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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마르코

dariaofs 2015. 2. 27. 17:46

우리 삶에 비추어 본 마르코 복음 (1)

성령, 예수 그리고 가난 이기우(사도요한)신부

--마르코 복음서의 형성과정 묵상-- (서울대교구 빈민사목)

 

제도적으로 윤곽이 잡힌 신앙 공동체들, 예를 들면 본당이라든가 수도원에서는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글자 한 자도 어김없이 정확하게 낭독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역동성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복음이 주는 십자가의 공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묵상용이요, 전례용입니다. 복음대로 살자면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요, 그 싧자가를 모두가 함께 짊어지고 가는 가운데 성령의 역동적인 이끄심이 교회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데 뭉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없습니다.

복음응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이들의 인간관계에는 복음이 적용되기보다는 교회의 관행과 질서에 따라서 진행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보면 복음을 선포하면서 복음으로부터 소외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신자들과 세상에 대해서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선포하면서 자신들은 전혀 기쁘지 않는 현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복음에 따른 십자가를 도외시한 채 섣불리 부활의 영광을 찾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 선포 속에서 기존의 교회 현상을 복음으로 합리화시키는 경향까지도 엿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제도적인 신앙 공동체들을 비판하면서 현장으로 찾아들어간 신앙 공동체들은 그 수가 적어도, 복음이 명하는 대로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진지한 용기가 발견되는 한편, 부활의 은총이 주는 교회적 일치와 사랑의 감사가 여간해소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악에 대해서 목청을 높이는 만큼 자신들의 허물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기성 교회의 제도적 영역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곧잘 하지만 자신들이 교회라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임을 확인하고 통공을 이루는 전례생활이 소흘히 되곤 합니다.

 

복음이 어떤 경우에는 이데올로기처럼 기성 신앙인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교회적인 관행과 질서보다는 사회적 현실의 역학관계에 더 민감하고 정치적인 세력관계에는 더 예민합니다. 그러다 보면 복음을 산다고 하면서 역시 자신들은 전혀 기쁘지 않는 현상이 생겨납니다. 복음에 따른 십자가만을 내세운 채 부활의 은총이 주는 형화가 메말라있기 때문입니다. 기쁨 없는 십자가 속에서 기존의 교회 현상을 비복음적으로 매도하는 경향까지도 엿보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제도적 보수현상과 현장의 혁명적 경향 사이에서복음이 설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복음의 향기가 메말라가는 이러한 교회의 현실이 복음의 위기요, 진정한 복음화를 위한 시련이라고 봅니다. 이를 풀어낼 수 있는 한 가지 실마리가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주는 기쁨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기쁨은 자연히 새로운 창조를 가져옵니다.

첫 복음서로 일컬어지는 마르코복음서가 쓰여지게 된 배경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기원후 약 30년경에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후 예루살렘의 한 작은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 공동체는 36년 스테파노의 순교에 뒤따른 박해로 북쪽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특히 스테파노와 같은 출신인 그리스계 유다인 신자들이 복음을 전파하여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이후 45년에서 60년 사이에 바르나바와 바울로에 의하여 공동체들이 소아시아 지방과 로마에까지 확산되었습니다. 64년에 소수의 유다인 혁명당원들이 로마제국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켜 치열하게 저항 운동을 전개하다가 70년에 패하였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이 무렵 쓰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유다인들은 반혁명세력(사두가이파 등의 상류계층)과 친혁명세력(젤로데파등 하류계층의 가난한 사람들)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사마리아 이북의 지방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그리스계 유다인 신자들은 어느 세력과도 손을 잡을 수 없어서 양쪽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마르코 공동체(마르코 복음서를 형성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조명함으로써, 마르코 공동체가 당하는 신앙의 시련에 해답을 주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왜 쓰여졌겠습니까? 그것은 마르코 공동체가 당하는 신앙의 시련에 해답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마르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조명함으로써, 이에 해답을 주고자 했습니다. 공동체의 존재 이유를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마르코는 밝혀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르코복음서는 어느 개인의 저술이라기보다 박해받는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보아야 합니다.

 

마르코는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응답이 공동체와 그에 속한 신자들의 삶을 좌우한다고 보고, 복음서 전체에 걸쳐 이 물음을 던지는 한편 단계적으로 이에 대한 응답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고백(8,27-30)이 마르코복음서의 핵심이며, 그 앞부분은 이를 준비하는 부분이며 그 뒷부분은 이를 전개하는 부분으로 불 수 있습니다. 이 뒷부분(9-16)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다루는 마르코복음서의 본론이라 볼 수 있는데, 예수가 누구인지는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물으신 바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마르 8,27-30)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분을 혁명가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글나 그분은 실패한 혁명가였기에 우리가 보완해햐 할 혁명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그분을 신비가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깨우쳐 주신 분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혹은 부처, 소크라데스, 공자 같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모두 예수를 과거의 인물로 보는 관점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단지 훌륭한 인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을 때 그분은 비로소 오늘의 인물이 되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첫 물음에 이어 제자들에게 직접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여기에는 그분을 우리의 친구요 벗(요한 15,15)으로 보는 대답이 가능합니다. 전통적인 답변입니다. 또 그분을 우리의 모델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요한 14,9)이라고 그분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은 유일한 스승(마태 23,8-12)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누구 앞에서도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도들이 고백했듯이, “이분을 힘입지 않고서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사도 4,12). 그분은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고백성 답변을 통틀어 가장 완전한 대답은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지를 살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교회가 역사 안에 시작 될 수 있었고 한 사람의 인생 역사 안에서 신앙이 뿌리 내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로 나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난한 이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요 동기입니다. 예수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게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 자신과 가난한 이들이 함께 복음화될 수 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동정심 등이 가난한 디들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동기가 된 수도 있으나 이로서는 불완전합니다.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 동기가 나자렛 예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난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가?”

 

사실 마르코복음서 안에는 사도 바울로로부터 영향받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깔려 있습니다. 본래 마르코라 부르는 요한(사도 12,25)은 안티오키아에서 바르나바와 사울과 같이 선교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마 나이로 보아 제자격의 수행원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1차 선교여행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르코는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사도 13,13). 그때가 45-49년경입니다. 그 이후 마르코는 지금의 마르코복음서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생전에 예수를 만났던 증인들을 만났을 것이고 요즘 말로 하면 광범위한 취재활동을 했습니다.

 

아마도 마르코는 예수로 하여금 직접 말씀하시게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점은 바울로의 편지들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바울로의 편지들이 바울로 자신이 주체가 되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가르치고 있는 반면, 마르코가 처음으로 개척한 복음서 양식은 예수를 직접 나서게 하여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르코가 바울로와 헤어져야 했던 숨은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르코는 생전에 예수를 뵙지도 못했으면서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한마디로 영성적 천재인 바울로를 존경하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말하자면 바울로로부터 복음을 듣는 신자들이 나자렛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직접 접해보지 못하고 간접적으로만 전달받음으로써 자칫 걸어 다니는 하느님정도로 예수를 불필요하게 신격화할 위험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를 좀더 역사적으로 생생하게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인격적인 모습으로 찾아오신 하느님의 아들을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르코 역시 자신의 복음서에서 줄곧 예수는 누구인가?’를 집요하게 물으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 수 없다는 깨달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울로로부터 마르코가 이어 받고 있는 중요한 유산을 빼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입니다. 고린토 공동체에게 바울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릅입니다(1고린 1,22). 그리하여 마르코 역시 자신의 복음서에서 줄곧 예수는 누구인가?’를 집요하게 물으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 수 없다는 깨달음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는 힘없이 예수를 배반하고 말지만 정작 십자가 처형현장에 있던 백인대장은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광경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15,39) 하고 고백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마르코는 바울로를 비판적으로 발전계승한 인물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형성과정을 생각하면서 저는 두 가지 부르심이 우리 교회에 주어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하나는 성령이 이끄심에 따라 복음을 살기 위한 십자가로서 가난한 드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필요하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난한 디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성령께 순종하는 것(요한 바오오2)이라는 점입니다. 현장에 투신하기 위해 엄청난 용기와 희생을 들였다 하더라도 성령의 주도권이 앞세워져야지 자칫 우리의 공로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제도적 영역의 신앙 공동체들에게는 첫 번째 부르심을, 그리고 현장의 신앙 공동체들에게는 두 번째 부르심을 일깨워드리고 싶습니다.한쪽에게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가난의 십자가가 부족하고 다른 한쪽에게는 성령께서 주시는 가난의 기쁨이 필요합니다.

