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1)
예수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1)
-비그리스도교계 문헌-
이홍기(요한)신부․부산가톨릭대학 : 성서와 전례
서론
1.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으로 믿고 공경하는 나자렛 예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소속 종교와 상관없이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가 어떠한 평가를 내리든 예수는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인류 역사는 그의 탄생을 중심으로 하여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뉜다. 그리고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날에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의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인류 가족의 일원이 된 사람으로서 기본 상식을 갖추려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 어느 정도나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한 메시아요 구세주임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우주만물과 인류의 기원이자 최종 목적으로 삼고, 그의 삶을 본받으며,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그들은 이미 예비신자 양성 과정이나 미사 강론 또는 기타 여러 경로를 통해 예수에 관하여 많이 듣고 배웠으며 지금도 배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생애나 가르침에 관해 어느 정도 상세히 알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성서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라는 예로니모의 말에 동의하여 거의 매일 성서를 읽고 열심히 공부하며 가르치는 성서 봉사자들도 정작 성서의 중심 인물인 예수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것밖에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필자는 서울과 부산에서 개최된 성서주간 특별 연수회에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본 글은 바로 이 강의 초안을 일반 신자, 그 중에서도 성서 봉사자들을 위하여 재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이 본래의 목적대로 일반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교리 지식의 폭을 넓혀 주고, 성서를 열심히 공부하는 신자나 성서 봉사자들에게는 복음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자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대중 교육의 목적에 따라 교의신학의 그리스도론 이나 성서학에서 다루는 예수 생애 연구 등의 심오한 이론은 될 수 있으면 피하겠다. 하지만 예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항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학자들의 학설이라 할지라도 가끔 소개하겠다.
2. 예수를 알고 연구하려면 그분에 관한 고대 자료들을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초 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수에 관한 자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상세한 자료는 뭐니뭐니 해도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은 아직도 복음서를 역사적 예수의 실상을 그대로 전하는 예수의 전기 정도로 생각한다. 2천년 전에 팔레스티나에서 살았던 나자렛 예수와 신자들이 성서와 교리에서 배운 신앙의 비 그리스도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여긴다. 하기야 19세기 말엽까지만 해도 일반 신자는 물론이거니와 성서학자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였다
예수 생애에 관한 연구는 18세기 중엽에 라이마루스(+1768)가 시작한 이래 다양한 시각과 관점 아래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시각에 따라 예수는 순수한 인간, 신학적인 인물, 위대한 사상가, 소설의 주인고, 유다 교의 랍비, 이적가, 박애주의자, 혁명가, 유다 종파의 한 지도자 등 여러 형태로 묘사되었다.
그러다가 성서학을 비롯하여 신학의 여러 분야에서 일반 문학과 역사학에서 사용하는 방법론을 응용하면서부터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복음서는 단순한 예수의 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난 세기말에서 금세기를 거치는 동안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은 성서학계는 물론이고 교의신학계의 가장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 덕택에 예수 문제는 복잡다단한 문제를 야기 시키면서도 장족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연구 내용과 결과를 염두에 두고 때로는 참조도 하겠지만, 나자렛 예수의 역사적 실상을 밝히는 데 그 목적을 두지는 않겠다. 많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사실 그대로 밝히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역사적 사실을 전혀 도의시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복음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으로 태어나 지상 생활을 하였던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엮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서의 보도 가운데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많은 내용은 필요에 따라 밝히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나 이 글에서 알리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무엇보다도 사실 보도에 앞서 초대 교회가 믿고 고백한 신앙의 증언이다. 따라서 비록 역사적인 시각에서는 애매 모호한 점이 많더라도 일일이 그 역사성을 규명하지는 않겠다. 이러한 태도가 비록 학문 작으로는 미흡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진리보다도 신앙의 진리라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제1장 기본 자료
나자렛 예수는 2천여 년 전에 팔레스티나라는 우리 나라의 강원도 정도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지역에서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사백여 년 전의 인물이라고 해도 그 생애를 자세히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그토록 오래 전에 살았던 옛 인물을 연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다행히도 예수에 관한 문헌은 그 어느 고대 인물에 비해 월등히 많다. 그 문헌들 가운데 예수 생존 당시나 늦어도 1-2세기경에 기록된 문헌들이 여러 모로 가치가 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예수가 직접 기록한 자서전이나 설교 집 같은 것이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쉽게도 예수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예수 시대와 가장 가까운 1-2세기의 예수 문헌들은 크게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과 그리스도교계 문헌으로 나뉜다.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은 다시금 이방 계 문헌과 유다 계 문헌으로 구분되고, 그리스도교계 문헌은 4복음서가 가장 귀중하고 가치 있는 자료이며, 신약성서의 나머지 책들도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1.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
우리가 그리스도 교의 경전인 신약성서를 두고서 굳이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을 먼저 찾는 것은 이 문헌들이 역사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은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 이도 1-2세기에 쓰여진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은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몇 안될 뿐 아니라 그 내용도 신약성서가 전하는 내용의 극소 부분에 불과하여 사실상 새로운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방 계 문헌과 유다 계 문헌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이방 계 문헌
1) 플리니우스(62-114년) : 로마인으로서 예수에 관해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로마제국의 소아시아 속주인 비티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이다. 그는 112년경에 로마의 트리아노 황제에게 신생 그리스도 교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다. “그들(그리스도인들)은 일정한 날 해 뜨기 전에 모여 마치 신께 하듯이 그리스도께 서로 시가를 읊었음은 인정하였습니다”(편지 10장 96항).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이 편지에는 예수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전혀 없고,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중에 예수를 신처럼 대한다는 사실만 전한다.
2) 따치뚜스(55-117년?) : 로마 황제 네로는 64년에 로마 시를 깨끗이 재건한다는 다소 해괴한 발상으로 불을 질러 시의 상당 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는 이 사건의 여파로 일어난 로마 시민들의 소요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비행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어 교회 박해를 단행하였다. 로마 사가(史家) 따치뚜스는 116년경에 기록한 “연대기”에서 이 사실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그리스도인)의 창시자 이름은 그리스도인데, 그는 티베리오가 통치할 때에 본시오 빌라도 총독에게 처형되었다”(연대기 15장 44항). 이 연대가 역시 별다른 정보는 제공하지 않지만, 예수가 그리스도 교의 창시자이고 티베리오 황제 때에 빌라도 총독에게 처형된 인물임을 밝히고 있다.
3) 수에또니우스(75-150년) : 로마의 왕실 서기였던 그는 120년경에 “열두 황제의 생애”라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이 책의 ‘클라우디오 황제’(41-54년 재위)편에서 황제가 유다 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사실(49-54년)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황제)는 크레스뚜스의 충동으로 계속 소요를 일으키는 유다 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 위에 언급한 따치뚜스 사가도 그리스도인들을 “크레스띠아노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말하는 “크레스뚜스”는 그리스도임이 틀림없다. 로마 당국의 유다 인 추방에 관한 이야기는 사도 18,2에서도 나온다.
2. 유다 계 문헌
1)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39년) : 모든 비그리스도교게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상세하며 가장 중요한 자료는 유다 사가(史家)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집필한 “유다 고대사”이다. 예루살렘의 사제 가문 출신인 그는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체험한 뒤 로마로 가서 ‘플라비우스’ 황제와 친교를 맺으면서 여러 권의 방대한 책들을 집필하였는데, 그 가운데 “유다 고대사”에 들어 있는 예수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 수로 건설로 야기된 논쟁이 있던 당시에 예수라는 한 현인이 살았다. 그는 이적을 행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유다 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그는 메시아였다. 그는 지도자들의 고소로 빌라도 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며,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무리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야고보는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 가운데 예수를 이적가, 스승, 메시아라 부르고 사흘만의 부활을 언급하는 부분들은 4세기 이전의 어느 그리스도교인이 삽입하였다고 주장한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리스도교 신앙 교리와 일치하는 내용은 후대의 삽입 문일 가능성이 크다.
2) 또 하나의 유다 계 자료는 5세기경에 기록된 랍비 문헌 “바빌론 탈무드”이다. 이 책은 비록 후대의 작품이지만 1세기경의 자료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고문헌(古文獻)의 가치가 있다. 이 책에서는 예수가 율법을 비판하고 마술을 익혀 기적을 행하였으며, 자칭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 사람들을 속이다가 유다 최고 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다음 해방절 전날에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는 ‘판테라’라는 군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벤 판테라’(판테라의 아들)라 불렸다고도 한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예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유다 인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내용의 상당 부분이 복음서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는 점은 눈 여겨 볼 만하다. 이상의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에 나타난 예수에 관한 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 문헌은 비록 예수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지만, 분명 그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이 내세우는 가공 인물이라는 가설은 전혀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① 예수는 팔레스티나에서 살았다.
② 예수는 티베리오 황제 때에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았다.
③ 예수는 사형수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④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은 이 종교의 창시자인 ‘그리스도’에게서 생겼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2)
예수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2)
-그리스도교계 문헌-
2. 그리스도교계 문헌
1. 사도 바오로의 편지
예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모든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50년대에 기록된 사도 바오로의 편지들이다. 예수보다 10여 년 늦게 다르소에서 태어난 바오로는 어릴 때부터 율법과 조상 전통에 관해 철저한 교육을 받은 바리사이였다. 그는 예수 생존시에는 예수를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2고린 5,16).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 할 때에 즈음으로 사도행전에 등장한 그는 그 후에 사형수 예수를 메시아로 선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을 섰다.
그는 36년경에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신비한 체험을 한 후에 가장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이자 사도로 탈바꿈하였다. 그는 비록 그리스도를 직접 보진 않았지만 39년경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고, 그 후에도 안티오키아 교회이 지도자 바르나바와 그 곳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예수에 관해 많이 듣고 배웠으며(갈라 1,17-24), 그 과정에서 초대교회의 전승들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로마 12,4 ; 1고린 7,10-11. 9,14 ; 갈라 4,17. 6,2 ; 1데살 4,8).
그는 45년부터 58년까지 세 차례의 기나긴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2차 여행(50-52년경)과 3차 여행(53-58년) 중에 여러 지방 교회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의 대부분이 신약성서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예수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만 언급하기 때문에 그리 큰 도움이 안 된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드문 편이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초대교회를 통해 전승된 예수의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의 편지 가운데 예수의 생애에 관한 주요 구절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태어나셨으며,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의 부활 이후 권능을 지닌 하느님 아들로 책봉되신 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때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으니, 그이는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였습니다”(갈라 4,4).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는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셨습니다”(2고린 5,21).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친절하심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2고린 10,1).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8).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1고린 2,2).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묻히셨으며, 또 성경(말씀)대로 사흘만에 일으켜지시고, 게파에게, 다음에는 열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1고린 15,3-5).
2. 복음서
앞에서 말한 대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권위 있는 문헌은 4복음, 그 중에서도 공관복음서이다. 그런데 위의 서언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 알려 주는 예수 전기나 역사서가 아니다. 이 책들은 전기나 역사서 에서 중시하는 예수의 출생, 교육, 외모, 성격, 가족 배경 등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복음은 일반 전기에서 흔히 중시하는 예수의 외모, 머리 색깔, 눈매, 신장, 의복 등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복음의 주된 관심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서 시작하여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이다.
예수의 활동 연대조차 정확히 알리지 않는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고서 예수가 언제, 어디서, 무슨 활동을, 어떻게, 왜 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복음서를 바탕으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사실 그대로 재구성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복음서는 예수께 대한 초대교회의 믿음을 증거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심어 주는 책이다. 곧 랍비이자 예언자였던 나자렛의 예수의 활동․가르침․수난과 부활 사건을 전하면서,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주님임을 선포하고, 공동체에 예배 안에 현존함을 밝히는 책이다. 따라서 복음서를 읽을 때에는 최소한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미리 알아두어야 한다
1) 형성 과정 : 복음서는 모두 다음과 같은 형성 과정을 거쳐 책이 되었다. 예수가 부활․승천한 후에 사도들은 그의 전도 명령에 따라 사방에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은 선포하였다. 그들의 설교와 활동으로 많은 유다 인과 이방인이 믿고 세례를 받아 신앙 공통체인 사도 교회를 형성하였다. 이 공동체는 자주 모여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점차로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예수 전승(傳承)이 글이 아닌 말의 형태로 형성되었다.
우리는 이 전승을 구두 전승(口頭傳承)을 이루었고, 그 일부분은 구두 전승과 함께 몇몇 사람들의 노력으로 집성되기 시작하였다. 집성된 전승을 종류별로 보면 예언집, 비유집 등 부피가 작은 문서와 예수 어록집, 수난기 등 소책자 형태 등이 있었다. 복음서들은 복음사가들이 바로 이러한 전승 집들을 기본 자료로 하여 편집한 책들이다.
2) 복음서의 구조와 형식 :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책은 70년경에 기록된 마르코 복음서이다. 그런데 이 복음서의 저자 마르코는 그가 수집한 전승들을 당대의 집필 관습에 따라 예수 전기 형식으로 엮으면서도 세계 문학사상 전대미문의 ‘복음서’라는 새로운 유형의 책을 펴냈다.
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는 대뜸 세례자 요한의 활동으로 시작하여 갈릴래아 지방에서 출발하는 예수의 공적 활동으로 이어진다. 예수의 공적 활동도 주로 이적 행위와 사람들을 가르치는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예수의 활동은 그 후에 여러 지역의 여행으로 계속되다가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으로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은 빈 무덤과 부활한 예수의 발현 이야기로 급작스레 끝나버리고 만다.
마르코 복음이 나온 지 십여 년이 지난 뒤인 80년대에 가서 또 다른 복음사가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 복음과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예수의 어록 집” 및 그들 자신이 각자 별도로 수집한 자료들을 가지고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을 펴냈다. 그들은 책을 편집할 때에 기본자료인 마르코 복음의 구조와 형식과 내용을 따르면서도 자신들의 사상과 독자들의 상황에 맞추어 삭제, 변경, 해설 등 가필을 하여 또 다른 형태의 복음서들을 펴냈다.
한편 1세기 말경에 나온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이 취한 예수의 전기 형식을 따르지만 그 구조나 형식 등 여러 면에서 공관복음과 상당히 다르다. 이를테면 이 복음에서는 예수가 적어도 세 번 아니면 네 번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공관복음에 없는 내용도 가끔 나온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윤곽이나 주제는 공관복음과 대동소이하다.
모든 복음은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어 지상 생활을 하였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한 후 승천하였음을 주제로 삼고 있다. 특히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복음서들의 핵심 주제이다. 그러면서도 각 복음서는 고유 신학과 사상 등 특징을 지니고 있다.
3) 문학 양식 :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각 항목의 문학 양식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 양식을 제대로 모르면 예수의 말씀이나 행적에 간한 항목을 사실 보도 문으로만 생각하여 그릇된 해설을 하기 쉽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복음서는 예수의 전기 형식을 띠고 있지만 전기가 아닌 복음 유형의 책이다. 그뿐 아니라 복음서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항목들도 다양한 문학 양식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를 읽을 때에는 이러한 양식들을 파악해야 그 주제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복음서의 문학 양식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 몇 가지 사항은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다. 특히 복음서의 상당 부분이 당대 유다 문학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럼 먼저 예수 행적 항목의 대표적인 양식을 살펴보자.
① 이적 사화(異蹟史話) : 복음서에는 이적 사화가 상당히 많은데 이들 대부분이 당대의 유다 및 그리스 이적 사화를 닮았으며, 흔히 일정한 도식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사화의 종류에 따라 어떤 것은 예수의 말에, 어떤 것은 예수의 행적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모든 이적 사화는 예수의 신분이나 초자연적 능력을 알리고, 그를 통해 구원이 시작되거나 실현되었음을 증언한다.
② 그리스도 사화 : 복음서의 어떤 부분은 예수의 행적이나 사건을 신화나 전설 형식으로 전한다. 탄생, 어린 시절, 세례, 유혹, 부활 후의 발현 등의 이야기가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이런 이야기는 주로 예수의 특별한 신분과 절대적인 영광을 부각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를 초대교회의 신앙의 관점에서 묘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사화라고 한다.
③ 단순 사화 : 헤로데의 죽음, 요한의 순교 등과 같이 어떤 사건을 단순한 보도 형식으로 전하는 이야기이다.
④ 수난 사화 :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긴 사화는 수난 사건을 매우 상세하게 예수 수난기 형식으로 전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수난의 구원사적 의미를 제시하는 데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담은 말씀 항목 역시 유다 문학 양식을 따르고 있다.
① 율법 말씀 : 대부분 실생활과 관계되는 규범, 지침, 규정들로서 구약 율법 양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율법 말씀이라고 한다.
② 예언 말씀 : 구약 예언서처럼 하느님의 축복이나 저주를 선언하거나 그와 비슷한 어투로 청중을 위로하거나 경고하는 형식의 말씀이다.
③ 지혜 말씀 : 구약성서나 랍비 문학에서 흔히 나오는데, 격언이나 속담 형식의 짤막한 말씀으로 기억하기 쉽다.
④ 비유 : 공관 복음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어떤 진리나 의미를 일상 생활이나 자연 가운데서 소재를 취하여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양식을 말한다.
⑤ 그리스도 말씀 : “나는 왔다”, “나는 - 이다” 등과 같이 예수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자각하고 하는 말씀이다. 예수께 대한 초대교회의 믿음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⑥ 추종 말씀 : 예수와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과 나눈 대화 형식의 말씀이다. 이 내용의 비중이 사건에 있을 때엔 소명사화라고 한다. 예수의 부름과 제자들의 추종을 크게 부각시킨다.
⑦ 논쟁과 대담 : 논쟁은 예수와 반대자들 사이에 이의나 반론을 제기하는 형식의 말이고. 대담은 예수의 제자 또는 그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과 나눈 대화이다. 두 양식은 대체로 상대의 질문, 예수의 재 질문, 상대의 대답, 절정을 이루는 예수의 마감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3)
예수 시대의 정치 세력
1. 로마 제국
예수 시대의 팔레스티나는 로마 제국의 작은 식민지였다. 기원전 6세기말에 로마의 티베르 강변의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는 그 후 현재의 유럽 지역의 대부분과 지중해를 장악한 다음 기원전 63년에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수중에 넣었다. 한편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을 지배하던 그리스의 헬라 문화와 종교 동화 정책에 반발하여 저항 운동에 승리를 거둔 마카베오(하스모네오) 가문이 일시적인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그 후에 내부의 왕권 다툼으로 로마의 도움을 청하였다가 기원전 63년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자초하고 말았다.
예수 시대의 로마 제국은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뚜스(기원전 27-14년)와 티베리우스(14-37년) 두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동방의 로마 속국 지역에서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야 했다. 두 황제는 기나긴 집권기간이 시사하듯이 제국의 정치적인 안정을 정착시켜 평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정치, 경제, 영토 등 여러 분야에서 제국의 번영과 평화를 이루어 ‘조국의 아버지’라 불리었고, 황제의 대명사격인 ‘아우구스뚜스’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이 칭호는 후에 역대 황제들의 공식 칭호가 되었으며 ‘빡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 평화)’ 라는 말은 그와 연관되어 생긴 말이다. 그는 재임시에 한 번도 팔레스티나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그의 권한은 헤로데 대왕과 유다의 로마 총독이 대행하여 영향을 끼쳤다. 예수는 바로 그의 재임시에 탄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후임인 티베리우스 역시 평화의 군주였다. 그러나 재임 후기에 가서는 대인 기피증에 시달려 시골이나 카프리섬에 은둔하다시피 하여 황제 권한을 약화시켰다. 빌라도는 그의 재임시에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재의 15년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루가 3,1).
2.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
그는 이두메아인 안티파텔과 아랍 군주의 딸 사이에 태어난 이두메아 출신의 비 유다 인이었다. 그는 하스모네오 가문이 권력 투쟁을 하는 동안에 로마 황제의 환심을 샀다. 그는 로마 군대의 지원을 받아 3년 간 유다 민족주의자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기원전 37년에 이두메아,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 베레아 지역을 통치하는 유다 왕이 되었다. 로마에 충성을 다하여 막강한 로마 황제의 후원을 얻은 그는 ‘로마 백성과 친밀한 왕이며 친구’로 불리었다. 그는 대사제를 임명하고 최고의회의 권한을 제한하는 등 독재를 일삼고, 수많은 가족과 친인척을 서슴지 않고 처형하는 폭군이었다. 유다 왕국을 솔로몬이래 가장 큰 국가로 만든 정복 가였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개축, 안토니오 요새와 궁전, 세바스떼와 신에리고 건설 등 많은 건물과 도시를 세운 위대한 건설 가였다. 그는 기원전 4년 3월 27일과 4월 11일 사이에 예리고에서 죽었다. 예수는 그의 통치 말년에 탄생하였다.
3. 헤로데의 아들들
헤로데 대왕이 죽자 로마는 헤로데의 유언에 따라 팔레스티나를 세 지역으로 나누어 헤로데의 세 아들들이 통치하게 하였다. 로마는 그들을 왕이 아닌 지방 군주로 임명하였다. 로마 제국은 많은 속국 가운데 비중이 큰 나라의 통치자는 왕으로 임명하고, 비중이 작은 나라의 통치자는 ‘족장’ 또는 ‘사분영주(四分領主)’ 로 임명하였다.
1) 아르켈리우스(기원전 4년 - 서기6년) : 유다와 사마리아의 이두메아의 영주였던 그는 부친을 닮아 폭정을 일삼다가 유다 지도자들의 탄원으로 재위 9년에 갈리아 지방 비엔나로 유배당하였다. 예수의 양부 요셉은 그의 잔인함을 알고서 그를 피해 갈릴래아로 갔다고 한다(마태 2,22). 루가 19,11-27의 돈 관리에 대한 비유는 그의 왕위 획득을 위한 로마 여행과 귀환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 통치하던 지역은 후임자 없이 로마 지방 총독이 직할 통치하였다(루가 3,1).
2)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 - 서기 39년) : 갈릴래아, 베레아 (동 요르단 지역) 등지의 사분영주(四分領主)였던 그를 복음서에서는 단순히 헤로데라고 불러 그의 부친과 혼동하게 한다. 그는 예수 고향 지역의 영주였기 때문에 복음서에 자주 등장한다. 그도 부친처럼 티베리아와 세포리스 건설 등 건설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이복형인 헤로데 필립보(사분영주가 아님)의 아내 헤로데아를 부인으로 삼았다가 세례자 요한에게 질책을 받았으며, 결국 요한을 투옥하였다가 처형하였다(마르 6,17-29). 예수 수난 시에는 빌라도가 예수를 고향 영주이자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로데에게 보냈지만. 헤로데는 별 죄목을 발견하지 못하고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냈다. 그는 말년에 헤로데 아그리빠 1세의 고발로 리용으로 귀양갔다.
3) 필립보(기원전 4년 - 서기 34년) : 비유다인 지역인 동 요르단의 바타네아, 골라니티스, 드라코니티스, 파네아 등 북동 지역의 사분영주였던 그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평화롭게 통치한 군주였다. 재위 기간에 가이사리아 필립보와 베사이다 율리아스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예수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무렵 가이사리아 지방에 있었다(마태 16,3).
4. 로마 총독
로마 황제는 서기 6년에 아르켈라우스를 폐위시키고, 그가 관할하던 지역을 로마 총독이 직접 통치하게 하였다. 총독은 3천여 명의 치안을 유지하는 군대를 거느린 행정 수반으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총독은 지중 해안의 가이사리아에 상주하였으나 축제 등 특별한 시기에는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치안 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정책에 따라 유다 종교와 율법을 세심할 정도로 존중해 주어, 소요의 위험이 없는 한 율법과 종교, 산헤드린과 사제들의 활동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총독에 따라 때때로 무시되어 유다 인들과 심한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1) 역대 총독 : 예수 시대에는 초대 총독 코포니우스로부터 5대 빌라도까지 5명의 총독이 통치하였다. 이들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는 대강 짐작만 할 뿐 정확한 연대는 모른다. 대체로 1대 총독 코포니우스는 6년부터 9년까지, 2대 암비불루스는 9년부터 12년까지, 3대 루푸스는 12년부터 15년까지, 4대 그라뚜스는 15년부터 26년까지, 그리고 5대 총독 빌라도는 26년부터 36년까지 재직한 것으로 추산한다.
초대 총독 코포니우스는 취임 직후에 세금 징수를 위해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이 호구 조사는 루가복음(2,1-2)이 전하는 예수 탄생시의 호구 조사와는 연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2-3대 총독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다. 4대 총독 그라뚜스는 11년간 재직하면서 4명의 대사제를 교체하였다.
2) 빌라도 총독 (26-36년) : 5대 총독 빌라도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정책에 따라 전임 그라뚜스 및 후임 마르첼루스와 함께 가장 오래 재직한 총독 중의 한 사람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완고하고 권세를 잘 부리며 뇌물을 좋아하고 포악하며 거만하고 화를 잘 내며 무섭도록 잔인하였다고 한다. 재임 초기에 유다 종교와 율법을 무시하여 황제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갔다가 군주의 저항에 못 이겨 군기를 치우기도 했다.
플라비우스 요셉은 그가 예루살렘의 수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성전 끔을 압수하였을 때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또 루가 13,1에서는 그가 성전 구역 안에서 제사를 지내던 갈릴래아 인들을 살육하였다고 한다. 그는 예수의 무죄를 알고서도 군중의 소요를 두려워하여 사형 선고를 내리고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36년에는 그리짐산에서 거짓 메시아의 선동으로 집결한 군중을 무차별 체포 살육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고발되어 로마로 불려 간 뒤에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스도 교 전설에 따르면 빌라도는 네로 황제 시대에 자살하였거나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역사적 신빙성은 없다.
5. 대사제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은 신정왕국(神政王國)이었기 때문에, 대사제는 총독이나 왕 등 집권자를 제외하곤 백성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대사제의 복장은 유다 종교와 유다 인들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임명하신 봉사자로 간주되었기 특별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의 날에 혼자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바쳤으며, 안식일과 매월 초하룻날과 삼대 순례 축일을 비롯하여 큰 모임이 있을 때에도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고 예배를 주관하였다. 그는 또한 율법과 성전을 보존 관리하는 책임자였으며,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장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유다 종교의 대표자였기에 봉헌물 중에서 가장 좋은 몫을 차지하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윤택한 생활을 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전임 대사제나 대사제 가문의 사람들도 대사제로 불리곤 했다. 특히 전임 대사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예수 재판 때에 안나스가 그런 경우이다(요한 18,13. 24).
