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1)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웠다
조철수(강사․서강대 수도자대학원․앗시리아학)
사람부터 짐승까지
창세기에 전개되는 홍수 이야기 시작 부분에 야붸 하느님께서는 홍수를 일으켜 사람들을 없애버리겠다고 결정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야붸께서는 땅에 사람의 사악함이 많아졌고 온종일 그들의 마음이 궁리하는 성향도 오직 사악함을 보았다. 야붸께서는 땅에 사람을 만든 것을 슬퍼하시고 그분의 마음이 괴로워졌다. 야붸는 말씀하신다. ‘나는 땅 위에 내가 만들어낸 사람을 없애겠다. 사람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하늘의 새까지. 내가 그들을 만든 것을 참으로 슬퍼한다’”(창세 6,5-6).
이 구절에 대한 초기 유대교 랍비들의 해석 책을 읽어보면 많은 랍비들이 항상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잘못했는데 왜 가축이나 하늘의 새까지 벌을 받아야 할까라는 것이다. 초기 유대교 문헌에 자주 대두되는 전통적인 개념 설정 가운데 ‘악한 성향’과 ‘신실한 성향’ 이라는 주제어가 있다. 인간의 성격을 이렇게 양분하여 그 범주를 정하는 것이다.
‘신실한 성향’은 하느님이 하느님과 닮은(가까운, 즉 믿을 수 있는) 아담(사람)을 만들어내신 하느님의 거룩한 생각을 가리키며, 그와 대조적으로 악한 성향은 ‘악한 충동’을 일으키는 성향, 즉 죄 짓는 경향이 짙은 생각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옛날의 아담’, 즉 회개하기 이전의 아담을 가리킨다.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아담은 그의 아내가 따서 준 열매를 얻어먹고 눈이 떠지자 그 때문에 벌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정해준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철칙이 창세기에서부터 준수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인간의 성향은 아무리 계명을 원칙으로 세워놓아도 경계선을 넘는 악한 경향이 있다는 변명도 아담과 하바의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다. 문제는 사람 때문에 왜 짐승이 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창세기 미드라쉬(성서 해석 책)에서는 아래와 같은 비유를 들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려준다. “사람에서 가축과 기는 것과 하늘의 새까지.” 이것은 이렇게 비유된다. 임금이 그의 아들을 선생에게 맡겼다. 그는 그의 아들을 악한 심보로 만들어 놓았다. 임금은 그의 아들에게 화가 나서 그를 죽였다. 임금은 말했다. “바로 이 사람이 내 아들을 악한 심보로 만들어 놓았다. 내 아들은 이미 무너졌는데 이 자는 아직도 살아 있도다.” 그래서 (성서는 말한다) “사람에서 가축까지”(창세기 미드라쉬 6,7).
‘임금과 그이 아들’ 비유는 유대교 성서 해석에 자주 사용되는 해석방법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임금은 하느님을, 그의 아들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 비유에서 아들은 사람, 즉 아담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으며 임금이 그의 아들을 가르치라고 선택한 선생은 ‘가축까지’라는 문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선생은 누구일까? 그 해답은 에덴동산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 인물은 모두 넷이다. 하느님과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뱀이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게 알려진 에덴동산 이야기를 다시 읽을 필요가 생긴다.
갈비뼈
하느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에게 단잠을 재우신 후(아마도 마취 향을 들여 마시게 하셨을 것이다),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아담의 상대로 도움’이 되는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나오는 것이며, 이와 비교하여 보면 에덴동산 이야기는 새로운 시각에서 각색된 창작극이다.
바빌로니아의 수메르 신화 ‘거룩한 도시 딜문’에 의하면 지혜의 신 엔키는 자기가 정원에 뿌린 씨에서 자란 열매를 따먹고 앓게 된다. 모신은 엔키를 불쌍히 여겨 그의 아픈 곳을 물어보고 거기서 여신을 만들어내어 치유해 준다. 지혜의 신이 갈비뼈가 아프다고 말하자 갈비뼈에서 여신을 태어나게 한다. 그리고 갈비뼈의 여주가 달(月)의 여주가 되게 자리 배당을 한다.
수메르 문화권에서는 갈비뼈의 여주를 ‘생명의 여주(女主)’라고 부르는데, 그 특별한 이유는 언어적으로 갈비뼈와 생명이라는 단어는 서로 같은 발음(티)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명의 여주(닌티)가 달의 여주가 되는 것도 생명을 잉태하는 여자와 달/월경의 상관관계에서도 설명될 수 있지만, 달의 여주는 ‘닌이티’라고 발음되기에 ‘닌티’(갈비뼈의 여주/생명의 여주)는 쉽게 ‘닌이티’(달의 여주)라는 단어로 덧붙여 이해될 수 있다(이와 비슷한 예로, 아래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뱀이 ‘교묘하다’와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벌거벗었다’ 는 두 단어는 서로 상관없는 별개의 뜻이지만 발음이 비슷하기에 이야기의 골자를 이루는 것처럼, 수메르 신화의 갈비뼈와 생명의 여주도 비슷하게 발음되는 단어들의 결말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웠다
아담의 상대로 만들어진 그의 아내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먹지 말라고 경고한 열매를 따서 먹고 또한 그녀의 아담도 함께 먹어 결국 벌을 받게 되었다고 이해한다. 과연 아담의 아내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열매를 따먹었을까? 이 단락의 첫 구절이 뱀에 대한 설명이다. “뱀은 야붸 하느님께서 만드신 온갖 들짐승에서 교묘한 것이었다”(창세3,1).
‘교묘’하다고 번역한 단어(아룸)는 바로 앞 절(2,25)에 아담과 그의 아내는 ‘벌거벗었다’는 단어(아루밈)아 비슷한 발음이다. ‘벌거벗었다’의 초점은 그들이 열매를 먹고 눈이 떠져(그렇다고 그들은 원래 눈이 멀었는데 열매를 먹고 눈이 떠졌다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벌거벗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는 생활관습을 배웠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의 눈이 떠지게 되는 길을 알려준 자가 바로 뱀이다. 뱀은 여자에게 하느님께서 열매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였느냐고 묻는다: “정말로 하느님께서 말했느냐? 동산의 온갖 나무에서 너희는 먹지 말라고,” 여자는 만일 그것을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때 뱀의 대답은 사실을 말한다.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아신다. 만일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 너희 눈이 떠지고 너희는 선과 악을 아는 신들처럼 된다는 것을” (창세 3,4-5).
다음 문장은 열매를 쳐다보는 여자의 마음을 그린 서술문이다. 이 문구가 그들의 눈이 떠지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디딤돌이다. ‘여자는 나무(의 열매)가 먹기에 좋고(맛있고), 그것은 눈(으로 보기)에 예쁘고, 나무(의 열매)는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웠다. 그녀는 그 열매를 취하여 먹고 그녀와 함께 있던 그녀의 남편에게 주어 그는 먹었다’ (창세 3,6).
열매를 표현하는 동사구가 3개 나온다. ‘먹기에 좋고, 보기에 예쁘고, 지식을 얻기에 탐스럽다.’ 히브리어에서 열매가 먹음직스럽다고 말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맛있게 생겼고(좋고) 생김새가 예쁘다’ 고 표현한다. 아담의 아내의 생각에는 한 가지 중요한 문구가 첨부되었다. “지식을 얻기에 탐스럽다.” 여자의 관심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소망이었지, 그것을 먹고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열매를 먹고 얻은 지식은 벌거벗은 것을 남에게 보이면 수치스러운 것이며 또한 남이 벌거벗은 것을 쳐다보아도 창피한 것이라는 예의이다.
우리의 상황에서는 별로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초기 유대교 문헌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예법(규범) 중의 하나는 합당한 이유 없이 옷을 벗지 말라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나이(13세)가 지나면 적어도 준수해야 할 사항이다. 초기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엣세네 공동체의 규례에 이와 같은 조항이 나온다. ‘저마다 그의 이웃 앞에서 인간적인 이유 없이 벌거벗고 걸은 자는 육 개월 벌받는다. … 자기 옷 밑으로 손을 꺼내며 몸을 드러내 보이면 삼십 일 벌받는다’(단합체의 규례 8,13-14).
처음에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벗고 있었어도 서로 창피하지 않았다(창세2,25)고 하였으나 지식을 얻은 후에는 그것이 창피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교훈적인 이야기이다. 하느님의 지식의 나무에서 사람은 규범을 배운다는 예증을 알려주는 것이다.
뱀신
여자와 지식의 나무와 뱀이 등장하는 것은 고대 바빌로니아 문화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몇몇 원통형 인장에 그려진 그림에서 이러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세계에 ‘좋은 나무의 주(主)’ 라는 수호신이 있다. 닌기쉬지다라고 불리는 이 신은 뿔 달린 두 뱀을 상징으로 하며 개인이나 가문의 수호신으로 저승선 신이다.
수메르 신화 ‘거룩한 도시 딜문’에서 닌기쉬지다는 ‘팔을 치켜드는 새싹여신’을 그의 아내로 취한다. 또 다른 신화 ‘인안나의 저승 여행’에 의하면 닌기쉬지다는 포도주 여신이 저승에 내려가 6개월 있는 동안 배우자로 선택된다. 뱀을 표상 하는 닌기쉬지다는 치유의 신으로 억울하게 죽어 저승에 내려온 죽은 자들의 혼을 달래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서로 꼬고 있는 두 뱀이 치유의 신으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 전해졌으며, 로마의 황제 트라야누스(서기 98-117년)의 동전 이면에도 나타난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병원이나 약국의 마크로 두 뱀의 모양이 사용된다.
아담과 그의 아내와 열매 이야기에 뱀이 등장하는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한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바꾸어 다시 쓴 내용이다. 즉, 에덴동산의 뱀은 수메르 신화의 닌기쉬지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에덴동산 이야기에 그 잔여를 보여주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야붸 하느님이 뱀에게 벌을 주며 말하는 대목에서 보인다. “너는 배로 기어다닐 것이다”(창세 3,14). 다시 말하면 그 전까지는 발로 걸어다녔다는 것을 암시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아내에게 “정말로 하느님께서 말했느냐?”라고 교묘하게 질문했던 뱀은 치유의 신인 뱀 신인 것이다.
교묘하다
창세기의 해석 책 창세기 미드라쉬 3,1에 ‘뱀이 교묘하다’ 라는 문장의 해석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뱀이 교묘했다.” “지혜가 많으면 분노도 많아진다. 지식이 많아지면 고통도 더해진다”(전도 1,18). 사람이 그의 지혜가 많아지면 그는 자신에게 분노를 더하게 되고 그의 지식이 많아지면 그의 고통도 더해진다.
“뱀이 교묘했다”는 문구를 설명하는 구절로 전도서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즉,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뱀이 지혜의 근거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여자가 생각할 수 있게 알려주어 그녀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뱀이 지혜롭다는 특정한 경우(모든 뱀이 지혜롭다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의 내용이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나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을 늑대들 사이에 양을 보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뱀처럼 지혜로우며 비둘기처럼 온전하여라”(마태 10,16). 온전한 비둘기를 제물로 바치기 때문에 비둘기를 들어 말씀을 하신 것이며, 초기 유대교 문헌의 맥락에서 비교하여 이해하면 지혜로운 뱀은 바로 에덴동산의 뱀을 가리킨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다
열매를 먹은 여자와 그의 남편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나무 뒤로 숨었다. 왜 숨었느냐고 묻자 “내가 벌거벗었기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라고 아담은 대답한다. “두렵다”는 것은 당연히 하느님이 두렵다는 말이다. 벌거벗었기에 두려운 이유는 벌거벗은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사실 아담을 만들고 그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냈을 때 그들은 창피하지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벌거벗은 것은 창피하다는 지식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인용구로 그 첫 ‘증언’인 셈이다. “하느님의 두려움은 지혜의 시작이다”(잠언 1,7). 잠언의 이 문구처럼 사람이 지식의 열매를 먹고(즉, 지식을 얻고)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경우가 에덴동산에 처음 나오는 것이다. 지식의 나무를 알고 수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계명의 근본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지혜를 얻게 되는 첫 시작이라는 점이다.
선악을 아는 신들처럼 된다.
그런데 지혜를 터득하는 능력을 여자가 스스로 알아차린 것일까 아니면 뱀신이 여자를 유혹하여 알려 준 것일까? 처음에 하느님은 아담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고, 만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말을 여자가 뱀에게 전하자 뱀은 여자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뱀이 여자에게 한 말에는 거짓이 없다.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아신다. 만일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 너희 눈이 떠지고 너희는 선과 악을 아는 신들처럼 된다는 것을”(창세 3,4-5).
뱀이 한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야붸 하느님이 아담과 하바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적에 하시는 말씀에서 판단할 수 있다. “자, 아담이 선과 악을 아는 우리들 중에 하나처럼 되었다. 지금 그가 그의 손을 뻗쳐서 생명의 나무에서도 또한 가져다가 먹고 영원히 살면 안되겠다”(창세 3,22).
뱀이 여자에게 전한 내용은 야붸 하느님이 하시는 말을 뒤바꾸어 약간 삭제하고 반복한 것이다. 아담과 하바가 죽어야 하는 운명은 하느님께서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셨기 때문이다. 사실 에덴동산에 영원히 살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영원히 살수 있는 존재들에게만 있다.
논리적으로 여자와 뱀의 대화에서 뱀이 속인 것은 없다. 오히려 더 자세히 알려주었다. 즉, 생길 일을 미리 알려준 선생 노릇을 한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지혜를 얻도록 길을 살펴준 착한 뱀신이다. 이래서 초기 유대교 문헌에 에덴동산의 뱀이 선생으로 혹은 지혜로운 자로 비유된다.
앞에서 읽은 창세기 미드라쉬의 ‘임금과 그의 아들’의 비유처럼 에덴동산의 뱀이 임금의 아들을 ‘악한 성향(심보)’이 되게 잘못 가르친 선생으로 나오지만, 아들의 나쁜 성향은 운명적이다. 홍수를 일으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후에 야붸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시는 사람 때문에 흙을 더 저주하지 않겠다. 사람마음의 성향은 어렸을 적부터 악하기 때문이다”(창세 8,21).
치유의 신 뱀이 여자에게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선과 악을 아는 신처럼 될 것이라는 ‘유혹’에 대해, 그녀는 ‘먹기에 좋고 보기에 예쁘고 지식을 얻기에 탐스럽다’라고 그녀의 마음을 서술한다. 뱀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녀는 ‘지식을 얻기에 탐스럽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우리는 눈으로 성서를 읽기에 책 안에 등장하는 하자의 억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뱀이 여자에게 대답하는 상황에서 그는 아마도 ‘안다’는 단어에 강세를 주어 말했을 것 같다. 직역하면 이러하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아실 것이다. 참으로 너희가 먹은 날에 … 너희는 선과 악을 아는 신들처럼 될 것이라고”(창세 3,5).
‘안다’는 2개의 동사구가 4문장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원래 하느님은 아담에게 열매를 먹지 말라고만 말했다. 뱀이 여자에게 가르쳐준 것은 열매를 먹으면 ‘선과 악을 아는 신들처럼 된다’. 즉 눈이 떠지는 지식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먹은 이유는 “눈이 떠지고 싶다”는 것이며 그 동기를 유발시킨 자는 뱀신이다. 에덴동산의 뱀은 선생이며 지혜를 터득하게 만든 착한 뱀이다(예수님의 말씀처럼).
뱀과 여자와 아담의 죄와 벌
그러나 뱀과 여자와 아담은 모두 넘어서면 안 되는 경계선을 지나갔으며 그에 해당되는 벌을 각각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여자와 아담의 경우는 분명하다. 여자는 금지된 물품을 탐내어 취하였고, 아담은 탐내어 취한 물건을 공유하였으니 공범죄에 해당된다. 뱀의 경우는 과연 무슨 죄에 해당될까? 뱀은 비밀을 누설한 죄이다. 열매를 먹으면 신처럼 사는 특권을 누린다는 사실을 여자에게 누설한 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화 가운데 ‘홍수 이야기’에 이러한 비밀 누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하도 불평불만이 많고 떠들어대기에 큰 신들은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없애려고 대홍수를 일으키자는 결의를 했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던 지혜의 신은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임금에게 이 비밀을 누설하는데, 본인에게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갈대로 엮은 담에 대고 말한다. 이 덕분에 인간은 홍수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의 비밀을 파악한 임금은 신처럼 영원히 사는 생명을 큰 신들에게서 선물로 받고, 인간의 종자를 보호하기 위해 산 넘어 바다 건너 저 먼 곳에 가서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에덴동산의 경우 신들의 비밀을 폭로한 뱀신은 이제 더 이상 서서 다니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기어다녀야 했고, 흙먼지가 그의 양식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뱀에게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너의 자손과 그녀의 자손 사이에 반목을 심어주겠다. 그가 네 머리를 짓밟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다”(창세 3,15)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네 임신의 고통을 늘려주겠고”(3,16), 아담에게는, “너는 고통스럽게 (일하여) 먹을 것이다”(3,17)라는 판결문을 낭독하신다.
창세기 미드라쉬 3,1에서 ‘뱀이 교묘했다’에 대한 설명문으로 전도 1,18의 구정을 입증하는 인용구로 사용하고 ‘사람이 그의 지혜가 많아지면 그는 자신에게 분노를 더하게 된다’ 라고 설명하는 랍비들의 해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담과 그의 아내가 지식을 습득하자 분노는 심해지고 고통이 더해진 것이다.
초기 유대교 관습에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족을 구성하는 나이를 지식을 얻는 나이라고 말한다. 초기 유대교 성문서인 미쉬나의 ‘선조들의 어록’에 의하면 나이 13세에는 미쉬나, 15세에는 탈무드를 배우고, 18세에는 결혼을 하고, 20세에는 직업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식이 충분히 생기는 나이를 결혼할 나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때부터 여자는 임신하는 고통이 많아지고 남자는 가족을 부양하는 노동의 고통이 늘어난다.
사해문헌의 한 단락에서도 볼 수 있다. ‘나이에 따라 계약의 법칙을 배우게 한다. 그들의 법령에 따라 자신에 교훈을 가지며 어릴 때 이렇게 십 년을 지낸다. 이십 세에 감찰을 받고 그의 가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참석하며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가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이십 세가 충분히 되지 않았으면 잠자리를 하여 알려고 여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는 토라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되며 재판의 청문회에 참여한다’(‘마지막 날의 규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나이는 단순히 결혼할 나이를 가리키는 것뿐 아니라, 적어도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거짓과 진실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이를 말한다.
에덴동산은 어디에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던 특권을 자발적으로 버린 아담은 그의 아내를 ‘살아있다’는 뜻인 ‘하바’라고 부르고 ‘모든 삶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벌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성문 입구에 활활 타는 불기둥과 문지기 수호천사를 세워두고 동산을 지키게 하였다.(뱀은 어디로 갔을까?)
(에덴동산은 사방이 담으로 둘러쳐진 막힌 공간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으며 거기에 문지기를 세워놓았을 것이다. 또한 그곳은 높다. 높은 산언덕 같다. 그러기에 그곳에서 네 강줄기가 흘러 내려온다고 말한다. ‘에덴에서 강이 나오 거기에서 갈라져서 네 줄기가 되었다.’ 초기 유대교 묵시문학 가운데 에덴동산으로 여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덴동산으로 가기 위해 마차를 타고 불기둥이 수없이 있는 많은 다리를 지나간다. 동산에 가까이 갈수록 눈에 쌓이게 된다. 즉,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광경이다.)
아담과 하바를 거룩한 동산 밖으로 내보낼 때 동쪽으로 쫓아낸다. 왜 동쪽일까? 당연하다. 에덴동산의 출입구가 동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지기를 세운 입구는 동쪽인 것이다. 거룩한 공간의 구조로 동쪽에 입구가 있는 곳을 찾으면 알 수 있다. 에덴동산과 가장 비슷한 환경의 공간 구조는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높은 산 위에 위치하며, 네 물줄기는 키드론 계곡으로 흐르는 수로를 가리키는 것이고, 동쪽 입구는 성전 입구가 실제로 동쪽이었다.
또한 서기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로마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함락하여 성전에서 약탈해간 물품들을 부조한 그림에 메노라(일곱 등잔의 등잔대)를 군인들이 들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유대인에게 메노라는 생명의 나무 혹은 지식의 나무로 비유되어 알려진 등잔대이며, 금으로 만든 메노라를 성전에 놓았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생명의 나무가 있는 것이다.
안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아담과 하바의 첫 이야기는 아담이 하바를 알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창세 4,1). 이 구절은 ‘안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이다. 마치 용례사전의 인용문과도 같다.
히브리어의 ‘안다’는 동사를 남․여 사이에 안다라고 사용될 경유에는 남녀가 잠자리를 해서 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단순한 성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로 ‘안다’를 사용하는 거이 아니라, 남녀가 잠자리를 하여 알고 임신하며 자식을 낳은 의무를 모두 포함하여 ‘남자가 여자를 안다’는 뜻이다(적어도 성서 히브리어와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그렇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이사야서를 그 경우로 들 수 있다.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하는 말이다. “보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의 지식으로 악을 물리치고 선을 택할 때 그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며 그 청소년이 악을 물리치고 선을 택하는 것을 알기 전에 네가 혐오하는 저 두 왕의 땅은 버림받을 것이다”(이사 7,14-16).
여기에서 임마누엘은 앞으로 태어날 히즈키야를 가리키며 히즈키야가 선과 악을 선별할 나이가 되기 전에 두 임금이 모두 사라진다는 말이다. 두 임금은 아하즈의 아버지 요탐과 그의 할아버지를 가리킨다. 요탐은 히즈키야가 9살 때 죽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히즈키야가 19세 때 죽는다(“성서와함께‘ 98년 6월호 참조). 이처럼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적어도 결혼할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바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의 나이는 이제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야붸에게서 사내를 얻다
아담이 하바를 알고 임신하여 카인을 낳았다. 그러나 “나는 야붸에게서 사내를 얻었다”(4,1)라고 하바는 말한다(우리말로는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옳은 것 같다). 하바가 아담에게서 아들을 낳고 하느님에게서 사내를 소유하였다 라고 말하는 뜻은 무엇일까? 물론 ‘카인’이라는 이름 풀이를 하기 위해 ‘사다, 얻다, 소유하다’ 는 동사(카나)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왜 ‘야붸 하느님’에게서 일까?
고대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고대 근동의 법에 일반적으로 첫 번째 소출은 주인에게 속한다(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느님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맏배를 신전에 바치는 관습이다. 첫 번째 자식은 하느님/주인께 속하는 것이다. 남종의 아들이 주인의 소유가 되어 상속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경우를 아브람과 다메섹의 엘리에제르 이야기에서 읽어본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에게 방패이며 네 보상은 매우 많다.”아브람은 대답한다. “야붸여, 당신은 무엇을 저에게 주십니까? 저는 무자식 팔자로 가며 제 집안 상속자 자식은 다메섹 엘리에제르입니다”(창세 15,1-3). 엘리에제르는 아브람의 남종의 아들이며 그에게 아브람의 법적 상속권이 있음을 알려준다. 만일 주인에게 상속자가 없을 경우 남종의 아들이 법적으로 상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바는 남종이 시민(자유인)의 딸과 결혼하는 경우이다. 그녀의 첫 번째 아들은 남종의 주인에게 속한다. 이것을 하바의 상황에 비유하면, 야붸 하느님은 주인이고 아담은 남종이며 하바는 시민의 딸로 남종과 결혼하는 경우이다.
그러니 그들의 첫째 아들은 당연히 야붸의 소유가 되며 주인집에 머물러 있어야하는 상황이고 부부가 쫓겨난(해방된) 신분에서도 그 아들의 소유권은 여전히 주인에게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나는 사내(아이)를 야붸에게서 샀다/얻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여 말하면 하바는 시민의 딸이며 아담은 종이다(그러나 아담은 하느님의 종이다).
하바가 야붸에게서 사내를 샀다면 무엇을 주고 샀겠느냐?(공짜는 아니겠다.) 여자가 비록 자기의 아들이라도 일단 하느님에게서 속한 아들을 다시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필요할까? 아마도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네가 네 남편을 원하지만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창세 3,16)라는 문장이다.
“네가 네 남편을 원하지만”의 문장에서 ‘원하다’의 보어가 빠져있다. 적합한 목적어구를 삽입하여 다시 적으면, 여자가 그녀의 남편을 ‘남편의 상대로 도움이 되기를’(창세 2,20) 원하겠지만 실상 남자는 그녀를 다스린다. 남자는 그녀의 주인이 되기 바란다.
이 구절에 대한 창세기 미드라쉬를 보자. ‘고관 집의 어떤 딸이 미천한 거지와 혼인하였다. 그는 (축복을 받기 위해) 현자에게 와서 점토 받침대에 서있는 금 촛대를 선물로 주며 이 구절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그 해석은 비록 여자보다 훨씬 못한 신분이지만 거지는 귀족 출신의 여자를 다스리는 권한을 가졌다는 거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가 가장(家長)이라는 뜻이다.
사실 유대교 전통에서 자식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지 못하고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 남종과 시민의 딸이라는 비유로 다시 살펴보면, 비록 어머니가 시민의 딸이라도 종인 아버지의 이름이 그들의 자식들의 성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상대로 도움을 찾아 하바를 만들어내셨지만, 지식을 얻고 나니까 남편과 아내 사이는 상대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로 전락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식이 많아지면 자기에게 분노도 많아진다는 말이 맞다.