 

국가 경제의 부도 위기 속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십자가의 은총, 그리고 그 속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우리 모두가 풍성하게 받을 수 있기를 성령께 기도합니다. 올해는 대희년을 준비하는 성령의 해입니다. 성령은 가난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처음으로 행하신 강론에서.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가 4,18)고 말씀하신 것을 온 교회가 다 아는데도, 성령의 해를 준비하자는 온갖 거창한 구호 속에 정작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목소리는 아주 약하게만 찾아볼 수 있을 뿐입니다. 전국 각 교구의 사목교서를 죄다 훑어보아도 그렇습니다. 올해는 국가 경제의 부도 위기 속에서 지금보다도 가난한 이들이 더 많이 생겨나고 가난한 이들은 더 가난해지게 될 전망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십자가의 은총, 그리고 그 속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우리 모두가 풍성하게 받을 수 있기를 성령께 기도합니다.

 

우리 삶에 비추어 본 복음 이야기 (2)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진 복음, 예수

--마르코복음서의 주제 묵상--

 

과연 예수님 자신이 기쁜 소식이 틀림없는가? 가난한 이들, 이 세상에서 별로 희망을 둘 구석이 없는 이들에게도 그분이 반가운 소식일 수 있는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1. 1).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봅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요한 14,9)이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인간이 나아 갈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고 고백합니다. 즉 예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 하느님이시요 참 인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고백해 온 오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한편, 그 사랑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겪어야 할 일들도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신기 한지요?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은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임의 사건, 악령의 방해, 제자들 사이의 갈등들을 빠집없이 겪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경건한 묵상용 책을 넘어서서 복음 선포의 교과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서를 쓰면서 예수가 누구인가?’를 제목에서부터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이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신가, 또 그분이 왜 그리스도이신가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에 관한 소식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는 점만큼은 처음부터 명확하게 선언하다시피 밝히고 있습니다. 아니,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분 자신이 기쁜 소식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묻고 싶습니다. 과연 예수님 자신이 기쁜 소식이 틀림없는가? 가난한 이들, 이 세상에서 별로 희망을 둘 구석이 없는 이들에게도 그분이 반가운 소식일 수 있는가?

예수회 출신으로서 밀라노의 교구장이 된 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은 여러 성서 묵상책을 통해 한국의 신앙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그분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복음서 하나 하나, 복음서 구절구절에도 감도하셨으나 더 크게는 4복음서 전체의 구도에도 감도하셨으므로 아직 신학사상이 집대성되기 전 고대 교회에서는 4복음서 자체가 교리서 구실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묻는 마르코복음서는 아직 예수를 모르는 예비신자들을 위한 교리서였고,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마태오복음서는 십자가의 희생을 툥해 예수를 알게 되어 교회에 들어온 신자들을 위한 교리서였으며, 복음화란 무엇인가?’를 초점으로 삼은 루가 복음서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읽혀졌고, 영원한 생명의 신비에로 이끌어 주는 요한복음서는 원로들과 사제들을 위한 복음서로 읽혀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의 신비예수교회그리고 복음화의 신비를 두루 겪고 난 다음에서야 깨달을 수 있는 진리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를 깨닫는 순환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어디까지나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신비를 깨닫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의 신비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한, 신앙의 신비는 본 궤도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말도 됩니다.

 

마르코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만나시는 사람들은 악령들린 사람(1.21), 병든 사람(1,32), 중풍병자(2,1), 손이 오그라든 사람(3,1),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인(5,25),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배고픈 군중(6,34), 귀먹은 반벙어리(7,32), 눈 먼 소경(8,22), 가난한 과부(12,42) 등 그 당시 팔레스티나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눌린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다가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그분은 당신이 복음을 전하시던 그 가난한 이들 안에서 부활하십니다. 그분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은 가난한 이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 안에서 만난 천사는 그분이 애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던 갈릴래아의 가난한 이들에게로 가야만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제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가난한 이들 안에서는,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가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사도 2, 44-45) 주었기 때문에 그들안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4,34) 되는 놀라운 기적(4,33)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에 의한 해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해방된 가난한 이들이 마태오복음서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서에서 예수쎼서 만나시는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이들(마태 5,3)이며 자비를 베풂(5,7)으로써 재물을 하늘에 쌓는(6,20)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또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11,25) 하느님의 뜻이 나타내어지는 계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기는 하지만(11,28) 그분 안에서 편히 쉬는 야훼의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르코복음서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마르 4,12 참조)과는 달리, 그 비유를 몽땅 알아듣는 제자들이었습니다(마태 13,51 참조).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십자가의 희생을 서로 실천하는 복음의 신비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 안에서 교회가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이스라옐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17,12)으로서 세상이 볼 때예는 보잘 것 없는(17,10) 사람들이었지만 그분께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17,10) 소중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성령을 받아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러 파견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이들은 사람 낚는 어부(루가 5,10)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희는 행복하다(6,20)고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선포되는 복음 속에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이러한 복음선포는 현실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당장 굶주린 사람들(6,21)과 지금 우는 사람들(6,21)에게 복음을 선포하자면 그것은 말로만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가난한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사랑의 십자가를 지는 삶만이 이러한 선포를 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래서 루가복음서의 행복선언은 가난한 이들에게 선포되는 선교적인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루가복음서에서 주목받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복음을 선포하러 파견된 선교사들이기에 이들은 마르코복음의 청중들과 만납니다. 복음 선포의 주체와 대상으로 말이지요.

 

성령의 이끄심을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삶을 살게 되고, 이들은 정신적 가난을 누리는 이들과 이루는 통공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여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가난함의 순환이 복음서가 이야기하는 복음화의 경로입니다.

 

루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만나시는 이들, 즉 선교사들은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9,3)는 당부를 들을 만큼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만나서 복음을 전할 사람들은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이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담아서 복음을 선포하자면 같은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사회적 강생이라 하겠습니다. 이를 자발적 가난이라 합니다. 이들에 의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행해지고 이로써 비로소 복음 선포가 시작됩니다. 그전에는 그저 불쌍한 마음에서 동정할 수는 있을지언정 복음선포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는 아픔과 희생 없이 행해지는 복음 선포는 선포 행위의 주변을 맴돌지언정 아직 선포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 따라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복음을 들은 가난한 이들이 빈곤에서 해방됩니다. 복음 선포에 따른 나눔으로도 그러하고 또 빈곤의 박탈감에서 벗어나 더 가난한 이들을 향하는 회개로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부요함이 아니라 정신적 가난’, 즉 청빈으로 해방됩니다.

