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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구약성서의 배경

dariaofs 2015. 2. 27. 16:54

구약성서 의 배경

성 서 란 ?

성서연구는 18세기말엽 개신교 측에서 역사비판학을 도입함으로써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전까지는 이 성서가 구원의 역사의 주역들(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베드로, 사도요한, 바오로) 이런 분들에서 쓰여진 것으로 믿어왔다. 하지만 금세기에 와서 고고학과 고문학의 발달로 성서의 세계가 당대의 세속문화와 역사의 비교 연구됨에따라서 성서의 다양한양식, 그리고 편집과정이 비교 연구됨에 노출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성서의 실재의 사건들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성서를 쓴 사람들의 문학적인 기교나 신학적인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과정을 역사비판학이라 한다. 이 역사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성서의 저작시기 그 자료의 기원과 전달과정, 성서의 각 권의 실재 저자들과 그들의 집필 동기나 신학적인 지향, 그들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문제점들, 그문제들을 어떻게하면 해결할까 하는 해결방안들, 보다 구체적으로 성서의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이건 역사비판학에 커다란 공헌이었다. 그렇다고 역사비판학이 결코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성서 저자들의 저술동기는 자신의 신앙, 그리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신앙을 표현하고 전달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신앙과 공동체의 신앙은 그 근원과 목적을 하느님께 두고 있다. 따라서 성서 저자가 자신의 신앙이나 공동체의 신앙을 전달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전달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표현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신앙을 전달하고 표현한다는 그 과정, 신앙이 생겨난다는 과정, 이것은 전부 하느님께서 유도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말이 섭리 유래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성서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 성서를 대충 훓어보게 되면은 이스라엘의 역사 (구약), 그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신약). 이것이 성서의뼈대 이다.

그런데 이 둘은 성서가 입고 있는 옷, 성서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뒤에 숨어있는 깊은 내용은 하느님이 누구신가? 그리고 인간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크고 작은 사건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과 가르침등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역사적인 사실로만 처리가 된다면은 지금 여기 20세기 후반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와 아무런 연관성을 가질 수가 없다.

 

실재로 이스라엘의 역사나 또한 예수님의 역사는 세속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다. 별로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 그런 사건들을 고정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 서 고공을 막론하고 왜 그토록 오랫동안 성서는 인류의 문화를 지배해왔는가?

그 이유는 성서의 그 속 알맹이 내용이 시공을 넘어서서 인류 전체의 커다란 충격을 던지면서 우리 인간성 정체를, 인간성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핵심 내용은 하느님의 소개와 인간소개, 이 둘은 성서의 어느페이지에도 드러나 있다. 성서를 보면 아무 대목이나 열어도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찾을수 있고 인간이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 사울 이야기, 바오로 이야기, 베드로 이야기,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빠져나와 가지고 광야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을 수시로 배반해 왔다.

 

이런 이야기들을 대하여 올 때 우리들은 즉시 아!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이야기구나, 나의이야기구나, 이렇게 알아듣게 된다. 우리는 그 성서 안에서 풍부한 인간성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의 족보들을 보면 그 안에 온갖 잡놈들이 다 들어가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느님은 인간성 전체를 다 끌여들여서 구원하시고자 하셨다. 우리 인간이 지을수 있는 모든 범죄에 총 막라해가지고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게 없다. 다 들어가 있다.

 

성서의 인물들을 가만이보면 우리와 별달리 특출한 인간이 아니다. 베드로, 바울로 사도들도 보면 서로 예수님을 전하다가 서로 다투기도 하고 얼굴도 붉히고 발나바 사도같으면 베드로 하고 뜻이 맞지않아서 너하고 여행 못하겠다 하고 중간에서 갈라져 따로 따로 여행하고 이런 것을 가만이보면 성서의 인물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감정을 지닌 연약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약점이 많고 연약한 그런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에게로 끌어들이시고 어떻게 그 사람들을 이용하시고 어떻게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시는가? 이것이 성서 안에는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은 아주 성실하신 분으로 나타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에게 성실하신 분으로 -----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그렇게 불충실한가?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인간의 불충실을 엮어내는 드라마가 바로 성서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 안에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야되고 나와 내 공동체를 위해서 주어지는 그 분의 말씀을 들어야 되고, 성서에 들어난 인물들의 행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나가야 될 삶의 방향을 정해야 될 것이다.

 

성서 저자들의 사고방식

성서 저자들이 들려주는 구수한 이야기들은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인류를 언제 어디서나 새롭게 교육시키고 있다. 참으로 다양하게 성서의 말씀들이 이야기로 전달되었다. 이야기속에는 반듯이 교훈이 있게된다. 이야기들을 통해서 후세를 계속해서 교육시키게 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구수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보면 그 안에 본질과 선, 악이라든가 무슨 윤리적인 것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설화들, 에집트에서 탈출한 그런 이야기들, 이런 것들을 보면 그 안에 대단한 윤리적인 교훈적인 요소가 들어있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이야기는 끊임없이 재해석 된다. 아무리 해석을해도 끝이 없다. 아주 풍부한 샘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류전체의 정신 문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이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같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조실록 가운데서 다윗의 부정실을 규탄하는 예언자 나단이 하는 말에 대단한 감동을 받는다. 임금님이 바로 그사람 입니다. 이 고발대목을 통해서 루터는 성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성서가 지적하고 있는 그런 비리는 바로 나의 비리구나, 이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참회의 전기를 마련했고 나중에는 더 나아가서 종교개혁을 단행하기로 했다.

 

우리가 전수받은 그리스도교는 분명 서구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 핵심 내용인 성서의 세계와 메시지는 다분히 동양적이다. 그런데 왜 같은 동양인으로 사고방식이 비슷한 성서 저자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알아듣기 힘든가? 그것은 그들과 우리사이에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천년 동안의 세월이 흘렀고 그리고 이 흘러간 세월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바로 고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서양학문이 해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땀과 노고가 성서의 핵심 내용을 깨닫는데 바쳐지고 일단 깨달은 핵심 내용은 자연스럽게 우리 주변에 동료들에게 우리처럼 시간과 정열을 화해서 성서공부를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바쳐져야 된다. 성서의 핵심 내용으로 접근하는 서구인들의 학구적인 노력과 성서의 내용을 직관적이고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우리의 동양사람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심성이 서로 만난다면은 바로 그 성태여부가 이 서양의 학문적인 방법론과 동양의 심성 조화여부에 달려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성서가 입고 있는 옷, 성서와 문화와의 관계를 살펴봐야겠다. 어떤 세대를 불문하고 그 세대가 외치는 그 목소리는 그 세대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인 옷을 반드시 입고 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자연질서와 구별되는 모든 것을 다 문화라고 한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 마을, 도시, 언어, 예술, 도구, 사회구조, 어떻든 인간의 노고와 창조성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든 것을 문화라고 한다. 세계의 여러곳에 또 여러세대에 걸쳐서 다양한 문화가 있었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문화의 높고 낮음을 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어떤 문화가 더 좋다, 서양문화가 더 났다, 동양문화가 더 났다, 한국문화가 더 우수하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있는 고유한 것은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 고유성은 자랑하고 인정할 수 있지만 그 고유성이 다른 문화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한국문화와 다른문화를 비교를 해가지고 우리문화는 다른문화보다 높다든가 이런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모든 문화는 다 하느님의 은혜라고 본다. 세계 여러곳에 다양한 문화가 있다. 참 커다란 은혜이다. 그 문화권 안에서 탄생하는 종교들도 하느님의 크신 선물들이다. 우리가 종교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과 부딫히게 되는데 부딫히는 이유중에 하나는 너무 우리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면은 다른 사람들도 진리를 소유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만이 옳고 그것만이 최상의 진리이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교들 안에 있는 진리는 전부 열등하고 형편없고 이런 식으로 낯추어 생각할 때 대화가 도저히 통할 수가 없다. 성서 저자들도 자기네 고유한 문화를 가졌다. 그들의 문화양식, 제사예식, 믿음과 기도의 표현 방법들은 우리에게 몹시 생소할 수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우리처럼 하느님과 그 분의 자비와 사랑, 인간의 불성실과 참다운 인간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 문화권을 가만히 살펴보면은 하느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개념은 천재, 하늘에 계신 커다란 임금님, 그래서 쭉 내려오다 보니까 한울님, 하느님, 이렇게 되었다. 개신교에서 너희가 믿는 신은 유일신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신은 하나이니까 하나님이고 너희가 믿는 신은 하느님이니까 하나이신 분이 아니다 라고 하지만 문법적으로나 우리의 신의 개념으로 본다면 하느님이 당연히 맞다.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신의 개념은 한울님, 하늘에 계신 큰분, 천재, 하늘에 계신 큰 임금님, 이런식으로 내려 왔다.

 

이렇게 내려오다가 200년전에 가톨릭이 들어왔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그 분은 서양 선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들여올 때 그때 서양 선교사들의 가방에 들여온 분이 아니다. 그렇게 수입된 분이 아니다. 이미 우리 민족이 믿어왔던 신 이었다. 우리 민족이 고백해왔던 신 이었다. 그 한울님이 좀더 명확하게 좀더 확실하게 우리한테 설명이 된 것뿐이다. 끝없이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가 이렇게 중요한데 그 문화를 이루는 요소들이 있다. 그 문화를 어떻게 창출을 시키느냐? 그요소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우선 지리적인 조건, 기후, 토양, 사회구조, 이런 것들에 의해서 문화가 조성이 되는 것이다. 성서의 탄생지인 고대근동의 기후와 지리적인 배경은 히브리인들의 생활과 언어와 사고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

 

예를 들어서 요한 복음에 보면 영원히 목마르지않을 샘물 (4,14)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처럼 수도꼭지 틀면 물이 쏴 나오는 그런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샘물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런데 메마르고 메말라서 물 한바가지만 가지고도 이것을 어떻게쓸까? 세수를 하고 손을 씻고 발을 씻고 이렇게 물이 아쉬운 지역에서는 샘물? 그것도 영원히 마르지않는 샘물이라면 귀가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물리적인 조건들, 기후와 지리 이런것들이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 냈고 야훼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은 바로 이 문화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화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체험을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된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창출해 낸 물리적인 조건들, 곧 기후와 지리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1. 지 리

 

팔레스티나의 지리는 비옥한 초생달로 표현되어 있다. ( 지도 설명 )

성서의 모든 사건들은 여기서 다 이루어 졌다. 지형이 왜 중요한가? 물 줄기는 지역 주민들의 생활의 형태를 전체적으로 바꿔 버린다. 큰 개울과 강이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또 우물과 오아시스를 중심으로해서 목축업이 발달되어 있었다. 때로는 유목민족들이 떠돌아 다니다가 강가에 자리잡고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는 농경민족을 침범하기도 한다.

 

성서 학자들은 성서의 이렇게 잡다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지역 전체를 비옥한 초생달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의 침범을 받지않고 유목민족의 침범을 받지않고 거기서 번영을 누려왔다. 물론 자기네들 안에서 각 축전은 있었다. 적어도 기원전 550년 폐르샤왕이 영토확장을 위해서 이 지역을 침범하기 전 까지는 조용한 생활을 해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의 겐지스강과 빈저스강 중국의 황화강유역 에집트의 나일강유역과 더불어서 세계 4대 문명 발생지로 손꼽히고 있다.

 

초생달 지역 가운데 제일 먼저 성서에 등장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 이다. 기원전 19세기에 살았던 인물로 아브라함을 보고 있다. 우르는 원래 항구 도시였다. 나중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이 실어나르는 모래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폐르샤만에서 내륙쪽으로 후태하고 만다. 원래는 폐르샤만이 바닷가에 있는 항구도시 였는데 지금은 상당히 안으로 들어와있다.

 

모래가 계속해서 표직되어 가지고 우르보다도 안쪽으로 폐르샤만 쪽으로 모래들이 들어서가지고 새로운 땅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우르가 좀 안쪽으로 들어가있다.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여행을 했는데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직선거리로 1,500 km가 된다. 평지뿐만 아니라 골짜기로 길을 돌아서 갈수도 있었으니까 실재여행은 2,000 km는 넘었을 것이다. 이 거리는 낙타로 여행할적에 40일은 걸렸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기서 어떻게 생존해 왔는가?

 

히브리 민족은 사실 전부 형편없는 노예계층, 돈을 받고 전쟁을 해주는 용병들, 사회의 불항아들, 죄짓고 도망가서 사는 사람들, 빚 얻어쓰고 떼먹고 도망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한 지역에만 몰려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저기 고대 근동지방 전체를 걸쳐서 에집트 북부를 에집트를 위시해서 여러지역에 다 퍼져있던 그런 민족이었다.

그리고 한 세기 뿐만아니라 여러세기를 걸쳐서 생존해왔던 그런 사람들이다. 우압지족, 한 마디로 우압지족인데 모세 라는 사람이 나타나가지고 에집트북부 고센지방에 살고 있던 노예계층을 단합을 시켰다. 그래서 그곳에서 탈출을 해서 도망을 나왔다. 그 다음에 여러 가지 경로를 밟아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나중에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강력한 왕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때 뿐이다. 그 다음에는 다시 이민족에 침범을 받아가지고 북쪽과 남쪽이 갈라지고 북쪽 왕국은 아시리아에게 멸망을 당한다.

기원전 721년에 북쪽 사람들이 아시리아에 끌려갔는데 그때 끌려간 사람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남쪽 왕국도 기원전 581년에 바빌론에 함락된다. 그러다가 폐르샤왕 고레스왕이 들어온다. 처음으로 이민족이 초생달 바깥쪽에서 들어와가지고 정복을 한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더 이상 이지역이 밀패된 지역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왜 선민의식이 생겼는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국가를 잠시하고 다음에 아시리아, 바빌론, 폐르샤, 희랍, 로마에 침범을 받으면서 한 마디로 강대국 틈에 끼어가지고 생존에 급급했다. 그래서 유배 전, 후로 해서 예언자들이 활약을 하고 그러면서 선민의식을 고취 시킨다. 그리고 하느님을 유일한 왕으로 추대를 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가만히 지켜보면 우리나라 역사와 아주 비슷하다. 강대국 틈에 끼어가지고 언제 다른나라 침범 한 번 못하고 계속해서 침범만 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도 약소 민족으로 남의 나라 침범만 당하고 살았다.

 

그래도 어떻게하면 눈치를 봐 가지고 조공도 바치면서 우리나라를 다른나라가 침범 못하게 하느냐? 이것이 그들의 정치절약 이었다. 그런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선민의식이 생긴것이다. 그들이 살던 팔레스티나 이 지역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름들이 있다.

성지, 가나안, 약속된 땅, 가나안 정착하기 이전에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 이후에는 맞지않는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기원전 922년 남 북 분단될 때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과 가끔 혼동을 가져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유대인) 이 이스라엘을 공식 국명으로 삼고 있다. 팔레스티나 라는 말은 불레셋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불레셋 사람들은 외계회 해양민족 이었다. 외계회는 희랍, 그리스영역에 있는 바다다. 해양민족은 세상에서 배를 타고 떠돌아 다니는 바이킹족이라고 생각 하면 된다. 바이킹은 해적이었지만 이사람들은 해적질은 안하고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자리 있으면 거기에 들어가서 산다.

 

기원후 135년 로마 황제 카드리아누스가 유대아라는 이름을 지도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하고 그리고 팔레스티나로 그 지역을 부르게 했다. 그 이후부터 이 지역을 팔레스티나로 통용이 되는데 지금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정하는데 성서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이 지역을 팔레스티나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팔레스티나 지방에 실재 지형은 북쪽에 단어라는 곳이 있고 남쪽에 브엘세바까지 남, 북으로240km , 서 로는 160km 대부분 낮은 구름과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에는 에바론에서 흘러온 물줄기들이 갈릴래아 바다로 몰린다. 갈릴래아 바다는 사실은 호수인데 하도 크니까 사람들이 바다라고 불렀다. 갈릴래아, 티베리아, 건너사렛, 모두 똑같은 호수다.

 

갈릴래아 바다는 지중해보다도 212m 얕다. 갈릴래아 바다에서 물줄기가 흘러나와 요르단강을 이루고 요르단강은 사해로 들어간다. 사해는 평균 해저 388m 사해에서는 다른데로 빠져나가지 않고 거기서 증발하기 때문에 소금이 쌓이게 된다.

팔레스티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강대국에 각축전을 감수해야 됬다. 여러 강대국의 침략을 위한 발판이었다. 여기에서 하도 평화가 그리우니까 샬롬평화가 인사가 되었다. 제발 평화스럽게 살자, 이 샬롬이라는 말은 아주 풍부한 뜻을 지니고 있다. 가난, 전쟁, 자연의 제의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 그래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안정을 이루는 것, 샬롬은 영적인 평화만 가르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일괄적으로는 물리적인 평화였다. 이 평화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 이 평화를 주시도록 청한다. 결국 이 샬롬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인간의 최상 행복, 최상 구원을 가리킨다.

2. 기후 및 계절과 생업

 

1) 기 후

기후와 계절은 그들의 생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의류상으로는 아열되었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서 강 우량에 변화가 극심하다. 북쪽에 헤르몬 땅은 연중 강우량 150cm를 웃돈다. 비가 자주온 달, 런던이 58cm 이니까 이것보다는 3배나 되는 강우량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적어진다. 사해 연안에 있는 예리고에 가면 10cm 로 떨어진다. 우기가 있는데 겨울비를 동반하는 전기우기는 10월에 시작해서 12월을 거쳐 3월에 절정에 이른다. 따뜻한 봄비를 동반하는 후기우기는 4-5월에 있다. 6월 부터는 건기로 들어가고 비 한방울 오지 않는 극심한 더위가 된다. 기온의 변화가 극심하다. 갈릴래아 쪽은 겨울 평균 온도가 7도 여름에는 22도가 된다.

 

그리고 서리도 내리고, 간혹 헤르몬 땅 쪽으로는 산악지대에 눈도 내린다. 그러나 예리고, 꿈란, 마사다, 지역의 사해연안 거기는 30도에서 40도의 폭염이다. 지중해 지방에서 불어오는 서풍은 우리나라 태풍처럼 폭풍우를 몰고 온다. 그리고 그쪽의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린다. 메뚜기 떼가 한 번 지나가면 아무것도 남지않는다. 메뚜기 떼 한 번 닥치면 그 해 농사는 망한다. 사계절, 우리는 보통 한해의 시작을 봄으로 잡지만 여기는 가을이다. 가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한 해가 시작된다. 겨울에는 북쪽 헤르몬지역과 갈릴래아 호수지역에 서리가 내리고, 간혹 눈발도 내린다.

 

봄은 아주 짧지만 행복한 시절이다. 여름은 수확의 계절이다. 보리, , 올리브, 무화가 순으로 추수를 한다. 여름에는 죽음의 계절이다. 기나긴 여름의 막바지의 생명을 지닌 모든 피조물은 가장 큰 시련에 봉착한다. 몇 개월도 비가 안온다.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으면 뭐든지 끝장이난다. 기후와 계절의 변화는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불가사이한 것 이었다. 지금처럼 자연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연이 주는 혜택과 재앙을 하느님의 상선 징악으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기후와 계절의 법칙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을 존중했고, 조그만 변화에도 아주 민감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현대인들이 빠져있는 중요한 오류, 자연을 마음대로 마음껏 정복하는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삼는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연을 신격화 시키는 범신론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들의 자연관이 우리보다 훨신 더 건전했던 것 같다. 자연안에서 우리에게 접근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을 모색했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대화를 도와주는 다리 역확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그런가하면 원시적인 민족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 고목나무도 신으로 섬기고 큰바위가 있으면 그것도 신으로 섬기고 이런식으로 범신론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2) 생 업

크게 두가지, 하나는 농업이고 하나는 목축업이다. 히브리인들의 조상들은 반유목민이었다.

유목민 - 사막을 횡단하고 떠돌아다닌다.

반유목민 - 사막을 떠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사막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막언저리 주변에 돌아 다니며 살다가 목적지를 발견했을 때에는 정착한다. 낙타나 양들이 풀을 다뜯어먹고 없으면 풀을 찾아서 또 떠돌아다닌다.

 

그러다가 13세기에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유목민 생활을 완전히 청산한다. 그래도 유목민의 의식과 종교생활은 그들의 문화의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들은 단순하고 검소하게 살았고, 공동에 적합해서 단결했다. 그들에게는 특권의식이 없었다. 누구나 다 일을 해야했다. 한 사람의 명령권자가 있었고 그에게 절대복종을 했다. 그러니까 약간의 살림도구를 싫고 목적지를 찾아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검소하게 살을 수밖에 없었다. 수시로 다른 씨족이나 부족하고 싸움을 해야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달라진다. 집도짓고, 재산도 불어나고, 그러면서 개인주위가 싹튼다. 여기에서 예언자들이 반발한다. 예언자들은 사막생활, 유목민생활을 동경하면서 가죽옷을 해입고, 세례자 요한처럼 꿀을 먹고, 뚜기기 잡아먹고, 이것이 유목생활의 잔재이다. 유목생활에서는 술을 먹지 않았다. 농경생활을 하지않으니까 술을 담을 수도 없고 먹지도 못했다.

 

3) 농 업

농업은 일상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의 축제일은 추수와 항상 연관되어 있고, 여러 가지 법령들도 나오는데 이것도 농업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으고 씨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그 사람들은 전기우기인 가을에 씨를 뿌려놓고 비가 오기를 기다린다. 씨를 뿌린 다음에 얼마있다가 경작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밟고 다니고, 길이생기고, 돌맹이가 있고 그런다. 우리와는 영농법이 다르다. 팔레스티나는 옥토가 아니었다. 농업 전문가에는 형편없는 땅이지만 그러나 사막에 싸여있는 그런땅으로 봐서는 요르단 강물이 흐르고 그러니까 옥토다. 더구나 가믐 극심하고, 메뚜기떼, 곰팡이, 사막의 열풍, 이런 것 들이 끊임 없이 들이 닥쳐서 한 해 농사를 망치는 예가 많다.

 

 

4) 추 수

보리와 밀은 5- 6월에, 무화가 나무는 8- 9월에, 보리나 밀, 첫 번째 수확을 하고난 다음에는 나뭇가지로 초막집을 시원하게 엮어만들어 쉰다. 그러다가 가믐과 우박과 메뚜기떼를 만나면 한 해 농사는 완전히 망치고 한숨과 빚만 늘어난다.빚을 지게되면 하나에서부터 모두 팔게된다(마태18,23-25). 그래서 추수가 성공을 하면 그해에는 행복이 보장된다. 그래서 그 추수의 성공을 기념하는 축제는 광난의 축제가 되는 것이다. 자기네들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으니까 대단하다. 추수를 망하게되면 그것은 수없이 절망하게 된다.

 

여기서 풍산신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을 수 밖에 없다. 풍상신 - 소출을 많이나오게 해주는 신, 양새끼들도 많이 낳게 해주고 곡식도 많이 맺게 해주고, 가나안의 퐁산신은 농부들이 바치는 희생제물에 따라서 동물, 식물의 번식과 수확을 결정해 주었다. 풍산신의 비유를 건드리면 안되고 잘 먹이고 잘 갖다바치고 해야된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쎅스가 굉장히 중요하게 등장하게된다. 풍산신 주변에는 창녀들이 들끓었다. 풍상신을 바치는 사제들과 성행위를 했고, 풍상신을 가져오는 사람들하고도 성행위를 공공연하게 성전안에서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그렇게 창녀들을 미워했는가 알 수가 있다.

 

창녀들은 풍상신, 우상숭배를 끌어들이는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성도덕이 문란해지면, 자연히 우상숭배가 성행하게되고, 우상숭배가 성행하면 성도덕이 자연적으로 문란하게 되었다. 농경생활을 해나감에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점차 안일함과 사치로 흘러간다. 대 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에 빈부차이가 격심해진다. 그 전에는 없던 것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양상이 일어난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이 심해졌다. 목축을 할 때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없이 똑같이 가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특권층이 없이 꼬마서부터 노인까지 모두 일을 하지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귀족과 특권층이 생겨나고 그들의 횡포가 대단했다. 이런 농경문화의 악습은 이스라엘의 단결을 해치고, 그들의 종교생활과 정신문화를 좀 먹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덕을 저버리고, 개인주위와 자만심에 빠졌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신명 8,17). 한 마디로 예언자들의 운동은 뿌리찾기 운동이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 우리가 목축업을 할 당시에는 특권층이 없었고, 빈부차이가 없었고, 우리의 야훼께 대한 믿음이 아주 신실했고, 개인주위가 없었고, 지금보다 사치스럽지 않았고, 이런생활로 돌아갈 수 없겠는가? 오늘 자본주위 체제안에서 경제적인 부의결실을 어느정도 획득하고 있는 우리 한국 사회에도 예언자들의 질책이 해당하지 않는가!

 

 

 

3 사 회 구 조

 

1) 가 정

이스라엘의 사회구조는 피라밋식으로 구조되어있다. 제일 최소 단위가 가정이다.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물론 기둥이다. 그들의 자녀들, 집안의 종들과 그들의 가족, 의지할 데 없는 독신친척도 가정에 속했다. 사막에서 목축업을 하면서 떠돌아 다니다보면 혼자 있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혼자 있는 것에 대한 공포가 대단했다. 하느님이 이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담에게 혼자 있는 것이 좋지않느니라 하고 하와를 만들어 주셨다. 가정을 부를 때 아버지집 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아버지가 앉는 의자에 자녀들이 앉아서는 안된다. 심지어 자녀들에 대한 생사권도 갖고 있다.

죽이고 살리고 하는 권한도 아버지가 갖을 수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근거렸다 루가 4,22). 아버지는 집안 귀속들을 보호 해야할 책임을 진다. 우리가 이해를 잘 해야 한다. 우리가 보통 현대가정에 있어서 아버지의 권위와 책임은 법의 테두리안에 묶어놓고 있다. 법으로서 정하고 있다. 아버지가 애들한테 해 줘야 하는 것 들, 교육을 시킨다든가 어떤 아이들 양육문제, 생사권, 이런 것 들을 법으로 규정해서 법으로 다 처리한다.

 

그러나 그 당시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 다갖고 있었다. 자녀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는 반면에 자녀들에 대한 권한도 갖고있고 자녀들에게 존경과 복종을 요구할 권리도 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이렇게 부를 때 는 모든 것 이다 포함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아버지하면 그 정도의 실감이 나지않는다. 벌써 문화가 이렇게 틀리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할 때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정안에서 아버지가 지녔던 권위와 책임, 그리고 아버지 에게 걸었던 기대, 이런것들을 모두다 합쳐가지고 하느님 아버지라 고백을 해야 한다. 엄청난 고백이다. 가정은 빠스카 축제를 지낼 수 있는 최소의 단이다.

2) 씨 족

씨족 - 씨족은 친척의 여러 가족들이 모여서 구성한다. 유목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를 지키기 위한 최소의 단위가 바로 씨족이다. 씨족은 유목생활을 하다가 정착하면 바로 마을로 바뀐다. 씨족은 원로로 불리우는 각 가장을 대표로 연합지도 체제를 갖추고 있다. 원로들은 가정에서의 그 아버지처럼 그 씨족의 생명과 권한을 가진다. 전쟁이 일어나자 원로들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판관제도를 도입한다. 판관은 원로들에 의해서 선출이되고 영토력을 갖는다. 그리고 정의를 세우고, 씨족 전체를 단결시켜서 외부 침략에 대처를 한다. 씨족은 철저한 연대의식으로 묶어져 있다. 씨족 사회안에 고헬이라는 사람이 하나있다. 고헬구속자어떤 속량자 라는 뜻이있다. 고헬은 씨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준다.

힘 없고 가난하고 의지할데없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옆에 힘 있고 부유하고 권한이 있는 친척이 힘 없는 그 사람의 고헬이 되어서 남에게 복수를 당했으면 복수도 해주고, 그 사람이 조상 때부터 물려 받은 땅을 도저히 빚 때문에 청산할 수가 없으면 그 땅도 사준다. 그리고 희년,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해에 십 오년째 되는 해는 무조건 돌려준다. 그 사람이 없으면 자식에게 돌려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씨족 내에 재산과 생명을 보호했다.

 

고헬 - 구속자, 속량자, 우리가 하느님을 고헬이라고 성서에 기록된 것을 볼 때 바로 이런 개념이 들어가 있다. 하느님은 나의구속자. 나의속량자. 이럴 때 고헬은 바로 이런 뜻이 있다. 나를 대신해서 내 송사를 들어주시고, 내 억울한 것을 풀어주시고, 또 가난하고 못난 이몸을 보호해 주시는 강력한 대변인으로 등장하시는 이런 의미로써고헬이다. 대단히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고헬의 임무는 예수에게서 완성된다. 예수는 모든이 에게서 고헬이 된다.

