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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예언서 입문

dariaofs 2015. 2. 27. 18:21

이사야서 입문

 

 

1. 이사야서의 형성 과정

 

이사야서에는 모두 66개의 장이 결집되어있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이들이 모두 동일한 시대의 것들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책의 저자가 여럿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구약성서의 적지 않은 책들이 다수의 저자들에 의한 합성물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무명인 데 반하여,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어떤 시대에 살았던 한 인물의 이름 아래 전해진다(1,1). 많은 사람들은 이사야서 전체가 이 한 사람에게서 유래한다고 믿었고 또 아직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에 관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견해는 기원전 2세기에 저술된 집회서에 잘 나타나있다. 히즈키야 임금의 치세 아래 예언자들의 활동에 대해서 말한 다음, 이 책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사야는 강한 신통력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았으며, 슬피 우는 시온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세상 종말까지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었으며 감추어진 일들을 사전에 미리 알려주었다(집회 48,24-25).

 

그런데 저자가 여럿이라는 사실이 이 예언서의 통일성을 말하는 데에 저해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 통일성은 몇 세기를 걸쳐 펼쳐지는 지속성 속에서, 그리고 특정 주제들의 항구성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여럿이라는 점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는 이른바 제2이사야의 작품이 시작되는 40장의 첫머리에 나타난다. 어떤 분명한 중간 과정도 없이 그 배경이 기원전 8세기에서 갑자기 기원전 6세기의 유배 시대 한가운데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사야는 홀연히 사라지고, 아시리아는 바빌론으로 대체되어 이후 이 바빌론만이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바빌론을 정복하고 유다인들이 귀향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장본인인 메대와 페르샤의 임금 고레스가 여러 번 직간접적으로 언급된다(41,2; 44,28; 45,1).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40장과 함께 새로운 책이 시작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제2이사야서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따로 이야기될 것이다.

 

40 - 66장이 이렇듯 분명하게 특색지어진다 하더라도, 이것들만이 이 예언서 가운데에서 분명하게 이사야 시대 이후에 생겨난 부분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36 - 39장이, 물론 여러 중요한 변형들과 함께, 열왕기 안에 들어있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열왕 18,13 - 20,19). 또한 34 - 35장은 유배 시대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으며 제2이사야의 작품과 유사하다. 끝으로 통상 이사야의 묵시록이라 불리는 24 - 27장은 기원전 8세기 사람들의 사고와 표현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예언자 자신과 결부되는 본문들 안에서도(1 - 12; 13 - 23; 28 - 33), 주석가들은 일정한 분량의 단편들이 예언자보다 후대의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저자의 단일성을 인위적으로 증명하려 드는 일이 없이, 이사야서의 합성적인 성격을 수긍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이사야 예언서의 형성 과정을 제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많은 부분 가설을 내포하고 있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완성은 56 - 66장이 전제하는 바와 같이 유배 시대 이후, 그리고 귀향 이후에 이루어진다. 편집자들은 흩어져있는 조각들만이 아니라 이미 진정한 의미의 문집들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서의 핵심은 주로 자서전적인 요소들 특히 자기의 소명과 예언자로서의 사명 수행에 대해서 예언자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6).

 

예언자 자신이 직접 기록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 8,1.16 30,8과 같은 본문들에 의해서 밝혀지기는 하지만, 그가 선포한 신탁의 기록은 많은 부분 그가 직접 하지 않고, 그의 지시에 따라서 또는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가 선포한 말과 사건들 사이의 일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사야의 제자단은 먼저 그의 가족들, 곧 상징적인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자기의 사명 수행에 참여시킨 아들들과, 8,3에서 여예언자로 불리는 그의 아내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확대된 제자단은 (어떤 이들은 이 집단을 진정한 의미의 이사야 학파라 부르기도 한다) 스승의 신탁들에서 출발하여 문학적 활동을 하게 된다. 이들은 또한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의 파괴 그리고 유배라는 대환난 이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핵심이 되는 성실한 남은 자들을 이루었음에, 또는 적어도 그들을 예시했음에 틀림없다.

 

이사야서 안으로 들어간 문집들의 수와 규모에 대해서는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함께 모아진 전체 신탁들과 역사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다른 예언서들, 특히 예레미야서와 에제키엘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세 부분을 포함하는 전통적인 도식 속으로 삽입되었다.

 

. 이스라엘에 내려지는 심판에 대한 예언.

. 이방 민족들의 불행에 대한 예언.

.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약속.

 

그런데 여러 모음들이 이사야서에 받아들여질 때에, 종종 이미 위와 똑같은 도식으로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편집될 당시에 이 전체적인 틀 속으로 다시 분류하여 집어넣기에는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1 - 39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단락들을 나누어볼 수 있다.

 

1 책 전체의 도입 부분으로서, 여러 시대의 신탁들 가운데에서 가려낸 것들로 이루어졌으며, 예언자의 선포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녔다.

2 - 12 이스라엘과 유다에 관한 예언들로서 대부분이 이사야서에서 가장 오래 된 것들이다.

13 - 23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신탁들.

24 - 27 주로 묵시록의 성격을 띤 문단.

28 - 33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약속과 위협을 담은 다양한 신탁들.

34 - 35 또 다른 묵시록적 단편들.

36 - 39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당시 이사야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

 

2. 예언자 이사야

 

1. 예언자의 활동

 

계속해서 새로운 부분이 첨가되는 과정이 끝나지 않는 열린 책이었던 이사야서는 도서관에, 어쩌면 예언서들의 도서관 그 자체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선집이라는 면이 예언자 이사야가 생애 중에 그리고 사후에 백성의 기억 속에 남아 수행한 본질적인 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 비범한 인물은 기원전 740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예언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의 활동은 적어도 40년에 달하는 기간에 걸쳐 전개된다. 그가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한 것은, 아자리야라고 불리기도 한 우찌야 임금의(2열왕 15,1-7 참조) 오랜 치세 아래 유다가 누렸던 번영의 시대와 일치한다. 그러나 번영은 사치의 팽배, 모든 토지들을 독점하는 지주 계급의 출현,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억압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에 반대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단죄하고, 그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야보다 몇 년 앞서 아모스 예언자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똑같은 언사를 사용한 적이 있다.

 

이사야가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타난 것은 아하즈 임금의 치세 초기의 일이다(2열왕 16,1-20). 당시,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아람 왕국과 사마리아를 수도로 한 이스라엘 왕국은 점점 위협적으로 되어가는 아시리아의 세력에 대항하려고 시도하는 반면, 유다 왕국의 아하즈는 자진해서 아시리아 임금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해결 방안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아하즈는 연합 전선 안으로 자신을 강제로 끌어들이려는 이 두 이웃 나라에 대항하여 징벌군을 보내줄 것을 아시리아 임금에게 요청한다.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나지만 아하즈는 자기의 친아시리아 정책을 계속한다. 기원전 734년을 전후하여 이 일이 일어난 뒤, 이사야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십여 년간 공적인 생활에서 물러나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스라엘의 여러 지방에서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아시리아 세력의 점진적인 상승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시리아는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된다.

 

기원전 716년 히즈키야 임금이 아하즈를 계승할 때(2열왕 18 - 20), 이사야는 다시 정치 무대의 전면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새 임금은 주님께 성실하면서도, 국정 수행에 있어서는 예언자의 조언을 조금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사야는 종교적인 이유로 해서, 유다가 비록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이라 할지라도, 에집트 및 그 밖의 인근 민족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계속 반대한다. 어떠한 당위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연합 전선의 구축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이사야는 주님에 대한 충실성을 요구한다. 그는 바로 이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시각을 통해서, 아시리아가, 주님에게 반항하고 그럼으로써 그분에게 일종의 적이 되어 그 교만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백성을 책벌하기 위한 하느님의 막대임을 점점 선명하게 보게 된다.

 

기원전 701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군대가 퇴각하게 되는데, 이는 이미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서 예고되었던 바이다. 이렇게 일어난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예언자와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이사야의 품위를 높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예언자 이사야가 왕족에 속한다고 추측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언자로서의 그의 사명에서 유래한다. 많은 이들이 그의 조언을 청하기는 하였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따랐다. 공적인 종교 대표자들 곧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그에게 야유를 퍼붓기까지 하였다. 이사야가 순교하였다는 전통은 분명히 외경에 속한다(이사야의 승천이라는 외경과 에녹서 11,37). 이사야서의 머리글(1,1)에 따르면 이사야가 박해자 므나쎄 임금 시대에는 이미 살고 있지 않았음이 확실하지만, 그러한 이사야 순교의 전설 안에서 우리는, 자주 확인되는 바처럼 예언자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실패를 체험한 것이라는 생각의 반향을 감지할 수 있다.

 

이사야의 본질적인 자질들 곧 그의 권위와 고귀함,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자기 민족에 대한 열정은 그의 언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언적인 신탁들이 지니고 있던 일정한 전통적 규칙들에 부합하면서도, 그는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언어 기술과 함께 그것들을 자기 예언에 적용시킨다. 이따금 해학으로 가득한 언어 유희, 동일한 자음 또는 모음을 되풀이하는 두운법과 반해음,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은유 등이 그것이다. 그가 교육을 받았던 현인들에게서처럼 현실은 그에게 의미가 가득한 것으로 드러난다. 자연의 요소들 곧 불, , 그리고 물과 바람 등은 그에게 삶과 죽음의 세력이라는 이중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우리 주변의 현실처럼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중적인 면을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이 놀라운 간결성과 함께 말해진다. 그는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이 이사야서에서 평범하고 장황하게 표현된 일정한 문장들을 예언자 자신의 말과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언어가 표현의 능력만이 아니라 창조력을 지니고 있다면, 성서에서 이에 대한 최선의 예증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사야서이다.

 

2. 예언자의 선포 내용

 

예언자의 선포 내용은 그의 사람됨, 그리고 그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파견된 당시의 정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사야는 항상 정해진 상황 안에서 그리고 그 상황을 위해서 말하고, 그의 자세는 자기 민족과 함께 그 자신이 체험한 바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독창성을 희생시키기 전에는 그의 메시지를 어떤 도식적인 내용으로 변환시키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어좌에 좌정하여계신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항상 현존해있는 이 예언자가 또한 자기의 역사 및 제한성과 함께 이 세상에 현존해있듯이, 우리는 그의 메시지 안에서 일정한 불변의 것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사야에게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곧 당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 밖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온다. 그래서 이를 이사야 학파 신학의 특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이 거룩함은 독점적인 성격, 또는 구약성서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시기가 많은성격으로서, 종교적 차원에서건 정치적 차원에서건 우상들과 공유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이사야에게 있어서는 자기 민족과의 연대 속에서 전체 인류에 대한 전망이 결코 배제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몰상식과 그에 따른 삶에 의해서만 그 자명성이 부정되는 이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어떠한 정황에서건 교만,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 그리고 인간들이 하느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수단과 책략들 속에 들어있는 자만은 언제나 단죄되는 것이다.

 

이 초월적인 하느님께서는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계시며, 이 역사는 세상의 역사와 무관하게 전개될 수 없는 동시에, 이것과 항상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사야가 즐겨 말하는 하느님의 계획 또는 그분의 뜻은 감추어져계신 하느님의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흔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유능하기로 평판이 높은 고문들보다도 항상 더 슬기로운 것이다. 하느님 계획의 지상권을 강하게 확신하면서도, 예언자는 인간의 활동과 또한 그의 자발성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 인간은 결코 이것들과 반대되는 형태로 구원받거나 단죄받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이사야가 항상 자기 민족에게 촉구했던 항구적인 자세로서의 신앙이라는 용어 안에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이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때처럼(7,1과 각주 참조), 사리에 어긋나는 듯이 보일 정도로, 그리고 일반적인 견해에 역행할 정도로 단호한 신앙을 말한다. 너희가 믿지 않는다면, 곧 너희가 견고하지 않으면, 정녕 서있지 못하리라, 곧 너희는 확고하지 못하리라(7,9; 믿다서있다를 뜻하는 두 동사는 히브리말에서 동일한 한 어근에서 파생한 두 가지 변화형으로서, 이 어근은 견고하다, 확고하다의 뜻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러한 일종의 언어 유희로써 신앙의 깊은 뜻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굴의 신앙 역시 조용하고 겸손한 신뢰로써 이루어진다(30,15).