이를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마태 5,3)으로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생겨날 때, 비록 서로 베푸는 자비로 말미암아 빈곤을 벗어나는데 필요한 재물은 함께 쓰게되지만 이로써 재물을 섬기지는 않는 자유로운 삶이 가능해집니다. 다시 이들 중에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이들을 선택하여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난함의 순환이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서가 구조적으로 알려 주는 복음화의 경로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이렇게 해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회가 복음적 활력을 얻어 늘 새롭게 탄생하고 성장하며 파견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아직은, 마르코복음서의 주제이자 제목으로 주어진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이신 이유가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걸림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가나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악령의 간섭이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선포자들을 지치게 하는 것은 사회의 구조악이나 가난한 이들의 일그러진 모습이거나 혹은 관심을 나누어 주어야 할 신앙인들의 무관심이기 이전에 이러한 악령의 간섭입니다. 이상하게도 악령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따라 다닙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방해받고 있다고 우깁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나자렛 예수님, 어찌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마르1,24)

 

악령의 간섭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마태 5,11)을 받는 것은 기본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어도 감사보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나눔으로 자비를 베풀어도 욕심스러운 의존심만 더 키울 수도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함께 파견된 동로들로부터 시기와 모함, 경쟁과 질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별 것 아닌 일로 갈등을 빚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선교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교우들로부터 한쪽으로 편향된 경향을 지녔으리라든가 매사에 과격하리라는 근거없는 인상을 받는 일도 흔한 일입니다. 바로 이 때, ‘옳은 일을 하다 박해를 받아도 참아 받는(5,10)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존심을 접고 모욕을 참을 수 있고 변화를 기다려 줄 수 있을 때만 성령께서 우리를 도구로 삼아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래서 경제적인 의미로, 그저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하는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정신적인 시련까지 참아 받을 또 다른 가난, 즉 사도적인 가난까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섬기는 예수를 더욱 닮을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투명하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제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 자체로 복음인 이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전하면서도 사랑받는 이가 그 사랑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삶,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삶을 어리석은(1고린 1,23) 삶이라 볼 것이지만 오히려 그런 비난이야말로 복음적인 삶의 역설적인 징표입니다. 때마침 IMF 한파로 우리 교회도 복음적 가난을 살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에 대한 이해도 전보다 높아진 것 같습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이미 가난한 이들의 현장에 들어와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숨은 사랑을 전하면서도 사랑받는 이가 사랑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삶, 이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 제자들의 배신과 군중의 오해와 지도자들의 배척을 참아 받으셔야 했던 분, 그분의 삶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일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 익명의 선교사들이 제법 있습니다. 저마다 물질적 풍요로움과 육체적 편리함을 추구하는 요즘 세상에서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들에게 들려오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자발적 가난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긴 해도 아직 자발적 가난만으로는 복음 선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바로 복음 선포의 어려움까지를 참아 받는 사도적 가난을 선택하는 일이 그 부르심입니다.

남들이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 그 십자가, 자신의 나약함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그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성령께서 도구로 삼으셔서 일하십니다.

 

나약함으로 오신 하느님,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 제자들의 배신과 군중의 오해와 지도자들의 배척을 참아 뱓으셔야 했던 분, 그분이 나자렛 예수이십니다. 그분의 삶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일 수 있었습니다. 4복음서 전체의 구도에 담긴 성령의 이끄심에 비추어서, 우리는 마르티니와 함께 마르코복음의 그 간단한 제목이 주는 깊은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그분이 복음입니다. 그분을 따라 자발적이고도 사도적인 가난을 살아가는 삶이 기쁨을 잃어버린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 교회 안에서 기억되고 재현되며 계승될 때 우리는 마르코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우리 삶에 비추어 본 복음 이야기 (3)

이미 다가와 있는 하느님 나라!

상대방의 약점이나 상처마저도 사랑할 수있을 때 비로소 인격적인 사랑이 가능하듯이, 사랑이 가난한 이들에게까지 미칠 수 있을 때 그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올해 서울대교구의 사목교서는 가정과 가난한 이들의 복옴화를 아울러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보면 가정의 복음화와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이 두 명제는 뜻이 서로 아주 가까운 주제들입니다. 왜 그런지 풀어볼까요? 우리네 손가락 다섯 개가 서로 같지 않듯이 가정에서 태어나는 자녀들도 각기 다릅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가장 주목을 받는 대상은 똑똑하고 튼튼한 자녀가 아닙니다. 어떤 자녀가 공부를 잘 하고 몸이 튼튼하다면 사랑받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모자라고 허약한 자녀가 더 부모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것은 편애가 아닙니다. 부모의 관심은 모든 자녀들이 다 잘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똑똑하고 튼튼해서 부모의 관심 없이도 혼자서 잘 자라는 것으로 보여지는 훌륭한 자녀보다는, 모자라고 허약해서 제대로 자랄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자녀에게 각별한 관심을 더 두기 마련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가정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의 관심을 더 받는 자녀들입니다. 그들이 더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돌 똑똑하고 덜 튼튼하며 여러 가지로 걱정스러운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기 떄문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2)에서 우리가 살펴본 주제는 예수께서 전하신 소식이 복음이기 이전에 그분 자신이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진 복음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존재가 우리 모든 이들을 위한 복음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상대방의 약점이나 상처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격적인 사랑이 가능하듯이, 사랑이 가난한 이들에게깢 미칠수 있을 때 그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은 결코 편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이들을 보편적으로 고루고루 사랑하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그 약함까지도 배려할 수 있을 떄 비로소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선포는 하느님 아버지의 보편적인 사랑을 드러내기에 가난한 이들에게까지, 아니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로부터 들어나지만 그것이 가난하지 않은 이들을 배척하거나 가난한 이들만을 편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이들을 보편적으로 고루고루 사랑하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렇듯 예수의 복음 선포는 선택적이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입니다.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의 활약상을 배경으로 예수의 공생활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때가 다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 말씀은 예수의 첫 설교일 뿐 아니라 공생활 동안의 모든 설교를 요약하는 대주제입니다. 병행하는 같은 기사들이 마태오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바뀌어 있습니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마태 4,17). 루가복음서에서는 성령의 이끄심과 함께 복음 선포의 민중적 성격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가 4,18).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각 복음서의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엄밀히 말하면 각 복음서를 형성한 신앙 공동체들의 처지와 깨달음이 드러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으로 복음서를 형성한 마르코 공통체에서는 구원의 때가 다 되었음을강조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미 마르코복음서를 아는 마태오 공동체에서는 이 를 또다시 반복하기 보다는 예수를 몰라본 대다수 유다인들의 회개를 강조합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복음을 선교해야 하는 루가 공동체로서는 구약성서를 이해하고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퍼져 있는 암시적 전제들을 이방인들 앞에서라면 아예 펄쳐놓을 필요가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묻혀 있던 보물처럼 성령과 가난한 이들의 존재는 이래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각 복음서별 특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점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데 있습니다.

