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사랑하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거친 물살 속에 뛰어들 수도 있고 타 죽을지도 모르는 불 속에도 뛰어들 수도 있으니까요.
세월호에서 사랑하는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는 사랑을 위해서 언제 끝날지도 모를 기약 없는 단식을 감행하고,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한 달이 넘게 도보행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어떤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일을 감행하게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했기에 “정의의 실천을 요구하고” 정의를 실천하자고 사랑으로 초대하기도 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83항).
사랑하게 되면 ‘못하게 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사 ‘사랑하게 되면 '못하게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사랑하는 이의 곁을 떠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습니다.
세월호에서 사랑하는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는 그들을 모욕하는 ‘엄마부대’라는 여성들에게 항의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조용히 하라”, “그만하라”는 어떤 사람들에게 원망도 표현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요한 3,16). 외아드님 역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나병환자를, 백부장의 종을, 시몬의 장모를, 가다라의 미친 사람을, 중풍병자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부인을, 눈먼 사람을, 말 못하는 사람을 낫게 하셨습니다(마태 8―9).
풍랑을 가라앉히시고(마태 8,23-27)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마태 9,9-10). 그것도 성에 안 차셨는지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영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그런데 웬일일까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기 시작하십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 11,20). 회개하지 않은 이 군중들―분명히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포함된 여러 고을에서 나온―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들은 어찌 예수님을 이리 힘들게 할까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접하시고 따로 외딴 곳에 물러가신 주님을 말입니다. 아픈 마음을 추스르고 “따로 기도하려고”(마태 14,23) 물러가신 그곳까지 찾아간다는 말입니까?
군중의 마음에 회개는 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인 것만 같습니다. 그들에게 관심은 오로지 병자의 치유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제 어느 정도 군중의 욕구와 마음이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 군중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십니다. 사랑은 미움과 원망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사랑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 있는 환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나름대로 버린다고 버린 제자들인데……. 나름대로 회개한다고 한 사람들인데……. 감히 회개도 하지 않고 주님께 꾸지람을 들은 주제에 자신들이 바라는 것만 채우려고 한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인 것 같습니다.
어서 사람들을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그리고 핑계를 댑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마태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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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재국 | ||
하지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이미 날도 저물어 저녁이 되었으니”(루카 24,29) 더 이상 가지 말고 함께 머물자고 요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눈이 열렸나요? 제자들은 어찌 예수님과 군중의 마음을 모르고 있을까요?
한 가지 밖에 이유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자란 것입니다. 별로 잘난 모습도 보이지 않는 이 제자들의 모습이 어찌 우리의 모습과 이리 닮았던가요?
온갖 결함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머물고 싶어 하는 군중과 이들을 헤쳐 보내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대비됩니다. ‘이 군중에게 애쓰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회개하지도 않을 무리일 텐데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텐데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바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양의 크고 작음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축복, 감사, 찬미였습니다. 주님께서 개의치 않으시고 그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축복하고 감사하고 찬미하는 사람이 어찌 나누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축복된 빵이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제자들만 잘 먹으라고요? 아니지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주어집니다. 축복되고 찬미가 드려진 빵은 주님에 의해 떼어졌고 이제 나누어지기 위함입니다.
성체는 나누어지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그리고 그것은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선포라고 말해도 될까요?
교회의 성사는 나누어지고 전해지기 위함입니다. 나누어질 때, 그리고 주어질 때 눈은 열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루카 24,30-31 참조). 그리고 선포되어집니다(루카 24,35 참조).
결국 최후의 만찬에서 받아먹으라고 전해진 그 빵은 받아먹고 마심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억(1코린 11,24-26 참조)의 의미일 겁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전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건네 주셨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더불어 생선도 건네주신 적이 있으십니다(요한 21,13).
건네어진 빵과 생선, 그리고 이어지는 담화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시몬, 당신은 이들보다 더 나를 사랑합니까?” “내 양들을 지켜 돌보시오”(요한 21,15-17). 그리고 각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의 헌신입니다(요한 21,18-19 참조).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눈이 열려 알아보는 법입니다(루카 24,31; 사도 9,18). 눈이 열려 알아보면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헌신하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드릴 각오를 하게 됩니다(요한 21,18-19 참조). 이것이 “하느님의 변치 않는 자애”(이사 55,3)이며 이것이 죽음이나 생명도, 천사들이나 주천사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도, 능천사들이나 높이나 깊이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갈라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로마 8,38-39).
“사랑만이 인간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583항). 어떠한 곤경에서도, 갈등 상황에서도 사랑의 마음만큼은 놓지 말고 살아가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말입니다.
신종호 신부 (분도)
대구대교구 옥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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