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 구약성경입문 - 일반구약성경입문 -
성경을 펼치기 전 우리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성경의 외형에 대하여 우선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 한 권의 훌륭한 작품이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한 순간 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이처럼 잘 집대성된 작품이 탄생되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적어도 성경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야 할 신학도로서는 이 문제에 대한 탐색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성경 특히 구약성경은 어떤 언어로 저술되었는가, 현대어 번역본들의 원본 역할을 하고 있는 필사본들은 어떠한 것이 있으며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은 무엇인가를 다루며 아울러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문제까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I. 성경 언어
1. 히브리어
히브리어는 서아시아, 아라비아 및 아프리카 동북부에 살고 있던 셈족(Sem族) 가운데 극서 아시아 지방에 위치한 이스라엘 민족이 사용하던 언어로서 모든 셈어가 그러하듯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언어이다. 구약성경 대부분이 이 히브리어로 저술되어 있으나, 이스라엘 민족의 언어와 문자가 ‘히브리 말’로 불리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인 기원전 2세기경의 일이다(집회서 머리말 참조). 기원전 5세기 느헤미야는 ‘유다 말’이라 지칭하고 있으며(느헤 13,24; 2열왕 18,26 참조), 기원전 8세기의 이사야는 ‘가나안 말’이라 부르고 있을 뿐이다(이사 19,18).
2. 아람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이 지방엔 유목민이며 동시에 정착생활을 하고 있던 아람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 아람족은 어떤 정치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는 못했었지만, 최소한 그들의 언어만큼은 아람(시리아)으로부터 시작해서 전(全) 메소포타미아 지방(지금의 중동)에 널리 파급되어 있었다.
기원전 8세기말까지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그저 지식층에 속하던 사람들만이 이 아람어를 이해하고 있었으나(2열왕 18,26), 바빌론 유배시대(587-538)를 기점으로 아람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그리스도 시대에는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된다. 구약성경에서 아람어로 저술된 부분은 창세기 31장 47절에 나오는 두 개의 단어, 예레미야서 10장 11절, 다니엘서 2장 4절-7장 28절, 그리고 에즈라기 4장 8절-6장 18절과 7장 12절-26절이다.
3. 희랍어
기원전 4세기 말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희랍제국을 건설한 후 보급되기 시작한 언어로서 본토 희랍어에 비해 문법이 간편하고 셈어적인 경향이 농후한 언어이다 (Κοινή라 칭함). 1947년부터 전개된 꿈란(Qumrân)공동체 발굴 이전까지 가톨릭의 제 2경전은 집회서 이외에는 희랍어로만 전해져 내려 왔으나, 발견이후 마카베오기 하권과 지혜서 이외의 전 구약성경이 본디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저술되었음이 확인되었다.
Ⅱ. 성경 필사본 및 번역본
1. 히브리어 필사본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 필사본 가운데 다음 세 가지 필사본이 가장 중요시되고 있다:
■ Codex Pentateuchi(창세 39,20-신명 1,33) : 10세기에 필사된 것이며 현재 런던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Codex Prophetarum 또는 Cairensis(예언서) : 895년에 필사된 것이며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Codex Petropolitanus 또는 Leningradensis(구약성경 전체) : 1008년에 필사된 것이며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대표적 필사본들은 8-9세기경의 유다인 학자들(일명 Massora학자들)이 발음의 획일성을 기함과 동시에 확고한 히브리어 성경원본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이제까지 전혀 없었던 모음부호를 창안해 표기해 가며 정성 들여 필사한 사본을 원본으로 해서 이루어진 사본들이다. 이 가운데 구약성경 전체를 담고 있는 Codex Petropolitanus를 정리하여 독일의 키텔(Kittel)이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1937년 ‘Biblia Hebraica’(BHK)라는 책이 출간되었으며, 이후 이 작품은 현대어 번역본들의 원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필사의 필사를 걸쳐 내려온 것이 이들 필사본들이고 보면 그 정확성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취할 수 있겠으나 1947년부터 시작된 꿈란(Qumrân)의 고고학적 발굴결과가 이러한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시켜 주었다. 유다교 에쎄네(Essene)파로 추정되는 공동체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자리 잡고 있던 꿈란과 그 인근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은 실상 성서학계에 획기적인 연구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곳에서 에스테르기와 마카베오기 하권을 제외한 전 구약성경이 최소한 단편이라도 발견되었으며, 제 2경전에 속하는 성경 가운데 상당수가 셈어인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발견되었고, 특히 사무엘기의 경우 기원전 3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필사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 곳에서 발견된 필사본들의 아람어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순수한 자음만으로 구성된 언어이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이곳에서 발견된 필사본들이 우리가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필사본들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필사본들의 정확성은 다시금 입증되었다. 즉 1000년간의 공백기간이 야기할 수 있는 필사본들의 정확성 문제가 해소된 셈이다. 또한 무라바아트(Muraba`at)에서 발견된 성경 필사본들과 기원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필사본들 역시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2. 희랍어 필사본
희랍어 성경 필사본들 가운데서 구약성경 전체를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들은 Codex Sinaiticus(4세기경 필사,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Codex Vaticanus (4세기경 필사, 바티칸박물관 소장), 그리고 Codex Alexandrinus(5세기경 필사,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이다. 이 필사본들은 기원전 3세기경부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 칠십인역본(七十人譯本: Septuaginta 또는 LXX)의 사본들이다.
‘칠십인역본’이라는 서명(書名)은 기원전 3세기에 쓰인 아리스테아(Aristea)라는 사람의 편지 내용에서 비롯된다. 편지 내용에 의하면 당시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282-246)가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유다인들을 위한 율법서 하나를 제공해 주기 위해 예루살렘의 대제관 엘레아자르(Eleazar)에게 성경 번역자들을 파견해 주기를 요청한다.
이러한 요청을 받은 대제관 엘레아자르는 예루살렘의 유다인 학자 72명을 선발하여 알렉산드리아로 파견하게 되며, 이집트 왕은 이들을 지중해 연안 파로스(Pharos)라는 조그마한 섬으로 보내 히브리어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하게 한다. 섬에 자리 잡은 이들이 72일 만에 번역작업을 마쳤다는 전설적인 편지 내용에 따라 이후 ‘칠십인역본’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학자 필론(Philon: 기원전 13년-기원후 54년),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F. Josephus: 37-100년),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Irenaeus: 140-202년), 희랍계 그리스도교 문필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150-215년)는 이와 같은 전설적인 편지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현대 성서학계는 이 편지 내용 가운데 히브리어 성경이 기원전 3세기경부터 서서히 희랍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그 중 모세오경이 우선적으로 번역되었다는 사실만을 인정하고 있다.
