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8월 14일 가해 연중 제19주간 목요일(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dariaofs 2014. 8. 14. 01:00

 

 

1894년 1월 7일 폴란드 우지 근처의 즈둔스카볼라(Zdunska Wola)에서 태어난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Maximilianus-Maria Kolbe, 또는 막시밀리아노)는 라이문두스(Raimund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1910년 9월 4일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누스라는 수도명을 택하였다.

 

이곳에서는 그는 중등 교육과 수련을 받고 1911년 9월 5일에 첫 서원약을 하였으며, 1912년 12월에 로마(Roma)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프란치스코회 국제 신학원에 머물면서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23세였던 성 막시밀리아누스는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신학원장 신부의 허락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Militia Immaculatae)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1917년 10월 16일). 이 모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활동하는 일종의 신심 단체이다.

1914년 11월 1일에 종신 서약을 한 그는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고 1919년에는 폴란드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크라쿠프(Krakow)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동료 수사들은 물론 대학생들과 군종신부들 안에서 기사회 조직을 만들었다.

 

1922년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je)라는 잡지를 발행함으로써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도직을 시작하였다. 이 잡지는 초기에 그로드노(Grodno)에서 발행되다가, 1927년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Miepokalanow)이라는 수도생활 공동체에서 발행하였다.

 

이 마을은 성 콜베 신부가 바르샤바(Warszawa)에서 40km 떨어진 방대한 지역에 설립한 공동체이다. 그리고 1930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중국, 한국, 인도에도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으나 외부적인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폴란드 내에서 유명해진 성 콜베 신부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그는 가난한 이들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에 거주토록 하면서, 이들을 보호하고 돕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1년 그가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나치는 유대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2월 17일 그를 체포하여 바르샤바의 파비악 형무소에 감금했다가 2월 28일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그는 저명한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매질과 고문과 처벌을 맏으면서도, 동료 수감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치는 한 명이 탈출하면 그 별로 열 명을 처형하였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 명의 처형자 중 한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성 콜베 신부는 자원하여 대신 죽겠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결국 성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혀 아사형을 받았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2주 이상을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한 그에게 나치는 결국 독극물을 주사하였고, 그는 1941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의 감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성 콜베 신부가 죽음을 맞이한 감방은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1948년 그에 대한 시복 절차가 시작되어 마침내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자비의 순교자'(Martyr of Charity)라는 칭호와 함께 그를 시성하였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가장 깊었고, 또 성모 마리아에게 매우 특별한 공경을 바친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강론   :   (마태 18,21-19,1)

 

<용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은

"무한정 용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용서'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용서하는 입장에서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고,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를 무한정 용서하시는 분인데,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 쪽에서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죄를 인정해야 하고, 고백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보속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마태 18,35).

 

그러나 그런 일들은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께서 용서하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은총이고, 은총은 조건이나 대가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에게 주신 기적의 빵 같은 무상급식입니다.

누구든지 그 빵을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자기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면서 그 빵을 거절한다면,

또는 그 빵 말고 다른 음식을 달라고 요구한다면,

또는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이 싫다고 한다면, 못 먹게 될 것입니다.

안 주셔서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안 먹어서 못 먹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보속하지 않는다면

이미 받은 용서의 은총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게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일본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사과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들이 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것은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피해 국가들이 용서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자신이 안 받는 것입니다.>

 

이제 용서를 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정 용서하시니까

우리도 이웃을 그렇게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은총을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웃을 용서하는 일은 상대방보다 내가 더 힘이 있을 때,

또는 최소한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힘이 없는 상태에서 힘이 있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리고 그 가해자가 회개하기는커녕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을 때,

단지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용서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죄와 악을 더 키우는 일이 됩니다.

 

지금 이 말은, 그런 경우에는 용서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용서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독재자가 국민을 탄압할 때,

그를 용서하는 것은 그가 회개한 다음에 할 일이고,

우선 먼저 할 일은 그를 권력에서 끌어내리는 일입니다.

어떤 범죄자가 악행을 저지를 때, 우선 먼저 그 범죄부터 막아야 하고,

(혼자 힘으로 안 된다면 여럿이 함께, 아니면 사법제도를 통해서...)

그 다음에 그가 회개하거나 회개할 가능성이 있을 때 용서를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그가 더 큰 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이고,

궁극적으로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용서란 '악을 막기 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르침도 주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만일에 용서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더 악해진다면,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준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에 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해자는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피해자는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죄의식을 느낀다면,

그것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해야 할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다면서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는 억울함과 죄의식 속에서 이중으로 고통을 겪는 것을

예수님께서 바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어떻든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 원칙인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복수하지는 말고...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로마 12,19).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