예수 탄생 시에는 헤로대 대왕이 임명한 시몬이 대사제였다(기원전 24-5년). 헤로데는 죽기 전에 시몬을 면직하고 마티아스를 대사제로 임명하였다. 그를 포함해 예수 생전에 12명의 대사제가 재직하였는데, 어떤 이는 한 번의 축일 행사로 물러나고, 또 어떤 이는 두 번이나 대사제가 되기도 했다. 복음서에는 안나스와 가야파만 등장하는데, 이 두 사람 사이에 세 사람의 대사제가 있었지만 모두 1년씩만 봉사하다가 물러났다. 안나스는 로마 총독이 임명한 첫 번째 대사제였다. 그의 가문은 네 아들이 차례로 대사제가 될 정도로 대표적인 대사제 가문이었다. 루가 3,2에는 안나스가 현직 대사제 직에서 이미 물러나 있었다. 가야파(18-37년)는 예수의 처형을 주도한 대사제이다. 그는 안나스의 사위인데, 요한 18,13에서는 그를 그 해의 대사제로 소개한다. 그런데 ‘그 해’가 대사제의 임기가 1년임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6. 산헤드린(최고의회)
동석(同席, Synhedrion)이라는 뜻을 지닌 산헤드린은 유다 교 최고 의회 및 대법원이었다. 그 구성원은 의장인 대사제를 비롯하여, 전직 대사제, 사두가이 계통의 귀족 원로, 주로 율사 출신의 바리사이 등 71인이었다. 70인은 민수11,16의 모세의 협조자였던 원로 70인과 관련이 있다. 이 의회는 율법에 관한 모든 사항을 의결하고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사실상 유다 인들의 종교와 일상 생활 대부분에 영향을 끼쳤고, 이 의회의 결정은 거의 율법으로 간주되었다. 헤로데 대왕은 의회의 권한을 대폭 제한하였지만, 로마 총독들은 오히려 특별한 경우 외에는 간섭하지 않을 정도로 그 권한을 인정하였다.
산헤드린은 민사 및 형사 재판권과 집행권도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 총독들은 의회의 결정과 관계없이 언제든지 권력 행사를 할 수 있었다. 산하에 경찰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경우처럼 체포, 구금 등 일정한 범위 내에서 형 집행도 하였다. 회의는 의장이 소집하였으며, 안식일이나 축일에는 회의가 없었다. 예수의 재판에 관해 각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사항은 산헤드린에게 사형 언도 및 집행권이 있었느냐 하는 점인데, 이에 관해서는 뒤의 수난기 편에서 다시 설명하였다. 아무튼 이 의회는 예수를 체포 심문하고 사형수로 판결하여 빌라도에게 넘겼다.
그 외에 각 지방에서는 23인으로 구성된 소 산헤드린이 있어 지방 사건을 심의 처리하는 등 지방 법정 구실을 하였다(마태 10,17). 그러나 중대한 사건의 경우에는 소 산헤드린이 직접 처리하지 않고 중앙 산헤드린으로 이송하였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4)
예수 시대의 종교적 배경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작은 소국에 불과하였지만, 종교적으로는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의 사회와 문화 등 모든 생활을 지배하는 구심점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으며, 이 믿음을 떠받치는 기둥은 율법과 조상 전통, 예배, 그리고 각종 종교 단체였다. 이들 요소는 유다 인들의 종교생활 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1. 율법과 조상 전통
(1) 유다 인들은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를 하느님의 말씀, 곧 성서로 간주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율법서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율법서를 비롯한 성서 전체는 하느님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수록한 책이며, 유다 인들은 이 말씀을 종교 생활과 사회 생활의 최고 규범으로 받아들였다. 성서는 그들에게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느님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율법(토라)이라는 말 자체를 하느님의 이름처럼 경건하게 대하였고, 그 누구도 함부로 다른 말을 첨가하거나 삭제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성서를 예배 때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자주 봉독 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듣고 연구하였으며, 반드시 거룩한 장소에 보관하였으며, 폐기할 때에는 성서 두루 마리를 항아리에 넣어 은밀한 곳에 숨겨 두었다. 그 덕택으로 우리는 사해 근처의 꿈란 동굴에서 기원 전후에 쓰여진 수많은 성서 필사본을 발견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2) 그런데 율법의 상당 부분이 일반 규정만 제시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밝히는 해설과 그 정신을 바탕으로 구체적 환경에 적용하는 세부 지침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해설과 그 정신을 바탕으로 구체적 환경에 적용하는 세부 지침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해설과 지침은 초기에는 대부분 구두 전승으로 전해지다가 차츰 문서화되었다. 유다 인들은 이 해설과 지침들을 통틀어 조상 전통이라 불렀으며, 이를 기록한 책들을 “미쉬나”라고 하였다. 조상 전통 가운데 율법에 관한 세부 지침을 살펴보면, 명령 248게 항과 금령 365개 항 등 모두 613개항이나 되었다.
유다 인들은 이 지침들을 율법에 버금가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여 준수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 규정이 너무 많고 까다로워 전부 다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완전하게 지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외적이고 형식적인 준수, 곧 하느님의 뜻보다는 지침의 말마디에 얽매이는 사례가 허다하였다.
예수는 율법을 주신 하느님의 뜻은 외면하고 형식적인 계명 준수에 급급한 유다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율법과 조상 전통 가운데 예수 시대의 유다 인들이 특별히 중시한 요소를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안식일 : 유다 인들은 율법 규정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았으며, 이날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든 일에 손을 놓고 철저하게 쉬었다. 본래 고대 원시 사회에서 생겨난 안식일이 왕국 시대에 들어서는 이집트 탈출 사건과 연결되어 선민 기념일, 하느님이 마련하신 거룩한 날, 계약의 표지등으로 정기적인 주간 종교 축일이 되었다. 이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전이나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거나 성서 봉독과 공부, 기도 등으로 하루를 거룩하게 지냈다.
그런데 예수 시대에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 너무 많고 외적인 준수에 치우쳐 본 뜻을 많이 상실하였다. 안식일에 대한 금령을 예로 들면 39가지나 되었는데, 농사를 비롯한 모든 육체 노동, 음식을 만드는 일, 긴 여행 등이 모두 금지 항목에 속했다. 예수는 이러한 맹목적인 안식일 준수 규정이 하느님의 뜻을 흐리게 한다고 보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는 랍비들의 가르침을 들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일깨웠다(마르 2,27).
2) 할례(割禮) : 예수 시대의 모든 남자 아기는 태어난 지 8일만에 성기의 외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받았다. 유다 인들이 이집트에 체류할 때에, 또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 도입한 것으로 보이는 이 할례는 차츰 종교적 예식으로 변하여 계약과 선민의 표지가 되었다. 예수 생전에는 할례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사도 시대에는 유다계 신자와 이방게 신자들이 이 할례 문제로 자주 마찰을 빚었다. 사도 바오로는 할례를 요구하는 유다계 지도자들에게 맞서 마음의 할례인 믿음을 강조하였다(갈라 5,6 ; 골로 2,11).
3) 정 결 : 하느님의 선민(選民) 의식이 투철했던 유다 인들은 거룩하신 하느님을 본받는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자연히 사람을 더럽히는 모든 부정한 행위나 사물을 멀리 하였고, 여기서 많은 정결 규정이 생겨났다. 이를테면 이방인이나 나병 등 특별한 병에 걸린 사람 접촉, 시체 접촉, 부정한 자와의 성교 등을 금지하는 규정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부정을 벗는 정결에도 예식도 다양하였는데, 예를 들면 산모는 남아를 낳았으면 40일 간, 여아의 경우에는 80일 간 정결 예식을 거행해야 깨끗하게 되었다(루가 2,22-24). 예수는 외적인 정결보다는 내적인 정결을 강조하였다(마태23장 ; 마르7,1-13 등).
2. 예배
(1) 성전 : 유일신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은 자연히 예루살렘 성전을 그들의 하느님께 맞 갖은 제사를 바치는 유일하고도 합법적인 장소로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성전이야말로 하느님의 현존과 보호의 장소요 표지였다. 따라서 성전은 국민 생활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 당시의 성전은 바빌론 유배 후인 515년경에 신축한 두 번째 성전이었는데,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0/19년에 개축을 시작하여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 성전은 64년에 가서야 완공되었지만 70년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 성전에서는 날마다 아침(해 뜬 직후)과 이른 오후에 제사를 바쳤다. 예수 시대에는 여기에 로마 제국과 황제를 위한 제사도 추가되었다.
그 외에도 해방절, 오순절, 초막절 등 주요 축일과 매달 초하루와 안식일 등에는 축일 예배를 거행하였다. 모든 유다 인은 성인이 되면 어디에 살든지 삼대 순례 축일(해방절, 오순절, 초막절)에 성전을 방문해야 했으며, 스무 살 이상의 어른은 1년에 한 번 성전 세를 바쳐야 했다. 예수는 이 성전에서 마지막 활동을 하고, 이스라엘의 형식과 위선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였으며, 당신 자신을 새로운 성전으로 내세웠다.
(2) 시나고가(회당) : 집회라는 의미를 지닌 시나고가는 바빌론 유배 중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데, 예수 시대에는 대부분의 도시와 큰 마을에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수십 여 회당이 있었다. 대부분의 유다 인들은 안식일과 축일이 되면 시나고가에 가서 기도, 성서 봉독, 강론 등으로 진행된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였다. 성전과는 달리 시나고가 에서는 제사를 바치지 못하였다. 후대에서는 시나고가 예배가 월요일과 목요일에,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매일 거행되었다.
(3) 종교 축일 : 성전과 시나고가가 유다 인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 장소였다면, 일년 중에 계절에 따라 맞이하는 축일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을 계속 이어주는 고리였다. 주요 축일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해방절 : 초봄 3-4월 무렵에 오는 해방절(니산달 15일)은 과거의 이집트 해방을 기념하고 미래의 완전한 해방을 기원하는 가장 큰 축일이었다. 유다 인들은 이 축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대부분 예루살렘으로 가서 해방절 만찬 등 축제 행사를 거행하였다. 공관복음의 보고에 따르면 예수는 해방절 만찬 중에 새로운 해방과 계약의 기념제인 성체성사를 제정하였다.
2) 오순절 : 해방절이 지난 다음 50일 만에 맞는 오순절은 봄의 수확 축제로서, 이날 역시 대부분의 성인 남녀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그 해에 수확한 첫 곡식을 예물로 봉헌하고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과 맺은 계약과 율법을 기념하였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날에 성령이 강림하였다고 보고하는데, 이것은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계약 공동체인 교회가 탄생하였음을 암시한다.
3) 초막절 : 이 축일은 원래 10월 중순에서 11월 초순 사이에 맞는 가을의 수확 축제(포도, 올리브 등)였으나, 예수 시대에는 광야 체류가 가나안 점령을 기념하는 축일이었다. 많은 유다 인들, 특히 사제들은 이 때에 예루살렘에 가서 한 주간 동안 천막 생활을 하면서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회상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매우 성대한 대중 축제가 되어 단순히 축일이라 불리기도 했다.
4) 대 속죄일(욤키뿌르) : 초막절에 닷새 전에 거행된 대 속죄 일로 이 날 백성들은 단식을 하고 속죄의 제사를 바치며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였으며, 대사제는 일년 중에 오직 이 날에만 흰옷을 입고 지성소에 들어가 짐승의 피를 바쳐 자신과 사제들과 백성이 지은 죄를 속죄하였다.
5) 새해 : 고대 유다 인 달력에서는 가을에 새해가 시작되었으며 그 시기는 8월 중순과 9월 중순 사이(대 속죄일 열흘 전)였다. 그들은 이 날 또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느님의 즉위도 기념하고 그분의 종말 심판을 기다렸다고 하는데 축일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6) 성전 봉헌 축일 : 기원전 164년에 마카베오는 그리스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날은 그 때에 속화된 성전을 정화한 사건을 기념하는 축일이었다.
(4) 일상 종교 생활 : 유다 인들은 성전이나 시나고가에서 거행되는 공적인 예배 외에도 일상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다졌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는 가정에서도 온 가족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안식일 등불을 켜고 안식일을 맞는 종교적 식사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안식일 당일에는 성서 봉독, 기도, 자선 등으로 하루를 거룩하게 지냈다. 그들은 평일에도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정해진 기도(세마, 세모네 에츠레)를 바칠 뿐 아니라, 식사 전후나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중요한 일을 시작하거나 마칠 때 등 하루에도 여러 번 기도하였다.
더 나아가 바리사이를 비롯하여 열심한 사람들은 기도 띠를 이마나 가슴에 두르고 다녔으며, 길을 가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그 자리에 서서 기도하였다.
예수는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이러한 과시용 기도를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였다(마태 6,5-6). 유다 인들은 또한 자주, 특히 축일에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하였고, 가끔 단식 등재를 지킴으로써 잘못을 속죄하였다. 바리사이들의 경우에는 일주일에 두 번(화, 목요일) 단식하기도 하였다(루가 18,12). 예수는 이러한 자선, 선행, 단식 등이 남의 눈을 의식한 위선 행위가 되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5) 종교 봉사자 : 유다 사회가 이렇게 종교 사회이다 보니 성전과 예배 등에 봉사하는 조직적인 단체가 율법과 조상 전통의 규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사제 : 당대의 사제 수는 70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사제들은 24개조로 나뉘어 차례로 성전을 관리하고 예배에 봉사하였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각 조별로 한 주간씩 일 년에 두 번 정도 봉사하였다. 그 외에도 사제들은 사람들의 자문에 응하고 지방 법정에서 재판을 담당하거나 재판석상에서 증언을 하였다. 그들은 백성들이 바치는 제물의 한 부분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일반적으로 필사, 상업 등 다른 부업을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에 인접한 도시 예고는 사제 도시라고 불릴 만큼 많은 사제들이 살았다.
2) 레위인 : 성직 계급의 최하위층에 속하는 레위 인들은 이론적으로는 사제 가문인 레위지파의 후손들이었지만 예수 시대에는 하급 성직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숫자는 만여 명되었으며 사제들처럼 24개조로 나뉘러 한 주간씩 일 년에 두 번 성전에서 봉사하였다. 주된 업무는 예배 중의 성가, 악기 연주, 수위, 기타 사제들을 돕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율법에 규정된 봉헌 물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매우 가난하였다.
3) 서기관(랍 비) : 성서와 율법 선포 자, 율법 스승 등으로 불리던 서기관은 율법과 스승 등으로 불리던 서기관은 율법과 조상 전통을 중시하던 유다 사회의 전문가였기에 그 비중과 활동이 상당히 컸다. 사제나 일반 백성이나 누구든지 서기관이 될 수 있었지만, 몇 해 동안 율법 전문 교육을 받아야만 정식으로 율사 또는 랍비 칭호를 받았다. 그들은 전문가 자격으로 정치나 법정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고문 역할을 했고, 산헤드린의 구성원이 되기도 했다.
또 율사 복을 입고, 모임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하고 길에서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율사 중에는 바리사이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복음서에는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종종 같이 등장한다. 그들은 일반 대중을 율법을 모르는 ‘땅의 백성’이라고 하며 무시하였지만, 군중들은 그들의 권위를 존중하였다.
3. 종교 단체
유다 교 안에는 숫자로나 사회적 역할로나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러 단체가 있었다. 신약성서에는 바리사이, 사두가이, 열성당 등이 등장하며, 플라비우스 요세프는 신약성서에 등장하지 않는 에세니도 추가로 소개한다.
(1) 바리사이 :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에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재건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 시대에 율법과 기도 등으로 이스라엘의 영성 쇄신을 주장하던 ‘하씨딤(경건한사람들)’ 이 아마도 바리사이의 선구자들이었을 것이다. 이 가문이 대 사제직과 왕직을 겸직하자 속화되었다 하여 이탈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6000여 명의 바리사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제자들과 동조자들까지 합하면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구성원은 기술자, 농부, 상인 등 대부분 일반 백성이었으나, 사제와 율사 등도 적지 않았다.
이 단체는 율법과 조상 전통을 올바로 알고 철저히 지키는 것을 신조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일상 생활과 삶 자체를 성화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백성을 가르쳐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것을 주요 목포로 삼았으나, 일반적으로는 율사들처럼 율법을 잘 모르고 제대로 지키지도 않는 백성을 무시하였다.
반면에 백성은 그들의 권위를 존중하였기 때문에 사두가이 등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지나친 율법 지상주의는 권위, 형식, 위선에 흐르는 경향이 많아 예수는 그들의 가르침을 본받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하였다(마태 23,16-33). 게다가 안식일, 정결, 단식 등에 관한 제반 규정을 소흘이 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예수의 태도가 그들의 눈에 좋게 보였을 리 없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보호하는데 기여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의 일부는 예수와도 친교를 가졌으며(루가 7,37), 헤로데가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알려 주기도 하였다(루가 13.31).
(2) 사두가이 : ‘사두가이’라는 명칭은 다윗 시대에 살았던 사제 ‘사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2사무 15,24).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도 바리사이와 비슷한 시기인 마카베오 시대에 등장하여 초기에는 마카베오 가문의 속화에 바리사이와 힘을 합하여 항거하였지만, 점차로 권력층에 밀착하여 바리사이와 대립 관계에 서게 되었다. 그 구성원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그들 가운데는 사제와 산헤드린 회원도 있었으며, 대사제 가문과 인연을 가지는 등 귀족층에 속했다.
사두가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로마 통치에 적극 협조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주의자들이어서 바리사이와는 달리 성서, 그것도 주로 율법서만 인정하고 조상 전통은 배격하였으며, 죽은 이의 부활과 사후 생명, 천사, 신의 섭리, 종말 심판 등을 부인하였다. 대중과의 접촉이 많지 않아서인지 예수 활동 초기에는 사두가이 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았지만 차츰 바리사이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예수 체포 음모에 적극 나섰고, 그들의 대표 격인 가야파는 예수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3) 에세니 : 신약성서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에세니’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를 통해 알려진 단체이다. 그들도 초기에는 바리사이와 같이 마카베오 가문의 속화 정책에 반대한 경건주의 자들이었던 것 같다. 예수 시대에는 4000여 명 정도가 있었는데, 주로 시골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 일부는 사해 서안(西岸)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기도 율법 공부, 노동 등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였으며, 성전 예배에는 속화되었다고 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새 계약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등 철저한 선민 사상에 젖어 속된 사람들과 떨어져 살았다. 나아가 세상을 선 신과 악신, 빛의 군주와 악의 군주의 싸움터로 여겼으며, 종말에는 빛의 군주가 승리한다고 믿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단체가 꿈란 유적지에서 발견된 꿈란 공동체와 동일한 단체라고 보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 업다.
(4) 열혈당 : ‘젤로띠’라고 불리던 이 열혈당은 바리사이의 좌파에 속하지만, 그 활동을 보면 종교 단체라기보다는 로마 식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애국 저항 단체였다. 이 당도 단체로서는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고, 단지 예수의 제자 시몬이 열혈당원이라 불리었다는 사실만 전한다(루가 6,15). 아마도 그는 실제로 열혈당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당의 창시자는 1대 총독 코포니우스의 세금 징수를 위한 인구 조사에 반대하여 서기 6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가릴래아 출신의 유다 였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구호 아래 로마의 식민 통치와 남세 행정 등을 반대하고, 친 로마주의자들에게 테러, 방화, 살육 등을 서슴치 않았다.
아마 그들은 예수의 설교를 듣고 그들의 혁명 과업을 주도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66-70년의 유다 독립 전쟁을 주도하고 마싸다 요새에서 3년 간 저항하다가 대부분 살해되고 말았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5)
예수의 탄생에서 공생활 전까지
1.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
4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집필된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 및 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30여 년간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는 일체 말이 없고, 대뜸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예수의 세례 및 유혹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마르코 저자가 초대 교회의 전승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만큼 초대교회가 선포한 복음은 예수의 공생활과 수난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이전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차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자 80년대에 이르러 마태오와 루가는 이러한 관심을 복음서에 반영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 1-2장의 이른바 유아 사(幼兒 史) 또는 전사(前史)를 통하여 예수의 탄생과 나자렛 시절에 관하여 몇 가지 안 되지만 매우 귀중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두 저자는 이 유아 사를 각각 별도의 전승들을 수집하여 작성하였다.
이 유아 사에서는 복음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예수의 기원과 신분과 미래의 사명 등에 관한 신학에 치중하고 있으며, 전기 형식의 보도에는 별 관심이 없다. 곧 유아사의 주제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약속된 메시아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으로 탄생하였으며, 처음부터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구원자의 길을 걸어갔음을 밝힌다.
(1) 탄생연도 : 대부분의 고대 위인들의 경우와 같이 예수의 생년월일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전혀 없다. 단지 유아 사는 예수가 아우구스뚜스(옥따비아누스) 황제 때에, 헤로데 대왕이 죽기 전에 태어났다는 정도만 보고할 뿐이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는 로마 기원 750년(기원전4년)에 죽었다. 예수가 헤로데 사망 몇 년 전에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2-3년 전 정도로 잡으면, 예수는 기원전 6-7년경에 탄생하였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력 기원은 예수의 탄생 연도를 원년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525년에 디오니시오 수사가 교황 요한 1세의 명에 따라 부활절 날짜를 정하면서 계산 착오로 예수의 탄생 연도를 최소한 4년 늦게 잡았다. 이 디오니시오 연대법을 800년경 독일의 가롤로 황제가 통치할 무렵에 공식으로 사용함에 따라 서력 기원 원년 (1년)이 예수의 탄생 연도로 완전히 굳혀진 것이다.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지내기 시작한 때는 4세기 초엽이다. 원래 12월 25일은 로마에서 275년에 건립한 태양 신전 축성식 때에 지정한 ‘무적의 태양 탄일 축일’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교회가 이 태양 축일을 세상의 빛이며 정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삼았으리라 생각하는데,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나 매우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다.
(2) 탄생 장소 : 유아사가 전하는 예수의 탄생 장소가 베들레헴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베들레헴 탄생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유아사가 고대 위인 탄생 기에서 흔히 보는 전설 체로 되어 있다.
2)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으로서 지리적인 의미보다는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3) 유아 사를 기록한 마태오나 루가가 예수이 공생활 부분에서는 한번도 베들레헴을 언급하지 않고 나자렛을 예수의 고향으로 말한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주장이 일리는 있다고 할지라도 유아 사 전승을 만든 초대 교회는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을 예수 탄생지로 믿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3) 탄생부터 공생활 전까지 : 그밖에 유아 사에는 예수의 탄생 배경, 할례와 성전 봉헌, 동방 점성가들의 방문, 이집트 피난, 헤로데의 아기 학살, 나자렛 귀환, 소년 예수의 성전 방문 등등 여러 가지 사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의 법적인 부모는 다윗 왕가의 후손인 요셉과 마리아이다.
2)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 몸에 잉태되었다.
3)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다윗의 후손이며 구원자이다.
4) ‘예수’는 천사가 지어 준 이름이다.
예수가 나자렛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가 침묵을 지키고 있어 자세히 모른다. 나자렛은 구약 성서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책에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아무런 비중이 없는 시골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이 도시에는 회당도 단 하나뿐이었다(마르 6,1-2). 예수는 “나자렛 사람”이 라 불린 것으로 보아(마태 2,23) 공생활 전까지 생애의 대부분을 나자렛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나자렛 생활은 그곳의 서민 생활과 다름없는 평범한 가정 생활이었을 것이다.
그의 법적인 아버지인 요셉은 예수보다 20-25세 가량 나이가 많았고, 어머니 마리아는 열 대여섯 살 정도 많았을 것이다. 마르 6,3은 예수가 공적 활동을 할 때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만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요셉은 빨리 사망했으리라 짐작한다. 예수의 형제는 야고보, 요세(요셉의 유사어), 유다, 시몬이었고, 그의 누이들도 나자렛에서 살았다고 한다(마르 6,3).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형제 자매는 친남매를 뜻하지만, 사촌이나 가까운 친척 또는 영성 적인 혈육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예수는 나자렛에서 부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다른 유다 인들처럼 일상 기도를 바치고 요셉에게서 율법 교육을 받았으며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을 것이다(마태 13,55). 그리고 청소년기에 들어서서는 요셉으로부터 일을 배워 장인(匠人)이 되었을 것이다. 요셉은 성서에서 말하듯이 목수였는데, 당대의 목수는 단지 건축용 나무를 다루는 기술자일 뿐 아니라 돌을 다루는 석수 등 넓은 의미의 건축 관계나 수공업 관계의 기술자를 뜻한다.
2. 예수의 공생활 시작 전에
(1) 공생활 시작 연도 : 복음서에서 예수의 생애 가운데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부분은 공생활 시작 연도이다. 물론 이 연도도 계산법에 따라서는 몇 년 정도 차이가 난다. 루가 3,1-2은 “티베리오 황제의 치세 십 오 년, 곧 빌라도가 유다를 통치하고 헤로데가 랄릴래아 영주로 다스리고 있을 때에” 세례자 요한이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보고한다. 이 연도를 서기로 계산하면, 빠르면 26-27년(전임 황제와 공동으로 통치한 햇수를 포함시킬 때), 늦어도 28-29년(전임 황제 사망 이후부터 계산할 때)이다. 학자들은 대체로 27-28년으로 보고 있다.
그 때의 대사제는 안나스와 가야파였다고 하는데(루가 3,2), 가야파는 현직 대사제였고(18-37년), 그의 장인이었던 안나스는 전임 대사제였다(6-15년). 요한의 활동과 예수의 활동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르지만,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루가는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할 때의 나이가 서른 살 가량 되었다고 한다(루가 3,23). ‘서른 살 가량’ 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를 일컫는 표현이다. 예수는 기원전5-6년경에 탄생하였으니까 공생활을 시작하던 기원 후 27-28년경에는 이미 삼십 대 초반 또는 중반이 되었다. 또 메시아의 조상인 다윗이 서른 살에 왕이 되었음을 감안할 때(2사무 5,4) ‘서른 살 가량’ 은 예수가 메시아 신분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음직하다.