 

인간에게 요구되는 이러한 견실성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함, 또 당신의 왕위를 완전하게 정립시키고자 하시는 의지로써 베푸신 징표들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11,9에 나오는 주님을 앎으로 가득한 땅이라는 주제 참조). 예루살렘에 설치되어있는 다윗의 왕좌는 하느님의 천상 어좌의 복사품이다. 이사야는 다윗의 전통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설사 왕국의 계승이 중단될 수가 있음을 예견하면서도, 그에게 있어서 미래의 이상적인 임금은 항상 다윗의 자손일 뿐이다. 그의 메시아 사상은 왕국적 메시아 사상이다. 다윗 왕조는 유다와 이스라엘 그리고 다윗이 건설한 옛 제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이사야가 다시 채택하여 갱신하는 옛 전통에 따르면, 장차 모든 민족들이 모여들 세계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설립된다(2,1` - 4). 다윗과 예루살렘은 이사야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두 주요 주제로서, 그는 자기의 청중들에게 이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으며, 그의 제자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켰다. 이렇게 해서 메시아 사상은 장차 예루살렘이 세계 중심적이고 보편적인 구실을 수행하리라는 내용과 함께 이사야서의 제2부와(40 - 55) 3부에서도(56 - 66) 계속 그 중심부에 남아있게 된다.

 

3. 2 이사야서

 

1. 2이사야 예언자의 시대와 그의 활동

 

이사야서 40 - 55장에 들어있는 메시지의 연대는, 이 이사야서 제2부가 페르샤의 승리, 바빌론인들의 쇠퇴, 메소포타미아에 유배 중인 이스라엘인들의 임박한 해방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제2이사야서는 기원전 550년과 539년 사이, 페르샤의 고레스 2세 대왕이 메대 왕국의 아스티아즈와(550) 리디아 왕국의 크레수스를(546) 제압한 다음(이사 41,2-3 참조), 그리고 바빌론을 침공하기 전에(이사 45 - 48) 선포되었다. 이 고레스 2세는 결국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의 마지막 임금인 나보니드가 통치를 잘못함으로써 백성 대부분이 반대하고 일어선 것에 힘입어, 전투를 할 필요도 없이 해방자로 환영을 받으면서 바빌론으로 입성한다.

 

나보니드 임금에게 명백하게 반기를 들던 갈대아의 사제들은 이 페르샤 임금의 이러한 승리를 그들의 최고신인 마르둑과(예레 50,2 참조) 그의 시종들인 벨 신 및 느보 신의(이사 46,1 참조) 덕택으로 돌린다. 그 영향으로 이스라엘인들의 거주지에 이르기까지, 몇몇 사람들은 이 일련의 사건들 안에서 이러한 거짓 신들의 개입을 보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명의 예언자인 제2이사야는 유배 온 자기의 동포 가운데에서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동포들에게 세상의 유일한 주인은 주님뿐이심을 주지시킨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확신 속에서(이사 48,16), 그는 구원 곧 바빌론의 억압에서의 해방, 자기들의 거룩한 땅으로의 귀환 그리고 예루살렘의 복구를 선포하는 것이다.

 

해방은 칠 년에 일곱을 곱한 햇수동안의 유배 기간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기원전 587-538). 이방 출신이면서도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라 불리는 고레스를 통해서 당혹스럽기까지 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 해방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굴욕에서 영광으로 건너가게 만든다. 그들이 거룩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날의 에집트 탈출보다 더욱 훌륭한 새로운 탈출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언자는 에집트에서의 탈출을 상기시키면서, 당신의 계획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성을 강조한다. 에집트 탈출을 능가하는 것으로, 그는 하느님의 일관된 계획, 곧 온 세상을 포괄하는 그분의 보편적인 왕국의 결정적인 실현을 엿보게 한다(52,7-10). 이 왕국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창건되기 때문에, 이 거룩한 성읍은 화려한 복구를 체험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예루살렘으로 해서 하느님에 의해서 이룩된 구원이 모든 인간들에게 예외없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체험하게 되는 구원의 첫째 요소, 곧 바빌론의 멸망과 고레스에 의한 해방은 무엇보다도 40 - 48장에서 다루어지고, 그 구원의 두 번째 요소, 곧 새로운 탈출은 40장에서 55장에 이르는 제2이사야서 전체에 걸쳐서 되풀이된다. 그리고 세 번째 요소, 곧 시온의 재건과 보편적인 구원의 강조는 무엇보다도 49 - 55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제2이사야 예언자의 활동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1) 첫째 단계(40 - 48)

 

전체적으로 구원을 선포하면서 예언자는 네 가지 오류를 교정시킨다.

 

.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주님을 탓하면서 용기를 잃은 자들에게(40,27) 예언자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이유를 상기시킨다. 첫째는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권능은 온 세상에 빛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성실성은 역사에 빛난다는 것이다.

 

. 자기들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신다고 주님을 탓하는 몰염치한 자들에게(43,22-24) 예언자는, 고마워할 줄 모르는 자들은 자기네 불행의 원인인 죄악을 쌓아온 그들 자신이라고 반박한다(43,24-28).

 

. 이방인 출신 해방자를 선택하셨다고 주님을 탓하면서 화를 내는 자들에게(45,8-10) 2이사야는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로서 그들이 품고 있는 교만을 지적한다(45,11-13).

 

. 바빌론의 번영을 가져왔다는 그곳의 신들에 이끌린 자들에게 예언자는, 참되신 하느님만이 유일하게 미래를 예고하고 만들어가실 수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과정에서, 또는 흔들거리는 신상들처럼 효력이 없는 이 자칭 신들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풍자에서, 이 물신(物神)들에게 신빙성이 없음을 보여준다(41,24; 42,17; 44,21; 46,8; 48,5).

 

첫째 단계의 목적이 바로 이러하다. 48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제2이사야서의 중간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이 예언자의 생애 가운데에 일어나는 하나의 전환점을 예감하게 된다. 지금까지 말해졌던 주제들은 포기되고 이제 새로운 주제들이 등장한다. 또한 그의 선포는 이스라엘의 정예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48,22의 각주 참조).

 

(2) 둘째 단계(49 - 55)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서 가장 성실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예언자의 메시지는 세 가지 면에서 주목된다.

 

. 그들의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될 것이다. 곧 예언자처럼(50,4-11) 박해받는 이들은(51,7-8) 위로를 받고(51,1-8), 억압받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 시온의 복구가, 예언자 호세아와 그 후계자들이 그렸던 것처럼, 남편인 하느님과 그의 아내인 이스라엘 공동체 사이에 이루어지는 부부간의 재회로서 서술되고 경축된다. 곧 과부가 되었던 예루살렘은 다시 남편을 찾게 되고, 아이를 갖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 아이를 낳게 되며, 그리고 불충했던 예루살렘은 변함없이 계약을 지키시는 주님에 의해서 다시 정숙한 아내가 된다(49,14-26; 51,9 - 52,12; 54).

 

. 진정한 하느님, 만물의 하느님에 대한 민족들의 회개가 점점 더 강조된다. 이 민족들은 점차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에 경탄하고(49,7; 52,10; 이는 이미 40,5에서도 언급됨),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알기를 갈망하며(49,23; 55,5; 이는 이미 45,14-15.23-25에서도 언급됨), 온 세상에 대한 진실한 신앙의 증인인 주님의 참다운 종에 의해서 계몽되고 변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49,2.6; 53,11).

 

2. 주님의 종들과 주님의 종

 

이렇게 요약되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제2이사야는 모두 21번에 걸쳐 이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그 가운데 단 한 번은 복수로(54,17), 또 다른 한 번은 노예가 되었다는 경멸의 뜻으로 쓰인다(49,7). 그리고 나머지 19번은 주님의 종에게 유리한 의미로 쓰여진다. 그중 14번에 걸쳐 이 종은 본연의 이름 곧 이스라엘또는 야곱으로 불리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 나머지 5번의 경우에 이 종은 무명으로 남는데, 문맥에 따라서 이 칭호로 불린 이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42,1; 44,26; 50,10; 52,13; 53,11).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종 역시 계속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것인가? 한 인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민족 내의 작은 집단인가? 아니면 한 개인인가? 위에 나열한 다섯 구절 이외의 경우들 곧 이스라엘또는 야곱이 나오는 구절들에서도, 주님의 종은 단순히 이스라엘 전체를 의인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의인화가 들어있는가? 그래서 똑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이 모든 가설들은 나름대로 지지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되어오고 있다.

 

해당 본문들이 문맥에서 지니는 직접적인 뜻만을 먼저 고려할 때, 이라는 낱말은 차례로 다음의 인물들을 가리킬 수 있다. 곧 이스라엘 전체, 정예의 이스라엘인들, 2이사야 자신, 그리고 페르샤의 임금 고레스이다.

 

. 민족 전체로서 주님의 종인 이스라엘

 

41장에서 48장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실제로 주님의 종이라 불린다. 나머지 구약성서와의 관계에서 볼 때 이는 새로운 사실이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들 외에는 드물게 그리고 후대의 본문들에서만 이에 상응하는 명칭이 이스라엘에게 적용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예레 30,10; 시편 136,22).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이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선택된 민족이 에집트에서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후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했음을 강조한다. 이 섬김은 비단 하느님에게 종속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당신의 계획에 대한 계시를 받고 이를 실현하는 데에 협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을 정도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41,8-1644,1-5에서는 하느님께서 어떠한 애정으로 당신의 종 이스라엘에게 정성을 기울이시는지를 볼 수 있다.

 

. 소수의 뽑힌 이들로서 주님의 종인 이스라엘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선별된 사람들이 활약한다. 자기의 청중들 가운데 일부에게서 배척을 받은 예언자는(50,6-9.11) 이제 49장에서부터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집단에게로 향한다(50,10). 이 집단은 병행 명칭인 이스라엘-야곱으로는 한 번도 불리지 않지만, 계속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49,3). 그러나 전체가 아니라 축소된 이스라엘, 정선된 사람들, 남은 자들이다(46,3). 49,5-6을 이들에게 적용한다면, 이들의 첫 번째 임무는 전체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이고, 그들의 주 임무는 민족들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52,13 - 53,12의 시 역시 이렇게 정선된 이스라엘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 2이사야 자신이 주님의 종

 

예언자 자신이 정선된 이스라엘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유배로 끌려와서 억압받는 그가 동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위로를 얻어야만 했다. 사려깊은 제자처럼 그는 자기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를 전달하였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사람들의 회의와 적대감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는 하느님에게 계속 충실함으로써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자기에게 동의하는 이들을 강화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꿋꿋하게 활동을 계속한다(50,4-11).

 

. 주님의 종인 고레스

 

2이사야의 메시지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많은 이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고레스의 사명에 대한 예언자의 선포 내용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페르샤 임금도 참으로 하느님의 종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다시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고레스의 계획이 성공하도록 만드시는 만물의 주인이시고, 고레스는 `예루살렘은 재건될지어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계획을 성공으로 이끄는 그분의 종이다(44,26-28).

