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주변 (1)
유다교의 이해 김성 / 성서고고학자
서양의 삼대 유일신교 (Monotheism)
서양의 삼대 유일신교는 유다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이다. 이 세 종교는 모두가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지방의 광야에서 유래되었고, 또한 모세, 예수, 모하메드 등 세 종교의 창시자들도 모두가 셈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중에서 국내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전파되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고 그리스도교 제3의 종파인 정교회도 비록 소규모이지만 들어와 있다.
회교라고도 불리는 이슬람교는 7세기 말 중동에서 시작하여 북 아프리카, 동유럽, 중앙 아시아 및 동남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 전래되었으며 국내에서도 회교 사원이 설립되었고 최근의 동남 아시아 회교 국가에서 온 근로자들로 인해 알라신 숭배가 한국인들에게도 이제는 더 이상 낯선 광경이 아니다. 이에 비해서 서양의 삼대 유일신교들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유다교는 이스라엘이나 유다인 등의 개념에 비해서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종교다.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신약성서에서 언급하는 기존의 구태의연한 유다교와 반대되는 새로운 신앙형태로서의 초대 그리스도교를 중시하다 보니 자연히 유다교에 큰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실정이었다. 다행히 1970년대의 석유파동 당시 아랍 신유국의 압력으로 철수했던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지난 1992년 공식적으로 다시 문을 열고 활동을 함으로써 이제 국내에서도 절기 때마다 독특한 유다교 축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등 본격적으로 유다교가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유다교란 무엇인가?
유다교는 회당 예배에서의 기도와 찬양, 그리고 오경을 비롯한 경전 연구 등을 통하여 야훼를 믿고 섬기는 종교이다. 그리스도교와 가장 큰 차이점은 구약성서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점등이다. 유다교는 오늘날 이스라엘의 국교로서 자국내의 500만, 그리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1100만 등 모두 1600만의 신도를 거느린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했다.
하지만 유다교는 오직 유다인들에게만 적용되는 종교이기 때문에 비록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믿고 있는 종교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세계종교라기보다는 민족 종교로 분리될 수 있다. 즉 유다교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선교의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유다 교인이 되려면 먼저 유다인이 되어야 한다. 반대로 오늘날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갖기 위해서는 유다 교인이 되는 개종절차를 밟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폐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유다교를 우리는 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 해답은 바로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유다교는 그리스도교의 모체로서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예수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바오로 등은 모두가 엄밀한 의미에서 유다인인 동시에 유다교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유다교를 단순한 하나의 외래 종교로서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의 모체로서 또한 초대 그리스도교 주인공들의 종교로서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유다교를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제순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유다교가 어떻게 출발하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성서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유다교 형성사를 살펴보고, 둘째, 유다교의 신학적, 신앙적 행심인 경전과 다양한 유다교 문학을 소개한 다음, 마지막으로 오늘날 유다인들이 지내고 있는 안식일 등을 비롯한 다양한 절기와 의식, 그리고 축제를 이스라엘 현지에서의 체험적인 관점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유다교의 형성사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유다교도 그 이전의 특정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태동하고 발전하였다. 유다교에서는 그 기원을 전통적으로 모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역사적으로는 예루살렘의 성전 제사와는 별도로 지방이나 외국에서 회당 예배를 시작한 기원전 586년 이후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즉 유다교의 기원은 성전의 희생제사인가 아니면 회당의 예배인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다교의 발전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함께 시작되어,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전정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유다교의 경전과 문학
오늘날 유다교의 경전은 오경을 비롯한 구약성서이지만 이에 못지 않은 미시나(Mishna) , 탈무드(Talmud) 등의 매우 다양한 종교적인 문학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다교의 전통적인 경전은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야훼로부터 전수받았다는 토라, 즉 오경과 기록되어 전해진 성문토라, 즉 미쉬나와 탈무드 등을 크게 양분된다. 유다교에서는 절대적인 야훼 하느님의 말씀인 오경의 613개의 율법을 중시하는 반면 현실적인 삶 속에서 새로운 상황적인 신앙과 윤리가 반영되는 알라캉도 매우 중요한 유다교인들의 삶의 규범으로 꼽힌다.
유다교의 절기와 축제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한 주간의 절일 주기는 곧 구약성서 창세기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육일 동안의 창조작업이 마무리된 후 칠일째 쉬는 안식일에서 유래되었다. 봄철의 밀, 보리 등의 추수와 연관된 유월절과 가을의 올리브, 포도 등의 과일 수확과 관련된 초막절 등은 야훼의 구원의 상징인 출애굽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에스델의 용기로 민족 말살의 위기를 극복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부림절(Purim), 마카베오혁명의 결과 예루살렘 성전의 정화를 기념하는 하누카(Hanuka)등 오늘날에도 유다교의 종교적인 절기는 모두가 철저하게 음력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국경 기념일 중에서 독립기념일과 현충일을 제외한 모든 국경일이 바로 성서에서부터 근거한 종교적인 절기와 축제라는 점에서 수천 년 동안 보전된 유다교 절기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성서 주변 (2)
유다교의 형성사
유다교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기원전 2000년경의 아브라함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4000년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아야만 한다. 이 중에서도 기원전 13세기에 발생한 것으로 여겨지는 호렙산에서의 야훼의 나타나심과 시나이산에서의 십계명 전수 사건 등은 야훼교의 구체적인 출발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기원전 950년경 완공된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은 야훼교를 이스라엘의 국가 종교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586년 야훼교의 중심지였던 성전이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파괴되면서 야훼교는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도 야훼를 섬길 수 있는 새로운 민중신앙 운동이 시작된 것을 우리는 유다교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이 유다교의 기원도 바로 전 단계의 종교였던 야훼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야훼교란 무엇인가?
야훼교는 문자 그대로 야훼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인데 일반적으로 ‘구약의 종교’, ‘히브리종교’ 또는 ‘이스라엘의 종교’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종교학계에서는 신의 이름에 기준 하여 야훼를 섬기는 종교, 즉 야훼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추세이다. 야훼는 구약성서에서 태초부터 존재하는 창조자로 나타나고(창세 2,4) 오늘날의 유다교에서도 아브라함부터 그 종교적 전승을 찾고 있지만 야훼가 명령한 율법들이 구체적으로 집대성되는 모세의 십계명 사건을 그 기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집트의 한 감독간을 살해한 협의로 망명생활을 하던 모세는 시나이산으로 동일시되기도 하는 호렙산에서 야훼와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불붙는 떨기 속에서 나타난 한 신(엘로힘)은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라고 말씀하시고(출애3,14), 모세에가 자신의 이름이 ‘야훼’임을 밝히셨다(출애 3,15). 많은 언어학자들은 야훼라는 이름이 히브리어의 ‘하야(be)’ 동사의 미래형인 ‘이히예’, 즉 ‘있을 것이다.’에서 유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신의 이름은 이미 가나안의 종교에서 없어진 재물이나 건강의 축복을 기원하는 ‘있게 하소서.’ 라는 동사의 미래적 기원형을 사용하는 기도의 한 구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야훼교의 발전과 쇠퇴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자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광야시대의 야훼교
모세 시대로부터 비롯된 야훼교는 40년간 광야의 유랑생활을 통하여 당시 고대 근동의 다른 정착된 종교들과는 달리 유목민의 종교로서 유지되었다. 따라서 야훼는 항상 이동이 가능하도록 손잡이가 달린 증거 궤로 상징되었고,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이 새겨진 증거 판과 아론의 지팡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이스라엘 주변의 광야에서 자상 하는 아카시아나무로 만든 가마 크기의 증거 궤는 일종이 임시 성소인 성막에 안치되었고 성막에는 분향단과 젯상, 일복 가지 촛대 등이 갖추어졌다.
성막 뜰에는 제단이 있어서 여러 종류의 희생 제사를 드리도록 되었는데 제단 자체도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양쪽에 두 개가 채(손잡이)가 붙어 있었다(출애 38,7). 이 시대는 야훼교의 형성기로 야훼가 명령한 모든 율법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에서 전수되는 단계였다.
2. 가나안 정착시대의 야훼교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평지에서 요르단강을 건너 예리고를 점령한 떄부터 야훼교의 중심지는 성막의 형태로 길갈(여호 4,19-24), 에발산(여호 8,30-35), 실로(1사무 1,3) 등 여러곳으로 이동되었다. 특히 ‘야훼의 성전’(1사무 1,9)이 있어서 절기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곤 하였다. 기원전 1050년경 불레셋과 에벤에젤 전투에서 실로에 있던 야훼의 언약 궤가 적에게 빼앗기고(1사무 4,11), 야훼의 사제인 엘리가 죽게되며(1사무 4,18), 실로에 있던 야훼의 성전마저도 파괴됨으로써 야훼교는 일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7개월만에 언약 궤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오고(1사무 6,1) 기원전 1000년경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윗이 하느님의 궤를 새로운 수도 예루살렘으로 가져옴으로써 야훼교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2사무 6,1-15). 이 시기는 야훼가 일찍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가나안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군사적 정복과 평화적 정착이 공존하던 시대로 향상 이동하던 광야시대의 성막이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보여준다.
3. 성전시대의 야훼교
야훼교는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설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고대 근동의 신전들은 대부분 도시의 수호신을 위해 건설되었으며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신전이 유지될 수 있었다. 솔로몬의 성전 자리는 유다인들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희생 제사로 바치려 했던 모리야산인 동시에 예루살렘의 원주민 여부스 민족의 제의 장소였다.
페니키아 기술자들의 설계와 시공으로 건설된 성전은 현관, 성소, 지성소 등 세 구조로 구성되었다. 화려한 솔로몬의 성전에 기반을 둔 야훼교는 그가 죽은 후 나누어진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방종교가 공식적으로 성행되면서, 또한 주변 가나안의 여러 종류의 매력적인 풍요의 신들 때문에 위기를 맞고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기원전 850년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가 450명이나 있는 반면 자신이 유일하게 생존한 야훼의 예언자임을 호소하고 있다(1열왕 18,22).
기원전 721년 사마리아가 아시리아에게 함락 당한 후 야훼교는 지속되는 다윗 왕조와 함께 남왕국 유다를 중심으로 안정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위기마다 야훼 신앙을 부르짖었던 예언자들의 선포 덕분에 야훼교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4. 성전의 파괴와 야훼교의 위기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어 더 이상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가 불가능하게 되면서 야훼교는 외면적으로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위대한 종교적 경전들이 그러했듯이 야훼교의 중심 경전인 오경도 성전 파괴 후 포로로 끌려갔던 이방 도시 바빌론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정리되고 편집되기 시작하였다. 야훼교가 더 이상 성전 제사를 드릴 수 없어서 그 명맥이 끊어진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유다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바빌론에 잡혀간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어떠한 형태로든 안식일을 비롯한 그들의 종교적 절기를 지키는 관습이 생겨났을 것이다. 따라서 가축을 잡아서 성전 제단에 바치는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당시까지 보전된 종교적 관습을 유지한 것이 유다교의 특징적인 예배의 기원이 된 것이다. 기원전 515년, 즈루빠뻴에 의해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지리적으로 절기마다 성전 순례를 할 수 없었던 디아스포라 유다인 공동체는 회당(시나고가)을 중심으로 안식일마다 종교적인 모임을 갖게 되었다.
성서 주변 (3)
디아스포라와 유다교의 형성
야훼교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내부에서 비롯되었다면 유다교는 외국의 유다인 공동체 디아스포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디아스포라(diaspora)는 히브리어로 유배라는 의미를 지닌 ‘갈롯트’의 그리스번역으로서 ‘흩어짐’ 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다윗 이후 이스라엘의 3천년 동안 자의든 타의든 간에 본국을 떠나서 외국에서 거주했던 모든 유다인 공동체를 일컫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이 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점령지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군사 고문단과 그에 따른 부속 공동체가 외국에 형성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솔로몬 시대에 와서는 평화적인 관점의 무역 공동체가 이스라엘 국외의 상업 거점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솔로몬이 죽은 후 이집트의 시삭 왕이 기원전 920년경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해 갔는데(1열왕 14,25-26), 이때 어떤 형태로든지 이스라엘 민족의 일부가 이집트에 포로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고대 근동이 역사 기록과 성서 자료에 의거한 이스라엘 민족의 해외 유배는 기원전 730년경 아시라아가 무자비한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의 영토 확장을 시도하면서 전쟁 포로들의 강제 이주를 통해서 시작되었다. 유다인들의 바빌로니아, 그리고 이집트의 디아스포라로 구분된다.
아시리아의 디아스포라
기원전 731년경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은 반역하던 이스라엘 북부 지역에 쳐들어와서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그 거주민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다(2열왕 15,29). 기원전 724년 아시리아의 샬마네셀 5세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721년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는 점령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하볼강 유역의 할라와 고잔, 그리고 메대의 여러 지역에 강제로 이주시겼다(2열왕 17,6). 또한 아시리아 왕은 바빌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등 아시리아 전역에 걸쳐서 각 지방 주민들을 사마리아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각 도시에 강제로 이주시켰다(2열왕 17,24).
아시리아의 이러한 대량이주와 이에 따른 혼혈정책은 점령지의 고유한 민족성을 혼합시키고 나아가 종교를 말살시켜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는 잔인한 식민정책이었다. 따라서 야훼를 섬기는 종교적 운동이 메소포타미아에 끌려간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지속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운 유배지의 관습을 따라야 했고 이스라엘에서도 새로 유입된 이방 종교가 성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위 ‘사마리아 사람’이라 일컫는 혼혈 유다인들의 공동체는 바로 이때부터 유래하였고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유다인들이 멸시했던 천민 집단으로 전략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디아스포라
기원전 597년 3월,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예루살렘을 포위, 점령하고 당시 왕이었던 여호야킴을 폐위시키고 그의아들 여호야긴을 왕예 임명하였다. 하지만 여호야긴도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반란을 일으켰고 바빌로니아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만7천여 명의 유다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2열왕 24,14-16). 당시 끌려갔던 포로들은 여호야긴과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왕족과 귀족, 고위 관리, 군인뿐만 아니라 은장이와 대장장이등 당시 예루살렘의 중요 계층의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또한 바빌로니아 군대는 예루살렘 궁전과 야훼의 신전에 있는 귀금속들을 모두 빼앗아 갔다. 바빌로니아 왕은 여호야긴 대신 그의 삼촌인 시드키야를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시드키야도 이집트 세력만 믿고서 바빌로니아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은 기원전 588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하였고 1년 6개월이 지난 기원전 586년 4월 9일에 드디어 성벽이 뚫리게 되었다(2열왕 25,1-4).
유다 왕이 호위병가 함께 성을 탈출하여 도망갔지만 바빌로니아의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예리고 들판에서 사로잡고 시리아의 기블라에 있는 느부갓네살에게로 끌고 갔다. 그해 5월 7일에는 야훼의 성전과 왕궁이 불에 탔고 성벽도 무너져서 예루살렘은 기원전 1000년경 다윗 왕이 요새로 만든 후 415년만에 페허가 되었다. 특히 성전을 파괴한 날은 아브달 9일로서 나중에 ‘티샤 베아브’라 불리는 애도의 절기로 정착되어서 온 이스라엘 민족이 금식하는 날로 선포되었고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기원전 586-585년 느부갓네살은 게달리야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파괴된 예루살롐 대신 북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미스바를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함락될 떄 도피했던 민족주의자들의 우두머리인 이스마엘은 게달리야를 죽이고 암몬땅으로 도망쳤다(예레 41,15).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하는 요하난 일파는 비록 그들이 게달리야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바비로니아의 후환이 두려워서 예레미야를 강제로 끌고 이집트로 망명하였다(예레 34,4-7).
이들은 주로 이집트 북부 지역인 믹돌, 다흐반헤스, 멤피스, 바드롯 등지에 정착하였다(예레 44,1). 특히 이집트의 디아스포라는 지난 19세기초부터 엘레판틴 섬 유적지에서 출토되기 시작한 아람어로 기록된 파피루스를 통해서 그들의 생활상이 자세하게 알려졌다.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시대(기원전 525-404년)에 그들은 남쪽 경계인 엘레판틴 섬을 요새화하였고 외국의 용병들로 수비대를 구성하였는데 이 주에는 유다인들이 다수 포함되었고 야훼 성전까지 건설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바빌로니아 토라
비록 예레미야 같은 지도자가 이집트로 망명 갔지만 이스라엘 구심점은 자연히 왕족을 비롯한 유다의 지도층과 기술자들이 끌려간 바빌론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바빌론은 당시 세계 문명의 중심도시로서 느부갓네살의 위대한 건축 사업으로 바벨탑으로 오인되기도 하는 지구라트와 아름다운 타일 그림들로 장식한 거대한 규모의 이쉬타르 성문, 그리고 고대 세계의 칠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공중 정원(hanging gardens)이 있는 국제적인 대도시였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인 악질마르둑은 기원전 562년 자신의 왕위 즉위 기념으로 여호야긴을 포로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그는 바빌론 왕궁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2열왕 25,27-30).
이후부터 바빌론의 유다인들은 비교적 자유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당대 최고를 자랑하는 바빌론의 학문과 종교에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자기 민족의 고전 발굴과 정리와 편찬 작업등을 추진하게 되었다. 기원전 500년에 집대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라는 오늘날 구약성서의 첫 다섯 권의 책인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이며 모두 613종류의 율법으로 최종 편집되었다. 따라서 바빌론의 유다인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토라에 근거한 성전 제사가 없어도 야훼를 섬길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야훼교인 유다교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서 주변 (4)
성전재건과 페르시아 시대의 유다교
페리세폴리스(persepolis):오늘날 이란에 있는 페르세폴리스는 그리스어로 ‘페르시아 도시’ 라는 의미이며 BC 515년경 다리우스 1세에 의해 건설되었으나 BC 330년 알렉산더에 의해 폐허로 변했고 1930년부터 발굴과 복원작업으로 잘 가꾸어진 유적지로 변모되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539-332)는 유다교가 형성되는 결정적인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된 상태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는 바빌론 유배를 겪으면서 그곳에서 알게된 당대 최고 수준의 철학과 종교의 영향을 받게 된다. 페르시아 시대의 유다교는 황제의 공식적인 칙령과 함께 포로들의 귀향으로 새로운 전기를 찾게 되었고, 이어서 성전의 재건, 토라(율법)의 재발견, 예루살렘 도시의 요새화 그리고 나아가 유다 민족 협동의 순수성 보전 등 거국적이고도 구체적인 사업화로 이어진다.