(2) 공생활 기간 : 공생활 기간도 정확히 계산하기 어렵다. 그 근본 이유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보고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은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지역을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서 해방적 만찬을 지낸 다음 날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생활 기간은 1년이 채 안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가 적어도 세 번, 많으며 네 번까지 예루살렘을 드나든 것으로 보도한다. 그럴 경우 공생활 기간은 짧으면 2년 몇 개월, 길면 3년 몇 개월이 된다. 일반적으로는 뒤에 설명하겠지만 예수의 사망 연도를 계산하여 길어도 3년 미만이었으리라 추측한다.
(3)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 : 4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공생활 시작을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연결시키고 있다. 요한은 요르단강 근처의 사막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왔음을 예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풀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막 인들의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고 하는데, 이것들은 사막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 음식이었다. 이러한 사막 생활 양식을 보고 초대 교회는 그를 제2의 엘리야로 간주하였다.
요한의 주요 역할은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과 메시아의 내림에 앞서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이었다. 요한 이야기에 자주 인용되는 예언서와 ‘선구자’, ‘죄 사함’, ‘회개’, ‘성령’ 등의 내용이나 표현은 모두 구원 시대, 메시아 시대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표지들이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등장한 엘리야이자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통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예수가 어떤 존재인가를 미리 알려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요한이 예고한 대로 어느 날 예수는 요르단 강변에 나타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가 요한의 가까운 친척인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가 어떻게 해서 요한과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세례의 배경은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일부 학자는 예수가 요한의 제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아무런 근거가 없다. 복음서는 단지 요한이 잠시 주저하다가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만 간단히 언급하고, 이야기의 초점은 오히려 세례 직후에 나타난 현상에 두고 있다. 그 현상이란 하늘이 갈라지고 영이 예수 위에 내려왔으며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나타나시어 메시지를 전하는 이야기 형식, 이른바 시현사화(示現史話)에 흔히 나오는 이러한 현상은 예수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속죄하는 종으로서 그의 위대한 사명을 알린다.
(4) 유혹 : 유혹 사화에 따르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는 영의 인도로 광야에 가서 사십 일 동안 단식을 하고 악마에게 유혹을 받았다. 유혹 사화 역시 세례 사화처럼 ‘광야’, ‘사십 일’, ‘들짐승’, ‘유혹’, ‘악마와 천사’ 등 성서적인 언어와 전설적인 양식으로 되어 있어 그 역사적 내막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화에 나타난 가르침은 뚜렷하다. 즉, 예수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또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일생 동안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물질과 영예와 권력 등의 유혹과 시련을 다 겪었다. 그러나 그는 아담의 일반 후손들과는 달리 모든 유혹을 다 이기고 낙원의 시대, 메시아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6)
예수의 공생활
4복음서는 초대 교회의 정승에 따라 예수의 공생활에 내용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30여 년이 넘는 나자렛 생활보다 불과 2-63년밖에 안 되는 공생활 기간 중에 예수가 주로 어떤 활동을 하였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공생활에 관한 부분 역시 복음사가들이 주제, 내용, 문학 양식, 언어, 장소, 시간 등 서로 관련이 있는 전승자료들을 연결시켜 편집하였기 때문에 예수의 활동 배경, 내용, 연대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게다가 예수의 공생활을 크게 행적과 가르침으로 나누고, 그 내용을 개괄적으로 제시하겠다.
1. 활동 지역
예수는 한 번도 팔레스티나 본토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의 활동 무대는 오직 팔레스티나에 한정되었고, 그나마도 주로 유다 인 거주 지역 중심이었다. 비록 일시적으로는 요르단 동부 등 이방인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지역도 다녔지만 어디까지나 통과 지역에 불과 하였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면 나자렛에서 불과 시오 리 밖에 안 떨어진 세포리스나 가파르나움 남쪽 호숫가에 있는 티베리아에는 한 번도 간 흔적이 없다. 그리고 북쪽의 띠로 지방이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가긴 했지만 이방인들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고 반대자들을 잠시 피하기 위하여 갔다.
마르코 복음은 그나마도 활동 지역을 단순화시켜 갈릴래아 활동, 여행 중의 활동 및 예루살렘 활동으로 간단히 구분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갈릴래아 지역의 건너사렛 호숫가와 가파르나움이 활동의 중심지로 나타난다. 이렇게 활동 지역이 좁았지만, 광야에만 주로 머물렀던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예수는 대부분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마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넓은 호숫가, 심지어는 배 위에서까지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
2. 활동 대상
활동 지역에서 나타나듯이 예수가 접촉한 사람들도 대부분 유다 인들이었다. 그는 같은 시대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나 유다 인 철학자 필로와 달리 그리스계 사람들과 별다른 교제를 하지 않았고, 사도 바오로와도 다르게 적어도 겉으로는 이방인 복음 선포에 그리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하다 못해 당대의 유다 랍비들도 이방인들을 유다 교로 개종시키려고 육지와 바다를 구분하지 않고 다녔다고 하지만(마태 23,15) 예수에게는 그런 국제적인 선교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유다 인 중심의 활동은 가파르나움의 이방인 백인 대장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에 대한 행동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며 한 말씀만 하면 하인이 낫겠다고 하니까, 예수는 그의 믿음을 매우 놀라워하며 이스라엘에서는 어떠한 사람에게서도 그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었다고 칭찬하고 그 하인을 낫게 하였다(마태 8,5-13).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딸을 낫게 해달라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에게는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고 노골적으로 유다 인에 대한 편애를 드러냈다(마르 7,24-30).
한마디로 예수는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믿고 기다리던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옛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주기를 기대하는 등 처음부터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불신을 꾸짖고 한탄할 뿐 아니라 차츰 믿음을 가지고 달아드는 이방인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루가 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예수의 태도 변화를 잘 포착하여 예수의 족보를 아담에까지 소급시켜, 하느님을 만민의 아버지로 부각시키고(루가 3,38), 착한 사마리아인(루가 10,25-37), 병이 나은 후 되돌아와서 감사하는 사마리아 출신 나환자(루가 17,11-19) 등 종종 이방인들을 선과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방인 선교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방인들의 길로 가지 마시오”(마태 10,5), “나는 오직 이스라엘 가문의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습니다”(마태 15,24) 등의 표현을 삭제한다.
그리고 예수의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는 부활 후에 사도들에게 만민 복음 선포를 명령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정도 유다 인 중심의 다소 폐쇄적인 듯한 예수의 태도가 그 내면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수가 상대한 사람들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실로 예수는 당대의 유다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일반 대중을 비롯하여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대하고 활동 대상으로 삼았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군중, 부자와 가난한 이, 몸과 마음의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여자와 어린이, 니고데모와 같은 의회 의원과 바리사이 시몬, 심지어는 율법이 접촉을 금하는 세리와 죄인과 창녀, 자신을 그토록 적대시하여 결국 죽음으로 몰아 넣을 유다 지도자들까지도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예수가 특별한 관심을 두고 가까이 한 사람들은 병자와 죄인 등 소외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예수께 도움을 청한 병자나 죄인들 가운데 거절당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 성부께 용서를 청하면서 몸소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는 성부의 뜻을 따라 모든 이를 구원하러 왔다는 신념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전적으로 봉사하였다.
3. 이적활동
예수의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복음 선포와 이적 활동이었다. 그 가운데 먼저 이적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적이 예수의 활동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는 복음서에 수록된 이적 부분의 분량만 보아도 알 수 있다. 4복음서에는 예수의 이적 사화가 모두 37가지가 있다. 여기에 이적에 관한 요약 보고문까지 계산하면 예수가 행한 이적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르코 복음은 후대에 첨가된 부록을 제외하고 모두 661절인데, 그 가운데 무려 209절 약 30% 이상이 직접 간접으로 이적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을 읽으면 예수가 짧은 활동 기간에 계속 이적을 행한 보기 드문 이적 가였다는 인상을 준다.
예수의 이적을 종류별로 보면 병자 치유, 죽은 이를 다시 살리는 소생, 귀신을 몰아내는 구마, 풍랑을 가라앉히고 물위를 걷는 등의 자연 이적으로 나뉜다. 복음서의 이적 사화들은 문학 양식으로 보아 당대의 유다 및 그리스이적 사화와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이적 사화는 세 단계의 도식(圖式)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병자나 그 대리인이 나타나 예수께 도움을 청한다.
이 때에 병자의 이름이나 병세 및 지금까지의 치유 노력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술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병이 어떻게 기적적으로 낫게 되었는가를 알려 준다. 끝으로 목격자들의 환호와 찬양 또는 치유된 자의 선전 등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적 사화들은 전승 과정을 분석해 보면, 세월이 흐를수록 이적 사실을 과장하거나 숫자를 늘리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마르 5,23에는 야이로가 자기 딸이 다 죽게 되었다고 하는데, 마태 9,18에는 그 딸이 방금 죽었다고 한다. 4천 명을 먹인 빵의 이적도 5천 명으로 늘어나고, 남은 빵 조각을 담은 바구니도 일곱에서 열둘이 된다. 사람들이 이적 전승을 전하면서 조금씩 이적을 과장하여 말하는 경향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이적 사화는 예수가 일으킨 이적 자체를 강조하지만, 다른 이적 사화는 예수가 일으키는 이적 자체를 강조하지만, 다른 이적 사화는 예수의 말씀 자체에 더 큰 비중을 두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제반 현상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이적 사화에는 과장, 장식, 전설적 요소 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예수는 분명 이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고, 또 실명 이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고, 또 실제로 많은 이적을 행하였음이 입증된다.
2) 모든 이적은 예수의 신적 신분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알리는 표지이다.
3) 예수는 한 번도 자신의 이익이나 영광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4) 예수의 이적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이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마태 12,28).
5) 예수의 이적은 구약에서 예고된 대로 예수를 통하여 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었거나 이미 실현되었음을 증언한다.
6) 예수의 이적은 신앙을 전제로 하거나 신앙으로 인도하는 등 신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이적 사화는 신앙을 명시적으로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르 2,5의 중풍병자 치유), “내가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습니다”(마태 8,10의 백부장의 종 치유),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하였소”(마르 5,34 ; 10,52)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4. 복음 선포
예수는 복음 선포로 공적 활동을 시작하였고(마르 1.14), 이러한 활동은 공생활 동안 계속되었다. 그의 활동은 외견상 당대의 유다 율법학자들과 비슷하였다. 비록 그가 일정한 기간의 교육을 받고 정식으로 랍비가 된 흔적은 없지만 랍비들처럼 제자 단을 거느리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랍비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랍비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쳐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마르 1,22), 율법을 가르치되 율법의 조문과 형식의 틀을 벗어나 그 내면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가르침은 마태 5장의 행복 선언 등에서 보듯이 흔히 예언자들의 선포 양식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그의 훈화에는 자주 이적이 뒤따라 말의 권위를 높이 주었기 때문에 일반 율사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아무런 편견 없이 그를 대한 사람들은 엘리아나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사실 그는 예언자처럼 활동하였고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비쳤다(마르 8,27-28). 그는 그 어느 예언자와도 비길 수 없는, 그가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했던 세례자 요한 보다 더 위대한 가장 완전한 종말 예언자였다. 그러나 그를 위험시하던 반대자들의 눈에는 율법을 무시하는 거짓 예언자로 보였고,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이나 빌라도의 눈에는 열혈당원처럼 내란을 일으킬 수 있는 거짓 메사아로 보였을 것이다.
5. 생활 양식
예수는 세례자 요한 과는 달리 사람들 가운데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소수의 제자 단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느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를 심어 주었다. 제자들을 뽑는 과정도 유다 랍비들과는 달랐다. 랍비들의 경우에는 제자들 편에서 스승을 정하여 따라 다녔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직접 제자들을 뽑았다. 그는 예언자 엘리야가 엘리사를 제자로 부르듯이(1열왕 19,19-20) 건너사렛 호수의 어부들을 제자로 삼았으며(마르 1,16-20) 그들과 함께 다니고 생활하며 교육시켰다.
그는 집도 재산도, 가족이나 친척도 고향도 떠난 사람이었다. 그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면서 지팡이 외에는 빵도 자루도 전대의 돈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속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등 사실상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였다(마르 6,8-9). 인간 생활에 가장 필요한 이 모든 것을 지니지 말라는 것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통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새로운 생활을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생활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가장 뚜렷한 표지이다. 그는 자신의 생활 양식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습니다(마태 8,20).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당대의 유다 인들에게는 독신 생활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비정상적인 생활이었다. 무릇 사람이란 “지식을 넣고 번성하여라”는 창세기의 말씀대로(창세 1,28) 유다 인들은 누구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랍비들은 독신자는 피를 흘리는 사람과 같다고 가르쳤다. 비록 그 때에도 꿈란 공동체 회원 가운데는 독신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일종의 수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사정이 달랐다.
결혼 생활에 관한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거의 틀림없이 예수 자신의 독신 생활과 연간이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으며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습니다”(마태 19,12).
예수가 이렇게 결혼과 가정과 재물과 영예 등 정상적인 인간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기한 근본 동기는 이상적인 수도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데 전심전력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오직 인간을 위하여, 그 누구도 완전히 실천해 보지 못한 극진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정신을 잘 드러내는 것이 의식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훈화이다.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또 여러분의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목숨은 양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을 뿐더러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십니다. ---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다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6,25-33).
이 훈화의 주제는 사람의 목숨이 음식이나 의복보다 귀중하다는 것과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자상하게 보살펴 주신다는 것, 그리고 특히 이러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느님의 의로우신 요구, 곧 그분의 뜻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특이한 생활 방식은 바로 자신을 통하여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삶을 그대로 구현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6. 사람들의 반응
유다 인들은 율사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수많은 기적으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 준 예수를 보고 처음에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군중들은 그가 옛 다윗 왕국의 영광을 되찾을 메시아이기를 기대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인기는 공생활 초기에는 대단히 높았다. 그런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등 유다 지도자들이 보는 눈은 달랐다.
그들도 예수의 가르침의 일부는 수긍하고 받아들였지만,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례 규정 등 율법과 조상 전통을 무시하는 듯한 언사나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시하였다. 더 나아가 많은 군중이 호응하고 몰려드는데 대해 지도층의 입장으로서 상대적으로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차츰 예수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며 기회만 있으면 그를 궁지에 빠뜨리거나 제거하려고 하였다.
한편 군중들도 초기의 호감과 기대가 어긋나자 차츰 예수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예수는 대중 활동을 줄이는 대신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최종 목적지이자 수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과감히 발길을 옮겼다.
7.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활동
예수의 마지막 활동 무대는 예루살렘이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간 외적 동기는 해방절 축제였지만 보다 깊은 내면적인 동기는 그 곳에서 옛 예언자들처럼 수난을 겪고 죽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활동은 복음의 절정을 이루고, 그런 뜻에서 예루살렘은 복음의 핵심 장소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활동은 수난 사건을 제외하면 삼 일 동안 전개되었는데, 활동 내역을 보면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무화과나무 저주와 유다 지도자들과의 논쟁, 성전 파괴 예고와 종말 훈화 등의 활동이 있었다. 이 활동 내역은 복음서에 따라 날짜나 순서가 다소 바뀌기도 한다.
먼저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군중의 열렬한 한영을 받았다. 군중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에게 이스라엘 왕국의 영광을 되찾는 주역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감으로써 정치적인 해방 자나 권력과 영광을 지닌 승리의 왕이 아니라, 겸손한 평화의 군주로서 세상에 구원을 주러 왔음을 명확히 드러내었다. 그런 다음 성전에 들어가 하느님이 원하신 메시아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그는 먼저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고 유다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유다 인들의 형식적이고 폐쇄적인 신앙 자세를 질책하고 모든 사람에게 참된 구원을 가져다 줄 참된 성전이 바로 자신임을 암시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구성될 새로운 이스라엘의 길과 종말에 대비하는 삶의 자세를 가르쳤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하느님은 예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성하실 것이다. 이 공동체는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을 바탕으로 건설되고 또 건설되어야 한다. 이 공동체는 예수가 다시 올 때 이루어질 세상 종말을 향하여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tko 공동체는 많은 환난, 혼란, 고통 등을 겪을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은 모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인내로이 준비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마지막 활동과 가르침은 유다 지도자들의 적의를 더욱 부채질하여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7)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공생활 가운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들을 교육시키며 반대자들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을 질책하는 등의 이른바 설교 활동은 이적 활동과 더불어 공생활의 주류를 이룬다. 그는 분명 위대한 설교자요 스승이며 예언자였다. 그러나 그는 랍비들과는 달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권위 있게 가르쳤으며, 고대 사상가들처럼 추상적인 내용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구약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생활 환경에 적용시켜 가르쳤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심오한 초자연적 진리를 다루면서도 마음의 문을 열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 문헌은 예수의 행적에 관한 문헌보다 훨씬 많고 그 내용이 복잡하다. 특히 20세기에 들어 와서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역사적 신빙성과 순수성을 가려내는 데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작업은 대단히 어려울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첨예한 문제는 피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강조하는 주제를 중심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요약 제시하였다.
1. 하느님 나라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 주제이자 핵심은 하느님의 나라 또는 하느님의 통치이다. 마르코 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첫 번째 복음 선포의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인데, 이는 분명 예수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 역시 “여러분은 회개하시오. 하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라는 말로 예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마태 4,17). 마태오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유다 관습을 생각하여 하느님을 대부분 하늘로 바꿨다. 그만큼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통치를 알리는 것을 자신의 최대 사명으로 알고 기회 있는 대로 이에 관해 이야기할 뿐 아니라 다른 활동도 흔히 이것과 연관을 시켰다.
(1) ‘하느님 나라’는 그 표현만으로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하느님의 왕권과 통치권이 미치는 나라를 뜻한다. 그러나 예수가 비유나 주의 기도나 행복 선언 등을 통해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예수 자신도 이 나라에 대한 정의를 내리거나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가 가르치는 나라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주님으로 인정받고, 그분의 주권이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보거나 각 사람의 생애를 보면 하느님이 주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러한 하느님이 모든 사람이나 각 사람에게 그 주권을 인정받고 하느님으로서 그들을 다스리시는 나라를 말한다.
예수의 표현을 빌리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가 세상이나 각 사람을 사랑으로 지배하시는 나라이다.
(2) 이 나라는 먼 훗날에 다가올 나라가 아니라 이미 가까이 와 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마르 1,15). 아니 예수와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마태 12,28). 예언자들이 예고한 미래의 하느님 나라가 예수 자신의 행적과 말씀을 통하여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너무 작아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큰 나무로 자라고 있다(마르 4,30-32). 이 나라는 누룩과 같아서 밀가루 반죽 안에 숨겨져 있지만 계속 부풀어서 반죽 전채를 새롭게 한다(마태 13,33). 그리고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많은 장애를 받지만 결국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마르 4,1-9).
(3)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면서도 동시에 미래에 실현되고 종말에 완성될 나라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마태 6,10).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겪지 않을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마르 9,1).
그러나 단순히 먼 훗날 비로소 도래할 나라가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계속 완성되고 완성시켜야 할 나라이다. 그 나라는 무조건 미래의 나라가 아니라 지금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과 대화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인간은 믿음과 희망을 안고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1고린 15,28) 예수가 제시한 그 나라의 백성 자격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4)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면서도 미래에 완성되리라는 사실은 인간의 결단을 촉구한다. 인간이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시민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참다운 하느님, 주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한다.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 내용을 복음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가난하게 되는 것. 물욕에서 벗어나는 것 (마태 19,16),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처럼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마태 18, 1-5).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마태 7,21)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이 이러한 회개를 바탕으로 복음을 믿고 실천하면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요 은총이며 하느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는 기적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용서는 인간에게도 용서를 요구한다. 인간도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마태 18,23-24).
이 나라가 하느님을 주님으로 받드는 데서 시작한다고 해서 말로만 “주님”이라고 고백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7,21).
(5)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라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함을 뜻한다. 모든 악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이 천지 창조 때에 마련하신 평화, 의로움, 자유, 생명이 실현됨을 뜻한다. 예언자들이 예고한 바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 한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이사 35,5-6 ; 마태 11,5)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다. 예수는 이 나라가 도래한 표징으로 병자들을 낫게 하고 죽은 이들을 살려 주었다. 그 나라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이며, 민족과 나라와 이웃 사이의 장벽이 없는 나라이다.
가난한 이가 부요 해 지고, 굶주리는 이가 배부르며, 우는 이가 웃는 나라이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펼쳐지고 완성되는 나라이다. 이 사랑은 나라와 민족을 구분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유다 인이든 이방인이든, 선인이건 악인이건 모두가 초대를 받았다. 모든 이에게 개방된 나라다. 따라서 이 나라에 들어가 그 구원을 누리는 것은 각자의 결단에 달렸다. 예수가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녀답게 살아갈 때 이미 그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가 있다.
2. 하느님
하느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유일신, 창조주, 세상 통치자, 계약과 율법의 제정 자,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자 보호자 등 유다 인들의 신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내용은 창조주요 심판관이신 하느님보다는 인류 구원을 위하여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자상하신 하느님이다.
예수는 당대의 유다 인과는 달리 하느님을 직접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당신 자신의 아버지이자 우리의 아버지로 불렀다. 물론 유다 인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불렀지만(신명 14,1 ; 32,6 ; 이사 63,16 ; 시편 103,13 ; 말라 2,10) 일상 호칭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가 가르친 기도나 비유 등에서 나타나듯이 하느님을 무엇보다도 바로 아버지로 대하였으며 이 점이 새로운 점이다. 이 사실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얼마나 자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에는 44번, 요한 복음에는 120번이나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그이 하느님께 대한 가르침이 집약되어 있다. 아버지 하느님은 더없이 자비로운 분이며 당신 자녀들을 인자로이 돌보시는 분이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루가 6,36).“여러분은 악하면서고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당신에게 청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후하게 좋은 것들을 주시겠습니까!”(마태 7,11). 그분은 참새나 들풀 같은 하찮은 것도 돌보시고, 특히 인간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이다(마태 10,29-30). 그분은 두렵고 지존하신 분이기에 앞서 모든 사람을 자식처럼 걱정하고 돌보시는 분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버지께 청하기도 전에 그분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마태 6,8).
그분은 인간의 연약함도 잘 알고 계시며, 한없이 자비로워 항상 용서하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뉘우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꺼이 용서하신다(루가 18,9-14). 모든 이간은 하느님 앞에 죄인이며 회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아무런 구분 없이 모든 이를 자녀로 대하시는 하느님께 되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하느님을 거절하는 사람은 계속 죄에 속박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진정 이러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그분이 그토록 아끼시는 사람들을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등 모든 면에 있어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마태 5,44-45).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여 주었다. 그가 가르친 아버지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 나라와 구원을 베풀 준비를 하고 계신다. 인간이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가 되려면 예수가 가르치고 보여 주었듯이 회개하여 예수와 같이 효성을 다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3. 예수의 신분과 사명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예수 자신의 신분에 대한 사항, 곧 예수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말하였는지에 대한 문제는 해석 학 상 매우 어려운 주제이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는 ‘예수 자신의 의식’ 또는 ‘예수의 메시아 의식’이라는 주제로 다룬다. 이 주제가 어려운 이유는 복음서는 예수의 활동이나 가르침에 관심이 있지 예수의 심리나 의식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고 다루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예수가 자신에 대해서 직접으로 밝혔으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신분이나 사명을 밝히는 부분과, 그 밖에 복음서에서 강조하는 예수에 관한 사항을 종합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도 대부분 부활 후에 형성된 신앙 고백 문이나 초대교회의 예수 신앙의 표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하느님의 아들 :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제시하는 본문은 마태오 복음에 11번, 마르코 복음에 7번, 루가 복음에 9번, 사도행전에 2번, 요한 편지에 17번, 바오로 계 편지에 18번 나온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을 직접 하느님의 아들로 표현하는 부분은 공관복음에는 한번도 없고 요한 복음에 는 6번 나온다.
그 외에 예수가 자신을 단순히 아들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요한 복음에 14번, 마태오 복음에 3번 나오는데, 이 말은 사실상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표현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복음서는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후손, 하느님의 영을 지님 준 등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의미를 지닌 표현이 많다. 그 가운데 예수의 신분을 가장 극적으로 잘 드러내는 대목은 세례 사화와 변모 사화이다(마태 3,17 ; 17,5). 이 두 장면에서 하는 또는 구름에서 울려 나온 소리는 “이는 애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이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문인 이 소리는 성부와 예수와 특별한 부자 관계를 공적으로 장엄하게 선포한다.
공관복음에는 그 외에도 성부와 예수의 특별한 관계 또는 예수의 특별한 신분을 암시하는 대목이 많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3,31).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매우 놀라데 되었다. 그분은 그들의 율사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그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 7,29). “인자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당신들이 알도록 하겠습니다”(마르2,10).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마태 10,37).
“ ‘당신이 찬양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 --- ‘내가 그입니다. 여러분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또한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르 14,61-62).
요한복음도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여러모로 묘사하는데 그 내용을 대강 압축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성부의 외아들이며,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16).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겨 주셨으며(3,35), 당신 친히 하시는 모든 일도 그에게 보여 주신다(5,20). 그는 하느님이 파견하신 이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3,34). 그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한다. 예수는 이런 엄청난 발언으로 말미암아 신성모독 죄인으로 몰리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었다(요한 10,31-33).
(2) 메시아 : 신약성서에는 메시아를 뜻하는 ‘그리스도’하는 말이 매우 자주 나온다(복음서에 55번, 그 밖의 책에 474번). 그러나 예수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단지 4복음서에 8번나올 뿐이다. 그나마도 그 본문을 분석해보면 편집자의 삽입 문이거나 초대교회의 고백 문이다. 실상 예수 자신은 한번도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거나 의식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없애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마태 5,17)라는 표현은 당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사상을 잘 반영한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한 4,36)나 대사제 가야파의 질문(마르 14,61)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보면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었다.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하기를 꺼린 이유는 유다 인들이 가진 그릇된 메시아 관념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치 권력과 영광을 지닌 현세적 메시아를 기대하였지만,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는 분명 아니었다. 예수는 이러한 그릇된 기대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베드로가 메시아 고백을 하였을 때 즉시 침묵을 명하며 자시 앞에 놓인 수난의 운명을 예고하였다(마르 8,29-31).
그리고 군중들의 기대와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도 승리와 영광과는 멀디 먼 작은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갔다. 그는 끝까지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임을 자처하고 스스로 수난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정작 영광을 완전히 등진 수난기간 중에는 아무런 오해의 우려가 없었기에 유다 인이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하면서,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선언하였다(요한 18,36-37). 그는 십자가의 죽음이 보여주듯이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과 인간을 위한 봉사와 희생으로 악과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승리한 십자가의 메시아였다.
