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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교리교사 성서입문

dariaofs 2015. 2. 2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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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의 이스라엘 역사

 

어떤 사람이든 취직을 하려 한다면 먼저 이력서를 쓸 것이다. 그리고 학창 시절의 성적 증명서와 생활기록부를 1통씩 준비해 놓고 어느 직장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직장에서는 그 사람의 이력서와 생활 기록부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기록된 내용이 사실인가 알아볼 것이다. 만일 거짓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직장에 채용되기 힘들 것이고 사실이라면 정도에 따라서 채용될 것이다.

 

이러한 채용 방법론은 성서를 알기 위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서를 알기 위해서는 성서가 쓰여지게 된 삶의 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또한 그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성서 언어의 깊은 의미를 알아듣게 될 것이다.

성경이 알려주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히브리인들의 족장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티나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역사상으로 이스라엘인들이 처음 등장되고 거론된 것은 이때이며 그 시기는 아마도 기원전 2,000년경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 고대 오리엔트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때 이스라엘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선사시대

고고학적인 연구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원시정착부락은 기원전 7,000년기 또는 8,000년기의 석기시대 말기이다. 그 이전에는 동굴에서 살았다고 본다. 마지막 빙하기인 기원전 9,000년대 이후 지구는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되었고 8,000년경에는 곡식을 경작하기 시작하였으며 야생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취락이 건설되고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예리고의 지층에서 발견된 기원전 8,000년대의 취락은 성서의 아브라함보다 이미 5,000년 전에 한 부류의 인간들이 이곳에서 문화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에집트에서의 정착생활은 구석기 시대 초기로 올라간다. 그러나 유적들은 신석기 시대의 문화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에집트의 이 유적 역시 아브라함보다 2,500년 전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2.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발전

금속이 발명되고 채색토기 문화가 시작된 기원전 4,000년대의 메소포타미아는 매우 눈부신 문명의 발전이 있었던 곳이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출발하기 2,000년 전 이미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글을 사용하였고 에집트와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성서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창조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역사가들은 그들을 수메르인이라고 한다. 기원전 3,500년경부터 수메르인들은 우르하는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이곳에서는 3,300년경부터 2500년대까지 이미 설형문자가 사용되고 있었고, 이미 신전을 중심으로한 도시국가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 시대를 아카드시대(BC 2360-2180)라고 하며 창설자는 사르곤 1세였다.

 

수메르인들은 열 두개 정도의 도시국가를 건설하였고 개량된 농업으로 경제생활이 윤택했으며 고도로 발달된 다신교를 갖고 있었다. 신들도 인간들처럼 비슷한 정치체계를 가졌다고 생각하였고 천상국가가 있다고 믿었다. 지상에서의 재난은 천상국가 신들의 노여움 때문이라 하였다. 이들은 법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셈족인 아키드인도 살았다. 이들은 수메르인들의 문화를 이어받아 자기네 생활에 적용시켰다. 수메르인들의 신전도 함께 사용하며 융화작업이 이루어져 점차 두인종이 희석되어 갔으며 셈족의 세력보다는 수메르인의 세력이 더 우세하여갔다. 수메르인들은 우르왕조를 창건하였고 문화를 발상 시킨 이래 1,500년 동안이나 발달 시켰다.

 

3. 팔레스티나의 유목민

초기 청동기에서 중기 청동기로 넘어가는 기원전 2300년에서 2000년쯤, 팔레스티나는 메소포타미아의 서북부에 살던 아모리인이라고 불리는 셈족민족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메소포타미아는 모든 도시가 아모리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들은 팔레스티나에도 들어와 모든 도시들을 파괴하고 점령하였다. 그러나 아모리족은 정착된 농경생활보다는 유목생활을 선호하였기에 이곳에 도시가 건설된 것은 매우 오랜 세월이 지나서였다. 우리가 조금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민족대이동의 시기에 팔레스티나로 들어온 인물들 중에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같은 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이렇게 하여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이다.

 

4. 이스라엘이 기원한 세계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쯤을 우리는 이스라엘의 기원시기로 본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들에 관한 성서의 기사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연대를 증명하기가 어렵고, 다만 성조 아브라함이 다신교도인 데라의 아들로서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살다가 메소포타미아의 북서쪽 하란을 거쳐서(BC 1950-1975) 팔레스티나로 이주한 시기가 바로 이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때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따로 없었다.

 

그의 후손들 중 일부가 이집트 국경지방인 고센 지방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 기원전 17세기였고, 그 후 약 400년 간 흔적이 보이지 않다가 고고학적인 연구결과 기원전 13세기에서야 모세라는 영도자의 인도 하에 이집트를 떠나서 팔레스티나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가나안 정복전쟁은 약 200년이나 걸린 어려운 전쟁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기 이전의 시기는 반유목민 방랑자들이 정처 없이 오랜 세월을 떠돌아 다녔을 뿐인 것이다. 이들의 생활양식을 우리는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선조 들의 이주는 바로 이 민족이동과 방랑이동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18세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남부에 바빌론이라는 아모리족 계통의 왕조국가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북부에서는 역시 같은 셈족의 아모리 계통의 아시리아 왕조가 가장 우세한 나라였다. 이들의 세력투쟁 결과 바빌론이 승리하였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은 바빌론 왕국이 되었다. 이 왕국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이 바로 함무라비 왕이다. 그의 치세 아래 바빌론은 커다란 문화적 번영을 누렸고 문학과 학문이 번성하였다. 그의 업적중 특별히 중요한 것은 법전이다.

 

이것은 근대화된 개념의 최초의 성문법전으로서 그 내용이나 구성에 있어서 성서의 소위 계약의 책, 출애굽기 21-23장과 비슷한 전승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체계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세 5경의 율법과 유사한 대목이 많다는 점에서 성서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빌론 제국이 번성하고 있을 때 이집트에는, 정확히 18세기가 끝나기 직전쯤, 역시 서북 셈족 계통의 힉소스족이 지배권을 가지고 힉소스왕조(BC 1720-1570)를 번성시켰다. 그들은 수도를 동북부 국경 근처의 아바리스에 건설하고 약 100년 이상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성서의 이스라엘 성조들이 이집트에 간 시기는 바로 이시기이다.

 

그러나 이집트 제 18왕조 아-모세 1세가 주축이된 이집트인들의 독립투쟁이 일어나 힉소스족들을 추방하려는 전쟁이 계속되었고 드디어 기원전 1540, 힉소스족들은 수도인 아바리스를 포기한 체 팔레스티나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후 투트 모세 3(BC 1490-1436)가 팔레스티나와 전쟁을 벌여 시리아 북방까지 점령하고 대이집트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때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는 330여 군주들의 연합군이 BC 14685월에 이집트에 대항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이집트는 번성에 번성을 더하여 중근동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이집트 제 19대 왕조 람세스 1(1303-1302)는 수도를 라메세스에 두고 그의 아들 세티 1(1302-1290)는 시나이 반도와 가나안까지 점령하여 지배하는 한편, 시리아의 힛타이트족을 물리치고 카데스에 승전비를 세웠다. 그후 람세스 2세는 힛타이트 동맹군과 전쟁에서 패배하여 BC 1270년에 상호협조조약을 채결하고, 람세스 2세는 힛타이트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집트에서 힉소스 왕조가 붕괴된 시기, 바빌론은 햇족(힛타이트족)350년간 번성하던 바빌론 왕국의 붕괴시켰으나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하지는 못한 채 여러 군소 국가의 경쟁 속에 혼란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부흥하고, 메소포타미아는 혼란시대로 휘말려 들어가고 ……. 여기에서 우리의 역사 기행을 이제 중단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창세기 12-50장의 족장사에 담긴 많은 설화들이 지금까지 소개한 배경들을 삶의 자리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태고 적부터 중동의 두 큰 문화가 있었는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그것이라는 것과 이집트의 동진 정책과 메소포타미아의 서진 정책의 교차로가 팔레스티나였다는 점과 그래서 팔레스티나 지방은 늘 문명과 전쟁의 교류가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이곳에 위치한 민족들은 항상 시달림을 당해왔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역의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구약의 모세 5경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5.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시대

출애굽이후 광야의 오랜 방랑 끝에 가나안에 들어선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왕권을 조직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해안지방에 정착한 팔레스티나인 들의 저항이 오랜 시간 이스라엘을 괴롭혔지만 이스라엘의 왕정은 이를 평정할 수 있었고,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왕국의 수도로 정한 후(1005년경) 40년 재위기간 중 내내 통일 대업을 완수하였다. 그의 아들 솔로몬(975-935)은 부왕의 여덕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며 40년동안 왕궁을 비롯한 건축과 토목을 크게 일으키고, 외국과의 교육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으나 그의 아들들의 불화로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 남부는 유다왕국(수도: 예루살렘)으로, 북부는 이스라엘 왕국(수도: 사마리아)이 되었다.

 

남북조는 여러차레 궁중혁명을 치르며 내적 고통을 겪기도 하였지만, 앗시리아의 세력이 약화된 8세기쯤에는 남북조 모두 태평 성대를 누리기도 하였다.

 

6. 앗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시대

고대 앗시리아는 BC 3000년경에 시작되었으나 후에 함무라비 왕국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8세기 초반, 앗시리아는 테글라트 팔라사르 3세의 정복 전쟁으로 동으로는 메데아, 서로는 이집트와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아라메아의 수도 다마스코(732),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722-1),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689),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671)등이 차례로 정복되었다.

 

이스라엘이 점령당할 때, 이스라엘 당시 왕이었던 호세아는 이집트의 배경을 믿고, 앗시리아에 조공을 거부하였고, 그 때문에 앗시리아는 722년에 이스라엘을 초토화하였으며, 이스라엘 상류사회 사람들 중 27,290명을 잡아갔다. 그 뒤 여러 지방에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이 새로이 사마리아에 정착하였고, 이주민과 원주민의 혼혈아가 늘어나게 되었고, 피와 종교가 혼합된 그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며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였다. 그 즘 예루살렘도 포위되었으나 많은 벌금을 지불하고 용서받았다(701).

 

돌풍 같은 정복과 잔인한 내치는 중동 여러 나라에 끊임없는 전쟁과 반란으로 국력을 소모하였고, 그럴 때마다 앗시리아 제국은 이집트의 메데스(664), 바빌론(648), 엘람의 수사(646), 아라비아의 여러 나라들(640-638)을 정복하였다. 앗시리아의 최후의 정복자였던 앗수르 바니팔(668-630)은 만년에 문학과 예술에 심취하여 건축, 조각, 회화에 열중하였고, 왕립 도서관을 만들어 나라의 모든 학문과 공문서를 22,000장의 벽돌 문서에 기록하였다. 오늘날 중근동의 고대사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문서에 힘입은바 크다.

 

앗수르 바니팔이 만년에 정복의 손길을 멈추자 제국의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고, 신흥세력인 메데아와 갈데아(신바빌로니아)는 연합하여 앗시리아를 정복하였고(614), 2년 후에는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베를 완전히 파괴하였다(612). 앗시리아의 왕은 하란으로 도망하였으나 하란도 610년에 정복되고 말았다. 이때 이집트는 앗시리아를 도와서 신바빌로니아아 세력적 균형을 이루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팔레스티나에 주력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한편 신바빌로니아의 나부코도노소르(성서의 느부갓네살 605-562)는 이집트를 물리칠 때 이집트편을 들었던 유다왕국을 쳐서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597), 왕과 왕의 어머니를 비롯한 10,000여명의 유다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느부갓네살은 시드키야를 왕으로 세워놓았는데 시드키아는 이집트의 파라오 호프라와 동맹하여 느브갓네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느브갓네살은 18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였고,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고 멸망하였다(586). 이때 시드키야왕은 장님이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이 끌려갔다. 당시의 예언자는 예레미아였는데 그와 많은 유다인들이 이집트로 피란 을 갔고, 성전과 왕궁을 비롯한 수도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들은 선왕같이 출중하지 못하였기에 신바빌로니아의 패권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기원전 5391012, 페르시아 군대의 바빌론 진주로 멸망하고 말았다. 신바빌로니아는 앗시리아를 멸망시켰지만 한 번도 앗시리아만큼 번성하지 못하였는데, 7세기와 6세기의 동방 세계는 신바빌로니아(갈데아), 이집트, 리디아(소아시아), 메디아(이란) 4개 강대국들의 분립시대였다.

 

7. 페르시아 시대(6-4세기)

기원전 11세기부터 아리안족인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 은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이란고원에 진출하고, 메디아인은 이란 서부에, 페르시아인은 이란 남부에 정착하였다. 특히 메디아인들은 바빌로니아에 인접해 있었기에 일찍이 그들의 문화와 문명을 접하였으나 그들의 속국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격리된 채로 있었다. 7세기경 메디아는 에크바타나를 수도로 정하고 있었고, 페르시아는 거기서 멀지 않은 수사에 수도를 정하고 있었다.

 

550, 페르시아왕 키로스는 메디아를 합병하였고, 서진 하여 리디아를 점령하였으며 계속 서진 하여 소아시아의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539년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하여 당시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석방하였다(538). 그는 동쪽으로도 진군하여 인디아 강까지 점령하였다.

그는 군사적으로 승리자였으며 일단 정복한 후에는 정복 지의 백성들에게 간대한 정치를 하였고, 각 민족 고유의 종교와 문화와 문물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정복 지의 민족들은 그를 해방자로 대우해 주었다. 키로스의 아들은 후에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지구상 최대의 대제국을 이루었다.

 

다리우스 1(522-486)는 이러한 위업을 계승하여 광대한 제국을 20여개의 주로 나눈 후 중앙 통제를 받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큰 압제나 폭정 없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조직적인 관료제도와 각 민족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관용주의 속에 각 나라의 중요 지점을 신속히 연결하는 역마교통을 발전시켰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그의 치세 때(520년 경) 유다인들은 대제관 여호수와의 인도로 약 50,000명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귀환한 여호수와는 예언자 학께와 즈가리아의 도움으로, 그리고 어린 왕자 즈루빠벨의 지휘아래, 사마리아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515년에 헌당식을 하였다. 당시,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국제적 통용어는 아라메아어였고, 전 제국이 통용하는 화폐를 발행하였다. 5세기에 들어와서 수사 궁중의 관리인이었던 느헤미아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을 재건하였고(445), 유다이즘을 확고한 유일신교로 중흥시켰다.

 

희랍제국이 페르시아와 알력을 갖기 시작하여 페르시아 희랍의 잦은 국경분쟁 속에 5세기도 저물고 ……. 이집트가 페르시아에게 계속 반란을 일으키자 예로부터 수시로 이집트 편을 틀었던 이스라엘을 공고히 하고자 에즈라를 파견(398)하여 유다와 이스라엘의 단결을 촉구하고, 에즈라의 활동으로 모세 5경이 모든 이스라엘인의 대헌장으로 공인된다. 4세기의 페르시아는 이집트의 반란, 희랍의 반란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왕위계승권 투쟁으로 왕실이 흔들리고 제국의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8. 헬레니즘 시대(4-2세기)

에게해 연안의 섬들에는 기원전 3,000년대부터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가진 헬레네 사람들이 각각 독립된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8세기경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표적이고 적대적인 양대 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었고, 6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며 페르시아와 여러차레 충돌을 하였다(마라톤 전쟁).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로폰네수스 전쟁으로 인하여 피차 국력이 쇠진하였고(431-404), 마케도니아왕 필립이 통일 할 때까지 혼란 천지였다.

 

마케도니아는 4세기초부터 헬레니즘 문명을 습득하여 국력을 신장시켰고, 결국 필립왕 시대에 헬레네의 맹주로서 나라의 통일을 달성하였다(346-336).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약관 20세에 부왕의 뒤를 이어 통일 천하의 꿈을 이루고자 아시아로 건너와 앗수스 대전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치고(333), 그 뒤 시리아와 에집트를 굴복시키고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331). 그는 다시 회군하여 티그리아 강변에서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하고 바빌론을 점령하여 대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330).

그는 계속 동부로 진군하다가 인더스 강변까지 나간 후 회군하여 바빌론에서 323년에 33세로 죽었다. 알렉산더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마케도니아는 사분 오열되었다. 즉 프롤로메는 이집트를 차지하고, 셀레오쿠스는 시리아아 바빌로니아를 차지하고, 마케도니아 본토는 안티고누스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 외의 동부지역은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독립했다. 3세기경, 이들 나라의 세력 다툼으로 팔레스티나는 약 1세기동안 안티고누스의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다. 집권자들은 많은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고, 그들은 정착지에서 그들 고유의 언어였던 헤브레아어나 아라메아어를 버리고 희랍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세들을 위한 배려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희랍어로된 구약성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70인역).

 

2세기에 들어와서 서서히 로마의 세력이 마케도니아에서 소아시아로 뻗쳤다. 시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탐내면서 유다인들에게 다신교를 강요하였고 탄압을 하였으므로(168), 유다인들은 유다 마카베오를 지도자로 하여 무기를 들고 저항하였고, 165년에는 예루살렘을 확보한 후 성전을 정화하였다. 그후 마카베오 형제의 저항은 계속되어 143년에는 시리아의 굴레를 벗어났으며, 상당히 조직된 국가를 형성하였으나, 계승권 투쟁과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투쟁으로 그 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종교 사회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사제들만으로 구성되었던 산혜드린(최고회의)에 바리사이들도 참여한 혼합형태를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1세기에 들어와서 게르마니아 야만인들의 민족이동이 심해지면서 로마의 변방이 시끄러워지고 해적이 출몰하고 노예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변방의 반란을 진압하고(65-63), 시리아를 합병하고(63),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을 모독하였다(63). 팔레스티나는 이후 로마의 속주가 된 시리아의 총독이 지배하는 땅이 되었다.

 

보다 자세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다음의 책을 보기 바란다.

존 브라이트, 김윤주, 이스라엘 역사, ,. 분도 출판사, 1979.

 

팔레스티나의 지리와 기후

 

(1) 팔레스티나의 지리

팔레스티나는 필미스틴인들의 땅”(다윗이 공략할 때까지 해안지역을 점령하여 지배했던 민족)이라는 뜻이다. 팔레스티나의 풍경의 현재 형태는 고대에 산맥 형성의 복잡한 과정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산맥이 형성된 것은 땅의 어떤 부분은 밀리고, 어떤 부분은 당기는 긴장상태에 의해서 그리고 바다와 바람으로 인하여 퇴적된 모래와 돌이 단층을 이룸으로 되었다.

 

특히 팔레스티나는 심한 지진으로 지하의 암반이 무너지면서 상층부가 내려앉아 아주 깊고 깊은 계곡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생긴 요르단 계곡의 갈라진 틈은 길이 480이상, 48이상, 깊이 910m을 상회한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티나는 5개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평야 : 주로 해변 위에 좁고 가느다란 땅으로 되어 있다. 타볼산의 남쪽에는 큰 계곡이 있다.

구릉(언덕) : 본토의 중앙부에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언덕과 계곡으로 비탈은 경작될 수 있는 곳이다.

사막 : 특히 사해 근처와 남단부에 있는 황무지이다.

요르단(계곡) : 갈릴레아 호수와 사해를 포함하고 있는데 남쪽으로 갈수록 더 깊이 침몰되어 있다.

트란스 요르단의 산맥 : 부분적으로는 비옥하고 부분적으로 사막이며, 고원지대를 내포하고 있다.

 

1) 예수 시대의 팔레스티나의 행정구역

 

유데아

주민은 주로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었다. 종교적 지도 계급이 여기 정착했다. 유데아 지방은 열광적인 민족주의 운동의 본거지였다. 인구는 수도 예루살렘과 예리고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남부 유데아와 사해 주변 지역은 사막이었고, 예수께서 유혹을 당하신 유데아 사막은 예리고 남쪽 지방이었다 (마태 4,1).

아수르산 1,011m, 예루살렘 750m, 베들레햄 777m, 예르람산 1,025m

 

갈릴레아

갈릴레아 지방 역시 유대인들이었으나 이 지역에 정착해 살고 있는 많은 비유대인들이 있어 범세계적 사회를 구성했다. 갈릴레아인들은 그들의 방언을 가지고 있었고, 종교에 대해 열렬하고 열성적이었다. 이 지역은 땅이 더 비옥하여 유데아보다 더 번창했으며, 인구밀도도 훨씬 높았다. 크기로 보아 주요 도시로 수도 티베리아와 세포리스(나자렛 북쪽 9)등이 있다. 레바논산(3,126m)을 중심으로 170에 달하는 산맥이 뻗어있다.

복음서에 의하면 이 지역이 예수의 활동이 중심 무대였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다음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영주로 이 지역을 다스렸다. 예수께서 갈릴레아 출신이란 이유로 바리사이들의 반대를 받았다 (요한 7,52).

 

페레아

이 행정 구역은 요르단강 건너 동부에 놓여 있고, 커다란 유대 백성이 살고 있는 구역이다. 영토는 갈릴레아보다 더 크지만, 주민이 살기에는 훨씬 못한 곳이다. 그래서 주민의 수는 많지 않았다.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계곡이 있는 조그만 도시들이나 혹은 팔레스티나를 방어하는 요새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유데아, 갈릴레아와 페레아는 팔레스티나의 유대인 행정구역들이었다.

 

사마리아

이 구역은 알맞게 번창했는데 주민은 앗시리아 왕들의 침공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된 외국인들의 후손이었다. 초기의 탈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점점 일신사상과 모세법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칼 근처의 가리짐 산에 그들 소유의 사원을 건립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계속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다. 사마리아 도시는 희랍 및 로마의 신전들을 가지고 있는 완전한 외교도시였다. 가리짐산(881m), 에발산(94m) 귀중한 샘이 많은 아름다운 곳으로 예수께서 이곳을 지나가셨다 (요한 4,4; 루가 9,52. 7,11)

 

데카폴리스

이 구역은 BC 64년에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로부터 일부 자치권을 취득한 10개 도시가 동맹하여 생겼다 (daka-polis-10개 도시라는 뜻). 다른 도시들이 후에 이 동맹 도시들에 가담했다. 일반적으로 주민은 비유대인으로 도시들이 헬라문화의 중심지로써 번성했다. 이 도시들 중에는 시토폴리스와 다마스커스가 유명하다 (마태 4,25-갈릴레아와 데카폴리스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르단 건너편(페레아)으로부터 온 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랐다.)

 

시리아와 페니키아

이 지역은 시리아의 로마 속주였다. 이 주의 최남단에 소수의 유대 마을이 있고, 대다수의 주민은 비유대인이었다. 띠로와 시돈은 무역으로 범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필립보의 영토

이 구역은 팔레스티나 북부에 퍼져있는 여러 지방으로 되어 있다. 즉 골란(헤르몬산 남쪽), 이두레아와 트라코니더스 지방(루가 3,1) 많은 주민이 비유대계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복음서에 주요 도시들 - 베사이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이두메아

이 구역은 예루살렘 멸망 후에 유대 남부에 정착한 에돔인들의 이름을 따라 이렇게 불려졌다. 주민은 사막이나 황무지의 조그만 정착촌들에 살았다. 헤로데 대왕은 이두메아 가문에 속했다.

2) 도로와 거리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예수께서 취하신 여정에 대한 아주 명백한 서술을 해 준다. 고고학의 도움으로 우리는 예수 시대에 있었던 주요 도로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취하신 정확한 여정을 재구성할 수 있다.

여기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루가 2,4)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을 향하여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을 통과해야 했다. 나자렛 사마리아 - 55, 사마리아 예루살렘 - 50

 

유다에서 갈릴레아로(요한 4,3이하)

베들레헴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수는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다. 그는 사마리아 지방의 야곱의 우물이 있는 시칼이라 부르는 읍내로 왔다. 시칼은 예루살렘과 나자렛 사이의 바로 중간지점으로 어떤 여행자도 잠깐 쉬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우물에 머물렀을 것이다.

띠로와 시돈을 향한 여행

마르꼬 7,24 - “예수께서는 띠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레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예수는 일주 여행을 하신다. 즉 그는 가파르나움에서 띠로와 시돈을 향해 북상하셨다가 오른쪽으로 멀리 돌아서 갈릴레아 호수로 돌아오신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길

루가 10,30 -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실제로 전체도로는 해발 638m에서 해저 304m까지 요르단 절반은 당시강도들이 횡행하는 유데아 사막을 통과한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으로의 여행

마르꼬 8,13 -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

마르꼬 8,22-“예수의 일행이 벳사이다에 이르렀을 때에 사람들이 소경 한 사람을

마르꼬 8,27 -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있는 마을들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마지막 여행

마태 19,1 -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레아를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지방으로 가셨는데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시지 않고, 요르단강 건너편(페레아)에 있는 길을 통과하신다.

 

마르꼬 역시 같은 도정을 서술한다.

마르꼬 10,1 - “예수께서 거기(갈릴레아)를 떠나 유다지방과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사람들이 또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늘 하시는 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갈릴레아 호수를 돌아서 요르단강 건너편 길을 따라 가려고 요르단강을 건너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꼬 10,32 -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르꼬 10,46 - “예수와 제자들이 예리고에 들렀다가 다시 길을 떠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마르꼬 11,1 -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르꼬 11,11 - “이윽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거기서 이것저것 모두 들러 보시고 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가셨다.”

 

엠마우스로 가는 길

루가 24,13 - “바로 그날 거기 모였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우스라는 동네로 걸어가면서 이즈음에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해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엠마우스 지방은 전혀 확실히 않다. 제자들이 따라갔던 길은 욥파(joppa)라는 곳이 아닐까? 가정하고 있다. 오늘날 도미누스 보비스꿈 성당이 엠마우스라고 하지만 이것은 후대에 기념하기 위하여 엠마오라고 정한 것일 뿐이다.

 

(2) 팔레스티나 지방의 기후

팔레스티나 지방은 대체로 열대, 아열대, 온대의 세 가지 기후를 모두 가지고 있다. 여름철에 요르단 골짜기는 열대성 기후이며, 산악지대는 온대 기후이고, 지중해 연안 지방은 아열대성 기후이다. 일년은 건조한 여름과 우수기의 두 계절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우수 기는 좀 더 따뜻한 시기와 추운 계절로 나누인다. 편의상 세 시기 즉 여름, 우수기, 겨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겨울(1, 2, 3)

보통 산악지대에는 서리 가 내리며, 예루살렘에는 때때로 눈이 약간 내린다. 대개 5년 내지 10년마다 눈이 많이 내린다. 더 추운 동부 고원지대에는 보통으로 눈이 퍽 흔하고, 매년 오기도 한다. 이 계절 동안 평균 온도는 1월은 3가량, 2월은 0가량, 3월은 6가량이다. 이 시기에는 진흙땅 때문에 곤란한 시기이다.

마태오 25,43 -

마태오 24,20 -

오주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이 계절의 말경에 이루어졌다.

루가 22,55 -

요한 10,22 -

 

여름(4월부터 9)

긴 건조기에 해당되며, 비가 없고, 이슬의 형태로 바람이 습기를 가져온다.

이 이슬이 여름 가뭄 동안에 포도의 계속적인 성장을 돕는다. 이슬은 성서에서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긴다.

창세기 27,28 -

판관기 6,38 -

수확은 이 시기 동안에(이른 여름 특히 5) 거둔다. 그리고 대략 과월절 7주 후에 감사 축제가 온다.

요한 4,35 -

이 시기에 따라 미풍이 매일 동쪽으로 열을 운반하며, 오후 늦게까지 내륙 쪽으로 불어온다. 이 미풍은 육지를 서늘하게 하며, 추수꾼들이 곡식 낟알에서 겨를 까불어 내는데 이 바람을 이용한다.

 

루가 3,17 -

6월 중순은 몹시 더운 때로 이 때부터 9월까지 가뭄이 연장되고, 사해지방에서 가끔 온 지방에 분다. 이 바람은 캄신이라 부르는데 덥고, 건조하고 불쾌한 바람이다.

루가 12,51 -

이 바람이 풀을 말라죽게 하며, 부의 항구치 못함의 상징이다(이사야 40,6-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람이 긴 항해를 할 수 있게 한다. 이 시기동안의 온도는 지역과 높이 따라 다르다. 해안 지방은 쉽게 37가량이 되지만 밤에는 서늘하다.

 

우수기(10- 12)

우수기는 퍽 예상할 수 없다. 회오리 폭풍이 일주일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계속하면서 약 3일 동안은 비가 많이 내리고 4일 동안은 좋은 날씨가 된다.

마태 14,24 -

폭풍전에 공기는 먼지로 가득하고, 서풍이 불 때는 가끔 이상한 일몰과 일출 현상이 생긴다. 추운 바다 공기와 더운 사막 공기가 만나서 갑자기 지역적으로 심한 뇌우를 일으킨다.

 

마태 1,24 이하 -

폭풍 때문에 특히 지중해를 따라 항해하기 곤란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바오로 사도는 말타 섬에서 파선을 당했다.

사도행전 27-

비는 사람에게 생명과 하느님의 축복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평균 강우량은 년 600정도이다.

비는 남쪽보다 북쪽이 더 풍부하다.

 

 

 

 

 

2 강의 성서학 일반론

 

1. 성서란 무엇인가?

 

1) 하느님 말씀과 하느님 백성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을 통하여 당신 자신과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신다(로마1,20). 이를 자연적 계시라고 한다. 그러나 이 자연적 계시만으로는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알려주지 못하며, 인간의 어두운 지성이 그 뜻을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할 예언자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통교하셨는데 이 통교를 초자연적 계시라고 한다. 이 초자연적 계시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계획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초자연적 계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이 인간에게 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당신의 뜻을 내포한 사건이나 표지까지를 포함한다(출애 20,2;출애굽사건).

 

즉 하느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진리를 막연하게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즉 어떤 시대, 어떤 장소,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인물의 어떤 사건을 통한, 구체적인 매개체를 통하여 구원의 경륜을 펴셨다. 이러한 구원 경륜이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전달된 것이다(히브 1,1-2).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자연적 계시는 모든 시대 모든 인류에게 있어 왔으나 특별한 메시지는 선정된 백성에게만 전달되었다. 이 백성이 그리스도 이전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형태를 나타냈고, 그리스도 이후에는 교회라는 형태로 드러났다. 이 백성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특별히 선정된 심오한 뜻을 펴게 된 것이다.

 

2) 성서와 성전

모든 종교는 그 정신적 가치를 살아 있는 전통을 통하여 후대에 전하고 있다. 그 전통 안에는 문체로서 표현된 신화, 기도, 노래, 율법, 교훈 등의 내용과 실천으로 표현된 예식, 관습, 금기 등도 있다. 문화의 발전에 따라서 이러한 내용들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다가 글귀로 수록되기도 하고 정리되면서 서책으로 전해지는 동안 살아 있는 전통을 만들기도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처음에는 어떤 특정 공동체에 맡겨진 것이었지만 이 공동체의 자체 발전 과정에서 상당 부분 서책으로 수록되었고, 일단 수록된 부분은 후대의 신앙인 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왔다. 이러한 성서의 말씀을 믿고 있는 크리스트교는 서적의 교회라고 하겠으나 그런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이나 신약의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서적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그 종교사상의 출발점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말씀이 서적에 담기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의 말씀은 시편이나 예언자들의 신탁이 구전을 통하여, 또 법전이나 민족 설화를 통하여 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이나 관습이나 생활 습관을 통하여 전해진 것이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서적과 거룩한 전통을 통하여 보존되어 왔다. 그리고 이 서적은 한순간에 결정적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고 시대와 더불어 분량이 증가되면서 전통에 대한 어떤 기준을 제공하게 되었고, 해석과 적용을 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의 경우 역시 예수의 언행과 그 직제자들인 사도들이 교회에 남겨 준 신앙의 규범이나 생활의 법칙을 기록으로 보존하려는 것이 그 저자들의 의도였다. 이러한 작업은 사도들의 생존 때부터 그 직제자들의 노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므로 신약성서 자체는 사도들의 중요한 전통의 일부가 기록으로 고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말씀과 교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성서의 전통과 사도적 전통은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원천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경로로 이 원천을 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6세기에 개신교도들은 오직 성서만이 사도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였고, 가톨릭은 계시의 두 가지 원천(성서와 성전)을 주장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개신교가 성전의 가치를 인정하는 추세이고 우리 역시 그 동안 소홀한 듯한 성서에의 열중함이 필요하다는 재인식이 넓게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전과 교회의 전통을 잘 구별해야 할 것이다. 사도적 전통이란 사도들의 믿음과 실천으로서 우리 신앙의 규범을 말하는 것이고, 교회적 전통은 이 규범을 보존하고 응용하는 모든 현실을 말한다.

 

사도적 전통이 교회적 전통이라는 등식이 언제쯤부터였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시점을 금 그은다는 것은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자는 말씀의 내용이고, 후자는 말씀의 보존 내지는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적 전통과 교회적 전통의 내용상의 연관성과 동일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신앙의 현실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2,000년간 끊임없이 모든 현실 문제 해결의 근거로서, 주님의 유언에 따라(신앙의 유산; 디모전 6,20; 디모후 1,12-14;3,14;디도 2,1) 사도적 전통을 근거 삼고 있으며, 또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성령의 임재속에 복음 메시지의 근본적 동일성에 한결같이 성실하였기 때문이다(마태 28,20).

 

교회가 이 성서의 유산, 성전의 유산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는 것은 이 유산을 화석과 같이 보존한다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환경의 요구에 시의 적절하게 해답을 주기 위해 이 유산을 연구하고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는 뜻이다. 이 이유에서 교리의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교회는 교리나 실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 노력에는 과연 최초의 유산과 오늘의 노력이 동일한지를 항상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교리의 발전이나 실천에 있어 성서의 역할이 새롭게 강조된다. 사실 초대교회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신앙의 근거나 계시의 원천으로서의 성서의 가치를 성전과 분리한 적이 없다. 교부들은 모든 교리의 실천 근거를 제시할 때 한결같이 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성서 밖의 그 어떤 것에서도 근거를 찾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 가톨릭 교회는 사도적 전통을 어디에서 발견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성전 안에서 이해되고 해석된 성서의 말씀 안에서 발견한다라고 대답한다.

 

성서와 성전의 관계가 이러하다면 모든 신학자와 성서학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성전 안에서 이해되고(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삶의 자리가 중요하다), 해석된 성서에서 사도적 전통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학이나 성서신학이라는 학문은 결국 성서해석학을 향하여 체계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발맞추어 성서입문이란 성서본문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성서의 성립 과정이나 시대적 배경이나 성서학 용어의 기초 개념들을 연구하는 분야인 것이다.

 

참고: 154648, 뜨리덴틴 공의회 제4차 회기에 선포한 교령 “Sacro sancta”에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와 윤리적 법칙의 근원은 오직 하나이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영감 받은 책들과 구전에 포함되어 있다고 선언함을 과거 초세기의 교부들과 같이 오늘의 교회의 장상들도 유일한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 성서는 전통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전통의 주제가 시작되어 전통이 봉사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서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직접적 수단인 것이 사실이나 우리는 그것을 전통 안에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4) 교회 생활 안의 성서

교회는 항상 그리스도의 몸 자체에 드린 것과 같은 존경을 성서에 드려왔다. 이러한 존경의 근거는 요한복음 6장에 근거한다. 즉 예수 친히 가르치고 전달하시는 성부의 가르침 때문이고(요한 6, 32이하), 성체성사안에서 당신 자신을 증여하시는 영양분 때문이다(요한 6,51-59). 이는 성서와 성체에서 오는 신앙의 영양분을 말한다. 이러한 대조는 교부들에 의해 널리 퍼졌고, 그리스도는 성체 안에서뿐만 아니라 당신 말씀 안에서 현존하시니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성서는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고, 살아 있는 설교를 위한 시금석이며 불변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서안의 예언자들의 목소리와 사도들의 목소리는 성령의 목소리이기에 상서의 말씀은 신앙의 규범이 되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전달하는 성서는 성전과 함께 교회 신앙의 최고 규범인 것이다. 교회의 교도권은 하느님 말씀보다 더 우월할 수 없으며 다만 그 말씀에 봉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할 것은 과거의 설교에 있어서 그릇된 성서의 해석이 있을까하는 두려움에서 교회의 공식된 발언이 성서를 근본으로한 설교에 있어서공통적이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Divino afflante Spiritu EB 561에서 성서는 거룩한 설교의 직분에 영양이 되고 힘이 된다라고 밝힘에 따라서, 이제는 모든 교회가 성서안에서 성부와 자녀들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고, 성서를 바탕으로한 사목적 배려로서 교우들과 하느님과의 사랑스런 대화가 성서적이도록 가르치고 있다.

* 교부들의 말씀 : 성 지롤라도 - 주님께서는 매일 교우들에게 성서의 증언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 우리는 예언자들의 혀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대화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5) 성서 말씀의 효과

우리 인간은 자신의 말 안에서도 확신과 설득력과 남을 감동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 그 내용에 있어서 틀릴 수 없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문의 사실이며, 그 진리를 표현하신 분의 본래의 의도와 창조적 효력을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히브 4,12; 사도 20,32; 1데살 2,13). 교회도 여러 회칙을 통하여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다(Spiritus Paraclitus EB. 482; Divino afflante Spiritu EB. 567).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이러한 증거를 수없이 볼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의 복음, 서간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효과적이며, 예리하고, 침투적이며, 특히 하느님 백성을 모으는 힘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베드로 사도의 표현대로 하느님 말씀은 교회의 생산적 원리이고(11,23; 야고 1,18.21), 세상 종말까지 전해야 할 교회의 전생명의 원리인 것이다(교의헌장 20,26).

 

2. 성서의 영감(신학적 차원과 사회학적 차원)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종교 경전을 거룩한 책으로 불러왔고 예수시대의 유대인들도 이 책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여 책 중의 책이라는 의미로 이라고 불렀다(하느님 말씀; 요한 10, 35; 신탁; 사도 7,38; 로마 3,2; 거룩한 책; 로마 1,2; 거룩한 글; 2디모 3,15 ). 이러한 칭호는 그 글이 하느님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을, 신적기원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믿음에 기원하여 예언자는 성령에 이끌리어’(2베드 1,21) 하느님 대신 말한다고 믿었고, 모든 성서가 하느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아’(2디모 3,16)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유익한 교훈이라고 믿었다.

 

초세기 교부들은 하느님께서 성서저자들에게 발음하다’, ‘시사하다’, ‘성취시키다라는 표현들을 하였다(아오스딩, 니싸의 그레고리오). 즉 성서 편집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셨다는 것이다. 4-5세기의 교부들과 공의회는 하느님의 신적 행위를 강조하면서 초세기 교부들의 말씀을 받아들여 쓰도록 명령하신 분이 바로 이것을 썼다고 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Providentissimus EB 125; 1893"에서 성령은 성서 필자가 기록하도록 초자연적 힘으로 충동하고, 하느님이 명하시는 모든 것만을 정확하게 생각하고, 충실히 기록하고, 틀림없이 표현하도록 성서 필자에게 작용하신다라고 하셨다.

이 회칙은 성서의 저술에 있어서 하느님의 몫과 필자의 몫이 구별되지 않고, 성서 필자의 저술활동의 전반에 걸쳐 하느님의 작용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후 비오 12세의 회칙 Divino afflante Spiritu에서는 성서 전반이 동시에 완전히 양자(하느님, 필자)의 소작이라는 가르침을 폈다. 이 설명은 더욱 발전하여 성서가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기록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느님과 성서기록자를 성서의 저자라고 칭하게 되었다(영감의 심리적차원).

 

다시 말한다면, 하느님은 인간 역사 안에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개입하신다. 즉 인간구원이 그 하나이고 당신자신의 계시가 또 하나이다. 여기에서 구세사로서의 성서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자기계시이므로 성서의 원저자는 하느님이다라는 가르침이 정당한 것이다. 동시에 인간의 손을 빌려 기록된 성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과 신앙의 응답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인간 저자는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표현을 저자인 자기자신의 표현방법으로 저술할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의 신앙의 응답과 표현방법을 하면서 드러내지 못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이 뜻한 바대로 당신을 계시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하느님의 자아계시이며, 동시에 저술가 자신의 계시인 것이다.

 

오늘날 이 문제는 성서학이 발전함에 따라서 성서 필자가 봉사하고 있는 구원의 공동체와 성령과의 관계 안에서 영감의 사회학적 차원으로 고찰하게 되었다. , K. Rahner는 구원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세운 성령의 같은 구원행위는 역시 성서를 교회의 구성요소가 되도록 교회안에서 자극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감의 개념의 내포가 확대되고, 구원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 안에서 유추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구세사의 주역들에게는 행동의 영감을 주셨고, 예언자와 사도들에게는 말하는 영감을 주셨고, 성서 필자들에게는 기록하는 영감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공동체 안에서 영감의 사회학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는 성서 영감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이즈음의 성서학자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며 교회의 가르침인 것이다. 이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은사인 성서 영감문제가 확실하여 졌다고 하겠다.

 

3. 성서와 다른 학문과의 문제

 

성서의 내용은 전체의 관점에서 부분을 평가해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성서의 기록은 성서 필자가 하느님의 Carisma적 가르침이라고 긍정한 내용을 자신의 의견, 추측, 의혹 등의 주관을 구별할 수 있도록 그 문장의 종류, 문학유형, 심리상태까지 고찰해야 한다. 이런 원칙을 견지하며 여타의 학문과의 잡음을 해소할 수 있다.

 

1) 성서와 철학과의 문제

성서의 가르침은 철학자들의 철학체계나 사물의 이성적 해결을 의도한 가르침이 아니다. 따라서 성서에서 그 어떤 철학적 체계를 도출하려 하거나 지탱하려 해서는 안된다. 다만 성서는 하느님의 유일성, 초월성을 인정하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자존유와 피존유)로 본다든지, 이원론이 아닌 인간론을 편다든지 하는 형이상학적 긍정은 인간 이성의 오류를 시정해 주기에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2) 성서와 자연과학의 문제

성서는 이 지상사물의 구조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다만 성서가 저술될 그 시대 사람들의 상식적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는 생물의 역사가 종()의 고정에 의한 것인지에 관심이 없다. 또한 성서가 인류의 일치와 원조 아담과의 연대성을 주장하는 것과 인류학에서 인류 단원설이나 다원설을 주장하는 것과도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것이다. * 갈릴레오 사건.

 

3) 성서와 역사와의 관계

성서가 거론하는 역사가 반드시 모든 면에서 객관적으로 정확해야될 이유가 없다. 다만 역사안에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건이 구원의 경륜에 관계되는 한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속하는 진리이다. 따라서 성서에 나오는 역사적 내용을 다룬 문헌과 성서의 내용이 다르다거나 있다거나 없다거나 해서 성서의 가르침을 단순한 가정이나 신화로 처리하는 태도는 온당하지 못한 것이다. * 신화와 전설의 문제; 노아의 홍수, 바벨탑.

 

4. 성서본문에의 접근

 

1)성서의 언어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우리 인간의 언어에는 헤브레아어, 아라메아어, 희랍어가 있다. 헤브레아어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사용하던 서방 셈족어에 속한 언어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친 후부터 헤브레아어를 국어로 사용하였다. 가나안 정복 전쟁부터 다윗왕조 건설까지(BC13-11)를 고대 헤브레아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다윗왕 시대부터 바빌론 유배까지(BC10-6) 헤브레아어 문학의 전성시기라고 하겠다. 유배 이후에는 헤브레아 문학의 쇠퇴기라고 하겠다.

 

헤브레아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이다. 헤브레아 성서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히브리인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건너온 사람즉 요르단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스라엘인들을 부를 때 사용한데서 유래한다. 원래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유프라테스 강변의 셈족으로 같은 셈족 언어였으나 헤브레아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었다. 헤브레아어는 원래 가나안 지방의 언어였는데 그들이 정복한 후 그 지방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연구결과이다.

 

그러므로 초창기 구약성서는 대부분은 헤브레아어로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원본은 하나도 없고 사본만이 남아 있는데 그 사본 대부분이 헤브레아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 동방정복 이후에는 아라메아어가 일상용어로 등장하였다. 이 언어도 본래 서부 셈족의 언어로서 오늘날 시리아 지방 사람들의 언어였다.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아라비아 사막을 무대로 유프라테스 강변까지 종횡무진 하다가 기원전 10세기, 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정착하여 아라메아 왕국을 건설하여 문화를 꽃피웠다. 그 이후 아라메아어는 차츰 발달하여 기원전 7세기경부터 상업 외교의 국제적 용어로서 사용되었고, 페르시아가 앗시리아를 정복하고 난 후 6세기에는 유럽 전체의 공용어로 널리 퍼졌다. 헤브레아 사람들은 국제적 용어이자 같은 셈족언어였던 아라메아어를 일상생활 용어로 사용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성서가 아라메아역 성서(타르굼; Targum)이다.

 

그러던 중 4세기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넘어뜨리고 동방세계를 제패하자 아라메아어는 국제어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희랍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희랍어가 제국의 곳곳에 자리잡기까지에는 수세기가 걸렸다. 예수님 시대에도 아직 서부 아라메아어의 방언들이 많이 쓰였을 정도였다. 이 이유로 신약성서의 일부분이 아라메아어로 된 것도 있으며 구약성서의 몇 부분이 아라메아어로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아라메아어가 동양의 언어임에 반하여 희랍어는 서양의 언어이다. 희랍어가 통일된 언어가 된 것은 알렉산더왕의 업적이라고 하겠다. 찬란한 헬레니즘 문화가 꽃필 때 희랍어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이 당시 통일 희랍의 언어를 꼬이네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대중 통용어라는 뜻이다. 이 언어로서 번역된 성서도 여러 가지의 사본이 남아 있다.

 

로마가 희랍을 누르고 세계를 제패한 후 즉, 기원전 2세기쯤부터 라틴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로마의 문화적 근원은 희랍제국이었기에 희랍어는 기원후 3세기까지 통용되었고, 4세기부터 라틴어가 세계어로서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시대의 언어로서 기록된 복음이나 서간들이 희랍어로 기록된 것이다. 이때 사용된 언어는 꼬이네였다. 그러나 저자들이 이스라엘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에는 헤브레아적이며, ‘아라메아적색채가 많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꼬이네희랍어는 문법이나 숙어가 간편하여 번역하기 쉬웠던 관계로 라틴어, 이집트어, 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

 

2) 구약원문 사본류

현존하는 구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이스라엘 사해 북쪽 꿈란이라는 동굴에서 1947년 어느 목동에 의해 발견된 두루말이 양피지 사본이다. 꿈란은 예리고 남쪽 10 km 떨어진 사해 연안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 1947년 늦가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던 목동이 발견한 동굴에 질항아리속에 간직된 양피지 사본의 이사야서가 기원전 100년 이전의 작품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후 그 지역을 답사한 학자들의 노력으로 여러 가지 구약성서 사본을 발견하였고, 그곳이 그리스도 강생 전 2세기말쯤 창설된 어떤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생활하던 곳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공동체는 여러 가지의 수난을 겪다가 기원후 70년 로마와 유대의 전쟁때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대부분이 단편들로서 성서 전문을 구성하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사실 성서는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까지는 예언자와 제관에 의해서, AD 70년 예루살렘 멸망부터 AD 600년까지는 라비들에 의해서, AD 600-1,200년까지는 마소렛이라는 텍스트 전승의 관리자들에 의해서 보관되고 연구되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킨 AD 130년부터는 이스라엘에 제관도 없고, 성전도 없는 신세였다. 당시의 그들은 오직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성서학자들의 짧은 설교로 민족적, 종교적 통일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들이 민족적, 종교적 통일을 유지하고자 한 것으로서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서쪽 40 km 떨어진 얌니아에서 성서 연구를 시작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사본을 통일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이 얌니아에서 개최된 유대인 최고지도자회의에서(기원후 약 100년경), 유대교에서 정경으로 통용될 성서경전 목록을 결정하였다. 이때의 기준은 헤브레아어로 쓰여진 구약성서만이 정경이라는 것이었다. 그후 그들의 후계자들이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을 마소라학파(전통의 사람)’라고 한다.

 

현재 학계에 널리 알려진 단편사본들을 포함한 성서 사본들은 모두 3,400여종에 달한다. 이들을 여러 가지로 비교연구하여 많은 학자들의 노력속에 만들어진 헤브레아 구약성서의 고정판은 Kittel판이라고 하는데 1929-1937년에 고정되었고 Stuttgart에서 출판되었다.

 

* 70인역 성서(희랍어 사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점차 모국어를 잃어버리게 되자 기원후 200년전후에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하게 되었다. 이중 모세오경은 충실하게 번역되었으나 이사야나 시편은 좀 부정확하고, 다니엘서는 자유역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 번역하였기에 문체의 통일성도 없고, 오역도 많으며 성서의 배치도 원문과는 다르게 되어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희랍어 성서를 많이 인용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이 70인역 성서는 약 400여종이 발견되고 있다. 그중 유명한 사본은 다음과 같다.

바티칸 사본 : 4세기 사본, 바티칸 박물관 소장.

시나이 사본 : 4-5세기 사본, 대영박물관 소장.

알렉산드리아 사본 : 5세기 사본, 대영박물관 소장.

에프렘 사본 : 5세기 사본, 파리국립박물관 소장.

기타 많은 사본들이 옥스퍼드 , 켐브리지, 런던, 레닌그라드, , 파리 등지에 산재함.

 

* 타르굼(아라메아역 성서)

바빌론 유배시부터 유대인들은 아라메아역 성서를 사용했으나 원본은 모두 사라졌고, 꿈란에서 일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타르굼은 3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빌로니아 타르굼, 예루살렘 타르굼, 사마리아 타르굼, 요나단 타르굼 등이 있다. 타르굼은 편역이 많기 때문에 당시의 유대인들이 구약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잘 드러난다.

* 라틴어역 성서

3세기 중엽 이후 로마제국은 라틴어를 제국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교황 다마소 1세는 성 예로니모에게 명하여 헤브레아 성서의 원문을 참조하여 라틴어역의 새 통일번역본을 만들 것을 위촉하였다. 예로니모 성인은 예루살렘 및 여러 곳의 성서를 살펴보고 헤브레아 성서의 본문에 충실한 번역을 한 라틴어 성서(불가따본)를 만들었다. 이 성서는 8세기까지 전 교회에 통용되었다. 13세기에 이 성서가 전 교회에 통용된다하여 통용본(불가따)라고 했다. 교황 끌레멘스 8세때 고정판 불가따의 제3판이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공식판이다.

현존하는 불가따본은 다 5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 신약성서의 원문 사본들

신약성서도 원문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원본은 아마도 파피루스였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로 모두 사라진 듯하나 이즈음, 고고학의 발굴로 파피루스 신약성서 사본이 약 70여종 발견되었다. 이들은 빠른 것은 2세기초의 것부터 4세기의 것까지 있다.

양피지 사본은 파피루스보다 보존이 용이하여 묵시록이 빠진 신약전편이 120, 복음서만 1,700, 기타 신약과 관계되는 사본과 단편의 총수는 2,800여편이 된다.

 

이들 중 유명한 사본은 다음과 같다.

바티칸 사본 B : 4세기초 이집트에서 필사. 바티칸박물관 소장.

시나이 사본 S : 4세기중엽본으로 시나이산의 가타리나 수도원에서 발견. 일부는 라이피치히도서관에 일부는 대영박물관 소장.

알렉산드리아 사본 A : 5세기의 것, 대영박물관 소장.

에프렘 사본 C : 5세기의 재필사본, 파리국립박물관 소장.

베자 사본 D : 6세기의 희랍어와 라틴어 대조사본, 켐브리지대 도서관 소장.

 

 

3 강의 성서주석의 방법과 성서의 의미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메시지를 미리 정하신 후 그것을 구체적으로 집필자의 사상과 언어와 의향 등을 이용하면서 기록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구원의 메시지가 성서안에 강생한 셈이다. 즉 성서안에서 하느님의 의도와 집필자의 의도가 교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성서의 살아있는, 능동적 주석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의도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집필자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세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할 과제요 책임이다.

 

성서해석의 참된 목적은 성서에 대한 반대자들의 고발에 대하여 옹호할 호교적 성격의 소극적인 면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한 구원의 신비스러운 메시지를 더 잘 통달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적극적 성격이 있는 것이다.

 

1. 성서주석의 기본 전제

신학과 사목에 직접 연결되는 성서주석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있다. 그 하나는 계시에서 우러나는 신학의 지도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그 시대 문화와 관계되는 실천적 방법론이다.

 

1) 신학적 지도 원리

성서 주석은 하느님께서 인간구원을 위해 교회에 맡기신 하느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영감 받은 글월(성서)을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구원, 계시, 교회, 영감, 이 네 가지 요소를 고려할 때 성서의 주석이 올바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므로 신앙으로 이 글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글의 이해와 해석이 신학을 구성한다면 신앙 없이 성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 언어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성서 문장의 비판 없이 성서필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으므로 신앙과 비판력을 아울러 행사해야 한다.

 

성서는 하느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때의 계시는 추상적인 명제를 나열한 것이 아니고 인간 역사안에 구체적으로 파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완성된 것이므로 그 근원은 초자연적이지만, 구체적 진전은 역사적이다. 그러므로 성서 주석자는 초자연적 기원에 대한 신앙을 가지면서, 계시의 역사적 전개에 따라 역사 비판적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 성서주석은 각 개인의 어떤 철학적 선입견을 거부한다.

 

성서는 교회에 맡겨진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성서는 교회의 근본적 구조의 일부이다. 따라서 교회의 교도권은 성서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 성서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를 대립시켜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교회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서 신앙의 유산인 성서를 올바로 해석할 본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교회안에서만이 성서와 성전의 유기적 대화를 이룰 수 있고, 하느님의 말씀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 교회의 교도권의 역할과 의미가 있다. 교도권은 성서의 어느 구절의 해석을 결정한다기보다 그릇된 해석을 배척하는 소극적 개입을 하며 주석가들의 정당한 연구를 격려하는 방법으로 적극적 개입을 한다.

 

성서는 인간 구원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성서는 순수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인간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책이므로 이 책의 주석은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목적 배려를 외면할 수 없다. 성서연구가 다만 고전문학을 연구하고 훈고학적으로 분석하는데 끝나서는 안된다. 성서의 연구는 인간을 개조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2) 문화적 요소(실천적 방법론)

복음은 모든 시대의 모든 문화에 침투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의 시대에 성서의 말씀이 이해되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의 문화감각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특징적 사고를 몇 가지 살펴보자.

 

과학과 기술

현대인은 고대나 중세인들과는 다른 우주관과 과학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연에 순응하기보다 자연을 개조하고 있다. 성서가 저술되던 시대는 우주의 신비를 캔다거나 연구하는 시대가 아니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성서언어가 오늘의 시대의 언어와 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서주석은 이 고대와 현대의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오늘날 과학의 발전은 영성과 상징을 말살하고 있다. 인간만능의 문명사상은 은총에의 길을 봉쇄하고 있다. 성서 주석은 현대인의 정신을 하느님의 말씀에 개방하도록 인도해 주어야 한다.

비판 정신

문예부흥 시대부터 있어온 비판 정신은 문학 비판, 역사 비판, 철학 비판을 통해서 성서의 연구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오늘날 현대인의 비판정신은 인간 실존 비판에까지 이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판에 응분의 답변을 줄 수 있는 것이 성서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를 계시하는 성서야말로 인간실존의 신비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성서주석과 실존에의 반성은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2. 성서의 해석 방법들

 

일반적으로 문학작품의 비판은 어떤 작품의 성립연대와 환경들을 고려하고 저자의 진의를 파악하고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자 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성서의 경우, 하느님을 주 저자로 하고 필자의 인간조건이 개입한 작품이라는 면에서 거기에 쓰여있는 글이 무엇을 1차적으로 말하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신앙인의 이성에서 당연한 요구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단순한 과학적 사물비판보다 역사적 사건비판은 더 어려운 작업이다.

인간실존의 발전현상인 역사적 사건이 어떤 신앙과 깊이 있게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어떤 인간의 자유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자의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비판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의 비판은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근래의 성서학자들은 이점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 과학적인 방법론을 개발하여 이용하면서, 신앙의 빛으로 관찰 분석 평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본문비판(원전비평)

성서의 원본이 없는 지금 남아있는 여러 가지 사본들 중 어느 사본이 원필자의 원문에 가까운 것인가를 알아내는 방법론이다. 이때의 몇 가지 법칙은 읽기 어려운 것을 쉬운 것보다 중요시한다. 긴 것보다 짧은 것을 중요시한다. 여러 사본들 중 공동 기원의 텍스트를 더 중요시한다. 의식적으로 고친 흔적이 있는 것을 배제한다. 원저자의 언어나 사고방식과 근접한 것을 중요시한다. 등등이 있다.