3) 부 족

부족은 한 분의 공통적인 조상을 모신 씨족들 간의 집합체 이다. 부족이 너무크면 견디어 낼 수가 없다. 사막에서 이동할 수가 없다. 전쟁을 하기에 알맞은 정도의 크기만 하면된다. 사막에서 돌아 다니다 보면 물이 제일 문제가 된다. 물이 조금씩 나오는데 사람이 몰리다보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부족이 점점 비대해지면 씨족들을 갈라 놓는다. 씨족들이 떨어져 나감으로 인해서 부족들의 순수성이 흐려지게 되었다.

 

같은 혈통을 한 분의 공통된 조상을 모신 씨족들간의 집합소였던 부족이 다른 조상을 모신 부족들하고 같이 연결이 되기 시작한다. 돌아다니다가 다른 부족에게서 떨어져나온 씨족들하고 합치게된다. 부족의 순수성이 흐려진다. 그러나 씨족 사회에서 노출 되었던 연대의식이 부족 사회에서 절정을 이룬다. 부족 대표의 잘못은 부족 전체의 잘못 이다. 가나안 정착 이후에 부족의 개념은 점점 사라진다.

 

농부들은 개인주위에 물들어있다. 바울로의 구속사상(새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속 되었다). 이것은 바로 씨족이나 부족사회의 연대 의식에서 나왔다.

죄가 한 인간으로 부터 왔고 구원이 한 인간으로 부터 주어졌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부족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민족의 개념이 나온다. 자신들을 결속시키는 근거가 공통 조상들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다. 이 땅안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다.

 

솔로몬 왕이 세금징수를 목적으로 나라를 열둘로 쪼개었다. 부족의구별이 없이 행정구역으로 짤랐다. 이스라엘이 민족으로서 설 수 있었던 유일한 시대는 다윗과 솔로몬 때였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이후로는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꼴을 갖추지 못한다. 강 대국에 시달리는 하나의 부족으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생존에 급급한 그런 나라의 운명을 맞는다. 민족주의, 강력한 국수주의가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 가 도입이된다. 이 민족주의는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다.

정치적인 환경 안에서 탄생하게 되지만 종교적인 의미를 여기다 강하게 부여를 한다. 야훼 홀로 왕이시다. 야훼 하느님 외에 다른 왕이 없다. 그래서 왕정도입 이후에도 역대 왕들은 야훼로부터 선택이 되어야 했다( 2사무 7). 왕정주입 자들과 전통주위 자들의 갈등이 표출 된다. 사무엘이 백성들로부터 왕을 뽑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아주 기분이 굉장히 나빴다. 너희 왕이 야훼 하느님 뿐인데 왜 왕을 뽑아달라고 하느냐? 그러면서도 사울을 뽑아서 기름 부어가지고 왕으로 추대를 한다. 두 가지 서로 틀린 주장들이 얽혀 져가지고 사무후서 를 이상한 방향으로 짜집기 를 했다.

 

왕정제도를 도입한 이스라엘은 왕들이 고대근동의 동방에 절대군주들이 빠진 악습을 그대로 닮는다. 궁궐을 호화롭게 짓고, 왕비나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위해서 사람들에게 부역을 시키고 호화로운 궁중을 유지하기 위해서 과도한 세금을 사람들에게 부과한다. 그리고 예쁜 처너들은 다 모아가지고 궁녀로 들여보낸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정제도가 필요하긴 했다. 판관제도로는 도저히 외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상설군대를 편성하고 언제나 한편으로 외 민족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그러한 왕정제도가 필요하다.

 

왕은 외 민족의 침입을 막아주는 대신 백성들로 부터 세금도 요구하고 부역도 요구하고 징병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게 되었다. 필요에 의해서 왕정제도를 도입했는데 왕들이 이런식으로 다른 국가들의 군주들 처럼 악습에 빠지니까 실망했다. 거기에서 메시아 사상이 싹튼다. 강력한 메시아 사상이---

도대체 이런식의 문란한 왕이 아니라 그야말로 백성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군대가 처들어 오면 자기먼저 도망 가는 허약한 왕이 아니라 강력하게 이민족을 거스려서 싸워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이런 메시아를 갈망하게 된다.

 

특히 나라가 다른 민족에 의해서 짓밟히게 되고 국토를 빼앗기고 그런 암담한 현실이 닥쳤을 때 이 메시아 사상은 더욱 크게 사람들 마음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 메시아 사상이 무르익었을 때 그 때 그리스도가 탄생 하게된다. 구약의 흐름을 그대로 안고 그 흐름이 절정에 달았을 때 그 때 때에 맞춰서 <성서의 표현, 때가 차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고헬의 의미와 에집트에서 부터 하느님의 사람들을 빼낸 것, 속량의 개념 -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 몸값을 주고 사서 풀어주는 것, 이스라엘 사람들을 에집트에서 빼낼 때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개입해 들어 가신다. 하느님의 백성을 히브리 백성, 혹은 유다 백성이라고도 하는데 연관성은 ? ---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장 - 아브라함이 우르 지방에서 가나안으로 들어 가서 이사악 - 야곱 - 요셉 - 파라오에게서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틀린 사람들이다. 모두가 다른 부족장 들인데 통일체 를 연결 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었다. 히브리 민족이 하나의 계층 이라고 본다면 어수선한 입장 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거기 압보리족들, 여러 군대에서 올 때에 우리는 누구 혈통이다, 이렇게 주장을 했을 것이다.

 

그것을 가나안 땅에 진주해 가지고 통일 국가 를 이루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정리를 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다윗과 솔로몬 왕가에 있는 서기관 들이 기록을 해 나갈 때 그런 식으로 역사를 꾸민 것이다. 그러나 족장들의 이름들은 어느정도 역사성이 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런 이름들이 고대문헌에 여기 저기 에서 선발적으로 발견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연결되어 가지고 발견이 되지않고 있다. 틀림 없이 압보리족, 히브리족 이 안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민족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일시키는 그런 원동력으로 삼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천민 들인 히브리 백성들을 강력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까지의 그 과정이 우리한테 던져 주는 신선한 충격이다. 우리 처럼 형편없는 개개인 으로 볼때에 그런 사람들도 하느님 께서 기억을 하시고, 부르시고, 그 다음에 우리를 도구로 쓰시고 그렇게 함으로서 내 자신이 사회안에서 나름대로 나의 주체성을 당성 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신 것은 커다란 은혜다. 우리는 이런 것을 성서에서 배워야할 것이다.

 

선민 -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한 민족이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뽑아 가지고,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다. 오합지졸인 그런 족속들을 모아가지고 이런 선민에까지 올려놓은신 것,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그렇게 까지 하느님의 힘이 컸다는 것, 말하자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이다. 혼돈에서부터 하나의 통일을 이룬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성서안에서 배울점들이다.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해서 거기서 통일 국가를 이룬 때 부터는 히브리 인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금의 이스라엘 인들의 조상이 히브리 인들, 압보리 인들 이라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해서 국가를 이루고 나면은 이스라엘 백성 이라든가 유다 백성으로 부르게 된다. 특히 유다 라는말은 나중에 후대에 오면서 유다이즘, 유다교가 유배 이후에 상당히 강하게 대조가 되면서 유다 백성, 유다인 들, 유다 문화, 이런 말이 나온다.

 

유다 인들은 고대 근동에 떠돌아 다녔던 압보리(방랑족) 인들을 가리 키는 것은 아니다. 상당히 후대에 어느정도 다듬어진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고, 그들의 조상들이 압보리 인들, 히브리인들이라고 본다. 이스라엘 은 국가 이름도 되고 사람들 이름도 된다. 북쪽만 가리킬 수도 있고, , 북을 모두 가리킬 수도 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이스라엘 이라 부른다.

 

 

 

 

4. 문화 와 축제

 

1) 문 화

문화는 자연질서에 반해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을 가리 킨다. 마을, 도시, 언어, 예술, 도구, 사회구조 등등, 각 문화는 약점과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고유한 점과 보편적인 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팔레스티나 문화도 이런 문화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 자기네들의 고유한 문화를 전달하는 동시에 문화적인 약점과 미성숙 도 노출시키고 있다. 우선 그들 문화의 고유성은 그들의 문학 양식, 제사 의식, 믿음과 기도의 표현 방법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 문화의 보편성은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인간의 불충실한 모습을 전달하는 것, 이것이 보편적인 진리 전달이다.

그들 문화의 약점은 종교 이름으로 곧 하느님의 이름으로 타민족 에게 가한 집단적 폭력, 그 폭력에 대해서 무감각 했다. 그리고 국수주의, 자기네 민족 만이 최고다. 우리 민족 만이 이세상 에서 살아 남아야 된다. 또는 남존 여비 사상, 일부 다처 주의, 노예 제도의 인정, 이런 것 들이 그들의 문화적 미성숙 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이런 문화적 미성숙을 잘 파악해야 된다.

 

이 성서의 말씀은 모두가 진리다. 아브라함이 일부 다처 제를 했으니까 우리도 해야 된다. 성서에 기록 되있으니까 또는 다른 민족을 개미 짓밟 듯이 다 짓밟아 버렸는데 우리도 다른민족을 그렇게 해야된다. 성서에 보면 남존 여비 사상이 대단하다. 여자들을 물건 취급하고 사고 팔고 하는데 이것은 문화적인 성숙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성서 안에 들어나있는 미성숙은 받아 들일 필요가 없고 고쳐야 한다.

 

그 들 문화의 장점은 연대 의식이라든가 자연을 순수하게 보고,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 해 내는 그런 태도, 그 외에 성서를 보면 여러 가지가 많이 나온다. 어쩌튼 그들의 사고방식과 우리의 사고방식이 비슷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성서 저자들과 정신적으로 우리가 교류를 할 수 있다.

 

2) 신명기 정신, 하느님의 사랑, 사랑의 이중계명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어떻게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가? 축제 정도에 따라서 정립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3대 순례 축제, 이 축제에는 가족들의 공동식사도 반듯이 동반한다.

해방절 - 과월절 및 무교절을 합쳐서 해방절 이라고도 한다.

과월절은 유목민 풍습 이었다. 가축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마다 한 살된 어린양 한 마리를 살해해서 액뗌을하던 유목민 풍습에서 나왔다. 그러다가 에집트 탈출을 겪고난 다음에는 탈출을 기념하는 해방절로 바뀐다.

무교절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그곳의 농경민 들이 가지고 있던 풍습이다. 누룩이 없는 빵의 축제, 새 누룩을 딛기 위해서 이전에 누룩과 이전에 누룩으로서 빚은 빵을 모두 불살라 버린다. 에집트 탈출 할 때 급하니까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 무교절과 과월절을 합쳐서 종교 적인 의미를 부여 하면서 해방절로 바꿨다.

오순절(맥추철) - 보리 추수 때에 지냈던 축제에서 비롯 되었다. 이 때 그들은 맏물, 제일 먼저 나오는 소출을 바알신, 아세라 목상이라든가 풍상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오순절은 과월절 첫날부터 시작해서 7주간을 지내고, 이 축제를 지냈다. 7×7=49일 지나고 50일 째 지냈기 때문에 오순절이라는 말이나왔다. 원래 이 맥추철은 가나안 농경민들에 의해서 보리 추수 시작에 지냈었으나 히브리인들이 밀 추수끝으로 축제일을 바꿨다.

맥추철, 오순절의 종교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계약,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축제로 삼는다. 노아와의 계약, 또는 모세와의 계약, 노아의 계약을 맺을 때 곡식단을 바치고 양을 살라서 바치는 번제를 바쳤다.

 

초막절 - 농경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수확물인 포도와 올리브를 걷어 들인후 풍산신에게 가나안 원주민 들이 바치던 감사제가 바로 초막절 이었다. 초막절의 종교 적인 의미는 사막 시절에 천막 생활과 그 기간에 맺었던 새계약.

초막절(히브리말로 쑥꽃)은 나뭇가지로 만든 안식처, 가나안 주민들의 종교의식은 여러신들을 인간의 힘으로 움직여 보려는데서 나왔다. 그래서 자연의 혜택을 얻어내는 것, 이와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연의 통제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간섭이나 영향력을 받지 않는 초월자로서 인식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예식을 통해서 하느님께 마땅한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렸다.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것 에서 받아들일 뿐 이지 하느님을 움직여 가지고 우리가 제물을 바쳐 가지고 하느님의 마음을 딱 사로잡아서 하느님을 우리 하수인 처럼 부릴 수 있는 그런분으로 생각 하지를 않았다. 우리에게는 구별이 뚜렷하다. 하나는 하느님을 조종하는 종교 예식이고, 또 하나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에 대해서 감사하게 받아 들이고 좀더 구체적 으로 그 지향들에 대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가는 것 보다 실제 그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곳에다 무얼 갖다바치고 그러는 것이 더 효과적이 아닐까?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래서 가나안의 풍산신 숭배에 자주 기울어졌다. 그러면 이 축제들의 날짜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도 우리처럼 음력을 썼다. 이것도 우리와 많이 비슷하다.

 

과월절 - 음력 3,14 저녁 때 부터 시작, 우리는 해가뜨면서 하루가 시작되지만 그 사람들은 해가 지면서 하루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최후의 만찬 하신 날과 똑같다.

무교절 - 음력 3,15일부터 7일동안 계속된다. 과월절 양을 하루전 날 1312:00시에 잡아가지고 먹는다. 1마리는 12명이 먹을 분량이다.

오순절 - 음력 56일 하루 뿐이다.

초막절 - 음력 915일에서 7일동안 이다.

그들이 계산한 달력과 지금 우리의 달력은 조금 틀리기 때문에 똑같이 맞지 않는다. 1월이 3월 이다. 바빌론 땅에 유배를 갔을 때 달력이 또 틀리다. 일 년의 시작이 다르다.

이스라엘 사람들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 과월절과 유월절은 똑같은 뜻이다.

5. 일반 역사 와 성서

 

성서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성서 독자들로 하여금 성서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또 그 배경을 이룬 역사의 줄거리를 대충 살펴봄으로써 개괄적인 개념을 갖자는 것이다.

 

1) 성조시대

성조시대 이전에 선사시대(창세1-11)가 나오는데 선사시대에 대해서는 별로 할말이없다. 다음에 구세사를 다룰 때 창세 1-11장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그런 맥락에서 보면 창세1-11장은 거의 할말이없다. 왜냐면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들 배후에 역사적인 사실이 전혀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서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나오는데 틀림 없이 아득한 옛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홍수를 크게 한 번 다친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무서운 기억 들이 점차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 오면서 그것이 노아의 홍수를 기록하게 될 배경을 틀림 없이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기록 자체는 역사적인 기록 이라고 볼 수가없다.

 

성조시대의 역사는 창세 12-50 장까지이다. 아브라함 으로 부터 시작 해서 요셉 그의 형제들, 에집트로 진출하면서 끝나는데 고대 근동의 문헌들 가운데 보면은 성조들의 이름과 풍습에 유사한 그런 기록들이 나온다. 이 인물들은 아브라함이 기원 19세기 한 4,000년전에 나왔던 사람들인데 기원전 2,000년전에 주름잡던 사람 들이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런 사람들이 모두 기원전 2,000년전에 살았던 부족장들이었다. 이들을 어떻게 조화시켜가지고 이스라엘을 단일 민족으로 묶느냐?

이것이 성서 저자들의 아이디어였다. 이 이야기 들을 쓴 목적은 정확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자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후손들에게 민족적 단결과 정기를 굳게 지켜 나가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성조 설화는 이스라엘과 이민족 들의 관계를 설명 해주고 있다.

 

아람족 - 시리아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훌의 손자가 그 원조가 되는 것이다.

 

미디안족-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내 크투라에게서 태어난 자식으로 부터 유래한다.

독선적 이라고 할까! 자기네 민족이 최고이고 다른 민족들은 우리에게서 갈라져 나갔다. 이런식으로 그래서 이 역사를 바탕으로 해가지고 체계적으로 역사를 구성할 수가 없게된다. 그렇다고 해서 창세12-50장까지의 기록을 전혀 황당무게한 기록 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성조의 이야기 전체, 그 뒤에는 역사의 발자취를 남긴 신앙인들의 삶이 자리잡고 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물론 으뜸은 아브라함 이다. 그의 믿음이 창세 12-50장까지의 근본바탕을 이루고 있다. 성조 설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출발점 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게되었다. 여기서 안다는 표현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가 보통 안다고 할 때는 우리 머리속에서 지성을 이용해서 무엇을 깨우치는 것, 그러니까 지성의 인지 작용이다.

그러나 성서에서 안다는 표현은 성적인 관계를 말한다. 마리아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서로 알고난 후에 아이를 낳는다든가,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이처럼 안다는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모든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처럼, 그 만큼 가깝게 그 만큼 적나라하게 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알고, 여자가 남자를 알 듯이 그 만큼 나의 모든 것을, 시편 139 편에 나오는 것을 보면, 나의 오장육부를 모두 아신다고 했다.

 

내 안에 있는 은밀한 생각 까지 내 육체의 모든 세포 하나 까지 모두 안다는 그런 말이다. 굉장히 진한 말이다. 그래서 성조설화의 메시지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그 다음에 이 신앙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는 것 이다. 히브리 민족의 형성은 합삐루 인들로 부터 되었다. 그들은 호전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용병들로 기용이 되었고, 고대근동에 상당히 넓은지역에 광범위하게 흩어져살던 이방인들, 전쟁의 포로들로서 어떤 국가나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했던 특수 노예들 이었다. 시대적으로도 여러 세기에 걸쳐서 존재했다.

 

출애 3장이나 6장에 보면 히브리인들이 노예생활을 하면서 막 신음소리를 낸다. 그들의 신음소리를, 절규를 들을시고 야훼 하느님께서 마음이 움직이셔서 그들에게 접근을 하신다. 그들의 신음소리는 기도가 아니다. 정식 기도의 꼴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 그들의 절규를 들으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방문해 오신다. 그래서 그들이 에집트 북부 고센지방에서 살다가 거기서 탈출을 한다.

 

성서에서 갈대바다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홍해에는 갈대가 자라나지 않는다. 그래서 고고 학자 들이나 성서 학자들이 도대체 어떤 경로를 밟아서 이 사람들이 빠져나갔을까? 그런데 에집트 북부에 수에즈운하 그처에 갈대가 자라난다. 그곳은 개울이 있어서 쉽게 건너갈 수 있는 지역이 있다. 모세가 쫒기다가 틀림없이 히브리 인들을 그 쪽으로 이끌고 갔을 것 이다. 그리고 건너면서 자게네들은 무거운 짐이 없었다.

그러나 파라오 병사들은 무거운 병거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수렁에 빠져버린 것 같다. 이런 것은 하나의 상상이다. 그래서 그들이 건너 갔고,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은 기원전1,400-1,500년 그렇게 되지만, 기록된 것은 기원전 900-800년밖에 안된다. 그러니까 400-500년이란 기간이 흘렀다.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건을 체험 했을 때 놀랍다. 그 강력한 군대가 뒤에서 밀어 부쳤는데 우리가 정말 하느님의 지시를 받는 영도자 모세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받고나서 그 사건이 너무 감격스럽고 너무 컸다. 자기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해줄 때 예를 들어서 우리는 형편없는 민족이었고 에집트 북부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견디기가 힘들어서 도망 나왔어, 도망나올 때 쫒기다가 갈대가 자라는 수에즈운하 그 쪽으로 도망 나왔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겪은 신앙적인 체험이 너무나컸다. 비록 형편 없는 우악지족 민족 이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나안 복지 까지 이끌어 주셨는데 이 체험이 너무나 큰 것 이었다.

특히 에집트 군사들과 자기네들 모습을 비교해 볼 때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체험 감격 이런 것을 점점 표현하다 보니까 인간적인 여러 언어들을 동원 해야 되고, 그래서 홍해를 마른 발로 딱 건너오고 그 다음에 뒤에 파라오 군사들이 쫓아오고 건너오고 나서 다시 지팡이를 드니까 물이 합쳐져서 파라오 군사들은 물귀신이 되었다. 이렇게 해야지 다음 세대에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해지고 그럴 것이다. 이야기가 재미있게 꾸며지니까 ---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어떻든 간에 홍해를 마른발로 건넜던지 성서학자 들이 말하는 것 처럼 수에즈운하 북부 갈대가 자라는 개울을 건넜던 간에 이 사건은 그들에게 지울 수 없는 큰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깊은 체험 이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노예생활 에서 끌어 내셨다. 그것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해 주셨다. 커다란 권능이다. 그 권능을 우리는 보았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 하느냐?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나름대로 표현 양식을 과장법, 이런 것 을모두 동원해 가지고 표현을 한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성서저자가 우리에게 전달 하고자 하는 그 사상이 중요하다 그 본내용은 다 놓쳐버리고 그 이야기 자체에만 메달려 있는 것은 별로 바람직 하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신화나 설화, 그 뒤에 숨어있는 깊은메시지 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다행이 그 이야기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 해석을 붙일 수가 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지금도 또 해석하고 해석해도 끝이 없다. 우리가 지금 기록하는 식으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딱 못박아서 기록을 해 버리면 더 이상 해석을 붙일 여지가 없다. 한 가지 해석으로 고착되고 만다.

 

2) 사막시절

사막시절 - 에집트에서 빠져나온 이 사람들은 사막에서 40년동안 방황 했다고 되어 있다. 에집트에서 가나안 까지 차로 8-9시간, 걸어도 한 달이면 된다. 그렇게 짧은 거리를 하느님은 40년동안 뺑뺑이를 돌렸다. 40년동안 뺑뺑이를 돌면서 우악지족인 히브리 인들이 강력한 신앙 공동체로 변모가 된다. 십계명이 시나이 산에서 주어진다. 시나이 산, 호렙 산, 시나이 반도, 남단 해발 2,500m에 성 카타리나 수도원이 있다. 그 옆의 장소가 시나이 산이 아닌가?

 

또 하나는 시나이 산에 보면 막 이글이글 타고 번개가 치고 그렇기 때문에 화산이 아닌가? 화산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닌가? 아리비아 북서 쪽에 화산 들이 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돌아다 니다가 화산 들을 보고 거기서 십계명을 받은 것이 아니냐? 또는 시나이 산이 에돔 땅에 있다고도 한다. 아마도 에집트 에서 빠져나온 히브리 노예들이 한꺼번에 뭉쳐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몇 갈래 로 나뉘어 져가지고, 나중에 가나안 땅으로 다시 모인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나뉘어진 각 지파들이 나름대로 그 체험을 가지고 들어와서 그 체험들이 짬뽕이 되어 가지고 어수선한 기록 들을 남긴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고 있다. 십계명에 대해서는 다음에 구세사를 다룰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3) 가나안 정복과 정착

여호수아 기를 보면 예리고를 함락 시킬 때 7일 밤 7일낮 꽹가리를 치니까 마지막 날에 성벽이 그대로 주저 앉드라 그래서 힘 안들이고 건너 간걸로, 요르단 강도 강물이 너무쎈데 탁치나까 가라져 가지고 건너갈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데 판관기 1장에 보면 그것과 다른 기록이 나온다. 전진적 으로 천천히 가나안 땅을 침입해 들어간 걸로 묘사가 되어 있다.

그래서 틀림없이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던 히브리 인들이 안에서 내동을 했고, 밖에서 들어오는 히브리 인들과 안에 있는 히브리 인들이 서로 야합해 가지고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력으로 가나안 땅을 점령을 하긴 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목민족의 문화라는 것이 별볼일 없었다. 자연적 으로 문화적 으로 우세한 가나안의 농경 문화를 받아 들이게 된다. 무력으로는 쳐들어 갔지만 문화적 으로는 먹혀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인들이 섬겨 왔던 우상숭배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 가나안 땅에 어느정도 정착이 되면서 판관시대가 열리는데 판관시대는 사울이 출현하기 전 (사울은 기원전 1,020년에 출현한다) 몇가지 패턴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을 시켜가지고 이스라엘을 침입케한다. 이스라엘이 호소를 한다. 용서해 달라고, 그러면 다시 판관을 보낸다. 판관을 보내서 정돈을 딱 해놓으면 또 다시 하느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진다. 그러면 또 이민족을 보내고, 이스라엘이 호소하고, 그러면 판관을 보내서 평화롭게 해 놓으면 또 우상숭배에 빠지고 이런 싸이클이 계속해서 돌아간다. 몇 년동안 ---

 

4) 초기 왕정시대

초기 왕정시대는 네 명의 건출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무엘 - 예언자, 사제, 환시가, 왕의 도유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초기 왕정시대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사람이다.

사울 - 성서에 보면 아주 비극적인 인물로 기록이 되어 있다.

다윗 - 호탕한 인물이고, 싸움을 잘 했던 것 같다. 쿠테타를 일으켜 사울 가문을 몰아 냈는데 (1열왕 1-11), 사울 가문을 원만큼 죽이고 묻는다(사무엘 전,후서). 사울 가문에 절름발이 하나가 남는데 그에게 잘 해 주라고 하고 자기가 왕위에 오른다.

솔로몬 - 사울이나 다윗 처럼 전사가 아니다. 싸움 잘 하는 사람이 아니고 타고난 외교가였다. 무역을 잘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절대 군주의 악습에 빠져 들어 간다. 수많은 몇 백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외국에서 여자들을 많이 데려온다. 그 여자들이 우상 숭배를 같이 끌여 들인다(세바의 여왕이 대표적).

그래서 궁궐 안에 우상숭배 사당들이 굉장히 많았다. 다윗 과 솔로몬 시대 때 편찬 작업이 이뤄진다. 왕궁의 서기들을 이용해서 기록을 하는데 제일먼저 기록한 것이 왕조실록 이었다. 솔로몬은 적자출생 이었다. 압살롬을 제치고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

솔로몬 치하에서 녹을 먹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서자가 왕이된 것을 어느정도 정당화 시켜야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사악 -에사오를 제치고 야곱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간다. 이렇게 내려오다가 요셉과 열 두 형제인데 동생인 요셉이 큰 역할을 해 나간다. 거기에 문학 적인 기교가 그 안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왕조실록을 쓰면서 다윗과 솔로몬의 비리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 하지 않고 비판하고 기록해 준다.

 

5) 왕국의 분열(기원전 922)

이미 분열의 씨앗이 그 전에 있었다. 유다 지파인 다윗이 남쪽 으로만 취중을 해서 정치 문화를 그쪽으로만 발전을 시키니까 불만이 많았다. 솔로몬이 죽고난 다음에, 북부에 열 지파가 여롤보함을 왕으로 선출한다. 한 편 시리아 와 아시리아 강대국 들은 끊임 없이 이스라엘 을 넘나 본다. 북부 이스라엘 왕 베가가 시리아 왕과 동맹을 맺는다. 남쪽 유다왕 아하즈에게 너도 같이 영합을 해달라고 청한다. 그런데 아하즈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아시리아 에게 붙는다.

아시리아가 시리아와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치면서 북부이스라엘을 먹어 삼켜버린다. 기원전 720, 북부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홀로 남은 유다는 기원전 721-587년까지 존속을 하는 데 초기에는 아시리아가 득세를 했기 때문에 안전 했다. 그런데 기원전 650년 이후에 아시리아에 잦은 내란이 생겼다.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니베는 메레스와 바빌론 연합군에게 멸망한다. 남은 지역도 에집트가 지원 함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605년 카르카메스 전투를 끝으로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 에게 먹힌다.

 

한 편 아시리아에 밀착 되었던 유다는, 특히 유다왕 여호야킴은 아시리아가 폐망 되고, 아시리아를 도우려는 에집트와 동맹을 맺어가지고 아시리아를 후원하다가 모두가 멸망을 당하자 유다왕 여호야킴도 느부갓네살 에게 패배 당한다. 그의 삼촌 시드키야가 왕으로 추대 됬는데 꼭두각시다. 바빌론에 조공을 계속 바쳐야 되니까 이 시드키야가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을 일으켰지만 역부족이었고, 두 눈을 뽑힌체 기원전 587년 포로로 바빌론 에 끌려 간다. 기원전 586-539년 바빌론의 귀양살이 생활이 시작 된다.