(3) 인자(人子) : 신약성서에는 인자라는 말이 85번 가량 나오며, 그 대부분이 복음서(공관복음 70번 가량, 요한복음 12번)에 집중되어 있는데, 구약 인용문을 빼면 단 한 곳(사도7,56) 외에는 언제나 예수가 한 말이다. 이로 미루어 비록 그 상당 부분은 초대교회의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분명 예수는 자신에 대해 메시아나 하느님의 아들과는 달리 인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가 아니고 전형적인 히브리어이다. 그리고 그 뜻은 문맥에 따라 모든 사람, 기록자나 발설 자 자신, 이스라엘의 대표자, 종말에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대리인, 하느님의 백성 등 여러 가지이다. 그것은 곧 유다 인들도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만큼 인자는 그들에게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이 단어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1) 예수의 지상 생활 및 활동과 관련된 말 : 예수는 ‘인자’를 자신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다고 할 때(마르 2,10)와 안식일에 대해 전권을 가지고 있음(마르 2,28)을 선언할 때에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은 하늘의 샌 여우보다 못해 머리 누일 곳도 없는 처지임을 j밝히거나(마태 8,20 ; 루가 9,58), 사람들이 자기더러 먹고 마시기를 좋아한다며 비난한다고 할 때(마태 11,18-19)에도 이 말을 쓴다. 이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인자라는 말에는 예수가 하느님의 파견을 받고 이 세상에 온 하느님의 대리인이요 종말의 예언자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유다 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살고 있다는 것과, 사람들은 그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배척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2)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말 : 인자는 세 번의 수난 예고를 비롯하여(마르 8,31 ; 9,31 ; 10,33-34)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문맥에 자주 쓰인다. 아마도 수난과 관련된 말의 대부분이 부활 후에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수난 전에도 예수는 분명 이 말을 수난의 운영을 지닌 자신을 드러낼 때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를 찾던 군중들의 그릇된 기대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마르코는 이 사실을 ‘메시아 비밀’ 이라는 특이한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비록 자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지만 수난을 통해서만 그 신분이 드러나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종말 재림과 관련된 말 : 인자라는 말은 또한 예수가 종말의 심판자로 올 것을 예고하고 사람들의 준비와 결단을 촉구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마르 13,26 ; 14,62 등). 이 경우에는 그 문맥으로 보아 다니 7,13-14에 나오는 인자의 쓰임새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전형적 묵시문학적 표현이다. 예수는 이렇게 자신이 마지막 날에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나타나 사람들의 최종 운명을 좌우할 특별한 신분의 인물임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결단을 촉구한다.
4. 인간 생활
예수는 유다 교에서 삶이 근본 지침으로 삼는 율법과 조상 전통을 비롯하여 구체적인 인간 생활에 관해 자주 언급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가르침이 언뜻 들으면 율법이나 계명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인상 때문에 예수는 결국 반 율법 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잘 보면 분명 그는 율법을 인간 생활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는 결코 새로운 율법이나 계명을 도입하지 않았다. 단지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밝히거나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근본 뜻을 외면하고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율법 준수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예리하게 비판하거나 단죄하였다. 그는 또한 그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결혼, 제물, 공동 생활, 폭력, 국가 권위, 납세, 이웃에 대한 태도 등 구체적인 윤리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새로운 윤리 교사로 새로운 윤리 지침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의 기본 정신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통치를 실생활에 구현하는 데 있었다. 이를테면 산상설교 등에서 자주 가난을 강조했지만 가난을 구원의 절대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 가난 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누가 당시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편 뺨마저 돌려대시오”(마태 5,39). “ 당신에게 청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당신에게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니 마시오”(마태 5,42). “남을 심판하지 마시오”(마태 7.1). 등 이웃에 대한 태도도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르치지만 결국 그 모든 내용은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의 근본 정신을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이러한 이웃 사랑은 율법서와 예언서의 근본 정신이고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 해주기 바라는 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해주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입니다”(마태 7,12).
예수는 언제나 인간 생활의 기준이 하느님의 뜻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면 가난한 이, 자비로운 이, 온유한 이가 되고 그렇게 되면 굶주린 사람을 돕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 생활이다. 한마디로 예수가 가르치는 올바른 인간 생활은 율법과 예언서의 기본 정신인 하느님의 뜻에 있고. 이 뜻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8)
예수의 수난과 부활
Ⅰ. 개 요
1. 수난과 부활
4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사화는 마지막 부분을 이루면서 서로 연결된 단일 사화로서는 그 분량이 가장 많다. 예를 들면 가장 오래된 마르코 복음의 경우 수난사화는 책 전체의 약 20%를 차지한다(661절 가운데 127절). 또 수난사화는 복음의 앞부분과는 달리 작은 사건이라도 매우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사화는 비록 예수의 수난 전기는 아니지만 전기에 가까울 정도로 장소, 시간, 인물, 사건 내역 등을 가장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 복음사가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알리고자 한, 복음의 중심이요 절정임을 드러낸다.
사실 성서의 증언을 보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초대교회의 설교, 교리 교육, 전례 등 모든 분야의 주제를 이루는 신앙의 핵심이었다. “내가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묻히셨으며, 또 성경 말씀대로 사흘만에 일으켜지셨습니다”(1고린 15,3-4). “실상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1데살 4,14). “우리는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을 믿습니다. 그 이는 우리의 범행들 때문에 넘겨지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2. 전승의 형성 동기와 역사성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에 관한 내용은 신앙고백, 설교, 전례 등 여러 형태의 짤막한 전승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긴 수난 전승을 이루었는데, 그 동기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사도들이나 설교자들은 이토록 중요한 사건의 이유 또는 의미를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했다.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인 예수가 왜 하필이면 유다 인들에게는 걸림돌이며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되는(1고린 1,23) 십자가의 죄인으로 죽었는지 이해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사건 자체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야 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이나 설교자들은 구원 사건의 핵심이자 신앙의 본질인 수난의 실상을 자세히 알려주려고 노력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수난과 부활사화는 복음 안에서 가장 깊고 상세할 뿐 아니라, 전기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도 신학적 의미가 풍부하다.
먼저 전기 형식의 관점에서 볼 때 수난사화는 복음의 어느 부분보다 때와 장소, 인물 등 사건 내용을 매우 상세히 전한다. 그리고 그만큼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최고의회 심문, 총독의 사형 언도, 슬피 우는 여인들, 축제 때의 죄수 특사, 사형 집행인들이 사형수의 옷을 나눠 갖는 일, 십자가 처형과 죄 명패 등 수난사화의 상당 부분이 당대의 풍습과 일치하는 점으로 알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진술 내용이 역사와 맞지 않는다면 그 시대의 독자들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수난사(受難史)나 수난 전기(傳記)는 아니다. 역사 서술이라면 체포 동기, 극형의 법적 근거, 처형 실상 등 상식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항을 크게 다루는 반면, 체포, 최고의회 심문, 빌라도 재판 등 덜 중요한 사항은 간단히 다루었을 것인데,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사하는 결국 역사적인 수난 사건을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독자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은 수난과 부활의 신학이다. 다시 말해 이 사화는 보도 형식을 띤 수난과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3. 주요 사상
4복음서는 사건의 실상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면서고 그 일차적인 목표는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고 독자들의 신앙을 강화하는데 두고 있다. 따라서 수난과 부활 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하느님의 뜻에 의한 필연적인 수난 : 예수는 구약의 예언대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난 하였다. 그는 겉으로는 적대자들의 모함과 증오로 희생되었지만, 수난의 참된 동기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어느 부분보다도 구약성서를 직접 간접으로 많이 인용한다(시편 22, 414, 69, 110장 ; 이사 53자의 야훼의 종의 노래 등). 자그마한 사건 하나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사건이나 예언과 연결시켜 이 모든 것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이 실현된 것으로 증언한다.
2) 예수의 신적(神的) 신분과 사명 : 복음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신적 신분과 사명을 선포하는 데 주력하는데, 이 사실은 특히 수난과 부활사화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마르코의 예를 들면 예수의 수난은 복음서 전체에서 숨겨두었던 그의 신분과 사명을 푸는 열쇠이다. 수난 직전까지 자기 신분을 숨기던 예수는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냐고 묻는 대사제나 빌라도의 질문에 시인을 하고(마르 14,61-62 ; 15,2), 십자가 형벌을 집행한 백인대장은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다(15,39). 이와 같이 복음서들은 체포, 심문, 죄목, 조롱, 십자가의 죽음과 그후의 사건들을 한결같이 예수의 신적 신분과 사명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삼고 있다.
곧 예수는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도 성부의 뜻을 따르고자 스스로 죽음을 맞아 인류를 구원하였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메시아이고 하느님의 아들임이 드러났다.
3) 속죄와 구원의 가치 : 최후 만찬 중에 예수는 “이는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입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 여러분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루가 22,19-20)라고 하였다. 이 “여러분을 위하여” 또는 “많은 이를 위하여”(마르 14,24)는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잘 밝혀 주는 표현 가운데 하나 이다. 예수를 수난과 죽음으로 몰고 간 근본 동기는 외적으로는 신성 모독 죄나 정치 반란죄 때문이지만, 그 내면적인 동기는 바로 인류가 저지른 죄 때문이었다.
수난사화가 즐겨 인용하는 야훼의 종의 노래는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이사 53,5). 예수는 한마디로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수난을 겪었고, 죽음의 운명을 지녔던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러한 대속과 구원을 위한 수난과 죽음은 그의 목표이자 결실이었다. 평소에도 그는 사람들에게 시중들고 봉사하는 위타(爲他)의 삶을 살았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마르 10,45). 이러한 의미를 사도 바오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문을 빌어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습니다”(1고린 15,3-4).
4)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모범과 경고 : 복음사가들은 수난사화를 통하여 예수를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제자들이나 그의 수난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의 잘못을 명시하여 독자들도 같은 잘못에 떨어지지 않도록 경고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스승 예수처럼 어떠한 번민과 시련 중에도 성부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는 정신을 익히며, 죽기까지 성부께 신뢰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그뿐 아니라 배반자 유다, 졸다가 겁을 먹고 비겁하게 도망간 제자들,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 십자가를 지고 간 키리네의 시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불의 한 재판을 한 빌라도, 예수를 조롱하고 채찍질한 군인들과 군중 등 수난사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사건 안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버리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따르며 죽는 것이 그의 부활에 참여하는 길이며, 예수처럼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임(요한 15,12-13)을 깨닫는다.
Ⅱ. 수난사화의 주요 내용
1. 최후만찬
예수는 수난 전날 저녁에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집의 이층 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였다. 마르코 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은 이 만찬 날짜를 유다 인들의 니산달 15일에 거행하는 해방 절 만찬 일자와 동일시하는 반면, 요한 복음은 그 전날로 이야기하고 있다. 날짜 문제는 그 전날로 이야기하고 있다. 날짜 문제는 아래의 예수 사망일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만찬이 예수의 사망일 전날인 목요일, 해방 절 만찬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었음은 분명하다.
이 만찬 때에 예수는 식사를 시작하면서 먼저 빵을 손에 들고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다시금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며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만찬 끝에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하였다. 교회는 이 기념 명령에 따라 주의 만찬, 곧 성찬을 정기적으로 거행한다.
그런데 이 빵과 잔의 말씀을 성서의 표현들과 연결시켜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많은 고통을 받고 생명을 바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예수가 죄를 대신 기워 갚고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린 예수 자신을 음식으로 먹고 마시면서 그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찬을 주님의 주음과 부활의 기념제라고 한다.
나아가서 최후만찬은 그 환경, 재료, 절차 등으로 보아 해방 절 만찬이거나 적어도 유다 인들이 축제일이나 친목 모임 등에 흔히 거행하는 종교적 공동 식사였다. 유다 인들은 이러한 식사를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를 다지는 신성한 행사로 여겼다. 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공생활을 보면 예수는 제자, 세리, 죄인, 바리사이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즐겨 식사를 하고, 이러한 식사를 흔히 그가 평소에 가르치고 실천한 자비, 용서, 구원, 친교, 나눔의 자리로 삼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찬은 공동체가 예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와 한 혈육의 가족이 되고 그를 통하여 하느님 및 이웃과도 가족이 되어 서로 가진 바를 나누게 하는 친교와 나눔의 잔치이다.
2. 게쎄마니의 번민과 체포
최후만찬을 마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게쎄마니에 가서 곧 닥칠 수난에 대한 공포와 번민 등으로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는 한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토록 고통을 싫어하면서도 인간을 구원하려는 성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여 그 시련을 용감히 극복하였다. 이러한 불굴의 의지는 다음날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예수가 이렇게 번민하고 기도하고 있을 때에 유다 지도자들이 보낸 군중들이 예수의 제자 유다를 앞세우고 나타나 그를 체포하였다. 유다 의 배반동기에 대해서는 복음서가 침묵을 지킨다. 그는 아마도 스승에게 걸었던 기대가 완전히 어긋나자 실망과 좌절을 겪으면서 스승을 팔아 넘겼을 것이다.
그리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스승을 배반하지 않겠다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
3. 최고의회의 심문과 빌라도의 재판
예수는 가야파 대제관의 집으로 끌려가 거기서 최고의회의 심문을 받았다. 최고의회의 심문은 율법 위반 사실을 심의하는 종교적 재판이었다. 고발 자들은 온갖 불리한 증언으로 예수를 고발하였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그들은 예수가 자신을 종말 심판관, 곧 메시아로 자처했다는 이유로 독성 죄(신성 모독 죄)라는 판결을 내린다. 이 죄는 중대한 율법을 거스른 범법 행위로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고의회는 직접 형을 집행하지 않고 예수를 총독 빌라도 에게 넘겼는데, 그렇다면 최고의회는 사형 언도와 집행을 할 권한을 갖지 않았단 말인가. 일부 학자들은 비유다 인이 금지된 성전 구역에 들어갔거나 스테파노의 경우처럼 투석형을 받을 때에는 최고의회에 사형언도 권과 집행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정확한 규정은 잘 모른다. 최근의 학계 동향은 최고의회에 사형 언도나 집행권이 없었다고 보는 추세에 있다. 스테파노의 경우에는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분노한 군중들이 돌로 쳐죽인 것 같다. 그러한 돌발적인 사건은 가끔 있었다고 한다.
총독관저에 압송된 예수는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았다. 빌라도는 예수가 과연 유다 인의 왕이 되려고 했던가를 집중 추궁하였다. 그의 재판은 최고의회의 재판과는 달리 정권 탈취 음모 여부를 가리는 정치 재판이었다. 심문 결과 빌라도는 예수가 유다 인들의 음모와 시기에 의해 고발되었음을 알았기에 매질이나 해서 해방 절 축제 특사로 풀어 주려고 했다. 축제 특사(特赦)는 로마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의 제도였다. 그러나 로마인들도 특사를 베푸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군중의 반발과 소요를 두려워하여 예수에게 유다 인의 왕이 되려고 했던 죄, 곧 정권 탈취 음모 죄목(반란죄)으로 사형 언도를 내리고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넘겼다. 그러나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서는 예수를 사형수로 만든 것은 인류의 죄악이었음을 거듭 증언한다(1고린 2,8 ; 사도 2,23 ;4,10 ; 1데살 2,14-15등).
형이 확장된 후에 예수는 군인들의 손에 넘겨져 당대의 사형수에 대한 처벌 관습에 따라 참혹하게 매를 맞고 조롱을 당하였다. 자주색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쓰며, 군인들이 무릎을 끓고 경배하는 등의 모든 조롱과 모욕은 유다 인의 왕이라는 예수의 죄목에 상응한다. 그만큼 예수는 철저하게 치욕을 겼었다.
4. 십자가 처형과 죽음
매질과 조롱이 끝나자 형 집행 자들은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타로 끌고 갔다. 일반적으로 죄수는 십자가의 횡목(橫木)만 지고 가고 종목(從木)은 처형 장소에 미리 세워 두었다.
형장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의 통행이 많았는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청사였다. 예수는 도중에 기진맥진하였기 때문에 키레네 출신 시몬이 붙들려 예수의 십자가를 졌다. 복음서는 키리네의 시몬을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의 표본으로 내세우는 듯한 인상을 준다. 형장에 도착한 예수는 옷을 벗기우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의 옷은 관례에 따라 군인들이 제비를 뽑아가졌다.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정치 반란자, 탈영자, 신전 약탈자 등 제국의 안정과 치안을 위태롭게 하는 중범 자들을 처형하는 가장 처참하고 기나긴 고통을 주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로마의 유명한 사상가인 치체로는 이 형벌을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형벌”, “십자가라는 말조차 로마 시민의 몸, 생각, 눈, 귀에서 치워야 할 극형”이라고 표현하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십자가 죽음이 모든 죽음 가운데 가장 처참하고 불쌍한 형태라고 하였다.
로마 제국은 이 형벌을 주로 노예들에게만 내리고, 로마 시민이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십자가 형벌을 일명 노예형벌이라고도 하였다. 물론 지역 총독들은 이 원칙을 때때로 무시하였다. 처형자들은 사형수의 손발을 십자가에 못박거나 끈으로 동여매었는데, 예수께는 못을 박았으리라 본다. 십자가 윗 부분에는 죄 명패를 달아 놓았는데, 4복음서의 명패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은 ‘유다 인들의 왕’이다. 요한 19,19-20에는 이 죄목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상처와 출혈로 인한 염증, 고열, 갈증, 호흡장애, 인대와 근육과 신경의 고통 등 갖가지 고통을 장시간 겪었다. 일반적으로 하루 이틀 정도 시달리다가 죽었는데, 어떤 기록에는 8-9일까지 걸렸다고도 한다. 그런데 예수의 경우에는 불로가 몇 시간 안되어 운명하였다. 그 정확한 사인(死因)은 알 수 없으나 게쎄마니의 번민, 철야 심문과 공포, 채찍, 과다 출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심장마비를 이르켰을 가능성이 크다.
4복음서를 종합하여 보면 j예수는 십자가에서 일곱 번 말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역사성은 밝힐 방도가 없지만, 분명 예수는 평소의 태도와 정신에서 보여 주었듯이 그 죽음의 고통 중에서도 원수들을 이해 기도하고 죄인들을 용서하였으며, 인류 구원을 원하신 성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여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으며, 성부를 신뢰하면서 자신의 영을 맡겼다. 그는 평소에 가르치고 실천하였던 자비, 용서 순종, 기도 , 신뢰, 사랑 등을 십자가 위에서 가장 완전하게 실천하고 모범을 보여 주었다.
5. 사망 시기
예수의 사망 시기는 공생활 시기와 기간 및 최후만찬 시기와 관계가 있다. 사도 바오로의 회개 시기도 예수의 사망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예수는 분명 바오로의 회개 이전에 죽었다. 그런데 바오로의 회개는 갈라 1,18과 2,1(바오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갈리오의 비문 등을 통해서 계산할 때 33-35년경에 있었다. 복음서는 모두 예수 사망일이 안식일(토요일) 전날, 곧 금요일이었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그 전날인 목요일 저녁에 최후만찬이 있었다. 단지 이 목요일을 공관복음은 유다 해방절 만찬일인 니산달 15일이었다고 하고, 유다 인들은 저녁 해가 넘어 가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측에서 보면 해방절 만찬은 니산달 14일 저녁에 거행되지만, 그들에게는 15일을 시작하면서 거행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해방절 만찬일 전날이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그러면 예수 사망일은 니산달 15일 금요일이거나(공관복음), 해가 지기 전까지는 아직 15일이었다. 아니면 니산달 14일 금요일이었을 것이다(요한복음).
학자들의 연대 계산에 따르면 30년 4월 7일이 니산달 14일 또는 15일 금요일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마도 예수는 30년 4월 7일 금요일에 사망하였을 것이다. 이 날이 니산달 14일이나 15일이 될 수도 있었던 이유는 당대에는 초생달을 한 달의 시작으로 간주하였는데, 날씨가 매우 흐릴 경우 날짜 계산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니산달 14일이 예수 사망일이라면 최후만찬 일은 요한복음의 보고대로 해방절 만찬 전날이었고, 반면에 니산달 15일이라면 최후만찬 일은 공관복음의 보고대로 해방절 만찬 당일이었다.
사망 시간 역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서로 틀려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마르 15,25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이 제3시(오전 9시)라고 하는데, 요한 19,14에 따르면 제6시(낮 12시)쯤에 예수는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었다. 예로니모는 성서 사본 필사 과정에서 두 복음서 가운데 하나가 잘못 기록되었으리라 추측하였다. 아무튼 예수는 금요일 정오와 일몰 사이인 오후 어느 시간에 사망하였을 것이다.
6. 매장
그날 저녁, 유다 인들의 날짜 계산으로는 토요일이 시작되자 아리마태아 출신이자 의회 회원인 요셉 요셉은 후에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는지 몰라도, 예수 수난 당시에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의회 회원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지방의회의 회원이었을 것이다. 이 빌라도의 동의를 얻어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다가 삼베로 쌌다. 그리고 아무도 안장된 적이 없는 새 무덤에 예수의 죽음이 빌라도 등 공인들이 확인한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며, 그의 시신이 범법자들과는 달리 경건하게 안장되었음을 암시한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마지막)
예수의 부활
Ⅲ 부활사화의 주요 내용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인 부활사화는 빈 무덤, 여자들에게 나타난 천사의 부활선언, 여러 차례에 걸쳐 여자들과 제자들에게 일어난 예수의 발현, 예수의 전도 명령과 승천 등의 이야기고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사는 더 이상 예수의 지상 생애에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새로운 역사, 곧 교회 공동체의 역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 부활이야말로 나자렛 예수의 모든 활동과 삶의 최종 목적이었기 때문에 부활을 도외시한 예수의 생애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사실상 무의미하다.
1. 빈 무덤
예수가 사망한 지 사흘 뒤인 안식일 다음 날 (유다 인들은 하루 중 몇 시간에 지나지 않더라도 하루로 간주하였다) 막달라의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자들이 이른 새벽에 예수의 시신에 향을 바르러 무덤에 갔다가 무덤 입구의 돌이 굴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천사로부터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즉시 사도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전했으나 사도들은 헛소리로 여기고 믿지 않았다.
한편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은 급히 무덤에 달려가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무장한 경비병들이 무덤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사도들은 후환이 두려워 숨어 지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비록 아무도 예수의 부활 장면을 본 일은 없지만 빈 무덤과 초대교회의 고백 문으로 보이는 천사의 부활 선언은 교회의 부활 신앙을 출발점이 되었다.
2. 예수의 발현
그 외에 성서는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의 여자 마리아, 베드로와 사도들, 주의 형제 dji고보와 엠마오로 가던 글레오파와 다른 한 제자 등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전한다. 복음서의 발현기사는 서로 조금씩 틀리지만 예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에는 일치한다. 게다가 사도들은 예수의 몸에 남아 있던 상처도 보고 만졌으며 그와 함께 먹고 마시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나아가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가 사흘만에 부활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오 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났고, 마지막으로는 자기에게도 나타났다고 한다(1고린 15,4-8).
이 모든 발현은 무덤이 비어 있었던 이유, 곧 예수는 단지 영으로만 부활한 것이 아니고 육으로도 분명히 부활하였음을 증언한다. 그와 동시에 부활한 예수는 공동체 안에 현존하면서 부활 생명과 은총을 계속 베풀어주고 있음을 암시한다.
3. 전도 명령과 승천
부활한 예수는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전도 명령을 내렸다. 예수는 당신 부활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놓았으며, 이 구원은 믿고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실현될 것임을 밝혔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였다. 전도 명령을 내린 후 예수는 제자들을 축복하면서 승천하였다. 사도 1, 9-11은 예수가 부활한지 40일 만에 승천하였다고 한다. 복음서의 내용으로 보아 이 승천은 부활과 동떨어진 별개의 사간이 아니라 부활의 또 다른 측면이다. 예수는 부활과 동시에 천상천하를 다스릴 대권을 받고 영광스럽게 높이 들려졌음을 고백한다.
4. 부활의 의미
부활사화에서 보듯이 예수부활은 처음부터 인간의 경험 세계를 넘어선 신앙의 대상이다. 우리는 부활 직후에 사도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 전혀 모른다. 흔히 짐작하듯이 그들은 예수가 체포되자 뿔뿔이 흩어져 갈릴래아로 도망갔는지 모른다(마르 16,7 ; 마태 28,16 이하 ; 요한 21장 참조). 우리가 아는 것은 부활 소식을 전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이는 막달라의 마리아였고, 매우 빠른 시일 내에 제자들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으며, 예루살렘을 출발점으로 하여 하느님께서 예수를 즉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열심히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 신앙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신앙의 대상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 신앙 공동체 안에는 사도들이 보여 주었듯이 불신앙도 공존한다. 이 불신의 벽을 깨고, 보지 않고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믿으며 고백할 때에 공동체나 각 사람은 진정으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고 그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
예수의 부활은 성부께서 그의 속죄와 구원의 뜻을 받아들이시어 당신 능력을 드러내셨다는 증거이다. 하느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새 생명을 주셨으며 당신이 새로운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예수 편에서는 부활로 구원사업을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었으며,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이 진리임을 증명하였다. 인류는 이 부활로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났다. 따라서 이러한 빠스카(지나감)의 신비를 일상 생활에서도 구현하여야 한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묵은 인간을 십자가에 못박고 부활하였기에 하느님의 자녀, 거룩하고 완전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한다.
