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1월 20일 나해 연중 제2주간 화요일(성 파비아노 교황 순교자, 성 세바스티아노 순교자)

dariaofs 2015. 1. 20. 01:00

 

성 파비아노 교황 순교자

로마(Roma)의 평신도이던 성 파비아누스(Fabianus, 또는 파비아노)는 236년 1월 10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선거를 실시하는 동안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신자들은 그 모습이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났던 모습(마태 3,16)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교황 선출에 관한 하느님의 의지가 드러난 것이라 여겨 그 자리에서 안수를 통해 성 파비아누스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의 업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이단 문제로 인하여 누미디아(Numidia, 오늘날 북아프리카 지역의 고대 지명)의 람베시스(Lambaessis)의 주교인 프리바투스(Privatus)를 단죄하였고, 로마의 칼리스투스 카타콤바 내에 주교들을 위한 묘역을 건설하였다.

 

 데키우스 황제 치하의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성 파비아누스 교황도 이때 순교하였다. 교황의 시신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성 세바스티아누스 대성전으로 옮겨졌으며, 1915년에 그의 이름이 적힌 무덤이 발견되었다.

 

성 세바스티아노 순교자

프랑스 남부 나르본(Narbonne) 태생인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또는 세바스티아노)는 283년경에 로마에서 군인이 되었고, 성 마르첼리아누스(Marcellianus, 6월 18일)와 성 마르쿠스(Marcus, 6월 18일) 부제를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키도록 했던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는데, 그들 중에는 재판장인 성 니코스트라투스(Nicostratus, 7월 7일)가 있었고, 그의 아내 성녀 조아(Zoa, 7월 5일)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성녀 조아는 벙어리였으나 그의 기도로 완쾌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간수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7월 7일), 로마의 집정관 크로마티우스(Chromatius)와 그의 아들 티부르티우스(Tiburtius) 등이 있다.

그는 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친위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인줄 몰랐다고 한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신자임이 드러난 것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즉시 처형될 입장이 되었다.

 

그는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성 카스툴루스(Castulus, 3월 26일)의 미망인인 성녀 이레네(Irene)가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가서 보니 아직 살아있음을 보고 극진히 간호하여 회복시켰다. 그 후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황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잔인성을 고발하자 황제는 화가 나서 그를 몽둥이로 때려죽이도록 한 다음 로마의 하수구인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에 던져 버렸다. 그의 죽음과 용기는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한편 순교한 후에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로마에 사는 루치나(Lucina)라는 부인의 꿈에 나타나 하수구에서 자신의 시신을 찾아서 지금의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당이 있는 자리 근처의 지하 묘지에 매장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루치나 부인에 의해 아피아(Appia) 가도에 있는 지하묘지에 묻혔다. 그는 군인, 운동선수 그리고 궁술가의 수호성인이자 전염병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가 전염병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680년 로마에 페스트가 발병했을 때 로마인들이 페스트가 멈추기를 기원하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유해를 모시고 장엄한 행렬을 거행하자 그 뒤로 페스트가 사라졌다고 한다. 또 1575년에 밀라노(Milano), 1599년에는 리스본(Lisbon)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보호를 기원하는 예식이 거행되었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점차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전염병 희생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게 되었다.

 

강론   :   (마르 2,23-28)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서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2,1).

예수님께서도 다윗이 배가 고팠을 때 했던 행동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제자들의 배고픔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만일에 제자들의 배고픔을 생각하지 않고 안식일 율법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도 바리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제자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까?

(제자들이 안식일 율법을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도 율법을 잘 알고 있었겠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신 분입니다(마태 8,20).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에 관한 논쟁 바로 앞에

단식에 관한 논쟁이 있는데(마르 2,18-22),

아마도 예수님과 제자들은 따로 단식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내 제자들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킨다고 비난하기 전에,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보다 사람을 먼저 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 먼저인가?

음식을 주는 일이 먼저인가?

어떤 사람이 정말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노동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주일을 안 지킨다고 비난만 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그런 비난을 듣는 사람은 얼마나 서러울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마르 8,1-2)"

예수님은 다른 일보다도 먼저 군중의 '배고픔'을 걱정하셨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배고픔만' 걱정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는 의미심장합니다.

아마도 사흘 동안 군중은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가 고픈 상태로 돌아가면,

배고픔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쓰러지다.' 라는 말을 '믿음을 잃다.' 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프면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기적은 행하지 않으신 것일까?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전에

작은 기적이라도 행하셨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목숨이 위험할 때에 기적을 행하신 적은 있어도

당신과 제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적은 없습니다.

 

어떻든 바리사이들의 비난 속에는 이런 뜻도 들어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팠다고 해도 안식일이 지나갈 때까지 참을 수는 없었는가?"

("아무리 먹고 살기가 힘들어도 주일 하루 쉰다고 굶어죽겠냐?")

제자들의 배고픔이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것에 대해서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굶어보지 않은 사람은 굶주림의 고통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은 정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 말입니다.

흔히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사랑'은 '생각'만 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고통을 '함께' 겪어야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 쪽으로 내려오셔서 함께 살면서 우리의 처지를 함께 겪으신 분입니다.

(제자들만 배고팠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배고픈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말은 비난하는 쪽을 향해서 하는 말이고,

이제 비난을 듣는 쪽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함부로 남을 비난하면 안 되지만,

동시에 양심을 속이면서 자신의 행동을 자기 마음대로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남용하거나 악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일을 안 지키는 것과 못 지키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비난에 맞서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일은

'배고픈 사람들'을 변호해 주신 일이지

"안식일에는 일하지 마라." 라는 율법 자체를 폐지하신 일은 아닙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