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르타는 성녀 마리아(Maria)와 성 라자루스(Lazarus, 12월 17일)의 누이이고 예루살렘 근교 베타니아에서 살았으며 집안일을 맡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였으며, 주님은 그들의 집에 자주 머무신 듯하다. 성녀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다.
루가 10장 38-42절의 사건은 그녀의 성격을 잘 묘사하는 내용이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이런 기사 때문에 그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성녀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처럼 공경을 받는다.
성 라자루스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 연락했던 이는 성녀 마르타이고, 성녀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요한 11,20).
어떤 전승에 의하면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루스는 예수님의 사후에 프랑스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녀이다.
강론 : (요한 11,19-27)
<부활, 생명>
신약성경을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나인'이라는 고을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루카 7,11-17),
'야이로' 라는 회당장의 외동딸(루카 8,49-56),
그리고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요한 11,38-44),
이들은 죽었다가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또 '야포'에서 살고 있던 '도르카스' 라는 여자는
죽었다가 베드로 사도 덕분에 다시 살아났고(사도 9,40),
건물 삼층에서 떨어져 죽은 '에우티코스' 라는 젊은이는
바오로 사도 덕분에 다시 살아났습니다(사도 20,10).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있는 이 이야기들을 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당사자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죽어 있었던 시간 동안 어디를 갔었는지, 무엇을 체험했는지,
다시 살아난 소감이 무엇인지...
실제 현장에서는 뭔가 말을 했을 것 같은데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그들의 '말'이 없습니다.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의 경우를 보면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루카 7,15)."
라고 되어 있는데, 복음서 저자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또 야이로 부부가 몹시 놀랐다고 언급되어 있는
루카복음 8장 56절 외에는 가족들의 반응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자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사건'만 기록했고,
그 다음에는 목격자들이 놀랐고, 믿었다는 것만 기록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말을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또는 저자들이 기록을 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하늘나라를 체험한 일을 기록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낙원까지 들어 올려진 그는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떠한 인간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2코린 12,3-4)."
바오로 사도는 하늘나라에서 뭔가를 보았고, 어떤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말할 뿐이고,
무엇을 보았고 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표현한 대로 '발설하면 안 되는 내용'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초월한 것입니다.
묵시록 저자가 종말의 하느님 나라의 완전함과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해서
온갖 보석의 이름들을 나열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묵시 21,18-21).
이제 라자로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라자로 자신의 말도,
또 마르타와 마리아의 반응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요한복음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
마르타는 라자로가 살아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과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것(요한 11,24-27).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요한복음서 저자가 독자에게
그 두 가지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었을 때의 일이나 죽었다가 살아난 다음의 일을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이신 분이라는 것을 먼저 믿어라."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라고 믿고 있고, 그런 곳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 세상의 생명을 주신 것은,
또 예수님께서 당신 혼자 승천하시고
제자들과 신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은
이 세상의 삶에도 하늘나라에서 삶만큼의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이고,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전체적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고,
개인적으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 세상도 원래는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인간들의 탓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그런 곳으로 복구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 속에서 완성되어야 할 나라이기 때문에
이 세상과 그 나라는 전혀 다른 딴 나라가 아니라, 사실상 하나의 나라입니다.
이승의 인생과 저 세상의 인생도 전혀 다른 별개의 인생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하나의 인생입니다.
여기서 '인생'이라는 말을 '생명'으로 바꿔도 됩니다.
장례미사 때에 흔히 "죽음이란 끝이 아니고, 관문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고 희망하는 것은
라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희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은 이승의 수명이 조금 더 연장된 것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수명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에 대한 권능과 권한을 갖고 계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 말은 수명 연장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고,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은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가? 가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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