루가적인 표현으로서도, “주님의 성령이 내리셨다고 단정할 뿐 아니라,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고 까지 학언합니다. 이 단정적인 확언 때문에 바로 전까지 고향을 방문한 예수를 환영하던 분위기가 돌연 사라지고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4,29)는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게 됩니다. 성서를 안다는 사람들에게 그 선언은 바야흐로 메시아가 오셨다는 뜻이요, 해방과 구원의 복음이 이제사 선포된다는 엄청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 세상에! 어느것 하나 바뀐 것이 없는데 자기 한사람 방문한 일을 두고 이런 건방진 말을 하다니!” 하는 식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수께서는 믿음 없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길을 가십니다(4,30). 왜냐하면 이미 다가와 우리 곁에 머물고 계시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현존, 그 안에서 가난한 이들까지 기쁜 소식을 들을 만큼 모든 이들에게 시작된 새로운 기쁨, 이것이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야 할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복음 선포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를 조건으로 해서 선포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의 실체는 이미 다가 왔다는 것이고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나자렛 고향 사람들처럼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는(마르 4,12)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바 복음의 실체를 자기 중심적으로 파악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추세 속에서 내가 기대하는 바가 달성되는가를 따져서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 여부를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에 종종 실패하는 것입니다. 물론 엄청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미래가 하느님의 복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 선포는 그러한 가능성을 조건으로 해서 선포된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의 실체는 이미 다가 왔다는 것이고 오늘 이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 이미 우리 모든 이들이 갈망하고 필요로 하는 바가 충분히 설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알맞는 때에 알맞는 만큼 주어지고 채워질 것임을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그 확신이, 아직 주변 여건으로는 어둡기만 한 속에서도 이미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가며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선포의 실체였습니다.

 

1968년에 콜롭비아 메델린에 모인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은 가난한 민중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원칙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교령을 인용하여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감추어진 하느님의 현존, 육화보다 먼저 혹은 사도들의 설교보다 먼저 현존하여 계신 말씀의 빛을 발견하는 일과 그 씨앗이 결실을 맺게 하는 일이 바로 교회의 복음화 임무에 해당한다.”

또한 1975년에 바울로 6세 교황께서 펴내신 현대의 복음선교” 18항에서는 이렇게 갈파합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할 때 교회는 복음 선교를 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자면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 즉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이 필수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추어졌으되 이미 다가와 현존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복음 선포의 출발점이자 필수 요소입니다. 복음 선포이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선교하는 사람은 그분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말해서 듣기 좋은 겸손한 표현이 아닙니다.

 

실제로 선교 현장에서 흔히 겪는 일은, 복음화의 반 이상을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악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완고하게도 만들고 서로의 갈등을 부추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선포되는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켜주며 하느님 나라가 이미 다가와 있다는 것과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확신은 어둡기만 한 속에서도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가는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 선포의 실체였습니다.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양심을 일깨워 주시는 그분의 일하심이 아니라면 현장의 선교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장난과 훼방은 가라지처럼 나타나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선교과업은 밀이삭처럼 보호받게 됩니다(마태 13,24-30).

 

이에 대한 학신 때문에, 일이 되든 안 되든, 사람들이 모이든 안 모이든, 또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상관없이 우선 나부터라도 그분의 계획에 따라 살아가야함을 절절히 꺠닫게 됩니다. 주변 여건은 아직 복음화가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자신을 벌써 복음화된 현실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나오는 전망과 안목과 깨달음이 복음 선포의 추진력이 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빈민사목- 사실상 빈민선교-의 원칙이 여섯 가지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 원칙들은 이미 다가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가난한 이들과 함께 체험하고 실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첫째는 가난한 이들과 삶을 나누는 원칙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빈민현장에 투신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네들의 희망과 슬픔이 무엇인지를 체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빈민지역의 주민이 되고 그들의 이웃이 될 때라야 비로소 대화의 문이 열리고 신뢰가 뿌리내릴 수 있으며 그들의 희망이 무엇이고 아픔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둘째는 삶과 복음을 일치시키는 원칙입니다. 우리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신문도 TV도 주목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고, 내가 하는 생활과 활동의 선택 기준을 복음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 일어난 일이, 마리아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바로 나에게도 일어난다는 그 신앙의 신비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세상 창조 때에 일어났던 일이, 교회의 시작 때에 일어났던 그 엄청난 일이 지금 여기서 또 다시 일어남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나에게 일어나는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가난한 주민을 주체로 내세우는 원칙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보다 더 불의하지도 않고 더 도덕적이지도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납득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네들이 우리보다 더 거룩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 그들을 섬기라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때까지 인내롭게 기다립니다. 시간이 한참 걸립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적어도, 그들을 한갓 우리네 복음 선포의 활동 대상으로 격하시키지는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그런 그들이 복음을 꺠달을 때 기적이 일어나지요. 그때까지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해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적어도 주님이 하시는 일에 내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테니까요.

 

넷째는 삶의 자리 불가침의 원칙입니다.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야 하는 현실 속에서 최소한도의 평등을 보장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먹고 입고 자고 하는 의식주 생활과 자존심에 직력된 인권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주거 생활과 관련한 인권입니다. 이를 주거권이라고 부릅니다. 국제연합에서도 기본 인권의 하나로 인정한 이 주거권이 우리 나라에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주거 현실로 인해서 우리 나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강제철거를 자행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상반되는이러한 반복음적 현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삶의 자리를 파괴해서는 안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아직도 가난한 이들에게는 고민되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예수와 함께 조심스러운 확신으로 우리도 말할 수 있습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다섯째는 공동체를 통한 사회 변혁의 원칙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혼자 힘만으로는 빈곤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살아가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를 이룩했을 때, 우리는 그 자체로 사회가 변혁되기 시작했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을 고립시키고 소외시키는 죄와 구조를 극복한 것이기 떄문입니다. 실제로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는 철거 현장에서 가옥주들의 조합과 관할 구청 공무원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가난한 이들이 이룩하겠다고 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아마도 먼 훗날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도 가난한 이들이 이룩하는 공동체들을 보고 우리도 한 번 제대로 된 공동체를 해보자고 자극을 받는다면 사회 변혁은 가속도가 붙겠지요.

여섯째는 주거 빈곤의 현실을 우선으로 해결하는 원칙을 들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통이 많이 있지만, 삶의 자리가 파괴되는 주거 빈곤이야말로 빈곤의 으뜸입니다. 고용의 불안도 있고 교육의 빈곤, 의료의 빈곤, 문화의 빈곤도 있지만 주거의 빈곤이 그 기본입니다. 그래서 빈민사목에서는 주거로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해결하고자 우선적인 순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원칙조차도 누군가가 책상 머리에서 착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30년 가까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해 온 무수한 익명의 선교사들이 시행착오를 거쳐 꺠닫고 정리해 낸 원칙입니다. 아직도 가난한 이들에게는 고민되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예수와 함께 조심스러운 확신으로 우리도 말할 수 있습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우리 삶에 비추어 본 복음 이야기 (4)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

--부르심에 관한 묵상--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기쁜소식으로 삼아 복음 진리를 전하자면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일이 부르심과 응답입니다.

 

복음선포의 첫 일, 부르심과 응답

지난 이야기에서 저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그 실체가 바로,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바탕 위에서, 거저 받은 그 하느님 나라의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 바로 복음화요 선교라는 것이지요. 덧붙여, 제가 이미 현장에 들어와 있는 익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몇가지 원칙 같은것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그 속에는 소수의 믿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온 역사성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 역사가 삼십 년이니까요. 이렇게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기쁜 소식으로 삼아 복음 진리를 전하자면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일이 부르심과 응답입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신는 일을 복음 선포의 첫 일로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북 되게 하겠다고 예수께서 어부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고 마르코는 전합니다(마르 1,17-18).

 

이렇게 해서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제자로 부르신 일에 대해 마르코는 3,14-15엣 그 뜻을 세 가지로 알려 줍니다.