 

이 때 끌려간 사람들은 전부 이스라엘의 엘리트들이었다. 사제계급, 귀족, 왕족, 지식인들, 궁중에서 글 쓰는사람들, 시편 137편에 이 때 끌려간 사람들의 처절한 심정, 망국의 한을 노래 한다. 그 때 끌려간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불러가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돌아가야 되겠다는 그런 맘을 먹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망국의 시름도 잠깐, 새 지역에서 정착해가지고, 나름 대로 돈도 벌고, 직위도 얻고, 안정된 생활을 해 나가기 시작 했다. 이 사람들은 나중에 539년 귀양이 끝났을 때에도 돌아 가지 않았다.

 

몇몇 의식 있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으로 돌아온다. 이 귀양살이 후에 특이한 것이 시나고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약탈 되었기 때문에 그 성전 대신 이억만리 에서 나마 예배를 볼 회당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시나고가 라고 불리는 유대교 회당이다.

 

6) 폐르샤 시대(기원전 539-337)

특징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완전한 행정 체계를 갖추고 이민족 들의 종교 자유를 어느정도 허락해 주었다. 탁월한 식민 정책을 썼다(에즈라, 느혜미야서에 잘 설명되어있다). 516년 귀양에서 돌아 온 이 사람들은 성전을 지어가지고 봉헌 했다. 성서에 보면 이 성전을 지을 때 그 땅의 백성들(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를 많이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나서 여러 혼합 민족들이 들어와서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피를 섞게 되었다.

 

그 다음에 남쪽 당국이 멸망한 이후에 북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방인들과 혼혈아 처럼 섞여살면서 어느정도 세력을 확보했다. 그러다가 귀양이 끝나면서 순수혈통인 유대인 들이 다시 돌아오니까 굉장히 방해를 많이 먹었다. 우리 땅이다 하고 그들은 그리짐 산에다 성소를 차리고 예배를 보았다.

 

유대인들이 귀양에서 풀려와서 성전을 지으려 하니까 성전을 뭐 지을 필요가 있느냐? 그리짐산에 성소가 있는데 여기서 예배를 보면될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방해를 자꾸한다. 그런 방해를 무릅쓰고 성전을 지어서 기원전 516년에 성전을 봉헌한다. 감격 속에서 봉헌한다. 사마리아 사람의 분쟁은 예수님의 시대 까지 계속된다. 폐르샤 시대 왕조는 시리아의 고레스 왕이다. 고레스가 바빌론을 물리치고 왕국을 세웠다.

 

7) 희랍시대

그 유명한 알렉산더가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사 책에서 많이 들었던 인물들, 소크라데스, 풀라톤, 아르키메레스, 히뽀카라테스, 아리시스텔레스, 소포클레스, 모든 분야의 철학, 의학, 자연과학, 이런 극작가들, 예술가들, 우리 귀에익은 그런사람들이 이 시대에 전부 쏟아져 나온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336 - 323년까지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샤 이 지역을 전부 통일시킨다. 기원전 333년에 이스라엘 팔레스티나가 그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가 죽고나서 그는 독신이었기 때문에 후손이 없었다. 그휘아 장군들에 의해서 나라가 분열된다. 크게 두 개로 분열된다. 기원전 301년에 안티오키아 를 수도 로하는 셀류코스 가문과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푸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알렉산더 대왕의 영토를 양분한다. 안티오키아 와 알렉산드리아는 그 이후에 서로 문화, 예술, 경제 면에서 나이벌 이었다. 계속 힘 자랑을 했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은 처음에 푸톨레마이오스 통치하에 있었다. 그래서 정치적 으로는 도저히 독립할 가망성이 없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새칙들을 지키기 여념이 없으면서 조그만 농업과 상업공동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이 공동체 내부가 크게 두 가지로 분열이 된다. 희랍 문화를 숭배하고 희랍세계와의 교역을 시도하면서 희랍식 오락을 즐겼던 친 희랍파하고, 희랍적인 모든 것과 단절해야 된다고 하는 수국파 유다인들, 그런데 식민지 민족들에게 비교적 부드런정책을 펴나갔던 푸톨레마이오스의 통치하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 분열이 크게 들어나지 않았는데 기원전 199년 이스라엘의 통치권이 안티오키아로 넘어가고 난 다음에 셀류코스 가문에 안티오쿠스 3세가 생각이 모자라는 왕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을 공약을 한다. 싸움에서 져가지고 막대한 세금을 갖다 바쳐야 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이 세금을 부과를 시켰다. 드디어 기원전 167년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짓밟고 모독한다. 여기에 격분을 해서 이스라엘이 독립 전쟁 을 일으킨다(마카베오서 <유다항쟁>).

 

8) 로마시대

로마는 추측컨데 기원전 753년 로므르스에 의해서 창관 되었다. 로므르스, 레므르스 두 형제 이야기 - 동네 여인들이 모여서 모두 자기의 보물 자랑을 했는데 주인은 아무말 없이 방에 들어가서 자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나온다. 바로 이 두 아들이 나의보물들 이라고, 말하자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말 못했다. 바로 이 아들들이 로마를 창관한 주역들이다. 이 시대에는 이스라엘 역사와 비교해보면(아모스) 예언자 시대이다. 로마는 처음에는 군주국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510년에 공화국이 된다. 그 때부터 로마는 급속도로 성장 해 가는데 그 때 로마를 가장 괴롭혔던 나라는 카리타구 였다.

 

기원전 150년 로마는 카리타구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 기원전 67년 폼페우스는 지중해 해적들을 무찔러야 되겠으니 길을 좀 비켜달라 하고는 해적들을 친다는 목적으로 군대를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해서 안티오키아도 집어삼키고, 다마스커스도 집어삼키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 까지 쳐들어온다. 예루살렘에 대량학살을 한후, 성전을 또 짓밟는다. 이 때 팔레스티나의 지방 영주 였던 아리스토볼로스를 로마로 쫓아 버리고 그의 경쟁자 히르카노스를 그 자리에 앉힌다.

 

팔레스티나 지역을 재편성 해가지고, 히르카노스는 유대인이 주로 사는 유대야, 이두메야, 갈릴래아, 뻬루아, 그 다음에 사마리아는 사마리아에서 다스리도록 했고, 요르단강 동쪽 열개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를 만들었는데, 그 지역은 자치국 으로 승격을 시키면서 창설을 한다. 로마의 감독을 받지만 자유롭게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내세웠다.

폼페우스는 율리우스시저 체사르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체사르는 기원전 44년 자기 양아들 부로트스에 의해서 살해된다.

 

체살이 죽은 다음에, 로마제국의 서쪽은 옥타비아누스, 동쪽은 안토니오스가 차지한다. 안토니오스는 쿠룰라움마이누스 가문에 마지막 왕인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사랑에 빠진다. 이 여왕은 199년 안티오키아오 넘어 갔던 유대아를 탐내서 유대아를 돌려 달라고 안토니오스를 부축인다. 그러다가 안토니오스가 클레오파트라 에게 넘겨 주기직전에 이리스토폴로스의 아들중에 하나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히르카노스를 쫓아버리고 팔레스티나를 차지한다.

헤로데 하스모니아 가문과, 로마에 아부를 해가지고, 왕위를 창탈하고, 헤로데 가문이 예수시대 까지 계속해서 이어온다. 한편 기운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오스와 악티움 패전에서 싸움을 해서 안토니오스를 패배시킨다. 그리고 안토니오스 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그들의 자살로 끝난다.

6. 구원의 역사

 

창세 1-11장은 역사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다. 그러나 구세사의 측면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1) 원조들의 타락 과 하느님의 자비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세레를 받기전에도 들었을 것이고,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주일학교에서도 누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가 두고 두고 생각해봐야 될 것이다. 아담 과 하와의 이야기, 실과 를 따 먹을 때, 뱀이 무어라고 말 하느냐? 하느님 처럼 되니까 따 먹지 말라고 했다. 이 실과를 따 먹으면 하느님 처럼 될 수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설 수 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보겠다는 의지, 이것이 인류의 첫 죄악이다. 죄를 범하기 전에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 과 인간사이, 인간 과 피조물, 인간이 하느님 과 맺는 관계, 인간이 상호간에 맺는 관계, 인간이 다른 피조물 들에게 맺는 관계가 아주 부드러웠다. 그리고 조화가 있었다. 그런데 열매를 여자가 따 먹고, 남자를 주고 남자가 따 먹었다. 남자가 먹고 난 다음에 즉시 그좋던 관계가 모두 단절된다. 하느님 과의 관계가 먼저 단절 된다. 숨어 버린다. 하느님이 왜 숨었느냐?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누가 너희들 벌거벗었다고 무어라고 하더냐? 너희들 그 열매를 따 먹고 말았구나!

 

아담에게 물었는데 - 제가 실수해서 따 먹었습니다 했으면 괜찮은 데, 즉시 여자에게 책임을 떠 맡긴다. 2장에 여자를 창조 해 냈을 때 갈빗대 에서 여자가 나오니까 아!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하고 그렇게 기뻐하던 그 남자가 치사하게 열매를 따 먹고 난 다음에는 그 책임을 여자에게 뒤집어 씌운다.

 

하느님, 당신이 나와 살라고 맺어주신 그 여자가 따 먹도록 부축였으니까 최종적인 책임은 당신이고, 그 다음 책임은 여자에게 돌아간다. 하느님이 여자에게 너 왜 따 먹었느냐? 여자가 뱀이 따먹으라고 해서 따 먹었습니다. 하느님이 제일 아름답게 창조한 뱀이 따 먹으라고 해서 따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책임이 뱀을 만든 하느님에게 다시 돌아간다. 뱀 은 할 말이 없다. 자기가 장본인 이니까, 그 다음에 하느님이 선고를 내릴 때는 뱀부터 내린다. 너는 땅을 기어 다녀라(3,14-16).

인류에게 주어진 첫 복음 (3,15). 스스로 모든 관계를 다 단절시켜 버린 인간을 하느님 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관계를 단절시키고, 숨어 버린 아담을 먼저 하느님 께서 찾아 오신다. 인간이 저질러 놓은 관계 단절을 회복시키고자 하느님께서 먼저 찾아오신다. 하느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잡고 아담에게 오신다. 하느님께서 그 열매를 따 먹지말라고 했을 때 이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 하셨다. 그러면 당연히 사형을 내려 죽여야 하는데 죽이지 않고 감형을 시킨다. 세상으로 쫓아 낸다. 쫓아낼 때 안스러워가지고 입고 있는 옷을보니까 무화가 나뭇잎을 걸치고 있는데 세상에 나가 비 바람치고 가시나무에 걸치면 찢기고 하니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힌다.

그리고 죄의 장본인인 뱀에게 족쇠를 채운다. 더 이상 유혹 하지 말아라. 이렇게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잠 자리를 같이하고, 두 아들을 둔다. 카인과 아벨, 그런데 카인이 아벨을 죽인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숨어 버린다.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 카인이 단절되어 버렸다. 단절된 관계를 회복 시키려고 하느님께서 먼저 대화를 걸어오신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네 형제가 어디있느냐? 이것은 굉장히 깊은 질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질문하신다. 형제에 대한 너희 책임이 무엇이냐? 하느님께서 아벨이 어떤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모르시고 묻는 것이 아니다. 네 아우에 대한 책임, 네 아우에 대해 그렇게 몹쓸 짓을 했을 때 그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내가 동생 지키는 사람입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네 아우의 피가 땅 속에서 울부짓고 있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다. 피조물 과도 단절이 되는 것다.

 

동료와의 단절로 인해서, 땅과도 단절이되고, 하느님과도 단절이 된다. 카인은 완전히 비관에 빠진다. 나를 떠나서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카인이 하소연 한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할 것 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약하시다. 동생을 죽였으니까 살인 죄는 살인을 해야 된다. 죽여야 된다. 그런데 또 거두신다.

 

그래, 누가 너를 해치는 사람은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겠다. 말하자면 카인의 고헬이 되시겠다고 선언 하신다. 아담(남자), 하와(생명을 낳는여자), 성서저자는 하느님께서 처음에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다를 아담과 하와를 만드 셨다. 이렇게 장난을 친 것이다, 그것이 고유의 명사인 것처럼 ---

 

후대의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 이것이 우리의 첫 조상의 이름이다. 창세기 본래 의미는 하느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로 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그 뜻이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를 창조를 했는데, 동시에 다발적으로 창조를 했는지 아니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를 했는지, 이것은 성서저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께로 부터 왔는데 우선 인간의 육적인 생명은 흙에서 부터 왔다고 되있다. 19세기 다인이 와가지고 진화론을 폈다. 진화론을 펴 나갈 때, 가톨릭 측에서 그래 너는 원숭이 자손이고, 우리는 사람 자손이다 이런식으로 일수에 붙였다. 우리 육신 생명을 쭉 진화과정을 보면, 단 세포 생물에서부터 고정생물로 변화되어 나간다. 과학적인 근거에서---

그래서 성서는 더 철저하게 올라간다. 우리 육신 생명이 흙에서부터 무생물에서부터 왔다고 되었다. 성서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과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진흙으로 창조가 되었다. 그러나 육적인 꼴에다가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하느님의 입김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력을 인간에게 불어 넣어 주셨다. 이것이 큰 창조이며 절대적인 창조이다. 성서는 인간의 육신의 생명을 흙에서부터 무생물에서부터 왔다고 한다. 그러나 영혼, 영혼이라고 할 때 우리 교리문답 에서, 인간은 무엇이뇨?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합하여 하나가 된 자니라. 영혼은 무엇이뇨? 영혼은 불사 불멸하는 체로서 죽으면 육신과 갈라지는 것이라고, 죽으면 육신은 땅에서 썩고, 영혼만 올라가는 것,

 

이것은 성서의 개념이 아니다. 성서의 개념은 인간의 가장 깊은 핵심을 영혼으로 봤다. 인격의 가장 깊은 핵심 안에는 하느님이 계신다. 하느님의 생명이 거기 숨쉬고 계신다. 이것이 적당하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 전체의 몸, 몸이라고 했을 때는 주로 똑같은 인간을 두고, 생물학적인 차혼에서의 그 이야기, 주고, 낳고, 병들고, 죽고, 동물들하고 같이 나누는 차혼, 내 생명을 갖다가 몸이라고 불렀다.

영혼은 무엇이냐? 영혼은 생물학적인 똑같은 인간인데 그 인간안에서 그야말로 깊은곳에서 하느님과 같이 연결되는 부분, 하느님의 생명력이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부분, 그것을 영혼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창조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 지흙으로 꼴을 만드신 다음에 그것을 움직이도록 활동하도록 하는 그 생명력은 하느님께서 불어넣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 육신의 개념은 희랍 철학에서 나왔다. 더 복잡하게 만들어 놨는데 그것은 성서의 개념이 아니다. 희랍, 풀라톤의 이원론을 보면, 아름다운 세계에 살고있는 유대아 영혼들이 육체안의 감옥속으로 들어오는 것, 그러니까 우리 육체는 유대아에 살고있는 아름다운 영혼들에 비해서 아주 열등한 존재들 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유대아에 살고 있는 영혼들을 끄집어 내려가지고, 육체 안의 감옥 속에다 집어 넣느냐? 따라서 결혼을 부정시 하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태어났으면 빨리 죽어서 영혼이 유대아로 올라가는 것이 좋다.특히 아름다운 영혼을 자꾸 끄집어 내리니까 결혼이 죄악시된다. 이것이 가톨릭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을 자꾸 일으키고 동시에 독신 생활을 굉장히 높이 올려 세우고 그런 교리나 학술들을 누가 연구 하느냐? 독신생활 하는 사람들이 계속 연구한다. 결혼생활 하는 사람들이 하면 달라질텐데---

아우구스티노에게서 굉장한 영향력을 비쳤다. 아오스딩은 거의 오랫동안 15년 이상 마니케이즘에 빠졌었다. 마니도교는 바로 이원론, 이원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영지주의라고 있다. 영지주의 일파가 아오스딩 시대 때 많이 활발했는데, 거기에 깊이 빠져 있었다. 물론 깊이 빠져있다가 빠져 나왔는데, 그러나 거기에 일단 빠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걸로본다.

 

그리고 자신의 젊었을 때 체험같은 것이 아프리카 카르타구 지역 위쪽에 히뽀 주교 였었다. 그곳에 있으면서 아들도 하나 두었다. 그러면서 그런 체험같은 것이 육체에 대해서 많이 격멸하게 되고, 결혼에 대해서 묘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묘한 사상을 일으켰다. 그것이 내려오면서 교회안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요즈음에는 독신도 깊은 의미가 있고, 결혼생활도 깊은 가치가 있다.

그것을 동시에 다각적으로 증언해 주면 좋을 것 같다. 결혼은 무조건 나쁘고 독신은 무조건 한계단 위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 보다는 독신은 말하자면 남김 없는 자기 봉헌, 이런 차혼에서 이야기가 되고 그 다음에 초대교회에 한참 오랫동안 까지는 모두 결혼생활을 했다. 사도들도 대부분은 결혼 생활을 했었다. 예수님이 독신을 지켰기 때문에 우리도 독신을 지켜야 된다는 그것은 맞지 않는다. 사도들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었는데 모두 결혼 생활을 했었다. 그러니까 다른 차원에서 독신의 이야기를 해야될 것 같다. 본질이 많이 어긋났기 때문에 ---

 

어떻든 중요한 것은 결혼생활이 독신생활 보다는 열등한 위치에 있다는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건 복음앞에서 성서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별로 근거가 없다. 그래서 지금 성서 저자들은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첫 조상이다. 그런식으로 해가지고 그들에게서부터 난 아들이 카인과 아벨인데 그 사람들만 세상에 있었다 그렇게 보지는 않았다. 그 증거가 다른 곳에도 사람이 있는 것 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나의 모순인데 이 모순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성서 저자들의 머리속에 들어있던 것은 구원의 역사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지 지금 과학적인 진리를, 자연과학의 이치를 여기에다가 기록해 가지고 후세에 전달 하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성서 저자들의 의도를 우리가 안다면 큰 문제가 없이 넘어갈 수가 있다. 모순과 충돌이 굉장히 많다.

 

2) 이스라엘의 방황과 야훼의 구원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끊임 없이 방황을 한다. 아브라함도 방황 한다. 방황하는 유목민, 하느님께서 방문하신다. 하느님께서 방황하는 인간을 찾아 오신다. 그 전까지는 방황만 하던 아브라함이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된다. 같이 헤메는 것은 똑같은 데 방황은 목적지가 없이 돌아 다니는 것이고 순레는 떠돌아 다니지만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 그러나 둘다 어디에 안주하면 안된다. 끊임 없이 떠나야 된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순례하는 인생살인데 어디에 정착을 자꾸 하면 안된다.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중산층에 정착되어 있기 때문에 큰 문제다. 중산층은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이다. 중산층의 생리는 안정을 항상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안정, 안정, 생활도 여유가 있고, 시간도 여유가 있다. 교회가 중산층을 위주로 선교를 하게되니까 자연적으로 교회도 변화를 싫어하고 점차로 우리끼리 교회 나오는 사람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상관 없이 교회만 나오면 천당갈 수 있어, 하나의 이질적인 단체로서, 어떻게 보면 사회안에 배타적인 단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굉장히 위험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안에 성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해준 순례의 길 과는 멀다. 순례는 끊임 없이 자기 있는 자리를 떠나서 제 창조를 위해서 다음것을 위해서 다음 정류소로 가고 거기서 머물지 않고 또 다음 정류소로 가고 이런식으로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들, 방황하는 유목민들이 순례의 길로 자신들의 생활을 정립해 간다.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생명 가나안 복지 가나안에서 살다가 에집트로 간다. 에집트에 주저 앉으니까 그곳에서 또 빼내어 탈출을 시킨다. 탈출해서 시나이 산, 사막을 돌아다닌다. 이 사막 에서의 방황생활이 히브리 민족의 시절로서는, 하느님과의 신혼여행 시절이었다.

이 때 처럼 하느님과 가까이 지낸적이 없다. 하느님 친히 음식을 제공해 주신다. 먹을 것 주시고, 마실 물 주시고, 만나, 메추라기, 구름기둥 으로 햇빛을 가리워 그늘 만들어 주시고, 밤이면 불 기둥으로 밝혀주시고 가는 곳마다 만남의 장막 안에서 쉬시면서 같이 이동 하신다. 순례의 하느님, 순례하는 자와 더불어서 같이 움직이시는 하느님, 순례의 하느님으로서 모습을 들어 내신다. 그리고 이 사막에서 가장 중요한 법을 주신다. 생명의 법, 율법, 우리가 생각하는 법과 그들이 생각하는 법은 달랐다. 천주교는 지킬 것도 많고, 하라는 것도 많고 하지말라는 것도 많고 규율같은 것이 많아서 나오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꽤많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는 이 법이 얼마나 귀중한지, 자기네들한테 십계명이 주어졌는데, 십계명을 거꾸로 살아본다면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다. 최소한도 이정도 규율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인간 사회에서 주신 것이 십계명 이다. 이 사람들은 그 법을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탈리온 법, 동태복수법이 왜 생겼느냐?

 

그 때 농경민들 사이에는 이제 법을 행사를 해줘야 하는데 고헬이라는 개념도 나왔기 때문에 꼭 복수를 해줘야 한다. 복수의 한계를 세워야 했기 때문에 탈리온 법이 생겼다. 나중에 기원후 3-4년후에 공부를 많이 한 랍비들은 탈리온 법을 이렇게 해석했다. 눈을 한짝 뽑힌 사람이 다른 사람 눈을 한짝 뽑아서 복수를 하면, 우리동족에 애꾸가 둘이 생기니까, 그 사람 눈을 뽑지 말고, 돈을 받아라, 그 사람은 눈을 보호받고, 너는 돈을 받으니, 그 대가로서 어느정도 불이익을 카바를 하지않겠느냐? 그런식으로 법 정신을 해석했다.

그러니까 법 정신을 제대로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법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적용을 시키면 이런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 법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시편119). 우리 나라에 좋은 개념이 있다. ‘’ ‘를 닦아야 한다. ‘는 규율이 아니다. ‘계명이라는게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인간완성에로 나아가는 하나의 이다. , , 도 닦읍시다. 할 때는 강제력, 구속력 같은 것이 없다. 자기자신이 스스로 좋아가지고, 닦아가는 것이 . 그래서 로 보았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로보았다.

 

기쁜 마음으로 을 걷는다(시편119,31). ‘계명을 지키는 것이 기쁨이다(시편119,46).

바오로 사도가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을 많이 하였다. 그것은 율법 자체본 정신이 나빠서가 아니다. 율법주의, 율법에 본 뜻을 살리지 못하고, 유법조항에 매달리는 그런 자세, 율법주의를 공격한 것이지, 율법자체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법을 폐하러 온 것이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예수님은 항상 법 정신을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복지에 도달을 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므로 인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이 이제 성취가 되는 것이다. 가나안 복지를 주겠다. 문리적인 방황은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또 다른 방황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윤리적인 방황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온갖 잡신들을 다 섬긴다. 거기에 끊임 없이 유혹을 받아 가지고 윤리적으로 굉장히 방황한다. 하느님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셔서 그들을 구원 하시고자 한다. 때로는 질책하시고, 때로는 호소하시고, 벌도 내리시고, 축복도 주시고, 어떻게 해서든지 하느님께로 관심을 돌리도록 유도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간혹 성서에 폭력문제가 나오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남자는 모두 다 죽여버리고 어린 아이까지 사내아이는 다 죽이고 여자는 첩으로 다 만들어버리고 이런식으로 무자비한 폭력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결코 폭력을 정당화 하시지 않는다. 그들의 사회 풍속을 조금 더 가깝게 대하면 이해가 된다. 먹느냐?, 먹히느냐?, 그 와중에서 항상 지냈던 사람들이다. 유목민으로서 떠돌아 다니면서, 우물 물을 놓고, 싸움을 벌일 때, 만약 지면, 그것이 끝장이다. 종족이 완전히 없어지는 그런 판국이다. 끊임 없이 종족간의 그런 싸움이 그들의 생활 전체를 이루었다. 자연적으로 하느님도 군대의 하느님, 싸움 잘 하는 하느님, 그런 분으로 묘사를 할 수밖에 없다.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문화 그 안에서 하느님을 표현하고, 자기 신앙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야기하는 그런 폭력들, 그 폭력은 그 폭력 자체를 위한 묘사가 아니고 하느님께서 얼마큼 성실하게 자신들을 보호해 주셨는가!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그 권위를 묘사하기 위해서 자기네 들이 늘 생활에서 체험하고 있는 폭력을 이용해 가지고 폭력의 언어들로 하느님의 성실과 자비와 그 권능을 표현하고 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땅을 주셨으니까 여기서 천년 만년 잘 살아야 되겠구나 그랬는데---

 

잠깐 다윗과 솔로몬시대를 거치고 난 다음에는 즉시 이민족들에게 먹혀들어 간다. 하느님은 절대 안주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사람들은 즉시 이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 그리고 거기 주저앉는다. 그러면서 그 땅을 지키는데 여념이 없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버린다. 자기네들이 어려움을 닥치고 방황할 때 하느님의 손길을 항상 찾고 그렇게 했는데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도착했으니까 이상 끝, 우리 방황은 끝났으니까 여기서부터는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소출을 내고 즐겁게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또 거두신다. 하느님께서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민족을 시켜서 가나안을 초토화 시켜버린다.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한 것이 이것이 아니구나, 깨닫게 되면서 메시아 사상으로 바뀌게 된다. 땅의 개념이 인물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약속의 내용이 곧 이제는 뭐니뭐니 해도 하느님 자신에게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분, 메시아 사상으로 바뀌어 나간다. 처음에는 현세적인 메시아,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시키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 부귀와 영화를 가져다 줄 현세적인 군주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그것이 점점 내려가면서 예언자들에 의해서 정화가 되고 그러면서 영적인 메시아로 조금씩 발전되어 나가고 그리스도교에 와서는 현세적인 메시아와 영적인 메시아 사이 갈등이 첨외와되고 그리스도는 거기서 현세적인 메시아 사상을 버리고 영적인 메시아 상을 이스라엘 역사 안에 정립을 시킨다.

그러므로 인해서 많은 대다수의 군중들, 현세적인 메시아를 기다리던 군중들이 배반감을 느끼면서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현세적인 메시아는 상당의 배타적인 국수주의, 자기민족만을 일등민족으로 만드는 편엽된 메시아상 이었다. 그런데 비해서 영적인 메시아 상은 보편적이다.

인류 전체, 골고루, 모든 사람들에게 그 분의 혜택이 주어지는 메시아 상이다.

 

3) 구세사의 정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니즘은 무엇이 특징인가?

그것은 구약에서의 메시아관은 인간 피조물 가운데 누가 우리 민족을 이끌어서 일등 국가를 건설하도록 만드는 그런 메시아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가 메시아로 고백할 때 그 고백하는 내용 가운데는 하느님께서 직접 메시아가 되셔서 세상을 구원 하신다는 그런 구세사적인 측면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다.

 

피조물로 이루어 지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느님 친히 당신 자신이 메시아가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메시아 사상의 핵심이면서 특징이다. 드디어 우리 모든 인류의 순례 방향이 뚜렷하게 정해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방황을하면서 순례의 목적을 현세적에 두었다. 가나안 복지 현세적인 메시아 이렇게 두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영적인 메시아상으로 하느님 안에 어떤 구원을 누리는 것, 이런 방향으로 목적이 완전히 정해진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 종교가 보편성을 띄게된다. 모든 만민에게 다 해당되는 종교로---

 

 

 

7. 구약의 문학양식

 

구약 성서의 형성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어떤 한 순간에 탄생된 것이 아니고 입으로 입으로 전달된 그런 이야기들이 어느 세기에 누군가에 의해서 집필 되기 시작 했다. 이 집필은, 또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 후대 사람들이 가필 수정하고 또 덧붙이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은 거기다가 이식시키고 본래의 사람들을 빼내고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거의 1.000여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서 안에는 모순되고 반복되는 부분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다. 이 형성과정을 우리는 세 단계로 나누어서 고찰해본다.

 

첫째단계 - 구약성서를 형성하는 기본 단위들 곧 신화, 전설, 법전, 신탁, , 노래 등, 일정한 문학유형을 갖추고 있는 기본 완전들을 다룬다.

 

둘째단계 - 그런 원전들이 어떻게 해가지고 편집자들에 의해서 완전한 책으로 완성되는가?

그 과정을 다룬다. 구약성서 전체를 율법, 예언서, 성문서, 집으로 나누어 가지고, 율법, 예언서, 성문서집이 어떻게 완성되어 나가는가를 다룬다.

셋째단계 - 이렇게 완성된 기록들이, 종교 공동체 안에서(유대교, 개신교, 천주교, 희랍정교,다 조금씩 다르다), 그런 종교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정경으로 정식 성경으로 인정 되었는가? 그 역사적인 과정을 더듬어 본다.