사려 깊은 신학자였던 에즈라와 능력있는 통치자였던 느혜미야의 주도적 역할로 이루어진 이러한 일련의 과업은 어쩌면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건국과 발전에 견줄 만하며, 야훼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는 이상아래서 당시 상황에 적절하게 취했던 현실적인 프로젝트였다고 볼 수 있다.
1. 고레스의 칙령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누구든지 우너하느너 자는 돌아가라.”(2역대 36,23) 기원전 539년 바빌론에 입성한 페르시아이 황제 고레스는 바빌로니아에 의해 포로가 된 모든 이방 민족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특별 사면을 선포하였다. 유다 민족도 47년간(기원전 586-539)의 바빌론 유배 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향하였다.
고대 근동에서는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억울한 포로들을 풀어주고 부채탕감 등을 선포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물며 바빌론 시민들까지도 환영했던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전왕의 치하에서 고생하던 이방 민족들을 해방시켜 주는 일은 당연한 의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특별히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고레스는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훼의 위대한 구원자로 여겨졌다.
따라서 당시 활동했던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왕이나 예언자들처럼 고레스도 야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이사 45,1). 1876년 바빌론 발굴 때 발견되어 현재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위 ‘고레스의 칙령’이라 불리는 한 원통형 토판 문서에는 비록 유다 민족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이방 신상들을 제자리로 돌려주고 잡혀 왔던 거주민들도 귀향시키라는 고레스의 칙령이 기록되어 있다.
고레스 실린더(Cyrus Cylinder) : 바빌론을 정복한 후 바빌로니아 치하에 있던 이방민족들의 신상과 신전들을 복원할 것과 강제로 끌려왔던 사람들을 귀한 시킬 것을 명령한 고레스 왕의 업적을 새긴 원통형 점토 판이다. 1876년 바빌론 왕궁 터에서 발굴되어 런던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즈루빠벨과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유다의 귀향 민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세의 법에 적혀 있는 대로’ 우선 제단을 만들었다(에즈 3,2). 기원전 538년 2월에는 성전을 다시 건설하기 위한 기공식도 거행하였다(에즈 3,8). 하지만 아시리아릐 에살하똔(기원전 680-669) 침공시 대량 이주 및 혼혈 정책에 의해 피가 섞인 북쪽의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전 공사에 참여하고자 하는등 방해가 있어서 성전 공사는 한동안 지연되었다.
다리우스 제2년 (기원전 519년)에 즈루빠벨과 여호수아는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야의 권고로 성전 공사를 재개하였고 ‘강(유프라테스) 건너편’ 주(州)의 총독 다뜨내가 직접 예루살렘에 와서 보고는 페르시아의 황제에게 진정서를 올렸다. 이 진정서에 포함된 유다인들의 청탁대로 메대의 아흐므다의 문서 보관 서에서 고레스 칙령을 발견하였는데, 이 칙령에서 다리우스 황제는 유다인들의 성전 건축을 위해서 ‘강(유프라테스)건너편, 주(州)의 세금으로 건설 비용을 충당하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또한 이 문서에 나타난 구체적인 성전 설계도에 의하면 성전의 높이가 60자(큐빗), 폭이 60자(큐빗)로서 솔로몬 시대에 지어진 성전보다 더 큰 규모의 것이었다. 드디어ㅓ 다리우스 제6년 (기원전 515년) 아달월 제3일에 성전이 준공됨으로써(에즈 6,15) 제2성전 시대가 시작되었다.
3. 느헤미야 총독의 예루살렘 축성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이 성벽은 아르닥사싸 제20년인 기원전 445년경까지도 ‘성벽은 무너진 채요, 성문들은 불에 탄 채’ 그냥 있었다(느헤 1,3). 페르시아 왕국에서 왕의 술잔 관리관이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임명받고 그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문과 성벽을 축성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느헤미야의 축성 작업에 반대하여 사마리아의 산발랏, 암몬의 토비야 그리고 ㅋ케다르의 게셈 등이 예루살렘에 몰려와서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도장들과 파피루스문서 등을 통하여 이들은 모두가 지방 총독들로 밝혀졌다. 그들이 페르시아이 아르닥사싸 왕에게 올린 진정서에 의하면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의 성벽을 쌓고 있으며 성이 완성되면 페르시아에게 바치던 조공과 세금도 바치지 않아서 반역을 하게 되며 나아가 거대한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을 모두 잃게 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에즈 4,11-16). 다시 말해서 자기들과 같은 위상에 있는 유다가 수도인 예루살렘을 요새화 하는 것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고대 근동의 관례상 식민지의 한 도시에서 파괴된 성벽을 재건한다는 것 자체가 곧 반란행위이기 때문에 주변의 도시들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러한 외부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드디어 공사를 시작한 지 52일 만인 기원전 445년 엘룰월에 성벽을 준공하였다(느헤 6,15).
고고학적 발굴 결과 느헤미야의 예루살렘은 전통적인 남동쪽의 비탈인 다윗성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에즈라의 종교개혁
에즈라의 종교개혁의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토라(율법)의 재발견, 이에 따른 유다교의 절기 준수 그리고 이방민족과의 통혼 금지 등을 들 수 있다. 기원전 445년경 칠월 (티쉬리) 초하루에 에즈라는 예루살렘의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에게 토라(모세의 법전)를 낭독한 다음 백성들이 알아듣고 깨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법전을 읽으며 풀이하여 주었다(느헤 8,1-8). 당시 에즈라가 낭독한 토라가 오경전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에 오경의 최종 편집이 완성되었으리라 추정된다. 특히 토라에는 성전 의식 중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각종 제사 규칙이 나와 있으며 사회적인 질서 유지에 필요한 민법과 상법, 형법 외에도 종교절기를 어떻게 지키는지에 관해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다.
그들은 토라에서 명하는 대로 정월(니산) 제 14일에 과월절을 지켰고 이어서 칠일 동안 과월절을 지켰다(에즈 6,19-22). 또한 에즈라의 명령에 의해 칠월(티쉬리) 초하루를 거룩한 날(설날)로 지키게 하였고, 같은 달 제14일부터 칠일 동안의 초막절과 팔일째 되는 날 폐회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느헤 8,15-18). 당시 유다의 지도자 중에서도 이방 민족의 여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맞는 풍습이 만연했던 것 같다. 즈루빠벨과 함께 성전 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여호수아도 포함되었는데 이에 분노한 에즈라는 이방 여자들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출생한 모든 자식들까지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다(에즈 10,10-11).
성서 주변 (5)
그리스 시대의 유다교
페르시아 제국의 비교적 관대한 식민지 정책에 많은 혜택을 본 유다교는 예수살렘의 야훼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를 지내며 정통성을 유지하는 한편 메소포타미아의 바실론, 이집트의 엘레판틴, 그리고 사마리아 등의 성전 또는 회당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종교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332년 2월 체니키아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 띠로(Tyre)가 알렉산더에 의해 점령당함으로써 팔레스티나 지역은 역사상 처음으로 지중해 건너편 서양 문명의 원류의 그리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Pompeius)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까지 약 270년간 유다교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기원전 167년부터 시작된 마카베오 혁명은 다윗 왕조와 견줄 만한 유다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등 유다교 발전예 일대 획으르 드ams 중대한 사건이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야훼교 전통과 지방 마을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유다교, 기타 오늘날의 수도원적인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 그리고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려는 민족운동등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종교적으로 가장 복잡한 양상을 보인 시대가 바로 그리스 시대였다.
알렉산더와 헬레니즘의 영향
알렉산더(기원전 356-323)는 오늘날 그리스의 북부 지역인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태어나 22세에 왕위에 오른 후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12년 동안 대규모 전쟁을 치렀다. 알렉산더의 침공은 당시 세계 문명의 주도권이 동양(페르시아)에서 서양(그리스)으로 넘어가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이스라엘도 펠레니즘이라는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인 펠라에서 필립보2세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산더는 22세 되던 해인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Darius)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기나긴 군사 원정을 감행하였다. 소아시아를 평정한 그는 다음해 11월 시리아로 이어지는 해안의 좁은 길목인 이소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패배한 다리우스는 겨우 목숨만 유지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서두르지 않고 예로부터 신비와 지혜의 보고로 알려졌던 이집트로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도중에 그는 레바논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천혜의 섬에 있는 해상 요새 띠로를 7개월간의 고전 끝에 점령하였고 이어서 두 달 후에는 가자를 점령함으로써 팔레스티나는 자연스럽게 그리스 식민지로 귀속되었다. 그 결과 유사이래 처음으로 이스라엘 지역의 주권은 아시아가 아닌 지중해 건너 그리스의 통치권에 놓이게 되면서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문명이 유입되었다.
또한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에도 정복자의 이름을 딴 새로운 헬라적 도시인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어 새로운 가치관의 이민자들로 붐볐는데 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유다인 공동체였다.
알렉산드리아 유다교와 칠십인역(Septuaginta)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이집트의 새로운 수도로 건설되었다. 나일 삼각주 지역의 여러 곳에 이미 정착해 있던 유다인들과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들은 함께 새로운 이방 도시에서 그들만의 집단 주거지를 형성하였다. 이 도시의 유다인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어를 사용하였고 매주 안식일마다 그들의 가장 귀중한 말씀인 토라를 그리스어로 낭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지 구약성서의 토라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알렉산드라에는 당대 최고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으며 당시 알려진 모든 민족의 책과 여러 종교이 경전을 수집하고 번역하는 작업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우리는 ‘아리스테아스(Aristeaas)의 편지’라는 기원전 100년경의 기록을 통하여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가 유다 민족의 경전인 토라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지파에서 6명씩 차출된 72명의 유다인 사제들은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등대가 위치한 파로스(Pharos) 섬에 있는 왕궁의 별장에서 72일에 걸쳐 번역을 끝마쳤다고 한다. 이 칠십인역 덕분에 외국에 살면서 히브리어를 읽을 줄 모르는 많은 유다인이 그리스어 성서를 통하여 그들의 종교를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칠십인역 성서 (시나이 사본) : 이스라엘의 한 지파에서 6명씩 모두 72명의 사제들이 알렉산드리아의 왕궁 별장에서 72일 동안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 최초의 외국어 성서이다. 칠십인역을 통하여 유다 교는 지중 해변의 대도시들에 정착한 유다인 디아스포라의 회당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마카베오 혁명과 정통파 유다교이 등장
기원전 175년에 왕위에 오른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이 성전 제사를 금지시키는 것을 비롯하여 유상이래 가장 잔인한 유다교 탄압정책을 실시하였다. 모데인 마을의 마따디아 일가는 이러한 그리스의 폭정에 항거하여 자신의 다섯 아들과 이에 동조하는 군사를 이끌고 중앙 산악지대를 무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마카베오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는 반란군의 장관으로서 그리스군에 대항하여 눈부신 승리를 거듭하였으며 마침내 기원전 164년 9월 25일예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새로운 희생제물을 바쳤다(1마카 4,52). 따라서 유다인들은 해마다 기슬레우월 25일부터 8일동안 하누카라 불리는 성전 제단의 봉헌 축제를 성대하게 거행하고 있다. 이 때부터 기원전 37년 헤로데가 로마 제국의 후광으로 왕이 될 때까지 13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은 다시금 독립국가로서의 막강한 지위를 누렸으며 제2의 다윗 시대로까지 불리기도 하였다.
하스몬 왕조와 유다교의 분파주의
마카베오 혁명의 주인공들이 헤브론 근처의 하스몬(Hashmon) 마을 출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하스몬 왕조라 부른다. 자치 정부를 이루고 특히 스스로 동전을 주조할 만큼의 경제력을 확립한 하스몬 왕조의 대표적인 왕들은 예호한난, 예후다, 알렉산더 야나이, 마따디아 안티고노스 등이다. 하지만 이들의 독재적인 정권욕 때문에 유다 사회는 여러 갈래의 파벌로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예루살렘 정권과 성전의 대사제직까지 차지하게 되자 이에 반발한 사제들은 사해 근처의 쿰란을 중심으로 에세네파를 형성하였다.
또한 요한 히르키누스왕 시대 (기원전 135-104)에는 부활과 운명론을 부정하던 사두가이파가 형성되었고 이와 반대되는 사상을 지닌 바리사이파도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
또한 제4의 종파라 불리는 열혈당원들은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다윗 왕조의 복권을 비롯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려는 민족 운동가들이었다. 따라서 비록 유다인들에 의한 독립을 쟁취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주도권과 사상적 갈등으로 기원전 70년 성전이 로마 군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유다교는 여러 갈래의 복잡한 종교관을 지닌 분파주의로 일관되었다.
성서 주변 (6)
신약 시대의 유다교
유다교 4000년 역사에 있어서 유일신론, 우상 숭배 금지 등 종교적으로 가장 철저했던 시긱 바로 기원전 165년의 마카베오 혁명부터 기원 135년에 끝난 바르 코크바 반란까지 약 300년의 기간이다. 이 기간은 그리스, 로마 등의 대제국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도 100여년 동안 하스몬 왕조의 독립 국가를 유지하였고, 다윗 - 솔로몬왕에 견줄만한 헤로데 대왕의 여러 치적들,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다 전쟁(기원66-70), 바르 코크바 반란 등 실질적인 독립과 지배 세력에 대한 강력한 항쟁 등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이 시대에 주조된 동전들을 보더라도 다른 지역의 것들과는 달리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에 따라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새기지 않았음은 당시 얼마나 보수적인 종교관을 지녔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시대의 유다교는 신약성서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지만 그 내용이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어서 요세푸스 등과 같은 당시 유다인들의 기록들도 같이 참조해야만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헤로데 성전의 건설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은 하스몬 왕조의 후손인 미리암과 결혼함으로써 그들의 정통성을 이어받고자 하였으나 그의 정권의 기반이 전적으로 로마 황제의 후광 아래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비록 유다교로 개종은 했지만 이방 지역인 이두메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유다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는 우선 가이사리아에 대규모의 항구도시를 건설하여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고, 예루살렘에서는 기존의 조그만 성전을 헐고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의 도시 역사상 최대의 토목 공사로 불리는 성전 산 공사는 144,000 평방미터에 달하는 넓은 성전 뜰을 확보하기 위하여 북쪽에 솟아오른 언덕을 깎아내고 남쪽의 골짜기에는 거대한 돌들로 축대를 쌓았다. 또한 헤로데는 성전 근처에 커다란 바실리카 (공회당)를 짓고 의회와 귀족들의 사교 클럽으로 운영하였다. 솔로몬 시대 이후로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다교가 사치스럽게 발전했으며 사제들의 권력에 대한 맹종과 이의 부작용도 극치에 다다랐다. 따라서 이에 반대하는 바리사이파의 랍비들은 마을의 회당을 중심으로 오경의 연구와 가르침에 몰두하였고, 에세네파는 광야에 머무르며 그들만의 독특한 종말론적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힐 렐(Hi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
기원전 1세기 말, 즉 예수 탄생 직전인 헤로데 대왕의 통치 시절에 예루살렘에는 서로 상반된 가치관과 율법의 해석을 주도하는 두 개의 학파가 있었다. 원래 학문이란 것은 정치적 경제적 안정의 바탕 위에서 발전하게 되는데 당시 예루살렘은 웅장한 성전을 중심으로 유다교의 새로운 부흥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바빌로니아에서 학식을 쌓은 힐렐은 과월절에 대한 실용적인 해석을 통하여 바리사이파의 중심적인 학자로 부상하였으며, 비교적 합리적인 교육 방법으로 당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었고, 바오로 사도도 힐렐 학파의 자도자들 중의 하나였던 가믈리엘의 문하생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들 두 학파의 대립은 다음과 같은 이방인에 대한 토라(율법) 교육의 태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어느 날 한 이방인이 샴마이에게 찾아와서 자기가 한쪽 발로 서 있는 동안, 즉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토라 전체에 관해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어이가 없어진 샴마이는 어떻게 그 방대한 토라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며 화를 내면서 갖고 있던 회초리로 때리면서 내쫓았다.
그러자 그 이방인은 자연스럽게 반대파인 힐렐에게 찾아가게 되었고 그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하였다. 이에 힐렐은 “네게 해로운 것들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이 토라의 근본이고 나머지는 이에 대한 해설일 뿐이다.” 라고 말해주었다.
예수의 참신하면서 실용적인 율법해석은 어쩌면 이러한 힐렐파의 해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복음서의 유다교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과 그의 추종자들같이 광야에 거주하며 요르단강에서 세례 의식을 베풀며 임박한 종말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종파들을 비롯하여 위대한 민족적 지도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베드로와 같은 갈릴래아 출신이 열심당원들, 그리고 여전히 성전과 예루살렘 정권과 결탁한 사두가이파와 이에 반대하는 바리사이파 등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매우 다양한 사상의 집단들이 공존하고 있다.
예수의 율법 해석은 바리사이파이 것과 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당대의 저명한 랍비들만이 용감하게 제기할 수 있었던 “피쿠악흐 네페쉬” 즉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인간 생명의 존중” 사상이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의 율법은 십계명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지만 율법보다는 인간의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리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배고픈 자들은 밀 이삭을 따먹을 수 있고, 병든 자들은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해석들이다.
일종의 상황 윤리로 볼 수 있는 “피쿠악흐 네페쉬” 사상은 유다교가 발전하면서 “할라카”라는 이름으로 판례들을 통한 규범으로 자리잡았고, 오늘날 유다인 사회에서도 여전히 시대적 변천에 따른 새로운 상황에 대한 율법의 합리적이고도 인본주의적인 적용을 위한 예외로 자리잡고 있다.
유다 전쟁 (기원 66-70)
기원 66년 유다교 역사의 일대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기원전 1665년의 마카베오 혁명 이후 가속화한 유다교의 분파주의 속에서 성전을 옹호하는 사두가이파와 이에 반대하는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열심당원 들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또한 헤로데 대왕 이후 이방인들의 역할이 커지면서 가이사리아 등지에서 유다인과 충돌이 잦게 되었고 나아가 펠릭스(Felix)나 플로루스(Florus)같은 로마 총독들의 실정으로 대규모의 내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기원 66년 5월 플로루스 총독은 세금 징수가 목표에 미달되자 성전 금고에서 금 17탈란트를 유용하였고, 이에 격분한 유다 반란군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서 대제사장 아나니야와 로마 군인들을 살해하고 빚 문서가 들어 있던 문서 보관소를 불질러 버렸다. 당시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유다에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고, 네로의 죽음 이후 황제가 된 후 그의 아들 티투스는 기원 70년 5-9월에 걸친 치열한 전쟁 끝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을 불태웠다.