첫째, 제자들을 당신 곁에 있게 하시려는 것, 둘째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려는 것, 셋째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라고요.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 세 가지 뜻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의 뜻은 당연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삶 안에서 다가온 것이기에 제자가 되려는 우리가 그분 곁에 있지 않고서는 복음 선포는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또 어느 누구에게든지 예수님과 함께 그분 안에서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살고, 일리며, 전하는 것이 복음화요 선교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도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하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가 제자로서 예수님 곁에 있겠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과 함께 있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현존의 태도가 자기 삶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낳고 해야 할 일에 대한 사명감을 줍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 그 태도가 모든 십자가를 짊어질 힘의 원천이 되어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힘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멀리까지 말씀의 물을 보낼 수 있는가가 달라집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힘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설 수 없는 약한 이들을 소외시킵니다.

둘째의 뜻은 하느님과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라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전한다 할 때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이요 그 말씀을 듣게 될 사람들은 세상에 있으니까요. 물론 그 내용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1요한 4,10)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분수입니다. 무룻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분수는 아래에서 위로 물을 뿜어 올립니다. 여기에 네 가지 작용이 있습니다. 모터의 힘으로 물을 위로 뿜어 올리는 상향작용, 위로 올라간 물이 옆으로 퍼지는 외향작용, 옆으로 퍼진 물이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하향작용, 그리고 아래로 내려온 물이 모터의 힘으로 가운데로 모이는 내향작용입니다. 분수의 물이 얼마나 멀리 옆으로 퍼질수 있느냐 하는 것은 모터가 물을 얼마나 높이 뿜어 올릴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 외향작용은 상향작용에 정비례합니다.

 

여기서 모터는 하느님의 힘에 비길 수 있습니다. 물은 사랑을 담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힘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멀리까지 말씀의 물을 보낼 수 있는가가 달라집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힘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설 수 없는 약한 이들을 소외시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힘을 받은 신앙 공동체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그만큼 가난한 이들이 자리잡고 있는 주변부까지 멀리 하느님의 말씀을 보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이들이 참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로써 하느님의 힘을 받아야만 우리의 활동과 삶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널리, 그리고 멀리 전할 수 있습니다. 주변부의 소외된 이들, 가지지 못해 가난한 이들, 혼자 설 수 없는 약한 이들에게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퍼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루가 5,4) 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까지 복음 말씀을 전하는 일은 기도로 하느님의 힘을 받는 일과 온전히 동일한 일입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했다고 무시당하는 가난한 이들, 남들 돈 벌 때 뭐했느냐고 멸시받는 철거민들, 수십년을 고향처럼 살아온 정든 산동네라도 종이 쪽지 한 장에 쫓겨나야 하는 세입자들, 이들을 보듬어 품에 안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르심의 셋째 뜻은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라는 영적 존재에 대한 견해나 신념이나 느낌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복음을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훼방꾼으로서의 마귀는 선교 현장에 어김없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활동 목표는 사람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막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 등 원래는 봉사와 사랑의 수단으로 생겨난 것들을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수단으로 쓰게 하는 것이 마귀의 활약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의 존재는, 그것도 점점 많아지고 빈곤이 대물림되어가는 현상은 마귀가 열심히 활약하고 있음을 한 눈에 알아보는 징표입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 현장에서는 마귀들을 만나신 예수님의 언행을 미루어 짐작할 만한 일들이 꽤나 많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했다고 무시당하는 가난한 이들, 남들 돈 벌 때 뭐했느냐고 멸시받는 철거민들, 수십년을 고향처럼 살아온 정든 산동네라도 종이 쪽지 한 장에 쫓겨나야 하는 세입자들, 이들을 보듬어 품어 안는 것이 우선은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주민활동가라고 부르는 빈민선교사들입니다. 이들이 가난한 주민들 속에서 스스로 가난한 주민이 되어 살아가는 원칙이 몇 가지 있습니다. 주민들과의 인간관계를 맺는 지혜인 셈입니다.

 

첫째는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주민을 안다는 것입니다. 주민들의 얼굴을 아는 일은 기본이고, 그들의 표정, 성장 과정, 성격, 기호, 감정까지를 알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활동가들입니다. 아이들의 이름을 아는 일도 필수적입니다. 주민들의 이름을 알더라도 입에 밴 이름은 흔히 누구 아빠, 누구 엄마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주민이 살고 있는 현장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 그 동네에 몇 사람이 살고 있는지(인구), 가족들은 얼마나 되는지(세대수), 집들은 어떠한지(주거형태), 서로가 함께 이용하며 정을 나눌 수 있는 시설은 있는지(공동시설), 무슨 일들을 하며 먹고 사는지(생업), 어떻게 일하러 다니는지(교통수단),등등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는 우리 지역의 문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남을 때는 무엇을 하는지(여가생활), 주로 시간을 보내는 수단이 텔레비전인데 이걸 보고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TV의 영향), 어떤 말투로 말하는지(언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어떻게 느끼고 사는지(정서), 식구들은 어떻게 하고 사는지(가족) 등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우리는 주민사이의 인간관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디서 주로 만나는지(장소), 무슨 이야기들을 주로 화제로 삼는지(대화), 또 이야기할 때 쓰곤 하는 말투의 숨겨진 뜻이 무엇인지, 다툴 때는 주로 무슨 일로 다투는지, 부부 사이에 싸움은 왜 벌어지는지, 이웃 주민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우리는 현장의 주민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활동가는 가난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도록 요구 받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비추어질 것이라는 편견도 버려야 합니다. 오로지 주민들의 눈으로 비추어진 자습의 모습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현장을 배우고 가난을 배우며 가난한 주민을 배운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언가를 가르치겠다고, 높은 데서 굽어보듯이 처신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선교 현장은 학위 없는 학교와도 같습니다. 일반 중산층 사회에서는 보기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워낙 우발적으로 때로는 은밀히 일어나기 때문에 일부러 취재하겠다고 고개를 들이밀어서는 아마 절대로 겪지도 배우지도 못할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는 가난한 주민들의 눈으로 비추어진 모습 가운데 우리가 얼마나 삶을 피상적으로 보고 있는지, 그동안 얼마나 겉치레에 길들여진 방식으로 살아왔는지를 절실히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우리는 주민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의 기술을 익힌다는 것입니다. 주민과 대화하는 방법, 주민들의 생각을 일깨우는 방법, 타성에 젖은 주민들에게 창의적인 행동을 유발시키는 방법 등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이 일은 살면서 그것도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살아가는 가운데 터득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일이 더 많을 일이 이 일입니다.

비단 가난한 이들에게만 그러하겠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 어떤 계층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기술을 익히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기술을 익히기는 참 어렵습니다. 비오 11세 교황께서 말씀하신 사회적 애덕이 이것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이 기술을 익히는 가운데 우리가 주님을 만나뵈옵지 않을까 합니다.

부르심을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의 힘, 봉사의 힘, 그리고 나눔의 힘을 받지 않고 내 힘으로만 또 내 식대로만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겠다고 한다면 사랑의 부도사태’, ‘봉사의 부도사태’, ‘나눔의 부도사태가 야기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일곱째는 우리는 역사의 어떠한 시점에 와 있는지를 주민들에게 알게 하고 우리도 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위주로 파악하던 관성을 떠나서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전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쳤는지, 현재가 어떻게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자신도 알고 주민들에게도 알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덟째는 우리는 하느님이 일을 맡은 청지기임을 명심한다는 것인데, 이상이 70년대에 가톨릭과 개신교가 합동으로 구성한 수도권 빈민선교위원회의 강령에 들어 있던 내용입니다. 이래야 가난한 이들을 주눅들게 하고 인간의 품위를 누리지 못하게 하며 결국 하느님께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이 활동가들입니다.