 

문학비판

성서는 고대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오늘의 감각만으로 고대의 필자의 의도를 알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필자가 처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안에서 이러저러한 낱말이나 문장이 표현하고자 한 뜻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이 문학비판이다. 이 일은 성서의 구절이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 알아들었나? 하는 당시의 말뜻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방법론은 성서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결국 문학비판은 성서언어의 어법의 변천, 낱말, 문법 등 언어학에 조예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방법론이 중요한 이유는 작품이란 낱말을 문법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의 사상이 있고, 그 사상을 어떤 형태로 표현할 것인가 선택이 있고 비로소 단어와 문법을 사용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된 작품이 여러 가지 문학유형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유형에 따라 주장하는 뜻이 다를 수 있고 바라보는 각도가 다를 수 있고 접근하는 각도가 다를 수 있다. 성서 필자가 어떤 종류의 표현 방법으로 자기 사상과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는가를 알려면 이 방법론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이 방법론을 위해서는 고대 중근동의 문학유형사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역사비판

문학비판은 역사비판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 작품이 어떤 시대, 어떤 배경, 어떤 사회, 어떤 환경에서 쓰여졌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또한 작품 내용의 인물이나 사건의 역사적 지식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한 작품을 가지고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는 학문이 역사비판이다. 이 방법론은 수 천년간의 저술기간이 필요했던 성서의 연구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학문을 통하여 성서의 정확한 저술연대가 밝혀졌다. 아울러 성서 고고학, 비교 민속학, 동방 고고학 등의 발전은 이 역사비판에서 유래한다.

 

철학적 비판

종교사에서 종교를 연구할 때는 단순하게 종교만을 연구할 수 없고 현상학적 방법을 원용하여 인간의 종교적 태도나 사건을 넘어서 존재하는 깊은 뜻을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이것이 종교철학의 대상인데 성서의 내용은 종교 현상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므로 성서연구에 있어서도 종교철학적인 비판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론은 자칫 주관주의에 빠질 우려가 높다. 철학적 선입관을 가지고 역사나, 자유의지나, 인간의 결단 등을 판단한다는 것은 위험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성서본문에 대한 종교철학적 비판을 일체 거부한다면 현대인들에게 성서를 통한 신앙의 대화를 유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본문 자체의 이해를 위해서라도 철학적 비판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성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4 강의 모세 5

 

1. 명칭

구약성서는 전 46권으로 형성되었고 약 1,000년의 역사 속에 엮어진 책이다. 이 구약성서의 처음 5권을 모세 오경, 오경, 토라, 율법서 등으로 부른다. 토라(Torah)는 히브리말로 교훈, 규칙, 지시, 교리, 율법을 말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를 즐겨 쓰는 이유는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인간들이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책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 책은 원래 하나의 두루말이였는데 이를 다섯 뭉치의 두루말이로 분류하여 다섯 개의 항아리에 나누어 보관하였기 때문에 오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체적인 낱권의 이름은 70인역의 희랍어를 라틴어로 옮긴 이름을 오늘날 사용하고 있다.

게네시스(Genesis 창세기) 엑소더스(Exodus 출애굽기) 레비띠꾸스(Leviticutus 레위기) 누메루스(Numerus 민수기) 데우떼로노미움(Deuternomium 신명기)라고 부르고 있다.

 

2. 구성과 내용

1) 구성

오경은 천지창조부터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조들의 역사를 거쳐 모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문학유형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즉 역사적인 부분과 법률적인 부분으로 나누면서 이 두 부분이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역사의 의미가 법률적인 의미와도 상통되고 있다고 하겠다. 다른 한편 오경은 명칭대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으로 분류되지만 내용상으로는 태고사와 성조사인 창세기와 본론인 출애굽 역사인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 그리고 결론으로 모세가 연설하는 신명기의 세부분으로 대별된다.

 

2) 내용

태고사 : 1-11. 이 부분은 먼저 세상과 인류의 창조 및 기원에 대해 말하는 이른바 창조설화 부분이다. 이는 창조를 과학적으로 조명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며 인류의 기원과 피조물의 기원을 더 나아가서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에 대한 깊은 숙고와 죄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묵상한 이스라엘 현자들이 얻어낸 결론이다. 즉 존재론적 숙고 속에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 부분은 오경의 일반적인 서론이며 나아가서 그 뒤부터 이루어지는 성조사의 서론이기도 하다.

 

성조사 : 12-50. 이곳부터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겠다. 이미 첫 번째 강의에서 말한 대로 기원전 2,000년경 즉 초기-중기 청동기에 팔레스티나에 이동했던 아모리족의 족장들 중 특히 위대했던 사람들 중 하나일 수 있는 아브라함(12-25), 이사악과 야곱(26-36), 그리고 요셉(37-50)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뽑으시려는 준비작업을 어떻게 하셨는지 소상하게 말해주고 있다.

 

출애굽사 : 창세기 이후의 세권의 책(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은 모세오경의 본론에 속하는 출애굽사이다. 모세의 생애를 주축으로 하여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의 성립과 그들의 사회, 종교, 경제, 법률적 형성 과정을 서술한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과 갈대 바다의 기적, 광야의 기적 등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신 능력 그리고 그분의 자비가 풍요로운 사랑을 체험하면서 점차 그분의 백성이 되어간다.

 

레위기 : 이는 대부분이 법률적인 부분이다. 즉 제사에 대한 법(1-7), 사제축성예식(8-10), 정결례법(11-16), 성화법(17-26), 기타의 보상법(27)으로 되어 있다. 이 법률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백성과는 다른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수기 : 이 책도 출애굽의 과정을 적고 있다. 출애굽의 역사 중 시나이산에서, 카데스에서, 모압 광야에서 체류하면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도중엣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을 다루며 중간 중간에 법률적인 문제를 기술하고 있다.

 

신명기 : 모세오경의 결론부분이다.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모압광야에서 행한 모세의 연설문을 길게 담고 있다. 구조를 살펴보면 긴 연설과 지킬 법률, 이에 따른 하느님의 축복과 하느님의 저주 등이 나타난다. 신명기의 특별한 의미는 이스라엘이 살아가야 할 법률 즉 시민법과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종교법(12-26)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여호수아를 임명한 뒤 느보산에서 죽는 것으로 끝난다.

 

3. 법률

오경 전체가 역사적인 부분과 법률적인 부분으로 나뉘어 졌다고 하였다. 여러 곳에 산재한 법률 중에 중요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십계명(출애 20,2-17). 이 계명을 바탕으로 시나이 계약이 채결되었기에 중요하다. 이는 구약법의 대헌장이라 할 수 있다. 이 계명의 내용과 정신은 이후 모세오경의 모든 법조문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십계명은 신명기 56-21절에도 나타난다.

 

2) 계약의 법전(출애 20,22-23,19). 이곳에 수록된 법률은 종교, 사회, 윤리, 형법 등 일상생활에 적응시킬 수 잇는 세부규정이다. 이 법전의 중심사상은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십계명을 지키고 계약의 정신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3) 사제적 법률(출애 25-31, 35-40; 레위 1-16, 23-27; 민수 1-10, 17-19, 28-29). 이 법들은 제관계(P)사료에 포함된 것으로 성소, 제사, 사제, 정결례, 축제일 등 주로 전례에 대한 것들이다. 이 법률이 의도하는 바는 성서를 중심으로 한편으로는 법을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올바른 공경을 드리는 하느님 백성답게 살도록 가르치고자함이다.

4) 성화법(레위 17-26) “너희의 하느님 야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1-2)는 말씀에 연유하여 성화법이라 한다. 이 법률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백성이니만큼 다른 백성보다 더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률 중 많은 곳은 후대에 즉 유배시대나 유배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본다.

 

5) 신명기 법전(신명 12-26) 열왕기에서는 이 부분을 단순히 토라라고 부른다. 야훼숭배, 십일조, 사회정의, 남녀관계 등 종교 및 사회생활 전반에 관한 법률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법전은 예언자들의 전성기인 기원전 7세기쯤 형성된 것으로 본다.

 

4. 모세오경의 전승들

1)모세오경의 비판적 연구의 선구자들

 

구문헌가설

B. Witter (1711 독일의 목사)

J. Astrue (1753 프랑스 천주교 의사)

위 두 사람은 창 1,1-2,4까지의 하느님 이름이 엘로힘으로 나오고 창세기 2,5-3,24에는 하느님 이름이 야훼로 나오며 문체, 구성이 다르므로 저자가 같은 사람일 수 없다고 주장. 이때부터 JE의 구별이 시작됨.

 

그 뒤를 이어 단편가설, 보충가설 등이 있었다.

 

신문헌가설

19세기 초반에 E. ReussVatkeE+J+D+P의 순서를 정했다.

그 뒤 E. Reuss의 제자인 A. KuenenK.H. Grof 그리고 Vatke의 제자인 J. Welhausen(1844-1918)토라는 J+E+D+P의 순서로 장구한 세월에 편집된 것이다.”고 하였다. Velhausen의 주장은 여러 가지 오류가 발견되었지만 이러한 구분은 성서 연구와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기에 그의 분류법을 받아들인 오늘날의 학자들은 다음의 결론을 내 놓았다.

 

모세오경이 글로서 기록된 것은 기원전 1,00-950년경부터이며 어떤 부분은 이스라엘이 유배생활 중에 또는 유배이후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그 전까지는 오랜 옛날부터 내려온 구전 전승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모세오경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을 통하여 책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모세의 친저성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모세의 정신과 모세의 권위에 의해 쓰여졌으므로 모세오경이라 칭한다. 연구에 의하면 원래 JE 두 가지 사료가 있었으며 이 사료의 구분은 하느님의 이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기인한다. 이 두 가지 사료는 이스라엘 멸망후 예루살렘에서 제관들의 노력으로 하나의 사료로 합하여졌고 이를 JE(예호비스트 사료)라고 부른다.

 

신명기계 사료(D)는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 직전에(기원전 622) 성전에서 발견된 것으로 요시아의 종교개혁의 토대가 되었고 그 뒤 보완되어 야훼, 엘로힘계 사료와 합하여졌으며(JED), 대부분 법률로 구성된 제관계 전승(P)은 에제케엘이 기초를 놓았고 유배 중에 그 이후에 여러 제관들이 편집을 거쳐 에즈라가 선포한 것이다. 이 제관계 문헌은 유배이후에 다른 사료와 합하여졌고(JEDP), 이것이 오늘날의 모세오경의 형성 과정이다.

 

이들 전승들의 집성연대와 장소는 다음과 같다.

J(야훼계 전승)

950

헤브론, 예루살렘

E(엘로힘계 전승)

850-721

사마리아, 세켐

JE(야훼, 엘로힘 전승)

800-700

예루살렘

D(신명기계 전승)

700-600

예루살렘, 바빌론

P(제관계 전승)

600-500

바빌론, 예루살렘

오경의 통합 완성

450-400

예루살렘

5. 전승들의 신학과 역사관

 

1) J계 사료

이름과 문제

이름은 야훼로 사용함. 문체는 Anthropo morpism(신인 동형론). 야훼스트는 설화적이고 단순소박한 표현을 쓰며 인간의 긴장과 심리묘사를 잘함. 또한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식으로 설명. 이는 하느님의 내재성과 직접적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등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창세기 27절에 숨을 불어 넣으셨다.”, 716절에 방주의 문을 닫아주셨다.”는 표현에서 드러난 야훼스트의 의도는 보아라 하느님은 얼마나 우리에게 다정하시고 가까우신 분인가? 하느님은 우리의 죄악을 벌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신이시다는 관점임.

 

신학과 역사관

하느님께서 인간과 관계하시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이 하느님의 역사하심의 장()이다는 주장.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비윤리적인 상황, 실패, 잘못, 죄악 등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제반 상황을 이용하시어 인간 구원의 역사를 끊이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역사관과 신학을 가지고 있다. 또한 J계 문헌에서는 인간의 윤리적 잘못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사라의 겁탈문제(12,10이하)를 보면 사라는 몸을 더럽히고 아브라함은 그 덕분에 대접을 받고 돈도 받는 등,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상황의 이야기도 별로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E계 사료(20,2 이하)를 보면 같은 사건인데도 윤리를 강조하는 노선의 특성을 볼 수 있다.

 

3절에서 18절까지의 내용이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몸을 더럽혔다는 사실을 기정 사실화 할 수 없기에 몸을 더럽히기 바로 전에 구출되었고 왕은 오히려 돈까지 주면서 사라가 결백하다고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노선이 J계 신학과 역사관의 특성이다. 또한 J계는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고 영혼과 육신의 구분도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J계 신학은 현대신학조류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2) E계 사료

이름과 문체

하느님의 이름을 주님혹은 하느님으로 표기한다. 이들의 문체는 J계처럼 신인동형론을 거부하고 초월자이신 하느님을 제시한다. 그래서 그 중재자로 천사와 꿈 이야기들을 사용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계시를 직접 만날 수 없고 중재자를 통해서 만나는데 꿈조차도 특별한 능력자의 해석이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21,5; 22,1; 31,1; 37,1; 31,24; 28,2 등등에 나타난 천사, 꿈 등 참조) 그러므로 E계에게는 전능하신 하느님, 초원자이신 하느님, 두려움과 경외심의 하느님인 것이다.

 

신학과 역사관

이스라엘 종교를 윤리적인 종교로 끌어올린 이들은 예언자들이었다.

() 요셉이 에집트로 팔려가는 사건에 있어서 J계는 형들이 요셉을 팔아먹는 것으로 묘사(37,28b)하는데 E계는 12족장의 선조들이 자기 동생을 어떻게 팔아먹을 수 있는가 하여 미디안 상인들이 구덩이의 요셉을 꺼내어 갔다(37,28a; 37,29이하)고 미화한다. 이점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

 

예언자들의 가장 중요한 사상은 윤리, 도덕이었는데 초월자이자 두려움의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예언자는 인간편의 말을 하느님께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예언자 시대의 신학과 역사관이 들어 있다. E계 사료 중에는 예언자 시대 훨씬 이전 인물인 아브라함을 예언자라고 말하고(20,7) 있고, 특히 모세도 예언자라고 하며,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민수 11,29)는 표현이 있다.

 

결국 E문헌은 예언자들이 강하게 활동하던 지역과 시기에 나왔고 예언자들의 신학과 역사관을 강하게 표현하는 문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EJ의 보충자료가 아니고 독립적 문헌이다. 특별히 E는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에 엄격하였는데 그 이유는 BC 9-8세기에 가나안 종교와 이스라엘 종교의 혼합주의와 형식주의가 팽배하였으므로 야훼 신앙을 살리기 위해서였다(1열왕 18,20-45 참조)

 

3) 신명기계 사료(D)

이름과 문체

Deutro(두 번째)+nomy() 이라는 말임. 즉 제2법전으로 해석됨. 그러나 출애굽 법전 뒤에 또 법을 주신 제2법전이 아니라 실제로는 율법을 복사한 것이다. 문체의 특징으로는 다른 사료의 성구는 하느님이 직접 인간에게 당신 말씀을 건네시지만 D에서는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서 백성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특색이다.

 

신명기 문체의 특징은 소위 쉐마 이스라엘이라는 신명기 65절에 요약되어 있다. 너 이스라엘은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아울러 하느님의 이름이 거기에 거하시도록 야훼께서 선택하신 곳이라는 상투어가 계속되므로 이런 문체의 특징에서 그들의 중심 신학이자 역사관임을 알 수 있다.

2열왕 22-23장과 2역대 34-35장에 나오는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의 내용이 신명기의 내용과 같다. 이를 근거로 요시아 왕이 성전을 보수하면서 찾아낸 것은 신명기 법전임을 알 수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신명기와 비교하여 보면 신명기의 신학과 역사관을 알 수 있다.

 

신학과 역사관

D의 신학중 중요한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 앞에 하나의 민족이라는 선민사상과 예루살렘 경신례의 중앙집중화이다. 신명기 이전에는 여러 곳에 성소가 있었고 제단의 복수성이 인정되었으나 요시아 왕은 지방 성소를 제거하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전례의 중앙집중화를 꾀하였다. 신명 12,162열왕 23,5-9는 병행구로서 야훼께서 당신 이름이 거하시도록 선택하신 곳이 예루살렘이라함. 또 다른 곳에는 이교도의 종교혼합주의를 단죄하고 제거하는데 2열왕23,4-11과 신명 17,2 이하도 병행구로 이를 증명하고 있고 가나안의 제의식은 농경문화민족의 제의식이었기에 풍요 다산을 비는 의식이었고 신전에서도 창녀와 창남이 있어 제관과 교접의식을 하는 등 성전의 매음이 인정되었으나 야훼 신앙은 이를 단죄하고 성전을 정화하였다.

 

이에 대한 성서는 2열왕 23,7과 신명 23,18 이하를 보면 나타난다. 신명기를 분석해 보면 어떤 때는 1인칭으로 서술, 어떤 때는 2인칭으로 서술하고 있고, 문학비평양식으로 보면 여러 가지의 중복, 단절, 상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구한 세월을 거처 여러 가지 전승이 수집되고 이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설명해 주는 교리교수 형식을 이용한 성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계약의 법전, 신명기와 출애굽기의 율법을 비교해 보면 차이점이 많은데 이는 편집자와 저자들이 서로 다른 신학적 견해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므로 유사점이 있으면서도 틀리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신명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전승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신명기계 사료는 대부분 신명기 안에 있다.

 

신명기서는 북부왕국에서 신명기학파의 독특한 신학적 관점에서 수집 편찬되었는데 북왕국 멸망후 남부 유다로 넘어 왔으나 유다의 신학에 적응되지 않은 채 성전에 보관되어 묵혀지고 있다가 621년 성전 재건축과 성전 정화 때 발견되어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의 지침서 역할을 하였다. 그 이후 남부 유다에 있던 전승들이 수집되어 보완되고 오늘날의 우리 손에 있는 신명기로 편찬되었다고 보고 있다.

 

4) 제관계 사료(P)

이름과 문체

P문헌은 모세오경 전체에 골고루 산재해 있다. P의 문체는 비교적 한결 같은 어휘로 장엄한 표현과 족보, 연대, 숙자들을 관심 있게 적고 있다. 특히 P문헌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전례(경신례의 제의식)이며 이와 관계된 여러 가지 의식, 제도 등 특히 사제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오경 중에 P계 사료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은 아담에서부터 모세의 죽음까지를 여러 개의 section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그 분수령은 서두에 이것은 ……의 계보이다.”라는 표현이다.

 

2,4 ‘순서라고 번역됨. 원어는 계보(이 부분만은 뒤에 있다).

5,1 - 아담의 족보 6,1 - 노아의 족보

10,1 - 노아 아들들 족보 11,7 - 셈의 족보

11,27 - 테라의 족보 25,25 - 이스마엘의 족보

25,19 - 이사악의 족보 39,1-9 - 에사오의 족보

37,2 - 야곱의 족보 민수 3,1 - 아론, 모세의 족보

 

P는 계보를 사용했을까? 이유는 그들이 관심 있는 부분은 설화체의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관심이 없는 부분은 족보를 나열하여 세월을 좁히고 있다. 이는 오랜 세월의 등장인물을 모두 자세히 적을 수 없다는 관점과 그들의 신학과 관심에 별 연관이 없는 것은 족보만을 써서 몇 백년의 시간을 단축한 것이고 전례에 관계된 것은 자세히 적고 있는 것이다. 일례를 든다면 창조에 대한 것은 자세히 적고 특별히 안식일에 대한 것은 자세히 적고 아담에서 노아까지는 간단히 적고 또 노아의 홍수는 자세히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창조와 안식일을 중요시 한 것을 보면 P계의 안식일관을 알 수 있다. 이런 흐름을 보면 P계는 제사, 사제직, 전례 의식들에 큰 관심을 보임을 알 수 있다.

신학과 역사관

하느님이 자기를 계시할 때는 하느님의 영광만이 계시되며 인간은 하느님을 직접 바라볼 수 없고 그 중재자인 모세(사제들, 제관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봄. 절대 초월자인신 하느님을 흠숭하여야 한다는 셈임. 이들은 안식일, 음식예법, 할례를 강조하고 있다.

안식일의 언급을 창조설화에까지 넣었고 출애굽 때 만나도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았다고, 기술 마지막 시나이산에서 계약으로 의무지웠다고 함. 이러한 세 가지를 강조한 이유는 이방세계에 동화되기 쉬운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예루살렘 귀환에의 꿈을 버리지 않고 민족적인 Identity를 지켜 가게 하려는 의도에서 였다고 본다.

 

그러므로 제관계 문헌은 이방세계에서 종속적 운명을 살 때, 즉 바빌론 유배 때에 수집되고 정리되어 완성되었음을 알려준다. P계는 영혼과 육신을 나누지 않고 있고 구원도 전인적인 구원을 말한다. 구약 전체에 철저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러한 사상은 P의 신학에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다윗왕 시대에 만들어진 이스라엘의 국가신학은 하느님께서 다윗왕조와 계약을 맺고 그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당신의 거처로 정하셨다는 것이었는데 P는 이스라엘의 국가신학을 의심하는 것은 큰 죄라고 말한다. BC 587년 이방민족 바빌론의 침입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남의 나라 땅에 잡혀온 이스라엘인들이 하느님께 투덜거리고 푸념하는 일이 많아지자 제관계 기자는 P문헌에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며 옛날 사막에서 출애굽할 때 하느님을 의심하고 투덜댄 자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하느님께 깊은 신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약속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의도로 수집되고 편집된 것이 많은데 민수기 14장이 대표적이다. P계 문헌인 이 부분은 이스라엘인들의 투덜거림 때문에 모세조차도 아론조차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못박고 있다. P계는 제일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어떤 부분은 JE보다 더 오래된 전승들을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고풍주의, 합리주의 등이 병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 론

 

지금까지 우리는 16세기 이후 시작된 성서 역사 비평 방법으로 모세오경의 형성사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모세오경을 이루고 있는 4가지 원천사료들(J, E. D. P)의 내용과 그 수집 정리과정들을 살펴보았고 어떻게 오늘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로 발전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가장 오래된, 수집된 전승들은 BC 20-9세기경의 J전승으로 남부 유다에서 정리되었고, 두 번째 원천은 북부 이스라엘에서 8세기경에 수집 정리된 E원천으로 721년 북부 이스라엘이 패망하자 남부 유다로 내려와서 남부에서 수집 정리된 J원전과 합쳐졌고 소위 JE로 표시되는 예호비스트 원천으로 편집되었으며 D문헌도 8세기 초엽, 북부 이스라엘에서 수집되었고 721년 북부 이스라엘이 패망하자 남부 유다로 내려왔는데 그때 남부 유다와는 D문헌의 신학사조와 시대상황이 다르므로 빛을 보지 못한 체 성전에 오랫동안 묻혀져 있다가 약 7세기경 요시아 왕의 치하 때 발견되어 다른 여러 가지 보충자료들과 만나게 되고 편집되어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의 모체가 되었다고 알았다.

 

P문헌은 587-539년까지의 유배기간 P계의 설화(Pg)들이 수집정리 되었고, 458년에 에즈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유다로 가져 왔는데 그 뒤 법률 자료들인 P계의 법률(Ps)들이 첨가되어 새로운 유다 공동체의 사회개혁과 종교개혁에 기초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약 400년경 예루살렘의 제관이었던 마지막 편집자가 J. E. D. P를 전부 합쳐서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하나의 문학총서로서의 모세오경을 만들었다. 그런데 마지막 편집자가 제관계 인물이었던 탓에 전체 모세오경이 제관계의 틀 속에 즉 P의 틀 속에 JED를 넣어 편집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5 강의 본 문 주 석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가지의 전승들이 잘 융합되어 있는 창세기 1-11장의 태고사 부분을 주석해 보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학적 반성과 숙고가 어떠했나를 알 수 잇는 중요한 배움의 기회이다. 여기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1. H. 까젤, 서인석, 모세의 율법, 성바오로 출판사, 1980.

2. R. 코흐, 장익, 구원 신학, 분도 출판사, 1980.

3. C. F. 화이틀리, 안성림,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독창성, 분도 출판사, 1981.

4. P. 엘리슨, 김윤주, 성경의 세계, 모세오경, 분도 출판사, 1979.

5. G. 폰 라트, 허혁, 구약성서 신학,,분도 출판사, 1979.

????????????????????????????????????????????????????????????????????????????????????창세기 11-24절의 창조설화 주석

 

창세기의 첫 부분인 이곳은 소위 태고사라는 표제로 불린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구의 역사와 인류의 기원 등에 관한 흥미 잇는 자료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서의 태고사는 물리학이나 생물학 또는 지질학의 보고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창조 때부터 아브라함의 등장 시기인 기원전 185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위 이스라엘인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의문 사항에 대하여 그들의 소박한 우주론에 입각한 신앙적이고도 신학적인 해답이며, 결코 과학적, 철학적, 논리적 해답이 아닌 것이다.

 

이 부분은 제관계 사료(P)인데 상당히 논리적 체계를 가지고 치밀하고 조직적인 구조를 가진 문장이다.

완성(인간 창조)

?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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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5b 8b 13 ? 19 23 31 2,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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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Α) ? 완성(Ω)

(시간의 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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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절 창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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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절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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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 11: 총괄제목, 12: 창조 이전

그림 설명

수평 구조

처음에 서술되는 태초에라는 단어로 가로시간을 구분하였다. 마지막 날이 시간의 흐름에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강조하고자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은 세 번이나 강조되었다. 이로써 일곱째 날은 우주 창조의 정점으로 소개되고 있다. 또한 안식일을 강조하고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는표현을 생략하였고 이 창조사건은 끝난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또 창조설화는 이스라엘의 시간개념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하루는 전통적으로 해떨어질 때부터 그 다음날 해떨어질 때까지이다. 안식일의 어원은 이렇게 마지막날을 쉬었다라는 뜻의 ???(shabbat)라는 말에서 안식일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P계는 태초부터 마지막날까지 이러한 시간 개념 속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창조설화에 이 시간 개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당시 중근동에 유행했던 다른 창조 이야기는 신화속에 진행된 것이었다. 그런데 신화에는 기간의 개념이 없다. 신화에는 오직 순환의 개념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고대인의 사고방식에서 해를 보면 해는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지만 그 다음 어제 저녁때 진 해가 다시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초목도 죽은 줄 알았지만 그 다음 해 봄에 다시 파랗게 살아나고, 계절도 순환하고 ……하여 모든 것이 순환의 연속으로 보았다. 순환의 개념과는 다르게 시간의 개념은 직선 개념이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시간인 것이다. 이처럼 성서의 창조설화 중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일곱째 날 등의 시간 개념은 신화의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절대 신의 창조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수직구조

혼돈 상태에서 창조의 정점인 인간 창조까지를 말한다. 무질서인 혼돈에서 안전 질서인 인간 창조까지를 말하면서 창조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직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히브리말로 창조를 뜻하는 א??(bara)이다. 이 단어 역시 마지막 인간 창조때에는 세 번이나 쓰였다. 수평구조에서 일곱째날이 세 번 강조된 것과 같은 이유이다. 이로서 P계는 창조 전체를 총괄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창조의 도식은 말씀하시고’, ‘그대로 되고’, ‘보시니 좋았다라는 조직적인 규칙 아래의 도식이다.

 

P는 창조 설화에서도 특별한 신학을 담았다. 즉 다른 피조물을 만들 때는 א??(bara)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생명이 있는 피조물을 만들 때에만 א??(bara)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생명 창조가 하느님의 의도적 작업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P 문헌이 갖고 있는 우주관 및 신화적 배경

성서의 제관계 창조설화에 영향을 미친 것은 바빌론의 창조신화인 enuma elisha이다. 그 내용을 보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을 때 Tiamat(혼돈의 물의 여신)Absou라는 남자 신과 결혼하여 많은 신들을 낳았는데 Marduk이라는 신이 Tiamat을 죽이고 그 시체를 두 쪽으로 나누어 한 쪽은 하늘에 걸어 두고 나머지 한 쪽은 육지를 만든 후 세계의 질서를 세운 후 바빌론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Tiamat을 히브리말로 보면 Tehom인데 이는 깊은 물, 궁창, 혼돈 등의 뜻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혼돈의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은 바로 이 탓이다.

enuma elisha는 문학 양식 사적으로 신화이다.

 

P계 창조설화는 문학 양식 사적으로 신화가 아니다.

신화란 어원상 신들의 이야기로서 다신론적 배경을 갖는다. 그러나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은 이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고 아주 엄격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엮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교도의 신화를 이용한다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보았다. 이처럼 신화를 비신화화 하여 창조설화의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바빌론 유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친숙해 있던 바빌론의 신화를 이용하여 즉 수단으로 빌려서 신화를 부정하는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부여하고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주 석

 

첫째날

 

11

11절의 주석에 어려움이 있다. 1절과 2절을 관찰해 보면 창조했는데도 모습을 갖추지 않은 혼돈을 말한다. 즉 창조 혼돈의 모순 구조이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혼돈이란 말인가? 창조의 반대가 혼돈인데!

근래의 일부 성서학자들은 1절이 종속적이고 2절이 주절이라고 말한다. 성서의 밑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것을 참조할 것. 즉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그때 땅은 혼돈 상태였다는 것이다. 즉 혼돈상태때부터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히브리 언어에는 merism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상반되는 두 개념을 동시에 쓰는 어법으로 그 안에 모든 것을 포함시키는 어법이다. 이 개념대로 라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늘과 땅안의 모든 것, 우주 전체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며 따라서 11절은 전체 창조 설화의 제목이자 총론으로 말할 수 있다. 12절부터 창조의 각론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P계의 저자들은 신화적 요소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고, 구조 자체에도 굉장히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성서 말씀은 한점 한 획도 없애지 않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성서의 한 점 한 획에도 하느님의 특별한 의도가 있다고 믿었던 것을 반증한다.

 

11절부터 24a까지 약 35개의 구성 문구가 있는데 이 모든 문구의 주어가 하느님이다. 즉 창조의 주재자,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한 처음에(태초에)라는 언어는 직선적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사 46,10; 48,12에도 동일한 의미로 쓰였고 P의 신관에서 볼 때 우주 역사의 시작 마침이 하느님에게 달렸다는 신앙을 담고 있는 것이다. 잠언 8,22; 요한 1,1도 같은 의미이다.

 

창조, 고대 중근동의 언어권에서 창조의 개념을 나타낸 언어를 보면 이집트는 iry, 아랍은 banu등인데 이 뜻은 짖다. 만들다. 날다(생산하다). 분리하다. 나누다 등으로 쓰였다. 구약에서 창조라는 단어는 49회 쓰였는데 모두가 하느님이 주어이고, 또 창조라는 단어가 쓰일 땐 물질적 목적이 동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중간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출설로 만들어진 바빌론의 enuma elisha와는 완전히 다른 전개 방법으로 철저히 비신화화 하였고 유일한 창조자로서의 하느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창조라는 단어가 쓰인 경우를 살펴보면

2이사야서 40-55장에 17: 유배 중 유배자를 위로하기 위해 쓰인 책

창세기 P계 문헌에서 10: 유배지에서 수집 정리된 책.

3이사야서 55장이하에 3: 귀환하는 유대 공동체의 글.

에제키엘서에서 3: 유배시기에 활동하던 예언자.

말라기에서 1: 유배시기에 활동하던 예언자.

기타의 여러 곳에 쓰였지만 모두가 유배와 관계가 있다. ‘창조라는 단어는 모두가 유배 때나 그후 수집 정리된 문헌에서만 볼 수 있는 점으로 미루어 창조신으로서의 하느님의 권위와 영광을 위해 이 단어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땅을 설명하는 단어는 ??? וּה?(토흐 봐 보흐), ???는 공허, וּה?는 무형을 뜻한다. 즉 어둡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 물과 같은 상태. P의 사고에 의하면 죽음과 허무의

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의 단어가 이것이었다. P에게는 또한 물이 위협적인 두려움의 , 죽음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를 근거로 P는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의 홍수를 경험한 사람들의 삶의 자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J에게는 물이 생명의 원천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로써 J는 물이 귀한 팔레스티나 지방의 삶의 자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깊은 물 םוֹ??(테흠 = 바빌론의 Tiamat) “깊은 물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여기의 기운루와하라고 하는데 이는 바람, 숨결, , 기운 등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공동번역에서 기운으로 번역되었으나 나의 성서주석적 견해로는 실제 P계는 바람이라는 의미를 사용했다고 본다. 다니엘 7,2에는 이 부분을 주석할 수 있는 단서가 들어 있다. 다니 7,2하느님의 바람이라는 문구가 있고, 실제로 이 문구는 출애굽 때 길을 내주고, 바람은 물과 육지를 분리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이다.

 

13-5

첫날 첫 번째 창조사업은 이었다. 성서에서 빛은 생명을 주는 것(요한 1,4)이고 진리를 밝혀 주고(2고린 4,6) 인간의 마음을 밝혀 주고(집회 11,7), 대단히 순수한 것(1요한 1,5-7)으로 소개된다. 첫 번째 창조가 빛인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혼돈에서 질서를 찾은 것으로 말할 수 있다. 혼돈은 어두움이다. 어두움은 빛 앞에서 밀려 버릴 수밖에 없고 빛 전체의 발광체에서 찾고 있다.

물론 고대 중근동에서도 그러했는데 당시는 점성술이 발달했었고 천체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P계 저자는 세상에 빛을 창조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하여 천체가 생기기 전에 하느님이 빛을 창조했다고 말하면서 혼돈을 질서로 바꾸어 놓은 후 이라는 이름을 준다.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내가 너의 지배자이다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그런데 P계는 하느님께서 빛만을 보시기 좋다고 하시어 어두움인 밤은 출신 성분이 나쁜 것으로 말한다 (P계 신학을 참조하면 이해할 수 있다.).

 

둘째날

16-8 : 이날은 궁창을 만드신 날이다. 히브리인들의 궁창 개념은 두드려서 만든 넓은 반구형의 그릇과 같은 개념이다. 궁창 창조에는 보시니 좋더라는 말이 빠져 있다.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우주관을 참조하면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창조라는 단어는 만드셨다’(행위의 창조)말씀하시자 생겼다’(말씀의 창조)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결국 고대 전승에 창조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는데 P계에 의하여 하나로 융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중 만드셨다는 것이 더 오래된 전승임을 알 수 있다.

 

셋째날

19-10

이날은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날이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원래 물은 혼돈의 세력의 표상인데 육지는 혼돈의 세계에 떠있는 셈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궁창으로 받쳐주시고 보존해 주시는 등으로 섭리하신다는 구체적인 뜻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한순간이라도 궁창을 받쳐주시지 않으면 윗물이 육지를 덮고 다시금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예로 창세기 7장 홍수의 예를 보자 P계의 홍수 이야기는 땅에서 물이 속고 바닷물이 밀려오고 하늘에서 물이 떨어져 그야말로 혼돈의 극을 말하는데 J계의 홍수 이야기는 글자 그대로 비가 많이 와서 넘치는 홍수일 뿐이다. 셋째날은 둘째날 시작하신 창조사업이 마무리 된 것으로 소개된다.

히브리적 사유에 의하면 시 24,2; 136,6; 출애 20,4 등에 바다 밑에 기둥을 박고 땅을 든든히 하셨다는 표현대로 이 땅은 주께서 궁창을 통하여 윗물을 막아 주시고 땅밑에 기둥을 박아 육지를 받혀 주시고 지탱해 주시므로 결국 하느님은 창조주, 구원자, 섭리자라는 개념이 셋째날의 창조사업에 들어 있는 것이다.

 

111-13

이날은 식물을 창조하신 날이다. 그러니까 두 가지 일을 하신 것이다. 잘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대상은 땅이다. P가 이렇게 쓴 것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땅()=어머니(母性)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계 기자는 땅이 어머니라는 당시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여 저술하면서도 가나안 신앙의 우상숭배를 없애려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가나안 신앙에 의하면, 땅의 신인 아쉬타트 여신과 하늘의 신인 바알신이 결혼하여 자식처럼 생겨나는 것이 곡식이다.

 

그래서 땅의 신 아쉬타트와 하늘신인 바알신의 결합을 상징하는 예식이 신전에서 늘 거행되었고, 신전에서는 땅을 상징하는 여사제나 창녀가 하늘을 상징하는 남사제나 찾아온 남자와 동침하여 성행위를 하였고 이것이 풍요다산을 비는 행위로 치부되었기에 성적 문란이 심했었다. P계 기자는 이런 우상숭배의 피해를 없애려고 땅도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곡식을 내는 것이지 땅 자체가 곡식을 내는 것은 아니라고 꼬집은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과정에서 원래 유목민 출신인 그들이 농사에 서툴고 수확이 적자 농사일에 능숙한 가나안의 신앙을 배우려 한 흔적이 많았기에 이런 창조과정의 문구를 만든 것이다. 결국 P는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던 땅의 신성을 배제하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날

114-19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신 날. 히브리 성서에서는 큰 등, 작은 등으로 표시하고 있다. 공동번역에서는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라고 되어 있지만 성서 원문은 밤과 낮, 절기와 해를 다스리라고 되어 있다. 해와 달과 별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절기와 해()뿐이다. 그들은 생명체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고대 근동에는 별리 신격화되어 있어서 시간, 절기뿐만 아니라 생명체도 인간도 다스린다고 생각했는데 성서 저자는 천체가 다스릴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정해주고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별 숭배의 잘못을 없애려 한 것이다. 31,26; 2 열왕 23,11; 이사 47,13 등 참조.

 

다섯째날

120-23

이날은 생명체를 창조하신 날이다. 물고기와 날짐승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생명있는 창조이므로 א??(bara)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 공동번역에서는 א??(bara)지어내셨다라고 번역하였다. א??(bara)가 쓰인 곳에는 P계가 좋아하는 축복의 말씀이 쓰인다. ‘낳고, 번성하고, 가득 채워라라는 이 말은 P계가 갖고 있는 신학적 견해를 보여주는 말이다. 결국 창조는 축복이 동반된 행위이다. 또 축복의 내용은 생식의 능력을 받아 스스로 생명을 후대에 줄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

21-22절에 바다동물(큰고기)은 원어에는 바다괴물이란 표현인데 어떤 물고기를 뜻하는지 잘 모른다. 어떤 학자들은 욥 41장의 레비아탄이 아닐까라고 말하고 있다.

 

여섯째날

124-25

동물을 창조하신 때에는 땅에 명령하여 간접 창조를 하신다. 땅의 모성적인 참여를 통하여 간접 창조를 한 탓에 א??(bara)가 없고 축복의 말씀도 없다.

 

126-28

PJ는 인간 창조에 대해서 각자 다른 관점에서 묘사한다. P는 인간 창조가 세상 창조의 절정이라고 설명하는데 반하여 J는 인간이 제일 먼저 창조되고 다른 피조물을 나중에 창조하여 인간을 만물의 중심에 놓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설화는 신학적으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우리모습대로…… 만들자

여기의 우리가 문제성 있는 문구이다. 우리라는 복수를 쓴 이유를 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는 삼위일체를 말한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삼위일체의 개념이 없었다.

천상궁전 어전회의의 결정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히브리 문법상 뜻은 단수이면서 형태는 복수를 쓰는 경우가 있다는 의견.

숙고복수이다(인간이 우주의 정점이므로 대단히 숙고한 뒤의 결정이므로 복수 표현).

우리라고 쓰지만 개인의 의견을 복수로 쓰는 경우는 많다는 의견.

결과 - 의 경우 당시에는 삼위일체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해당되지 않는다.

의 경우 이사 6, 에제 1-2장 등에 소개된 천상궁전에서 회의 때 천사를 엘로힘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다신론적인 모습이므로 해당되지 않는다. 결국 가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닮은

닮다는 라틴어 성서 표현은 imago(모상, 모습), similitudo(유사하다)인데 이 두 개념이 모두 쓰인 말이다. 히브리 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salemdemut로 창조했다한다. salem은 모상, 모양, 그림자. demut는 용모, 유사성, 유비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는 이 두 개념을 함께 써서 서로 보완하며 강화시키고 있다.

 

그림자라는 의미로도 많이 쓰였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후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salemdemut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그림자인 하느님의 지상대리자라는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신의 그림자라는 사상이 있었는데, 성서는 인간은 모두가 하느님의 그림자라는 사상을 펼친다.

 

이런 사상의 배경에는 P가 유배지에서 바빌론 왕에게 굴복하고 핍박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인간 창조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다는 점.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고대 근동의 가르침도 실상 성서에서의 가르침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하느님의 그림자이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같은 인간인 이웃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라는 심오한 가르침이 이미 창세기의 한 단어에도 들어있는 것이다.

 

127성별도 하느님의 창조물

고대 근동에서는 성을 신성시하여 사제와 신전 창녀와의 의식적 성교를 중요시하였고,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는 자웅 동체 신화가 있었는데 이런 모든 것을 P는 거부하고 인간의 생식 능력과 성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시어 선물하신 것으로 강조한다.

 

128축복

낳고 번성하고 가득 채우라는 통상문구에 인간 창조에서는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구가 첨가된다. 이유는 P계 자체가 유배자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려고 수집, 정리된 것이기 때문이며 당시의 유배자들은 ’,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이 컸었다. 또한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등의 어휘에는 출애굽의 -약속과 - 유배자들의 잃어버린 본토 회복을 암시한다. 이런 이유에서 P계는 성서 전체에서 정복, 통치 등을 강조하는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

 

129-30채식

P가 채식을 위주로 말하는 것은 최초 창조시 하느님이 의도했던 낙원을 이상향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죽이고 죽는 일이 없는 동물의 왕국 내에도 피를 흘리는 투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를 원하기 때문이다.

 

131비준

하느님께서는 비준의 말씀과 함께 매우’ ‘보시기 좋더라는 표현, 히브리 문법상 최상급을 사용하였다. P계가 최상급의 표현은 매우 자제하는데도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인간 창조가 창조의 정점이기 때문이며 때문에 대단히 좋게 보시고 감탄하신 것으로 묘사했다. 당시 유배를 당했던 이스라엘인들의 실존상황은 고통, 좌절, 부조리, 실망 등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좋더라, 좋더라는 표현이 안 어울릴 수 있으나 최종 편집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적 창조의 새질서와 인간실존 사이에 있는 크고 넓은 심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P기자는 하느님은 착하시고 좋은신 분이다는 관점에서 인간 실존의 심연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는 인간의 범죄 탓이라는 논리를 창세기 3장부터 전개한다.

 

21-3쉬셨다

쉬셨다라는 히브리 성서 원어는 תבש(샤바트)로서 안식일이라는 말과 같이 쓰이고 있다. 히브리적 사유로서 성서의 은 완성을 뜻한다. 세상은 하느님으로 인하여 완성된 것이며 결코 미완성 교향곡이 아니다. ‘은 일을 하지 않는 이 아니라 완성과 성취인 것이다. 또한 이 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쉼인 것이다. RE+CREATIO

 

거룩하게 하시고 축복하셨다.’

P는 안식일을 창조 때부터 제정하신 것으로 암시한다. 물론 창세기에 안식일에 쉬라는 강제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P기자는 창세기에 이렇게 암시하고 난 후 출애굽에서 만나 사건으로 안식일의 의미를 부여한 뒤 시나이 사건에서 의무화시킨 것이다. 또한 다른 날에는 밤이 되고 …… 아침이 되고가 있는데 안식일에는 그런 표현이 없다. 이것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하느님의 재창조를 찬미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또한 안식일의 영원함도 의미한다.

 

24a ‘순서는

P기자의 창조 설화의 마지막 절은 תוֹד?וֹת(톨레트)인데 이 말은 영어의 족보, 계보와 같은 말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P는 역사를 단축시킬 때 족보를 쓴다고 했는데, 그럴 때 머리말로 쓰는 말이며 문단을 가를 때 쓰는 문구가 족보인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문단의 마지막에 삽입하는 종결수법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고대 중근동에서 족보에는 여자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성서에는 여자가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11, 2223, 민수 2623, 271-11절 등.

하늘과 땅의 족보를 말하는 이유는 세상이 타락, 죄악, 모순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나 하느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는 매우 좋았다는 것을 밝히고 따라서 창조의 원모습을 찾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를 묵상하라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께 속하며 하느님이 절대적 주인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P계 문헌의 창조설화의 결론

성서의 창조설화는 신화가 아니고 수세기에 걸친 신앙의 반성과 체험에 의해 손질된 것이며 고대 근동의 우주 신화와는 전혀 다른 철저한 비신화화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이스라엘의 신앙임을 알았다. 또한 그 신앙의 뿌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온 BC 2,000년경으로 볼 수 있다.

 

오랜 역사 속에 구전되고 필사된 이것을 P는 바빌론 유배시에 정리한 것이다. 말씀에 의한 창조와 행위에 의한 창조를 살펴볼 경우, 최종 편찬자에 의해 합쳐진 것을 알 수 있고, 3일과 6일에 두 가지를 창조하신 것은 P기자가 안식일 신학을 넣기 위해 개작했음을 알 수 있다. P기자는 당시의 우주관, 신화적 자연지식 등을 바탕으로 위대한 신앙의 선언을 한 것이고, P계의 창조설화는 이스라엘의 독창적 신앙의 표현으로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한 것이다.

 

6 강의 J계 창조설화 주석(구원신학 참조)

 

24b-324절까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J계 창조설화는 인간의 기원에 관한 기사가 아니다. J계 기자는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고통, 비극이 선하신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하는 원인론(etiology)적인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신학적인 해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창조설화도 P계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관점에서 따질만한 것이 아니다.

J계에서 선정한 문학적인 모델은 고대 근동의 Atrahasis이다. 그 내용은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신들의 노동을 대신해 줄 존재가 필요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화이다. 그리고 Atrahasis에서는 인간의 반역에 신들이 홍수를 내어 인간이 몰락했음을 말한다. 그러나 J기자는 하느님이 당신의 넘치는 선,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홍수에도 배를 만들어 그 홍수를 피하도록 하셨으며 사람들이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는 스토리를 전개한다. P계가 enuma elisha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J계는 Atrahasis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다.

 

J계 창조설화의 문학상의 문제점

J계는 문학상 통일성이 결여된 곳이 많다. 중복, 단절, 상층의 문구가 많다. 그 이유로는 전승사적으로 독립된 여러 가지 자료들이 모여졌고, 편집자는 이들 모두를 결합시키고 편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28b. 15a. : 인간을 에덴 동산에 들여보냄.

29b. 33: 동산 한가운데 나무, 생명나무, 선악나무.

217: 선악을 아는 나무가 동산 한가운데 나무라는 명시가 없다.

310-14: 동산 가운데 4개의 강 이야기. 이걸 빼면 연결이 잘 되는 글.

그렇다면 강 이야기는 원래 창조설화에 없었던 것이 후에 삽입되었다는 말.

 

본문주석

 

24b.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P에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P기자에게는 하늘과 땅은 merism적 표현으로 우주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나 J의 표현은 이와는 다른 신학이 있다. 성서에서 땅은 הםדא(아담아)으로 표현되며 인간은 םדא(아담)으로 표현된다. 하느님께서 처음에 땅을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과 땅과 존재론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에제 1,2,3장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의 히브리말은 벤 아담이다. 이 말은 사람의 아들로도 번역할 수 있고, 땅의 아들로도 번역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J기자는 인간 생활의 터전, 인간의 활동 무대인 땅을 중심으로 창조가 전개됨을 말하는 것이다.

 

25절 이하(구원신학 48페이지 참조)

이 부분은 비록 부정적 어구로 시작되었지만 P계의 enuma elisha와 비슷한 구조도식을 갖는다. 땅에 아무것도 없었고, 물도 없었고, 졍작자도 없었다는 표현은 혼돈 그 자체이다. 6절에서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나자 7절에 인간을 진흙으로 만드셨다 한다. 인간을 진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의 기원이 진흙이라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어디에서 나왔다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처럼 유약하고 인생이 그처럼 무상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즉 인간 존재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표현도 주목하여야 한다. J기자는 생명을 숨으로 묘사했다. 우리는 숨이 멎으면 죽는다. 이 문구를 주목해 보면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숨결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순간순간마다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기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숨을 끊으시면 어떻게 될까?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숨은 끊어지고 우리는 죽고 마는 것이다. J기자는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한결같이 성실하게 지금도 숨을 계속 불어넣어 주신다고 믿고 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우리는 매 순간마다 생명을 연장시키시려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에 감사해야 하고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J기자의 의도이다. 22절에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기사는 여자의 기원에 대한 말이 아니다. 갈비는 인체의 중심이므로 여자는 본질에 있어 남자와 같은 존엄을 갖는다는 말이다. 즉 여자의 존재론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

 

J계 창조설화에 야훼 하느님?י??? ה?ה?(야훼 엘로힘)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5경의 최종 편집자가 엘로힘으로 불리는 하느님을 적으면서 야훼계열의 설화중 야훼라는 호칭을 버릴 수 없어 같이 쓴 것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이처럼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또한 동산을 관리하도록 하신다. ‘파라다이스란 말은 페르시아의 언어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의 본뜻은 농사를 질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생명나무 고대 근동 문헌을 보면 생명나무에 대한 언급이 많다(길가메쉬 서사시 등). 그러나 어느 신화에서도 인간이 생명초를 소유했다는 언급은 없다. 인간이 생명초나 그 열매를 먹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은 죽은 존재라는 말이다. 특별한 것은 고대 문헌 모두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없다. 이것은 야훼계열의 기자의 독창적인 수법이다. 어쨌든 생명나무에 대한 언급은 인간이 죽을 목숨임을 원인론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로서 너희들의 목숨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자기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할 때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다른 신화에서처럼 생명초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 줄 것으로 믿는 것은 헛된 망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말라는 거도 이와 같은 의도에서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역할 이 부분은 인간이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다루기 위해서 언급한 것이다. 고대 근동 신화에는 선과 악의 개념이 없다. J기자의 독창적인 내용이다. 그러면 선악나무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에게 도덕, 윤리적인 판단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도덕과 윤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가 있었다면 이에 따른 처벌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흑자는 이런 말을 한다.

 

즉 선악을 모르는 사람이 선악을 아는 능력도 주시지 않고 처벌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를 잘 읽어보면 원조는 열매를 따먹기 이전에 이미 올바른 판단능력과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동산을 가꾼다던가,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던가, 또 여자를 만들어 주었을 때 자기의 반려자로 알아보았다던가 하는 것은 이미 존재와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선과 악의 판단능력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적인 지식 ע??(야다아)라는 이 말은 남녀의 성관계를 완만하게 표현한 말이다. 그 뜻은 알다.’, ‘이해하다.’이다. )마리아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라고 말한 대목이나, 창세 4,1. 17; 19,16; 1사무 1,19를 참조하면 이해할 수 있다. 성서 본문을 보면 아담이 에와를 알다, 혹은 누가 누구를 알아서 누구를 낳고하는 식의 표현이 있는데 ע??는 이처럼 성적인 관계를 갖은 사람 사이의 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에 동반되는 선악이란 성적인 지식의 고통과 기쁨 등을 표시한 것이라는 학자도 있다.

개신교의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는 인간의 원죄란 성적인 타락이라고 주장한다. 일례로 통일교에서는 에와가 아담 아닌 다른자와 동침을 한 것을 나무 열매를 따먹은 것으로 표현했으며,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것이 되었고 그래서 벌을 받게 되었으니 모든 신혼부부들은 문선명에게서 피갈음을 하여 하느님의 노여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서신학상 분명한 것은 선악을 아는 것모든 것을 다 안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즉 보편 지식을 갖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결국 이 구절은 남자가 여자를 맞이하는 결혼을 묘사하며, 더 나아가서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이성간의 욕구를 원인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범죄란 무엇인가? 시편 8편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하늘의 천사보다 못하게 만드시고 인간의 고유의 질서 속에 살도록 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교만한 마음은 하느님의 명령을 거슬려 창조질서를 거스른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죄라고 말한다.

 

알몸이면서 부끄러운 줄 몰랐다. 이 구절은 인간의 완전한 행복 상태를 말한다. 이 구절로 완전한 행복 상태를 표현했다는 것에서 의의가 깊은 말이다. 로마의 씩스틴 성당에 벽화를 그린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발가벗은 군중들의 심판모습을 그렸다.

나체로 그린 이유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란 심판을 받고자 천주 대전에 나선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발가벗은 모습일 수밖에 없다는 신학적 숙고에서 였다. 그는 감추고 숨길 것이 없는 본래의 보습을 예술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부끄러움이란 죄를 지은 상태로 마음의 밸런스를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따라서 낙원에서 최고로 행복한 상태, 떳떳한 마음 상태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 부끄러운 줄 몰랐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구절로 24절부터 25절까지의 낙원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31인간의 타락뱀은 고대 근동의 지혜문학에 자주 이용되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신흥종교에서는 일례로 박태선의 전도관, 문선명의 통일교 등에서는 뱀을 남성의 상징으로 본다. 그러므로 뱀이라는 다른 남성이 애와와 간음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근동문헌에서의 뱀은 지혜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할 때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해야 한다’(마태 10,16)고 하셨던 것이다. 또한 뱀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모세는 광야에서 구리 뱀을 만들어 사람들을 병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고대 근동에서는 뱀 숭배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께서도 당신을 구리뱀으로 표현하시어 높이 들려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셨다.

 

고대 근동 종교에서는 (특히 가나안 종교에서) 뱀이 생명과 풍요 다산을 상징했다. 또한 바빌론의 신화 enuma elisha에서도 등장 인물인 옴나디야가 생명초를 가지고 있을 때 뱀이 나타나 인간의 생명초를 빼앗아 가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자기들의 옛조상이 그 생명초를 빼앗겼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나 뱀은 영생한다고 믿었고 뱀을 생명, 지혜, 풍요 다산, 치유의 상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뱀을 성서에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성서는 하느님의 피조물 중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고 표현하여 뱀이 신도 아니고 영생하는 짐승도 아니고 그저 하느님의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피조물인 뱀을 하느님보다도 더 숭배한다면 너희가 바라는 생명, 지혜, 풍요, 치유를 얻을 수 없고 오히려 생명 대신 죽음을, 지혜 대신 수치를, 풍요 대신 노동의 고통을, 치유 대신 질병만을 얻을 뿐이라는 경고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후대의 이스라엘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에서조차 뱀을 숭배한 적이 있다. 2열왕 18,4를 보면 히즈키야가 성전 정화때 구리 뱀을 부순 예가 나온다. 성서는 그러한 잘못된 우상 숭배를 없애려고 원인론적인 차원에서 뱀이 피조물이라는 것, 뱀의 간교함을 말하여 뱀 숭배를 근절하려 한 것이다.

애와아 뱀의 대화이 대화는 범죄 이전의 상태이다. 뱀과 여자가 다정스런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은 현대인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이 대화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좋았을 때에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세계와의 관계도 좋았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와가 뱀의 말을 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실은 애와가 뱀과 하느님을 같은 등급에 놓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뱀의 질문 내용을 보면 매우 복선적이고 간교하다. , , 아니오라고 대답할 성질의 질문이 아니다. 뱀의 질문은 자기의 의견에로 끌어들이려는 쇄뇌교육적 유도 심문인 것이다. 또 사람을 약올려 판단력을 흐려 놓고 감정적인 대응을 하도록 이끄는 질문이다.

 

질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선하신 하느님을 잔인한 하느님으로, 인색한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뱀이 하는 말 중에 만지지도 말라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하느님이 하시지도 않은 말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뱀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잔인하고도 인색한 하느님 상을 심어 놓고 사랑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갈라놓으려는 의도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간교한 화술로 인하여 여자의 마음에 동요가 생김을 눈치챈 뱀은 여자를 꼬이기 시작한다. 그 다음으로 뱀이 말하는 내용은 고대 근동의 신관을 내포하고 있다. 고대 근동에서는 질투하는 신, 시기하는 신의 개념이 있었는데 뱀은 에와에게 너의 신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네가 잘될까 보아, 질투 때문에, 시기 때문에) 너에게 열매를 먹지 못하게 했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관에서 이런 관점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뱀은 여자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고 사라졌다. 사라진 이유는 일단 유혹을 한 후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여자의 탓이지 내 탓이 아니라는 뜻이다.

 

심경이 변화를 일으킨 여자는 뱀의 말대로 열매를 따먹었고 또 남편에게도 주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끄럼움을 알고 앞을 가리웠다. ‘가리웠다는 것은 알몸일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이 생겼다는 것이다. 또 말씀을 거역한 사실을 깨달아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생기고 죄의식을 느꼈다는 것이다. 아담과 에와는 이 죄의식 때문에 하느님이 두려워져 숨게 된다. 오늘날에도 죄인들은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춘다. 이는 관계를 단절시킨 이기적 욕심을 부끄러워하는 행위이다.

 

결국 뱀의 유혹은 성공하였고 뱀의 말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상상 밖이었다. 에와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말씀과 뱀의 말을 저울질하여 하느님 말씀보다 뱀의 말을 택한 것이다. 뱀의 말에 더 신뢰심을 가진 것이다. 이 말은 뱀을 하느님보다 더 믿었다는 뜻이다. 에와가 지은 소위 죄란 이제 더 이상 하느님과의 관계속에 살지 않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나도 하느님처럼 독자적으로 살고 싶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때 하느님께서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신다. 이 말은 실존적 질문이다. 이때 아담은 숨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처벌처벌의 내용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의, 즉 본질적인 처벌이다.

아담의 경우 : 아담은 땅, 흙이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땅의 소출로 생명을 영위하라고 하신다. 그것도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라 하신다. 혹자는 하느님의 이 말씀으로 노동 자체가 하느님의 저주라고도 하지만 이 말씀은 노동 자체를 저주한 말이 아니다.

