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주변(지상성지순례) 1
김성/협성대학교 교수․성서고고학자
소아시아(터키)의 역사와 문화
때는 서기 30년경 초여름 유다 민족이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칠칠절에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왔다. 이들은 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인 갈릴래아 사람들이 외국어인 자기네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디아스포라 유다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고향 리스트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만도 자그마치 열다섯 군데나 되며 모두가 당시 로마 제국 행정체제의 주 단위 지방이었다.
이 명단은 파르티아․메대․엘람․메소포타미아․유다․갑바도기아․본도․아시아․프리기아․밤필리아․이집트․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아 지방, 로마․그레데․아라비아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파르티아를 비롯한 여섯 군데가 오늘날의 터키에 위치해 있다.
서기 40년대 길리기아 지방의 다르소 출신이 바오로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본부로 삼고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다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방문했다. 모두 세 차례에 걸친 선교 여정과 마지막 로마로 향하는 뱃길 등은 새 천년을 맞는 우리에게도 항상 새로운 여정으로 다가온다. 앞으로 약 2년에 걸쳐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터키 대륙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적인 유적지 탐방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터키의 지리적 배경
터키는 동서의 폭이 1.700킬로미터, 그리고 남북의 길이가 700킬로미터에 달하며 전체 면적이 78만 평방킬로미터인 거대한 대륙이다. 그 중에서도 유럽 쪽 부분을 뺀 아시아 지역의 터키를 예로부터 아나톨리아 또는 소아시아로 불렀다. 소아시아는 북으로는 흑해, 서로는 마르마라해 그리고 남으로는 지중해에 둘러싸여 전체 해안선 길이만 8,400킬로미터나 된다. 따라서 이곳의 기후는 바닷가의 온난한 해양성 기후와 내륙 고원의 온대성 기후가 교차한다. 북쪽으로는 본도 산맥, 남쪽으로는 토로스 산맥과 아마누스 산맥이 바닷가에 위치해 있고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지붕이라 일컫는 자그로스 산맥이 자리잡고 있다.
창세기에서 노아의 방주가 안착했다는 아라랏산이 바로 이 자그로스 산맥에 위치하며 해발 5,140미터로서 터키의 최고봉이다. 또한 터키 동쪽의 고원지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젖줄이던 티크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발원한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비록 건기인 여름철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지만 지하수가 풍부하고 일년 내내 수량이 풍부한 하천, 그리고 기름진 토양 등으로 인간이 살기에 쾌적한 조건을 고루 갖춘 곳이 바로 터키이다.
터키의 역사적 배경
서양 고대문명은 그 언어학적 배경에서 셈어족과 인도유럽어족으로 크게 양분 된다. 그 중에서도 바로 인도유럽어족의 최초 고향이 터키라는 학설이 최근에 제기되었다. 즉 이곳에서부터 동쪽으로 인도에까지 퍼진 부류가 아리아 민족이고 북쪽으로는 카프카스 민족, 그리고 서쪽 그리스 본토로 초기 그리스민족이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터키는 또한 인류문명사이에 있어서 수백만 년 동안의 구석기 시대를 청산하고 농사를 기초로 한 정착사회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밀, 보리, 귀리 등 곡식류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터키의 최초 문명의 주인공은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 기원전 2600년경의 하티 또는 원(原)-히타이트 민족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원전 7500년경에 성벽은 지닌 도시였던 챠탈후육이 세워져서 석기시대의 문명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900년경부터 본격적인 인도유럽어족인 히타이트 민족이 터키 중앙고원지대에서 하투샤시를 중심으로 강력한 왕국을 형성함으로써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못지 않은 제3의 세력이 고대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됐다. 기원전 1200년경 그리스 본토와 섬 지역에서 이주해 온 바다 민족에 의해 히타이트 제국이 붕괴되고 300-400년간의 암흑기가 지속되었다.
기원전 800년경 남서쪽 에게해연안 도시를 중심으로 우리가 오늘날 고대 그리스라고 부르는 문명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철학․문학․자연과학․예술 등을 꽃피운 황금기의 그리스 문명은 숲이 우거진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솟아 있고 그곳으로부터 흐르는 하천, 그리고 넓게 펼쳐진 들판이 한데 어우러진 이상적인 터키 산하에서 형성됐다. 기원전180년대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 세력이 서서히 소아시아로 확장되면서 로마 제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비잔티움을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고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면서 비잔틴 제국이 시작됐고 서기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2세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1100년간의 그리스도교 시대가 막을 내렸다. 셀주크 튀르크 민족이 주도권을 쥔 오스만제국은 중동뿐만 아니라 동부 유럽에까지 그 영향력을 끼친 막대한 세력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막을 내렸다. 오늘날 유럽식으로 근대화된 터키는 1923년 아타 튀르크에 의한 공화국이 탄생되면서부터였다.