부활사화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은 복음 선포이다. 천사로부터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즉시 이 사실을 사도들에게 전하였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들에게 빵을 떼어 주던 나그네가 예수임을 알자 ‘그 시간에 일어나’ (루가 24,33)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의 부활을 전하였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 선포 명령을 내리고 승천하였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야말로 세상 마지막 날까지 모든 사람에게 직접 관계되는 가장 중대하고 기쁜 소식을 지체하지 말고 선포해야 한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소식을 신속 정확히 전달하는 사명을 지닌 복음의 기자들이다. 기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건 현장을 뛰어다니며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건을 보도해 주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기자들도 이 기쁜 소식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열과 성을 다하여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묻히셨으며, 또 성경 말씀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1고린 15,3) 하고 사방에 외쳐야 한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1)
예수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1)
-비그리스도교계 문헌-
이홍기(요한)신부․부산가톨릭대학 : 성서와 전례
서론
1.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으로 믿고 공경하는 나자렛 예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소속 종교와 상관없이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가 어떠한 평가를 내리든 예수는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인류 역사는 그의 탄생을 중심으로 하여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뉜다. 그리고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날에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의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인류 가족의 일원이 된 사람으로서 기본 상식을 갖추려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 어느 정도나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한 메시아요 구세주임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우주만물과 인류의 기원이자 최종 목적으로 삼고, 그의 삶을 본받으며,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그들은 이미 예비신자 양성 과정이나 미사 강론 또는 기타 여러 경로를 통해 예수에 관하여 많이 듣고 배웠으며 지금도 배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생애나 가르침에 관해 어느 정도 상세히 알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성서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라는 예로니모의 말에 동의하여 거의 매일 성서를 읽고 열심히 공부하며 가르치는 성서 봉사자들도 정작 성서의 중심 인물인 예수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것밖에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필자는 서울과 부산에서 개최된 성서주간 특별 연수회에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본 글은 바로 이 강의 초안을 일반 신자, 그 중에서도 성서 봉사자들을 위하여 재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이 본래의 목적대로 일반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교리 지식의 폭을 넓혀 주고, 성서를 열심히 공부하는 신자나 성서 봉사자들에게는 복음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자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대중 교육의 목적에 따라 교의신학의 그리스도론 이나 성서학에서 다루는 예수 생애 연구 등의 심오한 이론은 될 수 있으면 피하겠다. 하지만 예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사항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학자들의 학설이라 할지라도 가끔 소개하겠다.
2. 예수를 알고 연구하려면 그분에 관한 고대 자료들을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초 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수에 관한 자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상세한 자료는 뭐니뭐니 해도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은 아직도 복음서를 역사적 예수의 실상을 그대로 전하는 예수의 전기 정도로 생각한다. 2천년 전에 팔레스티나에서 살았던 나자렛 예수와 신자들이 성서와 교리에서 배운 신앙의 비 그리스도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여긴다. 하기야 19세기 말엽까지만 해도 일반 신자는 물론이거니와 성서학자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였다
예수 생애에 관한 연구는 18세기 중엽에 라이마루스(+1768)가 시작한 이래 다양한 시각과 관점 아래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시각에 따라 예수는 순수한 인간, 신학적인 인물, 위대한 사상가, 소설의 주인고, 유다 교의 랍비, 이적가, 박애주의자, 혁명가, 유다 종파의 한 지도자 등 여러 형태로 묘사되었다.
그러다가 성서학을 비롯하여 신학의 여러 분야에서 일반 문학과 역사학에서 사용하는 방법론을 응용하면서부터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복음서는 단순한 예수의 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난 세기말에서 금세기를 거치는 동안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은 성서학계는 물론이고 교의신학계의 가장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 덕택에 예수 문제는 복잡다단한 문제를 야기 시키면서도 장족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연구 내용과 결과를 염두에 두고 때로는 참조도 하겠지만, 나자렛 예수의 역사적 실상을 밝히는 데 그 목적을 두지는 않겠다. 많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사실 그대로 밝히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역사적 사실을 전혀 도의시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복음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으로 태어나 지상 생활을 하였던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엮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서의 보도 가운데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많은 내용은 필요에 따라 밝히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나 이 글에서 알리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무엇보다도 사실 보도에 앞서 초대 교회가 믿고 고백한 신앙의 증언이다. 따라서 비록 역사적인 시각에서는 애매 모호한 점이 많더라도 일일이 그 역사성을 규명하지는 않겠다. 이러한 태도가 비록 학문 작으로는 미흡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진리보다도 신앙의 진리라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제1장 기본 자료
나자렛 예수는 2천여 년 전에 팔레스티나라는 우리 나라의 강원도 정도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지역에서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사백여 년 전의 인물이라고 해도 그 생애를 자세히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그토록 오래 전에 살았던 옛 인물을 연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다행히도 예수에 관한 문헌은 그 어느 고대 인물에 비해 월등히 많다. 그 문헌들 가운데 예수 생존 당시나 늦어도 1-2세기경에 기록된 문헌들이 여러 모로 가치가 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예수가 직접 기록한 자서전이나 설교 집 같은 것이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쉽게도 예수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예수 시대와 가장 가까운 1-2세기의 예수 문헌들은 크게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과 그리스도교계 문헌으로 나뉜다.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은 다시금 이방 계 문헌과 유다 계 문헌으로 구분되고, 그리스도교계 문헌은 4복음서가 가장 귀중하고 가치 있는 자료이며, 신약성서의 나머지 책들도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1.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
우리가 그리스도 교의 경전인 신약성서를 두고서 굳이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을 먼저 찾는 것은 이 문헌들이 역사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은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 이도 1-2세기에 쓰여진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은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몇 안될 뿐 아니라 그 내용도 신약성서가 전하는 내용의 극소 부분에 불과하여 사실상 새로운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방 계 문헌과 유다 계 문헌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이방 계 문헌
1) 플리니우스(62-114년) : 로마인으로서 예수에 관해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로마제국의 소아시아 속주인 비티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이다. 그는 112년경에 로마의 트리아노 황제에게 신생 그리스도 교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다. “그들(그리스도인들)은 일정한 날 해 뜨기 전에 모여 마치 신께 하듯이 그리스도께 서로 시가를 읊었음은 인정하였습니다”(편지 10장 96항).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이 편지에는 예수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전혀 없고,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중에 예수를 신처럼 대한다는 사실만 전한다.
2) 따치뚜스(55-117년?) : 로마 황제 네로는 64년에 로마 시를 깨끗이 재건한다는 다소 해괴한 발상으로 불을 질러 시의 상당 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는 이 사건의 여파로 일어난 로마 시민들의 소요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비행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어 교회 박해를 단행하였다. 로마 사가(史家) 따치뚜스는 116년경에 기록한 “연대기”에서 이 사실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그(그리스도인)의 창시자 이름은 그리스도인데, 그는 티베리오가 통치할 때에 본시오 빌라도 총독에게 처형되었다”(연대기 15장 44항). 이 연대가 역시 별다른 정보는 제공하지 않지만, 예수가 그리스도 교의 창시자이고 티베리오 황제 때에 빌라도 총독에게 처형된 인물임을 밝히고 있다.
3) 수에또니우스(75-150년) : 로마의 왕실 서기였던 그는 120년경에 “열두 황제의 생애”라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이 책의 ‘클라우디오 황제’(41-54년 재위)편에서 황제가 유다 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사실(49-54년)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황제)는 크레스뚜스의 충동으로 계속 소요를 일으키는 유다 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 위에 언급한 따치뚜스 사가도 그리스도인들을 “크레스띠아노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말하는 “크레스뚜스”는 그리스도임이 틀림없다. 로마 당국의 유다 인 추방에 관한 이야기는 사도 18,2에서도 나온다.
2. 유다 계 문헌
1)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39년) : 모든 비그리스도교게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상세하며 가장 중요한 자료는 유다 사가(史家)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집필한 “유다 고대사”이다. 예루살렘의 사제 가문 출신인 그는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체험한 뒤 로마로 가서 ‘플라비우스’ 황제와 친교를 맺으면서 여러 권의 방대한 책들을 집필하였는데, 그 가운데 “유다 고대사”에 들어 있는 예수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 수로 건설로 야기된 논쟁이 있던 당시에 예수라는 한 현인이 살았다. 그는 이적을 행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유다 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그는 메시아였다. 그는 지도자들의 고소로 빌라도 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며,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무리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야고보는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 가운데 예수를 이적가, 스승, 메시아라 부르고 사흘만의 부활을 언급하는 부분들은 4세기 이전의 어느 그리스도교인이 삽입하였다고 주장한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리스도교 신앙 교리와 일치하는 내용은 후대의 삽입 문일 가능성이 크다.
2) 또 하나의 유다 계 자료는 5세기경에 기록된 랍비 문헌 “바빌론 탈무드”이다. 이 책은 비록 후대의 작품이지만 1세기경의 자료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고문헌(古文獻)의 가치가 있다. 이 책에서는 예수가 율법을 비판하고 마술을 익혀 기적을 행하였으며, 자칭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 사람들을 속이다가 유다 최고 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다음 해방절 전날에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는 ‘판테라’라는 군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벤 판테라’(판테라의 아들)라 불렸다고도 한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예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유다 인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내용의 상당 부분이 복음서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는 점은 눈 여겨 볼 만하다. 이상의 비 그리스도교계 문헌에 나타난 예수에 관한 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 문헌은 비록 예수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지만, 분명 그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이 내세우는 가공 인물이라는 가설은 전혀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① 예수는 팔레스티나에서 살았다.
② 예수는 티베리오 황제 때에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았다.
③ 예수는 사형수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④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은 이 종교의 창시자인 ‘그리스도’에게서 생겼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2)
예수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2)
-그리스도교계 문헌-
2. 그리스도교계 문헌
1. 사도 바오로의 편지
예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모든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50년대에 기록된 사도 바오로의 편지들이다. 예수보다 10여 년 늦게 다르소에서 태어난 바오로는 어릴 때부터 율법과 조상 전통에 관해 철저한 교육을 받은 바리사이였다. 그는 예수 생존시에는 예수를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2고린 5,16).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 할 때에 즈음으로 사도행전에 등장한 그는 그 후에 사형수 예수를 메시아로 선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을 섰다.
그는 36년경에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신비한 체험을 한 후에 가장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이자 사도로 탈바꿈하였다. 그는 비록 그리스도를 직접 보진 않았지만 39년경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고, 그 후에도 안티오키아 교회이 지도자 바르나바와 그 곳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예수에 관해 많이 듣고 배웠으며(갈라 1,17-24), 그 과정에서 초대교회의 전승들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로마 12,4 ; 1고린 7,10-11. 9,14 ; 갈라 4,17. 6,2 ; 1데살 4,8).
그는 45년부터 58년까지 세 차례의 기나긴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2차 여행(50-52년경)과 3차 여행(53-58년) 중에 여러 지방 교회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의 대부분이 신약성서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예수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만 언급하기 때문에 그리 큰 도움이 안 된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드문 편이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초대교회를 통해 전승된 예수의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의 편지 가운데 예수의 생애에 관한 주요 구절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태어나셨으며,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의 부활 이후 권능을 지닌 하느님 아들로 책봉되신 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때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으니, 그이는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였습니다”(갈라 4,4).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는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셨습니다”(2고린 5,21).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친절하심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2고린 10,1).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8).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1고린 2,2).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묻히셨으며, 또 성경(말씀)대로 사흘만에 일으켜지시고, 게파에게, 다음에는 열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1고린 15,3-5).
2. 복음서
앞에서 말한 대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권위 있는 문헌은 4복음, 그 중에서도 공관복음서이다. 그런데 위의 서언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 알려 주는 예수 전기나 역사서가 아니다. 이 책들은 전기나 역사서 에서 중시하는 예수의 출생, 교육, 외모, 성격, 가족 배경 등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복음은 일반 전기에서 흔히 중시하는 예수의 외모, 머리 색깔, 눈매, 신장, 의복 등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복음의 주된 관심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서 시작하여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이다.
예수의 활동 연대조차 정확히 알리지 않는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고서 예수가 언제, 어디서, 무슨 활동을, 어떻게, 왜 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복음서를 바탕으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사실 그대로 재구성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복음서는 예수께 대한 초대교회의 믿음을 증거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심어 주는 책이다. 곧 랍비이자 예언자였던 나자렛의 예수의 활동․가르침․수난과 부활 사건을 전하면서,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주님임을 선포하고, 공동체에 예배 안에 현존함을 밝히는 책이다. 따라서 복음서를 읽을 때에는 최소한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미리 알아두어야 한다
1) 형성 과정 : 복음서는 모두 다음과 같은 형성 과정을 거쳐 책이 되었다. 예수가 부활․승천한 후에 사도들은 그의 전도 명령에 따라 사방에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은 선포하였다. 그들의 설교와 활동으로 많은 유다 인과 이방인이 믿고 세례를 받아 신앙 공통체인 사도 교회를 형성하였다. 이 공동체는 자주 모여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점차로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예수 전승(傳承)이 글이 아닌 말의 형태로 형성되었다.
우리는 이 전승을 구두 전승(口頭傳承)을 이루었고, 그 일부분은 구두 전승과 함께 몇몇 사람들의 노력으로 집성되기 시작하였다. 집성된 전승을 종류별로 보면 예언집, 비유집 등 부피가 작은 문서와 예수 어록집, 수난기 등 소책자 형태 등이 있었다. 복음서들은 복음사가들이 바로 이러한 전승 집들을 기본 자료로 하여 편집한 책들이다.
2) 복음서의 구조와 형식 :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책은 70년경에 기록된 마르코 복음서이다. 그런데 이 복음서의 저자 마르코는 그가 수집한 전승들을 당대의 집필 관습에 따라 예수 전기 형식으로 엮으면서도 세계 문학사상 전대미문의 ‘복음서’라는 새로운 유형의 책을 펴냈다.
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는 대뜸 세례자 요한의 활동으로 시작하여 갈릴래아 지방에서 출발하는 예수의 공적 활동으로 이어진다. 예수의 공적 활동도 주로 이적 행위와 사람들을 가르치는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예수의 활동은 그 후에 여러 지역의 여행으로 계속되다가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으로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은 빈 무덤과 부활한 예수의 발현 이야기로 급작스레 끝나버리고 만다.
마르코 복음이 나온 지 십여 년이 지난 뒤인 80년대에 가서 또 다른 복음사가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 복음과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예수의 어록 집” 및 그들 자신이 각자 별도로 수집한 자료들을 가지고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을 펴냈다. 그들은 책을 편집할 때에 기본자료인 마르코 복음의 구조와 형식과 내용을 따르면서도 자신들의 사상과 독자들의 상황에 맞추어 삭제, 변경, 해설 등 가필을 하여 또 다른 형태의 복음서들을 펴냈다.
한편 1세기 말경에 나온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이 취한 예수의 전기 형식을 따르지만 그 구조나 형식 등 여러 면에서 공관복음과 상당히 다르다. 이를테면 이 복음에서는 예수가 적어도 세 번 아니면 네 번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공관복음에 없는 내용도 가끔 나온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윤곽이나 주제는 공관복음과 대동소이하다.
모든 복음은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어 지상 생활을 하였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한 후 승천하였음을 주제로 삼고 있다. 특히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복음서들의 핵심 주제이다. 그러면서도 각 복음서는 고유 신학과 사상 등 특징을 지니고 있다.
3) 문학 양식 :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각 항목의 문학 양식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 양식을 제대로 모르면 예수의 말씀이나 행적에 간한 항목을 사실 보도 문으로만 생각하여 그릇된 해설을 하기 쉽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복음서는 예수의 전기 형식을 띠고 있지만 전기가 아닌 복음 유형의 책이다. 그뿐 아니라 복음서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항목들도 다양한 문학 양식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를 읽을 때에는 이러한 양식들을 파악해야 그 주제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복음서의 문학 양식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 몇 가지 사항은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다. 특히 복음서의 상당 부분이 당대 유다 문학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럼 먼저 예수 행적 항목의 대표적인 양식을 살펴보자.
① 이적 사화(異蹟史話) : 복음서에는 이적 사화가 상당히 많은데 이들 대부분이 당대의 유다 및 그리스 이적 사화를 닮았으며, 흔히 일정한 도식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사화의 종류에 따라 어떤 것은 예수의 말에, 어떤 것은 예수의 행적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모든 이적 사화는 예수의 신분이나 초자연적 능력을 알리고, 그를 통해 구원이 시작되거나 실현되었음을 증언한다.
② 그리스도 사화 : 복음서의 어떤 부분은 예수의 행적이나 사건을 신화나 전설 형식으로 전한다. 탄생, 어린 시절, 세례, 유혹, 부활 후의 발현 등의 이야기가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이런 이야기는 주로 예수의 특별한 신분과 절대적인 영광을 부각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를 초대교회의 신앙의 관점에서 묘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사화라고 한다.
③ 단순 사화 : 헤로데의 죽음, 요한의 순교 등과 같이 어떤 사건을 단순한 보도 형식으로 전하는 이야기이다.
④ 수난 사화 :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긴 사화는 수난 사건을 매우 상세하게 예수 수난기 형식으로 전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수난의 구원사적 의미를 제시하는 데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담은 말씀 항목 역시 유다 문학 양식을 따르고 있다.
① 율법 말씀 : 대부분 실생활과 관계되는 규범, 지침, 규정들로서 구약 율법 양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율법 말씀이라고 한다.
② 예언 말씀 : 구약 예언서처럼 하느님의 축복이나 저주를 선언하거나 그와 비슷한 어투로 청중을 위로하거나 경고하는 형식의 말씀이다.
③ 지혜 말씀 : 구약성서나 랍비 문학에서 흔히 나오는데, 격언이나 속담 형식의 짤막한 말씀으로 기억하기 쉽다.
④ 비유 : 공관 복음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어떤 진리나 의미를 일상 생활이나 자연 가운데서 소재를 취하여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양식을 말한다.
⑤ 그리스도 말씀 : “나는 왔다”, “나는 - 이다” 등과 같이 예수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자각하고 하는 말씀이다. 예수께 대한 초대교회의 믿음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⑥ 추종 말씀 : 예수와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과 나눈 대화 형식의 말씀이다. 이 내용의 비중이 사건에 있을 때엔 소명사화라고 한다. 예수의 부름과 제자들의 추종을 크게 부각시킨다.
⑦ 논쟁과 대담 : 논쟁은 예수와 반대자들 사이에 이의나 반론을 제기하는 형식의 말이고. 대담은 예수의 제자 또는 그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과 나눈 대화이다. 두 양식은 대체로 상대의 질문, 예수의 재 질문, 상대의 대답, 절정을 이루는 예수의 마감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3)
예수 시대의 정치 세력
1. 로마 제국
예수 시대의 팔레스티나는 로마 제국의 작은 식민지였다. 기원전 6세기말에 로마의 티베르 강변의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는 그 후 현재의 유럽 지역의 대부분과 지중해를 장악한 다음 기원전 63년에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수중에 넣었다. 한편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을 지배하던 그리스의 헬라 문화와 종교 동화 정책에 반발하여 저항 운동에 승리를 거둔 마카베오(하스모네오) 가문이 일시적인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그 후에 내부의 왕권 다툼으로 로마의 도움을 청하였다가 기원전 63년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자초하고 말았다.
예수 시대의 로마 제국은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뚜스(기원전 27-14년)와 티베리우스(14-37년) 두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동방의 로마 속국 지역에서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야 했다. 두 황제는 기나긴 집권기간이 시사하듯이 제국의 정치적인 안정을 정착시켜 평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정치, 경제, 영토 등 여러 분야에서 제국의 번영과 평화를 이루어 ‘조국의 아버지’라 불리었고, 황제의 대명사격인 ‘아우구스뚜스’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이 칭호는 후에 역대 황제들의 공식 칭호가 되었으며 ‘빡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 평화)’ 라는 말은 그와 연관되어 생긴 말이다. 그는 재임시에 한 번도 팔레스티나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그의 권한은 헤로데 대왕과 유다의 로마 총독이 대행하여 영향을 끼쳤다. 예수는 바로 그의 재임시에 탄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후임인 티베리우스 역시 평화의 군주였다. 그러나 재임 후기에 가서는 대인 기피증에 시달려 시골이나 카프리섬에 은둔하다시피 하여 황제 권한을 약화시켰다. 빌라도는 그의 재임시에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재의 15년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루가 3,1).
2.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
그는 이두메아인 안티파텔과 아랍 군주의 딸 사이에 태어난 이두메아 출신의 비 유다 인이었다. 그는 하스모네오 가문이 권력 투쟁을 하는 동안에 로마 황제의 환심을 샀다. 그는 로마 군대의 지원을 받아 3년 간 유다 민족주의자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기원전 37년에 이두메아,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 베레아 지역을 통치하는 유다 왕이 되었다. 로마에 충성을 다하여 막강한 로마 황제의 후원을 얻은 그는 ‘로마 백성과 친밀한 왕이며 친구’로 불리었다. 그는 대사제를 임명하고 최고의회의 권한을 제한하는 등 독재를 일삼고, 수많은 가족과 친인척을 서슴지 않고 처형하는 폭군이었다. 유다 왕국을 솔로몬이래 가장 큰 국가로 만든 정복 가였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개축, 안토니오 요새와 궁전, 세바스떼와 신에리고 건설 등 많은 건물과 도시를 세운 위대한 건설 가였다. 그는 기원전 4년 3월 27일과 4월 11일 사이에 예리고에서 죽었다. 예수는 그의 통치 말년에 탄생하였다.
3. 헤로데의 아들들
헤로데 대왕이 죽자 로마는 헤로데의 유언에 따라 팔레스티나를 세 지역으로 나누어 헤로데의 세 아들들이 통치하게 하였다. 로마는 그들을 왕이 아닌 지방 군주로 임명하였다. 로마 제국은 많은 속국 가운데 비중이 큰 나라의 통치자는 왕으로 임명하고, 비중이 작은 나라의 통치자는 ‘족장’ 또는 ‘사분영주(四分領主)’ 로 임명하였다.
1) 아르켈리우스(기원전 4년 - 서기6년) : 유다와 사마리아의 이두메아의 영주였던 그는 부친을 닮아 폭정을 일삼다가 유다 지도자들의 탄원으로 재위 9년에 갈리아 지방 비엔나로 유배당하였다. 예수의 양부 요셉은 그의 잔인함을 알고서 그를 피해 갈릴래아로 갔다고 한다(마태 2,22). 루가 19,11-27의 돈 관리에 대한 비유는 그의 왕위 획득을 위한 로마 여행과 귀환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 통치하던 지역은 후임자 없이 로마 지방 총독이 직할 통치하였다(루가 3,1).
2)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 - 서기 39년) : 갈릴래아, 베레아 (동 요르단 지역) 등지의 사분영주(四分領主)였던 그를 복음서에서는 단순히 헤로데라고 불러 그의 부친과 혼동하게 한다. 그는 예수 고향 지역의 영주였기 때문에 복음서에 자주 등장한다. 그도 부친처럼 티베리아와 세포리스 건설 등 건설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이복형인 헤로데 필립보(사분영주가 아님)의 아내 헤로데아를 부인으로 삼았다가 세례자 요한에게 질책을 받았으며, 결국 요한을 투옥하였다가 처형하였다(마르 6,17-29). 예수 수난 시에는 빌라도가 예수를 고향 영주이자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로데에게 보냈지만. 헤로데는 별 죄목을 발견하지 못하고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냈다. 그는 말년에 헤로데 아그리빠 1세의 고발로 리용으로 귀양갔다.
3) 필립보(기원전 4년 - 서기 34년) : 비유다인 지역인 동 요르단의 바타네아, 골라니티스, 드라코니티스, 파네아 등 북동 지역의 사분영주였던 그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평화롭게 통치한 군주였다. 재위 기간에 가이사리아 필립보와 베사이다 율리아스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예수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무렵 가이사리아 지방에 있었다(마태 16,3).
4. 로마 총독
로마 황제는 서기 6년에 아르켈라우스를 폐위시키고, 그가 관할하던 지역을 로마 총독이 직접 통치하게 하였다. 총독은 3천여 명의 치안을 유지하는 군대를 거느린 행정 수반으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총독은 지중 해안의 가이사리아에 상주하였으나 축제 등 특별한 시기에는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치안 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정책에 따라 유다 종교와 율법을 세심할 정도로 존중해 주어, 소요의 위험이 없는 한 율법과 종교, 산헤드린과 사제들의 활동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총독에 따라 때때로 무시되어 유다 인들과 심한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1) 역대 총독 : 예수 시대에는 초대 총독 코포니우스로부터 5대 빌라도까지 5명의 총독이 통치하였다. 이들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는 대강 짐작만 할 뿐 정확한 연대는 모른다. 대체로 1대 총독 코포니우스는 6년부터 9년까지, 2대 암비불루스는 9년부터 12년까지, 3대 루푸스는 12년부터 15년까지, 4대 그라뚜스는 15년부터 26년까지, 그리고 5대 총독 빌라도는 26년부터 36년까지 재직한 것으로 추산한다.
초대 총독 코포니우스는 취임 직후에 세금 징수를 위해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이 호구 조사는 루가복음(2,1-2)이 전하는 예수 탄생시의 호구 조사와는 연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2-3대 총독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다. 4대 총독 그라뚜스는 11년간 재직하면서 4명의 대사제를 교체하였다.
2) 빌라도 총독 (26-36년) : 5대 총독 빌라도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정책에 따라 전임 그라뚜스 및 후임 마르첼루스와 함께 가장 오래 재직한 총독 중의 한 사람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완고하고 권세를 잘 부리며 뇌물을 좋아하고 포악하며 거만하고 화를 잘 내며 무섭도록 잔인하였다고 한다. 재임 초기에 유다 종교와 율법을 무시하여 황제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갔다가 군주의 저항에 못 이겨 군기를 치우기도 했다.
플라비우스 요셉은 그가 예루살렘의 수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성전 끔을 압수하였을 때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또 루가 13,1에서는 그가 성전 구역 안에서 제사를 지내던 갈릴래아 인들을 살육하였다고 한다. 그는 예수의 무죄를 알고서도 군중의 소요를 두려워하여 사형 선고를 내리고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36년에는 그리짐산에서 거짓 메시아의 선동으로 집결한 군중을 무차별 체포 살육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고발되어 로마로 불려 간 뒤에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스도 교 전설에 따르면 빌라도는 네로 황제 시대에 자살하였거나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역사적 신빙성은 없다.
5. 대사제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은 신정왕국(神政王國)이었기 때문에, 대사제는 총독이나 왕 등 집권자를 제외하곤 백성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대사제의 복장은 유다 종교와 유다 인들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임명하신 봉사자로 간주되었기 특별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의 날에 혼자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바쳤으며, 안식일과 매월 초하룻날과 삼대 순례 축일을 비롯하여 큰 모임이 있을 때에도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고 예배를 주관하였다. 그는 또한 율법과 성전을 보존 관리하는 책임자였으며,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장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유다 종교의 대표자였기에 봉헌물 중에서 가장 좋은 몫을 차지하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윤택한 생활을 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전임 대사제나 대사제 가문의 사람들도 대사제로 불리곤 했다. 특히 전임 대사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예수 재판 때에 안나스가 그런 경우이다(요한 18,13. 24).