노동은 낙원에도 있었다. 동산을 꾸미고 가꾸는 행위 역시 노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 자체는 저주의 대상이 아니다. 낙원을 꾸민다는 차원에서의 노동을 보면 노동은 거룩하다. 결국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에와의 경우 : 에와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생명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여자로서 가장 신성하고도 중요한 일인 출산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이 출산이 고통 중에 이루어지는 것이 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주어진 출산의 고통은 실제로 자녀에 대한 사랑을 깊게 만드는 길이다. 특히 여자에게 모성은 여자를 가장 여자답게 만드는 것이다. 여자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여자의 존재 완성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뱀의 경우 : 땅을 기어다니게 하신 것이 처벌이라고는 하지만 원래 뱀이 땅을 기어다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므로 땅을 기는 뱀의 생태학적 원인론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처벌이기에, 즉 너희가 섬기는 뱀도 하느님 앞에서는 별볼일 없는 피조물이라 하여 뱀 숭배 사상을 없애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남자에게 질문하실 때 왜 따먹었느냐?’ 왜 따먹었느냐?’는 질문에 아담은 당신이 주신 저 여자가 주어서 라고 답한다. 저 여자라는 표현의 성서 원문은 매우 상스러운 단어이다. 지독한 표현의 욕이기에 옮기기가 미안할 정도였는데 공동번역에서는 그저 저 여자라고 표현했다. ‘당신이 주신이라는 표현은 아담이 자신의 책임을 하느님께 전가하는 표현이다.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선물로 기뻐할 때는 언제고 당신이 주어서 어쩔 수 없이 받은 저에게 저 여자가 주어서 따먹었다는 핑계를 할 때는 또 언제인가? 가장 소중한 반려자에게 욕을 했다는 것은 부부 관계에서 필수적인 사랑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다.

 

J계 창조설화에서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J계 창조설화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간의 관계가 잘못되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가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또한 인간의 역사에 깊게 들어와 있는 남녀 성별의 문제, 여자 및 결혼의 의미에 관한 의문들, 악과 고통과 죽음의 기원에 대한 의문들을 풀어주기 위한 원인론적 차원에서 오랜 숙고를 통한 결과를 기술한 것이다. 저자는 하느님은 선하신 데 왜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고집만을 피우는가를 원인론적으로 풀어준다.

 

특히 저자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 죽음 등이 하느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인 인간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낙원의 행복과 반대되는 개념, 즉 고통, , 죽음의 불행을 겪게 되었으며,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자유를 남용한 결과가 바로 죄로 나타나며,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된다고 말한다. 범죄한 인간에게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은 하느님이 늘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한편으로 인간의 죄를 모른 체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 J계 기자의 의도는 낙원의 행복한 상태를 소개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비참함의 원인이 죄라는 것을 밝히는데 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은 인간의 불쌍함을 아시어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시는 등 계속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할 구세주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심으로서 당신의 풍요로운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신다.

 

???????????????? 창조 다음의 이야기들(41- 119) ????????????????

 

대홍수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의 사건 (4,1-5,32)

저자는 4-5장을 통하여 아담의 죄의 결과로 인류와 하느님과의 관계의 단절, 인간과 인간의 단절, 인간과 다른 피조물 세계와의 단절이 이루어졌으며, 그 죄는 세상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4장에서 질투심 많은 카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살해했는데 이는 첫인간의 죄보다 더 큰 죄를 짖는 인간의 타락상을 보인다. 그는 반성이나 회개의 표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를 보호하는 표를 찍어 주신다.

 

이처럼 성서의 저자는 인간의 죄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아울러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악해지는 것을 묘사한다. 성서 본문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424절을 보면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의 보복을 받는다면 라맥을 해친 자는 일흔 일곱 갑절의 보복을 받으리라하여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심성의 황폐함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중 하느님을 예배하는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에노스라는 말은 아담이란 말의 뜻과 같다)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계획을 계속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장에서 저자는 인간 군상들이 자신들의 불행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는 경우에 대한 잘못을 알려준다. 우리는 수시로 손해나 슬픔이나 불행의 탓을 하느님께 돌린다. 그러나 악이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랑과 신뢰가 파괴되는데서 오는 것이다. 하느님처럼 되보려는 교만은 결국 하느님을 배제하고 자기가 하느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행위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네 인간은 그렇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동등하게 되려 하지 않으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필립 2,6-7). 창세기 4-5장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겸손을 깊이 생각하게 하여준다.

 

노아의 홍수 (61-929)

6장의 하느님의 자식들과 사람의 자식들의 결혼하는 괴상한 장면에 대해 드 보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여기 성서 저자는 네필림씨족의 전설을 이용하고 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네필림씨족은 동방에 사는 키가 무지하게 큰 거인족으로서 그들이 큰 이유가 그들이 신의 아들들과 인간의 딸들의 야합의 소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서 저자는 이 전설의 진실성을 판단하지 않고 이 전설의 신화적 요소를 숨기지 않고 다만 야합으로 출생한 거인들의 전설을 상기시키며 인류는 점점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노아의 홍수가 닥쳐오고 말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뿐이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즈음의 대부분의 성서학자들도 같은 주장을 한다.

홍수의 내용을 보면 배울 것이 많다. 하느님께서 홍수로 파멸을 계획하시지만 당시의 하느님이 깊은 슬픔을 느끼고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노아와 그의 가족만을 선택하시고 홍수 후에 새로운 축복의 계약을 맺으신다. 이 홍수 이야기는 죄를 지은 인간의 회개를 말하지 않고 이상하게도 하느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인간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뉘우침의 결심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저자의 의도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연민과 자비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상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세상이 오늘까지 계속되는 것은 하느님의 끊임없는 자비로운 보살핌 덕분인 것이다.

 

민족들의 분포 (10장 전체)

이 부분은 인류가 한 형제라는 것을 의도하여 기술된 것이고 땅의 백성들이 많은 것은 하느님의 축복의 결과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기술된 부분이다.

 

바벨탑 이야기 (111-9)

바벨탑 이야기는 10장에서 민족들이 흩어진 동기 및 여러 언어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다. 홍수가 인류의 첫 재앙이라면 바벨탑 사건은 인류가 두 번째 재앙을 일으킨 요인이다. 또한 바벨탑 사건에서 탑을 하늘까지 높이 쌓아’, ‘흩어지지 않도록’, ‘이름을 떨치자라는 표현은 창조때 뱀이 애와를 유혹한 것처럼 하느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또 하나의 교만과 죄를 묘사하는 것이다. 독일의 성서학자 융커(H. Junker, Trier)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대 근동 문헌을 통틀어 유일 무이한 이 바벨탑 이야기는 어느 긴 역사 과정을 짧게 줄인 축소판 이야기인 듯 하다. 짐작하건대 참된 하느님을 잃고 무한한 세력을 확장하며 불손하고 배신적인 야욕을 추종한 실재했던 어느 사이비 종교의 파멸의 긴 역사를 간단히 극적으로 요약 서술하고, 바벨을 통하여 바로 그 사이비 종교의 세력 확장 과정을 설명하려 한 듯 하다.”고 말한다.

 

어쨌든 홍수 이후에 노아가 새로운 아담으로 등장하듯이 바벨탑 사건 이후에는 셈의 족보를 통하여, 12장부터 시작되는 구체적인 이스라엘 역사인 아브라함과를 연결시켜 주고 있고, 이로서 아브라함이 새로운 아담으로 등장하여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계승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서 신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의 태고사 부분을 주석하여 보았다. 이후 전개되는 모든 모세 오경의 내용은 태고사의 성서신학적 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주석에의 어려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 개관

 

모세오경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창세기와 서로 연관된 성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세 50,24에서 성조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밝힌 바처럼 약속의 땅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 경전의 목록상 워 엘레써모트(תוֹט? ח??? : 그리고 이름은 이와 같다.)’라고 불리는 이 책을 흔히 토라의 둘째권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출애굽기와 함께 성조들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로 넘어 간다. 이 책의 최초의 사건의 무대는 이집트이다. 여기에서 헤브레아인들은 중노동에 시달리고, 마치 노예처럼 고생을 한다.

 

책의 서두에는 모세가 이집트에서 체재하던 당시의 환경을 간단히 소개하고 압제를 말한 후 모세의 영도하에 출애굽하는 과정을 마치 일기를 쓰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중점적 관심사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초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룬다는 섭리적 차원의 전개이며, 계시된 하느님과 해방된 백성 사이의 계약이 재가되고 그 백성의 시민적, 사회적, 종교적 조직 및 공식 예배를 위한 법률 등이 주어진다. 이 책은 모세가 주연배우인데 이것은 모세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한 백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모세오경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직자이고 첫 입법자인 것이다.

 

1. 조직과 구성.

 

1-12: 이집트 탈출을 준비한 사건들 - 압제(1), 모세의 성소(2-6), 재앙들.

13-18: 결정적인 사건 -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이주.

19-24: 하느님과 이스라엘간의 계약(가장 중요한 사건임).

25-40: 결약의 궤와 장막의 기록(장막은 선민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거처).

 

2. 종교적 교리

 

출애굽기의 사건들은 단지 한 집단으로서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했다는데서 살펴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에 하느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의미, 즉 종교적 가치에서 고찰되어야 할 성서이다. 여기서 간단히 그 종교적 가르침을 요약하면

 

출애굽기의 근본 주제는 유일하신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시나이 계약이다. 그 계약을 향하여, 그 이전의 모든 사건이 방향지워지고 그 계약에서 다른 모든 법률들이 기원한다.

야훼라 불리는 이 계약의 주체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경배할 백성들이 다른 우상들과 제휴하는 것을 묵인하지 못하는 시기하는 분임을 보여준다. 이교 잡신은 일정한 지역에만 그 권한을 행사하지만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백성을 지배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느님은 우주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분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백성에의 섭리자이시다. 이집트에서의 기적들은 이러한 섭리의 증거이다.

당신의 백성에게 다정하신 분이지만 거룩하신 분이시고, ‘초월하신 분이시다. 속된 모든 것과 분리된다는 차원에서 이 백성은 거룩한 자 되어야 한다. 이 백성을 성화시켜야 할 과업이 모세의 몫이다. 이러한 성성의 의무가 사제에게 있다.

계약의 하느님은 뚜렷한 도덕과 성격을 지니고 계신다. 당신 백성에게 상선벌악의 차원에서 징계와 보호를 약속하신다. 10계명과 계약은 특히 이웃, 약한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나이 계약으로 이스라엘은 맏아들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소유가 된다는 사명감을 심어 준다.

하느님의 감각적 현존의 상징은 계약의 조항들이 들어있는 결약의 궤가 있는 성막이다. 결약의 궤는 이스라엘의 수호이다.

 

이상과 같은 풍부한 신학적 주제 때문에 출애굽기는 그후의 모든 구약 성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구약성서 전편에 출애굽기는 도처에서 수시로 인용되며 그 원초적 부르심과 응답을 되새김한다. 이러한 출애굽기의 종교적 의미는 신약에서 완수되어야 하고 출애굽기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현실적이고 영구한 가치를 나타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출애굽사건을 성세성사의 전형적 사건으로 보고(1고린 10,1-13; 5,7)있고, 사막의 여행에서 우리들의 지상생활의 전형을 보고 있고, 만나와 물의 기적을 성체성사의 전형으로 보고 있다. 신약의 모든 성서가 빠스카 희생물에서 십자가상에서 제헌된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을 보고 있다. 히브리서에서도 모세와 예수의 관계를 모세의 경신례와 그리스도인의 경신례를 시나이 계약과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약을 밝힐 목적으로 쓰여졌다.

요한 사도도 구약과 신약을 대위법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는 입법자인신 그리스도를 모세와 대조시키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빠스카 사건과 대조시킨다. 오늘날 교회 자체도 이 책에서 많은 것을 취하고 있다. 결국 출애굽기는 모든 세기에 걸쳐 유효한 교리적 가치와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책이다.

 

레위기 개관 설명

 

모세오경의 세 번째에 있는 이 책을 히브리인들은 이 책에 나오는 첫마디인 와이크라(א???? : 그리고 부르셨다)’를 제목으로 정하고 부르시는 책이라 한다. 히브리인들은 왕왕 책의 제목을 정할 때 그 책의 첫마디를 제목으로 정하는 관습이 있다. 희합어 번역본(LXX)에서는 레위티콘(Λευιτικον)’이라 하며,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이 제목은 이 희랍어 역본가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본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 책의 주된 관심사는 레위족의 임무 즉 그들의 예배와 의식과 행사에 관한 규정들을 기록한 책이다.

 

레위기의 사료적 출전은 전편이 제관계 사료(P)에 속한다. 제관계 역사 서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배운바대로 다음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기원전 587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그곳에서 지금까지 접하지 못하였던 이방 문화와 종교를 맛보게 된다. 그러자 자기들의 고유한 신앙영역의 파괴를 보게 되었고, 그곳에서는 왕도 없고 예언자도 없어 그들 개개인의 일상생활을 신앙적 관점에서 통제 한다든지, 동족끼리의 분쟁을 해결해 준다든지 하는 계층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며 모세의 율법과 전통적인 전례를 강화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가지 전승들을 수집하고 가르칠 수 있었던 부류가 곧 제관(사제)들이었다. 포로가 되어 이방 민족 가운데 살던 이스라엘이 종교 생활의 항구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혈연관계, 공통의 전승, 전통적인 야훼 신앙을 기초로 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예배와 형식과 행사뿐임을 알고 있던 제관계 기자들은 그들의 신학과 합치된 것을 모아 책으로 엮었으니 그것이 곧 레위기라고 한다.

 

따라서 이 레위기는 오늘의 가톨릭 교회의 예식서와 같은 성격의 책이다. 특별히 이 책은 모세오경중에서 유일하게 거룩한 백성의 거룩함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의 이스라엘이나 오늘의 천주교 신자나 매 한가지이겠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잘 만나려면 하느님의 법과 규정을 잘 지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레위기를 대표하는 성서 구절을 찾는다면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행동하여 너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 (11,49; 19,2; 20,7; 22,31-33)는 것이다. 이 말은 레위기의 전편에 흐르는 그들의 대표 신학이다.

 

하느님 백성에게 종교적, 윤리적 사상을 깊게 하기 위한 노력을 살펴본다면 구약성서 전편에서 레위기와 같은 책이 없을 것이다. 레위기에 있는 몇 가지 규정들을 살펴본다면 셈족의 오랜 풍습의 흔적이 보이며, 가까운 이웃민족의 것과도 병행됨을 알 수 있다. 절대 신에 대한 신앙행위는 동서고금을 통해서 표면적으로는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개신교 신자가 우리에게 하는 말인즉 믿는 것은 다 같은 것이 아니냐,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말을 한다.

 

그러나 고대 중근동에서의 신앙 행위와도 마찬가지로 그들과 우리의 신앙이 외형은 비슷하다 하더라도 내면적인 원칙은 전혀 다르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각 규정과 그 규정을 살리고 있는 원리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레위기에서 간혹 바리사이즘이나 형식주의를 본다는 사람도 있지만 영원한 진리의 책이며 대대로 이어질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신앙 행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레위기는 비할나위 없는 표현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한다. 또 그분의 위대하심을 주장한다.

 

거룩하시고도 위대하신 하느님은 당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거룩한 덕과 깨끗함을 요구하신다. 그분의 요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한결 같은 요구이시다.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은 바치는 것이다. 또한 그분께 드리는 물질적인 선물이다. 동시에 순종과 사랑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헌신이다.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봉헌 정신을 우리는 레위기에서 배울 수 있다.

이 책은 또한 죄에 대해서 종교적이고도 윤리적인 도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죄는 사람을 하느님께로부터 멀리하게 하며, 사람을 더럽히고, 성전을 더럽히고, 성지를 더럽힌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화해를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화목과 일치를 위해 속죄가 뼈저리게 요구된다는 가르침이 레위기에는 있다.

 

참된 종교의 필수 조건이 거룩함이라면 다른 말로 하느님을 닮는 것’(11,44; 19,2)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는 사제들에게 고도의 덕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점에 있어서도 오늘날의 사제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의 사제들은 과거 그 어느 시대의 사제들보다 더 거룩함의 덕, 즉 성덕이 요구된다 (21,6; 21,15.23). 거기에다가 국민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요구된다 19,9-18.33-36). 24-26장에서는 윤리적으로 가치가 높은 가르침이 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유다인들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서를 가르칠 때 레위기를 가장 먼저 읽힌다. 그 만큼 신앙생활, 즉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중요한 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의 의식 조사를 하여보면 레위기를 읽지 않는다는 사람이 많다. 이점은 성서학자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내용에 문제가 많고, 잡다한 규정과 법, 그리고 의식 절차를 말하는 것에 지나친 단조로움들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신약의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정신의 전례가 우리 신앙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도 성모님도 그분들이 현세적 삶을 사는 동안 레위기의 여러 규정들을 따르셨다 (루가 2,21; 22,29; 요한 2,13이하. 7,10. 14). 예수님의 죽음도 요한에 따르면 과월절에 어린양을 잡을 때였다. 오늘날의 전례에서도 특히 사제의 서품, 제단과 성당축성, 사제의 의무와 권리 등의 규정에 있어서 교회는 레위기의 가르침을 근본 정신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시대를 초월하여 종교적 가치를 가진 책임을 알 수 있다.

레위기는 계약의 궤를 만들고 만남의 장막을 세우는 것으로 마감되는 출애굽기를 이어서 하느님이 옛날처럼 시나이산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만남의 장막에서 말씀하신다는 내용으로 서두를 꺼내어 전체적인 내용을 출애굽기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만남의 장막에 대한 인식을 드높이고 이 장막이 새로운 하느님의 현존의 성소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4부로 구성되어 있고 부록이 첨가되어 있다.

1부 제 1-7- 1부에서는 이스라엘 경신례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는 제물을 바치는 법즉 제사 예식에 관한 것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2부 제 8-10- 이곳에서는 합당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하느님과 선민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할 권능을 공적으로 부여하는 사제축성예식이 기록되어 있다. 제관들은 특별히 하느님과 가까운 신분이므로 그들에게 요구되는 성성(聖性)이 강조되고 있다.

3부 제 11-16- 이 부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더욱 친밀하게 지내기 위하여 외적으로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지를 말하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다.

4부 제 17-26- ‘성스러운(聖性)의 보존에 관한 법이라 불리는 마지막 부분으로서 하느님과 가까워진 백성이라면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 상호간에 지켜야 할 기본법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19,18)이다.

부록 27- 레위기의 마지막 장인 이곳에서는 하느님께 허원, 또는 봉헌함에 있어서 지켜야 할 여러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레위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축제일

 

삼바트(안식일)(23,3) - 하느님께 바쳐진 완전한 휴식의 날

빠스카 축일(23,4-14) - 니산달 14, 과거 출애굽 때 이집트에서의 해방을 기념. 이스라엘 3대 축제 중의 하나.

오순절 - 빠스카 축일후 50일 째 경축. 이스라엘의 3대 축제 중 두 번째 큰 축제. 이때 첫수확을 하였고 그 중 제일 좋은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속죄의 날(욤 끼뿌르)(23,26-32. 16장 전체) - 죄를 진심으로 슬퍼하고 통회하는 날로 이스라엘의 새해(오늘날의 9)를 지낸 다음 10일 날에 지냈다.

초막절(23,33-44) - 과일이나 포도를 수확할 때(오늘날의 9-10) 지냈다. 축제 기간 중 사람들은 천막에서 지내며 옛선조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전의 어려움을 기념하였다. 이스라엘의 세 번째 큰 축일이다.

 

안식년과 희년(25,1 이하) - 안식년은 7년마다 지냈으며 이해에는 땅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경작을 하지 않았으며 저절로 자란 곡식은 어려운 사람들이 가져갔다. 안식년을 7회 지내고 50년 째 되는 해를 희년이라 하였다. 이해에는 저당 잡은 가옥이나 전답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노예들도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의 성년(聖年)은 바로 이 희년에서 역사적 배경을 찾을 수 있다.

 

민수기 개관 설명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책의 제목은 그 책의 첫 번째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오랜 관습이 있다. 구약성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늘 우리가 읽을 민수기도 기실은 히브리 성서의 제목이 버미드바르(ד???? 광야에서...)’라고 불린다. 희랍어 성서(LXX)에서는 아리트모이(Άρϯθμοι , 인구조사)’라고 부르고, 라틴어(불가따본) 성서나 오늘날의 성서는 누메리(Numeri 민수기)’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 동안 성서 읽기를 시작하면서 세상의 시작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신학적 숙고 속에 쓰여진 창세기의 태고사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어떻게 불림을 받고 그 백성의 선조가 되었는지, 또 그 후손들이 어떻게 큰 백성이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족장사를 읽었고, 에집트에서 억압과 모세의 영도로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광야에서 이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초를 놓으신 하느님의 섭리 등을 중심으로 기술한 출애굽기를 읽었으며, 지난번 레위기에서는 하느님이 선택하시어 거룩하게 되어야 할 이 백성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경신례의 조직과 집행에 관한 법률적 규정들을 한데 모은 예식서로서의 레위기를 읽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백성이 어떻게 조직되었고, 각 지파의 인구는 얼마나 되며 그들의 지도자는 누구였고, 약속의 땅은 어떻게 분할되었나 하는 정보는 민수기에서야 얻을 수 있다. 민수기는 각종의 인구조사, 직무의 분담, 토지의 분배 등등 각 장마다 정확한 숫자 개념을 동원하여 기록하였다. 레위기가 경신례의 의전서라면 민수기는 공동체의 조직서라고 하여도 될 것이다. 특히 민수기는 여러 가지 조사, 직무 분담, 토지 분배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공동체를 형성하여 나아갔나를 가르치는 책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모세오경 중에서도 그 어떤 통일성이나 조직성이 떨어지는 책이다. 제관계 전승에 의해 쓰여진 것이 1장부터 10, 13장부터 14장의 일부, 15장 전체, 16장 일부, 17-19장 전체, 20-24장 일부, 25-36장 전체이다. 가히 전체가 제관계 기자의 작품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여러 사람에 의해서 쓰여졌기에 조직성이나 통일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 민수기는 모세오경의 다른 책에서도 그렇듯이 오랜 신앙의 숙고 속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사랑의 관계를 기술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여러 이야기들의 시대를 따져 보면 거의 40년간에 걸친 이야기이지만 , 카데스에서 보낸 38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매우 짧은 이야기일 뿐이다. 예를 들면 카데스에서 있었던 소동은 특별히 14장의 것은 가나안 점령의 어려움에서 온 것이고 20장의 것은 물 부족에서 연유한 것일 뿐이다.

 

물론 이 사실은 역사적 반추에서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든다면 모세에게 반역한 무리가 많았다는 것과 혹은 모세에게 반역한 시간이 매우 길었다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행간의 글씨로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부족이 완전히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독립된 개체일 수도 있었다는 숙고가 가능한 것이다. 또한 하느님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경신례를 이미 잊어버린 차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반추도 가능한 것들이다 (여호수와 5,4-7; 아모스 5,25-26; 사도 7,42-43 참조).

 

광야에서 보낸 히브리인들의 역사는 결코 그 누구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들은 개구리가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는 식으로 에집트에서 누리던 풍요로움을 그리워했다. 물론 그들이 그리워 한 것이 인간다움의 극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누가 노예에게 풍요로움의 극치를 선사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노예 생활의 열악함보다 조금 더 힘든 광야의 생활에 극복의 열성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 불평을 터트리고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그들 스스로 인정했던 모세에게 반항하고 급기야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작태를 보인 것이다 (122절 참조). 어찌 보면 머리가 둔한 백성의 역사이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백성에게 보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특별한 백성의 위치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종교적인 교의(교리)면에서도 이 책은 나름대로의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당신이 부르신 백성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고자 노심초사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의 섭리에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10,29; 14,12; 24,5; 22-25장 참조).

 

사실 책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배은 망덕은 여러 차레 되풀이되었다 (11-14, 16, 20). 그러나 하느님은 항상 바보같이 짝사랑만 하는 하느님의 모습만을 보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찾아낼 결론은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약속에 성실하신 분이시고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민수기의 저자는 다양한 그들 노선의 사료들을 한데 모아 민수기를 오늘의 우리에게 읽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반면에 민수기의 하느님은 불성실한 당신 백성에게 벌을 주신다. 그것이 재앙이다. 모세가 누구인가?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이고 입법자이다.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 아부도 하고 어떤 때는 하느님을 달래고(11,10-15), 어떤 때는 백성을 향하여 하소연도 하면서 그들을 달래고(20,1-13), 어떤 때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차라리 백성에게 부드럽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11,29 이하; 12장 참조).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평생을 산 사람이고 (12,3), 늘 주님께 대한 신뢰를 지킨 사람이다 (10,29이하). 그처럼 주님께 성실한 사람이 없다 (12,6-9 참조). 그렇다면 모세 없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겠다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모세를 알아야 하느님을 알고 구원의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억지도 성립된다.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여러 가지 무서운 재앙을 보아도 하느님께 불성실한 신앙은 결국은 멸망을 초래한다. 이 사실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동일한 진리이다. 우리가 읽은 민수기는 법과 불성실의 삶, 40년 간 광야에서 보낸, 어찌 보면 불행했던 역사를 들려주는 글이다. 이리하여 민수기의 주제가 결정된다.

 

민수기의 주제는 광야에서 보낸 40년의 시간이 하느님의 구원을 소홀히 한 백성이 바든 벌과 정화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도 하느님의 법을, 구원을 소홀히 할 때 과거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이나 불행의 역사가 찾아 올 것이다. 민수기의 이스라엘은 회개할 때 비로소 찾아오는 새로운 은총을 말하는 역설이 숨어 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민수기는 희망의 책이다. 민수기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은 의미를 갖는다.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고통과 괴로움, 이는 불성실이라는, 배신이라는 죄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는 길조차도 괴로움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값없이 자비와 은총을 나누어주시는 분이시다.

광야에서 40년간 보낸 이스라엘의 삶을 기록했다는 민수기는 실로 이스라엘의 고뇌가 전 인류의 고뇌의 전표이라는 것을 그들이 느꼈던 불안이 실은 이 시대 전 인류의 불안이라는 것을 그들의 회개가 이 시대 전 인류의 회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기에 이 책은 모든 인류에게 희망의 책인 것이다. 신약의 마지막 책 묵시록은 이 깊은 진리를 을 벗어나려고 아들을 데리고 광야로 도망친 한 여인의 모습을 빌려 말하고 있다 (묵시 12,5 참조).

 

민수기는 책 속에 묘사된 주요 사건들이 일어난 지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뉜다.

1(1-10) -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에 당도한 후 이곳에서 1년동안 지내며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2(10-22) - 시나이에서 사해, 사해 동북방 트란스 요르단의 모압평야에 이르기까지의 기간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3(22-36) -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평야에서 요르단강 서쪽 팔레스티나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신명기 개관

 

책 제목은 히브리말로 엘레 하드바림(םי??? ח?? 말씀은 이와 같았다)’, 희랍어와 라틴어 성서는 데우떼로노미온(Deuteronomion)이라 하는데 이 명칭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불린다. 신명기라는 이 이름은 실제로 표의 적절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실제로 오경의 이미 말한 모든 책들에서 거론된 법률들을 폭넓게 반복하고 있는 제2법전이기 때문이다.

 

1. 구성과 내용

이 책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인들에게 한 담화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담화(11-440)

시나이 산에서 출발하여 요르단 건너편까지의 정복과정에서 일어난 사실들의 회고적 서술이다.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성실성과 율법의 충실한 준수를 목적으로 말하여진 것이다.

둘째 담화(4,41-26,19)

이 책의 중심부분으로 먼저, 일반적인 원칙들, 종교에 대한 법률, 공법에 관한 법률, 마지막으로 가정과 개인에 관한 법률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담화(27,1-28,68)

이스라엘인들이 요르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침입자들에 대한 저주, 협박, 약속과 함께 세겜에서 법률 공포의 순서 등을 담고 있다.

넷째 담화(28,69-30,20)

역사적 사실들을 회고하고, 약속과 위협과 함께 법률의 준수를 새롭게 권고한다.

역서적 부록(31-34)

모세의 최종적 사설을 소개한다. 자기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선정(31), 그 뒤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32),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주는 축복(33), 마지막으로 모세의 죽음(34).

2. 종교적 교리

신명기의 중요한 지향은 이스라엘인들이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야훼가 모든 피조물, 권위, 권력의 원천이시며, 다른 신들은 어떤 권한도 없음을 말한다. 그분은 의인을 상 주시고, 악인은 벌주신다. 아무도 그분의 정의를 피할 수 없다. 그분의 본질은 어떠한 존재의 본질과도 다르기에 어떤 피조물로도 대신될 수 없다. 야훼는 자기의 생각을 예언자들에게 인식시키기에 예언자들에 의해서 그분의 뜻은 알려진다 (예언된다).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의 바탕에는 야훼의 선택이 있다. 이러한 선택은 법률적 관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다. 이 사랑 위에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놓여 있다. 결국 신명기의 근본 가르침은 사랑이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 하느님께 대한 전적이고 항구한 사랑은 경신례와 율법 준수 안에 포함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가정과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을 피할 뿐만 아니라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기를 원한다. 고아, 과부, 노예, 외국인들을 보살피는 것이 곧 그것이다.

결국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이러한 사랑에서 인간성의 자유주의와 박애주의 사상의 뚜렷한 의미가 나온다.

 

豫 言 書

 

개 관

이스라엘의 역사는 나일강을 중심으로한 이집트의 세력과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한 나라들의 사이에서 완충지 역할을 하던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항상 시련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나 예언서의 공부도 이러한 상황을 외면한 채 공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예언자 운동이 일어난 것은 왕정과 병행한다. 즉 예언자 운동은 이스라엘에서 왕정이 들어서면서 일어났고, 왕정이 몰락하면서 없어졌다. 이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예언현상에 대해 고찰하여보고 예언문학의 유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예언서는 편의상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구분한다. 여호수아, 판관, 사무엘 상하, 열왕기상하의 책들은 전기 예언서로 부르고 있다. 이 책들이 다른 예언서보다 먼저 쓰여져서가 아니라 경전의 순서상 앞에 쓰여져 있기에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 역사적 설화로 꾸며져 있는 역사서안에 예언자들의 활동이 소개되어 있는 점이 후기 문서예언서들과 다른 점이다.

 

전기 예언서는 주로 기원전 8세기쯤의 신명기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점이 특색이다. 이 책들은 민족의 과거를 묵상하면서 종교적 교훈을 도출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들이며 실제로 가나안정복까지 소급하는 자료들과 구전을 참작하고, 왕정시대 말엽이나 유배초기에 많은 부분을 손질하여 편찬된 것이다. 그러나 후기 예언서는 예언자들이 하느님께 받은 말씀을 글로 기록하여 남긴 문서집이다.

오늘날 보통 예언서라고 부르고 있는 책들은 이 후기 예언서를 꼽고 있으며 후기 예언서들의 문서 분량에 따라 대예언자 혹은 소예언자로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법에 의해 대예언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을 꼽고 소예언자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아, 요나, 미가, 나훔, 하바꾹, 스바니아, 하께, 즈가리아, 말라기등 12명을 꼽는다.

 

우리는 먼저 예언자의 정의를 살펴보고 각 예언서들의 삶의 자리와 메시지를 알아보자. 그 다음으로 예언문학의 유형으로 예언자의 소명양식 심판선포 구원선포를 알아보기로 한다.

 

. 예언자란?

 

고대 동방종교에는 스스로 신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가끔씩 범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 기적을 행하며 이러한 일들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들의 신의 뜻이라고 말하였다. 히브리말로 이러한 사람들을 Nabi, איבנ 라고 불렀는데 어원상 불리운자’, ‘선포하는 자의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둘을 합하여 소명을 받고 외치는 자’, ‘하느님께 불리워 하느님의 뜻을 백성에게 선포하는 자라 함이 정확할 것이다.

 

결국 예언자란 자기의 것이 아닌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받아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공적으로 선포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신의 대변자로서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중개자 역할을 하며 비록 메시지가 미래를 알려주는 것이라 해도 그 강조점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Kittel판의 TDNT에서 προ-’부분을 참조할 것).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공인의 삶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어쨌든 이들은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입에 당신 말씀을 맏기셨기에(예레1,9)’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모3,8. 예레20,7-9)’. 그들은 어느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불리움을 받아(아모7,15. 예레1,4-9) 하느님의 메신저(사자)가 되었다(이사6,8).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뿐만 아니라 가끔은 그들 스스로의 삶이, 생애 자체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어떤 표지가 되기도 하였다.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하는 불행한 결혼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충을 상징했고(호세1-3), 이사야는 이집트인의 불행의 상징으로 발가벗고 산책하였으며(이사20,3), 예레미아는 그 스스로의 존재가 이스라엘에게 주는 교훈 자체였고(예레16),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어떤 명령을 수행할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표지가 되었다(에제4,3. 12,6. 24,24).

 

* 하느님의 메시지가 예언자에게 주어지는 방법; 어떤 때는 환시중에(이사6. 에제1,2,8. 다니엘8-12. 즈가리아1-6)이루어졌고, 어떤 때는 청각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경우는 내적 영감으로 되었다.

 

* 메시지의 전달방법; 여러 가지 문학유형을 따서 직설적으로, 비유로, 짧은 경구로, 긴 설교로, 시편으로, 노래로, 탄식으로, 저주로, 칭찬으로, 글월로 전달하고자 하였다. 진짜 예언자는 자기가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확신과 그것을 전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신념에 차 있다. 예언자에 대한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은 예언자로 하여금 비정상적인 심리상태에 빠지게 하고, 때로는 탈혼상태에 빠지게도 하며, 기상천외의 언행을 하게 되었다. 예언자의 이러한 신비는 계시적 영감이다.

 

* 참된 예언자의 식별기준; 예언자 자신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듣는 사람 편에서는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을 할 수 없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이 가짜 예언자를 거슬려 투쟁하였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를 구별하는 성서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가 예언한 것이 적중하는 경우이고 그보다 더 일반적인 법칙은 그의 주장이 야훼신앙의 내용과 부합한다는 조건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사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경신례에 관여하거나 이미 백성들이 하느님 말씀으로 알고있는 성서 말씀을 인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예언자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뜻을 계시 받았고, 그래서 현재와 미래를 하느님의 빛으로 판단하고, 하느님께로부터 파견 받아서 하느님의 요구를 사람들에게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사랑의 길로 나아가게 자극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성서적 의미의 예언자는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고유한 현상이고 이 백성을 인도하기 위한 특별한 섭리적 방법이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야훼께 대한 정통신앙으로 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의 계시의 발전의 주역들이었다.

 

그들이 기여한 것은 구약시대의 종교의 3대 특징인 일신론, 윤리관, 메시아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예언자들은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여 일신론을 정착시켰고 야훼의 초월성을 뚜렷이 하며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하였다. 예언자들의 윤리관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날카로운 지적과 비판을 가한다. 초기의 예언자들은 민족의 죄악과 이에 대한 응보의 신명기적 신학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후대에 갈수록 개인의 상선벌악에 대한 관념을 발전시키고 있다.

 

메시아 사상도 예언자들에 의해서 서서히 발전된다. 하느님의 충실성은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일부 충실한 사람들을 시대마다 남겨두시어 장래를 대비하신다. 이 장래는 하느님이 보내실 메시아가 이룩할 나라인 것이다. 이 나라는 예언이 진실 됨에 따라 영성화되어 나타나며, 메시아도 현세군주나 영웅으로서 보다 영적이며 신비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들

 

우리는 성서의 목록을 따르지 않고 시대순으로 예언서를 개관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예언사상의 발전과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 아모스

 

이 책은 기원전 8세기의 아모스의 작품으로 설교와 신탁들이 한 권의 책으로 수집된 것이다. 아모스는 남부 드고아 출신인데(1,1) 양을 치다가 북부에 불려가(7,14) 베텔 근처에서(7,10) 예언을 하고, 거기서 추방되어 다시 본래의 직업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그가 예언자로 살았던 시기는 북부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재임기간중(783-743) 750년경의 몇 달이거나 아니면 몇 주간이었을 것이다.

아모스는 농촌출신이었으므로 야훼종교의 전통을 내세워 당시의 모든 죄악상을 단죄할 때 거친 언사를 사용했다. 당시 주변의 강대국들이 소강상태를 지속해 나가는 동안 북조는 비교적 안정되고, 풍요롭고,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는데 당시의 부자와 권력자들은 빈자나 약자를 억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들의 사치와 불의와 형식적 예배의 위선을 책망하였다. 세상의 모든 나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은(1-2) 이스라엘을 벌하시는데(3) 그날 야훼의 날은 어둡고 그 복수는 무서운 것이 되리라(5-6). 그리고 그 복수는 어떤 백성이 하리라(앗시리아를 암시함). 그러나 아모스는 요셉의 남은 자를 위한 희망이 있다고 한다.

아모스 예언서는 세부분으로 나뉜다(이는 IDBS,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밝힌다. 더불어 편역자의 의도가 더러 첨가되었음을 밝힌다).

. 이교백성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신탁(1,3-2,16)

. 이스라엘에 내리는 경고와 위협(3,1-6,14)

. 몇 개의 단편으로 엮어진 다섯 개의 희망(7,1-9,10)

. 부록;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구원의 신탁(9,11-15)

 

2. 호세아

 

야훼께서 놓아주신다라는 뜻을 가진 호세아 예언자는 아모스와 동시대인이다. 그는 이름과는 상반되게 불행과 실망의 일생을 살았다. 그는 아모스보다 몇 년후 이스라엘의 수난기(745-722) 동안에 예언활동을 하였다. 즉 앗시리아의 침략(734-732), 내란, 15년동안 4명의 왕이 암살되고, 종교적 윤리적 타락 속에 여로보암 2세 말년과 사마리아 함락(722)까지 역대국왕의 치세 하에 이스라엘에서 설교하였다.

 

호세아는 일부러 창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녀가 부정하여 버렸다가, 그녀의 고생을 보고 다시 맞아들인다(1-3). 이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한다. 후대의 예레미아, 에제키엘, 2이사야등도 호세아의 이런 삶을 모방하고 있다. 야훼께서 시나이산에서 당신의 아내로 맞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어 창녀처럼 되었고, 우상숭배와 불충실은 탕아의 배은망덕이며 간통인 것이다. 호세아는 당시의 관습법을 어기고 창녀로 살던 아내를 다시 집안으로 맞아들였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회개하는 당신백성을 맞아들이시는 자비와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실 호세아는 격렬한 어조로 이스라엘의 배신과 타락, 특히 왕들과 사제들의 우상숭배와 윤리적 타락과 불의한 처사로 백성을 잘못 이끌고 있다고 힐책하고, 그래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엄포한다(4-14,1). 그러나 제사가 아니라 사랑을, 희생이 아니라 흠숭을 원하시는 하느님(6,6)은 이스라엘의 회개를 보시고 용서하시리라고 말한다(14,2-10).

이 책의 1,7. 2,1-3. 14,10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호세아는 북부의 어느 성소(아마도 세켐이 아닐까 한다)와 관계 있지 않을까 한다. 호세아서의 문체는 자믓 감동적이고 사랑의 하느님 편에서 죄인에게 보내시는 호소는 자주 격정적인 어조를 띄고 있다. 이 책은 호세아 예언자가 직접 편집한 것으로 보이며 이 책이 완성된 시기는 북부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남부 유다 에서이다.

호세아서는 두부분으로 나뉘어 진다(IDBS기준).

. 호세아의 결혼생활 체험과 그 묘사(1-3)

. 이스라엘의 배은에 대한 질책, 멸망예고, 구원의 약속(4-14)

 

3. 미가(미케아)

 

미가예언자도 호세아와 동시대에 예언활동을 하였다. 그는 아모스처럼 남부 농촌출신으로 사마리아 함락을 전후해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 에서 예언활동을 하였다. 미가 예언자가 취급한 제재들은 아모스의 설교주제와 흡사하며 사회적 범죄에 대한 고발, 피상적인 경신례와 우상숭배에 대한 단죄, ‘야훼의 날의 선포 등이다.

 

야훼의 심판은 먼저 사마리아에, 그 다음으로는 유다에 올 터인데 유다도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고 단언한다(1,2-9. 3,9-12). 그의 충격적인 예언은 722년 극적으로 성취됨으로서 뜻있는 인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예레미아서에 의하면 미가의 예언이 에제키아스의 개혁사업을 촉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예레7,1-15. v.26). 그러나 미가는 메시아적 희망을 긍정하면서 평화의 왕의 탄생을 예언하였다(5,1-5). “에브라다 지방의 베들레햄아 너 비록 유다부족들 가운데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나리라”(참고,마태 2,6).

 

미가서는 네부분으로 나뉜다(IDBS기준).

.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위협설교(1-3)

. 유다왕국의 영광과 해방(4-5,8) 약속말씀

.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고발의 반복(5,9-7,6)

. 새로운 희망의 고취(7,7-20) 약속말씀

넷째 부분은 유배이후 페르샤 시대의 종말론을 반영한 것으로 유배 이후에 첨가된 것이다.

 

4. 이사야

 

이사야 예언자는 기원전 765년경 예루살렘 귀족출신으로 태어났다. 740년에 왕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거룩하신 하느님의 장엄한 환시를 보고 예언자로 불리워져(6장 참조), 40년 이상 예언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귀족출신답게 기교 있는 문장을 쓰고 있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궁중을 무상 출입하였다(7.8.10장 참조).

그와 동시대에 활약하였던 미가 예언자는 이사야의 명성에 가려져 큰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사야의 초기 예언은 시작부터 736년경까지 예루살렘의 처벌을 미리 보고 슬퍼하는 산문시이다. 이때의 신학은 아모스나 미가나 이사야나 다르지 않다. 이사야 역시 사회불의와 부자들의 물질 만능주의(5,8-24), 형식적인 예절로 하느님의 계명을 망각하는 종교적 위선(29,13-14. 1,10-20), 인간의 교만(2,6-19. 5,14-16. 2,21), 야훼의 은혜를 망각하는 백성들의 배은(5,1-7)을 단죄하며 그리하여 전쟁, 포로생활, 기근등 야훼의 처벌이 임박했다고 예언하고 있다.

이사야는 앗시리아의 침공을 예상하고 있으면서 이 역사상의 사건이 죄인들을 치시는 야훼의 날의 실현으로 묘사했다. 그는 유다에 대해 말하기를 야훼께서 당신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해 소수의 남은자즉 의인들만의 생존을 예언했다(6. 1,2-9). 그러나 이사야의 설교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 아하즈 시대에는 왕의 성실치 못한 종교적 태도를 신랄하게 공격했다(2열왕16,1-5). 즉 앗시리아의 티글랏 팔라살 3(745-727)에 대항하기 위하여 다마스코 왕 라손과 이스라엘왕 베카가 유다왕 아하즈와 동맹을 원하였는데 아하즈는 이사야의 반대를 무룹쓰고 앗시리아에 원병을 청하여 이스라엘과 다마스코의 연합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때 이사야는 오직 야훼 하느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여야 하며 자기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앗시리아의 원병을 청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사야는 왕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자 앗시리아가 유다를 침공하리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암담한 전쟁 중에라도 장차 엠마누엘이라 불리우는 임금이 서리라는 희망적인 예언을 한다.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아 아하즈는 자기 영토의 일부를 앗시리아에 빼앗기고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초래하였다(722-1).

 

사마리아의 함락을 전후하여 아하즈의 후계자인 에제키아스는 앗시리아를 치고자 에집트에 원병을 호소하였는데 이때에도 이사야는 이를 반대하였다. 이사야는 에제키아스가 하느님께 신뢰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죄하고(28-32), 앗시리아의 산헤립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되리라고 예언한다(29,1-8; 이때 유다의 고을 46개가 점령당함).

 

열왕기는 산혜립의 위협 앞에서 아사야가 에제키아스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자기 말을 들으라고 권하는 극적인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리하여 정말로 예루살렘은 함락을 면하였다(2열왕18-19). 그 이후 이사야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후대의 전설은 그가 유다왕 마나세치하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종교계에서 그의 예언활동과 정치생활에서의 이사야의 활약은 그로 하여금 민족적 영웅이 되게 하였고, 문장력이 뛰어난 그의 문체는 구약성서의 걸작중의 하나이다.

 

이사야의 신학은 하느님의 거룩하심,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절대적 신뢰의 필요성, 이스라엘 종교의 도덕적 내지는 사회적 요구들, 이스라엘과 세상에 대한 야훼의 계획과 정치가들의 계획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교만을 꺽어야 한다는 사실, 하느님의 심판과 마지막 시대에 있을 구원의 일깨움, 다윗과 솔로몬시대를 미리 알려주고 그 후손 중에 이상적인 왕을 통해 조건 없는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나 하느님백성의 자진 회개와 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이사야서는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다(IDBS기준).

 

. 1(1-39)

자서전의 성격을 띤 이 대목은 이사야가 이 책을 자기가 직접 썼다고 하나(6), 많은 부분이 이사야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36-39). 그후 여러 시대에 걸쳐서 13-14장의 신탁과 24-27장의 묵시와 33-35장의 시편들이 삽입되었다. 하여간에 이사야 본인의 작품은 1-6장까지만 실려있고, 엠마누엘의 책이라고 불리우는 6-12장은 후대에 일부가 첨가된 것이다. 중간 중간에 유배시대의 배경이 나오고 있고, 마지막으로 서사시 형태의 부록(36-39)은 열왕기에 병행되는 내용이 있고, 이사야의 친저의 단편들이 많이 담겨있다.

 

. 2(40-55)

현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에 의하면 이 부분은 이사야보다 2세기쯤 후대의 어떤 제자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1부가 냉엄한 비판과 엄포의 책이라면 제2부는 시련중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자 화여 이 부분을 이스라엘의 위로의 책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여기 나오는 사건들은 이미 예루살렘이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며 키로스왕이 이들을 석방하리라고 한다(538). 2부의 문체는 말이 많고 사상도 훨씬 짜임세가 있으며 일신론이 이론적으로 잘 전개되고 있다.

 

하느님의 지혜와 섭리가 설명되고 있고 종교적 보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2부에는 야훼의 종의 노래라는 유명한 4개의 서사시가 들어 있다(42,1-7.49,1-9.50,4-9. 52,13-53,12). 이 시들은 야훼의 완전한 제자가 참된 신앙을 선포하고 그 백성의 죄를 대신 보속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받는 것을 노래한다. 교회는 이 시들이 구세주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야훼의 종의 노래는 제 2이사야와 관계없는 후대의 첨가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 3(56-66)

이 부분은 유배생활이 끝나고서 여러 개의 단편들을 혼합 편찬한 것이라고 본다. 57장은 유배 이전의 것이고 56,58,66장은 유배에서 돌아온 것을 전재로 하며, 63-65장은 묵시록이고, 60-62장은 제2부와 가깝다. 3부는 제2부의 제자들이 6세기 말엽에 편찬한 것으로 본다.

 

. 7세기와 6세기초의 예언자들

 

8세기는 앗시리아의 전성기였고, 7세기 전반에는 이집트 세력이 미쳤으나 후반에는 이집트가 몰락하고 바빌로니아가 독립했으며(626), 니느웨가 함락되고(612), 앗시리아는 멸망하고 신바빌로니아가 동방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사이 유다왕국은 앗시리아의 영향아래 놓여 종교적으로 잡신신앙의 영향을 받았으나 앗시리아가 쇠퇴하자 요시아왕이 종교개혁을 일으켜 성공하였다.

1. 스바니야(소포니아)

 

스바니야라는 이름은 야훼께서 숨겨주다혹은 야훼께서 피난시켜 주시다라는 뜻이다. 스바니야는 유다 요시아왕 치하의 초년인 640년부터 요시아의 아들 요아킴시대의 사이인 630년에 걸쳐 예언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1,1). 학자들은 이 책이 기원전 630년경 스바니야 자신의 작품으로 보며 3,14-20은 후에 첨가된 것으로 본다.

 

당시 예루살렘 주변의 상황은 요시아왕이 개혁작업을 하기 전이었고, 앗시리아제국의 세력이 유다 조정의 대신을 임명하는데 입김을 넣을 정도였으며(1,8) 앗시리아의 천체숭배, 점성술등이 널리 유포되어 유다의 야훼신앙을 위협할 지경이었으며, 거기다가 암몬인들의 밀콤신 숭배, 가나안의 토속신앙(1,4-5), 외국 문물(1,8), 거짓 예언자들의 만행(3,4), 폭력과 사회불의(3,1-3. 1,11)등등의 숱한 퇴폐스런 악풍이 만연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루살렘의 정권교체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스바니야 예언자의 정치관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전해준다(2,3. 3,13).

 

스바니야서는 4부작이라고 할 수 있다(IDBS기준).

.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위협(1,2-2,3)

스바니야는 아모스(5,18)와 이사야(2,7)가 다룬 주제를 다시 다루어 야훼의 날을 선포하고, 회개를 선포하며, 생명을 얻으려면 정의를 사랑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뜻의 용어인 아나봐חוֹ??를 구약성서에서 처음 사용하여(2,3) 후일의 지혜문학에서 크게 조명 받았다.

. 이방국가들에 대한 위협과 신탁(2,4-15)

이곳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자에 대한 언급이 주목된다. 이곳에서의 선택된 남은자란 아모스, 이사야, 미가등에서 언급하는 이들과 같은 이들임에 분명하다.

. 예루살렘과 이방국가들에 대한 고발(3,1-8)

아모스와 같이 이방국가들에 대한 고발은 하느님의 선민인 유다에 대하여 보다 더 신랄하게 고발하기 위한 서두 및 방편으로서, 이교백성에게 내린 재앙과 처벌은 유다에 대한 전조 내지 질타의 역할을 한다.

. 회개와 용서의 약속(3,9-20)

 

스바니야서는 죄에 대한 깊은 개념과 하느님의 심판의 준엄함을 주장하고 구원은 소수의 남은 자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역설한다. 특히 겸손해야 한다는 뜻의 용어인 아나봐חוֹ??는 청빈을 가르치는 용어로 가난한 자’, ‘약자’, ‘바싹 야윈 자’, ‘비참한 자등의 뜻으로도 사용 되여 그들의 신앙의 자세를 나타내주고 있다.

 

2. 나훔

 

나훔은 야훼께 위로받은자라는 뜻으로, 유다 엘코스 출신이다. 그는 성전 주변에서 있으면서 성전의식과 활동에 정통한 예언자로서 장차 니느웨가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이는 잔학한 교만에 가득찬 자들과 하느님의 계획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내릴 진노의 벌이라고 노래한다(1,2-2,3).

나훔서의 편집시기는 663년 이후로 보며 니느웨가 완전 함락되기 바로 전의 책으로 본다. 이 책은 알파벳 순서에 따른 시편으로 시작되며(1,2-8), 야훼의 충실성과 역사의 섭리자이심을 증언하고 앗시리아의 멸망은 그들의 죄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3. 하바꾹

 

하바꾹 예언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하바꾹서는 신바빌로니아가 메디아인들과 연합전선을 펴 앗시리아를 분쇄하고, 에집트와 카르케이쉬전투(605)에서 승리한 후 597년에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드디어 587-6년에 함락해서 유다가 패망의 길을 걷게된 비참한 비극적 상황에서 쓰여진 예언서이다. 하바꾹은 당시 유다왕국이 처한 역사적 현실을 예언자적 안목에서 직시하고 과거 하느님이 행한 역사적 위업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주님께 충성하고 신뢰하여야 한다는 이사야의 메시지(7,9)를 재 천명하고 신실함으로서 살리라”(2,4;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사람)고 천명한다. 이 구절은 사도 바오로가 신앙이라는 말로 번역하여 수시로 이용하고 있다(로마1,17. 갈라3,11. 히브10,38).

 

이책은 3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 하느님과 예언자와의 대화(1,2-4)

유다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불의에 대한 탄식과(1,2-4) 하느님의 응답(1,5-11). 여기서 예언자는 갈데아를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위력으로 묘사한다. 또한 갈데아인들의 착취와 만행을 묘사하고 이는 합당치 못한 승리라고 호소한다(1,12-17).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는 갈데아를 멸망시킬 것과 정의를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행하는 한 살아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 압제자에 대한 저주와 하느님께 대한 예언자의 신뢰(2,5-20)

. 예언을 실현하기 위한 하느님의 개입;시편(3)

 

4. 예레미아

 

예레미아는 645년경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몇Km 떨어진 베냐민 영토내의 고대 성소인 아나돗의 사제 가문에서 이사야 보다 1세기 후에 태어났다. 그는 626년 하느님의 소명을 받아(1,4-10) 요시아왕과 그의 아들들, 즉 여호아킴과 시드키야시대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 예언활동을 하였다. 예레미아는 이사야와는 달리 유다왕국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왕을 위시하여 백성들까지 경고의 대상에 넣었으므로 주변의 모든 이에게 박해를 받았다. 그는 그가 예언한 바대로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였다.

 

성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그는 용케도 몸을 피해 포로로 끌려가지는 않았으나 갈데아 총독(고돌리아스)을 암살한 광신적인 유다인집단에 의해 에집트로 끌려갔다. 에집트에서 예레미아는 자기동족들을 위협하는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마지막까지 노력을 기울였다. 후대의 미드라시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아는 에집트에서 자기 동족들의 돌에 맞아 살해되었다고 한다. 청년시절 예레미아의 설교에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2-6장에서 예레미아는 호세아와 같이 10계명에 비추어 이스라엘의 죄악을 열거하고,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아내가 남편을 저버린 불충실에 비기고 있다(2,2-13).

아울러 그는 그 죄스런 백성에게 다가오는 책벌로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다. 그는 앗시리아의 기병대가 남긴 전쟁의 상흔속에서 영감을 받아 북쪽에서 몰아닥칠 새로운 침략자가 있다고 묘사했다(6,22-26; 신바빌로니아의 침략).

이것이 야훼의 날의 무시무시한 영상으로 나타나고(4,19-31),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레미아의 권유로 요시아왕은 622년 개혁을 단행하였다. 예레미아가 속해있던 레위지파의 사제들은 지방의 성소를 폐쇄하고 국왕의 정책에 반대하였으나 예레미아는 중도적인 입장에서 왕의 개혁을 뒷받침 해 주었다(11).

 

또한 예레미아는 사마리아의 멸망으로 흩어진 이스라엘백성의 귀환과 하느님백성의 재통일, 종교적 중신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을 묘사하며, 광야의 시절과 가나안 정복시대에 영원한 이상으로 꿈꾸던 영성적, 지상적 황금기의 도래를 이야기하며 그 희망은 호세아의 사상을 반영하여 항상 조건부의 약속으로 묘사하였다.

 

609년 요시아왕의 사망으로 중단된 개혁은 나라를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예레미아는 다시 초기의 예언으로 돌아가 회개를 촉구하고 책벌을 선언하였다. 그는 유다가 망할 징조를 수없이 발견하고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했기에 다른 예언자보다 더 많은 박해를 받았다.

 

605년 카르케미쉬 전투에서 바빌로니아가 승리를 거두자(46,3-12) 예레미아는 바빌로니아를 하느님복수의 도구로 보았다(25,15-31). 이때부터 예레미아는 고난에찬 예언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혼자서 대항하며 대 재앙을 예언하였고, 왕과 백성들을 모두 그를 반역자로 취급하였다. 그가 성전의 파괴를 예언했을 당시(7,1-26) 어떤 고관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죽음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그때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운명을 지적하기 위해 단지를 깨뜨림으로서 공공연히 상징적 행위를 하였고 이러한 상징으로 말미암아 성전의 경비병에게 잡혀가기도 하였다(19,1-20,6).

 

604년 예레미아는 이스라엘백성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 자기 비서인 바룩을 시켜 자기의 예언이 적힌 두루마리를 성전 안에서 낭독하게 하였다. 그 때문에 예레미아와 바룩은 국왕의 복수를 피해 도망가야만 하였다(36). 계속되는 박해는 그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고 따라서 그는 고독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독신을 지켜 백성들에게 하나의 표징을 보여주었다(16,2-13).

 

조국의 멸망이 눈앞에 보이는데도(15,1-4) 자신의 예언을 믿지 않는 백성을 보며 예언직무의 실패를 느낀 예레미아는 커다란 심적 고통과 실의를 갖게 되었다. 그의 자서전적인 부분에는 그때의 단편들이 남아있다(15,10-21. 18,18-23. 20,7-13. 20,14-18). 그는 하느님의 정의에 호소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악의 문제를 놓고 그의 성소까지를 의심하며 고뇌하였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새로이 용기를 북돋아 주시어 슬프고 어두운 소명이지만 그 소명을 과감히 받아들이도록 해주셔야만 했다(15,10-21). 이 부분의 예언서 기록은 예언자가 받은 영감의 초자연적 기원을 본인의 증언으로 드러낸 중요한 묵상거리이다.

598년 제1차 유배이후 예레미아는 극히 선명한 태도를 취하여 예언을 한다. 이제는 에집트나 기타 인접한 소국들과 손을 잡을 때가 아니며 오히려 회개해야 하는 때이며, 느브갓네살을 하느님의 채찍으로 알아 굴복해야 한다고 하였다(27). 그리고 이스라엘의 희망인 남은자들은 유배지에서 쇄신된 유대인공동체로서 새로운 장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9). 그러나 예언자의 충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가 그렇게도 반대하였던 친 이집트파가 드디어 바빌로니아와 두번째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586년 두 번째 예루살렘 포위는 예레미아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는 감옥에 갇혀 죽을 위험을 겪었다(37,3-38,13). 이 어두운 시기에 예레미아는 이상하게도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선택하게 된다(30-33). 요시아왕의 개혁시기에 그가 선언한 약속들이 새로운 신탁을 받아 보완되어 다시 발표되고, 시련이 지나면 새로운 계약이 맺어질 것이라고 한다. 이 새로운 계약은 옛계약이 이루지 못한 것을 실현할 것이라고 말한다(31,31-34). 그때에는 이사야가 말한 대로 다윗가문의 의로우신 왕, 즉 메시아가 통치할 것이다(23,5-6).