 

헛된 신들에게 바쳐진 쓸모없는 신상들과는 대조적으로(41,24.29), 고레스는 하느님의 입김으로부터 영을 받은 그분의 선택된 자가 아니겠는가?(42,1) 고레스는, 역사가 인정하듯 온화한 통치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이 주님에 의해서 내려진 판결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이 판결을 수행하면서도 바빌론에 의해서 희생된 자들, 곧 억압적인 통치의 멍에 아래에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이국땅에 억류됨으로써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42,3). 그는 나약해짐이 없이 자기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할 것이다. 고레스는 주님의 종인 이스라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을 복구시킴으로써, 사람들을 당신의 빛으로 비추시고 그들을 당신의 계약으로 결집시키시려는 하느님 계획의 전개를 촉진시킨다(42,1-7).

 

주님의 종과 관련해서 이상과 같은 설명들이 제안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본문들을 존중하면서 얻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만이 유일한 가능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히브리말로 된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해낸(칠십인역) 그리스화한 유다인들은 42,1에 나오는 무명의 종에게 이름을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옮긴다: ꡒ……`나의 종 야곱, 나에게 선택받은 자 이스라엘`…….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의와 그분이 세상에 전하라고 맡기신 율법을 민족들에게 제시하는 이는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본문에 대한 구두 번역 및 설명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아람어로 된 주석서인 타르굼은, 한 개인으로서의 하느님의 에 대하여 말하는 신탁들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내놓는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후대에 와서 곧 그리스도교 시대의 도래 이후에 편집된 타르굼의 많은 단락들 가운데, 주님의 종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읽어내고, 종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에서는 장차 올 메시아의 승리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게 된다. 반면에 이사 50,10에 서술된 에서는 단순하게 우리가 제2이사야라고 부르는 예언자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52,13에서는 42,143,10에서처럼 주님의 종을 메시아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이사야의 신탁들은 내용이 풍부하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 그래서 이라는 무명의 칭호 속에 감추어진 이런 개인 또는 저런 집단에 의한 그 의미들의 실현은 부분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어떠한 실현도 제2이사야에 의해서 예고된 세계에 알맞는 사명을 남김없이 다하였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제2이사야의 많은 본문들이 예수의 인물 및 업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이 죄사함의 제물로서 하느님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고(53,10: 이는 구약성서에서 매우 새롭고도 유일한 단언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강력하고 생산적인 삶이 약속된(53,9-12) 완전히 의로운 종인 것이다(50,9; 53,9).

 

3. 하느님의 모습

 

2이사야는 하느님의 모습에 대하여 매우 인상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그 그림의 주요 선들을 말해보기로 한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시며 결코 비길 수 없으신 분, 그 옆에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할 수 없는 분이심을 예언자는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분 이전에 또 그분 이후에 어떤 존재도 있을 수가 없다(43,10; 44,6). 모든 것 이전에 또 모든 것의 원천에 그분은 존재하시고 당신 홀로 만물을 창조하셨다(44,24). 하느님의 행동에만 유보된 이 창조하다라는 동사는 제2이사야와 함께 그 사용 빈도가 잦아진다. 곧 구약성서 전체에서 모두 44번 나오는데, 2이사야서에만 16번 쓰이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창조로 규정함으로써 이 용어를 갱신하고(43,1.7.15), 또한 새로운 탈출과 관련해서도 창조를 이야기한다(41,20; 48,7). 사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의 당신의 권능을 당신의 구원 계획에 이용하신다. 창조 때 원초의 혼돈에서 세상의 요소들을 끌어내시고, 또 당신의 자녀들을 에집트의 강제 노동에서 끌어내셨기 때문에(51,9-10), 그분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시키실 수 있으며, 이러한 그분의 구원 행위는 창조력의 새로운 폭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41,17-20).

 

이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더더구나 그러하다.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물의 하느님, 우주의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셨다(45,12).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기 전에 그분께서는 노아와 계약을 맺으셨다(54,9).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동의어들로 일컬어지는 인류 전체를 잊으신 적이 없다: 인류 또는 아담의 자손들, 모든 사람(본디는, 육신), 민족들, 나라들, 성읍들, 족속들, 먼 섬들, 세상 끝들 등. 이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하느님의 세력권 안에 들어있다. 그들의 오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미하고 나약한 존재들로서 전능하신 분의 손안에 있다(40,6-7.15-17; 51,6). 악은 불행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심판자이신 그분의 눈앞에 모든 인간들은 서있는 것이다(47). 그들은 결국 모든 이들을 구원의 기쁨으로 초대하시는 구원자의 부름을 듣게 된다(45,22-24; 55,3-4).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렇게 보편주의적인 시각들도 이스라엘의 특권을 폐기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한다. 절대적인 방식으로 거룩하신 분께서는(40,25) 동시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시다(2이사야서에서 모두 12). 진실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특별히 선택과 부름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 증인인 민족 안에서 더욱 그러하다(43,10-12; 44,8). 이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아브라함과(41,8; 51,2) 야곱과(43,27), 유다와(48,1) 다윗을(55,3) 내세우고, 그리고 여기에서 모세를 직접 지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활동 곧 장차 도래할 구원의 담보이며, 현재는 감소되었지만 앞으로도 그 후손들이 존속할 뿐만 아니라 쉬지 않고 불어날 것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약속으로서의 에집트 탈출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사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 백성을 돕고 희망을 북돋아주며, 떠받쳐주고 후원해주고 인도해주시며, 거짓 신들과는 달리 당신만이 혼자 예고하고 성취하실 수 있는 당신의 구원 계획에 참여시키신다.

 

주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면서 보여주시는 항구성은 제2이사야에게서 매우 특별한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그것은 정의로서 모두 28번 나오는데, 거의 모두가 법률적 정의의 유리한 면이나, 또는 각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바를 나누어주는 분배 정의에 의해서 보장된 공정성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정의는 당신의 구원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성실성이기 때문에, 구원과 거의 동의어가 될 수 있는 것이다(45,8,21; 46,13; 51,5.6.8).

 

2이사야서에 22번 나오는 말마디로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그분의 성실한 사랑은 물론 그분의 항구한 정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정성은 목자나 임금의 정성만이 아니라(40,11; 41,21; 43,15; 44,6; 52,7), 무엇보다도 먼저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43,6; 45,10-11), 자식들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49,15-16), 그리고 아내에 대한 남편의 정성이다(54). 그분의 사랑은, 아무리 크고 되풀이되는 인간의 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없애주시고(43,25; 44,22) 완전히 용서해주시기까지(55,7) 참고 극복하는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두 가지 면을 나타낸다. 그분께서는 한편으로는 풀어주고 구제하며 해방시키시고, 또 무엇보다도 구원자로서 구원해주신다(41,14을 비롯하여 모두 17). 다른 한편으로 그분께서는 다시 모으고 격려하며 위로하신다. 2이사야서의 첫번째 낱말로서 9번 되풀이되는 이 위로하다라는 동사는, 흔히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이 예언서의 어조를 결정짓는 구실을 한다. 이러한 격려는 불행과 악에서의 구원 이상의 것을, 공동체가 다시 모여 평온하고 행복한 생활로 되돌아감 그 이상의 것을 가져온다. 그것은 이 밖에도 이러한 은혜를 받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광명 자체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의 이 `광채는 제2이사야서에 7번 나오는 영광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 낱말은 히브리말에서 본디 무게를 뜻한다. 실제로 하느님의 이 광채, 이스라엘에게 당신 영광을 드러내셨다(44,23),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49,3) 등으로 선포되는 데에서, 5번에 걸쳐 영광이라는 낱말로 옮겨진다. 큰 무게를 지니신하느님께서는 결국 모든 사람(본디는, 살덩이)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40,5),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느님 덕택으로 이 세상의 삶 안에서 무게를 지닐 수 있게하신다(43,4). 2이사야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부지런히 우상들을 만들어서 그것들에게 인간적인 영광을 집어넣으려는(44,13) 장인들의 가련한 작업과, 당당하게 믿는 사람들을 만들어내시어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신적인 영광을 부여하시는 창조주의 눈부신 업적 사이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이것이 제2이사야가 보여주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인간에게 그토록 관대하신 이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감사드리도록 부름을 받는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예언자는 주님에게 되돌아오도록(44,22; 55,7 ), 그분을 찾고(51,1) 만나뵙도록(55,6), 그분의 말씀을 듣고(48장 등) 빵보다 더 큰 양식이 되는 그분의 계시를 향유하도록 자기 동포들을 부른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라고 격려하기 위해서 제2이사야는 하느님을 위하여 노래하도록(42,10), 그분 안에서 기뻐 뛰도록(41,16과 그외 6), 그분에게 환성을 올리고(42,11과 그외 11) 기뻐 소리치도록(49,13), 즐거워하도록(54,1), 기쁨과 즐거움을 증거하도록(51,3.11) 권유하는 열렬한 부름을 되풀이한다. 이러한 합창에는 유배자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 나아가 세상의 모든 민족들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와 우주의 모든 요소들, 하늘과 별들, 바다와 그 심연까지도 모여와야 한다. 그리하여 한 목소리로, 세상의 단결과 인류의 일치를 원하시는 하느님을 노래하고 기뻐하는 우주의 찬미가를 울려퍼지게 해야 하는 것이다.

 

4. 3이사야서

 

1. 3이사야서의 문제

 

이사야서 4055장에서 5666장으로 넘어가 보면, 이 둘 사이에는 사고와 어휘의 유사점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조와 새로운 표현들의 차이점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한편 이사야서의 이 마지막 부분 안에서도 이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본문들 사이의 다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주석가들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다.

 

. 어떤 이들은 이사 5666장을 일종의 편집물, 곧 저자나 생성 연대와 관련해서 각기 다양한 단편들의 인위적인 집합으로 여긴다. 이러한 설명은 이 작은 책에 들어있는 시들 사이에 일정한 부조화가 있음을 전제한다. 사실 모든 것을 동일한 한 저자의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사이의 상대적 통일성을 찾아내기를 너무 쉽게 포기해서도 안될 것이다.

 

. 다른 이들은 5666장 역시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 땅에 재입주하는 문제에 봉착한 제2이사야에게서 유래한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예언자 스스로 자기만의 고유한 표현들을 변형시키면서까지 자신을 표절할 가능성이 별로 없고(40,357,14; 52,1258,8; 49,2360,16 등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작품들 사이의 차이점들이 유사점들보 다 더 중요하게 드러남을 부정할 수도 없다.

 

. 끝으로 또 다른 성서학자들은 이사야서의 마지막 11개 장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제2이사야에게서 영감을 받아 유배가 끝난 뒤 20여 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사명을 수행한 동일한 한 예언자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선은 매우 일관성이 있는 6062장을 이 제3이사야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56,957,2158장과 59, 그리고 65장과 66장의 대부분을(비록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이 마지막 두 장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이 예언자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없다. 이 밖에 뚜렷이 눈에 띄는 시 두 개가 있는데, 63,1-663,764,11이다. 이것들이 제3이사야에게서 유래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조심스럽게 그의 작품 속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시는 그의 관심사에 부응함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66,18-24는 편집자들의 손에 의한 부록이고, 성전 재건 후에 발설되었을 56,1-8은 가장 후대의 본문이면서도 제2이사야서와의 문학적인 접촉 때문에 서두에 위치하게 되었을 것이다(56,555,13을 상기시키고, 56,146,1351,5.6.8을 되풀이한다).