맛사다(Masada) : 주변보다 400여 미터나 우뚝 솟아 있으면서도 주위와는 고립된 맛사다는 천연적인 요새로서 헤로데가 본격적인 겨울 궁전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물 저장소, 성벽, 창고, 궁전 등을 건설하였다. 기원 73년 로마군의 실바 장군은 6개월에 걸쳐 경사로를 만들고 성을 함락시켰다. 맛사다를 지키던 960명이 멸심당원들이 집단 자살한 것이 알려지면서, 오늘날 이곳은 유다인들의 가장 처절한 애국 충정의 유적지가 되었다.
당시 유다 광야의 천연적 요새인 맛사다로 피신했던 960명의 열심당원들도 결국 기원 73년 5월 로마군의 공격 전날 밤에 비극적인 집단 자살로 막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성전의 파괴는 유다교의 새로운 장을 열게 하였고 성전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사두가이파들의 전통이 끊어진 대신에 특히 갈릴래아 지방의 회당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바리사이파가 유다교의 정통성을 이어받게 되었다.
성서 주변 (7)
미쉬나와 탈무드시대의 유다교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괴 사건 이후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두가이파와 로마군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열혈당원, 그리고 그들의 본거지인 쿰란이 로마 군에 의해 파괴되어서 흩어졌던 에세네파 등의 전통은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과 관계없이 유다와 갈릴래아 지방의 여러 마을의 회당들을 중심으로 토라(율법)를 연구하고 일반 민중을 가르쳐 왔던 바리사이파는 정권이 바뀌고 성전의 기능이 중지되어도 별 동요 없이 그들의 종교적 전통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 유다교 발전의 주인공은 토라를 읽고 가르친, 특히 어려운 구절마다 시의 적절하게 나름대로의 해설을 첨가해 왔던 바리사이파의 랍비들이었고 유다교는 성전중심의 제의적 종교에서 회당 중심의 교육적 종교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중요한 사건으로는 구약성서의 확정(서기 90), 바르 코크바 반란(서기 132-135), 미쉬나의 편찬(서기 200), 기독교 제국의 도래(서기 330), 탈무드이 편찬(서기 400-600), 아랍인의 점령(서기640)등을 들 수 있다.
야브네(얌니아)에서의 구약성서의 정경화(서기 90)
바리사이파 지도자였던 요한난 벤자카이는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함락 당하기 직전 관 속에 숨어 열혈당원들이 목숨을 걸고 사수하던 예루살렘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그는 성 밖에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찾아가 야브네 마을에서 지치적인 종교와 각문활도읭 보장을 간청하였고 사령관은 곧 이를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야브네는 유다인의 입법, 사법, 행정의 막강한 권한을 지닌 산헤드린(Sanhedrin)의 중심지가 되었다.
서기 90년 랍비들로 구성딘 산헤드린은 이곳에서 오경과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이 세 부분으로 구성된 39권의 구약성서를 최종 확정짓는다. 이 사건은 유다교 역사에 있어서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한 후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지식층이 바빌론에서 기존의 단편들을 모아 오경을 최종 편찬한 것과 견줄 만한 중대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바르 코크바(Bar Kochba) 반란(서기 132-135)
서기 130년 자신이 통치하던 중요한 식민지 중의 하나였던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던 로마 제국의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는 예루살렘을 본격적인 로마식 도시로 건설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미 골고타 자리와 서기 70년에 파괴된 성전 자리에 들어선 비너스와 주피터 신전에 대해 평소에 반감을 품고 있던 유다인들은 서기 132년 ‘별의 아들(바르코크바)’ 이라는 별명을 가진 시몬이란 사람의 지휘 아래 게릴라전으로 로마군을 격퇴하기 시작하였다.
유다 반란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3년 동안 독립된 정권을 유지하였으며 경제적 자치권의 상징인 동전도 찍어냈다. 바르 코크바 은전이라 불리는 4드라크마짜리 은전 앞면에는 성전의 전면이 새겨져있고 뒷면에는 초막절에 유다인들이 7일 동안 기도할 때 양손에 쥐고 흔드는 거룩한 네 가지 식물인 에트로그(레몬 종류), 룰라브(대추야자의 어린 가지). 하다씸(myrtle), 아라봇트(버드나무 가지) 등이 새겨져 있다.
바르 코크바(Bar Kochba) 은전 : ‘바르코크바’, 즉 ‘별의 아들’ 이라는 아람어 명칭은 서기 132-135년 사이의 유다인 혁명지도자였던 시몬의 별명이었다. 은전 앞면에는 헤로데 성전의 정면이 조각되어 있고 한가운데에는 오경 두루마리를 넣어두는 토라 벽장이 보인다. 은전의 가장자리에는 히브리어로 혁병 지도자의 이름 ‘시몬’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초막절에 유다인들이 기도하면서 흔드는 네 가지 거룩한 식물 중 두 가지인 룰라브(lulav)와 에트로그(Etrog) 주의로 히브리어로 ‘예루살렘의 해방을 위하여’ 라는 히브리어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르 코크바 반란은 로마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서기 135년 막을 내렸고, 많은 우다인들이 처형되거나 이후부터 예루살렘은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본격적인 로마식 도시로 탈바꿈하였고 더 이상 유다인들은 이 도시에 얼씬거리지 못했다. 다만 1년에 한 차례 아브달 제9일, 즉 성전 파괴 에도일에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헤로데 성전의 서쪽 축대 부분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나씨(최고 지도자) 유다와 미쉬나의 완성(서기 200년경)
산헤드린은 야브네에 있다가 북쪽의 갈릴래아 지방으로 이동하여 차례로 유샤, 베잇트 셰아림, 찌포리, 티베리아 등으로 옮겨갔다. 서기 200년경 산헤드린의 최고 지도자였던 유다는 유다교 경전 역사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일종의 랍비들의 관례를 모은 미쉬나를 찌포리에서 편찬하였다. 미쉬나는 산헤드린에서 이루러진 모든 재판에 관한 판례가 씨앗(농사), 절기, 여성(가정), 피해(형사 문제), 거룩함(성전과 예배), 정결 등의 여섯 분야에 걸쳐 체계적으로 집대성된 것이다.
미쉬나는 서기 1-2시게의 간결한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구약성서의 율법과 이에 대한 해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쉬나는 기원전 50-서기 200년 사이의 250여 년 동안에 행해진 150여명의 랍비들의 재판 기록 및 율법에 대한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쉬나가 일종의 법전이고 계속해서 일상 생활의 재판에서 적용되는 만큼 새로운 해석과 판례가 첨가되었으며 그 결과가 탈무드라는 집대성으로 나타났다.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론 탈무드(서기 400-600)
서기 313년 기독교에 관한 호의적인 칙령을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기 324년 팔레스타인 지방을 본격적인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다. 당시까지 주로 로마 및 주변의 이방 종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유다교의 전통을 나름대로 지켜올 수 있었던 유다인들은 막강한 제국의 후광 아래 진행되는 조직적인 기독교도들의 개종운동에 거의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유다인들은 교육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고 회당에서 미쉬나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법전의 각 구절에 대한 랍비들의 해설이 첨가된 단편이 팔레스타인에서 서기 400년경부터 ‘게마라(Gemara)’ 라는 이름으로 편집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을 탈무드의 기원으로 볼 수 있으며 바빌론의 것과 구분하여 팔레스타인, 또는 예루살렘 탈무드로 부른다.
한편 기독교 중심부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던 바빌론에서는 유다인 공동체가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종교적, 학문적 전통을 유지하면서 미쉬나에 대한 좀더 다양한 해설(게마라)을 첨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기 500년을 전후하여 아모라이파
(Amoraim)에 속하는 학자들의 게마라가 첨가되었고 세보라이파(Seboraim)와 게오니파(Geonim)가 그 전통을 차례로 이어받았다.
원래 5,9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바빌론은 탈무드 중 1/3은 법 조항의 적용과 해석을 다룬 할라카(Hlalkah)이고 나머지는 유다 민족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이야기, 예화, 전설 등을 모은 아가다(Aggadah)로 구성되어 있다. 후대의 유다인들은 본문으로서의 미쉬나와 이에 대한 해석인 게마라 그리고 기타 관련된 아가등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 타무드를 구전된 토라(oeal Torah)로 여기서 기록된 토라(written Torah)인 구약성서에 버금가는 경전으로 그 가치를 고양시켰다.
성서 주변 (8)
중 세 의 유 다 교
중세의 유다 교는 7세기 이후 이슬람교라는 새로운 종교적 환경에 도전을 받는 것으로 시작해서 11-12세기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그리스도 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세력 다툼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립해야만 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리스도 교 제국의 중심지인 유럽으로 진출하여 무역업을 통한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정착한 유다 인 공통체에서는 비교적 자유스러운 성서 해석을 주도했던 라쉬(Rashi)나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등의 대가들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한편 끊임없는 종교적 박해로 인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떠난 유다 인들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편승하여 중남미까지 이주하는 등 유다 교가 전세계에 퍼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카라이 전통(Karaism)과 랍비 전통
640년경 아랍인들이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게 되면서 유다 교에도 변천의 바람이 불어왔다. 기본의 탈무드 연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랍비 전통에 대항한 카라이 전통은 760년경 페르시아의 아난 벤 다비드(Anan ben David)에 의해 비롯되었다. 가라이파의 신봉자들은 자신들이 제2경전시대에 근거를 둔 랍비파와는 달리 제1성전시대로 그들 조상들의 뿌리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면서 구전 토라인 미쉬나와 탈무드를 부정하고 오경을 비롯한 기록된 토라인 구약 연구를 강조하였다.
또한 유다 교의 절기를 지키는 데 있어서도 랍비 전통과는 달리 새해 첫날에 쇼파르(뿔나팔)를 불지 않고, 초막 절에 네 가지 식물도 흔들지 않으며, 구약성서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하누카 절기도 지키지 않는다. 또한 기도할 때에도 여러 종류의 기도문을 암송했던 랍비파와는 달리 반드시 구약의 시편만을 낭독하였다. 나아가 카라이 전통은 시온의 회복을 강조하였고 이에 동조하는 많은 추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이민 와서 정착하였다.
그 결과 9-11세기 예루살렘의 유다 교는 ‘가시’라 불리는 랍비 전통보다는 ‘장미’로 불렀던 카라이 전통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7만여 명의 카라이 주의자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같은 집단 안에서만 서로 결혼하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십자가와 초승달 사이에서
중세의 유다 인들은 그리스도 교 제국의 북아프리카 및 중동이라는 거대한 두 세력 사이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1050년경부터 스페인에서는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인들의 ‘레콩키스타(Reconpuista)’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 와중에서 유다 인들은 수 백년 동안 정착했던 곳에서 추방당하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비교적 관대했던 이슬람 정권 하에서 번창했던 유다 교는 그리스도 교 당국으로부터 개종과 관련된 박해를 받게 되었고 많은 유다 인들이 북아프리카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1081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더 이상 유다 인들을 중요한 관직에 임명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고 그때까지 유다 인들의 막강한 재력과 이해관계에 있었던 유럽의 군주들은 더 이상 공공연하게 유다 인 공동체를 보호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095년부터 유럽에서 시작된 십자군 운동은 그 출발부터 성지로 가는 길에 위치한 많은 유다 인 공동체들이 박해를 받는 계기가 된다. 십자군 운동은 궁극적인 적대 세력이 예루살렘의 예수의 무덤을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 과정에서 수많은 유다 인들의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라쉬와 마이모니데스(람밤)
유럽에 정착한 유다 인들은 잘 발달된 내륙 수로와 강을 이용한 무역업에서 성공하면서 그리스도 교 제국내의 유일한 이방인 집단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주로 교회 도그마의 틀 안에서 성서를 연구했던 그리스도 교 전통과는 달리 유다 인들은 풍요로운 경재력 의 바탕 위에서 비교적 자유스러운 성서 연구를 주도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유다 교 학자들로는 라쉬와 마이모니데스(람밤)를 들 수 있다.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에서 라쉬(Rashi)라 불리던 솔로몬 벤 이삭(1040-1105)은 그리스도 교적 성서 해석에 대항하여 문자 적 주석과 의미적 해설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구약 주석을 시도하였다.
한편 스페인의 크르도바에서 태어난 모세 벤 마이몬(줄여서 람밤이라 부름)은 우럽 학계에서는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는 1168년에 아랍어로 미쉬나에 대한 해설서 를 편찬하는 등 탈무드시대 이래 가장 권위 있는 유다 교 학자로 손꼽힌다. 특히 마이모니데스의 저작 중에서도 ‘난처한 자의 안내자’ 는 이성에 입각한 중세 유다 교 철학자들이 어떻게 미신적 신앙의 요소가 등장하는 성서에 대처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불후의 명작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
중세 유다 인 공동체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렸던 동유럽 중심의 아슈케나짐과 스페인에서 추방되어 흩어졌던 스파라딤으로 크게 양분된다. 그리스도 교의 박해를 피한 일련의 유다 인들은 종교적으로 비교적 관대한 러시아 정교회 지역인 폴란드를 중심으로 공동체로 형성하였다.
북부 프랑스와 독일 지역을 일컫는 지명 ‘아슈케나즈(Ashkenz)’에서 유래한 아슈케나짐의 문화는 비록 폴란드에서 꽃을 피웠지만 유럽 전체에 걸쳐 정착한 유다 인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특히 아슈케나즈의 언어인 독일어와 히브리어를 합성하여 만든 이디쉬(Yiddish)어는 오늘날까지도 정통파 유다 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언어로 자리잡았다.
한편 스페인에서는 이슬람교도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는 레콩키스타 운동이 마무리되어 가면서 또 다른 이교도 집단인 유다 인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구체적인 이단 재판(Inpuisition)으로 이어졌고 많은 유다 인들이 개종과 죽음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나아가 1492년 3월 31일 스페인의 왕은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유다 인들을 추방하는 문서에 서명하였다.
유다 인들은 그리스도 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북아프리카나 중동의 오토만 제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나아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함께 중남미에까지 퍼지게 된다. 원래 히브리어로 스페인을 지칭하는 ‘스파라드(Sfarad)’에서 유래된 스파라딤은 유럽 출신의 아슈케나짐과 구분되며 그들만의 독특한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은 각각을 대표하는 최고의 랍비가 있는등 유다 인 구성원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성서 주변 (9)
근 대 의 유 다 교
1. 폴란드와 유다 교의 발전
아슈케나즈 유다 교는 14세기에는 유럽 중에서도 주로 독일어권에서 발전되다가 15세기 이후에는 독일의 랍비들이 대거 폴란드로 이주하면서 폴란드가 새로운 유다 교의 중심지로 부상하였고 16세기부터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6세기 폴란드의 전형적인 랍비는 유다 교 이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속세를 떠난 금욕적인 삶을 사는 종교인으로 자주 부각되곤 하였다.
당시 동유럽에서 일종의 유다 교 신학교인 예쉬바(Yeshiva)들이 모여 있는 중심 도시로는 프라하(Praha), 크라코프(Krakow), 포즈나니(Poznan), 루블린(Lublin)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탈리아에 정착한 스파라드 유다 교와 르네상스의 예술과 학문적 업적들이 폴란드의 유다 교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기 시작하였다. 스파라드 유다 인들이 발전된 인쇄술을 이용하여 할라카(halacah), 신비주의 등에 관한 책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베포 함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이 증대하였다. 특히 팔레스티나의 사페드(Safed)에서 카로(J.Caro)가 저술했고 1565년 베네치아에서 인쇄된 「슐칸 아륵크 Shul- chan Arukh」는 ‘차려진 식탁’ 이라는 의미로서 스파라드 유다 교의 체계적인 율법과 풍습의 집대성이며 당시 아슈케나즈 유다 교와 스파 라드 유다교의 사상적인 통일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2. 카발라(kabbalah) 신비주의
‘전통에 의한 전수’ 라는 의미의 ‘카발라’운동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서 12세기에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13세기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모세드 레온(Moses de Leon)이 [세페르하-조하르], 즉 ‘영광의 책’이라는 유다 교 철학서를 저술하면서 본격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카발라 운동은 유다 교를 이성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인간의 내면적인 성찰의 경험으로 깨달을 수 있는 신비의 종교로 승화시키기에 노력하였다. 드 레온은 인간과 신과의 일치를 강조하였고, 신의 창조사역의 역 가지 소산들(스피롯트)을 열거하면서 인간도 누구나 철저한 제의를 수행하여 계속적인 창조 행위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주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1492년 스페인의 유다인 추방 사건 이후 카발라 신비주의는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널리 퍼져 나가서 16세기에 들어와서는 모로코의 페스(Fes),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그리스의 실로니카(Salonika), 그리고 팔레스티나의 사페드(Safed) 등이 카발라 신비주의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3. 메시아 운동
15세기 말 스페인의 대규모 유다 인 추방은 유다 교에서의 종말론적인 메시아 운동을 야기 시켰으며 초기의 중심 인물들은 대부분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이었다. 16세기에 솔로몬 몰코(Solomon Molkho)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메시아 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1626년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난 샵타이 쯔비(Shabtai Zvi)였다. 그는 팔레스티나로 이주하여 예루살렘과 가자 등지에서 카발라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은 후 종말을 예고하면서 스스로 메시아임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는 집단의 세력이 워낙 커지자 오토만 당국은 그를 심문하기에 이르렀고 예상과는 달리 그는 결국 많은 제자들과 함께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말았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와서 우크라이나 지방을 중심으로 야콥 프랑크(Jacob Frahk)가 샵ㄹ타이 쯔비의 후계자로서 메시아임을 자처하고 나섬으로써 새로운 부흥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메시아 운동은 그리스도 교, 또는 이슬람교로 개종 아니면 처형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자생적으로 발전된 운동이었으며 워낙 그들의 메시지가 강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의 유다 교에서 메시아 운동이 이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스피노자(1632-1677) : 네덜란드의 유다 인 철학자로 17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스피노자의 대담한 지성적 합리주의는 당시 유다 인들의 자유주의적 경제활동과 함께 유다 교가 세계적 사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스피노자 (B. Spinoza)와 유다 교 지성주의
17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지대한 공헌을 j한 철하자 중의 하나로 스피노자를 꼽을 수 있다. 포르투갈 출신의 부모 밑에서 1632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스피노자는 유다 교의 가장 거룩한 경전인 모세 오경 저자의 낮은 지적 수준을 비판하면서 기존의 유다 교 신학에 반기를 들었다.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뛰어난 성서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사상은 많은 제자들을 매료시켰으며 당시 네덜란드의 유다 교 당국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34세가 되던 해인 1656년에 스피노자는 유다 교 역사에서 전무후무하게 유다 교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그후 스피노자는 렌즈를 만드는 기술자로 연명하면서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던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는 한편 그의 ‘철학의 원리’에 대한 해설 서를 저술하여 데카르트의 세 가지 형이상학적 원리인 신의 초월성, 정신과 육체라는 인간 존재의 이원론, 그리고 자유의지 등을 비판하면서 그와는 다른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스피노자는 나아가 철학 하는 자유가 있어야만 개인적인 경권과 아울러 국가의 평화가 보장되는 것이며 이러한 자유가 박탈당할 때에는 개인의 신앙이나 국가의 안정도 기대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스피노자의 대담한 지성적 자유주의는 당시 유다 인들의 자유주의적 경제 활동과 함께 유다 교가 세계적 사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부의 축적과 유다 교
유다 인들은 기원전 721년, 사마리아의 함락에 이어 실행된 아시라아의 대양 이주 정책에 따라 메소포타미아로 건너가 거주하는 디아스포라가 형성되면서부터 독자적인 부의 축적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2-13세기에는 북부 이탈리아에 정착했던 유다 인들이 고리 대금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은행 설립의 기초를 놓기도 하였다. 유다 인들은 여러 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다 인 공동체를 점조직으로 연결하는 그들만의 밀접한 유대관계를 최대한 활용하여 17-18세기에 들어와서는 유럽의 경제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대서양 연안의 안트베르펜․암스테르담․함부르크․ 보르도 등에서 시장을 개척하여 상권을 장악하고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유럽 전체의 경제를 자본주의적 경제로 전환시키는데 큰 몫을 담당하게 된다.
