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7월 26일 가해 연중 제16주간 토요일(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dariaofs 2014. 7. 26. 06:00

 

 

성모 마리아(Maria)의 부모인 성 요아킴(Joachim)과 성녀 안나(Anna)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일체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 이외의 전승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70-180년경에 쓰여진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Jacobi)는 비록 교회에서 위경(Apocrypha)으로 간주되지만, 마리아의 부모에 대해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실제 이 책은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던 작품일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어 마리아에 대한 공경에 한몫을 하였다.

 

 물론 교회에서 위경으로 간주한 만큼 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이 역사적으로 실제 벌어졌던 일들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야고보 원복음서”에 따르면, 성 요아킴은 부유하고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성녀 안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이들에게 흠이라고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여겨지기 때문에, 요아킴은 시무룩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로 하느님께 단식하며 기도드리기로 결심하고는 광야로 갔다. 그 동안 집에 홀로 남겨진 성녀 안나 또한 주님 앞에서 울며 탄식 기도를 바쳤다.

이 부부의 간절한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다. 한 천사가 성녀 안나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낳은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다. 이에 성녀 안나는 그 아이를 주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중 이와 비슷한 환시를 본 성 요아킴 역시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딸을 낳았고, 안나는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이가 3세가 되었을 때,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마리아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양육받도록 맡겼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함께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한 어머니 안나와 아버지 요아킴의 축일도 생겨났다. 그리고 많은 교부들이 “야고보 원복음서”를 즐겨 인용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고조되었다. 원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를 기념하는 축일은 9월 9일이었다. 이를 기념하는 전례가 6세기 동방 교회를 거쳐 8세기 이후에 로마로 도입되었고, 14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 성녀 안나를 기념하는 성당이 건축되었고, 중세 시대 유럽에 성녀 안나에게 봉헌되는 성당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성모 마리아의 부모에 대한 공경을 확산시켰다. 그 결과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가 7월 26일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 축일로 지정하였다.

이처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가 일반인들에게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가정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모범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예전에는 대가족 제도였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포함되지 않는 가정상이 낯설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마리아의 부모까지 포함시켜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교회 미술 작품에서 성녀 안나는 주로 영원하고 신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초록색 망토와 빨간 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되며,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반면, 성 요아킴의 상징은 성전에서 행하던 그의 경건한 제사와 관련되어 어린 양, 백합, 새장 속의 비둘기 등이다.
 

강론   :   (마태 13,24-30)

 

<가라지의 비유>

 

7월 26일의 복음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고,

개인의 신앙생활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공동체 안에는 밀 같은 사람도 있고, 가라지 같은 사람도 있는데,

다른 사람을 함부로 가라지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지 말고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가라지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밀 같은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지금은 가라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회개한다면 밀이 될 수 있다는 격려로,

또 밀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가라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경고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격려하시는 말씀이든 경고하시는 말씀이든 간에

어떻든 하느님의 심판 때에

'가라지'로서 심판대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하게

밀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밀과 가라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로마 7,21-25)."

이 말은 '해야 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일이 많다는 것을 고백한 말입니다.

 

이성으로는 '해야 하는 일'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만 충실하게 한다면 그것은 '밀'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은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해야 하는 일'은 '하고 싶은 일',

즉 '하면 기뻐하게 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면 안 되는 일'도 '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고 나면 후회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마음과 몸이 자기 뜻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비참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갈등을 겪는 상황 자체가 비참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죄의 노예'가 된 것 같은 모습이어서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분도 이런 정도이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악의 화신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런 사람은 갈등을 겪기는커녕 범죄를 즐기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착한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가 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내적 갈등을 겪게 됩니다.

바로 그런 때에(자기 힘으로 안 될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회개'는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지만

회개가 완성되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가 밀로 변화되려면 자기 자신이 노력해야 하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루카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간 것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는 집에 도착해서 아버지에게 자기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루카 15,21).

만일에 그때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내쫓았다면?

그러면 아들의 회개는 물거품이 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원래는 순서를 바꿔서 생각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회개하기 전부터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했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의 회개는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가라지를 밀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지만,

죄인 자신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상 밀이 되기를 거부하고

가라지로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예외 없이 밀이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고,

지금 가라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밀로 바뀔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시는 분이고,

밀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회개와 충실한 신앙생활은 그 자비와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단순히 심판이 무서우니까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