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서
1) 성서란 무엇인가?
성서는 거룩한 책입니다. 이 한권의 책은 한 저자에 의해서 집필된 단행본이나 저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73권으로 된 도서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오랜 구전전승 기간을 제외하고서도 1200년이란 긴 세월을 걸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작성된 이스라엘백성의 고유문학총서 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는 고대 근동지방의 샘족사상에서 발전한 유다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신약성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던 팔레스티나 출신 제자들에 의해 선포된 메시지가 회랍 문명안에서 성문화된 것이다.
성서란 간단하게 말해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대화, 인류역사의 어느 일정한 순간들에 주고 받았던 대화,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이 대화의 결정(結晶)이다”라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성서란 하느님과 인간들의 대화로서 옛날에 한번 있었던 대화가 아니고 지금도 계속되는 대화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20세기전의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즉 팔레스티나라고 하는 조그만 지역에서 일어난 히브리 민족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나, 초기 크리스챤들의 아담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현재의 나에게 건네시며 답변을 요구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이론적인 성서 공부에 중점을 두고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 자신의 응답을 드리기 위해서인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들의 대화의 결정체인 이 성서는 한권으로 된 것도 아니며, 한 순간에 나온것도 더욱 아닌 것이다. 히브리 민족의 손에서부터 초대교회의 시대까지 1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에 형성된 수십권의 책으로 된 하나의 전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성서연구는 18세기말엽 개신교 측에서 역사비판학을 도입함으로써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 성서가 구원의 역사의 주역들(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베드로, 사도요한, 바오로) 이런 분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금세기에 와서 고고학과 고문학의 발달로 성서의 세계가 당대의 세속문화와 역사의 비교, 연구됨에 따라서 성서의 다양한 양식, 그리고 편집과정이 비교, 연구됨에 노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성서의 실재의 사건들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성서를 쓴 사람들의 문학적인 기교나 신학적인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역사비판학이라고 합니다.
이 역사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성서의 저작시기 그 자료의 기원과 전달과정, 성서의 각권의 실재 저자들과 그들의 집필동기나 신학적인 지향, 그들이 속한 신앙공동체의 문제점들,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까 하는 해결 방안들 보다 구체적으로 성서의 세계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비판학에 커다란 공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비판학이 결코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성서 저자들의 저술동기는 자신의신앙, 그리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신앙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앙과 공동체의 신앙은 그 근원과 목적을 하느님께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 저자가 자신의 신앙이나 공동체의 신앙을 전달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전달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표현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과정에서 신앙을 전달하고 표현한다는 그 과정, 신앙이 생겨난다는 과정, 이것은 전부 하느님께서 유도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말이 유래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서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성서를 대충 훑어보게 되면은 이스라엘의 역사(구약)과 그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으로(신약)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뼈대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성서가 입고 있는 옷, 성서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뒤에 숨어있는 깊은내용은 하느님이 누구신가? 그리고 인간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크고 작은 사건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과 가르침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역사적인 사실로만 처리가 된다면 지금 여기 20세기 후반부에 살고있는 우리 모두와 아무런 연관성을 가질수가 없습니다. 실재로 이스라엘의 역사나 또한 예수님의 역사는 세속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습니다. 별로 남아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그런 사건들을 고정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 서 고공을 막론하고 왜 그토록 오랫동안 성서는 인류의 문화를 지배해왔는가? 그 이유는 성서의 그 속 알맹이 내용이 시공을 넘어서서 인류 전체의 커다란 충격을 던지면서 우리 인간성 정체를, 인간성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핵심 내용은 하느님의 소개와 인간소개, 이 둘은 성서의 어느 페이지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 아무 대목이나 열어도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찾을수가 있고 인간이 누군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울이야기, 바오로이야기, 베드로이야기,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빠져나와 가지고 광야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을 수시로 배반해 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대하여 올 때 우리들은 즉시 아!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이야기구나, 나의 이야기구나, 이렇게 알아듣게 됩니다. 우리는 그 성서 안에서 풍부한 인간성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족보들을 보면 그 안에 온갖 사람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느님은 인간성 전체를 다 끌여들여서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범죄를 총 막라해가지고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 들어가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을 보면 우리와 별달리 특출한 인간이 아닙니다. 베드로, 바오로 사도들도 보면 예수님을 전하다가 서로 다투기도하고 얼굴도 붉히고 바르나바 사도같으면 베드로하고 뜻이 맞지 않아서 너하고 여행 못하겠다 하고 중간에서 갈라져 따로따로 여행하고, 이런 것을 보면 성서의 인물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감정을 지닌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약점이 많고 연약한 그런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에게로 끌어들이시고 어떻게 그 사람들을 이용하시고 어떻게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시는가? 이것이 성서안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안에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야되고 나와 내 공동체를 위해서 주어지는 그 분의 말씀을 들어야되고 성서에 들어난 인물들의 행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나가야 될 삶의 방향을 정해야 될것입니다.
2) 성서의 목표는 무엇인가?
성서의 목표는 하느님의 실현입니다.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해서--- 잘 살려고 --- 어쩌다보니까 --- 천당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무척 많습니다. 옛날 요리문답에 보면 천당은 지복직관이라 했습니다. 끝없이 복을 누리고 직접본다. 하느님을 직접보면서 하느님과 함께 끝없이 복을 누리는 곳이 천당이라고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거의 대부분이 죽은 이 다음에 꿈도 꿀 수 없는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하느님과 함께 끝없이 복을 누리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다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거 몇백년동안 교회가 가르쳐 왔던 천당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착한 일을 해야 갈 수 있다. 반대로 지옥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고서도 지키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 가는곳이다. 그래서 그 지옥은 영원히 벌을 받는 곳이다. 옛날 교리에 의하면 세례성사를 받게되면 우리 이마에 인호가박힌다. 그래서 마귀들이 송곳을 갖고 쑤신다. 나쁜일 하면 지옥가니까 나쁜일 하지마라. 또 연옥교리는 은연중에 신자들로 하여금 천당에 가기 위해서 착한일 해야된다. 자기자신이 천당에 가야 되기 때문에 착한일 해야된다라고 과거에는 보상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무엇인가 차곡차곡 쌓아놓아야 천당에 가서 상을 받는다라는 그런 개인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우리 자신들이 살았고 그것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성서의 의도를 파악한다면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이 내 자신만이 천당에 가는 개인적인 구원이겠는가? 우리가 성서의 가르침을 보면 개인적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부끄러운 일인가! 오히려 개인적인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버려야할 죄이고, 우리 신앙인들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내가 천당가기위해서, 내가 편할려고,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비신자들 자기소개서 받아보면 대부분이 내 자신의 안정을 찾기위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천주교회에 입문하는 동기에 거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만약에 교회가 계속해서 그런 동기를 받아 들이면서 그런 동기를 지닌 신앙인들을 교회 안에서 가르쳐 나간다면 분명히 교회는 앞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또 성서가 의도하고자 하는 신앙관은 아닙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목표는 하느님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 라고 하는 개념과 천당이라고 하는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는 같으면서 상대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습니다. 현재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이 있습니다. 영원한 세상, 하느님께서는 이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세상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이 먼저 다가오시는 계시라고 하는 구원계획을 통해서 하느님 당신 자신이 인간의 세상으로 들어 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침투해 들어오십니다. 침투 - 막무가내로 확 뚫고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들어오는 현상이다. 우리가 모른는 사이에 아주 비밀스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십니다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시는데 그 선봉에 세운 소대장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게서 인간 세상에 침투해 오시는 과정에 선봉장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세상을,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이 세상에다 그대로 이루려고 하십니다. 그 이루려고 하는 나라를 일컬어서 하느님 나라라고 합니다. 천당이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 있는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서의 가르침은 죽은 다음에 따로 가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개념 입니다. 성서를 제대로 해석을 한다면 천당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앙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신앙인들의 일차 적인 목적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해야되는 것은 나와 더불어서 저 사람이 천당에 가게 하기 위해서 선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 간에 자꾸 자꾸 넓혀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선교를 해야 됩니다. 말로만의 선교는 안됩니다. 하느님나라 라고 하는 개념을 좀 더 제대로 이해해야 됩니다.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가 아니고 지금 현재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 실현해야 할 나라가 하느님나라 입니다. 천당은 이 세상에 하느님나라가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서 완성이되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도 완전히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는 나라가 되었을 때 천당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진행되는 상태이고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었을 때 그것을 천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당 가려고 발버둥치는 그런 신앙 자체에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그 벗어나는 노력을 성서에서 배워야합니다. 성서에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깨닫는다면 천당 가려는 신앙 생활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회를 ‘실천종교’라고 합니다. 이 땅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역에, 좁게는 내 가정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 내가 책임지고 있는 공동체,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 하느님의 뜻이 빨리 실현되기 위해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목표를 위한 방법을 우리는 성서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서 죽음의 승리를 거두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고 고백을 하는가?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고, 인간이 되셔서 죽임을 당하셨고,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남에 의해서 강제로 죽임을 당하셨다가 그 다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의 희망을 걸고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 입니다. 그러면 이 부활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이긴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에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부활의 과정으로 가기 위한 문일 뿐입니다.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천당교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로 가기위한 하나의 과정이다라고 하는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해주면 좋겠습니다. 단지 천당 가기 위한 방법으로 성서 공부를 한다든지 혹은 신앙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 가정에, 내 직장에, 내가 머물고 있는 공동체에 실현 해볼까? 그 실현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 성서입니다.
왜 성서묵상을 하고, 소공동체를 통해서 자꾸 말씀 나누기를 하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역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케 하는 지혜를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간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성서공부를 해야되겠다. 그리고 성서의 가르침들을 깨우쳐야 되겠다. 이런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3) 성서를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가?
성서는 얼마든지 나름대로 또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대로 접근을 해도됩니다. 어떤 일정한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마음대로 해석을 한다고 해서 누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성서를 어떻게 읽고 해석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이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본다면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를 우리가 처음부터 제대로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성서에 접근을 한다 성서를 읽는다 했을 때에는 두 가지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육체적인 몸가짐, 어떤 자세로 읽어야 되는가에서 육체적인 몸가짐이 있을수가 있고,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느냐?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을 해볼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몸가짐 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성서를 읽을때의 자세(서서, 앉아서, 누워서, 화장실에서, 성전에서), 여러 가지 외적인 환경들을 말할 수 있고, 마음자세, 어떤 마음자세로 읽느냐?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몸가짐, 또 성서가 읽혀지는 환경보다는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 가짐입니다. 시대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만고불변의 말씀은 있지만 만고불변의 해석은 없습니다.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성서의 가르침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성서의 가르침을 해석 하는 것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수 있지만 성서의 말씀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와 인격의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그 해석의 원천이 되는 성서의 말씀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어떠한 마음으로 읽어야 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서는 남의 눈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읽어야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내가 성서를 읽고, 지금 현재 내가 느끼고, 내가 깨달은 바를 중요시 여겨야합니다. 내가 내 눈으로 읽은 내용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성서를 읽고 내 나름대로 느끼는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강요가 되면 독단이 되고, 편견이 됩니다. 우리는 이 독단과 편견의 부작용들을 우리 사회에서 많이 체험합니다. 성서를 자기눈으로 본 것 까지는 좋은데 자기 눈을 너무 믿은 나머지 자기 해석이 최고다. 휴거론, 종말론 등 그래서 믿지는 말고 내가 본 눈을 비워야 됩니다.
사람이 어떤 상대를 사랑하게 되면,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대에 첫 번째 반응은 상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주려고 합니다. 다 해줄 수 있다라고 할 때 상대방의 눈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의 눈빛을 보면, 나를 좋아 하는구나,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눈빛을 볼 때 내가 상대방의 요구를 알 수 있는 눈빛이 서로에게 마주치는 순간에 상대의 눈빛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나입니다. 상대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만이 보변, 처음에는 상대가 보이지만 깊이보면 상대의 눈빛속에서 자기를 발견합니다. 상대와 이미 합치된 자기자신을 본다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말은 내 눈으로 성서를 읽고 보지만, 결론적으로는 내 마음을 비움으로 인해서 이제는 성서 안으로 내 자신이 들어가야 됩니다. 내 의도대로 내가 부르짖고, 내가 주장하는 바대로, 성서를 인용해다가 막 끌어다가 사용할려고 하지말고, 내가 성서의 가르침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자기의 어떤 일반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서, 성서를 함부로 인용하고, 성서를 갖다가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데 정당화 시키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자기의 주장을 믿고 자기의 눈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말고 성서를 눈으로 읽되 자기 자신이 성서 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물론 이 단계까지 가는데는 많은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고 또 오랜 시간이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성서 해석입니다. 처음 시작은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인데 결론적으로는 말씀이 나를 읽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 성서 복음나누기이고 말씀나누기입니다. 말씀이 나를 읽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내가 말씀 안에 들어가 있는 이 상황, 이것이 성서를 대하는 방법입니다.(유리비유의 설명)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성서인데 그 성서를 읽는 내 자신이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서를 읽음으로 인해서, 내가 성서의 가르침을 외곡을 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눈으로 읽되 내가 읽은 것을 믿지는말고 오히려 말씀이 나를 읽음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계시가 많은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이 될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이 우리가 성서에 접근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 공부를 해야하고, 꾸준하게 성서에 대한 탐구자세가 필요로 하는것입니다. 만일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성서를 읽을 필요가 없고, 또 성서 공부를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성서의 의도를 제대로 알기 위한 과정, 그것이 바로 성서 공부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성서 공부를 하는 목적도 우리의 눈, 우리의 마음을 비우면서 말씀이 우리들을 읽을 수 있도록 내놓는 과정이라고 이해를 하면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에 대해서 좀더 쉽게 이해가 될 수있을 것입니다.
4) 성서의 짜임새
성서는 물론 한권으로 나와있지만 단행본은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 손에서 만들어진 구약,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 만들어진 신약, 이렇게 하느님 말씀의 총서 형식으로 나와 있습니다. 기원전 13세기에 모세에서부터 비롯해서 기원후 1세기에 성 사도요한에 이르기까지 무려 1400년동안 걸쳐서 집대성된 책입니다.
물론 가톨릭이 인정하는 73권(구약 46권, 신약 27권)의 방대한 책의 총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3-14세기에 걸쳐 저자들 역시 수없는 사람들이 거기에 걸쳐있고 저자들이 다른만큼 그분들의 개성과 필치가 다르고 또 저자에 따라서 자기가 쓴 책자의 부피도 다릅니다. 우리가 “성서”라고 일컫는 말은 히브리어로 책(seper)이라고 유래합니다.
이것이 후대에 와서 계약상속을 의미하는 유언(Testamentum)이라는 용어로 그 뒤에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크리스챤들은 다른 어떤 서적과는 비할 수 없이 존엄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어왔고 그것이 원 저자가 쓴 것을 수서사본 가의 손으로(파피루스나 양피지 두루마리 등에 필묵으로 옮겨적음), 옮겨적는 사람의 손으로, 그다음 인쇄공의 손을 거치면서까지 철저하게 간직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 손에 까지 넘겨졌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꿈란이라는 동굴에서 파피루스 같은데 써놓은 것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성서는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지고 구약은 크게 율법서(모세오경), 예언서, 성문서집으로 구분합니다.
구 약
① 율법서(모세오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권의 책으로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창세기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까지의 장구한 역사가 기록되며 여러저자의 손을 거쳐서 율법이 완성됩니다.
② 예언서 : 두 부분으로 나눈다(기원전760년경).
㉠ 예언시대의 역사 :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 예언집들 :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12소예언서(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아가, 나훔, 하바꾹, 스바니야, 하깨, 즈가리야, 말라기).
③ 성문서 :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 - 욥기, 시편, 잠언, 다섯두루마리(롯기, 아가, 전도서, 애가, 에스델) 다니엘, 에즈라, 느헤미야, 역대기 상․하, 그리고 토비트, 유딧, 에스델, 마카베오 전후서, 바룩, 집회서, 다니엘, 지혜서 중 일부는 개신교 측에서는 외경으로 보고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정경으로 확정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원전에는 없는 책들로 희랍어로 씌어졌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구약이 46권, 신약이 27권 그래서 73권이고, 개신교에서는 구약 39권, 신약 27권 합해서 66권입니다.
신 약
신약성서는 역사서, 지혜서, 예언서라는 분류를 정확히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역사서의 성격을 띠우고, 사도들의 서간서는 교훈서와 비슷하고, 요한의 묵시록은 예언서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성서를 신․구약으로 나누는 이유는 연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약성서는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약 100년이란 긴 세월을 통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성서’ 하면 본시 구약성서를 의미했으나, 그후 옛 계약인 구약성서를 완성 하는 작업으로서 인류가 새로운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맺게 된 새 계약을 기록하게 된 것이 신약 성서입니다. 그리스어로 씌어진 신약 성서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① 4복음서와 사도행전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기술되어 있으며, 마대오, 마르코, 루가, 요한 복음서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집성하게 된 동기는 예수님의 설교와 행적을 이웃에게 선포하려는 데 있습니다(루가1,1-4). 사도행전은 예수 부활 후 초대 교회 사도들의 선교활동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성서로, 예루살렘에서 세계 곳곳으로 확장 되어 가는 복음 선포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② 바오로 서간 : 14권 - 사도시대가 끝나갈 무렵, 사람들은 사도 및 그들의 직제자가 남겨 놓은 문헌들을 집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기원후 100-150년). 신약성서 중 가장 먼저 집필되고 집성된 부분은 바오로 서간이고, 제일 늦게 집성된 부분은 공동 서간입니다.
③ 공동서간 : 7권 - 공동 서간은 바오로 서간 집성의 영향을 받아 다른 사도들의 서간들도 모아서 보급시키려 한데 집성동기가 있습니다. 공동 서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베드로의 첫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 유다의 편지입니다.
④ 묵시록 - 요한 계시록이라고도 하며, 그리스도가 거둘 최후의 승리를 신비스런 상징이나 비유, 꿈, 숫자등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5) 성서 공부를 위한 기초작업
① 계시 : 숨겨진 것, 알려지지 않은 것, 가리위진 것을 밝히 드러내는 일을 계시라고 합니다. 성서상으로는 하는님이 사람에게 당신 자신에 관해서 밝히 드러내 주시는 일을 계시라고 정의합니다. 이 계시는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던 시대에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마지막 증인인 사도 요한이 기원후 100년 경에 죽기까지 장장 2천여년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우리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라야 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울리는 말씀(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들과 인간의 역사속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행적과 간섭(이스라엘 민족 역사와 함께 하신 일)들이라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성서에 실려있는 내용 전부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하신 것들이며 또한 성서 외에 교회의 온갖 가르침<가톨릭 용어로 성전(traditio)이라함>도 계시에 포함됩니다.
② 구세사 : 구세사란 하느님이 당신 행적과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직접 또는 역사상으로 드러내시고 거기에 인간이 응답함으로써 이룩되고 결정되는 사건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멀리 동떨어진 어느 역사의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동일한 목적에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방향 지워진 사건들, 즉 하느님의 역사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에게 접근해 오시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이야기는 결국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신 당신에게서 멀어져간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이야기는 결국 구원의 이야기 입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인간은 자신의 처지에 눈뜨면서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목격 증인들’이며 후에 ‘말씀의 전달자’가 된(루가1.2 참조)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수해 준 바와 같이 비록 하느님이 사실적(史實的) 계시가 예수의 인격과 구속사업으로 완성을 보았다 할지라도, 이 구원의 역사는 아직도 한창 전개되는 것입니다.
③ 성서 : 성서는 계시와 구세사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 계시를 받았고 그 역사를 살았던 백성 한 가운데 들어오신 하느님의 개입과 뜻에 따라, 기록된 책입니다. 그런 목적에서 특히 보우(保佑)를 입고 비추임 받은 인물들의 손으로 씌어진 책입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계시와 구세사와 성서는 서로 연관이 큽니다. 계시는 구세사의 일부를 이루고 구세사의 특출한 시기들을 가리키며 구세사의 동력(動力)이 되고 있습니다. 성서 역시 구세사의 일부를 이룹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행적과 말씀이 순수하게 보전되고 정확하게 풀이 되기를 바라셔서 당신의 개입의 결실이 세세대대로 계속되면서 모든 사람에게 증언(證言)이 되고, 교훈이 되고, 위안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다른 것들 사이에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한 가지 방식이고, 다른 것들 사이에 하느님을 만나뵙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는 늘(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의미가 무궁무진하며 영원한 가치를 지닌 말씀이 담겨 있고 사건들이 실려있습니다. 대학자들이 수천년 동안 성서 주해를 위해 기울인 노력과 성과는 성서의 단 일면조차 파헤친 것이 못되며 성서의 보고를 파악 하기에는 세상 종말까지 불가능할 정도로 성서는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도 항상 새로운 의미를 던져 준다 하겠습니다.
④ 성서의 영감 : 성서는 여러시대, 여러 저술가들의 손으로 씌어진 여러 권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성서는 한 책, 단일한 책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 성서는 여러 저술가들이 손을 댄 것이기는 하지만, 책임저자(責任著者)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한 책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 얼핏 보기에 성서는 무슨 총서(叢書)처럼 보이지만 그 논리가 일관 되어 있어서 단일한 책이라 하겠습니다.
⑤ 성서의 장(章)과 절(節) : 지금의 성서를 보면 장과 절이 잘 구분되어 있다. 원래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처음 성서를 쓸 때 에는 그냥 붙여서 하나로 쓴 것이었다. 지금의 그런 표시는 나중예 편리하게 성서를 알아듣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때로는 장절이 문장 전체와 잘 맞지 않는 곳도 나타나게 된다.
처음으로 장을 구분한 사람은 프랑스 사람인 파리 대학의 학장이었던 스테파노 랭톤(Stephanus Langton)으로서 그는 1226년에 성서를 장으로 구분 하였고, 동 시대인인 도밍고회 신부 후고(Hug0 de S. Cher +1263)는 이것을 절로 구분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오늘날 처럼 절을 구분한 것은 1551년 파리의 출판업자인 로베르 에스띠엔느(Robert Estienne)이다.
창세기부터 요한의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성서에 전개 되는 논리는 세상에 당신 나라를 세우시는 한 가지 계획입니다. 하느님 아들의 육화를 통해서 인간을 초자연계(超自然界)로 승화 시키고 만민을 구원 하시는 것이 그 계획의 전부입니다. 하느님의 이 계획이 구약에 준비되어 윤곽이 잡혔다가 신약(그리스도)에 이르러 실현을 봅니다. 성서의 일관성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교회 초창기부터 하느님이 성서에 영감(靈感)을 주셨다고 가르쳐 왔으며 그러기에 성서에는 탁월한 진리가 실려 있다고 봅니다.
바오로는 디모테오 서간에서 “성서는 전부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데 유익한 책이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된다”(2디모 3.16 이하 ; 2베드 1.21 이하 참고)고 성서의 영감을 강조 합니다. 성서 저술가는 하느님 이름으로 글을 썼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말씀을 기록해서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성서 저술가가 누구건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서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며, 하느님이 이 책의 저자이시고 또 이런것으로서 교회에 맡겨졌다”(계시헌장 제3장 11항)고 선언했습니다. 하느님의 개입과 역사(役事)가 신비하다면 성서의 영감 역시 신비로운 것입니다.
오 경 입 문
1. 오경의 통일성과 다양성
그리스계에 이어서 라틴계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성서의 첫 다섯 권을 전통적으로 ‘오경(五經 : Pentateuch)’ 이라 부른다. 오경의 원뜻은 ‘다섯 상자’가 된다. 흔히 ‘율법’으로 번역되는 히브리말 ‘토라’가 바로 이 다섯 권의 책을 가리키는데, 이 용어는 다섯 권의 책 각각이 아니라 전체를 가리키며, 법적인 의미에 한정되지 않고, 설화 부분들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과 구원의 역사까지 포함하는 폭 넓은 개념이다. 또한 오경을 ‘모세의 다섯 책’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모세를 입법자,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중개해 준 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모세의 토라는 각각 고유한 문학적, 역사적, 사회적 구조를 지닌 여러 법전들, 그리고 이 법전들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이루기 위하여 하신 일들을 하나로 이어 전하는 큰 설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경의 각 권에 붙여진 제목들 역시 그리스말에서 나왔는데, 이것들은 각 책의 내용에 대한 대략의 개념을 제공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의 기원에 대한 책이라는 의미에서 ‘창세기’, 에집트에서 탈출한 이야기를 전한다는 의미에서 ‘출애굽기’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레위기’라는 제목은 제의법(祭儀法)에서 레위의 자손들이 수행하게 되는 일에 상응하는 것이고, ‘민수기(民數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 조사에서 유래한다. 끝으로 ‘신명기(申命記)’는(이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두 번째 입법’ 이라는 뜻을 지닌다) ‘율법의 되풀이’라는 의미에서 이 제목을 달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전통에 따라 각 권을 시작하는 히브리어 첫 문장의 하나 또는 두 낱말을 제목으로 한다.
이렇게 다섯으로 나누는 것이 토라 전체의 통일성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이 통일성은 한 책에서 다음 책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출애굽기는 창세 46장에 전개된 야곱 가문의 족보를 요약하고, 요셉의 죽음을 알리는 창세기 마지막 절(50, 26)의 내용을 되풀이하며 시작한다(출애 1,6). 출애굽기 다음에 나오는 레위기에서는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의 계시가 계속되는데, 이 계시는 출애 20장에서 시작하여 민수 10장에 가서야 끝을 맺는다.
그리고 신명기는 전체적으로 출애 20장에서 23장에 이르는 법전을 다시 행각하게 하는모세의 열정적인 담론으로서, 이는 선택된 민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서 곧바로 하느님의 뜻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부딪히게 될 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성서의 책들이 장으로 나누어진 것은 중세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는 성서를 읽고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책 전체에 대략적으로나마 규칙적인 구분을 지으려는 노력이었다. 반면에 유다교 전례 봉독 때 이루어지는 단락 구분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성서 본문의 자연스런 구분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본문을 자연스럽게 나눌 경우 그 단락들의 길이는 매우 당양한 것으로 드러난다. 예컨데 요셉 이야기는 현재 여러 장에 걸쳐 전개되는 반면(창세 37과 39-50), 천사들과 사람들의 딸들 사이에 맺어진 혼인에 관한 일화는 단 몇 절일 뿐이다(창세 6, 1-4). 어쨌든 오경에서 현대적인 법전이나 신학 논술에서처럼 엄격한 구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아울러 오경에서 어떤 일정한 연대의 순서를 따라갈 수 있다 하더라도, 오경이 일차적으로 역사 안내서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율법의 역사
오경의 많은 설화들은 율법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예컨뎨 금송아지의 일화는(출애 32-34) 약속의 땅을 향해서 시나이산을 떠나라는 명령, 그리고 “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아라.” 는 계명과(출애 34,17) 함께 이루어지는 계약의 표명으로 끝을 맺는다. 다른 이야기들은 제도의 설정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예컨데 코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은(민수 16-17) 사제직 수행을 위해 아론 가문이 선택되는 것을 설명한다. 창세기는 무엇보다도 설화체로, 그리고 레위기는 특히 법률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창세기에는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할례에 대한 율법이 나오고(창17,9-14), 레위기에는 아론이 사제로 임명되는 이야기가 나온다(레위 8과 9). 유다교 전통은 토라의 법률적인 면에 먼저 주위를 기울인다. 반면에 그리스도교 전통은 설화적인 면에 더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결국 오경 안에서 하느님에 의한 인류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된다.
오경에 대한 문학적인 분석은 그 문학적인 유형들을 어느 정도 구분지을 수 있게 도와주고,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 대한 지식은 그 유형들을 특징지을 수 있게 해준다(형법, 혼인법, 족보 등). 그러나 본문의 분석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는 전체의 전망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매우 다양한 유형들은 일정한 의도와 의미와 함께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 따로, 설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동시에 역사이다. 역사와 율법은 선택된 민족의 것이고, 이 민족의 하느님께서 이루어신 것들이다.
3. 오경의 의의
1) 역사의 종교적 의미
오경은 역사와 동시에 율법으로 제시된다. 이 말은 오경이 교의신학적인 논술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시편의 기도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도움을 간청하고, 지혜문학서들은 개인의 도덕적, 종교적, 교육을 목표로 삼는다. 또한 예언서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힘차게 선포하고 이스라엘과 세상의 죄악을 강력히 고발한다. 이에 반해 오경은 우리에게 어떤 한 민족을 드러내 보여주면서, 하느님께서 이 민족을 어떻게 세우고 보호하셨으며 또 어떻게 기적적인 운명을 향해서 이끄셨는지 말해 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 민족,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온 인류와 맺고 유지하신 관계 속에서 이 책의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다. 오경의 백성은 거룩한 민족, 곧 전적으로 하는님께 봉헌된 백성이다. 이 백성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 달려있다. 고대 근동의 종교생활에서 아무리 중요한 일을 수행한 제도라 할지라도, 예컨데 왕권조차도 이스라엘에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권위는 하느님의 말씀, 곧 모세가 그 중개자였고 사제들이 전승하였으며, 예언자들이 선포하였고 끝으로 율법서에 보존된 말씀만이 지니고 있다. 이 율법은 단순히 법적인 계율들이나 종교 의식, 또는 규정들로 귀착시킬 수 없다. 그것은 이 율법이 하나의 역사에서 탄생하였고, 또한 계속해서 그 역사 속으로 다시 끼어들기 때문이다. 율법은 한 민족을 택하시어 당신 모습에 따라 만드신(“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11,45) 하느님의 교육이며, 결국은 이 백성의 종교적인 사고의 표현이기도 하다.
2) 오경의 그리스도교적 이해
이스라엘 백성이 온 세상에 흩어짐과 더불어 율법서는 이 민족을 하나로 묶는 통일성의 기초가 되고,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존립시키는 요소로 대두된다. 그리하여 오경의 법률적인 면들이 강조된다. 토라, 곧 온 세상에 퍼져있는 유다인들의 일상생활을 주재하면서 이들이 한 민족이 되도록 해주는 율법에 대한 성실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랍비들의 이러한 해석이 보편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보편주의는 유다 민족을 그 중심점으로 하면서 율법에 대한 성실성을 전제할 뿐이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율법의 현실성이 돋보이게 된다.
유다교가 지니는 이러한 항구한 가치 외에, 이졔 그리스도교 해석에 따라서 또 다른 형태의 보편주의가 시작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성서의 약속들이 이미 지켜졌다. 곧 이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고, 새로운 계약이 옛계약을 마무리지은 것이다. 첫 번째 계약의 율법은 이제 역사의 한때에 속한 것이었음이 드러나는 한편,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개방됨과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은 이 역사의 전체적인 지속성으로 세상에 내려진다는 생각이 강조된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이 과정은 멈추지 않고,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는 영원하다. 그래서 유다 백성은 그분께 받은 것을 잘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만이 토라를 통해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마태 5,17) 예수님을 통해서 육화된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는다. 이들은 율법 안에서 자기들의 역사를 발견한다. 이들 역시, 파스카날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며 살아가는 여정에서 공동체를 이룬다.
이들 역시 자기들의 생명이 계약으로써, 곧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위해서 맺으신 계약으로써 결정되었음을 안다. 이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자비와 성실의 징표에서 양식을 얻는다. 오경이 증언하는 사건들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 안에 이루실 업적을 미리 알리고 보인다. 그리고 옛계약의 제도들 역시 새계약의 제도들을 준비하고 그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드러낸다. 성전과 전례에 대해서 말해진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이 몸, 곧 하느님의 영광이 그 위에서 빛을 내는 새로운 성소에 적용된다(요한 2,21). 그리하여 오경은 계속해서 오늘의 인간들에게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함께 나누고, 온 인류를 위해서 이 선조에게 내려진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도 생명의 원천이 된다.
4. 오경의 서론
인간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啓示)는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19세기경에 생존했던 인물로서 히브리 민족의 시조(始祖)가 된다. 그런데 성서는 천지창조와 인간 창조를 서두로 하여 창세기 1-11장까지 인류 최초의 여러 변천사를 묘사한다. 만일 계시가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되었다면,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이야기를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 쓸 수 있었을까?
이 설화(說話)가 실려 있는 책들은 그리스말로 ‘오경(Pentateuco)’ 또는 다섯 두루마리라 하고 히브리인들이 ‘토라(Torah)’라고 일컫는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 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이 책들은 또 ‘모세의 율법’ 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다섯 권의 상당 부분이 이스라엘의 율법과 규정들을 담고 있다. 모세 오경에는 설화(說話) 부분도 상당히 많습니다. ‘토라’라는 말은 원래 ‘가르침’ 또는 ‘교의(敎義)’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은 모세 오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율법에서만 아니라, 자기네 선조들이 겪은 역사에서,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체험에서 ‘자신들의 삶의 규범’을 발견했던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모세 오경에서 하느님과 우주, 인간과 그 기원에 대한 가르침이 여러 문학 형태로 나아 있음을 발견한다. 모세 오경은 현존하는 결정판(決定版)이 나오기까지 기나긴 역사를 거쳐 형성된 문학이다.
모세 오경에 실린 율법과 설화 중의 대다수는 여러 세기 동안 구전(口傳)으로 전승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점차적으로 율법이나 설화의 일부가 한데 수집되고 편집이 되었고, 히브리인들이 바빌론 제국에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던 시기와, 유배생활 직후(기원전 586-538) 이전이 수집된 모든 자료를 한데 수집하고 편집하여 결정판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전승들이 역사이든 율법이든 간에 아주 다양한 사상적 환경에서 수집되고 전래 되었다는 견해에 일치하고 있다.
왕궁과 그 측근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사제단(司祭團)과 여러 예배소 혹은 성소(예 : 예루살렘 외에도 베델, 길갈, 실로와 같은 장소)에서 형성된 전승이 있고, 예언자와 그 제자들의 집단에서 수집 정리된 전승들도 있다. 이렇게 집단에 따라서 달리 형성된 전승들은 제각기 특이한 색채를 띠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종을 이루는 사료(史料) 넷을 골라 학자들은 편의상 다음과 같은 명칭을 붙였다.
① 야훼계 전승( J ) : 처음부터 하느님을 ‘야훼(Yhwh)'라고 호칭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이 전승은 제일 먼저 작성된 문헌이라고 추정이 되는데 솔로몬 이후에 남쪽은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 이렇게 구분이 되었을 때, 남쪽 유다 왕국에서 누가 작성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작성이 되었다. 이 전승에서 왕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고, 신앙의 일치를 이루는 것은 바로 왕이다.
② 엘로힘계 전승( E ) : 하느님을 ‘엘로힘(Elohim)'이라고 호칭한다. 이 전승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어떤 사람에 의해서 작성이 된다. 엘리야나 미가와 같은 예언자들의 메시지로서 매우 특징적인 모습을지니고 있는 이 전승은 예언자들에게 역점을두고 있다.
③ 신명기계 전승( D ) : 이 전승은 이스엘이 바빌론 유배생활을 거치고난 다음에 이제 자기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깊은 반성과 회개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 깊은 반성과 회개의 하나의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 출애굽 정신을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출애굽정신을 잊어벼렸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제 지금이라도 정신차리고 출애굽정신으로 돌아가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십계명에 충실하자, 충실해야만이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의 정신을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조하기 위해서 이 신명기계문헌이 작성이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요시아라는 왕이 종교 쇄신운동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정신적 토대가 된다.
④ 제관계 전승( P ) : 사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예식, 제사행위, 또 사제들의 삶에 대해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 제관계 문헌이라고 볼 수 있다. 제관계 문헌이 가장 집중적으로 작성이 되어 있는 것이 레위기이다.
야훼계 전승과 엘로힘계 전승은 주로 설화(說話)를 담고 있고, 신명기계와 제관계 전승은 율법(律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모세오경은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와 특히 신학사상을 풍부하게 전해줌으로써 실제적으로 그 과거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옛 글을 통해서 ‘오늘’ 인간에게 말씀을 계속 하시는 것이다.
5. 오경의 내용과 요약
모세 오경의 내용을 보면, 절반 가량은 율법으로 되어있고 그 나머지는 설화로 되어있는데, 설화 부분이 오경 전체에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이 설화 부분에서는 창조에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인류의 종교적 역사를 아주 일반적인 말로 서술하고 있으며(창세 1-11장), 이어서 성조들의 역사(창세 12-50장)와 에집트 탈출에 관계된 사건들과 광야에서의 방랑(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오경의 법률 부분은 후자의 사건들 특히 광야에서 방랑 중에 맺은 시나이 계약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율법(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전례적 법을 포함한)은 선택된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 주는 것이며, 그것은 실제의 형성기와는 관계없이 항상 시나이 계약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 개념이 법 개념을 결정지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세 오경의 편찬자의 목적은 시나이 계약과 그 계약의 체결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그들이 어떠한 민족이며, 어떤 기원에서 형성되고, 하느님에 의해 어떻게 운명 지어졌는가를 이야기 하는데 있었다. 그의 기본 계획은 먼저 시나이 계약에 이르기 까지의 예비적 사건들을 말하고, 다음에 시나이 계약 자체를 기술하고, 끝으로 그 계약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 주요 사건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창세기 1 - 11 서사 : 하느님과 사람에 관한 기본 진리(1-2장) : 구원의 첫 섭리(아담과의 계약)의 파탄(破綻), 그러나 인류가 궁극적으로 악(惡)을 누르고 승리하리라는 약속(3, 15) : 첫 타락 후 점차 심해간 퇴패적 경향(4-11장) 등을 묘사하고, 인간이 악의 세력을 정복하려면 하느님편에서의 저극적 간섭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세기 12 - 36장 : 선택된 한 가정을 이교 세계와 분리시키고 결국은 그 이교 세계에도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한 준비 - 메소포타미아 출신인 성조(聖朝) 아브라함의 가족과 그 혈통을 이은 이사악과 야곱과 이스라엘 12부족(지파)의 이야기. 성조들 및 그들의 자손들과 맺은 둘째번의 절대적 계약의 이야기(15-17장).
창세기 37 - 50장 : 야곱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 12부족을 섭리적으로 에집트로 이주시켜 그곳에서 성장 발전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백척 간두(百尺竿頭)의 결정적 순간에 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결합케 할 준비를 시킨다.
출애굽기 1 - 12장 : 이 겨레를 하나의 새로운(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직접적인 사건들, 즉 에집트 인들의 압박, 모세가 그들의 영도자로 등장하기 까지의 준비,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기적적 간섭과 재앙등의 이야기.
출애굽기 13 - 18장 : 결정적 사건인 에집트의 노예살이 에서 자유를 찾은 탈출 이야기. 시나이 계약에 이르는 과정의 준비 사건들을 묘사한 데 이어 시나이 계약 자체를 기술한다(출애 19-24장). 이 계약은 이스라엘을 새로운 백성으로 탄생케 하여 이 지상(地上)에서의 하느님 나라의 개기(開基)로 삼음으로써, 이에 앞선 모든 사건들의 절정을 이룬다.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근거로 한 일종의 조건부 계약인 시나이 계약은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깨뜨려지고 하느님에 의해 물리쳐진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언자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신약으로 알고 있는 새로운 계약을 약속하신다. 이 신약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고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성취하게 된다.
출애굽기 19 - 24장 : 이스라엘이 신정 민족, 즉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출애굽기 25 - 40장 :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는 성막과 결약의 궤에 머무르신다.
레위기 1 - 27장 : 하느님은 당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해지기를 요구하신다.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은 성막과 결약의 궤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민수기 1 - 36장 :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나이에서 팔레스티나로 인도하여 약속의 땅을 점령케 하신다. 이스라엘의 사회적 공동생활도, 성막도 결약의 궤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신명기 1 - 34장 : 설교의 양식으로 하느님과 인류와의 모든 통교(通交)의 기초인 사랑을 강조하며, 모세오경의 전체 내용을 요약한다.