바오로의 선교 여정의 지리학
사도 바오로의 출생지인 터키의 다르소, 교육받은 곳인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회심의 장소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잠시 들렀던 요르단의 페트라, 선교본부가 있었던 터키의 안티오키아, 세 차례에 걸친 선교 여행지인 키프로스․터키․그리스 그리고 그의 로마 행 배가 난파하여 상륙했던 몰타, 마지막 여정인 동시에 순교지인 이탈리아 등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9개국 50여 도시 및 장소에 달한다.
당시에는 로마 제국 번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유상과 해상 교통이 발달했고 도시도 부흥했기 때문에 사도행전 등에 나타난 사도 바오로의 여정은 비교적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의 여정은 지리적 인접성 때문에 일반적으로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t아시아의 일곱 교회 지역과 바오로의 편지 수신 지역 등을 포함하여 연구하게 되며 이들 모두를 합하면 60여 군데에 이른다
그 중에서 바오로가 잠시 스쳐간 지역을 제외한 그의 사목과 관계된 중요한 지역과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그리고 기타 중요한 일반 유적지를 포함하면 대략 30군데이다. 사도 바오로의 여정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건 순서에 따라 회심 여정, 선교 준비 여정, 세 차례 선교여행,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향한 여정 등으로 구분된다.
성서주변(지상성지순례) 2
히타이트, 소아시아 최초의 고등문명
소아시아에서 최초로 형성된 고등문명이 바로 히타이트이며 기원전 2000년경부터 세력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고대 근동의 대표적인 셈족과는 달리 인도-유럽어를 구사하는 첫 번째 민족이었다. 원래 성서의 헷 민족에서 유래된 히타이트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서야 그 역사성이 밝혀진 민족 중의 하나이다.
창세기(23,1-20)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그 아내 사라가 죽자 무덤을 만들기 위해 헤브론의 히타이트 사람 에브론으로부터 막벨라 동굴을 은 400세겔에 구입했다고 한다.
과연 아브라함 시대로 알려진 기원전 2000년경 이미 히타이트 민족의 일부가 헤브론 지역에 정착했을까?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히타이트 민족은 기원전 1000년 이후 시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신(新)히타이트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02년 노르웨이의 언어학자 크누존(J,A, Knudtzon)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기원전 14세기의 한 외교문서를 해독하면서 새로운 인도 - 유럽 어를 발견했으며 이를 히타이트어로 추정했다. 또한 1906년부터 시작된 보아즈커이 발굴에서도 이와 똑같은 언어로 쓰여진 토판문서를 수천 점 발견하면서 오직 구약 성서에서만 알려진 전설적인 히타이트 민족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히타이트 민족이 역사상 최초로 철기 문명을 발전시킨 장본인이라는 가설은 사실은 고문서 해독 오류로 밝혀졌으며, 동시대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청동기 문화를 보유한 것으로 보인다. 히타이트이 전성기는 시대별로 고대 히타이트 왕국시대(기원전1750-1500)와 히타이트 제국시대(기원전 1450-1180)로 양분된다
히타이트의 중심지역은 터키의 중앙 고원지대인데 이곳은 멀리 동쪽에서 발원한 할리스강이 남서쪽으로 돌아서 북쪽의 흑해로 빠져나가면서 천연적인 지리적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고원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수량이 풍부한 샘과 하천이 산재해 있으며, 주변의 비옥한 땅은 밀과 보리 등의 곡식농사를 짓거나 목초지를 이용한 대규모 목축업도 가능하다.
오늘날 누구든지 고대 히타이트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발굴을 통해서 r 면모가 잘 밝혀진 대표적인 유적지인 보아즈커이, 야즐르카야 그리고 알라자 후육 등을 답사해야 하며 이들은 모두가 앙카라에서 하루 여정으로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보아즈커이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아즈커이는 모두 6킬로미터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도시의 면적이 1.7평방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메트로풀리스였다. 1년 내내 물이 흐르는 두 개의 하천을 끼고 있는 보아즈커이는 그리스 시대 이전에 건설된 소아시아 최대규모의 도시로서 이미 이집트 문서릉 통해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로 알려진 하투샤인 것으로 밝혀졌다. 도시 안에서, 특히 깊은 골짜기로 인해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아크로폴리스 지역은 요새로 개발됐으며, 오늘날 버역칼레라 불린다. 버역칼레는 길이가 250미터, 폭 140미터 규모이며 바위로 된 천연적인 요새로 히타이트의 왕들이 거주했던 왕궁이 있고 하투샤의 행정적 중심지였다.