특히 다민족으로 구성된 합스부르크 제국의 왕족들은 정책으로 유다 인 상인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경제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 주었고 유다 인들은 은행업, 국제무역, 건설업, 운송업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유다 인들은 유럽의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근대화의 선두 주자가 되었고 웅장한 규모의 회당들이 건설되면서 그리스도 교의 박해를 피해 시골 공동체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유다 교가 일종의 부르주아 종교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성서 주변 (10)
오늘날의 유다 교 (1)
1. 반 유다 주의(Antisemitism)의 등장
유태인들에 대한 인종적 적대감을 표현하는 반 유다 주의는 1873년에 출판된 독일 정치가인 빌헬름 마르(Wilhelm Marr)의 저서「독일 왕국에 대한 유다 교의 승리」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이래 오늘날까지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유태인 차별정책을 일컫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원래 반 유다 주의는 유럽의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적 환경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유다 교를 끝까지 고수한 종교적 배경과, 철저하게 가족 친지를 중심으로 광대한 지역의 점조직을 연결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함으로써 본토 민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경제적 배경 등의 두 가지 측면에서 그 근본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유럽의 대도시에서 유태인들이 금융, 언론, 예술, 정치 분야 등에서 전문가 집단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지역 민들의 시기를 받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좌익세력에 많이 동참했던 유태인들은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말 대부분의 유럽 도시에서 전체시민 중 1퍼센트 미만을 차지하는 유태인들이 전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속설이 나돌았고, 러시아어로 ‘폭풍’이라는 의미의 ‘포그롬(pogrom)’으로 불려진 인종차별적 테러 행위가 1871년부터 러시아의 유태인들에게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881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2세가 암살 당한 후 당시 팽배했던 개혁파를 저지하기 위한 일종의 관심전도의 수단으로 유태인 마을에 대한 조직적인 테러 행위가 자행되었다. 나아가 1913년 소위 ‘베일리스(Bdilis)’ 사건에서는 유태인들이 과월절의 무교병을 만들 때 그리스도 교 소년을 살해하여 밀가루 반죽에 그의 피를 섞었다는 끔찍한 소문이 조작되어 전파되면서 유럽의 반 유다 주의가 절정에 달하게 된다.
2. 유다 교와 사회주의
유다 교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현실 부정과 종말 이후 나타나는 초월적인 낙원 개념의 메시아 왕국 사상은 젊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현실적이고도 세속적인 지상낙원의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마르크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헤스(M. Hess)는 1837년에 출간된「스피노자의 한 제자에 의한 인류의 거룩한 역사」라는 저서를 통하여 처음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표현하였고 1848년에는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 원리 Communist Manifesto」를 발표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이론적 바탕아래 라살(F. Lassalle)이 1863년 독일에서 최초의 노동자 정당을 탄생시킴으로써 유럽에서 본격적인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말의 지상낙원 사상은 유태인 지식인들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정착되었으며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유태인 자본가들까지 동조함으로써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897년까지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 등지에서 유태인을 중심으로 노동자 조합이 결성되면서 유태인들은 사회주의 혁명의 선봉에 나서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트로츠키(Leon Trotskii) 같은 유태인 혁명가는 외무성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소련의 붉은 군대를 창설하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태인들이 이러한 노동자 위주의 사회주의를 신봉하였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일단 지상낙원이 건설되면 2천여년간 자신들이 당해온 인종적 차별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을 것이다.
테오도르 헤르출(Theodor Herzl : 1860-1904) 오스트리아 시온주의자 작가이며 정치가.
팔레스타인에 유다인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을 정치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첫 번째 시온주의자 대화를 가졌으며 ‘세계 시온주의자 조직’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유다인 문제를 세계적인 정치 현안으로 부상시켜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다.
3. 시온주의 (Zionism)
1880년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포그롬을 피해 서쪽으로 이주한 유태인들은, 주권을 지닌 국가가 없는 한 유태인의 자주적 민족주의 운동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조상들의 약속의 땅인 팔레스티나에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자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레온 핀스커(Leon Pinsker)는 1882년에 발행한 「자주해방 Autoeman-cipation」에서 유태인들 스스로 그들의 운명을 개척해야 하며 구체적인 영토를 지닌 유태인 국가가 필요함을 역설함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시온주의의 초석을 놓게 되었다. 드디어 1897년에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을 중심으로 첫 번째 시온주의 대화가 개최되어 유태인들의 의회가 구성되었고, 연중 행사로 전세계 유태인들의 구심점 역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1903년 제6차 시온주의 대회에서는 영국이 제안한 아프리카의 우간다에 이스라엘을 건설하라는 소위 ‘우간다 계획’을 표결에 붙인 결과 50.5퍼센트의 근소한 차이로 지지를 얻게 되지만 반대파의 맹렬한 저항 때문에 이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 결과 유럽의 유태인들이 직접 팔레스티나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이민이 시작되었고 공동 생산과 평등분배에 입각한 그들만의 독특한 농업공동체 운동이 1910년 갈릴래아 호수 남단에 최초로 설립된 드가니야(Deganyah) 키부츠로 현실화되기도 하였다.
1939년에 마지막으로 개최된 시온주의 운동은 결국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하게 되는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4. 홀로코스트(Holocaust) : 나치의 유태인 대량학살
1929년 세계적인 대공황 상황에서 유업에서는 기존의 민주주의 운동이 무너지면서 독재와 전체주의에 입각한 선동적인 정치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에 발행된 히틀러의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그는 조직적으로 유태 민족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피력하였고 경제적 불황을 새로운 민족적주의로 이끌어 내면서 독일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1933년에는 총통 자리에 올랐다.
히틀러는 즉각 칙령을 통하여 독일 내 유태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모든 중요 공직에서 그들을 해고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11월에는 파리 주재 독일 대사가 한 유태인 청년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그 보복으로 ‘수정의 밤(Kristallmacht)’이라 불리는 대 유태인 테러 행위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하였다. 1939년 폴란드를 점령한 히틀러는 그곳의 330만 유태인을 실험 대상으로 숙청하기 시작하여 그 첫 번째 단계로 모든 유태인을 도시의 한 구역으로 몰아 거주시키는 이른바 ‘게토(ghetto)’ 정책을 시행하였다.
홀로코스트(Holocaust) 나치가 12년(1933-1945)동안 자행한 유태인 대학살.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 되면서 시작된 유태인 박해로, 1945년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할 때까지 폴란드․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600여 만 명의 유태인이 30여 개 강제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1941년 여름까지 50만 명의 폴란드 유태인들이 질병으로 게토에서 사망하였다. 독일이 계속하여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이 지역의 유태인들도 참사를 당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0월부터는 폴란드에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고 조직적인 유태인들의 이동이 시작되었으며, 11월에는 최초로 ‘죽음의 수용소’가 설치되어 독가스 등에 의한 대량학살이 시작되었다. 1945년 5월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할 때까지 폴란드에서 300만 명, 러시아에서 120만 명 등 유럽 전역에서 600여만 명의 유태인들이 30여 개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성서 주변 (11)
오늘날의 유다 교 (2)
오늘날의 유다교는 한마디로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표현으로 그 특징을 잘 나타낼 수 있다. 우선 그 구성원들의 종교적 성향이 극 보수에서부터 자유스러운 종파까지 매우 다양하고, 적어도 전체 유다 인중 2/3 는 종교적 유다 인들로부터 비 종교인으로 구분될 정도로 기본적인 관습 외에는 전혀 유다교 신자로 볼 수 없는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견지하고 있다. 또한 세계 100여 개 국가에서부터 이주해 온 이민 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종교적 분위기도 같은 유다 인이면서도 인종적․민족적 다양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이스라엘 유다교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국가 사이에서, 특히 팔레스타인 국가의 창설을 눈앞에 둔 정치적 위기를 겪으며 종교적 대안을 제시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세속적 국가관이 희박한 유다교의 전통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자유주의적 유다교
미국의 유다인 정착은 이미 독립(1776) 이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뉴욕으로 개명된 ‘뉴암스테르담’에 1650년대에 진출한 유다인들은 그곳의 주인이었던 네델란드 인들의 종교적 자유주의 덕분에 자신들의 유다교 전통을 고수할 수 있었다. 1729년에는 미국 최초의 유다교 회당이 뉴욕에 세워졌으며 1765년 영국에 항거하는 미국 식민지 거주민들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유다인 공동체도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30년대이래 유럽으로부터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졌을 때, 특히 독일어권의 유다인들이 미국에 많이 정착하게 된다. 1855년 개혁적인 유다인들에 의해 선포된 피츠버그 선언에서 미국 유다인들의 독자적인 종교관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다음과 같이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감성과 지성에 입각한 보편적인 문화의 환경 속에서 모든 인류에게 진리, 정의,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메시아적 희망을 인식한다.”
오늘날 전체 미국의 3억 인구 중 2퍼센트에 불과한 600만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미국 사회의 주인으로서 끊임없는 개혁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유다교의 방향 설정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총선을 실시하여 유다인 및 아랍인 국가를 각각 따로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스라엘 건국 자체를 반대했던 주변의 아랍국들이 11월 30일, 유다인 지역을 공격하면서 독립전쟁, 또는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위기를 승리로 이끈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에 선포한 독립선언문에서 이스라엘 국가는 자유․정의․평화에 기초해 있음을 표명하면서 종교․양심․언어․교육․문화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10세기, 사디아 가온은 유다 민족은 율법의 준수를 통하여 그 전통이 이어짐을 피력한바 있다. 하지만 이 율법이 과연 새로 건설된 국가의 법치주의와 부합되는지는 아직 유다교에서도 뚜렷한 해답을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건국초기의 입법자들은 결혼 및 가족에 관한 재판만큼은 랍비들로 구성된 종교 법정에서 다루도록 결정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어느 정도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민자들의 유다교
이스라엘 정부는 1950년에 제정한 귀한 법 첫머리에서 “모든 유다인은 이민자로서 이스라엘의 거주할 자격이 있음”을 선포함으로써 유다인이면 누구든지 이스라엘에 시민이 될 수 있음을 법으로 정하였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들 중 많은 사람이 미국 등 선진국으로 대량 이주했으며, 그 중 일부는 이스라엘로 이민하였다.
성서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는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은 이미 20세기초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들의 정착촌을 건설하고 유엔이 이스라엘 국가 설립을 위한 총선거 실시를 결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약 100개 국가에서 이민 온 각양각색의 유다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럽과 미국 출신들의 아슈케나짐과 북아프리카, 남미 출신의 스파라담은 각각 독자적인 랍비청을 운영하면서 수백 년 동안 전승된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의 대립과 갈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하고 또 마치 계급 차별과 같이 보이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종교적으로 유다교 신자이면서 민족적으로는 유다 민족이라는 동질성 하나로 이스라엘의 유다교를 대표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는 것 같다.
오늘날의 유다교
오늘날 약 1300만으로 추산되는 유다 민족은 1/3인 450만 정도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나머지는 미국과 유럽을 비롯하여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약 1/3 정도만 철저하게 일상생활에서 안식일과 율법을 지키는 소위 ‘종교인’들이고 나머지는 유다인으로서 고유의 절기나 ‘카슈루트’라 불리는 음식법등은 지키지만 율법의 문자적 해석과는 무관하게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종교인들이 극 정통파․정통파․보수파 등 여러 교파로 사분 오열되어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면제받아 일반인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며 종교적 미명 아래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그릇된 가치관을 표방하고 있다. 또한 국회 내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는 종교 정당들이 일반 시민들의 종교 자유를 제한하는 온갖 불합리한 정책들을 제시하고 그 대가로 권력과 돈을 챙기는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개인의 종교활동과는 무관하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내세의 축복을 보장받은 유다인들은 대부분의 아람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가 일치해야만 하는 민족주의적인 종교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종교를 통한 세계 평화라는 대 명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내세 중심적인 다른 종교에 비해 현세의 가장 바람직한 삶을 축복으로 간주하는 시대에 따른 유다교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그들의 새로운 역할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서 주변 (12)
유다 교의 축제와 절기
오늘날 이스라엘의 국경일은 독립기념일과 현충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구약성서와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종교적 절기들이다. 그만큼 유다 민족은 지구상의 그 어느 민족보다도 종교적 절기를 범국민적 명절로 승화시켜 지키고 있는 셈이다.
천지창조의 주기로부터 안식일이 생겨났고 출애굽 사건이 과월절과 무교절의 기원이 되며 계절적인 추수(추수절, 초막절) 민족적 위기(티샤 베아브, 부림절)등 민족의 모든 수난의 역사가 절기와 축제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잘 보전되었다.
유다교의 절기는 철저하게 음력에 기초하고 있으며 열두 달의 명칭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았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일년의 기준이 봄철과 가을철의 춘분과 추분이었는데 초기에는 춘분을 새해로 결정했지만 나중에는 바빌로니아의 영향으로 추분을 기준으로 하여 가을철 티슈리 달을 제1월로 결정하게 된다. 유다교의 종교적 명절은 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일곱 가지의 절기와 후대의 역사적 사건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전자는 축제일(하김)과 절기(모아딤)로 다음과 같이 양분된다.
1. 축제일(하김) : 과월절과 무교절, 추수절, 초막절
2. 절기(모아딤) : 안식일, 매월 초하루, 설날, 대속죄일(욤 키푸르)
3. 후대에 첨과된 절기 : 성전 파괴일(티샤 세아브), 부림절, 봉헌철(하누카), 라그 바오 메르
유다교의 종교력과 절기는 다음과 같다.
달 이 름 |
1일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30일 |
티슈리 (9-10월) |
설날 대속죄일 ---초막절--- (1-2일) (10일) (15-22일) |
헤슈반 (10-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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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슬레브 (11-12월) |
---하누카-- (25일- |
티 벳 (12-1월) |
하누카 -2일) |
슈밧트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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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르 (2-3월) |
부림절 (14-15일) |
니 싼 (3-4월) |
과월절, 무교절 (15-21일) |
이야르 (4-5월) |
라그바오메르 (18일) |
씨 반 (5-6월) |
추수절 (6일) |
탐무즈 (6-7월) |
|
아 브 (7-8월) |
티샤베아브 (9일) |
엘 룰 (8-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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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로쉬 하샨나)
“칠월 초하룻날 너희는 쉬어야 한다. 나팔을 불어 거룩한 모임을 알려야 한다. 너희는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고 야훼께 제물을 살라 바쳐야 한다”(레위23,24-25).
오늘날 이스라엘의 설날은 음력으로 티슈리 달 초하루인데 양력으로는 해마다 9-10을경에 해당된다. 로쉬 하샨나는 아마도 바빌론 포로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초기이 종교적 절기를 요약해 놓은 신명기 16장에는 삼대 절기인 과월절(무교절). 추수절, 그리고 초막절 등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티슈리가 칠월이 되는 것은 봄철의 니싼을 일월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주로 가을철 티슈리 초하루에 왕의 대관식을 거행했으므로 이러한 관습의 영향을 받아서 야훼가 창조주로서, 왕으로서 등극한다는 의미가 이 절기에 내포되어 있다. 로쉬 하샨나라는 이름은 탈무드 시대 (서기 7세기 이후)부터 나타나며 오경에서는 단순히 ‘쇼파르의 날’ 또는 ‘기억의 날’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날은 기쁨의 날이라기보다는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는 엄숙한 절기로 지켜진다.
탈무드는 모두 네 차례의 설날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봄철의 니싼 초하루는 왕정시대의 행정적인 기준이며, 여름철의 엘룰 초하루는 가축의 십일조를 계산하는 기준으로서의 설날이고, 슈밧트의 보름(투 비슈밧트)은 나무와 관계된 설날이며, 티슈리 초하루는 창조의 기원이 되는 의미로서의 설날이다.
한해의 마지막 열두 번째 달일 엘룰의 한 달 동안 유다인들은 반성의 시간을 가지며 조상들의 묘지를 참배하기도 한다 특히 마지막 주간은 ‘슬리콧트’라 불리는 참회의 기도를 매일 하며 마지막 안식일 밤 12시의 속죄기도를 통하여 지난해의 모든 죄악을 용서받고 새해를 맞게 된다. 로쉬 하샨나 바로 전날인 섣달 그믐에는 미가서 7장 19절에 의거하여 모든 죄악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타슐릭크(던진다는 뜻)’ 의식을 행한다.
