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수색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온 몸을 휘감았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심장에 새깁니다.
그리고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군사주권을 포기하고, 한, 중 FTA에 합의한 대통령이라는 사람도 똑똑히 기억할 것입니다.
미쳐 가는 사회에서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기보다 미친 모습으로 사는 것이 더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프고 답답합니다. 그래서 살짝 미쳐 가는 방법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과분한 대우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제라는 한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넘치는 대접을 받습니다. 회의나 나눔, 모임 때 항상 중앙이나 상석에 앉습니다.
사제가 앉는 자리는 꽃으로 단장하고 그 자리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집니다. 제 부모님의 나이의 어르신들은 소박한 음식으로 만족하는데 사제랍시고 받는 음식은 넘치고 남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색함은 사라지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가슴 안에서부터 부끄러움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구석에 앉습니다.
본당에서 나눔을 하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어르신들이 드시는 모습을 살피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주시는 소주 한잔을 받아먹습니다.
빈속에 들어가는 알코올의 짜릿한 자극을 느끼는 순간 드시던 음식을 안주라고 하시며 입에 넣어 주십니다. 좋습니다. 넘치지 않아서 좋습니다. 적음의 풍요를 통해서 주어지는 행복을 체험합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잊지 않고 기억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간단한 질문입니다.
“왜, 사제가 되려고 했는가?”
예수께서 걸으셨던 발자국을 탐구하면서 발견한 길은 어떤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가 죽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걸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걷는 것이 미친 선택이 되어 버린 현실을 발견합니다. 생명의 온전성을 회복하는 길을 걷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 되어 버린 세상이 되었습니다.
생명을 살리자고 주장하면 빨갱이 혹은 좌파가 되어 버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고한 죽음의 이유를 밝히자고 주장하면 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타협을 요구합니다.
타협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타협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그리고 타협으로 얻고자 하는 결과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타협의 성격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타협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제로 산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평신도로서 사는 것은 쉬울까요. 제가 공동체에서 체험한 경험을 통해 느끼는 평신도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아니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마치 어떤 대단한 희생을 감내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게 사제로서의 삶은 희생이 아니라 부르심에 대한 자발적 선택입니다.
그래서 희생의 대가로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한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사제로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렵고 힘들다면 다른 길을 선택하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사람에게 주어진 탈렌트가 다릅니다.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나누어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각자가 수용할 수 있는 탈렌트의 크기를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의 능력에 맞는 그만큼만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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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8월 16일 꽃동네 사랑의 영성원에서 교황과 만나는 평신도 사도직단체협의회 대표들.ⓒ교황방한위원회 | ||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탈렌트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해서 더 많은 탈렌트를 벌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어라”는 주님의 말씀은 주인에게 받은 것을 잘 보관하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받은 것으로 주인의 뜻을 실현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땅에 묻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확대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탈렌트를 땅에 묻는 종의 모습을 봅니다. 그가 탈렌트를 땅에 묻는 이유는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종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인에게서 받은 탈렌트를 그대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돌아온 주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은 모진 분이어서 심지 않는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에서 거두시는 분이시다.”(마태 25,24 참조) 그는 두려웠습니다.
주인에게 받은 탈렌트를 잃을 것이 두려워서 탈렌트를 사용하지 않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혜로운 것 같지만 어리석습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종을 보면서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나서지 마라.’, ‘가만히 있어라.’ 그는 불충실한 종입니다.
저는 사제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순간부터 제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따라 걷다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신 성인의 이름(성 김대건 안드레아)을 제 이름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희생이라는 단어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보상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행동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면서 주인에게서 받은 탈렌트를 땅에 묻어 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 필요하고, 들어야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례 때 주어진 예언직, 사제직 그리고 왕직을 세상에 구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세례 때 하느님의 선물인 탈렌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탈렌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더 많은 탈렌트를 벌어서 주인에게 돌려 드려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평신도 주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평신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평신도 주일을 보내면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나를 고민하기를 희망합니다. 탈렌트를 부여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안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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