이 희랍어 역본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한 팔레스티나의 유다교는 비교적 후기에 그들 나름대로 몇 개의 새로운 번역본 또는 교정본을 내놓게 된다: Aquila본(130년경의 번역본으로서 셈어 경향이 농후), Symmachus본(170년경의 번역본), Theo- dotion(2세기말의 교정본). 한편 번역본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오리게네스(Origenes : 185-254년)의 Hexaples역시 성경 본문 비판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3. 기타 번역본
번역본으로서 시리아어 또는 꼽트어 번역본 등이 있으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번역본은 역시 라틴어 번역본이다. 예로니모(Sophronius Eusebius Hiero- nymus : 347-420년)시대 이전 여러 개의 신구약성경 라틴어 번역본들이 보급되어 있었으나 교회의 공식 감독을 받아 이루어진 작품들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조잡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정을 직시한 교황 다마소(Damasus: 366-384년)는 자신의 비서 예로니모로 하여금 우선 신약 사복음서의 라틴어 번역본 교정작업에 착수토록 한다. 교황 서거 후 예로니모는 이 교정작업에 만족하지 않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 베들레헴으로 자리를 옮겨 19년(387-405)에 걸친 각고 끝에 신구약성경 전체를 새로이 라틴어로 번역하게 된다. 예로니모의 대작인 이 라틴어 번역본이 7세기경부터 가톨릭교회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대중용이라는 의미의 ‘불가따’(Vulgata)로 불리면서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다.
Ⅲ. 성경의 정경화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그리스도 시대의 유다인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공동체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팔레스티나(Palestina) 공동체
아람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희랍어나 라틴어는 그저 외국어로만 사용하였다.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체험한 공동체로서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 디아스포라(Diaspora)공동체
팔레스티나 이외의 지역, 특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공동체로서 희랍어를 사용하였고 희랍문화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진취적이며 활달했던 공동체로서 Septuaginta를 고유 성경으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초대교회 신자들이 팔레스티나에 머물러 있었던 기간은 상당히 짧았다.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전후로 많은 신자들이 고국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자연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동족인 디아스포라 유다인들과 접촉을 갖게 되었으며, 희랍어를 사용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래서 신약성경은 희랍어로 저술되었다- 이 공동체가 사용하고 있었던 희랍어 성경을 구약성경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구약성경 구절은 거의 대부분 Septuaginta에서 인용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입증해 준다. 따라서 초대 그리스도교가 Septuaginta를 아무런 이의 없이 구약성경으로 받아들인 시점은 대략 70년 직후로 보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티나 공동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주축으로 유다교 성경의 정경화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95년경 얌니아(Jamnia: 지금의 Yabne로서 예루살렘 북서 48km 지점에 위치)에 모여 39권만을 성경으로 채택하게 된다. 이 모임은 분명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탄생으로 대두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함에서였을 것이다. 7권을 왜 성경목록에서 제외시켰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 유다교와 가톨릭교회와의 갈등관계를 고려해 볼 때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미 Septuaginta를 성경으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히브리어만이 하느님 백성의 언어라는 아집과 아울러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자신들에게 비교적 생소한 7권의 저서를 성경 목록에서 제외시켰으리라는 추측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교부시대에는 정경화 문제에 대하여 어떤 어려움이 없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팔레스티나의 정경(TM: Textus Massoreticus)이 알렉산드리아의 정경(Septuaginta)과 그 목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으나 논쟁 상대가 팔레스티나의 유다교도들이었던 만큼 그들이 인정하고 있던 정경을 중심으로 호교론적 논쟁을 전개시켜 나갔다.
이와 같은 입장을 고수한 대표적 교부들로는 유스티노(Justinus: 100?-165년?),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년), 에우세비오(Eusebius: 260?-339년), 아타나시오(Athanasius: 295-373년), 예루살렘의 치릴로(Cyrillus: 315?-387년)등이 있으며 이들의 영향을 받은 서방교부들로는 루피노(Rufinus: 345-410년)와 예로니모가 있다. 그러기에 380년에 개최된 라오디케이아 지역공의회는 이른바 제2경전에 대하여 비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듯 하나, 교부들은 기존 신자나 예비신자의 교육을 위해서는 물론 전례 안에서도 제2경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와는 달리 처음부터 경전 사이의 어떠한 차별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년)의 영향 하에 예로니모와 동방교회의 입장을 반대하여 히포(393년)와 카르타고(397년과 419년)에서 지역공의회가 개최되었으며 이때 동방교회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던 작품들이 정경으로 재공인되기에 이른다. 인노첸시오(Innocentius) I세(401-417년) 교황 역시 405년에 뚤루즈의 엑쥐뻬르(Exupère)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결국 동방교회는 692년 콘스탄티노플 궁전내의 트룰론(Troullon)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고서 서방교회의 정경 목록을 존중하여 제2경전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이렇게 본다면 트리덴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재천명되는 구약 정경 목록 확정은 아우구스티노의 업적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어떠한가 ?
1517년 종교개혁을 단행한 독일의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신구약성경을 독어로 번역하면서 구약성경의 경우 가톨릭의 공인성경이었던 라틴어 번역본 Vulgata가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을 원본으로 채택한다. 이때 마르틴 루터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7권의 성경을 목록에서 이의 없이 삭제하고 유다교와 마찬가지로 39권만을 프로테스탄트 성경으로 수용한다. 종교개혁으로 야기된 각종 문제에 대해서 가톨릭교회는 공식입장을 표명해야만 했으므로 트리덴트(1545-1563년) 공의회를 소집하고 구약성경에 관한 한 46권의 정경성을 재천명하게 된다.
끝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성경에 관한 용어 가운데 혼동을 주는 용어가 있기에 이를 정리하고자 한다. 가톨릭은 구약의 경우 정경인 46권 이외의 그 유형상 성서적 작품들(예: ‘十二聖祖의 遺訓’, ‘헤녹서’, ‘므나쎄의 기도’, ‘제3 에즈라기’)을 가리켜 Apocrypha(外經)라고 하나,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의 제 2경전을 Apocrypha(外經), 그 밖의 다른 작품들 즉 가톨릭의 Apocrypha를 Pseudepigra- pha(한국 프로테스탄트는 이를 僞經으로 번역)라 부르고 있다. 신약의 경우는 양자간 정경목록의 차이가 없으므로 27권 이외의 작품을 가리켜 Apocrypha, 즉 외경이라 한다.
☞ 참고문헌
성경본문및 번역본 :
-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Deutsche Bibelstiefung, Stuttgart, 1967/77.
- Septuaginta, Deutsche Bibelstiefung Stuttgart, 1935.
- Vulgata, Vol. I-II, Deutsche Bibelstiefung Stuttgart, 1975.
- La Bible de Jérusalem(BJ), Cerf, Paris, 1978. - The Jerusalem Bible.
- La Bible, traduction oecuméniaue(TOB), Cerf, Paris, 1991.
- Die Bibel, Herder, Freiburg, 1980.
- The New English Bible, Oxford-Cambridge, 1970.
-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London, 1977.
- 성경,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 구약성서, 선종완 譯,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59-1976.
창세, 탈출-레위, 민수-신명, 여호-판관-룻, 사무 상-하, 열왕 상-하, 성 영(시편), 이사, 예레-애가-바룩.
