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서의 정의 <구약입문1>
1)거룩할 성(聖)
거룩하다-따로 떼어놓는다. 다른 일반적인 일들과 구별되는 따로 떼어져있는 일이다.
사제 - 다른 일반적인 직업과 구별되서 따로 떼어져있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성(聖) -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여러 물품 중에서 일부를 따로 떼어놓는다.
성서 -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따로 떼어 놓아진 책이다.
계약 - 하느님과 인간을 드러내는 책
옛 계약 -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
새로운 계약 -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약의 백성과 맺은 계약
2) 성서
성서라고하는 이 말은 영어의 바이블, 이 바이블이라고 하는 용어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 비블로스라고 하는 단어가 등장을한다. 둘 다 특별한 책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고대역사에보면 인류의 역사에있어서 최초에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파피루스다. 그 파피루스가 지중해 연한 비블로스라고 하는 도시에서 유럽사회로 많이 수출이되었다. 그 당시에 모든 책들은 파피루스로 제작이 되었었고 그 중에서도 이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많이 사용하였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 성서 였었다.
그 당시 책하면 성서였었기 때문에 비블로스라고 하는단어가 영어로 바이불, 또는 라틴어로 비블리아, 비블로스 이런말로 변화가 되었다. 이것은 어떤 역사적인 유래를갖고있는 단어로 이해를 하면된다. 단순하게 책 들이다하는 표현들이다. 또 가톨릭교회에서 많이 사용을 하고있는 계약이라고 하는단어가있다. 라틴어로 테스따멘뚬 이렇게 표현을 한다. 하느님과 인간의계약을 들어내는 책, 그 계약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옛 계약이고 하나는 새로운 계약이다. 예 계약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이고 새 계약은 그리스도를통해서 신약의 백성과 맺은 계약인데 이런 성서적인 의미를담고 있는 것인데 바로 그 계약의의미를 담고있는책이다 하는 의미에서 성서를 일컬어서 테스따멘뚬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한다. 이것은 성서를 표현하는 다양한 용어들을 대략 정리를 해보는 것이다.
2. 성서의 내용
1) 인간과 인간들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람은 서로가 필요성에 의해서 만나게 되는데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내 인격을 평가한다. 또 내가 어떤 사람과 어떻게 어울리면서 살아가는가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내 사회성을 평가한다. 결국은 이 만남 자체가 내 자신의 인격과 사회성을 판단받는 기준이 된다. 만남의 단례가 깊어지면 사귐의 단계로 들어간다.
사귐의 단계로 들어가면 동성간의 사귐은 우정이라 하고 이성간의 사귐은(작은의미) 사랑이라 한다. 사람과 대상이나 사물을 만나서 사귐의 단계로 들어갔을 때 그것을 취미 생활이라 한다. 사귐이 깊어지면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양보할 때 친교라 한다. 친교가 깊이 이루어지면 친교의 과정으로 들어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양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희생이 들어가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위해서 도와줄 수 있는 자기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봉사의 단계로 접어든다.
이것을 우리 그시스도교 에서는 (커다란 의미) 사랑이라고 한다. 넓은의미의 사랑이다. 친교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온전한 의미로 실천한다 라고 볼수가 있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본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윤리도덕은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가? 이 윤리도덕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 그리고 이것이 사귐의 단계 친교의 단계로 가기위한 하나의 질서이다. 이 질서를 일컬어서 우리가 보통 윤리도덕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 윤리를 지켜야된다. 도덕을 갖어야된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엇이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만나고 사귀고 친교를 맺어나가는 질서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윤리도덕 이다.
그러면 신앙은 무엇이고 종교는 무엇이냐? 윤이도덕이 질서라고 한다면 신앙이라든지 종교라든지 그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될 것인가? 반듯이 신앙과 종교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신’ 이라고 표현한다. 무엇인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보다 초월적인 위치에 있는 ‘신’을 상징하고 이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맺어 나갈려고 하는 것이 신앙이고 종교이다.
2) 종 교
① 자연종교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관계를 엮어나가는데 살다보니까 도저히 인간의 관계와 인간의 능력을 가지고는 해결이 안되는 부분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으로 하여금 한계성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종교 이다. 무엇인가 자연 발생적으로 우리 인간보다도 더 위대하고 엄청난 능력을 지닌 존재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곳은 땅이고 땅 보다도 훨씬 더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하늘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하늘에 우리 보다도 더 초능력을 지닌 존재자가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자연적으로 하게된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그 어떤 신령한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의탁하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자연종교이다. 보통 우리 사회에서도 아직까지도 사회의 어떤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라고 볼 수 있는 무속이라든지, 무교, 이런것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분은 이러이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을 것 이다라고 추정을 하는 것이다. 추정을 하니까 당연히 여기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의 자세는 무엇이냐 하면은 기원이다.
보이지않는 이 신령께 계속해서 정성을 다해서 비는 행위가 이루어진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있을 것이다. 있어야 된다. 요망사항을 가지고 계속해서 비는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은 자연종교이다.
② 계 시 종 교
계시 - (열어보인다. 낱낱이 적나라하게 열어보인다). 열어 보이는 종교이다. 누가 열어 보였는가? 인간이 열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신이 먼저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열어 보이셨다. 그래서 그 열어 보이신 것을 보고서야 그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종교이다. 자연종교에서는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난 신령한 존재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계시종교에서는 그 분이 바로 하느님 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완전히 열어 보이셨다. 그리고 그 열어보이신 것을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고 우리는 여기에 믿음을 갖고 따라가는 것이 계시종교이다.
계시종교와 자연종교의 차이는 자연종교는 막연하게 있을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신이라는분이 어떤분인가 하는 것을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단지 비는 존재일 뿐이다. 무엇인가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존재, 그래서 복을 받으려면 이 신의 노여움을 사지말아야된다. 만일에 혹시라도 이 신의 노여움을 사면 내가 이 신으로부터 벌을 받는다 하는 생각이들 수 밖에 없다.
계시종교는 이미 신이 먼저 다가오신다. 먼저 다가오셔서 신이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그 가르친 내용에 따라서 따라만가면 되는 것이 계시종교이다. 그러면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열어보인 내용이 어디있느냐? 우리가 이 내용을 따라가야 되는데 이 내용을 어디에서 살펴볼 수 있는가하면 이것이 바로 성서 라는 것이다.
성서란 무엇인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열어보이신, 당신이 인간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져있는 책이라고 이해를 하면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속에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정리를 한 이 내용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어떻게 표현이 되는 것인가?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신다. 그리고 그 다가오심에 대해서 인간은 응답을 한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열어보이시고 그 열어보이시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응답을 했을 때 만남이 이루어진다. 만일에 하느님이 열어보이시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응담을 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인간은 만나지 않는다.
우리 생각에 엄청난 능력을 갖고 계시고 전능하신 분이니까 당신이 마음대로 인간을 착하게 할수도 있고 악하게할 수도 있고 또 우리가 자연적으로 바라는 것처럼 착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서든지 역사하셔서 벌을 주시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인간이 응답하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한 개인이 잘났던 못났던 그 인간이 당신 자신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이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참으로 대단한 신비라고볼 수 있다. 하느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안에서는 우리 자신은 하느님앞에 먼지와도 같다. 항상 죄인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사실 엄격하게 놓고 보면 하느님이 인간을 마음대로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자세에 쩔쩔매는 분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인간이 응답을 했을 때 하느님과 인간은 만난다. 그렇지 않으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이제 이 만남이 더욱 발전을 한다. 인간이 응답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되고 또 하는님께 대한 다른 어떤 것보다도 희망을 갖게되고 그 하느님이 열어 보이시는 사건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믿고 따르는 사랑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면서 제일 처음 보이는 행동이 무어냐하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다. 그것을 우리가 보통 전통교리에서 향주 삼덕 이라고 표현을 했다. 하느님께 향하는 세 가지 덕, 신, 망, 애, 세 가지 덕이 있다. 이것을 향주 삼덕이라한다. 향주 삼덕을 통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발전을 해서 사귐의 단계로 접어든다.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이 응답을 함으로써 겹쳐지고 그래서 사귀게 된다. 이 때 비로소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라고 볼 수 있다. 매번 마다 하느님과 사귈려고 노력하는게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그러면 이 사귐이 더 깊어진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 신앙인의 삶이 더욱 더 깊어진다. 더욱 더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려고 하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려고 하는 우리의 노력으로 발전이 된다.
그래서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각들이 깎아 나가면서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위해서 우리가 반듯이 걸쳐야 될 덕목들이 있다. 사귐의 단계로 가기위해서 향주삼덕이 필요했다면 이 일치와 친교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복음삼덕이 있다. 청빈, 정결, 순명 이 세가지의 덕목을 충분히 실천함으로 인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 하느님과 비로서 친교를 이룬다. 그렇지 않으면 사귐에 까지 갈 수 있지만 일치와 친교는 불가능하다.
내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신자는될 수 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신자가 되겠다는 이야기는 믿음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겠다는 이야기고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겠다는 이야기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겠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세례성사요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사귈수는 있다.
미사도 참석을 하고 성사생활도 참석을 하고 나름대로 신자들로써 해야할 여러 가지 생활들을 충실히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생활만 했다고 해서 믿음만 고백했다고 해서 일치로 당장 가느냐? 그렇지는 않다. 일치로 가려면 반듯이 가난, 정결, 순명, 이 세가지 덕목이 자신의 삶 안에서 드러나야만 된다.
가난 - 나눔이다. 궁색하게 살으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나누면서 살으라는 이야기다.
정결 -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 충실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삶을 더욱 부채질하는 신뢰 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신앙인으로써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정결의 자세다. 어떤 육체적인 순결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수도자들에게 있어서는 육체적인 순결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있지만 우리 일반적인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정결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순결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인 순결만을 자꾸 이해하시면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나하고 정결하고는 상관없다 이렇게 해석을 하실 수 있는데 부부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정결은 반듯이 필요로 한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신뢰를 주겠다는 그런 의미에서 정결이다.
순명 - 순명 하면 어떤 경우에는 복종하는 것이다. 물론 수도자들 경우에는 장상에 대한, 신부들 같은 경우에도 교구장에 대한 순명, 물론 서약이라고 하는 그런 순명이 있는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순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장상에 대한 복종,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은 기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무엇을 억지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뻐서 하는 자세, 위에 사람이 억지로 누르니까 나는 그것이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눈치 때문에 투덜거리며 하는 것은 순명이 아니다.
순명은 나도 좋아서 내가 기쁜 마음으로 내 자신을 상대방보다 낯추는 겸허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나눔, 충실, 겸손, 겸허라고 하는 이 세가지 더목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생활 안에 어떤 삶으로든지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 일치가 이루어지고 친교가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사귐으로 다 끝난다. 신앙인의 삶이란 죽는 그 순간까지 완성이 아니라 계속해서 노력하는 과정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 친교 이렇게 이야기는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엄밀한 의미로 본다면 죽은 다음에나 비로소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단계에까지 가기위해서 꾸준하게 노력을 해야하는 그런 입장에 놓여있는 사람들인데 바로 이러한 하느님과의 일치,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기 위한 이 복음삼덕을 가르치는 그 구체적인 삶의 원칙들을 우리에게 변함없이 가르쳐주는 것이 사실은 성서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된다. 성서에 도대체 무엇이 담겨져있는가 하는 것은 이 두가지 차원에서 해석을 하면 더 간단하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두가지 단계 : 계시가 있고 계시된 진리가 있고 계시의 역사가있다.
계시 -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셨다.
계시된 진리 - 성서에 담겨져 있다. 계시된 진리가 성서다. 성서의 중심인물은 누구인가? 성서의 권위를 가르쳐 주는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래서 신약성서에 보면 예수의 전 과정, 하느님의 전 과정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 하시고자 하는 전 과정이 완성되신 인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드러난다.
그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다 쉽게 다루고 있는 것이 성서일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는 완성을 이루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그대로 우리 자신들에게 전달이 되는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진리를 현실적으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활인할 수 있는가? 성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계시의 역사 - 구세사,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다. 하느님의 구원역사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보통 성서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구세사를 중심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은 구원역사의 흐름을 리더하는 분이시다. 세상 창조 때부터 모든 일이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기운 이렇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었다. 당신 자신의 시대를 마감하시고 제자들에게 교회를 맡기시면서 교회의 주인으로 약속해 주신 분이 역시 성령이시다.
교회의 탄생일은 성령강림 대축일 이다. 하느님의 구원역사, 계시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분은 성령이시다. 계시된 진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 이고, 계시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분은 성령이다. 세상 창조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보통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라는 교리를 꼭 철학적인 차원으로 해석을 할려고 하지말고 성서적인 차원으로 해석을 하면 더 쉽게 접근이 될 수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 주셨고 그 완벽하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그 구원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그 모습이 사실은 우리에게 성령이라고 하는 형태로 체험이 된다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언어를 인간이 알아듣기는 힘든일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포장을 한다. 그 인간의 언어로 포장을 하시는데 그 방법으로 동원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는 것이다. 당신 자신의 언어로는 인간에게 이해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인간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포장을 하신다. 그것이 계시된 진리다. 우리가 지금 정리해본 것처럼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 역사를 굴러가기 시작한다. 이 굴러가는 전 과정을 일컬어서 구원의 역사라고 한다. 계시의 역사다라는 말이다.
이것이 언젠가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이 종말을 일컬어서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 이렇게 표현을 한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는데 우리는 계시된 진리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그게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매번마다 힘을 얻고자 하는 것, 바로 이 계시의 핵심을 알고자 할 때 우리가 사용해야 될것이 바로 성서다 하는 것으로 정리를 해볼 수 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보이지않는 모습으로 접근해 오신다. 거기에 우리가 응답했을 때 비로소 그분의 계시는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응답하지 않으면 영원히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런 의미로 하느님의 계시, 응답을 이해를 하면 좋을 것이다.
3. 성서의 산지
1) 연대적 대표성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그 진리가 담겨있는 것이 성서인데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신다 라고 했을 때 그 인간을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지목해야 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맺은관계 -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하느님으로부터 복도 받고 많은 이방인들의 침범으로부터 하느님의 힘으로 구원되기도 하고 쳐부수기도 하고 이런 일련의 여러 가지 과정을 우리가 성서에서 지켜보면서 바로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관계 맺었던 역사를 우리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의 역사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 하고의 맺는 관계가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대표적인 나라를 통해서 가르쳐지는 것 뿐이다 하는 의미에서 연대적 대표성이다. 이스라엘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응원하는 팀이다. 그 팀이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가? 그것을 살펴보면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것이 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다. 왜 이스라엘인가? 왜 구약성서를 보면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 그 다음에 남과 북으로 분열된 다음에 무슨왕 --- 여러명의 왕들이 나오는데 성서공부를 한다고 해놓고 왜 이스라엘의 왕들을 우리가 살펴봐야 되느냐?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대적 대표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의 사지, 배경이 되는 것은 다른 민족도 아니고 유태인들, 이스라엘이 성서의 배경이 된다. 유태인의 역사, 유태인의 역서의 중심적인 부분들을 보면 메소포타미아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성서가 쓰여지게 되는 하나의 지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유태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우르 라는 곳에서 살았다. 아주 문명의 발상지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행복하게 잘 살던 사람을 어느날 야훼라고 일컬어지는 하느님께서 불러 내신다. 내가 약속해준 땅으로 가거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거라. 하느님은 성서에서 내가 너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주겠다. 그러니까 나만 믿고 따라라.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가족들만을 데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동을 시작한다. 중간 도착지가 하란 이었다.
그리고 가나안 이라고 하는 땅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에 왔다가 거기서 아브라함은 일생을 마치고 그 밑에 이사악 야곱, 야곱의 열 두 아들들, 그 아들들이 우여곡절 끝에 에집트까지 내려갔다가 여기에서 모세 인도하에 출애굽을 해서 다시 가나안으로 오게 되는 이 과정, 이것이 구약성서 이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역사이다. 우르에서 시작을 해서 가나안 에집트를 걸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이 역사 이것이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보는 유태인들의 역사이고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이 구약성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연대적 대표성, 어떤 시기적인 장소적인 지리적인 배경을 이해를 한다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갖고있는 이 성서가 어떻게 해서 정경화 작업을 하게 되는가? 성서 권수가 확정이 되는가 그 과정을 이제 정리 해본다. 성서는 우르에서부터 시작을해서 가나안과 에집트를 거쳐서 다시 하느님께서 약속해주신 가나안 땅에 이르는 유태인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해서 작성되는 책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성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역사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구약성서는 예수 시대 이전에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예수님 당신 자신도 구약성서를 여러군데 이용하신 걸로 봐서 구약성서는 어느정도 정경화가 되어 있었다 라고 본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공식적으로 구약성서가 체계화 된 것은 기원후 90년이다. 기원후 90년에 얍니야 라고 하는 곳에서 종교회의가 열린다. 이 종교회의 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가톨릭 측에 종교회의 가 아니고 유태인들의 종교회의 이다. 유태인들이 90년에 얍니야 라고 하는 곳에서 개최를 해서 그곳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들의 유태교 경전을 확정을 한다. 유태교 경전을 확정을 하는데 그 당시에 24권이다. 24권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구약성서 라는 것을 자기네 경저으로 확정을 진다. 지금도 24권이 유태교 경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성서이다.
이 유태교의 경전을 그리스도교가 받아 들이면서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분의 행적 초창기 사도들과 교회들의 행적을 담은 또 한권의 성서를 첨부를 시킨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 하는 신약성서 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구약성서는 90년에 유태교인들이 확정지었던 것을 그대로 갖어오고 거기에다 신약성서를 덧붙였다. 신약성서 27권을 유태인들과는 상관이 없다. 유태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인정을 하지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신약성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로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유대교 경전을 초창기에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이는데 유대교 경전은 히브리어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태동이 되어서 신약성서와 접목을 시켜서 하나의 성서로 사용을 할려고 하는데 문제는 유태인 이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구약성서를 보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지만 차후에 초창기 사도들의 전교에 의해서 신자가 된 희랍 사람들, 소아시아 지방이라든지 그런 지역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히브리어 성서를 본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된다.
그래서 희랍 사람들, 초창기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유대교에서 확정한 24권의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초창기 그리스도교 교회가 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어로 번역을 한다. 그 번역을 하는 성서를 70인역(셉뚜아진따)이라 한다. 그리스어로 번역을 하면서 유대교에서 24권 경전으로 인정한 것 외에 또 다른 성서를 여기에다 첨부를 시킨다. 이것이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 성서가 차이가 나는동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가 구약성서의 유대교 경전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또 다른 성서를 삽입을 시킨다. 그것이 7권이다.
7권을 삽입을 시켜서 그것을 신약성서와 결부를 시키고 가톨릭 교회는 이것이 우리의 성서다 이렇게 확정을 짓게 되는 것이다. 또 유대교 경전을 번역하면서 24권이었던 성서를 필요에 따라서 분리를 시킨다. 그 분리를 시킨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성서를 보면은 상․하 권으로 구분을 하는 배경이 되고, 예언서도 유태교 경전에 보면 한 권의 책이었는데 그리스도 교회가 12권으로 조각 조각 분리를 시킨다. 그래서 유대교 경전의 권 수와 그리스도교의 권 수가 차이가 나게 된다. 유대교 경전 24 + 11 + 4 (에즈라+느혜미야) + 7 = 46권.
개신교는 중세기에 개혁해서(프포테스탄) 가톨릭에 대항하는 개신교가 등장이 되면서 7권은 가톨릭 교회가 자기들 마음대로 첨부 시켰다해서 7권을 빼 버린다. 그래서 개신교는 구약성서 39권, 유대교는 24권, 가톨릭 교회는 46권, 문제는 제2경전 7권이다. 에스델 과 다니엘은 부분적으로 인정을 못한다. 가톨릭 73권, 개신교 66권이다. 나중에 가톨릭교회는 이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을 하는데 가톨릭교회가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해서 유럽 전사회를 휩쓸게 되면서 이제는 그리스어 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므로 인해서 라틴어로 번역을 한다. 성 예로니모 성인의 주도하에 그리스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을하는데 이 성서를 불가따(보편적이다, 일반적이다)라고 한다.
이 라틴어 성서가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성서로 공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벌써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또 라틴어로 번역을 하다 보니까 번역상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오늘날에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라틴어를 보기 보다는 그리스어를 보고 많이들 공부를 하고 있다. 200주년을 맞이해서 우리 신부님들이 번역을 많이 하고 있는데 번역작업에 기초가 되는 성서가 그리스어이고 보다 더 가깝게 정확하게 해석을 하자해서 지금은 희랍어를 사용하고 있다. 성서의 전반적인 정경화작업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4. 성서의 의도
1) 성서의 목표는 무엇인가?
성서의 목표는 하느님의 실현이다.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해서--- 잘 살려고--- 어쩌다 보니까--- 천당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무척 많다. 옛날 요리문답에 보면 천당은 지복직관이라 했다. 끝없이 복을 누리고 직접 본다. 하느님을 직접 보면서 하느님과 함께 끝없이 복을 누리는 곳이 천당이라고 했다.
우리 신앙인들 거의 대부분이 죽은 다음에 이 세상에서 꿈도 꿀 수 없는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하느님과 함께 끝없이 복을 누리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다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과거 몇 백년동안 교회가 가르쳐왔던 천당에 대한 개념이다. 이것은 착한 일을 해야 갈수 있다. 반대로 지옥이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말씀을 알고서도 지키지않은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래서 그 지옥은 영원히 벌을 받는곳이다.
옛날교리에 의하면 세례성사를 받게되면 우리 이마에 인호가 박힌다. 그래서 마귀들이 송곳을 갖고 쑤신다. 나쁜일 하면 지옥가니까 나쁜일 하지마라. 또 연옥교리는 은연중에 신자들로 하여금 천당가기 위해서 착한일 해야된다. 그러니까 부작용이 생긴다. 자기 자신이 천당가야 되기 때문에 착한일 해야된다 라고 과거에 보상교리를 가르쳤다. 무엇인가 차곡차곡 쌓아놓아야 천당에 가서 상을 받는다 라는 그런 개인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우리 자신들이 살았고 그것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가 성서의 의도를 파악한다면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이 내 자신만이 천당에 가는 개인적인 구원이겠는가?
우리가 성서의 가르침을 보면 개인적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부끄러운 일인가? 오히려 이 개인적인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버려야 할 죄고 우리 신앙인들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장애물이다. 내가 천당가기 위해서 내가 편할려고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죄를 저지를 수있다.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예비신자들 자기 소개서 받아보면 대부분이 내 자신의안정을 찾기위해서, 가정의평화를 위해서 천주교회에 입문하는 동기에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만약에 교회가 계속해서 그런 동기를 받아들이면서 그런 동기를 지닌 신앙인들을 교회 안에서 가르쳐 나간다면 분명히 교회는 앞으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또 성서가 의도하고자 하는 신앙관은 아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나라의 실현이다.
하느님 나라 라고 하는 개념과 천당이라고 하는 개념은 어떤의미에서는 같으면서 상대적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다. 현재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이 있다 영원한 세상. 하느님께서는 이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세상을 그냥두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이 먼저 다가오시는 계시라고 하는 구원계획을 통해서 하느님 당신 자신이 인간의 세상으로 들어오신다. 들어오시는 이 과정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침투해 들어오신다.
침투 - 막무가내로 확 뚫고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들어오는 현상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아주 비밀스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신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시는데 그 선봉에 세운 소대장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에 침투해 오시는 과정에 선봉장으로 쓰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있는 세상을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있는 이 세상에다 그대로 이루려고 하신다. 그 이루려고 하는 나라를 일컬어서 하느님 나라 라고 한다. 천당이라고 하는 개념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은 다음에 딱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 있는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데 성서의 가르침은 죽은 다음에 따로 가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야 된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개념이다. 성서를 제대로 해석을 한다면 천당 가기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앙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신앙인들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왜 우리가 선교를 해야 되는가? 나와 더불어서 저 사람이 천당 가게하기 위해서 선교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간에 자꾸 자꾸 넓혀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선교를 해야된다. 말로만의 선교는 안된다. 하느님 나라 라고 하는 개념을 좀 더 제대로 이해해야 된다.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가 아니고 지금 현재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 실현해야할 나라가 하느님 나라이다.
천당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서 완성이 되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도 완전히 이제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는 나라가 되었을 때 천당이라고 한다. 하느님 나라는 진행되는 상태이고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이 되었을 때 그것을 천당이라고 할 수 있다. 천당 가려고 발버둥치는 그런 신앙 자세에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그 벗어나는 노력을 성서에서 배워야 된다. 성서에서 하느님 나라가 무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깨닫는다면 천당가려는 신앙생활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교회를 실천종교라고 한다. 이 땅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역에 좁게는 내 가정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 내가 책임지고 있는 공동체,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 하느님의 뜻이 빨리 실현되기 위해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고있는 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목표를 위한 방법을 우리는 성서에서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서 죽음의 승리를 거두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고 고백을 하는가?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고 인간이 되셔서 죽임을 당하셨고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셨다. 남에 의해서 강제로 죽임을 당하셨다가 그 다음에 부활하셨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부활의 희망을 걸고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이다. 그러면 이 부활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죽음을 이긴 사건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에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 끝이 아니다. 죽음은 부활의 과정으로 가기위한 문일뿐이다.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천당교리를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로 가기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해주면 좋겠다. 단지 천당 가기위한 방법으로 성서 공부를 한다든지 혹은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 가정에, 내 직장에, 내가 머물고 있는 공동체에 실현을 해볼까, 그 실현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 성서다.
왜 성서 묵상을 하고 소공동체를 통해서 자꾸 말씀 나누기를 하라고 하는가?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역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케 하는 지혜를 깨닫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간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내가 성서 공부를 해야 되겠다. 그리고 성서의 가르침들을 깨우쳐야 되겠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2) 예언자적 소명의식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 - 1965년에 열렸었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제 2의 성령강림 사건이라고까지 자신있게 이야기할 정도로 현대 교회가 걸어가야 될 여러 가지 삶의 원칙들을 분명하게 제시했었던 공의회 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삶을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예언자적 소명의식일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라고 하는 것은 현대 세계의 교회가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 교회라고 하는 것은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를 살아왔었다. 교회가 따로있고, 세계가 따로있고 그래서 세상은 오히려 교회에 몸 담고있는 우리 신앙인들 입장에서는 죄를 유발시키는 적이었다. 과거 교회에 보면 삼구라는 것이 있었다. 삼구(마귀, 세속, 육신) 우리를 죄 짓게 하는 죄로 빠트리는 요소들 이었다. 실질적으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지금 자기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자체가 죄를 짓게 만드는 요인이었고 자기 자신이 갖고있는 육신도 죄를 짓게하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육신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주면 안된다. 그래서 언제나 절재를 강조했었고 심지어는 편태까지도 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육신에게 고통을 주어야한다. 고통을 준 만큼 영혼이 맑아진다. 그래서 육신을 철저하게 괴롭혔다. 어떻게 해서든지간에 세상과 멀어져야 한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죄를 짓는다. 세속과 가까이 하면 천당 가는길이 점점 멀어진다. 그래서 가능하면 교회 건물은 세상 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또 가장 높게 첨탁을 쌓았다. 세상과는 어떻게 해서든지 멀어져야 하고 가능하면 하늘과 가까이 가도록 노력해야 된다.
또 모든 수도회라든지 실질적으로 하느님께 어떤 자기자신의 수련을 쌓을려고 하는 사람들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과 담을 쌓으며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격리를 시켰다. 과거 교회가 가르쳤었던 이 방법, 세상도 우리를 죄짓게 하는것이고 육신도 우리를 죄짓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부터 탈피해서 이제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피해 도망가야할 곳, 우리가 가까이 해서는 안될 곳, 우리가 떨어져 나와서 살아야될 곳이 아니고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세상안으로 들어가야 된다. 그리고 그 세상의 흐름에 우리 자신이 적응하면서 살아가야 된다 하는것에 초점을 맞춰서 열렸던 공의회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근본적으로 과거 교회가 가지고 있던 모습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고난 다음에 교회가 표방하는 모습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왔던게 적응이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개개인에게 적용이 될 때에는 쇄신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 쇄신해야 된다. 과거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모두 갈고 새롭게 태어나야 된다고 쇄신을 부르짖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교회의 가르침이라든가 또 그것이 외적으로 들어나는 전례 행위들이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교회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세상안에 뛰어들고 또 자기자신의 육신을 단지 죄를 유발시키는 어떤 물질적 몸 덩어리 살덩어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 자체를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표현으로 이해를 하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이 갖고있는 마음상태, 정신, 사고방식 모든 것이 육신으로 표현이 된다. 육신이 없이는 인간은 자기자신을 표현할 길이없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표현이다 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받아 들여지면서 새롭게 우리들 삶을 조명하는 것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가르침이 신자들에게 예언자적 소명의식을 가르치기 시작 한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세상이 있고 우리가 주도권을 갖은 철저한 세상이 있다라고 가증했을 때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고 인간이 그 계시에 응답함으로 인해서 만나게 된다. 그러면 오늘의 세상과 하느님의 세상이 만나는 이 과정에서도 사실은 무엇인가 인간의 응답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응답으로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신앙이다. 그 다음에 희망이고 사랑이다. 인간 세상편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종목들이 신앙과 희망과 사랑이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점점 깊어진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친교를 이루고 일치를 이룸으로 인해서 비로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 그러면 인간이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이러한 응답에 대해서 또 다시 응답하는 상태가 무엇으로 이루어 지겠는가? 다시 말하면 이렇게 응답한 신앙인들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면서 드러내는 삶의 형태가 무엇이냐?
① 신앙을 지닌 사람들의 입장에서 오늘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복음적 식별’ 이라고 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갖는다. 예수께서도 항상 들을귀가 있는자, 볼 수 있는 눈을 가진자, 이런 표현을 하시는데--- 볼 눈이 생긴다. 그 볼 눈을 어디서 발견하는가? 복음에서 발견한다. 더 넓게 표현하면 성서에서 발견한다.
신앙인들이 믿음을 갖고 성서를 읽고 해석하면서 비로소 오늘의 세상을 식별할 수 있는 눈들이 생긴다. 오늘의 세상을 식별한다는 말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부정인가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②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다라고 하는 것은 바꿔서 표현하면 복음삼덕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의 모든 인생의 희망이 하느님 나라에 가 있기 때문에 그 하느님 나라에 백성이 되기위해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성서에서는 복음삼덕으로 가르치니까 당연히 복음삼덕을 자신의 삶의원칙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느님께 혹은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두고있는 사람들이다.
다른데 희망을 두는 사람들은 결코 복음삼덕의 삶을 자기 자신의 삶의 원칙으로 삼지않는다. 이 희망이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의 출세에 있다. 혹은 자기자신의 이름을 세상에서 드높이는 어떤 명예에 있다. 또 남들보다 남들만큼 잘 살아야 되겠다 라는 어떤 제물에있다. 이것만을 자기자신의 희망으로 삼고 살아간다. 세상을 살아나가려면 힘이 있어야되고 재력이 있어야되고 명예가 있어야된다. 그것이 나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복음삼덕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수운 일이다. 멍청한 짓인 것이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복음삼덕을 살아간다.
③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알고 하느님께 사랑으로서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오늘의 세상에 보이는 삶은 무엇인가? 그것을 일컬어서 투신이라고 한다. 자기를 내던진다는 말이다. 내던진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께 신뢰를 둔다는 말이다. 믿는바가 있으니까 내던진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는 투자를 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오늘의 세상에서 보이고자 하는 삶, 식별력과 복음삼덕의 실천과 투신의 삶 이 세가지의 삶이 결국은 오늘의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점점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요소라고 한다면 바로 이 공통 분모를 찾아나가는 이 삶을 일컬어서 예언자적인 삶 이라고 표현을한다.
※ 예언자 (미리‘예’자가아니고 맡길‘예’자다. 하느님의 말씀을 맡겨놓은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있는 사람, 하는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 결국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다보니까 자기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예언자로서의 소명의식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세상의 가치와 부딫히고 그 과정에서 박해를 당하고 죽임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구약성서에 보면 그런 예언자들이 많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분별하다 보니까 당연히 예언자의 삶은 비판자로서의 삶이 이루어지게 된다. 세상에 대해서 비판을할 수밖에 없다.
그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는 세상에 대한 식별이다. 항상 예언자는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지못한다. 만일 세상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된다면 환영을 받겠지만 세상의 이치가 하느님의 이치와 다를 때는 분명히 예언자는 그 가운데서 고통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을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확인을 한다. 우리가 오늘날 이 시대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살아야 될 것이 예언자적인 사명이라고 한다면 이 예언자적인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성서에 들어나있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깨달음을 통해서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봤을 때 성서는 우리 자신에게 참다운 예언자적 소명을 일깨워 주는 책이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예언자적 소명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성령의 감도하에 작성된 책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타당한 정의가 될 수있다. 이러한 성서의 의도를 우선 파악을 하고 이러한 의도를 지닌 성서를 우리가 어떻게 접근을 해야 되는가?
3) 성서를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가?
성서는 얼마든지 나름대로 또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대로 접근을 해도된다. 어떤 일정한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마음대로 해석을 한다고 해서 누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그 성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를 본다면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를 우리가 처음부터 제대로 익힐 필요가있다.
대표적으로 성서에 접근을 한다 성서를 읽는다 했을때에는 두 가지를 연상할 수 있다. 우선은 육체적인 몸가짐, 어떤 자세로 읽어야 되는가에서 육체적인 몸가짐이 있을 수가 있고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느냐?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을 해볼 수 있다. 육체적인 몸가짐 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성서를 읽을 때의 자세 (서서? 않아서? 누워서? 화장실에서? 성전에서?) 여러 가지 외적인 환경들을 말할 수있고, 마음자세, 어떤 마음자세로 읽느냐?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몸가짐, 또 성서가 읽혀지는 환경보다는 마음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얼마나 급하면 화장실에서 성서를 읽을까? 좋게 해석을 하면 화장실에서 까지도 성서를 읽는 아름다운 모습일 수도 있다. 다른곳에서도 다읽고 화장실에서까지 성서를 읽는것과 다른곳에서는 일체 읽지않고 화장실에서는 다른 것을 할수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 한 번 읽겠다 하는 것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 이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될 것인가? 시대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만고불변의 말씀은 있지만 만고불변의 해석은 없다. 성서 그 자체는 만고불변 이다.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성서의 가르침은 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성서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것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그러난 성서의 말씀 그 자체는 변하지않는 것이다.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와 인격의 한계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 해석의 원천이 되는 성서의 말씀은 변할 수가 없다. 그래서라도 우리가 성서를 어떠한 마음으로 읽어야 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성서는 남의 눈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읽어야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눈으로 읽어야 한다. 내가 성서를 읽고 지금 현재 내가 느끼고 내가 깨달은 바를 중요시 여겨야한다. 내가 내 눈으로 읽은 내용을 믿지말아야 한다. 내가 성서를 읽고 내 나름대로 느끼는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강요가 되면 독단이 되고 편견이 된다. 우리는 이 독단과 편견의 부작용들을 우리 사회에서 많이 체험한다. 성서를 자기 눈으로 본것까지는 좋은데 자기 눈을 너무 믿은나머지 자기 해석이 최고다. 휴거론, 종말론 등, 그래서 믿지는 말고 내가 본눈을 배워야된다. 사람이 어떤 상대를 사랑하게 되면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대를 어떤 눈으로 보는가?
사랑하는 상대에 첫 번째 반응은 상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주려고 한다. 다 해줄 수있다 라고할 때 상대방의 눈빛을 보기 시작한다. 상대의 눈빛을 보면 나를 좋아하는구나,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구나 라는 것을알 수 있다. 상대방의 눈빛을볼 때 내가 상대방의 요구를알 수 있는 눈빛이 서로에게 마주치는 순간에 상대의 눈빛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나다. 상대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보면 처음에는 상대가 보이지만 깊이보면 상대의 눈빛속에서 자기를 발견한다. 상대와 이미 합치된 자기자신을 본다는 것이다.