풍부한 물과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봉즈커이에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있으며, 기원전 1900년경에는 티그리스강 유역의 아수르 세력이 이곳에 무역 거점도시인 카룸 하투샤를 운영했다. 기원전1720년경 하투샤는 외적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한동안 주거 공백 상태로 있다가 기원전 1650년경 본격적인 히타이트 민족의 세력이 형성되면서 고대 히타이트 왕국이 시작된다.
보아즈커이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6개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왕들의 문, 사자 문 등으로 명명된 이 성문에는 정교하고 웅장하게 새겨진 부조가 문 양편에 있으며 위쪽 성벽의 무게를 감안한 뾰족한 아치 모양의 성문으로 건설됐다.
보아즈커이에는 7개의 신전이 건설됐는데 모두가 한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방들이 사방으로 둘러싸인 고유한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오늘날 보아즈커이는 누구든지 쉽게 방문할 수 있으며 자동차를 타고 성벽을 따라 유적지를 일주하도록 되어있다.
야즐르카야
보아즈커이 북동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야즐르카야로 불리는 바위로 둘러싸인 아담한 성소가 있다. 이 성소는 바위 앞 평지에 건설된 신전과 성스런 바위로 구성되어있다. 특히 바위 절벽에는 고깔모자에 치마를 입고 부츠를 신은 신들의 행진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부조로 새겨져 있어 당시 히타이트 민족의 종교를 엿볼 수 있다.
바위 부조에는 모두 82명에 달하는 남 신과 여신, 그리고 왕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각 인물의 높이는 80센티미터에서 2.5미터에 달한다. 날씨의 신 테슈브와 그 아내인 태양의 신 헤바트, 달의 신 쿠슈 등이 확인 됐는데 신들의 이름은 히타이트 상형문자로 기록 되어 있으며 기원전1500년 이후 후르리 민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알라자 후육
보아즈커이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또 하나의 히타이트 도시인 알라자 후육이 자리잡고 있다. 전체 면적이 약 80 평방미터로서 비교적 작은 도시지만 신전과 궁전, 그리고 모두 13기에 달하는 왕들의 무덤이 발굴된 곳이다. 특히 성문 입구 양쪽에 세워진 스핑크스상과 부조는 히타이트 예술의 백미로 꼽힌다.
근처 마을에 위치한 박물관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기원전 1180년경 히타이트 제국이 붕괴된 후 그 잔재세력은 기원전 800년경부터 카라테페, 하란, 카르케미쉬 등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로서 명맥을 유지했으며 이를 신 히타이트라 부르고 있다.
성서주변(지상성지순례) 3
우라르투 - 아라랏
기원전 1200년경 히타이트 세력이 에게해 지역에서 이주해 온 바다 민족에 의해 붕괴된 후 터키 본토에는 약 300년간 중요세력이 형성되지 않는 과도기를 거쳤다. 기원전 900년경 이 지역에서 히타이트에 이어 역사적으로 두 번째로 형성된 세력이 우라르투(Urartu) 왕국이다. 히타이트가 할리스강 유역의 중앙고원지대에 자리잡은 반면 우라르투는 동쪽 고원지대의 반(Van) 호수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구약성서의 아라랏
지명인 동시에 민족 이름이기도 한 우라르투는 구약성서에는 홍수 이후 노아의 방주가 처음으로 안착했다는 아라랏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경우 특정한 산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레이 아라랏’, 즉 ‘아라랏 산지’로 기록된 만큼 넓은 의미의 고원지대를 일컫는 것으로 봐야 한다. 기원전 586년 이후 바빌론으로 유배된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된 창세기의 홍수 이야기는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의 홍수신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리적 관점에서 대홍수가 그치고 물이 빠질 때 가장 높은 고원지대에 방주가 안착했다면 바로 아라랏 산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시리아 와 산헤립의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는 열왕기하(19,37)와 이사야서(37,37-38)에 의하면 산헤립이 니느웨의 한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이 아들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암살자들은 쿠데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라랏 땅’, 즉 우라르투 지방으로 망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우라르투가 아시리아의 적대 세력임을 감안할 때 이 기록은 어느 정도 역사적인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예레미야서(5,27-28)에서는 기원전 590년경 아라랏, 민니, 아스그낫(스키타이). 메대 등의 왕국이 동맹을 맺고 바빌론에 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아라랏은 특정한 산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고원지대에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서 기원전 900년경 이후 300여년 동안 번창했던 우라르투 왕국을 염두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라르투의 기원과 발전
터키 남동부 지중해 연안지역에서 기원전 9세기 전통적인 고전시대의 그리스 문명이 꽃피기 시작할 때 동쪽 끝 반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고원지대에는 우라르투라고 불린 한 부류의 민족이 강력한 도시를 중심으로 왕국을 형성했다.