성경연구방법론 :
- E. Würthwein, Der Text des Alten Testament, Stuttgart, 1973.
- K, Koch, 聖書註釋의 諸方法, 허혁 譯, 분도출판사, 1975.
- W.A. Beardslee 外, 성서연구방법론, 황성규 譯, 한국신학연구소, 1985. - J.H. Hayes & C.R. Holadays, 초보자를 위한 성서주석, 박광호역, 성바오로 출판사, 1992.
제2장 : 성경지리 개관 - 구약성경입문 -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지금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토에 관한 문제였다.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건네시는 축복과 약속 또는 저주의 말씀 속에 이 개념은 핵심적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된다(창세 1,29; 2,17-18; 12,1-3; 여호 1,2-5; 판관 2,20-23; 예레 30,10; 에제 36 등).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그들의 역사가 그러하듯 구체적인 “땅”위에서 펼쳐졌다면 그에 대해 살펴봄이 성경이해에 근본적 도움이 되리라 본다.
Ⅰ. 팔레스티나 지방
팔레스티나는 홍해, 지중해, 흑해, 카스피해, 페르시아만으로 둘러싸인 근동지방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까지 이르는 반달모양의 비옥한 평야(Fertile Crescent)가 이 지방을 통과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 특수성이 예나 지금이나 이 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지방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해안평야, 중앙산맥, 요르단 지구(地溝), 트란스요르단(Transjordan) 순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해안평야
■ 아세르(Asher) 평야
성경에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으나 레바논과 카르멜 산 사이에 펼쳐 있는 평야로서 아코(Acco)와 악집(Akzib)이 이곳에 위치해 있다.
■ 도르(Dor) 평야
카르멜 산 남부 도르를 중심으로 발달된 평야로서 후에 해양민족인 체커(Tjekker)에 의해 점령된 것으로 본다(여호 11,2; 12,23; 1열왕 4,11).
■ 사론(Sharon) 평야
성서적으로 보다 중요한 평야로서 길이가 59km, 폭이 15km에 해당하는 상당히 넓은 평야다(이사 33,9; 35,2등).
■ 필리스티아(Philistia) 평야
사론 평야 남부에 발달된 평야로서 곡물이 풍요한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거의 같은 시기에 이집트 왕 라메세스(Ramses) 3세에 의해 밀려난 해양민족이 이 지방을 점령한 것으로 본다. 주요 도시로는 가자(Gaza), 아스클론(Ashqelon), 아스돗(Ashdod), 갓(Gad), 에크론(Eqron) 등이 있다.
2. 중앙 산맥
■ 갈릴래아(Galilaea) 산
북쪽은 1,200m, 남쪽은 200-300m 높이의 산으로서 구약성경에 6번, 신약성경에 62번 언급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갈릴(ליꗜꔿ)은 ‘지방’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될 때가 있는가 하면(여호 13,2)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일 때도 있다(여호 20,7; 1열왕 9,11).
■ 이즈르엘(Yizreel) 평야
중앙산맥은 이 평야에 의해 단절되는 듯 보인다. 이 평야는 이사카르 지파에 속해 있던 대단히 비옥한 평야로서 지명 역시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לא꘡ꙣꖅꖹ: 하느님께서 심으시다). 이 평야는 또한 요르단과 해안평야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상업적, 군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지역이다. 주요 도시로는 요크네암(Yoqneam), 므기또(Megiddo), 타아낙(Taanak), 벳 스안(Beth-shean)이 있다.
■ 므나쎄(Manasseh) 산
성서적 지명은 아니나 스켐(Sechem)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이다. 북으로 에발(Ebal)山(940m), 남으로 그리짐(Gerizim)山(881m)이 위치해 있다.
■ 에프라임(Ephraim) 산
스켐과 베텔(Bethel) 사이에 위치한 산으로서 성경에 자주 나타난다. 때로는 ‘유다 산’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 산’이라고도 불린다. 성소(聖所)로서 실로(Silo)와 베텔이 있다.
■ 유다(Juda) 산
에프라임 산과의 뚜렷한 경계를 찾기는 힘드나 대략 텔 하초르(Tell-Hazor)에서 브에르 세바(Beer-sheba)에 이르는 800-1000m 높이의 산으로 본다. 이 산이 성경에서는 종종 관사와 함께 ‘산’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다(여호 9,1; 10,40).
■ 세펠라(Shephelah)
유다 산 서부에 위치한 비교적 낮은 지방으로서 군사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했다. 해안지방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적군들을 일차 저지할 수 있는 훌륭한 방어벽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방에는 다수의 요새지가 있었다(여호 15, 33-47; 2역대 11,5-10).
■ 유다 광야
요르단 골짜기로부터 유다 산을 갈라놓는 지역으로서 항상 메말라 있으나 한편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신약성경에서는 예루살렘 동부에 위치한 모든 지역을 일컬어 유다광야라 부르기도 한다(마태 3,2).
■ 네겝(Negeb)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으나 유다 산 남단에 위치해 있다. 성경에서는 유다 지방을 설명할 때 유다 산, 세펠라와 함께 몇 번 언급되고 있다(신명 1,7; 여호 10,40; 11,16; 판관 1,9).
3. 요르단(Jordan) 지구(地溝)
요르단 지구는 헤르몬(Hermon) 산에서 아카바(Aqaba) 만에 이르는 420km의 지구를 가리키나, 성경에서는 그 이름과 범위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골짜기(여호 13,19.27), 아라바(Arabah, 신명 1,7), 지방(신명 34,3) 또는 평야(1마카 5,52)라 불리기도 한다. 이 가운데 특히 아라바라는 지명에는 유의해야 한다. 여호수아기 11장 2절과 12장 3절은 티베리아스 호수 남단에서 아카바 만까지를 말하며, 사무엘기 하권 4장 7절과 열왕기 하권 25장 4절은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사해까지를, 그리고 현대 지리학에서는 사해 남단에서 아카바만까지를 말할 때 이 지명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요르단(Jordan) 강
요르단 지구 한 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강으로서 훌레(Hule) 호수와 갈릴래아 호수를 거쳐 사해로 흘러 들어간다. 옛적에 요르단 강은 헤르몬 산(3,000-2800미터)에서 녹아내리는 눈으로 수량이 풍부해서 여호수아기 3장 15절이 말하듯 홍수도 가능했으나, 지금은 관개용수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사무엘기 하권 19장 19절에 의하면 나룻배를 타고 사람들이 이 강을 건넜던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우리나라의 강들처럼 그리 큰 강이 아니기에 걷거나 헤엄을 쳐서 쉽게 건널 수 있는 강이기도 하다(여호 3,28; 7,24; 12,5). 따라서 요르단 강을 자연적인 경계선, 국경선으로 단정해버리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에 불과하다. 요르단 강은 직선 길이가 100km이나 굴곡이 심해서 실지로는 300km에 이른다.