비운다는 말은 내 눈으로 성서를 읽고, 보지만 결론적으로는 내마음을 비움으로 인해서 이제는 성서 안으로 내 자신이 들어가야 된다. 내 의도대로 내가 부르짖고 내가 주장하는 바대로 성서를 인용해다가 막 끌어다가 사용할려고 하지말고 내가 성서의 가르침으로 들어가야 된다. 자기의 어떤 일반적인 주장을 하기위해서 성서를 함부로 인용을 하고 성서를 갖다가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데 정당화 시키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자기의 주장을 믿고 자기의 눈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말고 성서를 눈으로 읽되 자기 자신이 성서안으로 들어가야 된다. 물론 이 단계까지 가는데는 많은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고 또 오랜 시간이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성서 해석이다. 처음 시작은 내가 말씀을 읽는것인데 결론적으로는 말씀이 나를 읽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 성서 복음나누기 이고 말씀나누기 이다. 말씀이 나를 읽는 것이다. 내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내가 말씀안에 들어가있는 이 상황, 이것이 성서를 대하는 방법이다. (유리비유의 설명)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성서인데 그 성서를 읽는 내 자신이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서를 읽음으로 인해서 내가 성서의 가르침을 외곡을 시켜버린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 눈으로 읽되 내가 읽은 것을 믿지는말고 오히려 말씀이 나를 읽음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계시가 많은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이될 수있도록 해야되는 것이 우리가 성서에 접근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공부를 해야하고 꾸준하게 성서에 대한 탐구자세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만일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성서를 읽을 필요가없고 또 성서공부를 해야할 이유가없다. 서점에가면 성서는 얼마든지 산다. 사서 내맘대로 읽고 내맘대로 해석하면 된다. 그런데 그것은 본래 성서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 성서의 의도를 제대로 알기위한 과정 그것이 바로 성서 공부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성서공부를 하는 목적도 우리의 눈, 우리의 마음을 비우면서 말씀이 우리들을 읽을수있도록 내놓는 과정이라고 이해를 하면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에 대해서 좀더 쉽게 이해가 될 수있을것이다.
성서에 담겨져 있는 내용, 성서의 무류성
성서는 오류가 있을 수없다. 성서는 잘못이 있을 수없다. 과연 성서에 잘못이 없는가? 성서의 내용은 모두 진실된 것이고 진리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질문도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할수 있게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계시헌장 11항) 성서의 세계상과 오늘날 인간의 지식도 과학문명이 밝혀낸 자연과학의 세계상을 대표적인 것으로 비교를 해보면 성서라고 하는 것에 무류성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해야 될것인가 하나의 단초가 생긴다라고 본다.
성서에 나오는 세계상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느님께서 이세상에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라고 표현한다. 오늘의 세계상은 태양중심으로 해서 모든 위성들이 돌아가고 있다. 과거에 우리가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계상,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어느 누구든지 인정할 수 있는 세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성서가 진실된 것이냐? 성서의 내용을 모두 진리로 받아들일 수있느냐? 결코 그럴수는 없다. 성서에 나오는 지구의 상태는 원반이다. 멀리가면 떨어질줄 알았다. 요나서 같은데 보면 요나가 왜 배를타고 도망갔는가?
하느님이 자기에게 일시키려고 하니까 하느님이 보기 싫으니까 배 타고 멀리가면 하느님께서 안보실줄 알았다. 하느님께서 못잡을줄 알았다. 과거의 교회는 지구를 원반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다른 대륙으로 나가지 못하다가 태양중심으로 하는 우주관이 자연과학이 서서히 지구는 그렇게 생기지 않고 공처럼 생겼다. 우리가 여기를 한참을 가다보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올 것이다 하는 것을 자연과학이 밝혀내면서 사람들이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성서의 가르침은 원반이라고 했는데 실지 보니까 지구가 원통이더라, 또 성서에 보면 하느님께서 모든 세상을 다 만드셨다. 완벽하게 만드셨다라고 가르치는데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을 통해서 밝혀내고 있는 것은 지금도 생물체는 변화의 과정을 밟는다. 진화되고 있다. 교회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드셨다고 가르쳤는데 막상 알고보니까 지금도 변화되고 있는 종자들이있다.
세상의 자연과학이 밝혀낸 것은 진화이고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창조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이 세상의창조자, 관리자, 모든 것 변화의 주제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고있고 자연과학이 밝혀낸 것은 하느님이 있다라기보다는 살람과사람사이 혹은 사물과 사물사이에 인과 관계를통해서 원인이있으니까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오고 그래서 오늘날 세상 삶을 돌아보니까 하느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고 요즘도 서로의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수시로 상황들이 바뀌어 나가더라, 하느님이 주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에 따라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던지 바뀌어져 나가더라 오늘날 자연과학이 발견해낸 것이고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다.
서울이 오전농도가 어떻고 오염상태가 어떻고 만약에 이 논리를 그대로 초등학교 수준으로 이해를 한다면 서울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죄를 지어서 하느님께서 벌로 매연을 하늘 상공에다 깔아놓은 것읻다. 그런데 자연과학이 발견해낸 것은 인간들이 환경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않고 개발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편리함을 찾은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이다. 자연과학이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층명을해낸 현상이다. 그런데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벌이다. 지구 많은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대기권에다 구멍을 내서 암도 쉽게 걸리고 지구를 뜨겁게 달구어논다. 하느님이 주제자이니까 이런 의식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과 오늘날 현 대 사회에서 인정이 되고 있고 또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이러한 자연과학의 세계상의 마찰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할 것인가?
신앙을 갖지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비교가 훨씬 더 설득력이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는 봐라 너희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하느님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너희들이 이데올레기로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냐?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한 근거에 대해서 우리가 명학한 답을 내려야된다. 이것도 어떤의미에서는 성서를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라고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한답을 시도를 해본다면 결론은 성서는 일반적인 옹어를 표현을 한다면 성서는 신앙의 영역이다. 성서는 시대적인 산물이다. 시대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성서 그 자체는 성령의 감도하심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자신을 열어 보이신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표현하고 저술한 것은 인간이다.
그 시대에 살았던 인간의 언어와 그 시대에 살았던 인간의 표현으로 작성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갖고있는 성서는 2,000년전 혹은 4,000년전에 기록했었던 그 시대적인 상황을 그대로 반여을 하고 있다. 창세기에 이러한 구분이 생겨난다. 구약성서가 쓰여질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실질적으로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그시대에 쓰여진 성서의 가르침은 그 시대의 가르침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성서를 제대로 해석을 할려면 우선 성서공부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가 성서가 쓰여진 단계로 돌아가야된다. 성서가 쓰여진 시대로 돌아가서 그시대예서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를 먼저 우리자신이 충분히 이해할 수있을 때 성서를 통해서 들려지는 하느님의 모습, 하는님의 계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생각해야될 것은 성서는 시대적인 산물이다. 예를들면 고백성사를 대부분 1년에 두 번볼 것이다. 판공 : 과거에 한국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전교지역이다. 아직 한국 교회는 자체적으로 꾸려갈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전교지역으로 명해놓고 외부교회의 도움을 받아야만이 꾸려갈 수 있는 교회다.
그래서 전교지역으로 책정을 해놨다. 전교지역은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신자들이기 때문에 그 신자들을 가르쳐주어야 되겠다. 저들은 그냥두면 못살으니까 친절을 베풀어야 되겠다 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 판공성사이다. 언제 성사를 봐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날을 딱 정해놓고 이 때 만큼은 최소한 성사를 봐야 된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되니까 표를 주고 확인하는 것이 판공성사이다.
1984년도 200주년을 맞이해서 한국교회도 전교지역에서 탈피해서 자체교회로 승격이 되었다. 금육도 옛날에는 사순시기만 했는데 지금은 일년내내 모두 지켜야한다. 성인으로서 이제 대접을받는다. 그러면서 판공성사 라고 하는 의미도 없어졌다. 시대적 산물이다. 그런데 오늘날 까지도 판공에만 매달려있는 사람이 많다. 과거에는 부활과 성탄을 잘 준비하는 수단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이것이 일상생활을 이그러트리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교회안에서 일어나는일, 더군다나 성서안에서 일어나고 표현하는 일들은 반듯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시대적인 산물이라고 하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된다. 이것을 무시해버리면 성서를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고 성서의 무류성을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준다(집회서 45, 1-5)
성서의 진실성과 관련지어서 성서는 신앙의 영역이다.
① 시대적 산물임을 알아야 된다. 교회가 가르치는 참된 신앙의 내용하고 그 내용을 그때 그때마다 일정한 형식을 표현해야 하는 시대적인 조건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지만 그 내용을 그때 그때마다 표현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시대적인 표현방식과 신앙의내용은 구분할수 있어야되겠다.
②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영역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성서의 영역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자연과학이 다루고자 하는것과 성서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결론 : 성서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어떤것인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오늘에 대해서 하느님이 갖고 계신 계획이 무엇인가? 이것을 다루는 것이 성서이다. 자연과학이 다루는 것은 이 세상의 계획에대해서 다룬다.
성서는 이세상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고 우리가 고백을 하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세상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갖고계신 계획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계획안에서 인간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었는가? 이 부분을 다루는 것이 성서라고 한다면, 자연과학은 어떤 이론 초월자, 절대자, 하느님이라고 하는부분은 빠지고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이세상의 계획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자연과학이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가? 어떤 원칙, 어떤원리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인가? 이치가 무언가? 그것을 따지는 것이 자연과학이고 성서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이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서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성서와 자연과학의 차이점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에서 특히 창세기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가지 세계상들, 그것은 분명히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파악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것이고 어떤의미에서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것이 성령의 감도하에 오류가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이 존재 하시는 곳이고 이 세상과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라고 하는 신앙을 고백하는 그 시대의 표현방식일 뿐이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발견해낸 자연과학을 가지고 틀리다 맞다 라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시대적인 산물임을 우선 감안을 한다면 오늘날 이미 발전이 된 또 우리가 이미 깨달은 자연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성서를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선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지식의 수준에서 성서를 이해해야 되는 것이고 창세기라고 하는 것은 그시대 사람들이 파악했었던 자연과학적 지식을 총동원 해서 우리들에게 하느님이 창조자시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시다 하는 신앙고백을 발견해 내고 깨우쳐내는 하나의 방법임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성서의 진실성 성서의 무류성을 이야기할 때 성서에 드러나 있는 표현방식을 가지고 거짓말이다 참말이다 성서가 잘못되었다 잘되었다 이것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성서에서 자연과학적 사고를 끌어낼려고 해서는 안된다. 성서는 자연과학 서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신앙고백문일 뿐이다. 신앙고백문을 가지고 거기서 무슨 자연과학적 진리를 끌어낼려고 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성서를 자연과학적 서적으로 이해를 하고 더군다나 성서의 해석을 자기 멋대로 함으로 인해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활용을해서 우리사회에 무리를 일으켰던 것이 시한부 종말론 이라고할 수 있다.
그것은 성서의 특히 성서중에서도 묵시문학적인 표현들을 마치 자연과학적인 수치 개념으로 이용을 하고 또 강징적인 표현들을 자기 멋대로 현실 세계에다 꿰어 맞추어 가지고 종말이 몇 년도 몇 월, 몇 일이다. 또 휴거되는 표징이다. 적 그리스도다. 666은 박 코드다 이런식으로 해석을 계속 하다보면 성서는 더 이상 신앙고백문이 아니다. 성서를 우리가 신앙고백문으로 받아들이는 한 성서안에서 어떤 자연과학적인 진리를 끌어낼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모한 행동이 된다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된다.
강단한 예를 들면 창세기에서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 중에 하나를 뽑아서 하느님이 만드셨다더라 그러면 여자는 그사실을 자연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는가? 아담이 잠자는 사이에 비겁하게 도둑질한 걸로 갖자 만들었다. 그런 어떤 성서의 신앙고백, 옆구리 갈비뼈를 뽑았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성서적인 의미로 본다면 남 녀와 그 각각의 의미, 남과 여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인데 그것을 자연과학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서 남자의 갈비뼈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까 여자는 도둑질 한 물건을 받아서 만들었다. 그러면 장물애비다.
성서에서 신앙고백문을 자연과학적 진리로 이용하고 해석하는 시도는 무모한 시도다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 신앙고백, 신앙의 핵심이 무엇이다. 하느님은 인간과 세상을 창조해 주신분, 우리의 참된 주인이시다. 또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는 그러한 신앙고백문을 발견할 수있어야 되고 그러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넘치시는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그욕심 때문에 그 하느님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인해서 죄악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한 신앙의 내용, 신앙의 핵심을 우리가 발견할 수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문장 하나 하나 표현 하나 하나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낼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시도라고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5. 모세오경(율법서)
신약에서 보면 율법이라고 나오는데 그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모세오경(율법서)의 내용을 현실 생활안에 법규로서 제정을 해논 것이다. 율법의 본 정신을 살펴볼려면 이 모세오경(율법서)에 대한 이해가 먼저 전제가 되어야만 될 것이다. 모세오경의 입문과정 으로서 맨 처음에 구약성서를 이루는 기본적인 토대를 살펴본다.
구약성서를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는가? 구약 46권, 우리가 어떤 뼈대로 정리를 해보겠는가? 굉장히 복잡한 것 같지만 막상 정리를 해놓고 보면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님을 학인할 수 있다. 대략 세 가지로 정리를 해서 말을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구일까?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역사를 다루는 부분이다. 특히 구약성서는 그 인간의 대표성을 지닌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가?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는 부분이라고 볼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그 유대인들이라고 일컬으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이겠는가?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다윗이다. 왜 다윗인가? 신약성서에 있어서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예수다. 예수 사건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부활이다.
예수라고 하는 인물의 모든 초점에 우리는 맟춰져있는데 그 예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구약성서도 해석이된다. 그러면 예수의 탄생과정은 4복음 서에서 예수의 탄생과 어린시절을 전하는 것은 마태, 루가 두 복음서 뿐이다. 두 복음서를 봤을 때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 가녀린 인간, 한 아이, 그 아이를 표현하는 방식중에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 누군가 하면 바로 이 다윗이다. 마태오도 루가도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표현한다. 또 실질적으로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다. 구약성서의 완성, 구약에 이루어졌었던 하느님의 모든 예언이 완성되는 인물로 신약에서 예수를 표현할 때 그 예수를 어떻게 구약과 연결시키느냐? 복음서 저자들은 어김없이 다윗으로 연결을 시킨다.
구약성서에서 유대인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아 그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메시아가 예수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논리이며 신약성서의 저술동기도 된다. 왜 신약성서에서 특히 마태오와 루가가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전하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이요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유대인들, 너희가 기다렸던 메시아가 이 분이다 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삽입을 시킨 것이다.
결국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구약성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뽑으라고 한다면 다윗이다. 이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구약성서 전체가 작성이 되었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이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다윗시대를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오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다. 다윗의 이상적인 상태, 다윗이라고 하는 한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역사가 가장 이상적으로 펼쳐졌었는데 이 이상적인 상태가 무너져 버림으로 인해서 다시 우리가 하느님과 인간의 본래 관계를 회복해야된다.
창세기 적으로 표현을 하면 에덴동산으로 다시 되돌아 가야만이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다라고 후대이 이르러서 부르짓게 되는데---
유배생활을 겪게된다. 이 유배생활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또 다시 외치는게 무엇인가? 빨리 다윗시대로 돌아가자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 시작에서부터 다윗시대를 지향했다가 다윗시대에 절정을 이루고 유배생활을 통해서 다시 다윗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는 책이 바로 구약성서이다. 그래서 예언ㄴ서를 봐도 그렇고 유배시대에 쓰여진 모든 책들을 보면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서 묘사를 하는 것이 다윗왕이고 다윗시대이다. 그래서 다윗가문에서 메시아가 날 것이다라고 하는 예언이 성립이 된다.
다윗시대 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이 출애굽사건에서 우리가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모세오경이다(창세, 출애, 레위, 민수, 신명). 모세오경에서 항상 우리가 제일먼저 살펴봐야할 것은 하느님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이렇게 했다. 내가 세상을 만들었고 내가 너희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냈다. 당신을 열어 보이신다. 그리고 그 열어 보이심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응담을 했는가? 소명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모세오경이다.
그래서 여기에 대표적인 주인공으로 등장이 되는 사람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마지막에는 모세라고 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어떻게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그들이 어떻게 하느님께 응답했는가? 이 이야기를 써 놓은 것이 출애굽이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부르셨고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또 모세를 어떻게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모세가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그것만 모세오경에서 살펴보고 묵상할 수 있다면 출애굽사건은 간단하게 깨우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면 계시와 소명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의 주제를 다루는 것이 모세오경인데 한 마디로 출애굽사건,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느님 백성의 형성사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 백성이 초창기에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가 하는 하느님 백성의 형성사를 다루는 것이 모세오경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 백성이 된 구체적인 사례는 십계명이다. 모세가 출애굽 사건이 끝난 다음에 하느님으롭부터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십계명을 받음과 동시에 이 계명을 철저하게 준수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인간측의 응답이었다. 그러므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주님이 되시는 일종의 계약이다.
일종의 계약이라고 하는 형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림을 받게되었다.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모세오경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된다. 구약성서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인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는 부분은 어딘가?
구약성서 각 권으로 따진다면 우리가 보통 역사서라고 구분하는 부분이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구분할때는 전기예언서라고 구분을 하기도한다. 예언서를 구분할 때 전기 예언서, 후기예언서 이렇게 구분을 하는 방법도있다. 그런 구분이 가능하다면 전기예언서로 ㄹ분류되는 부분이 바로 이 다윗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내용이라고 볼수 있겠다. 그러면 이 전기예언서 역사서에서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뤄주는가?
우리가 상징적으로 본다면 인간이 하느님께 응답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다윗이라고 하는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 다윗을 ㅂ루각시키기 위해서 등장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울이다.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의미에서 보면 인간적으로 보면 참 불행한 그런 사람중에 한 사람이다. 물론 성서를 쓴 저자들의 의도에 따라서 그렇게 묘사된 측면도 있을수 있지만 어쨋거나 이 다윗이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서 구약성서의 편집자들은 인간이 하느님께 응답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서술을 한다. 그리고 이런 이상적인 모습속에서 구원이 이루어짐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다윗의 고향, 다윗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그래서 나중에는 전투를 통해서 언청난 지역을 확보를 하면서 자기자신의 수도로 삼았던 예루살렘이 오늘날까지도 구원의 상지으로 되어있다. 새 예루살렘 ,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곳이 자기들 시대에 있어서는 다윗의 도성이면서 하느님의 성전이 있었던 장소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봤을때는 세상종말 때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도성에 들어간다 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표현을 쓸 정도로 다윗시대 또 다윗과 관련된 모든 것은 이상과 구원의 표지가 되게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윗의 인간적인 부족함 또 한 인간으로 저질를 수 있는 죄악상이 솔직하게 숨기지않고 그대로 표현이된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하느님께 응답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요약해 논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부분은 우리가 모세오경이 하느님백성의 형성사라고 한다면 다윗 역사서는 하느님백성의 성장과정 이라고 표현을 할수있을 것이다.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하느님 백성으로 형성된 유대인들이 이제 하느님 은총안에서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가?
그 성장과정을 설명하고있는 것이 전기예언서 역사서 부분으로 말할 수 있다. 바빌론 유배 생활중에 쓰여지고 유배가 끝난 다음에 자신들의 과거역사를 반성하면서 쓰여지는 책이 성문서라고 하는 것이다. 성문서가 바로 이 유배생활과 관련된 성서들이다. 그리고 다윗시대와 유배시대를 통털어서 많은 예언서들이 작성이된다. 예언서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민족이 많은 민족적으로 우여곡절을 격고 있었을 그 당시에 남과 북에서 쓰여졌었던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모아논 것이다.
세 가지 뼈대로 구분을해서 살펴보면 예언서라고 하는 것은 이상적인 상황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이스라엘민족이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상황까지 전체를 총막라하는 그런 서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성문서들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작성이 되는가? 모세오경이 계시와 소명이고 역사서가 이상과 구원이라고 한다면 성문서는 유배생할 그 자체가 상징하듯이 시련과 시련을 통해서 다시 하느님과의 충실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회개라고 하는 두 가지의 주제로 작성이 되는 것이 그 시련을 통해서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었는가? 그 회개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성문서들이다.
그래서 이 시련과 회개라고 하는 두 가지 주제를 지닌 이 성문서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느님백성의 쇄신과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느님백서을 다시 재편하는 정화하는 그런의미로 이해를 하면된다. 구약성서라고 하는것이 무엇이냐? 한 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다윗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인간을 중심으로 어떻게 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만들어졌고 그 백성이 어떤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면서 차후에는 다시금 하느님 마음에드는 새로운 백성으로 정화되는가? 쇄신되는가? 하는 전 과정을 요약해논 것으로 이해를 하면된다.
그리고 각 권마다 이러한 주재들을 가지고 크게 묵상을할 수있으면 좋을것같다. 이러한 구분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구분속에서 느낄 수 있는 하느님상이 어떤가? 모세오경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상과 또 역사서나 전기예언서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상, 그리고 성문서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상이 어떤가? 이것은 우리가 또다시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된다. 모세오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하느님상은 어떤가?
출애굽사건이 기반이기 때문에 여기서 느끼는 하느님상은 해방과 자유의 하느님상이다. 억눌린자를 풀어주는, 같힌자를 풀어주는,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의 기쁜소식을 알려주는 그런 하느님상을 우리는 출애굽 사건에서 발견을 한다. 약자편을 드시는 당신의 능력으로 약자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런 하느님상을 우리가 발견을 한다. 다윗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서 부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느님상은 철저하게 인간과 하신 약속에 대해서는 실천을 하시는 약속과 희망의 하느님상을 발견을 한다. 구원의 상징으로 다윗과 다윗의 왕가가 그려지기 때문에 하느님께 성실하게 응답한 인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게되는 것인가?
하느님께서 신실한 인간에게 어떻게 반응을 하시는가? 그것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 다윗이야기이기 때문에 약속과 희망의 하느님을 우리는 역사서에서 발견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배생활을 중심으로 해서 펼쳐지는 성문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느님상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래서 현대적인 용어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상을 비로소 발견을 하게된다. 유배생활로부터 회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끌어들이시는, 다시 당신 품안으로 끌어 모으시는 자비, 그리고 사랑의 하느님상을 발견을 한다. 구약성서를 읽을 때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있는 하느님상을 가지고 읽으면 엄청나게 잘못된 해석이된다.
신약에서 알고 있는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느님상인데 구약성서를 보니까 도데체 하느님이라는 분은 사랑이 없더라. 이스라엘에 대적되고 이스라엘을 침범하는 이방인들을 하느님이 징벌로써 가서 쳐부숴버리고 또 계약의 궤를 나르는데 사제계급이 아닌 사람들이 그것을 조금 만졌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즉사를 시켜버리고 이것이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이신가?
이런 질문들을 하는데 성서에서 드러나는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 새대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시대적인 흐름이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모세오경을 보면서, 여기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발견할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세오경을 편집한 사람은 사랑의 하느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것을 편집하는 것이 아니고 해방과 자유라는데 맞춰서 하느님을 펴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해방과 자유를 표현하는 그 책 속에서 사랑과 자비를 발견할려고 하니까 발견이 안된다. 전혀 엉뚱한 곳에 가서 엉뚱한 것을 찾지 말아야 된다.
이것을 잊지말고 새겨두어야 구약성서가 제대로 이해가 된다. 모세오경을 보고 이 부분을 보면 하느님은 대단히 냉철하신 분이다. 당신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위배되는 사항이 있으면 가차없이 처벌을 하시는 분이다. 징벌을 하시고, 벌을 주시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천벌을 내리신다. 그러한 모습이 왜 그 당시에는 통용이 되었는가? 결국은 하느님은 약자편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느꼈던 하느님상이 그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사랑의 하느님을 발견할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정말 사랑의 하느님의 모습은 구약성서 보다는 신약성서에서 발견이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하느님이 사랑이심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다(돼지 꼬리 붙들고 순대 달라는식, 급하다). 인간의 깨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인데 이 단계 없이 처음부터 무작정 사랑의 하느님! 하고 나가면 문제가 된다.
우리가 신아을 깨우쳐 나가는 것도 항상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받고난 다음에 1년, 2년, 3년이라고 하는 기간을 왜 필요로 하는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례받는 순간에 완전히 하느님의 자녀로 탈바꿈 되는가? 그것은 아니다. 성사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선언이 되었다는 것이지 세례, 그 자체가 그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완전히 변화시켜 버리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개인이 앞으로 노력해야 될 부분이다. 출발점에 섰다는 것이지 결승점에 섰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앙생활, 제길을 걷느냐? 아니면 발바닥 신자만 되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다. 어떻게 내가 이 깨우침의 과정을 밞아나가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처음부터 무엇인가 완벽하게 되서 시작되는 것은 우리 인간세상에도 없고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 측면에서도 불합리한 요구사항이 될 수있다. 그래서 꾸준하게 성서공부를 해야한다.
성서안에서 성령의 감도하심에 의해서 쓰여진 성서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발전과정을 밟는 것인데 이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천년 동안의 발전과정을 밟은것인데 자기 자신의 그 조그만 몇십년의 인생에서 무엇인가 갑작스런 변화를 노린다고 하는 그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물론 특별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하루 저녁에 헤가닥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건 특별한 경우이다.
성서를 보면 바울로 사도가 오전까지만 해도 살기등등해서 때려 죽인다고 하고 가다가 갑자기 한 순간에 바뀌어 버린다. 그것은 하느님의 특은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를 일반화 시키지는 말아야한다. 특별한 경우는 특별한 경우로 놓아두어야지 특별한 것이 나에게 오지 않을까? 신앙생활에서 무언가 나에게 특별한 체험, 무언가 나는 특별해야 된다는 병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상적인 일상적인 어떤 교회의 활동, 자기자신의 건전하고 신실한 그런 신앙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할려고 해야지 어떤 특별한 행위를 통해서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맛을 드릴려고 하는 것은 정말 자기자신이 극한 밑바닥을 걷고 있을 때는 어느정도 힘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될 수있을지는 몰라도 자칫 잘못했다가는 자기 자신이 노리는 그 꾀에 자기 스스로 빠지는 수가있다.
특별한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말고 일상적인 삶안에서 전진적으로 차츰차츰 밟아 나가는것에 매력을 느끼면 좋겠다. 무엇인가 차츰차츰 발전해나가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 나가는 그런 과정을 염두에 두어야 된다. 그것을 성서공부를 하면서 간접적으로 배우면 좋을 것이다.
구약성서를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다. 또 한 시대에 1년, 혹은 2년에 걸쳐서 작서이 된것도 아니다. 수 백년 또 어림잡아서는 몇 천년에 이르면서까지 전승이 되어왔던 것을 종합한 서적이라고 봤을 때, 이 구약성서에는 자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성서를 지었다, 구약성서의 저자다, 이런 표현을 쓰지않고 편집자다. 라는 표현을 쓴다. 구약성서의 편집, 단계, 그리고 전승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정리를 해본다.
구약성서를 이루는 사료들은 무엇인가? 구약성서에 관련된 사료들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정이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인되고 있는 내용만을 간략하게 정리를 한다면 대략 네가지로 구믄을 할 수가 있다.
1. 야 훼 계(J) :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른다.
2. 엘로힘계(E) : 하느님을 엘로힘이라 부른다.
3. 신명기계(D) : 법에 관련된 문헌
4. 제 관 계(P) :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들과 관련된 문헌이다.
1 야훼계 문헌 -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르는 야훼계문헌을 제일먼저 작성된 문헌이라고 추정이되는데 솔로몬 이후에 남쪽으로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 이렇게 구분이 되었을 때 남쪽 유다왕국에서 작성이 되었다. 누가 작성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남쪽 유다왕국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작성이되었다.
작성이된 이유는 다윗 왕권에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윗의 편에서 작성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다윗이라고 하는 왕을 가장 이상적으로 묘사 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서 가장 이상적으로 응답한 인간으로써 다윗 왕을 돋보이게 하기위해서 야훼계문헌이 작성이된다.
2. 엘로힘계 문헌 -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작성이된다. 북쪽 이스라엘에 살고있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작성이 되게 되는데 북쪽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자기네 자신들의 정신적인 고향이고 종교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남쪽 유다왕국에게 빼앗겨버린 그런 입장이었었기 때문에에 남쪽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 열망, 그것은 대단했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차선책으로 여러 가지 상징물들을 만들어서 그 상징물들을 통해서 야훼 하느님께 대한 여러 가지 숭배행위를 하게된다. 또 실질적으로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은 우리 인간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는 제삼자를 동원을 한다. 혹은 제 삼의 어떤 사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라고 하는 사상이 싹트게 되는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모든 것이 하느님과 직접적인 일대 일로 대하한다.
하느님이 직접 만나서 직접 이야기 하고 하느님이 필요로하면 인간에게 직접 다가 오셔서 말을 건네고 이런 식이였었는데 이제 남쪽 북쪽으로 갈라지고 하느님을 직집 볼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빼앗겨버린 입장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까 이제 하느님과 간접적인 통로가 만들어지게 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야훼계문헌은 바로 그러한 입장을 대변을 하는 그러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특별히 내용을 보면 꿈이다든지 천사들과 관련된 내용은 어김없이 야훼계문헌이다. 구약성서에서 천사가 등장을 한다든가 꿈속에서 누구를 만난다던가 그런 내용들은 거의 야훼계문헌들이다.
3. 신명기계 문헌 - 나중에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생활을 거치고 난 다음에 이제 자기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깊은 반성과 회개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 깊은 반성과 회개의 하나의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 출애굽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출애굽 정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제 지금이라도 정신차리고 출애굽 정신으로 돌아가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십계명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충실해야만이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이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의 정신을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조하기 위해서이 신명기계문헌이 작성이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소 요시아라는 왕이 종교 쇄신운동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정신적 토대가 된다.
4. 제관계 문헌 - 사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예식, 제사행위, 또 사제들의 삶에 대해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 제관계문헌 이라고 볼 수 있다. 제관계문헌이 가장 집중적으로 작성이 되어 있는 것이 레위기다. 이렇게 구약성서는 네 가지의 문헌들이 짜집기 되어있는 책이다 라고 이해를 하면된다.
우리들 입장에서는 구약성서가 네 개의 문헌들로 되어있다는데 우리가 읽는 성서중에서 네 개의 문헌들을 하나하나 구분을 해보면 더 좋지않을까?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는것보다 전체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훨씬 더 이롭지 그것은 학자들이 하는 일이고 실질적으로 보고싶으면 구약성서의 각 구절 구절들을 문헌별로 ㅂ루분해논 안내서가 있다(분도출판사, 모세오경의 후반부를 보면 구분이 되어있다).
6. 모세오경의 이해
명칭은 우리가 모세오경을 이렇게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는데 학자들에 따라서 모세오경이 아니고 4경이다 또는 6경이다 9경이다 이렇게까지도 표현을 한다. 4경은 신명기를 뺀다. 신명기는 역사서적인 측면이 강하다. 6경은 여호수아서를 첨부를 시킨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을 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책이기 때문에 이것 역시도 하느님 백성이 형성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를 포함해서 6경, 9경은 전기예언서, 역사서까지 모두 포함을 시켜서 9경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또 가톨릭 교회가 나름대로 인정하는 부분은 모세오경 이라는 표현이고, 실질적으로 다섯권 이라고 하는 책을 모세오경(율법서)으로 간주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세오경 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내용을 정리를 해본다.
구성과 내용 : 구약성서의 기본적인 토대를 말할 때 모세오경은 출애굽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하느님백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그 형성사를 다루는 내용이다.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출애굽사건 이라고 하는 것이 자리를 잡는다. 가장 중심적인 사건이다. 이 중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앞 뒤로 펼쳐내는 것이 모세오경이다. 출애굽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등장되는 것이 하느님백성의 기원이다.
하느님백성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그 기원을 보통 우리가 성조사라고 한다. 물론 그기원사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서 하느님이 최초로 당신의 백성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성조들의 이야기,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이사악, 약곱, 열 두 아들들, 그리고 모세에 이르러서 출애굽사건이 일어났다. 이렇게 표현을 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하느님백성의 기원, 성조사를 다루기에 앞서서 모세오경의 맨 첫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세상과 인간의 기원이다(태고사).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인간의 삶이 인간이라고 하는 생명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전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열어보이시는 과정이 이 단계를 밞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인간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끌어 모으신다. 그리고 그 끌어 모은 백성이 노예생활에 빠져있을 때 다시 출애굽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당신의 백성으로 삼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출애굽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는 하느님백성의 형성과정을 정리를 하게된다.
대표적인 것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던지 또 광야생할을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서 벌어졌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 이것이 하느님백성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모세오경의 마지막 단계에 가면 이렇게 형성한 하느님백성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가? 하느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되는가? 그것을 법률이라고 하는 형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정리를 해준다. 하느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해야되는가? 하느님께서 당신자신을 열어보이시는 사건을 전제로 하고, 여기서는 인간의 적극적인 응답이 이루어짐으로 해서 한편에서는 구원역사가 펼쳐지는 이 과정이 모세오경이라고 볼 수 있다.
㉮ 성조사를 전하는 부분이 창세기.
㉯ 출애굽사건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백성으로써 어떻게 다듬어지는가? 그것을 다루는 부분이 출애굽기.
㉰하느님과 인간의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되는가?그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 신명기.
㉱ 그리고 이 전반적인 과정속에서 사제들이 지켜야할 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적인 규모, 공동체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 레위기와 민수기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모세오경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될 수있다. 우리가 오늘날 저술하는 책으로 본다면 창세기는 서론에 해당이되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한 민족을 선택을 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뤄나가는 서론이라고 본다면, 신명기는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모세오경을 한 권의 책으로 봤을 때 서론과 결론은 창세기와 신명기를 예로들 수 있겠고 그 서론과 결론안에 담겨져있는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출애굽사건이다. 이렇게 모세오경의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7. 모세오경의 신학
이러한 모세오경의 구성과 내용을 전제로 했을 때, 모세오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봤으니까 이러한 모세오경을 읽으면서 우리자신이 신앙안에서 체험해야 될 주제들이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가 간단한 용어로 신학이라고 표현을 해본다.
신학이라고 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성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신앙안에서 무엇인가 상징적인 느낌을 갖어야 되는데 그 상징적인 느낌을 정리해 놓은것, 어떤 묵상과 깨우침의 길을 제시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이해를 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이 모세오경의 신학이 무엇인가? 신학이라고 하는 표현이 너무 무겁다면 그냥 모세오경의 주제가 무엇인가? 이렇게 이해를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모세오경의 신학을 네 가지로 정리를 해볼 수 있다.
① 창조 - 우리 삶의 모든 시작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모든일, 나 자신을 포함을 하는 것이고 또 나자신이 살고 있는 이 삶의 조건이라고 하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도 다른 어떤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는 창조신학, 창조라고 하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 모세오경이다. 성서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학적인 진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고 신앙안에서 본인이 체함하고 느끼는 바로 고백이라는 행위이기 때문에 구약의 백성들이 야훼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맨 처음 그분의 대한 느낌, 체험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바로 창조였다.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는 신앙의 내용을 창세기에서 창조설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준다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이 창조라고 하는 주제, 이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인간의 삶의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다. 삶의조건은 평화이다. 평화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할수없고 할 것이 이니고 반드시 평화이어야만된다.
그것이 창세기에서 들어나는 하나의 신학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처음부터 주시고자 했고 실질적으로 주신 삶의 조건이 평화이다. 이 평화가 깨어진 것은 인간 스스로 깼다. 우리가 오늘날에 와서도 자꾸 평화를 이루어야된다. 민족통일을 위해서 평화와 일치를 이루어야 된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여러 가지 기도문들 중에도 등장하는 것이지만 이 평화라고 하는 것이 선진국 사람들만 혹은 잘 사는 사람들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고 이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인간들, 심지어는 오늘날에 와서는 동물과 식물들도 누려야 될 진정한 평화이다. 과거 교회의 부족한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 창조신학을 잘못 해석을 해서 인간의주로만 해석을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너 이세상 모든 것을 다스려라 했을 때 그 다스림을 인간 평화를 위해서 모든 동물, 식물들을 지배하고 희생하는 것으로 해석을했다. 인간 중심으로 해석을했다. 어느 철학자가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되고 자연, 동물, 식물들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했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 해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제시가 되면서 이 평화라고 하는 것이 인간들만을 위한 평화가 결코아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해주신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은 평화를 누려야만된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바로 환경문제라고 볼 수 있다. 생명운동, 환경운동에 그 신학적인 뿌리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아야만 된다. 왜 신앙인들이 환경문제 신앙운동에 앞장서야만 되는가? 여기에서 신학적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평화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느님안에 평화를 누려야만 되는것이고 그것을 신앙적인 내용으로 고백해놓은 것이 창세기에 들어있는 창조설화이다. 그 다스리라는 표현을 인간위주에 편협한 방식으로 해석을 한다면 무모한 해석이 될 수있겠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 교회역사에 있어서도 많은 오류를 범했다라고 생각을 한다.