예레미아와 이사야는 그 소명부터가 대조적이다. 예레미아는 겁이 많고, 감수성이 예민하여 재앙을 선포하면서도 마음의 고통을 느껴야만 하였고 하느님의 은총에 용기를 얻어 자기 의무를 다할 수 있었다. 구약의 인물들중 예레미아만큼 박해받는 그리스도를 닮은 예언자는 없을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호세아를 계승하고 신명기학파의 신학을 담고 있다. 또 그는 야훼와 그의 백성사이에 오가는 사랑과 마음의 종교에 큰 비중을 두었다. 문학적 관점에서는 이사야보다 활력은 적으나 훌륭한 시인이었고 특히 애가의 시인이었다.

그의 예언설교와 종말론적 신탁들은 소박한 사회생활과 농촌생활에서 영감받은 수많은 상징적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를 미루어 그가 가난한 농촌출신임을 알 수 있고, 뛰어난 표현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예레미아서는 그의 제자였던 바룩에 의하여 집성 편집되었고 최종적인 문학형태를 취했다고 본다. 결국 바룩은 자기 스승의 뛰어난 전기를 우리에게 남겨준 셈이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예레미아서는 히브리성서와 희랍어성서에 각각 순서가 다르다.

 

예레미아는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였으나(7,1-15. v26) 손으로 빚은 성전을 초월한 종교를 준비한 예언자로, 이점에서는 이사야를 초월한 예언자로 인정받고 있다. 실상 유다이즘이 유배생활동안에 재건된 것은 파괴된 성전 때문이 아니고, 유배시대에 야훼의 가난한 이들의 뛰어난 영혼들 때문이며, 이 열렬한 무리들이 후일 이스라엘의 심장과 혼을 이루고 있다.

 

예레미아서는 다음의 6부분으로 나뉜다.

.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린 신탁의 수집록(1,1-25,13).

. 타민족에게 내린 신탁(25,14-38. 46. 49).

. 유배중 바빌로니아에게 내린 신탁(50-51); 첨가물.

. 종말론적 약속들이 담긴 위로의 책(30-33).

. 바룩이 쓴 전기 부분(26-29, 34-45).

. 열왕기에서 빌려온 부록(52).

 

. 6세기 이후의 예언자들

 

기원전 538년에 키로스 대왕은 유배온 유다인들을 석방하였다. 기나긴 유배기간 반세기동안 이스라엘에 남은 서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민족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왕족들조차도 바빌론으로 끌려갔기에 이스라엘의 정치적 존재가치는 무색하게 되었고 이제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가치만이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유배생활 초기에는 에제키엘이, 유배생활 후기에는 제2이사야가 민족정신을 지도하게 된다.

키로스 대왕의 석방조치로 본토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건하였고(515), 대제관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유다이즘을 키웠으나 정치적 재건은 여러차레 시도했으나 이룩하지 못하였고 알렉산더대왕의 정복시대까지 페르샤의 지배를 받았다. 예언사상도 변천하여 유배이전의 자발적이고 위협적, 비관적이던 예언보다 이제는 학구적, 낙관적, 전례중심적 경향으로 변한다. 성전은 공동체의 전례의 중심지로 관심사를 갖게 되었고, 이제는 종말론의 교리가 발전하기 시작한다(최후의 심판; 요엘3-4. 즈카12-14. 엘리아 재림; 말라3. 지옥; 이사66,24. 부활; 이사26,19).

 

이렇게 서서히 설교의 시대에서 서적의 시대로, 예언자 시대에서 서기관 및 율사들의 시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유다이즘이 깊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1. 에제키엘

 

이 예언자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강하게 해주신다는 뜻이다. 예루살렘의 사제인 에제키엘은 기원전 593년에 유배지에서 예언자로 소명을 받았다. 그는 회개의 설교자가 되어, ‘반역의 집안에 대한 하느님의 책벌의 선포자가 되라는 소명을 받아(2,3-3,9. 3,16-21), 593-586년동안 약 7년간 예레미야와 비슷한 시기에 소명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그가 바빌로니아에 등장한 것은 1차 유배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 포로로 잡혀가기 전까지 그는 (586년까지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에제키엘은 기인이었다. 그의 생애에 대한 몇 가지 보고들은(4,4-8) 그가 혹시나 정신병자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에제키엘은 엉뚱한 행동을 많이 하였다(2,3-3,9. 8-11. 1,1-2. 3,10-15). 그는 선배 예언자들과는 다르게 탈혼중에 비젼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형용할 수 없는 실제들의 표현을 기괴한 형상과 무시무시한 장면을 섞어가며 상징적인 표현을 쓴 여러 대목이 특히 주목된다(1,1-2. 3,10-15. 37,1-14). 이러한 것은 유배시 메소포타미아의 표현법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본다. 문체는 형용사들이 너무 많고, 때로는 짧은 토막이고, 산문은 복잡하게 뒤얽혀 있으나(18), 아름다운 은유를 구사할 줄 아는 뛰어난 시인이었다(16). 때때로 보고되는 신탁의 아픔에 대한 그의 애환의 노래들은 일품이다(27).

 

에제키엘의 테마중 34장의 목자와 양은 신약성서에도 소개될 정도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에제키엘의 신탁의 형식은 후대의 편집자들이 어느 정도 손을 댄 것이다. 마지막 신탁은(30,17-20) 571년의 것이다. 에제키엘서는 전체를 연대순으로 볼 때 연대적 순서를 따른 것만은 아니다.

소명이야기 다음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 유다인들에게 발표한 회개의 메시지(3,22-24.v27)와 이교나라들에 대한 신탁(25-32)과 마지막 종말에 설 도읍과 성전에 대한 묘사(40-48)등이 그것이다. 또한 종말론에 속할 문서인 38-39장은 예레미아서를 끝맺음한 인물이 덧붙인 것이 아닌가 한다. 에제키엘서의 예언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는 586년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죄악들을 단죄하였다.

 

, 사제, 예언자, 백성들 모두가 그릇된 행동으로 하느님의 명예를 손상시켜(22,23-31), 수백년에 걸친 이스라엘의 불충이 극도로 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이 간음한 아내를 소박하듯 하느님께서도 당신백성을 소박하려 하신다(16). 바빌로니아 왕은 하느님의 이 판결을 집행할 것이다(21,13-22). 에제키엘은 예언적 환시속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격하고 야훼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것을 목격하였다(8-11). 그러나 유다의 원로들은 에제키엘의 이 예언을 무시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 이후 에제키엘은 야훼께서 각사람을 그 행실대로 다루신다고 하면서 개인적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특히 생활태도를 일신하라고 끊임없이 주장하였다(18). 그리고 예루살렘이 책벌을 받을 때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사람들만이 즉 의인들만이 그 위협을 면하리라고 끊임없이 외쳤다(8-11). 그는 청중들에게 충격을 주려고 그들 앞에서 해괴한 상징적 행동을 많이 했다. 그는 그 행동들에서 미구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그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국왕이 달아나다 죽고 성소가 유린된다는 뜻을 담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3,22-5,4. 12,1-20). 그러나 에제키엘의 예언이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국가의 재앙을 채험한 국민들에게 끊임없는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이 경험한 사건들의 의미를 되세기게 하며 그들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는 몫이 그에게 주어졌다.

 

이 희망의 내용은, 야훼께서는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배당한 당신백성들에게도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을 정화시키려 하시며, 결국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분노를 맛보았지만 다른 백성도 하느님의 분노를 살 것이며 모압(27)과 에집트(28), 그리고 마침내는 바빌로니아(38-39)도 하느님의 분노를 살 것이라고 외쳤다.

 

에제키엘서는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연대기적으로 기술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창작일지도 모르는 소명 이야기(2,3-3,9. 1,1-2. 3,10-15), 그리고 다음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회개의 메시지(3,22-24.v27), 그 다음의 이방나라들에 대한 신탁(25-32), 마지막 종말의 도읍과 성전이야기(40-48)등이 그렇다. 또한 종말에 대한 계시이야기(38-39)는 예레미아서를 끝맺음한 어느 제자의 손을 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어찌되었든 에제키엘서가 유배이후의 유다이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에제키엘은 제관계학파에 뿌리를 내리고 제관계학파의 최종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에제키엘서는 신학적 관점에서 성스러움의 법전(레위17-26)과 기타 제관계 문헌의 가운데 위치한다고 하겠다. 그 구체적 근거로는, 미래를 향한 하느님백성의 재기를 예언하고(37,1-14) 다윗왕가의 이상적 인물이 지도자가 될 것이며(34),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정화하시고 당신의 영을 쏫아 부어주시고 마음을 변화시키시어 영원한 계약을 맺으실 것이다 는 예언이 그것이다(37,20-28).

그는 이러한 종말론적 사건이 실현될 날을 기대하면서 이상적 이스라엘상의 실현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하느님의 영광이 머물 새로운 성전, 새로운 경신례, 조직, 새로운 성지의 묘사가 그것이다(40,1-4. 43,1-9. 47,1-12). 그는 선배들처럼 하느님을 성전에다 가두어 두지 않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성전을 주시는 하느님을 강조하여 은총의 신학을 준비한다.

에제키엘서는 복잡한 형성과정을 갖고 있다. 유배지에서 한 자기설교를 친히 주해하고, 확장 내지는 보충한 것을 마지막으로 제관계 그룹이 다시 주해하여 결정적인 편집을 하였으며 적어도 유배지에서 귀환하기 전에 완료된 예언서라고 본다.

에제키엘서는 5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서론; 소명(1-3)

.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와 위협(4-24)

. 이교백성에 대한 저주와 위협(25-32)

. 이스라엘의 위로와 희망적 약속(33-39)

. 장차 재건될 공동체의 종교적, 정치적 상태(40-48).

 

2. 2이사야(이사야 40-55)

 

이책은 유배시대 말기에 이사야 학파의 제자들의 손으로 편집된 것으로 본다. 특히 야훼의 종의 노래는 삽입된 것으로 보편적 예언자요, 스승이신 보편적 메시아관을 나타내고 있다. 학자들은 이 노래에서 원시 그리스도교관이 정립된 것이라고 본다. 이 예언부분이 8세기의 것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위협이나 심판의 고지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단행된 사건으로 고지된다는 점. . 8-7세기 이스라엘의 적은 앗시리아인데 이 예언에서는 바빌론이 적으로 나타난 점. . BC583년의 페르샤왕 키로스가 언급된 점(44,28. 45,18) 등등이다.

 

3. 하깨

 

이 책은 예언자 자신의 친저이다. 그러나 원문의 내용은 후에 재배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용된 언어는 조잡한 부분이 있고 그 어휘들은 무미건조하다. 그의 4개의 신탁은 다리우스 1(521-486)통치 2년째 되던 해 8,9-11,12월 사이에 시작된다. 하깨는 520년 여름에 예언자 즈가리아와 함께 성전 재건에 지친 즈루빠벨과 대제관 여호수아를 격려하여 성전재건을 예언하였다. 하깨가 말한 메시지는 궁핍한 생활은 종교적 열성 때문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성전을 지으며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한 것이다. 이 가르침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전에 관심이 없고, 열심치 못한 사람에게 평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꼭 외적인 성전만을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몸자체가 곧 성령의 성전이라고 하셨다. 하깨는 우리 스스로가 참된 성전을 우리 안에 짓지 못할 때 하느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 안에 참된 성전을 지으려는 노력을 할 때, 그 다음에 하느님께서 나머지를 축복해 주신다고 하였다. 그 결과 515년에 새성전 헌당식을 가졌다.

이책은 4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성전을 재건하면 풍요의 시대가 온다(1,1-14)

. 성전 건축의 독촉(1,15. 2,15-19)

. 메시아시대의 영화로운 성전(1,15b-2,14)

. 야훼의 날에 대한 예언(2,20-23)

 

4. 즈가리야서 1(1-8)

 

즈가리야는 하깨와 동시대에 활동을 한 예언자이며, 하깨와 더불어 성전 재건을 위해 노력한 예언자이다. 원래 이 책의 배경을 살펴보면, 귀환후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다인들이 바빌론에서 살던 것보다 더 못하게 사는 것을 본 예언자가 성전을 재건하자고 용기를 북돋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성전을 다시 재건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워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이나 지나서야 그들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1부와 2부로 나누는 이유는 1부와 2부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강의 시작에 예언자들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에 따라 고찰하기로 하였던 점을 상기하고, 학자들이 1부를 원 즈가리야서라고 부르는 점을 참조하여 일단 1부를 살펴보기로 하자.

 

1부는 520년부터 518년 사이에 쓰여진 것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환상들이 나타나며, 영광을 잃은 성도 예루살렘에 야훼께서 곧 오시리라는 말씀을 전한다. 이 예언은 즈가리야서의 핵심 사항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환상 속에서 야훼께서 오시기전 이루어질 사항들을 이야기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이 예언자는 그가 본 환상들을 통하여, 야훼께서 예루살렘과 자기 백성들을 많이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날이 오도록 당신께서 준비하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5. 3이사야서(56-66)

 

3이사야서는 분명히 제 1이사야나 제 2이사야와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2이사야서가 바빌론 포로기를 다루고 있는데 반하여 제 3이사야서는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직면한 여러 가지 어려움 들을 조명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많은 시간차를 가진 연유로 하여 이 부분을 제 3이사야서라고 부른다.

 

이책의 배경은 어두움과 빛 그 자체이다. 유배이후 돌아온 공동체에 남아진 것은 파괴된 성전과 성도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배지에서 귀환한 백성, 과거에 끌려가지 않고 남았던 백성, 그리고 그 사이에 집권자들에 의해 강제 이주된 백성, 해외의 디아스포라에 남아 있는 백성등등.....이러한 외적 상황에 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도 없고 생활도 없는 암흑 자체였다고 할만한 이시기에 예언자는 어려운 사회, 절망과 타락이 가득한 이 백성, 이 사회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에, 과연 어떻게 하여 이 백성이 야훼 하느님 안에 하나된 백성의 모습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당면 관심사였다. 그래서 제 3이사야서는 우상숭배의 퇴치, 유다인끼리의 반목과 분열을 타파하기, 외국인에 대한 반대등의 이야기가 강하게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3이사야서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비길 데 없는 하느님, 만민의 하느님, 영원하신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들의 4가지 모습의 하느님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예언서도 즈가리야 시대때 편찬된 것으로 드러난다.

 

6. 오바디야서

 

온통 계시로 일관되다 싶은 이 책은 500-46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야훼의 날에 관한 심판 개념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 종말론적인 성격의 책이라고 하겠다. 이 책은 구약성서중 가장 짧은 책으로 전체가 21절밖에 되지 않는다. 야훼 하느님의 능력과 정의를 찬미하는 작은 부분을 제외하면 도대체 성서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에돔족을 저주하는 등의 복수주의적 개념이 가득한 책이다.

 

7. 말라키서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제와 신자들의 경신례가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 제관계의 일원이 아니었나 싶지만 설득력이 적은 추측일 뿐이다. 이 책의 집필연대는 약 460년대가 아닐까 추정된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폐르샤의 지배를 아직까지 받을 때이다. 그리고 성전이 재건되었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의 신심은 아주 미약할 뿐인 시대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성의 없고 불충실한 예배로 일관된 종교생활을 하였으며 백성들의 윤리생활도 타락하고 퇴폐한 모습이었다. 말라기서는 하느님의 특사로서 메신저를 언급하여 마치도 신약의 요한 세자를 연상하게 한다.

 

8. 요엘

 

요엘서는 기원전 400년경의 작품으로 작가는 미상이다. 요엘이라는 말의 뜻은야훼는 나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내용을 보면 메뚜기떼의 침범으로 고통을 받는 기회에 회개를 권고하는(1-2) 내용을 시작으로, ‘야훼의 날에 이교 백성을 심판하고,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이 결정적으로 승리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3-4).

 

요엘서의 특수한 가르침은 메시아시대에 하느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 넣어 주신다는 것(3,1-5. 대조; 사도2,16-21), 참회의 표시로 기도와 재계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신약시대에서와 사도시대에서도 보속의 방법으로 도입되어 오늘의 교회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최근 김수환 추기경께서 마음을 비우라고 하셨던 적이 있어 한때 이 말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이 언어를 의미 있게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요엘예언자였다. 무릇 모든 신앙인들은 요엘의 누구든 자신을 비우는 시기를 겪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늘 묵상하는 신자여야 할 것이다.

 

9. 요나

 

요나서는 예언서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지혜문학의 교훈 서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2열왕기 14,25에 나오는 요나는 단지 이 책의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이 책의 내용을 문학 양식사적으로 볼 때 유배 이후인 기원전 400년경의 작품으로 본다.

학자들은 그 누구도 이 책의 내용을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로 보지 않으며, 비록 신약에서 여러차레 인용되고 있으나 교훈을 위한 예로서 인용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마태12,41. 루가11,29-32). 이책이 전하는 사상은 유배이후의 유다인들이 편협한 국수주의적인 성격을 띄게되자 예언자가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한 설화라고 판단한다.

 

10. 2즈가리야(9-14).

 

이 부분은 전반부와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희랍인들이 등장하는 점으로 보아(3,13), 알렉산더 대왕의 희랍시대 초기(4세기말쯤)의 작품으로 보인다. 물론 기본자료중 몇가지는 제 1즈가리야서 시대의 것이거나 그 조금 후의 것일 수도 있다. 시대적으로, 역사적으로 보아 제 2즈가리야서는 예언서중 제일 마지막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메시아 사상 때문에 중요한 책이다.

 

다윗 가문의 부흥(12), 정의롭고, 겸손하고, 인자한 구세주(9,9-10), 종말적 투쟁에서 죽어서 구원을 주는 찔리운자(12,10), 전쟁과 경신례를 통한 신정정치 사상들은 신약의 그리스도의 모습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마태21,4-5. 27,9). 또한 이 책에서 말하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13,7)신약의 복음에(마태26,31. 마르14,27. 요한19,37) 그대로 인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당시 하느님나라를 기다리며, 준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정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묵상하고 그들의 열망을 우리의 것으로 할 은총을 구해야 할 것이다.

 

11. 다니엘서

 

다니엘서는 히브리 성서에는 지혜문학으로 분류되어 있으나 희랍어 경전에는 예언서로 분류되어 있다. 물론 내용 중에 지혜 문학적 부분도 있고(1-6), 묵시문학적 부분도 있어서(7-12) 혼란스럽지만, 성격상으로는 예언서라고 할 수 있겠으나, 시대적으로 보아 예언자 시대가 지난 후대에 저술된 탓에 에언서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성서라고 하겠다. 이 책은 여러 언어로 쓰여진 것이 합하여진 것인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그 누구도 모른다. 저자는 희랍문명에 혐오감이 큰 하시딤(경건주의자)중 하나일 것이다.

 

내용을 역사비평 방법론으로 살펴보면 대략 167-164년 사이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이 책의 주요 사상은 다른 어떤 예언서보다 뚜렷한 하느님의 계획과 목적을 제시한다. 저자는 역사가 하느님의 구원섭리 즉, 구세사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파하고 강조한다. 세상의 악이 비록 잠깐의 지배를 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하느님의 승리와 사람의 아들의 권능에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구세사적 조명의 방법론은 개인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우리네 인생은 하느님의 섭리와 지배아래 움직이는, 마지막 구원의 그날을 향한 엄청난 드라마라고 말한다.

 

물론 과거의 예언자들의 사상도 이런 맥락에서 가르침을 주었지만, 다니엘서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하느님의 최후의 심판개념까지를 말하고 있고, 그 하느님은 산 자들뿐만이 아니라 죽은 이들까지도 다스린다는 사상으로 부활신앙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발전은 이 책이 167년의 성전침해사건(11,31), 유다인들의 죽음(11,33), 유다 마카베오의 항전을 알고 있고 유다의 첫승리(11,34)를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카베오서의 부활신앙을 알고 있다고 추론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유출한 것이다.

이책은 3부로 나뉜다.

. 바빌론 황제의 종으로 선택된 다니엘(1-6)

. 묵시문학적 현시(7-12)

. 부록; 세아이의 노래, 다니엘과 수산나, 벨과 뱀(3,24-90. 13-14).

 

예언서의 문학 유형 연구

 

구약의 기록 예언자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그들의 투철한 소명의식이다. 우리는 예언자들의 소명설화를 살펴보면서 우리들을 불러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성실한 응답을 드리도록하자. 그 다음에 예언자서의 심판선포, 구원선포의 양식사적 고찰을 하여보자.

 

. 예언자들의 소명설화에 대한 문학유형 연구

 

이미 구약 모세 5경에서 살펴본 바 처럼 구약의 선조들은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죄와 악을 거부하지 못하고 늘 얽메여 사는가?’ ‘왜 세상은 착하게 사는 사람이 복받지 못하고 못되게 사는 사람은 온갖 풍요를 누릴까?’ 라는등의 깊은 묵상속에서 인간의 삶은 늘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실한 응답이라는 것을 깨닫고, ‘바로 그길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자 존재 완성의 길이다라고 고백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고백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삶을 연구하던 성서학자들은 그들의 소명기, 즉 부르심에 응답한 기록들에서 이 소명기가 어떤 특별한 양식에 맞추어 작성되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소명 양식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최근에 그 분야의 대표적 학자들은 E. Kutsch, Richter, B. Long, N. Habel등이다. 이들이 지금까지 연구한 결론을 보면, 소명설화의 뼈대중 몇가지 기본구조(Gattung)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Gattung은 여러자료의 공통점을 뽑아 놓은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이들은 문학 양식을 유형적으로 비교 연구한 것이므로 인물 중심이라던지, 아니면 심리적 분석이라던지의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문학 양식의 연구를 한 결과를 기초로 하여 기본구조를 뽑아 놓은 것이다.

 

이들이 소명설화의 기본자료로 사용한 성서의 자료는

. 모세의 소명기(출애3,1-12), . 기드온의 소명기(판관6,11-17), . 예레미야의 소명기(예레1,4-10), . 이사야의 소명기(이사6,1-13), 에제키엘의 소명기(에제1,1-3,15)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의 의견을 제시했지만 그중 공통적이고도 대표적인 학설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의 주장에 동의한 학자는 미국의 N. Habel이다. 우리는 여기서 N. Habel이 말하는 소명설화를 문학 양식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을 배워보기로 하자.

문학양식비평이란, 우선 구조를 분석하고, 이와 유사한 내용을 여러개 놓고 구분을 하며, 동일 구조의 상투어를 알아내고, 오랜 세월동안 동일한 경우에 되풀이되는 일정한 양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정된 양식이 있다면 이를 Gattung이라고 하며, 이러한 양식이 나오게 된 사회적 배경을 삶의 자리(Sitz im leben. setting in life)라고 한다. 따라서 문학양식비평은 문학양식과 삶의 자리를 알아내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하겠다.

 

N. Habel의 경우, 그가 고정한 문학양식은 다음과 같다.

. 신 대 면 ; 예언자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

. 도 입 문 ; 이스라엘의 난국을 설명함, 내용은 다양할수 있다.

. 사명부여 ; 문제를 제기한후 사명을 부여한다.

. 반 대 ; 하느님의 엄청난 부르심앞에 인간적으로 자격이 없음을 알고 사양.

. 도움의 약속 ;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언질.

. 표 징 ; 하느님이 함께하고 있다는 징표를 보여주신다.

 

이제 우리는 위의 문학양식을 가지고 특별히 구약의 예언자중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이라고 일컷는 예레미야의 소명기를 문학양식사적으로 비평하여 보자.

 

예레미야의 소명양식(1,4-10)

신명18,9-22에는 예언자의 참모습을 전하여 주며 후대의 예언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말한다. 특히 8절에서 내가 나의 말을그의 입에 담아 주리니라는 언급이 있는데 예레미야의 소명기를 보면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에 담아주는 장면이 있다. 결국 예레미야의 소명양식의 의도는, 그 옛날 신명기시대에 하느님께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시고 그의 입에 당신의 말씀을 담아 주신다고 하셨듯이 나 예레미야야 말로 그옛날 모세의 직분을 이은 참 예언자임을 알리기 위해 신명기의 소명양식을 이용했다고 볼수 있다.

, 이러한 양식으로 불리움을 받은 모세가 위대한 예언자였듯이 나의 소명기도 모세와 같으니 나역시 모세처럼 위대한 예언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예레미야의 소명기는 모세의 말씀에 맞추어 기록되어진 것이다. 그러한 의도를 다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예레미야가 이용한 소명양식이 모세의 소명양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1. 신대면(1,4; 내가 받은 야훼의 말씀은 이러했다)

모세나 기드온은 야훼의 천사를 환시로 보는 것을 말하는데 예레미야는 환청, 즉 들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레미야가 신을 대면했느냐, 못했느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v7-8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나오는데 도대체 만나지 않고 어떻게 대화를 나누겠는가? 특히 v9는 하느님이 예레미야와 함께 계심을 드러낸다.

또한 23,1-18에서 거짓 예언자를 공박할 때 자기는 환시속에 하느님을 만났으나 너희는 만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 뒷받침 한다. 따라서 예레1,4는 비록 형식이 축소되어 말씀을 전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하느님을 대면한 것으로서 신대면의 요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그 내용이 신발현의 체험을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신대면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소명양식에 넣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예레미야는 어떤형태로든 신대면을 했다고 보며, 다만 그 양식이 말씀의 전수로 전해지고 있다고 하겠다.

 

2. 도입문(1,5a. 원문번역; 내가 너를 복중에 형성하기전에 내가 너를 알았다. 내가 너를 복중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거룩하게 하였다.) 이탤릭체 부분은 공동번역에서 생략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는 알았다거룩하게 하였다이다. 히브리적 사유의 특성으로 알다는 상대를 존재론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하며, ‘거룩하게 하다는 성별과 성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부분은 예레미야가 정상적인 생활로부터 결별되도록 성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셔서 그가 잉태되고, 출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분을 읽다보면 그는 어려움에 처할때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까지 하였으나 하느님이 자기를 선택하셨고, 성별하셨다는 소명을 되뇌이며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선택하셨고, 부르셨으니 나에게는 이길말고는 아무길도 없다는, 다른 가능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교회의 사도직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모름지기 예레미야와 같은 소명감을 가져야 하느님의 일꾼으로 하느님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헨리 나윈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읽어 보기 바란다. 교우들이 소명에 충실하려 할 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상처입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명을 완수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서 배울수 있는 것이다.

 

3. 사명부여(1,5b 원문; 내가 너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웠다)

다른 예언자의 사명부여에는 항상 나오는 상투어가 있다. 그것은 가라???라는 동사와, ‘보낸다, 파견한다ח?? 라는 동사가 있다(모세; 출애3,10. 기드온; 판관6,14). 이러한 동사가 같는 의미는 도입문의 난국에 대처하여 야훼 하느님의 중개자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즉 예언자에게 부여된 기능은 중개자, 구원자인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이러한 파견의 단어가 없다. N. Habel은 이부분에 대해서 말하길, 이부분은 야훼께서 아주 오랫동안 예레미야를 선택하셨다는 결과를 선포하는 의미로서 사명부여라고 말한다.

 

4. 반대(1,6;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대부분의 예언자의 경우,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는 심각한데 반하여 하느님이 고른 사람은 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고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을 고른 것이다. 모세의 경우도 파라오 앞에서 사람을 죽이고 광야에서 양이나 치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 이 사명은 도저히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었다.

기드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저 평범한 농부였던 그에게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사명은 엄청난 짐이었을 뿐이다. 그가 자신의 현주소를 쳐다볼 때 하느님의 사명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래서 거부를 한 것이다.

즉 자기의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도저히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하느님께 사양을 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부적격성을 인간적 관점에서 전개하며 하느님의 부르심을 사양한 것이다.

예레미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v6아이라는 말은 신체적, 정신적 아이라는 말이 아니라 겸손을 표시하는 자기 낮춤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반대요소는 부르심과 연결되는 성서 전편에 들어 있다. 사도 베드로도 그랬고, 성모님도 그러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반대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하느님의 부르심앞에 자기 자신을 내려다 보니 자신이 형편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사명을 완수하기에는 적당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반대의 뜻을 겸손되이 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하는 모든이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묵상하고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늘 생각하며 하느님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한결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피아노의 거장 루빈스타인을 인터뷰한 기자가 있었다. 당신의 훌륭항 연주의 비결은 무엇이냐고...... 그때 루빈스타인은 이렇게 답하였다. “나는 아직도 내 연주가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들으면 황홀해지나 내 연주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매일 7시간씩 연습을 계속하기를 수십년간 계속하고 있다”. 우리도 부르심에 성실한 응답을 하기위해 루빈스타인의 노력을 배워야 할 것이다.

 

5. 도움의 약속(1,7.8.;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이는 내말이라 어김이 없다.)

8절의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이 구체적인 도움의 약속이다. 다른 학자들은 두려워 말라라는 표현이 구원신탁의 전용물이므로 소명기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구약의 전반에 걸처 어떤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 도움을 약속하실 때 보통으로 쓰시던 말씀이므로 구체적인 도움의 약속이라고 하겠다. 모세와 기드온의 경우를 보면 두곳 모두(출애3,12. 판관6,16)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ה??? י?)는 말씀이 있다.

 

이말중에 ??? 는 하느님께서 도움을 약속하시는 경우에는 항상 따라 붙으니 꼭 챙기도록 하고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의 주체자는 과연 누구신가? 그분은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겠다는데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당신의 말씀을 성취시키고자 응답을 하였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겠다는데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말씀의 중요성은-예언자를 부르실 때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재질의 능력을 보시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그분이 마음에 두셔서 부르셨고, 그분이 함께 계시겠다 하신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과에, 업무에, 소명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가? 사실 세상을 창조때의 모습대로 만드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일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실때에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신약의 사도들의 부르심을 보면, Mc3,13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부르실 때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부르셨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기가 원하여 예언자가 되었거나, 사도가 된 사람은 없다.

다만 하느님께서 그분 마음에 두었던 사람을 부르셨을 뿐이다. 우리가 받은 교회안의 작은 소명도 실은 그분이 우리를 당신 마음에 두셨기에 부르셨고, 우리는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리라 믿었기에 응답을 한 것이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구약의 예언자들은 인간적인 부족함속에 살았지만 그들의 마음이 하느님 보시기 좋았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사람으로 쓰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좋아 하셔서, 마음에 두시고 부르신 것이다.

 

Mc3,13부르셨다는 것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부른 것이 아니다. 본문의 가까이 나아가라는 것은 인간 전존재가 가는 것이지 몸이든, 마음이든 어느 한 부분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우리의 전 존재의 응답이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사도 일수 있고, 예언자 일수 있고, 주일학교 교사 일수 있다.

 

Mc를 보면 본문에 당신이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을 뽑으셨고, 파견하기 위하여 뽑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당신과 함께 있도록(존재론적 목적) 원하셨기에 부르셨다는 사실과, 말씀을 전하도록(기능적 목적)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사실을 묵상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희열에 휩싸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의 1차적 목적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기능적인 목적은 존재론적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하자. 그렇다고 기능적인 목적이 소홀하여서는 않될 것이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열망에 가득차 계신데 나는 그분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있는가?

 

이상의 묵상으로 소명양식에서 가장 마음에 세길 부분은 도움의 약속이라 하겠다. “너의 인간적인 부족함도, 성격의 모남도, 불성실도, 나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질 않는다. 그저 나는 네가 미치도록 좋아서,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너를 옆에 가까이 두고 함께 하고 싶어서 너를 불렀다. 그러니 너는 나와 함께 있어 다오. 행여나 네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랴 할 때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네 옆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내가 네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을 늘 마음에 세겨라.” ??? ה??? י?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이말은 성소의 근본 목적이니 부르심에 응답한 모든 이는 이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6. 표징(1,9-10; 이렇게....너의 입에 담아준다. ....너의 손에 맡긴다.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

자격이 없다고 겸손되이 사양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하느님께서는 함께 있어 주시겠다는 말씀에 머무시지 않고 구체적인 표징을 보여 주신다. 모세나 기드온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구체적인 표징을 보여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 표징이 고정된 문학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과거의 교부들은 부르심이 개인적, 내적 체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체험을 심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르심 이해는 과거의 이해에 새로운 한가지 사실을 추가한다. 그것은 선포이다. 부르심은 선포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예언자의 소명 양식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소명은 완전히 하느님쪽의 부르심이고 늘 함께 계신다는 보증이다.

그렇다면 소명설화는 예언자 한 개인의 내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구약 성서 전체를 요약한 것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성서 전체가 그분의 부르심과 이스라엘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문학양식비평을 근거로 각 예언자들의 소명양식을 분석한 후 표로 작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이 양식을 바탕으로 성서 본문을 비교하여 그 차이를 살펴보고 나름대로의 연구와 묵상을 하여보기 바란다. 분명한 것은 예언 소명이 엄격한 의미에서 도식에 가깝지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도식이 체계를 갖추었는지를 따져 보는 것이 의미가 있으며, 그 이면의 삶의 자리와 함께 신앙적 응답의 묵상을 한다면 분명히 어러분은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의 나를 얼마나 크게 사랑하시는 가를 알 수 있고, 그분의 부르심에 감사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 세

기 드 온

예 레 미 야

이 사 야

에 제 키 엘

신 대 면

출애 3,1-4a

판관 6,11-12a

예레 1,4

이사 6,1-4

에제 1,1-28

도 입 문

출애 3,4b-9

판관 6,12b-13

예레 1,5a

이사 6,5-7

에제 2,1-2

사 명 부 여

출애 3,10

판관 6,14

예레 1,5b

이사 6,8-10

에제 2,3-5

반 대

출애 3,11

판관 6,15

예레 1,6

이사 6,11a(?)

?

도움의 약속

출애 3,12a

판관 6,16

예레 1,7-8

이사 6,11-13

에제 2,6-7

표 징

출애 3,12b

판관 6,17

예레 1,9-10

?

에제 2,8-3,15

 

Habel의 도식을 보면 모세와 기드온에는 잘 맞는 것 같고, 예레미야의 경우는 대부분이 맞는 것 같지만 조금 유동성을 보이는 것같고, 이사야나 에제키엘의 경우에는 반대와 표징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결국 우리가 소명양식에서 볼수 있는 것은 반대요소가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표징이 없는것과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그당시의 삶의 자리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고, 소명양식에도 문학양식의 다양성과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N. Habel은 예언자의 소명양식의 삶의 자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창세기 24장에는 이사악이 아내를 얻을 때 종이 파견되는데, 이때 예언자가 파견될 때 표징을 얻는것과 같은 양식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파견된 종이 목적지에 가서 말할 때 마치 파견한 아브라함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전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전하는 것과 같은 양식이라는 것이다. 파견된 사자가 주인이 하는 것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메신저 스피취라고 하며, 그러한 양식을 메신저 포뮬라라고 한다.

즉 파견된 자의 권위를 보장해 주는 것이 메신저 포뮬라인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메신저 포뮬라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하는 메신저의 신임장을 보장해주는 것이 소명설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대 중근동에서 왕이 사자를 파견할 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양식이며 Habel은 이러한 문학양식으로서의 고정된 틀이 있었다고 하나 당시 중근동 문헌에는 일부 찾아 볼수 있지만 성서상에는 그 근거를 찾아볼수 없다. 원래 삶의 자리에 대한 연구는 ReventlowC. Westermann이 깊이 있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N. Habel은 베스터만의 의견에 동조하고 근거로 하여 자기의 양식을 편다.

 

결론적으로 Text자체를 연구하여 소명설화를 분석한 결과 어느 특정한 양식이 있음을 알수 있고, 그러나 그 양식은 반대요소가 있는 것과 없는것의 2가지 양식으로 나눌수 있으며 또한 소명설화는 메신저의 파견식에서 그 삶의 자리를 찾아볼수 있다고 하겠다. 또한 소명설화 자체가 일정한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전통적 모티브에는 약간의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예언서를 공부하다보면 제기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누가 말하는가? 누구에게 말하는가? 무엇을 말하는가? 이다.

 

1. 누가 말하는가?

 

이 질문은 예언 연설문의 기원과 원천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웁게도 우리는 이질문에 분명한 답을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예언은 1차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고 2차적으로 예언자 자신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갈라 놓을 수 없는 것이 성서의 말씀이다.

어떤 학자들은 예언을 심판선포와 심판의 이유(고발)로 나눈후 심판선포는 하느님의 것이고 왜 심판하게 되었나 하는 이유의 설명은 예언자의 숙고이다 라고 말하지만 예언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심판선포에도 예언자의 숙고가 포함되어 있고, 전래되면서 삽입과정을 거쳤으므로 예언 연설문의 어디까지가 하느님의 것이고 어디까지가 예언자의 것인지 알수가 없다. 우리가 내릴수 있는 결론은 다만 예언은 하느님이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하느님 자신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언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예언자는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내릴수 있는 결론은 예언자는 하느님의 파견을 받은 메신저(Messenger)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언자는 자기를 파견한 분의 권위로 말씀을 선포하므로 이를 메신저 포뮬러(Messenger Formula)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말하는 이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 하실 때, 친히 말씀하시거나 아니면 천사를 시켜서 말씀 하셨다. 성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때 하느님의 천사는 사실은 하느님 자신이셨다. 그러나 예언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 자신과 구별되는 다른 인격체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시고,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자인 것이다. 이때 하느님의 사자로서 예언자가 하는 말의 상투어로 나타나는 것이 메신저 포뮬러인데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것이다.

 

이 메신저 포뮬러는 기록문화가 발전하기 이전에 이미 사용되던 양식으로 성서에 여러곳에서 사용되었다. 그 전형적인 표현을 우리는 창세32,3-5에서 볼수 있다. 야곱은 머슴들을 앞서 보내면서’, 여기서 보낸다는 파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파견되는 머슴들은 메신저이다. 보내는 대상은 그의 형 에사오이다. 장소는 에돔벌판 세일지방이다. 여기서 사명부여가 나온다. 원문은, “그들에게 시키기를, 나의 형 에사오에게 가서 너희는 이렇게 말하여라(밑줄 이테리체가 사명부여이다). 당신의 종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밑줄 이테리체가 메신저포뮬러이다).

이때 메신저포뮬러는 야곱 자신이 하는 말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갈을 듣는 에사오는 종이 하는 그말을 실제로 야곱 자신이 하는 말로 듣게 되는 것이다. 명령하달내용을 보면 메시지 내용이 1인칭이며 두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상황설명이고 뒤는 끝맺음이다. 32,3-5를 구분해보면,

. 파견; 메신저를 뽑고, 어디의 누구에게 가라.

. 메시지 하달; 사명부여와 M.F.로 도입되는 메시지(상황설명, 보내는 목적 설명).

. 전달; M.F.가 도입되고, 1인칭으로 그대로 상황설명하고, 메시지 하달부분을 그대로 전한다.

예언자들의 경우도 이러한 M.F.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때 M.F.는 두 번 사용되었는데, 주목할 것은 파견자가 말할때는 현재형이며, 사자가 장소에 가서 전할때는 완료형이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미 이루어 졌음을 뜻한다. 따라서 예언자의 연설문은 야훼 하느님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2열왕18,28에서도 이러한 양식을 볼수 있다.

 

성서의 M.F.는 모두 구전 전승이다. 원래 말씀은 글이 아닌 것이다.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미사때 독서나 복음을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읽으려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묵상중에 성서를 읽을때에도 그분의 말씀을 귀로 듣는다는 생각을 하며 읽기를 바란다. 성서는 봉독되는 것이며 우리는 경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10,17에서 믿음은 들음으로서 온다고 하였다.

 

2. 누구에게 말하는가?

 

예언의 1차적 대상은 이스라엘이다. 이때 특정한 어느 개인이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다음에 2차적으로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외국이 된다.

.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할때는 특별히 왕에게 대하여 말할때가 많다. 왕 개인의 죄상에 대하여 고발을 하고, 그에 따르는 하느님의 선포를 주로 다루는 법정이 삶의 자리이다. 그런데 왕의 경우에는 왕을 법정에 고발하고 처벌할 사람이 없으므로 하느님 친히 예언자를 통해 죄상을 고발하고 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 개인(고발 그뒤에 심판); 아모7,16-17을 보면 들어라라는 말로 예언을 시작하며, 아마지아의 죄상을 고발하고, 그뒤로 심판선포를 한다. 1열왕21,18-19는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왕이 탈취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때 이세벨의 구체적인 범죄사실을 응징하기 위해 예언자가 등장한다. “나봇에게 가서사명을 부여하고, 고발을 하도록 한다. “네가 사람을 죽이고”. 이때 고발문은 그 자체로 M.F.인 셈이다. 따라서 개인에게 내린 심판은 구체적 상황이 있고, 현장의 고발이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현장의 고발이므로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치 않다.

 

그러니 서론이 길어야 할 필요가 없고, 심판선포도 내용이 간단하다. 이 경우 처벌의 심판선포를 보면, “나봇의 피를 핥은 개들이 같은 자리에서 네피도 핥으리라로 되어 있다. 2열왕1,3-4은 아마지아가 아프고 바알 신에게 회복여부를 묻던 이야기이다. “그런데 야훼의 천사가 앨리아에게라는 부분으로 사명부여가 있고, “이스라엘은 신이 없어서가느냐?”라고 하는 고발이 나온다. 먼저 소개된 아모스는 긍정문인데 뒤에 소개된 경우는 의문문 형식이다. 의문문 형식은 범죄현장에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결국 이 양식에서, “나 야훼가 선포한다는 것은 M.F.이고, “너는 낳지않고 죽으리라는 부분은 심판선포인 것이다.

개인에게 하는 심판선포의 특징은, 설화체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구체적인 범죄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왕이 범죄할 때 그를 단죄할 자가 없으므로 야훼께서는 그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전하도록 예언자를 동원하였고, 예언자는 M.F.를 통하여 하느님의 결정사항을 1인칭으로 대단히 짧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M.F.로 도입되는 짧은 말씀이 심판선포인 것이다.

 

개인에 대한 심판선포의 삶의 자리는 법정의 소송절차라고 할 수 있다. 신법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을 바탕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 법을 어긴자는 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왕이 법을 어겼다면 그를 심판할 자가 없으니 이럴 때 하느님이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1사무2,27-36. 13,11-14. 15,10-31. 2사무12장 전체. 1열왕14,7-14. 20, 35-43. 21,17-22. 2열왕21,10-15. 20,14-19. 아모7,14-17. 이사22,15-25. 27,22-30. 예레20,1-6. 22,7-12. v13-19. v24-27. 28,12-16. 29,24-32. 36,29-30등등 다양하다. 특별히 열왕기에 나오는 심판선포는 모두가 개인에 대한 선포이며 단한번도 단체나 외국에 대한 것은 없다.

 

예레미야 예언자 이후에는 개인심판에 대한 선포가 없다. 따라서 개인에 대한 심판선포는 기록예언자가 나오기 이전의 왕정시대에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개인 선포가 단체선포보다 더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오늘 이 자리의 우리에게 묵상거리가 제공된다. 이시대 우리들은 온갖 사회적 부조리와 경제적 불의 그리고 윤리적 혼돈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 우리가 해야 할 말은 무엇이고 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소위 교회의 현실참여에 대한 묵상이 그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고 있다면, 우리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소명을 살아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예언자의 M.F.처럼, 그들은 자신의 말이 하느님의 특별한 말씀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말씀의 선포라는 소명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며 살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 이스라엘 백성 전체 즉, 민족들에 대한 심판선포(도입 고발 M.F. 심판); 이경우, 백성 전체가 심판의 대상일 때에는 개인에 대한 선포와는 다른 부분이 있다. 즉 서론으로 시작되는 말씀의 구조가 다른 것이다. 그 구조란, 개인에게 하는 선포는 구조가 간단하며, 초기 예언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러한 기본구조가 발달하여 많은 수의 사람이 잘못하게 될 때, 많은 죄를 오랜 세월동안 범할 때 고발된다는 것이다. 이때에는 사건자체의 시간적인 연결이나 현실성이 부족한 경우가 있다.

 

이때 이유를 말하는 도입부분이나 고발부분은 2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민족에 대한 심판선포는 글로 문학적인 구성양식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심판의 선고에 있어서는 라는 1인칭으로 개입하고 그 결과는 라는 2인칭으로 나타낸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심판선포의 양식을 도식화 한다면, 이유(고발 고발의 전개), 심판선포(개입 개입의 결과인 선고) 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개입이 강조되거나 선고가 강조되는 경우도 있고, 고발이 강조되는 경우도 있도 전개가 장황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위 양식은 분명히 다 갖추고 있다.

예레2,1-13을 보면, v1-8고발’, v9선고’, v10-13은 고발이다. 여기에서는 선고부분이 축소되고 도입부분이 강조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부분은 민족들에 대한 심판선포로 분류한다. 이처럼 성서에서 어떤 경우에는 고발이 강조되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선고가 강조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어느 한편이 아주 삭제되는 경우도 있다.

 

이사2,12-17을 보면, 이곳에는 선고부분만이 소개된다. 이처럼 기본 요소가 다 있지 않고 하나만 있는 것이 아모3,13-15에도 소개된다. 이사 12b-16까지를 보면 별도의 곱잘 내용이 없는 듯하지만 뽑내고 거만하게 구는 것의 지적이 곧 고발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겠다. 그러므로 변화된 양식에서 도입부분의 이유와 고발이 함축되었다고 하겠다.

 

예레26,18에는 선포 부분만이 소개된다. 이 내용은 미카3,9-12에 전체의 구조가 자세히 소개되는데 그중 일부만이 예레미야서에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느 한 부분만이 소개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유와 고발등의 기본구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성서를 읽어야 할 것이다.

 

예언의 양식도 세월이 가면서 이완되고 변화된 흔적을 볼수 있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대로 기본 양식이 이완되자 고발과 선포가 구별되는 양식이 약화되어 선포속에 이유를 담기도 하고 이유속에 선포를 담기도 하였다. 세월이 가면서 도입과 고발이 섞여 사용되었고, 이로 인하여 M.F.가 약화되는 경우가 생겼다. 따라서 M.F.는 세월이 가면서 원래 가지던 의미를 잃어 버리고 나중에는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M.F.그러므로라는 단어로 대치되며 축소되거나 문장 첫머리에 그러므로라는 표현으로나 혹은 때문에라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양식이 바뀌게 되자 고발부분이 겹치거나 선포부분이 겹치는 현상도 보이게 된다.

 

간혹 보이는 특별한 것은 기본 구조에 다른 부분이 첨가되어 확대 된 것이다. 고발의 확대나 심판의 확대나 기본틀의 확대등이 그것이다. 예레미야서나 특히 에제키엘서에서 이런 모습을 보는데 가령 예언자의 특징적인 모습을 전하는 것은 모두 이런류의 확대라고 볼수 있다. 예를 들어 아모2,6-11에는 고발부분이 확대되어 있고, 호세9,10-13. 이사5,1-7. 미카1,4. 에제16-20장등이 그렇다.

. 예언 대상이 외국일 때에는 예외 없이 특정한 백성 전체를 싸잡아서 선포하는 것이 특징이다. 8-7세기의 심판선포중에는 외국에 대한 심판선포양식이 있는데 이것들도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심판선포의 양식과 비슷하다. 아모스서 1-2장과 이사야서 7-8장이 그렇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외국에 대한 심판선포는 그 자체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선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이 멸망하는 것은 외국에 대한 심판이지만 그 이면의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실질적인 구원선포라는 것이다. 따라서 외국의 심판선포는 이스라엘의 구원선포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제껏 우리는 예언의 양식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이 양식에는 기본양식→②기본양식의 변형→③붕괴 의 모습을 취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587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바빌론 유배를 떠날 때 이스라엘은 과거 예언자들의 예언의 실현을 감지할 수 있었다. 587년 이전에는 모든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예언의 양식에 있어서도 587년은 중대한 분기점이 된다. 왜냐하면 587년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구원선포가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심판선포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유배 이후의 예언서에도 심판선포 양식의 잔재들이 많이 보인다. 그 이유는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 나타나 활동하던 587년 이전의 예언들과 그 고정양식들이 너무나 강한 자극을 주었기에 587년 이후에도 잠재된 영향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587년 이후의 심판선포들은 그자체로 회개에의 초대라는 것이다. 붕괴된 심판선포는 회개하라”, “돌아오라라는 강조점이 있다. 즈카1,1-4의 고발도 실상은 회개로의 초대이다. “너희는 그릇된 길을 버리고 악한 짓을 하지말고 돌아오라라는등의 예언문구는 모두가 회개에의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예언을 보면 여러분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즉 신명기적 관점이다. 신명기계의 역사서인 여호수와에서 열왕기까지에 제시된 신학에 따르면, “벌을 받지 않으려면 회개하여 돌아오라라는 관점이 전개된다.

 

즉 야훼 하느님께 잘 순종하면 복을 주고 불충하면 벌을 주니 벌받지 않으려면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레25,1-13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예언 양식은 민족들에 대한 심판선포양식이지만 그 내용은 지금까지의 고발, 심판과는 달리 회개를 촉구하는 양식이다. 예언자가 회개로 초대하는 것은 구원적 조건인 셈이다. 이러한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곳은 5절의 b항이다.

 

따라서 조건적 심판선포는 회개에의 초대이고, 이러한 양식은 유배이후의 문학지층이며 이런 관점에서 예레미야의 이 부분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는 학자도 있다(Movenkel). 결국 예레 25,1-13은 후대의 편집자가 예레미야의 일생을 요약하여 삽입한 것이며, 유배이후의 예레메야의 삶의 전체를 요약하며 이스라엘의 반응을 떠보면서 회개를 촉구한 것이라고 하겠다(이 역시 모빙켈의 견해임). 이러한 유형은 에제6,1-10. 2역대15,1-7에도 소개되고 있다.

 

우리가 교회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라면 이 시점에서 깊이 묵상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소명이다. 그들이 아무리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 위해 그러한 예언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사실 예수의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도 이스라엘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온힘을 다 바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주일학교 교사라면 우리에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으며 어떤 위로와 희망을 주고자 교안을 작성하며 어떤 활동을 하는가를 생각해 볼일이다. 오늘의 우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리교사라면 망국적 교육열속에서 힘들어 하는 어린이들에게 하느님만이 주실수 있는 위로와 희망을 줄수 선생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무엇을 말하는가?

 

예언자가 말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심판선포와 구원선포이다 우리는 이미 심판선포를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구원선포를 살펴 보기로하자. 우리가 실펴볼 수 있는 대표적 구원선포 예언서는 제 2이사야서이다.

2아사야서의 구원선포 양식은 애원시양식이며 애원시에 삶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애원시란 무엇인가? 시편에 소개되는 애원시는, 도입구, 애원, 하느님의 들어주심, 신뢰표현, 감사의 정 등의 순서로 되어 있는 시를 말한다. 이러한 양식과 비슷한 예언의 양식을 애원시양식이라고 하는 것인데, 구약의 예언서에 구체적으로 표현된 양식은

 

어떤이가 자기의 어려움을 사제에게 말하고, 사제는 하느님께서 너의 어려움을 들어주시어서 ……이렇게 잘 될 것이다라는 말로 끝나는 구원신탁을 말한다. 전례안에서 왕이 백성들 전체에게 재난과 문제점을 생생하게 말하고 사제나 예언자가 하느님의 신탁을 받아서 그들을 위로해 주며 구원을 말해주는 대답이다.

구원선포양식 연구의 선구자였던 Begrich는 위 의 예로서 이사41,8-16. 43,1-3.v5. 44,2-5. 48,17-19. 49,7.v14-15. 51,7-8. 54,4-8. 예레30,10=46,27. 30,11=46,28 등을 거론한다.

그러면 구원신탁에서의 애원시의 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1)먼저 소개되는 말은두려워 말라이다. 이 용어는 오세5경의 창세기에서는 신발현의 의미로 쓰여졌지만 출애, 민수, 신명, 여호등에서는 성전과 관계되었을 때 쓴 용어이다. 그러나 예언서의 구원신탁에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에 대한 약속이며, ).그다음에는 아무게야하는 호칭이 나오고,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는지를 설명하는 말이 나온다.

 

즉 야훼께서 너를 봐주신다는 구체적 말씀이 나온다. ).그다음은 하느님의 개입이 소개되고, ).개입의 결과로 미래가 열린다는 선포가 있다. ).그다음에는 애원자가 미래의 일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이다. Begrich는 애원시편을 듣고 사제가 응답해 주는 것이 사제의 구원신탁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제 2이사야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구원 연설은 옛날 사제들의 구원신탁양식에 대한 문학적 모방이라고 하였다.

 

Begrich는 오랜 연구 끝에 구원신탁양식의 요소를 ). 완료시제로 표현된 야훼의 개입선포로 보았다. 이러한 어법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상한 어법이나, 예언자가 완료시제로 표현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일에는 틀림이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히브리말에는 시제가 없다. 다만 완료와 미완료만이 구분된다. 또한 시간개념에는 동사가 없다. 따라서 야훼께서 개입하셨다면 그 결과는 자명한 것이다.애원자의 경우, 그가 하느님께 받은 것은 미래에 관한 것인데, 말씀에는 이미 하느님의 행동이 완료된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완료된 일이기에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 개입의 결과로 새로운 주어가 등장한다. ). 개입의 목적이 소개된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 찬미, 믿음, 승리등을 드러내는 것이다. )41,20.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구원선포에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개입하시는 이유를 궂이 찾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다는 것, 하느님께서 계약의 파트너로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으니, 그분의 자비와 사랑만이 이유라는 것이다.

 

Begrich는 제2이사야가 사제가 아니며, 구원신탁에 사용된 것을 모방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는 54,7.v8. 42,14. 41,17에서 한 예언자의 불평으로보아, 이 불평은 집단이 처한 상황을 말하며 애원을 하는 묘사이고 그 문형이 여러 가지이고, 43,18에는 두려워 말라라는 말이 나와야 할 자리에 이런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말의 배경은 제2이사야가 유배기간에 활동한 살함이므로 유배 이전의 기억을 상기 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언쟁들이 나오는 것은, 유배기간에 백성들이 당면하게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예언자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해명해 주어야 하는 상황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문학양식으로 그리며 제2이사야가 그리는 하느님은 창조주 하느님, 유배 이전의 하느님, 군대의 하느님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유배시기에 왜 창조주 하느님을 그리게 된 것일까? 그 이유를 Begrich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 즉 하느님은 우주의 원초적 근원이시고 우주만물의 근원이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그 하느님이 바빌론의 하느님도 되시니, 따라서 지금의 유배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바빌론의 하느님과 싸워서 진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아울러 유배 이전의 고통을 죄의 벌로 본 것에 반하여, 2이사야는 고통의 의미를 대속의 개념으로 승화사켰다고 보았다.

 

Von Waldo(폰 발도)Begrich의 작업위에 자기의 견해를 전개 하였는데 이 역시 관심있게 살펴볼 가치있는 것이기에 그의 주장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Begrich가 말하는 것은 제2이사야의 구원신탁이 사제의 구원신탁의 문학적 모방이라는 주장인데 반하여 Waldo, 예언자 자신이 제의적 상황속에서 애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느님께 신탁을 발한 제의예언자였다는 것이다. )로서 2역대20장에서 모압과 암몬사람들이 쳐들어 올 때 기도한 여호사밧의 기도문은 시편의 애원시와 같다. Waldo의 의견으로는 이때 v14-17의 내용으로보아 이 부분이 예언자의 구원선포양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이스라엘백성이 애원을 하고, 이말을 듣고 레위 사람인 에지엘이 하느님의 신탁을 말하는데 이것이 구원신탁의 전형적인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Waldo의 주장은 2역대20,14야훼의 영을 받아 말했다는 데서 근거하고 있다. 원래 사제는 하나의 제도이다. 그렇다면 사제의 신탁은 제도적인 신탁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영을 받아, 하느님의 영으로서 신탁을 전하는 사람이다. 20,14영을 받아라는 문구로 보면 그는 예언자이고, 그가 야훼께서 이르시는 말씀이요라는 M.F.를 말하고 그뒤에 하느님의 신탁을 전한다면, 이것은 예언자의 구원선포양식에 가깝고, 따라서 제2이사야는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예언자가 하느님의 신탁을 전하는 구원선포양식이라는 것이다.

Waldo는 이런 전제하에 제2이사야의 구원선포양식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도입구; 두려워 말라. 41,10.v14. 43,1.v5a. 44,2. 51,7. 54,4. 야훼의 개입; 이제 들어라 나의 종아. 44,1. 41,17. 43,19 46,13. 개입의 결과문; 주어가 바뀌고 대부분 미완료. 41,10. 42,17. 49,11-13. 55,5. 개입의 목적; 야훼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41,16.v20. 43,7.v21. 49,23. 55,5.