■ 훌레(Hule)호수
성경에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유다교 랍비들의 문헌과 우가릿(Ugarit)문헌이 언급하고 있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엷은 늪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 티베리아스(Tiberias)호수
티베리아스라는 지명은 비교적 후기의 명칭이다(요한 복음서에만 나타남: 6,1; 21;1). 구약성경에서는 우선 킨네렛(Kinnereth) 또는 킨네롯(Kinneroth)으로 불리다가(민수 34,11; 여호 12,3; 13,27) 유배시대 이후 겐네사렛(Gennesareth)으로 바뀌며 (1마카 11,67; 마태 14,34; 마르 6,53; 루카 5,1), 그리스도 시대에 와서는 갈릴래아 호수라는 지명이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마태 4,18). 티베리아스 호수는 해발 -209m에 위치해 있으며, 길이 21km, 폭 12km, 깊이 48m의 호수이다.
■ 사해(死海)
사해라는 지명은 이 바다 속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기원 후 2세기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지명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아라바(Arabah) 바다(신명 4,49; 2열왕 14,25), 소금바다(신명 3,17; 여호 3,16; 12,3) 또는 종말론적 의미의 동쪽바다(에제 47,18; 요엘 2,20; 즈카 14,8)로 불리고 있다. 사해는 해발 -397m에 위치해 있으며, 길이 80km, 폭 17km, 깊이 400m이다.
4. 트란스요르단(Transjordan)
엄밀히 말해서 이 지방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이 지방을 통과했으며 그 가운데 몇몇 지파는 이 지역을 그들의 몫으로 분배받기도 했다(여호 13,8-33).
■ 바산(Bashan)
헤르몬(Hermon)산 아래에서 야르묵(Yarmuk)강까지의 낮은 언덕지대로서 강우량이 풍부하고 화산질의 천연적 토양으로 대단히 비옥한 지방이며 목축업 역시 성행했던 곳이다. 이러한 풍요로움 때문에 성경은 종종 카르멜, 레바논과 함께 이 지방을 열거한다(아모 4,1; 에제 27,6; 예레 50,19; 시편 22,7-13).
■ 길랏(Gilead)산
기복이 상당히 심한 지역으로 야르묵 강이 북쪽 경계를 이루나 남쪽 경계는 뚜렷하지가 않다. 이 지역은 또한 야뽁(Yabbok) 강에 의해 양분되는데 남쪽보다는 북쪽이 비교적 넓고 높으며 기복이 심하다(1,000-2,000미터).
■ 세 소왕국 : 암몬(Ammon), 모압(Moab), 에돔(Edom)
대략 기원전 13세기에 세워진 왕국들로서 이스라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나라들이다. 암몬은 야뽁강 상류, 모압은 사해 동쪽, 그리고 에돔은 사해 남동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Ⅱ. 기 후
팔레스티나의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이나 인접해 있는 바다와 사막,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기복이 심한 산맥으로부터도 영향을 받고 있다. 계절은 중간계절이 없이 여름과 겨울, 좀더 정확히 말해서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건기에 해당하는 4월부터 9월까지의 기후는 예외 없이 규칙적이다. 아침마다 이슬과 안개를 볼 수 있으나 태양과 함께 곧 사라진다(호세 6,4참조). 태양은 작열하며 또한 서쪽에서는 무서운 열풍이 휘몰아친다. 팔레스티나 지방의 파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열풍은 더위와 메마름과 때때로 모래까지 동반하는 공포의 요인이 되기도 하나 농부들은 이 바람을 이용하여 낟알을 까불리기도 한다.
한편 우기에 해당하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기온과 강우량은 대단히 불규칙적이다. 강우량은 지역에 따라 200- 900mm까지이며 비는 대개가 소낙비로서 삽시간 내에 모든 것을 깨끗이 쓸어갈 정도의 힘을 가진 급류를 형성한다. 물론 농부들은 이 비로 농사를 짓는다. 성경 속에서 첫 비와 마지막 비에 대한 언급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비가 수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신명 11,14; 에즈 10,13; 잠언 26,1; 호세 6,3).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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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 이스라엘 역사와 인접국가 - 구약성경입문 -
성경이 순수 역사서가 아니라는 사실은 재론할 필요가 없으나, 성경 이해를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자는 데에는 또한 명분을 찾을 필요도 없다. 성경 저자들은 역사가들이 아니었기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사업을 전개해 나가실 때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성경이 말해주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토막 난 역사, 미흡한 역사이지만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담겨 있는 역사이기에 위대한 구원사일 수밖에 없다. 이를 정리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일견해 보고 이스라엘 역사 안에 자주 등장하는 인접 국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성경의 메시지를 보다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Ⅰ. 이스라엘의 역사개요
1. 기원 : 성조시대
이스라엘민족의 기원사를 다룬다는 것은 사실 어느 민족의 기원사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이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백성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시대를 대략 기원전 1200년경으로 추측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으나 이를 앞서는 8-9세기 동안의 기나긴 형성과정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이 형성 과정에 해당하는 사건들이나 특정 인물들에 대한 성서적 전승을 고대 근동지방의 역사 또는 고고학의 연구 결과 밝혀진 문헌들과 비교해 가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어렴풋이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이스라엘 선조들은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목축업을 하던 유목민이었다(창세 11,27-31; 신명 26,5-11; 사도7,2-4). 이 유목민들은 점차 정착생활로 접어들기 시작하며 때로는 이미 다른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방을 정복하여 다스리기도 한다. 이들 반유목민들 중 잘 알려져 있던 집단이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방에 정착한 아모리족(에제 16,1-14절 참조)과 13세기경 시리아에 정착한 아람족이다(신명 26,5-11 참조). 이 외에도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의하면 여러 부족이 산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 관하여 성경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조인 야곱의 12아들과 같은 중요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성조시대에 관해 성경이 제공하는 전승의 역사성을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 사실 성경 저자들은 이들 성조들이 이스라엘의 신앙 선조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관심을 쏟았을 뿐 현대인들의 관심 대상인 역사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역사학과 고고학의 연구 결과에 힘입어 이스라엘의 성조들이 대략 기원전 19세기 또는 18세기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팔레스티나 지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본다.
이들의 후손들 가운데 일부는 또 다른 유목민들과 함께 물과 초지를 찾아 별 어려움 없이 이집트로 내려가게 되나 이에 대한 정확한 시대를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단지 4-5세기에 걸쳐 이러한 현상이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본다.