예수 탄생 시에는 헤로대 대왕이 임명한 시몬이 대사제였다(기원전 24-5년). 헤로데는 죽기 전에 시몬을 면직하고 마티아스를 대사제로 임명하였다. 그를 포함해 예수 생전에 12명의 대사제가 재직하였는데, 어떤 이는 한 번의 축일 행사로 물러나고, 또 어떤 이는 두 번이나 대사제가 되기도 했다. 복음서에는 안나스와 가야파만 등장하는데, 이 두 사람 사이에 세 사람의 대사제가 있었지만 모두 1년씩만 봉사하다가 물러났다. 안나스는 로마 총독이 임명한 첫 번째 대사제였다. 그의 가문은 네 아들이 차례로 대사제가 될 정도로 대표적인 대사제 가문이었다. 루가 3,2에는 안나스가 현직 대사제 직에서 이미 물러나 있었다. 가야파(18-37년)는 예수의 처형을 주도한 대사제이다. 그는 안나스의 사위인데, 요한 18,13에서는 그를 그 해의 대사제로 소개한다. 그런데 ‘그 해’가 대사제의 임기가 1년임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6. 산헤드린(최고의회)
동석(同席, Synhedrion)이라는 뜻을 지닌 산헤드린은 유다 교 최고 의회 및 대법원이었다. 그 구성원은 의장인 대사제를 비롯하여, 전직 대사제, 사두가이 계통의 귀족 원로, 주로 율사 출신의 바리사이 등 71인이었다. 70인은 민수11,16의 모세의 협조자였던 원로 70인과 관련이 있다. 이 의회는 율법에 관한 모든 사항을 의결하고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사실상 유다 인들의 종교와 일상 생활 대부분에 영향을 끼쳤고, 이 의회의 결정은 거의 율법으로 간주되었다. 헤로데 대왕은 의회의 권한을 대폭 제한하였지만, 로마 총독들은 오히려 특별한 경우 외에는 간섭하지 않을 정도로 그 권한을 인정하였다.
산헤드린은 민사 및 형사 재판권과 집행권도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 총독들은 의회의 결정과 관계없이 언제든지 권력 행사를 할 수 있었다. 산하에 경찰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경우처럼 체포, 구금 등 일정한 범위 내에서 형 집행도 하였다. 회의는 의장이 소집하였으며, 안식일이나 축일에는 회의가 없었다. 예수의 재판에 관해 각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사항은 산헤드린에게 사형 언도 및 집행권이 있었느냐 하는 점인데, 이에 관해서는 뒤의 수난기 편에서 다시 설명하였다. 아무튼 이 의회는 예수를 체포 심문하고 사형수로 판결하여 빌라도에게 넘겼다.
그 외에 각 지방에서는 23인으로 구성된 소 산헤드린이 있어 지방 사건을 심의 처리하는 등 지방 법정 구실을 하였다(마태 10,17). 그러나 중대한 사건의 경우에는 소 산헤드린이 직접 처리하지 않고 중앙 산헤드린으로 이송하였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4)
예수 시대의 종교적 배경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작은 소국에 불과하였지만, 종교적으로는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의 사회와 문화 등 모든 생활을 지배하는 구심점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으며, 이 믿음을 떠받치는 기둥은 율법과 조상 전통, 예배, 그리고 각종 종교 단체였다. 이들 요소는 유다 인들의 종교생활 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1. 율법과 조상 전통
(1) 유다 인들은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를 하느님의 말씀, 곧 성서로 간주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율법서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율법서를 비롯한 성서 전체는 하느님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수록한 책이며, 유다 인들은 이 말씀을 종교 생활과 사회 생활의 최고 규범으로 받아들였다. 성서는 그들에게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느님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율법(토라)이라는 말 자체를 하느님의 이름처럼 경건하게 대하였고, 그 누구도 함부로 다른 말을 첨가하거나 삭제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성서를 예배 때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자주 봉독 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듣고 연구하였으며, 반드시 거룩한 장소에 보관하였으며, 폐기할 때에는 성서 두루 마리를 항아리에 넣어 은밀한 곳에 숨겨 두었다. 그 덕택으로 우리는 사해 근처의 꿈란 동굴에서 기원 전후에 쓰여진 수많은 성서 필사본을 발견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2) 그런데 율법의 상당 부분이 일반 규정만 제시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밝히는 해설과 그 정신을 바탕으로 구체적 환경에 적용하는 세부 지침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해설과 그 정신을 바탕으로 구체적 환경에 적용하는 세부 지침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해설과 지침은 초기에는 대부분 구두 전승으로 전해지다가 차츰 문서화되었다. 유다 인들은 이 해설과 지침들을 통틀어 조상 전통이라 불렀으며, 이를 기록한 책들을 “미쉬나”라고 하였다. 조상 전통 가운데 율법에 관한 세부 지침을 살펴보면, 명령 248게 항과 금령 365개 항 등 모두 613개항이나 되었다.
유다 인들은 이 지침들을 율법에 버금가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여 준수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 규정이 너무 많고 까다로워 전부 다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완전하게 지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외적이고 형식적인 준수, 곧 하느님의 뜻보다는 지침의 말마디에 얽매이는 사례가 허다하였다.
예수는 율법을 주신 하느님의 뜻은 외면하고 형식적인 계명 준수에 급급한 유다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율법과 조상 전통 가운데 예수 시대의 유다 인들이 특별히 중시한 요소를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안식일 : 유다 인들은 율법 규정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았으며, 이날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든 일에 손을 놓고 철저하게 쉬었다. 본래 고대 원시 사회에서 생겨난 안식일이 왕국 시대에 들어서는 이집트 탈출 사건과 연결되어 선민 기념일, 하느님이 마련하신 거룩한 날, 계약의 표지등으로 정기적인 주간 종교 축일이 되었다. 이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전이나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거나 성서 봉독과 공부, 기도 등으로 하루를 거룩하게 지냈다.
그런데 예수 시대에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 너무 많고 외적인 준수에 치우쳐 본 뜻을 많이 상실하였다. 안식일에 대한 금령을 예로 들면 39가지나 되었는데, 농사를 비롯한 모든 육체 노동, 음식을 만드는 일, 긴 여행 등이 모두 금지 항목에 속했다. 예수는 이러한 맹목적인 안식일 준수 규정이 하느님의 뜻을 흐리게 한다고 보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는 랍비들의 가르침을 들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일깨웠다(마르 2,27).
2) 할례(割禮) : 예수 시대의 모든 남자 아기는 태어난 지 8일만에 성기의 외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받았다. 유다 인들이 이집트에 체류할 때에, 또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 도입한 것으로 보이는 이 할례는 차츰 종교적 예식으로 변하여 계약과 선민의 표지가 되었다. 예수 생전에는 할례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사도 시대에는 유다계 신자와 이방게 신자들이 이 할례 문제로 자주 마찰을 빚었다. 사도 바오로는 할례를 요구하는 유다계 지도자들에게 맞서 마음의 할례인 믿음을 강조하였다(갈라 5,6 ; 골로 2,11).
3) 정 결 : 하느님의 선민(選民) 의식이 투철했던 유다 인들은 거룩하신 하느님을 본받는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자연히 사람을 더럽히는 모든 부정한 행위나 사물을 멀리 하였고, 여기서 많은 정결 규정이 생겨났다. 이를테면 이방인이나 나병 등 특별한 병에 걸린 사람 접촉, 시체 접촉, 부정한 자와의 성교 등을 금지하는 규정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부정을 벗는 정결에도 예식도 다양하였는데, 예를 들면 산모는 남아를 낳았으면 40일 간, 여아의 경우에는 80일 간 정결 예식을 거행해야 깨끗하게 되었다(루가 2,22-24). 예수는 외적인 정결보다는 내적인 정결을 강조하였다(마태23장 ; 마르7,1-13 등).
2. 예배
(1) 성전 : 유일신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은 자연히 예루살렘 성전을 그들의 하느님께 맞 갖은 제사를 바치는 유일하고도 합법적인 장소로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성전이야말로 하느님의 현존과 보호의 장소요 표지였다. 따라서 성전은 국민 생활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 당시의 성전은 바빌론 유배 후인 515년경에 신축한 두 번째 성전이었는데,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0/19년에 개축을 시작하여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 성전은 64년에 가서야 완공되었지만 70년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 성전에서는 날마다 아침(해 뜬 직후)과 이른 오후에 제사를 바쳤다. 예수 시대에는 여기에 로마 제국과 황제를 위한 제사도 추가되었다.
그 외에도 해방절, 오순절, 초막절 등 주요 축일과 매달 초하루와 안식일 등에는 축일 예배를 거행하였다. 모든 유다 인은 성인이 되면 어디에 살든지 삼대 순례 축일(해방절, 오순절, 초막절)에 성전을 방문해야 했으며, 스무 살 이상의 어른은 1년에 한 번 성전 세를 바쳐야 했다. 예수는 이 성전에서 마지막 활동을 하고, 이스라엘의 형식과 위선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였으며, 당신 자신을 새로운 성전으로 내세웠다.
(2) 시나고가(회당) : 집회라는 의미를 지닌 시나고가는 바빌론 유배 중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데, 예수 시대에는 대부분의 도시와 큰 마을에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수십 여 회당이 있었다. 대부분의 유다 인들은 안식일과 축일이 되면 시나고가에 가서 기도, 성서 봉독, 강론 등으로 진행된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였다. 성전과는 달리 시나고가 에서는 제사를 바치지 못하였다. 후대에서는 시나고가 예배가 월요일과 목요일에,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매일 거행되었다.
(3) 종교 축일 : 성전과 시나고가가 유다 인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 장소였다면, 일년 중에 계절에 따라 맞이하는 축일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을 계속 이어주는 고리였다. 주요 축일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해방절 : 초봄 3-4월 무렵에 오는 해방절(니산달 15일)은 과거의 이집트 해방을 기념하고 미래의 완전한 해방을 기원하는 가장 큰 축일이었다. 유다 인들은 이 축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대부분 예루살렘으로 가서 해방절 만찬 등 축제 행사를 거행하였다. 공관복음의 보고에 따르면 예수는 해방절 만찬 중에 새로운 해방과 계약의 기념제인 성체성사를 제정하였다.
2) 오순절 : 해방절이 지난 다음 50일 만에 맞는 오순절은 봄의 수확 축제로서, 이날 역시 대부분의 성인 남녀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그 해에 수확한 첫 곡식을 예물로 봉헌하고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과 맺은 계약과 율법을 기념하였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날에 성령이 강림하였다고 보고하는데, 이것은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계약 공동체인 교회가 탄생하였음을 암시한다.
3) 초막절 : 이 축일은 원래 10월 중순에서 11월 초순 사이에 맞는 가을의 수확 축제(포도, 올리브 등)였으나, 예수 시대에는 광야 체류가 가나안 점령을 기념하는 축일이었다. 많은 유다 인들, 특히 사제들은 이 때에 예루살렘에 가서 한 주간 동안 천막 생활을 하면서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회상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매우 성대한 대중 축제가 되어 단순히 축일이라 불리기도 했다.
4) 대 속죄일(욤키뿌르) : 초막절에 닷새 전에 거행된 대 속죄 일로 이 날 백성들은 단식을 하고 속죄의 제사를 바치며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였으며, 대사제는 일년 중에 오직 이 날에만 흰옷을 입고 지성소에 들어가 짐승의 피를 바쳐 자신과 사제들과 백성이 지은 죄를 속죄하였다.
5) 새해 : 고대 유다 인 달력에서는 가을에 새해가 시작되었으며 그 시기는 8월 중순과 9월 중순 사이(대 속죄일 열흘 전)였다. 그들은 이 날 또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느님의 즉위도 기념하고 그분의 종말 심판을 기다렸다고 하는데 축일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6) 성전 봉헌 축일 : 기원전 164년에 마카베오는 그리스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날은 그 때에 속화된 성전을 정화한 사건을 기념하는 축일이었다.
(4) 일상 종교 생활 : 유다 인들은 성전이나 시나고가에서 거행되는 공적인 예배 외에도 일상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다졌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는 가정에서도 온 가족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안식일 등불을 켜고 안식일을 맞는 종교적 식사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안식일 당일에는 성서 봉독, 기도, 자선 등으로 하루를 거룩하게 지냈다. 그들은 평일에도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정해진 기도(세마, 세모네 에츠레)를 바칠 뿐 아니라, 식사 전후나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중요한 일을 시작하거나 마칠 때 등 하루에도 여러 번 기도하였다.
더 나아가 바리사이를 비롯하여 열심한 사람들은 기도 띠를 이마나 가슴에 두르고 다녔으며, 길을 가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그 자리에 서서 기도하였다.
예수는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이러한 과시용 기도를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였다(마태 6,5-6). 유다 인들은 또한 자주, 특히 축일에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하였고, 가끔 단식 등재를 지킴으로써 잘못을 속죄하였다. 바리사이들의 경우에는 일주일에 두 번(화, 목요일) 단식하기도 하였다(루가 18,12). 예수는 이러한 자선, 선행, 단식 등이 남의 눈을 의식한 위선 행위가 되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5) 종교 봉사자 : 유다 사회가 이렇게 종교 사회이다 보니 성전과 예배 등에 봉사하는 조직적인 단체가 율법과 조상 전통의 규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사제 : 당대의 사제 수는 70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사제들은 24개조로 나뉘어 차례로 성전을 관리하고 예배에 봉사하였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각 조별로 한 주간씩 일 년에 두 번 정도 봉사하였다. 그 외에도 사제들은 사람들의 자문에 응하고 지방 법정에서 재판을 담당하거나 재판석상에서 증언을 하였다. 그들은 백성들이 바치는 제물의 한 부분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일반적으로 필사, 상업 등 다른 부업을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에 인접한 도시 예고는 사제 도시라고 불릴 만큼 많은 사제들이 살았다.
2) 레위인 : 성직 계급의 최하위층에 속하는 레위 인들은 이론적으로는 사제 가문인 레위지파의 후손들이었지만 예수 시대에는 하급 성직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숫자는 만여 명되었으며 사제들처럼 24개조로 나뉘러 한 주간씩 일 년에 두 번 성전에서 봉사하였다. 주된 업무는 예배 중의 성가, 악기 연주, 수위, 기타 사제들을 돕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율법에 규정된 봉헌 물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매우 가난하였다.
3) 서기관(랍 비) : 성서와 율법 선포 자, 율법 스승 등으로 불리던 서기관은 율법과 스승 등으로 불리던 서기관은 율법과 조상 전통을 중시하던 유다 사회의 전문가였기에 그 비중과 활동이 상당히 컸다. 사제나 일반 백성이나 누구든지 서기관이 될 수 있었지만, 몇 해 동안 율법 전문 교육을 받아야만 정식으로 율사 또는 랍비 칭호를 받았다. 그들은 전문가 자격으로 정치나 법정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고문 역할을 했고, 산헤드린의 구성원이 되기도 했다.
또 율사 복을 입고, 모임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하고 길에서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율사 중에는 바리사이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복음서에는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종종 같이 등장한다. 그들은 일반 대중을 율법을 모르는 ‘땅의 백성’이라고 하며 무시하였지만, 군중들은 그들의 권위를 존중하였다.
3. 종교 단체
유다 교 안에는 숫자로나 사회적 역할로나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러 단체가 있었다. 신약성서에는 바리사이, 사두가이, 열성당 등이 등장하며, 플라비우스 요세프는 신약성서에 등장하지 않는 에세니도 추가로 소개한다.
(1) 바리사이 :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에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재건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 시대에 율법과 기도 등으로 이스라엘의 영성 쇄신을 주장하던 ‘하씨딤(경건한사람들)’ 이 아마도 바리사이의 선구자들이었을 것이다. 이 가문이 대 사제직과 왕직을 겸직하자 속화되었다 하여 이탈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6000여 명의 바리사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제자들과 동조자들까지 합하면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구성원은 기술자, 농부, 상인 등 대부분 일반 백성이었으나, 사제와 율사 등도 적지 않았다.
이 단체는 율법과 조상 전통을 올바로 알고 철저히 지키는 것을 신조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일상 생활과 삶 자체를 성화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백성을 가르쳐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것을 주요 목포로 삼았으나, 일반적으로는 율사들처럼 율법을 잘 모르고 제대로 지키지도 않는 백성을 무시하였다.
반면에 백성은 그들의 권위를 존중하였기 때문에 사두가이 등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지나친 율법 지상주의는 권위, 형식, 위선에 흐르는 경향이 많아 예수는 그들의 가르침을 본받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하였다(마태 23,16-33). 게다가 안식일, 정결, 단식 등에 관한 제반 규정을 소흘이 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예수의 태도가 그들의 눈에 좋게 보였을 리 없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보호하는데 기여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의 일부는 예수와도 친교를 가졌으며(루가 7,37), 헤로데가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알려 주기도 하였다(루가 13.31).
(2) 사두가이 : ‘사두가이’라는 명칭은 다윗 시대에 살았던 사제 ‘사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2사무 15,24).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도 바리사이와 비슷한 시기인 마카베오 시대에 등장하여 초기에는 마카베오 가문의 속화에 바리사이와 힘을 합하여 항거하였지만, 점차로 권력층에 밀착하여 바리사이와 대립 관계에 서게 되었다. 그 구성원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그들 가운데는 사제와 산헤드린 회원도 있었으며, 대사제 가문과 인연을 가지는 등 귀족층에 속했다.
사두가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로마 통치에 적극 협조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주의자들이어서 바리사이와는 달리 성서, 그것도 주로 율법서만 인정하고 조상 전통은 배격하였으며, 죽은 이의 부활과 사후 생명, 천사, 신의 섭리, 종말 심판 등을 부인하였다. 대중과의 접촉이 많지 않아서인지 예수 활동 초기에는 사두가이 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았지만 차츰 바리사이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예수 체포 음모에 적극 나섰고, 그들의 대표 격인 가야파는 예수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3) 에세니 : 신약성서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에세니’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를 통해 알려진 단체이다. 그들도 초기에는 바리사이와 같이 마카베오 가문의 속화 정책에 반대한 경건주의 자들이었던 것 같다. 예수 시대에는 4000여 명 정도가 있었는데, 주로 시골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 일부는 사해 서안(西岸)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기도 율법 공부, 노동 등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였으며, 성전 예배에는 속화되었다고 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새 계약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등 철저한 선민 사상에 젖어 속된 사람들과 떨어져 살았다. 나아가 세상을 선 신과 악신, 빛의 군주와 악의 군주의 싸움터로 여겼으며, 종말에는 빛의 군주가 승리한다고 믿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단체가 꿈란 유적지에서 발견된 꿈란 공동체와 동일한 단체라고 보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 업다.
(4) 열혈당 : ‘젤로띠’라고 불리던 이 열혈당은 바리사이의 좌파에 속하지만, 그 활동을 보면 종교 단체라기보다는 로마 식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애국 저항 단체였다. 이 당도 단체로서는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고, 단지 예수의 제자 시몬이 열혈당원이라 불리었다는 사실만 전한다(루가 6,15). 아마도 그는 실제로 열혈당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당의 창시자는 1대 총독 코포니우스의 세금 징수를 위한 인구 조사에 반대하여 서기 6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가릴래아 출신의 유다 였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구호 아래 로마의 식민 통치와 남세 행정 등을 반대하고, 친 로마주의자들에게 테러, 방화, 살육 등을 서슴치 않았다.
아마 그들은 예수의 설교를 듣고 그들의 혁명 과업을 주도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66-70년의 유다 독립 전쟁을 주도하고 마싸다 요새에서 3년 간 저항하다가 대부분 살해되고 말았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5)
예수의 탄생에서 공생활 전까지
1.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
4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집필된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 및 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30여 년간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는 일체 말이 없고, 대뜸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예수의 세례 및 유혹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마르코 저자가 초대 교회의 전승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만큼 초대교회가 선포한 복음은 예수의 공생활과 수난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이전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차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자 80년대에 이르러 마태오와 루가는 이러한 관심을 복음서에 반영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 1-2장의 이른바 유아 사(幼兒 史) 또는 전사(前史)를 통하여 예수의 탄생과 나자렛 시절에 관하여 몇 가지 안 되지만 매우 귀중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두 저자는 이 유아 사를 각각 별도의 전승들을 수집하여 작성하였다.
이 유아 사에서는 복음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예수의 기원과 신분과 미래의 사명 등에 관한 신학에 치중하고 있으며, 전기 형식의 보도에는 별 관심이 없다. 곧 유아사의 주제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약속된 메시아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으로 탄생하였으며, 처음부터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구원자의 길을 걸어갔음을 밝힌다.
(1) 탄생연도 : 대부분의 고대 위인들의 경우와 같이 예수의 생년월일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전혀 없다. 단지 유아 사는 예수가 아우구스뚜스(옥따비아누스) 황제 때에, 헤로데 대왕이 죽기 전에 태어났다는 정도만 보고할 뿐이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는 로마 기원 750년(기원전4년)에 죽었다. 예수가 헤로데 사망 몇 년 전에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2-3년 전 정도로 잡으면, 예수는 기원전 6-7년경에 탄생하였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력 기원은 예수의 탄생 연도를 원년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525년에 디오니시오 수사가 교황 요한 1세의 명에 따라 부활절 날짜를 정하면서 계산 착오로 예수의 탄생 연도를 최소한 4년 늦게 잡았다. 이 디오니시오 연대법을 800년경 독일의 가롤로 황제가 통치할 무렵에 공식으로 사용함에 따라 서력 기원 원년 (1년)이 예수의 탄생 연도로 완전히 굳혀진 것이다.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지내기 시작한 때는 4세기 초엽이다. 원래 12월 25일은 로마에서 275년에 건립한 태양 신전 축성식 때에 지정한 ‘무적의 태양 탄일 축일’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교회가 이 태양 축일을 세상의 빛이며 정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삼았으리라 생각하는데,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나 매우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다.
(2) 탄생 장소 : 유아사가 전하는 예수의 탄생 장소가 베들레헴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베들레헴 탄생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유아사가 고대 위인 탄생 기에서 흔히 보는 전설 체로 되어 있다.
2)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으로서 지리적인 의미보다는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3) 유아 사를 기록한 마태오나 루가가 예수이 공생활 부분에서는 한번도 베들레헴을 언급하지 않고 나자렛을 예수의 고향으로 말한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주장이 일리는 있다고 할지라도 유아 사 전승을 만든 초대 교회는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을 예수 탄생지로 믿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3) 탄생부터 공생활 전까지 : 그밖에 유아 사에는 예수의 탄생 배경, 할례와 성전 봉헌, 동방 점성가들의 방문, 이집트 피난, 헤로데의 아기 학살, 나자렛 귀환, 소년 예수의 성전 방문 등등 여러 가지 사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의 법적인 부모는 다윗 왕가의 후손인 요셉과 마리아이다.
2)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 몸에 잉태되었다.
3)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다윗의 후손이며 구원자이다.
4) ‘예수’는 천사가 지어 준 이름이다.
예수가 나자렛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가 침묵을 지키고 있어 자세히 모른다. 나자렛은 구약 성서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책에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아무런 비중이 없는 시골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이 도시에는 회당도 단 하나뿐이었다(마르 6,1-2). 예수는 “나자렛 사람”이 라 불린 것으로 보아(마태 2,23) 공생활 전까지 생애의 대부분을 나자렛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나자렛 생활은 그곳의 서민 생활과 다름없는 평범한 가정 생활이었을 것이다.
그의 법적인 아버지인 요셉은 예수보다 20-25세 가량 나이가 많았고, 어머니 마리아는 열 대여섯 살 정도 많았을 것이다. 마르 6,3은 예수가 공적 활동을 할 때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만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요셉은 빨리 사망했으리라 짐작한다. 예수의 형제는 야고보, 요세(요셉의 유사어), 유다, 시몬이었고, 그의 누이들도 나자렛에서 살았다고 한다(마르 6,3).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형제 자매는 친남매를 뜻하지만, 사촌이나 가까운 친척 또는 영성 적인 혈육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예수는 나자렛에서 부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다른 유다 인들처럼 일상 기도를 바치고 요셉에게서 율법 교육을 받았으며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을 것이다(마태 13,55). 그리고 청소년기에 들어서서는 요셉으로부터 일을 배워 장인(匠人)이 되었을 것이다. 요셉은 성서에서 말하듯이 목수였는데, 당대의 목수는 단지 건축용 나무를 다루는 기술자일 뿐 아니라 돌을 다루는 석수 등 넓은 의미의 건축 관계나 수공업 관계의 기술자를 뜻한다.
2. 예수의 공생활 시작 전에
(1) 공생활 시작 연도 : 복음서에서 예수의 생애 가운데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부분은 공생활 시작 연도이다. 물론 이 연도도 계산법에 따라서는 몇 년 정도 차이가 난다. 루가 3,1-2은 “티베리오 황제의 치세 십 오 년, 곧 빌라도가 유다를 통치하고 헤로데가 랄릴래아 영주로 다스리고 있을 때에” 세례자 요한이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보고한다. 이 연도를 서기로 계산하면, 빠르면 26-27년(전임 황제와 공동으로 통치한 햇수를 포함시킬 때), 늦어도 28-29년(전임 황제 사망 이후부터 계산할 때)이다. 학자들은 대체로 27-28년으로 보고 있다.
그 때의 대사제는 안나스와 가야파였다고 하는데(루가 3,2), 가야파는 현직 대사제였고(18-37년), 그의 장인이었던 안나스는 전임 대사제였다(6-15년). 요한의 활동과 예수의 활동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르지만,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루가는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할 때의 나이가 서른 살 가량 되었다고 한다(루가 3,23). ‘서른 살 가량’ 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를 일컫는 표현이다. 예수는 기원전5-6년경에 탄생하였으니까 공생활을 시작하던 기원 후 27-28년경에는 이미 삼십 대 초반 또는 중반이 되었다. 또 메시아의 조상인 다윗이 서른 살에 왕이 되었음을 감안할 때(2사무 5,4) ‘서른 살 가량’ 은 예수가 메시아 신분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음직하다.