성서학계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Begrich의 의견을 지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로는, Waldo의 양식이 일정치 않고,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를 사제의 제의식에서 볼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Begreich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한 학자가 있다. 그는 C. Westermann이다. 그는 Begrich의 사제의 구원신탁의 모방이라는 데에 지지를 하면서 이 모두를 하나의 양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하여 개인의 애원신탁에 대한 구원신탁, 집단의 애원에 대한 구원선포의 두가지로 나눌수 있다고 하였다. 41,8-13을 대표적 예문으로 들은 그는

직접호칭, 구원확약, 구체화문, 결과문, 최종목적으로 분류하였다. 그는 두려워 말라는 경우는 개인에 대한 신탁에만 쓰인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집단에 대한 구원선포에는 두려워 말라는 부분이 빠졌다고 지적한다. 그는 41,17-20을 그 대표적 예로 들었다. 여기서는 집단탄원암시, 구원선포(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돌보심, 하느님의 개입), 목적으로 나뉘인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모든 것은 우리가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도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성서의 연구였다. 이후의 각종 연구는 지금까지의 배움을 바탕으로 정진 해 볼 일이다.

 

구약성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간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라고 하겠다. 물론 하느님이 관계의 대상으로 삼은 이스라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백성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안에서 그들과 관계를 가지신 것이다. 이때 하느님께서 맺으신 계약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해야할 계약의 충실성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그분은 항상 당신의 계약에 충실하셨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백성이 갖는 계약에의 충실성에 있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된 이스라엘은 하느님은 우리편이라는 거짓 안정감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간혹은 우상숭배에 빠지고, 계약의 의무에 소홀하게 된다. 무릇 계약이란 그 의무수행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응답인데 그들의 우상숭배는 이 계약을 정면으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하느님께 의지하며 신앙적 관점에서 위기를 극복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외세를 끌여들여 위기를 극복하려 함으로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외면하였다.

이에 등장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예언자들이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을 질책하고 야훼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정신인 계약정신으로 돌아가라고 그들을 제촉한다. “사막으로 돌아가라는 이 말은 과거 사막에서 야훼 화느님만을 믿고 살았던 그 순수한 신앙의 시대로 돌아가지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말은 역사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강대국과의 결탁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그렇게 될 때 야훼의 날이 찾아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시켜서 이스라엘의 남은자에게 종말론적 희망을 약속하는, 구원의 이스라엘, 새로운 이스라엘을 위한 새계약을 말씀하신다.

 

이제 우리는 예언서 강의를 마무리 할 시간을 맞이 하였다. 당부하는 바는 예언서를 읽으면서 예언자들의 소명의식과 예언자들의 정열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고 여러 가지의 어려움속에서 부르심에 동의를 하였다.

그들이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그들은 인간적인 것 모두를 배제하고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신뢰하였다. 지금 이자리의 우리는 미래교회의 구성원을 양성하는 소명을 받고, 주일학교 교사로 양성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단 하나, 투철하고 뚜렷한 소명의식과 정열이다. 과거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소명의식과 정열을 우리의 것으로하자!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먹는, 이사야가 더러운 입술을 정화하는이러한 묘사는 하느님 말씀에 투철한 봉사의식과 소명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언서를 배울 때 이런 소명의식과 봉사의식 그리고 신뢰심을 배울수 있다면 분명히 미래 교회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우리의 노력으로 완성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안에는 역사안에서 하느님 백성을 앞으로 이끌고 나아가는 예언자들이 있다. 그리고 교회의 보고를 지키는 수호자들이 있다. 교회안에 있는 이 두 부류의 계층은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오늘날 젊은 이들은 교회의 예언직에 열광한다. 그런 반면 교회의 수호자에게 무조건 보수파라고 하면서 비난의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언자는 하느님 나라를 수호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언자가 하느님 나라를 수호한다는 의식이 없을 때 그의 예언은 거짓 예언이 되고 말 것이다. 예언직만을 생각한다면 예언자는 위에서 내려오는 빛만을 보는 사람이다. 그러니 멀리 넓게 볼수 없다. 그러나 수호자는 교회의 보고를 위해 넓게, 멀리 본다. 이 두 부류의 시선을 함께한 에언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새계약의 시대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예언서 강의를 마치며 그동안 졸강을 들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지혜문학을 말할 때는 조금 더 노력 해 보겠습니다. .

 

지 혜 문 학

 

학습 목표

고대 근동의 지혜 전승의 맥락 속에서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의 토착화 과정을 살피고 아울러 그 독창성을 알아본 후 지혜 문학서들 및 시편의 비판적 입문을 다룬다.

 

참고도서

1. G. von Rad, Theology of O. T. vol ,,.

2. T. D. N. T. σοφια.

3. 전망 17중 지혜 문학의 토착화 과정

4. 신학 총서 No. 1 (P. 오브레)

5. 구약성서 입문, O. 아이스펠트 편. 분도출판사

6. B. W. Anderson, Understanding the O. T. vol .

7. Sellen Fohrer, 구약성서 개론. §38-51 (p 311-406)

8. W. Eichrodt, Theology of the O. T. vol . p 80-92

 

 

서 론

G. von Rad Wisdom

 

@ 지혜란 - 경험에 바탕을 둔 인생과 세상의 법칙에 대한 실천적 지식을 말한다. 히브리어에서 지혜로운’, ‘지혜라는 용어는 그 적용 범위가 대단히 넓고 복잡하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오랜 세월동안 여러 과정을 거쳐 정립된 것이며, 선원, 장인, 정치 고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지식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

 

@ 지혜의 출발점 - 인간의 구체적인 체험에서부터 인생의 여러 문제와 극복, 달관해야 할 과제 등의 많은 사건 속에서 질서, 법칙을 찾아내려 세심한 관찰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참고하여, 일정한 규칙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때 이를 객관화한 후, 고정시켜 표현하는데 이는 인생의 질서, 혹은 법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 표현의 과정에서 - 처음에는 단순한 형태로 사용했다. 즉 발음이 비슷하면서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개념으로 표현 Twin Formulae (). 친구. 사랑고통 etc. 닮은 음으로 표현한 이유는 - 인상, 기억에 좋게 하려는 의도에서 였다. 이러한 Twin Formulae가 잘 발전된 형태가 잠언이다.

 

@ 잠언들은 널리 인정된 진리와 경험들을 언어화 한 것이며, 잠언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하나의 문장으로 된 것이다. 일례로 1 사무 24.14 : 악인에게서 악이 나온다. - 이런 표현이 생명력을 지니는 이유는 사람들의 행동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유사 음으로 표현된 잠언들은 주로 역설을 통해 표현된다. eg) 11,24. 그러나 이 역설은 아직 결론적인 교훈의 내용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동일한, 유사한 결과들이 나온 오랜 과정을 거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 G. von Rad 는 이 단계의 문장이라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을 보고 동일한 인식을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진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실에 공감하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되어야 진리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론되는 것이 경험으로부터 지혜로 발전할 가능성이다. 사실 많은 것을 경험했다고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다. 지혜는 예리한 관찰로서 법칙 발견하고 성문화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감 받아야 재조명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이라는 천연 광석을 세공 하여 다이아몬드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변 사건에 항상 예리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고나 정신 상태가 있어야 한다.

 

@ 숨겨진 질서를 찾는 일은 과연 가능한가?

이 문제는 가능하다 해도 간단하지는 않다. 경험은 얽히고 설키는, 마치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야 하듯 변화 무쌍하기에 대단한 인내가 필요하고 이 때 발견된 지혜라야 품위를 갖출 수 있다. 그러므로 복잡한 사건 속에 숨겨진 질서 → ② 경험자의 수고와 인내 → ③ 질서 발견 → ④ 지혜 → ⑤ 역설적 표현이라는 도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eg) 27,7. 25,15. 23,13ff. 20,17 등의 표현들은 그 과정과 배후의 의미를 깨달을 때 인생에 도움을 주는 숨겨진 질서를 찾게 해 주고 유사한 상황에 적응시킬 때 어려운 혼돈을 피할 수 있다.

@ 처음에는 교훈 내용이 담기지 않은 형식으로 역설적 표현이 됨 이것들이 지혜 교사에 의해 수집되고 교훈적 의미부여 표현이 점점 발전되고 교훈적 내용 첨가됨 (인간이 맞이하는 문제들 앞에서 삶을 보호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교훈적 내용이 첨가되는 것임). 따라서 이 단계는 교훈 문학이라기 보다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는 단계이다. 일례로 잠언 15절은 처세술의 단계이다. 후대의 현인들은 지혜를 하나의 항해술로 보았다.

@ 이러한 처세술적 격언의 역할

여러 사건, 행위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다면 다른 사람의 요구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나이렇게 처신하면 그 문제점 앞에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따라서 지혜는 바다에 세워진 부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에 헤르트라는 학자는 격언 자체에서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격언의 도움에 힘입어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에 대한 G. von Rad 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 체계적(철학적. 신학적) 일반 원칙 ─┐

인간이 진리를 인식하는 길 │ │ 상호 보충적.

└─ 경험적 격언적 방법 ─┘

경험만으로 진리를 인식할 수 없고 분석 이해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상호 보충적 방법. 만일 경험을 무시하고 사고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지혜가 아니다 (환상적 관념 일 뿐).

 

@ 경험적 지혜란 ? - 체험한 여러 인식들을 체계적 일반 원칙으로 적용 범위가 넓게 표현하여 유사한 여러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 - 물론 추상적 표현이 될 수 있지만 대단히 구체적이면서도 광범위한 적용 범위를 가진 것이다. 이때의 구체적 표현의 문제점은 ? - 구체성 때문에 어떤 경우에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 따라서 잠언적 표현은 교정될 가능성을 지닌다. 이 말은 경험적 지혜는 항상 교정, 정정될 가능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모순적인 것에 부딪칠 때 이에 적응을 하지만, 표현 자체가 변했다 해도 그 의미는 그대로 살아남고 그 가치는 그대로 남는다.

 

@ 경험적 지혜는 관찰과 표현에 과장된 요소가 있기도 하고, 역설적 표현에는 유희적 요소도 있다. 이때의 유희적 요소에서 수수께끼로 발전될 가능성 (인간의 성향 때문에). 고대 근동의 지혜는 수수께끼로 발전시킨 지혜가 많으나 성서에는 수수께끼의 숫자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격언은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수수께끼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다.

eg) 25,14 : 26,20 의 비교 잠 27,20. 27,17. 집회 13,11. 참조 (은유적 표현들)

 

@ 유비의 문맥 속에서 숫자 격언으로 옮겨감. 20,15ff 유비에서는 두 가지만 비교하지만 숫자 격언은 여러 가지 나열. 이때의 숫자 격언은 일차적으로 어떤 도덕적 개념을 담지 않고 자연현상에서 여러 가지를 열거한다. 일례로 잠언30,15ff : 30,24ff에서 서로가 전혀 다른 여러 가지를 열거했다. Title line 공통점 열거

숫자 격언에서 Onomastica가 발생 공통점을 중심으로 수집된 격언. onomastica는 자연현상들의 범주를 정해 질서 있게 배열해 놓았다.

 

 

@ onomasticon

지혜가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질서들과 자연 속에 질서들을 찾으려는 의지였다면 이것이 발전한 것이 Onomasticon 이다. 시편에서 Onomasticon이 나타나는데 - 에집트의 Onomasticon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학자들은 Onomastica 의 정리와 열거에서 의문점을 제기했는데 (신학적 의문 이것이 어디에서 왔나?). 이 의문에 대답하고자 더욱 자연 질서를 관찰한 결과 이스라엘인들은 이 관찰을 과학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적 원칙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면서도 과학적 관찰을 한 것으로 놀라운 일이다.

 

eg. 욥서의 표현들을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경험의 길과 사변의 길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이 두 가지는 도달하고 보면 일치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해한 세계는 과학적 대상으로서의 세계가 아니고 측정, 평가하는 질서 잡힌 세계는 아니었지만 - 세계를 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들은 철학적인 논리가 없었으면서도 세상을 생성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추상적인 언어 표현이 부족하다. 그들은 다만 경험을 바탕으로 이 경험들을 조사하고 숫자 격언이나 Onomasticon 등으로 분류하면서 진리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계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지혜란 야훼를 두려워(경외심) 하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숨겨진 지혜는 야훼 하느님의 섭리라는 신앙 차원에서 이해했으며, 그들은 불변의 법칙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Idea를 갖고 있지 않았기에, 사물 속에 진리가 있다는 인식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격언을 말할 때, 인간과 인간 생활을 잘 알고 있는 인본주의적 방식으로 표현했다.

현명한 자 - 사물의 밑바탕에서 사건들의 균형과 질서를 인식할 수 있는 자.

어리석은 자 -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자. 현명한 자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음은 바보의 표지. 그러나 어리석음은 지적 결함이 아니며, 인식 능력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 격언과 잠언의 비교, 근본적 차이

격언 - 에집트처럼 자연을 고찰하고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것 - 가장 기초적 격언은 교훈적 내용이 아니다. 교훈적 내용은 지혜 교사를 통해 부여된다. 즉 특수한 관리, 정부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적 상황 속에서 훈계형식으로, “하라, 될 것이다라는 표현을 써서 교훈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와는 달리 잠언의 형식은 - 서술, 긍정 형식이어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러한 구분이 없었다. 이점에 착안한 G. von Rad - 초기 지혜는 이집트와 같이 왕궁에서 연마 개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혜는 국제적 성격이 있으며, 이스라엘도 이렇게 이해했기에 솔로몬의 지혜를 타국의 지혜와 비교했다고 말한다.

 

에집트 - 교훈적 목적을 가진 훈계조.

이스라엘 - 특정인, 관리들이 관심의 초점이 아니고 잠언 고유의 서술 긍정 형식.

10-29: 궁중 잠언이 많다. 따라서 이것들은 궁중에서 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사무 16,18ff - 이스라엘도 지배층의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왕궁에서 일할 사람은 여러 능력을 겸비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다윗, 솔로몬 이후 정치적 제도적으로 복잡하고 다양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הצע ; counsel (현자들의 자문)이다. 그러나 전문적 지식만으로는 부족하고, 설득력 있게 말할 줄 알아야 했다. (말 잘하는 기술, 즉 수사학을 중요시했다.) 잠언서 에서도 말 잘하는 법을 강조(2사무17,2 참조) 하였는데 설득력 있는 화술 등은 창세기 등의 표현에서도 볼 수 있다.

 

@ 고대 에집트 격언과 이스라엘 잠언은 조용한 사람은 이상적인 사람으로 보았다. 냉철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성급한 사람과 대조적으로 자기의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는 사람이다. 조용한 사람(당시 지혜 문학이 양성하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사람)을 이상적인 현자의 모습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모습이 창세기 요셉 설화 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요셉은 파라오에게 현자로 인정받았고, 형제들을 사랑으로 대했다.

 

@ 민간 잠언 형태

민간 잠언은 교훈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으나 이상적 인간상을 만들어 놓고 교육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중에 변화하였다.

변화 지혜의 범위가 한정됨 : 재산 보호, 지위 등을 논함. 따라서 특수층과 관계.

목적이 바뀜 : 일반적인 삶을 다룸 초보적 질서에서 - 이상적 인간 양성을 위하여 보다 직접적이고 교훈적으로.

결국 민간 잠언은 - 체험을 바탕으로 성문화되어 동일 사건에 대한 동일한 실패를 거듭하지 않게 하려 한 것이고, 교훈적 잠언은 -민간 잠언이 교훈적 잠언으로 변하면서 적용. 범위가 좁아졌고 목적이 변화되었다.

 

* 민간 잠언 - 누구든지. * 교훈적 잠언 - 관리 교육 등

이 차이점을 알고 성서를 읽을 때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을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언뜻 이 잠언이 민간 잠언인지, 교훈적 잠언인지 구별하기 곤란한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성서의 교훈적 잠언은 교육적 목적을 위해 민간 잠언을 사용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 잠언과 에집트 잠언의 특성

에집트 잠언 - 특수층을 대상으로

성서 잠언 - 평범한 문제부터 출발 (특수층과 무관) eg. 잠언 31,1. 식탁 예법.

지혜는 평범한 문제에서부터 - 하느님이 설정하신 신비로운 한계까지를 포괄.

그래서 하느님이 설정하신 한계까지 다루는 것이 지혜 교사들의 임무 중 하나였다.

G. von Rad - 지혜 교육의 출발점은 하느님을 알고 계명을 알게 하는 것이라 말했고

다른 학자들은 -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평범에서 발전적으로 하느님의 지혜에로 나아간다는 데에 반대).

 

* 지혜의 대상이 제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제의식 영역 안에서 인생 질서를 세우는 것은 지혜 교사 영역 밖의 일이다. 지혜 교사들의 의도는 - 체험을 바탕으로 사소한 결정들을 도와주려고 했을 뿐이며, 따라서 구원을 준다든지, 교리적 가르침을 준다는 것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서도 실제에 있어서 놀라운 기능을 발휘했다.

 

@ 지혜와 신학과의 관계.

신앙에 속한 고유의 영역은 지혜의 영역이 아니다. 지혜는 직접적인 종교적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지혜의 원동력은 인간의 이성이다. 그러면서도 지혜 문학은 실용적인 면과 윤리적 면을 구분치 않고 함께 취급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지혜를 이해하려면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일례로 이스라엘인들은, ·? 행위는 행위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행위자의 인격과 관계 있다고 보았고, ·? 정직, 자제력 등은 공동체를 위해 건설적인 것으로 보았고, ·? 공동체에 유익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으로 이해했다.

 

이런 차원에서 응보문제와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G. von Rad 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Rad 는 이런 것들이 세계 내의 질서와 자연 문제의 가르침이고 명확히 정의하려는 것 뿐이라 하며 그 예로 잠언16,17을 들고 있다. 그는 지혜의 가르침에서 신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것이 이런 내용이라고 한다.

 

@ G. von Rad 의 잠언집 분류 (3)

1.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저울질하고 시험하시는 분이라는 묘사의 잠언.

이것은 에집트 지혜 문학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야훼 신앙 안에서도 많이 되풀이 된 묘사이다. 즉 인간의 행동 결정을 하느님의 판단이라는 빛 안에서 보도록 하는 구절들.

2. “하느님께서 인간의 어떤 행동을 좋아하시고, 어떤 행동을 싫어하신다.”는 표현.

이 잠언에는 하느님 이름이 언급된 것도 있고 언급되지 않은 것도 있다.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것은 - 신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eg) 20,16 ‘거짓 증언하지 말라.’ 23,1f(계명) 18,5(지혜교사의 가르침)

신명 19,14 와 잠 22,28 의 내용이 같다.

여기서 G. von Rad 는 하느님이 언급되지 않은 잠언이라 하여 다른 나라의 잠언과 같이 이해하면 안되고 엄격히 야훼 하느님 신앙에 입각하여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3. 가장 신학적인 잠언들

하느님의 자유 행위에 의해 인간의 가능성이 제한을 받고 있다는 표현들. 16,9. 19,21. 16,2. 20,24. 21,30.

 

공통점 : 포괄적인 인간 행위의 한계점을 언급하지만 인간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에 의해 설정된 한계점을 지적할 뿐.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간의 한계점을 구분 지어 주시는 분으로 파악한다. 이런 표현을 쓴 이유는 - 인간을 비관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이성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존재를 채울 수 있는 것이 적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지혜를 가르쳐서 달성시키고자 한 목표는 인간으로 하여금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북돋게 하려는 것이 현자들의 최종 목표였다. 그러므로 그 지혜가 신앙과 무관한 지혜일지라도 - 하느님께 신뢰하는 마음으로 옮겨가는 바탕을 전해 주려는 목표 속에 만들어졌다고 본다.

@ 신학적 지혜

유배 이후 지혜의 일대 변혁은 지혜를 계시의 중계자로 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지혜를 창조 당시 하느님께서 세상에 부여한 원리로 이해한다.

유배 이전의 한정된 경험 지혜가 유배 후에는 신학적 개념이 도입되어 신학에의 일관성과 구심점을 지혜 개념 속에서 발견케 된다.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언제,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 졌는지는 알 수 없다.)

경험 지혜를 다룬 잠언 10-29 장과, 신학적 지혜를 다룬 잠언 1-9장을 비교 연구하면 경험 지혜가 신학적 지혜로 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다.

 

@ 지혜와 카리스마

이스라엘의 현자들은 하느님만이 완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완전한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상이 유대교 사상에 뿌리 깊게 내렸다. 이러한 지혜를 당신께서 특별히 선택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신다는 사상 때문에 지혜를 은사(은혜)로 이해했고, 이 지혜의 은사를 통해 인간에게 영감을 주신다고 믿었다.

 

그래서 솔로몬, 요셉의 해몽 능력이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의 카리스마로 이해하였다. 다른 한편 예술 분야의 카리스마도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이해하였는데 이는, 출애 28,3. 31,3에서 볼수 있다. 또한 신명33,9에 나오는 것처럼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인도하게 함도 지혜의 카리스마로 본다.

 

경험 지혜와 이성을 바탕으로한 지혜는 서로 양립, 구분 될 수 없다.

경험적 지혜 ?????????????????? 신학적 지혜

(이성. 경험) ? (하느님의 계시)

?

위 비교를 보면, 서로 다른 차원의 지혜를 말하지만 성서에 보면 중간 존재가 있다. 즉 솔로몬의 경우 자기 경험에 하느님의 빛이 함께 한 것으로 나타난다. 경험 지혜는 이성과 건전한 상식의 결과이고 하느님의 영감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즉 하느님의 계시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잠언 1-9장은 다르다. 잠언 1-9 장은 높은 문학 양식의 시를 내포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문학화 된 신학 작품인 것이다. (6,1-6,19는 경험을 표현한 삽입구) 그러므로 잠 1-9 장의 삶의 자리와 잠 10-29의 삶의 자리는 다르다.

 

* 특히 잠 2,5-2,8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지혜가 베푸는 선물 중에서 첫째로 꼽히는 것으로 소개된다. 여기서 더 발전하여, 이제 지혜는 지혜 교사의 가르침을 통하는 것이 아니고 라는 1인칭을 사용하면서 높은 권위를 지닌 인격체로 말한다 (의인화).

 

@ 지혜가 주는 선물 - 생명

이제 인간은 지혜의 목소리에 응답할 때 생명을 선물로 받는다. 그러나 거부하면 목숨을 잃게 된다. -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신명기 사상이다. 즉 하느님의 명령인 계명을 지키면 생명을 얻는다는 생각 : 신명30,15. 신명기의 호소는 지혜의 호소와 같다. (신명기-백성전체)(지혜-개인). 지금껏 신학의 발전상 구원이 개인에게 약속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혜 문학 편에서 지혜를 따르는 자는 보호받고 야훼의 마음에 든다는 가르침을 준다.

 

 

@ 의인화된 지혜.

G. von Rad Boström의 글을 인용하여, “의인화된 지혜가 사람들을 초대하는데 이것은 사랑의 여신 아폴로디테와 대조된다. 아폴로디테는 남자들에게 정조를 바치는 향락의 잔치를 묘사하는데 지혜도 이와 비슷하게 혼인 잔치를 묘사한다. 다정한 애인이 되고 싶어하는 지혜의 의인화된 모습은 사랑의 여신 아폴로디테의 모습을 모방한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 지혜서와 토라 (הרות)

집회서와 더불어 몇 세기 지난 후 지혜는 הרות 와 동일시된다. G. von Rad하느님의 뜻과 구원은 지혜라는 형식을 빌리어 인간에게 다가오고, 인간은 이 지혜를 통해 하느님을 찾아 뵙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지혜문학에서 하느님은 가르침, 안내, 구원 등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의인화된 라는 인격체로 다가온다.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는 지혜를 말한다. 이런 말은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말인데 지혜가 이 말을 썼으므로 지혜를 정의하기가 곤란하다.

 

분명히 지혜 = 하느님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지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신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지혜와 הרות의 동일시는 잠언 1-9장에 내재해 있다가 집회서에 와서 완숙한 신학적 결론으로 된다고 Rad는 말한다. 집회서 안에서는 세계사를 포괄할 정도로 분명해지고, 집회서에서 말하는 지혜는 (1,4. 23,4) 야훼 하느님의 첫 작품이고 창조 이전의 창조물이다. eg) 집회24,7 “지혜가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사람들 안에서 살 자리를 찾았으나 못 찾고 말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지혜가 쉴 자리를 만들어 주시고 지혜가 거대한 뿌리를 내리도록 하셨다.”

 

이런 문맥이 쓰인 이유 유배 중 이스라엘은 그들의 지혜가 뛰어남을 인식하였고 이방인들에게 비길 바 안되는 그들의 위치를 정립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깨우쳐 주고자 하였고 현자들은 신학적인 반성을 통해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특수한 위치를 설명하려 하였다. 그리고 후대에 와서 그들 스스로에 비친 이스라엘의 모습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 사이에 증명해야 할 과제를 풀고자 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고 본다.

 

@ 그러나 유배 이전은 성전이 있었고 독특한 위치로서 당당한 사고 방식을 가졌는데 예루살렘 패망과 더불어 다윗 왕조는 끊기고 성전이 파괴된 상황에서 지혜 문학의 발전 필요성이 절감되었다. 당시에 시급한 문제는 - 새로운 현상, 새로운 인식에 직면한 그들 스스로를 발견하고 이런 것들의 해명 문제가 시급했다. 욥서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구원을 숨겨두셨으니 세상을 탐구함으로 구원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이것을 지혜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지혜가 있는 곳을 아신다 : 욥서).

 

이제 숨겨져 있는 지혜는 인간의 의지나 탐구 정신만으로 얻을 수 없다 (잠언 22 지혜는 죽음을 통한 고비를 넘겨야 얻을 수 !!). 처음에는 절망의 시였는데 후대에 28 장이 첨가되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이 절망적 문제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길로 나아가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을 했다.

 

 

@ 유배 이후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지혜의 독특한 위치를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만백성에게 지혜를 주셨지만 이스라엘에 특별한 지혜를 주셨다고. 이런 작업의 이유는 - 유배 시 페르샤와 헬레니즘을 접촉한 상황에서 그들이 본 이스라엘 상과 이방인에 비친 이스라엘 상에 정립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욥 28장이다. 이곳에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숨겨 놓으신 지혜는 인간의 힘만으로 찾을 수 없다고 하여 절망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욥28,28을 보면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요 악을 피함이 지혜요.”라는 표현을 통하여 절망적 상태에서 가능성을 하느님께로 돌림으로서 지혜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했다.

 

@ 잠언 8 (18,1-21. 28,22-31. 38,32-36)

2(8,22-31)에서 : 지혜는 모든 피조물 보다 먼저 창조, 창조물 중 첫째임을 주장.

3(8,32-36)에서 : 다시 강조 함

잠언 3,19 에서는 :“지혜가 땅의 기초 슬기는 하늘의 기초.” 여기서는 하느님과 지혜가 협력 관계로 나타난다. 결국 잠8,21-36은 지혜를 세상의 창조주로 이해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지혜는 - 지혜가 창조주라는 관점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잠 8장 잠 3. 솔로몬 지혜 등을 살펴볼 때 지혜의 개념은 유동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지혜의 의인화, 지혜는 창조의 원리라는 개념이 계속 공존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표현은 잠 8,22ff에서 가장 심오하게 드러난다. (“뛰노는 어린아이라는 극단적 표현).

@ 우주론적 표현이 갖는 신학적 중요성

이 표현들은 어떤 경우에 사람들에게 생사 결단을 내리기를 요구한다. 우주론적 표현은 - 지혜가 지닌 권위, 무게를 강화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 잠언의 묘사는 - 본질적으로 같은 것. 28 - 8은 다만 분위기만 다르다고 이해하면 된다. 그렇다면 왜 지혜문학에서는 창조에까지 지혜를 소급시켰을까? 그 이유는 자명하다. 유배 이후 이들의 위치를 파악하려 하니 자연히 창조까지 올라야만 했다. 그러나 지혜 문학에서 거론되는 창조는 창세기의 창조사와 같은 것이 아니다 (관점이 전혀 다르다).

@ 제관계 창조 설화는 역사와 구원의 장을 여는 서문 역할을 하고 창조는 구원사와 접근시키고자 하는 신학적 과제를 푸는 것이었다.

@ 그러나 지혜 문학에서는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에 주신 하느님의 지혜, 계시와 연결점을 찾고자 한 것이다.

(창조) ????????? (계시)

??????? 연결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 지혜 문학의 노력

여기서 지혜 교사의 역할이란 - 창조와 계시를 연결하여 동일시하는 것. 결국 자연적으로 얻을 수 없는 우주적 지혜를 창조, 계시와 동일시함으로서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지혜 문학) ─??? (창조) ??? 따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알 수 없고 ???????

? ? ?

?? 하느님께서 창조를 통해 지혜를 심어 주심 계시로서 가능

이러한 도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계시와 창조를 동일시하여 연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강의를 요약해보자. 이스라엘이 합리적 비판적 지식이 부족했다고 보았으나 최근의 고고학은 이스라엘에 세계 인식의 가능성, 세계 비밀에의 궁극적인 것들을 통찰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 지금까지 본 바로 - 후기 지혜 교사들은 그때까지 한 번도 발설된 적이 없는 포괄적인 신학의 대표자인 셈이다.

@ 후일에는 묵시 문학과 어우러져서 - 현자가 미래의 일까지도 알아낼 수 있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 구원사 안에서 세계 안에서 묵시 + 지혜

@ 결론 : 신학적 지혜는 구원사가 아니라 창조로부터 그 근거를 갖고 이것은 욥서의 하느님 말씀과 유사하다. 지혜 문학의 바탕과 근거는 창조를 통해 세상 전체를 창조하신 하느님. 그리고 창조를 통해 당신 영광을 드러내신 하느님을 그 바탕과 근거로 삼는다.

@ 유배 이후 법과 제의식이 중요시되었고. 법과 지혜는 동일시되었다.

그런데 지혜 문학에서 제의식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그 이유는 - 제의식에 반대하거나 적대해서가 아니라. 제의식 관계는 그 직분상 사제들의 소관이므로 거론치 않은 것이다. 따라서 서로의 영역은 관계가 없는 것이다.

 

. 지혜의 개념

 

이스라엘인은 성서를 부를 때 토라הרות, ‘느비임םיאיבנ, 그리고 꺼투빔םיבותפ이라고 불렀는데, 우리가 다룰 성문서집을 꺼투빔םיבותפ이라 한다. 우리는 성문서집중에서 특히 지혜 문학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용어 분석 (T.D.O.T.ם?? 참조)

지혜란 하캄ם?? 이라고 쓰고, 명사는 지혜’, 형용사는 지혜로운등등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모음 표시 없을 때는(םכח) ‘하캄은 동사로 사용된다. 어쨌든 이 단어는 명사로, 형용사로, 동사로 다양하게 쓰여졌는데 O.T.에서는 역사서(73), 예언서(41), 지혜 문학(180), (13), 기타(5)로 쓰여졌다. 특별한 것은 전체의 3/5이 지혜문학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각 영역별로 쓰여진 것을 살펴보면,

 

역사서 기술적, 예술적 재능이나 능력. 솔로몬의 현명한 지식 등을 말하기도 하고, 마술적 지식, 실천적 지식을 말하기도 한다.

 

예언서 다양한 인간적 능력, 지혜, 타민족의 마술사를 지칭하기도 한다. 예언자들은 현자나 지혜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는데 예언자들의 지혜는 하느님이시고,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제는 율법הרות를 가르치고,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הוהי-רבד를 말하고 현자는 지혜-언변ה??를 가르치는 것이 그 직분이었기 때문에 예언서에서 지혜םכח 을 말할 때는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현자들의 ה??는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반면 예언자들의 말은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הוהי-רבד이었기에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지혜문학 영리한, 현명한 등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윤리적, 종교적 행동지침을 말하기도 하고, 그 외 마술적인 뜻을 담기도 하였다.

특히 O.T. 중 아라메아어로 쓰인 부분 중에서 (다니 2, 에즈 4,8-6,18. 7,12-26. 예레 10,11. 31,47) 현자들을 지칭 할 때 םי??(하킴) 이라고 했는데 꿈의 해석자로 쓰인 경우가 14회로 쓰였고 간혹은 율법 자체를 םכח 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 ם??(하캄)지혜로 번역한다면 본래의 정확한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 유사한 말 중 지식은 학문과 연결된다.

 

@ ם??의 복수 י???(하케미)현자들인데 성서적 표현은 ב?-י???이다. 이 때의 ב?(레브)심장이므로 정서와 관계된다. 그러므로 전통적 지식이나 교육, 체험을 통해 길러지는 올바른 지혜를 ם??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현명함이란 단어와 나란히 쓰이기도 한다. ב?-י???는 마음의 현명함을 뜻하는 말로 다음과 같이 쓰였다. 28,3. 31,6. 36,25. 36,1-8 ; 9,4. 37,24 ; 10,8. 11,29. 참조.

 

@ םכחןוֹב?과도 함께 쓰였는데, ןיב이해하다. 슬기롭다라는 뜻으로 이 둘을 합성하여 현명하고 슬기로운(사람)’이라는 뜻으로 다음에서 사용되었다. 41,33.v39 ; 신명 1,13. 4,6 ; 13,12 ; 이사 5,21. 29,14 ; 예레 4,22 ; 호세 14,10 ; 5,1. 17,28. 18,15 ; 전도 9,1

@ םכחה?י?와도 함께 쓰였다. ה?י?슬기를 뜻하며 아음에서 사용되었다. 신명 4,6 ; 이사 29,4 ; 29,12-20. 38,36. 39,17 ; 2,3. 7,4. 9,10.

 

@ םכח?די(야다)와도 함께 쓰였다. 이는 경험이 바탕이 되는 어떤 지식을 포함한 용어로서 알다라는 뜻이며 다음에서 사용되었다.

현명하고 명석함을 뜻할 때 : 예레 4,22 ; 34,2 ; 전도 6,8.

세상 물정을 아는 것을 뜻할 때 : 신명 1,13.v15.

예술적 기술, 장인의 기술을 뜻할 때 : 34,2 ; 전도 6,8 ; 17,14.

 

@ םכח곧음, 정직함과 병행하여 (9,9 ; 9,6.) 쓰이기도 하였다. 또한 의로운, 신심 있는과도 병행 (신명 16,19 ; 9,9. 23,24 ; 9,1) 되기도 하였다.

이상의 고찰로서

성서의 םכחהמכח는 실천, 행동(올바른)과 관계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성서에서 םכח 의 반대어인 어리석다의 뜻은 올바른 행동을 못하는 자를 뜻한다. 즉 사상이나 지식의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지혜와 지식은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즉 지혜란 : 전통, 세계 질서, 인생의 제반 문제에 관계되어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행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을 말하며, 그 반대어 는 - 어리석음인 것이다. 아울러 지식은 무지의 반대어인 것이다. 따라서 성서에서의 어리석음은 인생 길을 능력 없이 그르게 잘못 걷는 자를 지칭한다고 하겠다.

 

2. 인간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 (T.D.N.T.의 분류)

 

1). 인간적 지혜

마술, 점술, 꿈 해석 능력, 점성가의 능력, 장인들의 숙달된 솜씨, 곡을 잘하는 여인, 왕의 통치능력, 판단능력, 세상 물정을 잘 아는 것, 영리함, 교활한 재간 등 모두를 םכח 으로 사용하고 간혹 짐승에게도 םכח 을 적용시킨다.

또한 인생의 처세술, 기술, 기쁨과 고통, 일할 필요성, 친절을 주고받는 효과에도 םכח을 쓰고, 교육받은 사람의 교양, 세심한 관찰로 얻은 백과 사전적 지식, 올바른 행동을 할 지침 등을 지혜 םכח이라고 하며,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것, 선악을 판별하는 능력, 옳은 것을 실천하는 능력 등도 말한다.

지혜를 조직적으로 가르친 것은 유배이후 학교 성립 후이다.

이때부터 학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지혜는 신심과 관계되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혜의 시작.

지혜는 종말론적으로 하느님의 영이 들어온다는 표현도 있다.

 

2). 하느님의 지혜.

많은 학자들은 하느님이 지혜롭다는 표현이 이스라엘에서는 생소하다고 주장. 학자들은 가나안 만신전의 최상신인 엘El (לא) 이 지혜의 신으로 불렸던 것을 알아내고 이 엘El (לא) 이 지닌 속성을 이스라엘에서 받아들여서 모든 지혜의 원천이 하느님이고, 모든 지혜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였다고 주장한다. (가나안 엘El(לא) 은 자기의 지혜를 인간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함)

eg) 솔로몬의 경우 : 꿈속에서 지혜를 청했다. 그 뒤 그 지혜의 효력을 입증하는 재판이 소개된다. 그 뒤에는 모든 사람이 솔로몬의 지혜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1열왕 3,3-28).

이것은 지혜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발전된 형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 개념의 지혜는 과거의 경험 지혜와 완전히 구별되며 더 나아가서 지혜가 의인화되어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하신 것으로 표현되기까지 한다.

 

3). 지혜의 원천과 그 기원

지혜는 조상들로부터의 전통을 수집한 교과서가 있을 정도이므로 전통은 지혜의 중요한 원천이다. 또한 개인적 체험 역시 그 원천으로 꼽힌다.

 

3. 지혜를 소유한 자들

1). 비종교인들

@ 장인, 공인의 경우처럼 어떤 일에 숙달된 유능한 자. 손재간 있는 자를 현자라고도 함. 28,3 손재간 있는 사람. 31,3 대장장이의 경우 능숙하게라고 번역하여 현자라 함.

@ 교활한, 교만한의 문맥 속에서 םכח이 있기도 우리말로 변역하면 교활하다라고 할 곳에서 발견된다. 1,10 손을 써야겠다. 2 사무 13,3 꾀가 많은 - 요나단의 꾀를 מכח으로 씀.

성서에서는 꼭 선한 경우가 아니라도 םכח을 쓴 것이다.

@ 짐승의 경우 :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행위를 지혜라고 보았다. 30,24 개미, 메뚜기, 도마뱀, 너구리 등에도 지혜롭다고 하였다. 따라서 지혜는 안간만의 것이 아님을 말한다.

@ 지혜는 장수한 노인들이 가진 것으로 보았다. , 지혜는 날 때부터 가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터득하고 쌓아 가는 것임을 말한다. 12,12 ; 10,31 바울로는 1고린 1,20. 2,5. 3,19에서 이방인들도 지혜 있다고 하였다.

2). , 통치자들

@ 왕은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고, 하느님의 지혜가 주어진 사람으로 본다. 1사무 16,18 “다윗은 어릴 때부터 지혜를 갖추고 .” 다윗은 솔로몬이 지혜를 가진 것을 보고는 유언을 할 때 머리를 써서” - 원문은 지혜롭게” - 살라고 한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와 지식을 요청했다. 1열왕 3,1-28에 두어머니와 한 아들의 재판 중 왕에게 하느님의 지혜가 있어 정의를 베푼다는 것을 알고 모두 두려워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1열왕 10,23 “솔로몬은 부와 지혜에 있어 세상의 다른 왕들을 능가했다.”

@ 이러한 영향으로 후대의 작품들이 솔로몬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구약 지혜문학에는 이러한 가명 작품이 많으나 이는 이름을 도용하자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의 지혜로 영감 받은 작품임을 알리는 뜻일 뿐이다. (잠언, 아가, 전도서, 지혜서 등의 저자가 솔로몬인 양 소개된다.)

@ 지혜는 초 종교적, 국제적 성격을 띤다. 이사 10,12-13 “이방 왕들도 지혜를 가지고 있다.” 아시리아 왕은 나의 지혜로 이것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이사 19,11-13 “파라오의 현명한, 지혜롭다는 자들도 .” 에제 28,2-9은 띠로의 왕을 주님의 이름으로 비난한 구절인데 그렇다. 너는 다니엘 보다 슬기롭다.”, “너는 슬기롭고 현명하게 재산을 모아 .”라고 소개한다.

3). 고문관들

이적이나 꿈을 해석하는 등 국제 정치 등을 분석하고 조언하는 사람들. 39-41장에 요셉의 꿈 해몽, 왕이 에집트의 현자들에게 꿈을 해몽하게 한 사건. 요셉이 해몽하여 에집트의 고문관이 되었다. 즉 꿈을 잘 해석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으로 인정받는 경우.

8,19 마술사도 지혜로운 자로 봄. 다니엘 5,24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는 일 하느님의 능력있는 영이 하는 일. 루가 11,6 ; 마태 12,28.

다니엘 1,4 “사리에 밝아현명하여로도 번역됨.

 

다니엘서는 지혜 문학의 삶의 자리를 말해준다. 즉 고대 궁중의 지혜를 가르치던 학교에서 양성된 사람들이 왕의 고문관인 현자들인 것이다 (다니엘 2,12 참조). “왕궁에 현자들이 있었고 .”

판관 5,29에는 현명한 여자. 2 사무 14,1-24 압살롬의 사면을 요청한 여자를 현명한 여자라고 함. 2 사무 15,31.34에서 압살롬의 참모인 아이토벨이 갖고 있는 지혜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말함(םכח) 16,23 참조.

 

4). 예언자들

예언서에서는 예언자와 현자들의 갈등을 묘사해 놓고 잇다. 현자들은 ה?? : 합리적인 경험을 통해 왕에게 자문했고, 예언자들은 הוהי-רבד :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그 예로는 이사 30,1-5 히즈키야 왕국의 현자들은 에집트과 동맹을 권고하고 이사야는 하느님께 신뢰하고 매달리며 항전하라고 권고한 것과, 예레 9,23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항복을 권고했으나, 현자들은 전쟁을 권고한 것과, 에제 7,26과 이사 51장에 각자의 소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예언자는 보여줄게 없고, 사제는 가르쳐 줄 것이 없고, 현자는 일러줄 말이 없다.”

 

5). 서기관 (후대의 율사)

רפס라는 단어는 쓰다라는 동사인데, 이의 분사형은 ר?? 로서 서기관을 지칭한다. 유배 이후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현자로 인정받았다. 유배 이후에는 예언도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의 연구가 활발해졌으므로 율법과 지혜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지혜문학을 정리하고 마지막 손질을 가한 사람들이 서기관이었고, 이러한 추세는 예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서기관 다음 시대에는 종말론적인 메시아가 지혜 자체로 언급되는데, 이들은 이사 9,6의 언급대로 지혜로운 분이신 메시아가 오실 것으로 기대했다.

 

* 지금까지의 고찰로 지혜롭다는 단어는 주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성공의 비결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지만 이것이 이스라엘 안에서는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 고대 근동의 지혜 현상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양대 세력의 완충지이자 교두보였다. 에집트 - 아시리아, 에집트 - 바빌로니아, 에집트 - 페르시아 사이에서 양대 세력 중 어느 한 쪽이 흥할 때나 망할 때마다 수난을 당하였고, 다윗, 솔로몬 시대의 약 100년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이민족의 압박 속에서 살았다.

이제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을 배우려면 지혜의 보편성과 그 국제적 성격을 생각하여 근동의 지혜 현상을 살필 때이다. 이스라엘 격언들은 에집트과 메소포타미아의 지혜 문학 영향을 받았으므로 고대 근동의 지혜 연구가 선행됨은 물론이다.

 

1. 메소포타미아

 

예레 50,5. 51,37 ; 이사 44,25. 47,10 등에는 바빌로니아의 현자들이 소개된다. 여기에는 םכח, המכח를 나타내지는 않고, 전례 의식이나 마술에서의 기술을 말하며 현자란 제의식과 마술의 창시자로 소개한다. 바빌로니아에서도 마르둑의 지혜란 구마 의식의 기술 혹은 제의식의 창시자를 가르칠 때 쓴말이며, 비록 히브리어와 같은 포괄적 개념은 없어도 상응하는 것이 많다.

 

1) 잠언의 경우

잠언(לשׁמ)이란 다스리다, 지배하다, 유사하다, 같다. 대표적인 것, 표본적인 것 등의 뜻을 포함한 단어이다. 즉 체험적인 특징을 모아 응축시킨 대표적인 것이다. 잠언의 내용은 구체적이며 격언과 같은 것으로 원래 처음에 생길 때 구체적 상황에서 나온 것이 여러 상황에 적응 가능성이 있자 대표적인 표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스라엘의 잠언은 내용상 유사점이 많다.

메소 - 입이 없는 곳에는 손도 없다.

잠언 - 게으른 자는 숟가락과 밥이 있어도 입으로 가져가지 못한다. (19,24. 21,25. 20,4)

메소 - 다 익은 곡식이 자랄까? 말라 버린 곡식이 자랄까?

잠언 - 구부러진 것은 펼 수 없고 없는 것은 셀 수 없다. (전도 1,15. 3,11. 7,13-14)

이로서 격언적 지혜는 한 사람의 재치 있는 표현이 성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교훈 문학의 경우

교훈 문학은 스승이 제자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치는 형식이다. 지혜 문학에는 아들아 .” 로 시작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교훈서 중 슈르팍(Surppak)에서는 왕이 즈스트라(홍수의 영웅)에게 말할 때 오 아들이여 .”로 시작되는 긴 권고의 말이 자주 나온다. 잠언서에는 아들아 .”가 수많이 나온다. 이런 말로서 시작된 후 그 다음에 나오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그 형식상, 내용상 너무나 닮았다. (4,1-5. 3,1-4. 6,20-22 etc) Surppak에서 줄줄 아는 사람은 재산이 증대되리라.” 잠언에서 없는 사람에게 , 가난한 사람에게 .” 19,17. 22,9. 28,27 etc.

@ “지혜의 권고라는 책 (BC 2000 :ANET p. 421ff)에서 권고하는 내용은 잠언과 비슷하고, 더 나아가서 에집트의 마샬과도 비슷하다.

나쁜 친구를 피하고, 경솔한 친구를 피하고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며 .”, “너의 입을 지혜롭게 하여 너의 말을 경계하라. 재앙처럼 입술을 조심하라 .” 잠언에서는 13,3 “입에 재갈을 물리면 살지만 .”, “반대자에게 안할 것을 다그치지 말라 .”, “저의 적에게 정의롭게 대하라 .”. 24,17-18. 25,1-22 ; 32etc. 특히 지혜의 권고에는 창녀를 조심하라는 권고가 많다.

@ 메소포타미아의 대표적 지혜서는 “Ahiqar 어록집이다.

아라메아어 판으로 BC 5 C 경의 빠삐루스에 소개되는데 Ahiqar는 능력 있는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산헤립 왕과 아삼하툴 왕(681)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다. (토비트서 14,10에 토비트의 친척으로 소개될 정도임).

Ahiqar : “자녀, 왕을 모시는데 비밀을 지켜야 .”

너의 아들에게 매를 대는 것을 두려워 말라.” 23,13-44.

왕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4,22. 16,24

왕의 혀는 부드러워도 용의 갈비를 부순다.” 25부드러운 혀가 뼈를 깎는다.”

무겁고 모두가 힘겨워도 어리석은 자가 귀찮게 구는 것보다 가볍다.” 2,3ff

자기 부모의 이름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 20,20

배가 고프면 쓴 것도 달다 .” 11,2. 16,18. 20,6-7. 29,23.

이처럼 형식상 내용상 유사한 것이 많다. 이로서 이스라엘 문학이 메소포타미아 문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 전도서의 경우

인간의 불행이라는 바빌로니아 책은 전도서와 유사하다. 내용은 주인과 종 사이를 오가는 대화로서, 여자를 우물, 물통이라고 표현한다.(5,15 ; 아가 4,15 ; 23,27). 또한 ANET비관론의 대화 (Dialogue of Pessimism) 문헌도 지혜 문학과 비슷하다. 여기서의 주제는 주인과 종의 대화로서 여자, , 신심, 세상살이를 논한다.

) M. 종아 나에게 순종하여라. S. , 주인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M.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겠다. S. , 그렇게 하십시오. 한 여자를 사랑할 때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M. 종아 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겠다. S. , 주인님. 여자는 우물이요 (23/27) 쇠로 된 비수로서 남의 목을 치니 여자를 사랑하지 마십시오.

이런 방법의 비관론으르 전개시킨다. 세상의 허무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도다 .” 라는 것과 유사하다.

또 다른 예) M. 종아, S. 예 주인님. 말씀하십시오. M. 종아 무엇이 선이냐?

네 목과 내 목을 잘라 강물에 던지는 것이 선이다. S. 주인님, 누가 땅을 다 품을 만큼 넓은 품을 가졌습니까? M. 종아, 나는 너를 죽여 강물에 던지겠다. S. 주인님은 나보다 3일 쯤 더 살고 싶어서 나를 먼저 죽이시겠다는 것입니까? M. 종아. 내 말을 들어라 .

이 표현은 인간에게 죽음은 마지막 해결점이다 라는 식의 전개이다. 물론 표현이 전도서의 그것과 비슷하다 해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전도서에는 기본적인 신앙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의 책은 하나의 테마에 대해 항상 양면성, 상대성을 말한다. 그러나 모순점을 찾아서 양면성을 묘사하여 분기점을 찾아내려한다.

그러나 전도서에서는 인생의 가치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전도서의 염세관은 - 죽음은 공평하고 죽음에는 모든 피조물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이며 현세의 기쁨을 인정한다 (메소는 기쁨을 인정치 않음).

 

4) 욥서의 경우.

의인의 고통이 그 주제인데, BC 17 C 경의 Text 나는 지혜의 주님을 찬미하리라라는 책에서(ANET p.433f), 시편의 찬미가 문체를 닮은 이 책의 주인공인 Shubshi-Meshre-Shakkan는 자기의 온갖 고통을 열거하는 세 가지 꿈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으로는 마르둑 (지혜의 신 or 지혜의 신이 주는 지혜)에 관한 말로 맺는다. “나의 고생이 심해도 신은 고개를 들지 않는구나 .”

 

이 표현과 전개는 욥서와 유사점이 많다. 고통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응징이 아닌 점, 현재의 고통이 자신의 덕스런 삶에 대한 모욕(19장과 같다)이라는 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29장과 같다) 신심 깊은 삶을 살았으나 고통밖에 없다며 탄식하길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이것이 신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하늘 가운데 신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지 않는가? 신의 계획은 깊은 물,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 바빌로니아 책은 욥서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다. 다만 욥서 보다는 문제의 깊이가 적고 모든 문제는 신이 개입해서 해결해 준다는 관점이다.

 

욥서 42장도 욥의 잃은 것을 하느님이 곱으로 배상해 주기는 하지만 욥서가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과 대면하고, 영접하고, 하느님 뜻에 맡기는 것이며 이것이 욥서의 핵심이다. 이것이 나는 지혜의 .”와 욥서의 차이점이다.

 

이제껏 살핀 결과 ! 메소포타미아에도 다양한 지혜 문학이 있었고 윤리적 문제와 실천적 권고를 다루며 성공의 비결을 알려준다. 이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도 지혜란 순수지식이 아니고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구체적, 실천적인 생활의 예지이다.

 

2. 에집트의 지혜문학

 

이스라엘은 에집트에 지혜가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7,11 ; 41,8 ; 14,30). 에집트에서는 지혜를 통하여 가르치려는 행동 규범을 Maat라고 하였다. “Maat”는 여러 가지의 뜻이 있다(진리의 질서 <신적 질서, 인간적 질서> 구별이 없음). 에집트 사람들이 지혜를 가르치는 목적은 신으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질서인 Maat로부터 자신을 적용시켜 신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Maat는 진리이고 세계의 질서이며 Maat의 전수를 통해 조화의 형태가 국가와 사회를 유지한다고 한다. 또한 Maat는 인생의 진리로서 불변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을 Maat에 종속시키고 그 안에서 현명한 기준을 찾는데, Maat에 순응하면 행복을 얻고 거역하면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현명한 자는 - 안팎으로 자신을 살피며 Maat를 따르고 침묵하고 자제력을 행사하는 자이다. 현명치 못한 자는 - Maat를 거스르는 자로서, 격정과 욕정과 욕심에 가득차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다. 또한 Maat는 신과 인간의 질서를 포괄하므로 Maat를 거스른 자는 곧 신의 질서를 거스른 자이고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상과 같이 에집트의 지혜 문학 개념은 이스라엘의 초기 지혜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에집트의 지혜 문학을 알려면 Maat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1) Ptah-hotep의 교훈서

5왕조 (BC 24602420)시대의 궁중 총리 대신 Ptah-hotep이 남긴 교훈서로 제 18왕조 때까지 교재로 쓰이던 책이다.

내용 : 늙어서 은퇴하려는 총리대신에게 파라오 왕이 이르기를 너의 아들을 대신으로 기용하려 하니 잘 가르쳐라.”하여 대신은 자기 아들을 가르친다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임). 에집트 교훈서는 순종, 마음의 안정을 중요시한다. “나면서부터 지혜로운 자는 없다. 지혜는 배우는 것이고 또한 세상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책은 정치인들의 성숙한 결론들을 내포한 책이며 에집트의 전통을 담고 있고 매우 권위적인 교훈을 하며 절대적으로 이해하게 가르친다. 이러한 지혜의 개념을 궁중의 학교에서 가르쳐 왕궁의 인재를 양성했다.

여자 관계에 현명치 못한 자, 가정의 재산에 대해 다투는 자, 지적인 자만과 편견을 가진 자, 안정된 가정을 가지지 못한 자 정치가로서 성공하지 못한다.” (6,24;9,6여자문제 조심, 자만과 편견, 관직예법 중시23,15ff; 8,11f. 외교관의 역할25,13. 회의 참석 태도와 친구를 사귈 때6,7etc.)

 

이상의 관찰로서 에집트의 지혜문학의 Sitz im Leben은 궁중의 인재양성 학교임을 알 수 있다. Ptap-hotep에서는 지적인 성숙과 믿음직한 신하, 사람에 대한 좋은 판단 등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에집트 지혜 문학을 이해하려면 Maat 개념을 꼭 기억해야 한다 Ptap-hotep 에서 말하는 에집트 사회는 전통성, 안정성, 제도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보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적 개념을 말해주는 것이 곧 Maat이다. 그러므로 이 교훈서는 정치 지망생에게 Maat와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렇다고 하여 Ptap-hotep에서 나오는 내용이 출세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오히려 신의 이름은 없지만 신학적 개념의 Maat가 있음으로서 신학적 교리라고 말할 수 있다. eg) “부정한 수단으로 재산을 모을 수는 있지만 최후로 남을 것은 Maat의 힘 (, 정의의 힘) 만이 남을 뿐이다.” - 이러한 표현은 곧 신학적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출세나 성공, 행복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이다.

 

에집트 문헌에서 이라고 칭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Maat와 인격적으로 잘 조화된 파라오()를 지칭한다. Maat와 가장 완전한 조화를 이룬 자는 파라오이다. 따라서 神王인 파라오는 절대권 자이다. 에집트의 國家Maat의 원천이며 보존자인, 이며 인 파라오에 그 구심점이 있고 만고 불변의 Maat의 힘은 창조 때부터 지속적이었음으로 이해하였기에 정적인 전통 보수 사회가 된 것이다. 결국 Maat는 국가의 영속성과 항구성을 보존해 주는 역할을 한다. Ptap-hotep 에는 그것은 내 아버지, 내 조상의 유업이다.”라고 말하여 Maat가 창조 때부터 안정된 국가를 영속시켜 준다고 말한다. 정치가는 개인의 지혜로서 되는 것이 아니고 Maat에 참여하는 의식에서 영감을 받아야. 그러므로 정치가는 청렴 결백한 마음으로 Maat와 일치하려고 노력할 때 정치가가 된다. Maat의 윤리적 성격-Maat는 곧 정의의 질서라고 말한다. 이 교훈서 Ptap-hotepMaat와의 철저한 조화를 말하고 있다.

 

2) Merikare (교훈)

이책은 BC 22602150, 고대 중왕조의 혼란기, 과도기에 어떤 지도자가 자기 아들에게 준 교훈이다. 아마도 케티 3세가 그의 아들에게 준 것일 듯 추정된다. “인간의 삶이란 포괄적인 질서의 테두리 속에 있다. 즉 자연과 사회의 조화로운 통합 속에 있다. 왕과 왕궁의 대신은 날 때부터 현자이고 파라오는 인간적인 제한을 초월한다..” 그런데 파라오와 그 아들도 잘못할 수 있는 인간임을 말하기도 한다. 달변은 어떤 무기보다 효과적이라고 말한다(13,4와 비슷). Merikare 의 질서 개념은 Ptap-hotep보다 넓은 개념이다. “신들에게 드리는 예식은 재물만으로 부족하다. 마음의 재물이어야 한다”(15,7 병행).

Merikare 역시 Maat에 대해서 말하지만 Ptap-hotep과 차이가 있다.

Merikare - 후세에 대해 언급하고 강조함. 파라오도 잘못할 수 있는 인간.

Ptap-hotep - 현세에 대한 언급. 파라오를 신격화.

 

3) Amen-em-het의 교훈.

12왕조(BC 2000년경) Amen-em-het 1세가 후계자에게 준 교훈. 이 교훈서는 18-20왕조(BC 1580 년 경)까지 지혜 학교의 교재로 쓰였다. 이 책에는 비관론적 요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 신하들과 거리감을 두고, 형제에게도 왕권을 주지 말고, 친구를 믿지 말고, 잠 잘 때도 자기 심장을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적었다. 그에게 있어서 질서는 카오스로 대치되어 있다. 이책에는 Maat의 개념은 없고 어두운 사회상을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신하와 하인에게 잠 잘 때 암살될 뻔한 적이 있다.