성조시대를 정리하면 ;
▪ 1850년경 : 아브라함 팔레스티나 도착
▪ 1850 - 1750년경 : 팔레스티나의 성조들
▪ 1750 - 1250년경 : 이집트의 히브리인들
2. 이스라엘 백성의 탄생
이집트 파라오 라메세스(Ramses) 2세(1304-1238)치하인 1250년경부터 시작된 복잡한 과정이다. 이집트에 정착한 유목민들은 고된 부역에서 벗어나고자(탈출 1장) 모세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탈출을 시도한다. 모세는 시나이산과 카데스(Qades)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집트에서의 해방을 선사해주신 야훼 하느님만을 받들어 섬길 것을 강조하며 백성들의 응답을 얻어냄으로써 국가형성의 발판을 마련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국가형성의 초석이 된 이와 같은 기본적인 사건들을 중시하면서 이를 위해 많은 자리를 할애하고 있다: 이집트 탈출(탈출 1-12장), 홍해 건넘(탈출 14-15장),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탈출 19-24장).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일부는 남쪽으로, 일부는 사해를 돌아 동쪽에서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추측컨대 주민이 많지 않던 지역에서는 별 문제없이 평화롭게 정착할 수 있었으나, 성읍 지역에서는 불가피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본다. 이러한 전투를 치른 지파들의 우두머리들 가운데 성경은 특별히 여호수아의 업적을 높이 기리고 있다. 여호수아는 전사(戰士)로서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 정착한 지파들과 이미 전부터 이 지역에 몸 붙여 살고 있던 지파들을 결속시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여호 24장).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아직 정치체제가 빈약한 상태라 하더라도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하나의 국가로서의 꼴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목민 약탈자, 가나안 원주민, 트란스요르단의 세 왕국, 특히 해양민족인 필리스티아의 위협으로부터 각개 독립된 지파를 보호하기 위해서 12 지파는 부족동맹을 맺어 연합세력을 구축하고 ‘판관’(טꚇ)이라 일컬어지는 우두머리의 영도를 받게 된다. 그러나 필리스티아족의 지속적인 위협에 직면하여 이스라엘 12지파는 이웃 백성들처럼 지파를 다스려나갈 하나의 우두머리[왕]를 선정해 줄 것을 마지막 판관 사무엘에게 간청한다(1사무 8-10).
이 시대를 정리하면 ;
▪ 1250년경 :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 탈출
▪ 1220 - 1200년경 :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정착
▪ 1200 - 1030년경 : 판관시대
3. 왕정시대
벤야민 지파 사울(Saul)의 왕정(1030-1010)이 실패로 돌아간 후 유다 지파의 다윗이 1010-1004년까지 헤브론에서 우선은 유다의 왕으로, 이어서 970년까지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이스라엘 즉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여 통치한다(1사무 2,1-5; 5,1-5). 다윗은 국가의 존립을 위협했던 필리스티아, 아람 등 인접 민족들을 정복해 나가면서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다짐과 동시에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천도하고서 이곳에 야훼의 궤를 모셔 온다(2사무 5,6-6,15).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도읍으로 자리한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970-930)은 국가 행정제도를 확립하고 잘 무장된 군대를 보유하면서, 현인(賢人), 건축가, 국제무역인으로서의 능력을 과시하나 그의 통치 말기엔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상당한 문제점들이 노출되기도 한다(1열왕 3- 11).
솔로몬의 죽음과 함께 그의 아들 르하브암이 왕위에 오르나 에프라임 지파의 예로보암이 반기를 들어 다윗에 의해 이루어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이후 남쪽엔 유다왕국, 북쪽엔 이스라엘 왕국이 그 맥을 이어나간다. 남 유다는 변함없이 다윗왕가에 의해 통치되나, 북 이스라엘은 722년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무려 9개의 왕조를 맞이하게 된다: 예로보암(933-910), 바아사(910-886), 지므리(886), 오므리(886-841), 예후(841-747), 살룸(747-746), 므나헴(746 -735), 페카(735-732), 호세아(732-724).
한편 적대국들로 둘러싸인 남 유다는 그 명맥만은 유지를 해가나 솔로몬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초라한 나라로 남게 된다. 아사(912-870), 여호사팟(870-848), 히즈키야(716-687), 요시아(640-609) 시대엔 그나마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나 요시아의 죽음과 함께 남 유다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아시리아 제국의 뒤를 이어 강대국으로 등장한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Nabuchodonosor)왕이 1차 597년 (2열왕 24,13-15), 2차 587년(2열왕 25,11-12) 유다를 정복함으로써 바빌론 유배시대가 펼쳐진다.
민족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유배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시대였음에 틀림없으나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전개된다. 새로운 눈으로 지나간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고 그 안에서 펼쳐진 하느님의 업적을 상기하여 그분과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신앙의 쇄신을 기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더욱 많은 성경전승들이 수집되고 편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다.
4. 유다인 공동체
유다 왕국 멸망으로부터 60-50년후 시대상황은 또 한번 바뀌어 바빌론 제국이 사라지고 키루스가 세운 페르시아 제국이 강대국으로 등장한다. 키루스 황제는 538년 칙령을 반포하여 바빌론 억류민들로 하여금 본국에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명령한다(2역대 36,22-23; 에즈 1,1-4).
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업을 목적으로 귀환한 유다인들이 재결속을 다짐하고서 느헤미야와 에즈라 시대에 새로운 복합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며, 또한 구약성경 대부분이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한편 333년경 희랍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제국을 침식시키고 희랍제국을 건설하게 되며, 이후 고대 근동지방은 물론 지중해 연안국가들이 희랍문화권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다. 333년 이후 1세기 반 동안 이스라엘은 희랍세계와 평화를 유지하며 상당한 자유를 향유하게 되나 167년 안티오코스 4세(일명 Antiochos Epi- phanes)의 유다교 종교박해로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마카베오 형제들이 이에 반기를 들고일어나 결국 142년 대제관 시몬이 유다의 독립을 쟁취하며, 이후 1세기 동안 마카베오 형제들의 뒤를 이은 하스모니아 가문이 유다를 통치하나 63년 로마제국 폼페이우스(Pompeius)가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유다는 다시 독립을 상실하고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이후의 시대는 물론 신약시대에 해당된다.
지금까지 팔레스티나의 유다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관해 왔으나 여기서 잠시 팔레스티나 이외 지역의 유다인 또는 유다교도들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8세기 후반 아시리아의 침공과 6세기 초반 바빌론의 침입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및 기타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 된다. 또한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유배민들 모두가 다 538년 이후 본국으로 귀환한 것도 아니다. 이처럼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에게 희랍제국의 천하통일로 서신 왕래 등 교류가 수월했을 것으로 추측하며, 또한 보다 더 많은 이민생활이 용이했을 것으로 본다.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가장 많은 유다인들이 거주했으며 전교에 힘입어 많은 개종자들을 얻게 된 것으로 본다. 팔레스티나 이외 지역에 거주하던 이들 모든 유다교도들을 통칭해서 디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라 부르며, 이들은 유다교에 새로운 면모를 선사한 사람들이다. 특히 기원 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135년 유다인들의 최후 독립운동 실패로 인한 민족적이며 종교적인 참극을 극복할 수 있도록 유다교를 이끌어간 공동체이기도 하다.