(2) 공생활 기간 : 공생활 기간도 정확히 계산하기 어렵다. 그 근본 이유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보고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은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지역을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서 해방적 만찬을 지낸 다음 날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생활 기간은 1년이 채 안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가 적어도 세 번, 많으며 네 번까지 예루살렘을 드나든 것으로 보도한다. 그럴 경우 공생활 기간은 짧으면 2년 몇 개월, 길면 3년 몇 개월이 된다. 일반적으로는 뒤에 설명하겠지만 예수의 사망 연도를 계산하여 길어도 3년 미만이었으리라 추측한다.
(3)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 : 4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공생활 시작을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연결시키고 있다. 요한은 요르단강 근처의 사막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왔음을 예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풀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막 인들의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고 하는데, 이것들은 사막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 음식이었다. 이러한 사막 생활 양식을 보고 초대 교회는 그를 제2의 엘리야로 간주하였다.
요한의 주요 역할은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과 메시아의 내림에 앞서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이었다. 요한 이야기에 자주 인용되는 예언서와 ‘선구자’, ‘죄 사함’, ‘회개’, ‘성령’ 등의 내용이나 표현은 모두 구원 시대, 메시아 시대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표지들이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등장한 엘리야이자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통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예수가 어떤 존재인가를 미리 알려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요한이 예고한 대로 어느 날 예수는 요르단 강변에 나타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가 요한의 가까운 친척인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가 어떻게 해서 요한과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세례의 배경은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일부 학자는 예수가 요한의 제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아무런 근거가 없다. 복음서는 단지 요한이 잠시 주저하다가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만 간단히 언급하고, 이야기의 초점은 오히려 세례 직후에 나타난 현상에 두고 있다. 그 현상이란 하늘이 갈라지고 영이 예수 위에 내려왔으며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나타나시어 메시지를 전하는 이야기 형식, 이른바 시현사화(示現史話)에 흔히 나오는 이러한 현상은 예수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속죄하는 종으로서 그의 위대한 사명을 알린다.
(4) 유혹 : 유혹 사화에 따르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는 영의 인도로 광야에 가서 사십 일 동안 단식을 하고 악마에게 유혹을 받았다. 유혹 사화 역시 세례 사화처럼 ‘광야’, ‘사십 일’, ‘들짐승’, ‘유혹’, ‘악마와 천사’ 등 성서적인 언어와 전설적인 양식으로 되어 있어 그 역사적 내막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화에 나타난 가르침은 뚜렷하다. 즉, 예수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또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일생 동안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물질과 영예와 권력 등의 유혹과 시련을 다 겪었다. 그러나 그는 아담의 일반 후손들과는 달리 모든 유혹을 다 이기고 낙원의 시대, 메시아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6)
예수의 공생활
4복음서는 초대 교회의 정승에 따라 예수의 공생활에 내용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30여 년이 넘는 나자렛 생활보다 불과 2-63년밖에 안 되는 공생활 기간 중에 예수가 주로 어떤 활동을 하였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공생활에 관한 부분 역시 복음사가들이 주제, 내용, 문학 양식, 언어, 장소, 시간 등 서로 관련이 있는 전승자료들을 연결시켜 편집하였기 때문에 예수의 활동 배경, 내용, 연대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게다가 예수의 공생활을 크게 행적과 가르침으로 나누고, 그 내용을 개괄적으로 제시하겠다.
1. 활동 지역
예수는 한 번도 팔레스티나 본토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의 활동 무대는 오직 팔레스티나에 한정되었고, 그나마도 주로 유다 인 거주 지역 중심이었다. 비록 일시적으로는 요르단 동부 등 이방인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지역도 다녔지만 어디까지나 통과 지역에 불과 하였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면 나자렛에서 불과 시오 리 밖에 안 떨어진 세포리스나 가파르나움 남쪽 호숫가에 있는 티베리아에는 한 번도 간 흔적이 없다. 그리고 북쪽의 띠로 지방이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가긴 했지만 이방인들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고 반대자들을 잠시 피하기 위하여 갔다.
마르코 복음은 그나마도 활동 지역을 단순화시켜 갈릴래아 활동, 여행 중의 활동 및 예루살렘 활동으로 간단히 구분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갈릴래아 지역의 건너사렛 호숫가와 가파르나움이 활동의 중심지로 나타난다. 이렇게 활동 지역이 좁았지만, 광야에만 주로 머물렀던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예수는 대부분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마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넓은 호숫가, 심지어는 배 위에서까지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
2. 활동 대상
활동 지역에서 나타나듯이 예수가 접촉한 사람들도 대부분 유다 인들이었다. 그는 같은 시대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나 유다 인 철학자 필로와 달리 그리스계 사람들과 별다른 교제를 하지 않았고, 사도 바오로와도 다르게 적어도 겉으로는 이방인 복음 선포에 그리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하다 못해 당대의 유다 랍비들도 이방인들을 유다 교로 개종시키려고 육지와 바다를 구분하지 않고 다녔다고 하지만(마태 23,15) 예수에게는 그런 국제적인 선교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유다 인 중심의 활동은 가파르나움의 이방인 백인 대장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에 대한 행동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며 한 말씀만 하면 하인이 낫겠다고 하니까, 예수는 그의 믿음을 매우 놀라워하며 이스라엘에서는 어떠한 사람에게서도 그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었다고 칭찬하고 그 하인을 낫게 하였다(마태 8,5-13).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딸을 낫게 해달라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에게는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고 노골적으로 유다 인에 대한 편애를 드러냈다(마르 7,24-30).
한마디로 예수는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믿고 기다리던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옛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주기를 기대하는 등 처음부터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불신을 꾸짖고 한탄할 뿐 아니라 차츰 믿음을 가지고 달아드는 이방인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루가 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예수의 태도 변화를 잘 포착하여 예수의 족보를 아담에까지 소급시켜, 하느님을 만민의 아버지로 부각시키고(루가 3,38), 착한 사마리아인(루가 10,25-37), 병이 나은 후 되돌아와서 감사하는 사마리아 출신 나환자(루가 17,11-19) 등 종종 이방인들을 선과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방인 선교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방인들의 길로 가지 마시오”(마태 10,5), “나는 오직 이스라엘 가문의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습니다”(마태 15,24) 등의 표현을 삭제한다.
그리고 예수의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는 부활 후에 사도들에게 만민 복음 선포를 명령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정도 유다 인 중심의 다소 폐쇄적인 듯한 예수의 태도가 그 내면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수가 상대한 사람들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실로 예수는 당대의 유다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일반 대중을 비롯하여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대하고 활동 대상으로 삼았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군중, 부자와 가난한 이, 몸과 마음의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여자와 어린이, 니고데모와 같은 의회 의원과 바리사이 시몬, 심지어는 율법이 접촉을 금하는 세리와 죄인과 창녀, 자신을 그토록 적대시하여 결국 죽음으로 몰아 넣을 유다 지도자들까지도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예수가 특별한 관심을 두고 가까이 한 사람들은 병자와 죄인 등 소외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예수께 도움을 청한 병자나 죄인들 가운데 거절당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 성부께 용서를 청하면서 몸소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는 성부의 뜻을 따라 모든 이를 구원하러 왔다는 신념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전적으로 봉사하였다.
3. 이적활동
예수의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복음 선포와 이적 활동이었다. 그 가운데 먼저 이적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적이 예수의 활동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는 복음서에 수록된 이적 부분의 분량만 보아도 알 수 있다. 4복음서에는 예수의 이적 사화가 모두 37가지가 있다. 여기에 이적에 관한 요약 보고문까지 계산하면 예수가 행한 이적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르코 복음은 후대에 첨가된 부록을 제외하고 모두 661절인데, 그 가운데 무려 209절 약 30% 이상이 직접 간접으로 이적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을 읽으면 예수가 짧은 활동 기간에 계속 이적을 행한 보기 드문 이적 가였다는 인상을 준다.
예수의 이적을 종류별로 보면 병자 치유, 죽은 이를 다시 살리는 소생, 귀신을 몰아내는 구마, 풍랑을 가라앉히고 물위를 걷는 등의 자연 이적으로 나뉜다. 복음서의 이적 사화들은 문학 양식으로 보아 당대의 유다 및 그리스이적 사화와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이적 사화는 세 단계의 도식(圖式)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병자나 그 대리인이 나타나 예수께 도움을 청한다.
이 때에 병자의 이름이나 병세 및 지금까지의 치유 노력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술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병이 어떻게 기적적으로 낫게 되었는가를 알려 준다. 끝으로 목격자들의 환호와 찬양 또는 치유된 자의 선전 등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적 사화들은 전승 과정을 분석해 보면, 세월이 흐를수록 이적 사실을 과장하거나 숫자를 늘리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마르 5,23에는 야이로가 자기 딸이 다 죽게 되었다고 하는데, 마태 9,18에는 그 딸이 방금 죽었다고 한다. 4천 명을 먹인 빵의 이적도 5천 명으로 늘어나고, 남은 빵 조각을 담은 바구니도 일곱에서 열둘이 된다. 사람들이 이적 전승을 전하면서 조금씩 이적을 과장하여 말하는 경향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이적 사화는 예수가 일으킨 이적 자체를 강조하지만, 다른 이적 사화는 예수가 일으키는 이적 자체를 강조하지만, 다른 이적 사화는 예수의 말씀 자체에 더 큰 비중을 두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제반 현상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이적 사화에는 과장, 장식, 전설적 요소 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예수는 분명 이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고, 또 실명 이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고, 또 실제로 많은 이적을 행하였음이 입증된다.
2) 모든 이적은 예수의 신적 신분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알리는 표지이다.
3) 예수는 한 번도 자신의 이익이나 영광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4) 예수의 이적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이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마태 12,28).
5) 예수의 이적은 구약에서 예고된 대로 예수를 통하여 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었거나 이미 실현되었음을 증언한다.
6) 예수의 이적은 신앙을 전제로 하거나 신앙으로 인도하는 등 신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이적 사화는 신앙을 명시적으로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르 2,5의 중풍병자 치유), “내가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습니다”(마태 8,10의 백부장의 종 치유),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하였소”(마르 5,34 ; 10,52)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4. 복음 선포
예수는 복음 선포로 공적 활동을 시작하였고(마르 1.14), 이러한 활동은 공생활 동안 계속되었다. 그의 활동은 외견상 당대의 유다 율법학자들과 비슷하였다. 비록 그가 일정한 기간의 교육을 받고 정식으로 랍비가 된 흔적은 없지만 랍비들처럼 제자 단을 거느리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랍비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랍비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쳐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마르 1,22), 율법을 가르치되 율법의 조문과 형식의 틀을 벗어나 그 내면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가르침은 마태 5장의 행복 선언 등에서 보듯이 흔히 예언자들의 선포 양식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그의 훈화에는 자주 이적이 뒤따라 말의 권위를 높이 주었기 때문에 일반 율사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아무런 편견 없이 그를 대한 사람들은 엘리아나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사실 그는 예언자처럼 활동하였고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비쳤다(마르 8,27-28). 그는 그 어느 예언자와도 비길 수 없는, 그가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했던 세례자 요한 보다 더 위대한 가장 완전한 종말 예언자였다. 그러나 그를 위험시하던 반대자들의 눈에는 율법을 무시하는 거짓 예언자로 보였고,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인들이나 빌라도의 눈에는 열혈당원처럼 내란을 일으킬 수 있는 거짓 메사아로 보였을 것이다.
5. 생활 양식
예수는 세례자 요한 과는 달리 사람들 가운데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소수의 제자 단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느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를 심어 주었다. 제자들을 뽑는 과정도 유다 랍비들과는 달랐다. 랍비들의 경우에는 제자들 편에서 스승을 정하여 따라 다녔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직접 제자들을 뽑았다. 그는 예언자 엘리야가 엘리사를 제자로 부르듯이(1열왕 19,19-20) 건너사렛 호수의 어부들을 제자로 삼았으며(마르 1,16-20) 그들과 함께 다니고 생활하며 교육시켰다.
그는 집도 재산도, 가족이나 친척도 고향도 떠난 사람이었다. 그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면서 지팡이 외에는 빵도 자루도 전대의 돈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속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등 사실상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였다(마르 6,8-9). 인간 생활에 가장 필요한 이 모든 것을 지니지 말라는 것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통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새로운 생활을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생활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가장 뚜렷한 표지이다. 그는 자신의 생활 양식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습니다(마태 8,20).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당대의 유다 인들에게는 독신 생활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비정상적인 생활이었다. 무릇 사람이란 “지식을 넣고 번성하여라”는 창세기의 말씀대로(창세 1,28) 유다 인들은 누구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랍비들은 독신자는 피를 흘리는 사람과 같다고 가르쳤다. 비록 그 때에도 꿈란 공동체 회원 가운데는 독신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일종의 수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사정이 달랐다.
결혼 생활에 관한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거의 틀림없이 예수 자신의 독신 생활과 연간이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으며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습니다”(마태 19,12).
예수가 이렇게 결혼과 가정과 재물과 영예 등 정상적인 인간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기한 근본 동기는 이상적인 수도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데 전심전력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오직 인간을 위하여, 그 누구도 완전히 실천해 보지 못한 극진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정신을 잘 드러내는 것이 의식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훈화이다.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또 여러분의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목숨은 양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을 뿐더러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십니다. ---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다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6,25-33).
이 훈화의 주제는 사람의 목숨이 음식이나 의복보다 귀중하다는 것과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자상하게 보살펴 주신다는 것, 그리고 특히 이러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느님의 의로우신 요구, 곧 그분의 뜻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특이한 생활 방식은 바로 자신을 통하여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삶을 그대로 구현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6. 사람들의 반응
유다 인들은 율사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수많은 기적으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 준 예수를 보고 처음에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군중들은 그가 옛 다윗 왕국의 영광을 되찾을 메시아이기를 기대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인기는 공생활 초기에는 대단히 높았다. 그런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등 유다 지도자들이 보는 눈은 달랐다.
그들도 예수의 가르침의 일부는 수긍하고 받아들였지만,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례 규정 등 율법과 조상 전통을 무시하는 듯한 언사나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시하였다. 더 나아가 많은 군중이 호응하고 몰려드는데 대해 지도층의 입장으로서 상대적으로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차츰 예수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며 기회만 있으면 그를 궁지에 빠뜨리거나 제거하려고 하였다.
한편 군중들도 초기의 호감과 기대가 어긋나자 차츰 예수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예수는 대중 활동을 줄이는 대신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최종 목적지이자 수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과감히 발길을 옮겼다.
7.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활동
예수의 마지막 활동 무대는 예루살렘이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간 외적 동기는 해방절 축제였지만 보다 깊은 내면적인 동기는 그 곳에서 옛 예언자들처럼 수난을 겪고 죽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활동은 복음의 절정을 이루고, 그런 뜻에서 예루살렘은 복음의 핵심 장소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활동은 수난 사건을 제외하면 삼 일 동안 전개되었는데, 활동 내역을 보면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무화과나무 저주와 유다 지도자들과의 논쟁, 성전 파괴 예고와 종말 훈화 등의 활동이 있었다. 이 활동 내역은 복음서에 따라 날짜나 순서가 다소 바뀌기도 한다.
먼저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군중의 열렬한 한영을 받았다. 군중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에게 이스라엘 왕국의 영광을 되찾는 주역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감으로써 정치적인 해방 자나 권력과 영광을 지닌 승리의 왕이 아니라, 겸손한 평화의 군주로서 세상에 구원을 주러 왔음을 명확히 드러내었다. 그런 다음 성전에 들어가 하느님이 원하신 메시아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그는 먼저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고 유다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유다 인들의 형식적이고 폐쇄적인 신앙 자세를 질책하고 모든 사람에게 참된 구원을 가져다 줄 참된 성전이 바로 자신임을 암시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구성될 새로운 이스라엘의 길과 종말에 대비하는 삶의 자세를 가르쳤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하느님은 예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성하실 것이다. 이 공동체는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을 바탕으로 건설되고 또 건설되어야 한다. 이 공동체는 예수가 다시 올 때 이루어질 세상 종말을 향하여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 tko 공동체는 많은 환난, 혼란, 고통 등을 겪을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은 모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인내로이 준비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마지막 활동과 가르침은 유다 지도자들의 적의를 더욱 부채질하여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7)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공생활 가운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들을 교육시키며 반대자들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을 질책하는 등의 이른바 설교 활동은 이적 활동과 더불어 공생활의 주류를 이룬다. 그는 분명 위대한 설교자요 스승이며 예언자였다. 그러나 그는 랍비들과는 달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권위 있게 가르쳤으며, 고대 사상가들처럼 추상적인 내용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구약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생활 환경에 적용시켜 가르쳤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심오한 초자연적 진리를 다루면서도 마음의 문을 열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 문헌은 예수의 행적에 관한 문헌보다 훨씬 많고 그 내용이 복잡하다. 특히 20세기에 들어 와서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역사적 신빙성과 순수성을 가려내는 데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작업은 대단히 어려울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첨예한 문제는 피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강조하는 주제를 중심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요약 제시하였다.
1. 하느님 나라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 주제이자 핵심은 하느님의 나라 또는 하느님의 통치이다. 마르코 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첫 번째 복음 선포의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인데, 이는 분명 예수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 역시 “여러분은 회개하시오. 하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라는 말로 예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마태 4,17). 마태오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유다 관습을 생각하여 하느님을 대부분 하늘로 바꿨다. 그만큼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통치를 알리는 것을 자신의 최대 사명으로 알고 기회 있는 대로 이에 관해 이야기할 뿐 아니라 다른 활동도 흔히 이것과 연관을 시켰다.
(1) ‘하느님 나라’는 그 표현만으로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하느님의 왕권과 통치권이 미치는 나라를 뜻한다. 그러나 예수가 비유나 주의 기도나 행복 선언 등을 통해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예수 자신도 이 나라에 대한 정의를 내리거나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가 가르치는 나라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주님으로 인정받고, 그분의 주권이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보거나 각 사람의 생애를 보면 하느님이 주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러한 하느님이 모든 사람이나 각 사람에게 그 주권을 인정받고 하느님으로서 그들을 다스리시는 나라를 말한다.
예수의 표현을 빌리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가 세상이나 각 사람을 사랑으로 지배하시는 나라이다.
(2) 이 나라는 먼 훗날에 다가올 나라가 아니라 이미 가까이 와 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마르 1,15). 아니 예수와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마태 12,28). 예언자들이 예고한 미래의 하느님 나라가 예수 자신의 행적과 말씀을 통하여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너무 작아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큰 나무로 자라고 있다(마르 4,30-32). 이 나라는 누룩과 같아서 밀가루 반죽 안에 숨겨져 있지만 계속 부풀어서 반죽 전채를 새롭게 한다(마태 13,33). 그리고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많은 장애를 받지만 결국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마르 4,1-9).
(3)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면서도 동시에 미래에 실현되고 종말에 완성될 나라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마태 6,10).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겪지 않을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마르 9,1).
그러나 단순히 먼 훗날 비로소 도래할 나라가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계속 완성되고 완성시켜야 할 나라이다. 그 나라는 무조건 미래의 나라가 아니라 지금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과 대화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인간은 믿음과 희망을 안고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1고린 15,28) 예수가 제시한 그 나라의 백성 자격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4)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면서도 미래에 완성되리라는 사실은 인간의 결단을 촉구한다. 인간이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시민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참다운 하느님, 주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한다.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 내용을 복음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가난하게 되는 것. 물욕에서 벗어나는 것 (마태 19,16),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처럼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마태 18, 1-5).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마태 7,21)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이 이러한 회개를 바탕으로 복음을 믿고 실천하면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요 은총이며 하느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는 기적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용서는 인간에게도 용서를 요구한다. 인간도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마태 18,23-24).
이 나라가 하느님을 주님으로 받드는 데서 시작한다고 해서 말로만 “주님”이라고 고백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7,21).
(5)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라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함을 뜻한다. 모든 악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이 천지 창조 때에 마련하신 평화, 의로움, 자유, 생명이 실현됨을 뜻한다. 예언자들이 예고한 바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 한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이사 35,5-6 ; 마태 11,5)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다. 예수는 이 나라가 도래한 표징으로 병자들을 낫게 하고 죽은 이들을 살려 주었다. 그 나라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이며, 민족과 나라와 이웃 사이의 장벽이 없는 나라이다.
가난한 이가 부요 해 지고, 굶주리는 이가 배부르며, 우는 이가 웃는 나라이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펼쳐지고 완성되는 나라이다. 이 사랑은 나라와 민족을 구분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유다 인이든 이방인이든, 선인이건 악인이건 모두가 초대를 받았다. 모든 이에게 개방된 나라다. 따라서 이 나라에 들어가 그 구원을 누리는 것은 각자의 결단에 달렸다. 예수가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녀답게 살아갈 때 이미 그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가 있다.
2. 하느님
하느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유일신, 창조주, 세상 통치자, 계약과 율법의 제정 자,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자 보호자 등 유다 인들의 신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내용은 창조주요 심판관이신 하느님보다는 인류 구원을 위하여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자상하신 하느님이다.
예수는 당대의 유다 인과는 달리 하느님을 직접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당신 자신의 아버지이자 우리의 아버지로 불렀다. 물론 유다 인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불렀지만(신명 14,1 ; 32,6 ; 이사 63,16 ; 시편 103,13 ; 말라 2,10) 일상 호칭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가 가르친 기도나 비유 등에서 나타나듯이 하느님을 무엇보다도 바로 아버지로 대하였으며 이 점이 새로운 점이다. 이 사실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얼마나 자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에는 44번, 요한 복음에는 120번이나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그이 하느님께 대한 가르침이 집약되어 있다. 아버지 하느님은 더없이 자비로운 분이며 당신 자녀들을 인자로이 돌보시는 분이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루가 6,36).“여러분은 악하면서고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당신에게 청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후하게 좋은 것들을 주시겠습니까!”(마태 7,11). 그분은 참새나 들풀 같은 하찮은 것도 돌보시고, 특히 인간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이다(마태 10,29-30). 그분은 두렵고 지존하신 분이기에 앞서 모든 사람을 자식처럼 걱정하고 돌보시는 분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버지께 청하기도 전에 그분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마태 6,8).
그분은 인간의 연약함도 잘 알고 계시며, 한없이 자비로워 항상 용서하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뉘우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꺼이 용서하신다(루가 18,9-14). 모든 이간은 하느님 앞에 죄인이며 회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아무런 구분 없이 모든 이를 자녀로 대하시는 하느님께 되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하느님을 거절하는 사람은 계속 죄에 속박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진정 이러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그분이 그토록 아끼시는 사람들을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등 모든 면에 있어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마태 5,44-45).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여 주었다. 그가 가르친 아버지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 나라와 구원을 베풀 준비를 하고 계신다. 인간이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가 되려면 예수가 가르치고 보여 주었듯이 회개하여 예수와 같이 효성을 다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3. 예수의 신분과 사명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예수 자신의 신분에 대한 사항, 곧 예수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말하였는지에 대한 문제는 해석 학 상 매우 어려운 주제이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는 ‘예수 자신의 의식’ 또는 ‘예수의 메시아 의식’이라는 주제로 다룬다. 이 주제가 어려운 이유는 복음서는 예수의 활동이나 가르침에 관심이 있지 예수의 심리나 의식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고 다루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예수가 자신에 대해서 직접으로 밝혔으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신분이나 사명을 밝히는 부분과, 그 밖에 복음서에서 강조하는 예수에 관한 사항을 종합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도 대부분 부활 후에 형성된 신앙 고백 문이나 초대교회의 예수 신앙의 표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하느님의 아들 :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제시하는 본문은 마태오 복음에 11번, 마르코 복음에 7번, 루가 복음에 9번, 사도행전에 2번, 요한 편지에 17번, 바오로 계 편지에 18번 나온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을 직접 하느님의 아들로 표현하는 부분은 공관복음에는 한번도 없고 요한 복음에 는 6번 나온다.
그 외에 예수가 자신을 단순히 아들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요한 복음에 14번, 마태오 복음에 3번 나오는데, 이 말은 사실상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표현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복음서는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후손, 하느님의 영을 지님 준 등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의미를 지닌 표현이 많다. 그 가운데 예수의 신분을 가장 극적으로 잘 드러내는 대목은 세례 사화와 변모 사화이다(마태 3,17 ; 17,5). 이 두 장면에서 하는 또는 구름에서 울려 나온 소리는 “이는 애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이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문인 이 소리는 성부와 예수와 특별한 부자 관계를 공적으로 장엄하게 선포한다.
공관복음에는 그 외에도 성부와 예수의 특별한 관계 또는 예수의 특별한 신분을 암시하는 대목이 많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3,31).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매우 놀라데 되었다. 그분은 그들의 율사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그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 7,29). “인자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당신들이 알도록 하겠습니다”(마르2,10).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마태 10,37).
“ ‘당신이 찬양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 --- ‘내가 그입니다. 여러분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또한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르 14,61-62).
요한복음도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여러모로 묘사하는데 그 내용을 대강 압축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성부의 외아들이며,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16).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겨 주셨으며(3,35), 당신 친히 하시는 모든 일도 그에게 보여 주신다(5,20). 그는 하느님이 파견하신 이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3,34). 그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한다. 예수는 이런 엄청난 발언으로 말미암아 신성모독 죄인으로 몰리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었다(요한 10,31-33).
(2) 메시아 : 신약성서에는 메시아를 뜻하는 ‘그리스도’하는 말이 매우 자주 나온다(복음서에 55번, 그 밖의 책에 474번). 그러나 예수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단지 4복음서에 8번나올 뿐이다. 그나마도 그 본문을 분석해보면 편집자의 삽입 문이거나 초대교회의 고백 문이다. 실상 예수 자신은 한번도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거나 의식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없애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마태 5,17)라는 표현은 당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사상을 잘 반영한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한 4,36)나 대사제 가야파의 질문(마르 14,61)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보면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었다.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하기를 꺼린 이유는 유다 인들이 가진 그릇된 메시아 관념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치 권력과 영광을 지닌 현세적 메시아를 기대하였지만,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는 분명 아니었다. 예수는 이러한 그릇된 기대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베드로가 메시아 고백을 하였을 때 즉시 침묵을 명하며 자시 앞에 놓인 수난의 운명을 예고하였다(마르 8,29-31).