 

4) Ani의 교훈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형태의 내용. 서기관 교육에 사용된 교제로 BC 1850 년경의 작품이다. 자 관계로 말했지만 실상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다. “관리가 지녀야 할 덕 중 최상의 덕은 과묵한 것이다.” “혀를 제어하는 수단은 자제력을 갖는 것이다.” “사람의 배는 창고보다 넓어 온갖 종류의 대답이 들어있다. 그러나 좋은 대답만 해주고 나쁜 대답은 창고 속에 넣어두어라.” “친구를 보고 사귈 때에는 그의 행실을 보고 사귀고 나쁜 사람에게 속마음을 주지 말라.”

하느님의 거소에서는 사랑의 말로, 속마음으로 말하라.” 정숙한 예배를 강조.

 

5) Amen-em-Opet

BC 1000 년경의 작품으로 에집트 박물관 관장인 W. Budge1923년에 번역 출판하였다. 이 발표에서 잠언 22장과 Amen-em-Opet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지적했고, 후일 독일인이 연구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잠언과 Amen-em-opet가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사실은 성서의 지혜 문학이 에집트의 문학에 얼마나 많은 관련이 있나를 알려준다.

이 작품의 저자는 조용한 사람을 요구한다. “조용한 사람은 존경과 경애를 받을 수 있고, 침묵 속에 힘이 있다.”, “너는 고요함이 유약, 나약함이 아님을 알고, 모든 거대한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알라.”, “무질서와 야망에서 벗어나면 권력자가 되기에 보다 합당한 자가 된다.”, “말을 많이 하면 사람들이 진지하게 보지 않고 조용하면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조용한 사람은 운명의 불변성을 알고 … … 신의 뜻으로조차 생긴 빈곤은 압제와 부정의 부보다 낫다.”

 

이 책의 조용한 사람은 - 내적 충동, 탐욕을 극복한 사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으로 표현하며 그 분위기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이 책은 행정 관리의 교육용이었기에, 그 내용이 다른 교훈서와 같이 Maat와 맞추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가르친다.

내용은 주로 하급 관리 교육용인 듯한 부분이 많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관리함에 있어서 정직성, 비밀, 보관의 신심을 가져라. 수다스러움을 버리라. 권력과 책임을 맡기에 적당한 관리는 상관과 식탁에 앉아 게걸스러워서는 안되고 순종심 공손 건설적인 협조자가 되는 것이 좋은 인간 관계를 맺는 길이다. 자기 안에 좋은 인내심을 기르면 전도가 밝다.” 등등 예의도 중요시했다 (Simpson의 연구).

* 잠언과 Amen-em-Opet의 병행구 비교

잠언

Amen-em-Opet

잠언

Amen-em-Opet

22/17-18

22/19

22/20

22/21

22/22

22/23

22/23

22/25

22/26-27

22/28

3/9-11, 3/16

1/7

27/7-8

1/5-6

4/4-5

병행 없음

11/13-14

13/8-9

병행 없음

7/12-13

22/29

23/1-3

23/4-5

23/6-7

23/8

23/9

23/10-11

23/12-24/10

24/11

24/12-22

27/16-17

23/13-18

9/14-10/5

14/5-10

14/17-18

22/11-12

7/12-15, 8/9-10

병행 없음

11/6-7

병행 없음

< 참고 : ANET p. 421-424 >

 

6) onomasticon - 1열왕 5,13. 13,4 이하 나오는 것과 유사

Onomasticon 이란 가축, 나무 등에 대한 목록을 열거하고 특징을 묘사하는 식의 백과 사전식의 책을 말한다(자연물에 대한 지혜임). 에집트인들은 Onomasticon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하늘과 땅과 그 안에 모든 것, 태양신이 감추어둔 모든 것에 대한 목록을 작성한다.”는 말과 함께 약 600개의 자연물을 체계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에집트에서는 이 작품을 쎄바잇(sebayit)이라고 부르는데 과거에 지혜를 가르치는 교재였다. G. von Rad는 욥28, 41; 집회43; 148; 다니3,52; 이하와 지혜7,17-23 등이 Onomasticon 형식이라고 말한다.

 

7) onchsheshonqy (옹크쉐숑키).

이것은 다른 에집트 문헌과 내용이 다르다. 이 교훈의 교육 대상자는 관리나 대신이 아니라 평민들이다(평민들의 민간 잠언임). “인내심과 신체 건강이 성공의 비결이다.”라고 가르침. 교훈서의 특징이 명령법인데 반해 민간 잠언서인 이 책은 서술형이며 매우 구체적인 표현 형식을 사용하고 권유형도 눈에 뜨인다.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으로 만족하고 기본적인 인간 관계가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또한 이 교훈서는 엘리트의 잠언도 아니며 문체의 사용 표상이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에집트의 다른 잠언집들과 전혀 다르다. 문체의 표상은 산문 형식이다.

 

* 에집트 지혜 문학의 관찰 결론 *

 

에집트 지혜 문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Maat로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Maat와 조화를 이룬 자이다. 즉 침묵의 뜻을 아는 자, 자제력이 있는 자, 전통을 중요시하는 자이며, 전통 보수 사회에서 현자가 되는 것은 Maat와의 조화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문체의 형식은 대부분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하는 형식. 임금, 대신, 서기관 등을 교육의 대상자로 한 점은 - 삶의 자리가 궁중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런 영향으로 성서의 지혜 문학에 삶의 자리도 궁중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는 학자도 있다). 이상의 에집트 문헌들은 성서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특히 Amen-em-Opet는 잠언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성서의 지혜 문학의 삶의 자리를 아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주변의 영향을 받아들일 때는 꼭 자기들의 신앙에 바탕을 두고 탈 신화 작업 및, 유일신화 작업등으로 정리한 후 신학적 사상을 주입하였으므로 성서의 지혜 문학에 나타난 신학적 사상을 아는데는 비교할 것이 못된다 (즉 연구에 별 도움이 안되는 것임).

 

3. 페니키아의 지혜 문학

 

15,11 ; 에제27,8. 28,3-4,27; 즈가9,2 등에는 가나안의 현자와 지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띠로가 페니키아 지역임). 예레49,7; 오바8,8; 2,11 등에는 에돔의 현자에 대해 언급하며, 잠언 30,1-14. 31,1-9 등에 시리아 사막의 현자를 언급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 에돔, 띠로 등을 페니키아 지역 문화라고 칭하여 전개하자.

 

바알 서사시 중에 송아지에 대해 사나운 소처럼, 어린양에 대해 사나운 영양처럼 바알에 대한 아네아트의 느낌도 그러하리라.” - 이러한 구절들은 우가리트 서사시의 운율인데 잠언 10,26의 운율과 비슷하다 (동일한 문학 양식임). “나의 들은 남편 없는 여자와 같다. 경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미를 때리면 때리는 사람의 손을 문다.” 는 등의 표현은 잠언 30,25과 병행한다. 고대 근동에서 개미는 지혜 문학의 인기 있는 대상이었다. 이런 몇가지를 보아도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이 가나안의 지혜 문학의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난다.

잠언 8-9장은 가나안에서 온 단어, 표현 등이 많다. 8,22ff에 의인화된 지혜를 말하는데, 가나안의 엘El(לא) 의 속성 역시 지혜라고 하여 , El(לא)이시여, 당신의 지혜는 영원하시니 하면서 의인화된 지혜를 찬미한다.

이 형식은 그대로 잠언의 형식이며, 이 지혜는 생명 있는 힘을 지닌 엘El(לא)의 속성이다. 고대 페니키아 인들은 지혜를 영원한 행복의 삶을 주는 가나안 최상신인 엘El(לא)의 속성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성서에서 고대근동의 지혜를 받아들여 신학화 한 것은 J계 기자(야훼스트)이다. J계인 창 2-3장은 주 하느님(םיהלא הוהי)이라는 문법상 틀리는 표현을 계속 썼는데, 연구가들은 지혜 문학적으로 원래 가나안 최상신 엘El(לא)이 곧 성조들이 섬겼던 הוהי(야훼) 이시라고 하며 엘El(לא)의 속성인 המכח가 야훼 하느님의 속성으로 변화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8장과 가나안 문헌의 비교.

8,22-(직역) : 야훼께서 당신 지배의 시초에 나를 창조하셨다.

가나안 표현 : El(לא)께서 〃 〃 〃 〃 〃.

28, 8,30 등은 가나안적인 표현이다. 9,1“7개의 기둥으로 된 지혜의 집이 언급되는데 고고학적 발굴 결과 7개의 기둥을 세운 여신전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여신과 지혜를 연관시킨 가나안 지혜 문학의 영향이다. 7,6 “내가 나의 집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 - 이것은 고대 페니키아의 창녀들의 관습과 동일한 것을 묘사했다. 이처럼 가나안, 페니키아 지역의 지혜 문학도 성서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 (토착화)

 

이스라엘은 1200 년 경 (청동 후기 - 철기 초기)에 가나안 지방에 들어왔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당시 주변 국가인 에집트, 메소포타미아와 같이 높은 문화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스라엘은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근동 국가에서 이해한 지혜 개념은 현대적 이해처럼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었고 ‘Maat와 일치하는 것이나 El(לא)의 속성등으로 이해하여 살아가는 실천적 권고와 성공의 비결 등을 말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기 나름의 문화를 토착화시켰으며 신앙에 입각하여 정화시켜 받아들였다.

 

1. 민간 잠언의 영향.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삶을 성공으로 이끌고자 하며, 여러 가지 현상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그 곳에 자신을 통합시켜 잘 살아가려한다. 여기서 경험자들의 구체적 표현들이 잠언의 형식으로 나타내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이 잠언에 비추어 해결하려 한다. 이 잠언이 계속 전수되는 이유는 잠언의 깊은 뜻이 각자의 행동에 등불의 역할을 하는 살아있는 생명력을 가지기 때문이며 점차로 구체적 상황은 탈락되고 여러 경우에 적용시킬 수 있게 변화되는데 이것이 곧 옛 속담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민간 잠언이다. eg)

 

악인에게서 악이 나온다. 16,18. 18,12. 25,15. 27,7 etc. 11,24 에서는 역설적인 표현이 있다 (20,17. 25,15. 27,7도 마찬가지임).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적용을 위해 첨가된 것도 있다. 한 토막 한 토막의 잠언들에서 인간 질서의 윤곽을 파악하다가 첨가된 것으로는 잠 25,23. 26,20. 27,20 등이다.

25,23 북풍이 비를 몰고 온다 (원래의 민간 잠언).

그처럼 참소 한 혀는 사람 얼굴에 분노를 몰고 온다 (첨가된 것임).

26,20 땔감이 없으면 불이 꺼진다. 그처럼 …… (원래의 민간 잠언)

숯을 만지면 그처럼 (13,1 변화된, 첨가된 것임).

이러한 모습들에서 이스라엘도 다른 나라와 같이 많은 잠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지혜 문학과 군주 제도

고대 근동의 지혜 교훈들은 이스라엘에 군주 제도가 정착되기 전부터 종교 제도 속에 시작되어 솔로몬 시대에 완전한 정착을 이루었다. 에집트의 경우 궁중의 지혜 학교가 있었듯이 군주 제도는 지혜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온 후 200 년간 판관 시대를 가졌고 최초의 왕정이 사울 시대였는데 이때 사울은 왕이라기 보다 사령관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구체적인 왕정 시대는 다윗-솔로몬 시대이며 솔로몬은 성서에서 최고의 현자로 소개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본격적인 지혜 운동이 일어난 것이 군주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것은 고대 근동의 지혜 현상과 같은 것이다.

 

다윗-솔로몬 시대에 구체화된 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야훼스트 저자는 가나안의 엘El(לא)을 성조들의 으로 바꾸어 소개하고 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곧 한 분이신 하느님이고 지혜는 그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서 지혜란 야훼 하느님의 속성이며, 지혜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인간의 지혜란 하느님의 선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지혜는 민간 잠언에서 말하는 경험 지혜가 아님).

 

2사무14,20 : 임금님의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내용, 2사무14,17 : “임금님은 하늘이 내리시는 분이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실 수 있으십니다.” 13,9에서 솔로몬이 지혜를 청했고 하느님은 지혜를 주셨다는 내용의 이면에 있는 사상은 야훼 하느님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우신 분이고 인간이 가진 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신학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혜의 시작은 야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라는 사상을 정착시킨다.

 

3. 이스라엘에 근동 지혜가 들어온 과정

이스라엘은 왕정을 시작하면서 에집트과 많은 접촉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아 고대 근동의 지혜란 곧 왕, 보좌관, 고문관들에게 필수적인 것이었고 궁중에서의 교육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평정 정책을 편 후 문호를 개방한 뒤로는 외국인 용병을 고용했고 에집트 서사들도 채용했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정을 수립할 때 대제국의 면모를 갖추려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며 새로운 관리 계통을 만들었다. 따라서 관리교육의 필요성이 생기고 문물 도입이 용이했던 에집트 체제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2사무 8,16f. 20,20-26 참조).

 

솔로몬은 다윗으로부터 대제국을 물려받고 외부의 적이 없는 평온한 상태에서 현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이 그의 과업이었고 그의 슬기로운 동맹정책을 통하여 이 목적을 성취하려했다 (1열왕 3,2-6 참조). 많은 경우 이 정책은 결혼 동맹을 통해 이루어졌고 당시의 사정으로 후궁은 자신의 종교를 계속 가질 수 있었기에 영향력 있는 후궁은 왕을 설득하여 (1열왕14,21-22) 이방민족의 풍습을 펴기도 하였다 (또한 솔로몬의 아내 중 가장 빼어난 여인은 파라오의 딸이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솔로몬의 신흥 왕국은 군주 국가의 체계를 완성하기 위해 가능한 한 열강들의 정치, 지혜, 격언, 문자, 세제, 사물의 목록 작성법까지를 도입하고, 이를 모방하여 이스라엘의 군주국가 상을 정립시켰다. 이런 연유로 이스라엘에는 관리계급과 행정기구가 생긴다. eg) 1열왕 4,1-7.

 

또한 관리들을 지도하는 자 (215,2 ; 이사22,21ff)가 있었고, 지방 장관을 두었고, 거대한 행정 체제의 운영을 위한 전문 지식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기에 에집트의 모범을 따라 고급 관리, 하급 관리를 위한 지혜 학교를 세우고 지혜의 전수를 하게 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후대에 이르러 솔로몬을 최고의 현자로 여기는 전승을 갖게 되었고,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이 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12,6,v9. 3,12. 5,9-11,v21,v26. 10,4,v6-8. v33ff. 11,41; 2역대2,10,v12. 2,11. 9,3,5-7등에는 솔로몬을 지혜의 최고봉으로 본다). 또한 14,32에는 솔로몬을 수많은 잠언의 작가로 소개하며 그의 지혜는 동방에서 최고였다고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잠언, 아가 등의 작가가 솔로몬처럼 소개되었고, 전도서의 저자도 나는 다윗의 아들이며 예루살렘의 왕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지혜서 역시 22,1-3을 근거로 하여 솔로몬을 저자라고 한다.

 

** 그러면 왜 가명 작품이 나왔나? Pseudonimity(가명).

유명인의 가명을 쓰는 것은 자기가 쓰는 메시지에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작품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솔로몬을 현자들의 원형(Proto-type)으로 보았기에 현자들은 자기들이 글을 쓰고도 자기 선배 중에서 Proto-type이 될 수 있는 사람의 이름을 쓸 경우에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시킬 수 있었기에 가명을 많이 사용하였다. 즉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일했다는 것을 전하고자 가명을 썼고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은 솔로몬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므로 오늘날의 저작권 문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그래서 유태인들이 모세 5경을 모세의 것으로 돌렸듯이 지혜서 저자를 솔로몬으로 돌리는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 자연스러웠다.

 

솔로몬이 현자들의 원형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의 가정 : 지혜 문학 운동이 솔로몬 당시에 활발했고 솔로몬은 그 지휘자였다는 가설.

이 가설의 증거물은 지혜 문학과 에집트의 관계가 뒤받침 해준다. 솔로몬은 에집트와 정략 결혼을 하였고 당시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지혜문학이 크게 성행하였다. 이를 근거로 15,9ff. 10,1의 주장이 근거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솔로몬은 후궁을 700명이나 거느렸고, 사랑 받았다고 전하는 파라오의 딸도 후궁 중의 하나일 뿐이고 솔로몬의 총애도 기실 정책적이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15,9-14; 10,1,v25 등은 서로 관계 있는 전승으로 비록 솔로몬의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해도 새겨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15,9-14는 솔로몬의 지혜와 가장 깊은 관계를 알려주는 문구이다. 전승사적 연구 결과 110장의 솔로몬의 지혜는 15,9-14에서 나온 것이다. 이 부분이 솔로몬을 전설적 인물로 만들고 있지만 자세히 조사하면 언어학적으로 보아 열왕기의 문구는 아니다. 또한 마소렛본의 경우 5장과 10장의 구절과 70인역(LXX)의 구절을 비교하면 LXX의 구절의 순서가 바뀌었다.

그렇다면 LXX 번역 당시에도 이 부분의 고정은 안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10장은 뒤늦은 전승일 수밖에 없다. Text 상으로도 솔로몬의 지혜라고 주장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19,28. 10,11-12-원문으로 보여지는 것. ; 10,1-10. 10,13 - 첨가물로 보여지는 것 >

 

의 가정 : 솔로몬의 지혜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이 전설을 미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

이 가설은 솔로몬 시대에 그가 누렸다고 생각되는 부귀와 영화와 지혜를 갖고 싶었던 히즈키야가 솔로몬을 미화시켰다고 보는 의견이다. 이 가설의 가능성은 사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이 히즈키야 시대에 크게 성황 했는데 이 때 위의 욕구로 인하여 미화되었을 것이라고 하며 그 증거로 잠언 25장을 든다. “이것은 솔로몬의 잠언인데 히즈키야가 그 부하에게 베껴 쓰게 하였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의 가정 :신학적 이유

열왕기는 신명기계 역사서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전승은 원 신명기계 저자의 작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 신명기계의 지혜 개념과 솔로몬의 지혜 개념이 신학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원 신명기계의 지혜 개념은, . 지혜는 성공적인 통치(5,15-26 참조), 22,1-2. 2,5-9. . 올바름, 참다운 재판 능력. . 자연계에 대한 지혜 등이다. 따라서 솔로몬의 부귀, 명성은 3,12-15에서 나온 후대의 전승으로 본다.

 

신명기 - 요수에 - 열왕기의 맥을 잇는 신명기계 역사서의 관점은 하느님 말씀을 잘 들으면 상 받고 안 들으면 벌받는다는 사관이다. 그러므로 신명기계의 지혜란 - 임금이 갖추어야할 통찰 능력, 행정 능력, 판단 능력 등이다. 그런데 15장과 10장의 상이한 지혜 개념으로 보아 3,12-15를 바탕으로 한 후대의 전승이 삽입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학적인 이유로 솔로몬을 현자들의 원형으로 내세웠다는 가설도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4. 히즈키야의 영향

솔로몬과 지혜문학이 연결되는 것은 잠 10,1. 25,1 등의 제목 때문에 제기 되었다.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인데

여기에서도 두 가지 가능성을 유출할 수 있다.

. 솔로몬이 잠언의 저자라는 것을 공적으로 인정한 것이 히즈키야 시대라는 설. 히즈키야가 사람들을 시켜 베낀 것은 틀림없는데 당시 이 잠언의 저자는 솔로몬이라고 규정해 버릴 수 있다는 설이다. 히즈키야 시대 (716-687) 는 이스라엘에서 지혜 문학이 번창했던 시대였고 시로 에프라임 전쟁이 있고 난 후였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망했고 유다는 조공국이 되었으며 이때 유다의 히즈키야는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위해 에집트과 동맹을 맺었다. 당시 에집트 역시 지혜 문학이 활발했었고 이의 영향으로 지혜 문학을 정리하면서 솔로몬을 저자로 규정했을 것이다는 설.

 

. 시로 에프라임 전쟁 후 북부의 지혜 교사들이 북부의 자료를 가지고 남부로 내려오면서 이것이 기록으로 남겨지는 문학 활동이 성행하였다. 히즈키야는 당시 종교적, 정치적 독립을 꾀할 때 였으므로, 가장 좋은 정치인의 모델l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솔로몬 이였기에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회복시켜 보려고 하였고 그래서 히즈키야는 당시의 많은 잠언들을 수집하여 솔로몬의 것으로 돌리고 자기가 수집하였음을 덧붙인 탓에 솔로몬의 것으로 나타난다고 본다는 설.

 

. 히즈키야 시대의 예언자는 이사야 이다. 이사야는 특히 현자들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는데 사실 히즈키야는 솔로몬 이후 가장 탁월한 왕이었고 솔로몬의 영광과 지혜에 대한 유배 이전의 잠언들은 모두 히즈키야 시대의 작품이다. 미카 3,9-12 에는 히즈키야 시대에 북부의 영토가 남부로 포괄되는데 2역대 30장에는 북부지파의 관습이 예루살렘에서 시행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 예로는 금송아지 상 숭배를 들 수 있다. - 북부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소에 대응하는 성소를 만들어 놓고 당시 왕의 발판 역할을 하던 금송아지를 야훼 하느님의 발판으로 동일시하여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드러내고자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다. 이 단계는 우상숭배라고 할 수는 없는 차원이었으나 후 일에 송아지 자체를 하느님과 동격으로 보는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다. 히즈키야는 이런 폐단을 시정하였던 것이다.

 

역대기에는 히즈키야 시대와 솔로몬 시대를 묘사하는 비교하는 표현이 많다.

@ 2 역대32,22-23,v27-29. 야훼께서 여러 가지 부를 주셨고 영예를 누렸다고 .

@ 2 역대29,3-46. 30,13-27. 성전 정화를 소개하며 이런 일은 솔로몬이래 없었다.”

이사야서는 히즈키야 시대의 지혜 문학이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 이사 2,7. 22,18. 30,16. 21,1-3. 36,8-9 기본적인 군사장비와 영광의 상징으로 말과 마차가 뛰어났다고 소개.

@ 이사 5,21. 29,14-16. 30,1. 31,2. 32,14. 36,3.v22 에는 히즈키야의 자문 그룹인 현자들을 소개.

예루살렘 성전의 서기관 학교

8C 말경 시로 에프라임 전쟁으로 북부가 아시리아에게 패망하자 전승이 사라질 우려가 있어서 구전 전승을 글로 고정 시켰다. 따라서 문학 활동이 성전의 학교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 이사 38,9ff : “히즈키야의 노래이것은 하느님 찬미가인데 이 저자를 히즈키야로 본 것은 그가 문학 활동을 활발히 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솔로몬과 히즈키야는 지혜 문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히즈키야는 남북의 전승이 모아진 시대로 문학 활동이 활발했다. 이로 인하여 잠 25,1 이하의 제목을 붙이게 되었으므로 위 제목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전재로 하여 이해해야 한다. 또한 당시의 정치 문학의 관점과 함께 이해하여야 한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이 에집트 전승을 받아온 것은 잠언 21,17-24,22 의 내용이 대표적으로 증명한다. 이 잠언은 Amen-em-Opet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이때가 곧 히즈키야 시대인 것이다.

 

이사 28,23-29의 예언은 지혜 문학적 형식이며, 지혜 문학의 대표적인 교훈과 꼭 같다. 이사야가 지혜 문학의 영향을 받은 이유는 - 히즈키야 시대가 지혜 문학의 시대였던 고로 예언자 역시 하느님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서 지혜 문학 양식의 예언을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솔로몬 시대가 이스라엘 지혜 문학의 최고봉으로 인정하기 힘들다. 그 당시는 겨우 왕정이 체계화했을 뿐이다. 물론 당시 지혜 문학이 성행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히즈키야 시대를 능가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결언 : 고대 궁중은 지혜 문학의 산실이었다. 궁중의 지혜 학교에서 양성된 현자들은 왕을 보좌하였다. 특히 에집트 사회는 Maat를 정리, 발전, 전승시켰다. 이스라엘에서는 다윗 솔로몬 시대에 개방융화 정책을 편 탓으로 주변 국가의 지혜 문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당시 활동하던 J(야훼스트)기자는 당시 수립된 왕정의 타당성을 인정하기 위해 지혜 문학을 신학적으로 수용한 최초의 개척자였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은 히즈키야 시대에 성행하였음이 드러났다. 히즈키야는 이스라엘의 정치, 문화, 종교적 독립을 위해 에집트와 동맹하고 국내에 현자학교를 개설했고, 에집트의 지혜 문학을 도입, 수집, 정리, 편찬한 주인공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당시 패망한 북 왕국의 여러 전승을 책으로 펴놓았고,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에 기초하여 성서의 개념을 맞추어 남겨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성서에도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5. 예언자와 지혜 문학

예언자들은 이방인들 가운데에도 지혜 문학의 현자가 있었음을 말한다.

eg) 에집트의 현자 - 이사 19,7. 바빌론의 현자 - 이사 47,10 ; 예레 52,57

페니키아의 현자 - 에제 28,3-4 아시리아의 현자 - 이사 10,13

에돔의 현자 - 기타 지방의 현자 - 예레 10,7

여기에서의 현자는 왕국의 고관들, 점쟁이, 지방 장관, 거짓 예언자 등이다. 이방인의 현자는 주로 왕을 자문하는 정치적 현자들을 말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정의 개방정책을 통해 고대 근동의 지혜 문학이 도입 소개되었으므로 종교 혼합주의, 우상 숭배의 도입 기회가 되기도 하였기에 예언자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eg) 솔로몬의 결혼 동맹 이방 여인들의 종교 관습 인정 이스라엘에 종교 혼합주의를 만드는 계기.

당시 외국에서 들여온 지혜 문학은 정치적 자문들이었다. 따라서 종교 혼합주의와, 우상숭배와 야훼 신앙에 위배되는 ה??를 탄핵하게 된 것이다.

 

1. 이사야의 경우 : 8C 초의 예언자 이사야는 지혜롭다는 자 (이사29,14) 들을 탄핵하였다. 또한 아시리아 왕에게 벌을 선포 (이사 10,13) 하였고 유다의 현자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에집트의 현자들도 혹평하였다. 이사야가 이렇게 탄핵한 이유는 왕의 측근에 있는 현자들의 근시안적 안목 때문에 우상 숭배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지자 이사야는 야훼 하느님께만 의지하라고 외쳤다. 왕의 현자들은 우상 숭배의 기회를 부여하는 에집트와의 동맹을 촉구하였다 (아시리아에 대항하고자 ).

 

2. 예레미야의 경우 : 예언자와 현자의 충돌은 예레미야 시대에 극한 상태로 변하였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현자들이 사회의 중요 계층을 형성했다. 예레미야는 8,8에 이들을 탄핵했는데 여기에는 법과 지혜를 연결시키고 있고 그 배경으로 신명 4,6에 바탕이 있다. 신명 4,6은 이스라엘과 타민족들을 구별하는 구분점이다.

이런 연유로 현자들은 예레미야를 죽일 음모를 갖는다(18,18). 현자들과 사제들은 예레미야를 죽여 자기들의 ה??가 옳음을 주장하려 한다. 9,22ff에 나오는 현자들의 구별 점처럼 그는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는데 오히려 그들은 용사, 부자와 함께 나타나서 하느님의 말씀은 외면하고 세속적인 차원의 지혜만을 추구했다.”

 

7C 이후에는 위의 정치적 현자들의 지혜 개념이 이제는 왕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반화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즉 이때부터는 기술적으로 탁월한 자에게 적용하는 םכה을 쓰고 있는 것이다. 2 이사야 재간 있는 대장공(이사40,20), 재주 있는 사람이 손으로 만든 우상(예레10,9) 등처럼 재간, 재주 등에 םכה을 사용한다. 에제 27,8에는 띠로의 선원, 배 수선공(27,9) 등의 숙련공들에게 םכה을 적용시키고 마술, 숙련된 장인 등을 현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사야). 그러므로 이제는 지혜가 법과 질서 유지의 의미를 벗어나서 일반화 한 것이다.

 

예언자와 현자의 지혜의 비교상 차이점

예 언 자

현 자

설교 : 하느님과 인간 관계에 집중 (, 재앙, 회개, 용서, 구원)

계시의 관점에서 말하며 하느님의 사신의 기능을 갖음.

사람들에게 듣고 결단하고 실행할 것을 요구.

설교 : 인간 생활의 안녕, 질서, 행복에 이르는 지혜

경험 관찰의 자료에서 얻은 이성의 관점에서 말한다.

사람들에게 이해하고 배우기를 바라며 권고, 교훈

가르침 : 신 중심적, 수직적

가르침 : 인간 중심적, 수평적

 

그러나 예언자와 현자의 가르침에 공통점도 있다. 공통 경험과 관심사를 나눴기에 예언서 안에 지혜 문학의 어휘도 많다.

가르침의 공통점.

제의적 종교와 의식에 대한 태도의 공통점 : 아모5,21-24; 21,3; 이사6,9-10에서 수수께끼, 비유, 격언 등의 지혜 문학 양식을 사용한다.

명령형 : 들어라, 깨달아라, 보아라, 알아라 등의 예언서 상투어는 지혜 문학의 특징이다. : 이사1,1; 4,1,v10. 29,19; 13,6. 34,2; 이사5,1-7 (이사5,1-7은 비유로서 은유와 해설이 섞여 나오는 수사학적 질문, 반의적 병행법).

 

이사 28,23-29는 현자들의 권고문 형식(특히 23) 그대로이고 v24-28은 수사학적인 질문들이며 이런 스타일은 지혜 문학의 특징들이다. 이사 5,1-7은 잠언 24,30-34의 포도밭 비유와 같은 맥락의 지혜 문학이다. 이사야서에 사용하는 알다’, ‘깨닫다라는 용어는 지혜 문학 용어이다.

비유 : 에제키엘서의 많은 비유와 호세7,4, 이사10,15. 아모6,12. 3,3,v6의 비유들은 지혜 문학의 특징이다.

개인 응보 : 지혜 문학의 개인 응보 사상은 예레 12,1-3,5. 17,5-8. 17,9-10,11에도 있다.

예언서중(예레4,22)지혜, 슬기, 어리석음을 하느님께 적용시키어 야훼의 지혜, 슬기로 말한다.

환시 묘사 : 예언서 중 환시에 보이느냐?”내가 말하기를등의 질문 - 응답형식은 현자들의 지혜 교육때 쓰던 방법인데 예언자들이 많이 사용하였다. 즈가5,1f, 아모7,7f, 예레1,11f. 24,3.

잠언적 표현 : 예레 31,29. 에제18,2. 16,44. 이사49,24.

숫자 잠언 : 숫자 잠언이 예언서에도 많다. 예레36,33. 호세6,2. 아모5,5. 이사17,6 .

사용례 : 1,2의 경우-30,14. 1,2,3의 경우-집회 23,23. 2,3의 경우-33,2-9. 33,16. 26,28. 50,25. 2,3,4는 잠 30,15-16 26,5. ,3은 집회25,1-2. 3,4는 잠30,18-19.v29-31. 6,7은 잠 6,16. 5,19. 7,8은 전도 11,2. 9,10은 집 25,7-11

용어 면에서도 지혜 용어인 매, 규율(musar, correction)이 예레 2,40. 7,28. 17,23. 32,33. 35,15 등에서 즐겨 쓰인다.

예언서 중 후대 첨가 구절들은 지혜 문학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호세 14,10 (내용, 문체가 모두 지혜 문학 첨가물). 예레 10,23-25에 첨가 된 것은 잠언 20,24와 동일한 것이다.

 

결어 : 예언자는 지혜 문학의 전성기에 살면서 지혜 문학에서 말하는 ה??에 갈등을 느끼고 비판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상투 문구를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앙에 맞추어 토착화시키는데 공헌하였고, 그들의 야훼 신앙을 적절히 표현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예언자는 이방에도 지혜가 있음을 알았고, 예언서 문체에 지혜 문학의 문체를 반영했기에 지혜 문학적 문체인 은유, 비유, 잠언적 표현, 수사학적 표현이 많다. 다른 한편, 지혜가 하느님 말씀과 맞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탄핵하여 참다운 지혜의 근원이 야훼께 있음을 말하여 지혜 문학을 신학화하였다. 이 영향으로 결국은 야훼를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사상이 정립된 것이다. 잠언 1,20-33. 8,1-31에 의인화된 지혜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예언자들의 영향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지혜와 예언서는 연관이 많다. 결국, 예언자들이 야훼 신앙을 수호하려 했던 정열이 외국의 지혜 문학을 이스라엘에 토착화시킨 것이다.

 

6. 신명기와 지혜 문학

지혜 문학과 신명기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신명기 저자도 자녀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신명6,7을 보면 지혜 문학의 현자의 가르침과 같다. 신명기계 역사서도 교육적인 작품으로서 그 목적은 이스라엘의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주려한 것이다. 지혜교사처럼 신명기 저자도 지혜를 존중한다. 신명 1장에 지도자 임명규정은 지혜가 출중한 사람들이 판관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지혜란 지혜, 슬기, 지식을 포함한다. 이처럼 지혜에 특수한 관심을 갖게 된 것에서 신명기의 인본주의적인 법률의 근원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 신명기의 법률이 현자들을 통해 나타나듯이 (물질적 보상을 말하는 현자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자는 하느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 지혜의 가르침의 요점인 장수, , 대가족, 번영, 출세, 성공 등이 하느님의 법을 준수하는데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1차적 동기가 된다는 말, 신명 5장 참조).

히즈키야 시대에 신명기가 나왔다면 이 시대에 사제, 예언자, 현자 (예레 18,19. 에제 7,26) 직분이 나온 것이 틀림없고, 예레미야가 신명기 시대의 예언자로서 토라와 관련시켜서 현자들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본문에서 서기관이라 호칭하는 자가 현자임) 바로 이 서기관 (현자) 들이 신명기계를 편집한 듯하다.

7. 예언자 이후 시대의 지혜 문학

(유배와 유배 이후 시기)

 

유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지탱해오던 국가신학(다윗왕조신학) 이 붕괴했다. 예언자들이 왕조 신학의 붕괴를 예언했었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청중들에게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데 실패한 것이다. 이유는 신명기의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의 구별 기준이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과를 보고 판단 세월을 요구하므로 당시에는 효과를 모른다.

이루어져도 야훼 신앙만이 가짜일수록 더 진짜 같아서 구별이 모호해진다.

현자들이 말하는 ה??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논리 정연하게 말하여 설득력이 큰데 반하여 예언자들은 다만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הוהי-רבד 만을 확신 있게 말함으로서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고 따라서 설득력의 입장에서는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즈가 7,12 참조).

 

결국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말한 현자들의 말을 따른 탓에 유배를 초래했고 국가 신학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스라엘의 예언의 역사는 이처럼 계속된 순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호세7,9, 예레25,3-7, 에제33,30-33, 아모10,7-10). 백성들이 현자들의 설득력에 동화된 탓에 예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박해를 받았기에 예언자들은 항상 박해 중에도 심판 선포를 했다.

 

유배가 끝나자 예언자 권위는 실추하였고 예언자들이 설자리를 잃었다 (즈가 13,2-6).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 된 유배 이전의 참 예언자들이 지극한 공경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언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즈가 7,12. 다니 9,6. 에즈 9, 느헤 9장 등이 증명한다. 예언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벌을 받게 될 것이다.”는 것. 이리하여 신학의 재정립 시기를 맞이한 이스라엘은 유배이후 하느님의 정의, 응보관 등의 새로운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유배 이후 귀환 자들은 희망에 부풀었으나 본국의 잔유세력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현실이 너무나 다른데 실망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돌파구를 만든 것이 곧 지혜 문학 묵시 문학이다.

 

이 시대의 지혜 문학은 - 하느님의 정의, 의인의 고통, 응보관 등을 그린다. 이것은 당시의 현자 그룹인 율사들의 손으로 정리되었고 따라서 유배 이후의 지혜는 율법과 동일시되며 지혜로운 자는 -법을 지키는 자라는 관념을 창출했다.

이 시대의 묵시 문학은 - 종말론적인 새 하늘, 새 땅을 말하기 시작하며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신앙을 확인하기 위하여 전승을 모아 편집했고 5경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5경의 법을 잘 살면서 종말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결국 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율사들의 권위를 크게 부각시키게 하였고 이러한 추세는 예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1)귀환 시기

50 여년의 유배이후 BC 538 고레스 칙령으로 귀환하게 된 유배인들은 사실은 모두가 이스라엘의 현자 계급, 지식 계급, 왕족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유배지에서도 종교적 문학적 활동을 가능성이 있고 모세 5경 중 “P문헌과 지혜 문학의 구체적인 형성을 가졌다. P(제관계)의 형성과 욥서는 이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욥서는 유배 말기의 예레미야와 유사성이 많아서 유다 왕국의 유배와 관련된 작품으로 해석된다. (예레 20,14-18은 욥 3장과 유사, 예레 12,1-12은 욥 21,7 이하와 유사, 예레 20,7-8은 욥 19,1-12와 유사).

이런 이유로서 욥서의 시대적 배경을 유배 말기로 보고 있다. 또한 이사 52,14. 53,3,4b의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모습도 고통받는 욥의 모습과 같다. 그래서 제 2 이사야는 욥서를 알았던 사람의 작품으로 보인다.

 

2) 페르시아 시기 (538-322)

하께서는 유배 이후의 유대인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도 자기들의 신원을 회복하려한 노력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유다는 페르시아의 조공국으로 성전 재건을 이루고 관리 체제를 정비하고 바빌론 유배 중 수집된 율법을 에즈라가 가져오고 이 새 법(토라)으로 유다 공동체의 기본법을 만들었다. 그래서 토라를 연구하는 율사는 최고의 현자 계급이었다. 에즈라는 공적인 율사로 지칭되었으며 레위인들이 도움을 받아서 하느님의 법을 가르쳤다(느헤7,9ff). 이 시대의 레위는 율사를 말했으므로 에즈라는 율사들의 장이었을 것이다.

이 율사들이 현재의 성서에 나타나는 지혜 문학을 수집 편찬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율법과 지혜 문학을 연결시켰다. 신명 4,5-6의 내용처럼, “보아라. 나는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나에게 내리신 규정들과 법규들을 그대로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성심껏 지켜야 그것을 보고 다른 민족들이 너희가 지혜롭고 슬기 있는 것을 알 것이다 .” 이런 분위기로 인하여 집회서, 전도서, 잠언 1-9장 등이 수집되고 편집되기 시작하였다.

유배 이전에 수집된 것으로 보이는 잠 10장 이후와 유배 이후에 수집될 잠 1-9장을 보면 이 시기에 첨가된 잠 1,7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1,7 “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바보들이란 이런 지혜와 교훈을 무시하는 자이다.”

 

이런 관점에서 잠언 1-9장은 신명기계 사관의 신학적 지혜의 서문 역할을 함으로서 잠 10장 이후를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잠언이 구체적으로 언제 만들어졌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성격상 욥서와 집회서의 중간 시기로 보인다. 왜냐하면 욥서는 지혜를 하느님의 숨겨진 지헤로 보며 궁극적인 지혜는 하느님의 감추어진 지혜로 보는데 집회서는 궁극적인 지혜는 모세의 율법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토라 시편(119편등) 은 대게 3 세기 이전에, 지혜 시편(34, 37, 49 ) 들을 페르시아 시대의 작품이며, 전도서는 페르시아 시대 말기로 본다.

 

3) 희랍 시대 (332년 이후)

고대 희랍의 종교 문화가 전파하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은 희랍 세계로 분산되기 시작하여 알렉산드리아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희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거류민 공동체(Diaspora)를 위해 70인역성서(LXX)를 만들었고 집회서, 에즈라 1, 다니엘서 등이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의 Text들은 매우 유동적이었고 이때 지혜 교사들은 바룩서, 1에스드라서를 저술했다.

집회 34,9-12. 39,1-5. 51,13-21 등은 당시의 지혜 교사들의 훈련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훈련된 교사들이 자기의 배운 바를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모습이 집회 51,21-33에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최초로 정식학교라는 용어가 나온다 (·미드라쉬).

이 시대에 지혜 교사들은 잠 1-9, 전도 12,9-10에 언급된 것과 같이 나름대로의 교훈을 써내었고 솔로몬의 지혜, 토빗, 유딧, 에스델, 다니엘서 첨가분 등이 이 시대에 나왔다 (종교적 교훈 형식을 띠었지만 지혜 학교 교재는 아니었음). 결국 대부분의 지혜 문학서는 페르시아 - 희랍 시대에 수집 편찬된 것이다.

 

이스라엘 지혜의 발전 과정

①↓ 이스라엘 자체 안에서 생긴 민간 잠언.

②↓ 왕정의 시작과 함께 도입된 주변 국가의 경험 지혜.

③↓ 예언자들이 지혜 문학을 이용하여 야훼 신앙을 키우고 지혜의 근원을 하느님으로 가르침.

④↓ 유배후 페르시아 시대부터 율사들의 노력으로 구체적인 지혜 문학서들이 산출되기 시작함.

 

. 이스라엘 지혜 문학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이미 살펴본 대로 지혜 문학의 삶의 자리는 고대 근동의 경우는 궁중의 지혜 학교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지혜에 삶의 자리는 어떠할까?

일반적인 의미로 교육은 아버지의 책임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일상 생활의 지식, 가문, 사회적 책임과 종교적 책임까지를 가르쳐야 한다. eg) 18,19. 12,24f. 13,8f. 4,9f. 6,7f. 6,20f. 32,7.v46 . 어머니도 딸은 물론이고 아들들에게 교육시킬 의무가 있었다. eg)1,8. 6,20. 31,1.v26. 부모를 제외하고는 두 그룹의 계급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었는데 이들이 곧 예언자들, 사제들이다.

당시 이스라엘에 교육의 장소, 즉 학교(שׁרדמ-תב)가 있었다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학교는 집51,23에 처음으로 소개 됨). 학자에 따라서는 성서에 학교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교육이 지닌 개인적 성격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개인 교수의 형태이거나 아니면 광장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구체적인 학교가 필요없었다는 설을 펴기도 한다.

 

그 예로는, 212,3 : 여호야다 라는 사제가 요아스를 가르침. 210,1.v6. 2사무12,5 : 아합의 아들들의 수호자 (가정 교사와 동의어). 1역대27,32 : 요나단은 을 교육했다. 1,20. 8,1 : 의인화된 지혜가 광장이나 길모퉁이에서 외치며 가르치는 모습을 전해줌. 이상의 증거들은 지혜 교사가 자기 아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내용상 병행을 이룬다. 17,16 : “어찌하여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사려고 돈을 쥐고 있는가?”라는 구절을 공납금 (수험료) 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으나 원뜻은 지혜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의미일 뿐이다. 결국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는 학교가 있다는 말이 성서에 없다.

 

그러나 추론에 의하여 전문 교육의 장소 즉 학교가 있었음을 알아낼 수 있다.

1 추론 : 히브리 문학은 유배 이전부터 제관계 (율법, 시편). 역사서 지혜 문학 예언 문학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에 틀림없이 지적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궁전 학교나 성전 학교가 있었을 것이다. eg)

예언자의 제자들 이란 단어에 주의. 따라서 궁전이나 성전에서 전문지식을 가르쳤고, 이로서 고도로 성숙한 히브리 문학이 나온 것이라는 설.

2 추론 : 외국과의 비교 -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생기기 이전에 이미 에집트, 헷 제국에는 지혜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고 이는 정부의 구조상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다윗, 솔로몬 시대이래 주변국가의 행정, 관리 체제까지를 모방했다는 것이 사실인데 지혜 학교도 모방하였을 것이다.

3 추론 : 왕궁 행정 - 외국과 맺은 복잡한 여러 관계로 보아 이스라엘 왕궁에는 에집트어, 악카디아어 등을 구사하는 관리들이 있었을 것이고 복잡한 사무로 인하여 주변 국가와 같이 서기관 학교가 필요했을 것이다 라는 설.

4 추론 :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과 외국 지혜 문학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에집트 등의 지혜서들을 알고 있었다. 에집트의 지혜서는 학교의 교재이다. 따라서 잠 1-9장이 교육적인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혜 학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שׁרדמ-תב)는 집회서 51,23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일부의 학자들은 지금도 해석이 불가능한 이사 28,10이 옛날 히브리어 알파벳을 가르치던 순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28,9에는 가르치는 사람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사50,4에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기의 자세를 매일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모습과 비교한다. 여기에 나오는 리무딤(םידומל)이란 단어는 배우는 마음”, “학생의 자세로 번역 가능하다. 여기서는 명사로 쓰였기에 바로 학생을 가르킨다.

1역대25,7.v8에 음악가를 양성하는 학교 제도가 소개된다. 여기에서 v.8은 선생과 학생이라는 단어가 소개된다. 이 말은 학교가 있었다는 간접 증거이다. 반대론 자들은 개인 교수로 보거나, 아니면 학교가 있었다해도 역대기가 후대의 편찬물이므로 저자 당시의 상황에서 그 당시의 사건을 보고 적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 그렇다면 이미 살펴본 앞의 4가지 추론 중에서 잠언이 에집트의 지혜 교재와 같다는 사실을 넣으면 훌륭한 증거물이 될 수 있다. 특히 잠 1-9 장은 에집트 형식과 내용을 그대로 썼다. 즉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이 외국의 문학 작품을 알고 있었고, 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외국 학교와 비슷한 학교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C.F.Whitley의 주장은 - 에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너무나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에서는 학교 없이도 지혜 교육이 가능했다고 증거로서 이스라엘 서기관은 세습적이었다고 한다. 다른 학자들은 - 왕궁과 직접 연결된 관리학교를 떠나서, 예루살렘 성전에 부속 학교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학교는 사제 양성만이 아니라 서기관 양성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구약 구절들을 종합할 때 이스라엘에 지혜 학교가 틀림없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 삶의 자리 정리

교육은 가정 교육이 그 기본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왕국이 세워지고 외국과의 외교관계 등을 위해 인재 양성이 필요했으나 가정 교육만으로는 할 수 없었기에 교육의 체제 역시 외국에서 도입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 간접적 증거로는 지혜서의 유사점을 들 수 있다. 이 학교들은 왕궁과 성전에 있었고 성전을 중심으로 인재가 양성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시된다. 반면에 서기관, 율사 계급이 세습적이었고, 왕실은 개인 교수를 갖고 있었던 점을 말하는 성서 구절들로 보아 이스라엘의 지혜 교육은 주로 가정에서 아버지 아들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지혜 문학의 삶의 자리는 고대 근동의 경우처럼 궁중의 지혜 학교일 것이지만 확실한 성서적 근거는 없고 간접 증거들을 통한 긍정적 추론만이 가능할 뿐이다.

 

. 지혜 문학의 문학 유형.

 

1. 잠언 (ל??)

 

어원 분석 : ל?? ① 지배하다. 다스리다. ② ~과 닮다. 비슷하다. 비교가 된다.

의 지배한다는 개념은 히브리어에만 있고 다른 셈족 언어에는 없다. 히브리말에만 있는 이 단어는 효력이 있는, 힘있는 말이란 뜻과 연결된다. 의 비슷하다는 것은 - 닮은, 상징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효력, ??

??? Sympathetic magic

닮음, 상징적 행동 ??

 

Sympathetic Magic 이란 주술적 행동이 효력을 갖고 있다는 개념용어이다(미신적인 방편[방법]에서 나오는 주문과 행동을 의미함). 아랍어에서는 의 의미로 쓰이지 않고 의 의미로서 닮은, 비슷한, 예식, 예 등의 개념이 있다(이쪽으로 많이 쓰인다). 히브리어에서는 비슷하다는 뜻의 사용 예가 많다. 143,7처럼, 28,1. 49,13.v21, 이사14,10에서는 처럼, 같이 되다. 19, 이사46,5에서는 누구의 모습을 본뜨겠는가, 비교하여 같다고 하는가? 41,25에서는 누가 그와 같으랴?

 

* 이상의 표현으로 보아 비슷하다’, ‘과 같다라는 뜻에서 나온 모범, 모델, 예가 되는이라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ל??이란 모범과 표준이 되어 그와 유사한 상황에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말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ל??은 짧고 힘있는 말로 요약해 놓은 속담이나 잠언이다. 이때의 잠언이란 구체적 상황에서 나와 보편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ל??이란 글로서가 아니라 구전으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강의 서두에서 말한 바처럼 G. von Rad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ל??의 예 : 1사무10,11 “사울도 예언자들 중에 하나인가 하는 속담이 생겨났다.” 이 경우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예언자가 되는 것이 세습적인 것이 아니므로 사울이라고 예언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즉 사울의 행동을 보고 놀란 사람들에게 그라고 예언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 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 하나의 해석은 사울은 좋은 가문 출신이고 예언자는 어중이떠중이 일 수 있는데 이제는 사울도 자기 신분을 잊고 어영부영 되었구먼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실제로 성서에서는 이런 경우일 확률이 크다. 즉 신분 높은 사람이 (신분 낮은 사람과 어울려) 자기 신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에 사울도 예언자 중에 하나였던가?’ 라는 ל??을 적용시켰다는 말이 된다. 결국 ל??은 구체적 상황에서 나왔으나 그와 유사한 다른 상황에 적용될 때 쓰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절이 1사무19,24에도 나오는데 이곳에는 ל?? 대신 רבד를 사용했다. 그러나 뜻은 같이 사용했다. 따라서 ל?? ⇔ רבד 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10,9의 경우 야훼께서도 알아주시는 니므롯 같은 사냥꾼이때의 느므롯은 훌륭한 사냥꾼의 본보기이다. 따라서 속담이 된다. 1사무24,14 “악인에게서 악이 나온다라는 옛 속담도 있지만 이때는 사울과 다윗 양쪽에 모두 적용된다.

 

사울이 나 다윗을 죽이려하니 당신은 악인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없고 악인이 되기 싫다는 뜻. 즉 내가 사울을 죽일 수 없는 것은 사울이 하느님의 도유자이므로 죽일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악한 행위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뜻. 이를 일반화시켜 버리면 성격과 행위는 사람됨됨이에서 나온다.”

이렇듯 성서에서의 ל??은 구체적인 표현이 유사한 다른 경우에 적용될 때 쓰인 것이 많다.

에제 16,44 “그 어미에 그 딸” - 父傳子傳: 이 말에는 개인의 행동거지는 가문과 성장 과정이 중요하다.”는 뜻이 있다.

1 열왕 20,11 “싸워보지도 않고 으스대며 갑옷을 벗지 말라.” : 이 말은 완전히 이기기 전에는 승리를 장담하지 말라.”는 뜻.

에제 12,22 “환상으로 본 것치고 재대로 된 것이 있더냐?” 라는 속담이 : 이 말은 실없는 소리할 때 쓰이게 되었다.

예레 31,29 “아비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 윗대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아랫대가 진다는 신학적인 개념 용어로 썼다.

 

§. 이상을 요약해 보면

ל??은 한가지 일에만 의미되지 않고 다른 비슷한 경우에 적용되거나 일반화되어 항상 새롭게 적용이 가능하다. 잠언은 매우 짧고, 간결하게, 인간의 경험을 표시한다. 특수한 상황을 표현했어도 상징 가능성이 있으므로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ל??이다.

 

2. 잠언의 문학 양식.

 

아카디아 말로서 ל??이란 메쉬루라고 한다. 뜻은 절반, ½, 이 말(메쉬루)은 마샬의 문학 양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나를 둘로 나누면 각 개의 절반은 서로 닮은 셈).

원초적인 잠언은 한 줄로 되어 있다. 이 초기 잠언은 구전된 속담이며 산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eg) 1 사무 24,14 “악인에서 악이 나온다.”

O.T.의 속담은 두 줄로 되어 있다.

1) 원초적인 잠언이 수집되고 주절의 의미를 강조하고자 병행문이나 종속절을 넣은 것이다 (일례로 잠10,2 처럼 반의적 잠언으로 강조하고 새로운 형식에 적응토록 종속절을 둔 것이다).

원초적 1행짜리 나쁜 일로 모은 재산은 헛되다.

발전된 형태 나쁜 일로 모은 재산은 헛되지만 바르게 살면 죽을 자리에서도 빠져나간다.”

2) 통합적인 병행구: 첫 행은 원인, 둘째 행은 결과

eg) 16,17 “곧은 길로 가면 재앙을 면하고 제 길을 지키면 제 목숨을 보존한다.” 17,6 “어버이는 자식의 영광이요 자손은 늙은이의 면류관이다.”

3) 동의적 표현법 : eg) 22,24 “성급한 사람과 벗하지 말고 성 잘 내는 사람과 벗하지 말라.”

4) 비교 (보다 낫다) : eg) 25,7 “높은 사람 앞 보다 낫다27,5도 같은 양식.

Ur form : 한 줄 짜리의 민간 잠언 원초적 형식.

Stil form : 두 줄 짜리의 문학적인 운문 형식.

히브리 시의 특징은 두 줄로 병행을 이루는 것이다. Parallelismus membrorum (병행)

 

짧고 단순하던 민간 잠언이 문장화하면서 두 줄로 된 이유는?

산문 형식의 한 줄짜리 민간 잠언이 글로 고정되면서 시의 형태를 취하여 운률을 갖게 되었기 때문.

잠언의 교육적 기능을 위해서 즉 앞 절의 의미를 강조하고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효과를 위해서.

기타 여러 줄로 된 잠언은 원래 독립적인 것들이 내용이 비슷하므로 모아서 주절과 종속절을 이루었다. 이러한 것이 문학 화되면서부터 그 고유의 교훈을 강조하고자 여러 줄로 편집하고 첨가, 종속의 형식으로 이유와 목적 등을 첨가한 것이다.

 

3. 유형 (교훈 유형)

 

1) 수수께끼 : 어떤 지식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고 질문 받은 사람이 자기와 같이 지혜가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 eg) 110,1ff

수수께끼의 결과 풀지 못하면 재능 없는 자로 조롱 받는다. 따라서 재치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조롱하기 위해 걸림돌을 만드는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eg) 판관 14,10-18.

 

2) 숫자 격언 : 자연 현상에서 유출된 교훈으로서 흥미 있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법이다. 어떤 학자는 수수께끼에서 숫자 격언이 나온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즉 어리둥절한 질문에 수수께끼는 해답을 말해주고 숫자격언은 이에 해당하는 숫자를 낸다. 하는 것이 몇 개인가?”

eg) 30,15-20,21-23, 30,24-28,29-31.

@ 숫자 격언의 공통점 가짓수 (Title-line)

품목 (list)

이때 가짓수는 숫자가 순서적으로 나온다. 리스트에는 최종적으로 소개된 숫자가 나온다. 1 5,9-14에 나오는 오노마스티콘도 자연현상에서 유출한 것이다 (레바논의 체드루스 레바논에서 가장 큰 나무를 지칭한다).

@ 숫자 격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2, 3, 7 이다. 이때의 3이나 7은 숫자 자체가 가진 어떤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 관찰에서 얻어진 것이다.

 

 

Rott 교수의 숫자 격언 분석

설화적 용법

숙고적 용법

권고적 용법

Integral part of the context

Separable from the context

Usually independent of the context

effortless formulation

formulation achieved by philosophical reflection

formulation achieved by ethical reflection

concrete items, self-evident

abstract items, not self-evident

desirable actions, not self-evident

member given in history /nature

member gained in reflection

member gained in reflection, mnemotechnical

Past verb forms

Present verb forms

Future verb forms

informative

Philosophical

Ethical

. 설화적 용법

전후 문맥과 분리되지 않음.

사실 그대로의 있는 것을 말함.

자명한 역사적 사실, 구성적 내역, 자명성.

숫자는 역사나 자연 안에 주어진 것.

동사 형태는 과거형

목적은 정보를 주기 위한 것.

. 숙고적 용법

문맥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eg) 30,11-31.

철학적 반성으로 이론적 사실을 성문화.

자명성이 없는 절대형 내역.

숫자는 반성의 결과 (역사 사실과는 무관).

동사 형태는 현재형 eg) 30,11-31

목적은 철학적 사색에 도움을 주기 위함.

. 권고적 용법

보통으로는 전후 문맥과 독립.

윤리적 반성으로 이론적 사실을 성문화.

바람직한 행동 (자명성은 없다).

기억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숫자식 열거.

동사 형태는 미래형.

목적은 윤리적 규범을 주고자 eg)23,14-16, 신명 5,6-17, 6,16-19.

 

3) 비유, 우화, 알레고리의 사용.

@ 상징과 실제 사이에 같은 차원의 중복되는 표상이 드러난다. 이사 5장의 농부의 비유, 결혼식의 비유 등.

@ 지혜 문학은 교훈적 우화이다. 비판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특징이 있다.

@ 추상적인 관념은 알레고리(은유)로 나타난다. eg) 전도 11,9-12.8

@ 오노마스티콘의 영향은 1 5,13처럼 나타난다. 오노마스티콘은 특히 욥서에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팔레스티나의 지리, 기후, 동물학적 지식 등을 백과 사전식으로 나열한 것이다.

eg) 24,5-8,14-16a, 28, 30,2-8. 36,27-37,13. 40,15-24. 40,25-41,26. 38,4-39,30.