 

2. 예언자와 그의 활동

 

이 무명의 예언자는 기원전 537년과 52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유배자들의 첫 무리가, 본디 유다의 제후였다가 나중에 총독으로 임명된 세스바쌀의 지휘 아래 귀향하였다(에즈 1,8-11; 5,14; 1역대 3,18의 칠십인역 본문).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기초를 놓기는 하였지만(에즈 5,16), 곧바로 대내외적인 여러 어려움으로 해서 작업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약식의 제의나마 속개하기 위해서 제단만이라도 세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였다(에즈 3). 조금씩조금씩 다른 유배자들의 집단들이 되돌아오는데, 그 가운데에는 대사제 요수아와 유다 왕국이 망하기 전 마지막 임금 여호야긴의 손자로서, 페르샤 정부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고등 판무관인 세스바쌀을 계승한 즈루빠벨도 들어있었다.

 

이 사람들의 권위 아래 예루살렘과 이 거룩한 성읍 주변을 재건하려고 노력한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부류들로 혼합된 집단이었다.

 

.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즈 2; 느헤 7). 이들은 주로 유다와 시므온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서 이들 가운데에는 사제들도 많았다. 이들은 황폐하고 노략질당한 지역에 재입주하는 데에 곤란을 겪게 된다.

 

. 본국에 남아있던 유다인들. 이들 가운데에는 이스라엘의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었지만, 귀향자들의 종교적인 열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우상숭배자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유배자들의 땅에 자리를 잡고 살아야 했었는데, 귀향한 그들에게 재산권을 양도할 용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분열을 제3이사야서의 많은 구절들에서 볼 수 있다.

 

. 이방인들. 유배 기간 동안에 많은 이방인들이 유다 땅에 정주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오기도 하고(60,10; 61,5 참조),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온으로 귀향할 때 따라오기도 하였다(60,9; 66,20 참조). 점점 수가 많아진 이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백성과 얼마나 동화될 수 있었는가가 문제이다.

 

. 디아스포라에 남아있는 유다인들. 이들이 멀리 떨어져있기는 하지만(57,19 참조) 이들을 위해서도 귀향길이 준비되어야 했다(57,14; 62,1). 그리고 이들은, 주님께서 이미 모아들이심으로써 특권을 받은 이들 외에, 그분께서 다시 모아들이고자 원하시는 이들이다(56,8).

 

예언자는 이렇게 상이한 구성 요소들로부터 일치되고 거룩한 백성을 다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네 가지 큰 난관에 부딪친다.

- 늦어지는 구원에 의해서 야기되는 희망의 위기.

- 끈질기게 계속되는 타락, 곧 우상숭배.

- 여러 정황들에 의해서 발생한 분열 곧 동포들 사이의 미움.

- 상이한 부류들의 결합으로 증가된 위험, 곧 이방인들에 대한 멸시.

 

희망의 위기는 귀국자들이 절감했던 실망감에서 온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파괴되어있는 채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느헤미야 시대에 가서야 재건된다(기원전 445-433). 성전은 공사 초안만 잡혀있을 뿐이었고, 예전의 성전보다 그나마 덜 아름답게라도 지어진 것은 시간이 더 흐른 뒤인 기원전 520년에서 515년 사이였다. 생활 여건을 보더라도 외적으로는 일종의 경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 내적으로는 고국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좋지 않았다. 이러한 괴로움 속에서 거의 절망 상태에 빠진 열성 신도들은 늦어지는 구원과 전혀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 같은 주님과 관련해서 그분을 끊임없이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서 제3이사야는 일면 구원이 도래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죄악을 드러내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구원의 틀림없는 원천인 하느님의 성실성을 재확인한다.

 

예언자는 이 밖에도 거짓 신들에게서 도움을 찾는 우상숭배자들을 회개시키려고 한다. 이들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 성전 매춘, 부정한 동물들을 제의에 사용하는 것(65,4; 66,3.17 참조), 강신술(65,4), 이른바 멜렉-몰록 신(57,9) 또는 갓과 므니와 같은 신들을 경배하는 것과(65,11) 같은 타락한 종교 의식에 빠져있었다. 이러한 탈선을 교정하기 위하여 예언자는 두 가지 증거를 들어 위협한다. 곧 구원을 베풀 수 없는 거짓 신들의 무능과,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참되신 하느님의 권능이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자는 동시에 자기 동포들과의 계약도 깨는 자다. 그래서 이 유다인들 사이에 실제로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자들이 있고(56,857,1) 이웃들을 약탈하는 자들이 있다. 또한 상호 부조의 거절과 폭력, 정의의 거부와 임의로 동포를 제명하는 행위 등도 보게 된다. 예언자는 이러한 중죄들을 엄하게 고발하고, 이것들이 참다운 경신례와 부합하지 않음을 드러낸다(58장 등).

 

이스라엘 동포에게조차 흔히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대관절 이방 손님들에게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외국인들과 관련해서 이사야서 5666장은 여러 가지 자세를 드러낸다.

- 어떤 구절들은 악을 고집하는 나라들은 파멸하리라고 말한다(63,3-6; 64,166,15-16.24 참조; 여기에다 59,18의 후반부와 첨가문으로 여겨지는 60,12를 보탤 수 있다).

- 다른 구절들은 이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을 섬기리라고 말한다(60,3-11.13-17; 61,5-9; 62,2-8; 66,12).

- 그러나 가장 흥미를 끄는 문제들은 이방인들을 하느님 백성의 품안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된다. 이 비유다인들은 자기들이 격리될 것을 두려워하지만(56,3), 이사 5666장의 신탁들은 이들에게 매우 밝은 전망을 펼쳐보인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곤경에 빠진 어떠한 유랑민이라도 도와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58,7), 이 밖에도 회개한 이방인들을 자기네 성전으로 맞아들여야 하고(56,3-7), 그들에게 사제직을 양도할 것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66,21).

 

3. 하느님의 모습

 

하느님의 이러한 요구 사항들이 표현되는 것을 들으면서, 우리는 제3이사야가 그린 하느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다.

 

주님께서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며(64,3) 영원한 분이심을(57,15) 3이사야는(2이사야는 길게 강조하는 반면에 짧게) 상기시킨다. 그분께서 창조주이심을 이 예언자는 되풀이하지만 제2이사야보다는 드물게 말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알고 있으며(66,2) 나아가, 이는 특기할 사항으로서, 그분께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창조하실 것임을 덧붙인다(65,17; 그리고 66,22도 참조). 그는 다른 구절들에서는 하느님께서 회개자들의 마음에서 찬미가(57,19) 흘러나오게 하시고(이 역시 하느님의 창조 행위이다), 그리고 새로운 예루살렘을(65,18) 창조하신다고 분명히 말한다.

 

만물의 창조주로서 주님께서는 만물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그분께서 이방인들을 위하여 당신 백성에게 어떠한 보편적 수용의 자세를 명하셨는지 보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에게 영감을 주시어, 당신 백성에게 개인적인 책임감을 강조함으로써 보편주의를 장려하도록 하신다. 어떠한 구분도 없이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똑같이 선택된 백성에 소속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써 확실하게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성실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불경한 자들도 있다. 이스라엘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더 이상 그 구원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부르신다(56,7; 66,18).

 

그러나 모든 민족들이 모여오는 것은, 아직도 그 특권이 존속하는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이루어져야 할 바이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께서는(57,15) 계속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남아계신다(60,9.14에서 두 번 이렇게 불리신다). 물론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야곱이, 2이사야서에서는 17번 나오는데 반하여, 5666장에서는 한 번도 이렇게 불리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배신한 자들에 대립되는 충실한 이들을 부르기 위해서 선택된 용어가, 2이사야서에서는 단수로 쓰여지면서 선택된 민족을 가리키는 데 반하여, 3이사야서에서는 항상 복수로만 사용됨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밖의 다른 표현들은, 야곱과 유다의 후손들이고(65,9) 모세에 의해서 인도된 민족이며(63,11-12) 전세계 종교의 중심이 되도록 예정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하느님의 민족, 그리고 그분의 몫이요 그분의 상속자인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애정을 상기시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온 세상을 향한 사명 수행을 준비시키시면서, 유일하고 참된 아버지로서(63,8.16; 64,7) 절대적으로 성실한 당신의 사랑과(65,16) 전적으로 모성적인 정성을(66,13) 증언하신다. 동정으로 가득하신(63,9) 하느님께서는 백성이 저지른 죄악을 잊어주시고 그들을 낫게 해주시면서 용서까지 해주신다(57,16-18; 64,8). 당신의 친구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당신의 영광과 영화를 부여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자로서 도움을 주시고,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다시 모아들이신다. 이 일을 하시면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정의, 곧 인간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없이 지켜오신 당신의 약속들에 대한 절대적인 성실성을 드러내신다. 이미 제2이사야서에서 보았던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제3이사야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인을 막론하고, 악인들에게는 어김없이 불리하고 선인들에게는 유리하게 수행되는 하느님의 심판을 덧붙인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벌하시기 위해서 그와 함께 법정에 들기도 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그분의 보편적인 판결은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이 된다(66,16.24).

 

사랑에 성실하시고 구원에 능하시며 심판에 틀림이 없으신 이러한 하느님 앞에서 인간들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분을 배척하면 불행을, 그분을 받아들이면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을 받아들임은 회개와 기쁨에 찬 찬미만이 아니라, 동시에 열성적인 순종도 전제로 한다. 2이사야가 주님에 대한 경외를 단 한 번만 말하는 데 반해(50,10), 3이사야는 이를 세 번 또는 네 번에 걸쳐 되풀이한다(57,11; 59,19; 63,17). 에즈라서와만 공유하는 독창적인 특징으로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황송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자기의 청중들에게 촉구한다(66,2-5). 이렇게 하느님을 섬김은 도덕적으로 선한 품행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커다란 경신례적 성실성을 요구하게 된다. 3이사야서에서 성전은 12, 거룩한 산은 5번 언급되고, 이 밖에도 경신례적 행동들을 가리키는 용어들은 매우 많다(안식일이 3, 그리고 사제직, 제단, 희생제물, 단식 등). 3이사야에 따르면 도덕과 종교는 불가분의 것들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기 이웃을 사랑한다고, 그리고 자기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함은 공허한 것이 될 뿐이다.

 

5. 성서 전통 속의 이사야서

 

결국에 가서 이사야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을 통틀어 유일한 작품으로서 예언서들의 경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후 이 책은 새로운 역사를 겪게 된다. 쿰란에서 이사야서의 여러 단편들과 (쿰란의 주요 수사본이라 불리는) 이사야서 전체의 두루마리가 발견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들을 참다운 이스라엘, 그리고 성실한 남은 자들로 여겼던 에세네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이사야서 전체가 하나의 기획서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쿰란의 주요 수사본과 함께 가장 오래된 성서 수사본이 복구되었는데, 이는 유다인 성서전승가들에 의해서 전해진 마조라 본문보다 천년 이전의 것이다. 마조라 본문과 비교할 때 쿰란의 수사본은 단순히 철자법상의 문제들만이 아닌 수많은 변형들을 지니고 있는데, 본문의 뜻을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은 아래 번역의 각주에 명시될 것이다. 이사야서가 유다인들에게 불러일으켰던 관심은 칠십인역이라 불리는 그리스어 번역본에도 나타난다. 이 역본에는 가끔 번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번안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히브리어 본문과는 다른 본문들이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칠십인역은, 번역 원본인 히브리어 본문에 접근할 수 있는 길 하나를 열어주고, 이 번역본이 만들어진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 공동체가 수행한 이사야서의 재독(再讀)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증언해준다는 면에서 유익하다.