모세오경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느님의 영원한 눈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맨 처음 창세기부터 끝의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당신 앞에서는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시는 한 저자 곧 하느님에 의해 씌어진 한권의 책으로 보아야 한다. 예컨데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과 갈바리아에서의 그 성취, 시나이에서 세워진 신정 왕국과 성령강림으로 창건 된 그리스도 교회, 이 왕국의 백성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약속의 땅과 선택된 자들을 위해 천국에 마련된 지복직관(Visio beatitica)등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는 동시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모세오경은 성서라는 방대한 책의 처음 다섯 장(章)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무대(舞臺)를 설정하고, 주요 등장 인물들을 소개하고, 기본 줄거리를 소묘(素描)하고 있다. 신약성서는 그 책, 즉 구원의 역사의 마지막 장(章)들이다. 신약이 없으면 성서는 결말이 없는 소설 즉 해결을 보지 못한 탐정 소설과도 같이 되어 버린다.
구약이 없으면 신약은 허공에 떠 버린다. 구약 성서를 완전히 알아야만 신약 성서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또 한편 하느님의 사랑의 절정인 신약 성서를 올바르게 인식하여야만 이 절정에 희망을 둔 사랑의 첫 교섭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구약 성서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고 또 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모세오경 형성의 역사>
성 조 시 대 |
기원전 1800 - 1300년경 --- 구약 전승의 시작 |
모 세 시 대 |
기원전 1300 - 1250년경 --- ↓ |
부족 동맹시대 |
기원전 1250 - 1000년경 --- 설화가 구전 형태를 갗춤 |
왕정시대 (다윗-멸망) |
기원전 1000 - 587년경 --- 오경의 기록이 시작됨 |
유배와 복구시대 |
기원전 587 - 400년경 --- 오경의 완성 (경전) |
창 세 기
1. 입 문
창세기는 오경의 첫 번째 책이다. 이책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기원,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시는 하느님 활동의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창세기는 토라(또는 모세의 율법)의 일부를 이루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민족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의 ‘아버지들’), 그리고 신앙인들이 자기들의 선조로도 받아들이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창세기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며, 유다 민족과 그리스도의 교회와 더불어 온 인류와 관련되는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창세기는 선조들의 생애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전하는데, 이것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준비할 목적으로 아브라함과 그 가정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심을 드러낼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는 선조들의 이야기 앞에 나오는 일종의 서론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서론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세상의 여러 민족들 가운데 배치 시키면서, 성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설화들을 담고 있다. 창조, 아담과 하와, 노아의 홍수, 바벨탑 등, 인류의 지상 여정 그리고 그들의 활동과 실패에 대하여 인상적으로 요약한 것들이다.
이러한 창세기,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이야기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그 역동성 안에서 파악해야 하고, 그 이야기들을 다른 것들과 관계없는 단편들로 분해해 버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 책의 널리 알려진 부분들 가운데 어떤 한 부분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경우에도 다음의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곧 오경 입문에서 강조된것처럼, 창세기가 선조시대에 대한 일종의 역사서로서 독립적인 작품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당신의 증인으로 세우시려고 하느님께서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어떻게 당신의 백성을 뽑아 이루시는지를 이야기하는 광범위한 전체의 시작일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아울러 창세기가 단숨에 저작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 동안 계속된 문학적인 작업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자기네 선조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겪어야 했던, 때로는 고통스런 체험들도 반영한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성쇠와 관련해서 끊임없이 다시 풀어 읽히는 살아있는 전통을 전제로 한다.
현재의 창세기 본문은, 자기들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업적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필연적으로 되풀이해서 깊이 생각한 결과라는 사실을 함께 고려할 때에만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업적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본문의 여러 편집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 후대의 편집 작업들은 그 기초가 된 최초의 초고를 파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계시들과 더불어 그것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2. 구 성
창세기는 통상 두 부분으로 나눈다. 곧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게 된 인류의 시작을 다루는 1-11장과 선조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12-50장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다시 아브라함(12-25장), 이사악과 특히 야곱(26-36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에(37-50장) 대한 세 개의 서로 이어지는 설화들로 세분된다. 이를 ‘종적’인 구분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구분은 창세기의 내용을 말해 주기 때문에 편리한 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구분, 곧 성서의 이 첫 번째 책이 창세기 50장을 넘어서는 여러 문학적인 지층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횡적’ 구분을 선호할 수도 있다.
이들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서로 중첩되기는 하였지만 오경 전체를 통해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창세기라 부를 수 있는 야훼계 설화는 이미 현재의 창세기가 ㄹ보여주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 야훼계 저자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동물과 식물 사이에서 살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말을 들음으로써, 에덴에서 쫓겨나 고통과 혼돈과 분열 속에서 살게 된다(2-4장). 인류는 자기들 사이의 일치를 이루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11장).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진정한 모임을 준비하시고 또 그것을 실현하신다. 그렇게 해서 그분께서는 노아를 홍수에서 건져내시고(6-9장)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 안에서 당신의 복을 받도록 하신다(12장). 아브라함 선조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성소에서 저 성소로 옮겨다닌다. 그러면서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는데, 이스마엘의 탄생과(16장) 이사악의 탄생이(18-21장) 그 약속을 보증한다. 아브라함의 설화는 이사악이 메소포타미아의 아람 땅에 사는 친척 쳐녀와 혼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24장).
아브라함의 상속자에 대한 전승은, 비록 자기 아버지에 대한 전승들보다 더욱 견고하게 대지와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수가 많지 않을 뿐더러 별로 두드러지지도 않는다(26장). 이사악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장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통일을 이루게 되는 열두 지파의 선조인 야곱에 의해서 압도된다. 이 야곱은 생의 대부분을 약속의 땅 밖에서 지낸다. 그는 또한 일생 동안 하느님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투쟁을 벌여야 하는 인간이기도 하다(32장).
실제로 야곱은 지속적으로 자기 부인의 민족인 아람인들, 이스라엘의 형제 민족인 에돔족의 조상인 에사오, 또 가나안의 주민들과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34장). 그러다 그는 에집트에서 생을 마친다. 창세기는 야곱의 아들들의 역사와 함께 끝을 맺는다. 이들 가운데서 유다와 더불어 요셉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형들은 요셉을 제거하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에집트로 ㄹ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을 굶주림에서 구해 낸다. 야곱은 숨을 거두기 전에 자식들에게 축복하는데, 유다를 그들의 임금으로 지명한다(49장). 야곱에 이어 요셉도 죽는다.
이로써 요셉은 자기 가족들을 머지않아 노예생활을 하게 되는 땅에 그냥 놓아둔 체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에집트에서 살게 된 선조들의 해방은 창세기에 이어지는 책, 곧 출애굽기의 주제가 된다. 왕조시대에 저작된 것이 틀림없는 야훼계 설화는 지방 및 씨족 전통들 가운데서 첫 번째로 문학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 설화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약속, 그리고 이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겪게 되는 어려움을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상기시킨다.
왕국의 분열로 인한 하느님의 백성이 누리던 일치의 파괴, 그리고 그것에 이어지는 어려운 시기는 이스라엘에게 선조들의 역사에 대한 수정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보완을 요구하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엘로힘계 전승이 두 번째 문학적 지층을 이루게 되는데, 그 범위와 중요성을 밝혀내는 작업은 쉽지가 않다. 이 전승의 어조는 앞선 야훼계 문헌보다 더욱 간결하면서 그보다 덜 낙관적이다. 또한 이 전승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사에 덜 직접적으로 개입하시고, 당신의 종들에게서 무엇보다도 먼저 순종을 기대하신다. 이 전승 안에서 가끔 예언 현상의 영향을 알아볼 수 있다. 예컨데 아브라함은, 하느님 때문에 신앙의 시련을 겪게 되는(22장) 예언자로서 받들어진다(20,7).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참혹한 몰락으로 선조들의 발자취에 대한 서술을 새롭게 수정해야 했다. 이 작업은 메소포타미아에 유배 간 사제들에 의해서 수행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사제계 문헌은 하느님의 업적의 제의적 그리고 법률적인 면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노아의 계약을 이어받고(9장) 시나이 계약을 준비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강조하게 된다(17장).
이 사제계 전승은 세상 창조와 더불어 성역사(聖歷史)를 시작하게 함으로써(1장), 창세기의 이야기에 결정적인 짜임새를 부여하고, 족보와 연대기적인 자료를 통해서 인류 운명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계약 또는 특수 규약의 제정으로 표시되는 여러 단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단계 곧 창조에서 노아까지, 그리고 노아에서 아브라함에게까지 이르는 단계를 거쳐서 이스라엘은 결국 뭇민족들 사이에서 유일하신 하느님께 참다운 예배를 드리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3. 주제와 인물
창세기는 풍부한 주제와 인물들을 담고 있다. 이들은 성서의 다른 구절들에도 나올 뿐만 아니라, 유다교 전통은 물론 그리스도교 전통도 이들에 대한 깊은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창세기는 창조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이 이야기는 시편들에서 불려지고(시편 8 : 104) 욥기의 저자에 의해서 상기되며(욥 38이하), 제2이사야에 의해서 되새겨 진다(이사 40이하). 에덴 동산에서 보인 아담의 자세는 바오로 서간에서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사세와 비교된다(로마 5 : 1고린 15). 노아 홍수의 이야기는 종말의 극적인 사건의 배경(마태 25) 또는 세례성사의 예형(豫形)으로 사용된다(1베드 3).
아브라함의 운명은 약속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 약속은 이후 하느님에 의해서 끊임없이 확인된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의 가까운 자손들, 그리고 먼 후손들의 미래를 밝혀주고 결정짓는다. 이러한 약속의 성취를 선조들, 그리고 여호수아 때와 다윗 때에 이스라엘 전체가 고대하였고, 사도바오로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음으 경축한다(갈라 3). 이사악의 희생제사는 선조들의 은덕을 기리는 랍비들의 주의를 끌었고, 초세기의 교회에서는 성금요일에 대한 예형이 된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신학은, 세상 기원의 신비와 그 운명의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 업적의 첫 단계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대대로 성서의 이 첫 번째 책을 읽고 또 읽는다. 사실 창세기는 개인과 민족들이,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하느님 사랑의 의지 안에 삶의 뿌리를 내리도록 해준다.
창세기의 몇몇 인물들이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야훼계 전승이 섬세하고 심오하게 그려낼 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도록 초대하는 아담과 하와부부; 주님의 은혜를 받고 그분의 명령으 수행하는 노아;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과 회교도들까지도 존경하는, 신앙인들의 선조로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투신한 믿음과 소망의 증인인 아브라함;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로 태어났지만 끊임없이 위협받고 결국 자기 가족들의 음모 앞에서 농간당하는 이사악; 가까운 친척들과의 끊임없는 대결 상태에서 속고 속이며 살았고, 하느님의 강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으며, 하느님을 만난 결과로서 자기 몸에 계속 그 흔적을 지니고 산 야곱; 잊혀진채 무죄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지만, 에집트의 재상이 되어, 결국 그러한 운명으로써 모든 것을 당신의 선택된 이들의 선에 기여하도록 만드시는 주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요셉등이다.
이러한 남성들과 더불어 선조 전통들 속에서 여인 또는 어머니가 수행하는 일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다. 뱀의 유혹에 빠지긴 하였지만, 전 인류의 어머니가 되도록 부름을 받는 화와(3장); 약속된 아들 이사악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을 듣고 웃는 사라(18장); 자기가 더 좋아하는 아들 야곱을 위해서 음모를 꾸미는 리브가(27장); 갈등 속에 살아가는 레아와 라헬(29장 이하); 보디발의 아내(39장) 등등, 이들은 성서 전통이 제시하는 대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아담과 아브라함과 이사악 등과 함께 소개되는 여인들이다.
주제와 인물들과 관련한 창세기의 풍부함은 성서의 세계로 들어 가는 하나의 문으로서 신앙인들은 그 앞에서 크게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4. 명 칭
창세기는 모세오경의 첫 번째 책으로 우주와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전제하면서 히브리 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기원(起源)’을 뜻하는 그리스어 ‘게내시스(Genesis)’ 라는 이름이 붙었고, 우리말로는 ‘창세기(創世記)’ 라고 일컫는다.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태고(太古)에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태고사(太古史)를 알지 못한다면 구약도 신약도 이해하지 못한다. 창세기는 태고사와 성조사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5. 구 분
① 태고사(원역사) : 1장 - 11장
1장 : 세계와 첫 인간들의 창조
2 - 3장 : 낙원과 타락(3장 원죄)
4 - 5장 : 홍수에 이르기까지의 인류(4장 카인의 죄)
6 - 9장 : 홍수설화
10 - 11장 : 성조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류 (11장 바벨탑)
② 성조사 : 12장 - 50장
12 - 25장 : 아브라함과 그의 가문
25 - 26장 : 이사악과 그의 가문
27 - 36장 : 야곱과 그의 가문
37 - 50장 : 요셉 설화
원
역
사 |
(1,1 - 2,4a) 세상, 인간, 창조 |
(2,4b - 3,2) 낙원과 범죄 |
(4,1 - 16) 카인의 살인 |
세 상 과 인 류 의 기 원 |
자 연 ․ 문 화 ․ 풍 습 ․ 종 교 ․ 정 치 의 기 원 | |
(4,17 - 24) 카인의 족보 |
(4,25 - 5,32) 셋 족보 | |||||
(6,1 - 9,17) 홍수와 노아 계약 |
(9,18 - 29) 노아의 저주와 축복 | |||||
(10장) 민족들의 계보 | ||||||
(11,1 - 9) 바벨탑 | ||||||
(11,10 - 32) 셈 족보 | ||||||
성 조
사 |
(12 - 25장) 아브라함의 역사 |
이 스 라 기엘 원의 | ||||
(26 - 36장) 이사악과 야곱의 역사 | ||||||
(37 - 50장) 요셉의 역사 |
③ 창조적 이야기의 형태
혼돈
첫 날 : 빛과 어둠(낮과 밤) -----------------나흗날 : 해, 달, 별
이튿날 : 창공(물을 갈라놓음) ----------------닷샛날 : 새와 물고기
사흗날 : 마른 땅, 풀과나무 ------------------엿샛날 : 육지동물, 남자와 여자
휴식
④ 창조 이야기의 목적 : 휴식, 질서
⑤ 하느님의 이름
엘(El) - 하느님에 대한 셈어의 일반적인 칭호
엘 샤다이(El Shaddai) - 전능하신 하느님 : 17, 1 ; 28, 3 ; 35, 11
엘 올람(El Olam) - 영원하신 하느님 : 21, 33
엘 엘리욘(El Elyon) -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 14, 22
엘 베델(El Bethel) - 베델의 하느님 : 31,13 ; 35, 7
엘 로이(El Roi) -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 : 16, 13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홀(Nahor)의 하느님 : 31, 53
이사악을 돌보시던 두려운 분 : 31, 42
야곱의 강하신 이 : 49, 24
⑥ 신약에 나타나는 창세기
창조 1, 1 - 요한 1, 3 ; 히브리 11, 3
결혼과 이혼 1, 27 - 마태오 19, 4-5
하와의 범죄 3, 6 - 2고린 11 ,3
아담의 범죄 3, 6 - 로마 15, 12-21
아벨의 예물을 반기심 4, 4 - 히브리 11, 4
카인의 살인 4, 8 - 1요한 3, 12
에녹의 승천 5, 24 - 히브리 11, 5
노아의 구원 6, 8-13 - 1베드로 3, 20
아브라함의 소명 12, 1 - 히브리 11, 8
멜기세덱의 사제직 14, 18 - 히브리 7, 1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19, 24-25 - 마태오 10, 15
이사악을 제물로 바침 22, 9 - 히브리 11, 17
에사오가 장자권을 팔았다 25, 33 - 히브리 12, 16
야곱이 요셉 아들들을 축복함 48, 15 - 히브리 11, 21
요셉의 유언 50,24 - 히브리 11, 22
묵상 :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6. 내 용
제 1 부 : 태고사(1장 - 11장)
1, 1 - 2, 4a --- 세계와 인간의 창조 : P
2, 4b - 25 --- 남자와 여자의 창조 : J
3, 1 - 24 --- 원조의 범죄와 처벌 : J
대홍수에 이르기 까지의 인류 사건들 : 4, 1 - 5, 32
4, 1 - 16 --- 카인과 아벨 : J
4, 17 - 26 --- 카인과 셋의 후손들 : J
5, 1 - 32 ---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계보 : J, P
노아의 대홍수 : 6, 1 - 9, 29
6장 - 8장 --- 천상존재들과의 결혼과 노아의 홍수 : J, P
9, 1 - 17 --- 노아와의 계약 : J, P
9, 18 - 27 --- 노아의 후손들 : J
10, 1 - 32 --- 지상에 퍼진 인종들 : J, P
11, 1 - 9 --- 바벨탑 : J
11, 10 - 32 --- 셈과 데라의 후손 : J, P
천지와 인간 창조에서 아브라함까지의 역사를 전하는 태고사는 ‘원역사’라고도 한다. 태고사는 성조사와 더불어 오경 전체의 서론을 이루면서, 직접으로는 성조사의 서론을 이룬다. 하느님은 어떠한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닌 자유로운 상태에서 전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고(1,1-2,4), 인간에게는 특별한 위치를 부여한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의 행복을 교만하게 불순종함으로써 잃어버린다(2,3-3,24).
카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는 서로 갈라진다(4,1-16). 카인 가문은 문화적으로는 매우 활발하나 윤리적으로는 좋지 못한 반면(4,1-16), 아벨을 대신한 셋의 가문은 매우 종교적이다(4,25-5,32). 이리하여 아담에서 셋을 거쳐 노아까지 이른바 홍수 이전의 조상을 이룬다.
노아에 이르러 인류의 죄악이 절정에 달하자, 하느님은 의인인 노아와 그의 자녀 외에는 전 인류를 홍수로써 멸망시킨다. 홍수가 지난 뒤에 배에서 나온 노아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새로운 아담이 되며, 이제 그로부터 새로운 인류 역사가 펼쳐진다(6,1-9,17). 노아의 아들 함은 부친께 대한 불경으로 저주를 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는다(9,18-29). 이 세 아들의 후손들이 여러 민족들의 조상이된다(10장). 인간의 수가 많아지자 개인적으로가 아니라(3장) 집단적으로 하느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교만 때문에 인류는 풍습과 언어적으로 갈라진다(11,1-9). 마지막으로 홍수 이후 셈에서 갈려진 인류를 다시 모으는 역할을 아브라함의 탄생까지의 족보가 소개된다.
태고사는 오직 야훼계와 사제계 사료로만 엮어져 있다. 야훼계 사료는 전체의 사건과 줄거리를 이루며, 사제계 사료는 창조와 홍수 이야기 외에 족보 등을 통하여 야훼계 사료를 보충․연결시키면서 독특한 사상을 반영시킨다. 엘로힘계 사료는 여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데, 원래 엘로힘계 사료가 성조사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최종 편집자인 사제계 사료의 저자가 그의 사상에 맞지 않아 엘로힘계 사료의 태고사 부분을 제거 시켰기 때문인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야훼계 사료와 사제계 사료에 나타난 태고사의 저작 동기와 노선은 대강 다음과 같다. 이 저자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왕조 초기(950년경)와 유배중이나 그 후 시대(600-400년)에 주변 국가들처럼 역사를 서술하면서 왕이나 백성의 조상의 역사를 삽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과거의 중요한 사건들을 수집하는 가운 데에 성조사를 꾸미게 되었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과 인류의 기원 역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느님에 의한 구원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태고사에도 이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는 하느님은 세상과 자연과 전 인류의 역사도 주관함을 나타낸다. 태고사는 이런 의미에서 저자들이 처한 현재의 입장에서 되돌아 본 과거에 대한 신학적 해설이다. 그래서 저자 또는 편집자들은 태고사를 다음과 같은 도식에 의해 전개시킨다.
구원 역사의 시작으로서의 하느님의 창조 - 인간의 범죄로 인한, 하느님으로부터의 점진적인 이탈 - 새 창조를 위한 하느님의 개입 - 백성의 해방과 선택에 의한 새 창조.
태고사의 문학 유형과 역사성은 아래의 내용에 대한 해설 부분에서 띄엄띄엄 언급되겠거니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담은 인류 시조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쓰이고(1-4장), 카인은 농민을, 아벨은 유목민을 대표하고 있다. 그 외에 죄, 남녀의 사랑, 고통, 산고, 옷, 죽음, 여러 언어, 종족, 풍습 등 인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아카디아, 에집트, 바빌론 등 주변국가의 영향을 받아 신화, 전설, 원인론(原因論 aethiologia), 족보 등 다양한 문학양식을 사용하여 이야기 또는 역사적 사실과 같이 풀이한 것이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땅과 갖는 관계이다. 하느님께서는 흙을 취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2, 7). 따라서 흙은 그의 전 삶의 모태가 된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과 땅과의 싸움이 시작된 이래 그 관계는 끊어지고 서로 멀어지게 되었다. 인간 때문에 땅에는 저주가 내리고, 땅은 쉽사리 결실을 내주지 않으려 한다(3, 17-19). 그러나 인간과 땅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끊기게 된 것은 땅이 카인의 동생의 피를 마셨을 때이다(4, 10-12).
야훼계 문헌에 의하면, 이 무서운 저주는 노아가 포도밭을 경작하기 시작할 때 은혜롭게도 약간 완화된다. “이 아들은 야훼께서 땅을 저주하시어 고생하며 일하던 우리를 한숨 돌리게 해주리라”(5, 29). “노아는 포도를 가꾸는 첫 농군이 되었다”(9, 20).
첫 원조의 옷 입음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가리웠고(2, 7), 나중에는 그들이 서로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 하지 않도록 야훼께서 불쌍히 보시어 그들을 입히신다(3, 21). 하느님은 스스로 그들의 수치를 가려 주시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공존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시고 동시에 인간문화의 한 근본적인 요소(의복)를 이루어 주신다.
카인의 이야기는 인간 생활의 분화와 그 반목을 보여 준다. 즉 목동의 삶과 농부의 삶이 그것이며, 앞으로 분화는 점점 더 심화된다. 카인의 후손의 계보를 보면 문화사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도시의 독특한 공동체적 삶 이외에 목동, 음악가, 대장장이가 등장한다. 그 중 대장장이는 인류문화의 역사에 결정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 즉 칼을 만들어낸다. 야훼계는 이 발명이 즉시 인간을 악으로 유혹하였음을 재치있계 이야기하고 있다(4, 22-24). 문화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현상이 바벨 탑 이야기에서 소개된다.
큰 문명화는 일반적으로 커다란 이주에 의해 야기된다. 인간은 서로 모임으로써 역사를 이루어나가고 또한 그들은 크나큰 문화적 잠재성을 지니게 된다(11, 3-4).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달라지게 되고 그들의 공동 삶은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 그들은 경졔적 일치에 몰두하게 된다. 이렇듯 바벨 탑 이야기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모든 인간 문명의 원형과 그것을 아래에서 지탱해주는 힘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 일치와 거대함에 대한 강한 의지(공포의 혼합과 함께)로 인해 인간은 거대한 기술사업을 펼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벨 탑 이야기는 이 ‘거대주의’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가장 큰 ‘위협’을 끼친다는 사실과 인간의 거대한 문명사업에는 하느님 자신에 대한 공격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순박한 순종에서 벗어남으로써, 불순종으로써 얻은 지식과 더불어 더욱더 강해지고 거대해지게 된다. 천상존재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6, 1)나 바벨 탑 이야기(11, 1이하)에서 우리는 거대함에 대한 인류의 잠재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문화적으로 거대해짐에 따라 인간은 점차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어 가고 종국에는 ‘재앙’으로 끝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계의 태고사를 정당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더 언급 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 참된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태고사의 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12장 1-3절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신학적 관점으로는 다시 말해 이 복잡한 범죄사에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무엇을 했느냐는 것과 인간이 하느님의 질서를 점점더 위반함에 대해 그분이 어떻게 반응을 보이셨느냐는 것이다. 이야기는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시작된다.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모든 가능한 보살핌을 계획하셨다. 그렇지만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 당신 자신과 인간 사이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의지였다.
히브리어 용법에 따라 설화자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단순한 지성의 활동보다는 훨씬 더 큰 의미를 뜻하고 있다. ‘야다’(yada=알다)란 단어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과 동시에 모든 것과 모든 비밀에 대해 능통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선과 악’은 일방적으로 도덕적인 의미로 이해 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존재와 삶을 신적으로 중대하려고 함으로써, 다시 말해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라는 단순함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낙원에서의 삶과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는 삶을 박탈 당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 이라고는 악의 세력과의 암담한 싸움과 고된 세상 한가운데서의 노고의 삶이었고 그의 운명은 결국은 예외없이 죽음으로 끝나고만다.
첫 아들 카인은 자기 동생을 질투해서 그를 죽인다. 하느님 께서는 흘려진 피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살인자를 저주하여 비옥한 경작지 밖으로 내쫓으신다.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떠나게 된다(4, 16). 비록 동생을 죽인 자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목숨만은 보호하신다(4, 15). 하지만 칼이 인간 역사에 들어온 이상 카인의 후손들 안에 복수심과 보복심의 중대는 피할 수 없게 된다(4, 23-24).
더욱 큰 재앙이 일어난다. 즉 천상의 존재들이 인간과 성관계를 맺는데(6장), 이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창조질서를 새로이 손상하는 것이었다. 이 재앙은 이전의 어떠한 것들 보다도 더 심각한데, 이는 인간 세계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 인간과 천상존재 사이의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당신 창조물의 이러한 타락에 당면해서 하느님께서는 홍수의 심판으로 인류를 멸망 시키신다. 그러나 단 한가족(노아의 식구들)은 살려 두신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홍수 이후의 이 새로운 인류가 “어릴적부터 악하다”(6, 5 : 8, 21)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만, 이제 노아로부터 말미암은 새로운 인류에게 자연질서의 ‘항존’을 장엄히 보장하신다. 이러한 자연질서 항존의 약속에서 인간은 처음으로 하느님의 인내로운 ‘관용’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또다시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오만으로 거대한 탑을 세우려 한다(11장). 다시금 새로운 재앙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일치를 깨려고 결심하시계 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섞어 놓으셨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들로 인류를 나누어 버리신다.
제관계 문헌은 인류의 태고사를 훨씬 더 간단한 방법으로, 다른 신학적 견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땅은 부패했고 폭력으로 가득찼다”(6, 11-13)고 아주 함축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그리고 죄의 현상예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 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적인 것에 대한 정의(하느님의 행동과 그분의 특성)에 집중하고 있다. 제관계 편집자는 야훼계보다 홍수의 재앙을 훨씬 더 크게 보도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생명 보존에 관계 되는 규정들을 순전히 은총의 결과로 보고 있다(9, 1이하).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맺음으로써 (9, 8 이하) 우주의 물질 존재의 지속을 보증하시기까지 한다. 하느님의 변함 없는 성실하심(이는 그분의 은총의 결과이다) 안에서 바로 구원역사가 정한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인간학적 관점으로는 야훼계의 태고사 묘사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종합해 넣는다는 점에서 야훼의 행위만을 전적으로 보도하는 제관계와 구분된다. 야훼계는 죄를 인간적인 현상으로, 특히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현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야훼계는 독자로 하여금 유혹을 그럴듯한 유인(誘引)들의 복합적인 과정으로 보게 한다(3, 6).
원조에게 있어서 타락의 첫 번째 표시는 ‘부끄러워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들의 전 신체적 본성에 침투해 있다. 여기에 두 번째의 표시인 ‘두려움’이 따른다. 이들 감정은 깨닫기도 전에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정신이 들어 의식적인 반성을 하게 되자 죄를 ‘전가’ 한다(3, 12.13.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뱀에게 속아서---”).
즉 인간에게서 인간에게로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하느님께로의 죄의 전가이다. 끝으로 심판은 인간의 상태에 근본적인 ‘분열’을 초래한다.
이제 시작된 악과의 투쟁, 여자의 종속적인 위치, 아기를 낳기 위해 겪는 고통, 쉽게 결실을 내지 않는 땅과의 투쟁이 그것이다. 카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죄에 의해 형성된 인간상에 또 다른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된다. 동생에 대한 카인의 증오는 그의 얼굴까지 찡그리게 한다(4, 5).
그의 후손 사이에는 복수심이 한없이 증가해 간다. 천상존재와 인간의 뒤섞임에 의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생명의 조건은 완전히 무질서해지기 시작한다. 신적 생명이 인간적인 생명과 뒤섞이게 되고, 이것은 창조를 거스르는 악마적인 초인간류(‘느빌림’)로 나아갈 뿐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의 수명을 제한하심으로써 그들을 통제하셨다. 바벨탑 이야기는 이미 언급된 언어의 현상과 기능(2, 19-20)을 상기 시킨다. 거기서 언어는 창조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며, 이 언어로써 인간은 주변 세계를 개념화 시키는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의 원초적 기능의 인간 서로가 의사 소통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을 파악하고 그들을 분류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 인간은 모두 동일한 언어로 말했으나, 바벨탑 이야기에 이르러서 언어는 새로운 측면으로 등장하게 된다. 즉 언어의 다양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보호’ 하시려는 개입 뿐 아니라 또한 ‘처벌’ 하시려는 개입의 결과이다.
① 세계와 인간의 창조 (1,1 - 2, 4a)
모두 제관계 사료로 이루어진 창조설화(創造說話)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시적으로 노래하는 일종의 창조찬미가이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는 거창한 선언에 있어서 ‘하늘과 땅’은 ‘만물’을 가리킨다. 다만 창조설화에 있어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성서 작가가 히브리인들과 나아가서는 전인류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와 그 진리를 펴는 설화이다.
성서 작가의 진리는 이것이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은 는 존재해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무(無)에서부터 지어 내셨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한마디로 간추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주를 이루는 주요한 요소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들어가면서, 그것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의지(意志)의 행위(行爲)에 의해서 쌍에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 목차(目次)는 한 주간의 6일이라는 선이 분명한 구도(構圖)를 따르고 있다. 그것도 3일씩 나눈 전후기(前後期)로 짜여 있다. 전기 3일은 공간이나 환경이 만들어지는 기간이요, 후기 3일은 그 공간을 채우는 사물들이 창조되는 기간이다.
전기 3일 후기 3일
첫 날 : 빛과 어둠 (낮과 밤) 나흗날 : 해, 달, 별
이튿날 : 창공, (물을 갈라놓음) 닷샛날 : 새, 물고기
사흗날 : 마른땅, 풀과 나무 엿샛날 : 육지 동물, 남자와 여자
처음 사흘간의 작업은, 다음 사흘간의 창조 될 피조물을 위한 ‘공간’ 내지 환경을 마련하고 있으며 처음 사흘간과 다음 사흘간 사이에는 정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 밖에도 사흗날과 엿새날에는 완벽하게 대칭되는 두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렛날은 샤밧(shabat),안식일이다. 서두의 장중한 선언,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는 구절은 창조주 하느님께 드리는 근본되는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성서 저자는 태초에 거창한 혼돈(카오스. chaos)이 있었던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거기에 시간을 타고 하느님의 여러 차례 개입이 가해지면서 ‘코스모스(cosmos)’, 즉 질서 잡힌 우주가 창조 되는 것처럼 그려낸다.
칠일간의 시간적 구분(6+1)은 매우 상루적인 것이었다 7이라는 숫자는 성서에서 완성 혹은 완전함을 가리킨다. 아울러 6+1이라는 구도는 활동과 휴식을 번갈하 취하는 인간 행태의 귀감으로 하느님을 제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참된 하느님이 백성이라면 엿새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일간 일하고 7일째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신명 5, 12. 15 : 이사 1, 13 : 호세 2, 11등 참조). (제관계 사람들이 이 성서를 쓸 때는 안식일은 이미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6일간의 창조설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안식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휴식을 함께 맛보게 되었음을 경축하는 날인 것이다. 신명기나 출애굽기를 보면 이렛날은 우리가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이다라고 하며, 이날 우리는 하느님이 휴식을 함께 나눔으로서 우리의 존엄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신명 5, 12-15 : 출애 20, 8-11).
설화는 일정한 형식문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일련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련의 형식문들이란, 명령, 실행, 업적에 대한 묘사, 칭찬, 생물들에게 내리시는 축복(풍부한 출산이 축복의 표지가 된다.), 이름의 부여(그 피조물에게 당신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표지), 시간의 표시등으로 엮어진 것이다. 그 기반을 이루는 것은 ‘명령과 실행’이라는 이중 도식이다.
이것은 제관계 전승의 전형적인 구도로서, 성서의 법제(예를들어 출애 25-40장의 대법령집), 이스라엘의 사회․종교적 질서는 대개 이 명령과 실행의 구도로 소급된다. 한결같이 하느님의 명령(“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과 이스라엘 백성의 실행이라는 도식으로 엮어져있다. 만사가 명령을 내리시는 말씀의 힘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스라엘을 지탱해주는 사회․종교적 제도들도,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땅과 세계도 하느님이 내리시는 한마디 말씀으로 존재하게된다.
창조설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일정한 스케마에 의하여 짜여져 있다.
첫째 : 6일 간의 창조 작업은 앞의 세 날과 뒤의 세 날로 나뉘어지며, 뒷부분은 앞부분과 조화를 이루면서 보충한다.
둘째 : 창조가 하느님의 말씀과 행위라는 시적인 음률 내지 리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 생겨라 - 그대로 되었다 - 보기 좋았다 - 저녁이 되고 +++; 만드셨다 - 부르셨다 - 축복하셨다.
셋째 : 전례적인 후렴 형식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공동번역에는 “이렇게 +++ 밤낮 하루가 지났다”) 가 6일간의 창조작업 끝에 매번 반복되고, 또한 “보시니 참 좋았다”도 거의 매일 반복된다 (둘째날 제외).
넷째 : 전체 설화가 6일간의 노동과 7일째의 휴식이라는 도식안에 묘사된다.
이러한 구조를 보고 즉시 알 수 있는 사항은, 이 창조설화가 원래 누구든지 쉽게 암기할 수 있도록 배려한 종교 교육적 의도와 예배에서 찬미가로 부를 수 있도록 전례적인 목적 하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설화는 당대의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우주신화를 많이 닮았는뎨, 이들 신화에서는 인간이나 자연을 신격화하여 선신과 악신의 싸움이 있은뒤에 우주가 생겨났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설화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행위에 의해 비로소 생겨났음을 뚜렷이 밝힌다. 저자는 신화적인 양식과 자료를 이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화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
저자가 이 설화를 통하여 이야기 하려는 바는 -
첫째 - 만물이 오직 한 분뿐이신 하느님에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창조하다)라는 동사로 바라(bara)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성서에 47번 나오지만 결코 인간이나 다른 존재와는 관계가 없고 오직 하느님의 행위에 대해서만 쓰이며, 없는 가운데로부터의 창조를 뜻한다.
둘째 - 만물이 모두 훌륭하게 창조되었으며(보시니 참 좋았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것이다.
셋째 - 저자는 남녀가 동등한 차원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존재이자 그 창조사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피조물임을 이야기한다. 27절에 보면 남녀 창조를 동시에 말한다 :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 물론 2, 21절에서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대로 만드셨다고 하는 것도 최초의 여자가 어디서 왔는가를 실제로 제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생긴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시하며 남자와의 평등성 및 상호의존성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구약성서를 설명해주고 있는 탈무드에 보면 이런 상징적 표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하느님은 여자가 남자에게 명령을 하도록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부터 만들어내지도 않으셨고, 또 여자가 남자의 노예가 되도록 여자를 남자의 발로부터 만들어내지도 않으셨으며, 그보다 여자가 남자의 심장(마음) 가까이 있도록 여자를 남자의 옆구리에로부터 만들어 내셨다”.
넷째 - 저자는 구원역사의 시작을 전하면서 창조 자체가 이미 구원행위임을 시사한다. 창조는 하느님의 첫 번째 구원행위인 것이다. 끝으로 하느님은 밤이 없는 7일째에 휴식함으로써 그의창조는 영원히 계속되며, 인간도 시간 안에서의 활동이 끝난 다음에는 밤이 없는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감음 밝힌다.
인간은 ‘모상(模像)’임을,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원형(原型)’이 계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느님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하느님이 ‘너’라고 부르시는 말상대임도 잊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관계 전승을 따르면, 인간은 원래 창조계의 정상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샤밧의 인간’이다. 인간은, 하느님이 그렇게 하시듯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우주만물과는 달리 멈추어 설줄을 알고, 안식일 곧 휴식을 지킬 줄 안다.
그것도 기력을 회복하고 일을 계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자기 원형이 되시는 분과의 관계를 할성화하기 위함이며, 그분을 만나 뵙기 위함이고,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자신의 인간 조건과 자신의 소명을 재 각성하기 위함이다.
② 남자와 여자의 창조 (2, 4b - 25)
아담(Adam) : 히브리 말로 ‘사람’을 의미한다. 온 땅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진흙을 빚어 인류의 원조(元祖)를 가리킨다(창세1, 26).
하느님을 불신하고 불순명함으로써 원죄를 범한 첫 사람 아담은 “미래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교회헌장, 22항)이요, “장차 오실 분의 원형”(로마5, 14)이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골로1, 15)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 또는 새 아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고 죄인이 되어 죽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무죄 판결을 받고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로마5, 12-21)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이 둘째 설화를 읽으면서 염두에 둘 일은, 첫째로, 이 설화가 창세 3 장과 더불어 단일한 설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3 장과 더불어 함께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로부터 50만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들려주는 동화처럼 간주해서도 안된다는 점이다.
이 장에서는 성서 저자가 이용한 상징적 언어를 통해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이야기, 남녀 인간 누구나 겪는 이야기를 판독해야 한다. 저자는 자기 시대(야훼계 전승은 기원전 10세기, 곧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문자로 기록되었다.)의 문화가 지니는 표현법과 영상들을 사용하여 그 이야기를 한 것이다.
둘째 설화는 인간과 한 쌍의 인류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차지하는 상호적이고 인격적인 ‘가치’라는 관점에서 남자가 무엇이고 여자가 무엇이며 부부가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성서 저자는 그 기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 현대의 추상적인 언어를 쓸자면 ‘원초의 것이 사물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기술하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 서술하면서 성서 저자는, 사람이 어느 시대, 어느 땅, 어느 민족에 속하든 상관없이 과연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해설하고 있다. 서두에서 ‘하늘’을 언급한 다음 다시는 하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마른 땅’과 ‘사람’에 시선이 집중된다. 진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는 하느님의 형상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막론하고 고대중동의 문화 영역에서는 흔한 착상이었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굴된 문헌과 부조물(浮彫物 )에서 입증되고 있다. 인간의 기원에 관해서 상상하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이었다고 하겠다. 사람이 죽은 다음 분해되어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감을 목격하면서 그런 착상을 하게 된 듯하다.
또 ‘하느님의 입김’만이 진흙으로 만든 이 초상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널리 펴져 있었다. 하느님의 입김이라고 해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영혼(靈魂)이 아니라 단지 생명의 모든 징후를 보여주는 ‘목숨’을 가리켰다. 여기서 성서가 정말 ‘가르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면 오직 하나, “인간은 땅에 속하고 세상에 속하면서도, 하느님이 직접 개입(直接介入)하셔서 이루어 내신 소산이다.”라는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동산을 하나 마련하신다. 아담을 동산에 데리고 가시어 동산을 지키고 일하게 만드셨다면(창세 2, 15), 노동은 인간의 구성요소임이 분명하다. 노동은 범죄에 앞서고 범죄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본분이다. 노동은 결코 죄값이 아니다. 경제적인 필요(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는 일)말고도, 노동은 활동을 하고 싶은 충동, ‘창조’ 하려는 내밀한 필요, 자기 내심에 일어나는 활력과 이상들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에 상응한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가장 넓은의미에서) 자기를 성취하고, 하느님이 선사하신 환경을 자기에게 보다 적합한 형태로 만드는 데 늘 이바지한다. 노동해야 한다는 본분말고도, 성서 저자가 인간은 동산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기록해 두었을 때에, 30세기가 흐른 다음 자신의 말이 어떻게 구현되어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세상의 주인, 폭군, 제멋대로 다루는 군주가 되어서는 안된다. 현명하고 배려할 줄 아는 ‘주인’ , 자기 재산을 보살피고 지키며 더 나아지도록 개선하는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수탈하고 고갈시키고 파괴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파괴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르는 까닭이다.