특히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은 실로암 연못에 가서 자신들의 죄를 흐르는 물에 씻어버림으로써 새해마지를 준비한다. 또한 이날에는 네 명이 모여 한 명의 잘못에 대해 세 명이 각각 증인과 심판자의 역할을 하며 용서하는 ‘하타랏트 네다림’의 풍습도 있다.
설날의 종교적 행사는 주로 회당에서 진행되며 토라 낭독은 첫째 날에는 이사악의 탄생, 둘째 날에는 이사악의 희생제사 사건 부분을 낭독하고 예언서 낭독은 첫째 날에는 사무엘의 탄생을, 둘째 날에는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오리라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낭독한다. 로쉬 하샨나는 야훼를 우주의 왕으로 선포하고 야훼의 심판과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주셨듯이 종말에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세 가지 주제를 묵상하게 된다.
이날에는 뿔나팔인 쇼파르를 불게 되어 있다. 뿔은 금송아지로 섬겼던 소를 제외한 모든 정결한 짐승의 것을 사용할 수 있고 아브라함의 이사악 희생제사 사건에서 나타난 숫양 때문에 양의 뿔을 선호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길고 구부러진 산양의 뿔을 주로 쇼파르로 사용하고 있다. 로쉬 하샨나는 이틀에 걸쳐서 축제로 지켜지는데 그 이유는 비록 달력상으로는 음력 초하루이지만 실제로 초승달이 뜨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첫 달이 뜨는 것과 안전하게 결부시키려는 배려 때문이다.
로쉬 하샨나는 특별 음식은 달콤한 새해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과를 꿀에 찍어먹고 생선머리 부분을 요리해 먹음으로써 무슨 분야에서든지 첫째가 될 것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할라’라 불리는 안식일 빵에는 이날만큼은 소금을 첨가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달콤한 새해를 위해서이다. 이 날에 유다인들은 ‘샤나 토바’, 즉 ‘좋은 새해’라는 인사 외에도 생명 책에 기록되기를 기원하며 ‘하티마 토바’라는 인사를 교환하고 일반적인 신년 연하장도 주고받는다.
성서 주변 (13)
대속죄일(욤키푸르)과 초막절
대속죄일(욤키푸르)
“일곱째 달에 들어 그 달 십일이 되면 본토 주민이든지 너희 가운데 몸 붙여 사는 사람이든지 할 것 없이 모두 단식해야 하며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날은 너희의 죄를 벗겨 너희를 정하게 하는 날이므로 너희가 야훼 앞에서 모든 잘못을 벗고 정하게 되리라. 그날은 너희가 철저하게 쉬어야 하는 안식일이다. 너희는 단식을 해야 한다”(레위 16,29-31).
대속죄일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서 성전이 파괴된 날을 기억하는 티샤베아브와 함께 애통하며 금식하는 날이다. 바로 이날에 대사제가 특별한 제사를 드린 다음 일년에 한 번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가서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를 구하였다. 대속죄일의 제사 방식 중 특이한 것은 산 염소를 가져와서 대사제가 그 머리 위에 안수하여 백성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죄를 대신 짊어진 이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가 풀어서 달아나게 하는 것이었다.
대속죄일에는 주로 흰옷을 입고 영혼을 절제하기 위하여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또한 몸을 물로 씻거나 기름을 바르지도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지내기도 한다. 또한 이날에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촛불을 켜고 산 사람들끼리는 서로에게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
대속죄일 전날에는 ‘카파롯트’라 불리는 제사 의식을 거행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닭을 주로 제물로 이용하며 남자의 경우에는 수탉, 여자의 경우에는 암탉을 산채로 다리를 잡고 머리위로 세 번 휘두르면서 “이것이 나의 대속물이며 속죄물이니 이 닭은 죽임을 당하고 나는 안식을 누리며 즐겁게 오래 살 것이다.” 라는 구절을 낭독한다.
닭 중에서도 흰 닭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이사야서 1,18의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라는 구절 때문이다. 카파롯트 의식 후에는 닭을 잡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며, 내장은 새들이 먹도록 던져버린다. 닭이 없을 경우에는 오리나 생선으로 대신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돈으로 “이 돈이 나의 대속물이니 이 돈은 없어지지만 나는 영생하리라.”는 구절을 낭독한다.
대속죄일 아침 회당의 예배에서는 오경 중에서 레위기 16장가 민수기 29,7-11절을 낭독하고 예언서 중에서는 이사야서 57,14-58-14부분을 낭독한다.
초막절(수콧트)
“너희는 칠월 보름부터 칠 일간 초막절을 지내며 야훼께 예배드려야 한다. 그 첫날은 거룩한 모임을 여는 날이니,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 칠 일간 야훼께 제물을 살라 바쳐야 한다. 팔 일째 되는 날에도 또 거룩한 모임을 열고 야훼께 제물을 살라 바쳐야 한다. 이날은 축제일이므로 너희는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레위23,34-36).
초막절은 가나안의 전통적인 가을철 포도 수확의 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야훼의 축제’로 명명된 실로의 포도 축제는 그곳의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수확의 기쁨을 만끽했다(판관 21,19-21).
칠 일 동안 지켜지는 초막절 기간에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을 기념하여 초막에서 살아야만 한다. 히브리어로 ‘수카’라 불리는 초막은 반드시 야외에 설치해야 하며 벽은 최소한 삼면이상을 만들어야 한다. 초막의 벽은 아무 재료나 사용해도 되며, 지붕은 나뭇가지를 이용하는데 주로 대추야자 가지를 사용하며 밤에 별을 볼 수 있도록 엉성하게 설치해야 한다.
초막절에는 ‘훌륭한 과일(에트로구)’, ‘종려나무 가지(룰라브)’, ‘무성한 나뭇가지(하다심)’, 그리고 ‘개울버드나무(아라봇트)’ 등 네 가지 식물을 구해다가 양손에 쥐고서 흔드는 의식이 있다(레위 23,40). 왼손에는 오트로그를 잡고 오른손에는 룰라브 하나, 하다심 세 개, 아라봇트 두 개를 쥐고서 할렐시편인 113-118편을 낭독하는데, 118편이 시작되면서 동서남북 상하 방향으로 네 가지 식물을 흔든다.
후대의 합비들은 이 네 가지 식물의 향기와 맛이 각각 유다인의 살메 있어서 오경의 지식과 행동을 나타낸다고 보며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에트로그는 향기도 있고 맛도 있으므로 오경의 지식도 있고 그를 실천하는 자들이고, 룰라브의 열매인 종려나무는 맛은 있지만 향기가 없으므로 선행을 하지만 오경의 지식은 없는 자들이다. 하다심은 반대로 맛은 없지만 향기가 있으므로 오경의 지식은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마지막으로 아라봇트는 맛도 없고 향기도 없으므로 지식도 없고 선행도 최하위 유다인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초막절의 일곱째 날은 ‘호산나 라바(위대한 구원)’날이다. 이날에 에트로그와 룰라브를
손에 쥐고 회당을 일곱 바퀴 돌고, 아라봇트 가지를 나무의자에 내리쳐서 잎을 떨어뜨리면서 인간의 죄악을 재거해 주길 기원한다.
초막절 제 팔일에 ‘거룩한 모임’을 갖는데 이날은 특별히 ‘씸갓트 토라’, 즉 ‘오경의 기쁨’날로서 일 년 동안 오경 낭독의 한 주기가 마무리되고 시작되는 날이다. 유다인들의 회당에서는 오경 두루 마리를 꺼내놓고 그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 강단에 의자 두 개를 놓고 오경의 끝 부분을 읽는 사람과 창세기의 시작부분을 읽는 사람을 앉힌다. 오경의 마지막 낭독자를 ‘하탄 토라’, 즉 ‘토라의 신랑’이라 부르며 신명기 33,27-34,12을 읽는다. 또한 사람의 낭독자는 ‘하탄 블레쉿트’, 즉 ‘창세기의 신랑’으로 불리며 창세기 1장을 낭독한다.
성서 주변 (14)
하 누 카
“마카베오와 그의 동지들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탈환하고 이교도들이 광장에 쌓아놓은 제단과 소위 그들의 성역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성소를 정화하고 제단을 새로 쌓고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킨 후 이년만에 처음으로 그 불로 희생제물을 드리고 향을 피우고 등불을 켜서 떡을 바쳤다. …
그러고는 전에 이방인들이 성전을 더럽힌 바로 그날, 즉 기슬레우월 이십오 일에 성전을 정화하였다. 초막절과 마찬가지로 이 즐거운 축제는 팔일 동안 계속되었다”(2마카10,1-3. 5-6). 하누카는 히브리어로 건물의 ‘준공’을 의미하며 유다교 달력에서 기슬레 우월 제25일부터 티벳 제2일까지 8일 동안 계속되는 축제이다. 마카베오상 4장 59절에는 제단의 봉헌에 즈음한 축일로 나타나 있으며, 요한복음 10장 22절에는 이미 고유 명사화된 봉헌절 축제로 등장한다. 따라서 하누카는 예루살렘 성전의 신축 및 증축 후에 행하는 일종의 성전 봉헌축제라고 볼 수 있다.
성서의 절기 중 가장 늦게 형성된 하누카는 그 유래를 역사를 통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다. 기원전 173년 안티오쿠스 4세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예루살렘에는 친헬라파와 친이집트파 그리고 전통적인 하시딤 등 세 분파로 나누어져 대사제직을 놓고 각 축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안티오쿠스는 당시 대사제였던 오니아스 3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여호수아(야손)를 대사제로 임명했다. 야손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만일 예루살렘이 헬라적 수준의 도시인 폴리스(polis)로 격상된다면 시민들이 많은 혜택을 누릴 것이라는 계산 하에 헬라식 스포츠클럽인 김나지움과 에페배움 등을 예루살렘에 도입하여 건설하였다.
한편 같은 첸헬라파이면서 이에 반대하던 메넬라오스는 직접 자신이 안티오쿠스를 찾아가 야손의 실정을 고발했고, 이를 알아챈 대사제 오니아스는 이를 기회로 예루살렘에서 군사들을 동원하여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메넬라오스는 안티오크스로부터 대사제직을 약속 받고 수많은 시리아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쳐들어 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기원전 167년 기슬레우 달에 안티오쿠스는 유다 인들에 대한 종교적 관영정책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에 불만을 품고 유다 지방 전체를 헬라화하려는 조서를 공표 하게 된다. 그 달 제25일에 안티오쿠스 자신이 직접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제우스신상을 세우고 제단에는 유다 인들이 금기시하는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냈으며, 그 이후로 성전은 우상숭배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에서 토라를 연구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토라와 기타 유다 교에 관련된 모든 문서는 불태워졌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자도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할례 받은 아기를 성벽에서 던져 죽였고, 그 가족도 몰살 시켰다. 이러한 최초의 잔인한 종교적 박해에 못 견뎌 많은 유다 인이 낙향하거나 유다 광야 등지로 피신하게 된다. 그후 2년이 조금 지나서 종교적 박해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온 유다에 미치게 되었으며, 기원전 164년 봄에 쉐펠라 지역의 한 촌락인 모데인에서 마을 사람 모두에게 강제적으로 제우스 신상에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부터 그 마을의 마따디아 일가. 특히 둘째 아들 우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유다 산간 지역의 지리적 조건을 최대로 이용한 열광적인 하시딤들의 마카베오 세력은 시리아 군대와 전투를 할 때마다 승리로 이끌며 드디어 기원전 164년 기슬레우 달 제25일에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우상을 제거하였고 다시금 원래 야훼 성전의 모습으로 복구시켰다.
하누카가 8일 동안 지켜지는 유래는 마카베오하 10장 6절에 의하면 2년 동안 초막절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초막절에 준하는 8일간의 축제로 지낸다고 했다. 또한 탈무드에 의하면 유다 마카베오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탈환했을 때 오직 하루 동안만 등잔불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이 남아 있었는데 새로 기름을 구할 때까지 기적적으로 8일 동안 불을 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누카 축제 :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제2성전을 정결케 하고 다신 봉헌한 것을 기념하며 드리는 축제. 이날에는 회당이나 가정에 등불을 밝히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촛불절’이라고도 부른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사용하는 하누카 축제의 촛대를 ‘하누키야’라고 부르는데, 모두 아홉 가지의 촉대로 되어 있다. 첫째 날에 하나를 켜고, 둘째 날에는 두 개, 마지막 여덟째 날에는 여덟 개의 촛불을 켜게 되지만 하누키야의 촛불을 이용해서 다른 촛불로 옮길 수 없기 때문에 또 하나의 촛대를 첨가해서 모두 아홉 개의 촛대가 되었다. 하누키야 촛대는 조명용이 아니기 때문에 집 입구나 창가에 두는데, 촛불이 켜져 있는 동안에는 안식일처럼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하누카 기간에 우다 마카베오의 고향인 모데인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횃불을 들고 릴레이 하는 행사가 있으며, ‘쑤부가니아’라 불리는 도너츠를 많이 만들어 먹는다. 이 기간에는 매일 저녁마다 촛불을 켜는 점등의식을 하면서 13세기부터 독일에서 유래된 ‘내 구원의 반석’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른다. 성서 낭독은 광야시대 장막의 봉헌 장면이 나오는 민수기 7장이나, 성전 촛대에 불을 밝히는 8장 그리고 하누카 기간의 안식일에는 즈가리야 2장을 낭독한다.
하누카가 기슬레우월 제25일부터 시작되는 사실은 당시 근동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던 동지(12월 25일) 때의 태양신 미트라(Mitra) 숭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도 - 이란 계통의 신, 미트라는 페르시아가 소아시아를 점령한 기원전 5세기경부터 이 지방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안티오쿠스4세도 바로 이날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냈고, 유다마카베오가 바로 이날에 서전을 재탈환한 것도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성서 주변 (15)
부 림 절
“아하스에로스 왕국 각 지방에 사는 유다인들에게 원근을 가리지 않고 전갈을 보내어 해마다 아달월 십사 일과 십오 일을 축일로 지키라고 지시하였다. 이달은 쓰라림이 기쁨으로 바뀌고 초상날이 축제일로 바뀐 달이요, 이날은 유디인들이 원수에게서 풀려난 날이라, 이날을 기쁜 잔칫날로 지내며 선물을 주고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뻗는 날로 삼으라고 하였다”(에스 9,20-22).
부림절은 성서의 절기 중에서 가장 즐겁고 유쾌한 날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명절이다. 부림의 어원은 페르시아 제국의 총리일 하만이 유다인들이 자신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을 몰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그 실행일을 잡기 위해 주사위를 던졌는데 주사위가 바로 페르시아어로 ‘푸르’인 데서 유래됐다. 아람어의 푸르는 바빌로니아의 신년 축제에서 ‘신탁’을 의미하는 아카드어 ‘푸르(puru)’에서 유래됐다.
에스델서에 의하면, 자신의 사촌 여동생을 잘 키워서 아하스에로스왕의 왕비로 선택받게 뒷받침한 모르드개가 당시의 총리 하만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못한 잘못으로 그 자신은 물론 페르시아 제국내의 유다 민족 전체가 한꺼번에 처형당할 운명에 처하게 됐다. 하지만 아하스에로스 왕이 한밤중에 궁중실록을 읽다가 과거에 대궐 수문장으로 지내던 두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는데 이러한 쿠데타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한 자가 바로 모르드개였음을 알게 됐다. 따라서 왕은 하만에게 이름은 언급하지 않은 채 이 영웅에게 어떻게 상을 내릴지를 물었고 하만은 자신으로 착각하여 왕관을 씌어 성을 한바퀴 돌게 할 것을 제안했다.
한편 왕비 에스델은 큰 잔치를 베풀었고 참석한 왕이 소원을 물었을 때 유다 민족의 원수인 하만을 처형할 것을 부탁했다. 마침 하만이 모르드개를 교수형에 처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 50큐빗 높이의 교수대를 설치했는데 오히려 자신이 이곳에 매달려 교수형에 처해지게 됐다. 또한 하만이 주사위를 던져 유다인들을 몰살시킬 운명의 날로 정한 아달월 제13일에 왕의 명령에 의해 주동자들이 모두 처형당하게됐다. 따라서 그 다음날인 14일과 보름인 15일 이틀동안에 걸쳐 유다인들의 즐거운 해방 축제가 벌어지게 됐다.
비록 부림절이 에스델서에서 비롯되었지만 페르시아 시대의 배경하에서 역사적으로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기원전 1세기초에 기록된 마카베오서에는 아달월 14일을 ‘모르드개의 날’로 기념하고 있고,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는 에스델서가 16장 24절까지 연결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기원전 2세기 중엽 하스몬 시대부터 부림절이 유다인들의 공식적인 절기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약성서에는 부림절에 관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 이 절기의 중요성이 약화되었든지, 아니면 에스델서가 아직 구약성서에 정경으로 포함되기 이전이어서 비교적 후대에까지 부림절이 공식적인 절기로 정착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구약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에스델서에는 야훼라는 단어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정경으로삼는 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아하스에로스 왕은 다름 아닌 페르시아 제국의 네 번째 왕인 크세르크세스인데 당시의 관습대로라면 절대로 페르시아민족 이외의 이방인이 왕비가 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에스델은 바빌로니아의 전통적인 여신인 이쉬타르에서, 모르드개는 마르둑 신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기 때문에 원래 이교도들의 축제가 나중에 유다인들에게 전수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부림절에는 적어도 2명 이상에게 동정을 베풀어야 하며 친구나 친지들과 함께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이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아달월 14일을 부림으로 지키지만 원래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산에서는 1`3일과 14일 이틀동안 유다인들의 원수들을 처치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음날인 15일을 쉬면서 부림절로 지켰다. 이 전통에 따라서 랍비들은 여호수아 시대부터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아달월 15일을 부림으로 지킬 것을 권하고 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는 14일가 15일 이틀 동안 부림을 지키고 있으며 특히 아달월 15일은 ‘수산 부림’ 으로 불린다.
