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민족들>
팔레스티나는 후리족의 땅?
후리족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해에 있는 코카서스 남부 및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기원되었다. 아람족에 앞서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살았던 그들의 역사는 기원전 1550넌을 분기점으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 이전에는 고향 땅을 떠나 남. 서쪽방면에 위치한 고대 근동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오는데 그치지만, 그 지역에서 일정 세럭을 형성한 후에는 고대 근동의 국제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후리족은 우르 3왕조 시대 (기원전 2150-2000 년)와 이신 라르사가 주도권을 잡던 시대(기원전 2000-1800 년)에 여러 자료에서 그 이름이 많이 나타나지만, 기원전 18 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마리의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하나 도시의 계약문서에서 처음으로 민족으로서 언급된다.
아마 이 무렵부터 후리족은 메소포타미아 상부와 시리아 북부 지역에 많이 이주해 살면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헷 왕국의 하투실리 1세가 다스리던 시절인 기원전 1635년에는 후리족의 군대가 소아시아를 침입하였고, 헷 왕국의 무르실리 1세가 바빌론을 치기 위해서 시리아를 경유하던 기원전 1595년에는 후리족의 저항을 거세게 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고대 근동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여온 후리족은 급기야 기원전 15세개 초에 길리기아에서 왕권을 잡았고, 병거를 다룰 줄 아는 인도 아리안들과 함께 미탄니 왕국을 세워 상부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를 한 세기 이상 석권하고 이집트 왕과 맞먹는 권세를 누렸다.
이 왕국의 공식 언어가 후리아거 될 정도로 후리족이 큰 비증을 차지하였던 미탄니 왕국은 전차를 끄는 말들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기술을 고대 근동에 퍼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미탄니 왕국은 기원전 1450년 사우샤탈 왕 때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시리아의 영유권을 두고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와 전쟁까지 치렀다가 패함으로써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영토를 상실했지만, 얼마 자나지 않아 조약을 맺음으로써 알렙포와 북부시리아를 다시 다스릴 수 있었다.
그 후의 미탄니 왕들은 이집트에 공주를 시집보냄으로써 양국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370년경 미탄니 왕국은 그 나라와 동맹을 밎은 길리기아를 견제하느라 정상적인 길을 피해서 유프라테스강 북쪽으로 돌아서 쳐들어 온 헷 왕국의 수필루리우마 왕에게 정복됨으로써 속국으로 전락하는 비운을 맛보았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되지 않아 아시리아의 침입을 받고는 아시리아의 영토로 편입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미탄니 왕국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후리족은 그 시시를 전후에서 시리아와 페니키아를 비롯하여 팔렛,티나에까재 퍼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집트 신왕국 이후의 문서에서 팔레스티나를 ‘후리족의 땅(후루의 땅)’ 이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성경에는 ‘후리족’ 이라는 말 대신에 ‘호리족’이 언급되는데.이 명칭은 세일산이나 에돔 지역에 거주하였던 원주민 (창세 36,20-21. 29-30)의 이름과 혼선을 빚었던 관계로, 점차 호리족의 한 지역을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히위’ 나 ‘여부스’ 로 그 이름이 대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후리족은 호리족이 사는 에돔 지역이 아니라, 히위족이 살았던 요르단강 서쪽 지역에 주로 거주했을 것으로 생각된는 증거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다.
히위족은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여호수아가 곧바로 맞닥뜨려야 했던 팔레스티나 원주민의 하나였다.
예리고와 아이 주민을 전멸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속여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은 기브온 주민들은 바로 히위족이었다 (여호9,1-15).
‘기브온에 사는 히위족밖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우호관게를 밎은 도시가 하나도 없었다’(여호 11,19).
또한 기원전 14세기의 아마르나 문서에서 예루살렘 왕이 후리족의 모성 신을 뜻하는 ‘헤파의 종’ 이란 이름으로 제시되고
다윗이 야훼께 친교제를 드렸던 타작마당의 소유주의 이름이 후리어로 “주님” 이라는 뜻인 ‘아라우나’ 인 것을 보면 (2사무 24,15-25),
다윗에게 함락되기 이전에 예루살렘에 살던 원주민 여부스 사람들 (2사무 5,6-10)도 후리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기브온 주민과 여부스 주민등 후리족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살아남아 이스라엘 후손들과 섞여 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여호 9,22-27;15,63),
아브라함이 야훼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머물러 살았던 곳이 후리족의 중심지였던 하란이었던 까닭에 (창세 11,31-12,4),
이스라엘과 후리족의 풍습은 서로 흡사한 부분이 많다.
자식없는 사람이 상속자로 삼기 위해 양자를 들이거나 (창세 15,2-3) 몸종을 소실로 들이는 (창세 16,1-3) 행위, 양자를 들인 이후에라도 본부인이 자식을 낳으면 상속권이 친아들에게로 돌아오는 것 (창세 21,8-10),
야곱이 라반에게 대하는 행동과 수호신상에 집착하는 라반의 모습 (창세 31장),
형이 자식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대를 잇게 하는 것(신명25,5-7) 등은 모두 후리족의 영향권에 있었던 누지 문서의 내용과 자주 비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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