4) 지혜

권고, 격려, 교훈의 매용을 담은 시는 시 1, 37, 49, 73, 91, 112, 119, 127, 128, 133, 139 편이다.

eg) 49,2-5는 대표적인 지혜시이다. 지혜시들은 주로 법을 지키면 여러 가지 혜택이 온다는 식으로 법과 밀접히 관계한다. 이유는 지혜 문학 편집시기가 유배 이후이고 편집자들이 율사였기 때문이다. 지혜시의 기본은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하라.” eg) 37,27. 지혜 시편은 응보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고통을 받는 경우가 있기에 시 73,2-6. 139,19 등에 응보관을 담고 있다. 응보관의 철칙인 상선벌악은 시대에 따라 지켜지지 않기도 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의 대표적 표현은 욥서이다.

 

. 잠언 1-9(R. N. Whybray, Wisdom in Prov. - 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지혜의 의인화 현상은 에집트 지혜 문학(Amen-em-Opet)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지배적 학설이나 Whybray는 주장하기를 이스라엘이 고대 근동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독창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Whybray는 잠언 1-9장에 지혜 문학의 key가 있다고 말하고 있고 N. Habel은 잠언 1-9장에서도 ?כד() 이라는 단어가 key라고 한다.

 

후기 유대교 저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체계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느님의 지혜라는 개념 안에서 신학 사상의 체계를 세우고 일치 원리를 발견했다. 따라서 하느님의 지혜라는 개념은 후기 유대교 신학에 중대한 개념이다.

 

후기 유대 문학에서 하느님의 지혜는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영, 율법과 연관이 되고 솔로몬의 지혜서에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하나의 실체로 묘사된다. 이를 비인격적 신의 속성이라 하는데, 즉 지혜가 의인화 된 것으로서 단순한 시적인 의인화를 넘어서는 차원으로 고유한 존재를 지닌 적인 위격으로 간주됨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솔로몬의 지혜에서 지혜는 하느님과는 별개의 독립된 하나의 실체로 묘사되는 것이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고 하느님에 의존하고 이스라엘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전달하는 실체로 고유한 위격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었다.

 

@ 이러한 개념은 초대 그리스도교 신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육화한 지혜라고 묘사함 (골로 2, 3참조). 유대교에서 토라가 의인화하였듯이 신약에서는 말씀이 의인화되었고, 요한의 logos 개념은 지혜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 교회 밖에서는 영지주의를 말하는 자들이 지혜는 신적 유출이라고 주장(지혜 개념의 영향).

지혜의 의인화 이해는 유대교 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신학 이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 1-9장에서는 지혜가 인간의 모습으로 의인화 되어있다. 특히 잠 8,21-24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지혜의 의인화의 주요 원천은 집회서와 지혜서이며 잠언에서는 1,20-33 (지혜가 여자로 표상되어 도시의 공공 장소에서 외침), 8,1-35. 9,1-6에 나옴. 1,23-33에서는 여자로 의인화된 지혜가 자기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라고 호소. 8,1-35는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권위를 준다고 함. 또한 8,25f에서는 지혜가 하느님의 창조이전에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창조 사업의 목격자로 소개. 9,1-6에서는 다시 여자로 의인화, 지나가는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생명과 슬기로움을 준다고 소개 (반면에 지혜와 반대되는 어리석음도 여자로 의인화되어 나타나다). 9,13-18에서는 어리석은 여인으로 표상되어 사람들을 쾌락의 잔치에 초대하며 그 종말은 타락된 죽음으로 소개.

 

@ 구약의 다른 곳에도 의인화 현상은 있으나 대부분이 은유적이고 인격화되지는 않음 (에제 23: 두 음녀 - 의인화되었으나 인격화되지 않음).

@ 잠언에서 지혜의 의인화는 단순한 시적인 의인화 이상이다.

따라서 구약의 지혜의 의인화는 신약의 말씀의 의인화와 같은 차원이다. 구약의 지혜의 실체는 하느님으로부터 독립되지는 않으나 구별되는 실재이며 하느님의 속성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이 부리시는 일꾼으로 묘사됨.

 

1-9장은 교사가 제자에게 에게 교훈을 주는 형식인데 의인화 한 목적은 생생한 실재로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교훈의 성격 부여, 혹은 근동 신화의 영향으로 의인화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교사가 교훈을 주는 형식인데 뒤에 가서는 지혜가 의인화되어서 교사가 제자에게 하는 형식 그대로를 취한다. 즉 의인화된 지혜는 공공 장소에서 적극적으로 교훈을 준다. 이때 지혜가 약속하는 대가가 교사가 주는 대가와 같다. 왜 양쪽의 대가가 같을까? 교훈을 잘 듣고 지혜롭게 되는 지혜의 가르침의 효과를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1. 1-9장의 의인화된 지혜의 기능

 

@ 1-9장은 10-29장 보다 후대의 것이었으나 앞부분에 첨가된 이유는 잠언 전체의 신학적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 학계의 공통 견해이다. 10장 이후의 것은 주로 경험 지혜 지혜의 의인화 신학적 지혜로 구성되어 있는데 1-9장에는 위 3 요소가 다 들어있다.

@ 바빌론 유배 이후 지혜는 율법과 동일시되었고, 이 시대에 생긴 후기 유다이즘은 지혜와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들에 의해서 전수되었다. 1,7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라는 표현에는 야훼 신앙과 지혜가 동일시 된 것이며 시기적으로 후기 유다이즘의 신학이 완전히 정립된 후의 표현이다.

@ 그러면서도 잠 1-9장에는 율법, 제의식의 언급이 없다. 이런 이유로 유배이후, 아니면 유다 공동체 형성 이전에 쓰여졌던지 아니면 유배 당시에 혹은 유배 이후에 유다 공동체에 반발하던 사람에 의해 쓰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주장한다.

@ 그러나 자세히 조사해보면 1-9장은 여러 가지의 발전 단계를 거친 것임이 드러난다. 또한 단일 문학 작품으로 볼 수도 없다.

@ 문학 유형상

1. 교사 학생의 인간적 교훈 형식

2. 자기가 하느님의 권위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의인화된 지혜가 신적 권위 형식으로 호소하는 형식.

@ 1-9장에는 교사 학생 형식의 10가지 도입구가 있다.

내 말을 들어라!” 이런 표현은 Discourse의 전형적인 도입구로서 1,8. 2,1. 3,1. 3,21. 4,1. 4,10. 4,20. 5,1. 6,20. 7,1에 나온다. 도입구 뒤의 내용은 모두 하나로 묶어지는 양식이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혹은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전형적 스타일이고 에집트의 Amen-em-Opet의 형식과 동일하다.

들어라.”, “받아 들여라.”, “받아라.” 라는 명령형 표현은 교훈 문학의 대표적 형태이고 자신의 말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교사의 권위를 담은 말이며 교사의 가치와 효용성을 긍정적으로 나타내는 수법이다. 이처럼 Amen-em-Opet와의 유사성은 이스라엘 지혜 문학이 당시 널리 알려진 문학 유형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책의 13942(1,3;9-4,2)까지는 잠언 1-9장의 형식과 유사하다.

@ 반면에 일부 학자들은 잠 1-9장이 신명기의 영향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명기의 조건법절대법을 살피면 Amen-em-Opt를 비교하지 않아도 이스라엘 자체 내의 독창적 지혜 문학 발전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 그러나 Whybray는 신명기의 가르치다는 이스라엘과 하느님과의 계약이라는 문맥속에서 나오고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이므로 모세가 선포하는 것은 곧 하느님이 주신 법이지만 지혜 문학에서는 순수한 인간적 가르침이라고 하며, 그 권위 문제에 있어서도 신명기는 하느님의 절대 권위를 강조하나 지혜 문학은 순수한 인간적 권위로 이야기하므로 그들의 주장은 잘못이라 함.

따라서 잠 1-9의 도입부들은 신명기계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고대 근동의 교훈 문학 영향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독창적 전승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도입부에서 시작되는 내용 자체는 교훈 문학의 영향을 여실히 드러낸다.

 

2. 1-9장의 구조 분석

(Whybray의 분석표를 중심으로 함)

 

The Development of the Concept of Wisdom

The way in which the discourses have been expanded may be summarized as follows :

Preface(1,1-5)

followed by 1.7 (group 2)

. (1.8-19)

followed by 1.10-33 (group 1)

into which has been inserted 1.29 (group 2)

- 악한 자를 피하라.

. (2.1, 9, 16-19)

including 2.2-4 (group 1)

followed by 2.5-8 (group 2)

also including 2.10f. (group 1)

- 탕녀를 피하라.

. (3.1-10)

followed by 3.13-18 (group 1)

followed by 3.19f. (group 2)

- 하느님에 대한 의무

. (3.21-24, 27-32)

No theological additions1

- 이웃에 대한 의무

. (4.1-4, 5b)

followed by 4.5a, 6-9 (group 1)

- 지혜의 전통적 성격

. (4.10-12, 14-18)

including 4.13 (group 1)

- 악인을 피하라.

. (4.20-27)

No additions

- 항상 경계심을 가져라.

. (5.1-6, 8, 21)

No theological additions

- 탕녀를 피하라.

. (6.20-22, 24, 25, 32)

No theological additions2

- 탕녀를 피하라.

. (7.1-3, 5, 25-27)

including 7.4 (group 1)

followed by 8.1-21, 32-36 (group 1)

into which have been inserted 8.13a (group 2) and 8.35b (group 2) and also 8.22-31 (group 2)

Concluding chapter: 9.1-6, 13-18 (group 1, but added later and showing some further developments) - group 2 가 첨가되기 이전에 Discourse 결론으로 첨가된 것으로 본다.

 

1. 3.26 is theological in the sense that it asserts that the real source of human confidence is God; but it does not belong to either of the main groups of addition, and may be simply a gloss.

2. on 6.23 see p. 49, supra.

 

@ 1,1-5 혹은 1,1-61-9장의 전체 서문 역할을 함 (, 1,7은 후대에 삽입된 신학적 지식이므로 제외로 한다). 전체 서문인 1,1-6은 인간적 지혜의 권고인데 v. 7에서 갑자기 신학화된 지혜가 나온다는 것은 후대의 삽입구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v.1-6까지의 내용은 v.7이 첨가됨으로서 이제는 1,1-7까지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 1,1-6의 서문 형식은 에집트, 메소포타미아의 형식과 일치한다 (, 에집트 전승은 지혜의 영광을 왕에게 돌리고 있을 뿐).

1) 잠언과 에집트 교훈의 개념 비교.

maat

@ 에집트 교훈집은 실용적, 실천적이다. 그러나 출세를 위한 처세술이나 기회주의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신이 사물에 준 질서가 Maat이므로 이는 옳고, 참되고, 따라서 존중해야 하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Maat를 바라고, 순응하고, 따르고, 적응해야 한다. - 이런 사람이 현자.

@ 잠언을 살펴보면 히브리어에 Maat와 상응하는 개념은 없다. 그러나 우주와 세상안에 보편적 법칙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따르는 어떤 행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며 이를 거스리는 사람은 멸망케 된다는 가르침이 있음을 보아서 Maat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에집트의 관은 - 다신론적(多神論的), 만신전(판테온)이 있으나 에집트 교훈집은 항상 단수의 신을 언급한다.

@ 잠언의 Discourse에서 언급되는 은 항상 הוהי이다 (그러나 O.T.의 다른 곳에서의 הוהי와 잠언의 הוהי개념은 약간 다르다). 잠언의 הוהי의 역할 - 인생의 안내자 (3,5).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고,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시는 분 (5,21. 3,22f). 인간 행위에 적당한 보상을 주시는 분.

@ 이러한 개념의 הוהי는 에집트의 Maat와 그 역할이 비슷하다고 본다.

좋은 훌륭한 사람의 개념 (이상적인 인간).

에집트에서는 침묵하는 인간, 조용한 인간, Maat의 질서 속에 순응하고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표현.

잠언에서는 현명한 자는 순응하고 자제하는 인간이고, 미련한 자는 규범을 어기고 인간적인 것에 얽매이는 사람을 말하는 면에서는 에집트와 같으나 Discourse 뒤에 붙는 신학적 단서 때문에 결론은 다르게 나온다.

교훈의 권위와 목적.

에집트 - 전통적인 가르침과 그들의 인생 경험에서 나온 인간적인 것을 강조하며 이의 깊은 뿌리는 Maat의 깊은 통찰이므로 Maat의 진리에 대단한 권위를 부여한다 (신적 권위는 아님).

잠언 - 잠언의 Discourse 에서도 인간적인 것을 강조하며 토라”, “다바르”, “미쉬바등의 용어를 쓰지만 가르치는 교사의 토라이고, 교사의 다바르이며 모세 5경에서의 토라나 예언서의 다바르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가르치는 목적은 배우는 학생의 복지 중심이고 이것은 에집트와도 유사하다.

 

- 이상의 비교 결과 -

 

에집트의 교훈 문학과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은 종교적 차이를 넘어서 뚜렷한 유사성이 있음이 증명된다. 그러나 에집트의 신앙적 어휘를 빌려 오지는 않는다. 즉 내용상 비슷하게 전개되다가도 야훼 신앙에 저촉될 때는 이를 피하며, 신에 대해 언급 혹은 암시를 할 때에는 항상 야훼만을 언급한다. 에집트에는 죽은 뒤의 후생의 개념이 간혹 보이나 잠언에는 에집트의 후생 개념이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교훈집이 에집트의 교훈집에 영향을 받았다해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문학적 흔적은 없다. 또한 이스라엘의 저자도 Discourse에서는 종교적 믿음이나 신학 자체에 큰 관심은 없다. Discourse 에서는 에집트 저자처럼 특수한 행동 규범에 따르는 근본적인 의무에 일차적 관심을 보이며 계시 지혜 보다 경험 지혜만을 말한다.

또한 에집트에서는 사회적 지휘를 얻으려는 젊은이에게 특수한 대상을 향한 교훈이나 이스라엘에서는 일반적인 대상을 가르치는데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eg 1-9장의 경우).

따라서 잠 1-9장은 일정한 교육 체계가 아니다. 그 성격은 권고적이고 10장부터 나오는 구체적인 교훈들의 서문 역할만을 하고 있다. 10-29의 특수한 전문적인 가르침에 비해 잠 1-9에서는 보다 일반적인,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목적과 근본적 아이디어에 유사성이 있다.

 

2) 구조 분석; 앞페이지의 구조 분석표 참조 (Whybray의 분석)

 

구체적으로 잠 1-9에는 Discourse와 첨가물인 Group (이후 G), Group (이후 G)로 구성되어 있다. 이 첨가 구절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적 지혜 문학의 특성이 드러난다. 또한 첨가된 위치는 의미상 대단히 중요한 위치이다.

@ 첨가구의 위치를 살펴보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Discourse가 끝나는 바로 뒤나 혹은 바로 앞에 G이 있어서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지혜 교사의 훈계 첨가 = 새로운 의미부여).

 

@ GGroup들 사이에 첨가된다. 즉 경험 지혜를 신학적 지혜로 승화시키는 첨가 구절이다. G는 반드시 G뒤에 첨가되는 신학적 구절로서 지혜와 신학을 동일시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신학적 지혜와 G의 경험 지혜 사이의 gap을 메우기 위한 완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경험 지혜와 G의 연결은 G으로 인하여 가능해진다.

eg) 일례로 앞의 표, 별첨을 살펴보면 G1,20-33 사이에 G1,29가 첨가됨으로서 신학적 지혜로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1,20-33은 에집트의 교훈과 같다. 이런 교훈에 1,29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라는 구절이 첨가됨으로서 신학적인 지혜가 되었다. 사실 1,20ff에 의인화된 지혜는 아직 신학적 지혜가 아니다. 다만 에집트의 지혜가 의인화되어 표현되었을 뿐이다. 그러기에 1,29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로써 3단계 토착 과정이 나타난다.

일반적 교훈 - 선생이 학생에게 주는 훈계 (, 인정, 생명의 이득을 약속)

G- 지혜가 무엇? 의인화된 지혜 자신이 훈계 (이행하면 이득 약속)

G- 지혜의 기원, 신학적 의미 설명 eg) 1,7 (위치로는 G)

첨가된 구절인 GG는 문학 유형상, 내용상 구별된다. G는 생략한다해도 문법상, 문맥상 하자가 없다. 이로서 G가 후대에 첨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DiscourseG이 첨가될 때의 의도와 G가 첨가될 때의 의도가 드러난다.

 

To Sum Up - 1-9의 기본은 인간 교사가 가르치는 경험 지혜로서 10가지 교훈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교훈집은 독특한 분위기로서 고대 근동의 다른 문학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학 발전과 함께 경험적 지혜를 재해석한 몇가지 구절 (G)을 첨가함으로써 지혜의 영역을 넓혔다. 즉 의인화된 지혜의 활동 범위는 인간 교사의 활동 범위보다 더욱 넓은 것이다. 여기서 제 2차로 첨가된 구절 (G)이 있어서 이로서 지혜가 곧 하느님의 지혜임을 강조하고 이를 신학화 한다. 원래 경험 지혜는 매우 인본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만물의 창조자 관리자로서 야훼 하느님을 믿고 있었기에 매사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이해하였고 지혜 역시 이스라엘의 신앙안에서 경험 지혜를 신학화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경험 지혜를 신학적 지혜로 바꾸는 데에 따라오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GG의 발전상을 갖게 되었다.

Discourse Group Group

인간 교사 경험 지혜 지혜의 의인화 지혜 = 하느님 하느님을 두려워

(교훈집) (첨가 구절) 신학화 (첨가 구절) 하는 것이 지혜

eg). 3,1-10 3,13-18 3,19f

. 2,1.v9.v16-19 2,2-4 2,5-8

D GG

3. 1 단계 첨가 (Group )에 나타난 지혜의 표상.

@ G에 나타난 지혜의 표상의 기원, 도입된 이유, 현재의 위치의 역할 등에 관한 고찰.

@ G의 표상은 지혜 교사가 자신의 말씀의 성격 및 효능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다. 의인화된 지혜가 말하는 듯 하지만 인간 교사의 말은 지혜가 하고 있다.

철부지에게 전하는 메시지. G1,22. D1,4. 7,7.

지혜의 말씀을 따르면 인생의 안전 보장. G1,32f, D3,4. 3,21-24. 4,10-12.

지혜의 말씀은 옳고 의롭다. G8,1-9,20. D 2,1.v9. 4,10f

지혜의 말씀은 큰 가치를 지님. G4,7. 8,10. D 1,8f. 3,1-3. 4,22

지혜를 따르면 부귀 영화, 장수, 행복 보장. G3,16-18. 8,18-21. 8,34f. D 3,2.v4. 4,10

지혜를 따르면 생명을 얻는다. G4,13. 8,35a. 9,6. D 3,22. 4,22. 7,2

지혜를 인간의 마음속에 간직해야 . G2,10. D 3,13. 4,21. 6,21. 7,3

지혜는 추종자를 보호해준다. G2,11. D 3,24. 4,12

지혜는 왕관이나 화관을 준다. G4,9. D 1,9. 3,22

위에서 살핀 대로 GD의 약속은 같다. 따라서 G은 인간 교사와 똑같은 말을 지혜가 하고 있으며 같은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의인화된 지혜가 인간 교사를 대신한다는 점이다.

 

4. 의인화된 지혜의 기원

 

지혜가 의인화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 있는 주장들이 있다.

* 가능성 1 : 지혜 교사의 특성을 따왔다는 설 - 그 이유는 지혜가 경고하는 내용과 지혜 교사가 경고하는 내용이 동일하기 때문이라는 설.

* 가능성 2 : 설교의 장소가 길거리, 시장, 광장 등이므로 교실에서 보다 넓은 설교의 현장을 찾고자 하였기 때문이라는 설. 따라서 길거리를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당면한 도덕적 위험을 없애고자 했다는 설.

* 가능성 3 : 히브리 예언자들의 설교에서 따왔다는 설. 1,20의 가르침은 예언자들의 가르침과 같다. 예레 4,4.v21, 호세 8,5 등에 나타나는 예언자의 상투어 언제까지 방황하려느냐가 있기 때문에 잠 1,21에 돌아서라는 말은 회개를 말하는데 예언자의 전문 용어이다. 예레 5,1. 7,2에는 넓은 광장에서 가르침을 주는 히브리 예언자들의 전형적 표상을 보여준다.

* 가능성 4 : D에 나오는 창녀의 모습을 대조시키고자 의인화했다는 설. 지혜를 여자로 묘사하고 있고, 젊은이에게 지혜를 포용하고 신부로 맞아들이라(4,6. 7,3)고 하며, 9,1-6에는 지혜가 젊은이를 자기집으로 초대 잔치를 베푸는 것으로 보아서 창녀는 향락과 파멸의 잔치를 베풀지만 지혜는 슬기와 복락과 행복을 주는 잔치를 베푼다는 가르침을 주니 이런 지혜를 찾으라는 뜻에서 교훈서에는 창녀와 지혜를 대조시키는 경우가 많다 (9,1-6.v13-18). 7,6이하의 표현은 페니카아 문학에 창녀가 손님을 부르는 표현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가능성 4에 의하면 지혜의 반대는 어리석음이며 어리석음은 창녀와 연관된다. 여기서 이러한 이유로 지혜가 창녀와 대조되었고 지혜를 의인화시켰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어느 학설의 가능성도 근거있는 소리들임).

* 가능성 5 : 의인화된 지혜의 역할을 볼 때 시적으로 의인화시킴으로서 지혜를 하느님의 속성으로 나타냈다고 보는 설. 1-9의 지혜는 성서의 다른 곳에서 말하는 지혜와 다른 개념이므로 (12,13. 15,7f. 38,26f ) 특별한 사적인 표현으로서 생동감을 주려하였다는 설.

* 가능성 6 : 신화의 영향으로 의인화되었다는 설. 원래 독립된 여신의 전승에서 나온 것을 야훼 신앙의 영향으로 종속시킨 결과라고 보는 학설.

 

* 가능성 7 : 단순한 의인화 설 (사람이 아님을 사람으로 단순히 썼을 뿐이라는 설). 1,20. 4. 8,20의 지혜 의인화는 그 주된 목적이 생생한 표현을 위한 것이므로 단순한 의인화라는 설. 85편에는 사랑의 진리 등이 단순한 의인화로 표시되며 시 89,14에서는 정의, 심판 등이 단순히 의인화되었다는 설 (이러한 시편의 의인화는 생명력이 없고 적극적인 특성이 부족하며 생생한 묘사가 힘들다. 여기에 비하여 잠언에서는 지혜를 생명력 있는 독립된 인격체인 여자로 보고 있기에 위 주장에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잠언의 지혜는 (특히 1-9) 성서의 어느 곳보다도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 이유는 지혜가 하느님의 속성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너무나 생생한 생동감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 1-9의 지혜는 하느님의 속성으로서 그 속성과 어떤 면에서는 전혀 상관없이 독특한 성격을 부여받고 있어서 그 전문적 성격 파악이 의인화 현상만으로는 파악이 힘들다.

 

* 가능성 8 : 지혜의 표상을 신화적으로 설명하려는 설. 지혜라는 여신이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지혜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여신이 이스라엘 안에 들어왔다는 이론이 그 설명 요지임. 그러나 근본적으로 야훼의 속성을 이론적으로 이해시켰다는 의인화는 납득할 수 있지만 후일 토라(율법)까지를 의인화시킨 유대교의 사상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에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화적 표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혜 문학이 현자들 세계의 소산이고 현자들은 신화적 Cultus란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신화 세계는 Cultus와 밀접). 따라서 신화적 특성들의 증거가 강하다 해도 그 이론으로는 추상적인 이름을 가진 지혜의 의인화를 설명할 수 없다. 이미 인격적으로 신으로 숭배되는 여신이 추상적인 이름으로 지혜라는 이름으로 불린 문학 유형은 고금을 통해 없다.

* 가능성 9 : 가나안 El ל?의 속성이 의인화되었다는 설 (올브라이트 학설). 지혜의 표상은 야훼의 표상을 의인화 시켰다느니 보다는 가나안의 최상신인 El 의 의인화라고 본다. 그러므로 지혜의 표상은 이스라엘의 표상이라고 보기보다는 가나안의 표상으로서 7C를 전후하여 이스라엘에 도입된 것으로 본다. 이유인즉 O.T. 중 잠 8-9장에 나타난 지혜의 표상은 가나안의 지혜의 여신 표상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약간 과장된 점이 많은데, 왜냐하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가나안 지방의 문학이 별로 없다. ה???(하까마)의 복수형 명사가 단수와 함께 사용될 때 תומכח(하까모트 또는 혹모트)가 되어 가나안, 페니키아 여신을 지칭한 경우는 있으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히브리어를 변화시킨 것이고 사실 그 지방에서도 hokmot라고 발음했는지는 모르며 가나안 여신의 실제 이름이 hokmot라는 자료는 없다 (p. 36-37. 참조)

 

* 가능성 10 : Boström의 견해로 지혜가 신부로 의인화되었다는 설 (4,6.v8f, 7,4 참조). 지혜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묘사로서 신화적인 요소에서 의인화되었다는 말. 가나안의 사랑의 여신 Astarte”의 영향으로서 Astarte는 고대 가나안의 풍요다산의 여신이었는데 신전의 창녀들은 아스타테 여신의 역할을 대행하여 풍요다산 제의를 위해 신전을 방문하는 남자들과 성행위를 하고 그 남자의 농업, 축산 등에 풍요다산을 기원하고 빌어주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풍요다산 제의에 빠져들어 많은 사람들이 Astarte 여신전을 찾아가자 야훼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Astarte와 반대되는 표상을 만들어 놓고 젊은이들에게 효과적으로 호소하고자 지혜를 여자로 묘사한 후 여자로 의인화된 지혜에게 Astarte 여신이 지닌 몇 가지 특징을 부여하여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했다는 설. 기타의 다른 특징들 역시 사랑의 여신 및 풍산제의에 봉사하는 이방 여인의 특징들에서 취한 것이라는 학설이다.

 

이 학설은 잠언 8장에 지혜가 자신을 자찬하는 부분이 - 가나안 문헌에 Astarte 여신이 자신을 찬미하는 구절과 병행을 이루어 설득력을 지니며 학자들의 동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보면 지혜의 특성이나 성격과 다른 요소들의 설명이 불가하다. 또한 성서에는 Astarte 라는 여신을 표현한 적이 없다. 이방민족의 신 이름, 제의 양식 등을 다양이 소개하여 질책하면서도 Astarte는 없다.

 

* 가능성 11 : 우주론적인 견해 (9,1 “7기동을 가진 집을 지었다.” 참조). 9,1의 표현을 단서로 하여 바빌론 문헌에 하늘과 땅의 토대가 되는 집이라는 신전을 연관시켜 (세상을 상징한 7층 탑임)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레바논 지역 (고대 페니키아) 발굴 중 7개의 기둥이 있는 집을 발견했다. 이것은 하늘의 여왕과 7개의 별을 상징하는 표현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학자는 더 많다. 발굴된 7 기둥 집을 BC 3000 년경 유적 층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Whybray는 우주론적이나 신화적 표현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9,17기둥은 우주론적이나 신화적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Whybray는 아마도 일상 생활에서 소재를 찾은 단어라고 말하며 혹은 지혜 학교와 연결시킬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을 한다.

이스라엘은 신화를 배제하는 성서관을 가지고 있는데 잠언이라고 하여 이러한 신화적 개념을 썼을 리가 없다.

신화적 요소설은 절대적일 수 없는 것이다.

* 가능성 12 : 탕녀를 상대역으로 지혜의 표상을 만들었다는 설. 이 학설은 앞의 가능성 4와 비슷하다. 이것은 가능성 10Boström의 견해를 반대한 입장이므로 이 주장을 따르면 Astarte 여인 영향이라는 주장은 배제할 수 있다.

그러나 Boström이 말하는 여신의 성적 제의설을 배제하고 또 다른 주장인 탕녀의 상대역으로 여인을 묘사한 것을 본다면 이 또한 문제는 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우상 숭배에 빠졌던 경험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Discourse 의 경우, 저자의 시적인 구상에서 나온 특성이 있고

Discourse 의 경우, Astarte 풍산제의의 영향이 들어있다.

신화적 요소가 부차적이라 할 수 있는데 두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해결되어야 한다.

의인화된 구절을 첨가하여 D를 확대시킨 이유는 ?

G에 나온 하느님이 지혜이심G에는 왜 분명히 언급되지 않았나?

☞ ① A의 답변 : D의 내용들이 만족스럽지 않았거나 불충분했다고 생각했기에 G을 넣었다는 답변.

B의 답변 : D에도 좋은 답변(교훈)이 있다고 믿었기에 몇 마디 더 첨가하여 더 좋은 가르침을 넣었다고 보는 답변.

지혜 전승과 야훼 신앙 전승의 갈등 때문이었다.

 

요약 : 이상의 여러 견해를 살펴 본 결과.

 

DiscourseGroup 이 첨가된 것은 이스라엘적 사고 방식 때문이었다. 이러한 표현은 현자들에 대한 예언자들의 태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사제나 예언자와는 달리 지혜 교사들은 하느님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훈계를 따르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현상은 야훼 신앙안에서 하느님의 권위로 가르치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신명 30,11-20 참조) 많은 경우 야훼의 말씀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되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은 지혜 교사를 신랄히 비난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언과 지혜가 화해될 수도 있었는데 이사 31,2 처럼 야훼 하느님은 지혜의 바탕이라는 가장 만족스러운 화해의 표현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자가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음 도식대로 현자를 빼고 지혜 자체를 의인화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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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 혜 ? = 야훼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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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 ≠ ? 예언자의 ?

?가르침 ? ? 가르침 ?

????????? ????????????????

Discourse Group

이렇게 지혜 자체를 예언자처럼 의인화 시킴으로서 G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스라엘 신앙관에 입각한 지혜관을 만든 것이다.

G을 첨가시킨 이유는 경험 지혜를 이스라엘적 사고 방식과 연결시키려는 1차적 노력이다. 또한 야훼 신앙과 마찰 없이 Discourse를 성서에 정착시키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G은 야훼 신

앙 전승과 지혜 전승을 화해시키고 지혜를 신학화 시키는 첫 시도인 것이다.

5. 지혜의 표상 제 2 단계 Group

 

@ G에 속하는 구절은 G보다 후기에 속하고 더욱 신학적으로 발전된 모습이다. 1,7을 제외하고는 G에 속한 모든 구절들은 G에 첨가된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첨가로서 G을 보완한다. GD의 중요 부분에 첨가되었는데, GD에 첨가 된 것이 아니고 G에 첨가됨으로서 G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지혜가 야훼께로부터 온다는 G의 사상을 D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G는 문학 지층상 집회서의 표현보다 일찍 이루어졌지만 그 기본 표현은 집회서와 동일한 입장이다.

 

@ 집회 24,3-12. 39,1-8은 야훼와 지혜의 관계를 명확히 표현하여 신학화한 말이다. 이 표현은 두 가지 관점을 가진 것이다.

지혜를 야훼께 대한 두려움으로 본 관점.

지혜와 하느님의 관계를 태고로 소급시켜 지혜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 또한 지혜는 창조 이전부터 야훼와 함께 하였다는 관점이다.

G에 속한 구절 중 4(1,7. 1,29. 2,5. 8,13a)에는 지혜가 야훼께 대한 경외심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הוהי - תאָ??

תאָ??(두려움)이란 단어는 지혜 문학의 특징이다. 즉 야훼를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신학적 정언이 동일한 단어의 나열로서 5번이나 나온다. 이것은 지혜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임.

ת?? תי?א? הוהי תאָ?? (28,28, 111,10, 1,7. 9,10. 15,33).

@ 두려워하다(א??) 와 두려움(האָ??)을 조사해보면 본래 두려움이란 개념은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드러난다. 즉 이스라엘의 교육은 지혜 교육과 야훼를 두려워하게 가르치는 교육이 있음이 드러난다. 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정상적인 종교 교육이다. 이것은 부모에게서 그리고 성직자에게서 이루어진다.

 

@ 이스라엘에서 위 두 문구를 하느님과 연관시킬 때에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도덕적 기준을 표현하는 문구였다. 20,11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1,17.v21 산파가 하느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아이들을 죽이지 않았다.

@ 위 두 표현을 잡신에 연관시킬 때에는 217,33이하, 41절까지의 내용에 공경하는이라는 표현으로 변하였다(공경이라는 번역의 본문을 확인하기 바란다).

 

@ 야훼께 대한 두려움은 악을 피하는 것과 동일시되기도 하며(느헤5,9.v15. 10,27. 16) 또는 시편 34,12. 217,36에는 예배 행위와 동일시되기도 하고 레위19,4.v32. 25,17. 신명4,10. 5,29. 6,2. 10,12. 2열왕17,33f에서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 2열왕17장에 나타난 표현은 야훼께 대한 두려움이란 다른 신들에 대한 예배를 배제하면서 계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드러낸다.

 

@ 신명10,12f에서는 야훼께 대한 순종뿐만 아니라 그분에 대한 사랑까지도 긴밀히 연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야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야훼의 모든 관계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야훼 하느님께 대한 순명, 계약, 사랑, 예배를 모두 포함한다. 이것이 곧 야훼 신앙이다.

eg) 오바디아가 엘리아에게 나는 어려서부터 야훼를 두려워했소라고 했는데 이 말은 어려서부터 야훼 신앙을 가졌다는 신앙 고백이다.

이러한 교육적 표현은 레위 17-26(종교적 가르침으로 나오는 훈계들), 신명 17,18-20. 2열왕17,25-28 (야훼를 두려워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에서 종교 교육의 가르침으로 나타난다.

eg) 예언서 중에서 이사27,13에 이 두려움이 교육과 연결되어 나온다. 이사야 시대에 사제들의 특권이었던 종교 교육을 지혜 교사들이 자기들의 교과목 속에 포함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예언자들은 지혜 교사들의 이러한 노력이 쓸데없는 추상적인 것이라고 비난한다. 비록 예언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하여도 이사야 시대부터 벌써 야훼 신앙과 지혜 전승 사이의 화해가 시도되었음은 특기할 사실이다.

 

@ 1-9G가 첨가될 때는 이미 신학적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해진 때이다. 이 첨가 구절로서 지혜 전승과 야훼 신앙 전승이 단일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모든 면에서 지혜가 야훼께 대한 신앙의 실천이라는 것을 책머리에 적을 수 있도록 분위기가 성숙되어 있었다. 1,7은 그 좋은 예이다 (15,33. 9,10. 28,28. 1,14도 동일한 경우임).

@ 이리하여 지혜 학교에서는 지식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 야훼께 대한 두려움이라고 가르치게 되었다. 28,28의 야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표현은 이미 당시의 지혜 학교의 모토를 표현한 것이다.

 

6. 지혜의 신적 기원

 

고대의 지혜 전승과 야훼께 대한 계시가 양립할 수 있고 상호 보충적이라는 주장은 모든 지혜가 야훼께로부터 온다는 보다 신학적인 어투를 통해 평이하게 주장된다 (2,6f. 3,19f. 8,22-31이 대표적임).

@ 2,1-6의 경우는 잠 1-9장의 축소판이다.

2장의 경우 Discourse를 살펴보면,

v. 2-4 G: 지혜 교사의 훈계가 지혜로 대치되어 소개.

v. 5-6 G: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지혜 (창조 안에서의 지혜의 역할).

@ 8,22-313,19보다 더욱 발전된 표현으로 의인화된 지혜가 나타난다. 지혜가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창조 때부터 왔다는 것은 - 그 만큼 지혜란 소중하다는 뜻. 지혜가 창조이전부터 야훼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 3,19f “야훼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셨다는 표현 역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의인화된 것은 아니고 인격체 묘사도 아니다. 다만 지혜를 칭찬하는 구절이 3,13f에 나오며 이곳은 G이다.

@ 8,22-31은 지혜 문학 중 연구의 대표적 대목” (G에 속함). v.22 י???낳았다(창조했다) v. 23 י????모습을 갖추다(세웠다) v. 24,25 י???וֹח태어났다 v. 30 ןוֹמ?조수노릇을 했다, 이상의 4가지 단어에 많은 학설 논란이 있다.

@ י???낳았다(창조했다)

이 단어는 야훼께서 어떻게 지혜를 만드셨는지를 알려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소유하다. 획득하다. 창조하다. 지으셨다. 기타 다양한데 히브리 언어로 기본적 의미는 소유하다. 획득하다. 라는 뜻이다. 혹자는 지혜가 하느님의 소유물, 속성이다.”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대 번역에는 지으셨다 (창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신약의 바오로가 하느님의 지혜를 논했고, 사도행전에는 성자께서 낳음을 받으셨다고 했으므로 학자들 중 잠 8,22의 사상을 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 Whybray의 조사에 의하면 이 동사의 기본 의미가 획득하다.”이지만 파행어로서 낳았다. 창조되었다.”라는 뜻도 쓸 수 있다고 한다. 139,13에서는 이 단어가 당신은 나의 오장육부를 만들어 주시고 ”(창조했다는 뜻)

 

* 결국 Whybray낳다. 창조하다.”는 쪽을 주장하는 셈이다. 그러나 창조하다(ה??)라는 말 대신 י???낳았다(창조했다)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창조(ה??)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י???낳았다는 보편적으로 창조했다는 의미의 낳았다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표현을 통해서 지혜가 모든 창조물에 앞서서 귀중하고 오래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 י????모습을 갖추다.

이 단어는 v. 24י???וֹח(태어났다)와 병행적 의미를 갖는 말이다. 이 단어도 논란이 많은데 시 2,6 “왕으로 세웠다를 근거로 삼아 지혜의 신적, 왕적 품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어간이 무엇이냐에 따라 뜻이 틀려진다. 그렇지만 v. 23에서는 지혜의 창조 사업을 말한 것으로 보여진다.

@ י???וֹח(태어났다)

이 단어는 신명 32,18에서 태어났다는 표현으로 사용된 바 있다. 이 때의 표현을 신화적으로 알아들을 필요는 없다. 다만 하느님께서 낳았다는 시적이고도 비유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으면 된다.

@ ןוֹמא조수노릇을 했다

이 단어는 구약성서 전편에서 단 2회 나오므로 논란이 많다(8,30. 예레12,52). 물론 다른 곳에서 똑같은 상황의 묘사에 유사한 표현은 있다. 225,11ןוֹמה로 나타나서 소요, 동요, 군중의 뜻으로 쓰이고 이와 동일한 사건을 기술한 예레39,9에서는 םא(백성)으로 나타나지만 LXX에는 이 구절이 삭제되었다. 예레12,52에서는 기술자, 아카디아어에서는 장인, 공인, 기술자로 쓰였다.

 

따라서 v.30ןוֹמא는 야훼와 더불어 세상 창조에 적극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할 근거를 제시한다. 몇몇 학자들은 28,23-27을 배경으로 삼아서 8,30ןוֹמא을 해석하여 하느님의 위치에까지 높임을 받은 지혜라는 개념을 말하기도 한다. 특히 염두에 둘 일은 ןוֹמא을 모음과 함께 표기 할 때 ןוֹמ?으로 한다면 기르다.”라는 뜻이 되어 본문에 적용시키면 어린아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낳았다, 태어났다 라는 용어와 어울리려면 어린아이가 더 합당하고 v. 30b뛰놀고 기쁘게 하다라는 어감과도 잘 어울린다.

 

이상의 모든 상황을 종합하면 ןוֹמא어린아이로 보면 지혜가 창조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고 조수로 보면 세상을 창조할 때 창조주처럼 능동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나 거들어 준 개념이 포함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8,22-30의 의인화에 사용된 단어를 볼 때 지혜가 야훼 하느님의 창조까지 소급되지만 잠 3,19땅의 기초를 놓으신 야훼와 비교할 때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Whybray는 지혜가 태고로 소급된 것을 강조하는 역할로 쓰여졌고, 지혜와 야훼 전승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쓰였다고 본다.

 

 

1-9의 결론

잠언의 경험 지혜인 Discourse에 야훼 신앙을 화해시키고자 첨가된 GG로 말미암아 이제는 Discourse를 해석할 때에도 야훼 신앙을 토대로 하여 해석되도록 요구한다. 이로서 1-9장은 10-28장의 서문 역할을 하게 되고 10-28장의 모든 내용은 1-9장의 빛으로 조명하여 읽어야 한다.

 

7. 잠언 전체의 구조와 내용.

 

잠언의 서두는 이스라엘 왕인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금언집그러나 내용상 여러 사람의 저자들의 작품이 편집되어있다. 1,1 이하가 솔로몬의 잠언이라 해도 그 한계는 9,18까지인 듯하다. 왜냐하면 10,1에는 다른 제목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1-9장은 가장 후대에 첨가 편집물이므로 1,11-9장의 서문이었으나 앞부분에 삽입된 탓에 전체의 서두가 된 셈이다.

 

각 권의 분류

Group 1,1 - 9,18 Group 10,1 -22,16

Group 22,17-24,22 Group 24,23-34Group 25-29

F1: 30,1-10

Group

F2: 30,11-33 Group 31,1-9

31,10-31

이상의 순서는 M(마소렛본)에 따른 순서. 그러나 LXX (70인역)에는 A, B, C, F1, D, F2, G, E, H로 되어 있다. 순서가 바뀐 사실과 저자가 여럿인 사실을 감안하면 여러 개의 선집들로 이루어졌고 각 선집들은 각 개의 가르침을 전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잠1,2-6은 지혜를 가르치고 도덕적 교훈을 목적으로 한 것이 드러나지만 1열왕기의 솔로몬의 지혜는 Onomastican적 지혜이므로 내용상 다르기에 잠언집에 솔로몬의 이름이 있다해도 그의 저작은 아닌 셈이고 다만 전승 안에서 지혜와 관련된 명칭을 솔로몬에게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각권의 배경설명

1-9: 국제적인 영향을 받은 Discourse10개 있고 여기에 유배 이전의 예언자 시대부터 화해를 시도한 G이 첨가되고 유배 이후 야훼 신앙이 곧 지혜라는 G의 첨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1-9는 지혜 전승과 야훼 전승이 융합된 페르샤 시대의 작품이다.

10,1-22,16 : 375개의 2행 댓구로 되어 있다. B1; 10,1-15,33. B2; 16,1-22,16으로 분류되며 특별한 연속성이 없이 개별적인 2행 댓구의 집성이다.

B1의 특징은 184개의 2행 댓구 (동의 댓구, 반의 댓구, 종합 댓구 들로 구성) 184개 중에 169개는 반의 댓구임 (현자 어리석은 자, 선인 악인, 경건자 불경건자). 184개 중 정도는 현세적 응보 사상을 담고 있다.

B2의 특징은 16,1-22,16191개의 댓구를 가지고 있는데 31개만이 반의 댓구이다. 뚜렷한 분간은 힘들지만 어떤 댓구들은 동일한 화제, 동일 단어, 동일 글자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는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하지만 10,115,1 등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후대의 편찬자가 비슷한 두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만든 것으로 보며 여기의 격언은 그 시기상 유배 이전의 것이다.

10,1-22,16에 유배 이전의 오래된 증거가 많지만 14,34 책망, 17,17 내려가다. 19,24 밟다 등의 단어는 아라메아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서 유배 이후의 흔적도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아라메아어는 유배 이후의 언어임).

 

22,17-24,22 (이 부분은 Amen-em-Opet와 유사함)

이곳도 엄밀히 구분하면 C1C2로 분류된다 (긴 것이 대부분이다). C1; 22,17-23,14. 22,17-21C1의 서문이다. 22,20에서 유출한 제목을 붙였다. “잠언 서른 마디그 뒤로 30개의 말씀이 있다. C1Amen-em-Opet를 이용하여 동일한 기점을 논술한다. C1은 역시 Amen-em-Opet와 같이 공직에 몸담으려는 젊은이를 대상으로 하였다. C2; 23,15-24,22 : 간음, 만취, 시기심 등에 대해 경고를 하고 죽음에 말려든 자까지도 구해주라는 조언을 한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숨겨진 것까지도 아시기 때문이라는 것.

 

24,23-34, 현자들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보아서 의 부록 형식이지만 v.27에서부터는 직접 권고의 형식이며 v.30-34의 게으름뱅이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특기할 만하다.

 

25-29, “히즈키야가 부하들을 시켜 베껴 적은 솔로몬의 금언집이 부분은 솔로몬의 영화를 복귀시키려던 히즈키야가 벌인 문학 활동의 결과이며 E1 25-27, E2 28-29장으로 나누인다.

E1은 비유가 많고 내용상 자연, 가정, 궁중 생활에 대한 언급.

E229,17만 빼고 모두가 2행 반의 댓구이다.

의 분위기나 내용상 BC 700년경 왕정 시대의 수집물이다.

F1 30,1-10아굴의 말씀들로서 30,1-4에서 회의론자의 주장인 하느님과 그의 창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욥 40,2-6과 같다. 30,5ff에서는 위 회의론자에게 유대의 신앙적 답변을 준다 (기도를 통해, 2행 댓구를 통해 잘못을 교정한다).

F2는 생생한 숫자 격언으로 성서에서 유명한 곳이다. 30,15-33. 원래 숫자 격언은 독립된 것이었으나 이곳에 삽입된 것이고 30,5-6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속적인 잠언(Discourse)들이다.

31,1-9. “맛사의 왕인 르므엘이 그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교훈내용은 여자와 불순한 관계를 조심하라는 (v. 2-3) 것이다. 또한 술을 조심하라 (v. 4-7).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 보라 (v. 8-9)는 내용이다. 맛사는 아랍 지방의 지명(15,14)인 듯하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31,10-31 “어진 아내에 대한 시알파벳 시

22 절로 되어 있는데 매 절마다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시작하는 특징이 있고 구약성서에서 가장 완벽한 알파벳 시이다. 내용은 이상적인 아내상을 보여주는데 세속적 아내상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켰다. LXX(70인역)에는 지적이고 현숙한 아내(31,30)라고 번역하였는데, M(마소렛본)에서는 야훼를 두려워하는 여인(31,30)으로 표현하였다. 가장 정밀한 알파벳 라는 특징을 기억할 것.

 

이상의 수집록들을 살펴본 결과

@ 여러 가지의 화제를 다루며, 관점도 서로 상이한 격언의 수집록이다.

@ 내용상 현자들은 인생의 목적, 달성 규범, 인간 행위의 규범들을 가르치는 것을 수록했고, 대부분 반의적 2행 댓구를 사용하였다.

@ 현실적 잠언은 실천적 잠언 어떤 때는 회의적 잠언도 있다. 종교적 잠언은 이상적인 희망에 충만한 잠언이다.

@ 저작 연대

유배 이전 : Ⅱ Ⅲ Ⅴ

?? 대부분이 ??

? ? 유배 이전으로 ? : Ⅳ Ⅵ Ⅶ

?? 추정한다. ??

유배 이후 :

 

현재의 잠언서는 BC 4-3 세기경 수집되었을 것임 BC 190 년경 작품인 집회서 47,17노래와 격언 과 명답은 이 문구는 잠 1,6의 표현 그대로이다 (원문상 표현이 같다). 따라서 가장 후대 작품인 1-9장이 집회서에 그대로 쓰인 것으로 보아 집회서 저자는 이미 정형화된 잠언을 알고 있었다.

 

욥 서

 

성서백과 대사전 p. 491528

Von. Rad. O.T. Theology vol p. 236257

젤렌 포러 Intro. O.T. p.392406

성경의 세계(교훈 문학) p. 5472 J. B. C. -Job

하느님에 대한 욥의 질문, 하이크. Interpretater Bible -Job

IDBS -Job. Ancher Bible -Job

 

욥서는 성서 전편에서 가장 감동적인 내용을 가졌다. 특히 사제직을 사는 사람이나 성당에서 크던 작던 나름대로의 직책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신앙을 살면서 부딪히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한 번쯤 읽으면서 묵상해 봄직하다.

 

욥에 대한 언급은 에제키엘서에 노아, 다니엘, 으로 소개되어 전설적인 의인으로, 성조시대의 인물로 나타난다. 욥서의 저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 유사한 내용의 글이 있었고 성서 안에도 인간과 하느님의 정의문제, 전통적 정의문제, 시편의 애원시, 예레미아의 고백, , 회개, 용서 등을 다룬 곳에서는 욥서와 많은 유사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의 의견으로는 원래 산문체의 서문과 결문이 합쳐진 욥에 관한 전설이 있었는데 욥서는 이를 출발점으로 하여 본문을 넣은 책이라는 가설을 말하고 있는 정도이다.

 

1. 구 조 서문: 1 -2, 산문형식으로 신심 있는 욥, 하느님의 시험을 경건히 받아들이는 욥 을 소개.

본문: 3 -42,6. 시 형식으로 친구들과 논쟁하며 나중에는 하느님께 대들며 하느님 을 고발. 자기불행을 원망하는 것으로 묘사.

결문: 42,7-17. 산문형식으로 잃었던 것을 두배로 찾는 Happy ending.

 

서문과 결문의 욥은 인내심이 있는 욥으로 소개된다. 신약시대에도 인내심 있는 욥의 전승(야고5,11)이 있었으며, 구약의 에제키엘 14,12-20 에서 소개되는 것은 고대전승의 인내심 있는 욥과 가까운 분위기이다.(노아, 다니엘, 욥등)

본문의 욥은 인내심이 없는 욥에 대한 기록을 틀로 삼아서 여기에 시형식으로된 논쟁대화를 써놓고 그 뜻을 찾으며 의인이 받는 고통의 의미와 고민에 대한 심각한 신화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응보관은 현세적 상선벌악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정통교리였는데 모든 사람이 이를 믿고 따르기는 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상황 속에서는 어느 개인이 무고하게 고통을 받는 경우가 있고, 양심적으로 깨끗한 의인의 고통에 의미가 무엇이고 그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며, 하느님의 정의는 무엇인지를 캐묻는 것이다. 아울러 앞에 선 인간의 자세를 다룬 것이다.

 

주인공 욥은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보다도 더 큰 시련을 당했다(22장 이사악 제헌). 아브라함이 신앙의 결단을 내렸을 때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욥의 경우는 신앙이 결단 후에도 자신의 재산, 가족, 소유 모두를 멀리 했어야 했고 이런 의미에서 욥의 시련은 아브라함보다 크다. 또한 욥은 예레미야처럼 내적 갈등을 겪었다.

3,1-11은 예레20,14-15.18 과 유사하고, 34,23-33 에서의 야곱이 끈질긴 씨름으로 축복을 받은 것처럼, 욥은 - 아브라함예레미아야곱을 합친 인물이다. 그는 구약의 어느 누구보다 더 큰 시련을 겪고(아브라함) 내적 갈등을 이겼고(예레미야) 끝까지 씨름한 사람이다(야곱).

욥서는 인간이 삶의 문제와 신들의 정의를 다룬 당시 근동문헌과 유사점, 상이점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욥서가 제기하는 가장 큰 문제점을 이해하려면 당시 근동문헌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2. 고대근동 문헌과의 비교 (ANET 432페이지 이하에 계속 소개됨)

 

1) 나는 지혜의 주님을 찬미하리라(BC 1600 1150 사이의 문헌).

이 책은 바빌론의 욥서라고도 불리운다. 책의 제목에서처럼 이 시의 저술 목적이 나오는데 감사와 찬양의 시이다. 주인공이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이 책의 내용은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 주인공이 되어 응보관과는 전혀 다른 의인이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자기 삶의 잘못된 것이 없으니 결국은 신의 판단기준이 우리와는 다른 모양이다라는 진행을 보인다.

자포자기한 이 결국은 죽음이 시간만을 기다리는 마지막 순간에 마루둑신이 나타나 건강과 모든 것을 돌려주어 감사, 찬양한다는 이야기이다.

ANET P.433 이하에 소개.

욥서와 유사점- 자기들이 처한 고난을 적었다는 것(의인의 고난)

욥서와 차이점- 바빌론 욥서- 치유가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포기했다.

욥서- 치유나 해결이 문제되지 않고 의인의 고통을 더 크게 다룸. 하느님과 대결.

 

2) 인간과 그의 신 (BC 1700경 수메르 문헌)

어떤 학자는 BC 2000 우르제 3왕조의 것으로 보나 서판자체가 1700년 것. 수메르의 지혜교사의 가르침인데, 죄와 잘못된 행위의 결과를 들어서 아무도 죄없는 자는 없다고 말하며, 인간을 괴롭히는 고통의 문제는 결국 죄와 불미스런 행위의 결과로 본다.

따라서 사람이 받는 고통은 받는 고통은 마땅한 것이고 부당한 고통은 없으며 고통은 당연히 의 뜻이다. 물론 각 개인에게는 의 공평한 정의가 나타난다. 이러한 내용이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논박했던 태도와 같다.

1부는 신들의 보호.

2부는 신들에게 자기입장을 애원.

3부는 고통받는 이들의 청원. 동료들을 주인공으로 괴롭힘. 결국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구해줄 것을 청원.

4부는 신이 그의 애원을 듣고 구해줌- 신을 찬미.

욥서와 유사점: 신을 찬미, 애원, 동료의 구박

욥서와 차이점: 욥은 끝까지 결백을 고백, 수메르책은 죄인임을 고백

 

3) 바빌론의 신정론

고통받는 사람과 친구들의 대화형식. 친구들에게 자기입장 설명. 불평토로. 친구들은 자신의 멍애를 지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고, 신의 의지를 따르라고 함. 고통받는 사람은 자신의 비참한 입장을 다시 강조.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고통을 많이 받았다고 술회. 이 때 친구들은 그 모든 고통을 신을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자 고통받는 자는 친구를 힐책한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신을 따랐고 그에게 기도를 계속했다. 그런데 나는 파멸했다

 

바빌론의 신정론은 고대 근동문학 중 독특한 분위기이다. 비문의 고통받는 자의 마지막에 대한 모습이 소개되지 않았다. 다만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결론이 내려졌을 뿐이다.

(1) 기타 많은 문헌들이 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당시의 공식 신학으로 요약된다. 그럼에도 이를 풀어보려한 당시의 중근동 사람들은 다음의 결론을 내렸다.

고통은 죄와 벌이다. 人間의 책임

인간이 의롭다는 것을 주장하면 이 의롭지 못하고 공평치 못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신에게도 책임이 없다면?

인간이 가지는 에 대한 지식은 단편적이며, 그래서 의 뜻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고통은 하나의 신비이다.

(2) 이러한 공식신학상 고대근동 문헌의 전개방식은,

인간은 본성상 악하고, 고통은 자신의 탓이다.

고백과 회개를 하면- 신들의 보상이 따르고

인간은 이에 대해 감사와 찬미를 해야 한다는 전개

욥서의 세 친구들은 이와 꼭 같은 주장을 했다. 세 친구들은 전통 종교의 대변인이 되 셈이다.

 

 

3. 욥서의 성서적 배경

(1) 신명기계의 응보관

이스라엘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Covenent)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이 계약 개념은 성스런 약속인 성약으로 이스라엘 신앙에 핵심개념이다. 신명기는 그 구조자체로서 계약을 논한 책이다. 즉 이스라엘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느님과의 계약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계약의무에 충실할 때 그 백성은 의로운 백성이 되고, 그 개인은 의로운 개인(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약을 어기면 재앙을, 저주를 받는다는 현세적 응보관이 들어있다.

 

하느님과 人間과의 계약

?

?? 당신의 호의로서 ?? 人間이 성실하면- 축복

?? 人間이 불성실하면- 저주

요수- 열왕 까지는 신명기계 사관에 의해 쓰여진 역사서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의무에 충실했을 땐 복받고, 소홀했을 땐 벌받았다는 현세적 응보관에 의해 저술. 이때 하느님 편에서도 계약의무를 잘 지켜야 했지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졌던 근본정신은 ד??로서 그 뜻은 정의와 사랑과 자비의 마음(Kindness)이다.

 

공동체적이고 국가적 연대성의 표현

개인의 잘못이 국가의 볼행을 초래하고 부모의 잘못이 3 -4대의 후손까지 영향을 주는 식의 표현이 많다Corporate personality(동체적 인격). 신명기의 -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자식의 이가 시큼해진다는 말이 대표적 표현이다. 결국은 국가 전체가 긴밀한 연대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의인의 고통은 거론할 처지가 못된다. 즉 조상이나 우두머리가 잘못했다면- 우리가 함께 치러야 한다는 식. 이러한 동체적 인격에 의할 때 현세적 응보관은 두각을 나타내고 개인의 불행은 상선벌악의 논리에 잘 맞는다.

 

문제점 제기

이스라엘이 패망하여 바빌론에 유배되고 국가적 연대의식이 무너지자, 개인의 죄와 그에 따른 벌이 문제되기 시작했다(BC 587 이후). 예레미아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의인의 고통에 대한 반발은, 예레 12,1f 처럼 야훼께서 의로우신 것은 인정하나,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벌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이전의 공식신학에 반대되는 말을 시작한다. 하바꾹1,13도 같은 사상을 적고 있다.

 

이런 사조와 함께 에레키엘아비가 포도를 먹어도 아들의 이가 시큼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에제18,20 에서 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말하여 지금까지의 공식신학을 반대한다. 이리하여, 개인의 책임은 강조되고 하느님의 정의는 새롭게 표현된다. 공식신학인 현세적 응보관과는 달리, 반대구절뒤에는 소위 정화, 교화의 의미를 가진 구절들이 소개된다. , 계약 안에서의 상선벌악의 응보관은 변함이 없고 국가적 연대의식이 사라지면서 개인의 고난에 초점을 맞춘다. 바빌론 유배말기 제 2이사야 고통받는 야훼의 종에서 무죄한 자의 고통은 대속적 의미를 소개 의인의 고통과 동일시. 대속적 의미의 의인의 고통은 - 내세의 보상을 약속한다. (이것은 대속혹은 구속신학의 발전이다.)