부림절의 독특한 의식은 회당에 모여서 에스델서를 낭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낭독을 위해 오경 두루마리와 마찬가지로 에스델서만 별도로 가죽에 기록하여 만든 두루마리가 사용된다. 대표자가 에스델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가운데 ‘하만’이라는 유다인 운수의 이름이 나오면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데 깡통이나 냄비 뚜껑, 심지어 이 목적을 이해 특별히 만들어진 소리나는 기구를 동원하여 야유를 보낸다. 에스델서에는 모두 50회에 걸쳐서 하만이 등장하므로 부림절 회당에서의 이 낭독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날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성서 말씀대로 부림절에는 적어도 2명 이상에게 동정을 베풀어야 하며 친구나 친지들과 함께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이 있다. 이탈리아 유다인들의 영향으로 발전된 ‘하만이 귀’라 불리는 삼각형 모양의 과자를 만들어 먹는다. 중세 이후 유다인들의 독특한 언어로 정착된 이디시어로 ‘하만타센’이라 불리는 이 과자속은 자두 잼으로 채운다. 아마도 에스델 왕비가 유다인들의 음식 율법인 ‘카세르’를 지키기 위해 주로 견과류를 먹었다는 전승 때문에 이날은 콩 종류와 견과류를 많이 먹으며, 에스델서에 인도라는 지명이 등장하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똑같은 단어인 칠면조 요리를 해 먹기도 한다.
부림절에는 유럽 축제의 영향으로 가면을 쓰고 가장 행렬을 벌이는데, 특히 일반 학교에서는 학부형들을 초청하여 에스델서를 소재로 한 연극을 공연한다. 유다인들의 종교적인 절기 중에서 부림절이 가장 세속적이고 즐거운 날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탈무드의 한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부림절에는 모두가 포도주에 취해서 ‘모르드개에게 축복을!’이라는 외침과 ‘하만에게는 저주를!’이라는 외침을 서로 혼동해도 괜찮다.”
성서 주변 (16)
과월절과 무교절
“야훼께서 이집트인들을 침 지나가시다가 문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피를 보시고는 그 문을 그냥 지나가시고 파괴자를 당신들의 집에 들여보내어 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실 것이오.”(출애 12,13)
과월절과 무교절은 춘분이 지난 후 첫 번째 보름부터 7일 동안 지속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최대 명절이다.
보름 전날 밤에 어린양을 잡는 절기가 과월절이고, 무교절이란 7일 내내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는 풍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과월절을 히브리어로 ‘페싹흐’라 부르는데 이는 ‘뛰어넘다’의 뜻을 지닌 동사 ‘파싹흐’에서 유래된 말이다. 과월절과 무교절은 출애굽이라는 이스라엘 민족 신앙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사건과 유목민들의 봄철 축제 그리고 정착민들의 봄철 추수감사제가 한데 어울린 복합적인 절기이다.
과월절은 야훼가 이집트인들에게 내린 열 번째 재앙과 관계가 있는 날이다. 아홉 가지 혹독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계속 파라오가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자 야훼는 사람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가 죽는 최후의 재앙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의 지시에 따라 새끼 양의 피를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야훼가 그것을 보고 넘어가도록 약속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날 제 12일에 새끼 양을 준비했다가 제 14일 해질 무렵에 도살하여 피를 바르고 그날 밤에 고기를 불에 구워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빵을 곁들여 먹었다. 머리, 다리, 내장도 구워 먹어야 하며 만일 남은 고기가 있으면 다음날 아침에 모두 불에 태워야만 했다. 요시아 왕은 종교개혁 당시 과월절 준수를 명령했는데 판관 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 과월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2열왕23,22).
과월절에 어린양을 잡아 잔치를 하는 관습은 전통적인 유목민들의 봄철 축제와 갚은 관련이 있으며, 무교절은 보리와 밀농사를 짓는 정착민들이 봄철에 추수한 첫 곡식으로 제사를 지내며 축제를 지낸 것에서 유래되었다. 특히 겨울철 우기 동안 새로 돋아난 풀을 뜯고 새끼를 낳는 때이기 때문에 일종의 가축 수확을 기념하는 감사절로 볼 수 있다.
‘과월절 하가다’ 예식을 드리는 유다인 가족 : 이 의식은 모두 15단계의 순서가 있는데 축복문, 성서 구절, 노래, 전설, 해석 등 출애굽에 관련된 모든 종류의 유다인 문학이 망라되어 있다. 오늘날 이 쎄데르는 정중한 종교의식이라기보다는 온 가족이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웃으며 진행할 수 있는 일종의 가정 미사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세계 유다인들도 과월절과 무교절을 일년 중 가장 성대한 절기로 지킨다. 이 절기의 자세한 규정은 탈무드의 ‘패싹힘’편에 잘 나와 있다. “칠일간 너희 집안에서 누룩이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출애12,19)라는 말씀에 따라 과월절 이틀 전부터 완벽한 무교절을 지키기 위한 준비로 ‘누룩 찾기’ 행사를 실시한다. 일종의 봄철 대청소로서 집안 구석을 살피며 온갖 종류의 누룩이나 누룩이 들어간 모든 식품(과자, 빵, 케이크, 술 등)을 찾아내어 불에 태워버린다.
나아가 평소에 빵과 같은 누룩이 들어간 음식물을 담거나 요리했던 그릇도 물에 끓이거나 불에 달구어 누룩을 제거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모든 유다인 사회에서 누룩이 든 식품을 만들거나 판매할 수 없기 때문에 당장 처치 곤란한 과자류는 상점마다 해당 진열장을 천이나 종이로 가려서 판매를 금지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세계 유다인들은 과월절과 무교절을 일 년 중 가장 성대한 절기로 지킨다.
과월절 만찬은 예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드셨듯이 유다인들의 성대한 진수성찬이다. 그런데 이 만찬이 다른 잔치와 다른 점은 바로 히브리어로 ‘쎄데르’라 불리는 의식 때문이다.
먼저 식탁에 반드시 올려놓아야 하는 음식은 누룩 없는 빵인 ‘마쫏트’와 포도주, 닭고기의 정강이 부분, 쓴 나물을 상징하는 상추, 삶은 계란, 그리고 달콤한 소스 등이다. 닭고기는 과월절 어린양을 상징하고, 달콤한 소스는 이스라엘 민족이 고센 땅에서 흙벽돌 만들 때 벽돌사이에 발랐던 모르타르를 상징한다. 하로셋이라 불리는 이 소스는 쓴 나물을 찍어 먹기 위한 것이며 꿀, 아몬드, 사과, 포도주 등을 섞어 만든다.
쎄데르에는 모두 15단계의 순서가 있는데 참석자들은 이미 만들어진 의식서를 보면서 진행한다.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식사까지 합쳐서 적어도 두 시간 이상 걸린다. ‘과월절 하가다’ 라 불리는 이 의식 서에는 축복문, 성서구절, 노래, 전설, 해석 등 출애굽에 관련된 모든 종류의 유다인 문학이 총망라되어 있다. 쎄데르의 첫머리에는 키두쉬라 불리는 축복문을 낭독하며 과월절 의식 시작을 선포한다. 이어서 진행자가 식탁 위의 마쫏트를 떼어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주며 모두들 축복문을 낭독하고 또한 이 중에서 한 조각을 집구석에 숨긴 다음 아이들로 하여금 찾으면 푸짐한 과월절 선물을 주기도 한다. 쓴 나물을 소스에 찍어먹으면서 조상의 힘들었던 노예생활을 상기시키고 정강이뼈를 통해 어린 양 희생을 상징한다.
쎄데르 의식 중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포도주를 마시도록 되어 있다. 도중에 준비한 저녁식사를 하고 식후에도 계속해서 쎄데르를 진행한다. 오늘날 이 쎼데르는 정중한 종교 의식 이라기보다는 온 가족이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웃으며 진행할 수 있는 일종의 가정미사인 셈이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도 유다인들의 과월절 쎄데르로 볼 수 있다. 우선 제자들은 이 특별 만찬을 예루살렘의 특정한 장소에서 진행하기를 원했다(마태 26,17). 예수 자신도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왔는지 모른다.”(루가22,15)고 고백했다. 예수는 쎼데르의 순서에 따라 먼저 마쫏트를 떼어 나누어 주면서 축복한 다음 포도주도 함께 나누었다. 과월절의 쎼데르에서도 의식을 진행하는 집안의 가장이 마쫏트를 떼어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며 포도주를 따르면서 축복문을 낭독하게 되어있다. 유다를 지칭하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마태26,23)일란 곧 쓴 나물을 찍어 먹는 소스를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서 주변 (17)
오메르의 절기
“너희가 곡식단을 흔들어 바친 그 안식일 다음날부터 만 일곱 주간을 보내고 맞게 되는 그 일곱째 안식일 다음날까지 세면 오십 일이 될 것이다. 그때 너희는 새로운 곡식 예물을 야훼께 바쳐야 한다”(레위 23,15-16).
오메르(Omer)
오메르는 원래 구약성서 본문에서는 제사로 성전에 바치는 곡식단을 일컫는 말인데 나중에 절기상으로 과월절 둘째 날부터 칠칠절까지 49일간의 기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기간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의 곡식 추수기와 일치한다. 지역과 그해 기후에 따라 이른 추수의 결과 과월절과 무교절 축제가 이루어지고 계속 추수가 진행되어서 늦어도 칠칠절까지는 추수를 끝내게 된다.
49일간의 오메르 기간은 전통적으로 액운이 있는 슬픈 통곡의 기간으로 지켜왔는데 그 이유는 신약시대 이후인 서기 132-5년에 일어났던 바르 코크바 혁명 당시 오메르 기간중 랍비 아키바의 제자 24,000여 명이 전염병으로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유다교 전승에 의하면 오메르 기간은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받은 사건을 좀더 엄숙하게 기념하고자 하는 준비기간이라고 한다.
오메르 기간 중 중요한 관습 중의 하나는 애도의 표시로 수염이나 머리털을 자르지 않은 것이다. 또한 결혼식 같은 즐거운 축제는 이 기간 중 안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도 해마다 5월에는 결혼을 금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 이유는 5월이 레무리아(Lemuria)의 달로서 죽은 자의 영혼들이 지상으로 올라와서 삶의 질서를 해치기 때문이었다. 이에 영향받은 중세 유럽에서는 4월의 마지막 밤을 ‘월푸르기스(Walpurgis) 밤’으로 지내며 모닥불과 함께 밥을 세운다. 후대에 ‘오월의 날(May Day)’ 로 굳어진 5월 첫날에는 야외에서 귀신들을 쏘아 맞추는 활쏘기 대회를 개최한다.
오메르 기간 중에 유다인들은 중세에 형성된 유다교 현자들의 교훈집인 ‘피르케이 아봇트’를 공부한다. 모두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과월절 후 매주 한 장씩 읽고 그 뜻을 되새긴다. 특히 마지막 제6장이 토라에 관한 것이어서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전수받은 것을 기념하는 칠칠절을 준비하게 된다.
라그 바오메르(Lag BaOmer)
오메르의 기간 중에서 단 하루 동안 슬픔에서 벗어나 기쁨을 만끽하는 기념일이 바로 라그 바오메르이다. 성서에 등장하지 않는 비교적 후데에 형성된 라그 바오메르는 신약시대 이후 로마 세계의 세속적인 요소들이 유입된 민속절이기도 하다. 라그 바오메르에서 ‘라그’는 히브리어 알파벳 중에서 라메드와 김멜을 합친 것으로 숫자로는 33이 되며 오메르 기간 중 33일째 되는 날이라는 뜻이다. 라그 바오메르의 33일째는 유럽에서 액운이 있다는 오월이 지나고 유월 첫날부터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데 4월 30일부터 계산할 때 33일째 액운이 해제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다교 전승에서는 서기 2세기 초 바르 코크바 전쟁 당시 아키바의 제자들을 괴롭혔던 전염병이 오메르 33일째부터 물러가기 시작했고, 또한 그날에 로마군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절기로서 라그 바오메르에는 주로 야외로 나가 고기를 구워먹고 특히 저녁부터 밤을 세우며 지내는 ‘모닥불의 밤’ 으로 이어진다.
오메르 기간 동안 금기시했던 수염과 머리털을 자르는 의식도 행해진다. 특히 세 살 된 사내아이의 머리털을 자르면서 옆머리를 꼬아서 정통파 유다인의 상징인 ‘피욧트’를 만들기 시작한다.
칠칠절(Shavuot)
“그로부터 칠 주간을 세어라. 밭에 서 있는 곡식에 낫을 대던 그때로부터 시작하여 칠 주간이 지나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려주신 만큼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예물을 바치며 너희 하느님 야훼께 추수절 축제를 올려라”(신명 16,9-10).
오메르의 49일이 지나고 50일째 되는 날은 칠칠절로 지켜진다. 히브리어로 칠칠절은 한 주간을 의미하는 ‘샤부아’의 복수형인 ‘샤부옷트’ 라 불리며 일곱 주를 센 다음 지켜지는 절기라는 뜻이다. 칠칠절은 과월절이나 초막절, 또는 부림절과는 달리 어느 달의 보름이라는 일정한 시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과월절 첫날부터 50일째이기 때문에, 과월절이 들어 있는 니싼과 그 다음달인 이야르의 한 달 기간이 29일, 또는 30일이냐에 따라서 씨반 제5일에서 제7일 사이에 올 수 있는 유동적인 절기이다.
칠칠절은 팔레스티나 지방의 농사 절기상으로 과월절부터 시작된 밀과 보리 등의 곡식 추수를 마감하는 날이다. 또한 계절적으로 첫 여름 실과가 맺히는 날이어서 과일을 성전에 바치기도 한다. 이 지역에서 과일 추수는 칠칠절부터 시작해서 가을의 초막절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칠칠절은 항상 성전 제사에서 햇곡식으로 만든 빵과 첫 열매를 바치는 곡식과 과일의 양대 제사로 기념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서기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이후로 성전 제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칠칠절의 종교적 의미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과월절과 초막절이 모두 출애굽과 관련이 있듯이 비록 성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칠칠절도 시나이산에서의 모세에 의한 토라의 전수라는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라는 전승이 형성되었다. 랍비들에 의하면 출애굽 50일째 되는 날 토라를 받았다는 것이다. 칠칠절에는 흰옷을 즐겨 입고 우유나 치즈가 들어간 음식을 많이 먹는데 그 이유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토라를 받을 때는 아직 유다교의 음식율법인 ‘카세르’가 확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날에 유다인들은 회당에 모여서 밀 추수와 관련된 룻기를 낭독하며 십계명이 나오는 출애굽기 19-20장을 읽는다.
칠칠절과 오순절, 맥추감사절
기독교 전통에서 유다인들의 칠칠절은 사도행전 2장에 근거하여 오순절과 성령강림절로 지켜진다. 당시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유다인들 중에는 멀리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은 모두 칠칠절을 맞이하여 성전에 제사 드리러 온 순례자들이었다. 또한 개신교에서 이 주간의 주일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기도 한다.
성서 주변 (18)
티 샤 베 아 브 (성전 파괴일)
구약시대 후기 유다교에는 일 년에 네 차례 금식 일이 있었다. 유다교 달력으로 넷째 달인 탐무즈 제17일붙 다섯째 달인 아브 제9일까지 3주간은 슬픈 애도의 기간으로 지켜진다. 이 기간에는 결혼식 같은 축제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까지도 금지된다. 탐무즈 제17일은 유다교인들 사이에서는 준 금식 일로 지켜지며 아침 해뜰 때부터 저녁해질 때까지 마시는 것을 포함한 일체의 식사가 금지된다.
티샤 베아브는 히브리어로 아브달 제9일이라는 뜻인데, 기원전 586년 바로 이날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가을철의 대 속죄일과 함께 대표적인 애도의 날로 지켜진다. 아브달은 성서시대에는 봄철의 니싼을 첫째로 치기 때문에 다섯째 달이 된다. 기원전 586년 이후부터 가을철 추분이 들어 있는 티슈리 달을 새해 첫 달로 선포하는 전승이 생겨났다. 이는 팔레스티나의 계절상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 오늘날에도 이 전통을 따라 가을철 티슈리 달을 첫째 달로서 양력으로는 7, 8월에 해당된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는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지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당시 남쪽의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침으로써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원전 612년 바빌로니아가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했고, 유다는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이집트와 신흥제국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기원전 605년 북부 시리아의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바빌로니아가 이집트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유다는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하지만 기원전 601년 이집트가 바빌로니아 군대를 물리치고 다시금 유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자 할 수 없이 유다의 왕 여호야킴은 바빌로니아 왕에게 바치던 조공을 중단했고, 이를 계기로 느부갓네살 왕이 기원전 588년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구약성서에서는 우다 왕국의 마지막에 관해,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 시작일, 성벽파괴, 그리고 성전 파괴일 등을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다. 성서시대의 전투는 오늘날과 달리 무리하게 처음부터 성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목표물에 도착하면 그곳에 진지를 치고 성을 포위하는 작전을 실시한다. 예레미야서(52,4-6)와 열왕기서(2열왕 25,1-3)에 의하면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는 시드기야 제9년인 기원전 588년 열째(티벳) 달 제 10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 유다인들의 마음의 안식처요 성지 중의 성지이다. 해마다 아브달 9일이 되면 파괴된 성전의 이서벽에 모여 예레미야의 애가(哀歌)를 읽으며 옛날을 회상하고 통곡한다.
아시리아 군대가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함락시킬 때도 기원전 724년부터 3년 동안 그 성을 포위한 적이 있다(2열왕 17,5). 여름철 건기에는 6,7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고대 이스라엘 기후의 특성상 성을 포위하는 전술이 가장 효과적인 이유는 식량은 어느 정도 성안에 보관할 수 있지만 물은 많이 보관할 수 없으므로 결국은 항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성벽 공격을 쉽게 하고 빠져나가는 자들을 막기 위해 예루살렘성 주위로 토성을 쌓았다(2열왕 25,1). 예루살렘은 1년 6개월을 버텼지만 그 동안 식량과 물이 동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었고 더 이상 방어 군이 활동하지 못하자 드디어 본격적인 성벽 파괴를 시도하였으며, 탐무즈달 제9일에 성벽을 뚫고 적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다(2열왕 25,3 ; 예레 39,2. 52,6).
일단 성벽이 파괴되면 그 성이 함락되고 생존자들을 노예로 부리거나 포로로 자국에 이송하는데, 이와는 별도로 성안의 신전을 파괴하게 된다. 특히 신전 파괴 행위는 고대 근동에서는 정복자의 매우 중요한 일종의 의식이었고 그 안에 안치되어 있는 신상을 전리품으로 가져감으로써 그 도시의 수호신도 패배한다는 상징을 띠고 있다.