과거 중세기 교회때 식민지 정책의 교회가 협조를 하고 심시어는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었던 것도 사실은 이 창조에 대한 신학을 잘못 해석함으로 이해서 벌어진 교회의 부끄러움이라고 솔직하게 고백을 해야 될 것이고 그래서 최근에 교황청에서도 교회 과거의 잘못된 행위들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 하는 그런 내용도 있었다. 이 창조신학을 우리가 좀더 제대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② 선택 - 창조신학과도 깊은 연결을 짓는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자연, 동물, 식물에게 주시고자 했던 평화가 인간에 의해서 깨어짐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의 조건이리고 하는 것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도 역시 하느 인간의 선택이 있었다. 아담과 에와라고 하는 한 인간들의 선택에 의해서 평화가 깨졌고 이 선택이라고 하는 주제는 계속해ㅏ서 실질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라고 하는 성조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결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자기자신이 하느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자유의지를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 선택에는 반듯이 신앙이 전제된다. 내가 신앙을 갖고있느냐? 신앙생활을 하느냐? 하지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선택하는데 많은 영향을 준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는 하느님 이라고 하는 분을 모르고,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선택의 폭은 굉장히 높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았기 때문에 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우리의 선택을 제약을 받는다. 그 제약을 기쁜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제약을 제약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선택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인일 것이고 그렇지 않고 마지못해서 하라니까 한다. 자기 스스로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고 마지못해서 따라만가는 강요된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사실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리사이파적인 사고방식이다. 겉으로는 따르지만 속은 따르지 않는 것, 그런 의미에서 선택이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는 모세오경에서 아브라함이 신앙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리고 자기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서 한 인간으로서 한 신앙인으로서 순간 순간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을 하면서 살아가는가? 그것을 우리가 발견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 의미의 선택을 우리가 상상할 수있을 것이다.
③ 계약 - 가장 대표적인 계약은 십계명(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직접받았다)이다. 하느님 백성으로써 걸어가야 할 길(성실성), 하느님 백성으로써 성실하게 하느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 해 주는 주제가 바로 이 계약이다. 그래서 이 계약은 성서에 보면 희망으로 표현이된다. 계약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모세오경에 보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을 한다. 거기에 계약문이라고 볼수 있는 것이 십계명인데 그 십계명이라고 하는 목표는 결국은 너희들이 하느님께 희망을 갖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성실하게 살으라는 말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살아야만이 내가 이것을 해주고, 너희들이 이렇게 살지 않으면 벌 주겠다 라는 차원이 아니고 그것은 표현방식일 뿐이다. 계약이라고 하는 형태로 표현을 하다보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지 실지 하느님이 인간하고 장사를 할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하고 장사를 할려고 하지, 하느님은 장사를 하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하고 계산을 하지않는다.
하느님이 계산에 밝으신분 이라고 한다면 십자가상에 못을 박히고 죽임을 당하면서 까지도 이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없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해석하고 계약부분을 구약성서에서 볼 때에는 장사속으로 보지말아야 된다. 단지 표현방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를 가져라, 희망을 가져라, 그래서 전적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지닌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그 점을 깨우쳐주면 좋을 것이다.
④ 율법 - 이러한 창조, 선택, 계약이라고 하는 주제가 종합적으로 명문화 되는 것이 실은 율법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행위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되는가? 인간다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예 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덕목으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약에 보면 예수께서 율법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써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행위를 제시를 하는 것인데 결국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들어내시고자 하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간략하게 율법은 사랑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율법에 대한 구체적인내용은 모세오경에 보면 세 가지로 나온다. 법전이 세 개가 나온다.
㉠ 계약의 법전 - 탈출기(출애) 20장 22절 - 23장 19절
㉡ 신명기 법전 - 신명기 12장 - 26장(묵상자료로서 읽어보면 좋다)
㉢ 성 법전(거룩한 법전) - 레위기 17장 - 26장
이러한 모세오경의 전반적인 내용을 전제로 해서 마지막으로 정리를해 볼수 있겠는데 구약성서를 신약의 조명화에서 해석을하고 이해를 해야된다 라고 하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볼수 있겠다.
구약성서와 그리스도의 신원이다. 구약성서의 전반적인 내용과 우리가 신약에서 중심적인 인물, 또 현재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 연관을 지어보자. 구약의 모든 계시가 완성이 된 것이고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인물로 그리스도를 성서에서 가르치고 있다면 도대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그것을 발견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구약성서의 연관성이다. 어떤 의미로써 그리스도를 구약의 완성이다. 계시의 완성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다. 나는 000다. 000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표현할 때 우리가 가장 신약성서에서 상징적으로 볼 수 있는 단어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이다.
다른(메시아, 사람의아들, 어린양, 임마누엘, 임마누엘, 세상의빛, 목자, 하느님의 아들,부활, 빵) 내용은 구약의 예언되었던 표현들, 또 초창기 그리스도 신자들이 부활사건을 체험한 이후에 자기자신들이 소급해서 아! 예수님은 이런 분 이셨구나 라고 느낀점들이다. 이것은 예수의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초창기에 부활사건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예수께 대해서 드린 반응들이다.
실질적으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 군중들에게 자신을 표현했을 때 가장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표현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이다. 도대체 당신자신이 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라는 표현을 쓰셨느냐?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구약성서와 연결을 지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요한 복음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 - 내가 걸어가는 것을 전제로한다.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당신 자신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되겠다 라는 말씀이다. 구약성서에 인간들이 걸어가야 될 길을 제시한 것은 율법서이다. 그러면 나야말로 너희들이 따라야 될 진리이다. 예언서이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내가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성문서(지혜문학)이다.
율법서에 중점적으로 담겨져 있는 것이 계명이다. 인간이 걸어가야 될 길이 계명이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신자들이 올바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계명이다. 계명을 지켜야 된다 하는 것은 너희들이 이 길을 걸어야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예언 -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부분, 하느님의 말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생명은 사는 것 이기 때문에 사는 모습을 통해서 계속해서 후손들에게 전달해준다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것은 삶의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살아 나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삶의 지혜다. 계명과 말씀과 지혜가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안에 온전히 담겨져 있는 것이 구약성서이다. 이것이 구약성서의 전 내용이라고 불 수 있는데 이 전 내용이 예수안에서 완성이 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표현 자체가 구약의 모든 내용,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서를 통해서 들려주고자 하는 이 전 내용이 완성되었다. ‘나는 길이다’ 하는 표현은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사랑이다. ‘너희들이 앞으로 사랑의 길을 걸어가라’ 이 사랑속에는 율법이 완성되어 있다.
과거에는 율법이라고 그랬지만 이제 너희들에게 새로운 율법(계명)을 주겠다. 이 새로운 계명이 사랑이다. 이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 모범을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주겠다. 말로만 하면 안되니까 내가 직접 보여주마, 그리고 당신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너희들이 걸어가야 될 길이 이것이다. 그 다음에 너희들이 따라야 될 진리는 너희들이 고백하는 믿음에 있다. 너희들이 일상 생활안에 고백하는 그 믿음안에 진정으로 너희들이 따라야 할 진리가 있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누리고자 하는 생명은 현세의 생명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다. 그 영원한 생명에 너희들은 보증을 갖고 살아라, 내가 너희들에게 분명하게 보증이 되겠다. 그래서 사랑과 믿음속에서 희망(보증)으로 보여준 것이 부활이다.
당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언과 동시에 우리 인간들에게 이 세가지의 덕목을 요구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친히 십자가와 부할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을 해주신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전 과정이 완성되었다. 성취되었다. 계시가 완성이 되었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며으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이 삶,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를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갖고, 또 그 삶의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자신의 기본적인 조건은 영원한 생명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신, 망, 애, 삼덕이라는 것을 교회가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도 여기에있다. 그 점을 구약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정리하는데 활용을 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의미도 좀 더 올바르게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한다.
8. 창 세 기
1) 창세기 구조와 내용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별을 한다.
① 태고사(원역사) : 1장 - 11장 ② 성 조 사 : 12장 - 50장
① 태고사 - 인간의 역사,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조건을 만들어주는 과정이다.
태동과 관련된 이야기다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세상창조이고, 세상창조의 마무리 완성의 단계로서 인간 창조이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이 되고 있다. 이렇게 선한 상태에서 인간을 창조해 주셨고, 세상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에와 혹은 카인과 아벨로 대표되는 인간들은 하느님께 불순종을 했다. 하느님의 뜻에 반역을 했다 해서 불순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세상에 만연되고 있는 죄악을 신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성서 편집자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불순종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불순종의 결화로서 나타나는 이야기가 대홍수 사건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노아의 방주 사건을 이야기하고, 대ㅣ홍수를 통해서 하느님이 이세상의 모든 죄악들, 모든 것을 싹 쓸어버리고 그 다음에 다시 인간들로 하여금 기회를 주었지만 인간들은 또 다시 불순종의 ‘죄’인 바벨탑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진노로 이제는 싹쓸이가 되는 것이 아니가 인간사회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 1장에서 11장에 걸쳐서 나오는 태고사의 전반적인 내용이라고 불 수 있다. 한 아기로 친다면, 한 아기가 태어나는 그 과정을 본다면 세상창조와 인간창조, 그리고 인간의 불순종, 거기에 따르는 하느님의 징벌, 또 다시 불순종이 이루어지면서 마지막 결과로서 분열이 일어나는 이 전반적인 과정, 하느님과 인간이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이 역사를 우리가 태고사(1장-11장)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세상과 인류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② 성조사 -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부터 시작이된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인간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이 아브라함과 이어서 이사악이 나오고, 이사악에 이어서 야곱이 등장을한다. 이스라엘이 역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성조들이다. 그리고 이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활을 하는 인물로 요셉이 등장을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로 가게된 경위를 여기서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도 하나의 태동으로 본다면 전체적인 토대안에서 뼈대를 잡아놓고, 이 뼈대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삽입을 시켜서 우리가 좀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태고사가 전반적인 세상과 전 인류의 기원이라고 본다면 이 성조사는 이스라엘의 기원을 설명을 하고있는 것이다. 떠돌아 다녔던 히브리 민족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이스라엘(하느님이 싸우신다)을 하느님의 전사로 만들어주신 과정,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12장 - 50장까지 이르는 성조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와 내용을 지닌 창세기가 어떠한 배경을 갖고있는가? 창세기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의 역사적 배경 -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그 비옥한 지역에서 살고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이 되게되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지역에서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고 하란으로 이동을 한 다음에 가나안으로 가서 정착하는 이 과정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곳에서 떠나게 된 것은 어떤 정치적 망명을 한 것도 아니고 또 경제적으로 더 좋은땅을 찾아 나간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때 당시만 하더라도 정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자신이 족장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우두머리가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던 그 우르라고 하는 지역이 그 중동 지역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다른데로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서는 아브라함이 그 비옥한 땅인 우르, 또 자기 자신의 권력과 재력, 족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그 지역을 떠나서 알 수 없는 가나안 땅으로 갔다.
이 수수께끼를 하느님의 부르심, 하느님의 소명으로 해석을 한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소명을 받고 하란으로 떠나는데 실지 측량을 해보면 우르에서 하란까지가 1,100 km이고 하란에서부터 가나안에 이르는 이지역이 800 km 라고 한다. 거의 2,000 km를 자기 식솔들을 거느리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모험을 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야훼 하느님께서 자기자신을 부르셨다. 그래서 가나안 이야말로 자기가살 곳 이고 바로 그 곳 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신 땅이다라고 하는 그 신앙 하나로 자기의 식솔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의 전반적인 내용이고, 이런 고생고생 하던 끝에 결국 가나안에 도착을해서 아브라함이 정착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창세기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역사의 무대로 이해를 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 태고사라고 일컬었던 원역사에 대해서 정리를 해본다
① 태고사(원역사)
㉠ 우주관(세계상) - 자연과학적 지식과 성서의 지식의 구별을 말하는 것이다.
㉡ 구원관 -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관과 창세기에서 생각하는 구원관은 어떤가? 창세기의 구원관은 대략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창조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하느님의 은총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이 선물에 대해서 인간이 범죄행위를 저지른다. 선물을 관리를 못한다. 오히려 선물을 준 하느님께 대든다. 범죄 행위를 저지른다. 범죄행위를 저지르니까 당연히 하느님은 거기에서 발끈하신다. 하느님이 개입하신다. 이 개입하는 방식이 벌로 나타난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낸다. 그 때 서야 인간이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을려고 하는 노력을 하게 되고 그 인간이 본래의 모습, 은총의 상태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이 노력을 창세기에서는 구원관 이라고 가르친다. 이 것이 창세기의 구원관이다.
범죄 행위를 보면 뱀이 나오고, 생명나무가 나오고, 여러 가지 설화적인 요소들이 등장을 하게된다. 바벨탑도 나오게되고, 그러니까 ‘범죄’ 인간이 타락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런 내용을 기초로 해서 오늘날의 교회는 원죄를 가르친다. 아담과 에와가 하느님께 불순종 함으로 인해서 쫒겨나게 되는 그 과정, 그 죄악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오늘날 원죄로 자리를 잡고 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갖고 태어나고, 원죄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사해진다.라고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아담과 에와가 최초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다. 아담과 에와의 죄는 피조물로서의 자기자신을 망각한 죄다.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이것을 따 먹으면 하느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된다. 더군다나 선 과 악을 알게된다. 눈이 밝아지고, 지혜가 생기고, 그러므로 해서 하느님이 된다.
피조물로서의 자기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유혹이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인간이면서도 주제파악 못하고 하느님으로서 행세할려고 하는 그 경향들을 모두갖고 있다. 제물을 모으려고 하는 것 도 자기가 주인행세 할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위에서 내려누르고 싶고 지배하고 싶다. 남보다도 월등해지고 싶다. 내가 저 사람을 종으로 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나아야 되겠다는 주인 의식이다. 명예 쌓을려고 하고, 출세할려고 하고, 자식을 좋은 대학 보낼려고 하는 부모님들 욕심이 왜 나오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꼭대기에 올라가야 되겠다는 말이다. 바벨탑 사건처럼 ---
자식의 인간됨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공부만 잘해서 좋은 대학에만 가면된다. 그러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원죄이다. 그 원죄가 세례성사 때에 없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을 내 주인으로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내가 주인이 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서야 진정으로 하느님을 내 주인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하는 고백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원죄는 없어진다. 그러나 세레성사를 받고도 자기가 하느님처럼 행세하려고 하고 자기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를 한다면 죄악을 계속해서 저지르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원죄가 사해지면, 없어지면 그 자체로서 그 사람은 구원이다. 그런 그 구원이 오래 못간다. 세례성사 받은 그 시간부터 죄를짓는다. 세례성사 전례 때는 얌전한데, 끝나고 밖에나가면 그 순간부터 죄를짓는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당장 나가서 성당 밖에 세워둔 주차문제 가지고 시끌벅적 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구원관, 특히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야 될 것이 하느님께서 내리실 벌이 무서워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실 그 어떤 징계가 무서워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위선적인 뉘우침을 하는 것은 안된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에와의 이야기를 어떤 동화적인 차원, 또 거기에 나오는 단어를 단어 그 자체로 해석할려고 하지말고, 여기에는 창세기의 편집자가 우리에게 밝혀주고자 하는 이 구원관이 담겨져 있는 아주 상징적이고 치밀한 이야기이다. 그냥 대충 써 넣은 이야기가 아니다.
진정한 구원관이 무엇이냐? 인간의 죄는 무엇이며 하느님의 신성을 거스림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될 존재가 된다라고하는 그 의미가 무엇이냐?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에와이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는 엄청난 신학적 내용이 담겨져있다. 성서를 우리 자신들이 좀 더 깊게 묵상을 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다보면 이러한 도식이 보인다. 여기서 정말 우리가 신앙인으로 처신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죄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좀더 깊게 묵상 할 수 있어야한다.
㉢ 인간관
㉮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하느님의 품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해서 인간의 품위가 하느님의 품위로 끌어 올려진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다. 실질적으로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품위, 하느님의 모상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창세기에서 내가 모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겠다 하셨다. 모상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것은 창조설화는 설화자가 무엇인가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꾸며주는 이야기다 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무엇인가 반듯이 자기 나름대로 의도가 있다. 단어 하나 하나에도 분명히 의도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 했을 때 인간을 만드는 시점이 모든 세상을 다 만들어 놓은 다음에, 이제 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어야 되겠다 라고 하셨다. 하느님이 하신일이 창조사업 이었다. 창조사업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하느님이 일을 하셨다. 6일 동안 일을 하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는 쉬셨다. 하느님이 일하고 쉬신 것을 왜 창세기저자가 썼을까?
왜 유태인들이 그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가? 왜 십계명 속에도 안식일이 나오는가? 안식일 만큼은 일을 하지않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일한다는 것을 유태인들은 엄청나게 중요시 여겼다. 바꿔서 표현하면 일을 하시는, 노동을 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맨처음 인간이 체험하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품위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 했을 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품위는 노동하는 데서 들어난다.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한다, 창세기의 이야기가 없다면은 노동을 신성하다고 이야기 못한다. 왜 노동이 신성한가? 모두 하기 싫어하지, 누가 노동을 애써 사서 할려고 하는가? 부릴려고 하지 자기가 애써 일할려고는 안한다.
그런데 창세기의 정신은 그것이 아니다. 노동이야말로 신성하다. 왜 신성하냐? 하느님도 세상창조를 위해서 일을 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다하는 이야기는 일을 하는 존재다. 일을 할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살아나는 것이다. 일을 하지않으면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상실하는 것이다. 바울로 사도도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라’ 왜냐하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을 천박하게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왜 노동자들의 권리를 세워야 하는가? 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는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들만의 어떤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될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것이 우리 인간됨에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모상이다.
㉯ 보완적 존재
인간은 보완적 존재이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왔다. 그것이 여자는 남자의 시종이고 남자의 뒷바라지나 하는 이런 의미가 아니다. 성서에보면 아담이 혼자있는 것이 좋지 않더라, 혼자있는 것이 선이아니다. 미완성이다.
그래서 그 미완성인 상태를 좋은 상태로 만들어주기 위한 거둘 짝으로 여자를 당신자신이 친히 만들어 주신다. 남자가 갈비뼈 뽑아서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여자 역시도 하느님이 친히 만들어주신다. 미완성 상태인 남자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 주셨다.
결국은 남녀는 보완적 존재이다. 어느 한 편이 일방적으로 한 편만을 위해서 위해서 희생해야 될 존재가 아니고 서로의 완성을 위한 존재들이다. 남자는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을 위해서 여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여자는 자기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완성을 위해서 남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하등하다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똑같이 보완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남녀의 창조 이야기이다.
이것을 너무 잘못 해석을 한결과 우리 자신들도 신앙인들이면서도 많은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경우들이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관, 인간을 어떻게 이해를 하고 또 성서에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창세기에 이 두 가지 사항을 꼭 잊지말고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또 창조설화에서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중심적인 해석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야될 자연, 인간과 자연이라고 하는 두 측으로 이 창조설화를 해석할려고 하는 많은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② 성조사의 이해 (12-50)
연대적 대표성이라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다루는 부분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많은 이스라엘 성조들이 등장을한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이사악, 야곱, 그리고 마지막에는 믿음의 가장 출중한 인간으로서 요셉이 등장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앙적인 도식이 나오는데 창조설화에서 구원관의 네 가지 단계가 나왔던 것처럼 이 성조사에서도 우리가 걸치는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의 도식을 우리가 나름대로 잡아 볼 수가 있다. 그거을 간략하게 정리를 하면 먼저 신앙은 계시에서부터 시작을 한다. 하느님이 당신자신을 열어 보이신다.
열어보이시는 과정이 우선은 부르심이고, 부르심을 일컬어서 우리가 성소라고 한다. 그 부르심과 동시에 인간에게 약속을 해주신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땅을 주겠다. 그리고 무수한 자녀들을 주겠다. 성소와 부르심과 더불어서 약속을 주시는 하느님의 계시가있다. 그 계시에 대해서 인간이 응답을 하는(여기서 믿음이라는게 나온다), 그리고 그 응답을 했기 때문에 응답에 해답되는 실천행위가 나온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떠난다.
실천행위, ‘예, 알았습니다. 따르겠습니다.’ 하고 실천행위가 나오고, “네 아들 이사악을 바쳐라” 하니까 ‘예 알았습니다. 하고 이사악을 바칠려고 하는 응답과 실천이 따른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과 실천이 이루어졌을 때 구원이 성취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성조사에서 살펴 볼 수 있는 신앙도식이다.
우리 생활과 견주어서 본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의 계시를 신앙안에서 받아들이면서 응답을 한다. 창세기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상은 어떤가? 창세기 전반적으로 봤을 때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하느님상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정리를 해본다면 역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창세기 자체가 태고사(원역사)와 성조사로 되어있기 때문에 두 가지 차원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상을 볼 수 있다.
㉠ 태고사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하느님상은 우선 창조의 하느님이다. 모든 것을 만들어주신 근원이다.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창조의 하느님.
㉡ 태고사 안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절대 타자로서의 하느님이다.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타인이다.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내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그런모습의 하느님상을 우리는 태고사에서 발견을 한다. 나는 피조물이지만 하느님은 창조자 라는 이야기다. 내가 창조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창조자이신 하느님은 결국은 나에게 있어서는 철학적인 용어로 절대타자 이다.
나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다. 나 하고는 비교를 할 수 없는 그런존재다. 주의기도 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하늘에 계신다. 내가 가까이 느끼기는 느껴야 되는데 도저히 가까이는 할 수 없는 완전 절대자의 타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에 계신 이지 실재로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는 하늘에 계시는 분인가? 그건 아니다. 우주인들이 가서 아무리 뒤져봐도 안계시더라.
㉢ 성조사에서 들어나는 하느님상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임마누엘).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결정적으로 잊지말아야 될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왜 이런 표현이 가능한가? 성조사를 보면 하느님이 집안에 제일 큰 어른같이 나온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두가 마치 경우에 따라서는 친구처럼, 또 어떤 경우에는 아버지처럼 그냥 하느님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하느님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대할 때 아주 쉽게 아주 가까운 모습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족장의 우두머리와 같은 그런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신다.
심지어는 아브라함이 이끄는 그 가족들을 지켜주는 신으로도 등장이되고 그 가족들의 수가 불어나면서 하나의 종족이 되었을테니까 그 종족, 유대인, 나중에는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종족이 되었지만 그 이스라엘의 편만을 들어주는 그런 하느님으로서 등장이 된다. 그것은 그만큼 하느님이라고 하는 존재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라고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성조들에게 있어서는 항상 일상 생활안에 머물어 있었던 하느님이다.
창조설화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어떤 절대 타자, 나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거꾸로 성조사에 있어서는 항상 하느님이 인간들의 조그만일들에 끊임없이 개입하시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그분은 관여하시는 그런분으로 등장이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분은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이 공동체 운동에 신앙적인 기반, 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바로 우리가 가져야 될 하느님상이 이것이라고 본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어디서 만난다고 생각하는가? 성당에 가야되고, 성당에서도 감실에나 계시고, 전례중에서나 하느님 체험하고 그 외에는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산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아! 하느님이 계실 것이다. 양심의 소리는 계속해서 들린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국은 자기 양심에다 딱 묶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져야될 하느님상, 하느님이라고 하는 분은 어떤 종교적인 예식행위, 어떤 건물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같혀 계실 분이 아니다.
내가 겪는 슬픔, 고통, 기쁨, 행복, 모든 것에서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의식을 가져야되고, 그런 하느님상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펼치는 공동체운동 이다. 멀리 계시는, 지식으로나 알 수 있고, 성서 공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그런 하느님상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그 분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말씀나누기 이고 공동체 운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상을 우리가 가져주면 좋을 것이다. 정말 그 분을 내 집안 가장으로, 가장 큰 어른으로, 어떤 때는 형님으로서 친구로서 이렇기 아주가깝게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가고자 하는 이런 신앙, 이것을 인격적 신앙이라고 한다. 이런 인격적 신앙을 우리가 갖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때 정말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참된 기쁨의 요소, 또 우리를 얽어매는 그런 신앙생활이 될 수있으리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성조사에서 등장하는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상을 묵상을 하면 좋을 것이다.
9. 출애굽기
구조 :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을 할 수가 있다.
① 출애굽 사건, 에집트를 탈출해서 나오는 직접적인 이야기(1-18).
② 출애굽사건을 마치고 난 다음에 출애굽에 의미를 되새기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그 의미라고 하는 것이 하느님과 인간의 계약이라고 하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는 법령집 혹은 법률집 이라고 표현을 한다(19-40).
1) 출애굽 사건은 빠스카 사건이다.
빠스카 - 건너가다, 건너 뛰었다, 지나갔다.
성서에는 홍해를 갈대바다,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고 일명 홍해다. 바다냐? 호수냐? 거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냥 일반적으로 홍해, 갈대바다, 이렇게들 표현을 한다. 에집트에서 강이 되었던 바다가 되었던 어느 한 지역을 넘어서서 또 다른 지역, 노예생활에서 자유인으로 건너간 사건이 출애굽 사건인데 이 출애굽사건에서 성서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름대로 힘을 비축을 하고 그들이 무슨 독립운동을 펼쳐서 건너간 것이 아니고 이 출애굽 사건은 온전히 하느님의 능력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능력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상시에 힘을 키웠고 정치적으로 어떤 타협을 해서 파라오하고 협상을 한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집트의 노예생활 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하는 것이 출애굽사건이다. 그래서 일종의 이것은 해방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 해방의 역사에서 선봉에 섰었던 인물, 또 하느님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표적으로 대변했었던 인물이 ‘모세’라고 하는 인물이다.
노예로서의 억압이 있었고 이제 비로소 하느님의 능력으로 출애굽을 함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뽑힘을 받은 백성으로서의 자유, 그리고 해방이 주어졌다는 것이 출애굽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계기,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이 빠스카 사건이다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 다음에 ‘법률집’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이 사건의 의미를 깨우치는 것이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이 사건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미 이사건으 의미를 잘 알지만 이들의 후손들은 차츰 차츰 역사가 흘러가면서 이 출애굽사건을 잊어버릴것이고 의미가 점점 퇴색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퇴색되는 의미를 매일매일 살아있는 것으로 남기기 위한 방법이 사실은 이 법령집이다.
그래서 이 법령집은 계속해서 출애굽사건을 기억하도록 유도를 시킨다. 그 방법이 십계명이고 또 ‘계약의 법전’ 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약의 당사자는 야훼 하느님이고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간의 계약이 맺어진다. 이 계약의 조문이 십계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킨다는 이야기는 출애굽을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셨던 하느님께 대한 신아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야훼 하느님 백성으로서 계속 남기위한 절대적 조건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미가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19장-40장까지 나오는 법령집의 내용이다. 출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1부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2부는 사건의 의미를 다루는 것이다.
2) 역사적인 배경
출애굽기가 시작되기 위한 하나의 배경으로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것이 창세기의 후반부이다.
① 창세기 43장 -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로 내려가서 살게 되었는가? 그리고 왜 거기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들이 요셉이라고 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감도적으로 서술이된다.
② 창세기 47장 -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의 능력으로 요셉의 어떤 꾀로 에집트에 내려가서 정착을 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커다란 화를 일으키는 요인이되고 에집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방인 취급이 되고 나중에는 이방인도 아니고 노예로 전락을 하게 되는, 그래서 자기 자신들이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외각도시에 방벽을 쌓는 노예로 전락을 시킨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여기서 등장이된다.
이것은 출애굽을 이해하기 위한 우리자신의 배경 공부라 될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의 직접적인 이야기는 출애 1, 8-10절을 보면 더 구체적으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가? 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할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가? 하는 직접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그것을 하나의 배경으로 삼으시고 출애굽기를 이해를 하면 될 것 같다.
3) 출애굽에 나오는 내용들
출애굽기에서는 출애굽사건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1 -18).
① 하느님의 이름이 성서에서 나오게 된다. 이 전까지는 하느님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간단하게 줄이면 족장들의 하느님, 이런 표현이고 조상들이 섬겨왔던 분,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비로소 이 출애굽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하느님께서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서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신다.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 (나는나다)’ 다. 사실 엄격하게 따진다면 이것은 이름이라고 볼수 없고 당신 자신의 상태(인간에게 비쳐지는, 인간에게 들어나는 당신 자신만의 모습을 이야기 하신다)만을 모세에게 가르쳐주셨다.
한 편으로 본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름을 설명해 주어도 너는 모른다. 더 이해를 하자면 내 이름을 알 필요없다.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말고 그냥 하는 말만 따라라, 하면서 곧바로 주어지는 것이 모세에게 주어지는 소명이다. 모세는,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간에 하느님의 이름을 알아볼려고 한다. 이름을 안다라고 했을 때는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것이고 이름을 지어주다 라고 했을때는 그 사람을 나의 소유로 여기는 것이다. 어느 한 대상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를 내 소유로 삼겠다는 것이다.
또 그에게 이름을 물어본다는 이야기는 그와 관계를 맺고싶다는 표현이다. 모세가 하느님께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는 하느님과 무언가 자기가 인격적인 관계, 대등한 관계가 되어 보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안 가르쳐준다. 이름과 관련지어서는 그 이후에도 성서에서 많이 등장을한다. 바울로도 사울 이었는데 부활한 그리스도를 체험한 이후로 바울로로 바뀌었다. 시몬-베드로 아브람-아브라함 이름들이 바뀌어나가는 계기는 하느님이 체험,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름이 바뀌었다.
실질적으로 이름이 그 체험을 통해서 바뀌었겠느냐?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사울-바울로 시몬-베드로 다 같은 말이다. 그 당시 언어의 혼란으로 히브리말과 희랍어로 해서 그렇지 같은 말이다. 우리도 지역에 따라서 부르는 호칭이 다른 것들이 있다. 지역마다 다른 명칭을 쓸수도 있고, 언어권에서 달리 표현을 할 수 도있다.
이름을 바꿨다. 이름을 개명했다 하는 것은 무언가 자신의 삶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이 되었다 라는 이야기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가르쳐 주셨다라는 것은 이제 비로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하나의 신호다. 하나의 출발이다.
비로소 하느님께서 어떤 족장들 몇몇 사람들만을 대상상으로 당신의 구원계획을 계시 해 주시던 것에서부터 탈피해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전체를 상대를 해서 당신자신이 활동하신다는 인간적인 해석이다. 그 해석이 야훼라고 하는 이름으로 대표로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곧 바로 성서저자가 이름이 계시됨과 동시에 모세의 소명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그런이유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길을 따르기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거듭나야된다.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된다. 그 다시 태어남에 생활을 표현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기에 앞서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오늘날에와서 세례성사로 기념을 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라고 하는 공적인 표현은 세례성사이다. 중생 - 거듭 태어난다. 불교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해탈(깨달음)을 해야된다. 깨달음을 얻어야된다. 깨달음이 있을 때 해탈을 하는것이고 해탈을 해야 부처가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거듭남을 이야기하고, 불교에서도 깨달음, 결국은 거둡남이나 같은 의미이다. 한계를 지닌 한 인간이 어떤 절대적인 존재인 ‘신’ 과 접촉을 하고 또 ‘신’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거듭남의 자세, 깨달음이 자세이다. 모세도 비로소 하느님의 이름을 알게 되면서 자기 자신이 거듭난다. 출애굽기에서 이 부분을 보면 모세가 처음에는 야훼 하느님께 ‘나 못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아! 그럽니까? 제가 그것을 하기를 원합니까? 예, 그러면 제가 기쁜 마음으로 하지요,’ 이런 것이 아니고 어떤 의미로 본다명 하느님과 흥정을 한다.
흥정을 하는 조건은 처음에는 ‘나 보다는 형이 더 똑똑하니까 형을 시키십시오’ 하느님은 ‘안된다 네가 꼭 해야 되겠다.’ ‘그러면 내가 해야된다라고 하면 하느님이 내 편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나를 계속해서 지켜주겠다라고 하는 징표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니까 손을 가슴에다 넣으니까 문등병이 되었다가 또 한 번 넣었더니 말끔히 낳았다. 하나의 징표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만 갖고도 안되니까 하느님이 최종적으로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신다. 한 인간이 절대자인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근존적으로 변화를 이루는 이 소명부분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본다.
데카르타 라고 하는 철학자가 ‘나는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표현을 했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존재한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는 그런 부분이라고 본다. 모세의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가치는 소명을 받았다는데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앎과 동시에 그는 하느님이 일꾼으로 거듭낫다. 탈바꿈이 되었다 하는 것이 이 출애굽사건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부분적으로는 모세가 하느님과 흥정하다싶이 하는 그 부분을 우리도 좀 더 깊이 묵상을 해 볼 필요가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신앙을 너무 쉽게 아주 좋은 마음으로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참 아름다운일 일수 있다.
그 사람의 어떤 성격이라든지 그 사람의 사고에 따라서 물론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아무런 거부감없이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과 정말 많은 우여곡절 끝에 신앙을 경우에 따라서는 거부도하고 회피도하고 신앙의 여러 가지 내용들에 대해서 회의도 느끼고 의심도갖고 그러면서 신앙을 정말 자기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신앙생활은 정말 다르다.
우리가 주변에서 신앙을 너무쉽게 좋은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을 경계해야만 된다. 그 사람들은 신앙자체를 어떤 하려한 꽃으로만 생각을 하고 어떤 복락, 안정, 기쁨만을 주는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을 너무쉽게 받아들인다.
아무런 각오나 마음가짐 없이, 신앙생활 하면 좋다더라, 신앙생활 하면 무엇인가 의지처가 생기고 또한 생활하는데 아무래도 어떤 초월적인, 절대자인 촌재에 의지하다보면, 나름대로 초능력 생기고 힘도 생기겠지, 그런식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다보면 정말 신앙인으로서 걸어갈 때 십자가를 져야 될 순간에 그 사람들은 나가 떨어져버린다.
처음부터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자기자신이 남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십자가를 질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용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면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신앙생활을 하면 무엇이든지 다 잘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잘풀릴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런 의미로서는 모세가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소명을 수락하는 과정에서 우리 시각으로 보면 하느님과 흥정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좀 더 깊이 묵상할 필요가있다. 무언가 자기자신도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께서 자기자신에게 주는 소명에 대해서 한 번은 의심도 해보고, 거부도 해보고, 부정도 해보고 그러면서 오히려 더 깊게 깨달아가는 과정이로고 생각을한다. 무턱대고 거부하고 의심을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좀 더 깊이알고, 점 더 정확하게 알기위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는 그런것도 필요하다는 그점을 모세가 소명을 받는 이 과정에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② 실질적으로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 빠스카 - 건너갔다 뛰어 넘어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께 대해서 처음으로 사랑을느끼는 우리 인간적인 표현으로하면 이것이 바로 첫 사랑의 추억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과 나누었던 첫 사랑의 기억이다. 계속해서 기억하고 잊어버리려고 해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첫 사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또한 잊어버려서도 안되는 이 빠스카, 출애굽사건 이라고 본다. 왜? 이 첫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했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제일먼저 선민의식을 갖게하는 사건이되었다. 선민 - 뽑아서 세운민족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뽑아주셨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편애하신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선민의식 이다. 그 선민의식의 뿌리가 이 홍해를 건넌 빠스카 사건에서 찾아볼 수 가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위해서 온전히 떼어내진 민족이다. 하느님구원역사를 위해서 따로 떼어내진 민족, 그것이 선민의식이다.