 

1) 구약성서의 문학유형

 

신 화

. 종교적인 신화의 특징 - 신화는 종교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자주 사용하는 전문 용어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할 때 신화 그러면 하나의 풍문이나 과장된 그런 이야기 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성서에 신화가 많이 등장한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진실하고는 거리가 먼 허황된 이야기, 이런 의미에서 신화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서에서 말하는 신화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 신화가 비록 이야기 형태를 취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체험을 바탕으로 끊임 없이 반복되는 사건을 표현한다. 예를들면 한 해의 주기 봄, 여름, 가을, 겨울, 봄에는 봄 꽃들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죽음의 계절이 오고 가을에는 비가 내리고 겨울에는 생물들이 자라고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늘상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건들을 신화는 표현하고 있다.

 

- 신화의 이야기들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초월하며 가끔 신들의 세계에 그 무대를 차린다. 성서에서 이야기 하는 신화라기보다, 일반적인 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신화이다. 어떤 종교를 연구 하더라도 신화와 마주치게 된다. 종교의 신화가 갖는 특징이다.

 

- 보통 신화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묘사된다 할지라도 신들의 행동이 인간의 행동처럼 나온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들은 인간이 아니고 신들이라는 것이다.

 

- 신화의 이야기들은 경신례(종교적인 예절을 갖춰서 여러사람들이 같이 흠숭 행위를 하는것)를 통해서 일정한 성소에서 반복 한다. 경신례 안에서 신화를 재현 시킨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야기를 경신례를 통해서 또 반복을 시킨다. 우리 일상생활의 진실을, 연극으로 재현시키고 재현시키고 하면서 일상생활의 진실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기는 것처럼, 신화의 내용을 경신례를 통해서 반복을 시킨다. 그래서 신화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들이 다시 또 일어나리라고 믿고 있다.

 

현실적으로 일어나리라고 믿고 있다. 이런 특징을 갖춘 종교적 신화들은 고대 근동지방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히브리인들이 이 신화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들은 어느정도 짐작할 수가있다.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틀림없이 가나안에 유명한 바알신과 친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바알신화는 모든 신들의 아버지가 이다. 히브리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이라고 불렀다. ‘엘로힘의 복수이다.

그냥 엉뚱한데서 하느님의개념을 끌어내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보니까 그들이 믿고 있는 엘 신이 있었다. 엘 신이 최상신 인데 순수치 못한 요소들이 그 안에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재거하기 위해서 엘을 엘로힘 복수로 바꿔 버린다. 그 엘로힘을 자기들의 야훼 하느님의 신앙과 연결을 시켜 버린다. 가나안의 바알신화는 모든 신들의 아버지 엘 과 그의 배후자 아세라 둘이 있는데 그들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 그 아들이 바알 이다. 이 바알을 가장 중요한 신으로 떠 받들었다.

 

바알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 된다. 가믐과 사막과 죽음의 신 모트와 바알이 싸운다. 바알이 패배를 해서 반 죽음 상태로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지하세계로 내려가자 많은 신들이 슬퍼하며 통곡 한다. 바알이 반 죽음 상태로 내려가자 모든 자연이 시들어 버린다.

이것은 극소수인 강 우량에 대지를 지니고 있는 팔레스티나 풍토를 상징한다. 아니면 팔레스티나 여름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 때 바알의 애인 아스다롯이 바알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모투를 만나 한 바탕 결투를 해서 모트를 삽으로 내리쳐 죽이고 바알의 원수를 갚는다.

 

모트가 죽자 바알이 지하세계에서 부활하여 아스다롯과 결합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성대한 결혼식을 하자 자연이 다시 살아난다. 생명을 얻고 대지에 봄이 돌아 온다. 이 바알 신화는 명백하게 계절의 주기 와 관계가 된다. , 여름, 가을, 겨울, 히브리 인들이 이 신화를 잘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유일신 때문에 이런 종류의 신화를 철저하게 배재를 시킨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만물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고 역사 밖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다. 다른 신들은 역사가 시작이되서 역사 안에서 활동을 하는데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역사 밖에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역사를 끌어 나가신다.

 

원시적인 신앙에서 벗어나가지고 발전된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 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히브리어의 특징은 종속문이 별로 없다. 뭐뭐하기 때문에 한다. 무엇을 한 후에 무엇이 계속 된다라는 전치사를 연결되는 종속문이 별로 없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그리고 그래서 계속 이어지는 한 마디로 이야기 전체에 알맞는 그런 언어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발달된다. 그래서 히브리 인들도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야기 형태를 취하였고 이야기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자체에 기원을둔 것도 있지만 고대 근동에 널리 알려진 신화나 설화들에 그 뿌리가 이어지는 것 도있다.

 

예를 들어서 바알신화 같은 것은 그 안에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있어서 제거 했지만, 길가메쉬 라는 한 왕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 한다. 그래서 불사초를 구하러 간다. 천신만고 끝에 불사초를 얻어서 목이 말라서 샘가 옆에다 놓고 물을 마시는데 뱀이 불사초를 훔쳐 간다. 그래서 길가메쉬가 죽게 된다. 이것 은 아담과 하와의 생명나무 그것을 뱀이 훔쳐간 이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성서 저자들은 이런 고대 근동에 흩어져 있는 여러 신화들, 또는 설화들 가운데서 자기네들이 이용하고 싶은 그런 대목을 마음껏 선택해서 자신의 신앙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또는 자신들의 신학사상을 ---

어떻게 창조가 되었는가? 왜 여자는 해산할 때 고통을 당해야 되는가? 왜 남자는 이렇게 뼈빠지게 일을해야지 먹을것을 얻을 수 있는가? 왜 자연은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가? 왜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닥치는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들, 우리 인간의 머리를 뛰어넘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나? 했을 때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해결은 해야되는데 하고 풀어나갈 때 고대 근동에 신화나 설화들에서 몇가지 요소들을 뽑아서 엮어 나가는 것이다.

 

창세 1-11장은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한 마디로 구약성서의 신화들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한 히브리 신앙의 표현 들이다. 그들의 신앙은 진실하다. 그들의 신앙이 진실한 만큼 성서의 신화도 진실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 하는 진실은 역사적인 진실이 아니다. 이야기 속에 전달되고 있는그 내용, 이 내용을 우리는 잘 봐야 된다. 탈신화화 신화에서 벗어져 나가자 신화에서 그 꺼풀을 다 벗겨나가면 그 안에 진짜 내용이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신화들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 구약성서의 신화

- 구약의 신화들은 이야기의 형태를 취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위협을 소개한다.

- 이 신화들은 볼 수 없는 신들의 세계안에서 일어나는 환상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야훼께서 당신 백성과 더불어서 우리 인간 역사안에서 이루시는 일들을 다룬다. 신들끼리 지지고볶고 끝나버리는 일들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과 우리 인간사이의 드라마 이다.

-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경신례 안에서 반복 된다. 주 목적은 앞으로 반복되리라고 믿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느님께서 하신일 이루신일 그일을 경축하기 위한 것이다.

- 구약의 신화는 자주 사물이나 종교적관습에 기원을 설명하는데 기여한다. 신화는 굉장히 중요하다. 허황된 이야기라 생각하지 말고 깊은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것이다.

 

전 설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이 전설로 이루어졌다. 구약성서의 전설은 네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신화와는 달리 전설은 이 세상안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실재 인간을 다룬다. 그리고 이 전설의 사건은 때때로 잘 알려진 지역안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현재와는 거리가 먼 사건을 취급한다는 점에서 비현실 적이다.

- 전설은 흔히 역사적 실재를 바탕으로 한다.

- 전설은 인생의 기원에 관련된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서 현재의 삶이 어떤모습을 지녀야될지 설명한다. 또 과거의 영웅들의 덕행을 찬양함으로서 현세 생활의 가치를 재천명(재확인) 해주고있다.

- 전설도 신화처럼 우리 신앙과 관련된 어떤 신성한 장소나 관습의 기원을 설명한다.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여러성조들, 모세, 사무엘, 엘리야와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은 모두 이 전설에 속한다.

기타 일화들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재미난 이야기들, 또는 마술적인 이야기가 가끔 튀어 나온다. 모세의 지팡이, 엘리야의 외투, 이런 마술적인 요소들은 과학 이전의 문화에서 과학이 발달되기 이전의 문화에서 일반적으로 널이 유통되던 것들 이었다. 마술적인 요소들은 관련 인물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사용 되었고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돋구기 위해서 이용된 것 이었다.

 

히브리인들과 아말렉과의 싸움이야기, 모세가 손 들면 이기고 내리면 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한 인간 모세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가지고 히브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온갖 전력을 다 했는데 이것이 보통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이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사무엘의 부름받는 이야기, 그 이야기 자체에만 메달리지 말고 그 뒤에 숨어있는 깊은 뜻을 이해해야 된다.

 

족보 와 일람표

구약성서는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족보를 제시하고 있고 도시에 대한 일람표들도 제시하고 있다. 민족들에 대해서도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다. 족보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일성을 증언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일 민족이다.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 족보조차도 똑같은 족보를 이야기 하면서도 조금씩 틀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은 성서가 여러 가지 다양한 원전들을 이용해서 나왔다는 증거다.

 

역 사

구약성서 대부분은 형식상으로 볼 때에는 역사의 기록으로 되어있다. 이스라엘 역사가 죽 기록된걸로 되어 있다. 특히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 궁중실록( 1열왕 12, 41 솔로몬의 행위, 14,19 : 29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조실록, 6-8장 솔로몬의 성전건축과 봉헌), 왕의 계승사화 2사무 9- 20, 1-2장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것을 쓴 저자는 틀림없이 서자로서 왕위에오른 솔로몬의 계승을 정당화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들은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1 2, 열왕기 1 2, 느혜미야, 에즈라, 모두 다 역사에 속하는데 그러나 이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적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역사적 실재를 전한다는 것은 그 때 과연 몇월 몇일 몇시경 무슨일이 있었는가?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은 그 때 일어난 사건에 뒤에 숨어있는 그 뜻은 무엇이냐?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법 률

모든 사회는 법을 필요로 한다. 법은 매일의 생활을 규제하고 악과 악인들을 다스리고 약자들을 보호 한다. 더 나아가 이상적인 삶을 널리 전함으로써 참된 사회를 구현시키는데 이바지 한다.

관례법 -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 국가들로 부터 관례법을 받아 들였다.

관례법은 무엇이냐? 누가 만일 이런 ---짓을 하면 이러--- 한 벌을 받거나 이러저러한 보상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하면 무슨 대가를 지불한다.

이것은 자기네들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관습과 설례를 바탕으로 해가지고 이런 법을 제정한다. 이 법의 집행은 도시의 성문 안쪽 광장에서 원로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관례법과 함께 또 다른 법이 소개되는데 그것은 단정법이다.

 

단정법 - 조건문이 없다. 곧 바로 명령한다. 너희는 무엇을 하지 말아라, 이런 짓들을 해서는 안된다. 이런 짓을 저지른 자는 무조건 저주를 받는다. 이 단정법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갖고 있는법이다. 단정법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십계명 이다. 하느님께 가는 길을 충실히 걷는다면은 간음하지 못할 것이다. 살인하지 못할 것이다. 미래의 직설법 으로 되어 있다. 뭐뭐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법 이라는 하나의 구속으로 생각하면서 하지 말라니까 사람들이 자꾸 하고 싶은 생각이 난다. 도 라고 생각하고 길 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자기 좋아서 걷고 또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걷고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걷는다. 그래서 별로 힘든줄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 십계명은 사제들이 축제 때 발표를 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핵심이기 때문에 원로들에 의해서 성 안에서 집행되지 않고 축제 때 경신례 안에서 선포가 되었다. 이 법을 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벌은 최하 사형이다. 십계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권이면서 긍지였다. 다른 민족은 이런 법이 없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이 법이 없지! 우리는 갖고있어, 이 십계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른 민족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징표가 되었다. 십계명의 선포와 집행장소가 이스라엘의 최대 성지인 성소였다는 것, 이사실이 바로 이 단정법에 종교적 중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레위법 - 사제의 의무와 제사, 정과 부정에 관련한 법,

처음에는 단순 했다. 그런데 나중에 구약성서가 완성될즘 해서는 대단히 복잡한 체계를 갖춘다. 이 레위법에 대표적인 예는 제관법에도 통하는 레위기 전체안에 나타난 법이다. 특히 레위기(17- 26장 성 법전) 성 법전이 바로 이 레위법에 해당된다.

 

유행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래 하기를 즐겨 했다. 무슨 모임 끝나면 오락회 한다. 추수할 때 결혼잔치 때 일할 때 단체로 모여서 축제를 부를 때 구약성서 안에서 완전한 가사를 갖춘 노래들은 별로 전해져 오지않고 토막 가사들로 이루어지는 노래들이 전해져오고 있다. 왜 토막 노래들만 전해져오는가? 그것은 노래 수집하는 사람들의 종교적인 심성때문 이었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랬다. 유행가들 전체적인 것은 관심이 없고 그 중에 종교적인 의미을 갖춘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그런 부분만 뽑아 갖고 전달을 했다.

 

샘물을 팔 때 부르는 노래 하느님께서 샘물을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민수 21,17) 하사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부만을 뽑아서 넣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아가를 들 수 있다. 아가는 원래 세속적인 사랑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관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데 이용 되었다. 전쟁과 관련해서 승전가도 유행가 법전에 들어 간다. 미리암의 노래(출애 15,21), 이스라엘 여인들의 노래(사무 1186절이하).

 

경신례 노래

시편에 가장 많이 실려 있다.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 자연적인 지향이나 패배앞에서 공동체가 부른 비탄의 노래, 왕이 왕위에 오르고 그의 생애를 찬양하는 노래, 왕이 결혼하거나 전투에 참가해서 싸우는 이런것들을 기리는 노래, 궁왕 시편, 순례의 노래, 시온을 찬미하는 노래, 모두 경신례를 지내면서 부르던 노래 였다.

 

예언자들의 신탁 (특정한 일을 앞에두고 하느님께 의견을 물으면

하느님께서 가르쳐주는 것을 말함)

우리가 지금 대하는 예언서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신탁으로 이루어졌다. 특정한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탁들은 현재 예언서에 되어있는 것 보다는 짧고 간단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그리고 본 예언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제자들에 의해서 후대에 기억되고 집필 되었다. 그것이 나중에 모아져서 오늘 날의 예언서들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모스 서는 짧고 직접적인 신탁들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예언서 이다.

 

묵시적 현시

묵시는 예언과 매우 흡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언이 일반적으로 말로써 이루어지는 반면 묵시는 주로 글로써 이루어 진다. 묵시(계시),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묵시문학은 가까이 다가오는 우주적인 지향이나 세상 종말에 대한 자세한 현시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묵시의 목적은 악인들의 파멸과 의인들의 구원을 위협적인 언어와 표현들로 선언함으로서 고난의 시기에 처해있는 믿는이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묵시 문학가들은 예언자들하고 달리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희망을 갖고 있지 않는다. 세상은 끝났다. 세상은 썩었다. 이제는 새 하늘, 새 땅, 하느님이 개입해 오셔셔 모든 것을 정립해야 된다. 쓰레기 같은 것은 다치우고 정말 의인들만 남겨놓고 악의요소는 뿌리채 뽑아야 된다. 묵시 문학이 성행하던 시기는 기원전 200 - 기원후 100 년까지 예수님 시대에 이 묵시문학이 굉장히 성행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이 당대에 유행하던 묵시 문학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 하신다. 우리로선는 생소할지 몰라도 그 때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익숙한 표현들 이었다. 다니엘 서도 묵시문학의 대표적인 예고, 즈가리야 9 - 14장도 묵시문학에 속한다. 요엘 2, 이사야 24 - 27, 에제키엘 38 - 39, 거의 묵시문학에 가까이 접근해 있는 문헌들이 본격적인 묵시문학은 다니엘 7 -12, 즈가리야 9 - 14장 뿐이다.

 

교훈집 과 금언

지혜문학은 세계 모든 문화권 안에서 발견 된다. 현자들의 말씀들, 속담과 금언들, 수수께기들이 이스라엘 민족 전통안에서 후대에 전달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오한 지혜들을 간결하면서도 은율에 맞게 표현한 경고 들이다. 짧은 금언들, 경고들이다. (1열왕 2021) 이런 경고는 몇 천년이 흘러도 그 깊은의미를 잃지않고 있다. 고대근동 문화에서는 이런 지혜 말씀들을 수집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

솔로몬이 지혜로운 왕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다. 솔로몬은 자기 궁중안에 지혜 문학가들을 양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지혜문학들을 모아서 출판을 하도록 조치를해 주었다. 그 사람들은 작가가 물론 만들어 낸것도 있겠지만 고대 근동에 떠돌아 다니는 지혜 문학들을 끌어 모아서 글로써 편찬을 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은 잠언, 집회서, 지혜서, 욥기, 몇 몇 시편들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까지 11개 정도 문학양식들을 소개를 했는데 이것들이 구약성서 전체를 이루는 문학양식 전부라고 볼 수 는없다. 중요한 것들, 축복문과 저주문 조약문 이런것들이 다 빠져 있다. 이런것들은 복잡하기 때문에 생략을 한다. 대충 대표적인 것들만 골라서 소개를 했다.

 

2) 구약성서 각권의 형성과정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를 세 가지로 분리를 했다.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율법(모세오경)을 토라 라고 불렀다. 이 다섯권이 제일먼저 정경으로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여기는 각종 법령, 시행세칙, 선조들의 가르침, 다른책들에 비해서 이 책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다른 한편 유대인들은 이 토라를 모세오경이라 부르는데 오경이라는 이름은 다섯권 이라는 희랍어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다섯권의 책은 바빌론 귀양이후에 모세의 저서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 전통은 그리스도교에 그대로 이어지면서 모세오경 이라는 이름으로 굳혀 졌다. 율법이나 모세오경이 다른 책들보다 더 성스럽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실재 있어서 꼭 맞는 사고방식은 아니다. 일부 성서학자들은 모세오경 다음에 이어지는 여호수아기와 합쳐가지고 모세육경 이렇게 부르고 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모세오경에서 신명기는 다른책하고 틀리지 않느냐? 신명기를 빼 버리고 모세사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랫동안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나 모세오경의저자가 모세가 아니라 고 떠드는사람은 전부 단죄해 봤다.

그러나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이 다섯권의 책을 모세가 썼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세가 죽고난 이후에 기록도 모세오경 에는 나온다. 모세가 죽어서 무덤속에서 글을썼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 모세오경을 보면은 한 사람이 쓸수가 없다. 그것은 그 증거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모세란 분이 이 다섯권을 혼자서 쓸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 했다. 여러 가지 모순과 충돌이 발견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들을 몇가지 살펴보면은 창세기에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와 엘로힘으로 나온다.

출애 3,14 : 6,3절에 보면 야훼라는 이름이 어떻게 처음 등장하게 되는가 설명이 나온다. 야훼 - 나는 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 하느님의 초월성을 가리킨다. 나는 누구의 간섭없이 스스로 있는 자다.

 

예수님이 그걸 받아가지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그럴 때 0 0 다 집어넣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친근성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더불어서 라는 관계를 맺으면서 가까이 있는 분, 나는 누구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누구다. 그렇게 해놓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 야훼라는 이름을 입밖에 내지 않는다.

중요한 이름이기 때문에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하느님의 이름이기 때문에 타치하면 안되니까 아도나이라 불렀다. 출애 3,14 : 6,3절에 그런식으로 야훼의 이름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창세 4,26절에는 야훼의 이름이 아담의 손자 에노스에 의해서 처음 불러지게 되었다고 기록되 있다. 이미 옛날에 야훼의 이름이 불려지게 된 것이다.

 

출애굽에는 처음으로 모세에게 야훼의 이름이 불려진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미 창세 4장에는 그 이전에 야훼의 이름이 에노스에 의해서 불려지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로 모순이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 이름이 문제이다. 레위기와 민수기는 시나이 산이라고 하고 신명기는 호렙산 이라고 부르고 있다.

세 번째는 가나안 주민들의 이름이 때로는 가나안족 이라고도 하고 또 때로는 아모리인족 이라고도 한다. 네 번째 창세 1,1-3 절에 의하면 인간은 남 녀 모두가 엘로힘에 의해서 창조의 마지막 날 곧 여섯째 된는 날에 동시적으로 창조 된다. 창세 2,4-25절에 보면 남자가 먼저 야훼에 의해서 땅의 먼지로부터 창조되고 그 다음 짐승들이 짐승들 다음으로 여자가 창조된 것으로 나타난다. 순서가 틀리다.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모순과 충돌을 오경안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성서학자들은 우선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서로 틀린 기록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야훼냐? 엘로힘이냐? 출애 3장이나 6장에 모세 에집트 탈출전에 야훼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 전까지는 엘로힘 이라고 불렀다라는 전승이 하나 있고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다른 원전에서는 쭉 엘로힘으로 쓰다가 출애 6, 2-8절에서부터 야훼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고 야훼의 원전은 창세기 전반에 걸쳐서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엘로힘 원전을 더 깊이 살펴보니까 단순한 문체와 내용으로 된 부분이 있고 아주 화려하고 수확적인 문체를 사용하면서 사제와 제사에 관한 그런 규정들을 소개하고 있는 그런 부분이 또 있다. 그래서 후자를 복잡한 제사에 관한 규정들에 관심을 갖는 그 사료를 따로 구분해서 사제계원전 이라고 부르고 있다. 야훼 -J 엘로힘 -E 신명기 -D 제관계 -P 신명기 17,18절에 보면 베껴쓴 법전, 원 법전을 다시 베껴서 쓴 법전이라는 말이다.

 

3) 모세오경의 주요전승

야훼계 전승(J) - 처음부터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부른 전승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 이름을 야휘스트전승은 시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가나안 주민들을 미디안족 이라고 하지않고 가나안족 이라고 부르고 있다. 야훼계 전승의 문체는 단순하고 강하며 그 내용에는 가짜의 의인화의 수법이 많이 등장한다.

 

의인화 - 하느님에 관한 사정을 인간의 언어와 행동양식에 비추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야훼계전승이 관여하고 있는 설화는 창조설화 에덴동산과 타락, 카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 바벨 탑, 성조의 이야기, 출애굽과 모세에 관한기록 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야훼계 전승을 그냥 단순한 민단 또한 설화로 처리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건 잘못이다.

야훼계 전승의 원초적인 자료가 민담이나 설화라 할지라도 신앙을 전달해 주려는 그런 의도가 그 안에 다분이 들어있다. 특히 야훼계 전승을 통해서 하느님의 성실성이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은 적대 민족의 파괴공작 에도 불과하고 성조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듯이 확고하게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야훼계 전승이 작성된 곳은 남쪽 도시이다. 남부왕국이 되겠고 정확한 연대는 측정하기가 힘들겠지만 다윗왕 통치 직후로 보면 문안하다. 솔로몬 왕정 초기.

 

엘로힘계 전승(E) -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 이라 불렀고 시나이 대신 호렙 이라 사용했다. 가나안족 대신 아모리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엘로힘계 전승 문체 역시 단순하고 강하지만 생동력에 있어서는 야훼계 전승을 따라가지 못한다. 엘로힘계 전승의 작성장소는 도담이나 세겜, 북쪽 도시들의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북부왕국으로 추정되고 있다. 작성시기는 아마 사마리아가 함락(북부왕국 기원전 721) 되기이전에 야훼계 전승이 완성된 이후에 대충 기원전 800년경에 완성된 것을로 보인다.

 

엘로힘계 전승은 창세 15장 이후부터 등장 한다. 그런데 야훼계 전승 만큼 잘 보존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데 왜 엘로힘계 전승에 창조설화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가? 그것은 북부왕국이 멸망하면서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엘로힘계 전승을 가지고 왔던 것 같다. 두 가지를 놓고 남쪽왕국의 편집자가 둘을 하나로 묶으면서 자기 기후에 맞게 엘로힘계 전승을 버리고 야훼계 전승 기록만을 풀은 것 으로 보인다.

 

창조설화에 관한 것도 엘로힘계 전승에 분명히 있었을 텐데 엘로힘계 전승 보다는 야훼계 전승 것이 더 훌륭한 것으로 보일 때 편집자가 엘로힘계 전승을 빼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엘로힘계 전승이 강점이 있다. 야훼계 전승 보다는 하느님에 대해서 묘사할 때 더 세련되어 있다. 의인화 수법을 피하고 꿈이나 환시를 통하여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 한다. 엘로힘계 전승 에서는 하느님이 좀 더 초월적인 분으로 드러나고 있다. 야훼계 전승은 하느님과 말도 하고 재미나게 한다.

 

신명기계 전승(D) - 위 두전승 과는 달리 설화체로 되어 있지 않다.

신명기계 전승이 강조하는 신학적인 주제는 이스라엘이 선택된 민족이기 때문에 자신의 특별한 신변에 맞도록 하느님께 성실하고 순종하고 참된 예배로 그 분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신명기 전승은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경신례를 미워했다. 하느님께서는 신실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불충실한 사람들에게는 벌을 내리심으로써 역사 안에서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신다고 선포 했다. 이 전승안에 설정된 사회적 실정법은 인본주의 적인 색체를 띠고 있다.

신명기계 전승을 가만이보면 엘로힘계 전승을 수정하는 것이 많다. 그걸로 봐서 엘로힘계 전승보다는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애 21, 1절에 보면 7년이 지나고나서 히브리 노예들을 자유롭게 풀어줘야 된다고 되어있다. 신명 15, 12 -14절에 7년이 지나면 히브리 인들을 꼭 풀어줘야 한다. 엘로힘계 전승의 선택규정을 의무규정 으로 바꾼다.

신명기계 전승은 언제 작성되었는가? (2열왕 22) 요시아왕이 성전에서 법전을 발견한 후에 법전을 토대로 종교개혁을 했다. 이 법전은 종교적으로 문란했던 므나쎄왕 통치시대 때 누군가 숨어서 아무도 몰래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왔던 실정법과 경신례 법을 베껴서서 제2의 법전 지금까지 내려온 것을 잘 써서 성전안에 은밀한 장소에 감춰 두었다.

 

그런데 성전을 재건하다 보니까 법전이 발견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지켜오지 않았던 것, 엉터리로 살아왔던 것, 그래서 거기서 울면서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이 이렇게 되었는데--- 다시 법전 정신대로 살아야 되겠구나!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최소한 신명기계 전승은 요시아왕 종교개혁이 기원전 622년에 있었는데 그 이전인 기원전 7세기로 잡을수가 있다.

 

제관게 전승(P) - 저자는 엘로힘 전승처럼 하느님을 엘로힘 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엘로힘계 전승보다는 달리 보다 수사학 적이고 말장난을 했고 문체를 화려하게 공식적으로 어떤 형식을 갖추어서 복잡하게 사용했다. 왜냐하면 사제들이 까다로웠다.

 

유배 이후에는 사제계급이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다. 유배시대 때부터 끌려가 가지고 사제들이 문필 활동을 많이했다. 사제계급의 고유 관심사인 안식일, 음식, 할례, 제사, 사제의 직무 등에 관한 규정들의 기원을 밝히고 그 전통적인 가치들을 꽤 확인 했다.

유대인들이 귀양에서 풀려난 이후 에즈라와 느혜미야 시대 때 기록된 것 같다. 느혜미야 8장에 보면 사제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올 때 어떤 책을 들고 왔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제관계 전승이 아닌가 보고 있다. 그러면 이 제관계 전승들이 어떻게 어울려져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모세오경 으로 불리게 되었는가? 가장 단순하고 신빙성 이론은 이렇다.

 

먼저 야훼계 전승과 엘로힘계 전승이 독립된 전승으로써 있다가 기원전 721년 북부왕국이 멸망한 직후 야훼계 전승을 좋아하는 어떤 편집자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 본다.

기원전 7세기경 신명기계 전승이 나오고 신명기계 전승은 야훼계 전승과 엘로힘계 전승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신명기계 전승이 기록되고 바빌론 귀양 시절에 하나로 통합된다.

 

귀양이 풀리면서 제관계 전승이 기록되고 이 네 원전이 한데 모아질 때 제관계 전승은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록되는 한편 이 법전들이 끊임없이 경신례 안에서 반복되었다. 따라서 경신례 안에서 사용되었던 통합 전승들은 현재 우리가 대하고 있는 모세오경과 다르다고 가장할 수 있다. 그런 전승들이 쭉 내려오면서 또 수정을 받고 하면서 한참 후에 모세오경이 굳혀지는데 그때는 유대교가 정착된 기원전 400년 이후 였을 것이다.