하느님의 명령(창세 2,16-17)이 이 설화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하느님과의 만남과 대화와 친교를 나누도록 제안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과 아담 사이의 거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담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선물로 여겨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극히 현실적인 조건이다. 착각은 금물이다. 이 조건하에서만 아담은 자기를 충만하게 실현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기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아담이 믿고 신뢰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가 나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와 그 열매는 아담이 마음대로 따먹어도 된다. 다만 한 그루만은 안된다!”
대단한 제한이나 규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제한 규정의 대상이 미미한 그 만큼, 그 의미는 큰 것이다.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아담은 지음받은 자기 존재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할 수 있고 자기 창조주께 충실한 신뢰와 우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복종하지 않는다면 이 모두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짐승들이 창조 되고 아담 앞으로 줄지어 가며, 아담은 그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여준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성서적인 배경에서는 단순히 작명(作名)이라는 지적 활동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 권위와 지배권 및 주권을 행사하고 역할을 부여하는 행동이었다. 인간의 주위환경과 생활 그리고 노동에 있어서 짐승도 귀중한 도움이 된다. 짐승들도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을 나타내기는 하나 인간과 대등한 도움은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남자의 생명의 일부(‘갈빗대’는 극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로 여자를 빚어주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외과 의사처럼 작업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옹기장이 같은 하느님’ 등과 같은 관습적인 표현이다. 성서 저자는 하느님이 아담의 생명의 일부를 이용하셔서 여자를 빚어내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여자를 만드시는 데 무슨 재료가 필요하셔서가 아니라, 여자가 남자와 똑같은 본성으로 되어 있음을 남자에게 깨우쳐주기 위함이다.
여자도 똑같이 하느님의 입김으로 생명을 얻은 육체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도 남자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는다. 남자와 똑같이 지성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그 어느 피조물도 할 수 없는 동반자요 도움이다. 성서 저자는 여기서 원천적이고 근본적인 인간 관계,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관계는 모든 차원에서 남녀가 주고받는 협력과 상호보완을 위해 영속적인 관계이다. 그 중에서도 정신적 ․정서적 차원이 첫 번째 차원을 이룬다.
이 사실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도 나타나고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뼈에서 나온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라고 하는 아담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이 장면을 두고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창세 2, 24)는 해설을 붙이는 성서 저자의 말에서도 두드러진다. 이리하여 인간(남자와 여자)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완결을 본다. 하느님은 각 사람이 당신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실행하기를 바라신다.
③ 원조의 범죄와 처벌 (3, 1 - 24)
저자는 남녀가 알몸이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방해를 느끼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자기들끼리도, 자기들을 알몸으로 만들어주신 하느님 면전에서도 부끄러운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는 구절이다. 하느님의 원초 계획에 따른 인간 조 건이 어떤 것이었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알몸이라는 처지는 인간 존재가 근본적으로 피조물임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그렇다고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하느님과의 관계나 동료 인간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완전한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다. 알몸이라는 처지는 친교의 투명성, 단순함 그리고 전인적인 상호 신뢰를 나타낸다. 그러기에 ‘가려야’ 할 필요가 없고 가면을 쓸 필요가 없고 방어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느님과의 친교와 우정,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친교는 인간 관계에서도 행복과 균형을 도모해주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친밀함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직관(直觀)하는 경지는 누리지 못하였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신앙을 통한 만남이었다. 그렇지 않고 하느님을 직관했었더라면, 여하한 시험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유로운 선택 따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미 자신의 처지가 그분을 믿기로 결정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만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같은 신뢰를 거부하고서 (당장에는 분명하게 들어나지 않는) 심각한 결과를 향해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과일 하나 먹었다고 죽지는 않는다! 순종의 행위를 하기에 앞서 아담과 하와는 신앙과 신뢰를 고백하도록 불리움받았다. 신앙고백에는 지성을 하느님께 귀속시키는 행위, 자유의지의 행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모든 호의를 다 보여주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걸려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신뢰는 상당히 근거 있는 신뢰였던 셈이다.
지성과 자유의지를 주어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사람이 사람답게 즉 올바른 지성과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느님께 응답하는가를 시험 하셨다. 시험의 동기는 어떻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다운 처신 여부를 증명해 드렸어야만 했다. 여기서 악마(사탄)가 등장하고 여인(하와)이 말려든다.
악마와 여인의 대화는 3단계에 걸친 점진적인 과장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에 대해 점차 불신과 원망쪽으로 기운다. 원래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 2,16-17). 이에 뱀은 하와로 하여금 하느님께 서운한 마음이 일게끔 말꼬리를 얄밉게 바꾸고 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창세3, 1).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창세 3,2-3). ‘죽지 않으려거든’과 ‘만지지도’라는 말은 하느님의 본래 말씀에 하와가 보탠 말이다. 이쯤 되었을 때는 하와의 마음 속에 하느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들어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뱀은 그 순간을 포착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창세 3, 5).
원죄란 “하느님이 거추장스러운 계명으로 인간의 행복을 방해 하신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어, 차라리 계명을 범함으로써 오히려 행복이 온다는 식의 그릇된 논리가 실제로 행동화 된 것이라 하겠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선의를 인간이 정반대로 바꾸어 놓은 셈이다. 더욱이 아담은 비굴할 정도로 변명까지 서슴치 않았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창세 3, 12), 마치 이런 여자를 짝지어 주신 하느님께 책임이 있다는 식의 말투는 그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직접 받았던 장본인으로서의 체면까지 송두리째 스스로 뭉게 버리는 변명이다(창세 3, 14-19). 여기에 하느님의 징벌이 차례차례 내려진다. 뱀에게는 온갖 짐승 가운데서 저주를 도맡아 지고 죽기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여인과 여인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는 징벌이고 남자에게는 노동에 따르는 고통, 일터 자체의 악조건(가시더불, 엉겅퀴),
여인에게는 산고의 고통과 남편의 손아귀에 드는 징벌이 제시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징벌만으로 매듭을 짓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속의 희망을 던져 주신다. “나는 너를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15). 이 구절은 죄로 타락한 인류에게 맨 처음 죄 다음에 구원을 알린 ‘첫 복음’이 아닐수 없다.
하느님의 저주 속에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이 여전히 엄존하고 있음을 아담과 하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침과 또 ‘여인의 후손’(그리스도)이 전 인류를 대표하여 악마를 통쾌하게 쳐 부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자기네 구원이 달려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 함으로 인해서 쫒겨나게 되는 그 과정, 그 죄악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오늘날 원죄로 자리를 잡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피조물로서의 자기 자신을 망각한 죄다.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이것을 따 먹으면 하느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된다. 더군다나 선과 악을 알게된다. 눈이 밝아지고, 지혜가 생기고, 그러므로 해서 하느님이 된다. 피조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유혹이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인간이면서도 주제 파악 못하고 하느님으로서 행세 할려고 하는 그 경향들을 모두 갖고 있다.
재물을 모으려고 하는 것 도 자기가 주인행세 할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위에서 내려 누르고 싶고 지배할 수 있을까, 남 보다도 월등해지고 싶다. 내가 저 사람을 종으로 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나아야 하겠다는 주인 의식이다. 명예 쌓을려고 하고 출세할려고 하고 자식을 좋은대학 보낼려고 하는 부모님들 욕심이 왜 나오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꼭대기에 올라가야 되겠다는 말이다. 바베탑 사건처럼-----
하느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마치 재판관이 피고의 범죄사실을 캐어 묻듯이 질문하시는데, 그 질문의 요지가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이 물음에는 하느님이 항상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심과, 인간의 죄를 모른 체하시지 않으심과, 인간의 자유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의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즉각적인 하느님의 징벌과 구원약속은 물론이고 오경 전체를 통하여 전개된 하느님의 징벌과 구원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다.
※ 창세 1 -3 장의 강해들을 매듭짓기로 하자.
이 장들은 어떤 ‘사건’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 문서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만유의 기원, 하느님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던 원초의 인간 조건, 그같은 우정을 거부하였음과 그 선택에 뒤따른 온갖 비극적 체험, 마지막으로 그러한 인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당신의 우정을 쏟으시는 자비가 지극한 하느님의 선하심 등이다. 아울러 이 장들은 ‘예언’ 문서라고 하겠다.
인간적 접근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서원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감에서 우러나고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나온 결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장들은 ‘지혜’ 문서라고 불리울 만하다. 모든 지성을 지닌 존재가 자신의 삶 안에서 조만간에 제기할 만한 근본적인 ‘의문’들에 답변을 주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왜 우리 실존에 악이 존재하는가? 우리 인생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창세기 첫장들에 나오는 대답은 아직 결정적이고 완벽한 대답이 아니다. 하지만 인류 전체에게 크나큰 희망을 준다. 하느님은 인류의 원초와 우정을 회복하자고 제안하신다.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에제 18, 23)
※ 창세 4 - 11장의 의의
모세오경을 최종으로 편집하던 당시의 이스라엘 종교의식(宗敎意識)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이라는 좁다란 경계를 벗어난 경지였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전인류에 해당되는 ‘세계사’에 비추어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었다. 세계사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아브라함의 역사와 성조(聖祖)들의 역사를 논할 수가 없었다. 분명 이 역사도 ‘하느님과 인류와의 관계’라는 유일한 관점에 입각해서 서술된 것이다.
그러면 성서 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개별적인 역사와 세계사를 어떻게 연결해서 그 역사관(歷史觀)을 수립하였는가? 그들은 가종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대홍수의 관한 고대의 전승들, 바벨탑과 같이 위대한 민족들이 쇠망한 유적지들, 같은 집안이나 부족 가운데서 매일같이 자행되는 살인과 전쟁, 무서운 피의 복수, 언어의 장벽으로 철저하게 분열된 민족들의 상쟁을 확인하면서 그들은 치처럼 폭넓은 역사관에 도달하였다. 이 모든 현상에서 성서 저자들은 죄의 엄연한 현실을 보았다. 하느님을 거부한 인간 최초의 악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많아지고 심해졌음을 실감하였다.
성서 저자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그 이름이 전해져 오는 조상들의 명단을 부자간의 관계로 연결시켜 족보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생물학적 관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넓은 의미의 친족관계, 가족과 부족 간 인종상의 혈연관계, 지리적인 이웃, 그리고 정치, 경제, 상업 등을 매개로 한 여러 가지 형태의 인척 관계를 뜻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이야기들은 악이 퍼져 나감을 드러내고 있고, 족보는 하느님의 원초 계획에 따라 인류가 성장해 감을 나타내고 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라-.”(창세 1, 28) 이 모든 현상을 지켜보는 성서 저자들의 안목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안목이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최초의 타락 이후 인류의 종교사(宗敎史)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내리시는 선고는 결코 처벌이나 인류의 멸망이 아니고, 인간의 회복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이다. 성서 저자들은 사람의 이름과 족보들을 모아서 일종의 ‘몽타주’를 만들었다. 그 기본취지는 단일한 역사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류는 항상 한 핏줄이요 따라서 죄와 구원의 역사를 함께 한다는 연대의식을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성서는 시종일관 인간간의 차별과 민족주의에 대해 극구 반대하는 노선을 취한다.
이 고대사에는 중요한 문학적 흐름이 있다. 성서 저자는 우리가 선발이라 부를 수 있는 기준을 체택하고 있다. 인류가 원조에서 노아까지, 노아 다음, 셈에서 아브라함까지 족보를 지어 내려간다는 노선이다. 즉 구원계획이 그 노선에서 실현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하브라함 집안에서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이 이스마엘이 아닌 이사악에게 계승되며 다음에는 에사오가 아니라 야곱에게 계승된다. 성서 저자는 그 줄거리에서 벗어난 족보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흐름은 성서 저자가 두 가지 중요한 사상을 부각시키고자 사용한 방법이다.
1) 아브라함과 야곱에 이르는 족보에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다른 민족들이나 족보는 점차적으로 삭제했다. 이것은 한 사람(아브라함)과 한 민족(히브리)이 ‘선택’ 되는 사상과 사실을 주지시키고, 그 선택이 순전한 은혜임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2) 성서 저자는 전인류와 아브라함을 결부시킴으로써 ‘선택의 의의(意義)’ 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한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된 것은 온 인류를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맡겨져 계승되는 축복과 계시는 온 인류에게 돌아갈 재산이다.(창세 12, 3) 아브라함에게 내리는 언약의 축복은 낙원에서 내렸던 구원의 약속(창세 3, 15참조)을 실현하는 첫걸음이다.
④ 대홍수에 이르기 까지의 인류 사건들 (4,1-5,32)
카인의 이야기는 첫 인간의 범죄 이후 하느님이 예고하신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싸움과 그에 따르는 결과를 보여준다. 시기심이 많은 카인은 야훼께서 그의 아우 아벨의 제물은 받아 들이시고 자기 제물은 거절하시자 아벨을 살해한다.
하느님은 그 벌로 카인을 좋은 땅에서 쫓아내시고 고생길로 들어서게 하신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보호하신다. 설화자체는 그 양식상 사건을 종합적으로 묘사하는 부분과 장엄한 대화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대화는 시적이면서도 깊은 신학을 내포하고 있다.
저자는 이 이야기로 첫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가 얼마나 가혹하게 그의 가정을 통해 계승되는가를 일러 준다. 첫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지만(수직), 그 결과로 그의 자손은 인간과의 관계를 깨뜨린다(수평). 이 관계가 파손되기 때문에 이번에도 카인이 좋은 땅에서 쫒겨난다. 동시에 저자는 생명의 고귀함과 양심, 부족간의 복수의 기원과 서로 투쟁하는 농경문화와 묵축문화의 양상을 보여 준다.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하느님은 “너의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 9)라는 물음으로써 인간의 혀제에 대한 범죄 사실을 추궁하시며, 그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에 울부짖고 있다”(4, 10)라는 말로 표현한다. 시기심에 의하여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죄인인 카인을 보호하시며 “카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일곱갑절로 벌을 내리리라”(4, 15) 라고 말씀하시며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신다. 이처럼 성서의 저자는 인류의 죄에 대하여서 기록하면서도 하느님 자비의 신비는 그분의 정의를 훨씬 능가 하는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우리들에게 들려 주고 있다. 카인과 아벨의 일화는 비극으로 끝나는 평범한 한 형제간의 투쟁을 훨씬 뛰어넘어 보편적인 의의를 띠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잃고 타락한 인류는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음받은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미움과 질투가 마침내 살인까지 빚는다. 이렇게 하여 미움의 결과인 죽음이 지상에 최초로 나타났다.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카인의 양심에서 울려온 하느님의 말씀이다(4, 6-7). 인간이 원죄로 말미암아 많은 은총(恩寵)을 잃었지만 지성과 자유의지라는 제일 중요한 능력은 잃지 않았다. 따라서 자유로이 또 알면서 행한 모든 행동은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카인의 족보는 목축․음악․대장장이 등 문화의 기원, 복수․살인 등 선과 악의 흐름을 밝힌다(4, 17-24). 인류는 카인외에 또 다른 아담의 후손인 셋을 통하여 이어진다(야훼계 사료). 셋은 하느님의 은총을 상속받은 새로운 아벨로 등장하며, 그의 아들 에노스는 처음으로 야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4, 26).
5장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로 홍수 이전의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를 열거하는데(사제계 사료), 이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공간을 메울 뿐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이 계승됨을 증거한다. 여러 족보 중에 셋의 계보를 취한 것은 하느님이 그의 가문을 통하여 당신 계획을 실현됨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셋의 족보에는 10명의 조상이 열거되는데, 이들 모두가 천년을 넘지 못하지만 장수를 누리며, 규칙적은 아니지만 그 수명이 점차로 짧아진다. 이 장수의 근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왕의 수명을 1,500년으로 잡은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히브리 특유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⑤ 노아의 대홍수 (6,1-9,29)
창세 6 - 9장은 노아 홍수라고 전해져 오는 대 천재지변을 담고 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온 지구를 뒤덮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인류가 아직까지 전 세계에 펴져 살지는 않았던 시대이므로, 그 당시 원조들이 살고 있던 땅을 온통 휩쓸었으리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성서 저자로서는 이와 같은 재앙이 죄와 관련되지 않았음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홍수는 죄많은 인류를 벌하려고 하느님이 명하신 재앙이었다. 완전히 하느님을 망각하고 천륜을 모른는 세상이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였다. 신처럼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온갖 죄악에 빠지게 만들어 결국엔 새로운 심판, 대홍수를 불러 일으킨다.
저자는 하느님께서 파멸의 홍수를 일으키기로 작정하실 때 슬픔과 실망에 눌러 계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결국 하느님은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종류의 동물들 한쌍씩만을 구하시고 나머지는 전부 물로써 심판을 내리신다.
노아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모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과 가족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류의 혈통을 잇고 유일하신 참 하느님께 대한 사상을 전승시키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계승하도록 선택받은 사람이다.
성서는 노아의 복종심을 매우 대견하게 여긴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였다.”(6,22) 하느님의 말씀에만 의지하고서 당대 사람들의 온갖 조롱을 무릅쓰면서 거대한 배, 그것도 지붕이 덮인 방주(方舟)를 만드는 일은 수월하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렇ㄹ지만 방주에 들어간 자만 목숨을 건졌다. 노아의 방주에서 그리스도교회의 첫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무사히 살아 남은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가족을 이끌고 하느님께 제사를 올린다. 종교의 근본행위를 함으로써 하느님께 흠숭과 감사의 정을 표한다. 하느님은 그 제사를 받아주시고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노라고 노아에게 언약하신다. 그리고 새 인류의 시조가 된 노아에게 일찍이 원조 아담에게 “너희는 많이 낳고 불어나거라. 땅 가득히 펴져 땅을 정복하여라.”(9,7 참조 ; 1,28)고 하셨던 축복을 거듭 내리신다. 또한 하느님은 노아와 땅위의 모든 생물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생명을 보장해 주신다.
그러나 이 홍수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죄를 지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 나아가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께서 다시는 홍수를 내리시지 않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뉘우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연민, 자비로 가득찬 분이시라는 사실은 심판을 통해서도 변함없이 드러난다. 이 세계가 죄악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보존되는 것도 하느님의 이 자비 덕분이다.
한편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함이 부친이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자기 형제들에게 알리자 셈과 야벳이 부친을 가리워 주는 사건을 계기로 노아의 추태를 존중하지 못한 작은아들 함은 저주를 받고, 효경을 다한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는다.(9,21-23)
후대의 성조들이 하듯이 노아도 아들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내리는데 그 발언이 어디까지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느니만큼 참된 의미의 예언이라고 볼 수 있다.(9,25-27) 노아는 “셈의 하느님, 야훼는 찬양 받으실 분,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9,26)고 말한다. 즉 야훼의 이름을 불러 셈을 축복함으로써 셈과 그 후손이 하느님과 각별한 친분을 누리고 하느님의 특별한 안배를 받도록 한 것이다.
사실 셈에게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선민과 마침내 메시아가 나왔던 것이다. 함은 자손 만대에 걸쳐 저주를 받게 되었다. 가나안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징벌 때에 셈의 후손들인 히브리인들에게 굴복하고, 멸망하여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 야벳은 후손들이 번창하고 셈의 자손들과 평화로이 섞여 살리라는 축복을 받는다. 이리하여 노아의 막을 내리지만, 여기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한 다닥 노선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시는 친분이 셈의 후손을 통해 계승된다는 것이다.
⑥ 민족들의 분포 (10,1-32)
노아의 세 아들의 계보는 홍수 후에 그들이 민족을 이루어 세계로 퍼져나갔음과 인류가 원래는 한 조상을 둔 형제라는 것, 그리고 땅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축복의 결과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⑦ 바벨탑 (11 장)
창세 11장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민족들이 행한 시도를 우리에게 들려준다.(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양편에 낀 기름진 땅으로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 시도는 강력한 정치적․군사적 제국을 건설하고 전세계에서 유명한 민족이 되는 것이었다. 이 권력과 명성의 상징으로 거대한 도시와 높은 탑을 쌓기로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이 거창한 계획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하느님의 경륜(經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그 백성들의 언어르 혼란시켜 놓으셨다.
겨레들이 더 이상 서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갑자기 한순간에 여러 나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매우 빨리 사람들이 서로 불화하고 의견이 엇갈려 말이 통하지 않계 되고 따로 떨어져 제멋대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이 계획을 무너뜨리는 대신에 인류에게 참으로 위대한 당신의 계획을 세워주셨다. 그분은 한백성을 일으키시어 지상에서 진정 위대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이 백성은 전 인류를 대표하여 하느님의 계시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사실 바로 다음장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때부터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영적이면서도 볼 수 있는 건물의 초석(礎石)으로 삼으셨다.
건물은 처음에는 이스라엘백성을 가리켰고, 후일에는 메시아를 모신 ‘참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성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본받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친정한 자손이라 불리게 될 모든 이들로 이루어진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로마 4,12 참조)
※ 죄-처벌-은혜 및 태고사의 결론
성서의 태고사가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죄의 권세’가 인간의 잘못으로 일단 인류의 안으로 뚫고 들어오게 된자 인류의 최초의 역사를 전부 오염시키고, 점차로 역사의 향방을 지배하는 위세를 떨침으로써 하느님의 더욱 엄한 심판을 유발하게 되었다(3-11장). 원조의 타락, 카인의 살해, 라멕의 노래, 천상존재들과의 결혼, 바벨 탑의 건립 등은 야훼계가 죄의 증가를 표시하는 단계이다. 하느님께서는 점점 더 엄하게 범죄에 대해 벌하신다.
이와같은 죄의 세력확장의 역사가 그 절정에 이르렀음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 이야기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을 전하는 이 모든 설화들은 나름대로,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세상과 인간을 돌보시는 분으로 남아 계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동시에 3장-11장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거듭되는 ‘아니오’라는 태도에도 불구할고 당신이 그에게 원칙적으로 다짐하신 ‘긍정의 자세를 끝까지 고수하신다는, 일련의적극적인 증언들도 담고 있다. 그러기에 이 증언들은, 은총은 심판에 의한 지배보다 더 위대하고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언이다. 이에 대한 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는 3장 15절의 ‘첫 복음’은 그 형식을 보나 그 맥락을 보나 의심할 나위없이 뱀에 대한 일종의 처벌선고이다. 그렇지만 실상 이 말씀의 내용과 특히 그 의의를 제대로 측정하려면 이 말씀을 야훼계의 신학 전체 안에서 보아야 한다.
야훼계의 역사상은 일종의 구원사적 역사관이고 또 이를 애써 강조한다. 역사는 희망없는 반복적 순환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하느님으로부터 조종되고 있다. 그래서 야훼계가 이 말씀(3, 15)을 전할 때, 그가 메시아라든가 더구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안중에 두고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이 말씀을 좀더 정확하게 분석해 보면, 구원론적 의미에서의 어떤 ‘구원의 지평’이 거기에 함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2)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2, 17)라는 위협의 말씀은 즉시 죽는다는 의미이지만, 이 말씀이 뜻대로 실현된지는 않았다. 아담은 오래 살고 난 후에 죽었다(‘구백 삼십 년’ 6, 5).
3) ‘죄에 떨어진 다음’이었지만, 아직 ‘동산에서 추방되기’ 이전에 하느님께서는 첫 인간 부부를 걱정하고 돌보셨다고 한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남자(아담)와 그 아내에게 입히셨다”(3, 21).
4) 아내(하와)는 카인을 낳은 다음 이렇게 외친다.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4, 1). 이 말씀의 의도는 야훼께서 심판을 내리신 다음에도 계속해서 인간의 번성을 허락하시고 세상과 인간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5) 창세기 4장 6절에 의하면, 카인은 한때 모진 시련과 유혹을 견뎌야 했던 것 같다. 그러난 야훼께서는 죄에 떨어져 그 권세의 굴레를 쓰지 말고, 오히려 그 죄에 굴레를 씌우라고 타이르신다(4, 7).
6)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자 야훼께서는 아벨의 가장 가까운 혈친으로 자처하시고 불의와 폭력에 희생된 아벨의 ‘혈친 복수자’로 나서신다. ‘하느님은 억눌린 자의 옹호자’이시라는, 성서의 기조적인 명제가 여기에 이미 나타나 있다(4, 8-12).
7) 엄격한 응보원칙이 요구하는 것과는 달리 야훼께서는 카인에게 죽음을 선고하지도, 이를 집행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불안정한 방랑생활이라는 처벌을 그에게 내리셨으며, 카인에게 표를 찍어 그를 복수로 인한 죽음에서 지켜 주셨다(4, 15).
8) 야훼께서는 카인의 아들 에녹을 어여삐 여겨 그를 죽지 않은 채로 거두어 당신과 더불어 궁극적인 친교를 누리게 하셨다(5, 22 이하 : P문헌). 실상 그는 선사시대에 살았던 ‘의인’의 전형(典型)이다.
9)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많아지자”(6, 5 : J문헌)-실상“그 마음의 생각이 꾀하는 바가 날마다 그저 고약해 가기만 했던 것이다”-이를 보신 야훼의 마음은 “안타까웠고 당황하였다”(6, 6). 그리하여 그분은 마침내 홍수를 내어 인류를 멸종시키기로 작정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전멸을 가져 올 심판이 아니었다. “노아만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그 죄악 때문에 심판을 내리지 않으실 수 없으나 그분의 ‘은총’과 ‘호의’는 인간의 죄악보다도 더욱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10) 이렇게 야훼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배려로 노아의 가족을, 홍수의 재난에서 구출하심으로써 인류와 더불어 이루어 가시는 당신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신다.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고 돌보시는 야훼의 단호함은 이렇듯이 위해하다는 야훼계의 증언은 과연 대담하다. 그는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한다”(6 5)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밑받침하는 동시에,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는 그분의 은총의지를 그와 동일한 내용의 말씀-“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8, 21)-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은총의지는 또한 죄스런 인간이 생명을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 기본질서를 자연계 안에 유지해 준다(8, 22).
제관계 문헌의 신학은 이 전승을 넘겨 받아 이를 더욱 확장하고 재구성한다. 실상 이 하느님의 돌보심은 창세기 9장엣 노아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인류와의 ‘계약’에 집약되어 나온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대가(응답)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으시면서 이렇게 다짐하시다. “나는 너희와 계약을 세워 다시는 홍수로 모든 동물을 없애 버리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리라”(9, 11). 무지개는 그러한 약속으로 하느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돌보시기 위하여 당신의 구원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표징이 되었다.
실상 신화에서는 이 무지개가 하느님이나 혹은 제신이 전쟁을 마치고 활 시위를 놓고 쉬신다는 뜻으로 해석되던 소재였다. 즉 노아와의 계약은 - 비록 선사시대에 하느님과 노아, 따라서 전인류와 더불어 맺은 계약이라고 창세기 9장은 전하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 만백성이 하느님의 구원의지 안에 포함된다. 따라서 이 구원의지는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보증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서의 원사를 요약해 볼 때, 얼핏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는 원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셨고, 그 결과 이렇게 타락한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게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적지 않지만, 그분은 피조물을 부르시면서 세계 및 인간과 더불어 몸소 맺으신 인연을 당신 쪽에서 스스로 끊으시는 법이 없는 하느님이시다.
그러기에 이 인연은 그분이 벌로서 내리시는 심판 가운데에도 계속 유지된다. 또 사실 이 심판은 그 나름대로 (6, 5)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위해 관여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죄에 대한 처벌과 더불어 인간 곁에 계시는 하느님 편에서의 구원행위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심판의 행위와 더불어 항상 거기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나타났다. 죄가 커지자 은총은 더욱 커져 갔다.
그렇지만 한 시점에선 이 은혜스러운 보호도 없고 또한 하느님께서는 처벌된 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 즉 바벨 탑 이야기는 은총 없이 끝난다. 따라서 태고사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주요한 의문은 하느님과 인류와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 관계는 완전히 깨어졌는가? 하느님의 은총이 완전히 끝나 버렸는가? 태고사는 이에 대해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
모든 신학적인 의문들 중에 가장 보편적인 그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구원역사의 시작 - “아브라함을 통해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을” 축복하시기 위한,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이에 내포된 야훼의 역사계획-과 더불어 주어졌다. 아브라함을 통한 축복이 확대된 범위는 세계에 확산된 나라들이다. 이 사실은 역설적인 것 같아 보이는데, 그것은 창세기 12장부터 시작의 장이 갑자기 좁아지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문제들, 즉 세계, 인간, 성별, 고통, 나라들에 대한 언급이 없어진다. 아주 뜻밖에 창세기 12장부터 한 사람, 한 가족 그리고 그들로 말미암은 한 나라가 서술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러나 야훼께서 이러한 역사를 이끌어 가시려는 최종적인 보편적 목표에대한 언급은, 벌써 이 특별한 선택에 관한 이야기 시초(12, 1-3)에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태고사의 끝은 바벨 탑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의 부르심(창세 12, 1-3)이다. 사실상 태고사와 구원사의 바로 이러한 결합 때문에 이스라엘의 전체 구원역사는 ‘야훼와 뭇 나라들’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에 대해 또 이스라엘 선택의 의미에 대해 말하려면 세계창조 시초부터 시작하여야 하며, 이스라엘이란 모든 인류를 내포하는 보편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같이 창세기 12장 1절-3절은, 태고사가 이스라엘의 신학적 원인론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제 2 부 성조사 : (12장 - 50장)
① 성조 아브라함 : 12, 1 - 25, 18
12, 1 - 9 --- 아브람의 소명 : J, P
12, 10 - 20 --- 에집트에서의 아브람과 사래 : J
13, 1 - 18 --- 아브람과 롯의 분리 : J, P
14. 1 - 24 --- 아브람과 네 왕들 : ?
15, 1 - 21 --- 아브람과의 계약 : J
16, 1 - 16 --- 하갈의 도망 : J, P
17, 1 - 27 --- 할례의 계약 : P
18, 1 - 19, 38 --- 아들의 약속, 소돔과 고모라 : J
20, 1 - 18 --- 그랄에서의 아브라함과 사라 : E
21, 1 - 21 --- 이사악과 이스마엘 : J, P
21, 22 - 34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 E
22, 1 - 24 --- 이사악의 희생 : J, P
23, 1 - 20 --- 막벨라 동굴 구입 : P
24, 1 - 67 --- 이사악의 아내 : J
25, 1 - 18 --- 아브라함의 후손 : J, P
25, 19 - 34 --- 에사오와 야곱의 출생 : J, P
② 성조 이사악과 야곱 : 26, 1 - 36, 43
26, 1 - 35 --- 그랄과 브엘세바에서의 이사악 : J, P
27, 1 - 45 --- 이사악의 야곱 축복 : J
27, 46 - 28, 9 --- 바딴 아람으로 야곱 출발 : P
28, 10 - 22 --- 베델에서의 현시 : J, E
29, 1 - 30 --- 야곱의 결혼 : J, E
29, 31 - 30, 24 --- 야곱의 아들들 : J, E
30, 25 - 43 --- 야곱이 라반을 속임 : J, E
31, 1 - 21 --- 야곱의 출발 : J, E
31, 22 - 42 --- 라반의 추격 : J, E
31, 43 - 32, 3 --- 야곱과 라반의 계약 : J, E
32, 4 - 22 --- 야곱의 에사오 만날 준비 : J, E
32, 23 - 33 ---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함 : J
33, 1 - 20 --- 야곱이 에사오 만남 : J, E?
34, 1 - 31 --- 디나의 강간당함 : J, E
35, 1 - 29 --- 베델에서의 야곱 : E, P
36, 1 - 43 --- 에사오의 후손들 : P?
③ 요셉 이야기 37, 1 - 50, 26
37, 1 - 36 --- 요셉이 에집트로 팔려감 : J, E
38, 1 - 30 --- 유다와 다말 : J
39, 1 - 23 --- 요셉이 유혹을 극복함 : J
40, 1 - 23 --- 요셉이 죄수들의 꿈을 해석함 : E
41, 1 - 57 --- 요셉이 파라오 꿈을 해석함 : J, E
42, 1 - 38 ---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첫 번째 만남 : J, E
43, 1 - 34 --- 에집트로의 두 번째 여행 : J, E
44, 1 - 34 --- 베냐민을 위한 유다의 간청 : J
45, 1 - 28 --- 요셉이 자기 정체 드러냄 : J, E
46, 1 - 34 --- 에집트로의 야곱의 여행 : J, P
47, 1 - 31 --- 에집트에서의 히브리인들 : J, P
48, 1 - 22 ---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받아들임 : J, E, P
49, 1 - 33 --- 야곱의 축복 : J ?
50, 1 - 26 --- 야곱의 장래와 요셉의 마지막 행위 : J, E, P
성서에서 인류의 태고사(太古史 : 1 - 11장)가 아브라함의 역사로 넘어가는 분기점은 아무런 단절이 없이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난다. 노아의 큰 아들 셈에게서 이어지는 희미한 혈통이 아브라함의 가계로 넘어간다(11, 10-32). 다만 성서 저자는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에, ‘명성을 떨치려는’ 인간 욕구의 실패,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경륜을 벗어나 영광과 명예를 찾는 마지막 태고사 바벨탑 이야기를 삽입한다.
그 실패담에 이어서 세상이 감지하지 못할 불후의 영광과 위업에로 인간을 이끌어가는 전혀 새로운 역사가 막을 올린다. 이제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느님 손에 달려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신다. 현행 본분에서 이 시작의 완전한 새로움을 이해하는데 익숙지 않은 독자에게 성서적 전통 체계는 방해가 된다.
이스라엘이 과거를 의식적으로 반성하고 이를 기록할 무렵은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미 여러 세기를 살아온 후였다. 그때에는 벌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의 계시가 되어 있었고, 예언자들의 영감 받은 말씀에 의거하여 해석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인이 역사에 개입하신 하느님이 곧 태초부터 계시고 아브라함 이전에도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시던 하느님이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그렇기 때문에 히브리 성조들의 변천사는 태고의 전승 단편들과 단절되지 않고 연결 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저자가 부각 시키고자 하는 것은 진실은 하느님과 인간 관계의 역사에서 절대적인 이미로 그 시작이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원조의 타락 이후 그 효력을 회복하였다는 것이다.
성조사가 근거로 하고 있는 자료들은 다양한 그룹 및 여러 지방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지방적으로 그리고 제한적으로 유효했다. 야곱과 관계되는 전승들이 중부 팔례스티나 성소들, 즉 베델, 세겜, 브니엘과 결부된 것 이라면, 이사악과 아브라함과 관계되는 전승들은 남부, 특히 브엘세바와 마므레에서 유래했다. 이렇게 성조사가 원래는 독립적이었던 여러 전승들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성서 신학상 아주 중요하다.
성서학자들은 중동의 역사를 토대로 하여 아브라함과 다른 성조들의 연대를 기원전 1800년에서 1500년 사이로 잡고 있다. 그 고고학의 발굴에서 얻어진 자료로써 히브리 성조들에 관한 대부분의 아리송하던 것들이 밝혀졌고,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에는 이미 사라졌던 그들의 관습과 용기(用器)까지 확인하게 되었다.
발굴과 탐사가 쌓아올린 지식들은 자연히 성조들의 역사를 충분히 알려지고 한정된 역사적 궤도에 연결시키면서 납득이 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를 움직였던 내밀한 힘이나 그들의 결정과 외적인 활동들을 일으키는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설명하거나 문서화할 수 없을 것이다. 실로 그들의 정신세계에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으나 외부세계는 전과 다름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히브리 민족과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어디까지나 인격적인 차원의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어지는 성서의 관심은 성조들의 생애 중에서도 종교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그 무렵에는 계시가 초보 단계에 그쳤으며, 아브라함의 가문이라는 조그만 태두리 안에 국한된다.
구원의 역사가 한 집안에서 일어나는 출생, 결혼, 죽음 등 가정의 중요한 사건들과 섞이게 된다. 이제는 이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인간의 생활에 갱입하시고 당신을 드러내시고 계약을 맺으시고 대화를 나누시도록, 말하자면 기회를 제공해 드리는 것이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하느님의 그 개입과 대화는 상상도 못 할 만큼 폭넓어지고 걸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 구 조
현존하는 성조사를 형태로 볼 때 세 부분, 즉 본래 서로 독립해 있던 요셉 설화(창세 37-50장 : 이것은 12-36장과 매우 다름), 아브라함의 설화 전체(창세 12-50장), 그리고 야곱과 에사오의 설화 전체(창세 25-36장)로 구성 되어 있다. 그들의 주제는 각기 다르다. 아브라함의 설화는 부모들로부터 자녀들에게로 이어지는 후손의 계승과 관련되어 있으며, 야곱과 에사오 설화는 두 형제의 관계에 그리고 요셉 설화는 아버지와 형제들 및 가정 안에서의 갈등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세 부분들은 형태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12장-25장은 주로 개인적인 설화들로 구성되어 있고, 25장-36장은 좀더 큰 단위의 설화 집단들로 되어 있으며, 37장-50장은 하나의 긴 설화 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12장-25장은 약속을 25장-36장은 축복을 37장-50장은 평화(salon=공동체의 행복한 상태)를 강조한다.
★ 내 용
전체적으로 볼 때 성조들의 시대는 일종의 ‘약속의 시대’로 나타난다. 여기에 이어서 나오는 것은 약속의 실현으로 출애급, 가나안 점유, 그리고 이스라엘 왕정국가의 창업이다. 따라서 출애급 이후부터 왕조 창업까지는 ‘약속의 시대’에 비해서 ‘성취의 시대’로 나타난다. 창세기 12장-50장은 ‘약속’과 ‘성취’라는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을 중심으로 그 첫 동심원을 그려 준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2장-50장을 살펴볼 때, 주로 하느님께서는 구원 및 축복을 기꺼이 주시는 분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성조들을 돌보시면서 그들과 친교 관계를 맺고 유지하시는 분으로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성조들의 역사에서는 그때 마다 주도권을 먼저 취하시는 하느님이 전면에 나타나고, 이러한 하느님에 대해서 그 상대역인 인간이 이에 상응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관념은 오히려 후면으로 물러간 인상을 준다.
1) 아브라함의 역사 (12장 - 25장)
태고사(1장-11장)에서는 인간들이 죄를 지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시기였다고 볼 수가 있다. 아담과 에와의 범죄로 시작한 인류의 죄는 결국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시켰으며 하느님의 계속적인 은총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성조사에 들어와서는 다시 인간과 인간 또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다시 성립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인간의 하느님께로의 접근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며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 등 여러 가지 약속을 하고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그 약속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점차적으로 땅을 차지하고 이사악을 낳는 등의 사실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브라함의 역사는 다음의 8가지로 크게 나누어 살펴 볼 수가 있다.
⑴ 아브라함의 소명과 이주 : 12-13장
⑵ 아브라함과 왕들 그리고 멜기세댁 : 14장
⑶ 아브라함과 하느님 : 약속과 계약 : 15장
⑷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스마엘 : 16장
⑸ 계약과 할례 : 17장
⑹ 하느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소돔 : 18-19장
⑺ 남쪽 가나안에서의 아브라함 : 20-22장
⑻ 아브라함의 최후 : 23-25장
① 아브라함의 소명과 이주 (12장-13장)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로 하여금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케 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당신 나라의 토대가 될 민족을 형성하시기 시작 한다. 그는 시켐, 베델, 네겝지방을 통과하여 에집트로 내려가서 살다가 다시 그가 내려갔던 길을 되밟아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며, 함께 갔던 조카 롯에게 더 좋은 땅을 분배해 주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새로운 축복과 약속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인도로 축복속에 걷던 이길은 그의 후손 야곱에서 모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후손들이 다시 걷게 될 길이었다. 이 이야기 중에서 중요한 것은 처음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약속이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12,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12,1 : 13,5)과 많은 후손(12,1 : 13,6)과 모든 민족의 축복의 도구(12, 2-3 : 22, 18)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그 자신만을 위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고 모든 민족들을 이해서 선택된 것이다. 하느님은 바로 당신의 선택받은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하여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 이제 바벨에서 흩어졌던 민족들은 아브라함 안에서 희망의 표징을 부여 받게 된다.
