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12월 4일 나해 대림 제1주간 목요일(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사제 학자)

dariaofs 2014. 12. 4. 02:00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Joannes)은 그리스 교부로서는 마지막 인물로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레스 학풍을 개척한 분이며, 성 로마누스 작곡가(Romanus the Melodist)와 더불어 동방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아랍인들이 635년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마호메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의 치하에서 전 생애를 보냈지만, 성 테오도루스 스투디테스(Theodorus Studites, 11월 11일)와 더불어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성상 공경 논쟁이 가장 극심하던 시기에 끝까지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펼쳤던 위대한 교부이다.

성 요한은 그의 대표작인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에서 교회의 가르침 곧 하느님과 창조, 인간론,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성인 공경과 성화 공경, 구원론, 종말론을 100장에 걸쳐 다루었다. 이 저서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의 "신학대전"에 버금가는 역저로 동방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교육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때의 다마스쿠스는 아랍인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다. 성 요한의 가문은 몇 세대에 걸쳐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 관리였고, 이 직책은 세습제였다. 그래서 요한은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부친이 직접 그에게 교육을 시키고, 말 타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부친 외에 요한은 코스마(Cosmas)라 부르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코스마는 그에게 여러 학문을 가르쳤는데, 특히 신학을 강조했다. 장성한 요한은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여 국가의 관리가 되었다. 


그는 궁중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적 덕행, 특히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가 이토록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그의 스승 코스마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후임 칼리프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포기하자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고위 관직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직하고 코스마와 함께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 사바(Mar Saba)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분위기는 아직도 성상 공경 문제가 쟁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도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어쨌든 요한과 코스마는 책을 저술하거나 찬미가를 짓는 등의 일을 하면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장상과 다른 수도자들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게 처신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모님은 그의 스승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대의 제자에게 많은 책을 쓰고 또 아름다운 시를 쓰도록 허락하여라.” 이때부터 요한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성서와 교부 문헌 연구 및 저술 활동에 할애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다마스쿠스 거리로 나가 광주리를 팔았다고도 한다. 이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요한 5세는 그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코스마를 마유마의 주교로 축성하고, 성 요한은 사제로 서품하여 예루살렘으로 불렀다.

그런데 코스마 주교는 죽을 때까지 주교로서 양떼를 돌보았으나, 성 요한은 이내 수도원으로 되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다시금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이때부터 그의 저서는 도처에서 읽혀졌으나 반대자들의 질시 또한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시인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754년 12월 4일 고령으로 선종해서 마르 사바 수도원에 묻혔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0년 8월 19일 교령에서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강론   :   (마태 7,21.24-27)

 

<사랑>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이고,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계명들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가리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계명들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기 때문이고(마태 22,36-40),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예수님께서는 '믿음만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제대로 실천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한 '믿음만으로' 라는 말에서 '믿음'은 '실천 없는 믿음'을 가리키고,

'실천 없는 믿음'은 '말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믿음'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사실상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에 사랑은 실천하는데 믿음은 없다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되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버지의 나라'를 안 믿는 사람이고,

안 믿기 때문에 안 들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지 않으셔도 그 사람이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스스로 안 들어감으로써 못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24-25)."

 

이 말씀에서 '반석'은 '예수님의 보호'를 뜻합니다.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멸망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석'을 '사랑'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의 인생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고,

하느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6-27)."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천 없는 믿음(죽은 믿음)'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의 보호를 거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호를 받지 못하고,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집을 짓기에 적당한 반석을 찾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모래'를 '반석'으로 착각했든지 '모래'가 '반석'보다 더 좋다고 생각했든지 간에...

 

'모래'를 사랑 없는 인생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 나만 잘살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사랑 없이 사는 사람은)

비가 내리지 않아도, 강물이 밀려오지 않아도, 바람이 불지 않아도

언젠가는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사랑'은 '흐름'입니다.

'너'에게서 '나'에게로, 또 '나'에게서 '너'에게로 흐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도 하느님은, 또 이웃들은 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을 받기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음으로써 그 '흐름'이 막히게 되면,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사랑이 죽어버립니다.

내 안에서 사랑이 죽어 있으면

하느님과 이웃들이 아무리 많은 사랑을 주어도

그 사랑마저도 내 안에서 죽어버립니다.

아무리 많이 받아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 받기'만을 바라고 '사랑하기'는 싫어하는 이기심은 사랑과 상극입니다.

이기심은 자기에게로 사랑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또는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사랑의 흐름을 가로막는 벽과 같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사랑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처럼 능력이 없어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받기만 하는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다 '기쁨'으로 합니다.

 

갓난아기들은 어른들처럼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엄마들은 아기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아기가 엄마를 바라보면서 행복한 모습으로 방긋 웃기만 해도,

엄마들은 아기의 그 웃음만으로도 크게 기뻐하고 행복해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들에게 무슨 대단한 것을 바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은 위대한 성인 성녀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