 

구약성서 의 배경

성 서 란 ?

성서연구는 18세기말엽 개신교 측에서 역사비판학을 도입함으로써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전까지는 이 성서가 구원의 역사의 주역들(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베드로, 사도요한, 바오로) 이런 분들에서 쓰여진 것으로 믿어왔다. 하지만 금세기에 와서 고고학과 고문학의 발달로 성서의 세계가 당대의 세속문화와 역사의 비교 연구됨에따라서 성서의 다양한양식, 그리고 편집과정이 비교 연구됨에 노출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성서의 실재의 사건들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성서를 쓴 사람들의 문학적인 기교나 신학적인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과정을 역사비판학이라 한다. 이 역사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성서의 저작시기 그 자료의 기원과 전달과정, 성서의 각 권의 실재 저자들과 그들의 집필 동기나 신학적인 지향, 그들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문제점들, 그문제들을 어떻게하면 해결할까 하는 해결방안들, 보다 구체적으로 성서의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이건 역사비판학에 커다란 공헌이었다. 그렇다고 역사비판학이 결코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성서 저자들의 저술동기는 자신의 신앙, 그리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신앙을 표현하고 전달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신앙과 공동체의 신앙은 그 근원과 목적을 하느님께 두고 있다. 따라서 성서 저자가 자신의 신앙이나 공동체의 신앙을 전달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전달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표현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신앙을 전달하고 표현한다는 그 과정, 신앙이 생겨난다는 과정, 이것은 전부 하느님께서 유도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말이 섭리 유래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성서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 성서를 대충 훓어보게 되면은 이스라엘의 역사 (구약), 그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신약). 이것이 성서의뼈대 이다.

그런데 이 둘은 성서가 입고 있는 옷, 성서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뒤에 숨어있는 깊은 내용은 하느님이 누구신가? 그리고 인간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크고 작은 사건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과 가르침등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역사적인 사실로만 처리가 된다면은 지금 여기 20세기 후반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와 아무런 연관성을 가질 수가 없다.

 

실재로 이스라엘의 역사나 또한 예수님의 역사는 세속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다. 별로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 그런 사건들을 고정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 서 고공을 막론하고 왜 그토록 오랫동안 성서는 인류의 문화를 지배해왔는가?

그 이유는 성서의 그 속 알맹이 내용이 시공을 넘어서서 인류 전체의 커다란 충격을 던지면서 우리 인간성 정체를, 인간성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핵심 내용은 하느님의 소개와 인간소개, 이 둘은 성서의 어느페이지에도 드러나 있다. 성서를 보면 아무 대목이나 열어도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찾을수 있고 인간이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 사울 이야기, 바오로 이야기, 베드로 이야기,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빠져나와 가지고 광야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을 수시로 배반해 왔다.

 

이런 이야기들을 대하여 올 때 우리들은 즉시 아!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이야기구나, 나의이야기구나, 이렇게 알아듣게 된다. 우리는 그 성서 안에서 풍부한 인간성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의 족보들을 보면 그 안에 온갖 잡놈들이 다 들어가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느님은 인간성 전체를 다 끌여들여서 구원하시고자 하셨다. 우리 인간이 지을수 있는 모든 범죄에 총 막라해가지고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게 없다. 다 들어가 있다.

 

성서의 인물들을 가만이보면 우리와 별달리 특출한 인간이 아니다. 베드로, 바울로 사도들도 보면 서로 예수님을 전하다가 서로 다투기도 하고 얼굴도 붉히고 발나바 사도같으면 베드로 하고 뜻이 맞지않아서 너하고 여행 못하겠다 하고 중간에서 갈라져 따로 따로 여행하고 이런 것을 가만이보면 성서의 인물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감정을 지닌 연약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약점이 많고 연약한 그런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에게로 끌어들이시고 어떻게 그 사람들을 이용하시고 어떻게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시는가? 이것이 성서 안에는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은 아주 성실하신 분으로 나타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에게 성실하신 분으로 -----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그렇게 불충실한가?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인간의 불충실을 엮어내는 드라마가 바로 성서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 안에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야되고 나와 내 공동체를 위해서 주어지는 그 분의 말씀을 들어야 되고, 성서에 들어난 인물들의 행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나가야 될 삶의 방향을 정해야 될 것이다.

 

성서 저자들의 사고방식

성서 저자들이 들려주는 구수한 이야기들은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인류를 언제 어디서나 새롭게 교육시키고 있다. 참으로 다양하게 성서의 말씀들이 이야기로 전달되었다. 이야기속에는 반듯이 교훈이 있게된다. 이야기들을 통해서 후세를 계속해서 교육시키게 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구수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보면 그 안에 본질과 선, 악이라든가 무슨 윤리적인 것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설화들, 에집트에서 탈출한 그런 이야기들, 이런 것들을 보면 그 안에 대단한 윤리적인 교훈적인 요소가 들어있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이야기는 끊임없이 재해석 된다. 아무리 해석을해도 끝이 없다. 아주 풍부한 샘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류전체의 정신 문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이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같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조실록 가운데서 다윗의 부정실을 규탄하는 예언자 나단이 하는 말에 대단한 감동을 받는다. 임금님이 바로 그사람 입니다. 이 고발대목을 통해서 루터는 성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성서가 지적하고 있는 그런 비리는 바로 나의 비리구나, 이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참회의 전기를 마련했고 나중에는 더 나아가서 종교개혁을 단행하기로 했다.

 

우리가 전수받은 그리스도교는 분명 서구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 핵심 내용인 성서의 세계와 메시지는 다분히 동양적이다. 그런데 왜 같은 동양인으로 사고방식이 비슷한 성서 저자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알아듣기 힘든가? 그것은 그들과 우리사이에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천년 동안의 세월이 흘렀고 그리고 이 흘러간 세월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바로 고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서양학문이 해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땀과 노고가 성서의 핵심 내용을 깨닫는데 바쳐지고 일단 깨달은 핵심 내용은 자연스럽게 우리 주변에 동료들에게 우리처럼 시간과 정열을 화해서 성서공부를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바쳐져야 된다. 성서의 핵심 내용으로 접근하는 서구인들의 학구적인 노력과 성서의 내용을 직관적이고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우리의 동양사람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심성이 서로 만난다면은 바로 그 성태여부가 이 서양의 학문적인 방법론과 동양의 심성 조화여부에 달려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성서가 입고 있는 옷, 성서와 문화와의 관계를 살펴봐야겠다. 어떤 세대를 불문하고 그 세대가 외치는 그 목소리는 그 세대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인 옷을 반드시 입고 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자연질서와 구별되는 모든 것을 다 문화라고 한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 마을, 도시, 언어, 예술, 도구, 사회구조, 어떻든 인간의 노고와 창조성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든 것을 문화라고 한다. 세계의 여러곳에 또 여러세대에 걸쳐서 다양한 문화가 있었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문화의 높고 낮음을 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어떤 문화가 더 좋다, 서양문화가 더 났다, 동양문화가 더 났다, 한국문화가 더 우수하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있는 고유한 것은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 고유성은 자랑하고 인정할 수 있지만 그 고유성이 다른 문화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한국문화와 다른문화를 비교를 해가지고 우리문화는 다른문화보다 높다든가 이런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모든 문화는 다 하느님의 은혜라고 본다. 세계 여러곳에 다양한 문화가 있다. 참 커다란 은혜이다. 그 문화권 안에서 탄생하는 종교들도 하느님의 크신 선물들이다. 우리가 종교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과 부딫히게 되는데 부딫히는 이유중에 하나는 너무 우리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면은 다른 사람들도 진리를 소유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만이 옳고 그것만이 최상의 진리이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교들 안에 있는 진리는 전부 열등하고 형편없고 이런 식으로 낯추어 생각할 때 대화가 도저히 통할 수가 없다. 성서 저자들도 자기네 고유한 문화를 가졌다. 그들의 문화양식, 제사예식, 믿음과 기도의 표현 방법들은 우리에게 몹시 생소할 수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우리처럼 하느님과 그 분의 자비와 사랑, 인간의 불성실과 참다운 인간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 문화권을 가만히 살펴보면은 하느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개념은 천재, 하늘에 계신 커다란 임금님, 그래서 쭉 내려오다 보니까 한울님, 하느님, 이렇게 되었다. 개신교에서 너희가 믿는 신은 유일신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신은 하나이니까 하나님이고 너희가 믿는 신은 하느님이니까 하나이신 분이 아니다 라고 하지만 문법적으로나 우리의 신의 개념으로 본다면 하느님이 당연히 맞다.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신의 개념은 한울님, 하늘에 계신 큰분, 천재, 하늘에 계신 큰 임금님, 이런식으로 내려 왔다.

 

이렇게 내려오다가 200년전에 가톨릭이 들어왔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그 분은 서양 선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들여올 때 그때 서양 선교사들의 가방에 들여온 분이 아니다. 그렇게 수입된 분이 아니다. 이미 우리 민족이 믿어왔던 신 이었다. 우리 민족이 고백해왔던 신 이었다. 그 한울님이 좀더 명확하게 좀더 확실하게 우리한테 설명이 된 것뿐이다. 끝없이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가 이렇게 중요한데 그 문화를 이루는 요소들이 있다. 그 문화를 어떻게 창출을 시키느냐? 그요소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우선 지리적인 조건, 기후, 토양, 사회구조, 이런 것들에 의해서 문화가 조성이 되는 것이다. 성서의 탄생지인 고대근동의 기후와 지리적인 배경은 히브리인들의 생활과 언어와 사고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

 

예를 들어서 요한 복음에 보면 영원히 목마르지않을 샘물 (4,14)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처럼 수도꼭지 틀면 물이 쏴 나오는 그런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샘물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런데 메마르고 메말라서 물 한바가지만 가지고도 이것을 어떻게쓸까? 세수를 하고 손을 씻고 발을 씻고 이렇게 물이 아쉬운 지역에서는 샘물? 그것도 영원히 마르지않는 샘물이라면 귀가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물리적인 조건들, 기후와 지리 이런것들이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 냈고 야훼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은 바로 이 문화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화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체험을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된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창출해 낸 물리적인 조건들, 곧 기후와 지리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1. 지 리

 

팔레스티나의 지리는 비옥한 초생달로 표현되어 있다. ( 지도 설명 )

성서의 모든 사건들은 여기서 다 이루어 졌다. 지형이 왜 중요한가? 물 줄기는 지역 주민들의 생활의 형태를 전체적으로 바꿔 버린다. 큰 개울과 강이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또 우물과 오아시스를 중심으로해서 목축업이 발달되어 있었다. 때로는 유목민족들이 떠돌아 다니다가 강가에 자리잡고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는 농경민족을 침범하기도 한다.

 

성서 학자들은 성서의 이렇게 잡다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지역 전체를 비옥한 초생달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의 침범을 받지않고 유목민족의 침범을 받지않고 거기서 번영을 누려왔다. 물론 자기네들 안에서 각 축전은 있었다. 적어도 기원전 550년 폐르샤왕이 영토확장을 위해서 이 지역을 침범하기 전 까지는 조용한 생활을 해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의 겐지스강과 빈저스강 중국의 황화강유역 에집트의 나일강유역과 더불어서 세계 4대 문명 발생지로 손꼽히고 있다.

 

초생달 지역 가운데 제일 먼저 성서에 등장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 이다. 기원전 19세기에 살았던 인물로 아브라함을 보고 있다. 우르는 원래 항구 도시였다. 나중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데스강이 실어나르는 모래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폐르샤만에서 내륙쪽으로 후태하고 만다. 원래는 폐르샤만이 바닷가에 있는 항구도시 였는데 지금은 상당히 안으로 들어와있다.

 

모래가 계속해서 표직되어 가지고 우르보다도 안쪽으로 폐르샤만 쪽으로 모래들이 들어서가지고 새로운 땅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우르가 좀 안쪽으로 들어가있다.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여행을 했는데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직선거리로 1,500 km가 된다. 평지뿐만 아니라 골짜기로 길을 돌아서 갈수도 있었으니까 실재여행은 2,000 km는 넘었을 것이다. 이 거리는 낙타로 여행할적에 40일은 걸렸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기서 어떻게 생존해 왔는가?

 

히브리 민족은 사실 전부 형편없는 노예계층, 돈을 받고 전쟁을 해주는 용병들, 사회의 불항아들, 죄짓고 도망가서 사는 사람들, 빚 얻어쓰고 떼먹고 도망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한 지역에만 몰려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저기 고대 근동지방 전체를 걸쳐서 에집트 북부를 에집트를 위시해서 여러지역에 다 퍼져있던 그런 민족이었다.

그리고 한 세기 뿐만아니라 여러세기를 걸쳐서 생존해왔던 그런 사람들이다. 우압지족, 한 마디로 우압지족인데 모세 라는 사람이 나타나가지고 에집트북부 고센지방에 살고 있던 노예계층을 단합을 시켰다. 그래서 그곳에서 탈출을 해서 도망을 나왔다. 그 다음에 여러 가지 경로를 밟아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나중에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강력한 왕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때 뿐이다. 그 다음에는 다시 이민족에 침범을 받아가지고 북쪽과 남쪽이 갈라지고 북쪽 왕국은 아시리아에게 멸망을 당한다.

기원전 721년에 북쪽 사람들이 아시리아에 끌려갔는데 그때 끌려간 사람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남쪽 왕국도 기원전 581년에 바빌론에 함락된다. 그러다가 폐르샤왕 고레스왕이 들어온다. 처음으로 이민족이 초생달 바깥쪽에서 들어와가지고 정복을 한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더 이상 이지역이 밀패된 지역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왜 선민의식이 생겼는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국가를 잠시하고 다음에 아시리아, 바빌론, 폐르샤, 희랍, 로마에 침범을 받으면서 한 마디로 강대국 틈에 끼어가지고 생존에 급급했다. 그래서 유배 전, 후로 해서 예언자들이 활약을 하고 그러면서 선민의식을 고취 시킨다. 그리고 하느님을 유일한 왕으로 추대를 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가만히 지켜보면 우리나라 역사와 아주 비슷하다. 강대국 틈에 끼어가지고 언제 다른나라 침범 한 번 못하고 계속해서 침범만 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도 약소 민족으로 남의 나라 침범만 당하고 살았다.

 

그래도 어떻게하면 눈치를 봐 가지고 조공도 바치면서 우리나라를 다른나라가 침범 못하게 하느냐? 이것이 그들의 정치절약 이었다. 그런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선민의식이 생긴것이다. 그들이 살던 팔레스티나 이 지역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름들이 있다.

성지, 가나안, 약속된 땅, 가나안 정착하기 이전에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 이후에는 맞지않는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기원전 922년 남 북 분단될 때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과 가끔 혼동을 가져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유대인) 이 이스라엘을 공식 국명으로 삼고 있다. 팔레스티나 라는 말은 불레셋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불레셋 사람들은 외계회 해양민족 이었다. 외계회는 희랍, 그리스영역에 있는 바다다. 해양민족은 세상에서 배를 타고 떠돌아 다니는 바이킹족이라고 생각 하면 된다. 바이킹은 해적이었지만 이사람들은 해적질은 안하고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자리 있으면 거기에 들어가서 산다.

 

기원후 135년 로마 황제 카드리아누스가 유대아라는 이름을 지도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하고 그리고 팔레스티나로 그 지역을 부르게 했다. 그 이후부터 이 지역을 팔레스티나로 통용이 되는데 지금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정하는데 성서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이 지역을 팔레스티나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팔레스티나 지방에 실재 지형은 북쪽에 단어라는 곳이 있고 남쪽에 브엘세바까지 남, 북으로240km , 서 로는 160km 대부분 낮은 구름과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에는 에바론에서 흘러온 물줄기들이 갈릴래아 바다로 몰린다. 갈릴래아 바다는 사실은 호수인데 하도 크니까 사람들이 바다라고 불렀다. 갈릴래아, 티베리아, 건너사렛, 모두 똑같은 호수다.

 

갈릴래아 바다는 지중해보다도 212m 얕다. 갈릴래아 바다에서 물줄기가 흘러나와 요르단강을 이루고 요르단강은 사해로 들어간다. 사해는 평균 해저 388m 사해에서는 다른데로 빠져나가지 않고 거기서 증발하기 때문에 소금이 쌓이게 된다.

팔레스티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강대국에 각축전을 감수해야 됬다. 여러 강대국의 침략을 위한 발판이었다. 여기에서 하도 평화가 그리우니까 샬롬평화가 인사가 되었다. 제발 평화스럽게 살자, 이 샬롬이라는 말은 아주 풍부한 뜻을 지니고 있다. 가난, 전쟁, 자연의 제의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 그래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안정을 이루는 것, 샬롬은 영적인 평화만 가르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일괄적으로는 물리적인 평화였다. 이 평화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 이 평화를 주시도록 청한다. 결국 이 샬롬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인간의 최상 행복, 최상 구원을 가리킨다.

2. 기후 및 계절과 생업

 

1) 기 후

기후와 계절은 그들의 생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의류상으로는 아열되었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서 강 우량에 변화가 극심하다. 북쪽에 헤르몬 땅은 연중 강우량 150cm를 웃돈다. 비가 자주온 달, 런던이 58cm 이니까 이것보다는 3배나 되는 강우량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적어진다. 사해 연안에 있는 예리고에 가면 10cm 로 떨어진다. 우기가 있는데 겨울비를 동반하는 전기우기는 10월에 시작해서 12월을 거쳐 3월에 절정에 이른다. 따뜻한 봄비를 동반하는 후기우기는 4-5월에 있다. 6월 부터는 건기로 들어가고 비 한방울 오지 않는 극심한 더위가 된다. 기온의 변화가 극심하다. 갈릴래아 쪽은 겨울 평균 온도가 7도 여름에는 22도가 된다.

 

그리고 서리도 내리고, 간혹 헤르몬 땅 쪽으로는 산악지대에 눈도 내린다. 그러나 예리고, 꿈란, 마사다, 지역의 사해연안 거기는 30도에서 40도의 폭염이다. 지중해 지방에서 불어오는 서풍은 우리나라 태풍처럼 폭풍우를 몰고 온다. 그리고 그쪽의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린다. 메뚜기 떼가 한 번 지나가면 아무것도 남지않는다. 메뚜기 떼 한 번 닥치면 그 해 농사는 망한다. 사계절, 우리는 보통 한해의 시작을 봄으로 잡지만 여기는 가을이다. 가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한 해가 시작된다. 겨울에는 북쪽 헤르몬지역과 갈릴래아 호수지역에 서리가 내리고, 간혹 눈발도 내린다.

 

봄은 아주 짧지만 행복한 시절이다. 여름은 수확의 계절이다. 보리, , 올리브, 무화가 순으로 추수를 한다. 여름에는 죽음의 계절이다. 기나긴 여름의 막바지의 생명을 지닌 모든 피조물은 가장 큰 시련에 봉착한다. 몇 개월도 비가 안온다.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으면 뭐든지 끝장이난다. 기후와 계절의 변화는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불가사이한 것 이었다. 지금처럼 자연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연이 주는 혜택과 재앙을 하느님의 상선 징악으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기후와 계절의 법칙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을 존중했고, 조그만 변화에도 아주 민감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현대인들이 빠져있는 중요한 오류, 자연을 마음대로 마음껏 정복하는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삼는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연을 신격화 시키는 범신론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들의 자연관이 우리보다 훨신 더 건전했던 것 같다. 자연안에서 우리에게 접근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을 모색했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대화를 도와주는 다리 역확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그런가하면 원시적인 민족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 고목나무도 신으로 섬기고 큰바위가 있으면 그것도 신으로 섬기고 이런식으로 범신론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2) 생 업

크게 두가지, 하나는 농업이고 하나는 목축업이다. 히브리인들의 조상들은 반유목민이었다.

유목민 - 사막을 횡단하고 떠돌아다닌다.

반유목민 - 사막을 떠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사막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막언저리 주변에 돌아 다니며 살다가 목적지를 발견했을 때에는 정착한다. 낙타나 양들이 풀을 다뜯어먹고 없으면 풀을 찾아서 또 떠돌아다닌다.

 

그러다가 13세기에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유목민 생활을 완전히 청산한다. 그래도 유목민의 의식과 종교생활은 그들의 문화의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들은 단순하고 검소하게 살았고, 공동에 적합해서 단결했다. 그들에게는 특권의식이 없었다. 누구나 다 일을 해야했다. 한 사람의 명령권자가 있었고 그에게 절대복종을 했다. 그러니까 약간의 살림도구를 싫고 목적지를 찾아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검소하게 살을 수밖에 없었다. 수시로 다른 씨족이나 부족하고 싸움을 해야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달라진다. 집도짓고, 재산도 불어나고, 그러면서 개인주위가 싹튼다. 여기에서 예언자들이 반발한다. 예언자들은 사막생활, 유목민생활을 동경하면서 가죽옷을 해입고, 세례자 요한처럼 꿀을 먹고, 뚜기기 잡아먹고, 이것이 유목생활의 잔재이다. 유목생활에서는 술을 먹지 않았다. 농경생활을 하지않으니까 술을 담을 수도 없고 먹지도 못했다.

 

3) 농 업

농업은 일상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의 축제일은 추수와 항상 연관되어 있고, 여러 가지 법령들도 나오는데 이것도 농업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으고 씨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그 사람들은 전기우기인 가을에 씨를 뿌려놓고 비가 오기를 기다린다. 씨를 뿌린 다음에 얼마있다가 경작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밟고 다니고, 길이생기고, 돌맹이가 있고 그런다. 우리와는 영농법이 다르다. 팔레스티나는 옥토가 아니었다. 농업 전문가에는 형편없는 땅이지만 그러나 사막에 싸여있는 그런땅으로 봐서는 요르단 강물이 흐르고 그러니까 옥토다. 더구나 가믐 극심하고, 메뚜기떼, 곰팡이, 사막의 열풍, 이런 것 들이 끊임 없이 들이 닥쳐서 한 해 농사를 망치는 예가 많다.

 

 

4) 추 수

보리와 밀은 5- 6월에, 무화가 나무는 8- 9월에, 보리나 밀, 첫 번째 수확을 하고난 다음에는 나뭇가지로 초막집을 시원하게 엮어만들어 쉰다. 그러다가 가믐과 우박과 메뚜기떼를 만나면 한 해 농사는 완전히 망치고 한숨과 빚만 늘어난다.빚을 지게되면 하나에서부터 모두 팔게된다(마태18,23-25). 그래서 추수가 성공을 하면 그해에는 행복이 보장된다. 그래서 그 추수의 성공을 기념하는 축제는 광난의 축제가 되는 것이다. 자기네들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으니까 대단하다. 추수를 망하게되면 그것은 수없이 절망하게 된다.

 

여기서 풍산신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을 수 밖에 없다. 풍상신 - 소출을 많이나오게 해주는 신, 양새끼들도 많이 낳게 해주고 곡식도 많이 맺게 해주고, 가나안의 퐁산신은 농부들이 바치는 희생제물에 따라서 동물, 식물의 번식과 수확을 결정해 주었다. 풍산신의 비유를 건드리면 안되고 잘 먹이고 잘 갖다바치고 해야된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쎅스가 굉장히 중요하게 등장하게된다. 풍산신 주변에는 창녀들이 들끓었다. 풍상신을 바치는 사제들과 성행위를 했고, 풍상신을 가져오는 사람들하고도 성행위를 공공연하게 성전안에서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그렇게 창녀들을 미워했는가 알 수가 있다.

 

창녀들은 풍상신, 우상숭배를 끌어들이는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성도덕이 문란해지면, 자연히 우상숭배가 성행하게되고, 우상숭배가 성행하면 성도덕이 자연적으로 문란하게 되었다. 농경생활을 해나감에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점차 안일함과 사치로 흘러간다. 대 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에 빈부차이가 격심해진다. 그 전에는 없던 것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양상이 일어난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이 심해졌다. 목축을 할 때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없이 똑같이 가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특권층이 없이 꼬마서부터 노인까지 모두 일을 하지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귀족과 특권층이 생겨나고 그들의 횡포가 대단했다. 이런 농경문화의 악습은 이스라엘의 단결을 해치고, 그들의 종교생활과 정신문화를 좀 먹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덕을 저버리고, 개인주위와 자만심에 빠졌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신명 8,17). 한 마디로 예언자들의 운동은 뿌리찾기 운동이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 우리가 목축업을 할 당시에는 특권층이 없었고, 빈부차이가 없었고, 우리의 야훼께 대한 믿음이 아주 신실했고, 개인주위가 없었고, 지금보다 사치스럽지 않았고, 이런생활로 돌아갈 수 없겠는가? 오늘 자본주위 체제안에서 경제적인 부의결실을 어느정도 획득하고 있는 우리 한국 사회에도 예언자들의 질책이 해당하지 않는가!

 

 

 

3 사 회 구 조

 

1) 가 정

이스라엘의 사회구조는 피라밋식으로 구조되어있다. 제일 최소 단위가 가정이다.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물론 기둥이다. 그들의 자녀들, 집안의 종들과 그들의 가족, 의지할 데 없는 독신친척도 가정에 속했다. 사막에서 목축업을 하면서 떠돌아 다니다보면 혼자 있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혼자 있는 것에 대한 공포가 대단했다. 하느님이 이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담에게 혼자 있는 것이 좋지않느니라 하고 하와를 만들어 주셨다. 가정을 부를 때 아버지집 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아버지가 앉는 의자에 자녀들이 앉아서는 안된다. 심지어 자녀들에 대한 생사권도 갖고 있다.

죽이고 살리고 하는 권한도 아버지가 갖을 수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근거렸다 루가 4,22). 아버지는 집안 귀속들을 보호 해야할 책임을 진다. 우리가 이해를 잘 해야 한다. 우리가 보통 현대가정에 있어서 아버지의 권위와 책임은 법의 테두리안에 묶어놓고 있다. 법으로서 정하고 있다. 아버지가 애들한테 해 줘야 하는 것 들, 교육을 시킨다든가 어떤 아이들 양육문제, 생사권, 이런 것 들을 법으로 규정해서 법으로 다 처리한다.

 

그러나 그 당시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 다갖고 있었다. 자녀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는 반면에 자녀들에 대한 권한도 갖고있고 자녀들에게 존경과 복종을 요구할 권리도 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이렇게 부를 때 는 모든 것 이다 포함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아버지하면 그 정도의 실감이 나지않는다. 벌써 문화가 이렇게 틀리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할 때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정안에서 아버지가 지녔던 권위와 책임, 그리고 아버지 에게 걸었던 기대, 이런것들을 모두다 합쳐가지고 하느님 아버지라 고백을 해야 한다. 엄청난 고백이다. 가정은 빠스카 축제를 지낼 수 있는 최소의 단이다.

2) 씨 족

씨족 - 씨족은 친척의 여러 가족들이 모여서 구성한다. 유목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를 지키기 위한 최소의 단위가 바로 씨족이다. 씨족은 유목생활을 하다가 정착하면 바로 마을로 바뀐다. 씨족은 원로로 불리우는 각 가장을 대표로 연합지도 체제를 갖추고 있다. 원로들은 가정에서의 그 아버지처럼 그 씨족의 생명과 권한을 가진다. 전쟁이 일어나자 원로들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판관제도를 도입한다. 판관은 원로들에 의해서 선출이되고 영토력을 갖는다. 그리고 정의를 세우고, 씨족 전체를 단결시켜서 외부 침략에 대처를 한다. 씨족은 철저한 연대의식으로 묶어져 있다. 씨족 사회안에 고헬이라는 사람이 하나있다. 고헬구속자어떤 속량자 라는 뜻이있다. 고헬은 씨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준다.

힘 없고 가난하고 의지할데없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옆에 힘 있고 부유하고 권한이 있는 친척이 힘 없는 그 사람의 고헬이 되어서 남에게 복수를 당했으면 복수도 해주고, 그 사람이 조상 때부터 물려 받은 땅을 도저히 빚 때문에 청산할 수가 없으면 그 땅도 사준다. 그리고 희년,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해에 십 오년째 되는 해는 무조건 돌려준다. 그 사람이 없으면 자식에게 돌려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씨족 내에 재산과 생명을 보호했다.

 

고헬 - 구속자, 속량자, 우리가 하느님을 고헬이라고 성서에 기록된 것을 볼 때 바로 이런 개념이 들어가 있다. 하느님은 나의구속자. 나의속량자. 이럴 때 고헬은 바로 이런 뜻이 있다. 나를 대신해서 내 송사를 들어주시고, 내 억울한 것을 풀어주시고, 또 가난하고 못난 이몸을 보호해 주시는 강력한 대변인으로 등장하시는 이런 의미로써고헬이다. 대단히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고헬의 임무는 예수에게서 완성된다. 예수는 모든이 에게서 고헬이 된다.