천주교 신자들 입장에서는 동정녀들에 관한 신학을 정립을 할 필요가있다. 우리가 마리아를 일컬어서 ‘동정 성모마리아’다 이렇게 표현을 한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 천주교신자들의 잘못된 사고중에 하나는 ‘동정녀’ 라고 하는 것을 자꾸 육체적 순결에다 한정을 짓는다. 육체적 순결에다 자꾸 마리아의 신심을 한정을 짓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나온다. ‘동정녀 신학’이라고하는 것, ‘동정녀’라고 하는 신학은 육체적인 순결도 복합은 되겠지만
사실은 ‘하느님으롤부터 하느님께서 당신의 어떤 구원계획 안에서 그 구원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당신께서 따로 뽑아 세우셨다.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위해서 따로 떼어놓으셨다.’ 인간측에서 본다면 하느님께 하느님의 일을위해서 자기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하느님께 자기자신을 온전히 내놓았다라는 그런 의미의 동정녀이다. 이것을 너무 육체적인 순결에다만 인간의 감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자꾸 육체적인 순결에다만 신경을 쓰니까 이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마치 미신적인 요소로 둔갑을 해 버린다. 이 ‘동정녀’라고 하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해주면 좋겠다. 선민이다, 하느님께서 뽑아 세우셨다하는 이야기는 하느님의 구원역사안에서 그 구원역사의 의미를 설명하게 하기위해서 자기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친 백성들이다. 하느님과 계약의 당사자가 되었다 하는 것이 선민의식이다. 그런데 이 선민의식을 잘못 해석을 해서 우리만이 하느님 자녀이고 하느님 백성이다 했을 때 부작용이 나는 것이다.
요즘 이스라엘이 부작용이 나는 것이 그것이다. 선민의식을 잘못 해석을 하니까 우리만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백성이다. 하느님은 우리만의 편이고 다른 사람의편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는 것으로 발전이 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성서의 깊은 내용을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선택해서 당신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라는 의미는 내가 너희들만의 하느님이 되겠다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너희들을 통해서 이 땅에 이 세상에 내 사랑을 펼치겠다라는 것이지 너희들만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마 우리들 일상 생활중에서도 이런 비슷한누를 범할 수 있다. 내 자식만이 최고다. 남의 자식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내 자식만 잘 되면된다. 내 가정만 잘 되면되고 남의 가정이야 어찌 되었던지 상관안한다. 그런의식이 바로 이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발전이된다. 여기서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하는 이 선민과정은 이스라엘만이 하느님의 백성이다하는 의미가아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다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주면 좋을 것이다.
더불어서 오늘날 우리자신들에게 많이 대두가 되고있는 이 동정녀라고 하는 신학에 대해서도 어떤 육체적인 순결에만 자꾸 한정을 시키지말고 정말 하느님의 일을위해서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온전히 바쳐버린 그런의미로 동정녀의 의미를 생각을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선민의식을 갖게한 이 출애굽사건을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기념하고 갱신하고 했었던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약에 와서 미사 전례안에서 계속해서 하고 있다. 미사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최후의만찬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
다시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최후의만찬을 벌이신 그 장소와 그 시기도 이스라엘 백성이 과월절축제를 벌리는 때 였다. 빠스카사건을 기념하는 전례중에 예수님께서 최후의만찬(성체성사)을 세우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께서 빠스카 잔치중에 세우신 최후의만찬 성찬을 다시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을 미사라고하는 전례중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오늘날 계속해서 기억하고 기념하고 갱신하고 하는 것이다. 부활 대축일 때 보면 독서를 많이한다. 그때 빼놓지말고 읽으라고 하는 것이 빠스카사건과 관련된 대목이다. 출애굽기14장 15절 - 15장 1절 내용은 홍해를 건넌이야기다. 그내용은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신앙의 근거이고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빠스카사건, 홍해를 건넌사건을 이해를하면 좋을것이다.
③ 법 률 집 (출애 19장 - 40장)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이계약, 시나이산에서 이루어졌었던 계약의 내용이다. 시나이계약 중에ㅣ서도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십계명이다.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십계명과는 내용이 다르다. 첫 번째가 구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십계명이고 두 번째가 계약의 법전이라고 하는 것이 또있다. 이것은 십계명의 내용을 보완하는 차원으로 이해를하면 되겠고 이 계약의 법전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 공동체안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 가난한이들의 권리에 대해서 정리를 해논 부분이라고 이해를 하면된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사이에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해놓은것이라면, 이 계약의 법전은 인간과 인간사이 원칙중에서 특히 가난한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공동체가 대응을 해야 될것인가하는 부분을 다루는 보다 세부적인 차원으로 이해를 하면된다.
4 ) 전 례 (갱신식)
① 빠스카사건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그 때의 마음가짐으로 다시 되돌아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갱신식을 갖는 내용을 소개를 해주고있다. 이러한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고 있는 전례에도 그대로 반영이되어서 부활 성야미사 때에 세례성사가 있을때는 세례성사를 하고 그 다음에 전신자가 일어나서 성세서약 갱신식을한다. 그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의미를 정리하자는 그런내용이다.
② 계약의 궤 (하느님 존재의 상징)
계약의 조문을 담아놓은 상자, 계약문을 자기자신들이 궤짝에다 담아갖고 다닌다는 것은 야훼 하느님께서 자기자신들과 함께 계신다는 하느님존재의 상징이다. 하느님이 우리편이다 하는 상징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레위지파를 통해서 ‘계약의 궤’를 들고 다녔다. 심지어는 타민족과 전쟁을 할 때에도 ‘계약의 궤’글 갖어가면 이기고 ‘계약의 궤’를 실수로 안가져가면 무참하게 깨지고 다시 갖고가서 하면 이긴다.
하느님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계신다. 이것은 나중에 정치적으로 가장 유용하게 이용을하고 정약적으로 써 먹었던 사람이 ‘다윗’이다. ‘다윗’은 우리가 현대적으로 본다면 ‘사울’이라고 하는 전임자에게 쿠테타를 일으킨 사람이다. 쿠테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은 사람이다. 그래서 본래 자신의 고향의 성이 있었던 예루살렘에다가 성을 쌓고 그곳에 성전을 지을 계획을세운다.
그런데 사실은 많은 백성들이 자기자신의 왕권에 정통성을 인정해주지않는다. 쿠테타로 성공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울’이라는 사람이 훨씬 더 이스라엘 전체지파로부터 지지를 받던 사람이다. 그런데 ‘사울’을 정신병자로 몰아 밀어내고 자기가 쿠테타를 통해서 직권을 한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정권의 정통성이 인정이 안되니까 어떻게하면 이 정권의 정통성을 살릴수 있겠는가? 하고 묘소를 짜낸 것이 이 ‘계약의 궤’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적인 민족이고 또 하느님과의 계약을 통해서 한 민족으로 통합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종교적인 구심점만 마련이된다면 이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겠다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아닌 ‘실로’라고 하는곳에 모셔져있었던 ‘계약의궤’를 자기성으로 옮기는 작업을한다. 그것이 하느님이 내 편이다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를 인정해주신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인정을 해라. ‘계약의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성서를 보면 ‘계약의 궤’가 성에 들어오니까 ‘다윗’이 너무좋아서 춤을추다가 바지가 벗겨지는 것도 몰랐다. 자기 일생에 있어서 성공하는 순간이다. ‘계약의 궤’에 대한 이러한 배경을 모르면 ‘다윗’이 왜 그렇게 좋아하고 춤을 추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계약의궤’를 통해서 자기자신 정권의 정통성을 살리는 것이다. ‘계약의궤’를 모셔놓고 나니까 그때서야 모든지파가 ‘다윗’을 왕으로 인정을 한다.
하느님이 여기와 계시는데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려면 모두 예루살렘으로 와야되고 그때부터 예루살렘이 모든 종교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계약의궤’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상징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리를 잡게된다. 이것을 보통 ‘성 궤’라고도한다. 출애굽에서 나타난 하느님상은 해방과 자유의 하느님상이다. 이것에 테마를 잡아서 요근래 신학을 정립한 것이 해방신학이다.
해방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한 가난한이들, 억눌린이들편에 항상 서시는 하느님을 체험한 출애굽사건에서 나온 것이 해방신학이다. 해방신학은 불가피하게 그리고 원칙적으로 가난한 사람들편에 서게 되어있다. 이것은 가진자들, 권력을 지닌자들. 억눌림을 당하는이들이 아니라 억누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공산주의자다. 가난한 이들편에 서는데 가난한편이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듯이 적이 될 수밖에없다.
우리나라에서 해방신학이 소개가 될 때 많은 논란을 빚었던 것이 바로 거기에있고 더군다나 오늘날까지도 이 해방신학이 교회의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는 보다 완벽한 의미에서 아직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한다.
아직도 교황청과 여러 가지 갈등을 빚고 있는 요소중에 하나이고 심지어는 이것 때문에 남미에 많은 성직자들이 스스로 성직자직을 버리고 평신도로써 해방신학을 연구하는 그런 과정까지도 발전이된 그런 아픔을 갖고 있는 신학이다.
해방신학의 본래 의미를 이해를 해보자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체험한 해방과 자유의 하느님상을 지금 어떻게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세상에 다시 재현을 시킬것인가? 그래서 해방신학을 제대로 이해를 할려면 해방신학의 모태가되고 있는 남미의 상황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된다. 남미가 도대체 지금 어떤상항에 놓여있는가? 왜 해방신학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좀더 깊이 이해를한다면 해방신학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우리나라현실에 맞도록 이 해방신학을 다시 재해석하고 적용해야될 그런 과제도 우리가 안고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체험하는 또 우리에게 계시되늰 하느님상, 그 분은 가난한이들편에 서서 가난한이들의 권리를 지켜주시는 가난한이들을 해방시켜주시고 자유를 주시는 해방과 자유의 하느님상으로 파악을 할수있을 것이다.
10. 레 위 기
이름 자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12 지파에서 사제직분을 수행했었던 ‘레위지파’ 사제지파에 관한 전례규정이다. 전례규정집 이렇게 이해를 하면된다. 이스라엘민족은 출애굽사건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이고, 출애굽사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똘똘뭉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신앙으로 뭉친공동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신앙인들이 이끌어가고 또 신앙행위를 이끌어가는 사제계급이 중심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 레위지파의 규정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특별하게 설명을 하는 것중에 전체적인 전례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이때의 전례를 장막전례라고 이야기한다.
1) 장막전례
예루살렘성전은 솔로몬시대에 완성이되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이스라엘은 ‘장막’에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다. 장막을쳐놓고 거기다가 나름대로 여러 가지 구분만 해놓은 상태에서 ‘계약의 궤’를 모시고 전례를 거행한다. 그 ‘장막전례’에 필요로하는 여러 가지 사항들, 또 전례적인 측면, 제사는 어떻게 지내야되고 그 제사마다 의미가 무엇이고 하는 것을 쭉 설명을 해놓은 부분이라고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살펴볼 수있는 것이 다섯가지 전례이다.
다섯가지 제사 (레위 1장 - 7장)
① 번제 - 태워버린다. 재물을 태워서 하느님께 바친다.
㉠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을태운다 하는 것은 없애버린다는 뜻이다. 내가보는 앞에서 없애서 주인에게 되돌려 준다. 결국은 하느님의 최상권을 인정을 하는 것이다. 태운다는 것은 이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 태우면 연기가 난다. 냄새를 좋게해서 하느님의 기분을 좋게 해 드린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냄새를 맏느냐에 따라서 기분이 나빠지기도하고, 아주 기분이 붕붕 뜨기도하고, 그러는 것이다. 그런 인간적인 감성들, 속성들이 그대로 하느님께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번제를 바치는 것이다. 태워서 하느님께 최상권을 인정도 해 드리고 하느님의 기분을 맞춘다.
② 곡식 봉헌제 - 곡식이라고 하는것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그 곡식중에서 최상위물은 하느님께 바친다. 제일 첫 번째 수확물을 하느님께 바친다. 맏배를 하느님께 바친다는 그런 의미이다.
③ 친교제 - 이 친교제는 말마디 자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 제사에 참여하는 제사에 봉헌하는 사제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 상호간에 나눔을이루는 제사로 이해를 하면된다.
④ 속죄제 - 피를뿌린다. 피는생명이다. 피를 뿌린다는 이야기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내 자신을 바치는 행위이다. 그래서 내자신 대신에 어린양을 잡아서 바치는 것이다. 그것이 ‘천주의 어린양’이다. 피를뿌리는 행위로서 자기자신의 잘못을 용서청하는 행위를 벌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피는 절대 먹지않는다.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를 보면안된다. 그래서 피와관련된 것은 모두 불결한 것이고 금기식을 시켰던 것이다.
심지어는 여인들이 아이를 출산할 때도 피를 보기 때문에 불결하다해서 남자아이를 낳으면 40일동안, 여자아이를 낳으면 80일동안 밖에 나오지를 못했다. 그 날자가 지난다음에 성전에 가서 정결예식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활동을 할수있었다. 그것이 예날 우리전례에서는 ‘성모 취결례’ 라고한다. 성모님도 여자이니까 했었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주의봉헌축일’로 바뀌었다. 성모님도 사내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40일후에 성전에가서 이 불결함을 씻는 예식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을 봉헌을했다. 그것이 예날에는 ‘성모취결례’라고 했는데 오늘에 와서는 ‘성모취결례’라는 의미보다는 예수님의 봉헌의 의미가 더 있기 때문에 ‘주의 봉헌축일’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피 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에 함부로 피를 보지도않았고 가까이하지도 않았고 어떤 육식고기를 잡았을경우에는 피를 일체 보이지 않아야된다. 피가 보이지않도록 잘 구워서 먹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다.
⑤ 면죄제 - 이것은 말 그대로 속죄제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죄의사함을 받고자했을 때 피 대신에 다른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는형태, 그것이 면죄제라고 볼 수 있다. 다섯가지 제사에 관련된 여러 가지 규정들을 서술을 해놓은 것이 1장 - 7장의 내용이다. 2) 사제의 의미, 사제 축성예식 (8장 - 10장)
사제는 어떤사람인가 하는부분을 나름대로 정리를 해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사제는 하느님과 인간사이에서 다리를 놓아주는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사제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는 항상 정결해야된다라는 의식이 생겨나게된다.
중계자 - 자기의 역할은 전혀없이 이쪽의 이야기를 저쪽에다가 그대로 전달만해주는 것이다. 예를들면 TV중계, 라뒤오중계, 있는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중개자 - 중간에 있는사람이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다. 나쁜 표현으로 하면 중간에 있는사람이 장난질도 할 수 있다.
무언가 자기자신이 자위적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과정에 참여를 한다. 자신의 인격을 가지고 하느님과 인간사이에서 할동하는 것, 사제가 하는 역할은 하느님과 인간사이를 막연하게 하느님의 어떤 은총이나 복을 인간에게 그대로 갖다주는 그런의미가 아니고 사제로서 한 인격으로 자기자신의 판단도하고 자기자신도 하느님의 일에 협조를 하면서 인간으로서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하는사람, 그것이 바로 ‘사제’다.
오늘날 신부들이 수행하고 있는 사제직분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이들은 철저하게 사제로서, 행사하는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을 시킨다. 절대 다른 부분에는 참여를 하지못하게 만든다. 오늘날 수행하고 있는 사제직은 종교적인 영향에만 국한을 시키는 것이아니라 제한이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생각했었던 사제직은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을 기킨다. 그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구약성서의 레위기와 같은 성격을지니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다. 히브리서는 신약시대에 와서 사제직분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의미를 가지는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을해주는 것이다. 레위기와 더불어서 히브리서를 참고하면 구약의 율법에 명시되어있는 사제의 직분과 의미 그리고 십자가상 봉헌을 통해서 오늘날 교회안에서 거행하고 있는 사제직분의 의미를 비교할수있을 것이다. 율법의 사제직분과 오늘날 교회공동체가 수행하고 있는 사제직분은 분명히다르다. 그러나 그법통은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다.
그래서 성품성사가 거행되는 장소에 가보면 이론의 대 사제직, 멜키세댁의 대 사제직을 있는 영원한 사제직이다하는 구절들을 많이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부터 사제직분이라고 하는 법통은 이어오지만 그러나 구약의 새제라고 하는 의미와 신약시대의 사제라고하는 의미는 분명히다르다. 그것은 구분을 해야한다. 그 구분하는 자료는 레위기와 히브리서를 참고로 할 수 있다.
3) 정결례 (11장 - 16장)
이것은 육체적인의미에 정결예식들에 대해서 규정을 해놓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까다로운 정결예식을 가지고 있다. 마르코 7,1-23절 같은 부분을보면 유대인들의 전통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특히 정결례와 관련된 부분들이 나오고 있다. 유대인들의삶 안에서 정결례라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가? 그러한 여러 가지 정결, 정과 부정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원칙을 제시해논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4) 성 법전 (17장 - 26장 거룩한 법전)
정결례와는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측면을 다루고있는 부분이라고 불 수 있다. 그래서 레위기전체가 작성이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레위기라고 하는 성서의 주제는 거룩함이다. 거룩한 하는님, 거룩한 백성, 요약을 한다면 레위기의 내용은 거룩한 하느님께, 거룩한인간들(사제, 제사를 드리는인간)이, 거룩한 장소(장막)에서, 거룩한 때(축일, 축제, 성년)에, 거룩한 상태(정결한)에서, 거룩한 행위(제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선민으로서의 구원의 길을 걷도록 일러주는 책이다 라고 정리를 하면된다.
11. 민 수 기
(백성들의 상태를 기록해놓은, 광야생활 40년간의 여정을 묘사함)
1) 인구 통계조사 표
말 그대로 풀면 요즘 우리식으로 한다면 인구 통계조사표이다. 광야는 삭막하다. 인간을 극한 환경으로 내어모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까 당연히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하게 되어있다. 우리가 비록 노예였지만 그래도 에집트에서는 잘먹고 잘 살았다. 자는 것 걱정 없었고 먹는 것 걱정 없었다. 최소한 자유는 없었지만 그런데 막상 하느님의 은총으로 광야에 나오는 것 까지는 좋다. 자유를 준것까지는 좋은데 당장 먹고 살고 자는 문제가 해결이안된다.
그래서 광야라고 하는 곳은 인간이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하는장소, 도전을 하는장소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께 불순종을 하면서 죄악을 저지르는 장소로 상징적인표현을 하게된다. 그러니까 오늘날에와서는 광야 그러면 시련의장소, 또 자기자신을 단련하는장소, 이렇게 묘사들을 하게되고 이 때의 40년이라고하는 40의 초점을맞춰서 오늘날 전례에도 사순시기라고 하는 것이 있게된다. 이 때의 가장 큰 불만은 왜 에집트에서 우리를 건져내왔느냐? 처음엔 좋다고 그랬다. 이제는 해방이다. 하느님이야말로 우리편이다하고 부르짖어놓고 막상 생계가 해결이 안되니까 왜 에집트에서 우리를 꺼내왔느냐? 구원사건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다. 사실은 우리들이 좋을 때는 어쩔줄을 모르다가 조금만 틀어지면 죽일놈, 살릴놈 만들어버린다. 왜 우리를 에집트에서 건져왔느냐?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가지고있었던 불만의 모습이었고 이것을 좀더 우리가 신학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이때 이들이 저지르는 인간으로서의 어떤 부족한 모습, 좀더 넓게는 우리 신앙인들이 오늘날 살아가면서 가질 수 있는 어떤 불만들을 신학적으로 다시 한 번 묵상해 보려면 1고린 10,1 -11절의 말씀을 참고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 때 가장 상징적인사건이 구리뱀사건이다. 이런 상징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명령, 하느님의 사명을 따라가면서 그 안에서 우리 부족한 인간들이 느끼는 불평불만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도전하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묵상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라고본다. 그 모습을 대표적으로 이 민수기에서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2) 이스라엘 12 지파
이스라엘의 12지파들에 대해서 짜임새있게 정비를한다. 지파들을 각각 나눠놓고 그 지파들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살아야되고 몇 명이고 뭐가 어찌되었다. 남자가 몇 명, 여자가 몇 명, 이렇게 쭉 그때 그 당시에 12지파에 대해서 상황을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3) 모세의 연약함
모세도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지도자이긴하지만 그 역시도 인간이었기에 많은 부족함을 지니고 있었고 한 때는 하느님을 배반하는 불순종하는 죄를 저지르게된다. 그 결과 모세는 성서에보면 하느님께서 약속해주신 가나안에 들어가지못하는 그런 벌을 받게 되었다라고 후대사람들에 의해서 해석이 되어진다. 민수기는 실질적으로 성서를 읽을려고 하면 아주 재미없는 책인데 그래도 그런 통계적인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의 연약한모습, 부족한모습을 그런대로 확인하면서 묵상할 수 있는 그런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그런 내용을 찾아서 묵상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12. 신 명 기
1) 모세오경의 마지막권이면서 결론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 신명기는 철저하게 율ㄹ법에 대해서 다루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제일 먼저 율법을 일상생활중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설교로 이루어져있다. 율법을 현실 생활안에 어떻게 적용할것이며 또 율법의 조문들을 해설해서 설교하는 형태로 되어있다.
대표적인 것은 모세의 유언이 담겨저있다.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심정으로 모세가 자기자신이 그 동안에 살아왔었던 걸어왔었던 길을 회상한면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십계명을 주신의미, 그리고 그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지니고 있는 것인가? 아주 감동적으로 세 개로 나누러서 설명을하고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2) 공식적으로 유일신사상이 나온다. 그 전에는 야훼 하느님이 우리편이다하는 의식이강했고 우리 하느님이다. 우리 족장들의 하느님이고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다. 우리 가족들의 신이다라는식은 강했지만 유일신이라고 하는 사상은 그렇게 공식적인 모습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에서부터 해방이되서 가나안으로가는 과정에서 많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는다.
자기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은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민족이아니고 다른 신을 섬기는 민족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싸울때는 그들의 신의 이름으로 싸우는 형태가된다. 나중에 싸우다보니까 이제는 사람과사람의 싸움이아니라 신과 신의 싸움이된다. 우리‘신’이 더 강하냐? 너의‘신’이 더 강하냐? 그런 과정을 걸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안에는 자연히 하느님만이 유일한 신이다.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고 야훼만이 이세상에서 제일 강한 신이다. 야훼를 이길 수 있는 신은 없다. 그들의 체험이 그랬기 때문이다.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고 야훼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신’이다. 그 외에는 신 도아니다. 이렇게되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신사상의 뿌리가된다. 하느님은 야훼 한분 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를 에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당신이름을 야훼라고 가르쳐주신 그분만이 하느님이다. 그 외에는 신이 아니다. 이런 유일신사상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신명기이다.
3) 자기네들의 역사를 정리를 한다. 신명기라고 하는 것은 자기자신들이 쭉 걸어왔었던 길을 다시 반성을하면서 정리를 하는 것이다.
① 선택 -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② 해방 -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자기네민족을 해방시켜주셨다. 그리고 시나이산에서 율법(십계명)을 맺어주셨고 이제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광야에서 우리를 단련시켜주신다. 우리가 올바르게 성당할 수있도록 단련시켜주시는 분이다 하는 나름대로의 역사의식을 정립을한다. 이러한 역사의식 속에서 유애인들에게 강하게 뿌리내리기를 바라면서 신명기가 강조하는 것이 철저한 순종이다. 신명기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느님께 순종할 것을 가르치는 책이다.
왜 순명을 해야되는가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을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명 6장 전체를 묵상 할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유일신이신 야훼 하느님께 이스라엘백성들이 보여야할 순종의 자세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이 유일하신 야훼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벌 받는다. 무조건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신명기다. 그리고 그 순종의 길은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이다. 순종을하면 생명의 길로 들어가지만 불순종하면 죽음의 길로 간다. 이것이 신명기의 주된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아주 간단한 표현이지만 생명의 길로 들어가고 죽음의 길로 들어간다라는 것이 등장이되는데 마태 7,13-14절의 말씀을 참고할 수 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의 이르는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사람이적다” 이것이 사실은 신명기의 정신 이다. 율법이라고하는 좁은문을 너희들이 택하면 생명의 길로 가지만 율법의 문을 선택하지않고 너희 편할대로 불순종의 길을 걸으면 너희는 죽음의 길로빠져든다
4) 신명기 차체가 결론부분이기 때문에 어떤의미에서는 출애굽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후세대 사람들에 대한 의식화 교육 차원에서도 이 신명기는 작성이된다라고 보여진다. 출애굽사건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해준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순종해야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유일신 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만이 유일한 하느님이다하는 것을 의식화 교육을 시키는 자료가 바로 이 신명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사건을 잊지말자.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하는 이 사실만은 제발 잊지말자 하면서 그것을 철저하게 순종이다. 유일신사상이다라고 하는것과 연결을 시켜서 의식화 교육을 해왔다.
오늘날까지도 그것이 계속 지속이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도 유일신 사상을 고백을한다. 그러나 그 유일신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타 종교에대한 배척이나 독선으로 표현이된다면 곤란하다. 그렇게되면 거기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덕목을 이야기 할수 없다. 유대교에서는 사랑이 없다. 오로지 정의만있다. 그 정의라고 하는 것은 자기네들이 고백하는 유일한 하느님 야훼의 입장에서 보는 정의다. 우리가 말하는 공동선의라고 하는 차원의 정의가아니라 자기네 민족입장에서의 정의다.
철저한 시온주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아무거리낌없이 전쟁도 일으킬 수있고 보복까지 감형을한다. 세계 사람들이 뭐라고 손가락질하던 뭐라고 자기네들에게 구절을 가하던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우리가 당했으니까 우리가 보복하겠다. 그런의식이 유일신사상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가까운예로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경재의식만 키워놓으면 그 자녀들이 컸을 때 부모들에게 절대 효도못한다. 뿌린대로 거두게 되어있다. 자기자신이 뿌리지않은 것을 거둘려고 하니까 문제가되고 답답한데 매일 답답하다고 소리치면서 자기자신이 가정이라고 하는곳에 뿌리는 씨앗은 무엇인가? 매일 엉뚱한 씨앗을 뿌리고 있다. 정말 무지막으로 자녀들을 경쟁의식으로 내어몰으면 나중에는 각오를 해야한다.
사회라고 하는 것은 나와 같은 똑같은 사람들끼리 만들어서 이루는분위기일 뿐이지 누가 사회라고 하는 가정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라고 하는 이런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가 되는 것이지 무슨일만 터지면 요즘사회가 왜 이렇게 살벌하지? 하면서 자기는 그 사회에서 빠져있는 인물로 생각하게 된다. 어떤 순간적인 출세, 순간적인 체면만을 생각한다면 정말 우리사회도 앞으로 큰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를가지고 자식을 교육을 시켜야될 것인가? 남의 탓만하지말고 스스로 자성을 해보는기회로 삼아주면 좋을 것이다.
13. 전기 예언서(역사서)의 개관
1)여호수아
모세이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여호수아다. 이 여호수아가 가나안은 점령해나가는 과정, 1220년에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을 점령해나가는 그 과정에서부터 바빌론유배(586)생활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 약 650년간의 유대인들의 역사를 다루고있는 부분이다. 이 내용은 비로소 이스라엘왕국 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동안에는 떠돌이 민족이었었는데 가나안에 정착을하면서 비로소 왕정제도를 도입을한다.
왕정제도를 도입을하면서 많은 말썽들이 이일어난다. 왕이라고 하는 것은 민족의대표, 민족의주인으로서 야훼하느님을 섬겨왔었는데 왕이되면 왕이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결국은 하느님께 대적하는 것이 아니가?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왕을 두어서는안된다 라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은 이스라엘도 어쩔수없이 이유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우리도 우리나라를 지켜야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기 위해서는 왕이 필요하다하는 논리때문에 어쩔수없이 왕정제도를 도입을한다. 그래서 최초의 왕이된 사람이 ‘사울’이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왕국의 기원, 그리고 초창기역사를 다루는것이 여호수아서하고 판관기다. 이것이 왕국의 초기의역사다. 어떻게 해서 왕정제도가 도입이되었고 그리고 그 왕정이 어떠한 과정을 밟았는가? 여호수아는 가나안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을 끌어간 사람들이고 판관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왕정재도로 가기위한 과도기적인 체제였다. 12명의 판관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2) 다 윗
본격적으로 구약성서의 중심인물인 다윗을 중심으로한 이스라엘왕국의 전성기가 나온다. ‘사울’ ‘다윗’ ‘솔로몬’에 이르는 전과정을 설명하는 책,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 11장까지 다윗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왕국의 전성기다. 가장 이상적인 왕국의 체제이다. 열왕기 상 12장부터는 왕국이 솔로몬이후에 분열이되었고 결국은 남 북이 따로따로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멸망이되어서 유배를가게되었다 하는 민족의분열, 그리고 멸망에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것이 전기예언서(역사서)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에 흥미있게 쉽게 읽을 수 있다.
3) 이러한 역사서를 저술한 목적은?
① 역사서를 읽으면서 잊지말아야 될 것은 역사적인사실을 저술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아니고 역사의의미를 해석하기 바란다. 역사의의미는 하느님과 인간의관계속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는 구원약속과 인간이 그 구원약속에 어떻게 응답을하면서 살아가는가? 또 응답하지 않았을 때 불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하느님이 성실하신 분인가? 인간이 불성실한 것인가? 그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것을 살펴보아야한다.
일반적으로 하는그 역사 공부가아니고 왕이 순위가 어떻게되더라 하는 그런 역사공부하라는 것 이 아니고 역사의의미을 해석해야된다.
그 역사의 의미라는 것은 우리는 구원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하시는 그 구원계획에 인간들이 어떻게 응답을하는가? ‘다윗’이 어떻게 응답을했고 ‘솔로몬’이 어떻게 응답을했고 또 거기에 많이 등장을하는 이스라엘의 많은왕 들이 어떻게 응답을하면서 또 어떻게 불순종을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는가? 그것을 살펴보라는 것이지 역사공부를 하라는 것이 다. 그러니까 의미를 해석을 해야한다.
② 전기예언서 저술방법
㉠ 과거는 반성의차원 ㉡ 현재는 적응의차원 ㉢ 미래는 희망을 제시하는차원.이렇게 세 가지의 차원으로 그 역사서자체가 저술이된다. 역사의의미를 해석을하면서 결론 삼아서 해야될 부분이 우리가 이스라엘의 과거역사를 바라보면서 우리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 거기에서 깨우친바를 적용을 시켜야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이야기다 다윗의 이야기다가 아니고 다윗의 이야기를통해서 내자신이 현재 살아가고있는 삶에 적응을시켜라, 깨달아라, 깨달음을 적응시켜라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자신이 살아가야 될 삶의 방향을 잡아야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인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지식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에대해서 이스라엘 역사에대해서 해박한지식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의 과정 적응의 과정 이것을 밟으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갖고 전기예언서(역사서)를 읽어야된다. 역사서에서 등장하는 흐름을보면 위에서부터 밑으로 내려올려고 하지말고 항상 중심적인 인물에서부터 살펴보아야한다.
구약성서의 중심인물은 다윗이니까 다윗 이전에 사울이있었고 사울 이전에 판관들, 판관 이전에 여호수아, 다윗 다음에 솔로몬이있고 솔로몬 사후에는 남과 북으로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 북쪽은 나중에 아시리아에게 멸망을 하고 남쪽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을 한다. 결국은 전체적으로 유배생활을 떠나게 된다하는 전체의 역사적인 흐름이 전기예언서(역사서)의 전반적인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정말 역사공부를 할려고하면 역대기를 보면된다(역대기 역사서). 전기예언서는 의미를 보는것이기 때문에 신명기계 역사서라고 표현을 한다. 같은 역사서라도 왜 신명기계 역사서라고 하는가? 역사를 통해서 들어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서술된 역사서이기 때문에 이 역사를 일컬어서 신명기계 역사서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 조선실록 그런 것 처럼 연대별로 왕 중심으로 쭉 역사를 서술해나가는 것은 역대기를 보면된다. 항상 이스라엘역사를 종합을할려면 신명기계 역사서와 역대기의 역사서를 함께 조화를 시킨다. 그래서 서로 틀리고 맞는 점들을 찾아서 이스라엘역사를 재구성을 하고 있다. 역사공부를 하는 분들은 역대기를 보면 훨씬 더 전반적인 이스라엘역사를 꿰뚫을 수있을 것이다.
③ 역사서를 읽으면서 참고적으로 알아두어야할 것.
‘바알’신앙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을 하기전에 가나안에 살고있었던 원주민들이 섬기던 종교이다. ‘바알’이라고 하는이 종교는 끊임없이 이스라엘백성들을 괴롭힌다. 하느님과 가장 적대적인 항상 대치되는 ‘신’으로서 등장이된다. 이 것 때문이라도 이스라엘의 유일신사상은 더욱더 강해진다. 이 바알신앙의 위험 때문에 더욱 더 편협한방법으로 흐르게된다. 우리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유목민이었을 때, 떠돌아다녔을 때 야훼하느님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이제 가나안에 정착을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나름대로 농경문화를 하다보니까 농사를 짓다보니까 야훼보다는 바알신앙에 훤씬더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바알신은 농경문화에서 찾을 수 있는 풍요의 신이다.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주는 신이다. 야훼는 해방과 자유를주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인 막강한힘을지닌 그런 ‘신’인반면에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바를 비교한다면 바알은 실질적으로 돈이되며 자기자신들에게 생계를 유지해다주는 신이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야훼하느님께 신앙은 고백을하면서도 끊임없이 바알신앙의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래서 많은 예언자들이 왕들을 질책을하고 야훼하느님께 순수한 신앙을 보존해야된다 라고 목놓아외쳐댈 때 도 항상 비판의표적이 되는 것이 ‘바알신’이다.
너희들 바알신의 빠져서는 안된다. 이 바알신앙은 또 한편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의 윤리체계 까지도 흔들어놓게 된다. 이스라엘의 야훼하느님신앙은 유일신이지만 이 바알은 유일신이 아니다. 바알은 남성이고 이 바알의배후자로 등장하는 ‘아스다롯’이라고 하는 신이있다. 아스다롯은 여신이다 남편(바알)과 아내(아스다롯), 이 부부신이 조화를 이루어서 우리에게 풍요를 갖어다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의미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리적인바람이 그대로 지배하게 되었다라고 볼수 있다. 남녀의 결합을통해서 풍설한열매를 거두고자하는 그래서 실질적으로 바알신전에서는 매움행위가 하나의 전례로서 이루어진다.
매음을통해서 성교를 통해서 어떤 성교자체로 전례행위로 꾸며서 그 행위를 통해서 풍요를 기원하고자하는 다산도기원하고 또 풍성한 수확을기원하는 그런형태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농경문화로 점점들어가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상당히매력적인 종교였다. 군사적으로는 야훼를 내세우고 농사차원에서는 바알을따른는 그런 이중적인 신앙구조로 전략해버린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당에서는 하느님찾고 성당문을나서서는 하느님은 양심에다 가둬두고 나머지 따르는 것은 하느님을 따르느냐하면 하느님을 따르지않는다. 다른 것은 따를것이 많다. 큰 것 좋아하고, 많은 것 좋아하고, 사치하고 어떻게하면 많이가질까? 어떻게하면 큰곳에서 살고 큰 것 많이가질까? 큰 것 굴리고다니고 크게 놀까?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사회에서는 우리자신들도 하느님께 전례중에는 신앙을 고백하고 양심의소리에는 하느님을 모셔놓지만 실지 생활안에서 과연 우리가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는가? 우리들의 실지생활은 오히려 하느님보다는 하느님과 반대되는삶에 더 많이 빠져있다. 이스라엘이 그랬다는 것이다. 전례중에는 야훼하느님께 유일신앙을 고백하지만 실지 자기자신들의 삶에 있어서는 크고 많은것들을 쫒기위해서 바알을찾았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찾았지만 마음은 이미 바알에게로 갔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예언자들이 이스라엘백성들의 양심에다 호소를 하는 것이다. 너희들 그렇게 이중적인삶으로 살지말아라. 순수한 야훼 하느님의 신앙을찾자, 그것이 예언자들의 사명이고 예언자들의 의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종교적인배경을 염두에두고 전기예언서(역사서)를 읽어나가면 좀더 이해가 쉽게 다가올 수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 성서의 정의 <구약입문1>
1)거룩할 성(聖)
거룩하다-따로 떼어놓는다. 다른 일반적인 일들과 구별되는 따로 떼어져있는 일이다.