 

이사야서 특히 그 제2부 및 제3(4066)는 시편과 함께 신약성서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다. 그 가운데 일부는 명백한 직접 인용문들이고 나머지는 쉽사리 알아볼 수 있는 차용문들이다. 임마누엘의 탄생을 예고하는 이사 7,14가 마태 1,22-23에서 되풀이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유에 의한 가르침은 청중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복음사가들이 말하는데(마태 13,14; 마르 4,12), 이는 이사 6,10의 본문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포도밭이나 모퉁잇돌과 같은 이사야서의 중요한 이미지들은 신약성서에서도 자주 나온다. 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입술만에 의한 예배(마태 15,8과 이사 29,13), 종말의 시간을 묘사하는 그림에 나오는 것으로서 천체들이 빛을 잃는다는 것(마태 24,29와 이사 13,10), 그리고 가지와 그루터기, 특히 주님의 종과 관련된 주제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사야서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새로운 약속들과 임박한 심판 앞에 놓여있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사야서가 성화(聖畵)와 그리스도교 찬미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다. 여러 대성당의 정면 현관, 신심 서적 속에 들어있는 삽화들, 그리고 많은 성가들이 각자 제 나름대로 이사야서를 되풀이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상, 이사야서라는 이 하느님의 특별한 증인보다 계시를 더 적절하게 표현하고 신앙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 책도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예레미야서 입문

 

 

1. 말씀의 사람과 고독

 

예레미야서의 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 예언자는 스스로를 외톨이로 소개한다. 저는 홀로 앉아있나이다(15,17). 이 말은 예언자가 자신과 외부 사회의 관계를 묘사하는 전형적 표현이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그를 두둔하고 격려해 주어야 할 친지들, 특히 가족들에게서조차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12,6; 20,10). 그는 그들과 함께 혼인잔치에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다(16,5-9). 그는 혼인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될 수도 없다(16,1-4).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며,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에집트로 끌려가다가 타향에서 생애를 마치게 된 그의 무덤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레미야서에서 예언자의 내적 삶에 관한 매우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레미야의 고독은 그의 본성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의 고독은, 그를 압도하고 갑자기 그에게 몰려와 그의 존재 전체를 채우며 그를 괴롭히고 그의 의지를 온전히 사로잡은 외적 힘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 외적 힘은 예언자에게 유다 백성 한복판에서 고독을 행동 양식으로 삼도록 강요한다.

 

이 어찌할 수 없는 힘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어떤 예언자도 예레미야만큼 하느님의 말씀과 그 실천 방안을 철저하게 알리지 못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1,4). 이 말은 예레미야가 자신의 담화를 소개하고 규정하는 통상적인 표현이다(1,2 각주 참조).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었나이다(15,16). 때로는 이 말씀이 파괴자가 된다. 내 심장이 내 안에서 터지고 / 내 모든 뼈가 떨린다. /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 술에 전 인간처럼 되었으니 / 이는 주님 때문이요 / 그분의 거룩한 말씀 때문이다(23,9). 예레미야는 불과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은(23,29. 그리고 20,9 참조) 이 도발적인 말씀을 일상적 체험이 따르는 환시에서뿐 아니라(1,11-14 참조), 주님의 천상 어전회의에서도 받는다(23,18.22. 그리고 5,1과 각주 참조). 이 어전회의에 예레미야는 예언자의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님께서 직접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술에 담아주시고(1,9) 이 말씀이 고집센 이스라엘 백성을 삼킬 때까지(5,14) 지켜보신다(1,12). 때때로 말씀이 그를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씀이 드물게 그를 찾거나, 다시 그에게 내릴 때까지 형벌처럼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든다(42,7). 예레미야의 삶에서 말씀은 해결의 열쇠인 동시에 골칫거리요, 흥을 깨뜨리는 자인 동시에 존재 이유이며, 그 자신과 친지들을 갈라놓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사건의 한복판으로 그를 빠져 들게 만드는 전제군주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울여야 했던 노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노력의 흔적은 이 책 곳곳에 들어있는 수많은 대화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자신의 삶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하느님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그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들은 현대의 주석가들이 예레미야의 고백이라고 부르는 대목들이다(11,18 - 12,6; 15,10.15-21; 17,14-18; 18,18-23; 20,7-13.14-18).

 

이 다섯 고백에서 예언자는 자신의 고립과 소외, 열악한 주변 환경에 대하여 신랄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삶의 조건이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가 예언직의 일부라는 사실을 주님에게서 들어 확인할 뿐이다. 한편 예레미야의 다섯 고백만이 예언자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오간 대화의 전부는 아니다. 이 책에는 처음부터 다른 형태의 대화도 나온다. 예레미야가 성소를 받는 장면에서도 대화가 대부분인데, 여기서 그는 아직 나이가 젊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헛되이 발버둥친다(1,4-10). 그의 예언직을 규정하는 초기 환시들(1,11-14), 그에게 유다 사회에 대한 하느님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해주는 대목(5,1-`6), 이스라엘을 황폐케 하는 가뭄을 그치게 하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대목(14,115,9)들도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대화들을 보면 사람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과 고투하다가 결국 승리하는 쪽은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임이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그 전개 과정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든지` - `예언 체험을 심리학적으로 탐구해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 `이 모든 대화는 예레미야가 줄기차게 몰두한 대상이 하느님의 말씀이었음을 증언한다.

 

2. 예언직 소명의 진정성

 

예언자의 실존을 뒤흔드는 모든 문제 가운데 예언직에 대한 확신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사실 예레미야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은 아니었다. 예레미야서 자체만 보더라도 예레미야와 같은 자격으로 그 곁에서 예언자로서 지위와 특권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활동도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26,20-24), 아쭈르의 아들 하나니야(28), 콜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키야(29,21), 그 밖에 수많은 무명의 예언자들(2,8.26.30; 4,9; 5,13.31; 6,13-14; 14,13; 26,7-16; 27,16-18), 바빌론으로 유배 간 예언자들(29,1) 등이 그들이다.

 

예레미야서 본문을 보면 처음에 이 예언자는 자신의 동료 예언자들과의 관계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행동을 할 뜻이 전혀 없었다(14,13-16; 28,6-9; 29,1 참조). 그는 한번에 그들을 거짓 예언자들로 분류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의 고독과 관련하여 미묘한 특성을 만나게 된다. 예레미야는 고독을 자초한 적이 없었다. 그는 특정한 몇 가지 윤리적 비판을 제외하고(23,14.17.22; 29,23) 참과 거짓을 구별하고 스스로 참된 예언자라고 여기는 자들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를 특별히 옹호하는 어떠한 객관적 비판도 내놓지 않았다(28,8은 예외). 예레미야 역시 그의 경쟁자 하나니야처럼 틀릴 수 있다(28,6-9). 하나니야는 당시의 정치와 군사를 책임진 대다수와 견해를 같이하였다(아래 4항 참조).

 

예레미야가 받은 특별한 소명의 진정성은 그가 자신의 삶 한복판에서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달려있다. 하느님께서 그의 메시지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분이라면, 어찌하여 그 메시지에 일관성이 없는가?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파견하셨다면, 어찌하여 그 혼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혼자서 그 진리를 주장해야 했던가?(여호야킴에 의해 살해된 예언자 우리야 같은 사람도 예레미야를 옹호해 주지 못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에게 임무를 맡기셨다면, 어찌하여 이 예언자는 사람들의 학대를 받아야 하는가?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동료 형제로 또는 자신들의 스승으로 기꺼이 떠받들고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계시에 적합한 인물이 어떤 모습의 인간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정신적 갈등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사명에 관한 한 그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말씀에 충실히 동화되었고 심지어 그 말씀을 받아먹기까지(15,16 참조) 하지 않았는가? 그는 늘 완벽한 성실로 살아가지 않았던가? 그는 자신의 동료들뿐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까지 실제로 참 예언자처럼 중개하지(18,20. 그리고 14,13; 17,16 참조) 않았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는 고독과 적응 불능과 영원한 반동의 슬픈 주인공으로 드러나는가?

 

하느님의 단호한 응답은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정당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것으로서 갈수록 점점 심해질 것이다(12,5). 불만에 찬 하느님의 일꾼은 그분의 말씀이 다시 들리도록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길을 되찾고 그 길을 성실하게 걸어야 한다(15,19-21). 다른 예언자들과 관련하여, 그들에게 아무런 임무를 맡기지 않으신(14,14-16) 주님께서는 그들의 거짓을 폭로하실 것이다(23,16).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의 영혼을 뒤흔드는 의심들을 없애버리시기 위하여 그분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진정 살아계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확인시키려 하지 않으신다.

 

예레미야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이 예고한 재앙이 실현되는 것을 볼 것이다. 유다인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운명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몇몇 정통한 신학자들은 예레미야의 신탁들뿐 아니라 그의 예언직과 관련된 전승들까지도 수집하게 될 것이고 마침내 그를 주님의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입문 5항 참조).

 

3. 몇 가지 전기적 사료

 

이상의 근본적인 갈등과 비교할 때 이 예언자의 삶과 연관된 외적 환경은 이차적인 관심사로 밀려난다. 또한 이 환경은 그리 잘 알려진 편이 아니며 주어진 자료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 또한 대부분 추론일 뿐이다.

 

1,1에 보면 예언자의 고향은 예루살렘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아나돗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의 집안은 이곳에 토지를 갖고 있었다(32. 그리고 37,12 참조). 그는 사제 가문 출신이었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가 옛날 솔로몬에 의해 아나돗에 유배된 실로의 사제 아비아달의 먼 후손일 수도 있다는(1열왕 2,26-27) 가설을 끌어내었다. 나아가 조상이 물려준 종교적 전통과, 사라진 북부 왕국과 인접해 있는 지리적 조건은 그의 문체와 메시지 내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1,2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린 때였다(1,6). 많은 사람들이 이 12절과 6절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가 태어난 때를 기원전 650`?645년경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1,2(25,3에 다시 나옴)의 연대가 후대의 전승에 바탕을 둔 것이고 실제로 그가 성소를 받은 연대를 기원전 609 - 608년으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어떻든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가설이 나온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2년 요시야의 개혁을 진심으로 환영했고 자신의 설교로 이 개혁사업에 협력했을 것이다(11,1-4 참조). 개혁의 결과로 예루살렘 성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소들이 문을 닫고 수많은 사제들이 할 일을 잃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예레미야의 친척들이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11,18-22 참조). 그러나 나중에 요시야의 개혁이 일시적 효과만 내고 끝나는 것을 보고 실망한 예레미야는 유다인들의 불충실을 강도 높게 비난하였을 것이다.

 

이런 가설들은 예레미야가 기원전 626년에야 성소를 받았다는 연대기 자료 때문만이 아니라, 이 책이 요시야의 저 유명한 개혁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22,15-16에 약간의 암시가 있다) 그리 큰 확신을 주지 못한다. 또한 11,1-14를 비롯하여 예레미야서 여기저기에 드러나는 신명기적 용어와 사상은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입문 5항 참조). 결국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대한 반발은 그를 통해 전파되었을(이 추측이 맞다면) 요시야의 개혁 정책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증언대로 그의 중개를 통한 하느님 말씀의 갑작스런 개입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11,21; 예레미야의 다른 고백들 참조).

 

우리로서는 아무리 그것을 얻으려 해도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활동에 대해 불충분한 자료만을 입수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대신 그의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뒷부분에서 상당히 자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기원전 608년에 극도로 악화된 상황을 맞아 예레미야는 성전 어귀에서 설교하는데 그 장면이 26장에 잘 나와있다(7,18,3 참조). 기원전 605-`604년에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간직한 신탁들을 바룩을 통하여 처음으로 두루마리에 적게 하였는데, 그 글이 몇몇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읽혀진다(36). 기원전 594년 그는 다른 예언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조금 뒤에 바빌론에 끌려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는데, 이 편지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정신적 쇄신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29).