3) 부 족

부족은 한 분의 공통적인 조상을 모신 씨족들 간의 집합체 이다. 부족이 너무크면 견디어 낼 수가 없다. 사막에서 이동할 수가 없다. 전쟁을 하기에 알맞은 정도의 크기만 하면된다. 사막에서 돌아 다니다 보면 물이 제일 문제가 된다. 물이 조금씩 나오는데 사람이 몰리다보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부족이 점점 비대해지면 씨족들을 갈라 놓는다. 씨족들이 떨어져 나감으로 인해서 부족들의 순수성이 흐려지게 되었다.

 

같은 혈통을 한 분의 공통된 조상을 모신 씨족들간의 집합소였던 부족이 다른 조상을 모신 부족들하고 같이 연결이 되기 시작한다. 돌아다니다가 다른 부족에게서 떨어져나온 씨족들하고 합치게된다. 부족의 순수성이 흐려진다. 그러나 씨족 사회에서 노출 되었던 연대의식이 부족 사회에서 절정을 이룬다. 부족 대표의 잘못은 부족 전체의 잘못 이다. 가나안 정착 이후에 부족의 개념은 점점 사라진다.

 

농부들은 개인주위에 물들어있다. 바울로의 구속사상(새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속 되었다). 이것은 바로 씨족이나 부족사회의 연대 의식에서 나왔다.

죄가 한 인간으로 부터 왔고 구원이 한 인간으로 부터 주어졌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부족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민족의 개념이 나온다. 자신들을 결속시키는 근거가 공통 조상들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다. 이 땅안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다.

 

솔로몬 왕이 세금징수를 목적으로 나라를 열둘로 쪼개었다. 부족의구별이 없이 행정구역으로 짤랐다. 이스라엘이 민족으로서 설 수 있었던 유일한 시대는 다윗과 솔로몬 때였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이후로는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꼴을 갖추지 못한다. 강 대국에 시달리는 하나의 부족으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생존에 급급한 그런 나라의 운명을 맞는다. 민족주의, 강력한 국수주의가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 가 도입이된다. 이 민족주의는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다.

정치적인 환경 안에서 탄생하게 되지만 종교적인 의미를 여기다 강하게 부여를 한다. 야훼 홀로 왕이시다. 야훼 하느님 외에 다른 왕이 없다. 그래서 왕정도입 이후에도 역대 왕들은 야훼로부터 선택이 되어야 했다( 2사무 7). 왕정주입 자들과 전통주위 자들의 갈등이 표출 된다. 사무엘이 백성들로부터 왕을 뽑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아주 기분이 굉장히 나빴다. 너희 왕이 야훼 하느님 뿐인데 왜 왕을 뽑아달라고 하느냐? 그러면서도 사울을 뽑아서 기름 부어가지고 왕으로 추대를 한다. 두 가지 서로 틀린 주장들이 얽혀 져가지고 사무후서 를 이상한 방향으로 짜집기 를 했다.

 

왕정제도를 도입한 이스라엘은 왕들이 고대근동의 동방에 절대군주들이 빠진 악습을 그대로 닮는다. 궁궐을 호화롭게 짓고, 왕비나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위해서 사람들에게 부역을 시키고 호화로운 궁중을 유지하기 위해서 과도한 세금을 사람들에게 부과한다. 그리고 예쁜 처너들은 다 모아가지고 궁녀로 들여보낸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정제도가 필요하긴 했다. 판관제도로는 도저히 외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상설군대를 편성하고 언제나 한편으로 외 민족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그러한 왕정제도가 필요하다.

 

왕은 외 민족의 침입을 막아주는 대신 백성들로 부터 세금도 요구하고 부역도 요구하고 징병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게 되었다. 필요에 의해서 왕정제도를 도입했는데 왕들이 이런식으로 다른 국가들의 군주들 처럼 악습에 빠지니까 실망했다. 거기에서 메시아 사상이 싹튼다. 강력한 메시아 사상이---

도대체 이런식의 문란한 왕이 아니라 그야말로 백성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군대가 처들어 오면 자기먼저 도망 가는 허약한 왕이 아니라 강력하게 이민족을 거스려서 싸워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이런 메시아를 갈망하게 된다.

 

특히 나라가 다른 민족에 의해서 짓밟히게 되고 국토를 빼앗기고 그런 암담한 현실이 닥쳤을 때 이 메시아 사상은 더욱 크게 사람들 마음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 메시아 사상이 무르익었을 때 그 때 그리스도가 탄생 하게된다. 구약의 흐름을 그대로 안고 그 흐름이 절정에 달았을 때 그 때 때에 맞춰서 <성서의 표현, 때가 차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고헬의 의미와 에집트에서 부터 하느님의 사람들을 빼낸 것, 속량의 개념 -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 몸값을 주고 사서 풀어주는 것, 이스라엘 사람들을 에집트에서 빼낼 때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개입해 들어 가신다. 하느님의 백성을 히브리 백성, 혹은 유다 백성이라고도 하는데 연관성은 ? ---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장 - 아브라함이 우르 지방에서 가나안으로 들어 가서 이사악 - 야곱 - 요셉 - 파라오에게서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틀린 사람들이다. 모두가 다른 부족장 들인데 통일체 를 연결 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었다. 히브리 민족이 하나의 계층 이라고 본다면 어수선한 입장 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거기 압보리족들, 여러 군대에서 올 때에 우리는 누구 혈통이다, 이렇게 주장을 했을 것이다.

 

그것을 가나안 땅에 진주해 가지고 통일 국가 를 이루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정리를 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다윗과 솔로몬 왕가에 있는 서기관 들이 기록을 해 나갈 때 그런 식으로 역사를 꾸민 것이다. 그러나 족장들의 이름들은 어느정도 역사성이 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런 이름들이 고대문헌에 여기 저기 에서 선발적으로 발견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연결되어 가지고 발견이 되지않고 있다. 틀림 없이 압보리족, 히브리족 이 안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민족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일시키는 그런 원동력으로 삼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천민 들인 히브리 백성들을 강력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까지의 그 과정이 우리한테 던져 주는 신선한 충격이다. 우리 처럼 형편없는 개개인 으로 볼때에 그런 사람들도 하느님 께서 기억을 하시고, 부르시고, 그 다음에 우리를 도구로 쓰시고 그렇게 함으로서 내 자신이 사회안에서 나름대로 나의 주체성을 당성 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신 것은 커다란 은혜다. 우리는 이런 것을 성서에서 배워야할 것이다.

 

선민 -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한 민족이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뽑아 가지고,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다. 오합지졸인 그런 족속들을 모아가지고 이런 선민에까지 올려놓은신 것,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그렇게 까지 하느님의 힘이 컸다는 것, 말하자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이다. 혼돈에서부터 하나의 통일을 이룬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성서안에서 배울점들이다.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해서 거기서 통일 국가를 이룬 때 부터는 히브리 인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금의 이스라엘 인들의 조상이 히브리 인들, 압보리 인들 이라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해서 국가를 이루고 나면은 이스라엘 백성 이라든가 유다 백성으로 부르게 된다. 특히 유다 라는말은 나중에 후대에 오면서 유다이즘, 유다교가 유배 이후에 상당히 강하게 대조가 되면서 유다 백성, 유다인 들, 유다 문화, 이런 말이 나온다.

 

유다 인들은 고대 근동에 떠돌아 다녔던 압보리(방랑족) 인들을 가리 키는 것은 아니다. 상당히 후대에 어느정도 다듬어진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고, 그들의 조상들이 압보리 인들, 히브리인들이라고 본다. 이스라엘 은 국가 이름도 되고 사람들 이름도 된다. 북쪽만 가리킬 수도 있고, , 북을 모두 가리킬 수도 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이스라엘 이라 부른다.

 

 

 

 

4. 문화 와 축제

 

1) 문 화

문화는 자연질서에 반해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을 가리 킨다. 마을, 도시, 언어, 예술, 도구, 사회구조 등등, 각 문화는 약점과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고유한 점과 보편적인 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팔레스티나 문화도 이런 문화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 자기네들의 고유한 문화를 전달하는 동시에 문화적인 약점과 미성숙 도 노출시키고 있다. 우선 그들 문화의 고유성은 그들의 문학 양식, 제사 의식, 믿음과 기도의 표현 방법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 문화의 보편성은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인간의 불충실한 모습을 전달하는 것, 이것이 보편적인 진리 전달이다.

그들 문화의 약점은 종교 이름으로 곧 하느님의 이름으로 타민족 에게 가한 집단적 폭력, 그 폭력에 대해서 무감각 했다. 그리고 국수주의, 자기네 민족 만이 최고다. 우리 민족 만이 이세상 에서 살아 남아야 된다. 또는 남존 여비 사상, 일부 다처 주의, 노예 제도의 인정, 이런 것 들이 그들의 문화적 미성숙 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이런 문화적 미성숙을 잘 파악해야 된다.

 

이 성서의 말씀은 모두가 진리다. 아브라함이 일부 다처 제를 했으니까 우리도 해야 된다. 성서에 기록 되있으니까 또는 다른 민족을 개미 짓밟 듯이 다 짓밟아 버렸는데 우리도 다른민족을 그렇게 해야된다. 성서에 보면 남존 여비 사상이 대단하다. 여자들을 물건 취급하고 사고 팔고 하는데 이것은 문화적인 성숙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성서 안에 들어나있는 미성숙은 받아 들일 필요가 없고 고쳐야 한다.

 

그 들 문화의 장점은 연대 의식이라든가 자연을 순수하게 보고,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 해 내는 그런 태도, 그 외에 성서를 보면 여러 가지가 많이 나온다. 어쩌튼 그들의 사고방식과 우리의 사고방식이 비슷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성서 저자들과 정신적으로 우리가 교류를 할 수 있다.

 

2) 신명기 정신, 하느님의 사랑, 사랑의 이중계명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어떻게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가? 축제 정도에 따라서 정립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3대 순례 축제, 이 축제에는 가족들의 공동식사도 반듯이 동반한다.

해방절 - 과월절 및 무교절을 합쳐서 해방절 이라고도 한다.

과월절은 유목민 풍습 이었다. 가축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마다 한 살된 어린양 한 마리를 살해해서 액뗌을하던 유목민 풍습에서 나왔다. 그러다가 에집트 탈출을 겪고난 다음에는 탈출을 기념하는 해방절로 바뀐다.

무교절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그곳의 농경민 들이 가지고 있던 풍습이다. 누룩이 없는 빵의 축제, 새 누룩을 딛기 위해서 이전에 누룩과 이전에 누룩으로서 빚은 빵을 모두 불살라 버린다. 에집트 탈출 할 때 급하니까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 무교절과 과월절을 합쳐서 종교 적인 의미를 부여 하면서 해방절로 바꿨다.

오순절(맥추철) - 보리 추수 때에 지냈던 축제에서 비롯 되었다. 이 때 그들은 맏물, 제일 먼저 나오는 소출을 바알신, 아세라 목상이라든가 풍상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오순절은 과월절 첫날부터 시작해서 7주간을 지내고, 이 축제를 지냈다. 7×7=49일 지나고 50일 째 지냈기 때문에 오순절이라는 말이나왔다. 원래 이 맥추철은 가나안 농경민들에 의해서 보리 추수 시작에 지냈었으나 히브리인들이 밀 추수끝으로 축제일을 바꿨다.

맥추철, 오순절의 종교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계약,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축제로 삼는다. 노아와의 계약, 또는 모세와의 계약, 노아의 계약을 맺을 때 곡식단을 바치고 양을 살라서 바치는 번제를 바쳤다.

 

초막절 - 농경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수확물인 포도와 올리브를 걷어 들인후 풍산신에게 가나안 원주민 들이 바치던 감사제가 바로 초막절 이었다. 초막절의 종교 적인 의미는 사막 시절에 천막 생활과 그 기간에 맺었던 새계약.

초막절(히브리말로 쑥꽃)은 나뭇가지로 만든 안식처, 가나안 주민들의 종교의식은 여러신들을 인간의 힘으로 움직여 보려는데서 나왔다. 그래서 자연의 혜택을 얻어내는 것, 이와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연의 통제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간섭이나 영향력을 받지 않는 초월자로서 인식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예식을 통해서 하느님께 마땅한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렸다.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것 에서 받아들일 뿐 이지 하느님을 움직여 가지고 우리가 제물을 바쳐 가지고 하느님의 마음을 딱 사로잡아서 하느님을 우리 하수인 처럼 부릴 수 있는 그런분으로 생각 하지를 않았다. 우리에게는 구별이 뚜렷하다. 하나는 하느님을 조종하는 종교 예식이고, 또 하나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에 대해서 감사하게 받아 들이고 좀더 구체적 으로 그 지향들에 대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가는 것 보다 실제 그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곳에다 무얼 갖다바치고 그러는 것이 더 효과적이 아닐까?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래서 가나안의 풍산신 숭배에 자주 기울어졌다. 그러면 이 축제들의 날짜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도 우리처럼 음력을 썼다. 이것도 우리와 많이 비슷하다.

 

과월절 - 음력 3,14 저녁 때 부터 시작, 우리는 해가뜨면서 하루가 시작되지만 그 사람들은 해가 지면서 하루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최후의 만찬 하신 날과 똑같다.

무교절 - 음력 3,15일부터 7일동안 계속된다. 과월절 양을 하루전 날 1312:00시에 잡아가지고 먹는다. 1마리는 12명이 먹을 분량이다.

오순절 - 음력 56일 하루 뿐이다.

초막절 - 음력 915일에서 7일동안 이다.

그들이 계산한 달력과 지금 우리의 달력은 조금 틀리기 때문에 똑같이 맞지 않는다. 1월이 3월 이다. 바빌론 땅에 유배를 갔을 때 달력이 또 틀리다. 일 년의 시작이 다르다.

이스라엘 사람들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 과월절과 유월절은 똑같은 뜻이다.

5. 일반 역사 와 성서

 

성서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성서 독자들로 하여금 성서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또 그 배경을 이룬 역사의 줄거리를 대충 살펴봄으로써 개괄적인 개념을 갖자는 것이다.

 

1) 성조시대

성조시대 이전에 선사시대(창세1-11)가 나오는데 선사시대에 대해서는 별로 할말이없다. 다음에 구세사를 다룰 때 창세 1-11장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그런 맥락에서 보면 창세1-11장은 거의 할말이없다. 왜냐면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들 배후에 역사적인 사실이 전혀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서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나오는데 틀림 없이 아득한 옛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홍수를 크게 한 번 다친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무서운 기억 들이 점차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 오면서 그것이 노아의 홍수를 기록하게 될 배경을 틀림 없이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기록 자체는 역사적인 기록 이라고 볼 수가없다.

 

성조시대의 역사는 창세 12-50 장까지이다. 아브라함 으로 부터 시작 해서 요셉 그의 형제들, 에집트로 진출하면서 끝나는데 고대 근동의 문헌들 가운데 보면은 성조들의 이름과 풍습에 유사한 그런 기록들이 나온다. 이 인물들은 아브라함이 기원 19세기 한 4,000년전에 나왔던 사람들인데 기원전 2,000년전에 주름잡던 사람 들이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런 사람들이 모두 기원전 2,000년전에 살았던 부족장들이었다. 이들을 어떻게 조화시켜가지고 이스라엘을 단일 민족으로 묶느냐?

이것이 성서 저자들의 아이디어였다. 이 이야기 들을 쓴 목적은 정확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자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후손들에게 민족적 단결과 정기를 굳게 지켜 나가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성조 설화는 이스라엘과 이민족 들의 관계를 설명 해주고 있다.

 

아람족 - 시리아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훌의 손자가 그 원조가 되는 것이다.

 

미디안족-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내 크투라에게서 태어난 자식으로 부터 유래한다.

독선적 이라고 할까! 자기네 민족이 최고이고 다른 민족들은 우리에게서 갈라져 나갔다. 이런식으로 그래서 이 역사를 바탕으로 해가지고 체계적으로 역사를 구성할 수가 없게된다. 그렇다고 해서 창세12-50장까지의 기록을 전혀 황당무게한 기록 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성조의 이야기 전체, 그 뒤에는 역사의 발자취를 남긴 신앙인들의 삶이 자리잡고 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물론 으뜸은 아브라함 이다. 그의 믿음이 창세 12-50장까지의 근본바탕을 이루고 있다. 성조 설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출발점 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게되었다. 여기서 안다는 표현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가 보통 안다고 할 때는 우리 머리속에서 지성을 이용해서 무엇을 깨우치는 것, 그러니까 지성의 인지 작용이다.

그러나 성서에서 안다는 표현은 성적인 관계를 말한다. 마리아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서로 알고난 후에 아이를 낳는다든가,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이처럼 안다는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모든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처럼, 그 만큼 가깝게 그 만큼 적나라하게 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알고, 여자가 남자를 알 듯이 그 만큼 나의 모든 것을, 시편 139 편에 나오는 것을 보면, 나의 오장육부를 모두 아신다고 했다.

 

내 안에 있는 은밀한 생각 까지 내 육체의 모든 세포 하나 까지 모두 안다는 그런 말이다. 굉장히 진한 말이다. 그래서 성조설화의 메시지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그 다음에 이 신앙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는 것 이다. 히브리 민족의 형성은 합삐루 인들로 부터 되었다. 그들은 호전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용병들로 기용이 되었고, 고대근동에 상당히 넓은지역에 광범위하게 흩어져살던 이방인들, 전쟁의 포로들로서 어떤 국가나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했던 특수 노예들 이었다. 시대적으로도 여러 세기에 걸쳐서 존재했다.

 

출애 3장이나 6장에 보면 히브리인들이 노예생활을 하면서 막 신음소리를 낸다. 그들의 신음소리를, 절규를 들을시고 야훼 하느님께서 마음이 움직이셔서 그들에게 접근을 하신다. 그들의 신음소리는 기도가 아니다. 정식 기도의 꼴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 그들의 절규를 들으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방문해 오신다. 그래서 그들이 에집트 북부 고센지방에서 살다가 거기서 탈출을 한다.

 

성서에서 갈대바다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홍해에는 갈대가 자라나지 않는다. 그래서 고고 학자 들이나 성서 학자들이 도대체 어떤 경로를 밟아서 이 사람들이 빠져나갔을까? 그런데 에집트 북부에 수에즈운하 그처에 갈대가 자라난다. 그곳은 개울이 있어서 쉽게 건너갈 수 있는 지역이 있다. 모세가 쫒기다가 틀림없이 히브리 인들을 그 쪽으로 이끌고 갔을 것 이다. 그리고 건너면서 자게네들은 무거운 짐이 없었다.

그러나 파라오 병사들은 무거운 병거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수렁에 빠져버린 것 같다. 이런 것은 하나의 상상이다. 그래서 그들이 건너 갔고,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은 기원전1,400-1,500년 그렇게 되지만, 기록된 것은 기원전 900-800년밖에 안된다. 그러니까 400-500년이란 기간이 흘렀다.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건을 체험 했을 때 놀랍다. 그 강력한 군대가 뒤에서 밀어 부쳤는데 우리가 정말 하느님의 지시를 받는 영도자 모세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받고나서 그 사건이 너무 감격스럽고 너무 컸다. 자기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해줄 때 예를 들어서 우리는 형편없는 민족이었고 에집트 북부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견디기가 힘들어서 도망 나왔어, 도망나올 때 쫒기다가 갈대가 자라는 수에즈운하 그 쪽으로 도망 나왔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겪은 신앙적인 체험이 너무나컸다. 비록 형편 없는 우악지족 민족 이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나안 복지 까지 이끌어 주셨는데 이 체험이 너무나 큰 것 이었다.

특히 에집트 군사들과 자기네들 모습을 비교해 볼 때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체험 감격 이런 것을 점점 표현하다 보니까 인간적인 여러 언어들을 동원 해야 되고, 그래서 홍해를 마른 발로 딱 건너오고 그 다음에 뒤에 파라오 군사들이 쫓아오고 건너오고 나서 다시 지팡이를 드니까 물이 합쳐져서 파라오 군사들은 물귀신이 되었다. 이렇게 해야지 다음 세대에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해지고 그럴 것이다. 이야기가 재미있게 꾸며지니까 ---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어떻든 간에 홍해를 마른발로 건넜던지 성서학자 들이 말하는 것 처럼 수에즈운하 북부 갈대가 자라는 개울을 건넜던 간에 이 사건은 그들에게 지울 수 없는 큰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깊은 체험 이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노예생활 에서 끌어 내셨다. 그것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해 주셨다. 커다란 권능이다. 그 권능을 우리는 보았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 하느냐?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나름대로 표현 양식을 과장법, 이런 것 을모두 동원해 가지고 표현을 한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성서저자가 우리에게 전달 하고자 하는 그 사상이 중요하다 그 본내용은 다 놓쳐버리고 그 이야기 자체에만 메달려 있는 것은 별로 바람직 하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신화나 설화, 그 뒤에 숨어있는 깊은메시지 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다행이 그 이야기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 해석을 붙일 수가 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지금도 또 해석하고 해석해도 끝이 없다. 우리가 지금 기록하는 식으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딱 못박아서 기록을 해 버리면 더 이상 해석을 붙일 여지가 없다. 한 가지 해석으로 고착되고 만다.

 

2) 사막시절

사막시절 - 에집트에서 빠져나온 이 사람들은 사막에서 40년동안 방황 했다고 되어 있다. 에집트에서 가나안 까지 차로 8-9시간, 걸어도 한 달이면 된다. 그렇게 짧은 거리를 하느님은 40년동안 뺑뺑이를 돌렸다. 40년동안 뺑뺑이를 돌면서 우악지족인 히브리 인들이 강력한 신앙 공동체로 변모가 된다. 십계명이 시나이 산에서 주어진다. 시나이 산, 호렙 산, 시나이 반도, 남단 해발 2,500m에 성 카타리나 수도원이 있다. 그 옆의 장소가 시나이 산이 아닌가?

 

또 하나는 시나이 산에 보면 막 이글이글 타고 번개가 치고 그렇기 때문에 화산이 아닌가? 화산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닌가? 아리비아 북서 쪽에 화산 들이 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돌아다 니다가 화산 들을 보고 거기서 십계명을 받은 것이 아니냐? 또는 시나이 산이 에돔 땅에 있다고도 한다. 아마도 에집트 에서 빠져나온 히브리 노예들이 한꺼번에 뭉쳐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몇 갈래 로 나뉘어 져가지고, 나중에 가나안 땅으로 다시 모인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나뉘어진 각 지파들이 나름대로 그 체험을 가지고 들어와서 그 체험들이 짬뽕이 되어 가지고 어수선한 기록 들을 남긴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고 있다. 십계명에 대해서는 다음에 구세사를 다룰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3) 가나안 정복과 정착

여호수아 기를 보면 예리고를 함락 시킬 때 7일 밤 7일낮 꽹가리를 치니까 마지막 날에 성벽이 그대로 주저 앉드라 그래서 힘 안들이고 건너 간걸로, 요르단 강도 강물이 너무쎈데 탁치나까 가라져 가지고 건너갈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데 판관기 1장에 보면 그것과 다른 기록이 나온다. 전진적 으로 천천히 가나안 땅을 침입해 들어간 걸로 묘사가 되어 있다.

그래서 틀림없이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던 히브리 인들이 안에서 내동을 했고, 밖에서 들어오는 히브리 인들과 안에 있는 히브리 인들이 서로 야합해 가지고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력으로 가나안 땅을 점령을 하긴 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목민족의 문화라는 것이 별볼일 없었다. 자연적 으로 문화적 으로 우세한 가나안의 농경 문화를 받아 들이게 된다. 무력으로는 쳐들어 갔지만 문화적 으로는 먹혀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인들이 섬겨 왔던 우상숭배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 가나안 땅에 어느정도 정착이 되면서 판관시대가 열리는데 판관시대는 사울이 출현하기 전 (사울은 기원전 1,020년에 출현한다) 몇가지 패턴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을 시켜가지고 이스라엘을 침입케한다. 이스라엘이 호소를 한다. 용서해 달라고, 그러면 다시 판관을 보낸다. 판관을 보내서 정돈을 딱 해놓으면 또 다시 하느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진다. 그러면 또 이민족을 보내고, 이스라엘이 호소하고, 그러면 판관을 보내서 평화롭게 해 놓으면 또 우상숭배에 빠지고 이런 싸이클이 계속해서 돌아간다. 몇 년동안 ---

 

4) 초기 왕정시대

초기 왕정시대는 네 명의 건출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무엘 - 예언자, 사제, 환시가, 왕의 도유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초기 왕정시대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사람이다.

사울 - 성서에 보면 아주 비극적인 인물로 기록이 되어 있다.

다윗 - 호탕한 인물이고, 싸움을 잘 했던 것 같다. 쿠테타를 일으켜 사울 가문을 몰아 냈는데 (1열왕 1-11), 사울 가문을 원만큼 죽이고 묻는다(사무엘 전,후서). 사울 가문에 절름발이 하나가 남는데 그에게 잘 해 주라고 하고 자기가 왕위에 오른다.

솔로몬 - 사울이나 다윗 처럼 전사가 아니다. 싸움 잘 하는 사람이 아니고 타고난 외교가였다. 무역을 잘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절대 군주의 악습에 빠져 들어 간다. 수많은 몇 백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외국에서 여자들을 많이 데려온다. 그 여자들이 우상 숭배를 같이 끌여 들인다(세바의 여왕이 대표적).

그래서 궁궐 안에 우상숭배 사당들이 굉장히 많았다. 다윗 과 솔로몬 시대 때 편찬 작업이 이뤄진다. 왕궁의 서기들을 이용해서 기록을 하는데 제일먼저 기록한 것이 왕조실록 이었다. 솔로몬은 적자출생 이었다. 압살롬을 제치고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

솔로몬 치하에서 녹을 먹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서자가 왕이된 것을 어느정도 정당화 시켜야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사악 -에사오를 제치고 야곱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간다. 이렇게 내려오다가 요셉과 열 두 형제인데 동생인 요셉이 큰 역할을 해 나간다. 거기에 문학 적인 기교가 그 안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왕조실록을 쓰면서 다윗과 솔로몬의 비리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 하지 않고 비판하고 기록해 준다.

 

5) 왕국의 분열(기원전 922)

이미 분열의 씨앗이 그 전에 있었다. 유다 지파인 다윗이 남쪽 으로만 취중을 해서 정치 문화를 그쪽으로만 발전을 시키니까 불만이 많았다. 솔로몬이 죽고난 다음에, 북부에 열 지파가 여롤보함을 왕으로 선출한다. 한 편 시리아 와 아시리아 강대국 들은 끊임 없이 이스라엘 을 넘나 본다. 북부 이스라엘 왕 베가가 시리아 왕과 동맹을 맺는다. 남쪽 유다왕 아하즈에게 너도 같이 영합을 해달라고 청한다. 그런데 아하즈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아시리아 에게 붙는다.

아시리아가 시리아와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치면서 북부이스라엘을 먹어 삼켜버린다. 기원전 720, 북부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홀로 남은 유다는 기원전 721-587년까지 존속을 하는 데 초기에는 아시리아가 득세를 했기 때문에 안전 했다. 그런데 기원전 650년 이후에 아시리아에 잦은 내란이 생겼다.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니베는 메레스와 바빌론 연합군에게 멸망한다. 남은 지역도 에집트가 지원 함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605년 카르카메스 전투를 끝으로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 에게 먹힌다.

 

한 편 아시리아에 밀착 되었던 유다는, 특히 유다왕 여호야킴은 아시리아가 폐망 되고, 아시리아를 도우려는 에집트와 동맹을 맺어가지고 아시리아를 후원하다가 모두가 멸망을 당하자 유다왕 여호야킴도 느부갓네살 에게 패배 당한다. 그의 삼촌 시드키야가 왕으로 추대 됬는데 꼭두각시다. 바빌론에 조공을 계속 바쳐야 되니까 이 시드키야가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을 일으켰지만 역부족이었고, 두 눈을 뽑힌체 기원전 587년 포로로 바빌론 에 끌려 간다. 기원전 586-539년 바빌론의 귀양살이 생활이 시작 된다.

 

이 때 끌려간 사람들은 전부 이스라엘의 엘리트들이었다. 사제계급, 귀족, 왕족, 지식인들, 궁중에서 글 쓰는사람들, 시편 137편에 이 때 끌려간 사람들의 처절한 심정, 망국의 한을 노래 한다. 그 때 끌려간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불러가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돌아가야 되겠다는 그런 맘을 먹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망국의 시름도 잠깐, 새 지역에서 정착해가지고, 나름 대로 돈도 벌고, 직위도 얻고, 안정된 생활을 해 나가기 시작 했다. 이 사람들은 나중에 539년 귀양이 끝났을 때에도 돌아 가지 않았다.