사제 - 다른 일반적인 직업과 구별되서 따로 떼어져있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성(聖) -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여러 물품 중에서 일부를 따로 떼어놓는다.
성서 -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따로 떼어 놓아진 책이다.
계약 - 하느님과 인간을 드러내는 책
옛 계약 -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
새로운 계약 -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약의 백성과 맺은 계약
2) 성서
성서라고하는 이 말은 영어의 바이블, 이 바이블이라고 하는 용어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 비블로스라고 하는 단어가 등장을한다. 둘 다 특별한 책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고대역사에보면 인류의 역사에있어서 최초에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파피루스다. 그 파피루스가 지중해 연한 비블로스라고 하는 도시에서 유럽사회로 많이 수출이되었다. 그 당시에 모든 책들은 파피루스로 제작이 되었었고 그 중에서도 이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많이 사용하였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 성서 였었다.
그 당시 책하면 성서였었기 때문에 비블로스라고 하는단어가 영어로 바이불, 또는 라틴어로 비블리아, 비블로스 이런말로 변화가 되었다. 이것은 어떤 역사적인 유래를갖고있는 단어로 이해를 하면된다. 단순하게 책 들이다하는 표현들이다. 또 가톨릭교회에서 많이 사용을 하고있는 계약이라고 하는단어가있다. 라틴어로 테스따멘뚬 이렇게 표현을 한다. 하느님과 인간의계약을 들어내는 책, 그 계약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옛 계약이고 하나는 새로운 계약이다. 예 계약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이고 새 계약은 그리스도를통해서 신약의 백성과 맺은 계약인데 이런 성서적인 의미를담고 있는 것인데 바로 그 계약의의미를 담고있는책이다 하는 의미에서 성서를 일컬어서 테스따멘뚬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한다. 이것은 성서를 표현하는 다양한 용어들을 대략 정리를 해보는 것이다.
2. 성서의 내용
1) 인간과 인간들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람은 서로가 필요성에 의해서 만나게 되는데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내 인격을 평가한다. 또 내가 어떤 사람과 어떻게 어울리면서 살아가는가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내 사회성을 평가한다. 결국은 이 만남 자체가 내 자신의 인격과 사회성을 판단받는 기준이 된다. 만남의 단례가 깊어지면 사귐의 단계로 들어간다.
사귐의 단계로 들어가면 동성간의 사귐은 우정이라 하고 이성간의 사귐은(작은의미) 사랑이라 한다. 사람과 대상이나 사물을 만나서 사귐의 단계로 들어갔을 때 그것을 취미 생활이라 한다. 사귐이 깊어지면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양보할 때 친교라 한다. 친교가 깊이 이루어지면 친교의 과정으로 들어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양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희생이 들어가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위해서 도와줄 수 있는 자기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봉사의 단계로 접어든다.
이것을 우리 그시스도교 에서는 (커다란 의미) 사랑이라고 한다. 넓은의미의 사랑이다. 친교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온전한 의미로 실천한다 라고 볼수가 있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본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윤리도덕은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가? 이 윤리도덕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 그리고 이것이 사귐의 단계 친교의 단계로 가기위한 하나의 질서이다. 이 질서를 일컬어서 우리가 보통 윤리도덕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 윤리를 지켜야된다. 도덕을 갖어야된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엇이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만나고 사귀고 친교를 맺어나가는 질서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윤리도덕 이다.
그러면 신앙은 무엇이고 종교는 무엇이냐? 윤이도덕이 질서라고 한다면 신앙이라든지 종교라든지 그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될 것인가? 반듯이 신앙과 종교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신’ 이라고 표현한다. 무엇인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보다 초월적인 위치에 있는 ‘신’을 상징하고 이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맺어 나갈려고 하는 것이 신앙이고 종교이다.
2) 종 교
① 자연종교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관계를 엮어나가는데 살다보니까 도저히 인간의 관계와 인간의 능력을 가지고는 해결이 안되는 부분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으로 하여금 한계성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종교 이다. 무엇인가 자연 발생적으로 우리 인간보다도 더 위대하고 엄청난 능력을 지닌 존재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곳은 땅이고 땅 보다도 훨씬 더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하늘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하늘에 우리 보다도 더 초능력을 지닌 존재자가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자연적으로 하게된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그 어떤 신령한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의탁하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자연종교이다. 보통 우리 사회에서도 아직까지도 사회의 어떤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라고 볼 수 있는 무속이라든지, 무교, 이런것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분은 이러이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을 것 이다라고 추정을 하는 것이다. 추정을 하니까 당연히 여기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의 자세는 무엇이냐 하면은 기원이다.
보이지않는 이 신령께 계속해서 정성을 다해서 비는 행위가 이루어진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있을 것이다. 있어야 된다. 요망사항을 가지고 계속해서 비는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은 자연종교이다.
② 계 시 종 교
계시 - (열어보인다. 낱낱이 적나라하게 열어보인다). 열어 보이는 종교이다. 누가 열어 보였는가? 인간이 열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신이 먼저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열어 보이셨다. 그래서 그 열어 보이신 것을 보고서야 그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종교이다. 자연종교에서는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난 신령한 존재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계시종교에서는 그 분이 바로 하느님 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완전히 열어 보이셨다. 그리고 그 열어보이신 것을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고 우리는 여기에 믿음을 갖고 따라가는 것이 계시종교이다.
계시종교와 자연종교의 차이는 자연종교는 막연하게 있을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신이라는분이 어떤분인가 하는 것을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단지 비는 존재일 뿐이다. 무엇인가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존재, 그래서 복을 받으려면 이 신의 노여움을 사지말아야된다. 만일에 혹시라도 이 신의 노여움을 사면 내가 이 신으로부터 벌을 받는다 하는 생각이들 수 밖에 없다.
계시종교는 이미 신이 먼저 다가오신다. 먼저 다가오셔서 신이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그 가르친 내용에 따라서 따라만가면 되는 것이 계시종교이다. 그러면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열어보인 내용이 어디있느냐? 우리가 이 내용을 따라가야 되는데 이 내용을 어디에서 살펴볼 수 있는가하면 이것이 바로 성서 라는 것이다.
성서란 무엇인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열어보이신, 당신이 인간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져있는 책이라고 이해를 하면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속에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정리를 한 이 내용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어떻게 표현이 되는 것인가?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먼저 다가오신다. 그리고 그 다가오심에 대해서 인간은 응답을 한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열어보이시고 그 열어보이시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응답을 했을 때 만남이 이루어진다. 만일에 하느님이 열어보이시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응담을 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인간은 만나지 않는다.
우리 생각에 엄청난 능력을 갖고 계시고 전능하신 분이니까 당신이 마음대로 인간을 착하게 할수도 있고 악하게할 수도 있고 또 우리가 자연적으로 바라는 것처럼 착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서든지 역사하셔서 벌을 주시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인간이 응답하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한 개인이 잘났던 못났던 그 인간이 당신 자신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이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참으로 대단한 신비라고볼 수 있다. 하느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안에서는 우리 자신은 하느님앞에 먼지와도 같다. 항상 죄인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데 사실 엄격하게 놓고 보면 하느님이 인간을 마음대로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자세에 쩔쩔매는 분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인간이 응답을 했을 때 하느님과 인간은 만난다. 그렇지 않으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이제 이 만남이 더욱 발전을 한다. 인간이 응답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되고 또 하는님께 대한 다른 어떤 것보다도 희망을 갖게되고 그 하느님이 열어 보이시는 사건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믿고 따르는 사랑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면서 제일 처음 보이는 행동이 무어냐하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다. 그것을 우리가 보통 전통교리에서 향주 삼덕 이라고 표현을 했다. 하느님께 향하는 세 가지 덕, 신, 망, 애, 세 가지 덕이 있다. 이것을 향주 삼덕이라한다. 향주 삼덕을 통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발전을 해서 사귐의 단계로 접어든다.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이 응답을 함으로써 겹쳐지고 그래서 사귀게 된다. 이 때 비로소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라고 볼 수 있다. 매번 마다 하느님과 사귈려고 노력하는게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그러면 이 사귐이 더 깊어진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 신앙인의 삶이 더욱 더 깊어진다. 더욱 더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려고 하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려고 하는 우리의 노력으로 발전이 된다.
그래서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각들이 깎아 나가면서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위해서 우리가 반듯이 걸쳐야 될 덕목들이 있다. 사귐의 단계로 가기위해서 향주삼덕이 필요했다면 이 일치와 친교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복음삼덕이 있다. 청빈, 정결, 순명 이 세가지의 덕목을 충분히 실천함으로 인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 하느님과 비로서 친교를 이룬다. 그렇지 않으면 사귐에 까지 갈 수 있지만 일치와 친교는 불가능하다.
내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신자는될 수 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신자가 되겠다는 이야기는 믿음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겠다는 이야기고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겠다는 이야기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겠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세례성사요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사귈수는 있다.
미사도 참석을 하고 성사생활도 참석을 하고 나름대로 신자들로써 해야할 여러 가지 생활들을 충실히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생활만 했다고 해서 믿음만 고백했다고 해서 일치로 당장 가느냐? 그렇지는 않다. 일치로 가려면 반듯이 가난, 정결, 순명, 이 세가지 덕목이 자신의 삶 안에서 드러나야만 된다.
가난 - 나눔이다. 궁색하게 살으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나누면서 살으라는 이야기다.
정결 -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 충실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삶을 더욱 부채질하는 신뢰 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신앙인으로써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정결의 자세다. 어떤 육체적인 순결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수도자들에게 있어서는 육체적인 순결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있지만 우리 일반적인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정결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순결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인 순결만을 자꾸 이해하시면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나하고 정결하고는 상관없다 이렇게 해석을 하실 수 있는데 부부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정결은 반듯이 필요로 한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신뢰를 주겠다는 그런 의미에서 정결이다.
순명 - 순명 하면 어떤 경우에는 복종하는 것이다. 물론 수도자들 경우에는 장상에 대한, 신부들 같은 경우에도 교구장에 대한 순명, 물론 서약이라고 하는 그런 순명이 있는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순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장상에 대한 복종,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은 기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무엇을 억지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뻐서 하는 자세, 위에 사람이 억지로 누르니까 나는 그것이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눈치 때문에 투덜거리며 하는 것은 순명이 아니다.
순명은 나도 좋아서 내가 기쁜 마음으로 내 자신을 상대방보다 낯추는 겸허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나눔, 충실, 겸손, 겸허라고 하는 이 세가지 더목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생활 안에 어떤 삶으로든지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 일치가 이루어지고 친교가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사귐으로 다 끝난다. 신앙인의 삶이란 죽는 그 순간까지 완성이 아니라 계속해서 노력하는 과정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 친교 이렇게 이야기는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엄밀한 의미로 본다면 죽은 다음에나 비로소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단계에까지 가기위해서 꾸준하게 노력을 해야하는 그런 입장에 놓여있는 사람들인데 바로 이러한 하느님과의 일치,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기 위한 이 복음삼덕을 가르치는 그 구체적인 삶의 원칙들을 우리에게 변함없이 가르쳐주는 것이 사실은 성서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된다. 성서에 도대체 무엇이 담겨져있는가 하는 것은 이 두가지 차원에서 해석을 하면 더 간단하게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두가지 단계 : 계시가 있고 계시된 진리가 있고 계시의 역사가있다.
계시 -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셨다.
계시된 진리 - 성서에 담겨져 있다. 계시된 진리가 성서다. 성서의 중심인물은 누구인가? 성서의 권위를 가르쳐 주는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래서 신약성서에 보면 예수의 전 과정, 하느님의 전 과정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 하시고자 하는 전 과정이 완성되신 인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드러난다.
그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다 쉽게 다루고 있는 것이 성서일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는 완성을 이루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그대로 우리 자신들에게 전달이 되는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진리를 현실적으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활인할 수 있는가? 성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계시의 역사 - 구세사,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다. 하느님의 구원역사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보통 성서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구세사를 중심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은 구원역사의 흐름을 리더하는 분이시다. 세상 창조 때부터 모든 일이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기운 이렇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었다. 당신 자신의 시대를 마감하시고 제자들에게 교회를 맡기시면서 교회의 주인으로 약속해 주신 분이 역시 성령이시다.
교회의 탄생일은 성령강림 대축일 이다. 하느님의 구원역사, 계시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분은 성령이시다. 계시된 진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 이고, 계시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분은 성령이다. 세상 창조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보통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라는 교리를 꼭 철학적인 차원으로 해석을 할려고 하지말고 성서적인 차원으로 해석을 하면 더 쉽게 접근이 될 수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 주셨고 그 완벽하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그 구원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그 모습이 사실은 우리에게 성령이라고 하는 형태로 체험이 된다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언어를 인간이 알아듣기는 힘든일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포장을 한다. 그 인간의 언어로 포장을 하시는데 그 방법으로 동원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는 것이다. 당신 자신의 언어로는 인간에게 이해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인간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포장을 하신다. 그것이 계시된 진리다. 우리가 지금 정리해본 것처럼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 역사를 굴러가기 시작한다. 이 굴러가는 전 과정을 일컬어서 구원의 역사라고 한다. 계시의 역사다라는 말이다.
이것이 언젠가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이 종말을 일컬어서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 이렇게 표현을 한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는데 우리는 계시된 진리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그게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매번마다 힘을 얻고자 하는 것, 바로 이 계시의 핵심을 알고자 할 때 우리가 사용해야 될것이 바로 성서다 하는 것으로 정리를 해볼 수 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보이지않는 모습으로 접근해 오신다. 거기에 우리가 응답했을 때 비로소 그분의 계시는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응답하지 않으면 영원히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런 의미로 하느님의 계시, 응답을 이해를 하면 좋을 것이다.
3. 성서의 산지
1) 연대적 대표성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그 진리가 담겨있는 것이 성서인데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신다 라고 했을 때 그 인간을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지목해야 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맺은관계 -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하느님으로부터 복도 받고 많은 이방인들의 침범으로부터 하느님의 힘으로 구원되기도 하고 쳐부수기도 하고 이런 일련의 여러 가지 과정을 우리가 성서에서 지켜보면서 바로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관계 맺었던 역사를 우리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의 역사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 하고의 맺는 관계가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대표적인 나라를 통해서 가르쳐지는 것 뿐이다 하는 의미에서 연대적 대표성이다. 이스라엘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응원하는 팀이다. 그 팀이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가? 그것을 살펴보면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것이 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다. 왜 이스라엘인가? 왜 구약성서를 보면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 그 다음에 남과 북으로 분열된 다음에 무슨왕 --- 여러명의 왕들이 나오는데 성서공부를 한다고 해놓고 왜 이스라엘의 왕들을 우리가 살펴봐야 되느냐?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대적 대표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의 사지, 배경이 되는 것은 다른 민족도 아니고 유태인들, 이스라엘이 성서의 배경이 된다. 유태인의 역사, 유태인의 역서의 중심적인 부분들을 보면 메소포타미아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성서가 쓰여지게 되는 하나의 지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유태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우르 라는 곳에서 살았다. 아주 문명의 발상지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행복하게 잘 살던 사람을 어느날 야훼라고 일컬어지는 하느님께서 불러 내신다. 내가 약속해준 땅으로 가거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거라. 하느님은 성서에서 내가 너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주겠다. 그러니까 나만 믿고 따라라.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가족들만을 데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동을 시작한다. 중간 도착지가 하란 이었다.
그리고 가나안 이라고 하는 땅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에 왔다가 거기서 아브라함은 일생을 마치고 그 밑에 이사악 야곱, 야곱의 열 두 아들들, 그 아들들이 우여곡절 끝에 에집트까지 내려갔다가 여기에서 모세 인도하에 출애굽을 해서 다시 가나안으로 오게 되는 이 과정, 이것이 구약성서 이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역사이다. 우르에서 시작을 해서 가나안 에집트를 걸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이 역사 이것이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보는 유태인들의 역사이고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이 구약성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연대적 대표성, 어떤 시기적인 장소적인 지리적인 배경을 이해를 한다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갖고있는 이 성서가 어떻게 해서 정경화 작업을 하게 되는가? 성서 권수가 확정이 되는가 그 과정을 이제 정리 해본다. 성서는 우르에서부터 시작을해서 가나안과 에집트를 거쳐서 다시 하느님께서 약속해주신 가나안 땅에 이르는 유태인들의 역사를 바탕으로 해서 작성되는 책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성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역사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구약성서는 예수 시대 이전에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예수님 당신 자신도 구약성서를 여러군데 이용하신 걸로 봐서 구약성서는 어느정도 정경화가 되어 있었다 라고 본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공식적으로 구약성서가 체계화 된 것은 기원후 90년이다. 기원후 90년에 얍니야 라고 하는 곳에서 종교회의가 열린다. 이 종교회의 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가톨릭 측에 종교회의 가 아니고 유태인들의 종교회의 이다. 유태인들이 90년에 얍니야 라고 하는 곳에서 개최를 해서 그곳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들의 유태교 경전을 확정을 한다. 유태교 경전을 확정을 하는데 그 당시에 24권이다. 24권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구약성서 라는 것을 자기네 경저으로 확정을 진다. 지금도 24권이 유태교 경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성서이다.
이 유태교의 경전을 그리스도교가 받아 들이면서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분의 행적 초창기 사도들과 교회들의 행적을 담은 또 한권의 성서를 첨부를 시킨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 하는 신약성서 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구약성서는 90년에 유태교인들이 확정지었던 것을 그대로 갖어오고 거기에다 신약성서를 덧붙였다. 신약성서 27권을 유태인들과는 상관이 없다. 유태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인정을 하지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신약성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로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유대교 경전을 초창기에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이는데 유대교 경전은 히브리어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태동이 되어서 신약성서와 접목을 시켜서 하나의 성서로 사용을 할려고 하는데 문제는 유태인 이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구약성서를 보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지만 차후에 초창기 사도들의 전교에 의해서 신자가 된 희랍 사람들, 소아시아 지방이라든지 그런 지역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히브리어 성서를 본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된다.
그래서 희랍 사람들, 초창기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유대교에서 확정한 24권의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초창기 그리스도교 교회가 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어로 번역을 한다. 그 번역을 하는 성서를 70인역(셉뚜아진따)이라 한다. 그리스어로 번역을 하면서 유대교에서 24권 경전으로 인정한 것 외에 또 다른 성서를 여기에다 첨부를 시킨다. 이것이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 성서가 차이가 나는동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가 구약성서의 유대교 경전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또 다른 성서를 삽입을 시킨다. 그것이 7권이다.
7권을 삽입을 시켜서 그것을 신약성서와 결부를 시키고 가톨릭 교회는 이것이 우리의 성서다 이렇게 확정을 짓게 되는 것이다. 또 유대교 경전을 번역하면서 24권이었던 성서를 필요에 따라서 분리를 시킨다. 그 분리를 시킨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성서를 보면은 상․하 권으로 구분을 하는 배경이 되고, 예언서도 유태교 경전에 보면 한 권의 책이었는데 그리스도 교회가 12권으로 조각 조각 분리를 시킨다. 그래서 유대교 경전의 권 수와 그리스도교의 권 수가 차이가 나게 된다. 유대교 경전 24 + 11 + 4 (에즈라+느혜미야) + 7 = 46권.
개신교는 중세기에 개혁해서(프포테스탄) 가톨릭에 대항하는 개신교가 등장이 되면서 7권은 가톨릭 교회가 자기들 마음대로 첨부 시켰다해서 7권을 빼 버린다. 그래서 개신교는 구약성서 39권, 유대교는 24권, 가톨릭 교회는 46권, 문제는 제2경전 7권이다. 에스델 과 다니엘은 부분적으로 인정을 못한다. 가톨릭 73권, 개신교 66권이다. 나중에 가톨릭교회는 이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을 하는데 가톨릭교회가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해서 유럽 전사회를 휩쓸게 되면서 이제는 그리스어 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이 많이 늘어나게 되므로 인해서 라틴어로 번역을 한다. 성 예로니모 성인의 주도하에 그리스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을하는데 이 성서를 불가따(보편적이다, 일반적이다)라고 한다.
이 라틴어 성서가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성서로 공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벌써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또 라틴어로 번역을 하다 보니까 번역상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오늘날에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라틴어를 보기 보다는 그리스어를 보고 많이들 공부를 하고 있다. 200주년을 맞이해서 우리 신부님들이 번역을 많이 하고 있는데 번역작업에 기초가 되는 성서가 그리스어이고 보다 더 가깝게 정확하게 해석을 하자해서 지금은 희랍어를 사용하고 있다. 성서의 전반적인 정경화작업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4. 성서의 의도
1) 성서의 목표는 무엇인가?
성서의 목표는 하느님의 실현이다.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해서--- 잘 살려고--- 어쩌다 보니까--- 천당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무척 많다. 옛날 요리문답에 보면 천당은 지복직관이라 했다. 끝없이 복을 누리고 직접 본다. 하느님을 직접 보면서 하느님과 함께 끝없이 복을 누리는 곳이 천당이라고 했다.
우리 신앙인들 거의 대부분이 죽은 다음에 이 세상에서 꿈도 꿀 수 없는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하느님과 함께 끝없이 복을 누리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다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과거 몇 백년동안 교회가 가르쳐왔던 천당에 대한 개념이다. 이것은 착한 일을 해야 갈수 있다. 반대로 지옥이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말씀을 알고서도 지키지않은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래서 그 지옥은 영원히 벌을 받는곳이다.
옛날교리에 의하면 세례성사를 받게되면 우리 이마에 인호가 박힌다. 그래서 마귀들이 송곳을 갖고 쑤신다. 나쁜일 하면 지옥가니까 나쁜일 하지마라. 또 연옥교리는 은연중에 신자들로 하여금 천당가기 위해서 착한일 해야된다. 그러니까 부작용이 생긴다. 자기 자신이 천당가야 되기 때문에 착한일 해야된다 라고 과거에 보상교리를 가르쳤다. 무엇인가 차곡차곡 쌓아놓아야 천당에 가서 상을 받는다 라는 그런 개인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우리 자신들이 살았고 그것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가 성서의 의도를 파악한다면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이 내 자신만이 천당에 가는 개인적인 구원이겠는가?
우리가 성서의 가르침을 보면 개인적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부끄러운 일인가? 오히려 이 개인적인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버려야 할 죄고 우리 신앙인들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장애물이다. 내가 천당가기 위해서 내가 편할려고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죄를 저지를 수있다.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예비신자들 자기 소개서 받아보면 대부분이 내 자신의안정을 찾기위해서, 가정의평화를 위해서 천주교회에 입문하는 동기에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만약에 교회가 계속해서 그런 동기를 받아들이면서 그런 동기를 지닌 신앙인들을 교회 안에서 가르쳐 나간다면 분명히 교회는 앞으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또 성서가 의도하고자 하는 신앙관은 아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나라의 실현이다.
하느님 나라 라고 하는 개념과 천당이라고 하는 개념은 어떤의미에서는 같으면서 상대적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다. 현재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이 있다 영원한 세상. 하느님께서는 이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세상을 그냥두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이 먼저 다가오시는 계시라고 하는 구원계획을 통해서 하느님 당신 자신이 인간의 세상으로 들어오신다. 들어오시는 이 과정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침투해 들어오신다.
침투 - 막무가내로 확 뚫고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들어오는 현상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아주 비밀스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신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시는데 그 선봉에 세운 소대장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에 침투해 오시는 과정에 선봉장으로 쓰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있는 세상을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있는 이 세상에다 그대로 이루려고 하신다. 그 이루려고 하는 나라를 일컬어서 하느님 나라 라고 한다. 천당이라고 하는 개념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은 다음에 딱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 있는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데 성서의 가르침은 죽은 다음에 따로 가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야 된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개념이다. 성서를 제대로 해석을 한다면 천당 가기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앙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신앙인들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왜 우리가 선교를 해야 되는가? 나와 더불어서 저 사람이 천당 가게하기 위해서 선교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간에 자꾸 자꾸 넓혀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선교를 해야된다. 말로만의 선교는 안된다. 하느님 나라 라고 하는 개념을 좀 더 제대로 이해해야 된다.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가 아니고 지금 현재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 실현해야할 나라가 하느님 나라이다.
천당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서 완성이 되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도 완전히 이제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는 나라가 되었을 때 천당이라고 한다. 하느님 나라는 진행되는 상태이고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이 되었을 때 그것을 천당이라고 할 수 있다. 천당 가려고 발버둥치는 그런 신앙 자세에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그 벗어나는 노력을 성서에서 배워야 된다. 성서에서 하느님 나라가 무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깨닫는다면 천당가려는 신앙생활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교회를 실천종교라고 한다. 이 땅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역에 좁게는 내 가정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 내가 책임지고 있는 공동체,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 하느님의 뜻이 빨리 실현되기 위해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고있는 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목표를 위한 방법을 우리는 성서에서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서 죽음의 승리를 거두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고 고백을 하는가?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고 인간이 되셔서 죽임을 당하셨고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셨다. 남에 의해서 강제로 죽임을 당하셨다가 그 다음에 부활하셨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부활의 희망을 걸고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이다. 그러면 이 부활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죽음을 이긴 사건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에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 끝이 아니다. 죽음은 부활의 과정으로 가기위한 문일뿐이다.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천당교리를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로 가기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해주면 좋겠다. 단지 천당 가기위한 방법으로 성서 공부를 한다든지 혹은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 가정에, 내 직장에, 내가 머물고 있는 공동체에 실현을 해볼까, 그 실현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 성서다.
왜 성서 묵상을 하고 소공동체를 통해서 자꾸 말씀 나누기를 하라고 하는가?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역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케 하는 지혜를 깨닫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간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내가 성서 공부를 해야 되겠다. 그리고 성서의 가르침들을 깨우쳐야 되겠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2) 예언자적 소명의식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 - 1965년에 열렸었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제 2의 성령강림 사건이라고까지 자신있게 이야기할 정도로 현대 교회가 걸어가야 될 여러 가지 삶의 원칙들을 분명하게 제시했었던 공의회 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삶을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예언자적 소명의식일 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라고 하는 것은 현대 세계의 교회가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 교회라고 하는 것은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를 살아왔었다. 교회가 따로있고, 세계가 따로있고 그래서 세상은 오히려 교회에 몸 담고있는 우리 신앙인들 입장에서는 죄를 유발시키는 적이었다. 과거 교회에 보면 삼구라는 것이 있었다. 삼구(마귀, 세속, 육신) 우리를 죄 짓게 하는 죄로 빠트리는 요소들 이었다. 실질적으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지금 자기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자체가 죄를 짓게 만드는 요인이었고 자기 자신이 갖고있는 육신도 죄를 짓게하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육신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주면 안된다. 그래서 언제나 절재를 강조했었고 심지어는 편태까지도 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육신에게 고통을 주어야한다. 고통을 준 만큼 영혼이 맑아진다. 그래서 육신을 철저하게 괴롭혔다. 어떻게 해서든지간에 세상과 멀어져야 한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죄를 짓는다. 세속과 가까이 하면 천당 가는길이 점점 멀어진다. 그래서 가능하면 교회 건물은 세상 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또 가장 높게 첨탁을 쌓았다. 세상과는 어떻게 해서든지 멀어져야 하고 가능하면 하늘과 가까이 가도록 노력해야 된다.
또 모든 수도회라든지 실질적으로 하느님께 어떤 자기자신의 수련을 쌓을려고 하는 사람들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과 담을 쌓으며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격리를 시켰다. 과거 교회가 가르쳤었던 이 방법, 세상도 우리를 죄짓게 하는것이고 육신도 우리를 죄짓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부터 탈피해서 이제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피해 도망가야할 곳, 우리가 가까이 해서는 안될 곳, 우리가 떨어져 나와서 살아야될 곳이 아니고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세상안으로 들어가야 된다. 그리고 그 세상의 흐름에 우리 자신이 적응하면서 살아가야 된다 하는것에 초점을 맞춰서 열렸던 공의회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근본적으로 과거 교회가 가지고 있던 모습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고난 다음에 교회가 표방하는 모습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왔던게 적응이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개개인에게 적용이 될 때에는 쇄신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 쇄신해야 된다. 과거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모두 갈고 새롭게 태어나야 된다고 쇄신을 부르짖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교회의 가르침이라든가 또 그것이 외적으로 들어나는 전례 행위들이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교회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세상안에 뛰어들고 또 자기자신의 육신을 단지 죄를 유발시키는 어떤 물질적 몸 덩어리 살덩어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 자체를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표현으로 이해를 하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이 갖고있는 마음상태, 정신, 사고방식 모든 것이 육신으로 표현이 된다. 육신이 없이는 인간은 자기자신을 표현할 길이없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표현이다 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받아 들여지면서 새롭게 우리들 삶을 조명하는 것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이고 거기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가르침이 신자들에게 예언자적 소명의식을 가르치기 시작 한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세상이 있고 우리가 주도권을 갖은 철저한 세상이 있다라고 가증했을 때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고 인간이 그 계시에 응답함으로 인해서 만나게 된다. 그러면 오늘의 세상과 하느님의 세상이 만나는 이 과정에서도 사실은 무엇인가 인간의 응답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응답으로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신앙이다. 그 다음에 희망이고 사랑이다. 인간 세상편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종목들이 신앙과 희망과 사랑이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점점 깊어진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친교를 이루고 일치를 이룸으로 인해서 비로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 그러면 인간이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이러한 응답에 대해서 또 다시 응답하는 상태가 무엇으로 이루어 지겠는가? 다시 말하면 이렇게 응답한 신앙인들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면서 드러내는 삶의 형태가 무엇이냐?
① 신앙을 지닌 사람들의 입장에서 오늘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복음적 식별’ 이라고 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갖는다. 예수께서도 항상 들을귀가 있는자, 볼 수 있는 눈을 가진자, 이런 표현을 하시는데--- 볼 눈이 생긴다. 그 볼 눈을 어디서 발견하는가? 복음에서 발견한다. 더 넓게 표현하면 성서에서 발견한다.
신앙인들이 믿음을 갖고 성서를 읽고 해석하면서 비로소 오늘의 세상을 식별할 수 있는 눈들이 생긴다. 오늘의 세상을 식별한다는 말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부정인가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②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다라고 하는 것은 바꿔서 표현하면 복음삼덕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의 모든 인생의 희망이 하느님 나라에 가 있기 때문에 그 하느님 나라에 백성이 되기위해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성서에서는 복음삼덕으로 가르치니까 당연히 복음삼덕을 자신의 삶의원칙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느님께 혹은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두고있는 사람들이다.
다른데 희망을 두는 사람들은 결코 복음삼덕의 삶을 자기 자신의 삶의 원칙으로 삼지않는다. 이 희망이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의 출세에 있다. 혹은 자기자신의 이름을 세상에서 드높이는 어떤 명예에 있다. 또 남들보다 남들만큼 잘 살아야 되겠다 라는 어떤 제물에있다. 이것만을 자기자신의 희망으로 삼고 살아간다. 세상을 살아나가려면 힘이 있어야되고 재력이 있어야되고 명예가 있어야된다. 그것이 나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복음삼덕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수운 일이다. 멍청한 짓인 것이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복음삼덕을 살아간다.
③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알고 하느님께 사랑으로서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오늘의 세상에 보이는 삶은 무엇인가? 그것을 일컬어서 투신이라고 한다. 자기를 내던진다는 말이다. 내던진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께 신뢰를 둔다는 말이다. 믿는바가 있으니까 내던진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는 투자를 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오늘의 세상에서 보이고자 하는 삶, 식별력과 복음삼덕의 실천과 투신의 삶 이 세가지의 삶이 결국은 오늘의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점점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요소라고 한다면 바로 이 공통 분모를 찾아나가는 이 삶을 일컬어서 예언자적인 삶 이라고 표현을한다.
※ 예언자 (미리‘예’자가아니고 맡길‘예’자다. 하느님의 말씀을 맡겨놓은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있는 사람, 하는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 결국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다보니까 자기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예언자로서의 소명의식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세상의 가치와 부딫히고 그 과정에서 박해를 당하고 죽임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구약성서에 보면 그런 예언자들이 많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분별하다 보니까 당연히 예언자의 삶은 비판자로서의 삶이 이루어지게 된다. 세상에 대해서 비판을할 수밖에 없다.
그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는 세상에 대한 식별이다. 항상 예언자는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지못한다. 만일 세상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된다면 환영을 받겠지만 세상의 이치가 하느님의 이치와 다를 때는 분명히 예언자는 그 가운데서 고통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을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확인을 한다. 우리가 오늘날 이 시대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살아야 될 것이 예언자적인 사명이라고 한다면 이 예언자적인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성서에 들어나있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깨달음을 통해서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봤을 때 성서는 우리 자신에게 참다운 예언자적 소명을 일깨워 주는 책이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예언자적 소명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성령의 감도하에 작성된 책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타당한 정의가 될 수있다. 이러한 성서의 의도를 우선 파악을 하고 이러한 의도를 지닌 성서를 우리가 어떻게 접근을 해야 되는가?
3) 성서를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가?
성서는 얼마든지 나름대로 또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대로 접근을 해도된다. 어떤 일정한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마음대로 해석을 한다고 해서 누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그 성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를 본다면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를 우리가 처음부터 제대로 익힐 필요가있다.
대표적으로 성서에 접근을 한다 성서를 읽는다 했을때에는 두 가지를 연상할 수 있다. 우선은 육체적인 몸가짐, 어떤 자세로 읽어야 되는가에서 육체적인 몸가짐이 있을 수가 있고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느냐?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을 해볼 수 있다. 육체적인 몸가짐 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성서를 읽을 때의 자세 (서서? 않아서? 누워서? 화장실에서? 성전에서?) 여러 가지 외적인 환경들을 말할 수있고, 마음자세, 어떤 마음자세로 읽느냐?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몸가짐, 또 성서가 읽혀지는 환경보다는 마음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얼마나 급하면 화장실에서 성서를 읽을까? 좋게 해석을 하면 화장실에서 까지도 성서를 읽는 아름다운 모습일 수도 있다. 다른곳에서도 다읽고 화장실에서까지 성서를 읽는것과 다른곳에서는 일체 읽지않고 화장실에서는 다른 것을 할수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 한 번 읽겠다 하는 것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 이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될 것인가? 시대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만고불변의 말씀은 있지만 만고불변의 해석은 없다. 성서 그 자체는 만고불변 이다.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성서의 가르침은 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성서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것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그러난 성서의 말씀 그 자체는 변하지않는 것이다.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와 인격의 한계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 해석의 원천이 되는 성서의 말씀은 변할 수가 없다. 그래서라도 우리가 성서를 어떠한 마음으로 읽어야 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성서는 남의 눈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읽어야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눈으로 읽어야 한다. 내가 성서를 읽고 지금 현재 내가 느끼고 내가 깨달은 바를 중요시 여겨야한다. 내가 내 눈으로 읽은 내용을 믿지말아야 한다. 내가 성서를 읽고 내 나름대로 느끼는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강요가 되면 독단이 되고 편견이 된다. 우리는 이 독단과 편견의 부작용들을 우리 사회에서 많이 체험한다. 성서를 자기 눈으로 본것까지는 좋은데 자기 눈을 너무 믿은나머지 자기 해석이 최고다. 휴거론, 종말론 등, 그래서 믿지는 말고 내가 본눈을 배워야된다. 사람이 어떤 상대를 사랑하게 되면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대를 어떤 눈으로 보는가?
사랑하는 상대에 첫 번째 반응은 상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주려고 한다. 다 해줄 수있다 라고할 때 상대방의 눈빛을 보기 시작한다. 상대의 눈빛을 보면 나를 좋아하는구나,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구나 라는 것을알 수 있다. 상대방의 눈빛을볼 때 내가 상대방의 요구를알 수 있는 눈빛이 서로에게 마주치는 순간에 상대의 눈빛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나다. 상대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보면 처음에는 상대가 보이지만 깊이보면 상대의 눈빛속에서 자기를 발견한다. 상대와 이미 합치된 자기자신을 본다는 것이다.