Ⅱ. 이스라엘 인접 국가
1. 소왕국(小王國)
■ 에돔(Edom), 모압(Moab), 암몬(Ammon), 아람(Aram)
이스라엘 남동쪽에 위치한 민족들로서 이스라엘은 이들과 계속 되풀이되는 전투를 치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혈연관계를 숨기지 않는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자녀들이며(창세 19,30-38), 에돔은 야곱의 형제이고 (창세 36,1), 아람인 라반(Laban)은 이사악의 처형임과 동시에(창세 24장) 야곱의 장인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창세 29-30장).
■ 페니키아(Phoenicia), 가나안(Canaan)
페니키아족은 바다에 친숙했던 민족임과 동시에 국제 무역에 능했던 사람들로서 비블로스(Byblos), 시돈(Sidon), 티로(Tyr)를 주요 도시로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 혼혈민족으로 구성된 가나안(Canaan)족은 오로지 종교적인 면에서만 단일성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사실 이들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끼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들 고유의 가나안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집트의 나일강변의 텔 엘 아마르나(Tell-el-Amarna)에서 발굴된 문헌에서만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 필리스티아(Philistia)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거의 동시대에 정착한 민족으로서, 대륙민족과 종교와 문화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희랍과 크레트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스라엘 최대의 적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2. 강대국
이스라엘은 인접 소왕국들과의 관계를 넘어서 근동 지방의 강대국으로부터 숙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강대국들이 약세에 접어들거나 관심을 갖지 않을 때만이 이스라엘을 포함한 팔레스티나 소왕국들은 자유와 독립을 유지했으며, 다윗 역시 이런 상황을 틈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기반을 다지고 인접 국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는 이 강대국들의 지배 하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 이집트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이미 강대국으로서의 위용을 자랑했던 국가로서 일찍이 그들 고유의 문자(상형문자)와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항상 팔레스티나 지방을 지배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 때문에 팔레스티나는 사실 오랜 세기 동안 이집트의 행정구역 또는 보호령에 속해 있었다.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혜문학의 대부분이 바로 이집트의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강대국들
이집트의 나일강과 함께 이 지방 역시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이다.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Sumer), 아카드(Akkad)왕국이 건설되었었고 고유문자인 설형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이 지방에 아모리족이 이주하여 바빌론 왕국을 세우게 되며, 이 왕국의 인물들 가운데 우리는 함무라비(Hammu- rapi)왕(1792-1750)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아직은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의 형태를 취하지 못했으므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첫 번째 제국은 기원전 1100년경에 건설된 아시리아 제국이다. 아시리아족은 아람족이 강대해짐에 따라 약세에 접어들기도 했었으나 상당 기간 동안 이 지방의 왕자로 군림하게 된다. 735-722년 사이에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제국이 바로 이 제국이며, 이 때 남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의 주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위기를 벗어난다.
아시리아 제국의 뒤를 이어 일어선 제국이 606년에 재건된 신(新)바빌론 제국 (통상 바빌론 제국이라 칭함)이며 이 제국에 의해 남 유다 왕국 역시 597-587년 사이에 멸망하게 된다.
뒤이어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가 538년 바빌론 제국을 멸망시켜 페르시아 제국을 창건한다. 333년 희랍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침몰되기 전까지의 근 2세기 동안 이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소유하나, 피정복자들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고 자치권까지 부여하는 정책을 단행함으로써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구축해 나간다.
■ 희랍제국
마케도니아(Macedonia)왕 알렉산드로스(Alexandros)는 333년부터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까지 정복함으로써 광활한 희랍 제국을 건설한다. 이스라엘 역시 이들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며 희랍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정복한 그 광활한 희랍제국은 281년 마케도니아, 시리아(셀레우코스 왕가),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가)로 나뉘어 통치되며, 200년까지 팔레스티나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나 이후 142년 유다 독립시까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가의 지배를 받으며 종교 박해(167-164)까지 감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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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 성경과 고고학
구약의 역사가 펼쳐진 팔레스티나에서는 지금도 고고학적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결과만으로도 이 지역의 역사와 이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발굴작업에 있어서 근본적인 동기는 성경을 좀더 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기에 팔레스티나에서의 고고학적 연구 내지 노력은 다른 지역에서의 그것들과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 특히 그것이 역사와 지리를 바탕으로 할 때 이에 대하여 좀더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다교는 물론 그리스도교 역시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연구결과에 관한 한 불안한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Ⅰ. 고고학
Archeologia(考古學)란 말은 본디 희랍어 αρχαιος와 λογος의 합성어로서 ‘옛 것이나 옛 사람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옛 사람들의 역사가 글로 기록된 경우가 거의 없기에 고고학자들은 그들이 남긴 물질적 흔적들을 발굴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그들이 살던 시대와 공간에 접근하고자 한다.
고고학의 일차적인 목적은 발굴한 것들을 연구하거나 그 연구결과를 책으로 펴내는 일이 아니라, 일정한 지역에서 연이어 전개된 물질적 흔적 자체에 만족하는 일이다. 성경이 고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자연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성경은 여타의 여러 민족들과 운명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신앙의 발달사를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책이기에 고고학은 성경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본질적인 배경을 제시해 준다. 성경은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한편 그러한 정보는 일반적으로 단편적이거나 함축적이므로 이러한 결함을 메우는 데 있어서 고고학은 많은 기여를 한다. 즉 한 시대의 문화에 대한 정보와 관습에 대한 지식을 선사해 온 고고학은 성경이해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고고학은 가장 중요한 있는 그대로의 발굴작업에 이어 발굴한 것들을 비교분석하고 이를 글로 쓰인 문헌들과 대조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 단계는 이미 역사에 접어든 단계가 된다. 이 점에서 팔레스티나의 고고학은 고대근동지방의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לꚞ(Tell)에 기초한다.
각 시대의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입지조건을 택하여 건물을 세우게 되며,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때 결국 하나의 거대한 인공적인 언덕, 이름하여 ‘폐허의 언덕’이라 불리는 Tell이 형성된다(신명 13,17; 여호 11,13; 예레 30,18 참조). 사람들은 거주 장소로 무엇보다도 먼저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나<예루살렘의 기혼 샘(2사무 5,6-10; 1열왕 1,33)이나 예리코의 엘리사 샘(2열왕 2,19- 22)을 예로 들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곳<스켐(Sechem)은 요르단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예루살렘(Jerusalem)은 위쪽은 언덕, 아래쪽은 두 개의 골짜기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적 방어지였다.> 또는 식량공급이 용이한 곳을 자연스럽게 택하였다. 따라서 한 민족이 거주하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곳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폐허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할지라도 다른 민족들에 의해 재건될 가능성은 항상 있게 마련이었다.