 

몇몇 의식 있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으로 돌아온다. 이 귀양살이 후에 특이한 것이 시나고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약탈 되었기 때문에 그 성전 대신 이억만리 에서 나마 예배를 볼 회당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시나고가 라고 불리는 유대교 회당이다.

 

6) 폐르샤 시대(기원전 539-337)

특징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완전한 행정 체계를 갖추고 이민족 들의 종교 자유를 어느정도 허락해 주었다. 탁월한 식민 정책을 썼다(에즈라, 느혜미야서에 잘 설명되어있다). 516년 귀양에서 돌아 온 이 사람들은 성전을 지어가지고 봉헌 했다. 성서에 보면 이 성전을 지을 때 그 땅의 백성들(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를 많이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나서 여러 혼합 민족들이 들어와서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피를 섞게 되었다.

 

그 다음에 남쪽 당국이 멸망한 이후에 북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방인들과 혼혈아 처럼 섞여살면서 어느정도 세력을 확보했다. 그러다가 귀양이 끝나면서 순수혈통인 유대인 들이 다시 돌아오니까 굉장히 방해를 많이 먹었다. 우리 땅이다 하고 그들은 그리짐 산에다 성소를 차리고 예배를 보았다.

 

유대인들이 귀양에서 풀려와서 성전을 지으려 하니까 성전을 뭐 지을 필요가 있느냐? 그리짐산에 성소가 있는데 여기서 예배를 보면될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방해를 자꾸한다. 그런 방해를 무릅쓰고 성전을 지어서 기원전 516년에 성전을 봉헌한다. 감격 속에서 봉헌한다. 사마리아 사람의 분쟁은 예수님의 시대 까지 계속된다. 폐르샤 시대 왕조는 시리아의 고레스 왕이다. 고레스가 바빌론을 물리치고 왕국을 세웠다.

 

7) 희랍시대

그 유명한 알렉산더가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사 책에서 많이 들었던 인물들, 소크라데스, 풀라톤, 아르키메레스, 히뽀카라테스, 아리시스텔레스, 소포클레스, 모든 분야의 철학, 의학, 자연과학, 이런 극작가들, 예술가들, 우리 귀에익은 그런사람들이 이 시대에 전부 쏟아져 나온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336 - 323년까지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샤 이 지역을 전부 통일시킨다. 기원전 333년에 이스라엘 팔레스티나가 그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가 죽고나서 그는 독신이었기 때문에 후손이 없었다. 그휘아 장군들에 의해서 나라가 분열된다. 크게 두 개로 분열된다. 기원전 301년에 안티오키아 를 수도 로하는 셀류코스 가문과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푸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알렉산더 대왕의 영토를 양분한다. 안티오키아 와 알렉산드리아는 그 이후에 서로 문화, 예술, 경제 면에서 나이벌 이었다. 계속 힘 자랑을 했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은 처음에 푸톨레마이오스 통치하에 있었다. 그래서 정치적 으로는 도저히 독립할 가망성이 없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새칙들을 지키기 여념이 없으면서 조그만 농업과 상업공동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이 공동체 내부가 크게 두 가지로 분열이 된다. 희랍 문화를 숭배하고 희랍세계와의 교역을 시도하면서 희랍식 오락을 즐겼던 친 희랍파하고, 희랍적인 모든 것과 단절해야 된다고 하는 수국파 유다인들, 그런데 식민지 민족들에게 비교적 부드런정책을 펴나갔던 푸톨레마이오스의 통치하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 분열이 크게 들어나지 않았는데 기원전 199년 이스라엘의 통치권이 안티오키아로 넘어가고 난 다음에 셀류코스 가문에 안티오쿠스 3세가 생각이 모자라는 왕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을 공약을 한다. 싸움에서 져가지고 막대한 세금을 갖다 바쳐야 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이 세금을 부과를 시켰다. 드디어 기원전 167년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짓밟고 모독한다. 여기에 격분을 해서 이스라엘이 독립 전쟁 을 일으킨다(마카베오서 <유다항쟁>).

 

8) 로마시대

로마는 추측컨데 기원전 753년 로므르스에 의해서 창관 되었다. 로므르스, 레므르스 두 형제 이야기 - 동네 여인들이 모여서 모두 자기의 보물 자랑을 했는데 주인은 아무말 없이 방에 들어가서 자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나온다. 바로 이 두 아들이 나의보물들 이라고, 말하자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말 못했다. 바로 이 아들들이 로마를 창관한 주역들이다. 이 시대에는 이스라엘 역사와 비교해보면(아모스) 예언자 시대이다. 로마는 처음에는 군주국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510년에 공화국이 된다. 그 때부터 로마는 급속도로 성장 해 가는데 그 때 로마를 가장 괴롭혔던 나라는 카리타구 였다.

 

기원전 150년 로마는 카리타구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 기원전 67년 폼페우스는 지중해 해적들을 무찔러야 되겠으니 길을 좀 비켜달라 하고는 해적들을 친다는 목적으로 군대를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해서 안티오키아도 집어삼키고, 다마스커스도 집어삼키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 까지 쳐들어온다. 예루살렘에 대량학살을 한후, 성전을 또 짓밟는다. 이 때 팔레스티나의 지방 영주 였던 아리스토볼로스를 로마로 쫓아 버리고 그의 경쟁자 히르카노스를 그 자리에 앉힌다.

 

팔레스티나 지역을 재편성 해가지고, 히르카노스는 유대인이 주로 사는 유대야, 이두메야, 갈릴래아, 뻬루아, 그 다음에 사마리아는 사마리아에서 다스리도록 했고, 요르단강 동쪽 열개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를 만들었는데, 그 지역은 자치국 으로 승격을 시키면서 창설을 한다. 로마의 감독을 받지만 자유롭게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내세웠다.

폼페우스는 율리우스시저 체사르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체사르는 기원전 44년 자기 양아들 부로트스에 의해서 살해된다.

 

체살이 죽은 다음에, 로마제국의 서쪽은 옥타비아누스, 동쪽은 안토니오스가 차지한다. 안토니오스는 쿠룰라움마이누스 가문에 마지막 왕인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사랑에 빠진다. 이 여왕은 199년 안티오키아오 넘어 갔던 유대아를 탐내서 유대아를 돌려 달라고 안토니오스를 부축인다. 그러다가 안토니오스가 클레오파트라 에게 넘겨 주기직전에 이리스토폴로스의 아들중에 하나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히르카노스를 쫓아버리고 팔레스티나를 차지한다.

헤로데 하스모니아 가문과, 로마에 아부를 해가지고, 왕위를 창탈하고, 헤로데 가문이 예수시대 까지 계속해서 이어온다. 한편 기운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오스와 악티움 패전에서 싸움을 해서 안토니오스를 패배시킨다. 그리고 안토니오스 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그들의 자살로 끝난다.

6. 구원의 역사

 

창세 1-11장은 역사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다. 그러나 구세사의 측면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1) 원조들의 타락 과 하느님의 자비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세레를 받기전에도 들었을 것이고,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주일학교에서도 누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가 두고 두고 생각해봐야 될 것이다. 아담 과 하와의 이야기, 실과 를 따 먹을 때, 뱀이 무어라고 말 하느냐? 하느님 처럼 되니까 따 먹지 말라고 했다. 이 실과를 따 먹으면 하느님 처럼 될 수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설 수 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보겠다는 의지, 이것이 인류의 첫 죄악이다. 죄를 범하기 전에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 과 인간사이, 인간 과 피조물, 인간이 하느님 과 맺는 관계, 인간이 상호간에 맺는 관계, 인간이 다른 피조물 들에게 맺는 관계가 아주 부드러웠다. 그리고 조화가 있었다. 그런데 열매를 여자가 따 먹고, 남자를 주고 남자가 따 먹었다. 남자가 먹고 난 다음에 즉시 그좋던 관계가 모두 단절된다. 하느님 과의 관계가 먼저 단절 된다. 숨어 버린다. 하느님이 왜 숨었느냐?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누가 너희들 벌거벗었다고 무어라고 하더냐? 너희들 그 열매를 따 먹고 말았구나!

 

아담에게 물었는데 - 제가 실수해서 따 먹었습니다 했으면 괜찮은 데, 즉시 여자에게 책임을 떠 맡긴다. 2장에 여자를 창조 해 냈을 때 갈빗대 에서 여자가 나오니까 아!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하고 그렇게 기뻐하던 그 남자가 치사하게 열매를 따 먹고 난 다음에는 그 책임을 여자에게 뒤집어 씌운다.

 

하느님, 당신이 나와 살라고 맺어주신 그 여자가 따 먹도록 부축였으니까 최종적인 책임은 당신이고, 그 다음 책임은 여자에게 돌아간다. 하느님이 여자에게 너 왜 따 먹었느냐? 여자가 뱀이 따먹으라고 해서 따 먹었습니다. 하느님이 제일 아름답게 창조한 뱀이 따 먹으라고 해서 따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책임이 뱀을 만든 하느님에게 다시 돌아간다. 뱀 은 할 말이 없다. 자기가 장본인 이니까, 그 다음에 하느님이 선고를 내릴 때는 뱀부터 내린다. 너는 땅을 기어 다녀라(3,14-16).

인류에게 주어진 첫 복음 (3,15). 스스로 모든 관계를 다 단절시켜 버린 인간을 하느님 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관계를 단절시키고, 숨어 버린 아담을 먼저 하느님 께서 찾아 오신다. 인간이 저질러 놓은 관계 단절을 회복시키고자 하느님께서 먼저 찾아오신다. 하느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잡고 아담에게 오신다. 하느님께서 그 열매를 따 먹지말라고 했을 때 이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 하셨다. 그러면 당연히 사형을 내려 죽여야 하는데 죽이지 않고 감형을 시킨다. 세상으로 쫓아 낸다. 쫓아낼 때 안스러워가지고 입고 있는 옷을보니까 무화가 나뭇잎을 걸치고 있는데 세상에 나가 비 바람치고 가시나무에 걸치면 찢기고 하니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힌다.

그리고 죄의 장본인인 뱀에게 족쇠를 채운다. 더 이상 유혹 하지 말아라. 이렇게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잠 자리를 같이하고, 두 아들을 둔다. 카인과 아벨, 그런데 카인이 아벨을 죽인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숨어 버린다.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 카인이 단절되어 버렸다. 단절된 관계를 회복 시키려고 하느님께서 먼저 대화를 걸어오신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네 형제가 어디있느냐? 이것은 굉장히 깊은 질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질문하신다. 형제에 대한 너희 책임이 무엇이냐? 하느님께서 아벨이 어떤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모르시고 묻는 것이 아니다. 네 아우에 대한 책임, 네 아우에 대해 그렇게 몹쓸 짓을 했을 때 그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내가 동생 지키는 사람입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네 아우의 피가 땅 속에서 울부짓고 있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다. 피조물 과도 단절이 되는 것다.

 

동료와의 단절로 인해서, 땅과도 단절이되고, 하느님과도 단절이 된다. 카인은 완전히 비관에 빠진다. 나를 떠나서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카인이 하소연 한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할 것 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약하시다. 동생을 죽였으니까 살인 죄는 살인을 해야 된다. 죽여야 된다. 그런데 또 거두신다.

 

그래, 누가 너를 해치는 사람은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겠다. 말하자면 카인의 고헬이 되시겠다고 선언 하신다. 아담(남자), 하와(생명을 낳는여자), 성서저자는 하느님께서 처음에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다를 아담과 하와를 만드 셨다. 이렇게 장난을 친 것이다, 그것이 고유의 명사인 것처럼 ---

 

후대의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 이것이 우리의 첫 조상의 이름이다. 창세기 본래 의미는 하느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로 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그 뜻이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를 창조를 했는데, 동시에 다발적으로 창조를 했는지 아니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를 했는지, 이것은 성서저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께로 부터 왔는데 우선 인간의 육적인 생명은 흙에서 부터 왔다고 되있다. 19세기 다인이 와가지고 진화론을 폈다. 진화론을 펴 나갈 때, 가톨릭 측에서 그래 너는 원숭이 자손이고, 우리는 사람 자손이다 이런식으로 일수에 붙였다. 우리 육신 생명을 쭉 진화과정을 보면, 단 세포 생물에서부터 고정생물로 변화되어 나간다. 과학적인 근거에서---

그래서 성서는 더 철저하게 올라간다. 우리 육신 생명이 흙에서부터 무생물에서부터 왔다고 되었다. 성서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과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진흙으로 창조가 되었다. 그러나 육적인 꼴에다가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하느님의 입김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력을 인간에게 불어 넣어 주셨다. 이것이 큰 창조이며 절대적인 창조이다. 성서는 인간의 육신의 생명을 흙에서부터 무생물에서부터 왔다고 한다. 그러나 영혼, 영혼이라고 할 때 우리 교리문답 에서, 인간은 무엇이뇨?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합하여 하나가 된 자니라. 영혼은 무엇이뇨? 영혼은 불사 불멸하는 체로서 죽으면 육신과 갈라지는 것이라고, 죽으면 육신은 땅에서 썩고, 영혼만 올라가는 것,

 

이것은 성서의 개념이 아니다. 성서의 개념은 인간의 가장 깊은 핵심을 영혼으로 봤다. 인격의 가장 깊은 핵심 안에는 하느님이 계신다. 하느님의 생명이 거기 숨쉬고 계신다. 이것이 적당하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 전체의 몸, 몸이라고 했을 때는 주로 똑같은 인간을 두고, 생물학적인 차혼에서의 그 이야기, 주고, 낳고, 병들고, 죽고, 동물들하고 같이 나누는 차혼, 내 생명을 갖다가 몸이라고 불렀다.

영혼은 무엇이냐? 영혼은 생물학적인 똑같은 인간인데 그 인간안에서 그야말로 깊은곳에서 하느님과 같이 연결되는 부분, 하느님의 생명력이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부분, 그것을 영혼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창조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 지흙으로 꼴을 만드신 다음에 그것을 움직이도록 활동하도록 하는 그 생명력은 하느님께서 불어넣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 육신의 개념은 희랍 철학에서 나왔다. 더 복잡하게 만들어 놨는데 그것은 성서의 개념이 아니다. 희랍, 풀라톤의 이원론을 보면, 아름다운 세계에 살고있는 유대아 영혼들이 육체안의 감옥속으로 들어오는 것, 그러니까 우리 육체는 유대아에 살고있는 아름다운 영혼들에 비해서 아주 열등한 존재들 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유대아에 살고 있는 영혼들을 끄집어 내려가지고, 육체 안의 감옥 속에다 집어 넣느냐? 따라서 결혼을 부정시 하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태어났으면 빨리 죽어서 영혼이 유대아로 올라가는 것이 좋다.특히 아름다운 영혼을 자꾸 끄집어 내리니까 결혼이 죄악시된다. 이것이 가톨릭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을 자꾸 일으키고 동시에 독신 생활을 굉장히 높이 올려 세우고 그런 교리나 학술들을 누가 연구 하느냐? 독신생활 하는 사람들이 계속 연구한다. 결혼생활 하는 사람들이 하면 달라질텐데---

아우구스티노에게서 굉장한 영향력을 비쳤다. 아오스딩은 거의 오랫동안 15년 이상 마니케이즘에 빠졌었다. 마니도교는 바로 이원론, 이원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영지주의라고 있다. 영지주의 일파가 아오스딩 시대 때 많이 활발했는데, 거기에 깊이 빠져 있었다. 물론 깊이 빠져있다가 빠져 나왔는데, 그러나 거기에 일단 빠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걸로본다.

 

그리고 자신의 젊었을 때 체험같은 것이 아프리카 카르타구 지역 위쪽에 히뽀 주교 였었다. 그곳에 있으면서 아들도 하나 두었다. 그러면서 그런 체험같은 것이 육체에 대해서 많이 격멸하게 되고, 결혼에 대해서 묘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묘한 사상을 일으켰다. 그것이 내려오면서 교회안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요즈음에는 독신도 깊은 의미가 있고, 결혼생활도 깊은 가치가 있다.

그것을 동시에 다각적으로 증언해 주면 좋을 것 같다. 결혼은 무조건 나쁘고 독신은 무조건 한계단 위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 보다는 독신은 말하자면 남김 없는 자기 봉헌, 이런 차혼에서 이야기가 되고 그 다음에 초대교회에 한참 오랫동안 까지는 모두 결혼생활을 했다. 사도들도 대부분은 결혼 생활을 했었다. 예수님이 독신을 지켰기 때문에 우리도 독신을 지켜야 된다는 그것은 맞지 않는다. 사도들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었는데 모두 결혼 생활을 했었다. 그러니까 다른 차원에서 독신의 이야기를 해야될 것 같다. 본질이 많이 어긋났기 때문에 ---

 

어떻든 중요한 것은 결혼생활이 독신생활 보다는 열등한 위치에 있다는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건 복음앞에서 성서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별로 근거가 없다. 그래서 지금 성서 저자들은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첫 조상이다. 그런식으로 해가지고 그들에게서부터 난 아들이 카인과 아벨인데 그 사람들만 세상에 있었다 그렇게 보지는 않았다. 그 증거가 다른 곳에도 사람이 있는 것 처럼 기술하고 있다. 하나의 모순인데 이 모순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성서 저자들의 머리속에 들어있던 것은 구원의 역사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지 지금 과학적인 진리를, 자연과학의 이치를 여기에다가 기록해 가지고 후세에 전달 하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성서 저자들의 의도를 우리가 안다면 큰 문제가 없이 넘어갈 수가 있다. 모순과 충돌이 굉장히 많다.

 

2) 이스라엘의 방황과 야훼의 구원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끊임 없이 방황을 한다. 아브라함도 방황 한다. 방황하는 유목민, 하느님께서 방문하신다. 하느님께서 방황하는 인간을 찾아 오신다. 그 전까지는 방황만 하던 아브라함이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된다. 같이 헤메는 것은 똑같은 데 방황은 목적지가 없이 돌아 다니는 것이고 순레는 떠돌아 다니지만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 그러나 둘다 어디에 안주하면 안된다. 끊임 없이 떠나야 된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순례하는 인생살인데 어디에 정착을 자꾸 하면 안된다.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중산층에 정착되어 있기 때문에 큰 문제다. 중산층은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이다. 중산층의 생리는 안정을 항상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안정, 안정, 생활도 여유가 있고, 시간도 여유가 있다. 교회가 중산층을 위주로 선교를 하게되니까 자연적으로 교회도 변화를 싫어하고 점차로 우리끼리 교회 나오는 사람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상관 없이 교회만 나오면 천당갈 수 있어, 하나의 이질적인 단체로서, 어떻게 보면 사회안에 배타적인 단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굉장히 위험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안에 성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해준 순례의 길 과는 멀다. 순례는 끊임 없이 자기 있는 자리를 떠나서 제 창조를 위해서 다음것을 위해서 다음 정류소로 가고 거기서 머물지 않고 또 다음 정류소로 가고 이런식으로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들, 방황하는 유목민들이 순례의 길로 자신들의 생활을 정립해 간다.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생명 가나안 복지 가나안에서 살다가 에집트로 간다. 에집트에 주저 앉으니까 그곳에서 또 빼내어 탈출을 시킨다. 탈출해서 시나이 산, 사막을 돌아다닌다. 이 사막 에서의 방황생활이 히브리 민족의 시절로서는, 하느님과의 신혼여행 시절이었다.

이 때 처럼 하느님과 가까이 지낸적이 없다. 하느님 친히 음식을 제공해 주신다. 먹을 것 주시고, 마실 물 주시고, 만나, 메추라기, 구름기둥 으로 햇빛을 가리워 그늘 만들어 주시고, 밤이면 불 기둥으로 밝혀주시고 가는 곳마다 만남의 장막 안에서 쉬시면서 같이 이동 하신다. 순례의 하느님, 순례하는 자와 더불어서 같이 움직이시는 하느님, 순례의 하느님으로서 모습을 들어 내신다. 그리고 이 사막에서 가장 중요한 법을 주신다. 생명의 법, 율법, 우리가 생각하는 법과 그들이 생각하는 법은 달랐다. 천주교는 지킬 것도 많고, 하라는 것도 많고 하지말라는 것도 많고 규율같은 것이 많아서 나오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꽤많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는 이 법이 얼마나 귀중한지, 자기네들한테 십계명이 주어졌는데, 십계명을 거꾸로 살아본다면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다. 최소한도 이정도 규율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인간 사회에서 주신 것이 십계명 이다. 이 사람들은 그 법을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탈리온 법, 동태복수법이 왜 생겼느냐?

 

그 때 농경민들 사이에는 이제 법을 행사를 해줘야 하는데 고헬이라는 개념도 나왔기 때문에 꼭 복수를 해줘야 한다. 복수의 한계를 세워야 했기 때문에 탈리온 법이 생겼다. 나중에 기원후 3-4년후에 공부를 많이 한 랍비들은 탈리온 법을 이렇게 해석했다. 눈을 한짝 뽑힌 사람이 다른 사람 눈을 한짝 뽑아서 복수를 하면, 우리동족에 애꾸가 둘이 생기니까, 그 사람 눈을 뽑지 말고, 돈을 받아라, 그 사람은 눈을 보호받고, 너는 돈을 받으니, 그 대가로서 어느정도 불이익을 카바를 하지않겠느냐? 그런식으로 법 정신을 해석했다.

그러니까 법 정신을 제대로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법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적용을 시키면 이런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 법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시편119). 우리 나라에 좋은 개념이 있다. ‘’ ‘를 닦아야 한다. ‘는 규율이 아니다. ‘계명이라는게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인간완성에로 나아가는 하나의 이다. , , 도 닦읍시다. 할 때는 강제력, 구속력 같은 것이 없다. 자기자신이 스스로 좋아가지고, 닦아가는 것이 . 그래서 로 보았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로보았다.

 

기쁜 마음으로 을 걷는다(시편119,31). ‘계명을 지키는 것이 기쁨이다(시편119,46).

바오로 사도가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을 많이 하였다. 그것은 율법 자체본 정신이 나빠서가 아니다. 율법주의, 율법에 본 뜻을 살리지 못하고, 유법조항에 매달리는 그런 자세, 율법주의를 공격한 것이지, 율법자체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법을 폐하러 온 것이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예수님은 항상 법 정신을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복지에 도달을 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므로 인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이 이제 성취가 되는 것이다. 가나안 복지를 주겠다. 문리적인 방황은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또 다른 방황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윤리적인 방황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온갖 잡신들을 다 섬긴다. 거기에 끊임 없이 유혹을 받아 가지고 윤리적으로 굉장히 방황한다. 하느님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셔서 그들을 구원 하시고자 한다. 때로는 질책하시고, 때로는 호소하시고, 벌도 내리시고, 축복도 주시고, 어떻게 해서든지 하느님께로 관심을 돌리도록 유도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간혹 성서에 폭력문제가 나오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남자는 모두 다 죽여버리고 어린 아이까지 사내아이는 다 죽이고 여자는 첩으로 다 만들어버리고 이런식으로 무자비한 폭력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결코 폭력을 정당화 하시지 않는다. 그들의 사회 풍속을 조금 더 가깝게 대하면 이해가 된다. 먹느냐?, 먹히느냐?, 그 와중에서 항상 지냈던 사람들이다. 유목민으로서 떠돌아 다니면서, 우물 물을 놓고, 싸움을 벌일 때, 만약 지면, 그것이 끝장이다. 종족이 완전히 없어지는 그런 판국이다. 끊임 없이 종족간의 그런 싸움이 그들의 생활 전체를 이루었다. 자연적으로 하느님도 군대의 하느님, 싸움 잘 하는 하느님, 그런 분으로 묘사를 할 수밖에 없다.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문화 그 안에서 하느님을 표현하고, 자기 신앙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야기하는 그런 폭력들, 그 폭력은 그 폭력 자체를 위한 묘사가 아니고 하느님께서 얼마큼 성실하게 자신들을 보호해 주셨는가!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그 권위를 묘사하기 위해서 자기네 들이 늘 생활에서 체험하고 있는 폭력을 이용해 가지고 폭력의 언어들로 하느님의 성실과 자비와 그 권능을 표현하고 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땅을 주셨으니까 여기서 천년 만년 잘 살아야 되겠구나 그랬는데---

 

잠깐 다윗과 솔로몬시대를 거치고 난 다음에는 즉시 이민족들에게 먹혀들어 간다. 하느님은 절대 안주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사람들은 즉시 이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 그리고 거기 주저앉는다. 그러면서 그 땅을 지키는데 여념이 없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버린다. 자기네들이 어려움을 닥치고 방황할 때 하느님의 손길을 항상 찾고 그렇게 했는데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도착했으니까 이상 끝, 우리 방황은 끝났으니까 여기서부터는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소출을 내고 즐겁게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또 거두신다. 하느님께서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민족을 시켜서 가나안을 초토화 시켜버린다.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한 것이 이것이 아니구나, 깨닫게 되면서 메시아 사상으로 바뀌게 된다. 땅의 개념이 인물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약속의 내용이 곧 이제는 뭐니뭐니 해도 하느님 자신에게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분, 메시아 사상으로 바뀌어 나간다. 처음에는 현세적인 메시아,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시키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 부귀와 영화를 가져다 줄 현세적인 군주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그것이 점점 내려가면서 예언자들에 의해서 정화가 되고 그러면서 영적인 메시아로 조금씩 발전되어 나가고 그리스도교에 와서는 현세적인 메시아와 영적인 메시아 사이 갈등이 첨외와되고 그리스도는 거기서 현세적인 메시아 사상을 버리고 영적인 메시아 상을 이스라엘 역사 안에 정립을 시킨다.

그러므로 인해서 많은 대다수의 군중들, 현세적인 메시아를 기다리던 군중들이 배반감을 느끼면서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현세적인 메시아는 상당의 배타적인 국수주의, 자기민족만을 일등민족으로 만드는 편엽된 메시아상 이었다. 그런데 비해서 영적인 메시아 상은 보편적이다.

인류 전체, 골고루, 모든 사람들에게 그 분의 혜택이 주어지는 메시아 상이다.

 

3) 구세사의 정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니즘은 무엇이 특징인가?

그것은 구약에서의 메시아관은 인간 피조물 가운데 누가 우리 민족을 이끌어서 일등 국가를 건설하도록 만드는 그런 메시아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가 메시아로 고백할 때 그 고백하는 내용 가운데는 하느님께서 직접 메시아가 되셔서 세상을 구원 하신다는 그런 구세사적인 측면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다.

 

피조물로 이루어 지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느님 친히 당신 자신이 메시아가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메시아 사상의 핵심이면서 특징이다. 드디어 우리 모든 인류의 순례 방향이 뚜렷하게 정해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방황을하면서 순례의 목적을 현세적에 두었다. 가나안 복지 현세적인 메시아 이렇게 두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영적인 메시아상으로 하느님 안에 어떤 구원을 누리는 것, 이런 방향으로 목적이 완전히 정해진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 종교가 보편성을 띄게된다. 모든 만민에게 다 해당되는 종교로---

 

 

 

7. 구약의 문학양식

 

구약 성서의 형성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어떤 한 순간에 탄생된 것이 아니고 입으로 입으로 전달된 그런 이야기들이 어느 세기에 누군가에 의해서 집필 되기 시작 했다. 이 집필은, 또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 후대 사람들이 가필 수정하고 또 덧붙이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은 거기다가 이식시키고 본래의 사람들을 빼내고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거의 1.000여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서 안에는 모순되고 반복되는 부분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다. 이 형성과정을 우리는 세 단계로 나누어서 고찰해본다.

 

첫째단계 - 구약성서를 형성하는 기본 단위들 곧 신화, 전설, 법전, 신탁, , 노래 등, 일정한 문학유형을 갖추고 있는 기본 완전들을 다룬다.

 

둘째단계 - 그런 원전들이 어떻게 해가지고 편집자들에 의해서 완전한 책으로 완성되는가?

그 과정을 다룬다. 구약성서 전체를 율법, 예언서, 성문서, 집으로 나누어 가지고, 율법, 예언서, 성문서집이 어떻게 완성되어 나가는가를 다룬다.

셋째단계 - 이렇게 완성된 기록들이, 종교 공동체 안에서(유대교, 개신교, 천주교, 희랍정교,다 조금씩 다르다), 그런 종교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정경으로 정식 성경으로 인정 되었는가? 그 역사적인 과정을 더듬어 본다.