원래 우라르투는 지역 이름으로 기원전 13세기 아시리아 문서에 우루아트리(Uruatri)로 처음 등장한다.
우라르투의 중심지역은 오늘날 쿠르드민족의 중심지로서 반, 세반, 우르미야 등 세 개의 호수를 연결하는 삼각지역인데 노아의 방주가 맨 처음 닿았다는 창세기의 아라랏산은 바로 이 삼각지역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기원전 900년경부터 이 지역에 대한 아시리아의 끊임없는 군사적 원정을 견디다 못해 우라르투 민족은 좀더 서쪽에 위치한 반 호수 근처로 그 중심지를 옮겼다.
따라서 기원전 858년에 기록된 샬마네세르 3세의 원정기록에는 그가 반 호수 남쪽에 있는 수구니아(Sugunia)를 점령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원전 830년 사르두리(Sarduri) 1세는 천연적인 바위 요새인 반 칼레시를 수도로 삼아 투슈파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뒤를 이은 이슈푸이니와 메누아 왕은 멀리 북동쪽 아락세스강 유역까지 점령하여 우라르투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기원전 714년 아시리아의 사르곤2세는 우라루트의 중심부를 점령했고 이것을 기점으로 우라르투의 세력은 점점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카프카스 지방의 유목민인 키메리아 민족의 세력 확장과 기원전 590년경 스키타이 민족이 메대 민족과 함께 터키 동부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우라르투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지금까지 발굴된 대부분의 우라르투 도시에서 심하게 파괴된 주거층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당시 매우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라르투 민족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를 빌려 자기들의 언어로 표기했으며 그 어족상 셈어나 인도 - 유럽어가 아닌 일종이 후리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그들은 부근에 있는 구리와 철 광산을 무대로 고도의 금속 제련술을 발달시켜 청동제 무기와 철제도구를 제작했다.
반(Van) 호수
해발 1,800미터 높이의 고원지대에 있는 반 호수는 3,800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로 그 일대가 우라르투 민족의 중심지가 되었다. 서쪽에 위치한 해발 2,950미터 높이의 네무로트산이 화산폭발을 일으키며 흘러내린 용암이 호수로부터 빠져나가는 출구를 막았기 때문에 이 호수에는 소금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광물질이 축적되어 마시는 물이나 농업용수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호수 주변 평야에 하천이 많고 비록 호수가 염수이지만 이에 적응하는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어서 반 홀수 지역은 일찍부터 우라르투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호수 변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아타마르 섬에는 9세기에 세워진 ‘거룩한 십자가 교회’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
반 칼레시(Van kalesi) - 투슈파(Tushpa)
반 칼레시는 우라르투 왕국의 수도로서 반 호수 동쪽 평원에 주위보다 100여 미터나 높고 길이가 1,8킬로미터에 달하는 천연적인 바위 요새로서 우라르투 기록에서는 투슈파로 나타난다. 투슈파는 사르두리1세에 의해 기원전 830년경 우라르투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건설되었다.
우라르투 시대에는 이 바위 언덕이 서쪽 부분만 요새로 활용되었고 오늘날 볼 수 있는 성채는 대부분 서기 1000년경 셀주크 시대부터 건설된 것이다. 요새 남쪽 절벽에는 바위굴 무덤이 만들어졌고 아르기슈티(Argishti) 무덤 입구에는 ‘호르호르 연대기’라 불리는 우라르투 기록이 남아있다.
아라랏산 (아르산)
터키어로 ‘아르 다으’, 즉 ‘아르산’이라 불리는 아라랏산은 터키에서 가장 높은 해발5,137미터의 ‘대아라랏산(번역 아르 다으)’과 바로 옆에 있는 해발 3,895미터의 ‘소아라랏산(커척 아르 다으)’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봉우리는 1년 내내 흰눈으로 덮여 있어서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며 비잔틴 시대부터 노아 방주의 안착 지인 아라랏산으로 여겨진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몇몇 탐험가가 아라랏산에서 노아 방주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아직 뚜렸한 증거는 없다.
성서주변(지상성지순례) 4
트로이 전쟁의 신화와 역사
미케네 문명의 붕괴와 암흑기의 시작
소아시아에서 본격적인 그리스 문명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800년경으로 소위 고전 그리스 시대의 출발점이다. 기원전 1200년경 그리스 본토의 막강한 미케네 왕국이 붕괴된 후 지둥해 유역은 약 400년 동안 역사상 가장 기니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바로 이 암흑기가 시작된 출발점이 트로이 전재사건이며 에게해를 사이에 둔 도시국가들의 세력 다툼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원전 13세기 미케네 도시국가는 근처의 티린스, 필로스, 테베 등을 거느리고 지중해 유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험한 산중에 욱중한 거석으로 쌓은 난공불락의 성벽에 둘러싸인 요새도시들은 미케네 군주로 그리스와 인근 섬 지역을 통치했으며 하려한 채색벽화로 장식된 궁전, 웅장한 규모의 무덤, 잘 발달된 토기들, 그리고 선문자(線文字)라 불리는 고유한 글을 지닌 문명으로 발전했다.