또한 미천한 거지와 고관 집 딸의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거지는 아담으로 그 딸은 하바로 비유한 것이며, 아담은 점토로 만들어졌기에 흙으로 돌아가는 신세에 불과하지만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어져 그 값어치는 훨씬 높다는 말이다(고대 이스라엘 지역에서도 뼈를 이용하여 단추나 장식품 또는 놀이용품 등을 만들었다. 사람 뼈로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초기 유대교 랍비들의 우스개 소리로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어졌기에 ‘소리’가 많이 난다는 말이 있다. 뼈를 단지 속에 넣고 흔들어 보면 얼마나 시끄러운 소리가 나느냐, 그러나 흙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우스꽝스러운 야담이다.
탐스러운 도구
하바는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운 열매를 먹고 지식인이 되었으며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아담과 잠자리를 하고 카인과 헤벨(아벨)을 얻은 것이다. 그 아들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탐내지 말라는 것을 먹고 탐내면 안된다는 계명을 배운 것인데, 하바는 그 아들들에게 과연 그 율법을 가르쳤겠는가?
두 형제가 하느님께 드린 제물 가운데 헤벨의 제물만 들여다보신 하느님에게 카인은 몹시 분통이 터졌으며 자기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자기 동생을 밀쳐 죽게 하였다. 헤벨은 침묵을 지켜 하느님을 옹호하였으나 카인은 남의 것에 탐을 내어 결국 살인의 죄를 짓게 되었다는 말이다(“성서와 함께”98년10월호 참조).
유대교에서는 토라를 ‘탐스러운 도구’라고 부른다(신약성서에 ‘율법’이라고 번역하는 단어가 바로 ‘토라’이다. 토라는 좁은 의미로 율법이지만 하느님의 말씀/가르침 등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단어도 토라 이다). 서기 135년에 순교한 랍비 아키바는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어졌기에 사랑 받는다’고 하며, ‘탐스러운 도구가 사람들에게 주어졌기에 이스라엘은 사랑 받는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잠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탐스러운 도구는 하느님의 가르침(토라)이라고 부연한다(“선조들의 어록”, 3,14).
하바가 탐스러운 도구를 획득하여 그녀의 자식들을 과연 잘 가르쳤느냐는 질문이다(십계명 5조항이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식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중하여야 된다’는 율법이다. 즉, 자식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을 중히 여기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배워야 한다는 계명이다). 둘 중에 하나는 잘 배웠고 다른 하나는 지혜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카인은 그의 아들을 잘 가르쳤기에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배워 훗날 지식의 징표로 선택되었다. “하노크(에녹)는 하느님과 함께 온전했으며 대대로 지식의 징표로 선택되었다”(집회 44,16).
아담과 하바가 먹은 열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따서 먹은 열매는 무화과라고 유대교 전승에 말한다. 서양 그림에 사과로 나오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라틴어에서 유래한 발상이다. 라틴어로 malum(사과)은 ‘악하다’는 뜻도 있기에 일종의 중의법(double entendre)으로 그림에 표현된 것이다.
복음서에 전하는 일화 가운데 무화과나무 열매 이야기가 나온다(마태 21,18-21). 허기지신 예수님은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가서 열매가 아직 열리지 않는 것을 보시고 이 나무에 다시는 열매가 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하신다. 자기가 배고프다고 열매가 아직 달리지 않은 나무에 저주를 하는 것은 자기의 분노를 참지 못한 행위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운 무화과 열매를 먹고 지혜가 쓸데없이 많아져 근심만 늘어난 바리사이들을 두고 하신 비유이다.
허기가 나서(즉, 지식을 얻기 위해)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즉, 이른 아침부터 길가에 서서 토론하는 바리사이에게) 가까이 갔는데 그 나무에는 열매(지식)는 없고 어설픈 잎사귀만이 있다(즉, 그들의 가르침은 열매를 맺기에는 퍽 미흡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믿음을 갖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 무화과나무에서 일어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라는 가르침은, 제자들이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예수처럼 바리사이와 논쟁하여 예수가 메시아임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탐스러운 도구(토라)를 탐내어 얻은 지식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이다.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2)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처음’과 토라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이것은 요한 1,1의 인용구이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한 설명은 랍비들의 성서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랍비들의 성서해석은 다양하지만, 항상 성서 안에서 그 결론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느 한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성서구절을 인용하고 그 인용한 구절을 보충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구절을 인용하는, 마치 상자 속에 또 상자가 있고 그 속에 또 상자가 있는 상자 같다. 이 모든 상자들이 때로는 각기 모양도 다르며 색깔도 다르지만, 때로는 서로 엇비슷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랍비들이 선택한 인용구에서 멋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세기 미드라쉬 1,1을 읽어본다.
토라는 말한다 : ‘나는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의 일하는 도구이다.’ 사람들이(토라를)실용하는 것을(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임금이 왕궁을 지을 때 그는 그 자신의 기술로 짓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의 기술로 짓는다. 더군다나 건축가는 자기 자신의 머리로 짓는 것이 아니라, 방들과 문들을 어떻게 배정하는지를 알기 위해 계획서와 도면을 사용한다.
이처럼 하느님은 토라를 참고로 하여 세상을 만들어내셨다. 토라는 말한다 :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내셨다”(창세 1,1). “처음”은 토라를 가리킨다 : “주(主)는 그분의 길 처음에 나(지혜)를 소유하셨다”(잠언 8,22).
위의 설명은 처음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어떻게 창조하셨느냐에 대한 해석이다. 전지전능하신 주께서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설명하면 그만이겠지만, 랍비들은 질문을 했던 것이다. 비록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도 세상을 어떻게 만드셨을까?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그들의 질문이다. 그 설명을 돕기 위해 비유가 등장한다. 비유는 누구에게나 가장 평범하게 이해될 수 있는 방법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던 것을 어느 건축가가 집을 짓는 과정으로 쉽게 설명한다. 건축가의 눈에 비추어진 청사진이 바로 토라이며, 이 토라를 참조하여 세상을 만들고 질서를 이루게 하였다는 설명이다. 하느님께서 토라를 보고 토라의 의견을 참작하여 세상의 정의와 공의를 세운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토라가 존재했음을 시사하며, 그 토라는 하느님께서 만드셨다고 설명한다. 이를 입증하는 문구는 잠언에서 찾아진다. “야붸는 그분의 길 처음에 나를 소유하셨다. 그분이 그 옛날 일하시기보다 더 옛날에”(잠언 8,22-23)처럼, 창세 1,1의 “처음”이라는 단어를 같은 맥락에서 적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이 사용된 단락을 요한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다 :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1,1). 요한 1,1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위에서 인용한 창세기 미드라쉬이다. 요한 복음서의 “말씀”은 랍비 문헌으로 생각하면 토라에 해당된다. 말씀/토라는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이론이며 이를 입증하는 문구가 바로 잠언 8,22이다.
참된 빛
요한 1,1에 이어 대두되는 논조는 빛과 어둠의 대조이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1,5). 창세기 미드라쉬도 또한 빛과 어둠의 대조를 창세 1,1의 해석에서 언급한다(실상 빛과 어둠의 대조는 창세 1,3의 해석에 나온다).
랍비 유다 벤 심온은 인용했다 : “그분은 깊은 것과 비밀을 드러내신다”(다니 2,22). “깊은 것”은 지옥이며, 이렇게 쓰여 있다. “그는 그림자가 거기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며, 저승 깊은 곳에 그녀의 손님이 있다는 것을”(잠언 9,18). “비밀”은 에덴동산을 가리킨다. 이렇게 쓰여 있다. “피신처와 그늘을 위해”(이사 4,6).
다른 해석 : “그분은 깊은 것을 드러내신다”는 사악한 자들의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쓰여 있다. “화를 입을지어다. 주(主)로부터 그들의 음모를 숨기기 위해 깊은 곳을 추구하는 자들이여”(이사 29,15). “그는 어둠에 무엇이 있는지를 안다”(다니 2,22). 이것도 역시 사악한 자들의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쓰여 있다. “그들의 일은 어둠에 있다”(이사29,15).
“빛은 그분과 함께 머문다”(다니 2,22)는 의로운 자들의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쓰여 있다. “빛은 의로운 자를 위해 비친다”(시편 97,11).
세루가야 출신의 랍비 아바는 말했다. “빛이 그분과 함께 머문다”는 왕가(王家)의 메시아를 가리킨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운 도구(토라)는 하느님께서 소유하고 계셨던 것이며(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그 토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참된 진리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복음이 요한 복음서의 서두이다.
랍비 유다 벤 심온은 말했다. 세상이 창조되는 시작부터 “그분은 깊은 것과 비밀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쓰여 있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내셨다.” 그러나 어떻게 하셨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설명하느냐? 다른 곳에 : “하늘을 휘장처럼 펼친다”(이사 40,22). “그리고 땅.” 이 또한 설명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설명하느냐? 다른 곳에 : “왜냐하면 그분은 눈(雪)에게 말했다 : 땅위에 내려라”(욥 37,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 빛이 있어라”(창세 1,3). 이것도 역시 같은 방식이다. 어디에서 설명하느냐? 다른 곳에 : “빛을 옷처럼 덮으신 분이시여”(시편 104,2).
위의 설명은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기에 어둠과 빛의 근원을 밝히신다는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천지의 창조주께서 악을 심판하며 악을 배척하고 빛과 함께 머문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지만 어떻게 만드셨는지에 대해서는 창세기에 전혀 설명되지 않았기에, 다른 성서구절을 그 보충 설명으로 인용한다.
실상 중요한 부분은 “빛이 그분과 함께 머문다”는 구절이다. 왕가의 메시아로 “빛이 그분과 함께 머문다”는 주제가 요한 복음서에서는 “사람들의 빛”이라는 문구로 도입된다(1,4). 그 빛인 메시아는 세상에 오신 나자렛의 예수로, 그가 바로 참된 진리의 빛(1,9)이라는 해석이다(왕가의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를 뜻한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참된 진리의 빛”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연유는 창세기 미드라쉬 1,1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 내셨다”는 구절의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위의 미드라쉬를 이어 계속되는 단원이 ‘진리’에 대한 설명이다.
랍비 이스학은 아래 구절로 (그의 강론을) 시작했다 : “당신 말씀의 처음은 진리입니다. 당신의 의로운 모든 공의는 영원합니다”(시편 119,160). 랍비 이스학은 말했다. 세상의 창조 바로 그 시작부터 “당신 말씀의 처음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내셨다.” 그런데 “주 하느님께서는 참된 진리의 하느님이시다”(예례 10,10).
그러므로 “당신의 의로운 모든 공의는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위해 공표 하시는 단 한 가지 결정이라도, 그들은 당신 판단의 의로움을 확인하며 믿음을 받아들인다.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며, 두 권한이 토라를 주었거나 두 권한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고 신(神)들이 말씀하였다”라고 쓰여 있지 않고 “처음에 하느님이 만들어냈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서 두 권한은 선(善)한 권한과 악한 권한을 뜻한다. 랍비 이스학의 논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진리였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성서구절로 시편 119, 160을 인용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하느님은 참된 진리의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도 말씀이 빛이 되신 분은 처음부터 참된 진리의 빛이라고 규정한다. 랍비 이스학은 하느님이 참된 진리의 하느님임을 논증하기 위하여 간단한 문법적인 요소를 활용한다.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말씀하시는 단원의 첫 문장을 인용한다. “하느님이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즉, ‘말하다’는 동사가 단수 3인칭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또한 창세 1,1에서도 ”하느님이 만드셨다“는 문장에서도 동사가 단수 3인칭임을 확인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참된 빛’이 그들이 기다리던 왕가의 메시아라고 논증한다. 초기 유대교 문헌에 의하면 히브리 성서에서 메시아의 문구를 찾아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하여 해석하였다. 민수기의 한 구절이 메시아 문구로 자주 인용되었다(24,17). 별이 야곱에서 길을 내고 지팡이가 이스라엘에서 일어날 것이다.
히브리 성서의 맥락에서 읽으면, 별과 지팡이는 왕권이나 통치권을 상징한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은 것을 상징한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은 것을 지시하는 고유명사이다. 서기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독특한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았던 단합체가 남긴 사해문헌에 의하면, 별은 그들 공동체의 해석자이며 지팡이는 대표자라고 풀이된다. 그리고 그가 “다윗의 쓰러진 초막을 세울 것이다”(아모 9,11)라고 전제했다(‘새 계약의 규례’ 7,15-950).
새싹
한편 유대교 문헌에서 메시아 문구로 흔히 등장되는 단어는 ‘새싹’이다. ‘새싹’이 메시아의 이름이 된 것을 즈가 6,12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사람을 보아라. 그의 이름은 새싹이다. 그가 주(主)의 성전을 지을 것이다.” 다윗 가(家)의 새싹에 대한 예언은 예레미야서 에서도 나온다.
“보아라, 주의 말씀이시다. (앞으로) 올 날에 나는 다윗에게서 새싹을 세울 것이다”(23,5). “그날 그때에 나는 다윗에게서 정의의 새싹을 돋아나게 할 것이다. 그는 이 땅에 공의와 정의를 행할 것이다”(33,15). 이와 같이 ‘새싹’이 다윗 왕가의 메시아 이름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이사 11,1에 의거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어린 가지가 나오며 그 뿌리에서 싹이 나온다.
사해문헌의 이사야서 해석에 의하면 “그 해석 : 마지막 날에 일어날 다윗의 새싹에 대한 것이다”라고 천명한다. 이처럼 다윗 왕가의 줄기, 새싹 등은 서기 1세기에 유행했던 메시아 문구이다.
복음서에는 메시아에 대한 히브리 성서의 인용구가 여러 번 나오지만, 새싹이나 어린 가지와 같은 상징어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이러한 상징어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요한 묵시록의 한 구절이다(22,14․16). 그러나 성서 번역을 달리하기에,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고 성문을 통해서 성세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빠는 자는 행복하다 …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이것들을 교회 앞에서 증언하게 하였다. ‘내가 바로 다윗의 뿌리이며 그의 줄기이고 빛나는 새벽 별이다.’
한글 번역 성서에는 ‘그의 줄기’라고 하지 않고 ‘그의 자손’이라고 번역되었다. ‘줄기’를 뜻하는 단어는 물론 ‘자손, 혈통’의 뜻도 포함된다. 그러나 메시아 문구를 염두에 두면 ‘자손’보다는 ‘줄기’가 그 맥락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요한 묵시록의 이 부분을 히브리어로 옮기면 이사 11,1의 단어들이라는 점이다. 즉 이사 11,1의 인용구라고 말할 수 있다. 이사 11,1이 이새의 ‘줄기’ 와 그 ‘뿌리’를 가리킨다.
한편 위의 요한 묵시록의 인용문에서 ‘생명 나무’는 에덴동산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서기 1세기에 유행했던 유대교 묵시문학 작품 가운데 ‘숨겨진 지식의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권리를 추구하는 주제가 많았다. 서기 132-135년에 일어난 유대인들의 제2차 독립항쟁운동의 선두자였던 바르 코시바를 그들의 메시아로 인정하고, 민수기의 메시아 문구에서 별(코가브)을 인용하여 그를 바르 코크바라고 불렀던 랍비 아키바도 ‘숨겨진 지식의 에덴동산’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전한다. 랍비 아키바의 토라 지식은 방대하고 자세하여 서기 220년에 완성된 유대교의 경전인 미쉬나의 근간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랍비 아키바 같은 사람은 토라의 지식을 바른 도구로 사용하여 세상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는 모범이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운 도구(토라)는 하느님께서 소유하고 계셨던 것이며(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그 토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참된 진리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복음이 요한 복음서의 서두이다.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3)
아담의 성전과 다윗이 새싹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 심부름꾼(천사)을 너보다 먼저 보내니 그는 네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라”고 기록된 대로, 요한 세례자가 광야에 나타나 죄 사함을 위한 회개와 세례를 선포했다(마르 1,1-4).
위 본문은 구약성서의 인용문과 그에 대한 해석이다. 구약성서의 인용문은 출애 23,20 ; 말라 3,1 ; 이사 40,3(70인역)을 엮은 것이다. 인용문에서 ‘심부름꾼’(즉, 천사)은 ‘요한 세례자’를 가리킨다고 복음서 필자는 해석한다. 마태오복음서에는 보다 더 분명히 설명한다. “그 무렵에 요한 세례자가 나타나--- 이 사람을 두고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3,1-3). 따라서 요한 세례자가 광야에 나타나 죄사함을 위한 회개와 세례를 선포한다는 성서적 근거를 “주님의 길을 닦고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한다”는 문구에서 찾는 것이다.
즉, 구약성서의 내용을 현 상황에 도입하여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성서해석 방법은 신약성서의 형성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 사해문헌에서 쉽게 읽을 수 있다. 아래에 번역한 ‘마지막날의 성서해석(미드라쉬)’을 읽어본다.
“(내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자리를 정하여 그들을 심어 그 아래에 정착하여) 적이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 있었던 것처럼 죄의 자식이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판관들을 세워 준 때부터 그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2사무 7,10,-11).
이것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이 지으실 집이다. (모세의) 책에 이렇게 쓰여 있다. “주여, 당신의 손으로 세우신 성전에서 야붸는 영원히 지배하실 것입니다”(출애 15,17-18).
이것은 집(성전)이며 거기에 (부정하거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거나) 암몬인들이나 모압인들이나 사생아나 외국인의 자식이나 이방인이 영원히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그분의 거룩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광이) 영원히 있으며 그 위에 항상 드러난다. (이스라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성전을 이전에 허물어뜨린 것처럼 낯선 자들이 더 이상 그것을 허물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아담(사람)의 성전을 지을 것을 말한다.
사무엘서 하권에서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지을 하느님 ‘야붸의 집’을 이야기하지만 그 구절에 대한 엣세네파의 해석은 마지막 날에 세워질 하느님의 집을 가리킨다. 출애굽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그 확실성을 입증하고 있다. 하느님의 집(성전)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열거하며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이유도 설명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집은 마지막 날에 세워질 성전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엣세파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들은 초기 유대교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부정(不淨)한 사람(예를 들어, 불구자나 월경 중에 있는 여자 등)이나 사생아 또는 이방인의 출입을 금했다. 이러한 규례에 대한 엣세네파의 설명에 의하면 성전 안에는 거룩한 자들, 즉 천사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엣세네파들이 주장하는 성전은 그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사람의 온갖 부정 중에 하나라도 오염된 사람은 이 회 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아래와 같은 것에 오염된 사람은 공동체 중에 그의 지위를 절대로 유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살(肉)이 오염됐거나 팔 다리가 불수인 사람, 절름발이, 혹은 장님이나 귀머거리, 얼간이, 눈에 보이게 그의 살에 결점이 있는 자, 비틀거리는 노인도 공동체 중에 지위를 유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이름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중에 참여하러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이 그들의 공동체에 있기 때문이다(마지막 날의 규례 2,4-9).
초대교회 당시 예배 모임에 여자가 머리에 베일을 써야하는 이유는 천사들 때문이라고 말하는(1고린 11,10) 상황을 위의 규례에서 짐작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을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복음서에 전해진 많은 이야기에 예수께서 수많은 불구자나 환자들을 치유하여 초대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였다는 점이다. 엣세네파 공동체나 초대교회는 그들의 공동체를 예루살렘 성전처럼 모두 거룩한 모임의 장소로 구분했다.
유대교 전통에 유대인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속죄 일에 반드시 성전에 가서 속죄 의식을 행하고 사제의 축복을 받아야 하느님의 명부에 기록될 수 있다고 하였다. 누구든지 본인의 전말서(顚末書)를 하느님 앞에 내야 했다. 전말서는 마지막날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기 위해 본인의 선악을 보고하는 결산서이다.
아가비야 벤 마하랄렐은 말한다. 세 가지 것들을 쳐다보아라. 그러면 죄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훗날 누구 앞에 전말서를 내는지 알라. 네가 어디에서 왔느냐? 악취 나는 몇 방울에서. 네가 어디로 가느냐? 흙과 구더기와 벌레가 있는 곳으로. 훗날 누구 앞에 전말서를 내느냐? 왕들 중의 왕,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시니 분 앞에(선조들의 어록 3,1).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적어도 속죄 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전말서를 내고(즉 회개하고) 사제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명부에 기록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만일 본인이 직접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이면 그 해에 전말서를 낼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성전에 들어가서 내면 그전 해의 빚은 삭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평생 성전에 들어 갈 수 없는 불구자라면 그는 영원히 하느님 명부에 기록될 수 없으며 마지막 날의 심판에 그의 이름은 불리워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운명이다.
예수께서 불구자나 병자들을 치유하신 의도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진다. 초대교회의 거룩한 공동체에서는 절름발이, 장님, 귀신들린 병자, 중풍환자 등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도 하느님에게 전말서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배려한 것이다. 이처럼 전혀 다른 예수의 활동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에 격심한 논쟁을 일으키게 했다. 바리사이파 중심의 초기 유대교에서는 많은 랍비들의 논박 끝에 회당의 문이 불구자들에게도 열리게 되었다.
엣세네파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혀진 성전으로 여기고 그들 공동체가 성전이라고 가르쳤다. 이를 ‘아담의 성전’이라고 불렀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담(사람)의 성전’은 사람이 지은 건물로서의 성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아담)이 일원인 공동체의 거룩한 모임을 말한다. 바울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성전도 이러한 교인들의 모임 공동체를 가리킨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고린 3,16). “여러분들이 건물이라면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입니다”(에페 2,20).
또한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고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사람(아담)의 손으로 만든 이 성전을 허물고 사람(아담)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겠다”(마태 26,11). 흔히 예수의 이 말씀은 서기 30/33년경에 예수께서 서기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측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아담)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바로 아담의 성전을 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혹은 모르는 척한) 바리사이파들은 아담(사람)의 성전이 사람들이 모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고 대사제에게 고발했던 것이다.
바리사이와 사제들이 유대인의 의회에 예수를 고발했던 고소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전을 허문다고 발설했다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하느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세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마태 26,61). 예수께서는 답변(설명)을 하지 않았다. 대사제는 예수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까?” 예수께서 답변하였다. “내가 그입니다 ---”(마르 14,62 다른 복음서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다).
앞에서 인용한 ‘마지막 날의 성서해석’은 2사무 7,10-14의 해석이다. 첫 부분은 ‘아담의 성전’에 대한 내용이며 두 번째 부분은 메시아에 관한 성서해석이다.
“야붸께서 너에게 이야기하셨다. 그분이 너를 위해 집(안)을 세우시겠다고. 나는 네 다음의 자손을 세우겠다. (영원할 때까지) 그의 왕국의 왕좌를 확립하겠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며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될 것이다”(2사무7,11-14).
그는 다윗의 새싹이며 그는 토라 해석 자와 함께 서 있을 것이고 마지막 날에 시온에서 (다스릴 것이다.) 이렇게 쓰여있다. “내가 다윗의 쓰러지는 초막을 일으켜 세우겠다”(아모 9,11). 그것은 다윗의 쓰러지는 초막이며 그는 일어선 (즉 부활한) 후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다.
사무엘서 하권에서 전하는 내용은 다윗이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의 집을 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느님은 다윗을 위해 그의 집 즉 집안(왕가)을 세워 줄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건물로서의 ‘집’이나 자손을 세울 ‘집안’은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인 ‘베이트’이다. ‘야붸의 집’과 ‘다윗의 집(안)’에 대한 계약인 것이다. 즉, 다윗의 자손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메시아 문구로 이해되는 부분이며 하느님과 다윗 왕과의 아들사이에 맺는 계약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문구가 시편 2,6-7의 구절이다.
“내가 내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 위에 세웠다 ---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이 문구는 초기 유대교 문헌에 메시아 문구로 항상 언급된다. 복음서에도 예수께서 요한 세례자에게서 세례를 받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마태 3,17 ; 마르 1,11 ; 루가 3,22). 이 아들이 바로 다윗의 ‘새싹’이다. 다윗의 새싹은 메시아를 뜻한다.
엣세네파에 의하면 다윗의 새싹이 토라 해석 자와 함께 마지막 날에 서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토라 해석자는 토라를 추구하고 해석하는 사제를 말한다. 엣세네파에 의하면 그들에게 도래하는 메시아는 둘이다. 하나는 다윗의 새싹인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 다른 하나는 토라의 해석자인 사제 메시아이다. 그를 아론의 메시아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왕으로서의 메시아이며 아론의 메시아는 대사제로서의 메시아를 뜻한다.
(단합체에 들어온 사람들은) 토라의 모든 조언에서 그들 마음이 강퍅한 대로 걸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예언자와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아들이 올 때까지 단합체 사람들이 배우기 시작했던 첫 번째 법령으로 심판 받을 것이다(단합체의 규례 9,9-10).
메시아가 올 때까지는 모세의 율법에 준한 심판을 받지만, 메시아가 온 후에는 다른 법령에 의하여 심판 받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복음서와 비교하면 메시아와 함께 오는 예언자는 요한 세례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요한의 말처럼 그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 뒤에 오시는 분(메시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내용은 ‘단합체의 규례’에서 전거하는 처음 법령과 다음에 올 법령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 날에 두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전승은 즈가리야서의 해석에 기인한다. “나 만군의 야붸는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이 새싹이며 그이 밑자리에서 새싹으로 자라나 야붸의 성전을 지을 것이다. 그는 위엄을 갖추고 왕좌에 앉아 다스릴 것이다. 그의 왕좌 옆에 한 사제가 있을 것이며 그들 둘 사이에 평화의 조언이 있을 것이다’”(즈가6,12-13).