 

1) 구약성서의 문학유형

 

신 화

. 종교적인 신화의 특징 - 신화는 종교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자주 사용하는 전문 용어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할 때 신화 그러면 하나의 풍문이나 과장된 그런 이야기 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성서에 신화가 많이 등장한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진실하고는 거리가 먼 허황된 이야기, 이런 의미에서 신화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서에서 말하는 신화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 신화가 비록 이야기 형태를 취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체험을 바탕으로 끊임 없이 반복되는 사건을 표현한다. 예를들면 한 해의 주기 봄, 여름, 가을, 겨울, 봄에는 봄 꽃들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죽음의 계절이 오고 가을에는 비가 내리고 겨울에는 생물들이 자라고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늘상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건들을 신화는 표현하고 있다.

 

- 신화의 이야기들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초월하며 가끔 신들의 세계에 그 무대를 차린다. 성서에서 이야기 하는 신화라기보다, 일반적인 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신화이다. 어떤 종교를 연구 하더라도 신화와 마주치게 된다. 종교의 신화가 갖는 특징이다.

 

- 보통 신화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묘사된다 할지라도 신들의 행동이 인간의 행동처럼 나온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들은 인간이 아니고 신들이라는 것이다.

 

- 신화의 이야기들은 경신례(종교적인 예절을 갖춰서 여러사람들이 같이 흠숭 행위를 하는것)를 통해서 일정한 성소에서 반복 한다. 경신례 안에서 신화를 재현 시킨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야기를 경신례를 통해서 또 반복을 시킨다. 우리 일상생활의 진실을, 연극으로 재현시키고 재현시키고 하면서 일상생활의 진실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기는 것처럼, 신화의 내용을 경신례를 통해서 반복을 시킨다. 그래서 신화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들이 다시 또 일어나리라고 믿고 있다.

 

현실적으로 일어나리라고 믿고 있다. 이런 특징을 갖춘 종교적 신화들은 고대 근동지방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히브리인들이 이 신화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들은 어느정도 짐작할 수가있다.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틀림없이 가나안에 유명한 바알신과 친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바알신화는 모든 신들의 아버지가 이다. 히브리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이라고 불렀다. ‘엘로힘의 복수이다.

그냥 엉뚱한데서 하느님의개념을 끌어내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보니까 그들이 믿고 있는 엘 신이 있었다. 엘 신이 최상신 인데 순수치 못한 요소들이 그 안에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재거하기 위해서 엘을 엘로힘 복수로 바꿔 버린다. 그 엘로힘을 자기들의 야훼 하느님의 신앙과 연결을 시켜 버린다. 가나안의 바알신화는 모든 신들의 아버지 엘 과 그의 배후자 아세라 둘이 있는데 그들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 그 아들이 바알 이다. 이 바알을 가장 중요한 신으로 떠 받들었다.

 

바알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 된다. 가믐과 사막과 죽음의 신 모트와 바알이 싸운다. 바알이 패배를 해서 반 죽음 상태로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지하세계로 내려가자 많은 신들이 슬퍼하며 통곡 한다. 바알이 반 죽음 상태로 내려가자 모든 자연이 시들어 버린다.

이것은 극소수인 강 우량에 대지를 지니고 있는 팔레스티나 풍토를 상징한다. 아니면 팔레스티나 여름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 때 바알의 애인 아스다롯이 바알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모투를 만나 한 바탕 결투를 해서 모트를 삽으로 내리쳐 죽이고 바알의 원수를 갚는다.

 

모트가 죽자 바알이 지하세계에서 부활하여 아스다롯과 결합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성대한 결혼식을 하자 자연이 다시 살아난다. 생명을 얻고 대지에 봄이 돌아 온다. 이 바알 신화는 명백하게 계절의 주기 와 관계가 된다. , 여름, 가을, 겨울, 히브리 인들이 이 신화를 잘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유일신 때문에 이런 종류의 신화를 철저하게 배재를 시킨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만물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고 역사 밖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다. 다른 신들은 역사가 시작이되서 역사 안에서 활동을 하는데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역사 밖에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역사를 끌어 나가신다.

 

원시적인 신앙에서 벗어나가지고 발전된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 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히브리어의 특징은 종속문이 별로 없다. 뭐뭐하기 때문에 한다. 무엇을 한 후에 무엇이 계속 된다라는 전치사를 연결되는 종속문이 별로 없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그리고 그래서 계속 이어지는 한 마디로 이야기 전체에 알맞는 그런 언어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발달된다. 그래서 히브리 인들도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야기 형태를 취하였고 이야기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자체에 기원을둔 것도 있지만 고대 근동에 널리 알려진 신화나 설화들에 그 뿌리가 이어지는 것 도있다.

 

예를 들어서 바알신화 같은 것은 그 안에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있어서 제거 했지만, 길가메쉬 라는 한 왕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 한다. 그래서 불사초를 구하러 간다. 천신만고 끝에 불사초를 얻어서 목이 말라서 샘가 옆에다 놓고 물을 마시는데 뱀이 불사초를 훔쳐 간다. 그래서 길가메쉬가 죽게 된다. 이것 은 아담과 하와의 생명나무 그것을 뱀이 훔쳐간 이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성서 저자들은 이런 고대 근동에 흩어져 있는 여러 신화들, 또는 설화들 가운데서 자기네들이 이용하고 싶은 그런 대목을 마음껏 선택해서 자신의 신앙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또는 자신들의 신학사상을 ---

어떻게 창조가 되었는가? 왜 여자는 해산할 때 고통을 당해야 되는가? 왜 남자는 이렇게 뼈빠지게 일을해야지 먹을것을 얻을 수 있는가? 왜 자연은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가? 왜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닥치는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들, 우리 인간의 머리를 뛰어넘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나? 했을 때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해결은 해야되는데 하고 풀어나갈 때 고대 근동에 신화나 설화들에서 몇가지 요소들을 뽑아서 엮어 나가는 것이다.

 

창세 1-11장은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한 마디로 구약성서의 신화들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한 히브리 신앙의 표현 들이다. 그들의 신앙은 진실하다. 그들의 신앙이 진실한 만큼 성서의 신화도 진실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 하는 진실은 역사적인 진실이 아니다. 이야기 속에 전달되고 있는그 내용, 이 내용을 우리는 잘 봐야 된다. 탈신화화 신화에서 벗어져 나가자 신화에서 그 꺼풀을 다 벗겨나가면 그 안에 진짜 내용이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신화들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 구약성서의 신화

- 구약의 신화들은 이야기의 형태를 취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위협을 소개한다.

- 이 신화들은 볼 수 없는 신들의 세계안에서 일어나는 환상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야훼께서 당신 백성과 더불어서 우리 인간 역사안에서 이루시는 일들을 다룬다. 신들끼리 지지고볶고 끝나버리는 일들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과 우리 인간사이의 드라마 이다.

-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경신례 안에서 반복 된다. 주 목적은 앞으로 반복되리라고 믿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느님께서 하신일 이루신일 그일을 경축하기 위한 것이다.

- 구약의 신화는 자주 사물이나 종교적관습에 기원을 설명하는데 기여한다. 신화는 굉장히 중요하다. 허황된 이야기라 생각하지 말고 깊은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것이다.

 

전 설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이 전설로 이루어졌다. 구약성서의 전설은 네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신화와는 달리 전설은 이 세상안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실재 인간을 다룬다. 그리고 이 전설의 사건은 때때로 잘 알려진 지역안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현재와는 거리가 먼 사건을 취급한다는 점에서 비현실 적이다.

- 전설은 흔히 역사적 실재를 바탕으로 한다.

- 전설은 인생의 기원에 관련된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서 현재의 삶이 어떤모습을 지녀야될지 설명한다. 또 과거의 영웅들의 덕행을 찬양함으로서 현세 생활의 가치를 재천명(재확인) 해주고있다.

- 전설도 신화처럼 우리 신앙과 관련된 어떤 신성한 장소나 관습의 기원을 설명한다.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여러성조들, 모세, 사무엘, 엘리야와 엘리사에 얽힌 이야기들은 모두 이 전설에 속한다.

기타 일화들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재미난 이야기들, 또는 마술적인 이야기가 가끔 튀어 나온다. 모세의 지팡이, 엘리야의 외투, 이런 마술적인 요소들은 과학 이전의 문화에서 과학이 발달되기 이전의 문화에서 일반적으로 널이 유통되던 것들 이었다. 마술적인 요소들은 관련 인물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사용 되었고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돋구기 위해서 이용된 것 이었다.

 

히브리인들과 아말렉과의 싸움이야기, 모세가 손 들면 이기고 내리면 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한 인간 모세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가지고 히브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온갖 전력을 다 했는데 이것이 보통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이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사무엘의 부름받는 이야기, 그 이야기 자체에만 메달리지 말고 그 뒤에 숨어있는 깊은 뜻을 이해해야 된다.

 

족보 와 일람표

구약성서는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족보를 제시하고 있고 도시에 대한 일람표들도 제시하고 있다. 민족들에 대해서도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다. 족보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일성을 증언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일 민족이다.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 족보조차도 똑같은 족보를 이야기 하면서도 조금씩 틀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은 성서가 여러 가지 다양한 원전들을 이용해서 나왔다는 증거다.

 

역 사

구약성서 대부분은 형식상으로 볼 때에는 역사의 기록으로 되어있다. 이스라엘 역사가 죽 기록된걸로 되어 있다. 특히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 궁중실록( 1열왕 12, 41 솔로몬의 행위, 14,19 : 29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조실록, 6-8장 솔로몬의 성전건축과 봉헌), 왕의 계승사화 2사무 9- 20, 1-2장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것을 쓴 저자는 틀림없이 서자로서 왕위에오른 솔로몬의 계승을 정당화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들은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1 2, 열왕기 1 2, 느혜미야, 에즈라, 모두 다 역사에 속하는데 그러나 이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적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역사적 실재를 전한다는 것은 그 때 과연 몇월 몇일 몇시경 무슨일이 있었는가?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은 그 때 일어난 사건에 뒤에 숨어있는 그 뜻은 무엇이냐?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법 률

모든 사회는 법을 필요로 한다. 법은 매일의 생활을 규제하고 악과 악인들을 다스리고 약자들을 보호 한다. 더 나아가 이상적인 삶을 널리 전함으로써 참된 사회를 구현시키는데 이바지 한다.

관례법 -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 국가들로 부터 관례법을 받아 들였다.

관례법은 무엇이냐? 누가 만일 이런 ---짓을 하면 이러--- 한 벌을 받거나 이러저러한 보상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하면 무슨 대가를 지불한다.

이것은 자기네들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관습과 설례를 바탕으로 해가지고 이런 법을 제정한다. 이 법의 집행은 도시의 성문 안쪽 광장에서 원로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관례법과 함께 또 다른 법이 소개되는데 그것은 단정법이다.

 

단정법 - 조건문이 없다. 곧 바로 명령한다. 너희는 무엇을 하지 말아라, 이런 짓들을 해서는 안된다. 이런 짓을 저지른 자는 무조건 저주를 받는다. 이 단정법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갖고 있는법이다. 단정법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십계명 이다. 하느님께 가는 길을 충실히 걷는다면은 간음하지 못할 것이다. 살인하지 못할 것이다. 미래의 직설법 으로 되어 있다. 뭐뭐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법 이라는 하나의 구속으로 생각하면서 하지 말라니까 사람들이 자꾸 하고 싶은 생각이 난다. 도 라고 생각하고 길 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자기 좋아서 걷고 또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걷고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걷는다. 그래서 별로 힘든줄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 십계명은 사제들이 축제 때 발표를 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핵심이기 때문에 원로들에 의해서 성 안에서 집행되지 않고 축제 때 경신례 안에서 선포가 되었다. 이 법을 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벌은 최하 사형이다. 십계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권이면서 긍지였다. 다른 민족은 이런 법이 없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이 법이 없지! 우리는 갖고있어, 이 십계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른 민족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징표가 되었다. 십계명의 선포와 집행장소가 이스라엘의 최대 성지인 성소였다는 것, 이사실이 바로 이 단정법에 종교적 중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레위법 - 사제의 의무와 제사, 정과 부정에 관련한 법,

처음에는 단순 했다. 그런데 나중에 구약성서가 완성될즘 해서는 대단히 복잡한 체계를 갖춘다. 이 레위법에 대표적인 예는 제관법에도 통하는 레위기 전체안에 나타난 법이다. 특히 레위기(17- 26장 성 법전) 성 법전이 바로 이 레위법에 해당된다.

 

유행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래 하기를 즐겨 했다. 무슨 모임 끝나면 오락회 한다. 추수할 때 결혼잔치 때 일할 때 단체로 모여서 축제를 부를 때 구약성서 안에서 완전한 가사를 갖춘 노래들은 별로 전해져 오지않고 토막 가사들로 이루어지는 노래들이 전해져오고 있다. 왜 토막 노래들만 전해져오는가? 그것은 노래 수집하는 사람들의 종교적인 심성때문 이었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랬다. 유행가들 전체적인 것은 관심이 없고 그 중에 종교적인 의미을 갖춘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그런 부분만 뽑아 갖고 전달을 했다.

 

샘물을 팔 때 부르는 노래 하느님께서 샘물을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민수 21,17) 하사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부만을 뽑아서 넣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아가를 들 수 있다. 아가는 원래 세속적인 사랑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관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데 이용 되었다. 전쟁과 관련해서 승전가도 유행가 법전에 들어 간다. 미리암의 노래(출애 15,21), 이스라엘 여인들의 노래(사무 1186절이하).

 

경신례 노래

시편에 가장 많이 실려 있다.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 자연적인 지향이나 패배앞에서 공동체가 부른 비탄의 노래, 왕이 왕위에 오르고 그의 생애를 찬양하는 노래, 왕이 결혼하거나 전투에 참가해서 싸우는 이런것들을 기리는 노래, 궁왕 시편, 순례의 노래, 시온을 찬미하는 노래, 모두 경신례를 지내면서 부르던 노래 였다.

 

예언자들의 신탁 (특정한 일을 앞에두고 하느님께 의견을 물으면

하느님께서 가르쳐주는 것을 말함)

우리가 지금 대하는 예언서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신탁으로 이루어졌다. 특정한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탁들은 현재 예언서에 되어있는 것 보다는 짧고 간단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그리고 본 예언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제자들에 의해서 후대에 기억되고 집필 되었다. 그것이 나중에 모아져서 오늘 날의 예언서들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모스 서는 짧고 직접적인 신탁들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예언서 이다.

 

묵시적 현시

묵시는 예언과 매우 흡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언이 일반적으로 말로써 이루어지는 반면 묵시는 주로 글로써 이루어 진다. 묵시(계시),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묵시문학은 가까이 다가오는 우주적인 지향이나 세상 종말에 대한 자세한 현시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묵시의 목적은 악인들의 파멸과 의인들의 구원을 위협적인 언어와 표현들로 선언함으로서 고난의 시기에 처해있는 믿는이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묵시 문학가들은 예언자들하고 달리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희망을 갖고 있지 않는다. 세상은 끝났다. 세상은 썩었다. 이제는 새 하늘, 새 땅, 하느님이 개입해 오셔셔 모든 것을 정립해야 된다. 쓰레기 같은 것은 다치우고 정말 의인들만 남겨놓고 악의요소는 뿌리채 뽑아야 된다. 묵시 문학이 성행하던 시기는 기원전 200 - 기원후 100 년까지 예수님 시대에 이 묵시문학이 굉장히 성행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이 당대에 유행하던 묵시 문학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 하신다. 우리로선는 생소할지 몰라도 그 때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익숙한 표현들 이었다. 다니엘 서도 묵시문학의 대표적인 예고, 즈가리야 9 - 14장도 묵시문학에 속한다. 요엘 2, 이사야 24 - 27, 에제키엘 38 - 39, 거의 묵시문학에 가까이 접근해 있는 문헌들이 본격적인 묵시문학은 다니엘 7 -12, 즈가리야 9 - 14장 뿐이다.

 

교훈집 과 금언

지혜문학은 세계 모든 문화권 안에서 발견 된다. 현자들의 말씀들, 속담과 금언들, 수수께기들이 이스라엘 민족 전통안에서 후대에 전달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오한 지혜들을 간결하면서도 은율에 맞게 표현한 경고 들이다. 짧은 금언들, 경고들이다. (1열왕 2021) 이런 경고는 몇 천년이 흘러도 그 깊은의미를 잃지않고 있다. 고대근동 문화에서는 이런 지혜 말씀들을 수집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

솔로몬이 지혜로운 왕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다. 솔로몬은 자기 궁중안에 지혜 문학가들을 양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지혜문학들을 모아서 출판을 하도록 조치를해 주었다. 그 사람들은 작가가 물론 만들어 낸것도 있겠지만 고대 근동에 떠돌아 다니는 지혜 문학들을 끌어 모아서 글로써 편찬을 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은 잠언, 집회서, 지혜서, 욥기, 몇 몇 시편들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까지 11개 정도 문학양식들을 소개를 했는데 이것들이 구약성서 전체를 이루는 문학양식 전부라고 볼 수 는없다. 중요한 것들, 축복문과 저주문 조약문 이런것들이 다 빠져 있다. 이런것들은 복잡하기 때문에 생략을 한다. 대충 대표적인 것들만 골라서 소개를 했다.

 

2) 구약성서 각권의 형성과정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를 세 가지로 분리를 했다.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율법(모세오경)을 토라 라고 불렀다. 이 다섯권이 제일먼저 정경으로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여기는 각종 법령, 시행세칙, 선조들의 가르침, 다른책들에 비해서 이 책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다른 한편 유대인들은 이 토라를 모세오경이라 부르는데 오경이라는 이름은 다섯권 이라는 희랍어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다섯권의 책은 바빌론 귀양이후에 모세의 저서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 전통은 그리스도교에 그대로 이어지면서 모세오경 이라는 이름으로 굳혀 졌다. 율법이나 모세오경이 다른 책들보다 더 성스럽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실재 있어서 꼭 맞는 사고방식은 아니다. 일부 성서학자들은 모세오경 다음에 이어지는 여호수아기와 합쳐가지고 모세육경 이렇게 부르고 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모세오경에서 신명기는 다른책하고 틀리지 않느냐? 신명기를 빼 버리고 모세사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랫동안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나 모세오경의저자가 모세가 아니라 고 떠드는사람은 전부 단죄해 봤다.

그러나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이 다섯권의 책을 모세가 썼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세가 죽고난 이후에 기록도 모세오경 에는 나온다. 모세가 죽어서 무덤속에서 글을썼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 모세오경을 보면은 한 사람이 쓸수가 없다. 그것은 그 증거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모세란 분이 이 다섯권을 혼자서 쓸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 했다. 여러 가지 모순과 충돌이 발견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들을 몇가지 살펴보면은 창세기에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와 엘로힘으로 나온다.

출애 3,14 : 6,3절에 보면 야훼라는 이름이 어떻게 처음 등장하게 되는가 설명이 나온다. 야훼 - 나는 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 하느님의 초월성을 가리킨다. 나는 누구의 간섭없이 스스로 있는 자다.

 

예수님이 그걸 받아가지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그럴 때 0 0 다 집어넣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친근성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더불어서 라는 관계를 맺으면서 가까이 있는 분, 나는 누구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누구다. 그렇게 해놓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 야훼라는 이름을 입밖에 내지 않는다.

중요한 이름이기 때문에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하느님의 이름이기 때문에 타치하면 안되니까 아도나이라 불렀다. 출애 3,14 : 6,3절에 그런식으로 야훼의 이름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창세 4,26절에는 야훼의 이름이 아담의 손자 에노스에 의해서 처음 불러지게 되었다고 기록되 있다. 이미 옛날에 야훼의 이름이 불려지게 된 것이다.

 

출애굽에는 처음으로 모세에게 야훼의 이름이 불려진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미 창세 4장에는 그 이전에 야훼의 이름이 에노스에 의해서 불려지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로 모순이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 이름이 문제이다. 레위기와 민수기는 시나이 산이라고 하고 신명기는 호렙산 이라고 부르고 있다.

세 번째는 가나안 주민들의 이름이 때로는 가나안족 이라고도 하고 또 때로는 아모리인족 이라고도 한다. 네 번째 창세 1,1-3 절에 의하면 인간은 남 녀 모두가 엘로힘에 의해서 창조의 마지막 날 곧 여섯째 된는 날에 동시적으로 창조 된다. 창세 2,4-25절에 보면 남자가 먼저 야훼에 의해서 땅의 먼지로부터 창조되고 그 다음 짐승들이 짐승들 다음으로 여자가 창조된 것으로 나타난다. 순서가 틀리다.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모순과 충돌을 오경안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성서학자들은 우선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서로 틀린 기록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야훼냐? 엘로힘이냐? 출애 3장이나 6장에 모세 에집트 탈출전에 야훼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 전까지는 엘로힘 이라고 불렀다라는 전승이 하나 있고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다른 원전에서는 쭉 엘로힘으로 쓰다가 출애 6, 2-8절에서부터 야훼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고 야훼의 원전은 창세기 전반에 걸쳐서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엘로힘 원전을 더 깊이 살펴보니까 단순한 문체와 내용으로 된 부분이 있고 아주 화려하고 수확적인 문체를 사용하면서 사제와 제사에 관한 그런 규정들을 소개하고 있는 그런 부분이 또 있다. 그래서 후자를 복잡한 제사에 관한 규정들에 관심을 갖는 그 사료를 따로 구분해서 사제계원전 이라고 부르고 있다. 야훼 -J 엘로힘 -E 신명기 -D 제관계 -P 신명기 17,18절에 보면 베껴쓴 법전, 원 법전을 다시 베껴서 쓴 법전이라는 말이다.

 

3) 모세오경의 주요전승

야훼계 전승(J) - 처음부터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부른 전승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 이름을 야휘스트전승은 시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가나안 주민들을 미디안족 이라고 하지않고 가나안족 이라고 부르고 있다. 야훼계 전승의 문체는 단순하고 강하며 그 내용에는 가짜의 의인화의 수법이 많이 등장한다.

 

의인화 - 하느님에 관한 사정을 인간의 언어와 행동양식에 비추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야훼계전승이 관여하고 있는 설화는 창조설화 에덴동산과 타락, 카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 바벨 탑, 성조의 이야기, 출애굽과 모세에 관한기록 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야훼계 전승을 그냥 단순한 민단 또한 설화로 처리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건 잘못이다.

야훼계 전승의 원초적인 자료가 민담이나 설화라 할지라도 신앙을 전달해 주려는 그런 의도가 그 안에 다분이 들어있다. 특히 야훼계 전승을 통해서 하느님의 성실성이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은 적대 민족의 파괴공작 에도 불과하고 성조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듯이 확고하게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야훼계 전승이 작성된 곳은 남쪽 도시이다. 남부왕국이 되겠고 정확한 연대는 측정하기가 힘들겠지만 다윗왕 통치 직후로 보면 문안하다. 솔로몬 왕정 초기.

 

엘로힘계 전승(E) -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 이라 불렀고 시나이 대신 호렙 이라 사용했다. 가나안족 대신 아모리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엘로힘계 전승 문체 역시 단순하고 강하지만 생동력에 있어서는 야훼계 전승을 따라가지 못한다. 엘로힘계 전승의 작성장소는 도담이나 세겜, 북쪽 도시들의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북부왕국으로 추정되고 있다. 작성시기는 아마 사마리아가 함락(북부왕국 기원전 721) 되기이전에 야훼계 전승이 완성된 이후에 대충 기원전 800년경에 완성된 것을로 보인다.

 

엘로힘계 전승은 창세 15장 이후부터 등장 한다. 그런데 야훼계 전승 만큼 잘 보존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데 왜 엘로힘계 전승에 창조설화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가? 그것은 북부왕국이 멸망하면서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엘로힘계 전승을 가지고 왔던 것 같다. 두 가지를 놓고 남쪽왕국의 편집자가 둘을 하나로 묶으면서 자기 기후에 맞게 엘로힘계 전승을 버리고 야훼계 전승 기록만을 풀은 것 으로 보인다.

 

창조설화에 관한 것도 엘로힘계 전승에 분명히 있었을 텐데 엘로힘계 전승 보다는 야훼계 전승 것이 더 훌륭한 것으로 보일 때 편집자가 엘로힘계 전승을 빼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엘로힘계 전승이 강점이 있다. 야훼계 전승 보다는 하느님에 대해서 묘사할 때 더 세련되어 있다. 의인화 수법을 피하고 꿈이나 환시를 통하여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 한다. 엘로힘계 전승 에서는 하느님이 좀 더 초월적인 분으로 드러나고 있다. 야훼계 전승은 하느님과 말도 하고 재미나게 한다.

 

신명기계 전승(D) - 위 두전승 과는 달리 설화체로 되어 있지 않다.

신명기계 전승이 강조하는 신학적인 주제는 이스라엘이 선택된 민족이기 때문에 자신의 특별한 신변에 맞도록 하느님께 성실하고 순종하고 참된 예배로 그 분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신명기 전승은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경신례를 미워했다. 하느님께서는 신실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불충실한 사람들에게는 벌을 내리심으로써 역사 안에서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신다고 선포 했다. 이 전승안에 설정된 사회적 실정법은 인본주의 적인 색체를 띠고 있다.

신명기계 전승을 가만이보면 엘로힘계 전승을 수정하는 것이 많다. 그걸로 봐서 엘로힘계 전승보다는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애 21, 1절에 보면 7년이 지나고나서 히브리 노예들을 자유롭게 풀어줘야 된다고 되어있다. 신명 15, 12 -14절에 7년이 지나면 히브리 인들을 꼭 풀어줘야 한다. 엘로힘계 전승의 선택규정을 의무규정 으로 바꾼다.

신명기계 전승은 언제 작성되었는가? (2열왕 22) 요시아왕이 성전에서 법전을 발견한 후에 법전을 토대로 종교개혁을 했다. 이 법전은 종교적으로 문란했던 므나쎄왕 통치시대 때 누군가 숨어서 아무도 몰래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왔던 실정법과 경신례 법을 베껴서서 제2의 법전 지금까지 내려온 것을 잘 써서 성전안에 은밀한 장소에 감춰 두었다.

 

그런데 성전을 재건하다 보니까 법전이 발견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지켜오지 않았던 것, 엉터리로 살아왔던 것, 그래서 거기서 울면서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이 이렇게 되었는데--- 다시 법전 정신대로 살아야 되겠구나!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최소한 신명기계 전승은 요시아왕 종교개혁이 기원전 622년에 있었는데 그 이전인 기원전 7세기로 잡을수가 있다.

 

제관게 전승(P) - 저자는 엘로힘 전승처럼 하느님을 엘로힘 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엘로힘계 전승보다는 달리 보다 수사학 적이고 말장난을 했고 문체를 화려하게 공식적으로 어떤 형식을 갖추어서 복잡하게 사용했다. 왜냐하면 사제들이 까다로웠다.

 

유배 이후에는 사제계급이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다. 유배시대 때부터 끌려가 가지고 사제들이 문필 활동을 많이했다. 사제계급의 고유 관심사인 안식일, 음식, 할례, 제사, 사제의 직무 등에 관한 규정들의 기원을 밝히고 그 전통적인 가치들을 꽤 확인 했다.

유대인들이 귀양에서 풀려난 이후 에즈라와 느혜미야 시대 때 기록된 것 같다. 느혜미야 8장에 보면 사제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올 때 어떤 책을 들고 왔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제관계 전승이 아닌가 보고 있다. 그러면 이 제관계 전승들이 어떻게 어울려져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모세오경 으로 불리게 되었는가? 가장 단순하고 신빙성 이론은 이렇다.

 

먼저 야훼계 전승과 엘로힘계 전승이 독립된 전승으로써 있다가 기원전 721년 북부왕국이 멸망한 직후 야훼계 전승을 좋아하는 어떤 편집자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 본다.

기원전 7세기경 신명기계 전승이 나오고 신명기계 전승은 야훼계 전승과 엘로힘계 전승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신명기계 전승이 기록되고 바빌론 귀양 시절에 하나로 통합된다.

 

귀양이 풀리면서 제관계 전승이 기록되고 이 네 원전이 한데 모아질 때 제관계 전승은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록되는 한편 이 법전들이 끊임없이 경신례 안에서 반복되었다. 따라서 경신례 안에서 사용되었던 통합 전승들은 현재 우리가 대하고 있는 모세오경과 다르다고 가장할 수 있다. 그런 전승들이 쭉 내려오면서 또 수정을 받고 하면서 한참 후에 모세오경이 굳혀지는데 그때는 유대교가 정착된 기원전 400년 이후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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