Ⅱ. 고고학적 발굴
1. 건축물
왕궁과 성전은 거의 석조건물이었으며, 가옥 등 기타 건물들은 일반적으로 기초는 돌, 벽은 흙벽돌로 건조되었고, 지붕은 곡물 건조를 목적으로 평평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도읍이나 마을이 파괴되거나 버려질 때 남게 되는 것은 오로지 건물의 내부로서 벽돌이나 지붕 등에 덮여 있는 상태였다. 다음 정복자 또는 이주자들은 이미 파괴된 것들을 골라 평형하게 한 후 그 위에 새로운 건물들을 세움으로써 앞서 말한 Tell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착민들의 삶의 형태가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들이 어떤 부류 또는 문화의 사람들이었는지 추정은 가능하나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2. 연대측정
발굴된 출토품들의 연대기록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으나 여기서는 영국의 고고학자 페트리(Flinders Petrie)가 1890년에 제안한 방법을 소개하기로 한다. 페트리는 팔레스티나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작업 결과 각 층에서 발견된 공통된 토기들은 연대기록에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대를 Tell의 층을 기준으로 측정하였고 그 당시 도시에서 사용되던 토기의 파편들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냈다.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에 사용되던 토기 형태에 따라 토기를 구분해나감으로써 결국 그는 Tell의 각 층에서 발견된 토기 형태의 비교 연구는 토기의 발달과정이 한 세기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반세기에 걸쳐 동일한 범위 안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 구석기 시대 : ~ 12000
▪ 중석기 시대 : 12000 ~ 6000
▪ 신석기 시대 : 6000 ~ 4500
▪ 동석기 시대 : 4500 ~ 2900
▪ 초기 청동기 시대 : 2900 ~ 1900
▪ 중기 청동기 시대 I : 1900 ~ 1800
▪ 중기 청동기 시대 II : 1800 ~ 1550
▪ 후기 청동기 시대 : 1550 ~ 1200
▪ 철기 시대 I : 1200 ~ 900
▪ 철기 시대 II : 900 ~ 587
▪ 페르시아 시대 : 587 ~ 333
▪ 희랍 시대 : 333 ~ 63
한편 시카고 대학의 리비(Willard F. Libby) 박사는 1946년과 1950년 사이에 방사선으로 연대를 측정하는 매우 과학적인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생물의 부패된 정도를 계산해냄으로써 생존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이기는 하나 활용에 있어서의 한계가 문제이다. 착오의 한계는 5~10%인데 성경시대에 적용할 경우 250~300년이라는 공백이 생기며 이 공백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커진다. 아울러 이러한 방법은 20,000년이 넘는 아주 오래된 연대측정에는 사용이 불가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오랜 기간 후에 존재하는 탄소의 양은 매우 적기 때문이다.
3. 글자판독
고고학자들은 옛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알아내기 위해 각종 출토품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 사람들로서 기록된 문헌 또한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고대어로서의 이집트의 상형문자(象形文字)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楔形文字)를 어떻게 판독해낼 수 있느냐에 있었다.
■ 로제타석(Rosetta石)
1799년 나폴레옹 시대의 한 관리가 나일강 서쪽 하류 근처에 있는 로제타란 곳에서 발견한 이 비석은 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204-180)의 업적을 상형문자와 민용문자(民用文字)와 희랍어로 기록한 작품이다. 이 가운데 상형문자 판독을 위해 학자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1822년 샹뽈리옹(Jean François Cahmpollion)의 연구발표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를 기초로 이후 상형문자로 된 역사적 기록, 서신, 종교적 문서, 문학단편, 일상생활에 관한 문서 등의 판독이 가능하게 되었다.
■ 베히스툰석(Behistun石)
동인도회사의 영국인 관리였던 로린슨(Henry Rowlinson)이 페르시아를 통과하던 도중 설형문자에 속하는 페르시아어와 바빌론어와 엘람어로 기록된 비문과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522-486)의 부조(浮彫)가 새겨진 베히스툰 바위를 목격하게 되고, 그 신비로움에 매혹된 나머지 1835년 위험을 무릅쓰고 탁본을 뜨는 데 성공함과 아울러 1846년에는 문자 판독까지 이루어냄으로써 유명해진 바위이다.
이처럼 상형문자는 샹뽈리옹이, 설형문자는 로린슨이 판독에 성공함으로써 고대근동지방의 문자와 문화이해가 본격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즉 이들 고고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의 위대한 업적으로 성경시대에 쓰인 문헌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됨으로써 성경 또는 성경시대 이해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후 고고학적인 발굴은 지속되었으나 그 가운데 성경 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발굴 몇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 아마르나(Amarna) 편지
이집트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1400-1362)와 4세(1362-1340?)가 팔레스티나와 아시리아의 봉신 및 기타 아시아의 군주들로부터 받은 수백 개의 편지로 구성된 공문서를 보관하던 왕실문서보관소가 1887년 이집트 중부에 위치한 텔 엘 아마르나(Tell-el-Amarna)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이후 이 편지를 ‘아마르나 편지’라 부르게 되었다. 기원전 15-14세기에 바빌론의 설형문자가 외교언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편지 가운데는 예루살렘의 왕 압두 케바(Abdu Kheba)가 하비루(Habiru) 족의 침공 앞에서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이집트 파라오에게 군사와 무기를 보내줄 것을 청하는 내용도 들어 있는데, 여기서의 하비루족은 바로 히브리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한다.
■ 메르네프타(Merneptah) 기념비
1896년 앞서 언급했던 고고학자 페트리는 테베스(Thebes)에서 람세스 2세(1304-1238)의 뒤를 이어 즉위한 메르네프타(1238-1209)의 전승기념비를 발견하였는데, 이 비문에서 우리는 성경을 제외하고 글로는 최초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이 비문은 28개의 줄로 되어 있는데 26-27번째 줄에서 아시아 도시국가의 정복을 말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을 언급한다.
<이 전승비는 Tehenu 즉 리비아를 거슬러 싸워 이긴 승리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으나, 아시아 민족으로서 하티(Hatti: 13세기 소아시아 지방에 거주하던 민족), 가나안(Canaan: 지방으로서보다는 가자-Gaza-와 같은 어떤 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아스클론(Ashkelon: Gaza 북부 도시), 게제르(Gezer: 아스클론 북동 고대도시), 야노암(Yanoam: 티베리아 남동 요르단 골짜기)에 이어 이스라엘과 후루(Hurru: 팔레스티나를 지칭하는 이집트식 지명)를 언급한다.>
팔레스티나 북부 지방의 몇몇 도시들을 열거하면서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이스라엘은 거의 같은 지역에서 찾아져야 한다. 또한 다른 도시국가들이 ‘땅’을 가리키는 문자를 수식어로 취하고 있는 반면 이스라엘은 소수의 민족을 뜻하는 문자로 수식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착한 도시국가로서보다는 아직까지는 떠돌이생활을 하던 유목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기타
르하브암 5년에 유다와 이스라엘을 유린한 내용(1열왕 14,25)이 기록된 이집트 카르낙에 있는 시삭 1세(950-929)의 양각비문(陽刻碑文), 아시리아 왕 살만에세르 3세(858-834)에게 꿇어 엎드려 조공을 바치는 북 이스라엘 왕 예후의 모습이 새겨진 검은 오벨리스크(Obelisk), 남 유다 왕 히즈키야의 수로 건설을 입증해 주는 실로암의 비문(2열왕 20,20), 1868년에 발견된 모압 왕 메사의 승전비문(2열왕 3,4) 등이 있다.