비운다는 말은 내 눈으로 성서를 읽고, 보지만 결론적으로는 내마음을 비움으로 인해서 이제는 성서 안으로 내 자신이 들어가야 된다. 내 의도대로 내가 부르짖고 내가 주장하는 바대로 성서를 인용해다가 막 끌어다가 사용할려고 하지말고 내가 성서의 가르침으로 들어가야 된다. 자기의 어떤 일반적인 주장을 하기위해서 성서를 함부로 인용을 하고 성서를 갖다가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데 정당화 시키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자기의 주장을 믿고 자기의 눈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말고 성서를 눈으로 읽되 자기 자신이 성서안으로 들어가야 된다. 물론 이 단계까지 가는데는 많은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고 또 오랜 시간이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성서 해석이다. 처음 시작은 내가 말씀을 읽는것인데 결론적으로는 말씀이 나를 읽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 성서 복음나누기 이고 말씀나누기 이다. 말씀이 나를 읽는 것이다. 내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내가 말씀안에 들어가있는 이 상황, 이것이 성서를 대하는 방법이다. (유리비유의 설명)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성서인데 그 성서를 읽는 내 자신이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서를 읽음으로 인해서 내가 성서의 가르침을 외곡을 시켜버린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 눈으로 읽되 내가 읽은 것을 믿지는말고 오히려 말씀이 나를 읽음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계시가 많은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이될 수있도록 해야되는 것이 우리가 성서에 접근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공부를 해야하고 꾸준하게 성서에 대한 탐구자세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만일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성서를 읽을 필요가없고 또 성서공부를 해야할 이유가없다. 서점에가면 성서는 얼마든지 산다. 사서 내맘대로 읽고 내맘대로 해석하면 된다. 그런데 그것은 본래 성서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 성서의 의도를 제대로 알기위한 과정 그것이 바로 성서 공부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성서공부를 하는 목적도 우리의 눈, 우리의 마음을 비우면서 말씀이 우리들을 읽을수있도록 내놓는 과정이라고 이해를 하면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에 대해서 좀더 쉽게 이해가 될 수있을것이다.
성서에 담겨져 있는 내용, 성서의 무류성
성서는 오류가 있을 수없다. 성서는 잘못이 있을 수없다. 과연 성서에 잘못이 없는가? 성서의 내용은 모두 진실된 것이고 진리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질문도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할수 있게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계시헌장 11항) 성서의 세계상과 오늘날 인간의 지식도 과학문명이 밝혀낸 자연과학의 세계상을 대표적인 것으로 비교를 해보면 성서라고 하는 것에 무류성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해야 될것인가 하나의 단초가 생긴다라고 본다.
성서에 나오는 세계상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느님께서 이세상에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라고 표현한다. 오늘의 세계상은 태양중심으로 해서 모든 위성들이 돌아가고 있다. 과거에 우리가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계상,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어느 누구든지 인정할 수 있는 세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성서가 진실된 것이냐? 성서의 내용을 모두 진리로 받아들일 수있느냐? 결코 그럴수는 없다. 성서에 나오는 지구의 상태는 원반이다. 멀리가면 떨어질줄 알았다. 요나서 같은데 보면 요나가 왜 배를타고 도망갔는가?
하느님이 자기에게 일시키려고 하니까 하느님이 보기 싫으니까 배 타고 멀리가면 하느님께서 안보실줄 알았다. 하느님께서 못잡을줄 알았다. 과거의 교회는 지구를 원반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다른 대륙으로 나가지 못하다가 태양중심으로 하는 우주관이 자연과학이 서서히 지구는 그렇게 생기지 않고 공처럼 생겼다. 우리가 여기를 한참을 가다보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올 것이다 하는 것을 자연과학이 밝혀내면서 사람들이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성서의 가르침은 원반이라고 했는데 실지 보니까 지구가 원통이더라, 또 성서에 보면 하느님께서 모든 세상을 다 만드셨다. 완벽하게 만드셨다라고 가르치는데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을 통해서 밝혀내고 있는 것은 지금도 생물체는 변화의 과정을 밟는다. 진화되고 있다. 교회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드셨다고 가르쳤는데 막상 알고보니까 지금도 변화되고 있는 종자들이있다.
세상의 자연과학이 밝혀낸 것은 진화이고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창조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이 세상의창조자, 관리자, 모든 것 변화의 주제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고있고 자연과학이 밝혀낸 것은 하느님이 있다라기보다는 살람과사람사이 혹은 사물과 사물사이에 인과 관계를통해서 원인이있으니까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오고 그래서 오늘날 세상 삶을 돌아보니까 하느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고 요즘도 서로의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수시로 상황들이 바뀌어 나가더라, 하느님이 주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에 따라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던지 바뀌어져 나가더라 오늘날 자연과학이 발견해낸 것이고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다.
서울이 오전농도가 어떻고 오염상태가 어떻고 만약에 이 논리를 그대로 초등학교 수준으로 이해를 한다면 서울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죄를 지어서 하느님께서 벌로 매연을 하늘 상공에다 깔아놓은 것읻다. 그런데 자연과학이 발견해낸 것은 인간들이 환경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않고 개발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편리함을 찾은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이다. 자연과학이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층명을해낸 현상이다. 그런데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벌이다. 지구 많은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대기권에다 구멍을 내서 암도 쉽게 걸리고 지구를 뜨겁게 달구어논다. 하느님이 주제자이니까 이런 의식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과 오늘날 현 대 사회에서 인정이 되고 있고 또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이러한 자연과학의 세계상의 마찰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할 것인가?
신앙을 갖지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비교가 훨씬 더 설득력이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는 봐라 너희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하느님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너희들이 이데올레기로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냐?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한 근거에 대해서 우리가 명학한 답을 내려야된다. 이것도 어떤의미에서는 성서를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라고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한답을 시도를 해본다면 결론은 성서는 일반적인 옹어를 표현을 한다면 성서는 신앙의 영역이다. 성서는 시대적인 산물이다. 시대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성서 그 자체는 성령의 감도하심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자신을 열어 보이신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표현하고 저술한 것은 인간이다.
그 시대에 살았던 인간의 언어와 그 시대에 살았던 인간의 표현으로 작성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갖고있는 성서는 2,000년전 혹은 4,000년전에 기록했었던 그 시대적인 상황을 그대로 반여을 하고 있다. 창세기에 이러한 구분이 생겨난다. 구약성서가 쓰여질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실질적으로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그시대에 쓰여진 성서의 가르침은 그 시대의 가르침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성서를 제대로 해석을 할려면 우선 성서공부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가 성서가 쓰여진 단계로 돌아가야된다. 성서가 쓰여진 시대로 돌아가서 그시대예서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를 먼저 우리자신이 충분히 이해할 수있을 때 성서를 통해서 들려지는 하느님의 모습, 하는님의 계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생각해야될 것은 성서는 시대적인 산물이다. 예를들면 고백성사를 대부분 1년에 두 번볼 것이다. 판공 : 과거에 한국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전교지역이다. 아직 한국 교회는 자체적으로 꾸려갈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전교지역으로 명해놓고 외부교회의 도움을 받아야만이 꾸려갈 수 있는 교회다.
그래서 전교지역으로 책정을 해놨다. 전교지역은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신자들이기 때문에 그 신자들을 가르쳐주어야 되겠다. 저들은 그냥두면 못살으니까 친절을 베풀어야 되겠다 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 판공성사이다. 언제 성사를 봐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날을 딱 정해놓고 이 때 만큼은 최소한 성사를 봐야 된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되니까 표를 주고 확인하는 것이 판공성사이다.
1984년도 200주년을 맞이해서 한국교회도 전교지역에서 탈피해서 자체교회로 승격이 되었다. 금육도 옛날에는 사순시기만 했는데 지금은 일년내내 모두 지켜야한다. 성인으로서 이제 대접을받는다. 그러면서 판공성사 라고 하는 의미도 없어졌다. 시대적 산물이다. 그런데 오늘날 까지도 판공에만 매달려있는 사람이 많다. 과거에는 부활과 성탄을 잘 준비하는 수단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이것이 일상생활을 이그러트리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교회안에서 일어나는일, 더군다나 성서안에서 일어나고 표현하는 일들은 반듯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시대적인 산물이라고 하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된다. 이것을 무시해버리면 성서를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고 성서의 무류성을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준다(집회서 45, 1-5)
성서의 진실성과 관련지어서 성서는 신앙의 영역이다.
① 시대적 산물임을 알아야 된다. 교회가 가르치는 참된 신앙의 내용하고 그 내용을 그때 그때마다 일정한 형식을 표현해야 하는 시대적인 조건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지만 그 내용을 그때 그때마다 표현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시대적인 표현방식과 신앙의내용은 구분할수 있어야되겠다.
②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영역하고 성서에서 말하는 성서의 영역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자연과학이 다루고자 하는것과 성서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결론 : 성서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어떤것인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오늘에 대해서 하느님이 갖고 계신 계획이 무엇인가? 이것을 다루는 것이 성서이다. 자연과학이 다루는 것은 이 세상의 계획에대해서 다룬다.
성서는 이세상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고 우리가 고백을 하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세상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갖고계신 계획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계획안에서 인간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었는가? 이 부분을 다루는 것이 성서라고 한다면, 자연과학은 어떤 이론 초월자, 절대자, 하느님이라고 하는부분은 빠지고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이세상의 계획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자연과학이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가? 어떤 원칙, 어떤원리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인가? 이치가 무언가? 그것을 따지는 것이 자연과학이고 성서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이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서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성서와 자연과학의 차이점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에서 특히 창세기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가지 세계상들, 그것은 분명히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파악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것이고 어떤의미에서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것이 성령의 감도하에 오류가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이 존재 하시는 곳이고 이 세상과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라고 하는 신앙을 고백하는 그 시대의 표현방식일 뿐이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발견해낸 자연과학을 가지고 틀리다 맞다 라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시대적인 산물임을 우선 감안을 한다면 오늘날 이미 발전이 된 또 우리가 이미 깨달은 자연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성서를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선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지식의 수준에서 성서를 이해해야 되는 것이고 창세기라고 하는 것은 그시대 사람들이 파악했었던 자연과학적 지식을 총동원 해서 우리들에게 하느님이 창조자시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시다 하는 신앙고백을 발견해 내고 깨우쳐내는 하나의 방법임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성서의 진실성 성서의 무류성을 이야기할 때 성서에 드러나 있는 표현방식을 가지고 거짓말이다 참말이다 성서가 잘못되었다 잘되었다 이것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성서에서 자연과학적 사고를 끌어낼려고 해서는 안된다. 성서는 자연과학 서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신앙고백문일 뿐이다. 신앙고백문을 가지고 거기서 무슨 자연과학적 진리를 끌어낼려고 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성서를 자연과학적 서적으로 이해를 하고 더군다나 성서의 해석을 자기 멋대로 함으로 인해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활용을해서 우리사회에 무리를 일으켰던 것이 시한부 종말론 이라고할 수 있다.
그것은 성서의 특히 성서중에서도 묵시문학적인 표현들을 마치 자연과학적인 수치 개념으로 이용을 하고 또 강징적인 표현들을 자기 멋대로 현실 세계에다 꿰어 맞추어 가지고 종말이 몇 년도 몇 월, 몇 일이다. 또 휴거되는 표징이다. 적 그리스도다. 666은 박 코드다 이런식으로 해석을 계속 하다보면 성서는 더 이상 신앙고백문이 아니다. 성서를 우리가 신앙고백문으로 받아들이는 한 성서안에서 어떤 자연과학적인 진리를 끌어낼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모한 행동이 된다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된다.
강단한 예를 들면 창세기에서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 중에 하나를 뽑아서 하느님이 만드셨다더라 그러면 여자는 그사실을 자연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는가? 아담이 잠자는 사이에 비겁하게 도둑질한 걸로 갖자 만들었다. 그런 어떤 성서의 신앙고백, 옆구리 갈비뼈를 뽑았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성서적인 의미로 본다면 남 녀와 그 각각의 의미, 남과 여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인데 그것을 자연과학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서 남자의 갈비뼈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까 여자는 도둑질 한 물건을 받아서 만들었다. 그러면 장물애비다.
성서에서 신앙고백문을 자연과학적 진리로 이용하고 해석하는 시도는 무모한 시도다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 신앙고백, 신앙의 핵심이 무엇이다. 하느님은 인간과 세상을 창조해 주신분, 우리의 참된 주인이시다. 또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는 그러한 신앙고백문을 발견할 수있어야 되고 그러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넘치시는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그욕심 때문에 그 하느님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인해서 죄악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한 신앙의 내용, 신앙의 핵심을 우리가 발견할 수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문장 하나 하나 표현 하나 하나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낼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시도라고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5. 모세오경(율법서)
신약에서 보면 율법이라고 나오는데 그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모세오경(율법서)의 내용을 현실 생활안에 법규로서 제정을 해논 것이다. 율법의 본 정신을 살펴볼려면 이 모세오경(율법서)에 대한 이해가 먼저 전제가 되어야만 될 것이다. 모세오경의 입문과정 으로서 맨 처음에 구약성서를 이루는 기본적인 토대를 살펴본다.
구약성서를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는가? 구약 46권, 우리가 어떤 뼈대로 정리를 해보겠는가? 굉장히 복잡한 것 같지만 막상 정리를 해놓고 보면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님을 학인할 수 있다. 대략 세 가지로 정리를 해서 말을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구일까?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역사를 다루는 부분이다. 특히 구약성서는 그 인간의 대표성을 지닌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가?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는 부분이라고 볼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그 유대인들이라고 일컬으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이겠는가?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다윗이다. 왜 다윗인가? 신약성서에 있어서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예수다. 예수 사건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부활이다.
예수라고 하는 인물의 모든 초점에 우리는 맟춰져있는데 그 예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구약성서도 해석이된다. 그러면 예수의 탄생과정은 4복음 서에서 예수의 탄생과 어린시절을 전하는 것은 마태, 루가 두 복음서 뿐이다. 두 복음서를 봤을 때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 가녀린 인간, 한 아이, 그 아이를 표현하는 방식중에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 누군가 하면 바로 이 다윗이다. 마태오도 루가도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표현한다. 또 실질적으로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다. 구약성서의 완성, 구약에 이루어졌었던 하느님의 모든 예언이 완성되는 인물로 신약에서 예수를 표현할 때 그 예수를 어떻게 구약과 연결시키느냐? 복음서 저자들은 어김없이 다윗으로 연결을 시킨다.
구약성서에서 유대인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아 그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메시아가 예수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논리이며 신약성서의 저술동기도 된다. 왜 신약성서에서 특히 마태오와 루가가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전하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이요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유대인들, 너희가 기다렸던 메시아가 이 분이다 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삽입을 시킨 것이다.
결국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구약성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뽑으라고 한다면 다윗이다. 이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구약성서 전체가 작성이 되었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이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다윗시대를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오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다. 다윗의 이상적인 상태, 다윗이라고 하는 한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역사가 가장 이상적으로 펼쳐졌었는데 이 이상적인 상태가 무너져 버림으로 인해서 다시 우리가 하느님과 인간의 본래 관계를 회복해야된다.
창세기 적으로 표현을 하면 에덴동산으로 다시 되돌아 가야만이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다라고 후대이 이르러서 부르짓게 되는데---
유배생활을 겪게된다. 이 유배생활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또 다시 외치는게 무엇인가? 빨리 다윗시대로 돌아가자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 시작에서부터 다윗시대를 지향했다가 다윗시대에 절정을 이루고 유배생활을 통해서 다시 다윗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는 책이 바로 구약성서이다. 그래서 예언ㄴ서를 봐도 그렇고 유배시대에 쓰여진 모든 책들을 보면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서 묘사를 하는 것이 다윗왕이고 다윗시대이다. 그래서 다윗가문에서 메시아가 날 것이다라고 하는 예언이 성립이 된다.
다윗시대 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이 출애굽사건에서 우리가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모세오경이다(창세, 출애, 레위, 민수, 신명). 모세오경에서 항상 우리가 제일먼저 살펴봐야할 것은 하느님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이렇게 했다. 내가 세상을 만들었고 내가 너희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냈다. 당신을 열어 보이신다. 그리고 그 열어 보이심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응담을 했는가? 소명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모세오경이다.
그래서 여기에 대표적인 주인공으로 등장이 되는 사람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마지막에는 모세라고 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어떻게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그들이 어떻게 하느님께 응답했는가? 이 이야기를 써 놓은 것이 출애굽이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부르셨고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또 모세를 어떻게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모세가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그것만 모세오경에서 살펴보고 묵상할 수 있다면 출애굽사건은 간단하게 깨우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면 계시와 소명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의 주제를 다루는 것이 모세오경인데 한 마디로 출애굽사건,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느님 백성의 형성사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 백성이 초창기에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가 하는 하느님 백성의 형성사를 다루는 것이 모세오경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 백성이 된 구체적인 사례는 십계명이다. 모세가 출애굽 사건이 끝난 다음에 하느님으롭부터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십계명을 받음과 동시에 이 계명을 철저하게 준수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인간측의 응답이었다. 그러므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주님이 되시는 일종의 계약이다.
일종의 계약이라고 하는 형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림을 받게되었다.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모세오경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된다. 구약성서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인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는 부분은 어딘가?
구약성서 각 권으로 따진다면 우리가 보통 역사서라고 구분하는 부분이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구분할때는 전기예언서라고 구분을 하기도한다. 예언서를 구분할 때 전기 예언서, 후기예언서 이렇게 구분을 하는 방법도있다. 그런 구분이 가능하다면 전기예언서로 ㄹ분류되는 부분이 바로 이 다윗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내용이라고 볼수 있겠다. 그러면 이 전기예언서 역사서에서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뤄주는가?
우리가 상징적으로 본다면 인간이 하느님께 응답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다윗이라고 하는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 다윗을 ㅂ루각시키기 위해서 등장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울이다.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의미에서 보면 인간적으로 보면 참 불행한 그런 사람중에 한 사람이다. 물론 성서를 쓴 저자들의 의도에 따라서 그렇게 묘사된 측면도 있을수 있지만 어쨋거나 이 다윗이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서 구약성서의 편집자들은 인간이 하느님께 응답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서술을 한다. 그리고 이런 이상적인 모습속에서 구원이 이루어짐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다윗의 고향, 다윗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그래서 나중에는 전투를 통해서 언청난 지역을 확보를 하면서 자기자신의 수도로 삼았던 예루살렘이 오늘날까지도 구원의 상지으로 되어있다. 새 예루살렘 ,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곳이 자기들 시대에 있어서는 다윗의 도성이면서 하느님의 성전이 있었던 장소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봤을때는 세상종말 때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도성에 들어간다 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표현을 쓸 정도로 다윗시대 또 다윗과 관련된 모든 것은 이상과 구원의 표지가 되게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윗의 인간적인 부족함 또 한 인간으로 저질를 수 있는 죄악상이 솔직하게 숨기지않고 그대로 표현이된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하느님께 응답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요약해 논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부분은 우리가 모세오경이 하느님백성의 형성사라고 한다면 다윗 역사서는 하느님백성의 성장과정 이라고 표현을 할수있을 것이다.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하느님 백성으로 형성된 유대인들이 이제 하느님 은총안에서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가?
그 성장과정을 설명하고있는 것이 전기예언서 역사서 부분으로 말할 수 있다. 바빌론 유배 생활중에 쓰여지고 유배가 끝난 다음에 자신들의 과거역사를 반성하면서 쓰여지는 책이 성문서라고 하는 것이다. 성문서가 바로 이 유배생활과 관련된 성서들이다. 그리고 다윗시대와 유배시대를 통털어서 많은 예언서들이 작성이된다. 예언서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민족이 많은 민족적으로 우여곡절을 격고 있었을 그 당시에 남과 북에서 쓰여졌었던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모아논 것이다.
세 가지 뼈대로 구분을해서 살펴보면 예언서라고 하는 것은 이상적인 상황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이스라엘민족이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상황까지 전체를 총막라하는 그런 서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성문서들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작성이 되는가? 모세오경이 계시와 소명이고 역사서가 이상과 구원이라고 한다면 성문서는 유배생할 그 자체가 상징하듯이 시련과 시련을 통해서 다시 하느님과의 충실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회개라고 하는 두 가지의 주제로 작성이 되는 것이 그 시련을 통해서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었는가? 그 회개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성문서들이다.
그래서 이 시련과 회개라고 하는 두 가지 주제를 지닌 이 성문서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느님백성의 쇄신과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느님백서을 다시 재편하는 정화하는 그런의미로 이해를 하면된다. 구약성서라고 하는것이 무엇이냐? 한 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다윗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인간을 중심으로 어떻게 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만들어졌고 그 백성이 어떤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면서 차후에는 다시금 하느님 마음에드는 새로운 백성으로 정화되는가? 쇄신되는가? 하는 전 과정을 요약해논 것으로 이해를 하면된다.
그리고 각 권마다 이러한 주재들을 가지고 크게 묵상을할 수있으면 좋을것같다. 이러한 구분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구분속에서 느낄 수 있는 하느님상이 어떤가? 모세오경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상과 또 역사서나 전기예언서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상, 그리고 성문서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상이 어떤가? 이것은 우리가 또다시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된다. 모세오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하느님상은 어떤가?
출애굽사건이 기반이기 때문에 여기서 느끼는 하느님상은 해방과 자유의 하느님상이다. 억눌린자를 풀어주는, 같힌자를 풀어주는,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의 기쁜소식을 알려주는 그런 하느님상을 우리는 출애굽 사건에서 발견을 한다. 약자편을 드시는 당신의 능력으로 약자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런 하느님상을 우리가 발견을 한다. 다윗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서 부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느님상은 철저하게 인간과 하신 약속에 대해서는 실천을 하시는 약속과 희망의 하느님상을 발견을 한다. 구원의 상징으로 다윗과 다윗의 왕가가 그려지기 때문에 하느님께 성실하게 응답한 인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게되는 것인가?
하느님께서 신실한 인간에게 어떻게 반응을 하시는가? 그것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 다윗이야기이기 때문에 약속과 희망의 하느님을 우리는 역사서에서 발견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배생활을 중심으로 해서 펼쳐지는 성문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느님상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래서 현대적인 용어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상을 비로소 발견을 하게된다. 유배생활로부터 회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끌어들이시는, 다시 당신 품안으로 끌어 모으시는 자비, 그리고 사랑의 하느님상을 발견을 한다. 구약성서를 읽을 때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있는 하느님상을 가지고 읽으면 엄청나게 잘못된 해석이된다.
신약에서 알고 있는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느님상인데 구약성서를 보니까 도데체 하느님이라는 분은 사랑이 없더라. 이스라엘에 대적되고 이스라엘을 침범하는 이방인들을 하느님이 징벌로써 가서 쳐부숴버리고 또 계약의 궤를 나르는데 사제계급이 아닌 사람들이 그것을 조금 만졌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즉사를 시켜버리고 이것이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이신가?
이런 질문들을 하는데 성서에서 드러나는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 새대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시대적인 흐름이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모세오경을 보면서, 여기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발견할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세오경을 편집한 사람은 사랑의 하느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것을 편집하는 것이 아니고 해방과 자유라는데 맞춰서 하느님을 펴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해방과 자유를 표현하는 그 책 속에서 사랑과 자비를 발견할려고 하니까 발견이 안된다. 전혀 엉뚱한 곳에 가서 엉뚱한 것을 찾지 말아야 된다.
이것을 잊지말고 새겨두어야 구약성서가 제대로 이해가 된다. 모세오경을 보고 이 부분을 보면 하느님은 대단히 냉철하신 분이다. 당신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위배되는 사항이 있으면 가차없이 처벌을 하시는 분이다. 징벌을 하시고, 벌을 주시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천벌을 내리신다. 그러한 모습이 왜 그 당시에는 통용이 되었는가? 결국은 하느님은 약자편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느꼈던 하느님상이 그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사랑의 하느님을 발견할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정말 사랑의 하느님의 모습은 구약성서 보다는 신약성서에서 발견이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하느님이 사랑이심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다(돼지 꼬리 붙들고 순대 달라는식, 급하다). 인간의 깨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인데 이 단계 없이 처음부터 무작정 사랑의 하느님! 하고 나가면 문제가 된다.
우리가 신아을 깨우쳐 나가는 것도 항상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받고난 다음에 1년, 2년, 3년이라고 하는 기간을 왜 필요로 하는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례받는 순간에 완전히 하느님의 자녀로 탈바꿈 되는가? 그것은 아니다. 성사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선언이 되었다는 것이지 세례, 그 자체가 그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완전히 변화시켜 버리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개인이 앞으로 노력해야 될 부분이다. 출발점에 섰다는 것이지 결승점에 섰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앙생활, 제길을 걷느냐? 아니면 발바닥 신자만 되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다. 어떻게 내가 이 깨우침의 과정을 밞아나가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처음부터 무엇인가 완벽하게 되서 시작되는 것은 우리 인간세상에도 없고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 측면에서도 불합리한 요구사항이 될 수있다. 그래서 꾸준하게 성서공부를 해야한다.
성서안에서 성령의 감도하심에 의해서 쓰여진 성서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발전과정을 밟는 것인데 이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천년 동안의 발전과정을 밟은것인데 자기 자신의 그 조그만 몇십년의 인생에서 무엇인가 갑작스런 변화를 노린다고 하는 그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물론 특별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하루 저녁에 헤가닥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건 특별한 경우이다.
성서를 보면 바울로 사도가 오전까지만 해도 살기등등해서 때려 죽인다고 하고 가다가 갑자기 한 순간에 바뀌어 버린다. 그것은 하느님의 특은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를 일반화 시키지는 말아야한다. 특별한 경우는 특별한 경우로 놓아두어야지 특별한 것이 나에게 오지 않을까? 신앙생활에서 무언가 나에게 특별한 체험, 무언가 나는 특별해야 된다는 병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상적인 일상적인 어떤 교회의 활동, 자기자신의 건전하고 신실한 그런 신앙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할려고 해야지 어떤 특별한 행위를 통해서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맛을 드릴려고 하는 것은 정말 자기자신이 극한 밑바닥을 걷고 있을 때는 어느정도 힘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될 수있을지는 몰라도 자칫 잘못했다가는 자기 자신이 노리는 그 꾀에 자기 스스로 빠지는 수가있다.
특별한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말고 일상적인 삶안에서 전진적으로 차츰차츰 밟아 나가는것에 매력을 느끼면 좋겠다. 무엇인가 차츰차츰 발전해나가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 나가는 그런 과정을 염두에 두어야 된다. 그것을 성서공부를 하면서 간접적으로 배우면 좋을 것이다.
구약성서를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다. 또 한 시대에 1년, 혹은 2년에 걸쳐서 작서이 된것도 아니다. 수 백년 또 어림잡아서는 몇 천년에 이르면서까지 전승이 되어왔던 것을 종합한 서적이라고 봤을 때, 이 구약성서에는 자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성서를 지었다, 구약성서의 저자다, 이런 표현을 쓰지않고 편집자다. 라는 표현을 쓴다. 구약성서의 편집, 단계, 그리고 전승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정리를 해본다.
구약성서를 이루는 사료들은 무엇인가? 구약성서에 관련된 사료들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정이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인되고 있는 내용만을 간략하게 정리를 한다면 대략 네가지로 구믄을 할 수가 있다.
1. 야 훼 계(J) :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른다.
2. 엘로힘계(E) : 하느님을 엘로힘이라 부른다.
3. 신명기계(D) : 법에 관련된 문헌
4. 제 관 계(P) :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들과 관련된 문헌이다.
1 야훼계 문헌 -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르는 야훼계문헌을 제일먼저 작성된 문헌이라고 추정이되는데 솔로몬 이후에 남쪽으로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 이렇게 구분이 되었을 때 남쪽 유다왕국에서 작성이 되었다. 누가 작성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남쪽 유다왕국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작성이되었다.
작성이된 이유는 다윗 왕권에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윗의 편에서 작성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다윗이라고 하는 왕을 가장 이상적으로 묘사 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서 가장 이상적으로 응답한 인간으로써 다윗 왕을 돋보이게 하기위해서 야훼계문헌이 작성이된다.
2. 엘로힘계 문헌 -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작성이된다. 북쪽 이스라엘에 살고있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작성이 되게 되는데 북쪽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자기네 자신들의 정신적인 고향이고 종교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남쪽 유다왕국에게 빼앗겨버린 그런 입장이었었기 때문에에 남쪽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 열망, 그것은 대단했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차선책으로 여러 가지 상징물들을 만들어서 그 상징물들을 통해서 야훼 하느님께 대한 여러 가지 숭배행위를 하게된다. 또 실질적으로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은 우리 인간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는 제삼자를 동원을 한다. 혹은 제 삼의 어떤 사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라고 하는 사상이 싹트게 되는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모든 것이 하느님과 직접적인 일대 일로 대하한다.
하느님이 직접 만나서 직접 이야기 하고 하느님이 필요로하면 인간에게 직접 다가 오셔서 말을 건네고 이런 식이였었는데 이제 남쪽 북쪽으로 갈라지고 하느님을 직집 볼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빼앗겨버린 입장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까 이제 하느님과 간접적인 통로가 만들어지게 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야훼계문헌은 바로 그러한 입장을 대변을 하는 그러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특별히 내용을 보면 꿈이다든지 천사들과 관련된 내용은 어김없이 야훼계문헌이다. 구약성서에서 천사가 등장을 한다든가 꿈속에서 누구를 만난다던가 그런 내용들은 거의 야훼계문헌들이다.
3. 신명기계 문헌 - 나중에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생활을 거치고 난 다음에 이제 자기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깊은 반성과 회개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 깊은 반성과 회개의 하나의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 출애굽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출애굽 정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제 지금이라도 정신차리고 출애굽 정신으로 돌아가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십계명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충실해야만이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이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의 정신을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조하기 위해서이 신명기계문헌이 작성이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소 요시아라는 왕이 종교 쇄신운동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정신적 토대가 된다.
4. 제관계 문헌 - 사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예식, 제사행위, 또 사제들의 삶에 대해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 제관계문헌 이라고 볼 수 있다. 제관계문헌이 가장 집중적으로 작성이 되어 있는 것이 레위기다. 이렇게 구약성서는 네 가지의 문헌들이 짜집기 되어있는 책이다 라고 이해를 하면된다.
우리들 입장에서는 구약성서가 네 개의 문헌들로 되어있다는데 우리가 읽는 성서중에서 네 개의 문헌들을 하나하나 구분을 해보면 더 좋지않을까?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는것보다 전체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훨씬 더 이롭지 그것은 학자들이 하는 일이고 실질적으로 보고싶으면 구약성서의 각 구절 구절들을 문헌별로 ㅂ루분해논 안내서가 있다(분도출판사, 모세오경의 후반부를 보면 구분이 되어있다).
6. 모세오경의 이해
명칭은 우리가 모세오경을 이렇게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는데 학자들에 따라서 모세오경이 아니고 4경이다 또는 6경이다 9경이다 이렇게까지도 표현을 한다. 4경은 신명기를 뺀다. 신명기는 역사서적인 측면이 강하다. 6경은 여호수아서를 첨부를 시킨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을 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책이기 때문에 이것 역시도 하느님 백성이 형성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를 포함해서 6경, 9경은 전기예언서, 역사서까지 모두 포함을 시켜서 9경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또 가톨릭 교회가 나름대로 인정하는 부분은 모세오경 이라는 표현이고, 실질적으로 다섯권 이라고 하는 책을 모세오경(율법서)으로 간주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세오경 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내용을 정리를 해본다.
구성과 내용 : 구약성서의 기본적인 토대를 말할 때 모세오경은 출애굽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하느님백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그 형성사를 다루는 내용이다.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출애굽사건 이라고 하는 것이 자리를 잡는다. 가장 중심적인 사건이다. 이 중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앞 뒤로 펼쳐내는 것이 모세오경이다. 출애굽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등장되는 것이 하느님백성의 기원이다.
하느님백성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그 기원을 보통 우리가 성조사라고 한다. 물론 그기원사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서 하느님이 최초로 당신의 백성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성조들의 이야기,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이사악, 약곱, 열 두 아들들, 그리고 모세에 이르러서 출애굽사건이 일어났다. 이렇게 표현을 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하느님백성의 기원, 성조사를 다루기에 앞서서 모세오경의 맨 첫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세상과 인간의 기원이다(태고사).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인간의 삶이 인간이라고 하는 생명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전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열어보이시는 과정이 이 단계를 밞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인간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끌어 모으신다. 그리고 그 끌어 모은 백성이 노예생활에 빠져있을 때 다시 출애굽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당신의 백성으로 삼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출애굽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는 하느님백성의 형성과정을 정리를 하게된다.
대표적인 것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던지 또 광야생할을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서 벌어졌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 이것이 하느님백성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모세오경의 마지막 단계에 가면 이렇게 형성한 하느님백성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가? 하느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되는가? 그것을 법률이라고 하는 형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정리를 해준다. 하느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해야되는가? 하느님께서 당신자신을 열어보이시는 사건을 전제로 하고, 여기서는 인간의 적극적인 응답이 이루어짐으로 해서 한편에서는 구원역사가 펼쳐지는 이 과정이 모세오경이라고 볼 수 있다.
㉮ 성조사를 전하는 부분이 창세기.
㉯ 출애굽사건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백성으로써 어떻게 다듬어지는가? 그것을 다루는 부분이 출애굽기.
㉰하느님과 인간의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되는가?그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 신명기.
㉱ 그리고 이 전반적인 과정속에서 사제들이 지켜야할 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적인 규모, 공동체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 레위기와 민수기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모세오경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될 수있다. 우리가 오늘날 저술하는 책으로 본다면 창세기는 서론에 해당이되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한 민족을 선택을 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뤄나가는 서론이라고 본다면, 신명기는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모세오경을 한 권의 책으로 봤을 때 서론과 결론은 창세기와 신명기를 예로들 수 있겠고 그 서론과 결론안에 담겨져있는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출애굽사건이다. 이렇게 모세오경의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7. 모세오경의 신학
이러한 모세오경의 구성과 내용을 전제로 했을 때, 모세오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봤으니까 이러한 모세오경을 읽으면서 우리자신이 신앙안에서 체험해야 될 주제들이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가 간단한 용어로 신학이라고 표현을 해본다.
신학이라고 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성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신앙안에서 무엇인가 상징적인 느낌을 갖어야 되는데 그 상징적인 느낌을 정리해 놓은것, 어떤 묵상과 깨우침의 길을 제시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이해를 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이 모세오경의 신학이 무엇인가? 신학이라고 하는 표현이 너무 무겁다면 그냥 모세오경의 주제가 무엇인가? 이렇게 이해를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모세오경의 신학을 네 가지로 정리를 해볼 수 있다.
① 창조 - 우리 삶의 모든 시작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모든일, 나 자신을 포함을 하는 것이고 또 나자신이 살고 있는 이 삶의 조건이라고 하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도 다른 어떤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는 창조신학, 창조라고 하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 모세오경이다. 성서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학적인 진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고 신앙안에서 본인이 체함하고 느끼는 바로 고백이라는 행위이기 때문에 구약의 백성들이 야훼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맨 처음 그분의 대한 느낌, 체험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바로 창조였다.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는 신앙의 내용을 창세기에서 창조설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준다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이 창조라고 하는 주제, 이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인간의 삶의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다. 삶의조건은 평화이다. 평화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할수없고 할 것이 이니고 반드시 평화이어야만된다.
그것이 창세기에서 들어나는 하나의 신학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처음부터 주시고자 했고 실질적으로 주신 삶의 조건이 평화이다. 이 평화가 깨어진 것은 인간 스스로 깼다. 우리가 오늘날에 와서도 자꾸 평화를 이루어야된다. 민족통일을 위해서 평화와 일치를 이루어야 된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여러 가지 기도문들 중에도 등장하는 것이지만 이 평화라고 하는 것이 선진국 사람들만 혹은 잘 사는 사람들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고 이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인간들, 심지어는 오늘날에 와서는 동물과 식물들도 누려야 될 진정한 평화이다. 과거 교회의 부족한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 창조신학을 잘못 해석을 해서 인간의주로만 해석을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너 이세상 모든 것을 다스려라 했을 때 그 다스림을 인간 평화를 위해서 모든 동물, 식물들을 지배하고 희생하는 것으로 해석을했다. 인간 중심으로 해석을했다. 어느 철학자가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되고 자연, 동물, 식물들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했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 해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제시가 되면서 이 평화라고 하는 것이 인간들만을 위한 평화가 결코아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해주신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은 평화를 누려야만된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바로 환경문제라고 볼 수 있다. 생명운동, 환경운동에 그 신학적인 뿌리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아야만 된다. 왜 신앙인들이 환경문제 신앙운동에 앞장서야만 되는가? 여기에서 신학적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평화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느님안에 평화를 누려야만 되는것이고 그것을 신앙적인 내용으로 고백해놓은 것이 창세기에 들어있는 창조설화이다. 그 다스리라는 표현을 인간위주에 편협한 방식으로 해석을 한다면 무모한 해석이 될 수있겠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 교회역사에 있어서도 많은 오류를 범했다라고 생각을 한다.