신약성서에서도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유대인들의 왕’ 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대사제로서의 메시아 칭호도 받았다. “(대사제의) 영광스러운 자리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히브 5,5). 마지막 날에 메시아가 시온에서 다스릴 것이라는 묵시관이다. “내가 내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위에 세웠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시편 2,6-7)는 메시아 문구처럼 하느님의 아들은 시온 산과 관련되어 나온다.
‘다윗의 쓰러지는 초막’은 토라를 뜻한다. 초막은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막 생활을 하고 살았던 장막을 가리킨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석판을 장막에 간직하였기에 장막/초막은 토라를 상징하는 단어이다. 다윗의 새싹은 또한 토라 해석자처럼 토라를 일으켜 세우는 메시아라는 뜻이다. 토라를 일으켜 세우는 r가 일어선 후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다. 여기에서 ‘일어선다’는 그가 죽은 후에 다시 일어선다. 즉 부활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히브리어로 ‘일어서다’는 단어가 죽은 후에 일어서는 경우에 신약성서에서는 ‘부활하다’라고 흔히 번역한다. 엣세네파의 교리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메시아의 부활 후에 있다는 해석이다(엣세네파가 말하는 이스라엘은 그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과 비교하여도 그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주 예수께서(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하늘로 올라가시고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가서 사방에(복음을) 선포하였는데, 주께서 함께 일하시며 표징들을 따르게 하셔서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마르 16,19-20). ‘아담의 성전과 다윗의 새싹’ 이라는 내용을 해석한 ‘마지막 날의 성서해석’과 복음서에 전해진 예수의 심문 단락에서 ‘성전모독죄’와 ‘메시아의 시비’ 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엣세네파의 성서해석 방법과 복음서의 성서해석 방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4)
메시아의 이름과 다윗의 옥좌
아담과 하바의 이름
히브리 성서를 읽으면 인명이나 지명에 대한 설명이 자주 나온다 어떠한 맥락에서 이러한 이름이 생겼는지 혹은 어떠한 유래로 이러한 이름이 불리워졌는지에 대한 이름 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해석의 가장 초기단계는 이러한 이름 풀이에서 발견된다.
창조 이야기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고 하느님에게 벌을 받는 내용 가운데 아담이 받는 벌을 읽어본다.
“너는 흙(아다마)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콧등에서 흐르는 땀으로 빵을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창세 3,19). 그리고 부연하여 “너는 흙먼지이기 때문에 흙먼지로 돌아갈 것이다”(창세 3,19)라고 설명한다. 이 구절은 창조 이야기 앞부분에 나오는 아담을 만든 내용, 즉 ‘야붸 하느님께서 흙(아다마)에서 흙 부스러기로 아담을 만드셨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이다. ‘흙먼지’로 번역한 단어의 보다 사실적인 표현은 ‘거치른 흙먼지 같은 자잘한 흙 부스러기’이다.
이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담’은 ‘흙, 땅, 경작지’ 등을 뜻하는 단어 ‘아다마’와 비슷한 발음이며 그래서 흙이라는 소재가 사용되었고, 흙/땅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었다는 것보다는 흙/땅 표면에서 흙 부스러기를 모아 모습을 만들 수 있다는 구체성이 추가된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흙 부스러기가 된다는 객관적인 현상을 ‘아담’(사람)은 ‘아다마’(흙)로 돌아간다고 설명한 것이다. 인간 창조에 관한 많은 고대 신화 가운데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매우 사실적이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의 ‘아담’은 고대 바빌로니아 신화에 나오는 ‘아다파’라는 인물과 유사하며, 실상 아담 이야기는 흙/아다마와는 무관한 ‘아다파 신화’와 관련된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아다파/아답이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에는 아담이라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아담은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바라고 불렀다. 그녀는 모든 생명(하이)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창세 3,20). ‘하바’ 라는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에 대해 설명한 이 맥락을 창세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특정 이름을 정해주는 경우이다. ‘하바’는 ‘하야’(‘살다’)의 동명사형으로 ‘삶’ 이라는 뜻이다.
고대 근동 언어와 비교하면 하바는 아카드어의 ‘어머니’라는 뜻인 awa에서 파생된 고유명사라고 생각되며 야바/헤바트/하바는 히브리어 ‘하바’(삶)와 비슷한 발음이기에 ‘생명(하이)의 어머니’라고 이름 풀이를 한 것이다. 여신 ‘헤바트’는 아카드어 ‘아바’와 관련된 단어이다. 사실 창세기에서는 ‘삶과 생명의 어머니’라는 두 뜻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단얼ㄹ 찾아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름을 해석했던 고대 이스라엘의 선각자(先覺者)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초기 유대교 랍비들의 성서 해석에도 이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의 이름
서기전 3-1세기 팔레스티나에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도래가 큰 주제로 떠올랐다.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해 구원자인 메시아가 곧 올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전통적으로 알려진 다윗의 ‘새싹’이 과연 상징어냐 고유명사(쩨막흐 : 히브리어로 ‘새싹’이라는 뜻)냐, 혹은 다른 이름으로 알려주지/계시하지 않느냐? 등등.
그 한 예는 복음서의 기록에서도 읽을 수 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다가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안녕하세요(평화가 당신에게), 은총으로 가득한 이여, 우리의 주께서 당신과 함께”(루가 1,28). 마리아는 당황하며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일지 궁금해했다. 가브리엘은 다시 말한다. “참으로 보십시오. 당신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십시오”(1,31). ‘예수’는 히브리어로 ‘예슈아’이며, 이는 ‘구원, 구속’이라는 뜻이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처음에 말한 ‘우리의 주께서 당신과 함께’ 라는 뜻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녀가 알고 싶었다는 것은 마태오 복음에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이사야서의 인용문(7,14)이고 알려준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 해석은 ‘우리의 하느님은 그와 함께’라는 것이다”(마태 1,23). ‘우리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마태오)라고 이사야가 700년전에 예언했던 임마누엘은 바로 이 시대에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우리의 주께서 당신과 함께’(루가)라고 알려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당시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임마누엘)라는 이름을 가장 적합하게(즉 새롭게) 해석한 이름은 ‘구속하다. 구원하다’ 즉,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다’를 가리키는 ‘예슈아’라는 것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인 역사책에 기록된 서기전 3-1세기의 인물가운데예수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대사제권을 빼앗긴 오니아스의 형제 예수, 대사제과 된 가므리엘의 아들 예수, 대사제가 된 암메우스의 아들 예수, 대사제권을 빼앗긴 파베트의 아들 예수, 소동을 일으켜 처형당한 아나누스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의 집정관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도적단의 두목 사파트의 아들 예수 등등.
물론 예수 그리스도도 포함된다. 한편 초기 유대교 문헌인 탈무드에도 예슈아(혹은 줄여서 예슈)라는 이름과 관련된 문구를 찾을 수 있다: ‘예슈의 제자인 야콥이 와서 판테라의 아들 예슈의 이름으로 그를 치유한다고 말했다’: ‘판테라의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주문을 건다’ 등.
메시아의 이름
그러나 구원자로서의 예슈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아)로서의 예슈아는 다윗의 새싹, 즉 다윗 가문의 아들이어야 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그녀가 임마누엘을 잉태할 것이라는 계시를 전해 주고 그의 이름이 예슈아임을 정해준 다음에 나오는 문구에서 이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즉, 다윗의 가문에서 나온 아들이어야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천사는 천명한다. “그는 크게 되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주(야붸) 하느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아버지) 다윗의 옥좌를 주실 것이며 그는 아콥의 가문 위에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루가 1,32-33). ‘높으신 분’(엘리욘)은 ‘하느님’을, ‘야콥의 가문’은 ‘이스라엘’을 지칭한다. 엘리욘은 엘 엘리욘의 축약이며, 창세 14,18-20에서 아브람이 살렘의 왕이며 대사제인 멜키세덱에게서 축복을 받는 맥락에 의거한다: ‘하늘과 땅의 소유자 지고의 엘에게서 아브람은 복 받을 것입니다’. 루가복음서에서 엘리욘/‘높으신 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구속자 예슈아는 멜키세댁의 전승, 즉 대사제로서의 메시아/구속자라는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예시한다. 즉 엣세네파에서 거론하던 두 메시아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예수는 대사제 전승인 멜키세덱의 하느님 이름인 ‘높으신 분’/엘리욘의 아들이며 또한 다윗의 옥좌에 앉을 주/야붸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논리이다.
구원자로서의 예슈아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2세기 중반까지 세대에 관심이 많았던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이름을 추구했으며, 그는 영광의 옥좌에 앉을 것이라는 표제 문구가 생겼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일곱 가지의 것들이 창조되었다는 이론이며 이러한 논리는 이 시기 동안에 정립된 것이다. 이 부분은 탈무드에 두 군데, 창세기 미드라시와 다른 성서해석서 에도 몇 벌 기록된 잘 인용되는 짧은 단락이다.
아래의 번역은 ‘랍비 엘에제르의 강론’ 3장 앞부분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책을 집필했다는 랍비 엘리에제르는 서기 69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할 당시 바리사이파의 학자들을 야브네라는 곳으로 피신시켜 그들이 유대교 문헌을 계속 공부하고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던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의 수제자 중에 한 사람인 랍비 엘리에제르 벤 후르카노스를 가리킨다고 전한다. ‘선조들의 어록’(2,8)에 의하면 ‘랍비 엘리에제르 벤 후르카노스는 물방울 하나 낭비하지 않는 모르타르를 바른 수조이다’라고 말한다. 즉 그는 당시까지 전해진 유대교 문헌을 온전히 전수했다는 평판을 받은 사람이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찬미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오직 그분의 말씀으로만 (세상을)만드셨으며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그분에게서 떠올랐다. 그분은 자신 앞에서 세상의 기반을 추적하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은 서 있지 않았다. (랍비들은)비유를 말했다. 이것은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는가? 자신을 위하여 왕궁을 지으려는 임금과 같다. 만일 임금이 땅에서 그 기반이나 그 출구와 입구를 추적하지 못하면 그는 건물을 지으려고 시작하지 못한다. 이처럼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도 자신 앞에서 세상의 (계획도를)추적하셨으나 그분께서 회개를 만들어 내시기 전까지는 그것(계획도)은 서 있지 않았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일곱 가지 것들이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토라, 지옥, 에덴동산, 영광의 옥좌, 성전, 회개, 그리고 메시아의 이름이다. 이것이 토라에 알맞는지를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야붸)께서 그분의 길 시작에 나(토라)를 소유하셨다. 옛날 그분의 작업 전에”(잠언8,22). 여기에서 ‘옛날에’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을 뜻한다. 이것이 지옥에 관한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토펫트는 옛날에 준비되었다’(이사 30,33).토펫트는 힌놈 골짜기에서 지냈던 몰레크 제사를 말하며, 따라서 힌놈 골짜기는 지옥 ‘게해나’로 비유했다. ‘옛날에’는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것이 에덴 동산에 관한 것인지를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야붸) 하느님께서 옛날에 동산을 꾸미셨다’(창세 2,8). ‘예날에’는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것이 영광의 옥좌와 관련된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옥좌는 옛날에 세워졌습니다”(시편 93,2). ‘옛날에’는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것이 회개라는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당신이 땅과 세상을 형성하기 전에”(시편 90,2). 그리고 나서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담의 자식들아, 회개하라”(시편 90,2-3). ‘전에’, 즉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것이 성전에 관한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높은 곳에 세워진 영광스러운 옥좌는 우리의 성소자리이다’(예레 17,12). ‘처음부터’는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것이 메시아의 이름인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은 영원할 것이며 태양(이 뜨기) 전에 그의 이름은 싹을 낸다’ (시편72,17).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싹을 낸다’. 다른 문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유다 지파 가운데에서는 어린 자여. 너에게서 나를 위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되기 위해 나올 것이다. 그의 출생은 옛날에, 옛 시절부터’(미가 5,1). ‘옛날에’ 즉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다.
따라서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토라에 조언을 구했으며 세상의 창조와 관련해서 토라의 이름은 투시야(실천 지혜)이다(잠언8,14: ‘나에게 조언과 실천 지혜가 있다’참조). 토라는 그분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세상의 군주시여, 만일 임금을 대접할 주인이 없거나 임금을 위해 군대가 없거나 야영지가 없으면 그는 무엇을 다스리겠습니까? 만일 임금을 찬양할 백성이 없으면 임금의 영광은 어디에 있습니까?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이것을 들을시고 그분은 즐거워하셨다. 토라는 말했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은 세상의 창조에 관하여 나에게 조언을 구하셨다.
‘나는 이해하며 나에게 권능이 있다’(잠언 8,14). 그래서 (현자들은)말한다: 조언자가 없는 국가는 적합한 국가가 아니다. 이것을 어디에서 아느냐? 조언자들을 고용했던 다윗 가문의 왕국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윗의 삼촌 요나탄은 조언자였으며 이해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서기관이었다’(1역대 27,32). 다윗 가문의 왕국에서 조언자를 두었으며, 각자 그렇게 행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이로운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언을 듣는 자는 현명하다’(잠언 12,15). 그리고(이렇게) 말한다: ‘구원은 많은 조언에 있다’(잠언 11,14).
(‘에덴동산’, ‘말씀/토라’, ‘성전’, 그리고 ‘메시아의 이름’은 창조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일곱 가지 주제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려는 의도이다.) 위에서 인용한 루가복음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을 메시아에게 하느님께서 다윗의 옥좌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마리아가 천사에게서 받는다. ‘다윗의 옥좌’는 창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영광의 옥좌를 가리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그 메시아의 이름을 ’구속자‘인 예슈아라고 정해준 것이다.
랍비 엘리에제르의 강론에서 보더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토라의 조언이 있기에 가능하며 그 조언은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토라의 조언에서 조언의 구원으로 전개되는 논리 과정에 다윗의 가문이 등장한다. 이러한 인용은 우연이 아니라 앞으로의 구원/구속자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올 것을 내포하는 수사(修辭)이다. 여기에서 ’구원‘이라고 번역한 단어 ’트슈아‘는 ’예슈아‘와 같은 원형을 갖는 단어이다.
예슈아(구원)의 전통
서기전 3-1세기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이름을 예슈아라고 생각한 것은 매우 오래 된 ‘이름 풀이’의 전통에서 기인한다. 그 두드러진 예는 엘리샤에게 불 수 있다. 엘리샤는 ‘나의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엘리샤는 많은 기적을 행했으며 히브리 성서에 그가 행한 만큼 기적을 이룬 인물도 드물다. 엘리샤의 선생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며 그가 떨어뜨린 겉옷을 들고 엘리샤는 기적을 행하기 시작한다. 요르단 강을 갈라 마른땅으로 걸어갔으며. 물에 소금을 뿌리자 우물을 생명수가 되었다.
그 외에도 과부의 기름병에서 많은 기름이 솟아났으며, 즉은 아이를 살렸고, 보리빵 스무개로 백명을 먹였다. 아람 장군의 나병을 고치기도 하고, 심지어 엘리샤가 죽어 장사 지낸 후에 우연히 어떤 시체를 그 무덤에 던져 엘리샤의 뼈에 닿자 그 시체가 다시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섰다고 전한다(1열왕 13,21). 엘리샤는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이처럼 엘리샤(‘나의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이름의 소유자는 참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였다.
메시아와 관련되어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인물은 예언자 이사야이다. 히브리어로 이사야후는 ‘야후(야붸)는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임금으로 태어날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사야가 예고한 임마누엘은 히즈키야를 가리키며, 히즈키야는 앗시리아의 결정적인 예루살렘 침공에서 하느님불길같은 기적으로 해방된 기쁨을 누리게 한 임금이었다. 공로의 보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히즈키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에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았다:
“앗시리아의 손바닥에서 너와 이 성읍을 구해내고,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읍을 보호해 주겠다”(2열왕 2,6). 그는 다윗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구원자였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유다 왕국마저 앗시리아의 종속국이 되는 위기에서 그래도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다 준 다윗의 후손이다. 이후 임마누엘은 메시아(구원자)의 상징어로 등장한다.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오는 임금을 메시아로 기다리는 전승이 생긴다.
시온의 딸아, 매우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워하라. 보아라 너의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보아라, 너의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의롭고 구원이시다.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신다. 어린 새끼 나귀 위에, 내가 아프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질 것이다. 그는 이방인에게 평화를 말하며,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즈가 9,9-10).
즈가랴의 예언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오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지 무력으로 이방의 권력에 항쟁하는 구원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는 메시아는 평화의 수호자이다.
사랑과 평화
참으로 다윗과 그의 아들과 평화라는 주제는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이 이름에서 풀이된다. 다윗은 ‘사랑’이라는 뜻이며 솔로몬(히브리어로 쉴로몬)은 평화(샬롬)를 뜻한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명인 ‘에디드야’는 ‘야의 사랑’(‘야’는 야붸의 축약어이다)이라는 뜻이다.‘그녀(바트쉐바)가 아들을 낳았으며 그의 이름을 쉴로모라고 불렀다. 그리고 야붸께서 그를 좋아하셨으며 예언자 나탄의 손에 보내어 그는 그의 이름을 예디드야라고 불렀다’(2사무 12,24-25). 예디드는 다윗(히브리어로 다비드)과 같은 원형의 단어이다. 예루살렘에 야붸 하느님의 성전을 지을 것을 약속한 것은 다윗이며 그 약속을 지킨 이는 솔로몬이다. 이러한 다윗의 묵약으로 하느님은 다윗 가문이 이스라엘의 왕국을 계승할 것이라는 확신을 세우신 것이다.
예루살렘의 평화는 ‘야(붸)의 사랑’인 솔로몬에게서 이루어졌다고 기록한다: ‘쉴로모는 야붸를 좋아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규를 따랐다’(1열왕 3,3). ‘그(솔로몬)는 강 건너편, 팁삭흐에서 가자까지, 강 건너편 모든 임금들을 누르고 주변의 모든 건너편(국경)에서 평화를 누렸다’(1열왕 5,4). 사실 솔로몬은 그렇게 태어났다고 전승에 기록한다: ‘이제 너(다윗)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는 평온한 사람이 될 것이며 주변의 모든 적으로부터 그를 위해 평온하게 해주겠다. 참으로 쉴로모(평화)는 그의 이름이 될 것이다. 평화(샬롬)와 안정을 그의 생애 동안 내가 이스라엘에 주겠다’(1역대 22,9). 역대기 사가의 역사관이 반영된 구절이다 평화는 야붸 하느님의 사랑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 사관이다.
히브리 성서의 전승을 이어받은 초기 유대교 현자들의 언명에 이러한 구절들이 나온다. ‘선조들의 어록’ 1장은 세상은 세 가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전통을 학고히 만든 현자 심온은 ‘토라와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 이라고 말했으며, 서기 1세기 후반기에 할동했던 랍비 가므리엘은 그 세 가지를 ‘정의와 진리와 평화’라고 말한다(1,18).
랍비 가므리엘이 말하는 정의는 토라를 가리키며. 평화는 ‘자비를 한껏 행함’(히브리어로 두 단어)을 한 단어로 줄인 것이다. 랍비 가므리엘의 제자였던 바오로는 ‘사랑은 토라의 완성이다’라고 말한다(로마 13,10). 구원은 사랑에 있다는 논조이다. 그리고 그 구원은 바로 메시아 예슈아(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이다. 예슈아(구원/구속)는 다윗(사랑)의 아들 쉴로모(평화)의 전승을 계승한 것이며, 이래서 예슈아(예수)는 다윗의 옥좌에 앉을 수 있는 권한을 받은 것이다.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5)
지옥의 사자(使者) 사탄
예수와 욥을 유혹하는 사탄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지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옥이 이 세상에 있든지 혹은 저 세상에 있든지, 그 실체의 힘을 ‘사는 게 지옥 같다’ 고 말하는 어투에서 조금은 느낄 수 있다. 지옥이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디에 있는지 등의 단순한 의문에, 혹자는 지상낙원의 정반대가 지옥이라고도 묘사한다. 지옥은 살기에 무척 괴로운 곳이며, 지옥의 사자(使者)는 그곳으로 끌고 갈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전해진다.
성서에서는 그 지옥의 사자를 사탄이라고 불렀다. 복음서에 전해진 한 이야기를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귀신들이 방황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 매년 속죄 일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었던 제의에서 볼 수 있다(레위 16,8-26).
제2성전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속죄 일에 똑같이 생긴 염소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하나는 성전의 희생 제물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진’ 염소로 선포하여 광야로 내쫓아 보냈다. 광야로 보내는 염소를 ‘아자젤에게’ 보낸다고 말한다. 아자젤은 ‘험한 산, 광야’ 등을 뜻하며, 예수 당시의 히브리어에서는 ‘지옥’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진 염소는 죄인으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에 들게 되며, 지옥으로 끌려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그곳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논리이다.
사십 일 동안 단식하여 허기진 예수에게 다가온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을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유혹하였다. 악마는 자신의 꼬임에 예수께서 흔들리지 않자 그분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만일 엎드려서 자기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예수에게 주겠다고 다시 한번 유혹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라, 사탄아! 이렇게 쓰여있다: ‘너는 하느님이신 주(主)에게 절하고 그분을 홀로 섬겨라.’” 그래서 악마는 그분을 떠나갔고 천사들이 다가와서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1).
사탄이 예수께 보여준 왕국의 영광은 ‘영광의 옥좌’이며, 그 자리에는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앉을 곳이었다. 사탄의 유혹은 만일 예수께서 자기의 권능이 하느님의 권능보다 강하다고 말한다면 지옥에서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사탄의 꼬임 수는 예수로 하여금 십계명의 1-2계명을 범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한 분이 아닐 수 있다는 신성모독 죄로 지옥에 보내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신명 6,4 과 6,13의 말씀을 인용구로 만들어 그 응답을 하셨으며, 사탄은 포기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천사들은 그분을 천상으로 데려가기 이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사탄이 바른 사람을 악한 궁지로 몰아넣어 하느님을 모독하고 지옥에 빠지게 유혹하는 이야기로 욥기가 표적이다. 욥의 신실함을 흔들어보기 위해 사탄은 그에게 온갖 고난을 주지만, 욥은 심지어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으십시오”(2,9)라고 말하는 아내의 하소연에도 버틴다. 욥이 사탄의 꼬임에 홀려 지옥행이 되지 않고 끝내 찾아낸 지혜의 답변은 다른 신에게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찌 내가 처녀에게 눈길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저 위에 하느님의 몫이며 높은 곳들에 전능하신 분의 유산입니까?(31,1). 결국 욥은 지옥의 문턱에 발을 디디지 않은 것이다. 예수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불타는 지옥
이러한 지옥의 실체는 어디에 있으며 언제 생겼는지에 대한 초기 유대교 랍비들의 탐구는 그들의 강론과 성서 해석 서에 나타난다. 랍비들 가운데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처사였으며, 서로 논박하는 전통이 유대교 문헌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옥의 기원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의견은 창조 이전에 만들어진 일곱 가지 것들을 설명하는 랍비 엘리에제르의 강론에서 읽을 수 있다. 지옥이 옛날 옛적에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적용하는 문구로 “토펫트는 옛날에 준비되었다”(이사 30,33)를 인용한다.
토펫트는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한놈 골짜기에서 행해졌던 몰레크 제사를 가리킨다. 이 제사는 아들, 딸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여 몰레크에게 바치는 제사이다(2열왕 23,10). 미쉬나의 기록에도, 힌놈 골짜기에 대추야자나무 두 그루가 있었으며 이것은 지옥의 입구였다고 전한다. ‘힌놈의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게-힌놈’이며, ‘지옥’ 의 대명사로 게헨나(Gehenne)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게-힌놈’ 의 그리스어 음역(Υέεννά)에서 기인된다. 예루살렘에서는 오래 전부터 자식들을 불 속에 바치는 제사가 힌놈 골짜기에서 행해졌으며 , 유다 앙국 시대에 우상숭배의 종교관습을 타파하는 새로운 종교 개혁의 기운과 함께 그곳에서 행해졌던 불 제사 같은 종교제의가 탄압 받았다(특히 히즈키야와 요시야 임금 때에 야붸 주의자들의 종교개혁이 가장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힌놈 골짜기(게힌놈)는 지옥이라는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으며, 지옥은 불타는 곳으로 그곳에 끌려온 죄인은 숨막히는 열기로 고통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생겼다.
엘리에제르 강론에서 이와 같은 해석을 읽을 수 있다. ‘둘째 날에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창공, 천사들, 살(肉)가 피를 위한 불, 그리고 지옥의 불을 만들어내셨다. 하늘과 땅이 첫날에 만들어지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내셨다”(창세 1,1). 하느님께서 창조의 둘째 날에 지옥의 불을 만들어내셨다고 주장하는 랍비들이 있는데, 이들이 풀이하는 해석의 출발점은 창조의 날 1일부터 6일까지 둘째 날을 제외하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으로 좋았다”라는 구절이 모두 나온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다른 날들은 모두 좋다고 말씀하시는데 둘째 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이런 침묵에 숨겨진 비밀을 찾는 것이다(이런 방법이 유대교 랍비들의 성서해석 태도 중의 하나이다). 둘째 날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붙잡혀 가 고난을 받는 불타는 지옥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라는 변론이다.