Ⅲ. 성경고고학
성경고고학이란 성경본문과 관련 있는 성경의 땅에서 발견된 모든 자료에 관한 연구를 말한다. 성경고고학은 성경이 말하는 바를 증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성경본문과 그 본문의 출현배경의 이해를 통하여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데 목적을 둔다. 한편 성경본문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얻어진 자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성경본문과 고고학적 연구는 상호보완적인 성격도 있다.
어떤 한 지역에서 전개된 부족들의 점유현상이나 한 도읍의 설립과정, 생활방식의 발전단계, 물물교환이나 상업적인 교환에 대한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고고학이 성경이해에 기여하는 부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절대적인 잣대로 들이밀 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여호수아기 8장은 아이 지방에서의 전투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나, 1933-1935년에 단행된 고고학적 연구결과 기원전 2400-1200년 사이에는 이 지방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1200년 이후에야 비로소 수수한 촌락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말해줄 뿐이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1200년경의 전투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나 여호수아기를 세속적 역사서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역사서로 다시 읽어나갈 때 우리는 답을 찾아낼 수가 있다. 여호수아기 8장은 분명 전투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나 이야기의 핵심에는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자로서의 야훼 하느님이 계시다. 하느님의 전적인 지휘로 이스라엘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기에 이 땅은 예리코처럼(여호 6장) 거저 주어진 땅이나 다름없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성에는 별 관심이 없고, 다만 구원의 진리를 밝히고 전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고고학이 과거의 역사적 삶의 조건들을 보다 분명히 알려주는 기여는 하고 있으나 성서의 진실성까지 밝혀줄 수는 없으며, 이를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참고문헌
- K.M. Kenyon, Archaeology in the Holy Land, New York, 1970.
- J. Rehork, Archäologie und biblisches Leben, Gustav Lübbe, 1972.
- A. Läpple, 성경과 오늘, 김윤주 譯, 분도출판사, 1976.
- D.W. Thomas, Archaeology and Old Testament Study, London, 1978.
- 시그프리드 H. 호은, 성서考古學入門, 장수돈, 오강남 역, 대한기독교서 회, 1981.
- 문희석, 성서와 고고학, 보이스사, 1984.
- A. Millard, 성서시대의 보물들, 정태현 譯, 성바오로출판사, 1992.
- 김성, 성서고고학 이야기, 동방미디어, 2002.
제5장 : 구약성경 구성사 - 구약성경입문 -
구약성경이 어떤 한 순간에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이 아니라 기나긴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신앙 고백서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 볼 때 성경의 정경화(正經化)를 앞지르는 전승 및 편집과정을 살펴봄은 성경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Ⅰ. 구약성경 편집단계
1. 제 1 단계
이스라엘 문학의 시조 단계로서 기원전 10-8세기에 이루어졌다. 남 유다에는 야훼계 전승(J), 북 이스라엘에는 엘로힘계 전승(E)이 현저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단계이다.
2. 제 2 단계
북 이스라엘의 고유 전승인 엘로힘계 전승이 사마리아 멸망(722/721)과 함께 남 유다로 전래되어 야훼계 전승과 통합되는 단계로서 히즈키야 왕정(716-687) 후반기에 이루어졌다. 이때 활발한 문학운동이 전개되나 양대 전승 속에 동일한 사건이 등장하는 경우 야훼계 전승에 유리하게 엘로힘계 전승이 흡수되어 통합된 것으로 추측한다.
3. 제 3 단계
622년경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연히 발견된 ‘율법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종교 쇄신운동을 단행한 요시아 시대(640-609)에 이루어진 단계로서 신명기계 학파의 문학운동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명기를 비롯하여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와 같은 신명기계 문헌들이 편집되기 시작한 시대이다. 이 문헌들 속에서 우리는 왕정제도의 정당화를 위해 고심하는 한 학파의 모습을 읽어볼 수 있다(D).
4. 제 4 단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처절한 시기였던 유배시대(597/587-538)가 이에 속한다. 최근까지 이 시대엔 문학 운동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 추측해 왔으나, 땅도 성전도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그들의 하느님이 무력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유배민들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정신문화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시기였을 것이며, 따라서 오히려 보다 더 많은 작품들이 이 때 편집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본다. 이 시대의 대표적 인물은 사제이며 예언자였던 에제키엘이었고 그의 업적 역시 지배적이었다. 사제계 전승(P)이 이때 탄생되고 수집되고 편집되었다.
5. 제 5 단계
유배시대 이후를 말한다. 본격적인 사제계 시대가 전개됨으로써 모세오경을 기점으로 전 구약성경이 서서히 그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모세오경은 5세기, 예언서는 3세기, 기타 작품들은 1세기경 집대성되어 출판되기에 이른다.
Ⅱ. 구약성경 구성 순서
1. 모세오경(Tôrāh)
모세오경이 유태인들의 율법서로 공인된 것은 페르시아 황제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 2세(404-359) 치하이다. 하느님의 법을 가르치는 율사이며 사제였던 에즈라(Esdras)는 황제의 명을 받아(에즈 7,12-26) 유배생활에서 귀환한 유다인들과 본토에 계속 남아 있던 유다인들을 위한 율법서 한 권을 편집하여 공표하기에 이르나 물론 그의 개인적 창작품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익히 알고 실천해 왔던 개별적인 율법서들의 총체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2. 예언서(Nebî'îm)
토라보다는 훨씬 후대에 집대성된다. 그 시기를 정확히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나 대략 기원전 3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예언서 안에 포함되어 있어야 할 다니엘서(2세기 중엽 저술)가 예언서 목록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언서는 담고 있는 역사적 사건의 순서에 따라 전기 예언서(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와 후기 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아, 에제키엘, 12 소예언서)로 나뉜다. 이 가운데 12 소예언서는 작품의 분량에 따른 명칭으로서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드야, 요나, 미카, 나훔, 하바쿡, 스바니야, 하까이, 즈카르야, 말라키서가 이에 속한다.
3. 그 밖의 저서들(Ketûbîm)
모세오경과 예언서에 포함되지 않은 그 밖의 저서들을 통칭해서 ‘끄뚜빔’이라 부른다. 시편, 지서(智書), 다니엘서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우선 다섯 개의 전례용 두루마리(megilloth)가 중요시된다: 전도서(초막절용), 아가(과월절용), 룻기 (맥추절용), 애가(예루살렘 멸망 애도용), 에스테르기(Purim節용). 기타 작품들은 보다 후기에 저술되어 1세기경 히브리어 성경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N.B. :
1) Septuaginta는 구약성경 각 권 배열에 있어서 히브리어 성경(TM)과 차이를 보이나, 현대어 번역본들은 흔히 Septuaginta의 구분법을 따른다.
2) 유다교는 사무엘기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 역대기 상하권, 에즈라-느헤미아기, 12 소예언서를 각각 한 권으로 취급하고 있어, (구약)성경을 24권이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