하느님의 이 약속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범죄로 낙원에서 쫒겨나는 원조에게 하신 보편적 약속을 실천에 옮기신 제 1단계요,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26, 4)과 손자 야곱(28, 14)에게도 반복될 것이며, 모세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하며(출애 19-24장 참조),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에 의해 비로소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루가 1,55, 72-73 : 마태 1,1-14참조).
② 아브라함과 왕들 그리고 멜키세댁 (14장)
이방(異邦)의 네 임금들이 사해 남단의 평야지대를 습격하여 롯과 그의 가족을 사로 잡아가고, 아브라함은 추격하여 그들을 구해낸다.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하며 형제간의 관계를 파괴하지만 여기서는 손위 사람이 손아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려 함으로써 그 관게를 회복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승전길에 멜키세덱의 축복을 받는다. 멜키세덱은 살렘(예루살렘)왕이요, 레위 지파의 사제직이 정립되기 이전부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은자로 후대 전승은 그를 메시아의 한 형태로 보았다(시편 110).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모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히브리 7장), 이 사건에 나오는 빵과 포도주는 성체성사의 예표로 보고 있다.
이 장은 그 내용이나 양식 및 자료에 있어 오경의 어느 전승사료에도 속하지 않는 특수사료로서, 구약성서 중에서 해설하기에 가장 어려운 부분 중의 하나이다. 아마도 원래 독립적인 전쟁기였는데, 어느 편집자가 이것을 아브라함의 역사에 삽입한 것 같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전쟁영웅으로 등장하여 국제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세계역사 속의 중요인물로 부각된다.
이 민담의 장점은 아브라함과 멜키세덱이 이 만나는 장면인데, 이방적인 예식과 그 살제에 대한 경의는 구약성서에서 보기 힘든 이례적인 장면이다. 아브라함은 살렘(예루살렘?)의 왕이요 사제인 멜키세덱의 축복을 받고 그에 대한 의무를 수행했음을 나타내는 것이 이 민담의 의도이다. 왜냐하면 멜케세덱의 축복과 아브라함의 의무수행은 그의 후손인 다윗 왕조가 받는 축복과 구원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③ 아브라함과 하느님 : 약속과 계약 (15장)
이 장은 두 개의 독립된 설화로 짜여져 있다. 1-6절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보호와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과, 아브라함이 불평을 하면서도 그 약속을 믿는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7-21절은 하느님의 약속과 고대 민족들 사이에 흔히 행하여지던 계약체결이다. 그 대화나 예식자체로 보아 전례적인 영역에서 형성된 설화일 것이다. 이 설화의 사료는 야훼계와 엘로힘계인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엘로힘계 사료는 계약을, 야훼계 사료는왕조 창립사를 말한다고 본다.
이 설화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태도에 있다. 자식이 없이 늙어가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은 보호와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며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굳게 믿는다(15, 1-6). 아브라함은 단지 표징만을 보고 (하늘의 별) 하느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행위화 구원 약속에 대한 인간 자세의 한 표본을 제시하여 준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아즈라함의 미 믿음을 들면서 율법이 아닌 믿음에 의한 의화를(로마 4,3 : 갈라 3,6),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선행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야고 2, 23-26).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며 계약을 맺으신다. 계약을 맺는 양식은 당시의 퐁습대로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심으로 체결하신다. 이러한 양식은 상징적인 것으로 “만일 내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짐승들처럼 두동강이 나도 좋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수백년 후인 출애굽 사건으로 실현된다.
④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스마엘 (16장)
사라는 자신이 아기를 낳지 못하자,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보도록 주선하여 하갈이 임신하게 된다. 하갈은 태기가 있자 사라를 업신여기기 시작하고, 이에 사라는 하갈을 내쫒는다. 그런데 주의 천사가 라하이로이에서 나타나 하갈을 되돌려보내며 많은 후손을 약속한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돌아와서 이스마엘을 낳는다.
단편적인 사제계 사료의 보충 외에 주로 야훼계 사료로 된 이 설화는 아브라함의 부인 문제를 취급한다. 즉, 약속된 후손의 어머니는 불임자인 사라가 되느냐, 또는 에집트 소실인 하갈이 되느냐 하는 문제다. 합무라비 법전에 나타난 당대의 바빌론 풍습에 따르면, 아기를 낳지 못하는 본처가 주선하여 자기 종으로 하여금 아기를 낳게 하면, 그 아기는 본처의 아이로 간주하여 본처의 무릎에서 해산한다(30, 3. 9). 남편은 이 때에 그 여종을 자기 첩으로 거느리지 못한다.
사라는 이러한 픙습을 따라 합법적으로 처신하였지만, 오히려 하갈이 권리를 빼앗으려 하자 권리를 침해받지 않으려고 하갈을 내쫓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약속은 깊은 신앙이 없는 여인의 후손에게서 이루어지지 않음을 표명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집을 떠난 하갈의 후손도 당신 구원계획에 참여토록 배려하신다.
⑤ 계약과 할례 (17장)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왕손 및 땅을 주실 것과 영원한 계약을 맺을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계약의 표지로 할례를 명하신다. 하느님은 이 약속의 이행을 위하여, 이미 수태 불가능한 나이에 든 사라가 아들을 낳아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할 것과, 그에게서 민족을 다스릴 왕손을 구체적으로 다짐하신다.
아브라함은 명령대로 자신과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종에 이르기까지 할례를 베푼다. 모두 사제계 사료에 속하는 이 장은 15, 7-21과 내용이 같으면서도 그 보도양식이 전혀 틀린다. 아브라함의 말은 거의 없고 주로 장엄하고 엄숙한 하느님의 말씀난 나타난다. 예식적이고 장엄한 문체와 어휘는 1장의 창조설화를 연상시킨다.
사제계 사료의 스케마에 따르면, 이 계약은 아담과 노아와의 계약에 이은 세 번째 계약인데, 세 계약 모두 예식규정이 들어 있다. 사제계 사료는 구원역사를 이렇게 웅장하고 경건한 전례형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유의할 점은 후손과 땅에 대한 이 고전적인 약속이 시나이 계약에서 내린 약속,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라는 말과 연결된 점이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땅의 약속이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진 땅의 약속으로 승화되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약속의 위대한 조상으로 세워 주면서, 그의 이름을 (아바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고쳐 주시는데, 아바람(Abiram)은 “아버지(종족의 보호신)는 높으시다”, 아브라함(Abhamon)은 “많은 백성들의 아버지”라고들 하지만 그 자세한 의미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 부인은 “사래”를 “사라”로 바꾸어 주셨다.
이렇게 이름이 바뀌는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의 운명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우리는 이것을 나중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과 신약에서 요나의 아들 “시몬”이 “베드로”로 바뀌는 것에서 그 의미를 잘 알 수가 있다.
할례는 대부분 원시사회와 토테미즘 예식에서 볼 수 있는데, 정식 어른 또는 부족의 일원이 되는 성인식이었다. 이것이 종교예식과 결부되면서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하느님과 통교함을 표시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위생적인 효과 때문에 널리 퍼진 것 같다.
성서 저자는 이러한 원시 사회 내지 종교 풍습을 본떠면서도 그 의미를 계약에 의하여 하느님께 속한 백성의 표지로 승화시켰다. 또 어른이 될 나이가 아닌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실시함으로써 남자의 일생이 전부 하느님께 바쳐졌음을 나타내었다.
⑥ 하느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소돔 (18-19장)
18-19장은 전부 야훼계 사료에 속하며(19, 29만 사제계 사료), 보호자이신 하느님의 방문에 대한 설화이다. 구성상 하느님이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방문하는 부분과, 죄의 도시 소돔을 방문하는 설화 두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
첫째 방문설화에서는 아브라함이 세 여행자를 대접하자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1년 후에 이사악이 태어날 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사라는 이를 믿지않고 웃는다. 이 때문에 그 아들의 이름은 이사악(웃다, 미소짓다에서 온 말임)이라 불리게 된다. 이처럼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놀라움은 사라가 너무 늙어 아기를 낳을 희망을 완전히 포기한 사실에서 더욱 드러나고 있다
둘째 것은 두 천사가 소돔에 사는 롯에게 투속하자 소돔 사람들이 그들을 쫓아내려는 이야기다. 천사들은 롯 가족을 소알에 피신시킨 뒤에 소돔을 멸한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된다. 그후 롯의 두 딸은 남자들이 없는 곳에서 살게 되자, 롯을 술취하여 잠들게 한 다음 잠자리를 같이 하여 그 부친의 자식을 낳으니, 이들이 후대의 모압과 암몬이다.
신들이 유랑하는 나그네로 여러 도시를 다니며 인간의 선악을 구경하는 페니키아(오디세아․오바디오)와 희랍의 신화도 이 설화와 비슷하다.
아브라함의 방문자는 한 번은 야훼(18, 13. 22-23)로, 또 한 번은 두 천사(19, 1. 15)로, 또는 사람(18, 2. 10. 12)으로 나타나는데, 어떠한 식으로 표현되든 야훼를 말하며, 이러한 하느님이 현현은 구약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내용으로 전승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후대하는데, 이러한 풍습은 동방의 미덕으로서 아브라함 자신의 체험일 수 있다.
18장 16절에서 19장까지는 하느님이 소돔을 방문하는 내용이다. 창세 6장 5절-8절에서, 하느님은 세상의 사악함을 보시고 아무와도 협의없이 홍수로 세상을 파멸케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브라함과 협의하시며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그에게 개방해 두고 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두고 간청하는 것을 보면 그때 벌써 극소수의 의인 열사람만 있어도 하느님의 재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다(16, 53-55).
한편 몇세기 후에 예레미야는 예루살롐에 단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있으면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한다(예레 5,1). 또 유배시 예언자들은 당신의 종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걸머지게 될 것을 말한다(이사 53, 4-5). 이러한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소돔을 방문한 하느님은 롯과 그의 식구들을 구하고 나머지 백성은 단죄를 받게된다.
이스라옐의 전통에는 소돔이 성적 타락의 본보기로 전해지지만, 과연 소돔의 죄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이사야는 무법상태(1,10 : 3,9)로, 에제키엘은 먹고 마시며 안일하게 사는 것(16, 49)으로, 예레미야는 간음과 회개하지 않음과 헛소리(23, 14)로 보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오랜 시기에 걸쳐 가나안의 역사의 암이 되어 온 불륜의 변태적 악습을 하느님이 저주하신다는 것을 명심시키는 사건이다.
롯과 그의 딸들간의 근친상간은 일면 이스라엘의 적인 모압과 암몬의 불명에스러운 과거를 들추어 그들을 격하시키려는 의도도 있지만, 또한 당데에 있던 같은 씨족간의 결혼 관습을 표명한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서 혈통의 순수성을 말한다고도 본다.
⑦ 남쪽에서의 아브라함 (20-22장)
이 대목은 내용상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해서 볼 수가 있다.
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20장) : 12장 10-20절과 같은 내용으로 에집트 왕 대신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탐내다가 벌을 예고 받고 되돌려 준다. 내용이나 문체로 보아 엘로힘계 사료이다. 이 설화는 하느님이 약속하신대로 이사악을 낳기 전에 사라를 보호하심이 나타난다. 또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보게된다.
나) 이사악과 이스마엘(21, 1-21) : 이사악의 탄생과 하갈과 이스말엘이 쫓겨나는 설화가 담겨 있다. 사라는 약속 받은대로 이사악을 낳고 8일만에 할례를 베푼다.
이사악 탄생설화는 앞에서의 여러 번의 장황한 약속에 비해 매우 간결한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는 이야기(엘로힘계 사료)는 16, 1-4 (야훼계 사료)와 비슷한데, 여기서는 이스마엘이 완전히 떠나감으로써 구원역사가 이사악에게 집중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여종의 자식이 그 부친으로부터 적자로 인정받게 되면 그 어미도 정식 부인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는데, 사라는 이러한 풍습을 알고 그들을 추방한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부당한 처사를 행하기를 꺼리나 하느님의 허락을 받고 그들을 보낸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가지는 다정한 아버지로서의 인물됨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스마엘은 비록 약속의 아들이 아니지만 하느님은 그 여종과 그 아들을 보호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보호 장면은 창세기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다)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의 계약 (21, 22-34) : 26, 12-33의 이사악과 아베멜렉간의 계약과 비슷하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 땅과 우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는다. 이런 종류의 계약은 반 유목민의 생활을 반영한 것으로 브엘세바와 네게브 우물이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소유임을 증명한다 이로부터 약속된 땅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라) 이사악 제사 (22장) :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자, 그는 아낌없이 바칠 태세를 갖춘다. 많은 자손을 가지게 되리라는 약속은 바로 이사악을 통해 실현된 약속이었기에(15, 1-6참조) 아브라함에게 그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그의 순종정신과 그의 믿음을 시험한 것이었다.
성서의 가장 인상적인 이 이야기는 흔히 이사악의 제사로 불리는데, 엘로힘계 사료가 바탕을 이루며, 간간이 야훼계 사료가 삽입되었다. 그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어린이를 죽여 제물로 바쳤던 잔혹한 관습(열왕 하 16,3 : 21,6. 10)과는 반대로 이스라옐의 하느님은 생명을 존중하시며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신이 아니라 살리는 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이 사건은 순종의 최고 전형을 보여 주기 위해 기술되었고 또 동시대 사람들에게 맏아들은 참으로 하느님 차지라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순종하는 의인의 모델이 된다(히브 11,17 : 야고2, 21).
⑧ 아브라함의 최후 (23-25장)
아브라함의 생애의 마지막 시기의 보충적인 설화들(사람의 죽음과 막벨라 동굴을 사서 매장함, 나홀의 자녀들, 이사악의 결혼, 첩 크투라의 후손, 아브라함의 죽음과 이스마엘의 후손, 에사오와 야곱의 탄생 및 야곱이 장자권을 삼) 로서 구원역사 관점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라가 묻힌 막벨라 동굴에는 나중에 아브라함, 이사악, 리브가, 레아 및 야곱이 묻히는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지님을 말해 주는 것이 된다.
이사악과 리브가의 결혼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24장) 이방민족과의 혼합을 피하고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야곱 설화에도 나온다(27, 46-28, 2. 8-9). 아브라함의 셋째 부인 크투라 이야기는 아브라함 가문과 아랍 가문과의 연대성을 전하는 문서에서 인용한 것 같은데, 문맥에는 맞지 않으며 또 아브라함의 처신에도 맞지 않다. “아브라함은 백발이 되도록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25, 8)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지시에 충실한 일생을 보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역사는 이스마엘과 이사악의 계보로 사실상 끝난다. 그런데 끝부분에서 에사오와 야곱의 탄생(25, 19-28)과 야곱이 에사오에게서 장자권을 사는 것은(25, 29-34)하느님의 약속이 장자에게 결부되어 있지 않다는 표시이다. 이 기사에서 속임수를 쓰는 야곱의 윤리성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민담에는 선악 이야기가 흔하며, 이 모두가 윤리적인 의도로 씌어진 것은 아니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약속이 야곱에게 넘어감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다. 동시에 기억해야 할 점은 평범한 가정생활, 일상생활 중에서 하느님의 법과 뜻을 따름으로써, 가정의 역사와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2) 이사악과 야곱의 역사 (26 - 36장)
① 이사악 : 26장
② 야곱과 에사오 : 27-28장
③ 야곱과 라반 : 29-31
④ 야곱과 에사오의 상봉 : 32-36
명칭은 이사악과 야곱의 설화이지만, 이사악의 설화는 26장뿐이고, 그외 부분은 전부 야곱 설화에 속한다. 이사악 설화(26장)는 하느님의 축복, 리브가의 보호, 우물 사건 등 몇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야곱 설화에는 매우 잘 정돈되어 있는데, 크게 야곱과 에사오 설화(25, 21-34 : 27, 1-28. 22 : 32, 1-33. 20)와 야곱과 라반 설화(29, 1-31.54) 두 가지로 나누인다. 야곱이 에사오를 두려워하여 도망가는 이야기(27, 33이하)는 이 두 설화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이 둘째 성조사는 야곱과 에사오와의 싸움이라는 줄거리로 아브라함 설화보다 잘 통일되어 있다.
아브라함 설화는 후손의 약속이 중심이 되지만 매우 산만하였다. 또 여기서는 그 주제도 형제간에 자녀와 가축에 대한 축복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것으로 단순하다(신명기는 자녀, 가축, 땅의 세 축복을 말함). 성조사에서 형제관계는 큰 역할을 하는데, 이사악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사오, 요셉과 그 형제들, 이러한 형제 관계에서 저자는 하느님이 축복이 누구를 통해 계속 이어져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처음에 난 자보다 둘째 번에 난 자가 선택되었음을 보여줌으로써 하느님의 선택의 자유를 또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성조사는 야훼계 사료와 엘로힘계 사료가 더욱 평행적으로 연결되며 사제계 사료는 오직 부수적인 사료가 될 뿐이다.
① 이사악 (26장)
㉠ 리브가가 그랄에서 아비멜렉의 위험에서 보호를 받음
㉡ 우물로 인한 싸움
㉢ 아베멜렉과의 우호조약
리브가의 보호장면은 사라가 에집트에서 보호받은 장면과 비슷하다(12, 10-13 : 20, 1-18).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계획이 이사악에게도 계승됨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또 같은 이유로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도 나타나시어 아버지 아브라함과 맺었던 계약 하느님의 현현, 성소건립, 우호조약도 반복한다(26, 2-5. 24).
이 설화를 이해하려면 반유목민생활 모습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장소를 옮기면서 살다가 때로는 한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다. 이러한 생활에 전답, 우물, 여자가 삶이 큰 관심거리가 된다.
② 야곱과 에사오 (27-28)
이 설화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 야곱이 리브가의 지도로 이사악을 속이고 그의 형 에사오에게서 장자축복을 물려받는다. 에사오는 야곱을 죽일 뜻을 품지만 기브가는 야곱에게 라반에게로 피신하라고 일러준다(27, 1-45).
㉡ 이사악이 야곱을 라반에게로 보내며 가나안 여인이 아닌 같은 혈족과 결혼하라고 한다. 이를 보고 에사오는 가나안 아내를 두었지만, 다시금 혈족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는다(27, 46-28 ,9).
㉢ (28, 10-22) 야곱은 하란으로 가다가 루즈에서 꿈에 하늘까지 뻗는 사닥다리로 천사가 오르내리심을 본 뒤 야훼의 축복을 받는다. 그리고 그곳을 베델(하느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바꾼다. 야곱이 장자축복을 뺏는 행위는 윤릴적인 문제에 앞서, 하느님의 축복과 선택은 인간적인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유 선택에 기인함을 뜻한다.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데, 이스라엘도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다.
또 리브가의 활동은 하느님이 섭리에서 여인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야곱과 리브가의 행동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느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당신 계획을 실행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야곱이 받은 축복에는 농부들이 바라는 많은 수확, 에사오 지배가 있지만, 무엇보다 아브라함처럼 축복과 저주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 축복의 핵심이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27, 29).
야곱이 라반에게 장가들러 가게 되자, 에사오가 자기 종족과 다시 결혼하는 것은 사제계 사료의 기사로서 이 사료가 중시하는 윤리성(속임수가 없음), 하느님의 축복이 야곱 가문에 계승되는 점, 혼종혼이 단죄 등 신학적 의도가 뚜렷하다. 베델에서의 꿈 이야기는 고대 이방인의 성소가 야훼의 성소로 바뀐 사실을 정당화시키면서, 무엇보다도 아브라함(12-13장)과 이사악(28장)에게 내린 하느님의 축복이 야곱에게도 그대로 계승됨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③ 야곱과 라반 (29-31)
이 항목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 있다. 야곱은 하란에서 라반의 집에 머물며 두 번씩 7년간 일을 해주고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는다. 이 두 아내와 그들의 하녀들에게서 밴야민을 제외한(벤야민은 나중에 집에서 베델로 되돌아 가는 길에 라헬에게서 태어남 35, 16-20참조) 열 한 아들과 한 딸을 낳는다. 그후 다시 6년간 더 일해준 뒤 재산을 가지고 도망가다가, 뒤쫒아온 라반과 화해하고 조약을 맺는다.
이 설화는 결혼, 자녀출산, 가축, 조약 등 유목생활을 바탕으로 엮은 이야기로, 하느님이 평범한 인간 생활을 통하여 당신 뜻을 펴시고 약속을 이루어 주심을 소박하고 재미있는 문체로 펼친다. 야곱이 결혼하기 위해 오랫동안 일해 주는 것에서, 여자를 재산의 일부로 취급한 당대의 풍습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데릴사위이다.
처음 결혼식때 라반이 야곱을 속여 라헬 대신 레아를 먼저 준 것은 야곱이 에사오를 속인 것을 상기시키는 데, 역시 흔히 있는 이런 인간의 결점을 통해서도 하느님은 당신 계획을 이루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한 레아가 없었다면 모세나 다윗도 없었을 것이다. 야곱의 열 두 자녀(35, 16-18 : 벤야민 제외)는 열 두 지파와 상관이 되기는 하지만, 반드시 지파 자체나 또는 그들을 대표인물로 제시한 것은 아니다.
더 중점을 두는 것은 부인, 자녀, 남편간에 있는 인간생활이며, 인간의 개성이나 환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행위를 다룬다. 하느님은 인간의 평범한 생활 및 결혼, 자손, 재산 등 중요한 요소를 축복하심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주신 약속을 서서히 이루어 나가신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넷째 아들인 유다를 통해서 메시아를 보내심으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실 것이다. 즉 기한이 차면 유다 지파 다윗 가문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다(갈라 4, 4).
④ 야곱과 에사오의 상봉 (32-36)
본 항목은 야곱과 에사오이 상봉 외에 디나의 겁탈과 보복, 세켐에서 베텔로의 순례, 베텔에서 하느님의 현현과 약속, 벤야민의 출생과 라헬의 죽음, 야곱의 아들들의 명단, 이사악의 죽음, 에사오의 족보가 그 줄거리이다. 이 중에서 두 형제의 내용이 핵심 내용이며 그 나머지는 보충자료들이다. 한편 하란을 떠나 돌아오던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 씨름을 하며, 결국 “하느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 겨루어 이긴다” 는 뜻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적인 인물로, 백성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내고, 하느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이끄시도록 역사를 통해 씨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야곱처럼 하느님의 계획에 씨름이라도 하듯이 완고하게 반발하지만 결국 회심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이는 그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인 것이다. 에사오와의 재회는 야곱의 우려와는 달리 극히 우호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기사는 야곱이 브니엘에서 만난 기사와 평행선을 이룬다. 에사오는 자비스런 하느님처럼 행동하고, 야곱은 파라오에게처럼 일곱번 절하면서 마치 하느님을 대하듯이한다. 에사오가 동부 세일 지방으로 떠나감은 그가 요르단 동부지방과 연결됨을 시사하며, 이로써 마치 아브라함에게서 롯이 떠나가듯 사라짐으로써 하느님의 약속이 야곱에게 이루어 지도록 준비한다.
디나의 겁탈 기사는 세켐의 힉소스족과 이스라엘간의 투쟁에 의해 이스라엘이 이 땅을 차지한 것과, 이 지방에 루벤과 레위 지파가 없게 된 경위 및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할 때에 여러 이방인들의 풍습과의 접촉 위험이 많았음을 알린다. 세켐에서 간 것은(35장) 틀림없이 순례적 특징을 띠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세켐에서 베텔로의 순례는 관습적이었다. 이 순례시에는 먼저 이방 잡신을 버려야 했다. 베텔에서의 하느님의 현현은 땅의 약속과 이름을 바꾼 사실을 전하기 위함이며, 그 밖의 약속은 17장의 아브라함에게 내린 약속과 거의 일치한다.
라헬의 죽음은 그의 무덤이 어떻게 해서 베들레헴에 있게 되었나를 말하여 주며, 이 땅이 벤야민 지파의 영역이 된 배경을 설명한다. 요셉의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의 12지파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이름은 루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이싸갈, 즈블론, 단, 납달리, 가드, 아셀, 요셉, 벤야민이다(35, 23-26).
3) 요셉의 역사 (37 - 50장)
요셉의 일대기는 또 다른 선택의 새로운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세사는 야곱에게서 요셉을 끌어내고 있다. 야곱의 애처 라헬이 소생이었던 관계로 요셉은 야곱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고 이복형제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다 요셉은 자신의 미래를 꿈꾸고 나서 그 내용을 발설함으로써 이복 형제들의 미움과 질투를 극에 달하게 만들었다.
형들은 그를 잡아 죽이려 하다가 마음을 바꾸어 에집트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냥을 받고 노예로 팔아 버렸다. 야곱은 형 에사오를 속인 죄의 대가를 늙어서까지 톡톡이 치룬 셈이다(아들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요셉이 짐승들에게 잡혀 먹혔다고 속임으로써). 그러나 요셉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이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에집트 파라오 신하 집에서 시중을 들게된다.
그 신하의 부인은 요셉을 애모하여 자리를 같이 하려다가 요셉이 이에 불응하자 위중하여 그를 감옥에 갇히게 한다. 요셉은 같이 옥살이 하던 파라오의 신하들의 꿈을 해몽해 주고 그 인연으로 파라오의 꿈도 풀어주어 천신만고 끝에에집트 땅에서 왕 다음 자리로 승진하여 재상이 된다.
이것은 야곱가문(엄밀히 말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에집트 땅에 자리잡아 그 옛날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셨던 “하늘의 별 수 만큼, 바다의 모래 수 만큼이나 큰 민족으로 불어나게 되리라”는 말씀이 실현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요셉 형제들의 악의조차 하느님의 구원 목적에 오히려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하느님은 인간적 두뇌로 볼 때 가장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가장 비극적인 일을 행운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분임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의 해몽대로 7년 간의 풍년이 들자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가 그 다음 7년 간의 흉년시에 양식을 팔게 된다. 하느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며 그를 큰 인물로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요셉이 억울하게 고초를 겪는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그 때마다 하느님을 더욱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셉의 인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들이 지녀야 할 온전한 신뢰와 성실성 그리고 겸손을 배워야 하겠다.
요셉은 자기 형들이 에집트로 양식을 사러왔을 때에 자기 신분을 밝히고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에집트로 팔아 넘겼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 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45, 5).
“하느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파라오의 어른으로 그 온 집안의 주인으로 삼으시고 에집트 전국을 다스리는 자로 세워 주셨습니다”(45, 8).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열 두 형제와 그 자손들은 에집트에서 살게된다.
요셉의 사랑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구세사업과 어느정도 비교될 수 있다. 배척 당했던자가 가장 높은 자리에 높임을 받게된 점, 그로 인해 이루어진 생명의 길, 하느님께 꺾이지 않는 신앙, 정결, 원수사랑, 악을 덕으로 갚음, 용서와 자비등,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를 보게 된다.
에집트에 온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프라임과 므나세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여 축복을 준다(48장). 이로써 후에 팔레스티나의 땅을 차지하며 이스라엘이 12부족이라고 할 때에는 요셉과 레위가 빠지며 요셉의 두 아들이 들어가게 된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 전에 자기의 자식들에게 마지막의 축복을 내린다. 열 두 아들의 축복 중 유다에 대한 축복에서 우리는 메시아가 유다 가문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듣게 된다. 자식들에게 축복을 주고 야곱은 세상을 떠나 선조 아브라함이 묻혀 있는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에 묻히게 된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하느님의 품안으로 떠난 뒤, 옛 잘못에 대한 앙갚음에 대해 떨고 있는 형들을 용서해주며 세상을 떠나게 된다. 요셉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느님께서 너희를 그 때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그리고 올라 가거라”(50, 26) 하고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약속을 시킨다. 이러한 요셉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앞으로의 에집트 생활을 미리 예견하여 주는 것이며 결국 출애급기로 인하여 다시 찾아 온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 약속의 신학적 의미
성조들이 받은 약속들에게는 여러 가지 공통된 성질이 있는 반면에, 그 약속들 하나
나는 원래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약속에 대해 일반화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약속들이 전수되어 온 역사는 성조시대에서부터 유배기 이후까지 걸쳐 있으므로, 약속들을 모두 통틀어 초기 또는 후기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약속들 가운데 세 가지는 분명히 성조시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아들에 대한 약속, 이스라엘 민족이 이동하고 있는 동안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 새 목초지와 새로 거주할 장소에 대한 약속(이 약속은 12, 1-3절의 암시에서 추측한 것임)이 그것이다. 다른 약속들은 성조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생긴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 후기의 약속들은 후대에 옛 자료들을 재작업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며 ‘약속’이라고 표현된 것들이다. 위에서 두 그룹으로 크게 나누어 본 약속들의 신학적 의미는 개별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첫 그룹의 세 가지 약속들의 중요성은, 이 약속들이 성조들의 종교(이스라엘 종교나 역사와 어떤 연관을 갖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것)를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라는 사실에 있다. 이 약속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약속)과 하느님께서 행하신 것(성취) 사이의 관련성을 최초로 밝혀 준다.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거나 보호를 받았을 때, 그들은 그것이 곧 하느님이 말씀하셨던 것(약속)을 이루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살펴볼 때 성조전승이 왜 이스라일의 전승의 바탕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그룹의 약속들의 경우, 이 약속이 이스라옐 사람들의 의식을 신학적으로 반영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점은 초기 단계인 12, 1-3절과 후기 단계인 17장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 약속들은 이스라엘이 구원하시는 하느님 야훼(그분의 이러한 모습은 출애급 전승에 잘 나타나 있다)를 만난후 공식화 되었다. 그래서 이 약속들(둘째 그룹)은 하느님께서 옛날에 하신말씀(예컨데 첫 그룹의 약속)과 후기에 당신 백성에게 행하신 것(땅의 정복, 다윗 통치시대 등)을 연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 이 약속들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시며 앞으로도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
특히 땅 소유의 약속은 임박한 직접적인 성취, 즉 성조들의 가나안 땅에서의 정착과 관계되었다. 땅 소유의 약속이 처음에 주어졌을 때엔 여호수아의 인도에 의한 완저 정복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성조사에서 그 약속이 나타나는 곳마다 그러한 뜻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이같이 이 옛 약속은 야훼계와 엘로힘계의 전체적인 구원역사의 테두리 속에 놓여 있음으로써, 훨씬 후대의 완성을 지향한다. 약속의 완성은 이졔 더 이상 단순히 모세 이전의 예배 공동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확대되어 성조들에게서 말미암은 전 이스라엘에게 적용된다.
이처럼 약속된 땅예 대한 성조들의 관계는 묘하게도 ‘양면적’이다. 사실 이 땅은 엄숙하게 그들과 그 후손에게 맡겨졌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권리로 얻은 작 소유지인 그 땅에서 두루 다니도록 명령하셨다(13, 14-15). 그러나 단어의 완전한 의미로 볼 때 그들은 결코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 즉 그들은 그 땅예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거주’하는 이들은 여전히 가나안인들이다(12,6).
야훼계와 엘로힘계보다 개념 정의를 훨씬 즐겨하는 제관계 편집자는 이 잠정적인 체류를 “너의 잠정적인 체류의 땅”으로 표현한다(17,8 : 28,4 : 36,7 : 37,1 : 47,9). 법적으로는 이 땅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의 땅, 즉 헤브론 가까이 막벨라의 무덤만이 성조들에게 속했다(23장). 약속 때문에 아브라함과 함께 방랑생활을 하던 성조들은 원래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11,28. 31)에 묻히지 않고 가나안 땅 안의 헤브론에 묻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을 당시 그들은 더 이상 잠정적 체류자들이 아니었다.
이같이 땅의 약속은 ‘최후의 소유’로 향하고 있다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성조들의 방랑이 목표는 그들의 역사라는 한계를 훨씬 넘어 서있다. 또한 제관계 문헌의 역사도 미래로 방향을 잡는데 ‘시나이 계시’가 바로 그것이다.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땅과 자녀들만을 약속하신 하느님이 되시고자 약속하셨고,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당신 자신과의 독특한 관계를 약속하신 것이다(17, 4-8 : 출애 6, 4-7).
이제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리라”(출애 6,7)는 구절은 시나이 계약형식에 있어 첫 구절이고 이어 “나는 너희가운뎨 살며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레위 26,12 : 신명 26, 17-18 : 에제 36, 28 : 37,27 : 2고린 6,16 : 묵시 21,3)로 바꾸어진다. 그런데 계명들의 계시와 적절한 예배의 설립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은 야훼의 독특한 백성이 되었다.
이같이 성조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존재하게 한 야훼의 특수한 배려를 말해 주는데, 어느 대목에서든 그것은 그 자체 너머를 지향하고 있다. 약속과 더불어 성조사는 국가의 기원을 지향하지만, 그것을 너머 시나이에서 이 백성에게 허락된 하느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자향하고 끝으로 가장 뛰어난 구원의 선물, 즉 가나안 땅의 최종적인 소유를 자향한다.
※ 요셉 설화는 야훼계, 엘로힘계, 사제계의 세 사료가 혼합되었지만. 사제계 사료는 매우 적고 야훼계 사료와 엘로힘계 사료가 예술적으로 잘 엮어져 있다. 오경 편집자는 야훼계 사료와 옐로힘계 사료의 평행부분을 많이 넣어 이야기를 매우 풍성하게 만들었다 야훼계사료는 사건을 자세히 펼쳐나가는 반면에, 엘로힘계 사료는 그의 특징을 살리며 해설한다. 각 사료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곳도 바로 이 요셉의 설화이다. 야훼계 사료는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유다를 두둔하며, 이스마엘인들을 안다. 엘로힘계 사료는 이스라엘 대신에 야곱이라 부르고 루벤을 두둔하여 꿈이야기를 잘하고 하느님을 엘로힘이라 부르며 미디안인을 잘 안다.
문학정 특징으로 볼 때 이 설화는 우선 그 방대한 분량에 있어 다른 성조사와 틀린다. 또 각 민담들이 개별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며, 획일적이고 통일되어 있다. 다른 성조사에서는 각 장들이 독립적으로 시작과 끝이 있음에 비해 이 설화에서는 장 구분이 상대적이다. 따라서 장을 무시해도 좋다. 모든 장면에는 사건 진술과 해설이 있다.
이 설화는 에집트에서 유행하던 지혜문학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를태면 요셉은 현인으로 부각되며, 그의 겸손, 용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이스라엘의 이상형으로 제시된다. 그 외에도 성윤리, 회개, 하느님의 섭리, 보상 등을 가르친다.
요셉 설화는 다니옐서와 그 줄거리가 흡사하다. 여기에는 비록 조상의 신앙에 충실한다든가 맹세를 한다든가 하는 요소는 없지만, 시험을 당하고 꿈을 풀고 조언을 하며 쉽게 높은 자리에 오르고 왕의 측근으로서 총애를 받아 자기 백성을 구하는 것 등이 비슷하다.
다른 성조사와는 내용상 다른점이 있으니, 팔레스티나 성소에 대한 말이 없고, 부족, 지명, 이름, 관습 등에 관한 어원적 해설이 없으며, 메소포타미아도 모르고 전례적인 요소도 없다. 그 대신에 사건이 매우 극적으로 전개되며 에집트의 문화 요소가 많다. 다른 성조사처럼 하느님의 현현이나 계시 또는 약속이 없지만 이야기 자체 안에 성조사의 사상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런 면에서 구원역사를 계속 전진시키면서 선택된 민족의 형성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는 요셉의 개인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섭리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또 비록 설화의 스케마는 형제간의 분쟁, 그에 따른 사건 및 형제의 화해라는 틀한에 전개되나, 요셉을 통하여 성조들이 에집트에 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민족의 형성과 에집트 탈출을 준비한다. 요셉 설화는 연속적인 설화이면서도 38장과 49장은 예외에 속한다. 38장은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로 롯기와 비교가 된다.
둘다 유다 지파에 들어온 과부 이야기를 한다. 37장에서 유다의 역할이 크기 때문에 38장을 삽입하게 된 것 같다. 49장은 야곱이 그의 열 두 아들에게 내린 축복의 장으로, 오래된 지파 설화를 모은 것이다. 이 축복에는 열두 아들이 십이 지파의 조상으로 묘사된다. 끝으로 요셉 설화를 성조사에 넣은 이유는 여기서 두드러지는 하느님의 섭리적 인도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인도, 즉 거대한 구언역사를 준비하고 또 그 일부가 되기 바라기 때문이다.
※ 종교적 가르침
① 창세기는 비록 그 역사적 가치는 적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적 진리를 풍부하게 제시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세상과 인류 및 이스라옐의 기원을 가르친다.
기원이라고 해서 오직 지나간 사실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의 이스라엘의 신앙을 표현한다.
옛날에 인간과 이스라엘이 어떠했으며, 현재에는 어떠하니, 앞으로 어떠해야 함을 교훈한다. 태고사와 성조사에서 신앙의 이상 또는 꿈을 제시하고 이것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닫게 하여 앞으로의 길을 제공한다. 따라서 창세기의 출발점은 가거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인간이 처해 있는 현재이며, 그런 의미에서 기원의 책으로서의 창세기는 동시에 종말의 책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은 “조상들의 하느님”이며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으로 앞으로의 자연과 인류의 역사는 바로 그분의 손에 달려 있음을 표명한 것이다. 인간은 창세기에서, 비록 스스로 나약하고 죄가 많은 존재일지라도 이러한 결점을 이겨서 하느님의 구원 의도를 충실히 따라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길을 배운다.
② 창세기는 오경의 대주제인 구원역사의 준비 도는 시작을 묘사하는 구원의 책이다. 창조는 구원의 시작이며, 민족 해방은 구원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창조다. 하느님은 범죄 후 즉시 구원을 약속하시고, 인간을 벌하시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위한 고마운 벌을 내린다.
첫 구원을 약속은 그런 의미에서 인류가 받은 (첫 복음)(Protoevangelium)이며, 이 복음은 오경 안에서 계속 발전되어 나간다. 아브라함등 성조들과의 계약, 그들에게 내리신 후손과 땅의 약속 등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진전되어 감을 그린 것이다. 그분의 구원 계획은 성조들처럼 그분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실현될 것이다.
③ 구원자이신 하느님은 동시에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분이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아사악, 야곱을 축복해 주시는 국가적인 하느님인 동시에, 인류의 조상들을 만드시고 축복하신 전 인류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인간의 악을 단죄하고 벌하시는 정의로운 분이시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성조들을 이끄시고 보호하신 것처럼 백성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분은 가나안, 메소포타미아, 에집트 등 어느 나라의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시다(El elyon).
④ 창세기는 인류의 기원뿐 아니라 그 본성도 기묘하게 밝혀 준다.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동물처럼 물질로 된 존재이지만(2, 7) 하느님을 닮고 만물을 통치하는 가장 뛰어난 존재다. 그면에서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존재로서, 동반자로서 창조사업에 협력하고 인류를 번식시킴으로써 하느님의 계획 실현을 돕는다.
인간은 하느님께 순종함으로 죄를 물리칠 수 있었으나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려는 교만과 자유남용으로 하느님을 배반하고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모든 행복을 잃었다. 그리고 이 죄의 결과로 계속해서 수치, 두려움, 거짓 등이 악에 휘말리고 말았다. 인간의 타락은 인류를 악에 쉽게 젖어들게 만들었다(8,21).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기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믿음과 의로운 생활은 인간을 다시금 하느님께로 이끌어 줄 것이다.
⑤ 이상과 같이 창세기는 그 풍부한 테마와 인물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여 주는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한 생명의 책이다.
성 서
1) 성서란 무엇인가?