이른바 IMF 시대에 가난한 이들은 더욱 많아지고 더욱 가난해질 전망입니다. 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른 이유가 들어올 돈은 모자라는 데 많이 썼기 때문이라면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부르심을 듣지는 아니하고 제 나름대로 응답을 하겠다고 한다면 얼마 안가서 말씀의 부도사태가 초래되지 않을까요?

 

부르심을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의 힘, 봉사의 힘, 그리고 나눔의 힘을 받지 않고 내 힘으로만 또 내 식대로만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겠다고 한다면 사랑의 부도사태’, ‘봉사의 부도사태’, ‘나눔의 부도사태가 야기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어떠한지 귀 기울여 들어볼 일입니다.

 

우리 삶에 비추어 본 복음 이야기 (5)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35)

--가정에에 관한 묵상--

 

자살하고, 헤어지고, 길바닥에서 잠을 자고, 매맞아 쫓겨나고---, 이 모두가 다 가난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가정의 파괴 현상입니다. 지금의 이 위기는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이며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얼마전 청량리에 있는 임대아파트에 사는 여중생 네 명이 가난을 비관하여 20층 옥상 꼭대기에서 동반 투신자살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게 제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또 서울역 지하도에 밤 늦은 시간에 가보았더니 집을 나와 길바닥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 무려 5백여 명이나 무료 급식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서울역 대합실이나 지하도 맨바닥에서 잠을 잔다 했습니다.

 

그러기를 벌써 몇 년째 하는 이른바 부랑인들도 있고, 최근에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지방에서 올라와 잘 곳이 없어서 노숙하는, 아직은 말쑥한 실직자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실직 노숙자들이 많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을 많이들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부도가 나거나 직장에서 쫒겨나는 바람에 부부가 헤어지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일들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그런가 하면 마포의 한 산동네에서는 세입자가 강제철거에 맞서다가 매를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자살하고, 헤어지고, 길바닥에서 잠을 자고, 매맞아 쫓겨나고 ---, 이 모두가 다 가난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가정의 파괴 현상입니다. 더구나 우리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지금의 이 위기가 시작에 불과할 뿐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이며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에도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이만했을까요? 무르긴 몰라도 이천 년 동안에 인류가 발달시켜 온 물질 생산력을 생각하면 아마도 그 예날의 가난이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랫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시고 눈물을 닦아 주기도 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느라 분주하셨겠지요. 루가가 전하는 행복선언의 말씀이 실감납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루가 6,20-21).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행복해지고, 또 지금 당장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 배부르게 되는지, 그리고 지금 우는 사람이 웃게 되는지 대단히 궁금합니다. 아마 오늘 밤에도 서울역 지하도의 차디찬 맨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이 말을 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이 말씀이 배부른 소리라는 냉소어린 반응을 듣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6,20) 이라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으로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당신의 삶을 그들을 위하여 바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의 삶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그야말로 기쁜 소식, 즉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제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나 여전히 살아있는 진리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과 삶 안에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지금 가난하고, 지금 굶주리고, 지금 우는 이들에게 가져다가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가정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가정을 위하여 봉헌하신 정결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의 공동체, 즉 하느님의 가정이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가정이요 그분이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정결의 이유였습니다.

 

잃어버닐 냥들을 찾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활동이 좀 한다 하는 사람들로부터 더러운 악령에 사로잡혔다(마르 3,30)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작 가난한 이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가져다 주는 복음 선포였습니다.그런데 귀에 들려오는 사나운 소문 때문에 걱정이 되신 성모님께서도 친척들과 함께 예수님을 붙들러 찾아 나섰던 것이고, 그 날도(필경 가난한 이들이었을)군중들을 찾아가서 함께 계셨던 예수님과 성모님 일행이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속마음이 드러났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33-35).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새로운 가정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의 공동체, 즉 하느님의 가정이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가정이요 그분이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마태 19,12) 정결의 이유였습니다. 그분은 흔한 의미의 독신주의자는 아니셨습니다. 하느님의 가정아야말로 지상예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땅입니다. ‘하느님의 가정이 아니고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보여지고 체험되며 어둔 세상을 환하게 비출 현실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이심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태 6,9)로 가르치셨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신앙예 따르면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저 세상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현실에서는 우리의 육신도, 자유도 해소되어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만이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우리들은 그분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된다는 예수님의 계시를 가톨릭 신자들은 예비자 시절부터 교리로 배우고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다음에 틀림없이 다가올 현실을 이 현세에서 미리 살아가고 가르치셨고 사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까닭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요한 6,47)이라는 말씀을 듣고 있으며, 그 떄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임을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요한 6,47)이라는 말씀에 따라서 믿는 이들은 이미 하늘의 시민(필립 3,20)이라는 선언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현세 생활에설부터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람들을 다만 이웃으로만이 아니라 형제요 자매로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하느님의 가정을 이룩해야 할 소명을 우리 믿는 이들이 모두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가정이야말로 지상에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땅입니다. ‘하느님의 가정이 아니고서는 달리 하느님의 나라가 보여지고 체험되며 어둔 세상을 환하게 비출 현실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모범이 하느님의 가정을 이룩하는 데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신앙의 기본 진리를 모르고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자기 식구들만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 자식 간이나 부부 간이나 현세적인 인연들은 죽음으로 모두 해소되어 버립니다. 남남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세에서야 육신적인 한계가 있어서 모든 사람을 다 알 도리도 없으려니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알량한 자유가 남용되기 일쑤여서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이 외면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 내세에 가면 모두 다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미워했던 사람, 외면했던 사람까지도 다 만나게 되지요. 하느님의 사랑만이 다스리는 그 새로운 현실에서 도망칠 자리도 없고 외면할 자유도 없이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마태 25,40)이라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번 사순절에 여러 본당에서 특별강론하는 자리에서마다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본당마다 제법 많은 기혼여성 신자들이 적지않은 충격을 받는 것을 보고 제가 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네 신앙이, 순교자들의 피로 물려받은 한국 천주교 신앙이 어느새 이기적인 신앙이 되어 버렸구나 하는 생각에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요즘처럼 가난한 가정들이 파괴되고 무너지고 흔들려도 중산층 가정들은 자기네 가장들의 실직 여부, 소득의 감소로 어려워진 살림 형편에만 관심을 두고 자기 식구들만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자식을 낳아 길러봐야 부모님께 대한 고마움을 깨우치게 되듯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다른 이들에게 전해 봐야 비로소 알게 되고 꺠닫게 됩니다. 자기 식구들에 대한 기본족인 사랑을 넘어서서 더 못한 가정에게로 사랑이 흘러갈 때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 철이 드는 셈입니다.