과거 중세기 교회때 식민지 정책의 교회가 협조를 하고 심시어는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었던 것도 사실은 이 창조에 대한 신학을 잘못 해석함으로 이해서 벌어진 교회의 부끄러움이라고 솔직하게 고백을 해야 될 것이고 그래서 최근에 교황청에서도 교회 과거의 잘못된 행위들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 하는 그런 내용도 있었다. 이 창조신학을 우리가 좀더 제대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② 선택 - 창조신학과도 깊은 연결을 짓는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자연, 동물, 식물에게 주시고자 했던 평화가 인간에 의해서 깨어짐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의 조건이리고 하는 것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도 역시 하느 인간의 선택이 있었다. 아담과 에와라고 하는 한 인간들의 선택에 의해서 평화가 깨졌고 이 선택이라고 하는 주제는 계속해ㅏ서 실질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라고 하는 성조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결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자기자신이 하느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자유의지를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 선택에는 반듯이 신앙이 전제된다. 내가 신앙을 갖고있느냐? 신앙생활을 하느냐? 하지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선택하는데 많은 영향을 준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는 하느님 이라고 하는 분을 모르고,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선택의 폭은 굉장히 높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았기 때문에 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우리의 선택을 제약을 받는다. 그 제약을 기쁜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제약을 제약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선택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인일 것이고 그렇지 않고 마지못해서 하라니까 한다. 자기 스스로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고 마지못해서 따라만가는 강요된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사실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이 바리사이파적인 사고방식이다. 겉으로는 따르지만 속은 따르지 않는 것, 그런 의미에서 선택이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는 모세오경에서 아브라함이 신앙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리고 자기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서 한 인간으로서 한 신앙인으로서 순간 순간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을 하면서 살아가는가? 그것을 우리가 발견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 의미의 선택을 우리가 상상할 수있을 것이다.
③ 계약 - 가장 대표적인 계약은 십계명(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직접받았다)이다. 하느님 백성으로써 걸어가야 할 길(성실성), 하느님 백성으로써 성실하게 하느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 해 주는 주제가 바로 이 계약이다. 그래서 이 계약은 성서에 보면 희망으로 표현이된다. 계약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모세오경에 보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을 한다. 거기에 계약문이라고 볼수 있는 것이 십계명인데 그 십계명이라고 하는 목표는 결국은 너희들이 하느님께 희망을 갖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성실하게 살으라는 말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살아야만이 내가 이것을 해주고, 너희들이 이렇게 살지 않으면 벌 주겠다 라는 차원이 아니고 그것은 표현방식일 뿐이다. 계약이라고 하는 형태로 표현을 하다보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지 실지 하느님이 인간하고 장사를 할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하고 장사를 할려고 하지, 하느님은 장사를 하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하고 계산을 하지않는다.
하느님이 계산에 밝으신분 이라고 한다면 십자가상에 못을 박히고 죽임을 당하면서 까지도 이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없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해석하고 계약부분을 구약성서에서 볼 때에는 장사속으로 보지말아야 된다. 단지 표현방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를 가져라, 희망을 가져라, 그래서 전적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지닌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그 점을 깨우쳐주면 좋을 것이다.
④ 율법 - 이러한 창조, 선택, 계약이라고 하는 주제가 종합적으로 명문화 되는 것이 실은 율법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행위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되는가? 인간다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예 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덕목으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약에 보면 예수께서 율법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써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행위를 제시를 하는 것인데 결국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들어내시고자 하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간략하게 율법은 사랑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율법에 대한 구체적인내용은 모세오경에 보면 세 가지로 나온다. 법전이 세 개가 나온다.
㉠ 계약의 법전 - 탈출기(출애) 20장 22절 - 23장 19절
㉡ 신명기 법전 - 신명기 12장 - 26장(묵상자료로서 읽어보면 좋다)
㉢ 성 법전(거룩한 법전) - 레위기 17장 - 26장
이러한 모세오경의 전반적인 내용을 전제로 해서 마지막으로 정리를해 볼수 있겠는데 구약성서를 신약의 조명화에서 해석을하고 이해를 해야된다 라고 하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볼수 있겠다.
구약성서와 그리스도의 신원이다. 구약성서의 전반적인 내용과 우리가 신약에서 중심적인 인물, 또 현재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 연관을 지어보자. 구약의 모든 계시가 완성이 된 것이고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인물로 그리스도를 성서에서 가르치고 있다면 도대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그것을 발견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구약성서의 연관성이다. 어떤 의미로써 그리스도를 구약의 완성이다. 계시의 완성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다. 나는 000다. 000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표현할 때 우리가 가장 신약성서에서 상징적으로 볼 수 있는 단어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이다.
다른(메시아, 사람의아들, 어린양, 임마누엘, 임마누엘, 세상의빛, 목자, 하느님의 아들,부활, 빵) 내용은 구약의 예언되었던 표현들, 또 초창기 그리스도 신자들이 부활사건을 체험한 이후에 자기자신들이 소급해서 아! 예수님은 이런 분 이셨구나 라고 느낀점들이다. 이것은 예수의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초창기에 부활사건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예수께 대해서 드린 반응들이다.
실질적으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 군중들에게 자신을 표현했을 때 가장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표현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이다. 도대체 당신자신이 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라는 표현을 쓰셨느냐?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구약성서와 연결을 지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요한 복음 14장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 - 내가 걸어가는 것을 전제로한다.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당신 자신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되겠다 라는 말씀이다. 구약성서에 인간들이 걸어가야 될 길을 제시한 것은 율법서이다. 그러면 나야말로 너희들이 따라야 될 진리이다. 예언서이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내가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성문서(지혜문학)이다.
율법서에 중점적으로 담겨져 있는 것이 계명이다. 인간이 걸어가야 될 길이 계명이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신자들이 올바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계명이다. 계명을 지켜야 된다 하는 것은 너희들이 이 길을 걸어야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예언 -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부분, 하느님의 말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생명은 사는 것 이기 때문에 사는 모습을 통해서 계속해서 후손들에게 전달해준다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것은 삶의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살아 나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삶의 지혜다. 계명과 말씀과 지혜가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안에 온전히 담겨져 있는 것이 구약성서이다. 이것이 구약성서의 전 내용이라고 불 수 있는데 이 전 내용이 예수안에서 완성이 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표현 자체가 구약의 모든 내용,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서를 통해서 들려주고자 하는 이 전 내용이 완성되었다. ‘나는 길이다’ 하는 표현은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사랑이다. ‘너희들이 앞으로 사랑의 길을 걸어가라’ 이 사랑속에는 율법이 완성되어 있다.
과거에는 율법이라고 그랬지만 이제 너희들에게 새로운 율법(계명)을 주겠다. 이 새로운 계명이 사랑이다. 이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 모범을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주겠다. 말로만 하면 안되니까 내가 직접 보여주마, 그리고 당신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너희들이 걸어가야 될 길이 이것이다. 그 다음에 너희들이 따라야 될 진리는 너희들이 고백하는 믿음에 있다. 너희들이 일상 생활안에 고백하는 그 믿음안에 진정으로 너희들이 따라야 할 진리가 있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누리고자 하는 생명은 현세의 생명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다. 그 영원한 생명에 너희들은 보증을 갖고 살아라, 내가 너희들에게 분명하게 보증이 되겠다. 그래서 사랑과 믿음속에서 희망(보증)으로 보여준 것이 부활이다.
당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언과 동시에 우리 인간들에게 이 세가지의 덕목을 요구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친히 십자가와 부할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을 해주신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전 과정이 완성되었다. 성취되었다. 계시가 완성이 되었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며으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이 삶,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를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갖고, 또 그 삶의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자신의 기본적인 조건은 영원한 생명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신, 망, 애, 삼덕이라는 것을 교회가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도 여기에있다. 그 점을 구약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정리하는데 활용을 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의미도 좀 더 올바르게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한다.
8. 창 세 기
1) 창세기 구조와 내용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별을 한다.
① 태고사(원역사) : 1장 - 11장 ② 성 조 사 : 12장 - 50장
① 태고사 - 인간의 역사,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조건을 만들어주는 과정이다.
태동과 관련된 이야기다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세상창조이고, 세상창조의 마무리 완성의 단계로서 인간 창조이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이 되고 있다. 이렇게 선한 상태에서 인간을 창조해 주셨고, 세상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에와 혹은 카인과 아벨로 대표되는 인간들은 하느님께 불순종을 했다. 하느님의 뜻에 반역을 했다 해서 불순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세상에 만연되고 있는 죄악을 신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성서 편집자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불순종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불순종의 결화로서 나타나는 이야기가 대홍수 사건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노아의 방주 사건을 이야기하고, 대ㅣ홍수를 통해서 하느님이 이세상의 모든 죄악들, 모든 것을 싹 쓸어버리고 그 다음에 다시 인간들로 하여금 기회를 주었지만 인간들은 또 다시 불순종의 ‘죄’인 바벨탑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진노로 이제는 싹쓸이가 되는 것이 아니가 인간사회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 1장에서 11장에 걸쳐서 나오는 태고사의 전반적인 내용이라고 불 수 있다. 한 아기로 친다면, 한 아기가 태어나는 그 과정을 본다면 세상창조와 인간창조, 그리고 인간의 불순종, 거기에 따르는 하느님의 징벌, 또 다시 불순종이 이루어지면서 마지막 결과로서 분열이 일어나는 이 전반적인 과정, 하느님과 인간이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이 역사를 우리가 태고사(1장-11장)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세상과 인류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② 성조사 -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부터 시작이된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인간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이 아브라함과 이어서 이사악이 나오고, 이사악에 이어서 야곱이 등장을한다. 이스라엘이 역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성조들이다. 그리고 이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활을 하는 인물로 요셉이 등장을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로 가게된 경위를 여기서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도 하나의 태동으로 본다면 전체적인 토대안에서 뼈대를 잡아놓고, 이 뼈대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삽입을 시켜서 우리가 좀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태고사가 전반적인 세상과 전 인류의 기원이라고 본다면 이 성조사는 이스라엘의 기원을 설명을 하고있는 것이다. 떠돌아 다녔던 히브리 민족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이스라엘(하느님이 싸우신다)을 하느님의 전사로 만들어주신 과정,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12장 - 50장까지 이르는 성조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와 내용을 지닌 창세기가 어떠한 배경을 갖고있는가? 창세기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의 역사적 배경 -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그 비옥한 지역에서 살고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이 되게되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지역에서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고 하란으로 이동을 한 다음에 가나안으로 가서 정착하는 이 과정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곳에서 떠나게 된 것은 어떤 정치적 망명을 한 것도 아니고 또 경제적으로 더 좋은땅을 찾아 나간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때 당시만 하더라도 정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자신이 족장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우두머리가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던 그 우르라고 하는 지역이 그 중동 지역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다른데로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서는 아브라함이 그 비옥한 땅인 우르, 또 자기 자신의 권력과 재력, 족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그 지역을 떠나서 알 수 없는 가나안 땅으로 갔다.
이 수수께끼를 하느님의 부르심, 하느님의 소명으로 해석을 한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소명을 받고 하란으로 떠나는데 실지 측량을 해보면 우르에서 하란까지가 1,100 km이고 하란에서부터 가나안에 이르는 이지역이 800 km 라고 한다. 거의 2,000 km를 자기 식솔들을 거느리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모험을 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야훼 하느님께서 자기자신을 부르셨다. 그래서 가나안 이야말로 자기가살 곳 이고 바로 그 곳 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신 땅이다라고 하는 그 신앙 하나로 자기의 식솔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의 전반적인 내용이고, 이런 고생고생 하던 끝에 결국 가나안에 도착을해서 아브라함이 정착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창세기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역사의 무대로 이해를 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 태고사라고 일컬었던 원역사에 대해서 정리를 해본다
① 태고사(원역사)
㉠ 우주관(세계상) - 자연과학적 지식과 성서의 지식의 구별을 말하는 것이다.
㉡ 구원관 -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관과 창세기에서 생각하는 구원관은 어떤가? 창세기의 구원관은 대략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창조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하느님의 은총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이 선물에 대해서 인간이 범죄행위를 저지른다. 선물을 관리를 못한다. 오히려 선물을 준 하느님께 대든다. 범죄 행위를 저지른다. 범죄행위를 저지르니까 당연히 하느님은 거기에서 발끈하신다. 하느님이 개입하신다. 이 개입하는 방식이 벌로 나타난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낸다. 그 때 서야 인간이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을려고 하는 노력을 하게 되고 그 인간이 본래의 모습, 은총의 상태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이 노력을 창세기에서는 구원관 이라고 가르친다. 이 것이 창세기의 구원관이다.
범죄 행위를 보면 뱀이 나오고, 생명나무가 나오고, 여러 가지 설화적인 요소들이 등장을 하게된다. 바벨탑도 나오게되고, 그러니까 ‘범죄’ 인간이 타락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런 내용을 기초로 해서 오늘날의 교회는 원죄를 가르친다. 아담과 에와가 하느님께 불순종 함으로 인해서 쫒겨나게 되는 그 과정, 그 죄악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오늘날 원죄로 자리를 잡고 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갖고 태어나고, 원죄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사해진다.라고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아담과 에와가 최초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다. 아담과 에와의 죄는 피조물로서의 자기자신을 망각한 죄다.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이것을 따 먹으면 하느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된다. 더군다나 선 과 악을 알게된다. 눈이 밝아지고, 지혜가 생기고, 그러므로 해서 하느님이 된다.
피조물로서의 자기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유혹이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인간이면서도 주제파악 못하고 하느님으로서 행세할려고 하는 그 경향들을 모두갖고 있다. 제물을 모으려고 하는 것 도 자기가 주인행세 할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위에서 내려누르고 싶고 지배하고 싶다. 남보다도 월등해지고 싶다. 내가 저 사람을 종으로 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나아야 되겠다는 주인 의식이다. 명예 쌓을려고 하고, 출세할려고 하고, 자식을 좋은 대학 보낼려고 하는 부모님들 욕심이 왜 나오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꼭대기에 올라가야 되겠다는 말이다. 바벨탑 사건처럼 ---
자식의 인간됨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공부만 잘해서 좋은 대학에만 가면된다. 그러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원죄이다. 그 원죄가 세례성사 때에 없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을 내 주인으로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내가 주인이 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서야 진정으로 하느님을 내 주인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하는 고백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원죄는 없어진다. 그러나 세레성사를 받고도 자기가 하느님처럼 행세하려고 하고 자기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를 한다면 죄악을 계속해서 저지르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원죄가 사해지면, 없어지면 그 자체로서 그 사람은 구원이다. 그런 그 구원이 오래 못간다. 세례성사 받은 그 시간부터 죄를짓는다. 세례성사 전례 때는 얌전한데, 끝나고 밖에나가면 그 순간부터 죄를짓는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당장 나가서 성당 밖에 세워둔 주차문제 가지고 시끌벅적 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구원관, 특히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야 될 것이 하느님께서 내리실 벌이 무서워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실 그 어떤 징계가 무서워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위선적인 뉘우침을 하는 것은 안된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에와의 이야기를 어떤 동화적인 차원, 또 거기에 나오는 단어를 단어 그 자체로 해석할려고 하지말고, 여기에는 창세기의 편집자가 우리에게 밝혀주고자 하는 이 구원관이 담겨져 있는 아주 상징적이고 치밀한 이야기이다. 그냥 대충 써 넣은 이야기가 아니다.
진정한 구원관이 무엇이냐? 인간의 죄는 무엇이며 하느님의 신성을 거스림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될 존재가 된다라고하는 그 의미가 무엇이냐?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에와이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는 엄청난 신학적 내용이 담겨져있다. 성서를 우리 자신들이 좀 더 깊게 묵상을 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다보면 이러한 도식이 보인다. 여기서 정말 우리가 신앙인으로 처신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죄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좀더 깊게 묵상 할 수 있어야한다.
㉢ 인간관
㉮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하느님의 품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해서 인간의 품위가 하느님의 품위로 끌어 올려진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다. 실질적으로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품위, 하느님의 모상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창세기에서 내가 모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겠다 하셨다. 모상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것은 창조설화는 설화자가 무엇인가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꾸며주는 이야기다 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무엇인가 반듯이 자기 나름대로 의도가 있다. 단어 하나 하나에도 분명히 의도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 했을 때 인간을 만드는 시점이 모든 세상을 다 만들어 놓은 다음에, 이제 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어야 되겠다 라고 하셨다. 하느님이 하신일이 창조사업 이었다. 창조사업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하느님이 일을 하셨다. 6일 동안 일을 하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는 쉬셨다. 하느님이 일하고 쉬신 것을 왜 창세기저자가 썼을까?
왜 유태인들이 그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가? 왜 십계명 속에도 안식일이 나오는가? 안식일 만큼은 일을 하지않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일한다는 것을 유태인들은 엄청나게 중요시 여겼다. 바꿔서 표현하면 일을 하시는, 노동을 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맨처음 인간이 체험하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품위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 했을 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품위는 노동하는 데서 들어난다.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한다, 창세기의 이야기가 없다면은 노동을 신성하다고 이야기 못한다. 왜 노동이 신성한가? 모두 하기 싫어하지, 누가 노동을 애써 사서 할려고 하는가? 부릴려고 하지 자기가 애써 일할려고는 안한다.
그런데 창세기의 정신은 그것이 아니다. 노동이야말로 신성하다. 왜 신성하냐? 하느님도 세상창조를 위해서 일을 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다하는 이야기는 일을 하는 존재다. 일을 할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살아나는 것이다. 일을 하지않으면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상실하는 것이다. 바울로 사도도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라’ 왜냐하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을 천박하게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왜 노동자들의 권리를 세워야 하는가? 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는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들만의 어떤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될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것이 우리 인간됨에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모상이다.
㉯ 보완적 존재
인간은 보완적 존재이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왔다. 그것이 여자는 남자의 시종이고 남자의 뒷바라지나 하는 이런 의미가 아니다. 성서에보면 아담이 혼자있는 것이 좋지 않더라, 혼자있는 것이 선이아니다. 미완성이다.
그래서 그 미완성인 상태를 좋은 상태로 만들어주기 위한 거둘 짝으로 여자를 당신자신이 친히 만들어 주신다. 남자가 갈비뼈 뽑아서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여자 역시도 하느님이 친히 만들어주신다. 미완성 상태인 남자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 주셨다.
결국은 남녀는 보완적 존재이다. 어느 한 편이 일방적으로 한 편만을 위해서 위해서 희생해야 될 존재가 아니고 서로의 완성을 위한 존재들이다. 남자는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을 위해서 여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여자는 자기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완성을 위해서 남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하등하다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똑같이 보완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남녀의 창조 이야기이다.
이것을 너무 잘못 해석을 한결과 우리 자신들도 신앙인들이면서도 많은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경우들이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관, 인간을 어떻게 이해를 하고 또 성서에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창세기에 이 두 가지 사항을 꼭 잊지말고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또 창조설화에서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중심적인 해석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야될 자연, 인간과 자연이라고 하는 두 측으로 이 창조설화를 해석할려고 하는 많은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② 성조사의 이해 (12-50)
연대적 대표성이라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다루는 부분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많은 이스라엘 성조들이 등장을한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이사악, 야곱, 그리고 마지막에는 믿음의 가장 출중한 인간으로서 요셉이 등장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앙적인 도식이 나오는데 창조설화에서 구원관의 네 가지 단계가 나왔던 것처럼 이 성조사에서도 우리가 걸치는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의 도식을 우리가 나름대로 잡아 볼 수가 있다. 그거을 간략하게 정리를 하면 먼저 신앙은 계시에서부터 시작을 한다. 하느님이 당신자신을 열어 보이신다.
열어보이시는 과정이 우선은 부르심이고, 부르심을 일컬어서 우리가 성소라고 한다. 그 부르심과 동시에 인간에게 약속을 해주신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땅을 주겠다. 그리고 무수한 자녀들을 주겠다. 성소와 부르심과 더불어서 약속을 주시는 하느님의 계시가있다. 그 계시에 대해서 인간이 응답을 하는(여기서 믿음이라는게 나온다), 그리고 그 응답을 했기 때문에 응답에 해답되는 실천행위가 나온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떠난다.
실천행위, ‘예, 알았습니다. 따르겠습니다.’ 하고 실천행위가 나오고, “네 아들 이사악을 바쳐라” 하니까 ‘예 알았습니다. 하고 이사악을 바칠려고 하는 응답과 실천이 따른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과 실천이 이루어졌을 때 구원이 성취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성조사에서 살펴 볼 수 있는 신앙도식이다.
우리 생활과 견주어서 본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의 계시를 신앙안에서 받아들이면서 응답을 한다. 창세기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상은 어떤가? 창세기 전반적으로 봤을 때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하느님상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정리를 해본다면 역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창세기 자체가 태고사(원역사)와 성조사로 되어있기 때문에 두 가지 차원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상을 볼 수 있다.
㉠ 태고사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하느님상은 우선 창조의 하느님이다. 모든 것을 만들어주신 근원이다.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창조의 하느님.
㉡ 태고사 안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절대 타자로서의 하느님이다.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타인이다.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내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그런모습의 하느님상을 우리는 태고사에서 발견을 한다. 나는 피조물이지만 하느님은 창조자 라는 이야기다. 내가 창조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창조자이신 하느님은 결국은 나에게 있어서는 철학적인 용어로 절대타자 이다.
나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다. 나 하고는 비교를 할 수 없는 그런존재다. 주의기도 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하늘에 계신다. 내가 가까이 느끼기는 느껴야 되는데 도저히 가까이는 할 수 없는 완전 절대자의 타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에 계신 이지 실재로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는 하늘에 계시는 분인가? 그건 아니다. 우주인들이 가서 아무리 뒤져봐도 안계시더라.
㉢ 성조사에서 들어나는 하느님상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임마누엘).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결정적으로 잊지말아야 될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왜 이런 표현이 가능한가? 성조사를 보면 하느님이 집안에 제일 큰 어른같이 나온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두가 마치 경우에 따라서는 친구처럼, 또 어떤 경우에는 아버지처럼 그냥 하느님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하느님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대할 때 아주 쉽게 아주 가까운 모습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족장의 우두머리와 같은 그런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신다.
심지어는 아브라함이 이끄는 그 가족들을 지켜주는 신으로도 등장이되고 그 가족들의 수가 불어나면서 하나의 종족이 되었을테니까 그 종족, 유대인, 나중에는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종족이 되었지만 그 이스라엘의 편만을 들어주는 그런 하느님으로서 등장이 된다. 그것은 그만큼 하느님이라고 하는 존재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라고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성조들에게 있어서는 항상 일상 생활안에 머물어 있었던 하느님이다.
창조설화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어떤 절대 타자, 나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거꾸로 성조사에 있어서는 항상 하느님이 인간들의 조그만일들에 끊임없이 개입하시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그분은 관여하시는 그런분으로 등장이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분은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이 공동체 운동에 신앙적인 기반, 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바로 우리가 가져야 될 하느님상이 이것이라고 본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어디서 만난다고 생각하는가? 성당에 가야되고, 성당에서도 감실에나 계시고, 전례중에서나 하느님 체험하고 그 외에는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산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아! 하느님이 계실 것이다. 양심의 소리는 계속해서 들린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국은 자기 양심에다 딱 묶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져야될 하느님상, 하느님이라고 하는 분은 어떤 종교적인 예식행위, 어떤 건물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같혀 계실 분이 아니다.
내가 겪는 슬픔, 고통, 기쁨, 행복, 모든 것에서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의식을 가져야되고, 그런 하느님상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펼치는 공동체운동 이다. 멀리 계시는, 지식으로나 알 수 있고, 성서 공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그런 하느님상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그 분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말씀나누기 이고 공동체 운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상을 우리가 가져주면 좋을 것이다. 정말 그 분을 내 집안 가장으로, 가장 큰 어른으로, 어떤 때는 형님으로서 친구로서 이렇기 아주가깝게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가고자 하는 이런 신앙, 이것을 인격적 신앙이라고 한다. 이런 인격적 신앙을 우리가 갖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때 정말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참된 기쁨의 요소, 또 우리를 얽어매는 그런 신앙생활이 될 수있으리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성조사에서 등장하는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상을 묵상을 하면 좋을 것이다.
9. 출애굽기
구조 :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을 할 수가 있다.
① 출애굽 사건, 에집트를 탈출해서 나오는 직접적인 이야기(1-18).
② 출애굽사건을 마치고 난 다음에 출애굽에 의미를 되새기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그 의미라고 하는 것이 하느님과 인간의 계약이라고 하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는 법령집 혹은 법률집 이라고 표현을 한다(19-40).
1) 출애굽 사건은 빠스카 사건이다.
빠스카 - 건너가다, 건너 뛰었다, 지나갔다.
성서에는 홍해를 갈대바다,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고 일명 홍해다. 바다냐? 호수냐? 거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냥 일반적으로 홍해, 갈대바다, 이렇게들 표현을 한다. 에집트에서 강이 되었던 바다가 되었던 어느 한 지역을 넘어서서 또 다른 지역, 노예생활에서 자유인으로 건너간 사건이 출애굽 사건인데 이 출애굽사건에서 성서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름대로 힘을 비축을 하고 그들이 무슨 독립운동을 펼쳐서 건너간 것이 아니고 이 출애굽 사건은 온전히 하느님의 능력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능력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상시에 힘을 키웠고 정치적으로 어떤 타협을 해서 파라오하고 협상을 한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집트의 노예생활 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하는 것이 출애굽사건이다. 그래서 일종의 이것은 해방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 해방의 역사에서 선봉에 섰었던 인물, 또 하느님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표적으로 대변했었던 인물이 ‘모세’라고 하는 인물이다.
노예로서의 억압이 있었고 이제 비로소 하느님의 능력으로 출애굽을 함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뽑힘을 받은 백성으로서의 자유, 그리고 해방이 주어졌다는 것이 출애굽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계기,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이 빠스카 사건이다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 다음에 ‘법률집’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이 사건의 의미를 깨우치는 것이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이 사건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미 이사건으 의미를 잘 알지만 이들의 후손들은 차츰 차츰 역사가 흘러가면서 이 출애굽사건을 잊어버릴것이고 의미가 점점 퇴색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퇴색되는 의미를 매일매일 살아있는 것으로 남기기 위한 방법이 사실은 이 법령집이다.
그래서 이 법령집은 계속해서 출애굽사건을 기억하도록 유도를 시킨다. 그 방법이 십계명이고 또 ‘계약의 법전’ 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약의 당사자는 야훼 하느님이고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간의 계약이 맺어진다. 이 계약의 조문이 십계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킨다는 이야기는 출애굽을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셨던 하느님께 대한 신아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야훼 하느님 백성으로서 계속 남기위한 절대적 조건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미가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19장-40장까지 나오는 법령집의 내용이다. 출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1부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2부는 사건의 의미를 다루는 것이다.
2) 역사적인 배경
출애굽기가 시작되기 위한 하나의 배경으로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것이 창세기의 후반부이다.
① 창세기 43장 -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로 내려가서 살게 되었는가? 그리고 왜 거기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들이 요셉이라고 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감도적으로 서술이된다.
② 창세기 47장 -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의 능력으로 요셉의 어떤 꾀로 에집트에 내려가서 정착을 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커다란 화를 일으키는 요인이되고 에집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방인 취급이 되고 나중에는 이방인도 아니고 노예로 전락을 하게 되는, 그래서 자기 자신들이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외각도시에 방벽을 쌓는 노예로 전락을 시킨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여기서 등장이된다.
이것은 출애굽을 이해하기 위한 우리자신의 배경 공부라 될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의 직접적인 이야기는 출애 1, 8-10절을 보면 더 구체적으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가? 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할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가? 하는 직접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그것을 하나의 배경으로 삼으시고 출애굽기를 이해를 하면 될 것 같다.
3) 출애굽에 나오는 내용들
출애굽기에서는 출애굽사건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1 -18).
① 하느님의 이름이 성서에서 나오게 된다. 이 전까지는 하느님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간단하게 줄이면 족장들의 하느님, 이런 표현이고 조상들이 섬겨왔던 분,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비로소 이 출애굽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하느님께서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서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신다.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 (나는나다)’ 다. 사실 엄격하게 따진다면 이것은 이름이라고 볼수 없고 당신 자신의 상태(인간에게 비쳐지는, 인간에게 들어나는 당신 자신만의 모습을 이야기 하신다)만을 모세에게 가르쳐주셨다.
한 편으로 본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름을 설명해 주어도 너는 모른다. 더 이해를 하자면 내 이름을 알 필요없다.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말고 그냥 하는 말만 따라라, 하면서 곧바로 주어지는 것이 모세에게 주어지는 소명이다. 모세는,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간에 하느님의 이름을 알아볼려고 한다. 이름을 안다라고 했을 때는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것이고 이름을 지어주다 라고 했을때는 그 사람을 나의 소유로 여기는 것이다. 어느 한 대상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를 내 소유로 삼겠다는 것이다.
또 그에게 이름을 물어본다는 이야기는 그와 관계를 맺고싶다는 표현이다. 모세가 하느님께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는 하느님과 무언가 자기가 인격적인 관계, 대등한 관계가 되어 보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안 가르쳐준다. 이름과 관련지어서는 그 이후에도 성서에서 많이 등장을한다. 바울로도 사울 이었는데 부활한 그리스도를 체험한 이후로 바울로로 바뀌었다. 시몬-베드로 아브람-아브라함 이름들이 바뀌어나가는 계기는 하느님이 체험,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름이 바뀌었다.
실질적으로 이름이 그 체험을 통해서 바뀌었겠느냐?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사울-바울로 시몬-베드로 다 같은 말이다. 그 당시 언어의 혼란으로 히브리말과 희랍어로 해서 그렇지 같은 말이다. 우리도 지역에 따라서 부르는 호칭이 다른 것들이 있다. 지역마다 다른 명칭을 쓸수도 있고, 언어권에서 달리 표현을 할 수 도있다.
이름을 바꿨다. 이름을 개명했다 하는 것은 무언가 자신의 삶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이 되었다 라는 이야기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가르쳐 주셨다라는 것은 이제 비로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하나의 신호다. 하나의 출발이다.
비로소 하느님께서 어떤 족장들 몇몇 사람들만을 대상상으로 당신의 구원계획을 계시 해 주시던 것에서부터 탈피해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전체를 상대를 해서 당신자신이 활동하신다는 인간적인 해석이다. 그 해석이 야훼라고 하는 이름으로 대표로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곧 바로 성서저자가 이름이 계시됨과 동시에 모세의 소명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그런이유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길을 따르기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거듭나야된다.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된다. 그 다시 태어남에 생활을 표현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기에 앞서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오늘날에와서 세례성사로 기념을 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라고 하는 공적인 표현은 세례성사이다. 중생 - 거듭 태어난다. 불교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해탈(깨달음)을 해야된다. 깨달음을 얻어야된다. 깨달음이 있을 때 해탈을 하는것이고 해탈을 해야 부처가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거듭남을 이야기하고, 불교에서도 깨달음, 결국은 거둡남이나 같은 의미이다. 한계를 지닌 한 인간이 어떤 절대적인 존재인 ‘신’ 과 접촉을 하고 또 ‘신’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거듭남의 자세, 깨달음이 자세이다. 모세도 비로소 하느님의 이름을 알게 되면서 자기 자신이 거듭난다. 출애굽기에서 이 부분을 보면 모세가 처음에는 야훼 하느님께 ‘나 못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아! 그럽니까? 제가 그것을 하기를 원합니까? 예, 그러면 제가 기쁜 마음으로 하지요,’ 이런 것이 아니고 어떤 의미로 본다명 하느님과 흥정을 한다.
흥정을 하는 조건은 처음에는 ‘나 보다는 형이 더 똑똑하니까 형을 시키십시오’ 하느님은 ‘안된다 네가 꼭 해야 되겠다.’ ‘그러면 내가 해야된다라고 하면 하느님이 내 편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나를 계속해서 지켜주겠다라고 하는 징표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니까 손을 가슴에다 넣으니까 문등병이 되었다가 또 한 번 넣었더니 말끔히 낳았다. 하나의 징표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만 갖고도 안되니까 하느님이 최종적으로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신다. 한 인간이 절대자인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근존적으로 변화를 이루는 이 소명부분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본다.
데카르타 라고 하는 철학자가 ‘나는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표현을 했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존재한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는 그런 부분이라고 본다. 모세의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가치는 소명을 받았다는데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앎과 동시에 그는 하느님이 일꾼으로 거듭낫다. 탈바꿈이 되었다 하는 것이 이 출애굽사건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부분적으로는 모세가 하느님과 흥정하다싶이 하는 그 부분을 우리도 좀 더 깊이 묵상을 해 볼 필요가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신앙을 너무 쉽게 아주 좋은 마음으로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참 아름다운일 일수 있다.
그 사람의 어떤 성격이라든지 그 사람의 사고에 따라서 물론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아무런 거부감없이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과 정말 많은 우여곡절 끝에 신앙을 경우에 따라서는 거부도하고 회피도하고 신앙의 여러 가지 내용들에 대해서 회의도 느끼고 의심도갖고 그러면서 신앙을 정말 자기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신앙생활은 정말 다르다.
우리가 주변에서 신앙을 너무쉽게 좋은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을 경계해야만 된다. 그 사람들은 신앙자체를 어떤 하려한 꽃으로만 생각을 하고 어떤 복락, 안정, 기쁨만을 주는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을 너무쉽게 받아들인다.
아무런 각오나 마음가짐 없이, 신앙생활 하면 좋다더라, 신앙생활 하면 무엇인가 의지처가 생기고 또한 생활하는데 아무래도 어떤 초월적인, 절대자인 촌재에 의지하다보면, 나름대로 초능력 생기고 힘도 생기겠지, 그런식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다보면 정말 신앙인으로서 걸어갈 때 십자가를 져야 될 순간에 그 사람들은 나가 떨어져버린다.
처음부터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자기자신이 남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십자가를 질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용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면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신앙생활을 하면 무엇이든지 다 잘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잘풀릴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런 의미로서는 모세가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소명을 수락하는 과정에서 우리 시각으로 보면 하느님과 흥정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좀 더 깊이 묵상할 필요가있다. 무언가 자기자신도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께서 자기자신에게 주는 소명에 대해서 한 번은 의심도 해보고, 거부도 해보고, 부정도 해보고 그러면서 오히려 더 깊게 깨달아가는 과정이로고 생각을한다. 무턱대고 거부하고 의심을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좀 더 깊이알고, 점 더 정확하게 알기위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는 그런것도 필요하다는 그점을 모세가 소명을 받는 이 과정에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② 실질적으로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 빠스카 - 건너갔다 뛰어 넘어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께 대해서 처음으로 사랑을느끼는 우리 인간적인 표현으로하면 이것이 바로 첫 사랑의 추억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과 나누었던 첫 사랑의 기억이다. 계속해서 기억하고 잊어버리려고 해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첫 사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또한 잊어버려서도 안되는 이 빠스카, 출애굽사건 이라고 본다. 왜? 이 첫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했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제일먼저 선민의식을 갖게하는 사건이되었다. 선민 - 뽑아서 세운민족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뽑아주셨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편애하신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선민의식 이다. 그 선민의식의 뿌리가 이 홍해를 건넌 빠스카 사건에서 찾아볼 수 가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위해서 온전히 떼어내진 민족이다. 하느님구원역사를 위해서 따로 떼어내진 민족, 그것이 선민의식이다.