성서는 거룩한 책입니다. 이 한권의 책은 한 저자에 의해서 집필된 단행본이나 저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73권으로 된 도서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오랜 구전전승 기간을 제외하고서도 1200년이란 긴 세월을 걸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작성된 이스라엘백성의 고유문학총서 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는 고대 근동지방의 샘족사상에서 발전한 유다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신약성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던 팔레스티나 출신 제자들에 의해 선포된 메시지가 회랍 문명안에서 성문화된 것이다.
성서란 간단하게 말해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대화, 인류역사의 어느 일정한 순간들에 주고 받았던 대화,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이 대화의 결정(結晶)이다”라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성서란 하느님과 인간들의 대화로서 옛날에 한번 있었던 대화가 아니고 지금도 계속되는 대화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20세기전의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즉 팔레스티나라고 하는 조그만 지역에서 일어난 히브리 민족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나, 초기 크리스챤들의 아담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현재의 나에게 건네시며 답변을 요구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이론적인 성서 공부에 중점을 두고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 자신의 응답을 드리기 위해서인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들의 대화의 결정체인 이 성서는 한권으로 된 것도 아니며, 한 순간에 나온것도 더욱 아닌 것이다. 히브리 민족의 손에서부터 초대교회의 시대까지 1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에 형성된 수십권의 책으로 된 하나의 전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성서연구는 18세기말엽 개신교 측에서 역사비판학을 도입함으로써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 성서가 구원의 역사의 주역들(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베드로, 사도요한, 바오로) 이런 분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금세기에 와서 고고학과 고문학의 발달로 성서의 세계가 당대의 세속문화와 역사의 비교, 연구됨에 따라서 성서의 다양한 양식, 그리고 편집과정이 비교, 연구됨에 노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성서의 실재의 사건들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성서를 쓴 사람들의 문학적인 기교나 신학적인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역사비판학이라고 합니다.
이 역사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성서의 저작시기 그 자료의 기원과 전달과정, 성서의 각권의 실재 저자들과 그들의 집필동기나 신학적인 지향, 그들이 속한 신앙공동체의 문제점들,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까 하는 해결 방안들 보다 구체적으로 성서의 세계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비판학에 커다란 공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비판학이 결코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성서 저자들의 저술동기는 자신의신앙, 그리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신앙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앙과 공동체의 신앙은 그 근원과 목적을 하느님께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 저자가 자신의 신앙이나 공동체의 신앙을 전달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전달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표현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과정에서 신앙을 전달하고 표현한다는 그 과정, 신앙이 생겨난다는 과정, 이것은 전부 하느님께서 유도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말이 유래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서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성서를 대충 훑어보게 되면은 이스라엘의 역사(구약)과 그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으로(신약)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뼈대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성서가 입고 있는 옷, 성서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뒤에 숨어있는 깊은내용은 하느님이 누구신가? 그리고 인간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크고 작은 사건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과 가르침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역사적인 사실로만 처리가 된다면 지금 여기 20세기 후반부에 살고있는 우리 모두와 아무런 연관성을 가질수가 없습니다. 실재로 이스라엘의 역사나 또한 예수님의 역사는 세속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습니다. 별로 남아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그런 사건들을 고정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 서 고공을 막론하고 왜 그토록 오랫동안 성서는 인류의 문화를 지배해왔는가? 그 이유는 성서의 그 속 알맹이 내용이 시공을 넘어서서 인류 전체의 커다란 충격을 던지면서 우리 인간성 정체를, 인간성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핵심 내용은 하느님의 소개와 인간소개, 이 둘은 성서의 어느 페이지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 아무 대목이나 열어도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찾을수가 있고 인간이 누군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울이야기, 바오로이야기, 베드로이야기,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빠져나와 가지고 광야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을 수시로 배반해 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대하여 올 때 우리들은 즉시 아!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이야기구나, 나의 이야기구나, 이렇게 알아듣게 됩니다. 우리는 그 성서 안에서 풍부한 인간성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족보들을 보면 그 안에 온갖 사람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느님은 인간성 전체를 다 끌여들여서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범죄를 총 막라해가지고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 들어가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을 보면 우리와 별달리 특출한 인간이 아닙니다. 베드로, 바오로 사도들도 보면 예수님을 전하다가 서로 다투기도하고 얼굴도 붉히고 바르나바 사도같으면 베드로하고 뜻이 맞지 않아서 너하고 여행 못하겠다 하고 중간에서 갈라져 따로따로 여행하고, 이런 것을 보면 성서의 인물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감정을 지닌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약점이 많고 연약한 그런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에게로 끌어들이시고 어떻게 그 사람들을 이용하시고 어떻게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시는가? 이것이 성서안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안에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야되고 나와 내 공동체를 위해서 주어지는 그 분의 말씀을 들어야되고 성서에 들어난 인물들의 행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나가야 될 삶의 방향을 정해야 될것입니다.
2) 성서의 목표는 무엇인가?
성서의 목표는 하느님의 실현입니다.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해서--- 잘 살려고 --- 어쩌다보니까 --- 천당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무척 많습니다. 옛날 요리문답에 보면 천당은 지복직관이라 했습니다. 끝없이 복을 누리고 직접본다. 하느님을 직접보면서 하느님과 함께 끝없이 복을 누리는 곳이 천당이라고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거의 대부분이 죽은 이 다음에 꿈도 꿀 수 없는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하느님과 함께 끝없이 복을 누리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다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거 몇백년동안 교회가 가르쳐 왔던 천당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착한 일을 해야 갈 수 있다. 반대로 지옥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고서도 지키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 가는곳이다. 그래서 그 지옥은 영원히 벌을 받는 곳이다. 옛날 교리에 의하면 세례성사를 받게되면 우리 이마에 인호가박힌다. 그래서 마귀들이 송곳을 갖고 쑤신다. 나쁜일 하면 지옥가니까 나쁜일 하지마라. 또 연옥교리는 은연중에 신자들로 하여금 천당에 가기 위해서 착한일 해야된다. 자기자신이 천당에 가야 되기 때문에 착한일 해야된다라고 과거에는 보상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무엇인가 차곡차곡 쌓아놓아야 천당에 가서 상을 받는다라는 그런 개인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우리 자신들이 살았고 그것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성서의 의도를 파악한다면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이 내 자신만이 천당에 가는 개인적인 구원이겠는가? 우리가 성서의 가르침을 보면 개인적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부끄러운 일인가! 오히려 개인적인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버려야할 죄이고, 우리 신앙인들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내가 천당가기위해서, 내가 편할려고,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비신자들 자기소개서 받아보면 대부분이 내 자신의 안정을 찾기위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천주교회에 입문하는 동기에 거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만약에 교회가 계속해서 그런 동기를 받아 들이면서 그런 동기를 지닌 신앙인들을 교회 안에서 가르쳐 나간다면 분명히 교회는 앞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또 성서가 의도하고자 하는 신앙관은 아닙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목표는 하느님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 라고 하는 개념과 천당이라고 하는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는 같으면서 상대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습니다. 현재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이 있습니다. 영원한 세상, 하느님께서는 이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세상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이 먼저 다가오시는 계시라고 하는 구원계획을 통해서 하느님 당신 자신이 인간의 세상으로 들어 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침투해 들어오십니다. 침투 - 막무가내로 확 뚫고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들어오는 현상이다. 우리가 모른는 사이에 아주 비밀스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십니다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시는데 그 선봉에 세운 소대장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게서 인간 세상에 침투해 오시는 과정에 선봉장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세상을,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이 세상에다 그대로 이루려고 하십니다. 그 이루려고 하는 나라를 일컬어서 하느님 나라라고 합니다. 천당이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 있는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서의 가르침은 죽은 다음에 따로 가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개념 입니다. 성서를 제대로 해석을 한다면 천당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앙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신앙인들의 일차 적인 목적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해야되는 것은 나와 더불어서 저 사람이 천당에 가게 하기 위해서 선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 간에 자꾸 자꾸 넓혀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선교를 해야 됩니다. 말로만의 선교는 안됩니다. 하느님나라 라고 하는 개념을 좀 더 제대로 이해해야 됩니다.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가 아니고 지금 현재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 실현해야 할 나라가 하느님나라 입니다. 천당은 이 세상에 하느님나라가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서 완성이되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도 완전히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는 나라가 되었을 때 천당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진행되는 상태이고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었을 때 그것을 천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당 가려고 발버둥치는 그런 신앙 자체에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그 벗어나는 노력을 성서에서 배워야합니다. 성서에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깨닫는다면 천당 가려는 신앙 생활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회를 ‘실천종교’라고 합니다. 이 땅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역에, 좁게는 내 가정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 내가 책임지고 있는 공동체,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 하느님의 뜻이 빨리 실현되기 위해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목표를 위한 방법을 우리는 성서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서 죽음의 승리를 거두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고 고백을 하는가?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고, 인간이 되셔서 죽임을 당하셨고,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남에 의해서 강제로 죽임을 당하셨다가 그 다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의 희망을 걸고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 입니다. 그러면 이 부활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이긴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에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부활의 과정으로 가기 위한 문일 뿐입니다.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천당교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로 가기위한 하나의 과정이다라고 하는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해주면 좋겠습니다. 단지 천당 가기 위한 방법으로 성서 공부를 한다든지 혹은 신앙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 가정에, 내 직장에, 내가 머물고 있는 공동체에 실현 해볼까? 그 실현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 성서입니다.
왜 성서묵상을 하고, 소공동체를 통해서 자꾸 말씀 나누기를 하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역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케 하는 지혜를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간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성서공부를 해야되겠다. 그리고 성서의 가르침들을 깨우쳐야 되겠다. 이런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3) 성서를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가?
성서는 얼마든지 나름대로 또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대로 접근을 해도됩니다. 어떤 일정한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마음대로 해석을 한다고 해서 누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성서를 어떻게 읽고 해석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이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본다면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를 우리가 처음부터 제대로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성서에 접근을 한다 성서를 읽는다 했을 때에는 두 가지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육체적인 몸가짐, 어떤 자세로 읽어야 되는가에서 육체적인 몸가짐이 있을수가 있고,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느냐?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을 해볼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몸가짐 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성서를 읽을때의 자세(서서, 앉아서, 누워서, 화장실에서, 성전에서), 여러 가지 외적인 환경들을 말할 수 있고, 마음자세, 어떤 마음자세로 읽느냐?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몸가짐, 또 성서가 읽혀지는 환경보다는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 가짐입니다. 시대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만고불변의 말씀은 있지만 만고불변의 해석은 없습니다.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성서의 가르침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성서의 가르침을 해석 하는 것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수 있지만 성서의 말씀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와 인격의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그 해석의 원천이 되는 성서의 말씀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어떠한 마음으로 읽어야 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서는 남의 눈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읽어야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내가 성서를 읽고, 지금 현재 내가 느끼고, 내가 깨달은 바를 중요시 여겨야합니다. 내가 내 눈으로 읽은 내용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성서를 읽고 내 나름대로 느끼는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강요가 되면 독단이 되고, 편견이 됩니다. 우리는 이 독단과 편견의 부작용들을 우리 사회에서 많이 체험합니다. 성서를 자기눈으로 본 것 까지는 좋은데 자기 눈을 너무 믿은 나머지 자기 해석이 최고다. 휴거론, 종말론 등 그래서 믿지는 말고 내가 본 눈을 비워야 됩니다.
사람이 어떤 상대를 사랑하게 되면,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대에 첫 번째 반응은 상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주려고 합니다. 다 해줄 수 있다라고 할 때 상대방의 눈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의 눈빛을 보면, 나를 좋아 하는구나,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눈빛을 볼 때 내가 상대방의 요구를 알 수 있는 눈빛이 서로에게 마주치는 순간에 상대의 눈빛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나입니다. 상대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만이 보변, 처음에는 상대가 보이지만 깊이보면 상대의 눈빛속에서 자기를 발견합니다. 상대와 이미 합치된 자기자신을 본다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말은 내 눈으로 성서를 읽고 보지만, 결론적으로는 내 마음을 비움으로 인해서 이제는 성서 안으로 내 자신이 들어가야 됩니다. 내 의도대로 내가 부르짖고, 내가 주장하는 바대로, 성서를 인용해다가 막 끌어다가 사용할려고 하지말고, 내가 성서의 가르침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자기의 어떤 일반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서, 성서를 함부로 인용하고, 성서를 갖다가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데 정당화 시키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자기의 주장을 믿고 자기의 눈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말고 성서를 눈으로 읽되 자기 자신이 성서 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물론 이 단계까지 가는데는 많은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고 또 오랜 시간이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성서 해석입니다. 처음 시작은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인데 결론적으로는 말씀이 나를 읽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 성서 복음나누기이고 말씀나누기입니다. 말씀이 나를 읽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내가 말씀 안에 들어가 있는 이 상황, 이것이 성서를 대하는 방법입니다.(유리비유의 설명)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성서인데 그 성서를 읽는 내 자신이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서를 읽음으로 인해서, 내가 성서의 가르침을 외곡을 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눈으로 읽되 내가 읽은 것을 믿지는말고 오히려 말씀이 나를 읽음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계시가 많은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이 될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이 우리가 성서에 접근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 공부를 해야하고, 꾸준하게 성서에 대한 탐구자세가 필요로 하는것입니다. 만일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성서를 읽을 필요가 없고, 또 성서 공부를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성서의 의도를 제대로 알기 위한 과정, 그것이 바로 성서 공부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성서 공부를 하는 목적도 우리의 눈, 우리의 마음을 비우면서 말씀이 우리들을 읽을 수 있도록 내놓는 과정이라고 이해를 하면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에 대해서 좀더 쉽게 이해가 될 수있을 것입니다.
4) 성서의 짜임새
성서는 물론 한권으로 나와있지만 단행본은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 손에서 만들어진 구약,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 만들어진 신약, 이렇게 하느님 말씀의 총서 형식으로 나와 있습니다. 기원전 13세기에 모세에서부터 비롯해서 기원후 1세기에 성 사도요한에 이르기까지 무려 1400년동안 걸쳐서 집대성된 책입니다.
물론 가톨릭이 인정하는 73권(구약 46권, 신약 27권)의 방대한 책의 총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3-14세기에 걸쳐 저자들 역시 수없는 사람들이 거기에 걸쳐있고 저자들이 다른만큼 그분들의 개성과 필치가 다르고 또 저자에 따라서 자기가 쓴 책자의 부피도 다릅니다. 우리가 “성서”라고 일컫는 말은 히브리어로 책(seper)이라고 유래합니다.
이것이 후대에 와서 계약상속을 의미하는 유언(Testamentum)이라는 용어로 그 뒤에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크리스챤들은 다른 어떤 서적과는 비할 수 없이 존엄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어왔고 그것이 원 저자가 쓴 것을 수서사본 가의 손으로(파피루스나 양피지 두루마리 등에 필묵으로 옮겨적음), 옮겨적는 사람의 손으로, 그다음 인쇄공의 손을 거치면서까지 철저하게 간직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 손에 까지 넘겨졌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꿈란이라는 동굴에서 파피루스 같은데 써놓은 것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성서는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지고 구약은 크게 율법서(모세오경), 예언서, 성문서집으로 구분합니다.
구 약
① 율법서(모세오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권의 책으로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창세기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까지의 장구한 역사가 기록되며 여러저자의 손을 거쳐서 율법이 완성됩니다.
② 예언서 : 두 부분으로 나눈다(기원전760년경).
㉠ 예언시대의 역사 :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 예언집들 :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12소예언서(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아가, 나훔, 하바꾹, 스바니야, 하깨, 즈가리야, 말라기).
③ 성문서 :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 - 욥기, 시편, 잠언, 다섯두루마리(롯기, 아가, 전도서, 애가, 에스델) 다니엘, 에즈라, 느헤미야, 역대기 상․하, 그리고 토비트, 유딧, 에스델, 마카베오 전후서, 바룩, 집회서, 다니엘, 지혜서 중 일부는 개신교 측에서는 외경으로 보고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정경으로 확정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원전에는 없는 책들로 희랍어로 씌어졌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구약이 46권, 신약이 27권 그래서 73권이고, 개신교에서는 구약 39권, 신약 27권 합해서 66권입니다.
신 약
신약성서는 역사서, 지혜서, 예언서라는 분류를 정확히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역사서의 성격을 띠우고, 사도들의 서간서는 교훈서와 비슷하고, 요한의 묵시록은 예언서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성서를 신․구약으로 나누는 이유는 연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약성서는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약 100년이란 긴 세월을 통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성서’ 하면 본시 구약성서를 의미했으나, 그후 옛 계약인 구약성서를 완성 하는 작업으로서 인류가 새로운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맺게 된 새 계약을 기록하게 된 것이 신약 성서입니다. 그리스어로 씌어진 신약 성서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① 4복음서와 사도행전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기술되어 있으며, 마대오, 마르코, 루가, 요한 복음서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집성하게 된 동기는 예수님의 설교와 행적을 이웃에게 선포하려는 데 있습니다(루가1,1-4). 사도행전은 예수 부활 후 초대 교회 사도들의 선교활동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성서로, 예루살렘에서 세계 곳곳으로 확장 되어 가는 복음 선포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② 바오로 서간 : 14권 - 사도시대가 끝나갈 무렵, 사람들은 사도 및 그들의 직제자가 남겨 놓은 문헌들을 집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기원후 100-150년). 신약성서 중 가장 먼저 집필되고 집성된 부분은 바오로 서간이고, 제일 늦게 집성된 부분은 공동 서간입니다.
③ 공동서간 : 7권 - 공동 서간은 바오로 서간 집성의 영향을 받아 다른 사도들의 서간들도 모아서 보급시키려 한데 집성동기가 있습니다. 공동 서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베드로의 첫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 유다의 편지입니다.
④ 묵시록 - 요한 계시록이라고도 하며, 그리스도가 거둘 최후의 승리를 신비스런 상징이나 비유, 꿈, 숫자등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5) 성서 공부를 위한 기초작업
① 계시 : 숨겨진 것, 알려지지 않은 것, 가리위진 것을 밝히 드러내는 일을 계시라고 합니다. 성서상으로는 하는님이 사람에게 당신 자신에 관해서 밝히 드러내 주시는 일을 계시라고 정의합니다. 이 계시는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던 시대에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마지막 증인인 사도 요한이 기원후 100년 경에 죽기까지 장장 2천여년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우리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라야 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울리는 말씀(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들과 인간의 역사속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행적과 간섭(이스라엘 민족 역사와 함께 하신 일)들이라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성서에 실려있는 내용 전부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하신 것들이며 또한 성서 외에 교회의 온갖 가르침<가톨릭 용어로 성전(traditio)이라함>도 계시에 포함됩니다.
② 구세사 : 구세사란 하느님이 당신 행적과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직접 또는 역사상으로 드러내시고 거기에 인간이 응답함으로써 이룩되고 결정되는 사건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멀리 동떨어진 어느 역사의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동일한 목적에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방향 지워진 사건들, 즉 하느님의 역사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에게 접근해 오시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이야기는 결국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신 당신에게서 멀어져간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이야기는 결국 구원의 이야기 입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인간은 자신의 처지에 눈뜨면서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목격 증인들’이며 후에 ‘말씀의 전달자’가 된(루가1.2 참조)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수해 준 바와 같이 비록 하느님이 사실적(史實的) 계시가 예수의 인격과 구속사업으로 완성을 보았다 할지라도, 이 구원의 역사는 아직도 한창 전개되는 것입니다.
③ 성서 : 성서는 계시와 구세사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 계시를 받았고 그 역사를 살았던 백성 한 가운데 들어오신 하느님의 개입과 뜻에 따라, 기록된 책입니다. 그런 목적에서 특히 보우(保佑)를 입고 비추임 받은 인물들의 손으로 씌어진 책입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계시와 구세사와 성서는 서로 연관이 큽니다. 계시는 구세사의 일부를 이루고 구세사의 특출한 시기들을 가리키며 구세사의 동력(動力)이 되고 있습니다. 성서 역시 구세사의 일부를 이룹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행적과 말씀이 순수하게 보전되고 정확하게 풀이 되기를 바라셔서 당신의 개입의 결실이 세세대대로 계속되면서 모든 사람에게 증언(證言)이 되고, 교훈이 되고, 위안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다른 것들 사이에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한 가지 방식이고, 다른 것들 사이에 하느님을 만나뵙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는 늘(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의미가 무궁무진하며 영원한 가치를 지닌 말씀이 담겨 있고 사건들이 실려있습니다. 대학자들이 수천년 동안 성서 주해를 위해 기울인 노력과 성과는 성서의 단 일면조차 파헤친 것이 못되며 성서의 보고를 파악 하기에는 세상 종말까지 불가능할 정도로 성서는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도 항상 새로운 의미를 던져 준다 하겠습니다.
④ 성서의 영감 : 성서는 여러시대, 여러 저술가들의 손으로 씌어진 여러 권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성서는 한 책, 단일한 책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 성서는 여러 저술가들이 손을 댄 것이기는 하지만, 책임저자(責任著者)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한 책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 얼핏 보기에 성서는 무슨 총서(叢書)처럼 보이지만 그 논리가 일관 되어 있어서 단일한 책이라 하겠습니다.
⑤ 성서의 장(章)과 절(節) : 지금의 성서를 보면 장과 절이 잘 구분되어 있다. 원래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처음 성서를 쓸 때 에는 그냥 붙여서 하나로 쓴 것이었다. 지금의 그런 표시는 나중예 편리하게 성서를 알아듣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때로는 장절이 문장 전체와 잘 맞지 않는 곳도 나타나게 된다.
처음으로 장을 구분한 사람은 프랑스 사람인 파리 대학의 학장이었던 스테파노 랭톤(Stephanus Langton)으로서 그는 1226년에 성서를 장으로 구분 하였고, 동 시대인인 도밍고회 신부 후고(Hug0 de S. Cher +1263)는 이것을 절로 구분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오늘날 처럼 절을 구분한 것은 1551년 파리의 출판업자인 로베르 에스띠엔느(Robert Estienne)이다.
창세기부터 요한의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성서에 전개 되는 논리는 세상에 당신 나라를 세우시는 한 가지 계획입니다. 하느님 아들의 육화를 통해서 인간을 초자연계(超自然界)로 승화 시키고 만민을 구원 하시는 것이 그 계획의 전부입니다. 하느님의 이 계획이 구약에 준비되어 윤곽이 잡혔다가 신약(그리스도)에 이르러 실현을 봅니다. 성서의 일관성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교회 초창기부터 하느님이 성서에 영감(靈感)을 주셨다고 가르쳐 왔으며 그러기에 성서에는 탁월한 진리가 실려 있다고 봅니다.
바오로는 디모테오 서간에서 “성서는 전부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데 유익한 책이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된다”(2디모 3.16 이하 ; 2베드 1.21 이하 참고)고 성서의 영감을 강조 합니다. 성서 저술가는 하느님 이름으로 글을 썼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말씀을 기록해서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성서 저술가가 누구건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서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며, 하느님이 이 책의 저자이시고 또 이런것으로서 교회에 맡겨졌다”(계시헌장 제3장 11항)고 선언했습니다. 하느님의 개입과 역사(役事)가 신비하다면 성서의 영감 역시 신비로운 것입니다.
오 경 입 문
1. 오경의 통일성과 다양성
그리스계에 이어서 라틴계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성서의 첫 다섯 권을 전통적으로 ‘오경(五經 : Pentateuch)’ 이라 부른다. 오경의 원뜻은 ‘다섯 상자’가 된다. 흔히 ‘율법’으로 번역되는 히브리말 ‘토라’가 바로 이 다섯 권의 책을 가리키는데, 이 용어는 다섯 권의 책 각각이 아니라 전체를 가리키며, 법적인 의미에 한정되지 않고, 설화 부분들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과 구원의 역사까지 포함하는 폭 넓은 개념이다. 또한 오경을 ‘모세의 다섯 책’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모세를 입법자,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중개해 준 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모세의 토라는 각각 고유한 문학적, 역사적, 사회적 구조를 지닌 여러 법전들, 그리고 이 법전들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이루기 위하여 하신 일들을 하나로 이어 전하는 큰 설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경의 각 권에 붙여진 제목들 역시 그리스말에서 나왔는데, 이것들은 각 책의 내용에 대한 대략의 개념을 제공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의 기원에 대한 책이라는 의미에서 ‘창세기’, 에집트에서 탈출한 이야기를 전한다는 의미에서 ‘출애굽기’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레위기’라는 제목은 제의법(祭儀法)에서 레위의 자손들이 수행하게 되는 일에 상응하는 것이고, ‘민수기(民數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 조사에서 유래한다. 끝으로 ‘신명기(申命記)’는(이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두 번째 입법’ 이라는 뜻을 지닌다) ‘율법의 되풀이’라는 의미에서 이 제목을 달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전통에 따라 각 권을 시작하는 히브리어 첫 문장의 하나 또는 두 낱말을 제목으로 한다.
이렇게 다섯으로 나누는 것이 토라 전체의 통일성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이 통일성은 한 책에서 다음 책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출애굽기는 창세 46장에 전개된 야곱 가문의 족보를 요약하고, 요셉의 죽음을 알리는 창세기 마지막 절(50, 26)의 내용을 되풀이하며 시작한다(출애 1,6). 출애굽기 다음에 나오는 레위기에서는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의 계시가 계속되는데, 이 계시는 출애 20장에서 시작하여 민수 10장에 가서야 끝을 맺는다.
그리고 신명기는 전체적으로 출애 20장에서 23장에 이르는 법전을 다시 행각하게 하는모세의 열정적인 담론으로서, 이는 선택된 민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서 곧바로 하느님의 뜻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부딪히게 될 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성서의 책들이 장으로 나누어진 것은 중세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는 성서를 읽고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책 전체에 대략적으로나마 규칙적인 구분을 지으려는 노력이었다. 반면에 유다교 전례 봉독 때 이루어지는 단락 구분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성서 본문의 자연스런 구분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본문을 자연스럽게 나눌 경우 그 단락들의 길이는 매우 당양한 것으로 드러난다. 예컨데 요셉 이야기는 현재 여러 장에 걸쳐 전개되는 반면(창세 37과 39-50), 천사들과 사람들의 딸들 사이에 맺어진 혼인에 관한 일화는 단 몇 절일 뿐이다(창세 6, 1-4). 어쨌든 오경에서 현대적인 법전이나 신학 논술에서처럼 엄격한 구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아울러 오경에서 어떤 일정한 연대의 순서를 따라갈 수 있다 하더라도, 오경이 일차적으로 역사 안내서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율법의 역사
오경의 많은 설화들은 율법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예컨뎨 금송아지의 일화는(출애 32-34) 약속의 땅을 향해서 시나이산을 떠나라는 명령, 그리고 “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아라.” 는 계명과(출애 34,17) 함께 이루어지는 계약의 표명으로 끝을 맺는다. 다른 이야기들은 제도의 설정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예컨데 코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은(민수 16-17) 사제직 수행을 위해 아론 가문이 선택되는 것을 설명한다. 창세기는 무엇보다도 설화체로, 그리고 레위기는 특히 법률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창세기에는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할례에 대한 율법이 나오고(창17,9-14), 레위기에는 아론이 사제로 임명되는 이야기가 나온다(레위 8과 9). 유다교 전통은 토라의 법률적인 면에 먼저 주위를 기울인다. 반면에 그리스도교 전통은 설화적인 면에 더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결국 오경 안에서 하느님에 의한 인류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된다.
오경에 대한 문학적인 분석은 그 문학적인 유형들을 어느 정도 구분지을 수 있게 도와주고,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 대한 지식은 그 유형들을 특징지을 수 있게 해준다(형법, 혼인법, 족보 등). 그러나 본문의 분석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는 전체의 전망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매우 다양한 유형들은 일정한 의도와 의미와 함께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 따로, 설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동시에 역사이다. 역사와 율법은 선택된 민족의 것이고, 이 민족의 하느님께서 이루어신 것들이다.
3. 오경의 의의
1) 역사의 종교적 의미
오경은 역사와 동시에 율법으로 제시된다. 이 말은 오경이 교의신학적인 논술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시편의 기도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도움을 간청하고, 지혜문학서들은 개인의 도덕적, 종교적, 교육을 목표로 삼는다. 또한 예언서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힘차게 선포하고 이스라엘과 세상의 죄악을 강력히 고발한다. 이에 반해 오경은 우리에게 어떤 한 민족을 드러내 보여주면서, 하느님께서 이 민족을 어떻게 세우고 보호하셨으며 또 어떻게 기적적인 운명을 향해서 이끄셨는지 말해 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 민족,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온 인류와 맺고 유지하신 관계 속에서 이 책의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다. 오경의 백성은 거룩한 민족, 곧 전적으로 하는님께 봉헌된 백성이다. 이 백성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 달려있다. 고대 근동의 종교생활에서 아무리 중요한 일을 수행한 제도라 할지라도, 예컨데 왕권조차도 이스라엘에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권위는 하느님의 말씀, 곧 모세가 그 중개자였고 사제들이 전승하였으며, 예언자들이 선포하였고 끝으로 율법서에 보존된 말씀만이 지니고 있다. 이 율법은 단순히 법적인 계율들이나 종교 의식, 또는 규정들로 귀착시킬 수 없다. 그것은 이 율법이 하나의 역사에서 탄생하였고, 또한 계속해서 그 역사 속으로 다시 끼어들기 때문이다. 율법은 한 민족을 택하시어 당신 모습에 따라 만드신(“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11,45) 하느님의 교육이며, 결국은 이 백성의 종교적인 사고의 표현이기도 하다.
2) 오경의 그리스도교적 이해
이스라엘 백성이 온 세상에 흩어짐과 더불어 율법서는 이 민족을 하나로 묶는 통일성의 기초가 되고,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존립시키는 요소로 대두된다. 그리하여 오경의 법률적인 면들이 강조된다. 토라, 곧 온 세상에 퍼져있는 유다인들의 일상생활을 주재하면서 이들이 한 민족이 되도록 해주는 율법에 대한 성실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랍비들의 이러한 해석이 보편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보편주의는 유다 민족을 그 중심점으로 하면서 율법에 대한 성실성을 전제할 뿐이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율법의 현실성이 돋보이게 된다.
유다교가 지니는 이러한 항구한 가치 외에, 이졔 그리스도교 해석에 따라서 또 다른 형태의 보편주의가 시작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성서의 약속들이 이미 지켜졌다. 곧 이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고, 새로운 계약이 옛계약을 마무리지은 것이다. 첫 번째 계약의 율법은 이제 역사의 한때에 속한 것이었음이 드러나는 한편,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개방됨과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은 이 역사의 전체적인 지속성으로 세상에 내려진다는 생각이 강조된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이 과정은 멈추지 않고,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는 영원하다. 그래서 유다 백성은 그분께 받은 것을 잘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만이 토라를 통해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마태 5,17) 예수님을 통해서 육화된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는다. 이들은 율법 안에서 자기들의 역사를 발견한다. 이들 역시, 파스카날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며 살아가는 여정에서 공동체를 이룬다.
이들 역시 자기들의 생명이 계약으로써, 곧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위해서 맺으신 계약으로써 결정되었음을 안다. 이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자비와 성실의 징표에서 양식을 얻는다. 오경이 증언하는 사건들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 안에 이루실 업적을 미리 알리고 보인다. 그리고 옛계약의 제도들 역시 새계약의 제도들을 준비하고 그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드러낸다. 성전과 전례에 대해서 말해진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이 몸, 곧 하느님의 영광이 그 위에서 빛을 내는 새로운 성소에 적용된다(요한 2,21). 그리하여 오경은 계속해서 오늘의 인간들에게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함께 나누고, 온 인류를 위해서 이 선조에게 내려진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도 생명의 원천이 된다.
4. 오경의 서론
인간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啓示)는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19세기경에 생존했던 인물로서 히브리 민족의 시조(始祖)가 된다. 그런데 성서는 천지창조와 인간 창조를 서두로 하여 창세기 1-11장까지 인류 최초의 여러 변천사를 묘사한다. 만일 계시가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되었다면,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이야기를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 쓸 수 있었을까?
이 설화(說話)가 실려 있는 책들은 그리스말로 ‘오경(Pentateuco)’ 또는 다섯 두루마리라 하고 히브리인들이 ‘토라(Torah)’라고 일컫는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 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이 책들은 또 ‘모세의 율법’ 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다섯 권의 상당 부분이 이스라엘의 율법과 규정들을 담고 있다. 모세 오경에는 설화(說話) 부분도 상당히 많습니다. ‘토라’라는 말은 원래 ‘가르침’ 또는 ‘교의(敎義)’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은 모세 오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율법에서만 아니라, 자기네 선조들이 겪은 역사에서,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체험에서 ‘자신들의 삶의 규범’을 발견했던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모세 오경에서 하느님과 우주, 인간과 그 기원에 대한 가르침이 여러 문학 형태로 나아 있음을 발견한다. 모세 오경은 현존하는 결정판(決定版)이 나오기까지 기나긴 역사를 거쳐 형성된 문학이다.
모세 오경에 실린 율법과 설화 중의 대다수는 여러 세기 동안 구전(口傳)으로 전승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점차적으로 율법이나 설화의 일부가 한데 수집되고 편집이 되었고, 히브리인들이 바빌론 제국에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던 시기와, 유배생활 직후(기원전 586-538) 이전이 수집된 모든 자료를 한데 수집하고 편집하여 결정판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전승들이 역사이든 율법이든 간에 아주 다양한 사상적 환경에서 수집되고 전래 되었다는 견해에 일치하고 있다.
왕궁과 그 측근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사제단(司祭團)과 여러 예배소 혹은 성소(예 : 예루살렘 외에도 베델, 길갈, 실로와 같은 장소)에서 형성된 전승이 있고, 예언자와 그 제자들의 집단에서 수집 정리된 전승들도 있다. 이렇게 집단에 따라서 달리 형성된 전승들은 제각기 특이한 색채를 띠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종을 이루는 사료(史料) 넷을 골라 학자들은 편의상 다음과 같은 명칭을 붙였다.
① 야훼계 전승( J ) : 처음부터 하느님을 ‘야훼(Yhwh)'라고 호칭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이 전승은 제일 먼저 작성된 문헌이라고 추정이 되는데 솔로몬 이후에 남쪽은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 이렇게 구분이 되었을 때, 남쪽 유다 왕국에서 누가 작성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작성이 되었다. 이 전승에서 왕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고, 신앙의 일치를 이루는 것은 바로 왕이다.
② 엘로힘계 전승( E ) : 하느님을 ‘엘로힘(Elohim)'이라고 호칭한다. 이 전승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어떤 사람에 의해서 작성이 된다. 엘리야나 미가와 같은 예언자들의 메시지로서 매우 특징적인 모습을지니고 있는 이 전승은 예언자들에게 역점을두고 있다.
③ 신명기계 전승( D ) : 이 전승은 이스엘이 바빌론 유배생활을 거치고난 다음에 이제 자기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깊은 반성과 회개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 깊은 반성과 회개의 하나의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 출애굽 정신을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출애굽정신을 잊어벼렸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제 지금이라도 정신차리고 출애굽정신으로 돌아가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십계명에 충실하자, 충실해야만이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의 정신을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조하기 위해서 이 신명기계문헌이 작성이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요시아라는 왕이 종교 쇄신운동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정신적 토대가 된다.
④ 제관계 전승( P ) : 사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예식, 제사행위, 또 사제들의 삶에 대해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 제관계 문헌이라고 볼 수 있다. 제관계 문헌이 가장 집중적으로 작성이 되어 있는 것이 레위기이다.
야훼계 전승과 엘로힘계 전승은 주로 설화(說話)를 담고 있고, 신명기계와 제관계 전승은 율법(律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모세오경은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와 특히 신학사상을 풍부하게 전해줌으로써 실제적으로 그 과거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옛 글을 통해서 ‘오늘’ 인간에게 말씀을 계속 하시는 것이다.
5. 오경의 내용과 요약
모세 오경의 내용을 보면, 절반 가량은 율법으로 되어있고 그 나머지는 설화로 되어있는데, 설화 부분이 오경 전체에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이 설화 부분에서는 창조에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인류의 종교적 역사를 아주 일반적인 말로 서술하고 있으며(창세 1-11장), 이어서 성조들의 역사(창세 12-50장)와 에집트 탈출에 관계된 사건들과 광야에서의 방랑(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오경의 법률 부분은 후자의 사건들 특히 광야에서 방랑 중에 맺은 시나이 계약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율법(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전례적 법을 포함한)은 선택된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 주는 것이며, 그것은 실제의 형성기와는 관계없이 항상 시나이 계약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 개념이 법 개념을 결정지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모세 오경의 편찬자의 목적은 시나이 계약과 그 계약의 체결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그들이 어떠한 민족이며, 어떤 기원에서 형성되고, 하느님에 의해 어떻게 운명 지어졌는가를 이야기 하는데 있었다. 그의 기본 계획은 먼저 시나이 계약에 이르기 까지의 예비적 사건들을 말하고, 다음에 시나이 계약 자체를 기술하고, 끝으로 그 계약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 주요 사건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창세기 1 - 11 서사 : 하느님과 사람에 관한 기본 진리(1-2장) : 구원의 첫 섭리(아담과의 계약)의 파탄(破綻), 그러나 인류가 궁극적으로 악(惡)을 누르고 승리하리라는 약속(3, 15) : 첫 타락 후 점차 심해간 퇴패적 경향(4-11장) 등을 묘사하고, 인간이 악의 세력을 정복하려면 하느님편에서의 저극적 간섭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세기 12 - 36장 : 선택된 한 가정을 이교 세계와 분리시키고 결국은 그 이교 세계에도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한 준비 - 메소포타미아 출신인 성조(聖朝) 아브라함의 가족과 그 혈통을 이은 이사악과 야곱과 이스라엘 12부족(지파)의 이야기. 성조들 및 그들의 자손들과 맺은 둘째번의 절대적 계약의 이야기(15-17장).
창세기 37 - 50장 : 야곱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 12부족을 섭리적으로 에집트로 이주시켜 그곳에서 성장 발전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백척 간두(百尺竿頭)의 결정적 순간에 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결합케 할 준비를 시킨다.
출애굽기 1 - 12장 : 이 겨레를 하나의 새로운(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직접적인 사건들, 즉 에집트 인들의 압박, 모세가 그들의 영도자로 등장하기 까지의 준비,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기적적 간섭과 재앙등의 이야기.
출애굽기 13 - 18장 : 결정적 사건인 에집트의 노예살이 에서 자유를 찾은 탈출 이야기. 시나이 계약에 이르는 과정의 준비 사건들을 묘사한 데 이어 시나이 계약 자체를 기술한다(출애 19-24장). 이 계약은 이스라엘을 새로운 백성으로 탄생케 하여 이 지상(地上)에서의 하느님 나라의 개기(開基)로 삼음으로써, 이에 앞선 모든 사건들의 절정을 이룬다.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근거로 한 일종의 조건부 계약인 시나이 계약은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깨뜨려지고 하느님에 의해 물리쳐진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언자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신약으로 알고 있는 새로운 계약을 약속하신다. 이 신약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되고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성취하게 된다.
출애굽기 19 - 24장 : 이스라엘이 신정 민족, 즉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출애굽기 25 - 40장 :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는 성막과 결약의 궤에 머무르신다.
레위기 1 - 27장 : 하느님은 당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해지기를 요구하신다.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은 성막과 결약의 궤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민수기 1 - 36장 :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나이에서 팔레스티나로 인도하여 약속의 땅을 점령케 하신다. 이스라엘의 사회적 공동생활도, 성막도 결약의 궤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신명기 1 - 34장 : 설교의 양식으로 하느님과 인류와의 모든 통교(通交)의 기초인 사랑을 강조하며, 모세오경의 전체 내용을 요약한다.