 

기원전 588-587년 예루살렘이 포위된 기간에 예레미야가 시드키야 임금과 그 신하들과 겪은 갈등, 그리고 이 도성이 함락된 뒤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서 펼친 그의 활동상은 32 - 35장과 37 - 44장의 본 내용을 이룬다. 우리는 이런 갖가지 정보가 아무리 자세하다 하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예언자의 전기를 작성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 안에서 이런 정보들을 연대기순으로 정확하게 배열할 수도 없다. 이 정보들은 가장 어려운 역사의 현장을 체험한 한 민족과 더불어 고뇌하며 살았던 한 예언자의 실존 안에서 말씀이 어떤 형태로 활동했는지를 밝혀주는 실례들일 뿐이다.

 

4. 여러 해에 걸친 말씀의 봉사직

 

처음부터 예레미야의 봉사직을 특징지었던 고독은 특이한 종교적 체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고독은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의 내용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 메시지는, 유다인들이 공동체를 부정하고 창조까지도 철저하게 부정하는 상황과 끊임없이 마주치게 만들었다(4,23-26). 모든 것의 긍정이나 부정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수용이나 거부에 달려있었다. 이 점에서 그의 고독은 정치적 차원을 갖는다. 그의 고독이 지속되고 유다인들이 그의 말을 계속 거부하는 한 그는 우주적 재앙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생존자가 될 것이요, 반대로 그의 말을 듣는 청중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재앙은 비켜가거나 적어도 늦추어질 것이며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형태와 만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의 껄끄러운 메시지는 근본적인 결정을 명령조로 요구한다. 대부분의 다른 예언자들처럼 그에게도 말씀은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인격적 특성을 지니는 동시에 통교의 매체가 된다.

 

예레미야의 봉사직을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겠다.

 

) 첫 번째 시기는 소명에서 기원전 605년 가르그미스 전투까지이다. 요시야가 다스릴 때 유다는 처음에 번영을 누리는 안정 시대를 맞는다.

아시리아는 주변 국가들에 대한 폭정을 그치고 유다는 폭넓은 독립을 누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요시야는 영토를 넓히고 온갖 종류의 개혁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죽자 왕국은 몇년 지나지 않아 에집트인들에게 지배당하게 되는데 그 속박이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한편 유다 전체는 요시야가 전사한 므기또 전투(2열왕 23,29 참조) 이후 몇년 동안 점차 기울어져만 갔다.

 

바로 이 기간에 예레미야는 완전히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도록 강력하게 요청받는다. 매우 도발적인 용어를 사용한 운문 신탁으로 그는 북쪽에서 일어난 불가항력적인 군대가 쳐들어와 유다 전역과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킬 것이라고 단정한다(4 - 6장 참조). 이 무자비한 군대는 패배자들이 너무 늦기 전에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는 한 그들에게 어떤 희망도 남겨놓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자기 동족에게 회심을 촉구할 책임을 맡았지만 그들이 회개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이 백성은 자기네 길만을 너무 고집하고 그들이 세운 체제가 언제나 변함없이 유지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18,18; 8,8 참조). 유사시에 그들은 최후의 피난처요 세속의 힘이 미치지 못할 성전에 피신하면 되는 줄로 여겼다(7,4.10 참조).

 

예레미야는 계층별로 백성을 심문한 결과 그 명백한 증거에 승복해야 했다. 백성 전체가 잘못된 길로 빠져 들고 있다. 억압하는 자들도 억압받는 자들도, 착취하는 자들도 착취당하는 자들도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5,1-6 참조). 이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그 피부색을 바꿀 수 있겠는가? 표범이 제 얼룩을 지울 수 있겠는가? 그처럼 악에 젖어 사는 유다인들이 선을 행할 수 있겠는가(13,23)?

 

백성은 예언자의 통렬한 메시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언자의 생각이 그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이고 현실과 거리가 멀다. 현실은 완전히 검은 것도 완전히 흰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는 하느님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과도 맞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가까운 분, 친밀한 분이시다(23,23 참조). 믿기지 않는 내용이 담긴 두루마리를 한 조각 한 조각 침착하게 찢어 불에 태우는 여호야킴 임금의 행동은 예레미야의 설교가 첫 번째 시기에 완전히 실패로 끝났음을 그대로 보여준다(36).

 

) 두 번째 시기는 기원전 605-587, 곧 느부갓네살의 즉위부터 예루살렘의 파괴까지이다.

이 시기는 예레미야의 예언직 수행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시기로 평가된다. 적군의 침략과 관련된 그의 예언들은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다. 바빌론 임금은 자신의 군대로 여러 차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휩쓸었고 그 도상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에 장애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유다의 독립이었다. 이런 형편인데도 유다의 정치를 책임진 자들은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백성의 지도자들 대다수가 유다의 정치적 독립을 결연히 선택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바빌론을 근동의 패권 다툼에서 멀리 떼어놓으려는 에집트와, 바빌론의 진출로 위협을 느낀 주변의 약소국가들과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이런 정책은 유다의 통치자인 다윗 왕가가 중심이 되어 펼쳐 나갔다.

 

그러나 일부 지도자들은 느부갓네살 제국의 속국이 되어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행사할 희망 속에서 유다가 바빌론을 종주국으로 받들 것을 제안하였다. 예레미야서 덕분에 우리는 친바빌론파의 여러 거물급 인사들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예레미야의 강력한 보호자인 아히캄(26,24),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그 지방의 통치자로 임명된 그의 아들 게달리야, 예레미야가 자신의 신탁을 기록으로 남길 때 결정적 도움을 주었던 네리야의 아들 바룩 등이 그들이다. 마지막에 언급된 인물 바룩에 대해 어떤 이들은 그를 예레미야의 단순한 비서로 생각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예언자가 자신의 임무를 원활히 수행하려고 고용한 일종의 속기 필경사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바룩은 유다 왕궁의 재무대신이었던 그의 동기 스라야처럼(51,59 참조) 나라의 관료로 서기관직을 맡고 있었다. 바룩의 특별한 위치는 사람들이 그를 친바빌론파의 우두머리 중의 하나요 예레미야의 신탁을 부추긴 자로 여긴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43,3).

 

다른 제3의 제안은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극단적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에집트와 동맹을 맺어보았자 나중에 다시 그들의 속국이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을 자유파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실패할 경우 완전히 멸망하거나 아니면 바빌론의 정치제도에 합병될 것을 각오한다.

 

예레미야도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논쟁에 휘말려 들었다. 그의 입장은 매우 분명하였다. 그는 바빌론의 패권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가 기회에 따라 행동하는 정치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의 패권 안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였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유다가 독립된 강국으로서 정치와 종교의 이중 통치 질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성적 사랑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백성으로 남아있는 것이었다(3,224,4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이 백성이 마음으로부터 정의를 수호하고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신다(5,1-3; 22,13-17; 23,5-6 참조).

 

예레미야와 독립파들 사이를 구별하는 기준은 후자가 주님에게 소중한 가치를 모두 경멸한다는 데 있다. 특히 임금이 주범이었다(22,13-17).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국가를 없애버리기로 작정하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제국 한복판에서 완전히 새로운 계획을 마련하신다. 그분께서는, 한때는 심판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변화된 공동체, 자신의 영광을 찾지 않고 오히려 모든 이의 안녕을 돌보고자 하는 공동체를 창조하고자 하신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다른 이의 행복을 자기 행복의 조건으로 삼는다(29,5-7). 이 공동체는 마침내 조상들의 나라로 행복하게 돌아온 뒤에, 옛날 주님과 맺은 계약을 더욱 심화시켜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더 이상 어떤 중개 계층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31,31-34). 이 메시지는 이미 3,1523,6에도 나온 것으로서 이 대목에 보면 주님께서는 당신께 온전히 성별된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 백성을 인도하신다.

 

) 세 번째 시기는 기원전 587, 곧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데 그것은 바빌론 유배자들이 전체 유다 인구의 일부 계층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대로 본국에 남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데서 온다. 버려진 이 대중은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분류된다. 게달리야를 중심으로 한 친바빌론파는 바빌론의 보호 아래 나라를 재건하고자 했다. 예레미야도 이 부류에 속하였다.

두 번째 부류는 양심의 가책에 매이지 않고 행동하는 이스마엘이 이끌었는데 이들은 암몬 임금에게 의존하면서 폭력을 사용하여 독립을 쟁취하려고 하였다(41,1-10 참조). 세 번째 부류는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이끄는 것으로서 에집트에 망명하기를 원하였다. 이 망명길을 말리는 예레미야의 신탁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실천에 옮겼고 이 과정에서 예레미야를 인질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의 흔적은 이 에집트 망명길에서 끊어지고 만다.

 

5. 예레미야서의 형성과 구조

 

예레미야서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1,125,14: 유다를 거슬러 한 예레미야의 신탁과 행동

26,145,5: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구원의 신탁,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언직에 관한 기록

46,151,64(25,15-38의 서문 포함): 이방 민족들을 거슬러 한 신탁

52,1-34: 2열왕 24,1825,30에서 빌려온 역사적 문헌(몇 가지 새로운 자료가 첨부됨), 예루살렘의 함락을 다룸.

 

칠십인역에는 이방 민족들을 거슬러 한 신탁이 25,13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 이 배열은 본문 두루마리의 더욱 원초적인 상태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다른 여러 예언서들(이사 1 - 39; 에제키엘서; 하바꾹서; 스바니야서)도 이방인들을 거슬러 한 신탁을 이스라엘을 거슬러 한 재앙의 신탁과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신탁 사이에 놓는 삼분법 구조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넷으로 크게 구분한 각 부분에는 소단위 신탁들과 문헌들이, 비슷한 주제나 표상에 따라 한데 모여있다. 예를 들어 22,1123,8에는 다윗 가문에 관한 신탁들이, 23,9-40에는 예언자들에 관한 신탁들이, 그리고 30,131,40에는 새 이스라엘의 재건을 알리는 문헌이 모여있다. 그 밖에 2, 4 - 6, 14,1 - 15,4 등의 본문은 최종 편집에 앞서 수집된, 예레미야의 육성이 담긴 문헌들로 보인다.

 

예레미야서의 첫 부분(1 - 25)과 관련하여 바룩이 기록하고 여호야킴이 없앴으나 나중에 더욱 긴 형태로 재작성한 두루마리의 이야기는 주석가들의 특별한 연구 대상이 된다. 이 두루마리는 기원전 605년 이전에 선포한 위협적 신탁을 포함했을 터인데 그 내용이 십중팔구 현재의 예레미야서 1 - 25장에 한데 모아진 자료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주석가들이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이 본문들의 성격을 밝히고자 하였지만, 서로 모순되는 연구 결과들을 내놓게 되었고, 일치된 견해를 얻어내는 데 실패하였다. 현재로서는 최초의 두루마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1 - 25장의 운문 신탁들이 산문과 교묘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운문 신탁들은 대부분 예레미야에게까지 소급되는 원초적인 문헌인데 반하여 산문은 예레미야가 죽은 뒤, 유배 기간 동안에 저작활동을 벌인 신명기적 편집자들의 용어와 신학 사상을 반영한다. 이 편집자들은 예레미야서뿐 아니라 전기 예언서들이라 부르는 구약성서 책들을 집대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다. 운문과 산문이 뒤섞인 이 장들을 모두 예레미야의 육성 문헌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후대의 편집자들에 의해서 다듬어진 예언자 자신의 신탁들을 재현하는 것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두 번째 부분에는 예레미야의 직무 수행에 관한 기록들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바룩이 지은 것으로 본다. 사람들이 바룩을 이 기록의 저자로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나오는 정확한 정보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사건들을 직접 눈으로 본 증인의 기록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이 기록은 바룩에게 개인적으로 전하는 신탁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기록을 바룩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완전히 확실한 것은 아니다. 저자 바룩은 아마도 예레미야와 함께 에집트로 갔는지 모른다(43 - 44장 참조). 43,6에 따르면 바룩은 전에 친바빌론파의 우두머리였다. 이 사실 때문에 그가 예레미야와 함께 에집트로 강제 이주당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다.