창세 15장에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아브람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이해 짐승들을 제물로 잡아 반으로 잘라 서로 마주보게 차려놓은 다음, 해질 무렵 깊은 잠에 들었다.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아브람의 자손들을 훗날 자기 나라가 아닌 곳에서 거류민으로 살 것이며 타민족의 종이 되어 사 백년 동안 눌려지낼 것이라고 알려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그곳을 떠나 그들의 조상들에게로 평안히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말한다. 그러자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렸으며, 여기에 연기 나는 화덕과 불타는 횃불이 그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창세 15,17).
아랍어 번역인 타르굼의 이 단락에 대한 의역에서 랍비들의 해석을 알 수 있다. ‘보아라, 아브람은 불타는 숯덩이들과 타오르는 불티들을 올려보내는 지옥을 보았으며 그곳에서 악한 자들은 심판을 받고 있다.’ 사악한 자들이 불로 심판 받는 그러한 지옥에서 올라오는 불길이 그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즉 아브라함의 희생제물 사이로 심판의 불길이 지나갔다는 설명이다.
한편 창세 15,17에 대하여 랍비 엘레에제르의 강론 ‘아브라함의 시험’ 부분에 흥미로운 해석이 나온다.
여기에서 ‘화덕’이라는 단어는 오직 지옥을 가리키며 아래와 같이 쓰여진 구절의 화덕과 비교된다: “주님의 말씀이다 : 그분에게는 시온에 불꽃과 예루살렘에 화덕이 있다”(이사 31,9). 이사야서의 이 구절의 배경은 서기전 701년 예루살렘이 앗시리아 군대에 포위되어 있을 당시이며, 이 구절의 숨은 뜻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지옥의 불길로 예루살렘을 침범한 앗시리아 군대를 삼킨다는 것이다. “그날 밤에 야붸의 천사가 나아가 앗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그들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두가 죽은 시체였다”(2열왕 19,35). 야붸의 천사가 지옥의 불길/열기/열풍으로 앗시리아 군인들을 삼켜버린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더운 날과 연관된 대목이 나온다. “야붸 하느님은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는 그날 더위로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창세 18,1). 그날은 무척 더웠는데 천막 속은 너무 더워 아브라함은 어귀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 세 사람이 나타나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달려가 땅에 엎드려서 절하고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천사들이다. 여기에서 랍비들의 질문은 그날 왜 더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품은 랍비들은 그들 특유의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재미있는 짧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아가다’라고 말한다. 더운 이 날에 대하여 랍반 가므리엘은 아래와 같은 아가다를 남겼다(랍반 가므리엘은 서기 220년경에 미쉬나를 편찬한 랍비 유다의 아들이었다).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께서 할례 받으셨을 때 그 셋째 날이 매우 고통스러웠으며, 이는 하느님께서 그를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어떻게 하셨느냐? 그분은 지옥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사악한 자의 날처럼 그날을 매우 덥게 만드셨다. 아브라함은 나가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천막 어귀에 앉았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그날 더위로) 그는 천막 어귀에 앉았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천사들에게 말씀하셨다. : “자, 내려가서 저 아픈 사람을 방문하자. 환자를 방문하는 미덕은 나에게 좋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과 천사들이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을 방문하려고 내려왔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창세 18,1).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천사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희는 와서 할례의 권능을 보아라.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는 (내 앞에서) 그의 얼굴을 떨어뜨렸으나 이제 나는 그와 함께 말한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 “아브라함은 그의 얼굴을 떨어뜨렸다”(창세 17,17). 이제 그는 할례를 받았으며 그는 앉고 나는 섰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서 계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 “그가 눈을 들어보니 세 사람이 그에게 나서고 있었다”(창세 18,2).
‘사악한 자의 날처럼 그날을 매우 더웁게 만드셨다.’ 즉, 사악한 자들이 불타는 지옥에서 당하는 날처럼 그렇게 더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지옥이 더운 곳으로 상상되는 것은, 황사를 동반하며 몇 일 동안 불어닥치는 열풍의 일상 경험과 그 무더운 열기가 40도를 넘나드는 한 여름 메마른 광야의 폭염을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탈무드에도 ‘내세에 영원한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더운 날뿐이다’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뻔뻔스러운 자
이렇게 더운 지옥은 땅 밑에 있다고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선조 들의 어록’에 착한 아브라함과 사악한 발람을 비교하는 단락이 나온다(5,19).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의 제자들에게는 착한 눈, 겸허한 기질, 겸손한 정신이 있다. 사악한 발람의 제자들에게는 악한 눈, 거만한 기질, 건방진 정신이 있다.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의 제자들이 사악한 발람의 제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먹고 내세에 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나 사악한 발람의 제자들은 지옥을 이어받을 것이며 파멸의 구덩이로 내려갈 것이다.
발람의 성품을 이처럼 말하는 것은 민수 22-24장의 이야기를 반영한다. 이 단락의 주제는 착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또한 내세에서도 한 몫을 차지하며, 즉 지상낙원에 들어가는 특권을 받을 수 있으며, 이와 반대로 사악한 자는 이 세상에서 지옥을 이어받으며 내세에서도 파멸의 구덩이로 내려간다는 이상향적 해석이다(즉, 세상이 이처럼 의로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것일까라는 믿음이다). 두 병행구의 공통점은 이 세상은 사악한 자의 파멸의 구덩이로 대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즉, 지옥은 살아서 이어받는 곳이며, 지옥에 들어간 사람의 내세는 파멸의 구덩이로 연결된다는 해석이다. 이를 ‘아가다’로 설명할 수 있는 예를 랍비 엘리에제르의 강론 53장에서 읽을 수 있다.
여섯사람이 첫째 사람과 같았으며 그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그들은 이러하다 삼손은 그의 힘 때문에 살해되었다. 사울은 그의 신장(身長) 때문에 되었다(1사무 9,2). 앗사엘은 그의 달음박질 때문에 살해되었다. “앗사엘은 들판에 있는 영양들의 하나처럼 그의 발이 가벼웠다(즉 달음박질이 빨랐다)”(2사무 2,18). 요시아는 그의 콧구멍 때문에 살해되었다. “우리의 콧구멍은 숨, 주(主)의 기름부음 받은 이는 저들의 구덩이에 붙잡혔다”(애가 4,20)는 문구에서 기름부음 받은 이(메시아)는 임금 요시야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전승에 의거한다.
쯔드키야는 그의 눈 때문에 그의 눈이 멀게 되었다(2열왕 25,7). 압샬롬은 전쟁에 힘쓰는 용사였다. 그는 그의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는 왜 그의 칼을 빼서 그 머리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내려오지 않았느냐? 압샬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숲 속에서 싸울 때 압샬롬은 노새를 타고 있었다. “그 노새가 큰 참나무의 얽힌 가지 밑으로 지나갔다. 그의 머리는 참나무에 걸렸으며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 놓였고 그의 밑에 있었던 노새는 지나갔다”(2사무 18,9). 그러나 그는 지옥이 그의 밑에 열려져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는 말했다: “내 머리의 머리카락에 매달려 있어 불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는 참나무에 매달려 있었다”(2사무 18,10)
랍비 요쎄이는 말했다: 지옥에는 일곱 개 대문이 있다. 압샬롬은 지옥의 다섯째 대문까지 들어갔다. 다윗은(그의 소식을)듣고 울부짖기 시작했으며 통곡했다. 그는 압샬롬을 위해 “내 아들”이라고 다섯 번 불렀다. 이렇게 말씀한다. “임금은 괴로워서 성문의 누각으로 올라가 울었다: 그는 걸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 압샬롬, 내 아들, 내 아들 압샬롬, 누가 내 죽음을 초래하겠느냐? 내가 너 대신에 (죽을 것을 ), 압샬롬, 내 아들, 내 아들’”(2사무 19,1).
그래서 그들은 지옥의 다섯째 대문에서 그를 되돌려 왔으며, 그(다윗)는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했고 그의 조물주에게 찬송하였다. 이렇게 말씀한다: “나에게 호의의 징표를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참으로 당신은 주님(야붸)이시며 나를 도우시고 나을 위로하십니다”(시편 86,17). 압샬롬의 전쟁에서 “당신은 나를 도와주셨으며” 나의 슬픔에서 “당신은 나를 위로하셨습니다.”
다윗이 압샬롬을 위해 “내 아들”이라고 다섯 번 부른 구절에 근거하여 압샬롬은 지옥으로 가는 다섯째 대문까지 도달했다고 풀이하며, 다윗의 이러한 간구로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다시 되돌아오게 되었다는 짧은 이야기이다. 각 대문을 지날 때마다 다윗은 압tif롬을 돌려보내 달라고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계산이다. 이는 극적 상상력의 극치이다.
시편 86편의 제목은 ‘다윗의 기도’이다.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압샬롬을 지옥으로 내려가지 않게 도와달라는 다윗의 기도이며, 그 호의의 징표를 보여달라는 청원이다. 이처럼 지옥으로 붙들려 가는 길에서도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초대 유대교 랍비들의 생각이다. 지옥행 열차에 몸을 실은 죄인을 위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중재자가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에게 기도한다면 때로는 그분의 호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 유대고 문헌에 방영된 랍비들의 기본 입장은, 사람이 토라를 열심히 공부하고 토라의 말씀을 바로 지키면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며, 선생을 사람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파멸의 구덩이로 전락되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지론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은 아버지보다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이 더 중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부들에게 “당신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남겨두고 그분을 따랐다”고 전한다(마태 4,18-22).
그리고 아래와 같이 십계명의 근본가르침을 말씀하셨다 : “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옛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자기의 이웃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사람은 불타는 지옥에 넘겨질 것입니다”(마태 5,21-22).
‘선조들의 어록’에 기록된 여러 랍비들의 언명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목을 읽을 수 있다 : ‘이래서 누구든지 여자와 잡담을 늘리는 자는 자신에게 악을 유발하고 토라의 말씀을 게을리 하며 결국 지옥을 차지할 것이라고 현자들은 말한다’(1,5); ‘뻔뻔스러운 자는 지옥으로, 수치스러워하는 자는 에덴동산으로 (간다)’(5,20).
랍비 엘리에제르의 언명을 읽어본다: ‘현자들의 화로에 마주 앉아 몸을 따뜻하게 하라. 그러나 그들의 타는 숯에 데지 않게 조심할 것이다.--- 그들의 속삭임은 독사의 속삭임이다. 그들의 모든 말은 불타는 숯 같다’(2,10). ‘불타는 숯 같다’는 표현은 불타는 지옥을 가리킨다. 현자들의 가르침은 타는 숯 같아 잘못 배우면 지옥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충고이다.
예수의 가르침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말씀이 복음서에 전해진다. “불행하도다, 너희 율사들과 바리사이들, 뻔뻔스러운 자들아! --- 독사들의 족속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태 23,29; 33). 이와 비슷한 단어가 세례자 요한의 입에서 나온다. 많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요한 에게 세례를 받을 올 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독사들의 족속아! (다가) 올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었느냐?” (마태3,7). 요한이 전하는 닥쳐올 진노는 분명히 예수께서 말하는 지옥의 심판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진노/열화/불의 심판은 요한 묵시록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불이 하느님에 의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삼켰다. 그들을 잘못하게 했던 악마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졌다”(20,9-10).
초기 유대교 문헌에 전해지는 랍비 들의 지론은 하느님께서 게-힌놈(지옥)과 간-에덴(에덴동산)을 만들어 내셨으며, 사람은 각자에게 선택이 있는 것이다.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 사악한 자는 지옥행이며, 악한 성향을 극복하고 악을 멀리하고 토라의 길에 선 자는 에덴 동산 행이라는 진리이다. 악한 성향은 악마가 착한 얼굴의 탈을 쓰고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뻔뻔스러운 자라는 말이다. 창조의 질서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몫은 에덴 동산으로 가는 길이며, 그 방법은 토라를 배우고 지켜 뻔뻔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선조들의 어록’6장에 ‘토라의 길’을 배우는 48가지의 성격이 나온다. 탈무드(공부), 마음의 통찰, 착한 마음, 스스로 덕을 자랑하지 않는 자, 동료의 멍에를 짊어지는 자 등 열거되는 마지막 사람은 다음과 같다. “말한 자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 보아라, 너는 배웠다. 말한 자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는 세상에 구원을 가져온다”(6,6).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사악한 사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성향의 뻔뻔스러운 자이다.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6)
회개의 힘
회개
'회개‘는 옛날에 창조와 함께 혹은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그래서 흔히 “죽기 전에 하루 회개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죽으면 창조되기 전 상태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어록>2.10에 “죽기 전에 하루 돌아 오라(회개하라)”는 언명이 있다. 이 언명은 랍비 엘리에제르가 남긴 유명한 말씀 중의 하나이다. <선조들의 어록>에 대한 해석책인 <랍비 나탄의 선조들>은 그 내용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15장 마지막 단락).
“죽기 전에 하루 돌아 오라(회개하라).” 랍비 엘리에제르에게 그의 제자들이 질문했다 : “그렇다면 사람은 어느 날에 죽는지 알아서 그는 회개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는 말했다 :“할 수만 있으면 오늘 회개를 할 것이다. 그가 내일에 죽는다면 어떻게 하느냐? 내일에도 회개할 것이다. 그가 모레에 죽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니 평생 회개로 지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말씀의 해석이다 : “너의 옷이 언제든지 하얗도록 해라”(전도9,8).
이 해석과 연관된 문구는 벤시라(집회서) 5,7에서 찾을 수 있다 : “그분께 돌아가기를 늦추지 말라. 하루하루 미루지 말라. 왜냐하면 그분의 진노가 갑자기 닥쳐 네가 징벌의 날에 끝장난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은 세례자 요한 에게 모여든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에게 외치는 요한의 말이다 : “(닥쳐)올 진노에서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그래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느냐?”(마태 3,7-8). 이러한 요한의 언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히비리어로 ‘회개’(트슈바)라는 단어는 ‘돌아오다’(슈브)라는 동사의 파생어이지만 히브리성서에는 이렇게 사용되지 않았다. ‘회개’라는 뜻의 단어로 사용된 것은 제2성전 시대 현자들에 의한 것이며 그들이 만든 신조어이다. 그렇다고 회개라는 개념이 히브리성서에 없다는 것은 아니다.
‘회개’라는 단어 혹은 제의(祭儀)가 창조와 함께 혹은 창조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다고 논리를 전개하는 초기 유대교 현자들의 가르침은 초대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단편적인 예는 복음서의 시작에서 읽을 수 있다. 마태오 복음서의 시작 부분에 “회개하시오. 하늘 왕국이 가까이 옵니다”라고 전거 하는 문장이 나온다(마태 3,2). ‘회개하라’고 번역한 단어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이는 ‘돌아 오라’는 동사이다.
초대교회를 형성하는 새 계약의 공동체가 새로운 창조와 새 질서를 선포하는 처음에 놓는 문구가 ‘회개’라는 점은 초기 유대교 현자들의 이론과 부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조 이전에 창조된 ‘토라/말씀, 영광의 옥좌, 메시아의 이름, 지옥의 사자’등도 그러하다.
실상 사람은 일반적으로 악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토라를 배우며 자라는 과정에서 그 악한 성향을 멀리하고 착한 성향의 인간이 된다고 유대교 현자들은 주장한다.
수많은 성서 해석서와 탈무드 등에 엮어지는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주는 목표는 오직 하나이다. 착한 성향의 인간으로 만들어져야 된다는 명제이다. 악한 성향으로 잘못하여 계명을 어겼으나 착한 성향의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써 속죄의 제물을 신에게 드리고 스스로 회개를 해야 하는 인간의 괴로움과 바람(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서기 2세기 팔레스티나에서 활동한 랍비 핀하스의 질문과 답변에서 ‘죄와 벌’에 관하여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쓰여있다. “주님은 착하고 바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죄인에게 길을 가르쳐주신다”(시편 25,8). 그분이 왜 착하시냐? 왜냐하면 그분은 바르시기 때문이다. 토라(모세오경)는 질문을 받았다 : 죄인의 벌은 무엇이냐? 그것은 대답한다 : 그가 번제를 가져와 속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언서는 질문을 받았다 : 죄인의 벌은 무엇이냐? 그것은 대답한다 : “죄지은 영혼은 죽을 것이다”(에제18,4). 다윗(즉 시편)은 질문을 받았다 : 죄인의 벌은 무엇이냐? 그는 대답한다 : “죄인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수많은 성서 해석서와 탈무드 등의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주는 목표는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혜서는 질문을 받았다 : 죄인의 벌은 무엇이냐? 그것은 대답한다 : “죄인들에게 불행이 뒤따른다”(잠언 13,21).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질문을 받았다. 죄인의 벌은 무엇입니까?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 “그가 회개할 것이며 나는 그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 “주님은 착하고 바르시다.”
하느님은 착하고 바르시기에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회개라는 제의가 주어졌음을 알려준다. 회개는 ‘죄와 벌’에 앞서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회개의 힘
‘회개의 힘’에 대한 가장 유명한 강론은 ‘랍비 엘리에제르의 강론’ 43장 이라고 말한다. 회개에 대한 유대교의 입장을 변론하는 글에 항상 인용되는 단락이다. 이 글은 (선조들의 어록)의 한 언명인 “회개와 선행(善行)은 벌 앞에 방패이다”라는 문구에 대한 해석으로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열거하며 그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회개의 힘’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회개와 선행은 벌 앞에 방패이다” (선조들의 어록 4,11). 랍비 이쉬마엘은 말했다 : 만일 회개가 창조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유지되지 못했다. 랍비 아키바는 말했다 : 회개가 창조되었기에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의 오른손은 돌아온 자(즉 회개한자)를 매일 받아들인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 “돌아 오라(회개하라), 사람의 자식들이여!”(시편 90. 3). 너는 자비와 회개의 힘을 알 것이다.
와서 이스라엘의 임금 아합에 관하여 보아라. 그는 많이 회개하였다. 그는 도둑질을 하였고 부정을 했으며 살해하였다. 이렇게 쓰여있다 : “너는 살해하였으며 유산도 차지하려느냐?”(1열왕 21,19). 그분은 그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임금 예호샤파트를 불렀다. 그는 그에게 매일 세 번 사십대의 채찍을 주었다. 그는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 앞에 새벽과 저녁에 단식과 기도를 하였다. 그는 온종일 토라에 열중했다.
그래서 다시는 악한 짓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회개는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쓰여있다 :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하여졌는지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손하여졌기에 나는 그이 생애에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1열왕 21,19).
랍비 아바후는 말했다. 너는 회개의 힘을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에게서 알 것이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선조들에게 그들의 자식들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시킬 것이라고 맹세하셨다.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은 와서 그 수효를 세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한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흑사병이 생겨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2사무24장).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은 그에게 말했다. “다윗아, 나는 선조들에게 그들의 자식들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시키겠다고 맹세했다. 너는 와서 내 말을 취소하려느냐? 너를 위하여 양떼를 잡아먹으라고 주었다.” 세 시간만에 이스라엘에서 칠만 명이 쓰러졌다. 이렇게 쓰여있다. “이스라엘에서 칠만 명이 쓰러졌다”(1역대 21,4).
랍비 심온은 말했다. 이스라엘인 가운데 오직 쯔루야의 아들 아비샤이만이 쓰러졌다. 그의 선행과 토라(의지식)는 칠만 명과 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여있다. “이스라엘에서 칠만 명이 쓰러졌다”(1역대 21,14). 여기에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쓰여있다. ‘칠만 명’의 직역은 ‘칠십천 사람’이다. 즉 칠만(70x1000)이면 복수인데 ‘사람’이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인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숫자를 셀 때 복수의 수효에 단수 명사를 사용하는 경우는 우수리 없는 경우에 그렇게 상용되기도 한다.
다윗은 듣고 그의 옷을 찢고 자루 옷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하느님의 계약 궤 앞에서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있었다. 그는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 앞에서 회개를 구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온 세상의 주님이시여, 제가 바로 죄 지은 자입니다. 제 죄를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2사무 24,17). 그의 회개는 받아들여졌으며 그는 백성들을 파멸시키는 천사에게 말했다. “이제(주님의 자비가)많으시니까 당신 손에 맡기겠습니다”(2사무24,14). 여기에서 그는 그의 칼을 들어 다윗의 겉옷으로 닦았다. 다윗은 죽음의 천사의 칼을 보고 그가 죽을 때까지 사지를 떨었다. 이렇게 쓰여있다. “다윗은 주님의 천사의 칼이 무서웠기에 하느님께 문의하려고 그분 앞에 가지 못했다”(1역대 21,30).
랍비 예호슈아는 말했다. 너는 회개의 힘을 알 것이다. 와서 히즈키야의 아들 메나쉐에 관하여 보아라. 그는 세상의 온갖 죄악은 다 저질렀으며 악행을 더 했다. 다른 신들에게 제단을 쌓았다. 이렇게 쓰여있다. “그는 벤 힌놈의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며 요술과 마술과 점술을 행하였고 영매와 점장이들을 이용하였다. 그는 주님 앞에서 악행을 더하여 그분의 분노를 일으켰다”(2역대 33,6). 그는 예루살렘으로 나가 비둘기들을 장식하여 하늘의 모든 군대를 위하여 제단에 바쳤다.
앗시리아 군대의 장군들이 와서 그의 머리채를 붙들어 바빌론으로 그를 내던졌으며 그들은 그를 불(위의) 냄비에 집어넣었다. 그는 거기에서 그가 제단에 바쳤던 다른 신들을 불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단 한 신도 그에게 대답하여 그를 구하지 못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내 선조들의 하느님을 내 온 마음으로 부르겠다. 아마도 그분께서 내 아버지에게 하신 그분의 놀라우신 일들을 나에게도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선조들의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불렀으며 그분은 그의 호소를 그이 기도를 들으셨다. 이렇게 쓰여있다. “그가 그분께 기도하여 그분은 그의 호소를 받아들였다”(2역대 33,13). 그때에 메나쉐는 말했다. “심판이 있고 재판관이 있다.” ‘재판관’은 하느님을 가리킨다.
벤 아자이는 말했다. 와서 라키쉬의 아들 랍비 심온에게서 회개의 힘을 보아라. 그와 그의 두친구는 길에서 그들을 지나치는 모든 이들에게서 도둑질과 부정을 일삼았다. 그는 무엇을 했느냐? 그는 도적질을 하는 두 친구를 산에 두고 그의 온 마음으로 그의 선조들의 하느님에게 돌아왔다. 그는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 앞에서 새벽과 저녁에 단식과 기도를 하였으며 그가 사는 동안 토라에 열중했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악행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회개는 받아들여졌으며 그가 죽는 날에 그 두 도적질 친구들도 산에서 죽었다. 라키쉬의 아들 랍비 심온에게는 생명의 몫이 주어졌고 그 두 친구들은 저승 밑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 두 친구들은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 앞에서 말했다.
“세상의 주님이시여, 당신 앞에서 얼굴을 내미는 자가 있습니까? 즉, 하느님께도 특별히 호의를 베푸시는 자가 따로 있느냐는 반문이다. 이 자도 산에서 우리와 함께 도적질을 하였으나 그는 생명의 보물을 차지하게 되고 우리는 저승의 밑바닥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자는 살아서 회개를 하였으나 너희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에게 말했다.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가 회개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회개는 오직 죽을 때까지이다.”
비유 - 이것은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느냐? 바다로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과 (비유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사람이 사는 땅에서 그 손에 빵을 들고 오지 않으면 바다에서는 찾을 수 없다. 만일 그가 광야의 끝까지 걸어가기를 원하는데 거주지에서 빵과 물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광야에서는 먹고 마실 것을 찾지 못한다. 이처럼 사람이 그 사는 동안에 회개를 하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는 그에게 회개는 없다. 이렇게 쓰여있다. “그는 속죄의 값에 얼굴을 돌리지 않을 것이며 뇌물을 많이 준다 하여도 만족하지 않는다”(잠언 6,35). 이렇게 쓰여있다. “나는 심장을 조사하고 콩팥을 시험하는 주님이시다”(예레 17,10). 심장은 지성을, 콩 팥은 감성을 은유하는 상징어이다.
하카나의 아들 랍비 네후니야는 말했다. 너는 회개의 힘을 알 것이다. 와서 이집트의 임금 파라오에게서 보아라.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바위에 매우 많이 반목하였다. ‘바위’는 모세가 호렙산의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된 바위를 말한다. “나일강을 친 너이 지팡이를 손에 쥐고 가거라 ---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출애 17,5-6). 이렇게 쓰여있다. “내가 그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주님이 누구냐?”(출애5,2). 그는 같은 혀로 죄를 지었으며 그 혀로 회개를 하였다. 이렇게 쓰여있다. “신들 가운데 누가 당신 같겠습니까? 주님이시여”(출애15,11).
파라오가 죄를 지은 것은 “주님(야붸)이 누구냐” 고 반문한 것이고 회개한 것을 말해 주는 문구는 “신들 가운데 누가 당신 같겠습니까? 주님(야붸)이여!”라는 것이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는 죽은 자들 사이에서 그를 구하셨습니다.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렇게 쓰여있다. “이제 내가 내 손을 치켜들어 너를 치겠다--- 그렇지만 이것 때문에 너를 세우겠다(즉 살려두겠다)” (출애 9,15-16).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죽은 자들 사이에서 그를 세우시어 그분의 힘과 권능을 이야기하게 하셨다. 그분께서 그를 세우셨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이렇게 쓰여있다. “그렇지만 이것 때문에 나는 너를 세우겠다”(출애 9,16).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1)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웠다
조철수(강사․서강대 수도자대학원․앗시리아학)
사람부터 짐승까지
창세기에 전개되는 홍수 이야기 시작 부분에 야붸 하느님께서는 홍수를 일으켜 사람들을 없애버리겠다고 결정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야붸께서는 땅에 사람의 사악함이 많아졌고 온종일 그들의 마음이 궁리하는 성향도 오직 사악함을 보았다. 야붸께서는 땅에 사람을 만든 것을 슬퍼하시고 그분의 마음이 괴로워졌다. 야붸는 말씀하신다. ‘나는 땅 위에 내가 만들어낸 사람을 없애겠다. 사람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하늘의 새까지. 내가 그들을 만든 것을 참으로 슬퍼한다’”(창세 6,5-6).
