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자 료 실

신비에 쌓인 헷족

dariaofs 2012. 9. 28. 00:19

 

 

 

<성경의 민족들>

 

신비에 싸인 헷족

 

헷족은 아직도 안개 속에 있는 민족이다. 그들의 기원이나 인종의 특성은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기원전 23-20세기에 언어상으로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무리들이 소아시아 지방(현재 터키)에 이주해 와,

헷 원주민들이 세운 도시국가를 점령하고 헷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 역사를 이어갔음은 확실하다.

 

헷(=하티, 힛타이트) 왕국의 기록은 하투실 리가 다스리던 기원전 17세기 초부터 나타나는데, 아마도 이때쯤 시리아 지역의 서기관 학교에서 사용하던 점토판 기록방법을 차용해 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하투실리는 시리아가 위치해 있는 남동쪽 방면으로 손길을 뻗쳤고, 하투실리의 손자인 무르실리 왕 때에 시리아에 있는 도시국가 알렙포를 점령하고, 고바빌로니아 제국을 공격하여 함무라비 이후 5번째 왕인 삼수디타나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무르실리는 소아시아에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지만, 수도로 돌아와서 얼마 되지 않아 의형제로부터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아야 했다. 그 이후로 헷 왕국은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정국이 불안정한 틈을 타 습격해 온 주변국가에 대응해야 했고 때마침 기근이 겹치기도 해서 영토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기원전 14세기 무렵에 헷 왕국은 시리아에서의 주도권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투드할리야와 아르누완다 왕조 시절에 알렙포를 다시 점령할 수 있었고, 당시 시리아 북동부에서 팽창일로에 있던 미탄니 왕국을 무찌르고 나서는 헷 왕국의 전통적인 봉신제도를 도입해서 시리아 일대를 영토로 편입시켰다.

 

헷 왕국이 알렙포의 남쪽에 위치한 카데스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자, 당시 시리아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러 북진정책을 편 이집트 왕 라므세스 2세와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노동을 시켜 곡식을 저장해 둘 도성 비돔과 라므세스를” 고센 지역에 세우는 등 건축사업과 영토 확장 정책을 활발하게 편 그는, 기원전 1300년경 4개 군단을 이끌고 헷 왕국과 전투를 벌였지만, 어느 편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두 나라는 시리아를 접경지대로 지리하게 군사적으로 대치하다가, 기원전 1284년에 다마스커스를 국경선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이후 왕국의 역사는 분명치 않다. 동쪽에서는 아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세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아르자와 왕국의 견제를 받다가, 기원전 1190년경 바닷사람(해양민족)의 출현 등 중근동의 대대적인 민족이동 속에 헷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헷 왕국이 다스리던 영토는 작은 왕국들과 도시국가들로 나누어져 독립적으로 자기 앞길을 개척해 나가려 했지만,

군사대국이었던 아시리아에 하나씩 먹혀 들어가다가, 기원전 717년에 가르그미스가 아시리아 왕 사르곤 2세에 점령됨으로써 소왕국으로서 누리던 주권을 모두 빼앗겼다.

 

이처럼 헷 왕국은 그 영토가 팔레스티나에까지 미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대제국으로서 누리던 영광도 이스라엘이 통일왕국을 세우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1200년에 끝났기 때문에, 팔레스티나를 주 무대로 역사를 이어왔던 이스라엘과는 직접 맞닥뜨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성경은 헷족이 가나안족 다음으로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브라함은 헷 사람에게 아내 사라를 묻을 동굴을 팔라고 간청하는가 하면(창세 23,1-20), 약 속의 땅 가나안을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출애 3,8)으로 묘사한다.

 

더군다나 솔로몬은 이집트에서 말을 사서 헷 왕들에게 되파는 중개무역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2역대 1,17), 시리아군에 의해서 사마리아에 갇힌 이스라엘의 동맹군으로 헷 왕이 언급되기도 한다(2열왕 7,6).

 

아마도 이들은 헷 제국이 멸망한 후에 소왕국으로 쪼개지는 과정에서 시리아를 거쳐 팔레스티나에 흘러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아시리아는 시리아를 가리켜 ‘헷족의 땅’ 이라고 일컬었다.

헷족과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영향 관계는 분명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둘의 풍습과 문화는 흡사한 면을 일부 보인다.

 

사울은 불렛셋과의 싸움을 앞두고 꿈이나 우림이나 예언자들에게서 아무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자 무당에게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달라고 청한다(1사무 28,3-14).

 

이는 땅에 움푹 페인 곳을 지하세계의 혼령과 접촉할 수 있는 장소로 여겨, 거기에서 예식을 드리는 가운데 신탁을 받았던 헷족의 풍습과 유사하다.


또한 이스라엘과 헷족은 사제뿐만 아니라 왕에게 기름을 부었고, 그 행위에 대관식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담았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 외에도 공적으로 모욕을 줄 때 신을 벗긴다든가(신명25,5-10;룻기 4,7-8), 똑같은 제의 봉사자이면서도 사제와 레위인 사이에 차 등을 두었다는 점에서도 다를 바 없다. 특히 계약을 맺는 방식의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계약조문을 열거하기에 앞서 계약의 주도권 자를 명시하고 계약 쌍방 간의 이전 관계를 밝히는 역사적 서문이 들어간다는 점이나.


계약 조문 뒤에 계약조문을 정기적으로 낭독하면서 계약의 준수 여부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내린다는 점에서 양자는 자주 비교되고 있다(출애 20,2-3; 24,3-8; 신명 2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