한편 성전 파괴 일은 성서의 자료에 따라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아브달 제7일(2열왕 25,8)과 아브달 제10일(예레 52,12)이다. 따라서 후대에 기록된 탈무드는 성전 파괴 일의 날짜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성전파괴는 제7일부터 시작되어 제10일에 끝났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절정에 이른 시기가 제9일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탈무드의 해석을 근거로 이날을 공식적인 성전 파괴 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서기 70년 아브달 제9일에 헤로데 성전이 로마 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유다인들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성전이 모두 같은 날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날을 금식과 애도의 날로 지키는 것이다. 또한 유다교 랍비들의 해설집인 미드라쉬는 출애굽 이후 가데쉬 바르네아에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자들의 결과가 부정적이어서 야훼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도록 벌을 내린 날이 바로 티샤 베아브라고 한다. 마침 이날에 유다교 역사사상 가장 비참했던 스페인으로부터 추방(1492년)이 시작되어서 유다인들은 더욱 이날을 의미 있게 보낸다.
티샤 베아브의 금식은 전날 저녁 해질 때부터 시작된다. 금식을 시작하기 전날 오후에는 애도 음식인 삶은 계란과 렌틸 콩으로 만든 수프를 먹는다. 티샤 베아브가 시작되면 흰옷을 입고 회당에서는 성전 파괴를 읊은 애가 서를 낭독한다.
다음날 저녁까지 하루 동안 금지되는 사항들은 식사, 음료, 목욕, 향수, 가죽신발 등이다. 심지어 토라를 읽는 것도 금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토라 읽기가 기쁨의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욥기나 예레미야서의 성전 파괴 부분 등을 읽기도 한다. 회당에서는 맨발로 바닥에 앉아서 애가 서를 낭독함으로써 애도를 표시한다. 신약시대 헤로데 성전의 기초가 남아있는 통곡의 벽에서 하는 기도도 이날에 행하는 중요한 일과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티샤 베아브는 정식 휴일이 아닌 준 휴일로 지켜진다.
성서 주변 (19)
안 식 일
오늘날 인류가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주일이라는 7일간의 주기는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천지와 인간 창조를 모두 끝마치고 7일째 쉬셨다는 유다 교의 안식일 개념에서부터 유래 됐다. 비록 요일은 다르지만 세계 삼대 유일신교인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각각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금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면서 나름대로 7일 주기를 준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7일 주기는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시간의 주기 중에서 달이 차고 기울어지는 정도에 따른 그뭄에서 보름까지의 15일을 절반으로 나눈 것,
즉 반달(半月)이 되기까지 7일이라는 기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낮이 매우 더운 중동지방에서는 저녁에 해가 지고 선선해지면서 사람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하루의 시작으로 여겼고 이 기준에 따라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철 따라 핵 지는 시각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수할 우려가 있어서 안식일은 항상 금요일 해지기 30분전에 시작해서 토요일 해진 후 30분 경에 끝나도록 정해놓고 있다. 따라서 약 30분의 여유가 있기 때문에 그 동안 모든 준비를 끝내고 실제로 해가 질 때는 절대적인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유다인은 안식일을 창세기에 의거해서 철저하게 쉬는 날로 지켜왔다. 따라서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십계명의 율법은 곧 일을 하지 말라는 금지사항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유다교에서 지키는 안식일에 관한 여러 가지 관습도 어떻게 하면 일하는 것을 방지하여 율법을 어기지 않도록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울러 유다교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기원전 500년경부터 안식일은 일을 하지 않는 날과 함께 회당에서 특별한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날로 지켜지기 시작했다.
안식일 회당 예배의 가장 중요한 순서는 토라, 즉 모세 오경의 낭독이다.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의 회당에는 소가죽으로 만든 토라 두루마리가 회당의 토라 벽장에 안치되어 있고 안식일 아침마다 이것을 꺼내어 그 주간에 해당되는 부분을 차례대로 낭독한다. 따라서 토라 두루마리에는 성서와 같이 장 절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토라 전체를 읽을 수 있도록 53개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가을철의 대표적 축제인 초막절 제8일째 되는 날인 ‘씸캇트 토라’, 즉 ‘토라의 기쁨’이라는 기념일에 회당에서는 신명기서 끝 부분과 창세기 첫 부분을 읽음으로써 토라의 일 년 낭독주기가 마무리되는 동시에 다시금 시작된다,
안식일의 유다인 가족 : 안식일에 회당에서 경배를 드린 유다인 가족이 머리에 카파를 쓰고 기도할 때 입는 탈리트를 어깨에 걸친 채 유다인 전용 거주지(메아 셰아림)의 거리를 거닐고 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고 율법에 따라 행동을 자제한다.
안식일에는 모든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집안에서 요리를 하거나 아궁이나 난로에 지피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전기 스위치를 켜거나 끄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가정에서는 가전제품을 사영하지 않거니와 조명용 전등도 사람 손으로 하지 않고 자동으로 켜지고 꺼질 수 있도록 타이머를 부착해서 놓았다. 불을 피워서 만드는 요리는 할 수 없지만 찬 음식을 데울 수는 있기 때문에 주방의 가스불 중 하나는 항상 켜두기도 한다.
자동차를 타는 것도 금지사항 중의 하나이며 비가 오더라도 우산을 쓰면 안 된다. 안식일 동안에는 음식을 먹을 수는 있어도 식사 후 설거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러 벌의 그릇을 준비해 놓는다. 책을 읽는 것은 허용되나 글씨를 쓰면서 공부하는 것은 금지되는 등 시대와 환경, 그리고 생활습관에 따라 안식일의 금지사항과 허용사항을 자세하게 규정해 놓았다. 안식일은 토요일 저녁, 해가 질 때 끝난다.
안식일 식탁 :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오후까지는 안식일이다. 한 주간의 식사 중 가장 고급으로 차려지는 안식일 식탁에는 두 개의 촛대에 촛불을 켜며 ‘할라’라 불리는 큼직한 빵과 포도주가 기본적으로 등장한다.
안식일 만찬과 키두쉬
유다인들의 하루의 기준이 해가 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이기 때문에 안식일 만찬은 금요일 저녁식사에 해당된다. 물론 식사 준비는 해지기 전에 끝마쳐야 하며 다음날 아침과 점심식사 분까지 미리 요리해 놓아야 한다. 한 주간의 식사 중에서 가장 고급으로 차리는 안식일 식탁에는 두 개의 촛대에 촛불을 켜며 ‘할라’라고 하는 큼직한 빵과 포도주가 기본으로 등장한다. 특히 빵과 포도주에 대한 축복기도의식을 히브리어로 키두쉬라 부르는데, 이는 창세기에서 이사악이 그 아들 야곱을 축복하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리신 이슬로 땅이 기름져 오곡이 풍성하고 술이 넘쳐나거라”(창세 27,28).
안식일 만찬이 시작되면 가장이 먼저 포도주를 잔에 따른 후 “축복 받으실 당신은 세상의 왕이신 우리의 주님이시며, 포도열매의 창조자이십니다”. 라는 기도문을 다같이 낭독하고 한 잔씩 포도주를 마신다. 이어서 빵 한 조각을 떼어 손에 들고 “축복 받으실 당신은 세상의 왕이신 우리의 주님이시며, 땅에서부터 빵을 가져오시는 분입니다.” 라는 축복 문을 함께 낭독한다.
피쿠악흐 네페쉬
히브리어로 피쿠악흐 네페쉬는 ‘생명의 보살핌’이라는 뜻이 있으며 주로 유다교의 율법 준수에 있어서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는 경우에 목숨이 율법에 우선한다는 일종의 상황 윤리적 예외조항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따먹는다거나, 병자를 고치는 등의 행위는 비록 율법상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사람의 목숨과 결부된 사항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쩌면 이로부터 유다교의 전통적인 피쿠악흐 네페쉬가 유래되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인명을 구하는 일과 관계 있는 병원에서 응급환자의 치료와 수술, 천재지변시의 구조활동 등은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어기고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세계 1600만 유다인 중에서 율법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은 정통파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3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날로 일상 생활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과연 어는 정도까지를 일하는 것으로 보아서 안식일에 금지해야 하는지는 공동체마다 그 구체적인 기준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성서적 관점의 안식일이란 하느님께서 7일째 쉬셨듯이 우리도 그 날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푹 쉬라는 것이고, 그래야만 다음 6일 동안을 활기차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자연적인 삶의 리듬이 종교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서 주변 (20)
카 슈 룻 트 (유다인의 음식 율법)
유다인들은 세계적으로 그 어느 민족보다 독특하고 까다로운 그들만의 음식 율법을 준수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기초한 이러한 전통적인 식품 규정은 그들이 수 천년 동안 이방민족 사이에 섞여 살면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동질성을 지켜온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국제선 비행기 기내식당에서도 큰 항공회사들은 유다인들을 이한 별도의 식사를 준비하고 사전에 예약한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만큼 철저하게 음식 율법을 지키는지 알 수 있다.
유다 민족의 독특한 음식 율법을 ‘카슈룻트’라 부르는데 ‘정확성’, ‘적절성’이라는 뜻이다. 넓은 의미의 카슈룻트는 비단 음식뿐만 아니라 유다교의 모든 절기를 지킬 때 준수하는 규정까지 포함된다. 유다민족의 음식 율법은 크게 도살하는 방법부터 시작하여 부정한 음식에 관한 금기 법, 특정한 절기에 지키는 음식 법 등으로 구분된다.
도살법 : 슉히타
짐승을 도살할 때에는 고통을 주지 않고 빨리 죽여야 한다.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은 가축을 빨리 죽이기 위한 그들 나름의 비법을 갖고 있는데 이를 슉히타라 부른다. 대부분 날카로운 칼날로 짐승의 목 부의 기도와 식도를 단번에 자름으로써 가축이 고통 없이 빨리 죽게 하고 피를 쏟게 함으로써 피를 먹지 말라는 율법도 함께 지키고 있다.
특정한 식품의 금기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첫 번째 금기 법은 “피가 있는 고기를 그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 9,4)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며 또한 피는 범죄자의 용서를 위한 속량으로 제단에 뿌리기 위해서다(레위 17,11 참조). 오늘날 이스라엘인들은 도살하는 과정에서 원심분리기 등으로 충분히 피를 제거하고 있으며 가정에서는 고기를 요리하기 전에 몇 시간 동안 물에 담가 피가 완전히 빠지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고기 요리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대체로 맛이 없는 편이다. 두 번째 금기 법은 족장 시대의 특정한 사건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가축의 환도 뼈 힘줄을 먹지 않는 것이다. 야곱이 야뽁 강변에서 형 에사오의 시기를 두려워하며 가족을 모두 건네 보낸 후 혼자 남아 있을 때 하느님과 씨름을 하게 되었고 이 와중에서 환도 뼈 힘줄을 다쳤다(창세 32,23-33). 오늘날엔 가축을 도살하는 과정에서 이 힘줄을 제거함으로써 율법을 어길 수 있는 소지를 없앤다.
육류와 우유 제품의 분리
유다 민족의 독특한 식사 관습인 육류와 유제품과의 철저한 분리는 “또 새끼 염소를 그 어미젖으로 삶아도 안 된다”는 구절(출애 23,19 ; 34,26 ; 신명 14,21)에서 비롯됐다. 유다인들은 이 구절을 확대 해석하여 모든 종류의 육류 요리와 우유 또는 각종 짐승의 젖으로 만든 유가공 식품을 함께 섞어서 요리하거나 먹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다. 한편 아브라함 시대에는 송아지요리에다 치즈와 우유를 곁들여 먹음으로써(창세 18,8) 아직 이 율법이 적용되기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유다인들이 경영하는 식당은 모두 고기식사 전용과 우유식사 전용으로 철저하게 구분된다. 심지어 우유를 갖고 고기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 각 가정의 부엌에서도 이 규정을 적용해 육류와 유제품을 다루는 식기와 요리도구까지도 각각 별도의 것을 사용한다. 그릇을 씻는 싱크대도 고기용과 우유용으로 따로 분리하는 등 철저하게 이 두 가지 식품이 섞이는 것을 방지한다. 유다인들은 대부분 이방인이 만든 음식을 꺼리는데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조리를 할 때 이 두 가지 식품을 섞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누룩 없는 빵 :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유다인들은 급하게 이집트를 빠져 나오느라 빵 반죽을 숙성시킬 여유가 없었던 그때를 기념하며 누룩 없는 빵을 먹는다(출애 12,39).
금기 식품의 종류
구약성서에서 규정하고 있는 전반적인 금기 식품 목록은 레위기 11장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조류․육류․어류 등으로 분류된 금기 식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고대 유목민들이 평소에 잘 몰라서 아예 먹지 않았던 것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부분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냈던 유목민들은 자연히 어류 중에서도 바다에서 나오는 각종 해산물을 알지 못해 꺼리게 되고 오직 대표적인 민물고기만 선호하게 됐다 또한 돼지고기에 대한 금기는 돼지가 유목에 부적합하기 때문이었다.
돼지고기는 유다인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도 먹지 않는데 이는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유목민의 관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건기와 우기에 따라 가축 떼를 몰고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들에게 돼지는 부적절하며 가장 적합한 가축은 양과 염소였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소 떼도 거느리다 보니 자연히 이들 가축이 최고 육류로 평가되어 가장 훌륭한 희생 제물로 성서에 등장하게 된다.
이는 정착 민이었던 그리스, 로마 민족이 그들의 대표적인 가축인 돼지를 신전에 바치는 것과 대조적이다.
과월절의 누륵 제거
이스라엘 민족이 급하게 이집트를 탈출하느라 미처 빵 반죽을 숙성시킬 여유가 없어서 누룩 없는 빵을 먹은 것을 기념하여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은 해마다 봄철 7일간 과월절을 지키는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는다. 집안에서 누룩을 제거하는 별도의 대청소를 하며 빵 외에도 맥주. 과자 등 누룩이 들어가는 모든 종류의 음식물을 이 기간 동안 만큼은 먹지 않는다.
금기의 해제
신약시대 요빠로 갔던 베드로는 한 건물 옥상에서 대낮에 온갖 부정한 음식물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사도 10,9-16). 비록 베드로는 유다인으로서 율법에 따라 하늘에서 내려온 부정한 음식물을 먹을 수 없다고 했으나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 는 명령에 순종하여 유다인들에게만 관심을 갖던 그가 가이사리아에 있는 이방인 고르넬리오에게 선교하는 계기가 된다. 유다인들은 이 사건을 음식 금기 율법의 해제로 보고 있다.
성서 주변 (21)
유다교의 회당
히브리어로 베이트 크네셋트라 불리는 회당은 그리스도교의 교회당, 이슬람교의 사원, 불교의 사찰과 비교되는 유다교의 고유한 예배장소이다. 회당의 기원은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에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하여 더 이상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는 야훼교의 위기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역사적인 증거는 없지만 당시 바빌론으로 유배되었던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마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그곳에서 종교적인 모임을 가졌을 것이고 이 장소를 최초의 회당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오직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사제들에 의한 제사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야훼를 이방 지역에서도 회당 모임과 기도를 통해서 만나게 되면서 야훼의 영역이 이스라엘에서 전세계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회당 모임이 활성화되면서 비로소 성전 중심의 야훼교와는 별도의 종교적 형태인 유다교가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기원전 515년 페르시아의 배려로 파괴된 성전이 예루살렘에 재건되었고 다시금 희생제사를 드리는 성전 중심의 야훼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회당은 팔레스티나보다는 오히려 외국에 흩어져 지내던 유다인 공동체, 즉 디아스포라 유다인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발견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고대의 기록을 통해서 밝혀진 역사상 최초의 회당에 관한 언급도 기원전 3세기경 이집트에서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비해서 팔레스티나 회당은 기원전 63년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약시대 예루살렘에만 480개 회당이 있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회당은 성전과는 다른 일종의 순수한 공회당 성격의 모임 장소였으리라 추정된다. 지금까지 밝혀진 고고학적 발굴 결과 예루살렘․맛사다․헤로디움․가믈라 등의 회당이 서기 1세기의 것으로 판명됐다.
당시 성전과 회당이 공존하던 상황에서 특히 기원전 167년 마카베오 혁명 이후 수립된 하스몬 왕조 시대부터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두가이파와 지방 마을마다 흩어진 회당에서 토라를 연구하고 가르치던 바리사이파 사이의 종교적․사회적․사상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리스어로 회당을 ‘쉬나고게’라 하는데 이는 곧 ‘모임’을 의미하며 오늘날의 마을회관 같은 역할을 담당하여 중요한 회의나 경조사 때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기도하는 장소로서의 회당은 ‘프로수케’로 불렸으며 매주 안식일 오전에 오경 두루마리을 낭독하는 순서를 중심으로 성인 남자들이 모여서 기도문을 외우며 예배를 드린다. 회당에서는 매일 새벽 기도회를 갖기도 하는데 성인 남자 열 명이 모여야만 그 기도가 성립된다. 이 열 명은 소돔과 고모라 파괴당시 아브라함이 원했던 의인 열 명에서 유래되었다. 회당 기도에 필요한 성인은 일반적 기준의 성인이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 만 13세가 되어 바르 미쯔바라 불리는 성인식을 마친 남자들을 말한다. 회당 예배에서는 ‘하잔’이라 불리는 찬양 지휘자의 선창으로 기도문을 낭송한다.
회당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유다인들이 일 점 일 획도 바꿀 수 없는 토라, 즉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성경말씀을 소가죽에 직접 손으로 기록한 토라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토라 함으로 대부분 회당 전면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곧 예루살렘을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예배 참석자들이 기도할 때 회당 전면, 즉 예루살렘 성전 산을 향해 기도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회당 특징 중의 하나는 독경대가 회중과 마찬가지로 회당 전면을 향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에서 인도하는 지도자는 회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면을 바라보게 된다.