이 구절에 대한 초기 유대교 랍비들의 해석 책을 읽어보면 많은 랍비들이 항상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잘못했는데 왜 가축이나 하늘의 새까지 벌을 받아야 할까라는 것이다. 초기 유대교 문헌에 자주 대두되는 전통적인 개념 설정 가운데 ‘악한 성향’과 ‘신실한 성향’ 이라는 주제어가 있다. 인간의 성격을 이렇게 양분하여 그 범주를 정하는 것이다.
‘신실한 성향’은 하느님이 하느님과 닮은(가까운, 즉 믿을 수 있는) 아담(사람)을 만들어내신 하느님의 거룩한 생각을 가리키며, 그와 대조적으로 악한 성향은 ‘악한 충동’을 일으키는 성향, 즉 죄 짓는 경향이 짙은 생각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옛날의 아담’, 즉 회개하기 이전의 아담을 가리킨다.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아담은 그의 아내가 따서 준 열매를 얻어먹고 눈이 떠지자 그 때문에 벌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정해준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철칙이 창세기에서부터 준수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인간의 성향은 아무리 계명을 원칙으로 세워놓아도 경계선을 넘는 악한 경향이 있다는 변명도 아담과 하바의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다. 문제는 사람 때문에 왜 짐승이 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창세기 미드라쉬(성서 해석 책)에서는 아래와 같은 비유를 들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려준다. “사람에서 가축과 기는 것과 하늘의 새까지.” 이것은 이렇게 비유된다. 임금이 그의 아들을 선생에게 맡겼다. 그는 그의 아들을 악한 심보로 만들어 놓았다. 임금은 그의 아들에게 화가 나서 그를 죽였다. 임금은 말했다. “바로 이 사람이 내 아들을 악한 심보로 만들어 놓았다. 내 아들은 이미 무너졌는데 이 자는 아직도 살아 있도다.” 그래서 (성서는 말한다) “사람에서 가축까지”(창세기 미드라쉬 6,7).
‘임금과 그이 아들’ 비유는 유대교 성서 해석에 자주 사용되는 해석방법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임금은 하느님을, 그의 아들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 비유에서 아들은 사람, 즉 아담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으며 임금이 그의 아들을 가르치라고 선택한 선생은 ‘가축까지’라는 문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선생은 누구일까? 그 해답은 에덴동산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 인물은 모두 넷이다. 하느님과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뱀이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게 알려진 에덴동산 이야기를 다시 읽을 필요가 생긴다.
갈비뼈
하느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에게 단잠을 재우신 후(아마도 마취 향을 들여 마시게 하셨을 것이다),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아담의 상대로 도움’이 되는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나오는 것이며, 이와 비교하여 보면 에덴동산 이야기는 새로운 시각에서 각색된 창작극이다. 바빌로니아의 수메르 신화 ‘거룩한 도시 딜문’에 의하면 지혜의 신 엔키는 자기가 정원에 뿌린 씨에서 자란 열매를 따먹고 앓게 된다. 모신은 엔키를 불쌍히 여겨 그의 아픈 곳을 물어보고 거기서 여신을 만들어내어 치유해 준다. 지혜의 신이 갈비뼈가 아프다고 말하자 갈비뼈에서 여신을 태어나게 한다. 그리고 갈비뼈의 여주가 달(月)의 여주가 되게 자리 배당을 한다.
수메르 문화권에서는 갈비뼈의 여주를 ‘생명의 여주(女主)’라고 부르는데, 그 특별한 이유는 언어적으로 갈비뼈와 생명이라는 단어는 서로 같은 발음(티)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명의 여주(닌티)가 달의 여주가 되는 것도 생명을 잉태하는 여자와 달/월경의 상관관계에서도 설명될 수 있지만, 달의 여주는 ‘닌이티’라고 발음되기에 ‘닌티’(갈비뼈의 여주/생명의 여주)는 쉽게 ‘닌이티’(달의 여주)라는 단어로 덧붙여 이해될 수 있다(이와 비슷한 예로, 아래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뱀이 ‘교묘하다’와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벌거벗었다’ 는 두 단어는 서로 상관없는 별개의 뜻이지만 발음이 비슷하기에 이야기의 골자를 이루는 것처럼, 수메르 신화의 갈비뼈와 생명의 여주도 비슷하게 발음되는 단어들의 결말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웠다
아담의 상대로 만들어진 그의 아내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먹지 말라고 경고한 열매를 따서 먹고 또한 그녀의 아담도 함께 먹어 결국 벌을 받게 되었다고 이해한다. 과연 아담의 아내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열매를 따먹었을까? 이 단락의 첫 구절이 뱀에 대한 설명이다. “뱀은 야붸 하느님께서 만드신 온갖 들짐승에서 교묘한 것이었다”(창세3,1).
‘교묘’하다고 번역한 단어(아룸)는 바로 앞 절(2,25)에 아담과 그의 아내는 ‘벌거벗었다’는 단어(아루밈)아 비슷한 발음이다. ‘벌거벗었다’의 초점은 그들이 열매를 먹고 눈이 떠져(그렇다고 그들은 원래 눈이 멀었는데 열매를 먹고 눈이 떠졌다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벌거벗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는 생활관습을 배웠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의 눈이 떠지게 되는 길을 알려준 자가 바로 뱀이다. 뱀은 여자에게 하느님께서 열매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였느냐고 묻는다: “정말로 하느님께서 말했느냐? 동산의 온갖 나무에서 너희는 먹지 말라고,” 여자는 만일 그것을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때 뱀의 대답은 사실을 말한다.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아신다. 만일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 너희 눈이 떠지고 너희는 선과 악을 아는 신들처럼 된다는 것을” (창세 3,4-5).
다음 문장은 열매를 쳐다보는 여자의 마음을 그린 서술문이다. 이 문구가 그들의 눈이 떠지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디딤돌이다. ‘여자는 나무(의 열매)가 먹기에 좋고(맛있고), 그것은 눈(으로 보기)에 예쁘고, 나무(의 열매)는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웠다. 그녀는 그 열매를 취하여 먹고 그녀와 함께 있던 그녀의 남편에게 주어 그는 먹었다’ (창세 3,6).
열매를 표현하는 동사구가 3개 나온다. ‘먹기에 좋고, 보기에 예쁘고, 지식을 얻기에 탐스럽다.’ 히브리어에서 열매가 먹음직스럽다고 말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맛있게 생겼고(좋고) 생김새가 예쁘다’ 고 표현한다. 아담의 아내의 생각에는 한 가지 중요한 문구가 첨부되었다. “지식을 얻기에 탐스럽다.” 여자의 관심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소망이었지, 그것을 먹고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열매를 먹고 얻은 지식은 벌거벗은 것을 남에게 보이면 수치스러운 것이며 또한 남이 벌거벗은 것을 쳐다보아도 창피한 것이라는 예의이다.
우리의 상황에서는 별로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초기 유대교 문헌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예법(규범) 중의 하나는 합당한 이유 없이 옷을 벗지 말라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나이(13세)가 지나면 적어도 준수해야 할 사항이다. 초기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엣세네 공동체의 규례에 이와 같은 조항이 나온다. ‘저마다 그의 이웃 앞에서 인간적인 이유 없이 벌거벗고 걸은 자는 육 개월 벌받는다. … 자기 옷 밑으로 손을 꺼내며 몸을 드러내 보이면 삼십 일 벌받는다’(단합체의 규례 8,13-14).
처음에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벗고 있었어도 서로 창피하지 않았다(창세2,25)고 하였으나 지식을 얻은 후에는 그것이 창피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교훈적인 이야기이다. 하느님의 지식의 나무에서 사람은 규범을 배운다는 예증을 알려주는 것이다.
뱀신
여자와 지식의 나무와 뱀이 등장하는 것은 고대 바빌로니아 문화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몇몇 원통형 인장에 그려진 그림에서 이러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세계에 ‘좋은 나무의 주(主)’ 라는 수호신이 있다. 닌기쉬지다라고 불리는 이 신은 뿔 달린 두 뱀을 상징으로 하며 개인이나 가문의 수호신으로 저승선 신이다. 수메르 신화 ‘거룩한 도시 딜문’에서 닌기쉬지다는 ‘팔을 치켜드는 새싹여신’을 그의 아내로 취한다. 또 다른 신화 ‘인안나의 저승 여행’에 의하면 닌기쉬지다는 포도주 여신이 저승에 내려가 6개월 있는 동안 배우자로 선택된다. 뱀을 표상 하는 닌기쉬지다는 치유의 신으로 억울하게 죽어 저승에 내려온 죽은 자들의 혼을 달래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서로 꼬고 있는 두 뱀이 치유의 신으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 전해졌으며, 로마의 황제 트라야누스(서기 98-117년)의 동전 이면에도 나타난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병원이나 약국의 마크로 두 뱀의 모양이 사용된다. 아담과 그의 아내와 열매 이야기에 뱀이 등장하는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한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바꾸어 다시 쓴 내용이다. 즉, 에덴동산의 뱀은 수메르 신화의 닌기쉬지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에덴동산 이야기에 그 잔여를 보여주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야붸 하느님이 뱀에게 벌을 주며 말하는 대목에서 보인다. “너는 배로 기어다닐 것이다”(창세 3,14). 다시 말하면 그 전까지는 발로 걸어다녔다는 것을 암시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아내에게 “정말로 하느님께서 말했느냐?”라고 교묘하게 질문했던 뱀은 치유의 신인 뱀 신인 것이다.
교묘하다
창세기의 해석 책 창세기 미드라쉬 3,1에 ‘뱀이 교묘하다’ 라는 문장의 해석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뱀이 교묘했다.” “지혜가 많으면 분노도 많아진다. 지식이 많아지면 고통도 더해진다”(전도 1,18). 사람이 그의 지혜가 많아지면 그는 자신에게 분노를 더하게 되고 그의 지식이 많아지면 그의 고통도 더해진다. “뱀이 교묘했다”는 문구를 설명하는 구절로 전도서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즉,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뱀이 지혜의 근거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여자가 생각할 수 있게 알려주어 그녀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뱀이 지혜롭다는 특정한 경우(모든 뱀이 지혜롭다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의 내용이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나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을 늑대들 사이에 양을 보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뱀처럼 지혜로우며 비둘기처럼 온전하여라”(마태 10,16). 온전한 비둘기를 제물로 바치기 때문에 비둘기를 들어 말씀을 하신 것이며, 초기 유대교 문헌의 맥락에서 비교하여 이해하면 지혜로운 뱀은 바로 에덴동산의 뱀을 가리킨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다
열매를 먹은 여자와 그의 남편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나무 뒤로 숨었다. 왜 숨었느냐고 묻자 “내가 벌거벗었기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라고 아담은 대답한다. “두렵다”는 것은 당연히 하느님이 두렵다는 말이다. 벌거벗었기에 두려운 이유는 벌거벗은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사실 아담을 만들고 그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냈을 때 그들은 창피하지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벌거벗은 것은 창피하다는 지식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인용구로 그 첫 ‘증언’인 셈이다. “하느님의 두려움은 지혜의 시작이다”(잠언 1,7). 잠언의 이 문구처럼 사람이 지식의 열매를 먹고(즉, 지식을 얻고)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경우가 에덴동산에 처음 나오는 것이다. 지식의 나무를 알고 수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계명의 근본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지혜를 얻게 되는 첫 시작이라는 점이다.
선악을 아는 신들처럼 된다.
그런데 지혜를 터득하는 능력을 여자가 스스로 알아차린 것일까 아니면 뱀신이 여자를 유혹하여 알려 준 것일까? 처음에 하느님은 아담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고, 만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말을 여자가 뱀에게 전하자 뱀은 여자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뱀이 여자에게 한 말에는 거짓이 없다.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아신다. 만일 너희가 그것을 먹을 때 너희 눈이 떠지고 너희는 선과 악을 아는 신들처럼 된다는 것을”(창세 3,4-5).
뱀이 한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야붸 하느님이 아담과 하바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적에 하시는 말씀에서 판단할 수 있다. “자, 아담이 선과 악을 아는 우리들 중에 하나처럼 되었다. 지금 그가 그의 손을 뻗쳐서 생명의 나무에서도 또한 가져다가 먹고 영원히 살면 안되겠다”(창세 3,22).
뱀이 여자에게 전한 내용은 야붸 하느님이 하시는 말을 뒤바꾸어 약간 삭제하고 반복한 것이다. 아담과 하바가 죽어야 하는 운명은 하느님께서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셨기 때문이다. 사실 에덴동산에 영원히 살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영원히 살수 있는 존재들에게만 있다. 논리적으로 여자와 뱀의 대화에서 뱀이 속인 것은 없다. 오히려 더 자세히 알려주었다. 즉, 생길 일을 미리 알려준 선생 노릇을 한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지혜를 얻도록 길을 살펴준 착한 뱀신이다. 이래서 초기 유대교 문헌에 에덴동산의 뱀이 선생으로 혹은 지혜로운 자로 비유된다.
앞에서 읽은 창세기 미드라쉬의 ‘임금과 그의 아들’의 비유처럼 에덴동산의 뱀이 임금의 아들을 ‘악한 성향(심보)’이 되게 잘못 가르친 선생으로 나오지만, 아들의 나쁜 성향은 운명적이다. 홍수를 일으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후에 야붸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시는 사람 때문에 흙을 더 저주하지 않겠다. 사람마음의 성향은 어렸을 적부터 악하기 때문이다”(창세 8,21).
치유의 신 뱀이 여자에게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선과 악을 아는 신처럼 될 것이라는 ‘유혹’에 대해, 그녀는 ‘먹기에 좋고 보기에 예쁘고 지식을 얻기에 탐스럽다’라고 그녀의 마음을 서술한다. 뱀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녀는 ‘지식을 얻기에 탐스럽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우리는 눈으로 성서를 읽기에 책 안에 등장하는 하자의 억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뱀이 여자에게 대답하는 상황에서 그는 아마도 ‘안다’는 단어에 강세를 주어 말했을 것 같다. 직역하면 이러하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아실 것이다. 참으로 너희가 먹은 날에 … 너희는 선과 악을 아는 신들처럼 될 것이라고”(창세 3,5).
‘안다’는 2개의 동사구가 4문장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원래 하느님은 아담에게 열매를 먹지 말라고만 말했다. 뱀이 여자에게 가르쳐준 것은 열매를 먹으면 ‘선과 악을 아는 신들처럼 된다’. 즉 눈이 떠지는 지식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먹은 이유는 “눈이 떠지고 싶다”는 것이며 그 동기를 유발시킨 자는 뱀신이다. 에덴동산의 뱀은 선생이며 지혜를 터득하게 만든 착한 뱀이다(예수님의 말씀처럼).
뱀과 여자와 아담의 죄와 벌
그러나 뱀과 여자와 아담은 모두 넘어서면 안 되는 경계선을 지나갔으며 그에 해당되는 벌을 각각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여자와 아담의 경우는 분명하다. 여자는 금지된 물품을 탐내어 취하였고, 아담은 탐내어 취한 물건을 공유하였으니 공범죄에 해당된다. 뱀의 경우는 과연 무슨 죄에 해당될까? 뱀은 비밀을 누설한 죄이다. 열매를 먹으면 신처럼 사는 특권을 누린다는 사실을 여자에게 누설한 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화 가운데 ‘홍수 이야기’에 이러한 비밀 누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하도 불평불만이 많고 떠들어대기에 큰 신들은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없애려고 대홍수를 일으키자는 결의를 했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던 지혜의 신은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임금에게 이 비밀을 누설하는데, 본인에게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갈대로 엮은 담에 대고 말한다. 이 덕분에 인간은 홍수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의 비밀을 파악한 임금은 신처럼 영원히 사는 생명을 큰 신들에게서 선물로 받고, 인간의 종자를 보호하기 위해 산 넘어 바다 건너 저 먼 곳에 가서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에덴동산의 경우 신들의 비밀을 폭로한 뱀신은 이제 더 이상 서서 다니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기어다녀야 했고, 흙먼지가 그의 양식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뱀에게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너의 자손과 그녀의 자손 사이에 반목을 심어주겠다. 그가 네 머리를 짓밟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다”(창세 3,15)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네 임신의 고통을 늘려주겠고”(3,16), 아담에게는, “너는 고통스럽게 (일하여) 먹을 것이다”(3,17)라는 판결문을 낭독하신다. 창세기 미드라쉬 3,1에서 ‘뱀이 교묘했다’에 대한 설명문으로 전도 1,18의 구정을 입증하는 인용구로 사용하고 ‘사람이 그의 지혜가 많아지면 그는 자신에게 분노를 더하게 된다’ 라고 설명하는 랍비들의 해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담과 그의 아내가 지식을 습득하자 분노는 심해지고 고통이 더해진 것이다.
초기 유대교 관습에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족을 구성하는 나이를 지식을 얻는 나이라고 말한다. 초기 유대교 성문서인 미쉬나의 ‘선조들의 어록’에 의하면 나이 13세에는 미쉬나, 15세에는 탈무드를 배우고, 18세에는 결혼을 하고, 20세에는 직업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식이 충분히 생기는 나이를 결혼할 나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때부터 여자는 임신하는 고통이 많아지고 남자는 가족을 부양하는 노동의 고통이 늘어난다.
사해문헌의 한 단락에서도 볼 수 있다. ‘나이에 따라 계약의 법칙을 배우게 한다. 그들의 법령에 따라 자신에 교훈을 가지며 어릴 때 이렇게 십 년을 지낸다. 이십 세에 감찰을 받고 그의 가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참석하며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가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이십 세가 충분히 되지 않았으면 잠자리를 하여 알려고 여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는 토라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되며 재판의 청문회에 참여한다’(‘마지막 날의 규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나이는 단순히 결혼할 나이를 가리키는 것뿐 아니라, 적어도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거짓과 진실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이를 말한다.
에덴동산은 어디에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던 특권을 자발적으로 버린 아담은 그의 아내를 ‘살아있다’는 뜻인 ‘하바’라고 부르고 ‘모든 삶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벌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성문 입구에 활활 타는 불기둥과 문지기 수호천사를 세워두고 동산을 지키게 하였다.(뱀은 어디로 갔을까?)
(에덴동산은 사방이 담으로 둘러쳐진 막힌 공간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으며 거기에 문지기를 세워놓았을 것이다. 또한 그곳은 높다. 높은 산언덕 같다. 그러기에 그곳에서 네 강줄기가 흘러 내려온다고 말한다. ‘에덴에서 강이 나오 거기에서 갈라져서 네 줄기가 되었다.’ 초기 유대교 묵시문학 가운데 에덴동산으로 여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덴동산으로 가기 위해 마차를 타고 불기둥이 수없이 있는 많은 다리를 지나간다. 동산에 가까이 갈수록 눈에 쌓이게 된다. 즉,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광경이다.)
아담과 하바를 거룩한 동산 밖으로 내보낼 때 동쪽으로 쫓아낸다. 왜 동쪽일까? 당연하다. 에덴동산의 출입구가 동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지기를 세운 입구는 동쪽인 것이다. 거룩한 공간의 구조로 동쪽에 입구가 있는 곳을 찾으면 알 수 있다. 에덴동산과 가장 비슷한 환경의 공간 구조는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높은 산 위에 위치하며, 네 물줄기는 키드론 계곡으로 흐르는 수로를 가리키는 것이고, 동쪽 입구는 성전 입구가 실제로 동쪽이었다.
또한 서기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로마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함락하여 성전에서 약탈해간 물품들을 부조한 그림에 메노라(일곱 등잔의 등잔대)를 군인들이 들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유대인에게 메노라는 생명의 나무 혹은 지식의 나무로 비유되어 알려진 등잔대이며, 금으로 만든 메노라를 성전에 놓았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생명의 나무가 있는 것이다.
안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아담과 하바의 첫 이야기는 아담이 하바를 알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창세 4,1). 이 구절은 ‘안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이다. 마치 용례사전의 인용문과도 같다. 히브리어의 ‘안다’는 동사를 남․여 사이에 안다라고 사용될 경유에는 남녀가 잠자리를 해서 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단순한 성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로 ‘안다’를 사용하는 거이 아니라, 남녀가 잠자리를 하여 알고 임신하며 자식을 낳은 의무를 모두 포함하여 ‘남자가 여자를 안다’는 뜻이다(적어도 성서 히브리어와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그렇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이사야서를 그 경우로 들 수 있다.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하는 말이다. “보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의 지식으로 악을 물리치고 선을 택할 때 그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며 그 청소년이 악을 물리치고 선을 택하는 것을 알기 전에 네가 혐오하는 저 두 왕의 땅은 버림받을 것이다”(이사 7,14-16).
여기에서 임마누엘은 앞으로 태어날 히즈키야를 가리키며 히즈키야가 선과 악을 선별할 나이가 되기 전에 두 임금이 모두 사라진다는 말이다. 두 임금은 아하즈의 아버지 요탐과 그의 할아버지를 가리킨다. 요탐은 히즈키야가 9살 때 죽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히즈키야가 19세 때 죽는다(“성서와함께‘ 98년 6월호 참조). 이처럼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적어도 결혼할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바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의 나이는 이제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야붸에게서 사내를 얻다
아담이 하바를 알고 임신하여 카인을 낳았다. 그러나 “나는 야붸에게서 사내를 얻었다”(4,1)라고 하바는 말한다(우리말로는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옳은 것 같다). 하바가 아담에게서 아들을 낳고 하느님에게서 사내를 소유하였다 라고 말하는 뜻은 무엇일까? 물론 ‘카인’이라는 이름 풀이를 하기 위해 ‘사다, 얻다, 소유하다’ 는 동사(카나)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왜 ‘야붸 하느님’에게서 일까?
고대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고대 근동의 법에 일반적으로 첫 번째 소출은 주인에게 속한다(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느님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맏배를 신전에 바치는 관습이다. 첫 번째 자식은 하느님/주인께 속하는 것이다. 남종의 아들이 주인의 소유가 되어 상속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경우를 아브람과 다메섹의 엘리에제르 이야기에서 읽어본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에게 방패이며 네 보상은 매우 많다.”아브람은 대답한다. “야붸여, 당신은 무엇을 저에게 주십니까? 저는 무자식 팔자로 가며 제 집안 상속자 자식은 다메섹 엘리에제르입니다”(창세 15,1-3). 엘리에제르는 아브람의 남종의 아들이며 그에게 아브람의 법적 상속권이 있음을 알려준다. 만일 주인에게 상속자가 없을 경우 남종의 아들이 법적으로 상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바는 남종이 시민(자유인)의 딸과 결혼하는 경우이다. 그녀의 첫 번째 아들은 남종의 주인에게 속한다. 이것을 하바의 상황에 비유하면, 야붸 하느님은 주인이고 아담은 남종이며 하바는 시민의 딸로 남종과 결혼하는 경우이다. 그러니 그들의 첫째 아들은 당연히 야붸의 소유가 되며 주인집에 머물러 있어야하는 상황이고 부부가 쫓겨난(해방된) 신분에서도 그 아들의 소유권은 여전히 주인에게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나는 사내(아이)를 야붸에게서 샀다/얻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여 말하면 하바는 시민의 딸이며 아담은 종이다(그러나 아담은 하느님의 종이다).
하바가 야붸에게서 사내를 샀다면 무엇을 주고 샀겠느냐?(공짜는 아니겠다.) 여자가 비록 자기의 아들이라도 일단 하느님에게서 속한 아들을 다시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필요할까? 아마도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네가 네 남편을 원하지만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창세 3,16)라는 문장이다. “네가 네 남편을 원하지만”의 문장에서 ‘원하다’의 보어가 빠져있다. 적합한 목적어구를 삽입하여 다시 적으면, 여자가 그녀의 남편을 ‘남편의 상대로 도움이 되기를’(창세 2,20) 원하겠지만 실상 남자는 그녀를 다스린다. 남자는 그녀의 주인이 되기 바란다.
이 구절에 대한 창세기 미드라쉬를 보자. ‘고관 집의 어떤 딸이 미천한 거지와 혼인하였다. 그는 (축복을 받기 위해) 현자에게 와서 점토 받침대에 서있는 금 촛대를 선물로 주며 이 구절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그 해석은 비록 여자보다 훨씬 못한 신분이지만 거지는 귀족 출신의 여자를 다스리는 권한을 가졌다는 거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가 가장(家長)이라는 뜻이다.
사실 유대교 전통에서 자식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지 못하고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 남종과 시민의 딸이라는 비유로 다시 살펴보면, 비록 어머니가 시민의 딸이라도 종인 아버지의 이름이 그들의 자식들의 성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상대로 도움을 찾아 하바를 만들어내셨지만, 지식을 얻고 나니까 남편과 아내 사이는 상대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로 전락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식이 많아지면 자기에게 분노도 많아진다는 말이 맞다.
