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긴 후에는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에게 빼앗겼던 메드바를 비롯하여 아르논강 북부 영토를 대부분 되찾을 수 있었다.

 

더구나 이 무렵에는 시리아가 위세를 떨칠 때이므로 이스라엘은 위축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모압은 시리아와 연줄을 대어 왕의 큰길을 이스라엘의 영향권에서 빼냈을 것이다.

 

이후 모압은 시리아가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을 때에도 영토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스라엘을 털곤 하였다(2열왕 13,20).

 

그러나 아시리아의 세력이 잠시 주춤한 틈을 타, 유다 왕 우찌야는 여로보함 치세에 이어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다.

 

이때 요르단강 동쪽 지역을 점령하여 암몬들에게 조공을 받았는데(2역대 26,8), 이 시기에 모압 역시 유다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733년에 아시리아가 다시 세력을 정비해서 팔레스티나와 트랜스요르단을 휩쓸게 됨에 따라, 모압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모압은 아수르바니팔이 다스릴 시절에 아랍인들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역사의 두 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모압은 느보산 위에서, 메드바에서 통곡하고 모두들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깍는다”(이사 15,2)는 예언 말씀 그대로였다.

 

철기 시대의 모압인들은 청동기 시대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종교 관습을 그대로 전수받았는데, 이들의 신앙행태는 요르단강 서편에 살았던 팔레스티나의 가나안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벳-바알-브올, 벳-바알-므온, 베못-바알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의 바알 신앙이 그대로 행해졌을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왕의 큰길에서 밀려들어오는 남방과 북방의 종교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모압은 그모스신을 국가신으로 받들었다.

 

모압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가면서 야훼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고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것은 그모스신이 자신들에게 화를 냈기 때문이며, 이후 빼앗긴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모스신이 다시 모압 백성에게 호의를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까닭에 예레미야는 모압이 망하리라는 뜻으로 “그모스신의 백성은 끝장이 났다”(예레 48,46)고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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