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 (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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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하는 교회가 세상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가운데 하느님의 영에 따라 천상 교회의 완전함을 모범으로 삼아 꿋꿋이 나아갈 수 있도록 간구합시다.”
매일미사의 초대 말씀입니다. 초대 말씀을 들으면서 갑자기 숨쉬기가 어려웠습니다. 한 문장 안에 묵상과 성찰을 필요로 하는 많은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순례, 교회, 순례하는 교회, 세상, 유혹, 세상의 유혹, 굴하지 않음, 하느님의 영, 천상 교회, 완전함, 모범…….
대단합니다. 너무도 많은 개념들이 나열되어 있어서 생각하기가 겁나고 마주 대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읽고 지나쳐 버립니다.
그리고 부정성을 전제하고 사용된 단어가 정말 부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또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단어를 감성의 언어로 바꿔 버려서 현 시대에서 수행해야 하는 직무와 삶의 상태에 대해서 무감하게 만듭니다. 적당히 포장된 언어, 사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언어, 조금 짜증납니다.
집중호우처럼 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말이 홍수처럼 쏟아져서 정신 차리기가 힘듭니다. 아니 정신을 가다듬지 않으면 말 속에서 의식을 잃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가 희망하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립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말이 자신의 말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동의를 넘어서 동화되는 것입니다. 타인이 내가 됩니다.
내가 사용하는 말은 자신의 것이어야 합니다. 타인의 의견은 수용하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타인의 의견 속에 내가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들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 또는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타인의 의견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자들의 생각은 아닙니다.
교회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가르침에 의문을 갖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실까?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은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이실까?
제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성경의 가르침과 삶의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된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을 저의 언어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느님에 대해서 고백할 때 느끼는 감정은 다른 이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교회 가르침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동의하지만 제가 느끼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개별적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의 하느님에 대한 고백은 교회의 보편성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편성은 획일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편성은 다양성을 전제로 합니다. 전체 안에 부분이 살아 있는 것이 보편성입니다. 개인이 사라진 전체, 그것은 독재에 불과합니다.
저는 제가 고백하는 하느님의 발자국을 따라서 걷습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예수의 발자취를 찾습니다.
제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찾고 내어 맡깁니다. 성령께 의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정의와 평화를 위한 연대를 선택하면서 듣게 되는 비난을 견뎌 냅니다.
월요일의 골프와 진한 술자리 초대를 거절하면서 조금은 외롭지만, 슬프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아니라 “너희(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주님께서 듣고 싶어 하시는 것은 제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의 언어로 고백되는 말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고백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분기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언어로 고백합니다. 그가 체험하고 만난 스승 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의 현존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맺고 여는 권한을 교회에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문이 되는 권한을 주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고백은 나의 고백입니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고백을 자신의 고백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혼동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늦은 밤, 높은 곳에 올라가 보십시오.
수많은 십자가가 보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랑, 평화, 정의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넘쳐나도 사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부정과 감춤이 사회를 유지하는 주된 기제가 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강이 죽고 사람이 죽어가도 경제 한마디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돈과 권력을 더 믿고, 타인의 고백에 얹혀서 자신의 입을 다무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교종께서 한국을 떠나시면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 힘을 믿으십시오.”
저는 교종의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고백이 너의 마음을 통해서 나온 너의 진실한 고백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위대한 힘이 너를 이끄실 것이다.”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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