 

바빌론 유배 초기부터 수많은 소책자, 단편 문헌, 여기저기서 모은 기록들, 그리고 예레미야와 관련된 몇 가지 구두 전승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자료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사람이 바로 무명의 편집자이다. 우리는 이 편집자의 신원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가필과 수정, 신명기적 문체를 바탕으로 한 해설 등으로 본색을 드러낸다. 특히 신명기적 문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예레미야서의 거의 모든 장에서 눈에 띈다. 기원전 6세기 후반기는 이스라엘 안에서 문학과 신학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수많은 문헌들을 수집하고 해석하며 그것들을 모아 낱권의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과 이해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애가 입문

 

 

1. 책 이름과 역사적 배경

 

히브리 성서에서는 책의 첫 낱말에 따라 그 책의 이름을 지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자권에서 [애가(哀歌)라 부르는 책의 히브리 이름은 에카(=`!; 또는, 어찌하여!)”가 된다. 이 책은 다섯 개의 노래로 이루어졌는데(이에 따라 역시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둘째와 넷째 노래도 이 에카!”라는 말로 시작한다(이사 1,21와 예레 48,17 참조). 반면에 그리스말 번역에서는 책의 내용에 따라 트레노이(=`애가)”로 불리는데, 탈무드에 따르면 히브리말에서도 본디 만가의 뜻을 지닌 키노트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라틴말 번역에서도 같은 뜻을 지닌 Lamentationes가 채택되었다. 이후 이 라틴 명칭 또는 그리스 명칭이 라틴말로 음역된 Threni가 서양에서는 전통적인 이름이 되는데, 이것이 히브리 문학 유형이 의도하는 바에 더 상응한다고 하겠다. 이 애가 또는 만가 유형은, 장례식 때 불린 조가(2사무 1,17-27 참조)와 더불어, 국가적 환난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

 

이 책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의 임금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한 사건을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느부갓네살은 이어서 유다 왕국 국민의 일부를 바빌론에 강제로 이주시킨다(2열왕 25,1-21 참조).

 

유다인들은 (확실하게는 기원후 6세기부터) ‘아브라 불리는 다섯번째 달(한 해는 과월절로부터 시작한다)9일에 거행되는 기념일에 이 책을 봉독한다(그래서 히브리 성서에서 애가는 유다인들의 다른 주요 축제 때 봉독되었던 룻기/아가/코헬렛서<전도서>/에스델서와 함께 머길로트<‘축제 두루마리곧 축제 오경>의 일부를 이룬다). 그런데 이날은, 기이하게도, 위의 사건만이 아니라 기원후 70년 제2 성전이 로마인들에 의하여 파괴된 것까지도 기념한다.

 

2. 저자

 

칠십인역은 유다인들의 어떤 전통에 따라 이 책을 예언자 예레미야의 작품으로 전하는데(그래서 이 번역본과 불가타, 그리고 현대의 많은 번역 성서에서는 예레미야서 다음에 자리하고, 이에 따라 맛예레미야의 애가맜라는 명칭과 함께 불려오기도 한다), 이는 예레미야가 유다의 임금 요시아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가를 지었다고 전하는 2역대 35,25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상 애가의 4,20은 예레미야가 유다의 임금 시드키야에 대하여 생각했던 바와는 별로 일치하지 않는다(예레 23,6; 24,8도 참조). 이 밖에도 예레 31,29-30은 애가 5,7에 표현된 응보의 교리를 논박하고 있으며, 예레 37,5-7은 애가 4,17에 나오는 에집트와의 동맹 관계를 공박한다(5,6; 예레 2,18도 비교). 또한 예언자들이 주님께로부터 계시를 더 이상 받지 못한다는 2,9의 말을 예레미야 자신이 한다는 것은 모순일 것이다. 2,9의 본문은 애가가 바빌론이 아니라, 팔레스티나 - 예루살렘에서 저작될 수밖에 없었음을 드러내는 징표임을 지적할 수 있겠다(2,10; 4,22; 5,4.8.18도 참조). 바빌론에는 에제키엘의 말을 듣는 일정한 청중이 있었기 때문에(에제 8,1 참조) 그의 존재가 무시될 수 없었다. 반면에 예레미야가 에집트로 도피하는 무리에 의하여 끌려감으로써(예레 43,6), 팔레스티나에는 이제 예언자가 더 이상 없다는, 또는 예언자가 더 이상 주님께로부터 환시를 받지 못한다는 말(2,9)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애가 안에 들어 있는 다섯 개의 노래들이 형식과 기조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아 서로 다른 출처에서 유래하는 작품들일 수 있다. 애가는 예레미야의 작품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한 사람 또는 한 집단, 아니면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도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3. 문학 양식

 

다섯 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애가의 처음 네 개는 알파벳 노래이다(시편 9-10; 25; 34; 37; 111; 112; 119; 145; 잠언 31,10-31 참조). 곧 각 노래의 절 수는 22개로 되어 있고, 각 절은 22자에 달하는 히브리 알파벳의 철자 순서에 따라 시작한다. 그러나 첫째와 나머지 세 노래의 알파벳 순서에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곧 첫째 노래는 현재 우리에게 전해진 알파벳 순서를 따르지만, 2,3,4장에서는 이와는 달리 페( )가 아인( ) 앞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저작 당시 알파벳의 순서가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셋째 노래는 이른바 3중의 알파벳 노래이다. 곧 이 3장에서는 각 절이 세 줄로 되어 있는데(우리말 번역에서는 여섯 행), 각 줄이 모두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같은 철자로 시작하는 것이다(예컨대 1,2,3절은 모두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레프< >로 시작하고, 4,5,6절은 둘째 글자인 베트< >로 시작한다). 그리고 5장은 비록 알파벳 노래는 아니지만 앞의 노래들처럼 22개의 절로 이루어짐으로써 알파벳의 자수와 절수를 일치시키는 형식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알파벳 시 형식은 암기를 수월하게 하고, ‘A에서 Z까지라든가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말하는 바와 같이, 주제가 충분히 다루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외형적 양식에 맞추어야 하는 필요 때문에 내용의 전개에 있어서는 일정한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주제와 관련해서는, 첫째와 둘째, 그리고 넷째 애가에 정치적 조가(弔歌)’라는 유형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 노래들은 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가의 형식으로 시온(그리고 이를 통하여 예루살렘 및 이스라엘 민족 전체)을 한 여인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형식 속에 성전과 수도의 파괴, 그리고 국가의 멸망이라는 정치적 내용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정치적노래들은 이른바 세속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기도로 나아간다. 다섯째 노래는 시편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공동 탄원기도 유형에 속한다.

 

반면에 한 개인의 노래로 여겨지는 셋째 애가에는 한 남자가 서술되는데, 그의 여러 가지 면이 고통받는 예레미야를 생각하게 한다. 자기 나라의 고난을 몸으로 고스란히 나타내는 예언자의 특징들을 이용함으로써 백성 전체를 이 예언자를 통하여 묘사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네 개의 노래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해석으로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노래가 다른 네 개의 국가적 공동 애가들 사이에 자리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4. 저작 시기

 

애가에 실린 노래들의 작가 불명성과 다양성은 동시에 저작 시기의 문제를 안고 있다. 명확한 저작 순서에 대하여 확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모든 노래는 기원전 538년 유배가 종료되기 이전의 것들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둘째와 넷째 노래에 들어 있는) 여러 세부 사항들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사건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첫째 애가는 기원전 597년의 첫 강제 이주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2열왕 24,10-17 참조).

 

정치적 및 종교적 대환난이 가져온 물리적/도덕적 불행 속에 겪어야 하는 슬픔, 하느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백성을 멸망시키도록 강요한 지금까지의 죄스런 행실에 대한 회개,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의 체험 등은 성서의 이 책에 비극적 미를 부여하고, 이러한 특수한 상황에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모든 시대를 통하여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다.

 

5. 내용

 

애가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애도한다(1,1.4; 2,8; 5,16). 이 성읍은 눈물 속에(1,2.16; 2,11.18; 3,48-51), 탄식속에(1,4.8.11.21.22), 고통 속에(1,5.12; 3,32), 폐허 속에(1,4.13.16; 4,5; 5,18), 수치(1,8)와 기아 속(1,11.19; 2,12.19; 4,4.5.8-9; 5,6.10)에 잠겨 있다.

 

예루살렘은 자기에게 귀중한 존재들을 상실하였다. 아이들(1,5.20; 2,4.11.19.20.22; 4,4.10), 처녀들(1,4.18;2,10.21; 5,11), 청년들(1,15.18; 2,21; 5,13; 5,14), 원로들(1,19; 2,10; 4,16; 5,12.14), 사제들(1,4.19; 2,6.20; 4,16), 예언자들(2,9.20), 그리고 임금들(1,6; 2,2.6.9; 4,20; 5,12)을 잃어버렸다.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의 신성한 것들, 곧 성전(1,4.10; 2,1.4.6.7.20)과 축제 때 경신례를 거행하는 공동체(1,4.10; 2,6.7.22) 역시 속화되고 더럽혀졌다.

 

고통 속에서,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고통 덕분에,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주님께 대한 반항, 항거, 거역, 불순종과 패륜(1,5.8.14.18.20.22; 2,14; 3,39.42; 4,6.13.22; 5,7.16) 곧 자신의 죄악을 인식하고 이를 고백한다(3,42; 5,7.16).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당신의 손으로 무겁게 내리누르신다. 이는 물론 (도합 20번 이상이나 언급되는) 적들의 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손(1,14)일 따름인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악을 철저히 배격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신다. 이것이 그분의 진노(1,12; 2,1.3.6.21.22; 3,43.66; 4,11), 분노(2,4; 4,11), 격노(2,2; 3,1), (1,13; 2,3-4; 4,11)로 서술된다.

 

그분께서는 죄인들에게 일종의 적의 모습을 취하신다(2,4-5; 3,1-18.43-45). 고통을 내리시고(1,5.12) 먹구름으로 뒤덮으시며(2,1), 사정없이 쳐부수시고 도살하신다(2,1-8). 그래서 그분께서는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것으로 여겨진다(1,16). 그러나 동시에 가까이 계시면서(3,57) 들으시고(3,56.61) 직접 보시며(1,9.11.20; 2,20; 3,50.59-60.63; 5,1) 기억하신다(5,1).

 

인간은 그분께 의지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의롭고(1,18; 3,34-36) 전능하시며(3,37-38; 5,19), 약속하신 당신의 자애에 충실하시고(3,32) 구원을 베푸시며(3,26.58),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고(1,16) 좋으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3,25), 당신의 다함 없는 모성적 자비를 아침마다 새롭게 베푸시기 때문이다(3,22-23).

 

죄의 결과인 불행은 그 나름대로 지고의 은혜이기도 하다. 그것은 겸손한 고백,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회개,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이루겠다고 장담할 수 있는 회개가 아니라(3,40), 하느님만이 인간 안에 이루실 수 있는 회개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5,21).”

 

 

바룩서 입문

 

 

바룩서는 칠십인 그리스말 역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 예로니모는 히브리인들이 바룩서를 읽지도 않고 지니지도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라틴말로 옮기지 않았다. 따라서 불가타에 수록된 바룩서 번역은 예로니모의 번역이 아니라 옛 라틴말역이다. 칠십인역에서 바룩서는 예레미야서와 애가 사이에 있고 예레미야의 편지는 애가와 에제키엘서 사이에 있다. 그러나 우리말 번역에서는 불가타 전통에 따라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인 6장으로 소개한다. 이 입문에서는 칠십인역의 바룩서 본문을 먼저 해설하고, 그 다음에 예레미야의 편지에 관해서 해설하겠다.