우리네 가정은 하느님 가정의 성사입니다. 가정의 현실에서, 특히 사랑의 현실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가정에서 필요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가정에서 배우는 사랑의 공리가 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사랑은 받아서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자녀에게 갚습니다. 누구나 자기를 낳고 기른 부모님보다는 자기가 낳아 기르는 자녀에게 마음이 더 기웁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그렇습니다. 그래도 자녀들은 아직 고마움을 모릅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아직 어려서 그런 것입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길러봐야 뒤늦게 자기 부모님께 대한 고마움이 깨우쳐지듯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다른 이들에게 전해 봐야 비로소 알게되고 깨닫게 됩니다. 자기 식구들에 대한 기본적인 사랑을 넘러서서 더 못한 가정에게로 사랑이 흘러갈 때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 철이 드는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감사할 줄을 알게 되니까요. 이 어려운 시기에 열 가정이, 아니 백 가정이 어려운 한 가정씩에게만 관심을 쏟아도 아이들이 아이들이 자살하고 부부가 에어지고 멀쩡했던 가장들이 흩어져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하는 가정 파괴 현상은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신 하느님의 가정이 든든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정결은 혼자만 편하자고 하는 이기적인 독신이나, 역시 자기 식구들하만 잘 살자는 이기적인 결혼을 넘어서서 하느님께 소중한 제물로 자신의 성()과 가정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대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더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7)고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한테서 받은 사랑도 그 누군가에게 갚아야 하니까요.

 

가정에서 발견되는 둘째 사랑의 공리는 사랑은 주는 데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하며 사랑가는데 아이들이 그 희생을 모른다고 부모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부모의 희생을 거저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아이들이 갓 태어나서 자라면서 부모 얼굴을 알아보고 눈을 맞추기도 하며 뜻도 알 수 없는 말을 더듬더듬 중얼거리고 걸음마을 걸으며 재롱을 피우고 튼튼하게 자라는 그 모습 자체게 부모에게는 더 없이 큰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나중에 연로하신 부모님께 효도하고 공양해야 함은 자식된 도리일 뿐 그걸 기대해서 자식에게 갖은 정성으로 공을 들이는 부모는 없습니다. 있다면 비정상이지요. 이 세상의 부모된 사람들은 자식을 키우는 데서 오는 그 기쁨과 보람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고생의 대가를 이미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 어려운 가정들에게 전한다 할 때 무슨 대가나 보상을 기대해서는 참된 사랑이 되지 못하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상급을 스스로 줄이는 것이 됩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는(마태 6,3-4) 것이 옳은 일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천주교에 입교 하기를 부지불식간에 기대하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어차피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만이 움직이실 수 있는 것, 자그만 호의를 베푼 것을 가지고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에다 섣불리 비긴다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다 섣불리 비긴다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베풀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 안에 이미 우리가 사랑하느라 치루신 희생을 갚고도 남는 기쁨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는 보람이요 하느님의 가정을 이룬다는 긍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살아가시는 힘이요 영적인 양식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요한 4,32)는 말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베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안에 이미 우리가 사랑하느라 치루는 희생을 갚고도 남는 기쁨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는 보람이요 하느님의 가정을 이룬다는 긍지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사랑의 공리로 가정이 유지되듯, 하느님의 가정도 받아서 주고주는 데서기쁨을 찾는 참된 사랑으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디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랑의 현실입니니다.

누구든지 믿는 대로 살지 않으면 자기가 사는 대로 그것이 옳다고 믿게 됩니다. 믿는 일에 있어서도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1고린 10,12). 사제나 수도자들에게서 결혼하지 않고 사는 독신이 무슨 벼슬인 양 귀족처럼 처신하는 모습을 가끔 봅니다. 혼배성사를 받은 평신도들에게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독차지한 양 자기 식구들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모습도 흔히 봅니다. 하지만 정결의 기준은 예수님이십니다.

 

독신을 선택하든 결혼을 선택하든 우리의 성()이 하느님의 가정을 이루는 사랑의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정결한 성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가정들이 이 IMF 태풍을 만나 사상 초유의 고통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침 가정의 달이자 성모님의 달인 이 오월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예수님 대신 여러분에게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의 가정을 이룩하는 정결의 은총으로 우리 주변의 어려운 가정들에게, 그 중에서도 가장 고통받는 가정들에게 사랑의 관심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비추어 본 복음 이야기 (6)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마르 4,30) ----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 나타난 삶의 현실 묵상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 곧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의 형식이야말로 이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는 예수님과 그렇지 못한 군중들이 서로 대화 할 수 있는 통로요 연결 고리였습니다.

 

예수님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셨나 봅니다. 듣는 사람에 맞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양식이 비유입니다. 대표적인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3-9)이지만 등불이 비유(4.21-25)겨자씨이 비유(4,30-32)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태오는 훨씬 더 많은 비유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 누룩의 비유(13,33), 보물과 진주와 그물의 비유(13,44-50)가 마태 13장에 모여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의 다른 장에도 드문드문 비유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18,10-14), ‘무자비한 종의 비유’(18,23-35)가 나오는가 하면, ‘포도원 일꾼의 비유’(20,1-16)도 있고 두아들의 비유’(21,28-32)에다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6), ’혼인 잔치의 비유‘(22,1-4), 그리고 무화과 나무의 비유‘(24,32-35)도 나옵니다.

 

루가도 충성스런 종의 비유’(루가 12,35-48)에다가 잃었던 아들의 비유’(15,11-32), ‘약은 청지기의 비유’(16,1-15)하며 금화의 비유’(19,11-27) ‘무화과 나무의 비유’(21,29-33) 등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이 전하는 포도나무의 비유’(요한 15,1-10)밀알의 비유’(12,24-25)와 함께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비유에서는 말씀을 듣는 우리의 처지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러 주셨다면, ‘등불의 비유에서는 그 말도 이야기도 비록 소리 없어도’ (최민순 역 시편 19,3) 퍼져 나가는 말씀의 진리성에 대해 일러 주셨으며, ‘겨자씨의 비유에서는 말씀이 전해지는 과정이 처음에는 아주 작은 시작이지만 나중에는 엄청난 결과로 나타날 것임에 대해 알려 주셨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시작부터 너무 요란스럽게 하지 말라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흔히 겪는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지혜를 말해 줍니다. 가라지를 뽑는 일보다도 밀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무릇 일을 하자면 겪게 되는 숱한 갈등 속에서도 일이 되게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누룩의 비유는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이야기로서 세상 안에서 는 소수인 선각자들의 사명에 대해 일깨워 주시려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보물의 비유진주의 비유는 아마도 예수님 자신의 체험이 담긴 듯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사기 위해 기뻐하며 자신이 전 재산을 파는 사람처럼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자신의 전 인생을 바치게 된 것이라는 말이지요. 핵심은 기쁨에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의 기본 자세를 알게 합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는 평소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또 말씀을 전하는 이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일깨워 주시려는 말씀 같습니다.

 

지금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 할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아마도 무자비한 종의 비유만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묘사된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곱씹어 볼수록 스스로 겸손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회개는 요청이지만 그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명령입니다. 적어도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게는 그렇습니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들으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회 현실에 대해 민감하셨음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또 분명히 공평하지 않았던 그 당시 고용주들의 처사를 묘하게도 역전시키셔서 하느님 나라의 무상성에로 연결시키는 지혜가 돋보입니다.

이렇게 의미가 역전되는 것은 루가 16장에 나오는 약은 청지기의 비유와도 흡사합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는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로서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주 쉽사리 큰아들고 동일시하게되는 우리이 교만스런 마음을 흔들어 놓는 채찍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러 비유 이야기들은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듣는 이로 하여금 곰곰이 생각하게 이끌어 주는 맛이 있습니다. 믿는 이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운명은 포도나무의 비유밀알의 비유에서 잘 드러납니다.