모세오경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느님의 영원한 눈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맨 처음 창세기부터 끝의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당신 앞에서는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시는 한 저자 곧 하느님에 의해 씌어진 한권의 책으로 보아야 한다. 예컨데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과 갈바리아에서의 그 성취, 시나이에서 세워진 신정 왕국과 성령강림으로 창건 된 그리스도 교회, 이 왕국의 백성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약속의 땅과 선택된 자들을 위해 천국에 마련된 지복직관(Visio beatitica)등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는 동시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모세오경은 성서라는 방대한 책의 처음 다섯 장(章)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무대(舞臺)를 설정하고, 주요 등장 인물들을 소개하고, 기본 줄거리를 소묘(素描)하고 있다. 신약성서는 그 책, 즉 구원의 역사의 마지막 장(章)들이다. 신약이 없으면 성서는 결말이 없는 소설 즉 해결을 보지 못한 탐정 소설과도 같이 되어 버린다.
구약이 없으면 신약은 허공에 떠 버린다. 구약 성서를 완전히 알아야만 신약 성서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또 한편 하느님의 사랑의 절정인 신약 성서를 올바르게 인식하여야만 이 절정에 희망을 둔 사랑의 첫 교섭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구약 성서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고 또 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모세오경 형성의 역사>
성 조 시 대 |
기원전 1800 - 1300년경 --- 구약 전승의 시작 |
모 세 시 대 |
기원전 1300 - 1250년경 --- ↓ |
부족 동맹시대 |
기원전 1250 - 1000년경 --- 설화가 구전 형태를 갗춤 |
왕정시대 (다윗-멸망) |
기원전 1000 - 587년경 --- 오경의 기록이 시작됨 |
유배와 복구시대 |
기원전 587 - 400년경 --- 오경의 완성 (경전) |
창 세 기
1. 입 문
창세기는 오경의 첫 번째 책이다. 이책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기원,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시는 하느님 활동의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창세기는 토라(또는 모세의 율법)의 일부를 이루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민족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의 ‘아버지들’), 그리고 신앙인들이 자기들의 선조로도 받아들이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창세기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며, 유다 민족과 그리스도의 교회와 더불어 온 인류와 관련되는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창세기는 선조들의 생애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전하는데, 이것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준비할 목적으로 아브라함과 그 가정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심을 드러낼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는 선조들의 이야기 앞에 나오는 일종의 서론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서론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세상의 여러 민족들 가운데 배치 시키면서, 성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설화들을 담고 있다. 창조, 아담과 하와, 노아의 홍수, 바벨탑 등, 인류의 지상 여정 그리고 그들의 활동과 실패에 대하여 인상적으로 요약한 것들이다.
이러한 창세기,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이야기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그 역동성 안에서 파악해야 하고, 그 이야기들을 다른 것들과 관계없는 단편들로 분해해 버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 책의 널리 알려진 부분들 가운데 어떤 한 부분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경우에도 다음의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곧 오경 입문에서 강조된것처럼, 창세기가 선조시대에 대한 일종의 역사서로서 독립적인 작품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당신의 증인으로 세우시려고 하느님께서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어떻게 당신의 백성을 뽑아 이루시는지를 이야기하는 광범위한 전체의 시작일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아울러 창세기가 단숨에 저작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 동안 계속된 문학적인 작업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자기네 선조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겪어야 했던, 때로는 고통스런 체험들도 반영한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성쇠와 관련해서 끊임없이 다시 풀어 읽히는 살아있는 전통을 전제로 한다.
현재의 창세기 본문은, 자기들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업적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필연적으로 되풀이해서 깊이 생각한 결과라는 사실을 함께 고려할 때에만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업적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본문의 여러 편집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 후대의 편집 작업들은 그 기초가 된 최초의 초고를 파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계시들과 더불어 그것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2. 구 성
창세기는 통상 두 부분으로 나눈다. 곧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게 된 인류의 시작을 다루는 1-11장과 선조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12-50장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다시 아브라함(12-25장), 이사악과 특히 야곱(26-36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에(37-50장) 대한 세 개의 서로 이어지는 설화들로 세분된다. 이를 ‘종적’인 구분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구분은 창세기의 내용을 말해 주기 때문에 편리한 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구분, 곧 성서의 이 첫 번째 책이 창세기 50장을 넘어서는 여러 문학적인 지층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횡적’ 구분을 선호할 수도 있다.
이들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서로 중첩되기는 하였지만 오경 전체를 통해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창세기라 부를 수 있는 야훼계 설화는 이미 현재의 창세기가 ㄹ보여주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 야훼계 저자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동물과 식물 사이에서 살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말을 들음으로써, 에덴에서 쫓겨나 고통과 혼돈과 분열 속에서 살게 된다(2-4장). 인류는 자기들 사이의 일치를 이루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11장).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진정한 모임을 준비하시고 또 그것을 실현하신다. 그렇게 해서 그분께서는 노아를 홍수에서 건져내시고(6-9장)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 안에서 당신의 복을 받도록 하신다(12장). 아브라함 선조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성소에서 저 성소로 옮겨다닌다. 그러면서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는데, 이스마엘의 탄생과(16장) 이사악의 탄생이(18-21장) 그 약속을 보증한다. 아브라함의 설화는 이사악이 메소포타미아의 아람 땅에 사는 친척 쳐녀와 혼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24장).
아브라함의 상속자에 대한 전승은, 비록 자기 아버지에 대한 전승들보다 더욱 견고하게 대지와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수가 많지 않을 뿐더러 별로 두드러지지도 않는다(26장). 이사악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장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통일을 이루게 되는 열두 지파의 선조인 야곱에 의해서 압도된다. 이 야곱은 생의 대부분을 약속의 땅 밖에서 지낸다. 그는 또한 일생 동안 하느님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투쟁을 벌여야 하는 인간이기도 하다(32장).
실제로 야곱은 지속적으로 자기 부인의 민족인 아람인들, 이스라엘의 형제 민족인 에돔족의 조상인 에사오, 또 가나안의 주민들과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34장). 그러다 그는 에집트에서 생을 마친다. 창세기는 야곱의 아들들의 역사와 함께 끝을 맺는다. 이들 가운데서 유다와 더불어 요셉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형들은 요셉을 제거하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에집트로 ㄹ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을 굶주림에서 구해 낸다. 야곱은 숨을 거두기 전에 자식들에게 축복하는데, 유다를 그들의 임금으로 지명한다(49장). 야곱에 이어 요셉도 죽는다.
이로써 요셉은 자기 가족들을 머지않아 노예생활을 하게 되는 땅에 그냥 놓아둔 체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에집트에서 살게 된 선조들의 해방은 창세기에 이어지는 책, 곧 출애굽기의 주제가 된다. 왕조시대에 저작된 것이 틀림없는 야훼계 설화는 지방 및 씨족 전통들 가운데서 첫 번째로 문학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 설화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약속, 그리고 이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겪게 되는 어려움을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상기시킨다.
왕국의 분열로 인한 하느님의 백성이 누리던 일치의 파괴, 그리고 그것에 이어지는 어려운 시기는 이스라엘에게 선조들의 역사에 대한 수정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보완을 요구하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엘로힘계 전승이 두 번째 문학적 지층을 이루게 되는데, 그 범위와 중요성을 밝혀내는 작업은 쉽지가 않다. 이 전승의 어조는 앞선 야훼계 문헌보다 더욱 간결하면서 그보다 덜 낙관적이다. 또한 이 전승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사에 덜 직접적으로 개입하시고, 당신의 종들에게서 무엇보다도 먼저 순종을 기대하신다. 이 전승 안에서 가끔 예언 현상의 영향을 알아볼 수 있다. 예컨데 아브라함은, 하느님 때문에 신앙의 시련을 겪게 되는(22장) 예언자로서 받들어진다(20,7).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참혹한 몰락으로 선조들의 발자취에 대한 서술을 새롭게 수정해야 했다. 이 작업은 메소포타미아에 유배 간 사제들에 의해서 수행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사제계 문헌은 하느님의 업적의 제의적 그리고 법률적인 면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노아의 계약을 이어받고(9장) 시나이 계약을 준비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강조하게 된다(17장).
이 사제계 전승은 세상 창조와 더불어 성역사(聖歷史)를 시작하게 함으로써(1장), 창세기의 이야기에 결정적인 짜임새를 부여하고, 족보와 연대기적인 자료를 통해서 인류 운명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계약 또는 특수 규약의 제정으로 표시되는 여러 단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단계 곧 창조에서 노아까지, 그리고 노아에서 아브라함에게까지 이르는 단계를 거쳐서 이스라엘은 결국 뭇민족들 사이에서 유일하신 하느님께 참다운 예배를 드리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3. 주제와 인물
창세기는 풍부한 주제와 인물들을 담고 있다. 이들은 성서의 다른 구절들에도 나올 뿐만 아니라, 유다교 전통은 물론 그리스도교 전통도 이들에 대한 깊은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창세기는 창조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이 이야기는 시편들에서 불려지고(시편 8 : 104) 욥기의 저자에 의해서 상기되며(욥 38이하), 제2이사야에 의해서 되새겨 진다(이사 40이하). 에덴 동산에서 보인 아담의 자세는 바오로 서간에서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사세와 비교된다(로마 5 : 1고린 15). 노아 홍수의 이야기는 종말의 극적인 사건의 배경(마태 25) 또는 세례성사의 예형(豫形)으로 사용된다(1베드 3).
아브라함의 운명은 약속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 약속은 이후 하느님에 의해서 끊임없이 확인된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의 가까운 자손들, 그리고 먼 후손들의 미래를 밝혀주고 결정짓는다. 이러한 약속의 성취를 선조들, 그리고 여호수아 때와 다윗 때에 이스라엘 전체가 고대하였고, 사도바오로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음으 경축한다(갈라 3). 이사악의 희생제사는 선조들의 은덕을 기리는 랍비들의 주의를 끌었고, 초세기의 교회에서는 성금요일에 대한 예형이 된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신학은, 세상 기원의 신비와 그 운명의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 업적의 첫 단계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대대로 성서의 이 첫 번째 책을 읽고 또 읽는다. 사실 창세기는 개인과 민족들이,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하느님 사랑의 의지 안에 삶의 뿌리를 내리도록 해준다.
창세기의 몇몇 인물들이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야훼계 전승이 섬세하고 심오하게 그려낼 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도록 초대하는 아담과 하와부부; 주님의 은혜를 받고 그분의 명령으 수행하는 노아;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과 회교도들까지도 존경하는, 신앙인들의 선조로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투신한 믿음과 소망의 증인인 아브라함;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로 태어났지만 끊임없이 위협받고 결국 자기 가족들의 음모 앞에서 농간당하는 이사악; 가까운 친척들과의 끊임없는 대결 상태에서 속고 속이며 살았고, 하느님의 강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으며, 하느님을 만난 결과로서 자기 몸에 계속 그 흔적을 지니고 산 야곱; 잊혀진채 무죄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지만, 에집트의 재상이 되어, 결국 그러한 운명으로써 모든 것을 당신의 선택된 이들의 선에 기여하도록 만드시는 주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요셉등이다.
이러한 남성들과 더불어 선조 전통들 속에서 여인 또는 어머니가 수행하는 일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다. 뱀의 유혹에 빠지긴 하였지만, 전 인류의 어머니가 되도록 부름을 받는 화와(3장); 약속된 아들 이사악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을 듣고 웃는 사라(18장); 자기가 더 좋아하는 아들 야곱을 위해서 음모를 꾸미는 리브가(27장); 갈등 속에 살아가는 레아와 라헬(29장 이하); 보디발의 아내(39장) 등등, 이들은 성서 전통이 제시하는 대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아담과 아브라함과 이사악 등과 함께 소개되는 여인들이다.
주제와 인물들과 관련한 창세기의 풍부함은 성서의 세계로 들어 가는 하나의 문으로서 신앙인들은 그 앞에서 크게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4. 명 칭
창세기는 모세오경의 첫 번째 책으로 우주와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전제하면서 히브리 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기원(起源)’을 뜻하는 그리스어 ‘게내시스(Genesis)’ 라는 이름이 붙었고, 우리말로는 ‘창세기(創世記)’ 라고 일컫는다.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태고(太古)에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태고사(太古史)를 알지 못한다면 구약도 신약도 이해하지 못한다. 창세기는 태고사와 성조사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5. 구 분
① 태고사(원역사) : 1장 - 11장
1장 : 세계와 첫 인간들의 창조
2 - 3장 : 낙원과 타락(3장 원죄)
4 - 5장 : 홍수에 이르기까지의 인류(4장 카인의 죄)
6 - 9장 : 홍수설화
10 - 11장 : 성조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류 (11장 바벨탑)
② 성조사 : 12장 - 50장
12 - 25장 : 아브라함과 그의 가문
25 - 26장 : 이사악과 그의 가문
27 - 36장 : 야곱과 그의 가문
37 - 50장 : 요셉 설화
원
역
사 |
(1,1 - 2,4a) 세상, 인간, 창조 |
(2,4b - 3,2) 낙원과 범죄 |
(4,1 - 16) 카인의 살인 |
세 상 과 인 류 의 기 원 |
자 연 ․ 문 화 ․ 풍 습 ․ 종 교 ․ 정 치 의 기 원 | |
(4,17 - 24) 카인의 족보 |
(4,25 - 5,32) 셋 족보 | |||||
(6,1 - 9,17) 홍수와 노아 계약 |
(9,18 - 29) 노아의 저주와 축복 | |||||
(10장) 민족들의 계보 | ||||||
(11,1 - 9) 바벨탑 | ||||||
(11,10 - 32) 셈 족보 | ||||||
성 조
사 |
(12 - 25장) 아브라함의 역사 |
이 스 라 기엘 원의 | ||||
(26 - 36장) 이사악과 야곱의 역사 | ||||||
(37 - 50장) 요셉의 역사 |
③ 창조적 이야기의 형태
혼돈
첫 날 : 빛과 어둠(낮과 밤) -----------------나흗날 : 해, 달, 별
이튿날 : 창공(물을 갈라놓음) ----------------닷샛날 : 새와 물고기
사흗날 : 마른 땅, 풀과나무 ------------------엿샛날 : 육지동물, 남자와 여자
휴식
④ 창조 이야기의 목적 : 휴식, 질서
⑤ 하느님의 이름
엘(El) - 하느님에 대한 셈어의 일반적인 칭호
엘 샤다이(El Shaddai) - 전능하신 하느님 : 17, 1 ; 28, 3 ; 35, 11
엘 올람(El Olam) - 영원하신 하느님 : 21, 33
엘 엘리욘(El Elyon) -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 14, 22
엘 베델(El Bethel) - 베델의 하느님 : 31,13 ; 35, 7
엘 로이(El Roi) -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 : 16, 13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홀(Nahor)의 하느님 : 31, 53
이사악을 돌보시던 두려운 분 : 31, 42
야곱의 강하신 이 : 49, 24
⑥ 신약에 나타나는 창세기
창조 1, 1 - 요한 1, 3 ; 히브리 11, 3
결혼과 이혼 1, 27 - 마태오 19, 4-5
하와의 범죄 3, 6 - 2고린 11 ,3
아담의 범죄 3, 6 - 로마 15, 12-21
아벨의 예물을 반기심 4, 4 - 히브리 11, 4
카인의 살인 4, 8 - 1요한 3, 12
에녹의 승천 5, 24 - 히브리 11, 5
노아의 구원 6, 8-13 - 1베드로 3, 20
아브라함의 소명 12, 1 - 히브리 11, 8
멜기세덱의 사제직 14, 18 - 히브리 7, 1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19, 24-25 - 마태오 10, 15
이사악을 제물로 바침 22, 9 - 히브리 11, 17
에사오가 장자권을 팔았다 25, 33 - 히브리 12, 16
야곱이 요셉 아들들을 축복함 48, 15 - 히브리 11, 21
요셉의 유언 50,24 - 히브리 11, 22
묵상 :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6. 내 용
제 1 부 : 태고사(1장 - 11장)
1, 1 - 2, 4a --- 세계와 인간의 창조 : P
2, 4b - 25 --- 남자와 여자의 창조 : J
3, 1 - 24 --- 원조의 범죄와 처벌 : J
대홍수에 이르기 까지의 인류 사건들 : 4, 1 - 5, 32
4, 1 - 16 --- 카인과 아벨 : J
4, 17 - 26 --- 카인과 셋의 후손들 : J
5, 1 - 32 ---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계보 : J, P
노아의 대홍수 : 6, 1 - 9, 29
6장 - 8장 --- 천상존재들과의 결혼과 노아의 홍수 : J, P
9, 1 - 17 --- 노아와의 계약 : J, P
9, 18 - 27 --- 노아의 후손들 : J
10, 1 - 32 --- 지상에 퍼진 인종들 : J, P
11, 1 - 9 --- 바벨탑 : J
11, 10 - 32 --- 셈과 데라의 후손 : J, P
천지와 인간 창조에서 아브라함까지의 역사를 전하는 태고사는 ‘원역사’라고도 한다. 태고사는 성조사와 더불어 오경 전체의 서론을 이루면서, 직접으로는 성조사의 서론을 이룬다. 하느님은 어떠한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닌 자유로운 상태에서 전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고(1,1-2,4), 인간에게는 특별한 위치를 부여한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의 행복을 교만하게 불순종함으로써 잃어버린다(2,3-3,24).
카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는 서로 갈라진다(4,1-16). 카인 가문은 문화적으로는 매우 활발하나 윤리적으로는 좋지 못한 반면(4,1-16), 아벨을 대신한 셋의 가문은 매우 종교적이다(4,25-5,32). 이리하여 아담에서 셋을 거쳐 노아까지 이른바 홍수 이전의 조상을 이룬다.
노아에 이르러 인류의 죄악이 절정에 달하자, 하느님은 의인인 노아와 그의 자녀 외에는 전 인류를 홍수로써 멸망시킨다. 홍수가 지난 뒤에 배에서 나온 노아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새로운 아담이 되며, 이제 그로부터 새로운 인류 역사가 펼쳐진다(6,1-9,17). 노아의 아들 함은 부친께 대한 불경으로 저주를 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는다(9,18-29). 이 세 아들의 후손들이 여러 민족들의 조상이된다(10장). 인간의 수가 많아지자 개인적으로가 아니라(3장) 집단적으로 하느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교만 때문에 인류는 풍습과 언어적으로 갈라진다(11,1-9). 마지막으로 홍수 이후 셈에서 갈려진 인류를 다시 모으는 역할을 아브라함의 탄생까지의 족보가 소개된다.
태고사는 오직 야훼계와 사제계 사료로만 엮어져 있다. 야훼계 사료는 전체의 사건과 줄거리를 이루며, 사제계 사료는 창조와 홍수 이야기 외에 족보 등을 통하여 야훼계 사료를 보충․연결시키면서 독특한 사상을 반영시킨다. 엘로힘계 사료는 여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데, 원래 엘로힘계 사료가 성조사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최종 편집자인 사제계 사료의 저자가 그의 사상에 맞지 않아 엘로힘계 사료의 태고사 부분을 제거 시켰기 때문인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야훼계 사료와 사제계 사료에 나타난 태고사의 저작 동기와 노선은 대강 다음과 같다. 이 저자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왕조 초기(950년경)와 유배중이나 그 후 시대(600-400년)에 주변 국가들처럼 역사를 서술하면서 왕이나 백성의 조상의 역사를 삽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과거의 중요한 사건들을 수집하는 가운 데에 성조사를 꾸미게 되었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과 인류의 기원 역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느님에 의한 구원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태고사에도 이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는 하느님은 세상과 자연과 전 인류의 역사도 주관함을 나타낸다. 태고사는 이런 의미에서 저자들이 처한 현재의 입장에서 되돌아 본 과거에 대한 신학적 해설이다. 그래서 저자 또는 편집자들은 태고사를 다음과 같은 도식에 의해 전개시킨다.
구원 역사의 시작으로서의 하느님의 창조 - 인간의 범죄로 인한, 하느님으로부터의 점진적인 이탈 - 새 창조를 위한 하느님의 개입 - 백성의 해방과 선택에 의한 새 창조.
태고사의 문학 유형과 역사성은 아래의 내용에 대한 해설 부분에서 띄엄띄엄 언급되겠거니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담은 인류 시조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쓰이고(1-4장), 카인은 농민을, 아벨은 유목민을 대표하고 있다. 그 외에 죄, 남녀의 사랑, 고통, 산고, 옷, 죽음, 여러 언어, 종족, 풍습 등 인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아카디아, 에집트, 바빌론 등 주변국가의 영향을 받아 신화, 전설, 원인론(原因論 aethiologia), 족보 등 다양한 문학양식을 사용하여 이야기 또는 역사적 사실과 같이 풀이한 것이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땅과 갖는 관계이다. 하느님께서는 흙을 취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2, 7). 따라서 흙은 그의 전 삶의 모태가 된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과 땅과의 싸움이 시작된 이래 그 관계는 끊어지고 서로 멀어지게 되었다. 인간 때문에 땅에는 저주가 내리고, 땅은 쉽사리 결실을 내주지 않으려 한다(3, 17-19). 그러나 인간과 땅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끊기게 된 것은 땅이 카인의 동생의 피를 마셨을 때이다(4, 10-12).
야훼계 문헌에 의하면, 이 무서운 저주는 노아가 포도밭을 경작하기 시작할 때 은혜롭게도 약간 완화된다. “이 아들은 야훼께서 땅을 저주하시어 고생하며 일하던 우리를 한숨 돌리게 해주리라”(5, 29). “노아는 포도를 가꾸는 첫 농군이 되었다”(9, 20).
첫 원조의 옷 입음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가리웠고(2, 7), 나중에는 그들이 서로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 하지 않도록 야훼께서 불쌍히 보시어 그들을 입히신다(3, 21). 하느님은 스스로 그들의 수치를 가려 주시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공존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시고 동시에 인간문화의 한 근본적인 요소(의복)를 이루어 주신다.
카인의 이야기는 인간 생활의 분화와 그 반목을 보여 준다. 즉 목동의 삶과 농부의 삶이 그것이며, 앞으로 분화는 점점 더 심화된다. 카인의 후손의 계보를 보면 문화사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도시의 독특한 공동체적 삶 이외에 목동, 음악가, 대장장이가 등장한다. 그 중 대장장이는 인류문화의 역사에 결정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 즉 칼을 만들어낸다. 야훼계는 이 발명이 즉시 인간을 악으로 유혹하였음을 재치있계 이야기하고 있다(4, 22-24). 문화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현상이 바벨 탑 이야기에서 소개된다.
큰 문명화는 일반적으로 커다란 이주에 의해 야기된다. 인간은 서로 모임으로써 역사를 이루어나가고 또한 그들은 크나큰 문화적 잠재성을 지니게 된다(11, 3-4).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달라지게 되고 그들의 공동 삶은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 그들은 경졔적 일치에 몰두하게 된다. 이렇듯 바벨 탑 이야기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모든 인간 문명의 원형과 그것을 아래에서 지탱해주는 힘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 일치와 거대함에 대한 강한 의지(공포의 혼합과 함께)로 인해 인간은 거대한 기술사업을 펼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벨 탑 이야기는 이 ‘거대주의’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가장 큰 ‘위협’을 끼친다는 사실과 인간의 거대한 문명사업에는 하느님 자신에 대한 공격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순박한 순종에서 벗어남으로써, 불순종으로써 얻은 지식과 더불어 더욱더 강해지고 거대해지게 된다. 천상존재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6, 1)나 바벨 탑 이야기(11, 1이하)에서 우리는 거대함에 대한 인류의 잠재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문화적으로 거대해짐에 따라 인간은 점차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어 가고 종국에는 ‘재앙’으로 끝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계의 태고사를 정당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더 언급 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 참된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태고사의 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12장 1-3절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신학적 관점으로는 다시 말해 이 복잡한 범죄사에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무엇을 했느냐는 것과 인간이 하느님의 질서를 점점더 위반함에 대해 그분이 어떻게 반응을 보이셨느냐는 것이다. 이야기는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시작된다.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모든 가능한 보살핌을 계획하셨다. 그렇지만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 당신 자신과 인간 사이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의지였다.
히브리어 용법에 따라 설화자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단순한 지성의 활동보다는 훨씬 더 큰 의미를 뜻하고 있다. ‘야다’(yada=알다)란 단어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과 동시에 모든 것과 모든 비밀에 대해 능통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선과 악’은 일방적으로 도덕적인 의미로 이해 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존재와 삶을 신적으로 중대하려고 함으로써, 다시 말해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라는 단순함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낙원에서의 삶과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는 삶을 박탈 당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 이라고는 악의 세력과의 암담한 싸움과 고된 세상 한가운데서의 노고의 삶이었고 그의 운명은 결국은 예외없이 죽음으로 끝나고만다.
첫 아들 카인은 자기 동생을 질투해서 그를 죽인다. 하느님 께서는 흘려진 피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살인자를 저주하여 비옥한 경작지 밖으로 내쫓으신다.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떠나게 된다(4, 16). 비록 동생을 죽인 자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목숨만은 보호하신다(4, 15). 하지만 칼이 인간 역사에 들어온 이상 카인의 후손들 안에 복수심과 보복심의 중대는 피할 수 없게 된다(4, 23-24).
더욱 큰 재앙이 일어난다. 즉 천상의 존재들이 인간과 성관계를 맺는데(6장), 이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창조질서를 새로이 손상하는 것이었다. 이 재앙은 이전의 어떠한 것들 보다도 더 심각한데, 이는 인간 세계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 인간과 천상존재 사이의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당신 창조물의 이러한 타락에 당면해서 하느님께서는 홍수의 심판으로 인류를 멸망 시키신다. 그러나 단 한가족(노아의 식구들)은 살려 두신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홍수 이후의 이 새로운 인류가 “어릴적부터 악하다”(6, 5 : 8, 21)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만, 이제 노아로부터 말미암은 새로운 인류에게 자연질서의 ‘항존’을 장엄히 보장하신다. 이러한 자연질서 항존의 약속에서 인간은 처음으로 하느님의 인내로운 ‘관용’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또다시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오만으로 거대한 탑을 세우려 한다(11장). 다시금 새로운 재앙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일치를 깨려고 결심하시계 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섞어 놓으셨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들로 인류를 나누어 버리신다.
제관계 문헌은 인류의 태고사를 훨씬 더 간단한 방법으로, 다른 신학적 견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땅은 부패했고 폭력으로 가득찼다”(6, 11-13)고 아주 함축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그리고 죄의 현상예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 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적인 것에 대한 정의(하느님의 행동과 그분의 특성)에 집중하고 있다. 제관계 편집자는 야훼계보다 홍수의 재앙을 훨씬 더 크게 보도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생명 보존에 관계 되는 규정들을 순전히 은총의 결과로 보고 있다(9, 1이하).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맺음으로써 (9, 8 이하) 우주의 물질 존재의 지속을 보증하시기까지 한다. 하느님의 변함 없는 성실하심(이는 그분의 은총의 결과이다) 안에서 바로 구원역사가 정한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인간학적 관점으로는 야훼계의 태고사 묘사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종합해 넣는다는 점에서 야훼의 행위만을 전적으로 보도하는 제관계와 구분된다. 야훼계는 죄를 인간적인 현상으로, 특히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현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야훼계는 독자로 하여금 유혹을 그럴듯한 유인(誘引)들의 복합적인 과정으로 보게 한다(3, 6).
원조에게 있어서 타락의 첫 번째 표시는 ‘부끄러워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들의 전 신체적 본성에 침투해 있다. 여기에 두 번째의 표시인 ‘두려움’이 따른다. 이들 감정은 깨닫기도 전에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정신이 들어 의식적인 반성을 하게 되자 죄를 ‘전가’ 한다(3, 12.13.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뱀에게 속아서---”).
즉 인간에게서 인간에게로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하느님께로의 죄의 전가이다. 끝으로 심판은 인간의 상태에 근본적인 ‘분열’을 초래한다.
이제 시작된 악과의 투쟁, 여자의 종속적인 위치, 아기를 낳기 위해 겪는 고통, 쉽게 결실을 내지 않는 땅과의 투쟁이 그것이다. 카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죄에 의해 형성된 인간상에 또 다른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된다. 동생에 대한 카인의 증오는 그의 얼굴까지 찡그리게 한다(4, 5).
그의 후손 사이에는 복수심이 한없이 증가해 간다. 천상존재와 인간의 뒤섞임에 의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생명의 조건은 완전히 무질서해지기 시작한다. 신적 생명이 인간적인 생명과 뒤섞이게 되고, 이것은 창조를 거스르는 악마적인 초인간류(‘느빌림’)로 나아갈 뿐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의 수명을 제한하심으로써 그들을 통제하셨다. 바벨탑 이야기는 이미 언급된 언어의 현상과 기능(2, 19-20)을 상기 시킨다. 거기서 언어는 창조적인 기능을 갖고 있으며, 이 언어로써 인간은 주변 세계를 개념화 시키는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의 원초적 기능의 인간 서로가 의사 소통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을 파악하고 그들을 분류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 인간은 모두 동일한 언어로 말했으나, 바벨탑 이야기에 이르러서 언어는 새로운 측면으로 등장하게 된다. 즉 언어의 다양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보호’ 하시려는 개입 뿐 아니라 또한 ‘처벌’ 하시려는 개입의 결과이다.
① 세계와 인간의 창조 (1,1 - 2, 4a)
모두 제관계 사료로 이루어진 창조설화(創造說話)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시적으로 노래하는 일종의 창조찬미가이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는 거창한 선언에 있어서 ‘하늘과 땅’은 ‘만물’을 가리킨다. 다만 창조설화에 있어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성서 작가가 히브리인들과 나아가서는 전인류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와 그 진리를 펴는 설화이다.
성서 작가의 진리는 이것이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은 는 존재해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무(無)에서부터 지어 내셨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한마디로 간추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주를 이루는 주요한 요소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들어가면서, 그것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의지(意志)의 행위(行爲)에 의해서 쌍에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 목차(目次)는 한 주간의 6일이라는 선이 분명한 구도(構圖)를 따르고 있다. 그것도 3일씩 나눈 전후기(前後期)로 짜여 있다. 전기 3일은 공간이나 환경이 만들어지는 기간이요, 후기 3일은 그 공간을 채우는 사물들이 창조되는 기간이다.
전기 3일 후기 3일
첫 날 : 빛과 어둠 (낮과 밤) 나흗날 : 해, 달, 별
이튿날 : 창공, (물을 갈라놓음) 닷샛날 : 새, 물고기
사흗날 : 마른땅, 풀과 나무 엿샛날 : 육지 동물, 남자와 여자
처음 사흘간의 작업은, 다음 사흘간의 창조 될 피조물을 위한 ‘공간’ 내지 환경을 마련하고 있으며 처음 사흘간과 다음 사흘간 사이에는 정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 밖에도 사흗날과 엿새날에는 완벽하게 대칭되는 두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렛날은 샤밧(shabat),안식일이다. 서두의 장중한 선언,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는 구절은 창조주 하느님께 드리는 근본되는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성서 저자는 태초에 거창한 혼돈(카오스. chaos)이 있었던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거기에 시간을 타고 하느님의 여러 차례 개입이 가해지면서 ‘코스모스(cosmos)’, 즉 질서 잡힌 우주가 창조 되는 것처럼 그려낸다.
칠일간의 시간적 구분(6+1)은 매우 상루적인 것이었다 7이라는 숫자는 성서에서 완성 혹은 완전함을 가리킨다. 아울러 6+1이라는 구도는 활동과 휴식을 번갈하 취하는 인간 행태의 귀감으로 하느님을 제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참된 하느님이 백성이라면 엿새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일간 일하고 7일째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신명 5, 12. 15 : 이사 1, 13 : 호세 2, 11등 참조). (제관계 사람들이 이 성서를 쓸 때는 안식일은 이미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6일간의 창조설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안식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휴식을 함께 맛보게 되었음을 경축하는 날인 것이다. 신명기나 출애굽기를 보면 이렛날은 우리가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이다라고 하며, 이날 우리는 하느님이 휴식을 함께 나눔으로서 우리의 존엄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신명 5, 12-15 : 출애 20, 8-11).
설화는 일정한 형식문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일련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련의 형식문들이란, 명령, 실행, 업적에 대한 묘사, 칭찬, 생물들에게 내리시는 축복(풍부한 출산이 축복의 표지가 된다.), 이름의 부여(그 피조물에게 당신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표지), 시간의 표시등으로 엮어진 것이다. 그 기반을 이루는 것은 ‘명령과 실행’이라는 이중 도식이다.
이것은 제관계 전승의 전형적인 구도로서, 성서의 법제(예를들어 출애 25-40장의 대법령집), 이스라엘의 사회․종교적 질서는 대개 이 명령과 실행의 구도로 소급된다. 한결같이 하느님의 명령(“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과 이스라엘 백성의 실행이라는 도식으로 엮어져있다. 만사가 명령을 내리시는 말씀의 힘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스라엘을 지탱해주는 사회․종교적 제도들도,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땅과 세계도 하느님이 내리시는 한마디 말씀으로 존재하게된다.
창조설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일정한 스케마에 의하여 짜여져 있다.
첫째 : 6일 간의 창조 작업은 앞의 세 날과 뒤의 세 날로 나뉘어지며, 뒷부분은 앞부분과 조화를 이루면서 보충한다.
둘째 : 창조가 하느님의 말씀과 행위라는 시적인 음률 내지 리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 생겨라 - 그대로 되었다 - 보기 좋았다 - 저녁이 되고 +++; 만드셨다 - 부르셨다 - 축복하셨다.
셋째 : 전례적인 후렴 형식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공동번역에는 “이렇게 +++ 밤낮 하루가 지났다”) 가 6일간의 창조작업 끝에 매번 반복되고, 또한 “보시니 참 좋았다”도 거의 매일 반복된다 (둘째날 제외).
넷째 : 전체 설화가 6일간의 노동과 7일째의 휴식이라는 도식안에 묘사된다.
이러한 구조를 보고 즉시 알 수 있는 사항은, 이 창조설화가 원래 누구든지 쉽게 암기할 수 있도록 배려한 종교 교육적 의도와 예배에서 찬미가로 부를 수 있도록 전례적인 목적 하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설화는 당대의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우주신화를 많이 닮았는뎨, 이들 신화에서는 인간이나 자연을 신격화하여 선신과 악신의 싸움이 있은뒤에 우주가 생겨났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설화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행위에 의해 비로소 생겨났음을 뚜렷이 밝힌다. 저자는 신화적인 양식과 자료를 이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화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
저자가 이 설화를 통하여 이야기 하려는 바는 -
첫째 - 만물이 오직 한 분뿐이신 하느님에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창조하다)라는 동사로 바라(bara)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성서에 47번 나오지만 결코 인간이나 다른 존재와는 관계가 없고 오직 하느님의 행위에 대해서만 쓰이며, 없는 가운데로부터의 창조를 뜻한다.
둘째 - 만물이 모두 훌륭하게 창조되었으며(보시니 참 좋았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것이다.
셋째 - 저자는 남녀가 동등한 차원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존재이자 그 창조사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피조물임을 이야기한다. 27절에 보면 남녀 창조를 동시에 말한다 :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 물론 2, 21절에서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대로 만드셨다고 하는 것도 최초의 여자가 어디서 왔는가를 실제로 제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생긴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시하며 남자와의 평등성 및 상호의존성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구약성서를 설명해주고 있는 탈무드에 보면 이런 상징적 표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하느님은 여자가 남자에게 명령을 하도록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부터 만들어내지도 않으셨고, 또 여자가 남자의 노예가 되도록 여자를 남자의 발로부터 만들어내지도 않으셨으며, 그보다 여자가 남자의 심장(마음) 가까이 있도록 여자를 남자의 옆구리에로부터 만들어 내셨다”.
넷째 - 저자는 구원역사의 시작을 전하면서 창조 자체가 이미 구원행위임을 시사한다. 창조는 하느님의 첫 번째 구원행위인 것이다. 끝으로 하느님은 밤이 없는 7일째에 휴식함으로써 그의창조는 영원히 계속되며, 인간도 시간 안에서의 활동이 끝난 다음에는 밤이 없는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감음 밝힌다.
인간은 ‘모상(模像)’임을,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원형(原型)’이 계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느님의 피조물일 뿐 아니라 하느님이 ‘너’라고 부르시는 말상대임도 잊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관계 전승을 따르면, 인간은 원래 창조계의 정상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샤밧의 인간’이다. 인간은, 하느님이 그렇게 하시듯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우주만물과는 달리 멈추어 설줄을 알고, 안식일 곧 휴식을 지킬 줄 안다.
그것도 기력을 회복하고 일을 계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자기 원형이 되시는 분과의 관계를 할성화하기 위함이며, 그분을 만나 뵙기 위함이고,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자신의 인간 조건과 자신의 소명을 재 각성하기 위함이다.
② 남자와 여자의 창조 (2, 4b - 25)
아담(Adam) : 히브리 말로 ‘사람’을 의미한다. 온 땅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진흙을 빚어 인류의 원조(元祖)를 가리킨다(창세1, 26).
하느님을 불신하고 불순명함으로써 원죄를 범한 첫 사람 아담은 “미래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교회헌장, 22항)이요, “장차 오실 분의 원형”(로마5, 14)이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골로1, 15)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 또는 새 아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고 죄인이 되어 죽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무죄 판결을 받고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로마5, 12-21)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이 둘째 설화를 읽으면서 염두에 둘 일은, 첫째로, 이 설화가 창세 3 장과 더불어 단일한 설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3 장과 더불어 함께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로부터 50만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들려주는 동화처럼 간주해서도 안된다는 점이다.
이 장에서는 성서 저자가 이용한 상징적 언어를 통해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이야기, 남녀 인간 누구나 겪는 이야기를 판독해야 한다. 저자는 자기 시대(야훼계 전승은 기원전 10세기, 곧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문자로 기록되었다.)의 문화가 지니는 표현법과 영상들을 사용하여 그 이야기를 한 것이다.
둘째 설화는 인간과 한 쌍의 인류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차지하는 상호적이고 인격적인 ‘가치’라는 관점에서 남자가 무엇이고 여자가 무엇이며 부부가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성서 저자는 그 기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 현대의 추상적인 언어를 쓸자면 ‘원초의 것이 사물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기술하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 서술하면서 성서 저자는, 사람이 어느 시대, 어느 땅, 어느 민족에 속하든 상관없이 과연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해설하고 있다. 서두에서 ‘하늘’을 언급한 다음 다시는 하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마른 땅’과 ‘사람’에 시선이 집중된다. 진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는 하느님의 형상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막론하고 고대중동의 문화 영역에서는 흔한 착상이었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굴된 문헌과 부조물(浮彫物 )에서 입증되고 있다. 인간의 기원에 관해서 상상하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이었다고 하겠다. 사람이 죽은 다음 분해되어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감을 목격하면서 그런 착상을 하게 된 듯하다.
또 ‘하느님의 입김’만이 진흙으로 만든 이 초상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널리 펴져 있었다. 하느님의 입김이라고 해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영혼(靈魂)이 아니라 단지 생명의 모든 징후를 보여주는 ‘목숨’을 가리켰다. 여기서 성서가 정말 ‘가르치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면 오직 하나, “인간은 땅에 속하고 세상에 속하면서도, 하느님이 직접 개입(直接介入)하셔서 이루어 내신 소산이다.”라는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동산을 하나 마련하신다. 아담을 동산에 데리고 가시어 동산을 지키고 일하게 만드셨다면(창세 2, 15), 노동은 인간의 구성요소임이 분명하다. 노동은 범죄에 앞서고 범죄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본분이다. 노동은 결코 죄값이 아니다. 경제적인 필요(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는 일)말고도, 노동은 활동을 하고 싶은 충동, ‘창조’ 하려는 내밀한 필요, 자기 내심에 일어나는 활력과 이상들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에 상응한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가장 넓은의미에서) 자기를 성취하고, 하느님이 선사하신 환경을 자기에게 보다 적합한 형태로 만드는 데 늘 이바지한다. 노동해야 한다는 본분말고도, 성서 저자가 인간은 동산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기록해 두었을 때에, 30세기가 흐른 다음 자신의 말이 어떻게 구현되어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세상의 주인, 폭군, 제멋대로 다루는 군주가 되어서는 안된다. 현명하고 배려할 줄 아는 ‘주인’ , 자기 재산을 보살피고 지키며 더 나아지도록 개선하는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수탈하고 고갈시키고 파괴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파괴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르는 까닭이다.