또한 미천한 거지와 고관 집 딸의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거지는 아담으로 그 딸은 하바로 비유한 것이며, 아담은 점토로 만들어졌기에 흙으로 돌아가는 신세에 불과하지만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어져 그 값어치는 훨씬 높다는 말이다(고대 이스라엘 지역에서도 뼈를 이용하여 단추나 장식품 또는 놀이용품 등을 만들었다. 사람 뼈로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초기 유대교 랍비들의 우스개 소리로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어졌기에 ‘소리’가 많이 난다는 말이 있다. 뼈를 단지 속에 넣고 흔들어 보면 얼마나 시끄러운 소리가 나느냐, 그러나 흙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우스꽝스러운 야담이다.
탐스러운 도구
하바는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운 열매를 먹고 지식인이 되었으며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아담과 잠자리를 하고 카인과 헤벨(아벨)을 얻은 것이다. 그 아들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 탐내지 말라는 것을 먹고 탐내면 안된다는 계명을 배운 것인데, 하바는 그 아들들에게 과연 그 율법을 가르쳤겠는가? 두 형제가 하느님께 드린 제물 가운데 헤벨의 제물만 들여다보신 하느님에게 카인은 몹시 분통이 터졌으며 자기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자기 동생을 밀쳐 죽게 하였다. 헤벨은 침묵을 지켜 하느님을 옹호하였으나 카인은 남의 것에 탐을 내어 결국 살인의 죄를 짓게 되었다는 말이다(“성서와 함께”98년10월호 참조).
유대교에서는 토라를 ‘탐스러운 도구’라고 부른다(신약성서에 ‘율법’이라고 번역하는 단어가 바로 ‘토라’이다. 토라는 좁은 의미로 율법이지만 하느님의 말씀/가르침 등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단어도 토라 이다). 서기 135년에 순교한 랍비 아키바는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어졌기에 사랑 받는다’고 하며, ‘탐스러운 도구가 사람들에게 주어졌기에 이스라엘은 사랑 받는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잠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탐스러운 도구는 하느님의 가르침(토라)이라고 부연한다(“선조들의 어록”, 3,14).
하바가 탐스러운 도구를 획득하여 그녀의 자식들을 과연 잘 가르쳤느냐는 질문이다(십계명 5조항이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식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중하여야 된다’는 율법이다. 즉, 자식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을 중히 여기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배워야 한다는 계명이다). 둘 중에 하나는 잘 배웠고 다른 하나는 지혜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카인은 그의 아들을 잘 가르쳤기에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배워 훗날 지식의 징표로 선택되었다. “하노크(에녹)는 하느님과 함께 온전했으며 대대로 지식의 징표로 선택되었다”(집회 44,16).
아담과 하바가 먹은 열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따서 먹은 열매는 무화과라고 유대교 전승에 말한다. 서양 그림에 사과로 나오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라틴어에서 유래한 발상이다. 라틴어로 malum(사과)은 ‘악하다’는 뜻도 있기에 일종의 중의법(double entendre)으로 그림에 표현된 것이다.
복음서에 전하는 일화 가운데 무화과나무 열매 이야기가 나온다(마태 21,18-21). 허기지신 예수님은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가서 열매가 아직 열리지 않는 것을 보시고 이 나무에 다시는 열매가 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하신다. 자기가 배고프다고 열매가 아직 달리지 않은 나무에 저주를 하는 것은 자기의 분노를 참지 못한 행위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운 무화과 열매를 먹고 지혜가 쓸데없이 많아져 근심만 늘어난 바리사이들을 두고 하신 비유이다.
허기가 나서(즉, 지식을 얻기 위해)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즉, 이른 아침부터 길가에 서서 토론하는 바리사이에게) 가까이 갔는데 그 나무에는 열매(지식)는 없고 어설픈 잎사귀만이 있다(즉, 그들의 가르침은 열매를 맺기에는 퍽 미흡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믿음을 갖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 무화과나무에서 일어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라는 가르침은, 제자들이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예수처럼 바리사이와 논쟁하여 예수가 메시아임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탐스러운 도구(토라)를 탐내어 얻은 지식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이다.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2)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처음’과 토라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이것은 요한 1,1의 인용구이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한 설명은 랍비들의 성서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랍비들의 성서해석은 다양하지만, 항상 성서 안에서 그 결론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느 한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성서구절을 인용하고 그 인용한 구절을 보충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구절을 인용하는, 마치 상자 속에 또 상자가 있고 그 속에 또 상자가 있는 상자 같다. 이 모든 상자들이 때로는 각기 모양도 다르며 색깔도 다르지만, 때로는 서로 엇비슷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랍비들이 선택한 인용구에서 멋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세기 미드라쉬 1,1을 읽어본다.
토라는 말한다 : ‘나는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의 일하는 도구이다.’ 사람들이(토라를)실용하는 것을(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임금이 왕궁을 지을 때 그는 그 자신의 기술로 짓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의 기술로 짓는다. 더군다나 건축가는 자기 자신의 머리로 짓는 것이 아니라, 방들과 문들을 어떻게 배정하는지를 알기 위해 계획서와 도면을 사용한다.
이처럼 하느님은 토라를 참고로 하여 세상을 만들어내셨다. 토라는 말한다 :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내셨다”(창세 1,1). “처음”은 토라를 가리킨다 : “주(主)는 그분의 길 처음에 나(지혜)를 소유하셨다”(잠언 8,22).
위의 설명은 처음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어떻게 창조하셨느냐에 대한 해석이다. 전지전능하신 주께서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설명하면 그만이겠지만, 랍비들은 질문을 했던 것이다. 비록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도 세상을 어떻게 만드셨을까?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그들의 질문이다. 그 설명을 돕기 위해 비유가 등장한다. 비유는 누구에게나 가장 평범하게 이해될 수 있는 방법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던 것을 어느 건축가가 집을 짓는 과정으로 쉽게 설명한다. 건축가의 눈에 비추어진 청사진이 바로 토라이며, 이 토라를 참조하여 세상을 만들고 질서를 이루게 하였다는 설명이다. 하느님께서 토라를 보고 토라의 의견을 참작하여 세상의 정의와 공의를 세운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토라가 존재했음을 시사하며, 그 토라는 하느님께서 만드셨다고 설명한다. 이를 입증하는 문구는 잠언에서 찾아진다. “야붸는 그분의 길 처음에 나를 소유하셨다. 그분이 그 옛날 일하시기보다 더 옛날에”(잠언 8,22-23)처럼, 창세 1,1의 “처음”이라는 단어를 같은 맥락에서 적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이 사용된 단락을 요한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다 :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1,1). 요한 1,1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위에서 인용한 창세기 미드라쉬이다. 요한 복음서의 “말씀”은 랍비 문헌으로 생각하면 토라에 해당된다. 말씀/토라는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이론이며 이를 입증하는 문구가 바로 잠언 8,22이다.
참된 빛
요한 1,1에 이어 대두되는 논조는 빛과 어둠의 대조이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1,5). 창세기 미드라쉬도 또한 빛과 어둠의 대조를 창세 1,1의 해석에서 언급한다(실상 빛과 어둠의 대조는 창세 1,3의 해석에 나온다).
랍비 유다 벤 심온은 인용했다 : “그분은 깊은 것과 비밀을 드러내신다”(다니 2,22). “깊은 것”은 지옥이며, 이렇게 쓰여 있다. “그는 그림자가 거기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며, 저승 깊은 곳에 그녀의 손님이 있다는 것을”(잠언 9,18). “비밀”은 에덴동산을 가리킨다. 이렇게 쓰여 있다. “피신처와 그늘을 위해”(이사 4,6).
다른 해석 : “그분은 깊은 것을 드러내신다”는 사악한 자들의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쓰여 있다. “화를 입을지어다. 주(主)로부터 그들의 음모를 숨기기 위해 깊은 곳을 추구하는 자들이여”(이사 29,15). “그는 어둠에 무엇이 있는지를 안다”(다니 2,22). 이것도 역시 사악한 자들의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쓰여 있다. “그들의 일은 어둠에 있다”(이사29,15).
“빛은 그분과 함께 머문다”(다니 2,22)는 의로운 자들의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쓰여 있다. “빛은 의로운 자를 위해 비친다”(시편 97,11).
세루가야 출신의 랍비 아바는 말했다. “빛이 그분과 함께 머문다”는 왕가(王家)의 메시아를 가리킨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운 도구(토라)는 하느님께서 소유하고 계셨던 것이며(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그 토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참된 진리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복음이 요한 복음서의 서두이다.
랍비 유다 벤 심온은 말했다. 세상이 창조되는 시작부터 “그분은 깊은 것과 비밀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쓰여 있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내셨다.” 그러나 어떻게 하셨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설명하느냐? 다른 곳에 : “하늘을 휘장처럼 펼친다”(이사 40,22). “그리고 땅.” 이 또한 설명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설명하느냐? 다른 곳에 : “왜냐하면 그분은 눈(雪)에게 말했다 : 땅위에 내려라”(욥 37,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 빛이 있어라”(창세 1,3). 이것도 역시 같은 방식이다. 어디에서 설명하느냐? 다른 곳에 : “빛을 옷처럼 덮으신 분이시여”(시편 104,2).
위의 설명은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기에 어둠과 빛의 근원을 밝히신다는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천지의 창조주께서 악을 심판하며 악을 배척하고 빛과 함께 머문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지만 어떻게 만드셨는지에 대해서는 창세기에 전혀 설명되지 않았기에, 다른 성서구절을 그 보충 설명으로 인용한다.
실상 중요한 부분은 “빛이 그분과 함께 머문다”는 구절이다. 왕가의 메시아로 “빛이 그분과 함께 머문다”는 주제가 요한 복음서에서는 “사람들의 빛”이라는 문구로 도입된다(1,4). 그 빛인 메시아는 세상에 오신 나자렛의 예수로, 그가 바로 참된 진리의 빛(1,9)이라는 해석이다(왕가의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를 뜻한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참된 진리의 빛”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연유는 창세기 미드라쉬 1,1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 내셨다”는 구절의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위의 미드라쉬를 이어 계속되는 단원이 ‘진리’에 대한 설명이다.
랍비 이스학은 아래 구절로 (그의 강론을) 시작했다 : “당신 말씀의 처음은 진리입니다. 당신의 의로운 모든 공의는 영원합니다”(시편 119,160). 랍비 이스학은 말했다. 세상의 창조 바로 그 시작부터 “당신 말씀의 처음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내셨다.” 그런데 “주 하느님께서는 참된 진리의 하느님이시다”(예례 10,10).
그러므로 “당신의 의로운 모든 공의는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위해 공표 하시는 단 한 가지 결정이라도, 그들은 당신 판단의 의로움을 확인하며 믿음을 받아들인다.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며, 두 권한이 토라를 주었거나 두 권한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고 신(神)들이 말씀하였다”라고 쓰여 있지 않고 “처음에 하느님이 만들어냈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서 두 권한은 선(善)한 권한과 악한 권한을 뜻한다. 랍비 이스학의 논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진리였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성서구절로 시편 119, 160을 인용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하느님은 참된 진리의 하느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도 말씀이 빛이 되신 분은 처음부터 참된 진리의 빛이라고 규정한다. 랍비 이스학은 하느님이 참된 진리의 하느님임을 논증하기 위하여 간단한 문법적인 요소를 활용한다.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말씀하시는 단원의 첫 문장을 인용한다. “하느님이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즉, ‘말하다’는 동사가 단수 3인칭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또한 창세 1,1에서도 ”하느님이 만드셨다“는 문장에서도 동사가 단수 3인칭임을 확인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참된 빛’이 그들이 기다리던 왕가의 메시아라고 논증한다. 초기 유대교 문헌에 의하면 히브리 성서에서 메시아의 문구를 찾아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하여 해석하였다. 민수기의 한 구절이 메시아 문구로 자주 인용되었다(24,17). 별이 야곱에서 길을 내고 지팡이가 이스라엘에서 일어날 것이다.
히브리 성서의 맥락에서 읽으면, 별과 지팡이는 왕권이나 통치권을 상징한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은 것을 상징한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은 것을 지시하는 고유명사이다. 서기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독특한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았던 단합체가 남긴 사해문헌에 의하면, 별은 그들 공동체의 해석자이며 지팡이는 대표자라고 풀이된다. 그리고 그가 “다윗의 쓰러진 초막을 세울 것이다”(아모 9,11)라고 전제했다(‘새 계약의 규례’ 7,15-950).
새싹
한편 유대교 문헌에서 메시아 문구로 흔히 등장되는 단어는 ‘새싹’이다. ‘새싹’이 메시아의 이름이 된 것을 즈가 6,12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사람을 보아라. 그의 이름은 새싹이다. 그가 주(主)의 성전을 지을 것이다.” 다윗 가(家)의 새싹에 대한 예언은 예레미야서 에서도 나온다.
“보아라, 주의 말씀이시다. (앞으로) 올 날에 나는 다윗에게서 새싹을 세울 것이다”(23,5). “그날 그때에 나는 다윗에게서 정의의 새싹을 돋아나게 할 것이다. 그는 이 땅에 공의와 정의를 행할 것이다”(33,15). 이와 같이 ‘새싹’이 다윗 왕가의 메시아 이름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이사 11,1에 의거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어린 가지가 나오며 그 뿌리에서 싹이 나온다.
사해문헌의 이사야서 해석에 의하면 “그 해석 : 마지막 날에 일어날 다윗의 새싹에 대한 것이다”라고 천명한다. 이처럼 다윗 왕가의 줄기, 새싹 등은 서기 1세기에 유행했던 메시아 문구이다.
복음서에는 메시아에 대한 히브리 성서의 인용구가 여러 번 나오지만, 새싹이나 어린 가지와 같은 상징어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이러한 상징어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요한 묵시록의 한 구절이다(22,14․16). 그러나 성서 번역을 달리하기에,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고 성문을 통해서 성세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빠는 자는 행복하다 …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이것들을 교회 앞에서 증언하게 하였다. ‘내가 바로 다윗의 뿌리이며 그의 줄기이고 빛나는 새벽 별이다.’
한글 번역 성서에는 ‘그의 줄기’라고 하지 않고 ‘그의 자손’이라고 번역되었다. ‘줄기’를 뜻하는 단어는 물론 ‘자손, 혈통’의 뜻도 포함된다. 그러나 메시아 문구를 염두에 두면 ‘자손’보다는 ‘줄기’가 그 맥락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요한 묵시록의 이 부분을 히브리어로 옮기면 이사 11,1의 단어들이라는 점이다. 즉 이사 11,1의 인용구라고 말할 수 있다. 이사 11,1이 이새의 ‘줄기’ 와 그 ‘뿌리’를 가리킨다.
한편 위의 요한 묵시록의 인용문에서 ‘생명 나무’는 에덴동산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서기 1세기에 유행했던 유대교 묵시문학 작품 가운데 ‘숨겨진 지식의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권리를 추구하는 주제가 많았다. 서기 132-135년에 일어난 유대인들의 제2차 독립항쟁운동의 선두자였던 바르 코시바를 그들의 메시아로 인정하고, 민수기의 메시아 문구에서 별(코가브)을 인용하여 그를 바르 코크바라고 불렀던 랍비 아키바도 ‘숨겨진 지식의 에덴동산’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전한다. 랍비 아키바의 토라 지식은 방대하고 자세하여 서기 220년에 완성된 유대교의 경전인 미쉬나의 근간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랍비 아키바 같은 사람은 토라의 지식을 바른 도구로 사용하여 세상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는 모범이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지식을 얻기에 탐스러운 도구(토라)는 하느님께서 소유하고 계셨던 것이며(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그 토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참된 진리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복음이 요한 복음서의 서두이다.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3)
아담의 성전과 다윗이 새싹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 심부름꾼(천사)을 너보다 먼저 보내니 그는 네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라”고 기록된 대로, 요한 세례자가 광야에 나타나 죄 사함을 위한 회개와 세례를 선포했다(마르 1,1-4).
위 본문은 구약성서의 인용문과 그에 대한 해석이다. 구약성서의 인용문은 출애 23,20 ; 말라 3,1 ; 이사 40,3(70인역)을 엮은 것이다. 인용문에서 ‘심부름꾼’(즉, 천사)은 ‘요한 세례자’를 가리킨다고 복음서 필자는 해석한다. 마태오복음서에는 보다 더 분명히 설명한다. “그 무렵에 요한 세례자가 나타나--- 이 사람을 두고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3,1-3). 따라서 요한 세례자가 광야에 나타나 죄사함을 위한 회개와 세례를 선포한다는 성서적 근거를 “주님의 길을 닦고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한다”는 문구에서 찾는 것이다.
즉, 구약성서의 내용을 현 상황에 도입하여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성서해석 방법은 신약성서의 형성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 사해문헌에서 쉽게 읽을 수 있다. 아래에 번역한 ‘마지막날의 성서해석(미드라쉬)’을 읽어본다.
“(내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자리를 정하여 그들을 심어 그 아래에 정착하여) 적이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 있었던 것처럼 죄의 자식이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판관들을 세워 준 때부터 그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2사무 7,10,-11).
이것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이 지으실 집이다. (모세의) 책에 이렇게 쓰여 있다. “주여, 당신의 손으로 세우신 성전에서 야붸는 영원히 지배하실 것입니다”(출애 15,17-18).
이것은 집(성전)이며 거기에 (부정하거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거나) 암몬인들이나 모압인들이나 사생아나 외국인의 자식이나 이방인이 영원히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그분의 거룩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광이) 영원히 있으며 그 위에 항상 드러난다. (이스라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성전을 이전에 허물어뜨린 것처럼 낯선 자들이 더 이상 그것을 허물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아담(사람)의 성전을 지을 것을 말한다.
사무엘서 하권에서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지을 하느님 ‘야붸의 집’을 이야기하지만 그 구절에 대한 엣세네파의 해석은 마지막 날에 세워질 하느님의 집을 가리킨다. 출애굽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그 확실성을 입증하고 있다. 하느님의 집(성전)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열거하며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이유도 설명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집은 마지막 날에 세워질 성전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엣세파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들은 초기 유대교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부정(不淨)한 사람(예를 들어, 불구자나 월경 중에 있는 여자 등)이나 사생아 또는 이방인의 출입을 금했다. 이러한 규례에 대한 엣세네파의 설명에 의하면 성전 안에는 거룩한 자들, 즉 천사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엣세네파들이 주장하는 성전은 그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사람의 온갖 부정 중에 하나라도 오염된 사람은 이 회 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아래와 같은 것에 오염된 사람은 공동체 중에 그의 지위를 절대로 유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살(肉)이 오염됐거나 팔 다리가 불수인 사람, 절름발이, 혹은 장님이나 귀머거리, 얼간이, 눈에 보이게 그의 살에 결점이 있는 자, 비틀거리는 노인도 공동체 중에 지위를 유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이름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중에 참여하러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이 그들의 공동체에 있기 때문이다(마지막 날의 규례 2,4-9).
초대교회 당시 예배 모임에 여자가 머리에 베일을 써야하는 이유는 천사들 때문이라고 말하는(1고린 11,10) 상황을 위의 규례에서 짐작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을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복음서에 전해진 많은 이야기에 예수께서 수많은 불구자나 환자들을 치유하여 초대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였다는 점이다. 엣세네파 공동체나 초대교회는 그들의 공동체를 예루살렘 성전처럼 모두 거룩한 모임의 장소로 구분했다.
유대교 전통에 유대인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속죄 일에 반드시 성전에 가서 속죄 의식을 행하고 사제의 축복을 받아야 하느님의 명부에 기록될 수 있다고 하였다. 누구든지 본인의 전말서(顚末書)를 하느님 앞에 내야 했다. 전말서는 마지막날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기 위해 본인의 선악을 보고하는 결산서이다.
아가비야 벤 마하랄렐은 말한다. 세 가지 것들을 쳐다보아라. 그러면 죄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훗날 누구 앞에 전말서를 내는지 알라. 네가 어디에서 왔느냐? 악취 나는 몇 방울에서. 네가 어디로 가느냐? 흙과 구더기와 벌레가 있는 곳으로. 훗날 누구 앞에 전말서를 내느냐? 왕들 중의 왕,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시니 분 앞에(선조들의 어록 3,1).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적어도 속죄 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전말서를 내고(즉 회개하고) 사제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명부에 기록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만일 본인이 직접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이면 그 해에 전말서를 낼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성전에 들어가서 내면 그전 해의 빚은 삭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평생 성전에 들어 갈 수 없는 불구자라면 그는 영원히 하느님 명부에 기록될 수 없으며 마지막 날의 심판에 그의 이름은 불리워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운명이다.
예수께서 불구자나 병자들을 치유하신 의도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진다. 초대교회의 거룩한 공동체에서는 절름발이, 장님, 귀신들린 병자, 중풍환자 등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도 하느님에게 전말서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배려한 것이다. 이처럼 전혀 다른 예수의 활동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에 격심한 논쟁을 일으키게 했다. 바리사이파 중심의 초기 유대교에서는 많은 랍비들의 논박 끝에 회당의 문이 불구자들에게도 열리게 되었다.
엣세네파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혀진 성전으로 여기고 그들 공동체가 성전이라고 가르쳤다. 이를 ‘아담의 성전’이라고 불렀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담(사람)의 성전’은 사람이 지은 건물로서의 성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아담)이 일원인 공동체의 거룩한 모임을 말한다. 바울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성전도 이러한 교인들의 모임 공동체를 가리킨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고린 3,16). “여러분들이 건물이라면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입니다”(에페 2,20).
또한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고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사람(아담)의 손으로 만든 이 성전을 허물고 사람(아담)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겠다”(마태 26,11). 흔히 예수의 이 말씀은 서기 30/33년경에 예수께서 서기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측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아담)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바로 아담의 성전을 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혹은 모르는 척한) 바리사이파들은 아담(사람)의 성전이 사람들이 모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고 대사제에게 고발했던 것이다.
바리사이와 사제들이 유대인의 의회에 예수를 고발했던 고소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전을 허문다고 발설했다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하느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세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마태 26,61). 예수께서는 답변(설명)을 하지 않았다. 대사제는 예수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까?” 예수께서 답변하였다. “내가 그입니다 ---”(마르 14,62 다른 복음서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다).
앞에서 인용한 ‘마지막 날의 성서해석’은 2사무 7,10-14의 해석이다. 첫 부분은 ‘아담의 성전’에 대한 내용이며 두 번째 부분은 메시아에 관한 성서해석이다.
“야붸께서 너에게 이야기하셨다. 그분이 너를 위해 집(안)을 세우시겠다고. 나는 네 다음의 자손을 세우겠다. (영원할 때까지) 그의 왕국의 왕좌를 확립하겠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며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될 것이다”(2사무7,11-14).
그는 다윗의 새싹이며 그는 토라 해석 자와 함께 서 있을 것이고 마지막 날에 시온에서 (다스릴 것이다.) 이렇게 쓰여있다. “내가 다윗의 쓰러지는 초막을 일으켜 세우겠다”(아모 9,11). 그것은 다윗의 쓰러지는 초막이며 그는 일어선 (즉 부활한) 후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다.
사무엘서 하권에서 전하는 내용은 다윗이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의 집을 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느님은 다윗을 위해 그의 집 즉 집안(왕가)을 세워 줄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건물로서의 ‘집’이나 자손을 세울 ‘집안’은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인 ‘베이트’이다. ‘야붸의 집’과 ‘다윗의 집(안)’에 대한 계약인 것이다. 즉, 다윗의 자손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메시아 문구로 이해되는 부분이며 하느님과 다윗 왕과의 아들사이에 맺는 계약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문구가 시편 2,6-7의 구절이다.
“내가 내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 위에 세웠다 ---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이 문구는 초기 유대교 문헌에 메시아 문구로 항상 언급된다. 복음서에도 예수께서 요한 세례자에게서 세례를 받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마태 3,17 ; 마르 1,11 ; 루가 3,22). 이 아들이 바로 다윗의 ‘새싹’이다. 다윗의 새싹은 메시아를 뜻한다.
엣세네파에 의하면 다윗의 새싹이 토라 해석 자와 함께 마지막 날에 서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토라 해석자는 토라를 추구하고 해석하는 사제를 말한다. 엣세네파에 의하면 그들에게 도래하는 메시아는 둘이다. 하나는 다윗의 새싹인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 다른 하나는 토라의 해석자인 사제 메시아이다. 그를 아론의 메시아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왕으로서의 메시아이며 아론의 메시아는 대사제로서의 메시아를 뜻한다.
(단합체에 들어온 사람들은) 토라의 모든 조언에서 그들 마음이 강퍅한 대로 걸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예언자와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아들이 올 때까지 단합체 사람들이 배우기 시작했던 첫 번째 법령으로 심판 받을 것이다(단합체의 규례 9,9-10).
메시아가 올 때까지는 모세의 율법에 준한 심판을 받지만, 메시아가 온 후에는 다른 법령에 의하여 심판 받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복음서와 비교하면 메시아와 함께 오는 예언자는 요한 세례자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요한의 말처럼 그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 뒤에 오시는 분(메시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내용은 ‘단합체의 규례’에서 전거하는 처음 법령과 다음에 올 법령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 날에 두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전승은 즈가리야서의 해석에 기인한다. “나 만군의 야붸는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이 새싹이며 그이 밑자리에서 새싹으로 자라나 야붸의 성전을 지을 것이다. 그는 위엄을 갖추고 왕좌에 앉아 다스릴 것이다. 그의 왕좌 옆에 한 사제가 있을 것이며 그들 둘 사이에 평화의 조언이 있을 것이다’”(즈가6,12-13).