천주교 신자들 입장에서는 동정녀들에 관한 신학을 정립을 할 필요가있다. 우리가 마리아를 일컬어서 ‘동정 성모마리아’다 이렇게 표현을 한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 천주교신자들의 잘못된 사고중에 하나는 ‘동정녀’ 라고 하는 것을 자꾸 육체적 순결에다 한정을 짓는다. 육체적 순결에다 자꾸 마리아의 신심을 한정을 짓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나온다. ‘동정녀 신학’이라고하는 것, ‘동정녀’라고 하는 신학은 육체적인 순결도 복합은 되겠지만
사실은 ‘하느님으롤부터 하느님께서 당신의 어떤 구원계획 안에서 그 구원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당신께서 따로 뽑아 세우셨다.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위해서 따로 떼어놓으셨다.’ 인간측에서 본다면 하느님께 하느님의 일을위해서 자기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하느님께 자기자신을 온전히 내놓았다라는 그런 의미의 동정녀이다. 이것을 너무 육체적인 순결에다만 인간의 감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자꾸 육체적인 순결에다만 신경을 쓰니까 이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마치 미신적인 요소로 둔갑을 해 버린다. 이 ‘동정녀’라고 하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해주면 좋겠다. 선민이다, 하느님께서 뽑아 세우셨다하는 이야기는 하느님의 구원역사안에서 그 구원역사의 의미를 설명하게 하기위해서 자기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친 백성들이다. 하느님과 계약의 당사자가 되었다 하는 것이 선민의식이다. 그런데 이 선민의식을 잘못 해석을 해서 우리만이 하느님 자녀이고 하느님 백성이다 했을 때 부작용이 나는 것이다.
요즘 이스라엘이 부작용이 나는 것이 그것이다. 선민의식을 잘못 해석을 하니까 우리만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백성이다. 하느님은 우리만의 편이고 다른 사람의편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는 것으로 발전이 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성서의 깊은 내용을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선택해서 당신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라는 의미는 내가 너희들만의 하느님이 되겠다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너희들을 통해서 이 땅에 이 세상에 내 사랑을 펼치겠다라는 것이지 너희들만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마 우리들 일상 생활중에서도 이런 비슷한누를 범할 수 있다. 내 자식만이 최고다. 남의 자식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내 자식만 잘 되면된다. 내 가정만 잘 되면되고 남의 가정이야 어찌 되었던지 상관안한다. 그런의식이 바로 이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발전이된다. 여기서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하는 이 선민과정은 이스라엘만이 하느님의 백성이다하는 의미가아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다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주면 좋을 것이다.
더불어서 오늘날 우리자신들에게 많이 대두가 되고있는 이 동정녀라고 하는 신학에 대해서도 어떤 육체적인 순결에만 자꾸 한정을 시키지말고 정말 하느님의 일을위해서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온전히 바쳐버린 그런의미로 동정녀의 의미를 생각을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선민의식을 갖게한 이 출애굽사건을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기념하고 갱신하고 했었던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약에 와서 미사 전례안에서 계속해서 하고 있다. 미사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최후의만찬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
다시 기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최후의만찬을 벌이신 그 장소와 그 시기도 이스라엘 백성이 과월절축제를 벌리는 때 였다. 빠스카사건을 기념하는 전례중에 예수님께서 최후의만찬(성체성사)을 세우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께서 빠스카 잔치중에 세우신 최후의만찬 성찬을 다시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을 미사라고하는 전례중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오늘날 계속해서 기억하고 기념하고 갱신하고 하는 것이다. 부활 대축일 때 보면 독서를 많이한다. 그때 빼놓지말고 읽으라고 하는 것이 빠스카사건과 관련된 대목이다. 출애굽기14장 15절 - 15장 1절 내용은 홍해를 건넌이야기다. 그내용은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신앙의 근거이고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빠스카사건, 홍해를 건넌사건을 이해를하면 좋을것이다.
③ 법 률 집 (출애 19장 - 40장)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이계약, 시나이산에서 이루어졌었던 계약의 내용이다. 시나이계약 중에ㅣ서도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십계명이다.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십계명과는 내용이 다르다. 첫 번째가 구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십계명이고 두 번째가 계약의 법전이라고 하는 것이 또있다. 이것은 십계명의 내용을 보완하는 차원으로 이해를하면 되겠고 이 계약의 법전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 공동체안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 가난한이들의 권리에 대해서 정리를 해논 부분이라고 이해를 하면된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사이에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해놓은것이라면, 이 계약의 법전은 인간과 인간사이 원칙중에서 특히 가난한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공동체가 대응을 해야 될것인가하는 부분을 다루는 보다 세부적인 차원으로 이해를 하면된다.
4 ) 전 례 (갱신식)
① 빠스카사건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그 때의 마음가짐으로 다시 되돌아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갱신식을 갖는 내용을 소개를 해주고있다. 이러한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고 있는 전례에도 그대로 반영이되어서 부활 성야미사 때에 세례성사가 있을때는 세례성사를 하고 그 다음에 전신자가 일어나서 성세서약 갱신식을한다. 그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의미를 정리하자는 그런내용이다.
② 계약의 궤 (하느님 존재의 상징)
계약의 조문을 담아놓은 상자, 계약문을 자기자신들이 궤짝에다 담아갖고 다닌다는 것은 야훼 하느님께서 자기자신들과 함께 계신다는 하느님존재의 상징이다. 하느님이 우리편이다 하는 상징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레위지파를 통해서 ‘계약의 궤’를 들고 다녔다. 심지어는 타민족과 전쟁을 할 때에도 ‘계약의 궤’글 갖어가면 이기고 ‘계약의 궤’를 실수로 안가져가면 무참하게 깨지고 다시 갖고가서 하면 이긴다.
하느님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계신다. 이것은 나중에 정치적으로 가장 유용하게 이용을하고 정약적으로 써 먹었던 사람이 ‘다윗’이다. ‘다윗’은 우리가 현대적으로 본다면 ‘사울’이라고 하는 전임자에게 쿠테타를 일으킨 사람이다. 쿠테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은 사람이다. 그래서 본래 자신의 고향의 성이 있었던 예루살렘에다가 성을 쌓고 그곳에 성전을 지을 계획을세운다.
그런데 사실은 많은 백성들이 자기자신의 왕권에 정통성을 인정해주지않는다. 쿠테타로 성공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울’이라는 사람이 훨씬 더 이스라엘 전체지파로부터 지지를 받던 사람이다. 그런데 ‘사울’을 정신병자로 몰아 밀어내고 자기가 쿠테타를 통해서 직권을 한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정권의 정통성이 인정이 안되니까 어떻게하면 이 정권의 정통성을 살릴수 있겠는가? 하고 묘소를 짜낸 것이 이 ‘계약의 궤’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적인 민족이고 또 하느님과의 계약을 통해서 한 민족으로 통합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종교적인 구심점만 마련이된다면 이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겠다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아닌 ‘실로’라고 하는곳에 모셔져있었던 ‘계약의궤’를 자기성으로 옮기는 작업을한다. 그것이 하느님이 내 편이다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를 인정해주신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인정을 해라. ‘계약의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성서를 보면 ‘계약의 궤’가 성에 들어오니까 ‘다윗’이 너무좋아서 춤을추다가 바지가 벗겨지는 것도 몰랐다. 자기 일생에 있어서 성공하는 순간이다. ‘계약의 궤’에 대한 이러한 배경을 모르면 ‘다윗’이 왜 그렇게 좋아하고 춤을 추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계약의궤’를 통해서 자기자신 정권의 정통성을 살리는 것이다. ‘계약의궤’를 모셔놓고 나니까 그때서야 모든지파가 ‘다윗’을 왕으로 인정을 한다.
하느님이 여기와 계시는데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려면 모두 예루살렘으로 와야되고 그때부터 예루살렘이 모든 종교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계약의궤’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상징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리를 잡게된다. 이것을 보통 ‘성 궤’라고도한다. 출애굽에서 나타난 하느님상은 해방과 자유의 하느님상이다. 이것에 테마를 잡아서 요근래 신학을 정립한 것이 해방신학이다.
해방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한 가난한이들, 억눌린이들편에 항상 서시는 하느님을 체험한 출애굽사건에서 나온 것이 해방신학이다. 해방신학은 불가피하게 그리고 원칙적으로 가난한 사람들편에 서게 되어있다. 이것은 가진자들, 권력을 지닌자들. 억눌림을 당하는이들이 아니라 억누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공산주의자다. 가난한 이들편에 서는데 가난한편이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듯이 적이 될 수밖에없다.
우리나라에서 해방신학이 소개가 될 때 많은 논란을 빚었던 것이 바로 거기에있고 더군다나 오늘날까지도 이 해방신학이 교회의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는 보다 완벽한 의미에서 아직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한다.
아직도 교황청과 여러 가지 갈등을 빚고 있는 요소중에 하나이고 심지어는 이것 때문에 남미에 많은 성직자들이 스스로 성직자직을 버리고 평신도로써 해방신학을 연구하는 그런 과정까지도 발전이된 그런 아픔을 갖고 있는 신학이다.
해방신학의 본래 의미를 이해를 해보자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체험한 해방과 자유의 하느님상을 지금 어떻게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세상에 다시 재현을 시킬것인가? 그래서 해방신학을 제대로 이해를 할려면 해방신학의 모태가되고 있는 남미의 상황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된다. 남미가 도대체 지금 어떤상항에 놓여있는가? 왜 해방신학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좀더 깊이 이해를한다면 해방신학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우리나라현실에 맞도록 이 해방신학을 다시 재해석하고 적용해야될 그런 과제도 우리가 안고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체험하는 또 우리에게 계시되늰 하느님상, 그 분은 가난한이들편에 서서 가난한이들의 권리를 지켜주시는 가난한이들을 해방시켜주시고 자유를 주시는 해방과 자유의 하느님상으로 파악을 할수있을 것이다.
10. 레 위 기
이름 자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12 지파에서 사제직분을 수행했었던 ‘레위지파’ 사제지파에 관한 전례규정이다. 전례규정집 이렇게 이해를 하면된다. 이스라엘민족은 출애굽사건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이고, 출애굽사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똘똘뭉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신앙으로 뭉친공동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신앙인들이 이끌어가고 또 신앙행위를 이끌어가는 사제계급이 중심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 레위지파의 규정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특별하게 설명을 하는 것중에 전체적인 전례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이때의 전례를 장막전례라고 이야기한다.
1) 장막전례
예루살렘성전은 솔로몬시대에 완성이되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이스라엘은 ‘장막’에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다. 장막을쳐놓고 거기다가 나름대로 여러 가지 구분만 해놓은 상태에서 ‘계약의 궤’를 모시고 전례를 거행한다. 그 ‘장막전례’에 필요로하는 여러 가지 사항들, 또 전례적인 측면, 제사는 어떻게 지내야되고 그 제사마다 의미가 무엇이고 하는 것을 쭉 설명을 해놓은 부분이라고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살펴볼 수있는 것이 다섯가지 전례이다.
다섯가지 제사 (레위 1장 - 7장)
① 번제 - 태워버린다. 재물을 태워서 하느님께 바친다.
㉠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을태운다 하는 것은 없애버린다는 뜻이다. 내가보는 앞에서 없애서 주인에게 되돌려 준다. 결국은 하느님의 최상권을 인정을 하는 것이다. 태운다는 것은 이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 태우면 연기가 난다. 냄새를 좋게해서 하느님의 기분을 좋게 해 드린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냄새를 맏느냐에 따라서 기분이 나빠지기도하고, 아주 기분이 붕붕 뜨기도하고, 그러는 것이다. 그런 인간적인 감성들, 속성들이 그대로 하느님께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번제를 바치는 것이다. 태워서 하느님께 최상권을 인정도 해 드리고 하느님의 기분을 맞춘다.
② 곡식 봉헌제 - 곡식이라고 하는것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그 곡식중에서 최상위물은 하느님께 바친다. 제일 첫 번째 수확물을 하느님께 바친다. 맏배를 하느님께 바친다는 그런 의미이다.
③ 친교제 - 이 친교제는 말마디 자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 제사에 참여하는 제사에 봉헌하는 사제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 상호간에 나눔을이루는 제사로 이해를 하면된다.
④ 속죄제 - 피를뿌린다. 피는생명이다. 피를 뿌린다는 이야기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내 자신을 바치는 행위이다. 그래서 내자신 대신에 어린양을 잡아서 바치는 것이다. 그것이 ‘천주의 어린양’이다. 피를뿌리는 행위로서 자기자신의 잘못을 용서청하는 행위를 벌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피는 절대 먹지않는다.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를 보면안된다. 그래서 피와관련된 것은 모두 불결한 것이고 금기식을 시켰던 것이다.
심지어는 여인들이 아이를 출산할 때도 피를 보기 때문에 불결하다해서 남자아이를 낳으면 40일동안, 여자아이를 낳으면 80일동안 밖에 나오지를 못했다. 그 날자가 지난다음에 성전에 가서 정결예식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활동을 할수있었다. 그것이 예날 우리전례에서는 ‘성모 취결례’ 라고한다. 성모님도 여자이니까 했었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주의봉헌축일’로 바뀌었다. 성모님도 사내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40일후에 성전에가서 이 불결함을 씻는 예식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을 봉헌을했다. 그것이 예날에는 ‘성모취결례’라고 했는데 오늘에 와서는 ‘성모취결례’라는 의미보다는 예수님의 봉헌의 의미가 더 있기 때문에 ‘주의 봉헌축일’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피 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에 함부로 피를 보지도않았고 가까이하지도 않았고 어떤 육식고기를 잡았을경우에는 피를 일체 보이지 않아야된다. 피가 보이지않도록 잘 구워서 먹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다.
⑤ 면죄제 - 이것은 말 그대로 속죄제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죄의사함을 받고자했을 때 피 대신에 다른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는형태, 그것이 면죄제라고 볼 수 있다. 다섯가지 제사에 관련된 여러 가지 규정들을 서술을 해놓은 것이 1장 - 7장의 내용이다. 2) 사제의 의미, 사제 축성예식 (8장 - 10장)
사제는 어떤사람인가 하는부분을 나름대로 정리를 해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사제는 하느님과 인간사이에서 다리를 놓아주는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사제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는 항상 정결해야된다라는 의식이 생겨나게된다.
중계자 - 자기의 역할은 전혀없이 이쪽의 이야기를 저쪽에다가 그대로 전달만해주는 것이다. 예를들면 TV중계, 라뒤오중계, 있는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중개자 - 중간에 있는사람이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다. 나쁜 표현으로 하면 중간에 있는사람이 장난질도 할 수 있다.
무언가 자기자신이 자위적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과정에 참여를 한다. 자신의 인격을 가지고 하느님과 인간사이에서 할동하는 것, 사제가 하는 역할은 하느님과 인간사이를 막연하게 하느님의 어떤 은총이나 복을 인간에게 그대로 갖다주는 그런의미가 아니고 사제로서 한 인격으로 자기자신의 판단도하고 자기자신도 하느님의 일에 협조를 하면서 인간으로서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하는사람, 그것이 바로 ‘사제’다.
오늘날 신부들이 수행하고 있는 사제직분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이들은 철저하게 사제로서, 행사하는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을 시킨다. 절대 다른 부분에는 참여를 하지못하게 만든다. 오늘날 수행하고 있는 사제직은 종교적인 영향에만 국한을 시키는 것이아니라 제한이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생각했었던 사제직은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을 기킨다. 그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구약성서의 레위기와 같은 성격을지니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다. 히브리서는 신약시대에 와서 사제직분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의미를 가지는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을해주는 것이다. 레위기와 더불어서 히브리서를 참고하면 구약의 율법에 명시되어있는 사제의 직분과 의미 그리고 십자가상 봉헌을 통해서 오늘날 교회안에서 거행하고 있는 사제직분의 의미를 비교할수있을 것이다. 율법의 사제직분과 오늘날 교회공동체가 수행하고 있는 사제직분은 분명히다르다. 그러나 그법통은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다.
그래서 성품성사가 거행되는 장소에 가보면 이론의 대 사제직, 멜키세댁의 대 사제직을 있는 영원한 사제직이다하는 구절들을 많이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부터 사제직분이라고 하는 법통은 이어오지만 그러나 구약의 새제라고 하는 의미와 신약시대의 사제라고하는 의미는 분명히다르다. 그것은 구분을 해야한다. 그 구분하는 자료는 레위기와 히브리서를 참고로 할 수 있다.
3) 정결례 (11장 - 16장)
이것은 육체적인의미에 정결예식들에 대해서 규정을 해놓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까다로운 정결예식을 가지고 있다. 마르코 7,1-23절 같은 부분을보면 유대인들의 전통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특히 정결례와 관련된 부분들이 나오고 있다. 유대인들의삶 안에서 정결례라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가? 그러한 여러 가지 정결, 정과 부정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원칙을 제시해논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4) 성 법전 (17장 - 26장 거룩한 법전)
정결례와는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측면을 다루고있는 부분이라고 불 수 있다. 그래서 레위기전체가 작성이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레위기라고 하는 성서의 주제는 거룩함이다. 거룩한 하는님, 거룩한 백성, 요약을 한다면 레위기의 내용은 거룩한 하느님께, 거룩한인간들(사제, 제사를 드리는인간)이, 거룩한 장소(장막)에서, 거룩한 때(축일, 축제, 성년)에, 거룩한 상태(정결한)에서, 거룩한 행위(제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선민으로서의 구원의 길을 걷도록 일러주는 책이다 라고 정리를 하면된다.
11. 민 수 기
(백성들의 상태를 기록해놓은, 광야생활 40년간의 여정을 묘사함)
1) 인구 통계조사 표
말 그대로 풀면 요즘 우리식으로 한다면 인구 통계조사표이다. 광야는 삭막하다. 인간을 극한 환경으로 내어모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까 당연히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하게 되어있다. 우리가 비록 노예였지만 그래도 에집트에서는 잘먹고 잘 살았다. 자는 것 걱정 없었고 먹는 것 걱정 없었다. 최소한 자유는 없었지만 그런데 막상 하느님의 은총으로 광야에 나오는 것 까지는 좋다. 자유를 준것까지는 좋은데 당장 먹고 살고 자는 문제가 해결이안된다.
그래서 광야라고 하는 곳은 인간이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하는장소, 도전을 하는장소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께 불순종을 하면서 죄악을 저지르는 장소로 상징적인표현을 하게된다. 그러니까 오늘날에와서는 광야 그러면 시련의장소, 또 자기자신을 단련하는장소, 이렇게 묘사들을 하게되고 이 때의 40년이라고하는 40의 초점을맞춰서 오늘날 전례에도 사순시기라고 하는 것이 있게된다. 이 때의 가장 큰 불만은 왜 에집트에서 우리를 건져내왔느냐? 처음엔 좋다고 그랬다. 이제는 해방이다. 하느님이야말로 우리편이다하고 부르짖어놓고 막상 생계가 해결이 안되니까 왜 에집트에서 우리를 꺼내왔느냐? 구원사건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다. 사실은 우리들이 좋을 때는 어쩔줄을 모르다가 조금만 틀어지면 죽일놈, 살릴놈 만들어버린다. 왜 우리를 에집트에서 건져왔느냐?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가지고있었던 불만의 모습이었고 이것을 좀더 우리가 신학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이때 이들이 저지르는 인간으로서의 어떤 부족한 모습, 좀더 넓게는 우리 신앙인들이 오늘날 살아가면서 가질 수 있는 어떤 불만들을 신학적으로 다시 한 번 묵상해 보려면 1고린 10,1 -11절의 말씀을 참고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 때 가장 상징적인사건이 구리뱀사건이다. 이런 상징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명령, 하느님의 사명을 따라가면서 그 안에서 우리 부족한 인간들이 느끼는 불평불만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도전하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묵상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라고본다. 그 모습을 대표적으로 이 민수기에서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2) 이스라엘 12 지파
이스라엘의 12지파들에 대해서 짜임새있게 정비를한다. 지파들을 각각 나눠놓고 그 지파들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살아야되고 몇 명이고 뭐가 어찌되었다. 남자가 몇 명, 여자가 몇 명, 이렇게 쭉 그때 그 당시에 12지파에 대해서 상황을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3) 모세의 연약함
모세도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지도자이긴하지만 그 역시도 인간이었기에 많은 부족함을 지니고 있었고 한 때는 하느님을 배반하는 불순종하는 죄를 저지르게된다. 그 결과 모세는 성서에보면 하느님께서 약속해주신 가나안에 들어가지못하는 그런 벌을 받게 되었다라고 후대사람들에 의해서 해석이 되어진다. 민수기는 실질적으로 성서를 읽을려고 하면 아주 재미없는 책인데 그래도 그런 통계적인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의 연약한모습, 부족한모습을 그런대로 확인하면서 묵상할 수 있는 그런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그런 내용을 찾아서 묵상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12. 신 명 기
1) 모세오경의 마지막권이면서 결론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 신명기는 철저하게 율ㄹ법에 대해서 다루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제일 먼저 율법을 일상생활중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설교로 이루어져있다. 율법을 현실 생활안에 어떻게 적용할것이며 또 율법의 조문들을 해설해서 설교하는 형태로 되어있다.
대표적인 것은 모세의 유언이 담겨저있다.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심정으로 모세가 자기자신이 그 동안에 살아왔었던 걸어왔었던 길을 회상한면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십계명을 주신의미, 그리고 그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지니고 있는 것인가? 아주 감동적으로 세 개로 나누러서 설명을하고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2) 공식적으로 유일신사상이 나온다. 그 전에는 야훼 하느님이 우리편이다하는 의식이강했고 우리 하느님이다. 우리 족장들의 하느님이고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다. 우리 가족들의 신이다라는식은 강했지만 유일신이라고 하는 사상은 그렇게 공식적인 모습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에서부터 해방이되서 가나안으로가는 과정에서 많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는다.
자기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은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민족이아니고 다른 신을 섬기는 민족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싸울때는 그들의 신의 이름으로 싸우는 형태가된다. 나중에 싸우다보니까 이제는 사람과사람의 싸움이아니라 신과 신의 싸움이된다. 우리‘신’이 더 강하냐? 너의‘신’이 더 강하냐? 그런 과정을 걸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안에는 자연히 하느님만이 유일한 신이다.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고 야훼만이 이세상에서 제일 강한 신이다. 야훼를 이길 수 있는 신은 없다. 그들의 체험이 그랬기 때문이다.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고 야훼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신’이다. 그 외에는 신 도아니다. 이렇게되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신사상의 뿌리가된다. 하느님은 야훼 한분 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를 에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당신이름을 야훼라고 가르쳐주신 그분만이 하느님이다. 그 외에는 신이 아니다. 이런 유일신사상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신명기이다.
3) 자기네들의 역사를 정리를 한다. 신명기라고 하는 것은 자기자신들이 쭉 걸어왔었던 길을 다시 반성을하면서 정리를 하는 것이다.
① 선택 -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② 해방 -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자기네민족을 해방시켜주셨다. 그리고 시나이산에서 율법(십계명)을 맺어주셨고 이제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광야에서 우리를 단련시켜주신다. 우리가 올바르게 성당할 수있도록 단련시켜주시는 분이다 하는 나름대로의 역사의식을 정립을한다. 이러한 역사의식 속에서 유애인들에게 강하게 뿌리내리기를 바라면서 신명기가 강조하는 것이 철저한 순종이다. 신명기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느님께 순종할 것을 가르치는 책이다.
왜 순명을 해야되는가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을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명 6장 전체를 묵상 할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유일신이신 야훼 하느님께 이스라엘백성들이 보여야할 순종의 자세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이 유일하신 야훼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벌 받는다. 무조건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신명기다. 그리고 그 순종의 길은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이다. 순종을하면 생명의 길로 들어가지만 불순종하면 죽음의 길로 간다. 이것이 신명기의 주된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아주 간단한 표현이지만 생명의 길로 들어가고 죽음의 길로 들어간다라는 것이 등장이되는데 마태 7,13-14절의 말씀을 참고할 수 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의 이르는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사람이적다” 이것이 사실은 신명기의 정신 이다. 율법이라고하는 좁은문을 너희들이 택하면 생명의 길로 가지만 율법의 문을 선택하지않고 너희 편할대로 불순종의 길을 걸으면 너희는 죽음의 길로빠져든다
4) 신명기 차체가 결론부분이기 때문에 어떤의미에서는 출애굽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후세대 사람들에 대한 의식화 교육 차원에서도 이 신명기는 작성이된다라고 보여진다. 출애굽사건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해준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순종해야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유일신 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만이 유일한 하느님이다하는 것을 의식화 교육을 시키는 자료가 바로 이 신명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사건을 잊지말자.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하는 이 사실만은 제발 잊지말자 하면서 그것을 철저하게 순종이다. 유일신사상이다라고 하는것과 연결을 시켜서 의식화 교육을 해왔다.
오늘날까지도 그것이 계속 지속이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도 유일신 사상을 고백을한다. 그러나 그 유일신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타 종교에대한 배척이나 독선으로 표현이된다면 곤란하다. 그렇게되면 거기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덕목을 이야기 할수 없다. 유대교에서는 사랑이 없다. 오로지 정의만있다. 그 정의라고 하는 것은 자기네들이 고백하는 유일한 하느님 야훼의 입장에서 보는 정의다. 우리가 말하는 공동선의라고 하는 차원의 정의가아니라 자기네 민족입장에서의 정의다.
철저한 시온주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아무거리낌없이 전쟁도 일으킬 수있고 보복까지 감형을한다. 세계 사람들이 뭐라고 손가락질하던 뭐라고 자기네들에게 구절을 가하던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우리가 당했으니까 우리가 보복하겠다. 그런의식이 유일신사상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가까운예로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경재의식만 키워놓으면 그 자녀들이 컸을 때 부모들에게 절대 효도못한다. 뿌린대로 거두게 되어있다. 자기자신이 뿌리지않은 것을 거둘려고 하니까 문제가되고 답답한데 매일 답답하다고 소리치면서 자기자신이 가정이라고 하는곳에 뿌리는 씨앗은 무엇인가? 매일 엉뚱한 씨앗을 뿌리고 있다. 정말 무지막으로 자녀들을 경쟁의식으로 내어몰으면 나중에는 각오를 해야한다.
사회라고 하는 것은 나와 같은 똑같은 사람들끼리 만들어서 이루는분위기일 뿐이지 누가 사회라고 하는 가정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라고 하는 이런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가 되는 것이지 무슨일만 터지면 요즘사회가 왜 이렇게 살벌하지? 하면서 자기는 그 사회에서 빠져있는 인물로 생각하게 된다. 어떤 순간적인 출세, 순간적인 체면만을 생각한다면 정말 우리사회도 앞으로 큰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를가지고 자식을 교육을 시켜야될 것인가? 남의 탓만하지말고 스스로 자성을 해보는기회로 삼아주면 좋을 것이다.
13. 전기 예언서(역사서)의 개관
1)여호수아
모세이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여호수아다. 이 여호수아가 가나안은 점령해나가는 과정, 1220년에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을 점령해나가는 그 과정에서부터 바빌론유배(586)생활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 약 650년간의 유대인들의 역사를 다루고있는 부분이다. 이 내용은 비로소 이스라엘왕국 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동안에는 떠돌이 민족이었었는데 가나안에 정착을하면서 비로소 왕정제도를 도입을한다.
왕정제도를 도입을하면서 많은 말썽들이 이일어난다. 왕이라고 하는 것은 민족의대표, 민족의주인으로서 야훼하느님을 섬겨왔었는데 왕이되면 왕이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결국은 하느님께 대적하는 것이 아니가?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왕을 두어서는안된다 라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은 이스라엘도 어쩔수없이 이유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우리도 우리나라를 지켜야되는 것이 아니냐?
그러기 위해서는 왕이 필요하다하는 논리때문에 어쩔수없이 왕정제도를 도입을한다. 그래서 최초의 왕이된 사람이 ‘사울’이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왕국의 기원, 그리고 초창기역사를 다루는것이 여호수아서하고 판관기다. 이것이 왕국의 초기의역사다. 어떻게 해서 왕정제도가 도입이되었고 그리고 그 왕정이 어떠한 과정을 밟았는가? 여호수아는 가나안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을 끌어간 사람들이고 판관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왕정재도로 가기위한 과도기적인 체제였다. 12명의 판관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2) 다 윗
본격적으로 구약성서의 중심인물인 다윗을 중심으로한 이스라엘왕국의 전성기가 나온다. ‘사울’ ‘다윗’ ‘솔로몬’에 이르는 전과정을 설명하는 책,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 11장까지 다윗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왕국의 전성기다. 가장 이상적인 왕국의 체제이다. 열왕기 상 12장부터는 왕국이 솔로몬이후에 분열이되었고 결국은 남 북이 따로따로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멸망이되어서 유배를가게되었다 하는 민족의분열, 그리고 멸망에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것이 전기예언서(역사서)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에 흥미있게 쉽게 읽을 수 있다.
3) 이러한 역사서를 저술한 목적은?
① 역사서를 읽으면서 잊지말아야 될 것은 역사적인사실을 저술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아니고 역사의의미를 해석하기 바란다. 역사의의미는 하느님과 인간의관계속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는 구원약속과 인간이 그 구원약속에 어떻게 응답을하면서 살아가는가? 또 응답하지 않았을 때 불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하느님이 성실하신 분인가? 인간이 불성실한 것인가? 그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것을 살펴보아야한다.
일반적으로 하는그 역사 공부가아니고 왕이 순위가 어떻게되더라 하는 그런 역사공부하라는 것 이 아니고 역사의의미을 해석해야된다.
그 역사의 의미라는 것은 우리는 구원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하시는 그 구원계획에 인간들이 어떻게 응답을하는가? ‘다윗’이 어떻게 응답을했고 ‘솔로몬’이 어떻게 응답을했고 또 거기에 많이 등장을하는 이스라엘의 많은왕 들이 어떻게 응답을하면서 또 어떻게 불순종을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는가? 그것을 살펴보라는 것이지 역사공부를 하라는 것이 다. 그러니까 의미를 해석을 해야한다.
② 전기예언서 저술방법
㉠ 과거는 반성의차원 ㉡ 현재는 적응의차원 ㉢ 미래는 희망을 제시하는차원.이렇게 세 가지의 차원으로 그 역사서자체가 저술이된다. 역사의의미를 해석을하면서 결론 삼아서 해야될 부분이 우리가 이스라엘의 과거역사를 바라보면서 우리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 거기에서 깨우친바를 적용을 시켜야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이야기다 다윗의 이야기다가 아니고 다윗의 이야기를통해서 내자신이 현재 살아가고있는 삶에 적응을시켜라, 깨달아라, 깨달음을 적응시켜라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자신이 살아가야 될 삶의 방향을 잡아야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인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지식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에대해서 이스라엘 역사에대해서 해박한지식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의 과정 적응의 과정 이것을 밟으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갖고 전기예언서(역사서)를 읽어야된다. 역사서에서 등장하는 흐름을보면 위에서부터 밑으로 내려올려고 하지말고 항상 중심적인 인물에서부터 살펴보아야한다.
구약성서의 중심인물은 다윗이니까 다윗 이전에 사울이있었고 사울 이전에 판관들, 판관 이전에 여호수아, 다윗 다음에 솔로몬이있고 솔로몬 사후에는 남과 북으로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 북쪽은 나중에 아시리아에게 멸망을 하고 남쪽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을 한다. 결국은 전체적으로 유배생활을 떠나게 된다하는 전체의 역사적인 흐름이 전기예언서(역사서)의 전반적인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정말 역사공부를 할려고하면 역대기를 보면된다(역대기 역사서). 전기예언서는 의미를 보는것이기 때문에 신명기계 역사서라고 표현을 한다. 같은 역사서라도 왜 신명기계 역사서라고 하는가? 역사를 통해서 들어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서술된 역사서이기 때문에 이 역사를 일컬어서 신명기계 역사서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 조선실록 그런 것 처럼 연대별로 왕 중심으로 쭉 역사를 서술해나가는 것은 역대기를 보면된다. 항상 이스라엘역사를 종합을할려면 신명기계 역사서와 역대기의 역사서를 함께 조화를 시킨다. 그래서 서로 틀리고 맞는 점들을 찾아서 이스라엘역사를 재구성을 하고 있다. 역사공부를 하는 분들은 역대기를 보면 훨씬 더 전반적인 이스라엘역사를 꿰뚫을 수있을 것이다.
③ 역사서를 읽으면서 참고적으로 알아두어야할 것.
‘바알’신앙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을 하기전에 가나안에 살고있었던 원주민들이 섬기던 종교이다. ‘바알’이라고 하는이 종교는 끊임없이 이스라엘백성들을 괴롭힌다. 하느님과 가장 적대적인 항상 대치되는 ‘신’으로서 등장이된다. 이 것 때문이라도 이스라엘의 유일신사상은 더욱더 강해진다. 이 바알신앙의 위험 때문에 더욱 더 편협한방법으로 흐르게된다. 우리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유목민이었을 때, 떠돌아다녔을 때 야훼하느님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이제 가나안에 정착을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나름대로 농경문화를 하다보니까 농사를 짓다보니까 야훼보다는 바알신앙에 훤씬더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바알신은 농경문화에서 찾을 수 있는 풍요의 신이다.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주는 신이다. 야훼는 해방과 자유를주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인 막강한힘을지닌 그런 ‘신’인반면에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바를 비교한다면 바알은 실질적으로 돈이되며 자기자신들에게 생계를 유지해다주는 신이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야훼하느님께 신앙은 고백을하면서도 끊임없이 바알신앙의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래서 많은 예언자들이 왕들을 질책을하고 야훼하느님께 순수한 신앙을 보존해야된다 라고 목놓아외쳐댈 때 도 항상 비판의표적이 되는 것이 ‘바알신’이다.
너희들 바알신의 빠져서는 안된다. 이 바알신앙은 또 한편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의 윤리체계 까지도 흔들어놓게 된다. 이스라엘의 야훼하느님신앙은 유일신이지만 이 바알은 유일신이 아니다. 바알은 남성이고 이 바알의배후자로 등장하는 ‘아스다롯’이라고 하는 신이있다. 아스다롯은 여신이다 남편(바알)과 아내(아스다롯), 이 부부신이 조화를 이루어서 우리에게 풍요를 갖어다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의미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리적인바람이 그대로 지배하게 되었다라고 볼수 있다. 남녀의 결합을통해서 풍설한열매를 거두고자하는 그래서 실질적으로 바알신전에서는 매움행위가 하나의 전례로서 이루어진다.
매음을통해서 성교를 통해서 어떤 성교자체로 전례행위로 꾸며서 그 행위를 통해서 풍요를 기원하고자하는 다산도기원하고 또 풍성한 수확을기원하는 그런형태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농경문화로 점점들어가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상당히매력적인 종교였다. 군사적으로는 야훼를 내세우고 농사차원에서는 바알을따른는 그런 이중적인 신앙구조로 전략해버린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당에서는 하느님찾고 성당문을나서서는 하느님은 양심에다 가둬두고 나머지 따르는 것은 하느님을 따르느냐하면 하느님을 따르지않는다. 다른 것은 따를것이 많다. 큰 것 좋아하고, 많은 것 좋아하고, 사치하고 어떻게하면 많이가질까? 어떻게하면 큰곳에서 살고 큰 것 많이가질까? 큰 것 굴리고다니고 크게 놀까?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사회에서는 우리자신들도 하느님께 전례중에는 신앙을 고백하고 양심의소리에는 하느님을 모셔놓지만 실지 생활안에서 과연 우리가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는가? 우리들의 실지생활은 오히려 하느님보다는 하느님과 반대되는삶에 더 많이 빠져있다. 이스라엘이 그랬다는 것이다. 전례중에는 야훼하느님께 유일신앙을 고백하지만 실지 자기자신들의 삶에 있어서는 크고 많은것들을 쫒기위해서 바알을찾았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찾았지만 마음은 이미 바알에게로 갔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예언자들이 이스라엘백성들의 양심에다 호소를 하는 것이다. 너희들 그렇게 이중적인삶으로 살지말아라. 순수한 야훼 하느님의 신앙을찾자, 그것이 예언자들의 사명이고 예언자들의 의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종교적인배경을 염두에두고 전기예언서(역사서)를 읽어나가면 좀더 이해가 쉽게 다가올 수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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