그리고 군중들의 기대와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도 승리와 영광과는 멀디 먼 작은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갔다. 그는 끝까지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임을 자처하고 스스로 수난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정작 영광을 완전히 등진 수난기간 중에는 아무런 오해의 우려가 없었기에 유다 인이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하면서,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선언하였다(요한 18,36-37). 그는 십자가의 죽음이 보여주듯이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과 인간을 위한 봉사와 희생으로 악과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승리한 십자가의 메시아였다.
(3) 인자(人子) : 신약성서에는 인자라는 말이 85번 가량 나오며, 그 대부분이 복음서(공관복음 70번 가량, 요한복음 12번)에 집중되어 있는데, 구약 인용문을 빼면 단 한 곳(사도7,56) 외에는 언제나 예수가 한 말이다. 이로 미루어 비록 그 상당 부분은 초대교회의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분명 예수는 자신에 대해 메시아나 하느님의 아들과는 달리 인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가 아니고 전형적인 히브리어이다. 그리고 그 뜻은 문맥에 따라 모든 사람, 기록자나 발설 자 자신, 이스라엘의 대표자, 종말에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대리인, 하느님의 백성 등 여러 가지이다. 그것은 곧 유다 인들도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만큼 인자는 그들에게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이 단어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1) 예수의 지상 생활 및 활동과 관련된 말 : 예수는 ‘인자’를 자신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다고 할 때(마르 2,10)와 안식일에 대해 전권을 가지고 있음(마르 2,28)을 선언할 때에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은 하늘의 샌 여우보다 못해 머리 누일 곳도 없는 처지임을 j밝히거나(마태 8,20 ; 루가 9,58), 사람들이 자기더러 먹고 마시기를 좋아한다며 비난한다고 할 때(마태 11,18-19)에도 이 말을 쓴다. 이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인자라는 말에는 예수가 하느님의 파견을 받고 이 세상에 온 하느님의 대리인이요 종말의 예언자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유다 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살고 있다는 것과, 사람들은 그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배척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2)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말 : 인자는 세 번의 수난 예고를 비롯하여(마르 8,31 ; 9,31 ; 10,33-34)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문맥에 자주 쓰인다. 아마도 수난과 관련된 말의 대부분이 부활 후에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수난 전에도 예수는 분명 이 말을 수난의 운영을 지닌 자신을 드러낼 때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를 찾던 군중들의 그릇된 기대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마르코는 이 사실을 ‘메시아 비밀’ 이라는 특이한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비록 자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지만 수난을 통해서만 그 신분이 드러나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종말 재림과 관련된 말 : 인자라는 말은 또한 예수가 종말의 심판자로 올 것을 예고하고 사람들의 준비와 결단을 촉구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마르 13,26 ; 14,62 등). 이 경우에는 그 문맥으로 보아 다니 7,13-14에 나오는 인자의 쓰임새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전형적 묵시문학적 표현이다. 예수는 이렇게 자신이 마지막 날에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나타나 사람들의 최종 운명을 좌우할 특별한 신분의 인물임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결단을 촉구한다.
4. 인간 생활
예수는 유다 교에서 삶이 근본 지침으로 삼는 율법과 조상 전통을 비롯하여 구체적인 인간 생활에 관해 자주 언급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가르침이 언뜻 들으면 율법이나 계명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인상 때문에 예수는 결국 반 율법 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잘 보면 분명 그는 율법을 인간 생활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는 결코 새로운 율법이나 계명을 도입하지 않았다. 단지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밝히거나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근본 뜻을 외면하고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율법 준수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예리하게 비판하거나 단죄하였다. 그는 또한 그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결혼, 제물, 공동 생활, 폭력, 국가 권위, 납세, 이웃에 대한 태도 등 구체적인 윤리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새로운 윤리 교사로 새로운 윤리 지침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의 기본 정신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통치를 실생활에 구현하는 데 있었다. 이를테면 산상설교 등에서 자주 가난을 강조했지만 가난을 구원의 절대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 가난 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누가 당시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편 뺨마저 돌려대시오”(마태 5,39). “ 당신에게 청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당신에게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니 마시오”(마태 5,42). “남을 심판하지 마시오”(마태 7.1). 등 이웃에 대한 태도도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르치지만 결국 그 모든 내용은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의 근본 정신을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이러한 이웃 사랑은 율법서와 예언서의 근본 정신이고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 해주기 바라는 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해주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입니다”(마태 7,12).
예수는 언제나 인간 생활의 기준이 하느님의 뜻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면 가난한 이, 자비로운 이, 온유한 이가 되고 그렇게 되면 굶주린 사람을 돕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 생활이다. 한마디로 예수가 가르치는 올바른 인간 생활은 율법과 예언서의 기본 정신인 하느님의 뜻에 있고. 이 뜻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8)
예수의 수난과 부활
Ⅰ. 개 요
1. 수난과 부활
4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사화는 마지막 부분을 이루면서 서로 연결된 단일 사화로서는 그 분량이 가장 많다. 예를 들면 가장 오래된 마르코 복음의 경우 수난사화는 책 전체의 약 20%를 차지한다(661절 가운데 127절). 또 수난사화는 복음의 앞부분과는 달리 작은 사건이라도 매우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사화는 비록 예수의 수난 전기는 아니지만 전기에 가까울 정도로 장소, 시간, 인물, 사건 내역 등을 가장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 복음사가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알리고자 한, 복음의 중심이요 절정임을 드러낸다.
사실 성서의 증언을 보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초대교회의 설교, 교리 교육, 전례 등 모든 분야의 주제를 이루는 신앙의 핵심이었다. “내가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묻히셨으며, 또 성경 말씀대로 사흘만에 일으켜지셨습니다”(1고린 15,3-4). “실상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1데살 4,14). “우리는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을 믿습니다. 그 이는 우리의 범행들 때문에 넘겨지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2. 전승의 형성 동기와 역사성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에 관한 내용은 신앙고백, 설교, 전례 등 여러 형태의 짤막한 전승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긴 수난 전승을 이루었는데, 그 동기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사도들이나 설교자들은 이토록 중요한 사건의 이유 또는 의미를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했다.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인 예수가 왜 하필이면 유다 인들에게는 걸림돌이며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되는(1고린 1,23) 십자가의 죄인으로 죽었는지 이해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사건 자체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야 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이나 설교자들은 구원 사건의 핵심이자 신앙의 본질인 수난의 실상을 자세히 알려주려고 노력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수난과 부활사화는 복음 안에서 가장 깊고 상세할 뿐 아니라, 전기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도 신학적 의미가 풍부하다.
먼저 전기 형식의 관점에서 볼 때 수난사화는 복음의 어느 부분보다 때와 장소, 인물 등 사건 내용을 매우 상세히 전한다. 그리고 그만큼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최고의회 심문, 총독의 사형 언도, 슬피 우는 여인들, 축제 때의 죄수 특사, 사형 집행인들이 사형수의 옷을 나눠 갖는 일, 십자가 처형과 죄 명패 등 수난사화의 상당 부분이 당대의 풍습과 일치하는 점으로 알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진술 내용이 역사와 맞지 않는다면 그 시대의 독자들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수난사(受難史)나 수난 전기(傳記)는 아니다. 역사 서술이라면 체포 동기, 극형의 법적 근거, 처형 실상 등 상식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항을 크게 다루는 반면, 체포, 최고의회 심문, 빌라도 재판 등 덜 중요한 사항은 간단히 다루었을 것인데,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사하는 결국 역사적인 수난 사건을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독자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은 수난과 부활의 신학이다. 다시 말해 이 사화는 보도 형식을 띤 수난과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3. 주요 사상
4복음서는 사건의 실상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면서고 그 일차적인 목표는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고 독자들의 신앙을 강화하는데 두고 있다. 따라서 수난과 부활 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하느님의 뜻에 의한 필연적인 수난 : 예수는 구약의 예언대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난 하였다. 그는 겉으로는 적대자들의 모함과 증오로 희생되었지만, 수난의 참된 동기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어느 부분보다도 구약성서를 직접 간접으로 많이 인용한다(시편 22, 414, 69, 110장 ; 이사 53자의 야훼의 종의 노래 등). 자그마한 사건 하나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사건이나 예언과 연결시켜 이 모든 것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이 실현된 것으로 증언한다.
2) 예수의 신적(神的) 신분과 사명 : 복음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신적 신분과 사명을 선포하는 데 주력하는데, 이 사실은 특히 수난과 부활사화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마르코의 예를 들면 예수의 수난은 복음서 전체에서 숨겨두었던 그의 신분과 사명을 푸는 열쇠이다. 수난 직전까지 자기 신분을 숨기던 예수는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냐고 묻는 대사제나 빌라도의 질문에 시인을 하고(마르 14,61-62 ; 15,2), 십자가 형벌을 집행한 백인대장은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다(15,39). 이와 같이 복음서들은 체포, 심문, 죄목, 조롱, 십자가의 죽음과 그후의 사건들을 한결같이 예수의 신적 신분과 사명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삼고 있다.
곧 예수는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도 성부의 뜻을 따르고자 스스로 죽음을 맞아 인류를 구원하였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메시아이고 하느님의 아들임이 드러났다.
3) 속죄와 구원의 가치 : 최후 만찬 중에 예수는 “이는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입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 여러분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루가 22,19-20)라고 하였다. 이 “여러분을 위하여” 또는 “많은 이를 위하여”(마르 14,24)는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잘 밝혀 주는 표현 가운데 하나 이다. 예수를 수난과 죽음으로 몰고 간 근본 동기는 외적으로는 신성 모독 죄나 정치 반란죄 때문이지만, 그 내면적인 동기는 바로 인류가 저지른 죄 때문이었다.
수난사화가 즐겨 인용하는 야훼의 종의 노래는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이사 53,5). 예수는 한마디로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수난을 겪었고, 죽음의 운명을 지녔던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러한 대속과 구원을 위한 수난과 죽음은 그의 목표이자 결실이었다. 평소에도 그는 사람들에게 시중들고 봉사하는 위타(爲他)의 삶을 살았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마르 10,45). 이러한 의미를 사도 바오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문을 빌어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습니다”(1고린 15,3-4).
4)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모범과 경고 : 복음사가들은 수난사화를 통하여 예수를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제자들이나 그의 수난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의 잘못을 명시하여 독자들도 같은 잘못에 떨어지지 않도록 경고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스승 예수처럼 어떠한 번민과 시련 중에도 성부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는 정신을 익히며, 죽기까지 성부께 신뢰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그뿐 아니라 배반자 유다, 졸다가 겁을 먹고 비겁하게 도망간 제자들,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 십자가를 지고 간 키리네의 시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불의 한 재판을 한 빌라도, 예수를 조롱하고 채찍질한 군인들과 군중 등 수난사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사건 안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버리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따르며 죽는 것이 그의 부활에 참여하는 길이며, 예수처럼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임(요한 15,12-13)을 깨닫는다.
Ⅱ. 수난사화의 주요 내용
1. 최후만찬
예수는 수난 전날 저녁에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집의 이층 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였다. 마르코 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은 이 만찬 날짜를 유다 인들의 니산달 15일에 거행하는 해방 절 만찬 일자와 동일시하는 반면, 요한 복음은 그 전날로 이야기하고 있다. 날짜 문제는 그 전날로 이야기하고 있다. 날짜 문제는 아래의 예수 사망일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만찬이 예수의 사망일 전날인 목요일, 해방 절 만찬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었음은 분명하다.
이 만찬 때에 예수는 식사를 시작하면서 먼저 빵을 손에 들고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다시금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며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만찬 끝에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하였다. 교회는 이 기념 명령에 따라 주의 만찬, 곧 성찬을 정기적으로 거행한다.
그런데 이 빵과 잔의 말씀을 성서의 표현들과 연결시켜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많은 고통을 받고 생명을 바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예수가 죄를 대신 기워 갚고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린 예수 자신을 음식으로 먹고 마시면서 그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찬을 주님의 주음과 부활의 기념제라고 한다.
나아가서 최후만찬은 그 환경, 재료, 절차 등으로 보아 해방 절 만찬이거나 적어도 유다 인들이 축제일이나 친목 모임 등에 흔히 거행하는 종교적 공동 식사였다. 유다 인들은 이러한 식사를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를 다지는 신성한 행사로 여겼다. 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공생활을 보면 예수는 제자, 세리, 죄인, 바리사이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즐겨 식사를 하고, 이러한 식사를 흔히 그가 평소에 가르치고 실천한 자비, 용서, 구원, 친교, 나눔의 자리로 삼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찬은 공동체가 예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와 한 혈육의 가족이 되고 그를 통하여 하느님 및 이웃과도 가족이 되어 서로 가진 바를 나누게 하는 친교와 나눔의 잔치이다.
2. 게쎄마니의 번민과 체포
최후만찬을 마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게쎄마니에 가서 곧 닥칠 수난에 대한 공포와 번민 등으로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는 한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토록 고통을 싫어하면서도 인간을 구원하려는 성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여 그 시련을 용감히 극복하였다. 이러한 불굴의 의지는 다음날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예수가 이렇게 번민하고 기도하고 있을 때에 유다 지도자들이 보낸 군중들이 예수의 제자 유다를 앞세우고 나타나 그를 체포하였다. 유다 의 배반동기에 대해서는 복음서가 침묵을 지킨다. 그는 아마도 스승에게 걸었던 기대가 완전히 어긋나자 실망과 좌절을 겪으면서 스승을 팔아 넘겼을 것이다.
그리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스승을 배반하지 않겠다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
3. 최고의회의 심문과 빌라도의 재판
예수는 가야파 대제관의 집으로 끌려가 거기서 최고의회의 심문을 받았다. 최고의회의 심문은 율법 위반 사실을 심의하는 종교적 재판이었다. 고발 자들은 온갖 불리한 증언으로 예수를 고발하였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그들은 예수가 자신을 종말 심판관, 곧 메시아로 자처했다는 이유로 독성 죄(신성 모독 죄)라는 판결을 내린다. 이 죄는 중대한 율법을 거스른 범법 행위로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고의회는 직접 형을 집행하지 않고 예수를 총독 빌라도 에게 넘겼는데, 그렇다면 최고의회는 사형 언도와 집행을 할 권한을 갖지 않았단 말인가. 일부 학자들은 비유다 인이 금지된 성전 구역에 들어갔거나 스테파노의 경우처럼 투석형을 받을 때에는 최고의회에 사형언도 권과 집행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정확한 규정은 잘 모른다. 최근의 학계 동향은 최고의회에 사형 언도나 집행권이 없었다고 보는 추세에 있다. 스테파노의 경우에는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분노한 군중들이 돌로 쳐죽인 것 같다. 그러한 돌발적인 사건은 가끔 있었다고 한다.
총독관저에 압송된 예수는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았다. 빌라도는 예수가 과연 유다 인의 왕이 되려고 했던가를 집중 추궁하였다. 그의 재판은 최고의회의 재판과는 달리 정권 탈취 음모 여부를 가리는 정치 재판이었다. 심문 결과 빌라도는 예수가 유다 인들의 음모와 시기에 의해 고발되었음을 알았기에 매질이나 해서 해방 절 축제 특사로 풀어 주려고 했다. 축제 특사(特赦)는 로마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의 제도였다. 그러나 로마인들도 특사를 베푸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군중의 반발과 소요를 두려워하여 예수에게 유다 인의 왕이 되려고 했던 죄, 곧 정권 탈취 음모 죄목(반란죄)으로 사형 언도를 내리고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넘겼다. 그러나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서는 예수를 사형수로 만든 것은 인류의 죄악이었음을 거듭 증언한다(1고린 2,8 ; 사도 2,23 ;4,10 ; 1데살 2,14-15등).
형이 확장된 후에 예수는 군인들의 손에 넘겨져 당대의 사형수에 대한 처벌 관습에 따라 참혹하게 매를 맞고 조롱을 당하였다. 자주색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쓰며, 군인들이 무릎을 끓고 경배하는 등의 모든 조롱과 모욕은 유다 인의 왕이라는 예수의 죄목에 상응한다. 그만큼 예수는 철저하게 치욕을 겼었다.
4. 십자가 처형과 죽음
매질과 조롱이 끝나자 형 집행 자들은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타로 끌고 갔다. 일반적으로 죄수는 십자가의 횡목(橫木)만 지고 가고 종목(從木)은 처형 장소에 미리 세워 두었다.
형장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의 통행이 많았는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청사였다. 예수는 도중에 기진맥진하였기 때문에 키레네 출신 시몬이 붙들려 예수의 십자가를 졌다. 복음서는 키리네의 시몬을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의 표본으로 내세우는 듯한 인상을 준다. 형장에 도착한 예수는 옷을 벗기우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의 옷은 관례에 따라 군인들이 제비를 뽑아가졌다.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정치 반란자, 탈영자, 신전 약탈자 등 제국의 안정과 치안을 위태롭게 하는 중범 자들을 처형하는 가장 처참하고 기나긴 고통을 주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로마의 유명한 사상가인 치체로는 이 형벌을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형벌”, “십자가라는 말조차 로마 시민의 몸, 생각, 눈, 귀에서 치워야 할 극형”이라고 표현하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십자가 죽음이 모든 죽음 가운데 가장 처참하고 불쌍한 형태라고 하였다.
로마 제국은 이 형벌을 주로 노예들에게만 내리고, 로마 시민이나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십자가 형벌을 일명 노예형벌이라고도 하였다. 물론 지역 총독들은 이 원칙을 때때로 무시하였다. 처형자들은 사형수의 손발을 십자가에 못박거나 끈으로 동여매었는데, 예수께는 못을 박았으리라 본다. 십자가 윗 부분에는 죄 명패를 달아 놓았는데, 4복음서의 명패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은 ‘유다 인들의 왕’이다. 요한 19,19-20에는 이 죄목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상처와 출혈로 인한 염증, 고열, 갈증, 호흡장애, 인대와 근육과 신경의 고통 등 갖가지 고통을 장시간 겪었다. 일반적으로 하루 이틀 정도 시달리다가 죽었는데, 어떤 기록에는 8-9일까지 걸렸다고도 한다. 그런데 예수의 경우에는 불로가 몇 시간 안되어 운명하였다. 그 정확한 사인(死因)은 알 수 없으나 게쎄마니의 번민, 철야 심문과 공포, 채찍, 과다 출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심장마비를 이르켰을 가능성이 크다.
4복음서를 종합하여 보면 j예수는 십자가에서 일곱 번 말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역사성은 밝힐 방도가 없지만, 분명 예수는 평소의 태도와 정신에서 보여 주었듯이 그 죽음의 고통 중에서도 원수들을 이해 기도하고 죄인들을 용서하였으며, 인류 구원을 원하신 성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여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으며, 성부를 신뢰하면서 자신의 영을 맡겼다. 그는 평소에 가르치고 실천하였던 자비, 용서 순종, 기도 , 신뢰, 사랑 등을 십자가 위에서 가장 완전하게 실천하고 모범을 보여 주었다.
5. 사망 시기
예수의 사망 시기는 공생활 시기와 기간 및 최후만찬 시기와 관계가 있다. 사도 바오로의 회개 시기도 예수의 사망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예수는 분명 바오로의 회개 이전에 죽었다. 그런데 바오로의 회개는 갈라 1,18과 2,1(바오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갈리오의 비문 등을 통해서 계산할 때 33-35년경에 있었다. 복음서는 모두 예수 사망일이 안식일(토요일) 전날, 곧 금요일이었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그 전날인 목요일 저녁에 최후만찬이 있었다. 단지 이 목요일을 공관복음은 유다 해방절 만찬일인 니산달 15일이었다고 하고, 유다 인들은 저녁 해가 넘어 가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측에서 보면 해방절 만찬은 니산달 14일 저녁에 거행되지만, 그들에게는 15일을 시작하면서 거행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해방절 만찬일 전날이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그러면 예수 사망일은 니산달 15일 금요일이거나(공관복음), 해가 지기 전까지는 아직 15일이었다. 아니면 니산달 14일 금요일이었을 것이다(요한복음).
학자들의 연대 계산에 따르면 30년 4월 7일이 니산달 14일 또는 15일 금요일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마도 예수는 30년 4월 7일 금요일에 사망하였을 것이다. 이 날이 니산달 14일이나 15일이 될 수도 있었던 이유는 당대에는 초생달을 한 달의 시작으로 간주하였는데, 날씨가 매우 흐릴 경우 날짜 계산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니산달 14일이 예수 사망일이라면 최후만찬 일은 요한복음의 보고대로 해방절 만찬 전날이었고, 반면에 니산달 15일이라면 최후만찬 일은 공관복음의 보고대로 해방절 만찬 당일이었다.
사망 시간 역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서로 틀려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마르 15,25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이 제3시(오전 9시)라고 하는데, 요한 19,14에 따르면 제6시(낮 12시)쯤에 예수는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었다. 예로니모는 성서 사본 필사 과정에서 두 복음서 가운데 하나가 잘못 기록되었으리라 추측하였다. 아무튼 예수는 금요일 정오와 일몰 사이인 오후 어느 시간에 사망하였을 것이다.
6. 매장
그날 저녁, 유다 인들의 날짜 계산으로는 토요일이 시작되자 아리마태아 출신이자 의회 회원인 요셉 요셉은 후에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는지 몰라도, 예수 수난 당시에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의회 회원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지방의회의 회원이었을 것이다. 이 빌라도의 동의를 얻어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다가 삼베로 쌌다. 그리고 아무도 안장된 적이 없는 새 무덤에 예수의 죽음이 빌라도 등 공인들이 확인한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며, 그의 시신이 범법자들과는 달리 경건하게 안장되었음을 암시한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마지막)
예수의 부활
Ⅲ 부활사화의 주요 내용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인 부활사화는 빈 무덤, 여자들에게 나타난 천사의 부활선언, 여러 차례에 걸쳐 여자들과 제자들에게 일어난 예수의 발현, 예수의 전도 명령과 승천 등의 이야기고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사는 더 이상 예수의 지상 생애에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새로운 역사, 곧 교회 공동체의 역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 부활이야말로 나자렛 예수의 모든 활동과 삶의 최종 목적이었기 때문에 부활을 도외시한 예수의 생애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사실상 무의미하다.
1. 빈 무덤
예수가 사망한 지 사흘 뒤인 안식일 다음 날 (유다 인들은 하루 중 몇 시간에 지나지 않더라도 하루로 간주하였다) 막달라의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자들이 이른 새벽에 예수의 시신에 향을 바르러 무덤에 갔다가 무덤 입구의 돌이 굴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천사로부터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즉시 사도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전했으나 사도들은 헛소리로 여기고 믿지 않았다.
한편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은 급히 무덤에 달려가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무장한 경비병들이 무덤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사도들은 후환이 두려워 숨어 지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비록 아무도 예수의 부활 장면을 본 일은 없지만 빈 무덤과 초대교회의 고백 문으로 보이는 천사의 부활 선언은 교회의 부활 신앙을 출발점이 되었다.
2. 예수의 발현
그 외에 성서는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의 여자 마리아, 베드로와 사도들, 주의 형제 dji고보와 엠마오로 가던 글레오파와 다른 한 제자 등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전한다. 복음서의 발현기사는 서로 조금씩 틀리지만 예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에는 일치한다. 게다가 사도들은 예수의 몸에 남아 있던 상처도 보고 만졌으며 그와 함께 먹고 마시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나아가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가 사흘만에 부활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오 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났고, 마지막으로는 자기에게도 나타났다고 한다(1고린 15,4-8).
이 모든 발현은 무덤이 비어 있었던 이유, 곧 예수는 단지 영으로만 부활한 것이 아니고 육으로도 분명히 부활하였음을 증언한다. 그와 동시에 부활한 예수는 공동체 안에 현존하면서 부활 생명과 은총을 계속 베풀어주고 있음을 암시한다.
3. 전도 명령과 승천
부활한 예수는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전도 명령을 내렸다. 예수는 당신 부활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놓았으며, 이 구원은 믿고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실현될 것임을 밝혔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였다. 전도 명령을 내린 후 예수는 제자들을 축복하면서 승천하였다. 사도 1, 9-11은 예수가 부활한지 40일 만에 승천하였다고 한다. 복음서의 내용으로 보아 이 승천은 부활과 동떨어진 별개의 사간이 아니라 부활의 또 다른 측면이다. 예수는 부활과 동시에 천상천하를 다스릴 대권을 받고 영광스럽게 높이 들려졌음을 고백한다.
4. 부활의 의미
부활사화에서 보듯이 예수부활은 처음부터 인간의 경험 세계를 넘어선 신앙의 대상이다. 우리는 부활 직후에 사도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 전혀 모른다. 흔히 짐작하듯이 그들은 예수가 체포되자 뿔뿔이 흩어져 갈릴래아로 도망갔는지 모른다(마르 16,7 ; 마태 28,16 이하 ; 요한 21장 참조). 우리가 아는 것은 부활 소식을 전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이는 막달라의 마리아였고, 매우 빠른 시일 내에 제자들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으며, 예루살렘을 출발점으로 하여 하느님께서 예수를 즉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열심히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 신앙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신앙의 대상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 신앙 공동체 안에는 사도들이 보여 주었듯이 불신앙도 공존한다. 이 불신의 벽을 깨고, 보지 않고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믿으며 고백할 때에 공동체나 각 사람은 진정으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고 그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
예수의 부활은 성부께서 그의 속죄와 구원의 뜻을 받아들이시어 당신 능력을 드러내셨다는 증거이다. 하느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새 생명을 주셨으며 당신이 새로운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예수 편에서는 부활로 구원사업을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었으며,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이 진리임을 증명하였다. 인류는 이 부활로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났다. 따라서 이러한 빠스카(지나감)의 신비를 일상 생활에서도 구현하여야 한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묵은 인간을 십자가에 못박고 부활하였기에 하느님의 자녀, 거룩하고 완전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한다.
부활사화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은 복음 선포이다. 천사로부터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즉시 이 사실을 사도들에게 전하였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들에게 빵을 떼어 주던 나그네가 예수임을 알자 ‘그 시간에 일어나’ (루가 24,33)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의 부활을 전하였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 선포 명령을 내리고 승천하였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야말로 세상 마지막 날까지 모든 사람에게 직접 관계되는 가장 중대하고 기쁜 소식을 지체하지 말고 선포해야 한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소식을 신속 정확히 전달하는 사명을 지닌 복음의 기자들이다. 기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건 현장을 뛰어다니며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건을 보도해 주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기자들도 이 기쁜 소식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열과 성을 다하여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묻히셨으며, 또 성경 말씀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1고린 15,3) 하고 사방에 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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