하느님의 명령(창세 2,16-17)이 이 설화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하느님과의 만남과 대화와 친교를 나누도록 제안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과 아담 사이의 거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담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선물로 여겨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극히 현실적인 조건이다. 착각은 금물이다. 이 조건하에서만 아담은 자기를 충만하게 실현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기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아담이 믿고 신뢰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가 나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와 그 열매는 아담이 마음대로 따먹어도 된다. 다만 한 그루만은 안된다!”
대단한 제한이나 규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제한 규정의 대상이 미미한 그 만큼, 그 의미는 큰 것이다.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아담은 지음받은 자기 존재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할 수 있고 자기 창조주께 충실한 신뢰와 우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복종하지 않는다면 이 모두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짐승들이 창조 되고 아담 앞으로 줄지어 가며, 아담은 그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여준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성서적인 배경에서는 단순히 작명(作名)이라는 지적 활동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 권위와 지배권 및 주권을 행사하고 역할을 부여하는 행동이었다. 인간의 주위환경과 생활 그리고 노동에 있어서 짐승도 귀중한 도움이 된다. 짐승들도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을 나타내기는 하나 인간과 대등한 도움은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남자의 생명의 일부(‘갈빗대’는 극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로 여자를 빚어주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외과 의사처럼 작업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옹기장이 같은 하느님’ 등과 같은 관습적인 표현이다. 성서 저자는 하느님이 아담의 생명의 일부를 이용하셔서 여자를 빚어내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여자를 만드시는 데 무슨 재료가 필요하셔서가 아니라, 여자가 남자와 똑같은 본성으로 되어 있음을 남자에게 깨우쳐주기 위함이다.
여자도 똑같이 하느님의 입김으로 생명을 얻은 육체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도 남자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는다. 남자와 똑같이 지성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그 어느 피조물도 할 수 없는 동반자요 도움이다. 성서 저자는 여기서 원천적이고 근본적인 인간 관계,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관계는 모든 차원에서 남녀가 주고받는 협력과 상호보완을 위해 영속적인 관계이다. 그 중에서도 정신적 ․정서적 차원이 첫 번째 차원을 이룬다.
이 사실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도 나타나고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뼈에서 나온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라고 하는 아담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이 장면을 두고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창세 2, 24)는 해설을 붙이는 성서 저자의 말에서도 두드러진다. 이리하여 인간(남자와 여자)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완결을 본다. 하느님은 각 사람이 당신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실행하기를 바라신다.
③ 원조의 범죄와 처벌 (3, 1 - 24)
저자는 남녀가 알몸이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방해를 느끼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자기들끼리도, 자기들을 알몸으로 만들어주신 하느님 면전에서도 부끄러운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는 구절이다. 하느님의 원초 계획에 따른 인간 조 건이 어떤 것이었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알몸이라는 처지는 인간 존재가 근본적으로 피조물임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그렇다고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하느님과의 관계나 동료 인간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완전한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다. 알몸이라는 처지는 친교의 투명성, 단순함 그리고 전인적인 상호 신뢰를 나타낸다. 그러기에 ‘가려야’ 할 필요가 없고 가면을 쓸 필요가 없고 방어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느님과의 친교와 우정,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친교는 인간 관계에서도 행복과 균형을 도모해주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친밀함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직관(直觀)하는 경지는 누리지 못하였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신앙을 통한 만남이었다. 그렇지 않고 하느님을 직관했었더라면, 여하한 시험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유로운 선택 따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미 자신의 처지가 그분을 믿기로 결정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만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같은 신뢰를 거부하고서 (당장에는 분명하게 들어나지 않는) 심각한 결과를 향해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과일 하나 먹었다고 죽지는 않는다! 순종의 행위를 하기에 앞서 아담과 하와는 신앙과 신뢰를 고백하도록 불리움받았다. 신앙고백에는 지성을 하느님께 귀속시키는 행위, 자유의지의 행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모든 호의를 다 보여주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걸려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신뢰는 상당히 근거 있는 신뢰였던 셈이다.
지성과 자유의지를 주어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사람이 사람답게 즉 올바른 지성과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느님께 응답하는가를 시험 하셨다. 시험의 동기는 어떻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다운 처신 여부를 증명해 드렸어야만 했다. 여기서 악마(사탄)가 등장하고 여인(하와)이 말려든다.
악마와 여인의 대화는 3단계에 걸친 점진적인 과장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에 대해 점차 불신과 원망쪽으로 기운다. 원래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 2,16-17). 이에 뱀은 하와로 하여금 하느님께 서운한 마음이 일게끔 말꼬리를 얄밉게 바꾸고 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창세3, 1).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창세 3,2-3). ‘죽지 않으려거든’과 ‘만지지도’라는 말은 하느님의 본래 말씀에 하와가 보탠 말이다. 이쯤 되었을 때는 하와의 마음 속에 하느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들어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뱀은 그 순간을 포착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창세 3, 5).
원죄란 “하느님이 거추장스러운 계명으로 인간의 행복을 방해 하신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어, 차라리 계명을 범함으로써 오히려 행복이 온다는 식의 그릇된 논리가 실제로 행동화 된 것이라 하겠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선의를 인간이 정반대로 바꾸어 놓은 셈이다. 더욱이 아담은 비굴할 정도로 변명까지 서슴치 않았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창세 3, 12), 마치 이런 여자를 짝지어 주신 하느님께 책임이 있다는 식의 말투는 그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직접 받았던 장본인으로서의 체면까지 송두리째 스스로 뭉게 버리는 변명이다(창세 3, 14-19). 여기에 하느님의 징벌이 차례차례 내려진다. 뱀에게는 온갖 짐승 가운데서 저주를 도맡아 지고 죽기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여인과 여인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는 징벌이고 남자에게는 노동에 따르는 고통, 일터 자체의 악조건(가시더불, 엉겅퀴),
여인에게는 산고의 고통과 남편의 손아귀에 드는 징벌이 제시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징벌만으로 매듭을 짓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속의 희망을 던져 주신다. “나는 너를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15). 이 구절은 죄로 타락한 인류에게 맨 처음 죄 다음에 구원을 알린 ‘첫 복음’이 아닐수 없다.
하느님의 저주 속에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이 여전히 엄존하고 있음을 아담과 하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침과 또 ‘여인의 후손’(그리스도)이 전 인류를 대표하여 악마를 통쾌하게 쳐 부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자기네 구원이 달려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 함으로 인해서 쫒겨나게 되는 그 과정, 그 죄악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오늘날 원죄로 자리를 잡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피조물로서의 자기 자신을 망각한 죄다.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이것을 따 먹으면 하느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된다. 더군다나 선과 악을 알게된다. 눈이 밝아지고, 지혜가 생기고, 그러므로 해서 하느님이 된다. 피조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유혹이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인간이면서도 주제 파악 못하고 하느님으로서 행세 할려고 하는 그 경향들을 모두 갖고 있다.
재물을 모으려고 하는 것 도 자기가 주인행세 할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위에서 내려 누르고 싶고 지배할 수 있을까, 남 보다도 월등해지고 싶다. 내가 저 사람을 종으로 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나아야 하겠다는 주인 의식이다. 명예 쌓을려고 하고 출세할려고 하고 자식을 좋은대학 보낼려고 하는 부모님들 욕심이 왜 나오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꼭대기에 올라가야 되겠다는 말이다. 바베탑 사건처럼-----
하느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마치 재판관이 피고의 범죄사실을 캐어 묻듯이 질문하시는데, 그 질문의 요지가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이 물음에는 하느님이 항상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심과, 인간의 죄를 모른 체하시지 않으심과, 인간의 자유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의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즉각적인 하느님의 징벌과 구원약속은 물론이고 오경 전체를 통하여 전개된 하느님의 징벌과 구원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다.
※ 창세 1 -3 장의 강해들을 매듭짓기로 하자.
이 장들은 어떤 ‘사건’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 문서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만유의 기원, 하느님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던 원초의 인간 조건, 그같은 우정을 거부하였음과 그 선택에 뒤따른 온갖 비극적 체험, 마지막으로 그러한 인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당신의 우정을 쏟으시는 자비가 지극한 하느님의 선하심 등이다. 아울러 이 장들은 ‘예언’ 문서라고 하겠다.
인간적 접근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서원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감에서 우러나고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나온 결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장들은 ‘지혜’ 문서라고 불리울 만하다. 모든 지성을 지닌 존재가 자신의 삶 안에서 조만간에 제기할 만한 근본적인 ‘의문’들에 답변을 주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왜 우리 실존에 악이 존재하는가? 우리 인생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창세기 첫장들에 나오는 대답은 아직 결정적이고 완벽한 대답이 아니다. 하지만 인류 전체에게 크나큰 희망을 준다. 하느님은 인류의 원초와 우정을 회복하자고 제안하신다.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에제 18, 23)
※ 창세 4 - 11장의 의의
모세오경을 최종으로 편집하던 당시의 이스라엘 종교의식(宗敎意識)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이라는 좁다란 경계를 벗어난 경지였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전인류에 해당되는 ‘세계사’에 비추어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었다. 세계사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아브라함의 역사와 성조(聖祖)들의 역사를 논할 수가 없었다. 분명 이 역사도 ‘하느님과 인류와의 관계’라는 유일한 관점에 입각해서 서술된 것이다.
그러면 성서 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개별적인 역사와 세계사를 어떻게 연결해서 그 역사관(歷史觀)을 수립하였는가? 그들은 가종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대홍수의 관한 고대의 전승들, 바벨탑과 같이 위대한 민족들이 쇠망한 유적지들, 같은 집안이나 부족 가운데서 매일같이 자행되는 살인과 전쟁, 무서운 피의 복수, 언어의 장벽으로 철저하게 분열된 민족들의 상쟁을 확인하면서 그들은 치처럼 폭넓은 역사관에 도달하였다. 이 모든 현상에서 성서 저자들은 죄의 엄연한 현실을 보았다. 하느님을 거부한 인간 최초의 악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많아지고 심해졌음을 실감하였다.
성서 저자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그 이름이 전해져 오는 조상들의 명단을 부자간의 관계로 연결시켜 족보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생물학적 관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넓은 의미의 친족관계, 가족과 부족 간 인종상의 혈연관계, 지리적인 이웃, 그리고 정치, 경제, 상업 등을 매개로 한 여러 가지 형태의 인척 관계를 뜻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이야기들은 악이 퍼져 나감을 드러내고 있고, 족보는 하느님의 원초 계획에 따라 인류가 성장해 감을 나타내고 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라-.”(창세 1, 28) 이 모든 현상을 지켜보는 성서 저자들의 안목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안목이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최초의 타락 이후 인류의 종교사(宗敎史)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내리시는 선고는 결코 처벌이나 인류의 멸망이 아니고, 인간의 회복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이다. 성서 저자들은 사람의 이름과 족보들을 모아서 일종의 ‘몽타주’를 만들었다. 그 기본취지는 단일한 역사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류는 항상 한 핏줄이요 따라서 죄와 구원의 역사를 함께 한다는 연대의식을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성서는 시종일관 인간간의 차별과 민족주의에 대해 극구 반대하는 노선을 취한다.
이 고대사에는 중요한 문학적 흐름이 있다. 성서 저자는 우리가 선발이라 부를 수 있는 기준을 체택하고 있다. 인류가 원조에서 노아까지, 노아 다음, 셈에서 아브라함까지 족보를 지어 내려간다는 노선이다. 즉 구원계획이 그 노선에서 실현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하브라함 집안에서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이 이스마엘이 아닌 이사악에게 계승되며 다음에는 에사오가 아니라 야곱에게 계승된다. 성서 저자는 그 줄거리에서 벗어난 족보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흐름은 성서 저자가 두 가지 중요한 사상을 부각시키고자 사용한 방법이다.
1) 아브라함과 야곱에 이르는 족보에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다른 민족들이나 족보는 점차적으로 삭제했다. 이것은 한 사람(아브라함)과 한 민족(히브리)이 ‘선택’ 되는 사상과 사실을 주지시키고, 그 선택이 순전한 은혜임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2) 성서 저자는 전인류와 아브라함을 결부시킴으로써 ‘선택의 의의(意義)’ 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한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된 것은 온 인류를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맡겨져 계승되는 축복과 계시는 온 인류에게 돌아갈 재산이다.(창세 12, 3) 아브라함에게 내리는 언약의 축복은 낙원에서 내렸던 구원의 약속(창세 3, 15참조)을 실현하는 첫걸음이다.
④ 대홍수에 이르기 까지의 인류 사건들 (4,1-5,32)
카인의 이야기는 첫 인간의 범죄 이후 하느님이 예고하신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싸움과 그에 따르는 결과를 보여준다. 시기심이 많은 카인은 야훼께서 그의 아우 아벨의 제물은 받아 들이시고 자기 제물은 거절하시자 아벨을 살해한다.
하느님은 그 벌로 카인을 좋은 땅에서 쫓아내시고 고생길로 들어서게 하신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보호하신다. 설화자체는 그 양식상 사건을 종합적으로 묘사하는 부분과 장엄한 대화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대화는 시적이면서도 깊은 신학을 내포하고 있다.
저자는 이 이야기로 첫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가 얼마나 가혹하게 그의 가정을 통해 계승되는가를 일러 준다. 첫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지만(수직), 그 결과로 그의 자손은 인간과의 관계를 깨뜨린다(수평). 이 관계가 파손되기 때문에 이번에도 카인이 좋은 땅에서 쫒겨난다. 동시에 저자는 생명의 고귀함과 양심, 부족간의 복수의 기원과 서로 투쟁하는 농경문화와 묵축문화의 양상을 보여 준다.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하느님은 “너의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 9)라는 물음으로써 인간의 혀제에 대한 범죄 사실을 추궁하시며, 그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에 울부짖고 있다”(4, 10)라는 말로 표현한다. 시기심에 의하여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죄인인 카인을 보호하시며 “카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일곱갑절로 벌을 내리리라”(4, 15) 라고 말씀하시며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신다. 이처럼 성서의 저자는 인류의 죄에 대하여서 기록하면서도 하느님 자비의 신비는 그분의 정의를 훨씬 능가 하는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우리들에게 들려 주고 있다. 카인과 아벨의 일화는 비극으로 끝나는 평범한 한 형제간의 투쟁을 훨씬 뛰어넘어 보편적인 의의를 띠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잃고 타락한 인류는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음받은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미움과 질투가 마침내 살인까지 빚는다. 이렇게 하여 미움의 결과인 죽음이 지상에 최초로 나타났다.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카인의 양심에서 울려온 하느님의 말씀이다(4, 6-7). 인간이 원죄로 말미암아 많은 은총(恩寵)을 잃었지만 지성과 자유의지라는 제일 중요한 능력은 잃지 않았다. 따라서 자유로이 또 알면서 행한 모든 행동은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카인의 족보는 목축․음악․대장장이 등 문화의 기원, 복수․살인 등 선과 악의 흐름을 밝힌다(4, 17-24). 인류는 카인외에 또 다른 아담의 후손인 셋을 통하여 이어진다(야훼계 사료). 셋은 하느님의 은총을 상속받은 새로운 아벨로 등장하며, 그의 아들 에노스는 처음으로 야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4, 26).
5장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로 홍수 이전의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를 열거하는데(사제계 사료), 이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공간을 메울 뿐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이 계승됨을 증거한다. 여러 족보 중에 셋의 계보를 취한 것은 하느님이 그의 가문을 통하여 당신 계획을 실현됨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셋의 족보에는 10명의 조상이 열거되는데, 이들 모두가 천년을 넘지 못하지만 장수를 누리며, 규칙적은 아니지만 그 수명이 점차로 짧아진다. 이 장수의 근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왕의 수명을 1,500년으로 잡은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히브리 특유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⑤ 노아의 대홍수 (6,1-9,29)
창세 6 - 9장은 노아 홍수라고 전해져 오는 대 천재지변을 담고 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온 지구를 뒤덮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인류가 아직까지 전 세계에 펴져 살지는 않았던 시대이므로, 그 당시 원조들이 살고 있던 땅을 온통 휩쓸었으리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성서 저자로서는 이와 같은 재앙이 죄와 관련되지 않았음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홍수는 죄많은 인류를 벌하려고 하느님이 명하신 재앙이었다. 완전히 하느님을 망각하고 천륜을 모른는 세상이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였다. 신처럼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온갖 죄악에 빠지게 만들어 결국엔 새로운 심판, 대홍수를 불러 일으킨다.
저자는 하느님께서 파멸의 홍수를 일으키기로 작정하실 때 슬픔과 실망에 눌러 계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결국 하느님은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종류의 동물들 한쌍씩만을 구하시고 나머지는 전부 물로써 심판을 내리신다.
노아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모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과 가족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류의 혈통을 잇고 유일하신 참 하느님께 대한 사상을 전승시키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계승하도록 선택받은 사람이다.
성서는 노아의 복종심을 매우 대견하게 여긴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였다.”(6,22) 하느님의 말씀에만 의지하고서 당대 사람들의 온갖 조롱을 무릅쓰면서 거대한 배, 그것도 지붕이 덮인 방주(方舟)를 만드는 일은 수월하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렇ㄹ지만 방주에 들어간 자만 목숨을 건졌다. 노아의 방주에서 그리스도교회의 첫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무사히 살아 남은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가족을 이끌고 하느님께 제사를 올린다. 종교의 근본행위를 함으로써 하느님께 흠숭과 감사의 정을 표한다. 하느님은 그 제사를 받아주시고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노라고 노아에게 언약하신다. 그리고 새 인류의 시조가 된 노아에게 일찍이 원조 아담에게 “너희는 많이 낳고 불어나거라. 땅 가득히 펴져 땅을 정복하여라.”(9,7 참조 ; 1,28)고 하셨던 축복을 거듭 내리신다. 또한 하느님은 노아와 땅위의 모든 생물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생명을 보장해 주신다.
그러나 이 홍수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죄를 지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 나아가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께서 다시는 홍수를 내리시지 않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뉘우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연민, 자비로 가득찬 분이시라는 사실은 심판을 통해서도 변함없이 드러난다. 이 세계가 죄악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보존되는 것도 하느님의 이 자비 덕분이다.
한편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함이 부친이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는 모습을 보고 자기 형제들에게 알리자 셈과 야벳이 부친을 가리워 주는 사건을 계기로 노아의 추태를 존중하지 못한 작은아들 함은 저주를 받고, 효경을 다한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는다.(9,21-23)
후대의 성조들이 하듯이 노아도 아들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내리는데 그 발언이 어디까지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느니만큼 참된 의미의 예언이라고 볼 수 있다.(9,25-27) 노아는 “셈의 하느님, 야훼는 찬양 받으실 분,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9,26)고 말한다. 즉 야훼의 이름을 불러 셈을 축복함으로써 셈과 그 후손이 하느님과 각별한 친분을 누리고 하느님의 특별한 안배를 받도록 한 것이다.
사실 셈에게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선민과 마침내 메시아가 나왔던 것이다. 함은 자손 만대에 걸쳐 저주를 받게 되었다. 가나안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징벌 때에 셈의 후손들인 히브리인들에게 굴복하고, 멸망하여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 야벳은 후손들이 번창하고 셈의 자손들과 평화로이 섞여 살리라는 축복을 받는다. 이리하여 노아의 막을 내리지만, 여기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한 다닥 노선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시는 친분이 셈의 후손을 통해 계승된다는 것이다.
⑥ 민족들의 분포 (10,1-32)
노아의 세 아들의 계보는 홍수 후에 그들이 민족을 이루어 세계로 퍼져나갔음과 인류가 원래는 한 조상을 둔 형제라는 것, 그리고 땅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축복의 결과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⑦ 바벨탑 (11 장)
창세 11장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민족들이 행한 시도를 우리에게 들려준다.(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양편에 낀 기름진 땅으로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 시도는 강력한 정치적․군사적 제국을 건설하고 전세계에서 유명한 민족이 되는 것이었다. 이 권력과 명성의 상징으로 거대한 도시와 높은 탑을 쌓기로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이 거창한 계획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하느님의 경륜(經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그 백성들의 언어르 혼란시켜 놓으셨다.
겨레들이 더 이상 서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갑자기 한순간에 여러 나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매우 빨리 사람들이 서로 불화하고 의견이 엇갈려 말이 통하지 않계 되고 따로 떨어져 제멋대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이 계획을 무너뜨리는 대신에 인류에게 참으로 위대한 당신의 계획을 세워주셨다. 그분은 한백성을 일으키시어 지상에서 진정 위대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이 백성은 전 인류를 대표하여 하느님의 계시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사실 바로 다음장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때부터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영적이면서도 볼 수 있는 건물의 초석(礎石)으로 삼으셨다.
건물은 처음에는 이스라엘백성을 가리켰고, 후일에는 메시아를 모신 ‘참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성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본받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친정한 자손이라 불리게 될 모든 이들로 이루어진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로마 4,12 참조)
※ 죄-처벌-은혜 및 태고사의 결론
성서의 태고사가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죄의 권세’가 인간의 잘못으로 일단 인류의 안으로 뚫고 들어오게 된자 인류의 최초의 역사를 전부 오염시키고, 점차로 역사의 향방을 지배하는 위세를 떨침으로써 하느님의 더욱 엄한 심판을 유발하게 되었다(3-11장). 원조의 타락, 카인의 살해, 라멕의 노래, 천상존재들과의 결혼, 바벨 탑의 건립 등은 야훼계가 죄의 증가를 표시하는 단계이다. 하느님께서는 점점 더 엄하게 범죄에 대해 벌하신다.
이와같은 죄의 세력확장의 역사가 그 절정에 이르렀음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 이야기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을 전하는 이 모든 설화들은 나름대로,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세상과 인간을 돌보시는 분으로 남아 계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동시에 3장-11장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거듭되는 ‘아니오’라는 태도에도 불구할고 당신이 그에게 원칙적으로 다짐하신 ‘긍정의 자세를 끝까지 고수하신다는, 일련의적극적인 증언들도 담고 있다. 그러기에 이 증언들은, 은총은 심판에 의한 지배보다 더 위대하고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언이다. 이에 대한 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는 3장 15절의 ‘첫 복음’은 그 형식을 보나 그 맥락을 보나 의심할 나위없이 뱀에 대한 일종의 처벌선고이다. 그렇지만 실상 이 말씀의 내용과 특히 그 의의를 제대로 측정하려면 이 말씀을 야훼계의 신학 전체 안에서 보아야 한다.
야훼계의 역사상은 일종의 구원사적 역사관이고 또 이를 애써 강조한다. 역사는 희망없는 반복적 순환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하느님으로부터 조종되고 있다. 그래서 야훼계가 이 말씀(3, 15)을 전할 때, 그가 메시아라든가 더구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안중에 두고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이 말씀을 좀더 정확하게 분석해 보면, 구원론적 의미에서의 어떤 ‘구원의 지평’이 거기에 함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2)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2, 17)라는 위협의 말씀은 즉시 죽는다는 의미이지만, 이 말씀이 뜻대로 실현된지는 않았다. 아담은 오래 살고 난 후에 죽었다(‘구백 삼십 년’ 6, 5).
3) ‘죄에 떨어진 다음’이었지만, 아직 ‘동산에서 추방되기’ 이전에 하느님께서는 첫 인간 부부를 걱정하고 돌보셨다고 한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남자(아담)와 그 아내에게 입히셨다”(3, 21).
4) 아내(하와)는 카인을 낳은 다음 이렇게 외친다.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4, 1). 이 말씀의 의도는 야훼께서 심판을 내리신 다음에도 계속해서 인간의 번성을 허락하시고 세상과 인간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5) 창세기 4장 6절에 의하면, 카인은 한때 모진 시련과 유혹을 견뎌야 했던 것 같다. 그러난 야훼께서는 죄에 떨어져 그 권세의 굴레를 쓰지 말고, 오히려 그 죄에 굴레를 씌우라고 타이르신다(4, 7).
6)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자 야훼께서는 아벨의 가장 가까운 혈친으로 자처하시고 불의와 폭력에 희생된 아벨의 ‘혈친 복수자’로 나서신다. ‘하느님은 억눌린 자의 옹호자’이시라는, 성서의 기조적인 명제가 여기에 이미 나타나 있다(4, 8-12).
7) 엄격한 응보원칙이 요구하는 것과는 달리 야훼께서는 카인에게 죽음을 선고하지도, 이를 집행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불안정한 방랑생활이라는 처벌을 그에게 내리셨으며, 카인에게 표를 찍어 그를 복수로 인한 죽음에서 지켜 주셨다(4, 15).
8) 야훼께서는 카인의 아들 에녹을 어여삐 여겨 그를 죽지 않은 채로 거두어 당신과 더불어 궁극적인 친교를 누리게 하셨다(5, 22 이하 : P문헌). 실상 그는 선사시대에 살았던 ‘의인’의 전형(典型)이다.
9)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많아지자”(6, 5 : J문헌)-실상“그 마음의 생각이 꾀하는 바가 날마다 그저 고약해 가기만 했던 것이다”-이를 보신 야훼의 마음은 “안타까웠고 당황하였다”(6, 6). 그리하여 그분은 마침내 홍수를 내어 인류를 멸종시키기로 작정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전멸을 가져 올 심판이 아니었다. “노아만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그 죄악 때문에 심판을 내리지 않으실 수 없으나 그분의 ‘은총’과 ‘호의’는 인간의 죄악보다도 더욱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10) 이렇게 야훼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배려로 노아의 가족을, 홍수의 재난에서 구출하심으로써 인류와 더불어 이루어 가시는 당신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신다.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고 돌보시는 야훼의 단호함은 이렇듯이 위해하다는 야훼계의 증언은 과연 대담하다. 그는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한다”(6 5)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밑받침하는 동시에,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는 그분의 은총의지를 그와 동일한 내용의 말씀-“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8, 21)-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은총의지는 또한 죄스런 인간이 생명을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 기본질서를 자연계 안에 유지해 준다(8, 22).
제관계 문헌의 신학은 이 전승을 넘겨 받아 이를 더욱 확장하고 재구성한다. 실상 이 하느님의 돌보심은 창세기 9장엣 노아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인류와의 ‘계약’에 집약되어 나온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대가(응답)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으시면서 이렇게 다짐하시다. “나는 너희와 계약을 세워 다시는 홍수로 모든 동물을 없애 버리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리라”(9, 11). 무지개는 그러한 약속으로 하느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돌보시기 위하여 당신의 구원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표징이 되었다.
실상 신화에서는 이 무지개가 하느님이나 혹은 제신이 전쟁을 마치고 활 시위를 놓고 쉬신다는 뜻으로 해석되던 소재였다. 즉 노아와의 계약은 - 비록 선사시대에 하느님과 노아, 따라서 전인류와 더불어 맺은 계약이라고 창세기 9장은 전하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 만백성이 하느님의 구원의지 안에 포함된다. 따라서 이 구원의지는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보증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서의 원사를 요약해 볼 때, 얼핏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는 원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셨고, 그 결과 이렇게 타락한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게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적지 않지만, 그분은 피조물을 부르시면서 세계 및 인간과 더불어 몸소 맺으신 인연을 당신 쪽에서 스스로 끊으시는 법이 없는 하느님이시다.
그러기에 이 인연은 그분이 벌로서 내리시는 심판 가운데에도 계속 유지된다. 또 사실 이 심판은 그 나름대로 (6, 5)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위해 관여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죄에 대한 처벌과 더불어 인간 곁에 계시는 하느님 편에서의 구원행위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심판의 행위와 더불어 항상 거기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나타났다. 죄가 커지자 은총은 더욱 커져 갔다.
그렇지만 한 시점에선 이 은혜스러운 보호도 없고 또한 하느님께서는 처벌된 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 즉 바벨 탑 이야기는 은총 없이 끝난다. 따라서 태고사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주요한 의문은 하느님과 인류와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 관계는 완전히 깨어졌는가? 하느님의 은총이 완전히 끝나 버렸는가? 태고사는 이에 대해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
모든 신학적인 의문들 중에 가장 보편적인 그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구원역사의 시작 - “아브라함을 통해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을” 축복하시기 위한,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이에 내포된 야훼의 역사계획-과 더불어 주어졌다. 아브라함을 통한 축복이 확대된 범위는 세계에 확산된 나라들이다. 이 사실은 역설적인 것 같아 보이는데, 그것은 창세기 12장부터 시작의 장이 갑자기 좁아지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문제들, 즉 세계, 인간, 성별, 고통, 나라들에 대한 언급이 없어진다. 아주 뜻밖에 창세기 12장부터 한 사람, 한 가족 그리고 그들로 말미암은 한 나라가 서술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러나 야훼께서 이러한 역사를 이끌어 가시려는 최종적인 보편적 목표에대한 언급은, 벌써 이 특별한 선택에 관한 이야기 시초(12, 1-3)에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태고사의 끝은 바벨 탑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의 부르심(창세 12, 1-3)이다. 사실상 태고사와 구원사의 바로 이러한 결합 때문에 이스라엘의 전체 구원역사는 ‘야훼와 뭇 나라들’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에 대해 또 이스라엘 선택의 의미에 대해 말하려면 세계창조 시초부터 시작하여야 하며, 이스라엘이란 모든 인류를 내포하는 보편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같이 창세기 12장 1절-3절은, 태고사가 이스라엘의 신학적 원인론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제 2 부 성조사 : (12장 - 50장)
① 성조 아브라함 : 12, 1 - 25, 18
12, 1 - 9 --- 아브람의 소명 : J, P
12, 10 - 20 --- 에집트에서의 아브람과 사래 : J
13, 1 - 18 --- 아브람과 롯의 분리 : J, P
14. 1 - 24 --- 아브람과 네 왕들 : ?
15, 1 - 21 --- 아브람과의 계약 : J
16, 1 - 16 --- 하갈의 도망 : J, P
17, 1 - 27 --- 할례의 계약 : P
18, 1 - 19, 38 --- 아들의 약속, 소돔과 고모라 : J
20, 1 - 18 --- 그랄에서의 아브라함과 사라 : E
21, 1 - 21 --- 이사악과 이스마엘 : J, P
21, 22 - 34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 E
22, 1 - 24 --- 이사악의 희생 : J, P
23, 1 - 20 --- 막벨라 동굴 구입 : P
24, 1 - 67 --- 이사악의 아내 : J
25, 1 - 18 --- 아브라함의 후손 : J, P
25, 19 - 34 --- 에사오와 야곱의 출생 : J, P
② 성조 이사악과 야곱 : 26, 1 - 36, 43
26, 1 - 35 --- 그랄과 브엘세바에서의 이사악 : J, P
27, 1 - 45 --- 이사악의 야곱 축복 : J
27, 46 - 28, 9 --- 바딴 아람으로 야곱 출발 : P
28, 10 - 22 --- 베델에서의 현시 : J, E
29, 1 - 30 --- 야곱의 결혼 : J, E
29, 31 - 30, 24 --- 야곱의 아들들 : J, E
30, 25 - 43 --- 야곱이 라반을 속임 : J, E
31, 1 - 21 --- 야곱의 출발 : J, E
31, 22 - 42 --- 라반의 추격 : J, E
31, 43 - 32, 3 --- 야곱과 라반의 계약 : J, E
32, 4 - 22 --- 야곱의 에사오 만날 준비 : J, E
32, 23 - 33 ---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함 : J
33, 1 - 20 --- 야곱이 에사오 만남 : J, E?
34, 1 - 31 --- 디나의 강간당함 : J, E
35, 1 - 29 --- 베델에서의 야곱 : E, P
36, 1 - 43 --- 에사오의 후손들 : P?
③ 요셉 이야기 37, 1 - 50, 26
37, 1 - 36 --- 요셉이 에집트로 팔려감 : J, E
38, 1 - 30 --- 유다와 다말 : J
39, 1 - 23 --- 요셉이 유혹을 극복함 : J
40, 1 - 23 --- 요셉이 죄수들의 꿈을 해석함 : E
41, 1 - 57 --- 요셉이 파라오 꿈을 해석함 : J, E
42, 1 - 38 ---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첫 번째 만남 : J, E
43, 1 - 34 --- 에집트로의 두 번째 여행 : J, E
44, 1 - 34 --- 베냐민을 위한 유다의 간청 : J
45, 1 - 28 --- 요셉이 자기 정체 드러냄 : J, E
46, 1 - 34 --- 에집트로의 야곱의 여행 : J, P
47, 1 - 31 --- 에집트에서의 히브리인들 : J, P
48, 1 - 22 ---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받아들임 : J, E, P
49, 1 - 33 --- 야곱의 축복 : J ?
50, 1 - 26 --- 야곱의 장래와 요셉의 마지막 행위 : J, E, P
성서에서 인류의 태고사(太古史 : 1 - 11장)가 아브라함의 역사로 넘어가는 분기점은 아무런 단절이 없이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난다. 노아의 큰 아들 셈에게서 이어지는 희미한 혈통이 아브라함의 가계로 넘어간다(11, 10-32). 다만 성서 저자는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에, ‘명성을 떨치려는’ 인간 욕구의 실패,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경륜을 벗어나 영광과 명예를 찾는 마지막 태고사 바벨탑 이야기를 삽입한다.
그 실패담에 이어서 세상이 감지하지 못할 불후의 영광과 위업에로 인간을 이끌어가는 전혀 새로운 역사가 막을 올린다. 이제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느님 손에 달려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신다. 현행 본분에서 이 시작의 완전한 새로움을 이해하는데 익숙지 않은 독자에게 성서적 전통 체계는 방해가 된다.
이스라엘이 과거를 의식적으로 반성하고 이를 기록할 무렵은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미 여러 세기를 살아온 후였다. 그때에는 벌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의 계시가 되어 있었고, 예언자들의 영감 받은 말씀에 의거하여 해석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인이 역사에 개입하신 하느님이 곧 태초부터 계시고 아브라함 이전에도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시던 하느님이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그렇기 때문에 히브리 성조들의 변천사는 태고의 전승 단편들과 단절되지 않고 연결 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저자가 부각 시키고자 하는 것은 진실은 하느님과 인간 관계의 역사에서 절대적인 이미로 그 시작이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원조의 타락 이후 그 효력을 회복하였다는 것이다.
성조사가 근거로 하고 있는 자료들은 다양한 그룹 및 여러 지방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지방적으로 그리고 제한적으로 유효했다. 야곱과 관계되는 전승들이 중부 팔례스티나 성소들, 즉 베델, 세겜, 브니엘과 결부된 것 이라면, 이사악과 아브라함과 관계되는 전승들은 남부, 특히 브엘세바와 마므레에서 유래했다. 이렇게 성조사가 원래는 독립적이었던 여러 전승들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성서 신학상 아주 중요하다.
성서학자들은 중동의 역사를 토대로 하여 아브라함과 다른 성조들의 연대를 기원전 1800년에서 1500년 사이로 잡고 있다. 그 고고학의 발굴에서 얻어진 자료로써 히브리 성조들에 관한 대부분의 아리송하던 것들이 밝혀졌고,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에는 이미 사라졌던 그들의 관습과 용기(用器)까지 확인하게 되었다.
발굴과 탐사가 쌓아올린 지식들은 자연히 성조들의 역사를 충분히 알려지고 한정된 역사적 궤도에 연결시키면서 납득이 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를 움직였던 내밀한 힘이나 그들의 결정과 외적인 활동들을 일으키는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설명하거나 문서화할 수 없을 것이다. 실로 그들의 정신세계에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으나 외부세계는 전과 다름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히브리 민족과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어디까지나 인격적인 차원의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어지는 성서의 관심은 성조들의 생애 중에서도 종교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그 무렵에는 계시가 초보 단계에 그쳤으며, 아브라함의 가문이라는 조그만 태두리 안에 국한된다.
구원의 역사가 한 집안에서 일어나는 출생, 결혼, 죽음 등 가정의 중요한 사건들과 섞이게 된다. 이제는 이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인간의 생활에 갱입하시고 당신을 드러내시고 계약을 맺으시고 대화를 나누시도록, 말하자면 기회를 제공해 드리는 것이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하느님의 그 개입과 대화는 상상도 못 할 만큼 폭넓어지고 걸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 구 조
현존하는 성조사를 형태로 볼 때 세 부분, 즉 본래 서로 독립해 있던 요셉 설화(창세 37-50장 : 이것은 12-36장과 매우 다름), 아브라함의 설화 전체(창세 12-50장), 그리고 야곱과 에사오의 설화 전체(창세 25-36장)로 구성 되어 있다. 그들의 주제는 각기 다르다. 아브라함의 설화는 부모들로부터 자녀들에게로 이어지는 후손의 계승과 관련되어 있으며, 야곱과 에사오 설화는 두 형제의 관계에 그리고 요셉 설화는 아버지와 형제들 및 가정 안에서의 갈등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세 부분들은 형태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12장-25장은 주로 개인적인 설화들로 구성되어 있고, 25장-36장은 좀더 큰 단위의 설화 집단들로 되어 있으며, 37장-50장은 하나의 긴 설화 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12장-25장은 약속을 25장-36장은 축복을 37장-50장은 평화(salon=공동체의 행복한 상태)를 강조한다.
★ 내 용
전체적으로 볼 때 성조들의 시대는 일종의 ‘약속의 시대’로 나타난다. 여기에 이어서 나오는 것은 약속의 실현으로 출애급, 가나안 점유, 그리고 이스라엘 왕정국가의 창업이다. 따라서 출애급 이후부터 왕조 창업까지는 ‘약속의 시대’에 비해서 ‘성취의 시대’로 나타난다. 창세기 12장-50장은 ‘약속’과 ‘성취’라는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을 중심으로 그 첫 동심원을 그려 준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2장-50장을 살펴볼 때, 주로 하느님께서는 구원 및 축복을 기꺼이 주시는 분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성조들을 돌보시면서 그들과 친교 관계를 맺고 유지하시는 분으로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성조들의 역사에서는 그때 마다 주도권을 먼저 취하시는 하느님이 전면에 나타나고, 이러한 하느님에 대해서 그 상대역인 인간이 이에 상응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관념은 오히려 후면으로 물러간 인상을 준다.
1) 아브라함의 역사 (12장 - 25장)
태고사(1장-11장)에서는 인간들이 죄를 지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시기였다고 볼 수가 있다. 아담과 에와의 범죄로 시작한 인류의 죄는 결국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시켰으며 하느님의 계속적인 은총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성조사에 들어와서는 다시 인간과 인간 또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다시 성립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인간의 하느님께로의 접근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며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 등 여러 가지 약속을 하고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그 약속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점차적으로 땅을 차지하고 이사악을 낳는 등의 사실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브라함의 역사는 다음의 8가지로 크게 나누어 살펴 볼 수가 있다.
⑴ 아브라함의 소명과 이주 : 12-13장
⑵ 아브라함과 왕들 그리고 멜기세댁 : 14장
⑶ 아브라함과 하느님 : 약속과 계약 : 15장
⑷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스마엘 : 16장
⑸ 계약과 할례 : 17장
⑹ 하느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소돔 : 18-19장
⑺ 남쪽 가나안에서의 아브라함 : 20-22장
⑻ 아브라함의 최후 : 23-25장
① 아브라함의 소명과 이주 (12장-13장)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로 하여금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케 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당신 나라의 토대가 될 민족을 형성하시기 시작 한다. 그는 시켐, 베델, 네겝지방을 통과하여 에집트로 내려가서 살다가 다시 그가 내려갔던 길을 되밟아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며, 함께 갔던 조카 롯에게 더 좋은 땅을 분배해 주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새로운 축복과 약속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인도로 축복속에 걷던 이길은 그의 후손 야곱에서 모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후손들이 다시 걷게 될 길이었다. 이 이야기 중에서 중요한 것은 처음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약속이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12,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12,1 : 13,5)과 많은 후손(12,1 : 13,6)과 모든 민족의 축복의 도구(12, 2-3 : 22, 18)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그 자신만을 위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고 모든 민족들을 이해서 선택된 것이다. 하느님은 바로 당신의 선택받은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하여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 이제 바벨에서 흩어졌던 민족들은 아브라함 안에서 희망의 표징을 부여 받게 된다.