미케네 문명이라 불리는 그리스 본토 최초의 이 고등문명은 기원전 17세기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13세기에는 전성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원전 1200년경 당시 현존하던 미케네 세력권내 도시들 대부분의 기능이 정지됐다. 이 증거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 심하게 불에 탄 파괴 층을 발견함으로써 밝혀졌다.
역사학자들의 전통적인 가설에 의하면 그리스 북부로부터 야만민족의 일파인 도리아족이 남하했고 이들의 영향으로 미케네 왕국이 붕괴됐고 기존의 정착민들이 새로운 영토를 찾아 에게해 쪽으로 진출하면서 소위 바다민족이라 불리는 일종의 해상 유랑민들로 변했다. 이들은 당시 막강했던 히타이트 제국을 비롯해서 우가리트 왕국 등을 파괴했고 시리아 -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도 후기 청동기 시대의 잘 발달된 도시들이 붕괴됐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 미케네 문명의 붕괴는 인구증가, 기후변화, 생산량 감소, 도시들의 경쟁 등 복합적인 원인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트로이 전쟁의 신화
트로이 목마를 비롯한 트로이 전생의 신화적인 이야기들은 기원전 9세기 인물이었던 호메로스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알려진 일리아드아 오딧세이를 통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트로이의 왕비 헤쿠바는 자기몸의 복부로부터 불길이 솟아 나와 온 트로이 도시를 불태우는 악몽을 꾼다. 이 꿈의 해몽은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도시를 파괴한다는 것이어서 왕은 사내아이를 낳자마자 깊은 산속에 버릴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한 목동이 이 아이를 발견해 데려다 길렀고 이름을 파리스라 불렀다. 장성한 파리스는 자신의 출생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게 됐고 그리스로 건너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렌을 납치하여 토로이로 데려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다.
부인을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를 도와서 그리스 모든 도시의 왕들이 수십만 명의 군대를 모집했고 미케네 왕 아가멤논을 중심으로 네스토르, 아킬레스, 오딧세우스 등의 영웅들이 합세했다. 이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수천 척의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트로이를 공격했다.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는 아들인 헤토르와 파리스를 내세워 완강히 저향했고 요새 덕분에 이들의 공격을 10년간이나 저지할 수 있었다.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지루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오딧에우스는 목마를 만들고 자신을 포함한 병사들을 그 안에 숨기는 계략을 짜냈다.
다른 그리스인들은 배를 타고 마치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척 바다로 나가서 테네도스 섬 뒤쪽으로 숨었다. 단지 한 명의 병사만 남아서 이 목마를 아테네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며 트로이인들이 기꺼이 받아줄 것을 청했다. 이 모든 전술은 오딧세우스의 계획대로 진행됐고 트로이인들은 적의 선물인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들였다.
호메로스가 기록한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사건이 발행한 후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무용담을 종합적으로 편집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한 고고학자의 집념으로 트로이 전쟁이 역사적 사건으로 빛을 보게 됐다.
슐리만(H. S c h l i e m a n n)과 트로이 발굴
전설이라고만 알려졌던 트로이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역사적 도시로 밝혀낸 사람은 독일 출신의 사업가였던 슐리만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품에 지니고 다니며 트로이 전쟁의 현장을 직접 발견하리라는 꿈을 지녔고 이를 실현키 위해 유럽과 미국에서 사업에 성공해 막대한 재산을 쌓았다.
1870년 그는 고대 트로이로 여겼던 히싸를릭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고 호메로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성벽과 궁전 터, 무덤 등을 차례로 발굴했다.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은 고고학 연구사에 있어서 텔이라 불리는 고대의 유적지 언덕이 세월에 따라 겹겹이 쌓인 주거층들의 집합체이며, 각 주거층들의 상관관계를 통해 그 도시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주거층론을 처음으로 확립한 계기가 된다. 1873년에 발견된, 모두 수천 점에 달하는 트로이의 보물 가운데서 중요한 유물들의 2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에서부터 러시아로 공수되어 비밀에 부쳐졌다가 지난 1991년 모스크바의 푸슈킨 박물관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오늘날 이스탄불에서 트로이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남쪽의 케샨(Kesan)을 지나 차나칼레 헤협을 건너가게 되는데 가장 좁은 곳의 폭이 1,4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 이곳은 역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길목으로서 각각 페르시아와 로마 황제들이 적진을 향해 동쪽으로 또는 서쪽으로 진격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차나칼레를 지나 남쪽으로 30킬로미터쯤 가면 트로이 역이 나오는데 매우 비옥한 평야를 이루고 있다. 트로이는 이 평야 한가운데 30여 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 언덕을 이루고 있다.