신약성서에서도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유대인들의 왕’ 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대사제로서의 메시아 칭호도 받았다. “(대사제의) 영광스러운 자리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히브 5,5). 마지막 날에 메시아가 시온에서 다스릴 것이라는 묵시관이다. “내가 내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위에 세웠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시편 2,6-7)는 메시아 문구처럼 하느님의 아들은 시온 산과 관련되어 나온다.
‘다윗의 쓰러지는 초막’은 토라를 뜻한다. 초막은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막 생활을 하고 살았던 장막을 가리킨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석판을 장막에 간직하였기에 장막/초막은 토라를 상징하는 단어이다. 다윗의 새싹은 또한 토라 해석자처럼 토라를 일으켜 세우는 메시아라는 뜻이다. 토라를 일으켜 세우는 r가 일어선 후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다. 여기에서 ‘일어선다’는 그가 죽은 후에 다시 일어선다. 즉 부활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히브리어로 ‘일어서다’는 단어가 죽은 후에 일어서는 경우에 신약성서에서는 ‘부활하다’라고 흔히 번역한다. 엣세네파의 교리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메시아의 부활 후에 있다는 해석이다(엣세네파가 말하는 이스라엘은 그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과 비교하여도 그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주 예수께서(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하늘로 올라가시고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가서 사방에(복음을) 선포하였는데, 주께서 함께 일하시며 표징들을 따르게 하셔서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마르 16,19-20). ‘아담의 성전과 다윗의 새싹’ 이라는 내용을 해석한 ‘마지막 날의 성서해석’과 복음서에 전해진 예수의 심문 단락에서 ‘성전모독죄’와 ‘메시아의 시비’ 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엣세네파의 성서해석 방법과 복음서의 성서해석 방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4)
메시아의 이름과 다윗의 옥좌
아담과 하바의 이름
히브리 성서를 읽으면 인명이나 지명에 대한 설명이 자주 나온다 어떠한 맥락에서 이러한 이름이 생겼는지 혹은 어떠한 유래로 이러한 이름이 불리워졌는지에 대한 이름 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해석의 가장 초기단계는 이러한 이름 풀이에서 발견된다.
창조 이야기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고 하느님에게 벌을 받는 내용 가운데 아담이 받는 벌을 읽어본다.
“너는 흙(아다마)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콧등에서 흐르는 땀으로 빵을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창세 3,19). 그리고 부연하여 “너는 흙먼지이기 때문에 흙먼지로 돌아갈 것이다”(창세 3,19)라고 설명한다. 이 구절은 창조 이야기 앞부분에 나오는 아담을 만든 내용, 즉 ‘야붸 하느님께서 흙(아다마)에서 흙 부스러기로 아담을 만드셨다’는 구절에 대한 해석이다. ‘흙먼지’로 번역한 단어의 보다 사실적인 표현은 ‘거치른 흙먼지 같은 자잘한 흙 부스러기’이다.
이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담’은 ‘흙, 땅, 경작지’ 등을 뜻하는 단어 ‘아다마’와 비슷한 발음이며 그래서 흙이라는 소재가 사용되었고, 흙/땅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었다는 것보다는 흙/땅 표면에서 흙 부스러기를 모아 모습을 만들 수 있다는 구체성이 추가된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흙 부스러기가 된다는 객관적인 현상을 ‘아담’(사람)은 ‘아다마’(흙)로 돌아간다고 설명한 것이다. 인간 창조에 관한 많은 고대 신화 가운데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매우 사실적이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의 ‘아담’은 고대 바빌로니아 신화에 나오는 ‘아다파’라는 인물과 유사하며, 실상 아담 이야기는 흙/아다마와는 무관한 ‘아다파 신화’와 관련된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아다파/아답이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에는 아담이라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아담은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바라고 불렀다. 그녀는 모든 생명(하이)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창세 3,20). ‘하바’ 라는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에 대해 설명한 이 맥락을 창세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특정 이름을 정해주는 경우이다. ‘하바’는 ‘하야’(‘살다’)의 동명사형으로 ‘삶’ 이라는 뜻이다.
고대 근동 언어와 비교하면 하바는 아카드어의 ‘어머니’라는 뜻인 awa에서 파생된 고유명사라고 생각되며 야바/헤바트/하바는 히브리어 ‘하바’(삶)와 비슷한 발음이기에 ‘생명(하이)의 어머니’라고 이름 풀이를 한 것이다. 여신 ‘헤바트’는 아카드어 ‘아바’와 관련된 단어이다. 사실 창세기에서는 ‘삶과 생명의 어머니’라는 두 뜻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단얼ㄹ 찾아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름을 해석했던 고대 이스라엘의 선각자(先覺者)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초기 유대교 랍비들의 성서 해석에도 이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의 이름
서기전 3-1세기 팔레스티나에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도래가 큰 주제로 떠올랐다.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해 구원자인 메시아가 곧 올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전통적으로 알려진 다윗의 ‘새싹’이 과연 상징어냐 고유명사(쩨막흐 : 히브리어로 ‘새싹’이라는 뜻)냐, 혹은 다른 이름으로 알려주지/계시하지 않느냐? 등등.
그 한 예는 복음서의 기록에서도 읽을 수 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다가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안녕하세요(평화가 당신에게), 은총으로 가득한 이여, 우리의 주께서 당신과 함께”(루가 1,28). 마리아는 당황하며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일지 궁금해했다. 가브리엘은 다시 말한다. “참으로 보십시오. 당신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십시오”(1,31). ‘예수’는 히브리어로 ‘예슈아’이며, 이는 ‘구원, 구속’이라는 뜻이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처음에 말한 ‘우리의 주께서 당신과 함께’ 라는 뜻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녀가 알고 싶었다는 것은 마태오 복음에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이사야서의 인용문(7,14)이고 알려준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 해석은 ‘우리의 하느님은 그와 함께’라는 것이다”(마태 1,23). ‘우리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마태오)라고 이사야가 700년전에 예언했던 임마누엘은 바로 이 시대에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우리의 주께서 당신과 함께’(루가)라고 알려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당시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임마누엘)라는 이름을 가장 적합하게(즉 새롭게) 해석한 이름은 ‘구속하다. 구원하다’ 즉,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다’를 가리키는 ‘예슈아’라는 것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인 역사책에 기록된 서기전 3-1세기의 인물가운데예수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대사제권을 빼앗긴 오니아스의 형제 예수, 대사제과 된 가므리엘의 아들 예수, 대사제가 된 암메우스의 아들 예수, 대사제권을 빼앗긴 파베트의 아들 예수, 소동을 일으켜 처형당한 아나누스의 아들 예수, 티베리아스의 집정관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 도적단의 두목 사파트의 아들 예수 등등.
물론 예수 그리스도도 포함된다. 한편 초기 유대교 문헌인 탈무드에도 예슈아(혹은 줄여서 예슈)라는 이름과 관련된 문구를 찾을 수 있다: ‘예슈의 제자인 야콥이 와서 판테라의 아들 예슈의 이름으로 그를 치유한다고 말했다’: ‘판테라의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주문을 건다’ 등.
메시아의 이름
그러나 구원자로서의 예슈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아)로서의 예슈아는 다윗의 새싹, 즉 다윗 가문의 아들이어야 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그녀가 임마누엘을 잉태할 것이라는 계시를 전해 주고 그의 이름이 예슈아임을 정해준 다음에 나오는 문구에서 이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즉, 다윗의 가문에서 나온 아들이어야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천사는 천명한다. “그는 크게 되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주(야붸) 하느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아버지) 다윗의 옥좌를 주실 것이며 그는 아콥의 가문 위에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루가 1,32-33). ‘높으신 분’(엘리욘)은 ‘하느님’을, ‘야콥의 가문’은 ‘이스라엘’을 지칭한다. 엘리욘은 엘 엘리욘의 축약이며, 창세 14,18-20에서 아브람이 살렘의 왕이며 대사제인 멜키세덱에게서 축복을 받는 맥락에 의거한다: ‘하늘과 땅의 소유자 지고의 엘에게서 아브람은 복 받을 것입니다’. 루가복음서에서 엘리욘/‘높으신 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구속자 예슈아는 멜키세댁의 전승, 즉 대사제로서의 메시아/구속자라는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예시한다. 즉 엣세네파에서 거론하던 두 메시아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예수는 대사제 전승인 멜키세덱의 하느님 이름인 ‘높으신 분’/엘리욘의 아들이며 또한 다윗의 옥좌에 앉을 주/야붸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논리이다.
구원자로서의 예슈아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2세기 중반까지 세대에 관심이 많았던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이름을 추구했으며, 그는 영광의 옥좌에 앉을 것이라는 표제 문구가 생겼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일곱 가지의 것들이 창조되었다는 이론이며 이러한 논리는 이 시기 동안에 정립된 것이다. 이 부분은 탈무드에 두 군데, 창세기 미드라시와 다른 성서해석서 에도 몇 벌 기록된 잘 인용되는 짧은 단락이다.
아래의 번역은 ‘랍비 엘에제르의 강론’ 3장 앞부분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책을 집필했다는 랍비 엘리에제르는 서기 69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할 당시 바리사이파의 학자들을 야브네라는 곳으로 피신시켜 그들이 유대교 문헌을 계속 공부하고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던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의 수제자 중에 한 사람인 랍비 엘리에제르 벤 후르카노스를 가리킨다고 전한다. ‘선조들의 어록’(2,8)에 의하면 ‘랍비 엘리에제르 벤 후르카노스는 물방울 하나 낭비하지 않는 모르타르를 바른 수조이다’라고 말한다. 즉 그는 당시까지 전해진 유대교 문헌을 온전히 전수했다는 평판을 받은 사람이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찬미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오직 그분의 말씀으로만 (세상을)만드셨으며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그분에게서 떠올랐다. 그분은 자신 앞에서 세상의 기반을 추적하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은 서 있지 않았다. (랍비들은)비유를 말했다. 이것은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는가? 자신을 위하여 왕궁을 지으려는 임금과 같다. 만일 임금이 땅에서 그 기반이나 그 출구와 입구를 추적하지 못하면 그는 건물을 지으려고 시작하지 못한다. 이처럼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도 자신 앞에서 세상의 (계획도를)추적하셨으나 그분께서 회개를 만들어 내시기 전까지는 그것(계획도)은 서 있지 않았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일곱 가지 것들이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토라, 지옥, 에덴동산, 영광의 옥좌, 성전, 회개, 그리고 메시아의 이름이다. 이것이 토라에 알맞는지를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야붸)께서 그분의 길 시작에 나(토라)를 소유하셨다. 옛날 그분의 작업 전에”(잠언8,22). 여기에서 ‘옛날에’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을 뜻한다. 이것이 지옥에 관한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토펫트는 옛날에 준비되었다’(이사 30,33).토펫트는 힌놈 골짜기에서 지냈던 몰레크 제사를 말하며, 따라서 힌놈 골짜기는 지옥 ‘게해나’로 비유했다. ‘옛날에’는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것이 에덴 동산에 관한 것인지를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야붸) 하느님께서 옛날에 동산을 꾸미셨다’(창세 2,8). ‘예날에’는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것이 영광의 옥좌와 관련된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옥좌는 옛날에 세워졌습니다”(시편 93,2). ‘옛날에’는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것이 회개라는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당신이 땅과 세상을 형성하기 전에”(시편 90,2). 그리고 나서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담의 자식들아, 회개하라”(시편 90,2-3). ‘전에’, 즉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것이 성전에 관한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높은 곳에 세워진 영광스러운 옥좌는 우리의 성소자리이다’(예레 17,12). ‘처음부터’는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다.
이것이 메시아의 이름인 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은 영원할 것이며 태양(이 뜨기) 전에 그의 이름은 싹을 낸다’ (시편72,17).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싹을 낸다’. 다른 문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유다 지파 가운데에서는 어린 자여. 너에게서 나를 위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되기 위해 나올 것이다. 그의 출생은 옛날에, 옛 시절부터’(미가 5,1). ‘옛날에’ 즉 세상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다.
따라서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토라에 조언을 구했으며 세상의 창조와 관련해서 토라의 이름은 투시야(실천 지혜)이다(잠언8,14: ‘나에게 조언과 실천 지혜가 있다’참조). 토라는 그분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세상의 군주시여, 만일 임금을 대접할 주인이 없거나 임금을 위해 군대가 없거나 야영지가 없으면 그는 무엇을 다스리겠습니까? 만일 임금을 찬양할 백성이 없으면 임금의 영광은 어디에 있습니까?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이것을 들을시고 그분은 즐거워하셨다. 토라는 말했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은 세상의 창조에 관하여 나에게 조언을 구하셨다.
‘나는 이해하며 나에게 권능이 있다’(잠언 8,14). 그래서 (현자들은)말한다: 조언자가 없는 국가는 적합한 국가가 아니다. 이것을 어디에서 아느냐? 조언자들을 고용했던 다윗 가문의 왕국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윗의 삼촌 요나탄은 조언자였으며 이해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서기관이었다’(1역대 27,32). 다윗 가문의 왕국에서 조언자를 두었으며, 각자 그렇게 행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이로운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언을 듣는 자는 현명하다’(잠언 12,15). 그리고(이렇게) 말한다: ‘구원은 많은 조언에 있다’(잠언 11,14).
(‘에덴동산’, ‘말씀/토라’, ‘성전’, 그리고 ‘메시아의 이름’은 창조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일곱 가지 주제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려는 의도이다.) 위에서 인용한 루가복음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을 메시아에게 하느님께서 다윗의 옥좌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마리아가 천사에게서 받는다. ‘다윗의 옥좌’는 창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영광의 옥좌를 가리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그 메시아의 이름을 ’구속자‘인 예슈아라고 정해준 것이다.
랍비 엘리에제르의 강론에서 보더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토라의 조언이 있기에 가능하며 그 조언은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토라의 조언에서 조언의 구원으로 전개되는 논리 과정에 다윗의 가문이 등장한다. 이러한 인용은 우연이 아니라 앞으로의 구원/구속자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올 것을 내포하는 수사(修辭)이다. 여기에서 ’구원‘이라고 번역한 단어 ’트슈아‘는 ’예슈아‘와 같은 원형을 갖는 단어이다.
예슈아(구원)의 전통
서기전 3-1세기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이름을 예슈아라고 생각한 것은 매우 오래 된 ‘이름 풀이’의 전통에서 기인한다. 그 두드러진 예는 엘리샤에게 불 수 있다. 엘리샤는 ‘나의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엘리샤는 많은 기적을 행했으며 히브리 성서에 그가 행한 만큼 기적을 이룬 인물도 드물다. 엘리샤의 선생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며 그가 떨어뜨린 겉옷을 들고 엘리샤는 기적을 행하기 시작한다. 요르단 강을 갈라 마른땅으로 걸어갔으며. 물에 소금을 뿌리자 우물을 생명수가 되었다.
그 외에도 과부의 기름병에서 많은 기름이 솟아났으며, 즉은 아이를 살렸고, 보리빵 스무개로 백명을 먹였다. 아람 장군의 나병을 고치기도 하고, 심지어 엘리샤가 죽어 장사 지낸 후에 우연히 어떤 시체를 그 무덤에 던져 엘리샤의 뼈에 닿자 그 시체가 다시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섰다고 전한다(1열왕 13,21). 엘리샤는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이처럼 엘리샤(‘나의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이름의 소유자는 참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였다.
메시아와 관련되어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인물은 예언자 이사야이다. 히브리어로 이사야후는 ‘야후(야붸)는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임금으로 태어날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사야가 예고한 임마누엘은 히즈키야를 가리키며, 히즈키야는 앗시리아의 결정적인 예루살렘 침공에서 하느님불길같은 기적으로 해방된 기쁨을 누리게 한 임금이었다. 공로의 보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히즈키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에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았다:
“앗시리아의 손바닥에서 너와 이 성읍을 구해내고,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읍을 보호해 주겠다”(2열왕 2,6). 그는 다윗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구원자였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유다 왕국마저 앗시리아의 종속국이 되는 위기에서 그래도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다 준 다윗의 후손이다. 이후 임마누엘은 메시아(구원자)의 상징어로 등장한다.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오는 임금을 메시아로 기다리는 전승이 생긴다.
시온의 딸아, 매우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워하라. 보아라 너의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보아라, 너의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의롭고 구원이시다.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신다. 어린 새끼 나귀 위에, 내가 아프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질 것이다. 그는 이방인에게 평화를 말하며,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즈가 9,9-10).
즈가랴의 예언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오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지 무력으로 이방의 권력에 항쟁하는 구원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는 메시아는 평화의 수호자이다.
사랑과 평화
참으로 다윗과 그의 아들과 평화라는 주제는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이 이름에서 풀이된다. 다윗은 ‘사랑’이라는 뜻이며 솔로몬(히브리어로 쉴로몬)은 평화(샬롬)를 뜻한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명인 ‘에디드야’는 ‘야의 사랑’(‘야’는 야붸의 축약어이다)이라는 뜻이다.‘그녀(바트쉐바)가 아들을 낳았으며 그의 이름을 쉴로모라고 불렀다. 그리고 야붸께서 그를 좋아하셨으며 예언자 나탄의 손에 보내어 그는 그의 이름을 예디드야라고 불렀다’(2사무 12,24-25). 예디드는 다윗(히브리어로 다비드)과 같은 원형의 단어이다. 예루살렘에 야붸 하느님의 성전을 지을 것을 약속한 것은 다윗이며 그 약속을 지킨 이는 솔로몬이다. 이러한 다윗의 묵약으로 하느님은 다윗 가문이 이스라엘의 왕국을 계승할 것이라는 확신을 세우신 것이다.
예루살렘의 평화는 ‘야(붸)의 사랑’인 솔로몬에게서 이루어졌다고 기록한다: ‘쉴로모는 야붸를 좋아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규를 따랐다’(1열왕 3,3). ‘그(솔로몬)는 강 건너편, 팁삭흐에서 가자까지, 강 건너편 모든 임금들을 누르고 주변의 모든 건너편(국경)에서 평화를 누렸다’(1열왕 5,4). 사실 솔로몬은 그렇게 태어났다고 전승에 기록한다: ‘이제 너(다윗)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는 평온한 사람이 될 것이며 주변의 모든 적으로부터 그를 위해 평온하게 해주겠다. 참으로 쉴로모(평화)는 그의 이름이 될 것이다. 평화(샬롬)와 안정을 그의 생애 동안 내가 이스라엘에 주겠다’(1역대 22,9). 역대기 사가의 역사관이 반영된 구절이다 평화는 야붸 하느님의 사랑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 사관이다.
히브리 성서의 전승을 이어받은 초기 유대교 현자들의 언명에 이러한 구절들이 나온다. ‘선조들의 어록’ 1장은 세상은 세 가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전통을 학고히 만든 현자 심온은 ‘토라와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 이라고 말했으며, 서기 1세기 후반기에 할동했던 랍비 가므리엘은 그 세 가지를 ‘정의와 진리와 평화’라고 말한다(1,18).
랍비 가므리엘이 말하는 정의는 토라를 가리키며. 평화는 ‘자비를 한껏 행함’(히브리어로 두 단어)을 한 단어로 줄인 것이다. 랍비 가므리엘의 제자였던 바오로는 ‘사랑은 토라의 완성이다’라고 말한다(로마 13,10). 구원은 사랑에 있다는 논조이다. 그리고 그 구원은 바로 메시아 예슈아(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이다. 예슈아(구원/구속)는 다윗(사랑)의 아들 쉴로모(평화)의 전승을 계승한 것이며, 이래서 예슈아(예수)는 다윗의 옥좌에 앉을 수 있는 권한을 받은 것이다.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5)
지옥의 사자(使者) 사탄
예수와 욥을 유혹하는 사탄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지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옥이 이 세상에 있든지 혹은 저 세상에 있든지, 그 실체의 힘을 ‘사는 게 지옥 같다’ 고 말하는 어투에서 조금은 느낄 수 있다. 지옥이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디에 있는지 등의 단순한 의문에, 혹자는 지상낙원의 정반대가 지옥이라고도 묘사한다. 지옥은 살기에 무척 괴로운 곳이며, 지옥의 사자(使者)는 그곳으로 끌고 갈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전해진다.
성서에서는 그 지옥의 사자를 사탄이라고 불렀다. 복음서에 전해진 한 이야기를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귀신들이 방황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 매년 속죄 일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었던 제의에서 볼 수 있다(레위 16,8-26).
제2성전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속죄 일에 똑같이 생긴 염소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하나는 성전의 희생 제물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진’ 염소로 선포하여 광야로 내쫓아 보냈다. 광야로 보내는 염소를 ‘아자젤에게’ 보낸다고 말한다. 아자젤은 ‘험한 산, 광야’ 등을 뜻하며, 예수 당시의 히브리어에서는 ‘지옥’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진 염소는 죄인으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에 들게 되며, 지옥으로 끌려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그곳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논리이다.
사십 일 동안 단식하여 허기진 예수에게 다가온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을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유혹하였다. 악마는 자신의 꼬임에 예수께서 흔들리지 않자 그분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만일 엎드려서 자기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예수에게 주겠다고 다시 한번 유혹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라, 사탄아! 이렇게 쓰여있다: ‘너는 하느님이신 주(主)에게 절하고 그분을 홀로 섬겨라.’” 그래서 악마는 그분을 떠나갔고 천사들이 다가와서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11).
사탄이 예수께 보여준 왕국의 영광은 ‘영광의 옥좌’이며, 그 자리에는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앉을 곳이었다. 사탄의 유혹은 만일 예수께서 자기의 권능이 하느님의 권능보다 강하다고 말한다면 지옥에서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사탄의 꼬임 수는 예수로 하여금 십계명의 1-2계명을 범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한 분이 아닐 수 있다는 신성모독 죄로 지옥에 보내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신명 6,4 과 6,13의 말씀을 인용구로 만들어 그 응답을 하셨으며, 사탄은 포기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천사들은 그분을 천상으로 데려가기 이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사탄이 바른 사람을 악한 궁지로 몰아넣어 하느님을 모독하고 지옥에 빠지게 유혹하는 이야기로 욥기가 표적이다. 욥의 신실함을 흔들어보기 위해 사탄은 그에게 온갖 고난을 주지만, 욥은 심지어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으십시오”(2,9)라고 말하는 아내의 하소연에도 버틴다. 욥이 사탄의 꼬임에 홀려 지옥행이 되지 않고 끝내 찾아낸 지혜의 답변은 다른 신에게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찌 내가 처녀에게 눈길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저 위에 하느님의 몫이며 높은 곳들에 전능하신 분의 유산입니까?(31,1). 결국 욥은 지옥의 문턱에 발을 디디지 않은 것이다. 예수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불타는 지옥
이러한 지옥의 실체는 어디에 있으며 언제 생겼는지에 대한 초기 유대교 랍비들의 탐구는 그들의 강론과 성서 해석 서에 나타난다. 랍비들 가운데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처사였으며, 서로 논박하는 전통이 유대교 문헌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옥의 기원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의견은 창조 이전에 만들어진 일곱 가지 것들을 설명하는 랍비 엘리에제르의 강론에서 읽을 수 있다. 지옥이 옛날 옛적에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적용하는 문구로 “토펫트는 옛날에 준비되었다”(이사 30,33)를 인용한다.
토펫트는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한놈 골짜기에서 행해졌던 몰레크 제사를 가리킨다. 이 제사는 아들, 딸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여 몰레크에게 바치는 제사이다(2열왕 23,10). 미쉬나의 기록에도, 힌놈 골짜기에 대추야자나무 두 그루가 있었으며 이것은 지옥의 입구였다고 전한다. ‘힌놈의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게-힌놈’이며, ‘지옥’ 의 대명사로 게헨나(Gehenne)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게-힌놈’ 의 그리스어 음역(Υέεννά)에서 기인된다. 예루살렘에서는 오래 전부터 자식들을 불 속에 바치는 제사가 힌놈 골짜기에서 행해졌으며 , 유다 앙국 시대에 우상숭배의 종교관습을 타파하는 새로운 종교 개혁의 기운과 함께 그곳에서 행해졌던 불 제사 같은 종교제의가 탄압 받았다(특히 히즈키야와 요시야 임금 때에 야붸 주의자들의 종교개혁이 가장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힌놈 골짜기(게힌놈)는 지옥이라는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으며, 지옥은 불타는 곳으로 그곳에 끌려온 죄인은 숨막히는 열기로 고통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생겼다.
엘리에제르 강론에서 이와 같은 해석을 읽을 수 있다. ‘둘째 날에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창공, 천사들, 살(肉)가 피를 위한 불, 그리고 지옥의 불을 만들어내셨다. 하늘과 땅이 첫날에 만들어지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내셨다”(창세 1,1). 하느님께서 창조의 둘째 날에 지옥의 불을 만들어내셨다고 주장하는 랍비들이 있는데, 이들이 풀이하는 해석의 출발점은 창조의 날 1일부터 6일까지 둘째 날을 제외하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으로 좋았다”라는 구절이 모두 나온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다른 날들은 모두 좋다고 말씀하시는데 둘째 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이런 침묵에 숨겨진 비밀을 찾는 것이다(이런 방법이 유대교 랍비들의 성서해석 태도 중의 하나이다). 둘째 날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붙잡혀 가 고난을 받는 불타는 지옥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라는 변론이다.