지난 4번에 분수의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아마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기를 좋아하시는 예수님이시라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분수에 비길 수 있다. 모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마련이지만 분수에는 전동기가 달려 있어서 주변의 물을 빨아 들여 높이 뿜어 올린다. 높이 솟아 오른 물은 그 높이만큼 멀리 뻗게 된다. 우리의 마음도 세상이라는 물 한가운데 있는 성령의 힘에 빨려 들어 그 힘으로 본성을 넘어 높이 솟구쳐야만 하느님의 사랑을 멀리까지 전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마음이 성령의 힘을 받는 일이 기도라면 그 힘으로 멀리 뻗어 나가는 일은 사랑의 선포라 할 수 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선포할 수 없다.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모여든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 곧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마태 13,34).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통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를 제자들은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했기(13,11) 때문입니다. 비유의 형식이야말로 이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는 예수님과 그렇지 못한 군중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통로요 연결 고리였습니다. 그러기에 비유에 담긴 뜻을 필요 이상으로 자상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르4,9) 하고 듣는 이에 따라서는 냉정하게 잘라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그 신비를 겪어보고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신비를 알리며 또 어떻게 초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고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민은 오늘날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똑같이 해당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드링 신아의 관점에서 행하는 그 모든 공통체 생활과 사도직 활동이 사실은 다 비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부분적이되 담고 있는 것은 전체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타난 것은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것이지만 숨겨진 것은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 세상에서 서로 받아들여 주는 하느님의 가정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그 신비를 겪어 보고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신비를 알리며 또 어떻게 초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고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민은 오늘날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이 고민의 결과로 등장하는 것이 비유라는 언어 형식이며, 또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많은 기적들도 사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들이라고 볼 때 하나의 비유적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의 언어와 비유적 행동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려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겨자씨의 비유가 하느님 나라의 조용하고도 소박한 시작과 더불어 위력적인 성장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라자로의 소생 사건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부활이 먼 훗날이 아니라 이미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현재의 사건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였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유가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점과 이울러 비유를 듣는 청중이 알아들을 만한 익숙한 소재를 동원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의미는 말하는 쪽에서 가져가되, 형식은 듣는 쪽에 맞추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듣는 청중의 인생 경험이나 직업 경험을 고려하신 것 같습니다. 농부들 앞에서라면 당연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13,1-9)라든지 가라지이 비유(13,24-30), 겨자씨의 비유(13,31-31), 보물의 비유(13,44)등을 말씀하셨을 테고, 그 중에서도 포도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20,1-16)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6)가 어울리고, 어부들 앞에서는 그물의 비유(13,47-50)가 적당했을 것이며, 주부들에게라면 누룩의 비유(13,33)가 제격이었을 겁니다. 목동들에게라면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18,10-14)가 주효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만큼 사회 현실을 알고 있는가, 소외되고 버림받은 가난한 이들에게 그들의 체험에 맞는 비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신앙 생활도 사회 현실에 육화되어 있는가? 현실 안에 살아 있는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가?

이렇듯이 다양한 비유 형식을 자유자재로 동원할 수 있으려면 예수님 자신도 그 형식에 동원되는 삶의 현실들을 체험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르고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니까요. 이 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는 사실입니다.

농부들에 대한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 겨자씨, 밭에 묻혀 있는 보물 등등에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농사일을 거들어 보았어야 할 테고, 어부들 앞에서 그물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물고기를 잡아 봤어야 할 것이며, 목동들하고 이야기를 할래도 양을 돌보지 않고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겁니다.

 

마침, 포도원 일꾼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오늘날 고실업 시대에 접어든 우리 사회의 현실을 연상케 합니다. 이른 아침에 고용한 일꾼들은 그렇다 치고 아침 아홉 시쯤이나 열두 시, 오후 세 시 그리고 심지어 오후 다섯 시쯤에도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채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 시대에도 실직자들이 제법 많았기 때문일 것이고, 그 당시 실직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반성케 하지요. 우리가 예수님만큼 사히 현실을 알고 있는가. 소외되고 버림 받은 가난한 이들에게 그들의 체험에 맞는 비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신앙 생활도 사회 현실에 육화되어 있는가. 흔히 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하는것처럼 생기 없는 관념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 볼 일입니다. 우리네 삶이 예수님처럼 비유적이려면 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보아야 하지만 발은 땅위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 안에 살아 있는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말입니다.

 

우리 삶에 비추어 본 복음 이야기 (7)

그래도 아직 모르겠느냐?” (마르 8, 21)

---- 예수의 기적에 관한 묵상 -----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가난한 저소득 노동자들의 가정에는 별로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역사상에는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을 일으켜보려는 사람들이 늘 있었습니다.

IMF 한파가 몰아닥친 이후 가난한 이들에게는 주거의 빈곤에 이어 고용의 빈곤으로 말미암은 고용의 빈곤으로 말미암은 고통의 바람이 한층 매섭게 불어오고 있습니다. 사실 이 IMF 한파가 불어닥치기 이전에도 가난한 이들은 절반쯤 실직된 상태에서 사랑가고 있었습니다. 장기화된 불황 속에서 매우 불완전한 고용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달씩 임금이 체불되는가 하면 하루 아침에 일거리가 없다고 쫓겨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나고 있었습니다.이른바 임시직, 일용직에 종사하는 노동자 들입니다.

 

게다가 5인 미만인 영세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길거리에서 좌판이나 노점을 생계를 영위하는 노점상들, 영세한 자영업자들까지 합치면 이들 저소득 노동자들이 약 칠백만 명쯤 됩니다. 이들 중 특히 일용직 노동자들은 작년까지만 해도 한 달에 20일 이상은 일할 수 있었던 것이 올해 들어서는 평균 6일밖에 일을 못할 정도로 일거리가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임금 수준 역시 5분의 1정도로 확 낮아졌습니다.

이쯤되면 생활의 빈곤을 넘어서서 생존의 위협을 받을 지경입니다. 이렇게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가난한 저소득층은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 실업자 통계 약 150만 명을 두 배 이상 웃도는 4백만 명을 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노동기구에서는 1주일에 16시간 이하로 일하는 경우에는 모두 실업자로 간주하는 데 비해, 우리 정부의 통계는 1주일에 1시간 이상만 일해도 취업자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용직, 임시직 노동자들이 저소득 취업자로서 실업자 아닌 실업자 생활을 하는 동안 정부로부터는 고용보험을 비롯한 실업재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합니다. 산업재해 보험, 직장의료보험, 국민연금보험의 혜택 역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째서 빈입빈 부익부 현상이 생기는지를 알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지출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은행 등에 많은 돈을 예금해 놓을 수 있었던 부유층들은 고금리 시대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빈부격차가 어느새 훌쩍 커져버렸습니다. 그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기적이 인어나지 않는 한 가난한 저소득 노동자들의 가정에는 별로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역사상에는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을 일으켜보려는 사람들이 는 있었습니다. 고리대금과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금을 모아 신용을 쌓게 하고 노동고 경영과 분배를 자율적으로 함으로써, 자립하도록 북돋아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이들을 일컬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비웃었지만, 이들은 굴하지 않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여 마침내 가난한 사람들의 힘을 모아 일어설 수 있는 경로를 발견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협동조합입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장점으로 삼는 개인의 창의성을 기본으로 하고, 또 공산주의가 생명처럼 여기는 개인 간의 평등을 축으로 하는 절묘함이 있습니다. 자본보다 사람을 위하고 통제보다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복음적 가치가 협동조합에는 담겨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자본주의로부터는 권력으로 소외당하지만, 협동조함으로부터는 격려와 희망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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