뜰에 세워진 상징적인 목마를 지나 유적지 언덕으로 오르면 아직까지도 발굴이 계속되는 모두 아홉 개에 달하는 주거층들이 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제Vlla 주거층이 틀이 전쟁시대의 것으로서 기원전 1180년경 파괴된 것으로 추정됐다. 좀더 자세한 분석 결과 토로이에는 초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3000년경부터 서기600년경 비잔틴 시대까지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모두 43개의 세분화된 주거층들이 발견됐다. 목마 옆에 있는 소규모 박물관에 체계적으로 진열된 사진과 그림 자료를 통해 트로이의 발굴 역사와 주거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성서주변(지상 성지순례) 5
트로아스, 트로이에서 아소스까지
이 지역의 이름은 이미 기원전 3000년경부터 주거지를 형성했던 중심도시 트로이에서 유래됐다. 트로아스 지방은 북쪽으로는 마르바라 바다, 서쪽으로는 차나칼레 해협과 에게해, 그리고 남쪽으로는 에드레미트만으로 돌러 싸인 반조지역으로서 예로부터 소아시아 대륙과 마케도니아를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기원전 1세기의 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보는 트로아스 지방이 울창한 숲과 기름진 평야가 어우러진 곳이어서 일찍부터 그리스인들이나 야만인들을 모두 끌어들여 정착시킨 곳이라고 기록했다. 트로아스의 남동쪽에는 최고봉이 해발 1,774미터나 되는 이다(Ida) 산맥이 자리잡고 있다. 트로아스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네안드리아․그리세 그리고 아소스를 들 수 있다.
그리스 식민지
터키 역사상 최고의 제국이었던 히타이트와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이 기원전 1200년경 몰락한 후 기원전 800년경 에게해 연안에 고전 그리스 문명이 꽃필 때까지 약 400년 가량을 암흑기라 부른다. 이 시기에 그리스 주민들은 본토에서 출발하여 에게해의 여러 섬 지방에, 그리고 건너편 소아시아 해안지역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주인공들이 바로 그리스 세 민족인 에올리아․이오니아 그리고 도리아 민족들이다. 에올리아인들은 원래 그리스 본토의 테살리와 보에티아 지방에 살고 있었으며 기원전 900년경부터 에게해를 건너 레스보스 섬과 소아시아 서해안 지역에 정착했다. 특히 이들의 주거분포는 북쪽으로는 트로이 지방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스미르나에까지 펴져 있었다. 이오니아 민족의 기원은 아테네 왕 코르도스가 이끄는 한 부류의 민족이 에올리아 남부지역에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오니아지역이 가장 기름지고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한다. 이미 기원전 800년경 이오니아 지방의 12도시는 동맹체를 결성했으며 이들은 밀레토스․에페소스․테오스․포케아․미오스․콜로폰․클라조메네․사모스․프리에네․레메도스․에리트레․키오스 등이다. 에올리아와 이오니아 경계에 위치했던 스미르나는 초기에는 에올리아 동맹에 속했지만 나중에는 이오니아 동맹의 13번째 도시로 동참했다.
이오니아 지방에서 진정한 의미의 고전 그리스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 문학의 호메로스는 스미르나 출신이었고 철학의 탈레스는 밀레토스에서 자랐다. 밀레토스는 모두 90여군데의 식민지를 개척했으며 그 중에서도 혹해 연안의 시노, 페․아미소스․트라페소스 등이 유명하다. 도리아 민족은 로도스와 코스 섬으로 이주했으며 인근 해안지방인 카리아 지역에 정착했다.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 (A l e x a n d r i a T r o a s)
바오로는 제2차 선교여행 당시 마케토니아로 건너가려고 배를 타기 위해 에게해 연안으 항구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에 들렀다(사도16,11). 또한 제3자 선교여행 당시 이곳에서 한밤중 그의 설교를 듣다 3층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유디코를 살리기도 했다(사도 20,7-12).
이 도시는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더의 부하였던 안티고노스에 의해 처음으로 건설되어 그의 이름을 따라 안티고네이아라 불렀다. 하지만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리시마코스에게 살해당한 후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로 개명됐다. 바다 쪽으로는 항구 자리가 있고 언덕에는 성벽․진전․극장․아고라․묘지 등의 유적이 발견됐다.