욥서의 경우는, 고통의 의미나 해결책이 나오기 이전의 시대와 상황을 말하며 의인이 고통을 갖는 대속의 의미, 내세의 보상 개념이 없을 때의 것이다. 따라서 욥서는 수천년간 지배된 현세적 응보관의 상황안에서 고통받는 의인이 하느님의 정의를 논하는 것이고, 저자는 의인을 주제로 하여 전통적인, 현세적 상선벌악의 응보관을 질타한다. 저자는 시, 산문 등을 연결하여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하느님을 등장시켜서 대화를 이끌어 간다.

(2) 본문분석

1,1- 2,13 서문

2,11- 13 친구방문에 관한 말

42,7- 9 친구방문에 관한 말

42,7- 17 결문

이런 구조를 “Volksbuch" 라고 부름

저자는 친구들이 방문했다는 말에 힌트를 얻어 시 부분의 대화를 써넣고 전통적 응보관의 문제점과 고통받는 의인을 거론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고, 또 다른 학자들은 별개의 본문과 서문, 결문을 연결시켜 주기 위해 후대에 첨가한 부분이 2,11-1342,7-9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문에서 - 하느님께서 욥에게 두곱으로 갚아 주셨다고 소개할 뿐, 그 구조상 욥이 중병에 시달렸다고 말하고 있고, 1-2장의 사탄, 천상궁중어전회의 등은 실제로 유배이후이 문학지층인데, 서문의 내용과 문학양식은 성조시대로 소급된다. 그러므로 고대의 것과 후대의 것이 혼합되었다고 본다. 아울러 사탄에의 언급이 서문에는 있고, 결문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사탄이란 단어는 유배이후 첨가물로 보이는데,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은 문학비평을 어렵게 한다.

본문 3,1-42,6은 문학비평상 문제점이 있는데 그 중 2427 장은 특히 심하다. 일관성이 없고 문제거리가 많다. 특히 이 부분이 누구의 이야기인지 불분명하고 논리적 재구성이 힘들다.

28장의 시는 문맥상 원래 독립된 시 였는데 후대의 첨가물로 보고, 특히 28,28 은 후대의 첨가물인 증거를 보여준다.

32-37 장의 엘레후의 이야기는, 여타의 친구들과 욥 두편을 모두 질책함으로 부록 같은 성격이 있다. 사상적으로 앞의 친구들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고통의 의미를 풀어내려 하고 있다.

결문에서 엘레후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신심 있는 유태인이 세 친구들이 욥을 비판한 것이 전통교회의 옹호에 부족함을 느껴 첨가시킨 것으로 볼 수 있고 이에 따라서 엘리후의 이야기도 후대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하느님의 이름

서문과 결문에서 הוהי(야훼)27. 본문은 םי???(엘로힘)이란 말은 쓰기를 꺼려하여서, (ל?: 36), (?וֹל?엘로아 35), (י??샤다이 25)를 사용하였다. 여기에는 הוהיםי??? 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서문결문의 저자와 본문의 저자는 전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욥서는 이스라엘 문화, 전례와 무관하고 욥 자신은 우스 사람, 세 친구도 아라비아 사람으로 말한다. 결국 욥서는 처음부터 일관성 있게 쓰여진 책이 아니고 후대 편집자에 의해 민간전설로 내려오던 설화를 토대로 하여 의인의 고통문제를 해결하려 여러 가지 첨가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3) 욥서의 사상

1(1-2) 산문체의 서문.

1,1-5 욥의 소개. 대단히 신심있는 사람으로 묘사. 옛 사람들의 부의 측정기준인 가축과, 하느님의 축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자녀가 많았다고 묘사(성조시대 참조).

1,6-12 1차 천상어전회의. 사탄이 욥을 시험하겠다고 하느님께 제의. 이 때의 사탄은 하느님을 보좌하는 보좌관중 하나로 묘사됨.

1,13-22 사탄의 시험으로 시련이 옴. (자녀들을 잃음).

2,1-6 2차 천상어전회의

2,7-10 불행의 계속

2,11-13 세 친구의 방문

 

사탄은 하느님의 아들 혹은 보좌관으로 묘사되며, 시련의 결과로 자녀와 재산을 잃고 중병(문둥병)에 걸려 격리된 채 고통에 시달리는 욥에게는 신체적 고통은 컸지만 더 큰 고통은 소외감이었다. 소외감과 고통과 절망에 시달리는 욥에게 그의 아내는 그의 심증을 읽기라도 한 듯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이시오라고 한다. 이런 심정은 불행을 당한 사람이면 모두 느낄 수 있는 절망감일 것이다.

 

천상궁중 어전회의에 참석한 독자들이 모두 바라보는 중에 욥은 1,21의 말씀으로 하느님을 찬양한다. 욥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가져가는 데에는 문제 삼지 않는다. 2,10에는 나쁜 것이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받아야 한다고 말하여 그의 신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시험의 결과로 욥은 신심 지극한 사람임을 드러난다.

서문의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본문중에 욥의 주장을 이해하도록 뒷받침한다. 즉 본문에서 욥이 찬양대신 항의하는 것이 정당한 항의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3(42,7-17) 산문체의 결문.

42,7-9 욥의 세 친구에 대한 심판.

42,10-17 욥의 회복

42,7-9는 본문과 결문을 연결시키기 위한 후기 첨가물이다.

42,10-17에서 욥이 당하던 불행은 죄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부정이 있다. 왜냐하면 물질적 행복을 되찾고 자녀를 더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 주장에 반항을 하였던지, 부정을 하였던지 하는 문제는 거론되지 않고 있고 결문 부분의 회복은 서문과 맞지 않고 있다.

 

본문에서 욥이 상선벌악은 철칙이 아니다는 말을 하고, 기계적 응보관을 비관하며 인간이 당하는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깨닫게 되고 참 지혜가 생긴다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는데 비하여 결문에는 이에의 연결이 미흡하다. 또한 욥의 건강상태가 거론되지 않고 있고, 욥이 당한 시련에의 언급이 없다. 즉 첫 번째 시련은 복구되었으나 두 번째 시련()에의 언급은 없다. 그러므로 서문과 결문은 본문과 다른 민간 설화로써 상선벌악이 드러나며 의인의 고통에 대한 해답을 준다.

 

 

 

2(3,1-42,6) 시 형태의 대화체 본문.

3,1 ff는 예레미아의 고백과 유사하다.

3-27장은 3-11: 1논쟁

12-20: 2논쟁 세 개의 연설로 되어있다.

21-27: 3논쟁

3-11: 3- :욥의 이야기

4-5: 엘레바스

6-7:

8- : 빌다

9-10: 21-27: 21- :

11- : 서파르 22- : 엘레바스

12,20: 12-14: 23-24:

15- :엘레바스 25- :빌다

16-17: 26,1-4. 27,1-12:

18- : 빌다 27,13. 24,18-24: 소파르

19- : 27,14-23: 소파르

20- : 소파르

본문 부분은 대단히 복잡하다. 구분이 어려우므로 대강 3등분 한 것이다.

3-27장은 욥과 그를 방문한 친구와의 대화이다.

28장은 지혜에 대한 찬미가로서 후대의 첨가물로 본다.

28,28에서 야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라는 지혜문학적 정의가 이채롭다. 이로서 후대첨가물임이 증명된다.

29-31장은 하느님께 대한 욥의 도전. 위로는커녕 죄인으로 몰고 가는 친구들의 비난에 이제는 하느님께 도전을 하여 따진다.

32-37장은 엘리후의 연설로서 독립된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엘리후가 지금껏 언급된 적이 없는 사람인데 불쑥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서 후기첨가물이다.

38-40,2 은 하느님의 발현과 하느님의 말씀

40,3-5 는 욥의 답변

40,6-42,6은 하느님의 말씀

위 본문의 대화는 일관성이 없다. 대화란 상대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답변하거나 반박하는 것인데 본문의 대화는 결렬한 자기주장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위로하려 찾아온 친구들이 오히려 논쟁하며 비난한다.

 

4. 결 론

 

친구들의 기본입장

 

고대근동의 전통적 응보관이다. 상선벌악은 신적질서의 철칙이며 예외가 없다는 것.

근동의 지혜전승상 전통적 응보관은 의인물질적 번영. 악인고통의 도식.

따라서 인간이 고통 중에 있다면 그는 틀림없는 죄인이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빌며 그분을 찬미할 때 신은 축복을 내려준다.

유배이전의 이스라엘의 응보관은 계약이 중심이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잘 따르는 자의인.

따라서 계명과 정의를 잘 따를 때- 축복. 반대는- 고통, 저주

이 당시는 개인적 고통의 대속적 의미를 모를 때였고, 내세적 의미를 몰랐다. 이런 배경으로 보아 욥이 친구들은 전통적 응보관()의 대변인이다. 그들은 지혜전승을 근거로 (4,8. 5,2-7. 15,17-1.v9. 8,8-10. 20,4) 자기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 욥을 공박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의인임을 스스로 잘 알고(의 의인) 있었기에 자신의 불행은 하느님 쪽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의 경우라도, 하느님과 人間이 계약을 맺었다면 쌍방이 계약의무가 있는데 나는 계약을 지켰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약속을 위반한 셈이다. 그러니 의 하느님이나 의 하느님이나 모두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고대근동의 지혜교사들의 입장이다. (지혜전승 인용문구참조) 그들은 세상에 만고불변의 진리를 따르는 자임을 자처하여 전통적 응보관은 하느님과 人間에게 엄격히 적용됨을 말하고 욥이 결국 죄인이라고 단정한다.

 

엘리후의 입장- 그의 연설은 세 친구의 기본입장과 같다. 그러나 33,15-29에서 고통의 교육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 특기할 만한 새로움이다.

 

이상으로 보아 친구들의 입장을 결론 지우면, 모든 고통은 죄에서 기인하며 이것은 철칙이다.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죄와 고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다. 그러니 욥 너도 회개하고 하느님께 빌어라…… 하는 것이 기본입장이다.

 

욥의 기본입장

 

욥은 자신이 계약에 충실한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당시 의인의 개념은 계약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이것이 이스라엘 윤리도덕의 대명제였다. 그러므로 현재의 자기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하느님쪽에 문제가 있고 하느님이 의롭지 못하고 공정치 못하다. 오늘 나의 고통은 나와의 계약에 있어서 하느님쪽이 충실치 못한 결과이다.

 

세 친구가 지혜전승을 말하나 욥도 그들만큼 지혜로운 현자이다. (12,6-12. 13,1-13) 욥은 전통적 응보관을 고수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이 자기의 의로움을 밝혀주기만 원한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제반상황을 볼 때 실존적 상황에서 반드시 고통이 죄의 결과일 수는 없다. 그래서 욥은 창22,23의 야곱처럼 고통을 받고 죽임을 당할지언정 자신의 의로움이 밝혀지기를 원한다.

 

세친구하느님의 를 말하기 위해서는 욥의 不義를 말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를 주장키 위해 하느님이 불의 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人間를 주장하기 위해 하느님을 不義한 분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고통이 죄의 결과라는 철칙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욥은 결국 하느님은 인간의 측정으로는 알 수 없는 분임을 깨닫는다.

친구들과의 논쟁결과 욥은 하느님께 도전하게 되는데, 욥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억압자이며 동시에 유일한 변호인인 셈이다. 신앙의 하느님과 경험의 하느님이 다른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31,35-37에서 자신이 잘못했으며 차라리 벌을 달라고 애원하나 하느님은 숨어 계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점점 더 소외감을 느끼는 욥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 직접 대답을 요구. 그분의 침묵. 욥은 끝까지 저항하며 다른 돌파구를 찾는다(32,22-33). 이런 상황 속에서 그분의 말씀이 시작된다.

 

폭풍속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말씀

 

38-42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욥의 친구들은- 당시의 정통신학대로 훈계했으니 욥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바라는 입장이고, 욥은- 자기의 업청난 억울함을 하느님이 해명하여 주시어 자신의 를 드러내 주시기를 바라는 입장이고, 독자의 기대는- 전통적 응보관과 신정론 사이의 토론 이후이니 만큼 하느님께서 해결의 말씀을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느님은 욥의 고통에 대한 질문이나, 세친구의 응보관에 대한 질문이나, 논쟁중에 발생한 문제의 해결책이나 어느 것도 답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엉뚱하게 꾸지람을 주시며 질문하신다.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불의한 자로 몰려 하느냐?”

이것은 질문자에게 주는 합리적 답변도 아니고, 수긍할 논리도, 철헉적 사고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제시가 곧 상선벌악의 도식에 욥의 고통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욥에게 새로운 차원의 이해의 눈이 열린다. (하느님의 현존과 말씀앞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자기의 이해력을 초월한 것에 대해 논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욥은 하느님과 결정적, 인격적 만남을 통하여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결국 인간이 겪는 가장 어려운 고통은 소외감이랄 수 있는데 소외감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하여 극복되는 것이다.

 

욥서는, 인간이 삶과 인생에 수반되는 모든 문제를 기계적 응보관 이라는 테두리에 묶을 수 없음을 말하고, 인간적 범주로서 하느님을 평가한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주장을 한다. 욥서는 창조주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고,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함부로 하는 판단하는 모든 것을 경계한다.

전통적으로, 인간이 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느끼는 것은계명을 잘 지키고 축복된 생활을 할 때인 것으로 알았다. 이런 사조는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욥서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며, 설혹 하느님이 침묵하고 계신다 하여도 하느님은 가까이 계시며 인간이 경험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결코 알 수 없음을 알려준다.

이로서 욥서는 전통적 지혜가 가진 문제점을 파헤치고, 인간이 찾고 있는 물질적인 축복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 앞에는 이런 것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인간적 범주를 초월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하느님의 현존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욥서의 제시된 해결책은 -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역동적 삶에 대한 숙고이며, 욥서의 메시지는 신학적, 철학적 하느님의 현존체험이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성서의 욥이 개인에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고 집단일 수도 있다고 말하며 욥서의 현대적 이해를 거론하기도 한다.

 

욥서의 연대장소- 구체적 언급이 없다.

서문, 결문- 유배이전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본문- 유배이후

장소: 욥은 우스사람- 애가4,21 “우스땅에 자리한 에돔의 수도야”.우스」→ 에돔으로 소개.

파피루스 등에 나온다. 혹자는 에집트 혹은 아라비아라고도 함.

장소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주장을 할 수 없다.

 

고통받는 인간실존 문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가진 경건하고도 겸손한 침묵 속에서, 고통이 하느님의 신비하고도 측량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의미 있는 행동에서 오는 것이라는 깊은 통찰과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친교)속에서 해결되며 그 외는 무의미하다는 확신 속에서 해결 가능한 것이다.

 

. ת??? (전도서)

 

LXX→ εκκλησιατης (집회에 관계된 직책을 일컬음) 아가-유월절 마지막 날.

VulgataConcionator(설교자) 룻기- 5순 축제

읽히는 때; 애가- 아브달 9

전도서- 초막절

에스델- 부림축제때.

 

Introduction

아가,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델은 작은 별도의 두루마리에 있고 이스라엘의 중요한 축제때 읽혀지던 책들이었다. 위의 순서는 읽혀지는 순서에 따라 정해진 것이었다. 전도서에 나타나는 체념의 철학은 신적인 것과 무관한 듯도 하고 저자의 태도로 미루어 합리론자 혹은 염세주의자라는 추측도 한다.

이 책은 아라메아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데 성서대학의 마이클 교수는 저작장소는 띠로쯤으로 보며 페니키아어의 영향도 많이 받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페르시아가 구제적 세력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BC 6세기 언어도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페르시아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드러난다. 집회서와 전도서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내용상 집회서가 있기 전에 전도서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꿈란 동굴에서는 BC 200경 이전의 전도서 단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가지를 종합하여 BC 200150 사이의 작품으로 본다.

ת???(코헬렛)은 사람이름 인 듯 소개되지만 7,26에는 정관사가 있어서 의문스럽다. 전도서는 성서중 가장 이상하면서도 매력적인 책이다. 이 책은 음울한 생활의 묘사속에 깊은 지혜가 숨어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의 삶속에 가치가 있음을 긍정하며 삶이 하나의 주어진 선물(to given-gift)임을 강조한다.

전도서의 자세는, 절대적인 성실성, 진실성을 추구하는 자세이다. 인생을 관찰하고 솔직 담백한 묘사로서 죽음 앞에 서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정직하게 현실적으로 그리며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다. 이로서 인생의 숨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7,2). 또한 인생을 지혜롭게 음미하는 것은 삶의 한계를 느껴 죽음을 직시할 때라고 가르친다.

소박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는 신앙심을 가진 자세이다. 전도서의 세상이해는 의혹 속에서의 세상이므로 신의 존재가 부정될 정도의 세상이다. 그러나 저자는 신의 존재를 부정치 않고 있다. 그냥 겉보기에는 염세, 회의주의자 같으나 깊이 있게 살피면 신앙과 종교의 진수를 볼 수 있다.

 

AD 270년경의 그레고리우스 타르마투스는 말하기를 이 책은 우리를 천상적 명상으로 이끌기 위해 모든 쓸데없는 것들을 초월할 수 있도록 적고 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전도서의 자세는 신앙인에게 중요한 자세이다.

 

1. 제 목

ת???의 어원은 להק로써 불러모우다. 불려 모아진 것들로 집회, 회중을 뜻하는데 이 어원의 여성분사형으로 ת-를 써서 직책, 기능, 사람의 태도 등을 나타내었다(에즈라 2,52. 2,57).

따라서 ת???은 회중을 지도하는 직책, 회중에게 말하는 직책이고 이들에게 말하는 자전도자, 설교자라는 뜻으로 변천되었다. 그래서 vulgata 에서는 Concionator(설교자)로 번역하였다.

진드버그라는 학자는 ת???의 어원이 아라메아어로서의 להק불러모으는 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혜 격언을 수집하여 모아논 자라고 본다. 즉 원래 아라메아의 남성형 להק이 히브리어로 번역되면서 여성형으로 변하였다고 주장하며 전도서의 제목을 수집자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1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이 왕이었던 솔로몬의 말이다.”

이를 필두로 하여 1,1. 1,7. 7,27. 12,8 등에 솔로몬의 글임을 말한다. 그러나 1,16에는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왕노릇한 어른들 치고라고 말하며 왕들을 복수로 썼으므로 문제가 있다. 솔로몬이라면 자기 부왕 한명뿐일텐데 자기 앞에 왕들이 많았다는 복수표현이 걸린다. 혹자는 이를 이유로 히즈키야가 저자라고도 한다. 사실 책제목에 저자를 솔로몬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솔로몬이 설교자와 동일시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제목과 저자에 문제점을 인정하며 지혜문학의 개명작품이 많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1,1181인칭. 1,1. 1,2. 12,9-11에서는 3인칭을 쓰는 것으로 보아 단일저자의 작품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솔로몬임을 강조하는 것은 1열왕4,9-14에서 말하는 바처럼 지혜로운 현인의 모델이 솔로몬으로 알고 있기에 이 책을 쓴 저자는 솔로몬 왕이 쓴 지혜의 책임을 강조하고자 가명을 쓴 것으로 본다.

 

2. 문학 양식

다양하다. 어떤 곳은 한 줄짜리 잠언도 있다. (1,15)

가장 중요한 문구의 문학양식은 보다 낳다는 형식 (9,40이 대표적)

2인칭으로 된 금기사항 (10,20)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1인칭 설화 (1,12f. 2,1f)

부정적 답변을 기대하는 수사학적 질문 (1,3f. 6,12 etc)

이상의 다양한 양식적 요소들이 뒤섞여진 수사학적 연설문을 형성키도 한다. 또한 잠언들과 산문적 설화형식이 혼합되어 있기도 하다.

전도서의 반성, 성찰양식의 3가지.

부정으로 시작하여 인간실존을 낙관적으로 이해한 반성적 비판. 6,1-6. 3,16-22.

긍정, 중립적으로 시작하여 갑자기 비판한 것. 3,1-15. 4,13-16.

부정으로 시작하여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나아가는 것. 4,4-6. 5,12-19.

첨가물의 흔적은 1,1(제목), 그리고 12,9-14에서 나타나고 12,9-10은 대표적 케이스. 12,9-1012,12-14는 별도의 편집자가 첨가한 것으로 본다(12,12 특히).

 

3. 유사한 근동문학

 

A. 전도 9,7-9는 길가메쉬 서사시와 비슷하다.

 

당신은 배를 채우고밤낮 즐겁게머리를 감고ANET p.90 참조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작품은 하프 켜는 사람의 노래로서 장례식때 부르는 것인데 인생무상을 노래하며 살아있는 동안 즐기라는 내용의 것이다. 이것은 전도 7,1-9과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 대문에 I.C.C Barton 은 전도서가 길가메쉬를 번역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전도서의 특징인 헛되고 헛되다라는 말은 길가메쉬 그대로이다.

그러나 구별점도 많다.

1 구별점 ?? 전도서- 일을 하고 수고를 즐겨라.

?? 길가메쉬- 놀기만 하는 것이 최고.

2 구별점 ?? 전도서(9,7)- 코헬렛의 충고가 시두리의 충고와 병행.

?? 길가메쉬- 병행되지 않는다.

?? 9,7- 하느님께서 주신 인생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깔려있는 점 이 길가메쉬와 다르다.

B. 비관론의 대화

 

이 책은 자살을 예찬하는 염세주의적 색체가 짙은 것으로, 종이 옛 사람의 무덤에서 죽음은 가장 공평한 것으로 말하는 점은 전도서와 비슷하지만 전도서는 자살 개념이 없다.

C. 에집트 현자의 권고,

전도 10,6-7 은 에집트 현자의 권고와 같다. 이런 권고는 바빌론 문헌에도 같이 소개된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내용은 같다. 바빌론; 누가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으랴? 에집트; 아무도 죽음의 날을 알 수 없다. 전도 8,6-7;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지 아무도 모르고

전도서와 근동문학의 유사점은 많으나 직접적 영향 여부는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전도서 역시 근동의 지혜문학과 사상적 일맥상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서백과 대사전, I.D.B.S

의 전도서 부분 읽으면 됨)

4. 최근의 학자들 경향.

성서의 연구방법에는,

분석적 방법- 어떤 것이 어떤 방법을 거쳐 이러한 발전을 하였다. 각 부분들을 자기가 처한 삶의 자리에 환원시켜 그 의미를 보고 최종단계로 정착된 이 문맥에서 주는 새로운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 통시적 방법(Diachronic)이다.

 

종합적 방법-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text 만을 보고 연구하여 그 의미를 살피는 것. 따라서 편집자나 전승이나 역사등은 외면된다- 공시적 방법(Synchronic)이다.

과거에는 분석적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오늘날에는 점점 종합적이고 공시적 방향으로 전환되는 중이다. 해석학, 구조주의 등은 종합적 방법에 속한다.

작자 - 작품 - 독자

성서의 해석은, 이해의 문제이다.

객관적 이해는- 역사비평방법을 적용하는 것이고

주관적 이해는- 실존적 해석, 구조분석 등을 말한다.

 

최근의 학자들은 전도서가 210년경 집필되었다고 보는데, 이때는 알렉산더 대왕이 고대근동을 점령한 780년 후의 시대이므로 희랍사상의 영향에 많았던 시기라고 하며 전도서에서 그 증거를 찾아 제시한다. 희랍의 테오그니스문헌과 비교해보면,

좋은지 나쁜지 알면서 수고하는 자는 없다. 우리의 생각들은 헛된 것, 신들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 모든 것 중에서 지상의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태어났으면 될수록 일찍 하데스의 문을 거쳐 눕는 것이 좋다이러한 염세, 허무주의는 전도서의 내용과 닮은 점이 많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주변국가와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W.Zimmeri , 1964년에 구약신학에서 지혜가 차지하는 위치와 한계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에서는 주변국가의 영향을 연구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분위기를 중요시보아 성서 외적인 것에서 미친 영향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또한 지혜는 창조신학의 틀 속에서 위치한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창 1-11 내용에 전도서 사상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2,7. 3,202,7 과 비슷: 인간이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 숨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

4,9-12. 9,91,27. 2,21-25 와 비슷: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있다.

7,29. 8,11. 9,33,1-13과 비슷: 인간에게는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8,7. 10,142,17과 비슷: 인간의 지식은 하느님께서 그어 놓으신 한계속에 머문다.

1,3. 2,223,14-19와 비슷: 인간이 삶이란 땀흘려 수고하는 것이다.

9,4-6. 11,83,19.v24와 비슷: 죽임이란 인류 위에 드리워진 비극이다.

3,10-131,28-30. 3,5와 비슷: 하느님은 주권자이다.

이상에서 본 바대로 전도서는 자연질서와 규칙을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의 표시로(8,21ff)본다는 점에서 창세기 저자와 일치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때에 맞도록 아름답게 창조하셨으니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세상을 즐기며 사는 것(3,11-12)이라는 주장이다.

W.Zimmeri의 주장에 중요한 일치점은,

창조 motif의 중심점이, 생명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것이므로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서 저자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며 생명을 긍정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 하나의 증거;

1장에 창조설화에, 하느님께서 7번이나 보시니 좋더라고 하신 것처럼 전도서에도 생에 대한 결론에 수고한 보람을 즐겨라”,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하는데, 창세기에 좋더라”(בוֹט)와 전도서의 수고한 보람의 원문(בוֹט)2,24에서 같은 단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전도서는 지혜전승의 일부로서 창조신학을 담고 있다. 지혜가 창조신학안에 자리하고 있다면, 전도서가 창세기에 의존한 문제점이 해결되며 생을 기쁨으로 맞이하자는 주장 역시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창조신학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앙표현인 창세기 1-2장에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구체적 상황에서 갈등, 고통, 배신, 죽음의 현실이 창1-3장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멀리계신 분이고 침묵하시는 분으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하느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 것이 창조신학이다. 지헤문학도 이런 창조신학적 바탕이 있음이 드러나고, 이로서 전도서 저자는 창조신학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고대 근동 문헌의 영향에 직접 의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W.Zimmeri의 주장이다.

J.Philip Hyatt, W.Zimmeri의 주장에 반대하여, 전도서가 표현하는 것은 지혜전승의 불변철학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인생은 달관해야 될 과업이 아니라 조정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과업이고,

인생은 지배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는 것이 과업이고,

인생은 윤리적 실존을 말함이 아니라 심리적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세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라도 종교인은 자기신앙이라는 관점에서 현실세계와 삶을 진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간단히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며 그냥 지나 쳐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책은 인생의 지침서가 된다는 이유로 Canon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다른 차원의 증거로는, 전도서가 대체로 지혜의 업적에 대하여 근본적인 부정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도서의 경우는 지혜의 주요 관심사인 인생을 되찾을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지혜가 선포하는 삶의 소개서인 것이다. 다른 주석가들은 1,20 “헛되다”, 2,17 “삶을 미워하라는 표현에서 비관론자로 이해한다. 그러나 코헬렛이 문제시하는 것은 교의화한 세계관과 세계의 현실사이에 갈등을 드러내놓고, 지헤가 가장 중심적인 초점인 삶에 관심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G.Lohfink; 전도서는 하느님께 바탕을 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대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전도서가 전반에서 인간이 생을 즐겨야 한다는 말이 계속되고(2,24-26. 3,12-13. 3,22. 5,17-19. 7,14. 8,15. 9,7-9. 11,9-12,1)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지금까지 헛되다라는 motif를 중심으로 전도서를 이해하려 했기에 엉뚱한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을 즐겨야 한다는 것은 전도서 전체를 놓고 볼 때 전혀 다른 이해도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G.V.Rad; 전도서의 기본관점이 다음 3가지라고 주장.

인생에 대한 철저한, 합리적인 탐구는 만족스런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헛되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모든 사건들은 하느님에 의해서 규정된다.

인간은 세상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들을 수 없다.

R.Guardini , V.Rad의 말 중에 하나를 더 첨가한다.

삶 자체가 온전히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 이 책의 기본 주제는 을 즐기라는 것인데 기쁨이란 하느님이 주신 지상명령이므로 이를 인간의 실존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인간의 쾌락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To Sum up: 이상의 학자들의 경우를 종합하여 보면, 전도서는 교조화한 지헤관에 입각하여 세상문제를 풀어내려고 한 것이 아니다.

?? 죽음, 환멸, 체념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읽으면- 부정적 견해가 생기고

??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삶의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 중심으로 읽으면- 긍정적 견해

따라서 삶의 무의미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지침서로 이해할 것이다.

로핑크는 덧붙이기를,

비록 삶에 대해 비관적이라 해도 이것이 인간의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긍정으로 받아들인다면 틀림없이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人生을 즐길 수 있다는 내용이고, 죽음, 체념들을 말한다해도 이것은 부정적 견해가 아니고 중간적이라고 말한다.

결국 인간존재의 한계성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에 중요성이 있다.

 

5. 전도서의 구조

 

?? 1,1 제 목

?? 1,2 헛되다(경고문구)

?? 1,3-11 수고: 보람이 없다.

?? 1,12 1 : 1,12-6,9. ; 죽음. 헛되다. 즐겨라. 하느님뜻대로

?? ~ ― 본문

?? 12,8 2 : 6,10-11,6 + 11,9-12,7+12,8; 죽음. 헛되다. 즐겨라. 하느님뜻대로

?? 12,9-14 결문: 전체를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motif. 후대 첨가물.

 

전도서는 일관성있는 주제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구조주의적 작업은 힘들다. 전도서는 여러 가지 문학장르의 수집록이다. 한 문장으로 된 잠언양식으로 부터 산문적 설화양식까지 다양하다.

1,1; 이 글의 제목인 셈. “다윗이 아들설교자의 말이다여기서 설교자는 3인칭으로 나오는 것이 특색. 다른 곳에서는 나는”, “이므로 결국 이 절은 편집자가 제목으로 삽입한 것으로 본다.

1,2; “헛되고 헛되다이것은 12,8에도 나오는데 마치 1,212,8이 그릇처럼 (빙크로스)포지션을 잡고 있다.

1,3-11; 인간의 수고가 아무 쓸데없다는 .

1,12-6,9; 1; 몇가지 충고로 구성되어 있다. 2,18-26. 3,1-15. 3,16-4,3. 4,4-16. 5,9-6,6. 이 충고들은 모두 인생의 수고 및 의미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에서 시작하여 이와 대조되는 개념을 등장시켜 인생을 즐기며 살라는 긍정적 마무리를 지운다. 그 뒤에는 즐기라는 충고를 오해할까 보아, 인생을 푸는 열쇠, 신비를 푸는 열쇠로만 알아들을까 보아 이를 제한시키는 말을 꼭 이어준다.

도식: 부정적(헛되다)긍정적(즐겨라)제한(그러나 헛되다)

) 그 중, 6,7은 제 1부의 요약이다. 6,7-8은 인간의 수고나 지혜가 아무 이익도 안된다는 부정적 이야기. 6,9b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눈을 뜨고 사는 것이 났다(원문에는 눈뜨고 보는 것이 났다)이것은 즐기는 것이 났다는 뜻: 긍정적 이야기.

 

6,9a 는 제한된 부정(즐기라는 것을 제한시키는 표현).

원문. 9a: 이 또한 바람잡듯 헛된 일이다. 9b: 굶어죽는 것보다 눈뜨고 보는 것이 났다.

제한된 부정을 하는 이유는, 인생을 즐기라는 자기 주장의 취소가 아니다. 이 권고를 절대화시키는 것이 제한부정이 갖는 의미이다.

6,10-11,6; 2: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없다는 것.

6,10-12. 새로운 서론(도입구): 인생은 덧없다.

78인간이 무엇을 해야 좋은지 알 수 없으므로 덧없는 것이라고

9,1-11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으니 덧없다고 설명.

결국 6,10-12에 대한 답변이 7-9장인 셈이다.

11,7-8; 즐기라는 긍정적 내용이 있는데, 이때의 즐기라는 말은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지 노세 노세젊어서 노세가 아니다. 또한 즐기라는 말 뒤에는 제한된 낙관론이 있으므로, 인생의 덧없음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되지만 현세의 생을 한없이 즐기라는 쾌락주의가 아니다.

11,9-12,7은 인생을 즐기라는 촉구의 . 12,8은 다시 제한된다.

이처럼 전도서는 인간의 수고, 지혜가 별의미 없다고 저술한 것으로 볼 가능성이 많은 책이다. 또한 인간의 운명은 하느님이 결정하시므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어절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의 수고나 보람은 뜻없는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찬미의 노래이다. 절대화되고 남용되는 인간의 수고나 지혜는 의미가 없고......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로서 人生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6. 전도서의 용어분석(구조분석과 개념분석)

히브리어: 헛되다(ל??); 마소렛 본에 73회 사용됨(그 중 34회가 전도서에 있음).

라틴어: Vanitas; 이방신, 우상을 뜻하기도 했다.

시리아 어로는 먼지, 구름등 여러 가지 뜻이 있다.

희랍어 역본 중 아퀼라본(Ag), 테오도스본(Theo), 심마꾸스본(Sym)등에는 ατμις라고 번역하여 숨결, , 안개, 연기 등을 의미했다.

ל?? 의 기원을 아벨로 보는 학자도 있다. 왜냐하면 아벨이 덕있게 살았으나 일찍 죽은 탓에, 착한 아벨이 헛된 죽음에서 ל?? 이 나왔다고 보는 견해이다. ל??의 아라메아 형태로 성서에 나온 것은 םי???이다. 37,13. 62,10: 입김, 9,9: 효과 없음. 신명32,21: 허수아비.

ל?? 의 기본의미는 성서전체에서 비유적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전도서에서,

인간의 수고가 헛되다.- 1,14. 2,11. 4,4. 6,8. 2,2. 2,15.

인간의 운명은 헛되다- 2,19.v21.v23. 4,7.v8. 6,2. 8,10.v14

덧없는 인생은 헛되다- 6,12. 7,15. 9,9. 11,8-10.

ל??수고한다, 보람, 이득과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다. 헛된 것이 왜 수고, 보람, 이득 등과 함께 나올까? 이런 것은 특히 전도서가 자기의 경험을 회상하는 문맥에서 잘 나온다.

 

전도서는 inclusion 표현법을 기본으로 한다. (A-B-A의 순서)

eg) 4,7-8 A. 나는 하늘에서헛된 일을 살펴보았다.

B. 외톨이로 사는 사람이

A. 이 또한 헛된 일이다.

8,14 A. 땅위에서헛되다

B. 니쁜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A. 그래서 나는헛되다고 한다.

이런 기법은 책 전체에도 나타난다. 1,2…… 12,8inclusion이다.

ל?? 은 또한 인생이 무상하다는 표현과 함께 쓰이기도 했다.(5) 이 때 ל?? 생명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었고, 나의, 너의, 그의 라는 대명사가 첨가 되어있다(7,15. 9,9. 6,12. 11,8.v10). 특별히 이 부분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헛되고 젊음 자체도 헛되다고 표현한 것이 특기할 만 하다.

 

헛되다는 표현

인간의 행위는 헛되다태양아래 벌어지는 모든 것이 헛되다처럼 태양아래2,17. 1,12. 2,11 etc 27회나 쓰인 전문용어이다. 향락도 헛되고(2,1), 지혜도 헛되고(2,11), , 돈도 헛되고(5,9), 지혜로운 자의 말을 듣는 것도 헛되고(7,6)……

왜 헛된가? 이유→① 수고해 본들 수고해서 남는 것이 없다.(2,23) 내가 외톨박이라면 결국 누구,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수고한 보람을 남이 가진다면 이 또한 헛된것이다는 논조. 4,7-8. 2,21. 2,26. 6,2 etc. 사람도 짐승처럼 죽고마니 일하는 것이 헛되다(3,19). 성공하고 업적을 쌓고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질투심만 키우니 괴롭더라(4,4).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욕망이 만족을 모른다는 것 그것이더라(5,9. 6,9).

 

인간의 운명도 헛되다이 세상에는 악인이 영광을 얻는 것이 많다(8,10.v14). 인생은 물거품 같은 것(6,4), 젊은 시대는 패기가 있지만 이 시기도 물거품처럼 사라진다(11,4.v10).

결국 인간의 운명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직면하는데 이 죽음이 인간의 운명을 헛되게 만든다는 것. 즉 전통사상으로 세상을 보니 헛된 일이더라는 것이다. 이상의 관점대로라면 전도서는 염세주의, 비관론자로 보인다.

코헬렛을 긍정적으로 나타내는 개념.

האר보다(즐기다) לםע일하다, 수고하다, 이익, חמשׁ기쁨, 즐김

 

1. האר

이 단어는 보다, 살피다라는 듯으로 주로 쓰인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 사고, 생각 모두를 자기 밖으로 모으는 것이다. 즉 보이는 대상에 관심이나 생각의 촞점을 맞추는 의미로 이해된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본다이해하다(11,4), 관심을 가지고 본다(3,21), 기쁘게 본다(2,1) 등을 보면 긍정적 의미로 이해함이 옳다. 이런 예문을 보면 인생을 달관하고 헛수고하느니 보다는 자기가 한일 중에 좋은 것을 살핀다, 본다는 뜻인 것이다. 2,1의 원문과 번역문 대조하면 이 점이 잘 나타난다. 한마디로 이 단어는 긍정적인 용어이다.

원문- 내가 환각으로 너를 시험해 보리라. 그러니 쾌락으로 본다면, 그것들은 헛된 일이다.

번역문- 그래서 향락에 몸을 담가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더니 그 또한 헛된 일이더라.

2. לםע 일하다, 수고하다, 이익,

전도서에 34( 명사 24, 분사 5, 형용사 5+3(?)) 사용된 이 말은 일을 해서 먹게 되는 몫, 보람이라는 말과 함께 쓰인 경우가 많다. 2,10.v21. 3,22. 5,17.v18. 9,9 etc.

ןוֹרתי(, 이득)어근은 רתי남는다”. 이 말은 1,3. 2,11. 5,15. 3,9 등에 쓰였다. 인생을 달관하는 일에 있어서 세상을 주인의 입장에서 보니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ןוֹרתי현세에 남은 자기 몫을 즐겨라하는 충고로 쓰인다. 자기 몫이란 ק??(재산, 전리품)이다. 이것은 공평히 나눈 전리품이고, 12지파들의 정당한 땅의 분배의 경우에 쓰인 용어이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수고한다는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

ןוֹרתי의 몫을 찾으려는 물거품의 수고,

ק?? 의 몫을 찾으려는 영원한 수고,

전도서는 순간 순간의 자기 몫을 즐기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고 한다.

 

3. החמשׁ 기쁨, 즐김.

17회 쓰였다. 충고할 때 기쁜 마음의 충고로 2,26. 5,19. 8,15. 9,7 등에 쓰였고, 3,12.v22. 5,8. 8,15. 11,8.v9 에서 인간의 내면적 기쁨을 최고의 기쁨으로 소개하는데 쓰였다. 동사로서의 ה??는 축제때 공동체가 경신례중 기뻐함을 나타낼 때 쓰였거나(45,16) 혹은 개인의 마음속에 간직한 기쁨을 나타낼 때에도 쓰였다(14,13). LXX에서는 ευϕροσυνη(환락, 기쁨)으로 번역하였다.

 

NT에서는 자연적, 인간적 연회의 기쁨으로 언급한다(루가12,19).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기쁨(Χαρα)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쓰였다(사도 14,6. 14,17). 이곳에서 사도 바오로는 음식과 기쁨으로 채워 주심으로서라고 썼다.

전도서는 바로 이런 선물,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주시는 인생의 축복들을 기뻐하고 즐기라는 것이다.

결국 ל??은 인간의 모든 헛된 관계, 조건을 말하며,

이것을 받아들이면

즐길만한 것이 있고,

자기의 몫이 있고,

일상의 기쁨을 선물로 받는다.

 

G. Rophink 에 따른 주제 분류.

 

1. 죽음 앞에선 인간

전도서는 인간이 하는 수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죽음이라는 공통운명(3,19. 5,12-

16. 6,6. 7,2. 8,8. 12,1-7)이 인간의 수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또다른 한계점으로서 7,15. 8,14 에서처럼 인간의 분간하기 어려운 도덕질서 사이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지혜가 덧없음을 말함- 지혜는 부나 어리석음 앞에서 덧없이 무너진다고 한다(4,13-16. 9,13-16. 9,16-10,1).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자기운명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오만한 노력은 가소로운 것이고 죽음은 참으로 헛된 것임을 깨우치라는 것이다.

 

2.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전제하면 인생의 환멸감과 헛됨을 알게 된다. 1번의 헛됨을 극복하려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으나 안되더라는 것을 깨우쳐, 지혜가 노력으로 인생을 달관하려는 모든 노력 역시 헛되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 헛됨이 드러나고, 이런 노력은 결국 하느님의 독자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주권자이시고 헤아릴 수 없는 분이시며 그분의 의중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3,11. 6,10-11. 7,13-14. 7,23-24. 8,17).

전도서는 하느님이 주권자이신 데 그분의 섭리내용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기에 모를 뿐이라는 것이다(그러나 경험지혜는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전제하고 지혜를 따르라고 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해야할 지 알 수 없다(6,12a, 7,29. 8,16-17). 이 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것이다(6,12b. 9,11-12). 사실 인간은 미래의 일에 절대적인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저녁때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난다고 결심했다 하여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하여 미래를 모른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신앙이 미래를 알려주는 것이다. 전도서는 이런 관점에서 결국은 하느님이 우리의 주관자이시고, 그분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는 비관주의자가 아니고 깊은 신앙인이다(10,14. 11,4-6.; 지혜를 믿는 현자들이 가소롭다는 내용). 인간의 수고를 달관하려는 현자의 노력 역시 숨결정도의 무게밖에 되지 않는 헛된 일이라는 것이다.

 

3. 헛됨을 받아들이면 삶의 순간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실체(Reality)임을 알고, 하느님의 선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이 세상사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보기 위하여(즐긴다는 뜻을 포함한האר) 2,24. 3,13. 5,17.v18. 8,15. (5,18החמשׁ)

먹고 마시는 것 역시 좋은 것으로 긍정하는 것이고 (2,24-26. 5,17. 8,15. 9,7)

인간의 모든 현세활동을 즐기는 것이며(3,22)

삶이란 타인과 함께 기쁘게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긍정하는 것이다(9,9. 4,9-12).

결국 전도서는 기쁨과 슬픔 중에서도 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도록 하여 의 불확실성이 있다하여도 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11,1-6 참조). 비록 부정적인 표현이 있다해도 수고는 무의미 - 즐겨라 - 헛되다라는 도식은 인생을 즐기라는 충고를 절대화시키는 것을 방지하는 도식이다. 따라서 염세, 비관론이 아니며 하느님께 바탕을 둔 사랑으로 이끌어 준다. 삶에 대한 사랑이란, 우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여 현재의 순간을 궁정하고 삶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구조= 헛되다즐겨라헛되다 라는 소단위의 페리코페의 반복이다. 2,18-26. 3,1-15. 3,16-4,3.

4,4-16. 5,9-6,6.

 

To sum up: 지금까지 살펴본 전도서는, 절대로 염세, 비관론적 책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시므로 인간의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조건을 받아들이고 긍정하고 나면 일상의 현세적인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또한 전도서는 인생의 의미를 얻는 열쇠를 발견할 수 없다는 논조로 인간의 무능력을 논하지만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피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전도서의 근본목표는,

고대 근동 주변국가처럼 인생을 달관하려는 현자들의 경험지혜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인간은 다만 하느님께 신뢰심을 자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즉 경험지혜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폭로한 후 하느님의 신비, 그분의 구원의도에 신뢰심을 갖도록 주장한다.

 

저술시기

2,5 정원(파르데스). 8,5 죄를 받다(피트감). 이러한 페르샤어를 보아 바빌론 유배이후페르시아의 고레스 칙령으로 귀환했음을 상기하여, 페르샤 이전시대에는 저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BC 2세기의 꿈란문헌에도 단편이 있음을 보아서 BC 2세기 이전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넓게 잡는다면 BC 300200년 사이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 םירשׁה רישׁ(아가)

Vulgata: Canticum canticorum. R.S.V. Song of songs

히브리인에게는 다섯두루마리의 책이라고 하여 축제기간중에 읽혀지는 성서가 있다.

아가6월절 제일 마지막날 읽고,

룻기5순축제 때 읽고,

애가는 아브달 9, 성전파괴를 애도하며 읽고,

전도서는 장막 축일에 읽고,

에스델은 부림 축제 때 읽는다.

 

아가를 6월절 축제 때 읽는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면서 출애굽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전 역사를 신랑이신 하느님과, 그 배필인 신부 이스라엘의 사랑을 노래로 표현하였다하여 읽는 것이다.

아가는 유태인과 그리스도교의 정경(Canon)에서 빠진 적이 없다. 탈무드 정경 목록에도, 멜리또 정경문헌에도, AD 90의 아퀼라 역본에도 있다. 얌니아 회의 때 아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정경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때 랍비아퀴바, “성서가 다 거룩하지만 그 중 가장 거룩한 책이 아가이다. 토라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토라를 대신할 정도로 거룩한 책이다.”

 

그런데 가장 짧은 책이 가장 많은 논란을 오늘날까지 일으킨다. 앵커 바이블의 Song of songsInterduction에서 성서 본문은 제일 짧은 책이 주석서는 제일 두꺼울 정도라면 알아볼만한일이다.

유대인 성서학자싸디아는 말하기를,

형제여, 아가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실제로 아가는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통과 같은 것일세.”

 

저자문제: 1,5. 3,7.v9.v11. 8,11ff 에 솔로몬이 저자인 것으로 되어있으나 이것은 1열왕11,5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면 되고 실제 저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제목 םירשׁה רישׁ은 노래들 중에 노래라는 뜻으로 최고의 노래가 곧 아가라는 식이다.

 

해석방법,

우의적(allegory): 쓰인 것과는 다르게 해석하는, 전통적으로 가장 많이 쓰인 해석법.

자의적(Literal Historical):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방법.

 

아가서는 남녀간의 찐한 사랑이야기 이므로, 비록 표현은 이러하나 알아듣기는 달리 알아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우의적 해석이 성행했다. 유태교에서는 이스라엘 역사에 비추어 우의적으로 해석하여, 이스라엘 주님이신 야훼와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간에 영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유대교의 해석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대신에 교회를 집어넣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영적인 사랑을 말했다고 가르친다.

혹자는 신부를 성모마리아로 보기도 했고, 중세시대에는 인간의 지성을 신부로 보기도 하였다.

우의적 해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allegory적 해석은 해석학적 기준을 세울 수 없으므로 아가서의 우의적 해석은 불가하다고 주장한다.

현대에 와서는, 1차적으로 자의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 후 이를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자의적 해석에 시도되는 방법들,

1. Dramatic theory: 드라마로 이해하려는 시도.

2. 결혼 축하식 이론: 시리아 및 근동의 결혼 축제와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시도.

3. 세속적 이론: 세속적인 남녀의 연가 집으로 이해하는 시도.

4. 제의적, 전례적 이론: 고대 근동의 성전창녀와 사제의 성적 결합을 통하여 풍요다산제의가 이루어지듯, 종교의식 속에서 신들의 결혼을 이렇게 그렸다는 이론.

5. 창세기 연장 이론: 창세기의 아담- 에와의 낙원에서의 사랑이야기로 보려는 시도.

지금까지 시도된 해석

 

1. 유태인들의 우의적 해석.

유태인들은 탈무드, 미드라쉬 등에 아가를 이스라엘 역사에 연결시켜 해석하였다. 먼저 구전되어 내려오는 토라에 맞춘 후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유배, 속죄, 메시아 사상을 암시하는 것으로까지 보았다. 즉 출애굽부터 시작하여 온갖 고통과 박해 속에서 살아 나온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사랑관계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증거를 호세아 1-3장에서 찾는다. 즉 부인이 잘못해도 신랑이신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지원, 보존, 사랑하여 주셨다는 것을 말하는 책이라고 주장한다.

 

2. 그리스도교에서 본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우의적 해석).

바오로사도가 즐겨 쓴 예형론(Typology)에 입각하여서, 그리스도와 신자들 상호간의 사랑으로 연결시켰다.

eg) 로마서의 아담- 예수 그리스도

(Typos) (Antitypos)

이런 해석이 가능했던 이유는 O.T.N.T.를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아가서의 신부는 교회이고, 신자라는 해석이다. Typology는 글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역사적 사실성까지를 인정하면서 그 글에서 말하는 예표를 찾는 방법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에서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와 전 인류의 구원에 대한 사랑

성령과 마리아의 사랑 등등으로 확대 해석하였다.

 

그리스도교가 팔레스티나를 떠나서 이방사회로 전파되자 희랍, 로마적 사고방식의 영향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안에 금욕은 성스러운 것으로, 육적인 요소는 불결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생겼다. 독신생활을 하던 신학자들은 아가에서 육적인 요소를 없애고 영적인 사랑의 찬미가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지향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욕망을 영적으로 승화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스도교에서 아가를 우의적으로 해석한 것은 200년경 히뽈리뚜스가 우선적으로 꼽힌다. 그는 4,5의 젖가슴을- 신약과 구약의 두 봉우리로,

4,6의 유향언덕은- 육적인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신자들이 들어 높임을 받은 곳 등 으로 이해했다.

오리게네스는, 플라톤적 사랑으로 이해하여 지상적, 육적인 사랑을 멸시할 때 천상적, 영적인 사랑이 가능하다고 하며, 그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짤라버리었다. 초대교회의 거장이었던 그의 이러한 해석은 그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장하기를 토마스 행전에 보면 신적인 존재, 영과 신비스런 결합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성적인 것을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네가 만일 이를 끊어버리면 순수해지고표현되어 있다.

오리게네스는 모든 육적인 것을 배제한 영적노래로 승화시키려 했고, 다른 한편 유대인들의 유비 개념을 이용, 영혼과 λογος를 받아들여 해석했다.

 

예로니모는, 오리게네스의 견해를 따라서 아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결합을 노래한 책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그는 이 책이 육적인 글로 쓰여졌으므로 아가를 영적인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만 읽고 다른 이는 읽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기록을 보면,레시아라는 여인이 예로니모 성인에게 내 딸을 천주께 봉헌하려는데 성서를 어떻게 읽힐까요?” 하고 질문하자 그가 답하기를,

시편에서잠언까지 삶의 지혜를 배우고,

전도서에서 세상을 멸시하는 것을 배우고,

욥서에서 인내를 배우고 난 후,

복음과 행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도록 하시오.

이상이 모든 보배를 읽도록 하고 이것까지를 다 마친 후라면 아가를 읽으라고 하시오.

만일 아가를 맨 처음 읽으면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이익보다는 피해가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테오도르 주교는, 육적인 사랑노래로 이해하였다. 그는 아가를 자의적으로 이해하라고 신자들을 가르친 탓으로 550년 콘스탄틴 공의회에서 단죄받았다. 그 후에 나온 주석서는 다시 우의적 해석을 하기 시작하였고, 만일 이 책의 주제가 겉으로 나타난 것처럼 육적인 것이었다면 어떻게 수천년을 성서로 읽힐수 있었겠는가? 라고 반문하게 되었다.

 

종교개혁가들은 아가서를 자신들의 개혁의지의 합리화에 이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후 우의적 해석을 버리고 다시 자의적 해석(테오도르 노선)을 하기 시작한다. 즉 아가는 파라오의 딸과 솔로몬의 사랑노래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자의적 해석을 바탕으로 그 위에 예형적, 우의적 해석을 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Herder는 명백한 자의적 해석이 중요하다고 주장. 그는, “아가는 진실하고 정의로운 사랑을 묘사한 것이므로 그 가치만으로도 성서에 들어올 충분한 노래이다. 그러므로 이를 우의적으로 엉뚱하게 해석할 수 없다.” 고 하였다.

 

19세기 이후, 점점 자의적 해석의 경향이 커졌다.

 

⑥「꿈이론- 가톨릭사제이며 성서학자였던은 아가서가 38개의 단편들이 모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증거로는 꿈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전개되었음을 든다. 꿈을 꾸는 여자목동은 북부 이스라엘 10지파를 대표하고 신랑은 남부 유다왕을 지칭하며 아마도 히즈키야왕 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히즈키야왕은 재위기간동안 북부 10지파를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결합을 열망했는데 그의 이 열망이 사랑의 노래로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의 미국 성서학자인 B.O. Long은 꿈에 대한 분석을 하여 이 꿈이론을 체계화하였다.

⑦「푸리훅- 이 사람은 3,1을 참조하여 꿈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 3,1부근은 꿈이라고 생각하면 성서가 잘 이해되는 곳이다.

구약의 랍비들은 꿈이 하느님과의 종교현상이라고 하여 꿈에 종교적인 메시지가 담겼다고 말했으며 이런 해석은 상징적으로만 가능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아가서는 아스라엘과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보는 것이 가능했다. 꿈이란 상징적인 표현이고, 내적 갈망의 표현인 바 이 설명 역시 상징적이어야 한다. 꿈에서 논리적 행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프로이드의 꿈해석에 나타나는 상징론이 적용된 것이다.

 

Jacobus, 아가서가 부부간에 사랑을 노래했다기 보다는 부부간에 있어야 할 충실성을 묘사했다고 주장(이 주장은 진스베르그가 지지했다). 아가의 여주인공은 비천한 가문의 묵동으로서 자기와 비슷한 남자를 사랑한다. 정혼을 하려는데 솔로몬왕이 온갖 부귀영화로 유혹하지만 그녀는 자기와 정혼한 목동을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가는 덕스럽고 진실한 애정의 사랑을 묘사하고 정결, 충실성과 부덕을 지키는 진실한 애정의 성공담을 묘사하는 것이다고 주장, 진스베르그는 이런 주장을 답습하여 아가를 주석하며 말하기를, “아가서가 전경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가의 여인이 가진 성실성, 충실성, 여인의 덕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는데, 현대의 여성운동가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서가 아가라는 사실이요상스런 일! 아닌감?

 

결혼주관설1873년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 주제한 독일 영사 Wetʒstein이 시리아들의 결혼풍습을 연구하여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을 아가서 연구에 활용하였다.

시리아에서는 결혼식을 7일간 하는데, 신랑신부는 곡식을 터는 탈곡판위에서 왕과 왕후로의 대관식을 한 후, 신랑 신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로 노래를 불러주는 풍습이 있다. 이 예식을 Wast(바스프)라고 하는데 노래동안 신부는 칼춤을 춘다(7,1참조). 따라서 아가는 당시에 성행했던 축제를 배경으로 한 노래라고 했다.우데라는 학자는 베쩌스타인의 설을 지지했다. 여기서의 문제점은, 아가에서 女人을 여왕으로 부르지 않았다는데 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 신랑에게 왕대접을 해 준 증거가 없다.

한국의 사모관대쓴 혼인왕의식과 같은 맥락.

 

제의적 해석팔레스티나의 신화적 요소를 생각하여 내놓은 학설이다.

중근동에서는 남신태양신- 탐무스 신, 여신달신아쉬타르 신으로 보았는데 달의 여신 아쉬타르가 명부로 들어가서 죽었던 자기 남편 탐무스신을 소생시킨다는 것. 이것은 풍요다산의 제의와 관계된다. 왜냐하면 죽었던 대지에서 생명을 소생시키는 것이 농사이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안으면, 이런 문맥과 같은 사조이다.

여기서 유출되는 제의적 해석이란,

 

신랑신부의 사랑묘사는 고대근동의 풍요다산과 생명력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고대근동의 신들에게 나타난 풍요다산의 제의 때 노래가 아가서와 유사점이 많음을 전제할 때 아가는 제의적 결론을 하여 풍요다산을 비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이것이 성서에 들어온 이유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곳 원주민은 이러한 풍요다산제의를 행하였는데, 다윗은 그들의 전례행위를 인정해 주고 받아주었는데, 솔로몬은 그의 정치적 배려로서 간혹 성전에서도 이 예식을 사용함으로서 원주민들의 문제점, 종교적 갈등을 해소시켜주었으므로 성서에 들어오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이방신의 풍요다산 제의를 이스라엘 제의로 받아들일 때 탐무스신을 야훼로, 아쉬타르신을 이스라엘로 대치하여 전례로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는, 에제8,14. 즈카11. 예레22,18. 34,5. 이사17,7 등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처럼 고대근동의 풍요다산 제의가 O.T.에 들어온 것을 참작하면 N.T.의 그리스도 부활 사건의 뿌리도 O.T의 배경이었던 팔레스티나 원시 풍요다산제의 였던 탐무스의 소생제의식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극단적인 학자도 있다.

 

제일 짧은 책이 제일 많은 말썽과 논란을 일으키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적 해석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와의 영적인 사랑을 말했다고 가르친다(예레5,1-3. v21-33 참조).

이제 구약의 지혜문학 강의도 문을 닫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동안 여러달 저의 졸강을 경청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 졸강은 여러분의 연구 노력을 위한 밑거름일 뿐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로 성서의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무궁 무진합니다. 성서의 말씀으로 스스로의 삶의 양식을 삼고, 여러분이 만날 한 영혼 한 영혼의 성화를 위한 양식으로 제공할 때 하느님나라는 더욱 풍요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년 강의가 저에게 맏겨진다면 더 좋은 강의가 되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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