회당은 다른 종교 기관과 마찬가지로 강연회 등을 통하여 토라를 비롯한 구약성서와 미쉬나․탈무드․할라카 등 유다교 경전에 관한 교육도 실시한다. 특히 신약시대 이후 회당에는 본당 옆에 교육관이 있어서 마을의 학교 역할을 담당했다. 그밖에도 회당에는 유다교의 정결 의식에 따른 종교적인 목욕을 위한 미크베(הוקמ)가 설치되어 있어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신자들은 이곳을 이용하게 된다. 고대 회당에는 숙박시설이 있어서 여행 중인 나그네를 위한 여관으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소아시아를 비롯한 지중해 일대에서 선교 여행 당시 대부분 유다인 공동체가 있는 도시를 순방했으며, 회당에 딸린 숙소에서 머물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건축 적 차원에서 회당 특징 중의 하나는 종교의식을 진행할 때 남녀가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예배를 보는 2층 난간이 있다는 점이다. 회당은 대부분 마을마다 있어서 자동차를 탈 수 없는 안식일에 걸어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내부 좌석 배치가 유다교 교파마다 다른 점은 가장 보수적인 정통파 회당에서는 토라 낭독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회당 한 가운데 독경대가 있고, 그 양쪽으로 남자들이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으며, 여자들은 회당 2층 양쪽 끝 회랑에 앉게 된다.
개혁파 회당에서는 토라 낭독과 함께 설교나 강연도 진행되기 때문에 예배를 인도하는 앞쪽 강단과 뒤쪽 회중석이 분리되어 있다. 또한 개혁파 회당에서는 남녀가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오늘날 회당은 건축 적으로 외관상 뚜렸한 특징은 없고 현대식 건물로 설계하기도하지만 회당을 상징하는 메노라로 불리는 칠 촛대의 상징이 외벽에 장식되어 있어서 회당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유다인으로서 토요일 안식일을 회당에서 지낸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에 다시 회당에 모여 그들의 사상을 토론하며 지내는 모임에서 역사상 최초의 교회가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헤로데 성전이 반란군을 진압한 로마군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되면서 성전제사를 기반으로 한 이스라엘의 야훼교는 r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때부터 회당이 유다인들의 유일한 예배장소가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유다교가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성서 주변 (22)
탈무드란 무엇인가?
미쉬나의 한 부분이 아봇(A팻) 편에는 유다인들의 일반 교육에 있어서 “5세부터 구약성서를, 10세부터 미쉬나를, 그리고 15세부터 탈무드를 가르치라.”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탈무드가 전통적인 유다인 교육 중에서 가장 어려운 최종 과정임을 잘 알 수 있다. 유다교의 가장 핵심적인 경전은 두 개의 토라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는 기록된 토라(written torah)이고 다른 하나는 구전된 토라(oral torah)이다. 기록된 토라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구약성서의 오경이고 구전된 토라는 미쉬나와 탈무드이다.
모세오경은 이미 확정되어 기록된 것이기에 더 이상 일 점 일 획의 가감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유다인들의 생활 속에서 불거져 나온 재판 소송 결과를 다룬 미쉬나는 시대에 따라 그 적용 방법과 기준이 달라지면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재해석될 수 있는 유동적이고도 상황 윤리적인 성격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적 규범을 통틀어 할라카(Halakah)라 부르며 이런 의미에서 미쉬나 자체를 할라카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구전으로 축적된 미쉬나와 탈무드는 수많은 랍비들의 끊임없는 해석과 이에 대한 재해석이 한꺼번에 뭉뚱거려진 유다교 아카데미즘의 완결 판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다교의 탈무드를 유다인들의 지혜의 보고로서 동양의 명심보감쯤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원래의 탈무드는 그처럼 단순하게 유모와 위트가 넘치는 이야기만을 모아놓은 명언집이 아니다. 단지 특정 저술가들이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탈무드의 몇몇 에피소드만을 골라 이야기체로 간단하게 엮어낸 책들이 국내에 소개된 결과일 뿐이다. 탈무드가 복잡한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법적인 소송과 분쟁에 관련된 사례를 주제별로 편집한 미쉬나(Mishnah)라 불리는 유다교의 판례집에 간한 상세한 해설서인만큼 탈무드가 어떤 책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뼈대가 되는 미쉬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 쉬 나 (기원전 50 - 서기200)
히브리어로 미쉬나는 구전된 율법을 ‘연구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됐다. 이와 비교되는 미크라는 ‘낭독한다.’는 뜻으로 구약 전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미쉬나는 서기 200년경 당시 유다인 공동체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sanhedrin)의 지도자였던 유다(Judah ha-Nasi)에 의해 나자렛 근처의 세포리스에서 편찬되었다. 그 내용은 대부분 기원전 50년부터 서기 200년까지 약 250년의 기간 동안 산헤드린 법정에서 150여 명의 랍비들이 판결을 내린 재판의 판례를 편집한 것이다. 중세의 유다교 학자였던 레쉬 라키쉬(Lesh Lakish)는 미쉬나가 모두 여섯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사야 33장 6절에 의거했다고 시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 구절에는 신앙․시간․힘․구원․지혜․지식 등 모두 여섯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각각 씨앗(즈라임)․절기(모에드)․여성(나쉼)․피해(네지킨)․거룩(코다쉼)․정결(토호롯트) 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나쉼과 네지킨은 민법․상법․형법 등의 재판 관련 판결문이고. 나머지는 농사에 필요한 규정(즈라임), 유다교의 종교적 절기를 지키는 데 필요한 규정(모에드), 그리고 성전 제사와 토라에 의한 율법(코다쉼)가 기타 일상생활의 정결 의식에 관한 규정(토호롯트)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특히 코다쉼을 통해서 구약시대 성전 제사의식의 상세한 규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여섯 부분을 각각 히브리어로 ‘순서’라는 뜻을 지닌 세데르(ד??)라 부르는데 하나의 세데르는 마세카라 불리는 여러 개의 장으로 이루어 있으며, 전체 미쉬나는 모두 63개장으로 구성된다. 미쉬나가 일종의 판례집이고 계속해서 일상생활의 재판에서 적용되는 만큼 새로운 해석과 판례가 첨가되기 시작하며 그 결과가 탈무드라는 집대성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탈 무 드 (서기 200 - 600)
서기 313년 그리스도교에 관한 호의적인 칙령을 선포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기 324년 팔레스타인 지방을 본격적인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었다. 당시까지 주로 로마 및 주변의 이방 종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유다교의 전통을 나름대로 지켜올 수 있었던 유다인들은 막강한 제국의 후광 아래 진행되는 조직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의 개종운동에 거의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유다인들은 교육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고 회당에서 미쉬나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법전의 각 구절에 대한 여러 랍비들의 해설이 첨가된 단편이 팔레스타인에서 서기 400년경부터 ‘게마라(Gemara)'라는 이름으로 편집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을 탈무드의 기원으로 볼 수 있으며 바빌로니아의 것과 구분하여 팔레스타인 탈무드, 또는 예루살렘 탈무드라고 부른다.
한편 그리스도교 중심부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빌론에서는 유다인 공동체가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종교적․학문적 전통을 dbn지하면서 미쉬나에 대한 좀더 다양한 해설(게마라)을 첨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기 500년을 전후하여 아모라이파(Amoraim)에 속하는 학자들의 게마라가 첨가되었고, 세보라이파(Seboraim)와 게오니파(Geonim)가 그 전통을 차례로 이어받았다.
전반적으로 탈무드는 미쉬나․게마라 그리고 아가다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모두 5,900여 쪽에 250만 단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바빌로니아 탈무드 중 3분의 1은 미쉬나 법조항 적용과 이에 대한 해석을 다룬 할라카이고 나머지는 유다 민족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이야기․예화․전설 등을 모은 아가다(agadah)이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탈무드 연구 중심지는 네하르데아․수라․품베디타․마호자․나레쉬․마타메하시아 등이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된 탈무드는 18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라틴어를 비롯한 서구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탈무드의 지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성서 주변 (23)
유다인과 성서의 땅
유다 민족은 세계 그 어느 민족보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애착이 강한 집단이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도 여러 군데에 걸쳐 야훼가 그들에게 땅을 약속했고 그에 따라 땅을 차지하는 구절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러한 땅에 관한 집착은 1948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과 주변 세력간의 다섯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세계적인 평화를 위협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다. 유다인들의 땅에 관한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근본적으로 팔레스티나가 성서에 언급된 약속의 땅이라는 명분론이고 다른 하나는 일단 정착한 후에는 주위 아랍 세력으로부터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땅을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실제론 이었다. 유다인과 땅의 문제는 성서에 등장하는 그들 조상들의 원래 고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롯됐다. 어떻게 자기들의 고향이 아닌데 그토록 역사 속에서 그곳이 바로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이라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을까?
유다인의 고향, 바빌론과 이집트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리적인 관점에서 ‘바빌론에서 바빌론으로’, ‘이집트에서 이집트로’라는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두지역은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중심지였다. 바빌론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라는 상징을 갖고 있다. 천지창조, 에덴 동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의 지리적 배경이 메소포타미아일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이 직접적인 조상으로 손꼽는 아브라함의 고향도 갈대아 우르, 즉 메소포타미아였다.
바빌론에서부터 출발한 유다 민족의 역사는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한 다음 유다 왕족과 귀족들을 포로로 삼아 바빌론으로 유배시킴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따라서 비록 그들이 포로로 잡혀갔지만 어떤 면에서는 조상들의 고향으로 귀환했다고도 볼 수 있다.
유다 민족의 또 다른 고향은 이집트였다. 비록 요셉에 의해 이집트로 내려갔지만 출애굽 사건은 이집트에 정착했던 한 소수민족이 고향을 떠나 이국 땅 가나안으로 향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들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이 거의 살지 않는 중앙 산악지대에 정착했고 그 지역이 훗날 이스라엘 왕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가나안 민족이 주로 거주했던 해안 평야지대가 팔레스티나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현상은 1948년 지중해 연안의 해안 평야를 차지한 이스라엘이 중아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공동체를 지배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그 지리적 중요성이 입증된다. 기원전 586년 유다 왕국의 종말과 함께 일부 유다인들이 바빌론 정권을 피해 이집트로 망명을 간다. 이들의 지도자였던 예레미야는 거센 땅에서도 야훼로부터 말씀을 받아 예언활동을 지속하였고 이집트 디아스포라의 기원을 이루었다.
또한 에덴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네 개의 강도 엄밀히 따지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암시함을 알 수 있다. 첫 번째의 비손강은 비록 그 어원상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과 금이 나오는 하월리 땅을 적신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이집트의 나일강과 비교 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이고 기혼강은 바로 예루살렘의 기혼 샘에서 흐르는 것으로 본다면 에덴 동산은 당시 알려진 두 문명의 축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상징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돈을 주고 산 가나안의 땅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기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창세 12,7),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 그 시신조차 묻을 땅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처럼 구약성서에는 유다민족의 조상이 가나안의 원주민으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땅을 구입한 사실이 몇 군데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구절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국가에서, 특히 정통파 유다인들이 강조하는 그들의 땅문서로 여겨지고 있어서 팔레스타인 민족과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필이면 이들 네 군데는 모두가 팔레스타인 아랍 민족의 중심도시이기 때문이다.
땅 이름 |
땅 주인 |
구입자 |
가 격 |
성서구절 |
헤브론 |
헷사람 에브론 |
아브라함 |
은 400 세겔 |
창세23, 1-20 |
세겜 |
하몰의 아들들 |
야곱 |
은 100 세겔 |
창세33,18-20 |
예루살렘(타작마당) |
아라우나 |
다윗 |
은 50 세겔 |
2사무24,15-25 |
사마리아 |
세멜 |
오므리 |
은 2달란트(800세겔) |
1열왕 16,24 |
평화를 위한 땅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결성된 시온주의의 중심 이념은 유다 민족의 조상들이 야훼로부터 약속 받았고 오랫동안 정착했던 팔레스티나에 구체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비극적인 중동전쟁을 겪은 오늘날 유다인의 땅에 관한 집착은 서서히 평화에 관한 희망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1967년 유다인의 평화를 보장받기 위해 전쟁을 통해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를 빼앗았지만 1982년 이집트와의 평화조약을 맺은 후 이 땅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또한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에서부터 1998년 미국의 와이리버 협정에 이르기까지 거론되고 채택된 기본정신은 ‘평화를 위한 땅’ 정책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군은 1967년의 6일 전쟁에서 점령했던 요르단 서안에서 부분적으로 철수했다. 이것은 성서시대부터 약속의 땅을 쟁취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던 전통적인 유다인들의 땅 사상과 대치되는 것이었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이 시점에서 ‘평화를 위한 땅’, 즉 평화를 얻기 위해 이미 점령했던 땅을 임자에게 돌려주는 이스라엘의 평화정책은 이제 그들이 더 이상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들의 후예가 아니라 엄연히 성지 이스라엘엣 주인공 행세를 하는 정착민임을 은연중 드러내는 매우 용감하고도 성숙된 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제는 유다인들의 고향이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서 주변 (24)
유다인․유다교․이스라엘
유다인
야곱이 레아로부터 얻은 넷째 아들인 유다인 열두 지파 중의 하나로 출애굽 이후 가나안 중앙 산악지대 남부에 정착했다. 다윗은 헤브론을 중심으로 정치적․군사적 세력을 결집하여 여부스 민족의 요새였던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기원전 1000년경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부자간의 세습으로 이루어지는 다윗 왕조가 시작된다.
왕정시대 유다인은 좁은 의미로는 유다 지파에 속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부류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기원전 920년경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남 왕국 유다에 살던 사람들을 지칭했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게 함락 당하자 유다의 지도층들이 포로로 잡혀갔고 이미 북 왕국 이스라엘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게 함락되어 먼 지방으로 강제 이주됐던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통틀어 유다 인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종교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된 현대사회에서도 유다 인들은 민족성과 종교가 일치되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희귀한 집단이다. 즉 유다 인이라면 유다 교인이며 유다 교인이라면 유다 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유다 교로 개종한다면 그는 곧 유다 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에 약 1600만 이상의 유다 인이 살고있으며 이중에서 450만 명 정도만 조국인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나머지 70퍼센트는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아마 전세계적으로 자기 나라보다 외국에서 훨씬 많이 살고 있는 민족은 유다 인뿐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계 100여 개국에 흩어진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된 민족이며 인종적으로도 백인은 물론이거니와 에티오피아 출신 흑인에서부터 아랍계․인도계․중국계 유다인에 이르기까지 외관상 거의 모든 민족을 총망라하고 있다. 유다인은 전통적으로 편협되고 배타적이어서 결속력이 강한 민족으로 인식되며, 특히 재물에 집착하여 일찍부터 경제계를 평정한 민족으로 평가된다. 또한 모계혈통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종족보존 방법론에 힘입어 유아기에 결정적인 교육의 영향을 유다인 어머니로부터 받은 덕분에 우수한 두뇌 소유자들로 역사에 기록되기도 했다. 유다인의 긍정적인 배경은 유일신 야훼를 믿고 토라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유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다교
그리스도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유일신교 중에서 뿌리의 역할을 했던 유다 교는 그리스도 교와는 달리 철저한 현실적인 종교로 발전되고 있다. 따라서 내세관보다는 현세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을 야훼의 축복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아브라함이 자손으로, 즉 야훼가 선택하신 선민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굳이 종교적 제의와 인간적 노력을 통해 사후 심판의 결과 영생을 얻는다는 개념은 매우 희박하다. 또한 민족성과 종교가 일치하다보니까 굳이 이방인을 유다 교인으로 개종시키려는 선교의 개념도 겨의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유다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유다인들의 민족주의이자 철저한 인종주의 같이 비치기도 한다.
유다교가 역사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인격젹인 신 개념, 즉 유일신교를 성립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유다교는 어디까지나 현세적 삶에 관심이 많은 만큼 시대 상황에 따라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율법, 즉 할라카가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만들어지는 특징이 있다.
한 예로서, 노동을 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현대인의 삶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며, 즉 어떤 종류의 활동이 율법에 저촉되는 노동이고 또 어떤 활동이 안식일에도 허용되는 가라는 물음에 대해 유다교는 상황에 따른 적절한 판단으로 규정을 수정하고 새로 재정하기도 한다.
워낙 자유스러운 분위기여서 그런지 유다 교인들은 당장 도래하는 메시아를 기대하는 정통파부터 시작해서 철두철미하게 문자 그대로 율법을 지키려는 보수파, 현대사회에 적응하려는 개혁파, 좀더 자유스러운 종교활동을 보장하는 자유파 등 그 분파가 매우 다양하다. 나아가 성인식이나 결혼식 등을 제외하고는 회당 가까이에 가지도 않은 세속파까지 있어서 유다교인의 다양성은 그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스라엘
야뽁 강변에서 야훼의 사자와 겨루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야곱의 별명 이스라엘은 기원전1200년경 이집트 문서에서 가나안의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역사에 등장한다.
다윗 왕조에 의한 이스라엘 국가는 세겜과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 왕국의 국명으로 이어지다가 근대에 와서야 빛을 보게 됐다.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의 헤로데 성전이 파괴되는 사건을 역사 속에서 야훼가 다스렸던 신정국가의 종말로 본다면 1948년 5월 14일 팔세스타인에서 예루살렘을 수도로 설립된 이스라엘은 전혀 새로운 개념의 세속적인 국가로 탄생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의 정통파 유다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국가의 세속적 존재의미를 부정하며 오직 야훼만이 다스리시는 신정 개념의 이스라엘을 꿈꾸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국가 이스라엘은 19세기 말 시온주의라는 정치적 운동에서 비롯됐고 설립 초기부터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하되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당시 현존하는 최고의 국가 이념으로 망라된 이상적인 국가관으로 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의한 유다인 학살사건은 서구를 비롯한 많은 나라의 전폭적인 외교적 지지를 얻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주변 아랍 국들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스스로 국가를 지키려는 사생결단의 위기 앞에 다섯 차례나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하고 인식되기도 했다. 세계사의 변천과 함께 중동평화의 진전과 동시에 정치적 안정 속에서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첨단 산업을 통한 경제적 부흥에 치중하며 제2의 솔로몬 제국을 꿈꾸고 있다. 유다교를 마치며
유다 인들이 선민이어서 역사 속에서 축복을 받았고 동시에 야훼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는 이중적인 운명론보다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한 인과관계 속에서 운행되는 보편적인 신의 섭리가 지구상의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유다 인들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단지 그들이 사상과 이념이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와 아랍 제국의 이슬람교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세계사의 핵심 역할을 한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기에 오늘날 세계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유다인과 유다교,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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