네 안 드 리 아 ( N e a n d r I a)
네안드리아는 기원전 700년경 에올리아 민족에 의해 건설된 대규모 도시였다. 성벽의 길이가 각각 1,500미터와 500미터인 대규모 도시로 밝혀졌다.
안티고노스가 안티고네이아를 건설한 후 이곳의 주민들을 새로운 동시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오늘날 이곳에는 기원전 700년경 건설된 초기의 에올리아식 신전 터만 남아있다.
크 리 세 ( C h r y s e )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에서 남쪽으로 35킬로미터쯤 가면 고대도시 크리세가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이곳에는 생쥐신 아폴로를 섬겼던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아폴로 스멘테오스 신전터가 잘 발굴되어 있고 그 옆의 조그만 박물관에는 신전의 벽을 장식했던 부조가 전시되어 있는데 트로이 전쟁 모습이 새겨져 있다.
크레테 출신의 테우세례는 가뭄과 기근을 피해 배를 타고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나서는데 이미 신탁을 통해서 ‘땅의 자손들’에 의해 그의 일행이 공격당하는 곳에 정착할 것을 지시 받았다. 그들이 트로아스 지방에 도착했을 때 마침 그들의 장비가 생쥐들에 의해 훼손된 것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생쥐의 주님이신 아폴로’ 신전을 세우고 정착하게 되었다. 크레테 민족의 쥐 숭배사상은 같은 해양민족의 한 부류였던 불레셋 민족이 기원전 1020년경 하느님의 궤를 전리품으로 차지한 대가로 계속해서 발생하는 재앙을 막기 위해 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금으로 다섯 마리의 쥐 형상을 만든 것과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 소 스 ( A s s o s )
오늘날 베람칼레(Beramkale)라 불리는 아소스는 바닷가에 우뚝 솟은 해발 240미터 높이의 바위 언덕에 건설된 요새도시 겸 항구도시로서 기원전 900년경 건너편의 레스보스 섬의 그리스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건설됐다. 아소스가 가장 번창했던 시기는 기원전 4세기 초로 풀라톤의 제자였던 헤르메이아스가 이곳의 통치자였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 같은 철학자들이 아소스에 머물면서 자연과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기원전 240년 이후로 이 지역의 중심지가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로 이동되면서 아소스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남쪽의 강대국이었던 페르가몬의 왕들에 의해 식민지로 다스려졌다. 제3차 선교여행 당시 바오로는 아소스 항구에서 배를 타고 일행과 함께 레스보스 섬의 미텔레네로 떠난 적이 있다.
아소스는 바닷가 언덕에 위치한 전형적인 그리스 시대의 도시로서 신전이 위치한 아크로폴리스와 바다 쪽 경사면의 아고라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아테네 여신을 모신 신전이 기원전 530년경 건설됐다. 신전터에서 사방을 바라보는 경치가 장관이며 멀리 레스보스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고라 지역에는 길이가 110미터나 되는 스토아와 김나지움, 극장 등이 있다. 기원전 4세기에 건설됐고 전체 길이가 3킬로미터나 되는 성벽의 잔재가 잘 보존돼 있다.
성서주변(지상 성지순례) 6
베 르 가 모
그리스어로 ‘페르가몬’, 그리고 현대 터키어로 ‘베르가마’라 불리는 이 고대도시는 동쪽으로는 셀리누스 하천과 서쪽으로 케티우스 하천 사이에 위치한 400미터 높이의 천연적인 바위언덕에 건설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베르가모는 기원전 400년경부터 도시로 발전했으며, 특히 기원전 320년경 알렉산드로스의 부하였던 리시마코스가 페르시아 제국의 전리품 금 9,000탈란트(320)를 이곳 금고에 저장한 것을 계기로 대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베르가모의 본격적인 왕조는 기원전 263년 유베네스 1세부터 시작하며, 아탈로스 1세(기원전 241-197) 시대에는 켈트족을 물리쳤고 유메네스 2세(기원전 197-160) 때 서쪽의 신흥세력 로마와 동맹을 맺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를 물리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베르가모 왕국의 지리적 경계는 메안데르강에서 코냐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으로 모두 500만의 인구를 다스렸으며,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가죽을 이용하여 만든 ‘페르가메나(pergamena)’라 불리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기원전 133년 아탈로스 3세가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양도함으로써 130년에 걸친 베르가모의 독립 역사가 막을 내렸다. 요한 묵시록 시대인 서기 1세기말 베르가모는 상업도시로서 그 명성을 떨쳤으며 “사탄의 왕자”(묵시 2,13)는 유메네스 2세 시대에 건설된 제우스 제단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베르가모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은 1877년 이스탄불에서부터 이즈미르까지 철도건서릉 책임진 독일의 카를 휴만(Carl Humann)이 시작했으며 1900년부터는 되르펠(W. Dorpfel), 1927년부터는 비가트(T. Wiegad). 1957년부터는 베링거(E. Boehringer), 1972년부터는 라트(W. Radt) 등대부분 독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이 진행됐다. 오늘날 모두 6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베르가모의 유적은 중심도시였던 언덕 위의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해서 시내에 위치한 ‘붉은 마당’과 박물관, 그리고 대규모 병원단지인 아스클레페이온 등에 흩어져 있다.