창세 15장에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아브람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이해 짐승들을 제물로 잡아 반으로 잘라 서로 마주보게 차려놓은 다음, 해질 무렵 깊은 잠에 들었다.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아브람의 자손들을 훗날 자기 나라가 아닌 곳에서 거류민으로 살 것이며 타민족의 종이 되어 사 백년 동안 눌려지낼 것이라고 알려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그곳을 떠나 그들의 조상들에게로 평안히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말한다. 그러자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렸으며, 여기에 연기 나는 화덕과 불타는 횃불이 그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창세 15,17).
아랍어 번역인 타르굼의 이 단락에 대한 의역에서 랍비들의 해석을 알 수 있다. ‘보아라, 아브람은 불타는 숯덩이들과 타오르는 불티들을 올려보내는 지옥을 보았으며 그곳에서 악한 자들은 심판을 받고 있다.’ 사악한 자들이 불로 심판 받는 그러한 지옥에서 올라오는 불길이 그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즉 아브라함의 희생제물 사이로 심판의 불길이 지나갔다는 설명이다.
한편 창세 15,17에 대하여 랍비 엘레에제르의 강론 ‘아브라함의 시험’ 부분에 흥미로운 해석이 나온다.
여기에서 ‘화덕’이라는 단어는 오직 지옥을 가리키며 아래와 같이 쓰여진 구절의 화덕과 비교된다: “주님의 말씀이다 : 그분에게는 시온에 불꽃과 예루살렘에 화덕이 있다”(이사 31,9). 이사야서의 이 구절의 배경은 서기전 701년 예루살렘이 앗시리아 군대에 포위되어 있을 당시이며, 이 구절의 숨은 뜻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지옥의 불길로 예루살렘을 침범한 앗시리아 군대를 삼킨다는 것이다. “그날 밤에 야붸의 천사가 나아가 앗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그들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두가 죽은 시체였다”(2열왕 19,35). 야붸의 천사가 지옥의 불길/열기/열풍으로 앗시리아 군인들을 삼켜버린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더운 날과 연관된 대목이 나온다. “야붸 하느님은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는 그날 더위로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창세 18,1). 그날은 무척 더웠는데 천막 속은 너무 더워 아브라함은 어귀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 세 사람이 나타나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달려가 땅에 엎드려서 절하고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천사들이다. 여기에서 랍비들의 질문은 그날 왜 더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품은 랍비들은 그들 특유의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재미있는 짧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아가다’라고 말한다. 더운 이 날에 대하여 랍반 가므리엘은 아래와 같은 아가다를 남겼다(랍반 가므리엘은 서기 220년경에 미쉬나를 편찬한 랍비 유다의 아들이었다).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께서 할례 받으셨을 때 그 셋째 날이 매우 고통스러웠으며, 이는 하느님께서 그를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어떻게 하셨느냐? 그분은 지옥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사악한 자의 날처럼 그날을 매우 덥게 만드셨다. 아브라함은 나가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천막 어귀에 앉았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그날 더위로) 그는 천막 어귀에 앉았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천사들에게 말씀하셨다. : “자, 내려가서 저 아픈 사람을 방문하자. 환자를 방문하는 미덕은 나에게 좋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과 천사들이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을 방문하려고 내려왔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창세 18,1).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천사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희는 와서 할례의 권능을 보아라.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는 (내 앞에서) 그의 얼굴을 떨어뜨렸으나 이제 나는 그와 함께 말한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 “아브라함은 그의 얼굴을 떨어뜨렸다”(창세 17,17). 이제 그는 할례를 받았으며 그는 앉고 나는 섰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서 계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느냐?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 “그가 눈을 들어보니 세 사람이 그에게 나서고 있었다”(창세 18,2).
‘사악한 자의 날처럼 그날을 매우 더웁게 만드셨다.’ 즉, 사악한 자들이 불타는 지옥에서 당하는 날처럼 그렇게 더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지옥이 더운 곳으로 상상되는 것은, 황사를 동반하며 몇 일 동안 불어닥치는 열풍의 일상 경험과 그 무더운 열기가 40도를 넘나드는 한 여름 메마른 광야의 폭염을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탈무드에도 ‘내세에 영원한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더운 날뿐이다’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뻔뻔스러운 자
이렇게 더운 지옥은 땅 밑에 있다고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선조 들의 어록’에 착한 아브라함과 사악한 발람을 비교하는 단락이 나온다(5,19).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의 제자들에게는 착한 눈, 겸허한 기질, 겸손한 정신이 있다. 사악한 발람의 제자들에게는 악한 눈, 거만한 기질, 건방진 정신이 있다.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의 제자들이 사악한 발람의 제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우리의 선조 아브라함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먹고 내세에 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나 사악한 발람의 제자들은 지옥을 이어받을 것이며 파멸의 구덩이로 내려갈 것이다.
발람의 성품을 이처럼 말하는 것은 민수 22-24장의 이야기를 반영한다. 이 단락의 주제는 착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또한 내세에서도 한 몫을 차지하며, 즉 지상낙원에 들어가는 특권을 받을 수 있으며, 이와 반대로 사악한 자는 이 세상에서 지옥을 이어받으며 내세에서도 파멸의 구덩이로 내려간다는 이상향적 해석이다(즉, 세상이 이처럼 의로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것일까라는 믿음이다). 두 병행구의 공통점은 이 세상은 사악한 자의 파멸의 구덩이로 대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즉, 지옥은 살아서 이어받는 곳이며, 지옥에 들어간 사람의 내세는 파멸의 구덩이로 연결된다는 해석이다. 이를 ‘아가다’로 설명할 수 있는 예를 랍비 엘리에제르의 강론 53장에서 읽을 수 있다.
여섯사람이 첫째 사람과 같았으며 그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그들은 이러하다 삼손은 그의 힘 때문에 살해되었다. 사울은 그의 신장(身長) 때문에 되었다(1사무 9,2). 앗사엘은 그의 달음박질 때문에 살해되었다. “앗사엘은 들판에 있는 영양들의 하나처럼 그의 발이 가벼웠다(즉 달음박질이 빨랐다)”(2사무 2,18). 요시아는 그의 콧구멍 때문에 살해되었다. “우리의 콧구멍은 숨, 주(主)의 기름부음 받은 이는 저들의 구덩이에 붙잡혔다”(애가 4,20)는 문구에서 기름부음 받은 이(메시아)는 임금 요시야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전승에 의거한다.
쯔드키야는 그의 눈 때문에 그의 눈이 멀게 되었다(2열왕 25,7). 압샬롬은 전쟁에 힘쓰는 용사였다. 그는 그의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는 왜 그의 칼을 빼서 그 머리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내려오지 않았느냐? 압샬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숲 속에서 싸울 때 압샬롬은 노새를 타고 있었다. “그 노새가 큰 참나무의 얽힌 가지 밑으로 지나갔다. 그의 머리는 참나무에 걸렸으며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 놓였고 그의 밑에 있었던 노새는 지나갔다”(2사무 18,9). 그러나 그는 지옥이 그의 밑에 열려져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는 말했다: “내 머리의 머리카락에 매달려 있어 불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는 참나무에 매달려 있었다”(2사무 18,10)
랍비 요쎄이는 말했다: 지옥에는 일곱 개 대문이 있다. 압샬롬은 지옥의 다섯째 대문까지 들어갔다. 다윗은(그의 소식을)듣고 울부짖기 시작했으며 통곡했다. 그는 압샬롬을 위해 “내 아들”이라고 다섯 번 불렀다. 이렇게 말씀한다. “임금은 괴로워서 성문의 누각으로 올라가 울었다: 그는 걸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 압샬롬, 내 아들, 내 아들 압샬롬, 누가 내 죽음을 초래하겠느냐? 내가 너 대신에 (죽을 것을 ), 압샬롬, 내 아들, 내 아들’”(2사무 19,1).
그래서 그들은 지옥의 다섯째 대문에서 그를 되돌려 왔으며, 그(다윗)는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했고 그의 조물주에게 찬송하였다. 이렇게 말씀한다: “나에게 호의의 징표를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참으로 당신은 주님(야붸)이시며 나를 도우시고 나을 위로하십니다”(시편 86,17). 압샬롬의 전쟁에서 “당신은 나를 도와주셨으며” 나의 슬픔에서 “당신은 나를 위로하셨습니다.”
다윗이 압샬롬을 위해 “내 아들”이라고 다섯 번 부른 구절에 근거하여 압샬롬은 지옥으로 가는 다섯째 대문까지 도달했다고 풀이하며, 다윗의 이러한 간구로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다시 되돌아오게 되었다는 짧은 이야기이다. 각 대문을 지날 때마다 다윗은 압tif롬을 돌려보내 달라고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계산이다. 이는 극적 상상력의 극치이다.
시편 86편의 제목은 ‘다윗의 기도’이다.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압샬롬을 지옥으로 내려가지 않게 도와달라는 다윗의 기도이며, 그 호의의 징표를 보여달라는 청원이다. 이처럼 지옥으로 붙들려 가는 길에서도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초대 유대교 랍비들의 생각이다. 지옥행 열차에 몸을 실은 죄인을 위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중재자가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에게 기도한다면 때로는 그분의 호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 유대고 문헌에 방영된 랍비들의 기본 입장은, 사람이 토라를 열심히 공부하고 토라의 말씀을 바로 지키면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며, 선생을 사람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파멸의 구덩이로 전락되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지론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은 아버지보다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이 더 중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부들에게 “당신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남겨두고 그분을 따랐다”고 전한다(마태 4,18-22).
그리고 아래와 같이 십계명의 근본가르침을 말씀하셨다 : “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옛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자기의 이웃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사람은 불타는 지옥에 넘겨질 것입니다”(마태 5,21-22).
‘선조들의 어록’에 기록된 여러 랍비들의 언명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목을 읽을 수 있다 : ‘이래서 누구든지 여자와 잡담을 늘리는 자는 자신에게 악을 유발하고 토라의 말씀을 게을리 하며 결국 지옥을 차지할 것이라고 현자들은 말한다’(1,5); ‘뻔뻔스러운 자는 지옥으로, 수치스러워하는 자는 에덴동산으로 (간다)’(5,20).
랍비 엘리에제르의 언명을 읽어본다: ‘현자들의 화로에 마주 앉아 몸을 따뜻하게 하라. 그러나 그들의 타는 숯에 데지 않게 조심할 것이다.--- 그들의 속삭임은 독사의 속삭임이다. 그들의 모든 말은 불타는 숯 같다’(2,10). ‘불타는 숯 같다’는 표현은 불타는 지옥을 가리킨다. 현자들의 가르침은 타는 숯 같아 잘못 배우면 지옥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충고이다.
예수의 가르침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말씀이 복음서에 전해진다. “불행하도다, 너희 율사들과 바리사이들, 뻔뻔스러운 자들아! --- 독사들의 족속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태 23,29; 33). 이와 비슷한 단어가 세례자 요한의 입에서 나온다. 많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요한 에게 세례를 받을 올 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독사들의 족속아! (다가) 올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었느냐?” (마태3,7). 요한이 전하는 닥쳐올 진노는 분명히 예수께서 말하는 지옥의 심판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진노/열화/불의 심판은 요한 묵시록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불이 하느님에 의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삼켰다. 그들을 잘못하게 했던 악마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졌다”(20,9-10).
초기 유대교 문헌에 전해지는 랍비 들의 지론은 하느님께서 게-힌놈(지옥)과 간-에덴(에덴동산)을 만들어 내셨으며, 사람은 각자에게 선택이 있는 것이다.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 사악한 자는 지옥행이며, 악한 성향을 극복하고 악을 멀리하고 토라의 길에 선 자는 에덴 동산 행이라는 진리이다. 악한 성향은 악마가 착한 얼굴의 탈을 쓰고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뻔뻔스러운 자라는 말이다. 창조의 질서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몫은 에덴 동산으로 가는 길이며, 그 방법은 토라를 배우고 지켜 뻔뻔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선조들의 어록’6장에 ‘토라의 길’을 배우는 48가지의 성격이 나온다. 탈무드(공부), 마음의 통찰, 착한 마음, 스스로 덕을 자랑하지 않는 자, 동료의 멍에를 짊어지는 자 등 열거되는 마지막 사람은 다음과 같다. “말한 자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 보아라, 너는 배웠다. 말한 자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는 세상에 구원을 가져온다”(6,6).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사악한 사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성향의 뻔뻔스러운 자이다.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6)
회개의 힘
회개
'회개‘는 옛날에 창조와 함께 혹은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그래서 흔히 “죽기 전에 하루 회개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죽으면 창조되기 전 상태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어록>2.10에 “죽기 전에 하루 돌아 오라(회개하라)”는 언명이 있다. 이 언명은 랍비 엘리에제르가 남긴 유명한 말씀 중의 하나이다. <선조들의 어록>에 대한 해석책인 <랍비 나탄의 선조들>은 그 내용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15장 마지막 단락).
“죽기 전에 하루 돌아 오라(회개하라).” 랍비 엘리에제르에게 그의 제자들이 질문했다 : “그렇다면 사람은 어느 날에 죽는지 알아서 그는 회개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는 말했다 :“할 수만 있으면 오늘 회개를 할 것이다. 그가 내일에 죽는다면 어떻게 하느냐? 내일에도 회개할 것이다. 그가 모레에 죽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니 평생 회개로 지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말씀의 해석이다 : “너의 옷이 언제든지 하얗도록 해라”(전도9,8).
이 해석과 연관된 문구는 벤시라(집회서) 5,7에서 찾을 수 있다 : “그분께 돌아가기를 늦추지 말라. 하루하루 미루지 말라. 왜냐하면 그분의 진노가 갑자기 닥쳐 네가 징벌의 날에 끝장난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은 세례자 요한 에게 모여든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에게 외치는 요한의 말이다 : “(닥쳐)올 진노에서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그래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느냐?”(마태 3,7-8). 이러한 요한의 언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히비리어로 ‘회개’(트슈바)라는 단어는 ‘돌아오다’(슈브)라는 동사의 파생어이지만 히브리성서에는 이렇게 사용되지 않았다. ‘회개’라는 뜻의 단어로 사용된 것은 제2성전 시대 현자들에 의한 것이며 그들이 만든 신조어이다. 그렇다고 회개라는 개념이 히브리성서에 없다는 것은 아니다.
‘회개’라는 단어 혹은 제의(祭儀)가 창조와 함께 혹은 창조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다고 논리를 전개하는 초기 유대교 현자들의 가르침은 초대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단편적인 예는 복음서의 시작에서 읽을 수 있다. 마태오 복음서의 시작 부분에 “회개하시오. 하늘 왕국이 가까이 옵니다”라고 전거 하는 문장이 나온다(마태 3,2). ‘회개하라’고 번역한 단어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이는 ‘돌아 오라’는 동사이다.
초대교회를 형성하는 새 계약의 공동체가 새로운 창조와 새 질서를 선포하는 처음에 놓는 문구가 ‘회개’라는 점은 초기 유대교 현자들의 이론과 부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조 이전에 창조된 ‘토라/말씀, 영광의 옥좌, 메시아의 이름, 지옥의 사자’등도 그러하다.
실상 사람은 일반적으로 악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토라를 배우며 자라는 과정에서 그 악한 성향을 멀리하고 착한 성향의 인간이 된다고 유대교 현자들은 주장한다.
수많은 성서 해석서와 탈무드 등에 엮어지는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주는 목표는 오직 하나이다. 착한 성향의 인간으로 만들어져야 된다는 명제이다. 악한 성향으로 잘못하여 계명을 어겼으나 착한 성향의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써 속죄의 제물을 신에게 드리고 스스로 회개를 해야 하는 인간의 괴로움과 바람(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서기 2세기 팔레스티나에서 활동한 랍비 핀하스의 질문과 답변에서 ‘죄와 벌’에 관하여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쓰여있다. “주님은 착하고 바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죄인에게 길을 가르쳐주신다”(시편 25,8). 그분이 왜 착하시냐? 왜냐하면 그분은 바르시기 때문이다. 토라(모세오경)는 질문을 받았다 : 죄인의 벌은 무엇이냐? 그것은 대답한다 : 그가 번제를 가져와 속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언서는 질문을 받았다 : 죄인의 벌은 무엇이냐? 그것은 대답한다 : “죄지은 영혼은 죽을 것이다”(에제18,4). 다윗(즉 시편)은 질문을 받았다 : 죄인의 벌은 무엇이냐? 그는 대답한다 : “죄인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수많은 성서 해석서와 탈무드 등의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주는 목표는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혜서는 질문을 받았다 : 죄인의 벌은 무엇이냐? 그것은 대답한다 : “죄인들에게 불행이 뒤따른다”(잠언 13,21).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질문을 받았다. 죄인의 벌은 무엇입니까?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그분께서 대답하신다 : “그가 회개할 것이며 나는 그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 “주님은 착하고 바르시다.”
하느님은 착하고 바르시기에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회개라는 제의가 주어졌음을 알려준다. 회개는 ‘죄와 벌’에 앞서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회개의 힘
‘회개의 힘’에 대한 가장 유명한 강론은 ‘랍비 엘리에제르의 강론’ 43장 이라고 말한다. 회개에 대한 유대교의 입장을 변론하는 글에 항상 인용되는 단락이다. 이 글은 (선조들의 어록)의 한 언명인 “회개와 선행(善行)은 벌 앞에 방패이다”라는 문구에 대한 해석으로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열거하며 그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회개의 힘’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회개와 선행은 벌 앞에 방패이다” (선조들의 어록 4,11). 랍비 이쉬마엘은 말했다 : 만일 회개가 창조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유지되지 못했다. 랍비 아키바는 말했다 : 회개가 창조되었기에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의 오른손은 돌아온 자(즉 회개한자)를 매일 받아들인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 “돌아 오라(회개하라), 사람의 자식들이여!”(시편 90. 3). 너는 자비와 회개의 힘을 알 것이다.
와서 이스라엘의 임금 아합에 관하여 보아라. 그는 많이 회개하였다. 그는 도둑질을 하였고 부정을 했으며 살해하였다. 이렇게 쓰여있다 : “너는 살해하였으며 유산도 차지하려느냐?”(1열왕 21,19). 그분은 그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임금 예호샤파트를 불렀다. 그는 그에게 매일 세 번 사십대의 채찍을 주었다. 그는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 앞에 새벽과 저녁에 단식과 기도를 하였다. 그는 온종일 토라에 열중했다.
그래서 다시는 악한 짓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회개는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쓰여있다 :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하여졌는지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손하여졌기에 나는 그이 생애에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1열왕 21,19).
랍비 아바후는 말했다. 너는 회개의 힘을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에게서 알 것이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선조들에게 그들의 자식들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시킬 것이라고 맹세하셨다.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은 와서 그 수효를 세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한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흑사병이 생겨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2사무24장).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은 그에게 말했다. “다윗아, 나는 선조들에게 그들의 자식들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시키겠다고 맹세했다. 너는 와서 내 말을 취소하려느냐? 너를 위하여 양떼를 잡아먹으라고 주었다.” 세 시간만에 이스라엘에서 칠만 명이 쓰러졌다. 이렇게 쓰여있다. “이스라엘에서 칠만 명이 쓰러졌다”(1역대 21,4).
랍비 심온은 말했다. 이스라엘인 가운데 오직 쯔루야의 아들 아비샤이만이 쓰러졌다. 그의 선행과 토라(의지식)는 칠만 명과 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여있다. “이스라엘에서 칠만 명이 쓰러졌다”(1역대 21,14). 여기에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쓰여있다. ‘칠만 명’의 직역은 ‘칠십천 사람’이다. 즉 칠만(70x1000)이면 복수인데 ‘사람’이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인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숫자를 셀 때 복수의 수효에 단수 명사를 사용하는 경우는 우수리 없는 경우에 그렇게 상용되기도 한다.
다윗은 듣고 그의 옷을 찢고 자루 옷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하느님의 계약 궤 앞에서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있었다. 그는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 앞에서 회개를 구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온 세상의 주님이시여, 제가 바로 죄 지은 자입니다. 제 죄를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2사무 24,17). 그의 회개는 받아들여졌으며 그는 백성들을 파멸시키는 천사에게 말했다. “이제(주님의 자비가)많으시니까 당신 손에 맡기겠습니다”(2사무24,14). 여기에서 그는 그의 칼을 들어 다윗의 겉옷으로 닦았다. 다윗은 죽음의 천사의 칼을 보고 그가 죽을 때까지 사지를 떨었다. 이렇게 쓰여있다. “다윗은 주님의 천사의 칼이 무서웠기에 하느님께 문의하려고 그분 앞에 가지 못했다”(1역대 21,30).
랍비 예호슈아는 말했다. 너는 회개의 힘을 알 것이다. 와서 히즈키야의 아들 메나쉐에 관하여 보아라. 그는 세상의 온갖 죄악은 다 저질렀으며 악행을 더 했다. 다른 신들에게 제단을 쌓았다. 이렇게 쓰여있다. “그는 벤 힌놈의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며 요술과 마술과 점술을 행하였고 영매와 점장이들을 이용하였다. 그는 주님 앞에서 악행을 더하여 그분의 분노를 일으켰다”(2역대 33,6). 그는 예루살렘으로 나가 비둘기들을 장식하여 하늘의 모든 군대를 위하여 제단에 바쳤다.
앗시리아 군대의 장군들이 와서 그의 머리채를 붙들어 바빌론으로 그를 내던졌으며 그들은 그를 불(위의) 냄비에 집어넣었다. 그는 거기에서 그가 제단에 바쳤던 다른 신들을 불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단 한 신도 그에게 대답하여 그를 구하지 못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내 선조들의 하느님을 내 온 마음으로 부르겠다. 아마도 그분께서 내 아버지에게 하신 그분의 놀라우신 일들을 나에게도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선조들의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불렀으며 그분은 그의 호소를 그이 기도를 들으셨다. 이렇게 쓰여있다. “그가 그분께 기도하여 그분은 그의 호소를 받아들였다”(2역대 33,13). 그때에 메나쉐는 말했다. “심판이 있고 재판관이 있다.” ‘재판관’은 하느님을 가리킨다.
벤 아자이는 말했다. 와서 라키쉬의 아들 랍비 심온에게서 회개의 힘을 보아라. 그와 그의 두친구는 길에서 그들을 지나치는 모든 이들에게서 도둑질과 부정을 일삼았다. 그는 무엇을 했느냐? 그는 도적질을 하는 두 친구를 산에 두고 그의 온 마음으로 그의 선조들의 하느님에게 돌아왔다. 그는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 앞에서 새벽과 저녁에 단식과 기도를 하였으며 그가 사는 동안 토라에 열중했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악행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회개는 받아들여졌으며 그가 죽는 날에 그 두 도적질 친구들도 산에서 죽었다. 라키쉬의 아들 랍비 심온에게는 생명의 몫이 주어졌고 그 두 친구들은 저승 밑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 두 친구들은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 앞에서 말했다.
“세상의 주님이시여, 당신 앞에서 얼굴을 내미는 자가 있습니까? 즉, 하느님께도 특별히 호의를 베푸시는 자가 따로 있느냐는 반문이다. 이 자도 산에서 우리와 함께 도적질을 하였으나 그는 생명의 보물을 차지하게 되고 우리는 저승의 밑바닥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자는 살아서 회개를 하였으나 너희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에게 말했다.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가 회개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회개는 오직 죽을 때까지이다.”
비유 - 이것은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느냐? 바다로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과 (비유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사람이 사는 땅에서 그 손에 빵을 들고 오지 않으면 바다에서는 찾을 수 없다. 만일 그가 광야의 끝까지 걸어가기를 원하는데 거주지에서 빵과 물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광야에서는 먹고 마실 것을 찾지 못한다. 이처럼 사람이 그 사는 동안에 회개를 하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는 그에게 회개는 없다. 이렇게 쓰여있다. “그는 속죄의 값에 얼굴을 돌리지 않을 것이며 뇌물을 많이 준다 하여도 만족하지 않는다”(잠언 6,35). 이렇게 쓰여있다. “나는 심장을 조사하고 콩팥을 시험하는 주님이시다”(예레 17,10). 심장은 지성을, 콩 팥은 감성을 은유하는 상징어이다.
하카나의 아들 랍비 네후니야는 말했다. 너는 회개의 힘을 알 것이다. 와서 이집트의 임금 파라오에게서 보아라.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바위에 매우 많이 반목하였다. ‘바위’는 모세가 호렙산의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된 바위를 말한다. “나일강을 친 너이 지팡이를 손에 쥐고 가거라 ---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출애 17,5-6). 이렇게 쓰여있다. “내가 그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주님이 누구냐?”(출애5,2). 그는 같은 혀로 죄를 지었으며 그 혀로 회개를 하였다. 이렇게 쓰여있다. “신들 가운데 누가 당신 같겠습니까? 주님이시여”(출애15,11).
파라오가 죄를 지은 것은 “주님(야붸)이 누구냐” 고 반문한 것이고 회개한 것을 말해 주는 문구는 “신들 가운데 누가 당신 같겠습니까? 주님(야붸)이여!”라는 것이다.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는 죽은 자들 사이에서 그를 구하셨습니다.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렇게 쓰여있다. “이제 내가 내 손을 치켜들어 너를 치겠다--- 그렇지만 이것 때문에 너를 세우겠다(즉 살려두겠다)” (출애 9,15-16).
찬미 받으시는 거룩하신 분께서 죽은 자들 사이에서 그를 세우시어 그분의 힘과 권능을 이야기하게 하셨다. 그분께서 그를 세우셨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이렇게 쓰여있다. “그렇지만 이것 때문에 나는 너를 세우겠다”(출애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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