하느님의 이 약속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범죄로 낙원에서 쫒겨나는 원조에게 하신 보편적 약속을 실천에 옮기신 제 1단계요,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26, 4)과 손자 야곱(28, 14)에게도 반복될 것이며, 모세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하며(출애 19-24장 참조),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에 의해 비로소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루가 1,55, 72-73 : 마태 1,1-14참조).
② 아브라함과 왕들 그리고 멜키세댁 (14장)
이방(異邦)의 네 임금들이 사해 남단의 평야지대를 습격하여 롯과 그의 가족을 사로 잡아가고, 아브라함은 추격하여 그들을 구해낸다.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하며 형제간의 관계를 파괴하지만 여기서는 손위 사람이 손아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려 함으로써 그 관게를 회복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승전길에 멜키세덱의 축복을 받는다. 멜키세덱은 살렘(예루살렘)왕이요, 레위 지파의 사제직이 정립되기 이전부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은자로 후대 전승은 그를 메시아의 한 형태로 보았다(시편 110).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모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히브리 7장), 이 사건에 나오는 빵과 포도주는 성체성사의 예표로 보고 있다.
이 장은 그 내용이나 양식 및 자료에 있어 오경의 어느 전승사료에도 속하지 않는 특수사료로서, 구약성서 중에서 해설하기에 가장 어려운 부분 중의 하나이다. 아마도 원래 독립적인 전쟁기였는데, 어느 편집자가 이것을 아브라함의 역사에 삽입한 것 같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전쟁영웅으로 등장하여 국제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세계역사 속의 중요인물로 부각된다.
이 민담의 장점은 아브라함과 멜키세덱이 이 만나는 장면인데, 이방적인 예식과 그 살제에 대한 경의는 구약성서에서 보기 힘든 이례적인 장면이다. 아브라함은 살렘(예루살렘?)의 왕이요 사제인 멜키세덱의 축복을 받고 그에 대한 의무를 수행했음을 나타내는 것이 이 민담의 의도이다. 왜냐하면 멜케세덱의 축복과 아브라함의 의무수행은 그의 후손인 다윗 왕조가 받는 축복과 구원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③ 아브라함과 하느님 : 약속과 계약 (15장)
이 장은 두 개의 독립된 설화로 짜여져 있다. 1-6절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보호와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과, 아브라함이 불평을 하면서도 그 약속을 믿는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7-21절은 하느님의 약속과 고대 민족들 사이에 흔히 행하여지던 계약체결이다. 그 대화나 예식자체로 보아 전례적인 영역에서 형성된 설화일 것이다. 이 설화의 사료는 야훼계와 엘로힘계인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엘로힘계 사료는 계약을, 야훼계 사료는왕조 창립사를 말한다고 본다.
이 설화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태도에 있다. 자식이 없이 늙어가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은 보호와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며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굳게 믿는다(15, 1-6). 아브라함은 단지 표징만을 보고 (하늘의 별) 하느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행위화 구원 약속에 대한 인간 자세의 한 표본을 제시하여 준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아즈라함의 미 믿음을 들면서 율법이 아닌 믿음에 의한 의화를(로마 4,3 : 갈라 3,6),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선행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야고 2, 23-26).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며 계약을 맺으신다. 계약을 맺는 양식은 당시의 퐁습대로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심으로 체결하신다. 이러한 양식은 상징적인 것으로 “만일 내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짐승들처럼 두동강이 나도 좋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수백년 후인 출애굽 사건으로 실현된다.
④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스마엘 (16장)
사라는 자신이 아기를 낳지 못하자,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갈을 통해 자식을 보도록 주선하여 하갈이 임신하게 된다. 하갈은 태기가 있자 사라를 업신여기기 시작하고, 이에 사라는 하갈을 내쫒는다. 그런데 주의 천사가 라하이로이에서 나타나 하갈을 되돌려보내며 많은 후손을 약속한다.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돌아와서 이스마엘을 낳는다.
단편적인 사제계 사료의 보충 외에 주로 야훼계 사료로 된 이 설화는 아브라함의 부인 문제를 취급한다. 즉, 약속된 후손의 어머니는 불임자인 사라가 되느냐, 또는 에집트 소실인 하갈이 되느냐 하는 문제다. 합무라비 법전에 나타난 당대의 바빌론 풍습에 따르면, 아기를 낳지 못하는 본처가 주선하여 자기 종으로 하여금 아기를 낳게 하면, 그 아기는 본처의 아이로 간주하여 본처의 무릎에서 해산한다(30, 3. 9). 남편은 이 때에 그 여종을 자기 첩으로 거느리지 못한다.
사라는 이러한 픙습을 따라 합법적으로 처신하였지만, 오히려 하갈이 권리를 빼앗으려 하자 권리를 침해받지 않으려고 하갈을 내쫓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약속은 깊은 신앙이 없는 여인의 후손에게서 이루어지지 않음을 표명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집을 떠난 하갈의 후손도 당신 구원계획에 참여토록 배려하신다.
⑤ 계약과 할례 (17장)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왕손 및 땅을 주실 것과 영원한 계약을 맺을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계약의 표지로 할례를 명하신다. 하느님은 이 약속의 이행을 위하여, 이미 수태 불가능한 나이에 든 사라가 아들을 낳아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할 것과, 그에게서 민족을 다스릴 왕손을 구체적으로 다짐하신다.
아브라함은 명령대로 자신과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종에 이르기까지 할례를 베푼다. 모두 사제계 사료에 속하는 이 장은 15, 7-21과 내용이 같으면서도 그 보도양식이 전혀 틀린다. 아브라함의 말은 거의 없고 주로 장엄하고 엄숙한 하느님의 말씀난 나타난다. 예식적이고 장엄한 문체와 어휘는 1장의 창조설화를 연상시킨다.
사제계 사료의 스케마에 따르면, 이 계약은 아담과 노아와의 계약에 이은 세 번째 계약인데, 세 계약 모두 예식규정이 들어 있다. 사제계 사료는 구원역사를 이렇게 웅장하고 경건한 전례형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유의할 점은 후손과 땅에 대한 이 고전적인 약속이 시나이 계약에서 내린 약속,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라는 말과 연결된 점이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땅의 약속이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진 땅의 약속으로 승화되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약속의 위대한 조상으로 세워 주면서, 그의 이름을 (아바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고쳐 주시는데, 아바람(Abiram)은 “아버지(종족의 보호신)는 높으시다”, 아브라함(Abhamon)은 “많은 백성들의 아버지”라고들 하지만 그 자세한 의미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 부인은 “사래”를 “사라”로 바꾸어 주셨다.
이렇게 이름이 바뀌는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의 운명이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우리는 이것을 나중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과 신약에서 요나의 아들 “시몬”이 “베드로”로 바뀌는 것에서 그 의미를 잘 알 수가 있다.
할례는 대부분 원시사회와 토테미즘 예식에서 볼 수 있는데, 정식 어른 또는 부족의 일원이 되는 성인식이었다. 이것이 종교예식과 결부되면서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하느님과 통교함을 표시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위생적인 효과 때문에 널리 퍼진 것 같다.
성서 저자는 이러한 원시 사회 내지 종교 풍습을 본떠면서도 그 의미를 계약에 의하여 하느님께 속한 백성의 표지로 승화시켰다. 또 어른이 될 나이가 아닌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실시함으로써 남자의 일생이 전부 하느님께 바쳐졌음을 나타내었다.
⑥ 하느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소돔 (18-19장)
18-19장은 전부 야훼계 사료에 속하며(19, 29만 사제계 사료), 보호자이신 하느님의 방문에 대한 설화이다. 구성상 하느님이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방문하는 부분과, 죄의 도시 소돔을 방문하는 설화 두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
첫째 방문설화에서는 아브라함이 세 여행자를 대접하자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1년 후에 이사악이 태어날 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사라는 이를 믿지않고 웃는다. 이 때문에 그 아들의 이름은 이사악(웃다, 미소짓다에서 온 말임)이라 불리게 된다. 이처럼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놀라움은 사라가 너무 늙어 아기를 낳을 희망을 완전히 포기한 사실에서 더욱 드러나고 있다
둘째 것은 두 천사가 소돔에 사는 롯에게 투속하자 소돔 사람들이 그들을 쫓아내려는 이야기다. 천사들은 롯 가족을 소알에 피신시킨 뒤에 소돔을 멸한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된다. 그후 롯의 두 딸은 남자들이 없는 곳에서 살게 되자, 롯을 술취하여 잠들게 한 다음 잠자리를 같이 하여 그 부친의 자식을 낳으니, 이들이 후대의 모압과 암몬이다.
신들이 유랑하는 나그네로 여러 도시를 다니며 인간의 선악을 구경하는 페니키아(오디세아․오바디오)와 희랍의 신화도 이 설화와 비슷하다.
아브라함의 방문자는 한 번은 야훼(18, 13. 22-23)로, 또 한 번은 두 천사(19, 1. 15)로, 또는 사람(18, 2. 10. 12)으로 나타나는데, 어떠한 식으로 표현되든 야훼를 말하며, 이러한 하느님이 현현은 구약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내용으로 전승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후대하는데, 이러한 풍습은 동방의 미덕으로서 아브라함 자신의 체험일 수 있다.
18장 16절에서 19장까지는 하느님이 소돔을 방문하는 내용이다. 창세 6장 5절-8절에서, 하느님은 세상의 사악함을 보시고 아무와도 협의없이 홍수로 세상을 파멸케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브라함과 협의하시며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그에게 개방해 두고 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두고 간청하는 것을 보면 그때 벌써 극소수의 의인 열사람만 있어도 하느님의 재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다(16, 53-55).
한편 몇세기 후에 예레미야는 예루살롐에 단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있으면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한다(예레 5,1). 또 유배시 예언자들은 당신의 종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걸머지게 될 것을 말한다(이사 53, 4-5). 이러한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소돔을 방문한 하느님은 롯과 그의 식구들을 구하고 나머지 백성은 단죄를 받게된다.
이스라옐의 전통에는 소돔이 성적 타락의 본보기로 전해지지만, 과연 소돔의 죄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이사야는 무법상태(1,10 : 3,9)로, 에제키엘은 먹고 마시며 안일하게 사는 것(16, 49)으로, 예레미야는 간음과 회개하지 않음과 헛소리(23, 14)로 보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오랜 시기에 걸쳐 가나안의 역사의 암이 되어 온 불륜의 변태적 악습을 하느님이 저주하신다는 것을 명심시키는 사건이다.
롯과 그의 딸들간의 근친상간은 일면 이스라엘의 적인 모압과 암몬의 불명에스러운 과거를 들추어 그들을 격하시키려는 의도도 있지만, 또한 당데에 있던 같은 씨족간의 결혼 관습을 표명한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서 혈통의 순수성을 말한다고도 본다.
⑦ 남쪽에서의 아브라함 (20-22장)
이 대목은 내용상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해서 볼 수가 있다.
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20장) : 12장 10-20절과 같은 내용으로 에집트 왕 대신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탐내다가 벌을 예고 받고 되돌려 준다. 내용이나 문체로 보아 엘로힘계 사료이다. 이 설화는 하느님이 약속하신대로 이사악을 낳기 전에 사라를 보호하심이 나타난다. 또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보게된다.
나) 이사악과 이스마엘(21, 1-21) : 이사악의 탄생과 하갈과 이스말엘이 쫓겨나는 설화가 담겨 있다. 사라는 약속 받은대로 이사악을 낳고 8일만에 할례를 베푼다.
이사악 탄생설화는 앞에서의 여러 번의 장황한 약속에 비해 매우 간결한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는 이야기(엘로힘계 사료)는 16, 1-4 (야훼계 사료)와 비슷한데, 여기서는 이스마엘이 완전히 떠나감으로써 구원역사가 이사악에게 집중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여종의 자식이 그 부친으로부터 적자로 인정받게 되면 그 어미도 정식 부인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는데, 사라는 이러한 풍습을 알고 그들을 추방한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부당한 처사를 행하기를 꺼리나 하느님의 허락을 받고 그들을 보낸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가지는 다정한 아버지로서의 인물됨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스마엘은 비록 약속의 아들이 아니지만 하느님은 그 여종과 그 아들을 보호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보호 장면은 창세기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다)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의 계약 (21, 22-34) : 26, 12-33의 이사악과 아베멜렉간의 계약과 비슷하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 땅과 우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는다. 이런 종류의 계약은 반 유목민의 생활을 반영한 것으로 브엘세바와 네게브 우물이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소유임을 증명한다 이로부터 약속된 땅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라) 이사악 제사 (22장) :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자, 그는 아낌없이 바칠 태세를 갖춘다. 많은 자손을 가지게 되리라는 약속은 바로 이사악을 통해 실현된 약속이었기에(15, 1-6참조) 아브라함에게 그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그의 순종정신과 그의 믿음을 시험한 것이었다.
성서의 가장 인상적인 이 이야기는 흔히 이사악의 제사로 불리는데, 엘로힘계 사료가 바탕을 이루며, 간간이 야훼계 사료가 삽입되었다. 그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어린이를 죽여 제물로 바쳤던 잔혹한 관습(열왕 하 16,3 : 21,6. 10)과는 반대로 이스라옐의 하느님은 생명을 존중하시며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신이 아니라 살리는 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이 사건은 순종의 최고 전형을 보여 주기 위해 기술되었고 또 동시대 사람들에게 맏아들은 참으로 하느님 차지라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순종하는 의인의 모델이 된다(히브 11,17 : 야고2, 21).
⑧ 아브라함의 최후 (23-25장)
아브라함의 생애의 마지막 시기의 보충적인 설화들(사람의 죽음과 막벨라 동굴을 사서 매장함, 나홀의 자녀들, 이사악의 결혼, 첩 크투라의 후손, 아브라함의 죽음과 이스마엘의 후손, 에사오와 야곱의 탄생 및 야곱이 장자권을 삼) 로서 구원역사 관점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라가 묻힌 막벨라 동굴에는 나중에 아브라함, 이사악, 리브가, 레아 및 야곱이 묻히는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지님을 말해 주는 것이 된다.
이사악과 리브가의 결혼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24장) 이방민족과의 혼합을 피하고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야곱 설화에도 나온다(27, 46-28, 2. 8-9). 아브라함의 셋째 부인 크투라 이야기는 아브라함 가문과 아랍 가문과의 연대성을 전하는 문서에서 인용한 것 같은데, 문맥에는 맞지 않으며 또 아브라함의 처신에도 맞지 않다. “아브라함은 백발이 되도록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25, 8)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지시에 충실한 일생을 보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역사는 이스마엘과 이사악의 계보로 사실상 끝난다. 그런데 끝부분에서 에사오와 야곱의 탄생(25, 19-28)과 야곱이 에사오에게서 장자권을 사는 것은(25, 29-34)하느님의 약속이 장자에게 결부되어 있지 않다는 표시이다. 이 기사에서 속임수를 쓰는 야곱의 윤리성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민담에는 선악 이야기가 흔하며, 이 모두가 윤리적인 의도로 씌어진 것은 아니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약속이 야곱에게 넘어감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다. 동시에 기억해야 할 점은 평범한 가정생활, 일상생활 중에서 하느님의 법과 뜻을 따름으로써, 가정의 역사와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2) 이사악과 야곱의 역사 (26 - 36장)
① 이사악 : 26장
② 야곱과 에사오 : 27-28장
③ 야곱과 라반 : 29-31
④ 야곱과 에사오의 상봉 : 32-36
명칭은 이사악과 야곱의 설화이지만, 이사악의 설화는 26장뿐이고, 그외 부분은 전부 야곱 설화에 속한다. 이사악 설화(26장)는 하느님의 축복, 리브가의 보호, 우물 사건 등 몇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야곱 설화에는 매우 잘 정돈되어 있는데, 크게 야곱과 에사오 설화(25, 21-34 : 27, 1-28. 22 : 32, 1-33. 20)와 야곱과 라반 설화(29, 1-31.54) 두 가지로 나누인다. 야곱이 에사오를 두려워하여 도망가는 이야기(27, 33이하)는 이 두 설화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이 둘째 성조사는 야곱과 에사오와의 싸움이라는 줄거리로 아브라함 설화보다 잘 통일되어 있다.
아브라함 설화는 후손의 약속이 중심이 되지만 매우 산만하였다. 또 여기서는 그 주제도 형제간에 자녀와 가축에 대한 축복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것으로 단순하다(신명기는 자녀, 가축, 땅의 세 축복을 말함). 성조사에서 형제관계는 큰 역할을 하는데, 이사악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사오, 요셉과 그 형제들, 이러한 형제 관계에서 저자는 하느님이 축복이 누구를 통해 계속 이어져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처음에 난 자보다 둘째 번에 난 자가 선택되었음을 보여줌으로써 하느님의 선택의 자유를 또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성조사는 야훼계 사료와 엘로힘계 사료가 더욱 평행적으로 연결되며 사제계 사료는 오직 부수적인 사료가 될 뿐이다.
① 이사악 (26장)
㉠ 리브가가 그랄에서 아비멜렉의 위험에서 보호를 받음
㉡ 우물로 인한 싸움
㉢ 아베멜렉과의 우호조약
리브가의 보호장면은 사라가 에집트에서 보호받은 장면과 비슷하다(12, 10-13 : 20, 1-18).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계획이 이사악에게도 계승됨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또 같은 이유로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도 나타나시어 아버지 아브라함과 맺었던 계약 하느님의 현현, 성소건립, 우호조약도 반복한다(26, 2-5. 24).
이 설화를 이해하려면 반유목민생활 모습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장소를 옮기면서 살다가 때로는 한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다. 이러한 생활에 전답, 우물, 여자가 삶이 큰 관심거리가 된다.
② 야곱과 에사오 (27-28)
이 설화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 야곱이 리브가의 지도로 이사악을 속이고 그의 형 에사오에게서 장자축복을 물려받는다. 에사오는 야곱을 죽일 뜻을 품지만 기브가는 야곱에게 라반에게로 피신하라고 일러준다(27, 1-45).
㉡ 이사악이 야곱을 라반에게로 보내며 가나안 여인이 아닌 같은 혈족과 결혼하라고 한다. 이를 보고 에사오는 가나안 아내를 두었지만, 다시금 혈족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는다(27, 46-28 ,9).
㉢ (28, 10-22) 야곱은 하란으로 가다가 루즈에서 꿈에 하늘까지 뻗는 사닥다리로 천사가 오르내리심을 본 뒤 야훼의 축복을 받는다. 그리고 그곳을 베델(하느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바꾼다. 야곱이 장자축복을 뺏는 행위는 윤릴적인 문제에 앞서, 하느님의 축복과 선택은 인간적인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유 선택에 기인함을 뜻한다.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데, 이스라엘도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다.
또 리브가의 활동은 하느님이 섭리에서 여인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야곱과 리브가의 행동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느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당신 계획을 실행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야곱이 받은 축복에는 농부들이 바라는 많은 수확, 에사오 지배가 있지만, 무엇보다 아브라함처럼 축복과 저주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 축복의 핵심이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27, 29).
야곱이 라반에게 장가들러 가게 되자, 에사오가 자기 종족과 다시 결혼하는 것은 사제계 사료의 기사로서 이 사료가 중시하는 윤리성(속임수가 없음), 하느님의 축복이 야곱 가문에 계승되는 점, 혼종혼이 단죄 등 신학적 의도가 뚜렷하다. 베델에서의 꿈 이야기는 고대 이방인의 성소가 야훼의 성소로 바뀐 사실을 정당화시키면서, 무엇보다도 아브라함(12-13장)과 이사악(28장)에게 내린 하느님의 축복이 야곱에게도 그대로 계승됨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③ 야곱과 라반 (29-31)
이 항목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 있다. 야곱은 하란에서 라반의 집에 머물며 두 번씩 7년간 일을 해주고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는다. 이 두 아내와 그들의 하녀들에게서 밴야민을 제외한(벤야민은 나중에 집에서 베델로 되돌아 가는 길에 라헬에게서 태어남 35, 16-20참조) 열 한 아들과 한 딸을 낳는다. 그후 다시 6년간 더 일해준 뒤 재산을 가지고 도망가다가, 뒤쫒아온 라반과 화해하고 조약을 맺는다.
이 설화는 결혼, 자녀출산, 가축, 조약 등 유목생활을 바탕으로 엮은 이야기로, 하느님이 평범한 인간 생활을 통하여 당신 뜻을 펴시고 약속을 이루어 주심을 소박하고 재미있는 문체로 펼친다. 야곱이 결혼하기 위해 오랫동안 일해 주는 것에서, 여자를 재산의 일부로 취급한 당대의 풍습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데릴사위이다.
처음 결혼식때 라반이 야곱을 속여 라헬 대신 레아를 먼저 준 것은 야곱이 에사오를 속인 것을 상기시키는 데, 역시 흔히 있는 이런 인간의 결점을 통해서도 하느님은 당신 계획을 이루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한 레아가 없었다면 모세나 다윗도 없었을 것이다. 야곱의 열 두 자녀(35, 16-18 : 벤야민 제외)는 열 두 지파와 상관이 되기는 하지만, 반드시 지파 자체나 또는 그들을 대표인물로 제시한 것은 아니다.
더 중점을 두는 것은 부인, 자녀, 남편간에 있는 인간생활이며, 인간의 개성이나 환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행위를 다룬다. 하느님은 인간의 평범한 생활 및 결혼, 자손, 재산 등 중요한 요소를 축복하심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주신 약속을 서서히 이루어 나가신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넷째 아들인 유다를 통해서 메시아를 보내심으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실 것이다. 즉 기한이 차면 유다 지파 다윗 가문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다(갈라 4, 4).
④ 야곱과 에사오의 상봉 (32-36)
본 항목은 야곱과 에사오이 상봉 외에 디나의 겁탈과 보복, 세켐에서 베텔로의 순례, 베텔에서 하느님의 현현과 약속, 벤야민의 출생과 라헬의 죽음, 야곱의 아들들의 명단, 이사악의 죽음, 에사오의 족보가 그 줄거리이다. 이 중에서 두 형제의 내용이 핵심 내용이며 그 나머지는 보충자료들이다. 한편 하란을 떠나 돌아오던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 씨름을 하며, 결국 “하느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 겨루어 이긴다” 는 뜻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적인 인물로, 백성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내고, 하느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이끄시도록 역사를 통해 씨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야곱처럼 하느님의 계획에 씨름이라도 하듯이 완고하게 반발하지만 결국 회심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이는 그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인 것이다. 에사오와의 재회는 야곱의 우려와는 달리 극히 우호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기사는 야곱이 브니엘에서 만난 기사와 평행선을 이룬다. 에사오는 자비스런 하느님처럼 행동하고, 야곱은 파라오에게처럼 일곱번 절하면서 마치 하느님을 대하듯이한다. 에사오가 동부 세일 지방으로 떠나감은 그가 요르단 동부지방과 연결됨을 시사하며, 이로써 마치 아브라함에게서 롯이 떠나가듯 사라짐으로써 하느님의 약속이 야곱에게 이루어 지도록 준비한다.
디나의 겁탈 기사는 세켐의 힉소스족과 이스라엘간의 투쟁에 의해 이스라엘이 이 땅을 차지한 것과, 이 지방에 루벤과 레위 지파가 없게 된 경위 및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할 때에 여러 이방인들의 풍습과의 접촉 위험이 많았음을 알린다. 세켐에서 간 것은(35장) 틀림없이 순례적 특징을 띠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세켐에서 베텔로의 순례는 관습적이었다. 이 순례시에는 먼저 이방 잡신을 버려야 했다. 베텔에서의 하느님의 현현은 땅의 약속과 이름을 바꾼 사실을 전하기 위함이며, 그 밖의 약속은 17장의 아브라함에게 내린 약속과 거의 일치한다.
라헬의 죽음은 그의 무덤이 어떻게 해서 베들레헴에 있게 되었나를 말하여 주며, 이 땅이 벤야민 지파의 영역이 된 배경을 설명한다. 요셉의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의 12지파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이름은 루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이싸갈, 즈블론, 단, 납달리, 가드, 아셀, 요셉, 벤야민이다(35, 23-26).
3) 요셉의 역사 (37 - 50장)
요셉의 일대기는 또 다른 선택의 새로운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세사는 야곱에게서 요셉을 끌어내고 있다. 야곱의 애처 라헬이 소생이었던 관계로 요셉은 야곱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고 이복형제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다 요셉은 자신의 미래를 꿈꾸고 나서 그 내용을 발설함으로써 이복 형제들의 미움과 질투를 극에 달하게 만들었다.
형들은 그를 잡아 죽이려 하다가 마음을 바꾸어 에집트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냥을 받고 노예로 팔아 버렸다. 야곱은 형 에사오를 속인 죄의 대가를 늙어서까지 톡톡이 치룬 셈이다(아들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요셉이 짐승들에게 잡혀 먹혔다고 속임으로써). 그러나 요셉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이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에집트 파라오 신하 집에서 시중을 들게된다.
그 신하의 부인은 요셉을 애모하여 자리를 같이 하려다가 요셉이 이에 불응하자 위중하여 그를 감옥에 갇히게 한다. 요셉은 같이 옥살이 하던 파라오의 신하들의 꿈을 해몽해 주고 그 인연으로 파라오의 꿈도 풀어주어 천신만고 끝에에집트 땅에서 왕 다음 자리로 승진하여 재상이 된다.
이것은 야곱가문(엄밀히 말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에집트 땅에 자리잡아 그 옛날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셨던 “하늘의 별 수 만큼, 바다의 모래 수 만큼이나 큰 민족으로 불어나게 되리라”는 말씀이 실현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요셉 형제들의 악의조차 하느님의 구원 목적에 오히려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하느님은 인간적 두뇌로 볼 때 가장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가장 비극적인 일을 행운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분임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의 해몽대로 7년 간의 풍년이 들자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가 그 다음 7년 간의 흉년시에 양식을 팔게 된다. 하느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며 그를 큰 인물로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요셉이 억울하게 고초를 겪는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그 때마다 하느님을 더욱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셉의 인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들이 지녀야 할 온전한 신뢰와 성실성 그리고 겸손을 배워야 하겠다.
요셉은 자기 형들이 에집트로 양식을 사러왔을 때에 자기 신분을 밝히고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에집트로 팔아 넘겼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 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45, 5).
“하느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파라오의 어른으로 그 온 집안의 주인으로 삼으시고 에집트 전국을 다스리는 자로 세워 주셨습니다”(45, 8).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열 두 형제와 그 자손들은 에집트에서 살게된다.
요셉의 사랑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구세사업과 어느정도 비교될 수 있다. 배척 당했던자가 가장 높은 자리에 높임을 받게된 점, 그로 인해 이루어진 생명의 길, 하느님께 꺾이지 않는 신앙, 정결, 원수사랑, 악을 덕으로 갚음, 용서와 자비등,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를 보게 된다.
에집트에 온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프라임과 므나세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여 축복을 준다(48장). 이로써 후에 팔레스티나의 땅을 차지하며 이스라엘이 12부족이라고 할 때에는 요셉과 레위가 빠지며 요셉의 두 아들이 들어가게 된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 전에 자기의 자식들에게 마지막의 축복을 내린다. 열 두 아들의 축복 중 유다에 대한 축복에서 우리는 메시아가 유다 가문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듣게 된다. 자식들에게 축복을 주고 야곱은 세상을 떠나 선조 아브라함이 묻혀 있는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에 묻히게 된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하느님의 품안으로 떠난 뒤, 옛 잘못에 대한 앙갚음에 대해 떨고 있는 형들을 용서해주며 세상을 떠나게 된다. 요셉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느님께서 너희를 그 때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그리고 올라 가거라”(50, 26) 하고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약속을 시킨다. 이러한 요셉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앞으로의 에집트 생활을 미리 예견하여 주는 것이며 결국 출애급기로 인하여 다시 찾아 온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 약속의 신학적 의미
성조들이 받은 약속들에게는 여러 가지 공통된 성질이 있는 반면에, 그 약속들 하나
나는 원래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약속에 대해 일반화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약속들이 전수되어 온 역사는 성조시대에서부터 유배기 이후까지 걸쳐 있으므로, 약속들을 모두 통틀어 초기 또는 후기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약속들 가운데 세 가지는 분명히 성조시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아들에 대한 약속, 이스라엘 민족이 이동하고 있는 동안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 새 목초지와 새로 거주할 장소에 대한 약속(이 약속은 12, 1-3절의 암시에서 추측한 것임)이 그것이다. 다른 약속들은 성조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생긴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 후기의 약속들은 후대에 옛 자료들을 재작업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며 ‘약속’이라고 표현된 것들이다. 위에서 두 그룹으로 크게 나누어 본 약속들의 신학적 의미는 개별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첫 그룹의 세 가지 약속들의 중요성은, 이 약속들이 성조들의 종교(이스라엘 종교나 역사와 어떤 연관을 갖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것)를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라는 사실에 있다. 이 약속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약속)과 하느님께서 행하신 것(성취) 사이의 관련성을 최초로 밝혀 준다.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거나 보호를 받았을 때, 그들은 그것이 곧 하느님이 말씀하셨던 것(약속)을 이루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살펴볼 때 성조전승이 왜 이스라일의 전승의 바탕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그룹의 약속들의 경우, 이 약속이 이스라옐 사람들의 의식을 신학적으로 반영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점은 초기 단계인 12, 1-3절과 후기 단계인 17장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 약속들은 이스라엘이 구원하시는 하느님 야훼(그분의 이러한 모습은 출애급 전승에 잘 나타나 있다)를 만난후 공식화 되었다. 그래서 이 약속들(둘째 그룹)은 하느님께서 옛날에 하신말씀(예컨데 첫 그룹의 약속)과 후기에 당신 백성에게 행하신 것(땅의 정복, 다윗 통치시대 등)을 연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 이 약속들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시며 앞으로도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
특히 땅 소유의 약속은 임박한 직접적인 성취, 즉 성조들의 가나안 땅에서의 정착과 관계되었다. 땅 소유의 약속이 처음에 주어졌을 때엔 여호수아의 인도에 의한 완저 정복을 뜻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성조사에서 그 약속이 나타나는 곳마다 그러한 뜻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이같이 이 옛 약속은 야훼계와 엘로힘계의 전체적인 구원역사의 테두리 속에 놓여 있음으로써, 훨씬 후대의 완성을 지향한다. 약속의 완성은 이졔 더 이상 단순히 모세 이전의 예배 공동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확대되어 성조들에게서 말미암은 전 이스라엘에게 적용된다.
이처럼 약속된 땅예 대한 성조들의 관계는 묘하게도 ‘양면적’이다. 사실 이 땅은 엄숙하게 그들과 그 후손에게 맡겨졌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권리로 얻은 작 소유지인 그 땅에서 두루 다니도록 명령하셨다(13, 14-15). 그러나 단어의 완전한 의미로 볼 때 그들은 결코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 즉 그들은 그 땅예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거주’하는 이들은 여전히 가나안인들이다(12,6).
야훼계와 엘로힘계보다 개념 정의를 훨씬 즐겨하는 제관계 편집자는 이 잠정적인 체류를 “너의 잠정적인 체류의 땅”으로 표현한다(17,8 : 28,4 : 36,7 : 37,1 : 47,9). 법적으로는 이 땅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의 땅, 즉 헤브론 가까이 막벨라의 무덤만이 성조들에게 속했다(23장). 약속 때문에 아브라함과 함께 방랑생활을 하던 성조들은 원래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11,28. 31)에 묻히지 않고 가나안 땅 안의 헤브론에 묻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을 당시 그들은 더 이상 잠정적 체류자들이 아니었다.
이같이 땅의 약속은 ‘최후의 소유’로 향하고 있다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성조들의 방랑이 목표는 그들의 역사라는 한계를 훨씬 넘어 서있다. 또한 제관계 문헌의 역사도 미래로 방향을 잡는데 ‘시나이 계시’가 바로 그것이다.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땅과 자녀들만을 약속하신 하느님이 되시고자 약속하셨고,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당신 자신과의 독특한 관계를 약속하신 것이다(17, 4-8 : 출애 6, 4-7).
이제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리라”(출애 6,7)는 구절은 시나이 계약형식에 있어 첫 구절이고 이어 “나는 너희가운뎨 살며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레위 26,12 : 신명 26, 17-18 : 에제 36, 28 : 37,27 : 2고린 6,16 : 묵시 21,3)로 바꾸어진다. 그런데 계명들의 계시와 적절한 예배의 설립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은 야훼의 독특한 백성이 되었다.
이같이 성조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존재하게 한 야훼의 특수한 배려를 말해 주는데, 어느 대목에서든 그것은 그 자체 너머를 지향하고 있다. 약속과 더불어 성조사는 국가의 기원을 지향하지만, 그것을 너머 시나이에서 이 백성에게 허락된 하느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자향하고 끝으로 가장 뛰어난 구원의 선물, 즉 가나안 땅의 최종적인 소유를 자향한다.
※ 요셉 설화는 야훼계, 엘로힘계, 사제계의 세 사료가 혼합되었지만. 사제계 사료는 매우 적고 야훼계 사료와 엘로힘계 사료가 예술적으로 잘 엮어져 있다. 오경 편집자는 야훼계 사료와 옐로힘계 사료의 평행부분을 많이 넣어 이야기를 매우 풍성하게 만들었다 야훼계사료는 사건을 자세히 펼쳐나가는 반면에, 엘로힘계 사료는 그의 특징을 살리며 해설한다. 각 사료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곳도 바로 이 요셉의 설화이다. 야훼계 사료는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유다를 두둔하며, 이스마엘인들을 안다. 엘로힘계 사료는 이스라엘 대신에 야곱이라 부르고 루벤을 두둔하여 꿈이야기를 잘하고 하느님을 엘로힘이라 부르며 미디안인을 잘 안다.
문학정 특징으로 볼 때 이 설화는 우선 그 방대한 분량에 있어 다른 성조사와 틀린다. 또 각 민담들이 개별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며, 획일적이고 통일되어 있다. 다른 성조사에서는 각 장들이 독립적으로 시작과 끝이 있음에 비해 이 설화에서는 장 구분이 상대적이다. 따라서 장을 무시해도 좋다. 모든 장면에는 사건 진술과 해설이 있다.
이 설화는 에집트에서 유행하던 지혜문학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를태면 요셉은 현인으로 부각되며, 그의 겸손, 용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이스라엘의 이상형으로 제시된다. 그 외에도 성윤리, 회개, 하느님의 섭리, 보상 등을 가르친다.
요셉 설화는 다니옐서와 그 줄거리가 흡사하다. 여기에는 비록 조상의 신앙에 충실한다든가 맹세를 한다든가 하는 요소는 없지만, 시험을 당하고 꿈을 풀고 조언을 하며 쉽게 높은 자리에 오르고 왕의 측근으로서 총애를 받아 자기 백성을 구하는 것 등이 비슷하다.
다른 성조사와는 내용상 다른점이 있으니, 팔레스티나 성소에 대한 말이 없고, 부족, 지명, 이름, 관습 등에 관한 어원적 해설이 없으며, 메소포타미아도 모르고 전례적인 요소도 없다. 그 대신에 사건이 매우 극적으로 전개되며 에집트의 문화 요소가 많다. 다른 성조사처럼 하느님의 현현이나 계시 또는 약속이 없지만 이야기 자체 안에 성조사의 사상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런 면에서 구원역사를 계속 전진시키면서 선택된 민족의 형성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는 요셉의 개인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섭리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또 비록 설화의 스케마는 형제간의 분쟁, 그에 따른 사건 및 형제의 화해라는 틀한에 전개되나, 요셉을 통하여 성조들이 에집트에 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민족의 형성과 에집트 탈출을 준비한다. 요셉 설화는 연속적인 설화이면서도 38장과 49장은 예외에 속한다. 38장은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로 롯기와 비교가 된다.
둘다 유다 지파에 들어온 과부 이야기를 한다. 37장에서 유다의 역할이 크기 때문에 38장을 삽입하게 된 것 같다. 49장은 야곱이 그의 열 두 아들에게 내린 축복의 장으로, 오래된 지파 설화를 모은 것이다. 이 축복에는 열두 아들이 십이 지파의 조상으로 묘사된다. 끝으로 요셉 설화를 성조사에 넣은 이유는 여기서 두드러지는 하느님의 섭리적 인도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인도, 즉 거대한 구언역사를 준비하고 또 그 일부가 되기 바라기 때문이다.
※ 종교적 가르침
① 창세기는 비록 그 역사적 가치는 적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적 진리를 풍부하게 제시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세상과 인류 및 이스라옐의 기원을 가르친다.
기원이라고 해서 오직 지나간 사실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의 이스라엘의 신앙을 표현한다.
옛날에 인간과 이스라엘이 어떠했으며, 현재에는 어떠하니, 앞으로 어떠해야 함을 교훈한다. 태고사와 성조사에서 신앙의 이상 또는 꿈을 제시하고 이것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닫게 하여 앞으로의 길을 제공한다. 따라서 창세기의 출발점은 가거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인간이 처해 있는 현재이며, 그런 의미에서 기원의 책으로서의 창세기는 동시에 종말의 책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은 “조상들의 하느님”이며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으로 앞으로의 자연과 인류의 역사는 바로 그분의 손에 달려 있음을 표명한 것이다. 인간은 창세기에서, 비록 스스로 나약하고 죄가 많은 존재일지라도 이러한 결점을 이겨서 하느님의 구원 의도를 충실히 따라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길을 배운다.
② 창세기는 오경의 대주제인 구원역사의 준비 도는 시작을 묘사하는 구원의 책이다. 창조는 구원의 시작이며, 민족 해방은 구원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창조다. 하느님은 범죄 후 즉시 구원을 약속하시고, 인간을 벌하시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위한 고마운 벌을 내린다.
첫 구원을 약속은 그런 의미에서 인류가 받은 (첫 복음)(Protoevangelium)이며, 이 복음은 오경 안에서 계속 발전되어 나간다. 아브라함등 성조들과의 계약, 그들에게 내리신 후손과 땅의 약속 등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진전되어 감을 그린 것이다. 그분의 구원 계획은 성조들처럼 그분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실현될 것이다.
③ 구원자이신 하느님은 동시에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분이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아사악, 야곱을 축복해 주시는 국가적인 하느님인 동시에, 인류의 조상들을 만드시고 축복하신 전 인류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인간의 악을 단죄하고 벌하시는 정의로운 분이시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성조들을 이끄시고 보호하신 것처럼 백성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분은 가나안, 메소포타미아, 에집트 등 어느 나라의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시다(El elyon).
④ 창세기는 인류의 기원뿐 아니라 그 본성도 기묘하게 밝혀 준다.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동물처럼 물질로 된 존재이지만(2, 7) 하느님을 닮고 만물을 통치하는 가장 뛰어난 존재다. 그면에서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존재로서, 동반자로서 창조사업에 협력하고 인류를 번식시킴으로써 하느님의 계획 실현을 돕는다.
인간은 하느님께 순종함으로 죄를 물리칠 수 있었으나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려는 교만과 자유남용으로 하느님을 배반하고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모든 행복을 잃었다. 그리고 이 죄의 결과로 계속해서 수치, 두려움, 거짓 등이 악에 휘말리고 말았다. 인간의 타락은 인류를 악에 쉽게 젖어들게 만들었다(8,21).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기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믿음과 의로운 생활은 인간을 다시금 하느님께로 이끌어 줄 것이다.
⑤ 이상과 같이 창세기는 그 풍부한 테마와 인물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여 주는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한 생명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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