아크로폴리스
가파른 언덕 위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크로폴리스는 신전․궁전․극장 등이 위치한 정상 지역과 남쪽의 저지대에 위치한 김나지움 지역으로 양분된다. 정상에는 비교적 후시대에 건설된 트리아누스 황제의 신전과 약 20만 권의 도서를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도서관과 아테나 신전 등이 있고 서쪽의 가파른 경사면에는 베르가모 근처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약 1만 석 규모의 극장이 있다.
이 극장의 무대 부분에는 좌우로 길이가 250미터나 되는 테라스가 건설되었고 북쪽 끝에는 연극의 신 디오니소스 신전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 언덕 아래에는 각각 한 변의 길이가 70미터나 되는 제우스 제단이 건설됐는데, 삼면에 걸쳐 매우 아름다운 부조로 장식된 이 제단은 1870년대 카를 휴만에 의해 독일로 운송 됐으며 오늘날 일명 ‘페르가몬 박물관’이라 불리는 베를린 국립박물관에 원형 그대로 재건됐다. 남쪽의 저지대에는 헤라 여신의 신전과 데메테르 신전을 비롯해서 지형에 따라 모두 세 개의 층으로 건설된 일종의 체육 클럽 및 교육기관인 대규모의 김나지움이 자리잡고 있다.
붉은 마당 (Red Courtyard)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베르가모의 경계가 아크로풀리스 아래의 평지로 확장되면서 스타디움․극장․원형 경기장․이집트 신전 등이 건설됐는데 이 중에서 유일하게 발굴 보존된 것이 바로 이집트 신전이며, 이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베르가모 주민들에게 ‘붉은 마당’이라고 불리게됐다.
이 신전 마당은 셀리누스 하천에 직경 9미터, 길이가 150미터에 달하는 한 쌍의 아치형수로를 만들고 그 위에 건설됐으며, 이 마당의 동쪽 끝에 위치한 신전 규모는 길이가 60미터이고 폭이 26미터이다.
이 신전은 이집트의 세라피스와 이시스 그리고 하르포크라테스 등의 신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 서기 130년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됐다. 비잔틴 시대에 이 신전은 성 요한 기념교회로 재건되기도 했다.
베르가모 고고학 박물관
1936년에 문을 연 이 박물관은 터키에서 처음으로 발굴지의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대표적인 전시물은 기원전 525년경 조각된 쿠로스(남성상)를 비롯해서 하드리아누스와 카라칼라 황제의 석상이 있으며, 디오니소스․비너스 등의 신상도 볼 수 있다.
아스클레페이온(Asclepeion)
대규모 병원시설인 게르가모의 아스클레페이온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가장 유명한 시설로 손꼽힌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아폴로의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는 그의 어머니에 의해 산 속에 버려졌고 반인반수의 괴물인 켄타우로스가 데려다 키우면서 의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기원전 400년경부터 아스클레피오스가 의학의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병원이 건설됐다.
오늘날 불 수 있는 대부분의 구조물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인 서기 130년대에 건설된 것들이다. 마당 한가운데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분수대가 있고 동쪽으로는 도서관․프로필론․아스클레피오스 신전 그리고 지하 원형 치료소가 있다. 북서쪽에는 3,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 있어서 비록 병원 환자들이라 할지라도 연극과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을 잘 알 수 있다.
베르가모 출신의 유명한 의사로서 서기 2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갈렐(Galen)을 들 수 있는데 해부학으로 명성을 떨친 그는 이곳의 원형 경기장 검투사들의 전문치료사로 경력을 쌓았고, 나중에 로마에서 황제들의 전문의로 활동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아스클레페이온의 치료 방법은 먼저 깨끗한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며 진흙 마사지와 식사조절, 맨발 걷기와 약초를 이영한 약재처방 등이었다.
성서주변(지상 성지순례) 7
에 페 소 ①
지리적 배경과 역사
에페소는 이오니아 지방으 카이스터강이 에게해로 들어가는 하구에 위치한 비옥한 평야에 자리잡은 소아시아의 대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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