 

1. 바룩서의 저자

 

예로부터 이 책의 저자로 불린 바룩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비서요 친구이며, 동시에 유다 왕궁의 서기관이었다. 바룩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축복받은 이라는 뜻을 지닌다. 예레미야서는 바룩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바룩은 유다의 명문 출신으로서 마아세야의 손자이며 네리야의 아들이었다. 그의 동기 스라야는 시드키야 임금의 재무대신이었다(예레 51,59). 바룩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파괴에 관하여 전한 신탁을 글로 적어 유다 임금 여호야킴에게 전달하였다(예레 36,1-21). 그러나 여호야킴은 그 두루마리를 칼로 한 조각 한 조각 베어 불에 살라버렸다. 그러자 바룩은 그 내용을 더 늘린 신탁의 두루마리를 새로 만들었다(예레 36,27-32). 그 다음에 바룩은 호사야의 아들 아자리야에게 친바빌론파로 몰려 예레미야와 함께 에집트로 끌려갔고(예레 43,1-7), 그뒤 바룩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이 예레미야서가 전하는 바룩의 생애이다. 그러나 바룩서의 저자가 이 바룩과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바룩서가 전하는 내용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비서인 바룩이 바빌론에서 유배살이를 하며 예루살렘에 남은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편집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빌론의 예루살렘 점령과 유배에 관한 그 당시 문헌의 기록과 바룩서 자체의 기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이 책의 저자를 도저히 바룩으로 여기기 어렵게 한다(1,1.2.8.10.12 그리고 14절의 각주들 참조). 더구나 예레미야서에 따르면 바룩은 바빌론에 가서 유배살이를 하지 않고 오히려 에집트로 끌려갔다. 따라서 이 책은 가명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가명 작품은 저자의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다를 뿐 아니라 작품의 상황 설정이나 염두에 둔 독자도 본문의 진술과 다르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바룩서를 읽을 때 부딪히는 가장 큰 어려움이다. 바룩서는 기원전 587년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점령과 유배기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지만, 이 배경을 저자가 살던 시대에 맞추려고 적지 않은 수정을 한다. 역사적 실제 배경과 본문에 묘사된 배경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시대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룩서를 공간과 시간 안에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이 책의 기능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본문이 말하고 묘사하는 내용 뒤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2. 바룩서의 구조

 

바룩서는 성격이 다른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네 부분은 전혀 다른 저자의 손과 시대를 거쳐 나왔다. 네 부분의 제목은 역사적 서문, 참회기도, 지혜에 관한 명상,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이다. 이들은 본래의 언어와 문학양식과 사상 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여기서 자연히 이 책의 편찬 과정에서 어떤 자료들이 이용되었는가, 그 자료들은 서로 어떤 연관과 통일성을 갖는가, 편집의 전반적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점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들로 떠오른다.

 

) 역사적 서문(1,1-14)

 

이 부분은 바룩서가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무슨 의도로 쓰여졌는지를 우리에게 밝혀준다. 이 서문은 칠십인역에 친숙한 저자가 그리스말로 직접 편집했는가? 아니면 원래 히브리말을 사용하는 저자가 작성한 것인가? 이 두 가지 가설이 서로 맞서왔으나 나중 가설이 좀더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서문은 바로 이어지는 기도의 머리글 구실을 한다. 특별히 참회기도를 언제 그리고 왜 바쳐야 하는지와, 이 기도가 어떤 전례의 틀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서문의 기능이다.

 

) 참회기도(1,15 - 3,8)

 

이 부분은 고백(1,15 - 2,10)과 기도(2,11 - 3,8)로 나눌 수 있다. 이 기도의 그리스말 본문은 여러 성서 구절들을 짜깁기해 놓은 것인데, 본래 히브리말로 편집된 것을 번역한 것 같다. 참회기도는 민족적 고백의 기도로 알려진 한 문학양식에 속한다. 이 문학양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증언이다(에즈 9,6-15; 느헤 9; 시편 106; 다니 9,4-19). 쿰란 제6동굴에서 나온 문헌들, 특히 빛을 내는 천체들의 말이라는 제목의 전례 문헌에도 이 문학양식이 나온다.

 

기도의 시작 부분은 다니엘의 기도에 바탕을 두지만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개작한다. 바룩은 특히 예루살렘과 그 무너진 성소에 관련된 다니엘서의 구절들(다니 9,16.17.18.19)을 삭제한다. 그 대신 유배살이하는 사람들의 상황에 관해 좀더 자세한 기록을 덧붙인다(2,3-5.13.14). 이 같은 변형은 바룩의 참회기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 이상 향유할 수 없었으며 다니엘서에 묘사된 것처럼 극적인 상황에 처했던,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에서 나왔음을 시사한다. 다니엘서의 민족적 참회기도와 바룩서의 참회기도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연대순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여러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바룩이 다니엘서의 기도를 직접 빌려왔다는 결론을 내리면 당연히 다니엘서의 기도가 바룩서의 기도보다 시대적으로 앞선다. 그러나 두 민족적 고백의 기도가 다 같이 더 옛 시대의 기도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바룩 2,17에 나오는 예스러운 사상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럴 경우 두 책의 저자는 같은 사료를 서로 독자적인 관점과 형태로 편집하여 끼워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룩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분에 나오는 전례의 기능과 여러 가지 정보들과 당대의 상황, 이를테면 단식과 애도,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 예물, 민족적 고백 등은 여기 나오는 전례의 틀이 어떤 민족적 재앙이 지나간 뒤에 백성을 하느님과 화해시킬 목적으로 거행된 참회예식임을 시사한다. 특히 서로 다른 시대의 갈등 상황이 고려해 볼 대상이 될 수 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통치 아래에 있었던 기원전 169년 이후 수년간,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점령, 기원후 70년에 있었던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 등이 바로 그런 상황들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기원전 169년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그로부터 5년 뒤인 164년에 유다 마카베오가 성전의 예배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킨 상황이(1,2.8 참조) 이 부분에 사용된 유형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듯하다.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들 벨사살을 위한 중개기도(1,11)는 안티오쿠스 4세와 나중에 안티오쿠스 유파톨이 될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로 생각할 수 있다. 바룩서의 처음 두 부분이 본래 염두에 둔 공동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안티오쿠스 치세 아래에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였을 것이다. 이 유다 공동체는 대사제 메넬라오스와 같은 헬라계의 혼합주의자들과는 달리 유다의 종교적 전통에 강한 집착을 보였지만, 정치적으로 셀레우코스 가문에 맞서는 군사적 저항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1,11-12; 2,21.24).

 

) 지혜에 관한 명상(3,9 - 4,4)

 

참회기도에 이어 지혜에 관한 명상이 나온다(3,9 각주 참조). 이 대목의 본문은 유배살이하는 백성의 불행이 무엇 때문인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되며 그 대답은 지혜문학의 고유한 용어들로 이루어진다.

 

이 지혜에 관한 명상은 유다 지혜 사상사(思想史)의 전환기에 자리잡혀 있다. 유다의 보편적 지혜 사상은(잠언 8,17.31)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정의할 수 있다(28,28; 시편 111,10; 잠언 1,7; 9,10; 15,33). 때로는 지혜가 선민 이스라엘이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율법과 동일시되고(4,1; 집회 24,8-12), 때로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이로 나타나기도 한다(잠언 8,22-31; 집회 24,9. 그리고 바룩 3,32-35; 3,32의 각주 참조). 그러면서도 지혜는 사람들 사이에 거처한다. 이 마지막 개념이 신학적으로 발전하여 지혜를 메시아와 동일시하기에 이른다(1고린 1,24; 2,6-9; 요한 1,14). 지혜를 율법과 동일시하고, 창조사업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동업자와 사람들 사이에 거처하는 메시아로 보는 사상은 바룩서에서 하나로 모아진다(4,13,38을 비교). 지혜를 율법과 동일시하는 사상은 그리스말 본문에서 더욱 뚜렷이 눈에 띈다. 지혜를 메시아와 동일시하는 사상도 그리스말 본문에 함께 나타나지만, 이 사상은 특히 바룩 3,38의 라틴말역에 더 잘 드러나 있다. 옛 라틴말역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지혜를 야곱에게 맡기신 뒤에야 땅위에 그가 나타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라틴말 본문은 여기서 를 남성 단수 3인칭으로 표현한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말 본문에서는 를 지혜를 가리키는 여성 단수 3인칭으로 표기하고 있다. 라틴말 본문의 이 작은 변경은 지혜에 관한 개념 전체를, 지혜와 율법의 동일시에서 지혜와 메시아의 동일시로 이동시키기에 충분하다(3,38 각주 참조). 그리하여 교부들도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육화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바오로 사도도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처음 두 장에서 바룩서의 이 대목을 이용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바룩서의 지혜에 관한 명상이 집회서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까닭에 이 대목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로 잡을 수 있겠다. 그러나 더 정확한 연대는 밝히기 어렵다. 이 대목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지만 원래 그리스말로 작성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이 대목을 바룩서의 다른 부분과 통합시키는 문제는 만족할 만한 답을 얻어내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이 대목을 속죄의 날에 선포된 설교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였다.

 

)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4,5 - 5,9)

 

이 부분에도 또 다른 문학 유형이 나타난다(4,5 각주 참조). 그것은 격려와 위안의 시로 되어있는데 제2이사야서의 문체와 매우 가깝다. 원문이 히브리말이었는지 그리스말이었는지를 밝히는 문제는 앞 부분에서와 똑같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에 편집된 솔로몬의 열한 번째 시편이 바룩서의 이 부분에 가장 가깝다. 그리고 두 문헌을 비교해 보면 바룩서의 이 대목이 솔로몬의 시편보다 오래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을 유배살이 초기로 잡고 정치적으로 이민족들과의 화해로 기울어졌던 역사적 서문과 참회기도와는 달리, 이 대목의 본문은 이민족의 지배에 대해 적대적이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곧 돌아올 것임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대목의 본문은 처음 두 대목의 본문들과 전혀 다른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에 속한다. 그 본문은 기원전 63년 이전, 아마도 기원전 2세기 후반 어느 시점에, 셀레우코스와 관계를 멀리하고 하스모네아 가문의 정치적 군사적 성공으로 용기를 얻게 된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는 별 어려움 없이 참회예식의 틀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4,20 각주 참조). 이 대목은 결국 이스라엘의 민족적 탄원에 하느님께서 신탁의 형식으로 응답하신 것이라 하겠다.

 

3. 칠십인역 바룩서의 통일성

 

위에서 살펴본 내용에 따르면 바룩서는 예루살렘 출신 유다인들에게 참회예식을 거행하도록 격려하는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의 기록이다. 가장 오래된 처음 두 부분은 기원전 164년의 사건들과 동시대 또는 바로 그 다음 시대에, 메넬라오스파와 마카베오파 사이에 정치적으로 중도 입장을 취한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에서 나온 것 같다. 이와는 달리 이 두 부분에 덧붙여진 네 번째 부분은 유다의 독립으로 생겨난 시대적 분위기에서 나왔음에 틀림없다. 지혜에 관한 부분은 그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사람이 계속 말하는 일관된 문체를 이유로 이 부분을 기꺼이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에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바룩서는 전체적으로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결정적인 꼴을 갖춘 듯하다.

 

바룩서는 그 본문의 꼴을 보면,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생긴 단절을 공인하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둘 사이의 화해로 끝난다. 단절에서 화해로 바뀌는 과정은 먼저 중개자의 도움을 받아 죄악에 관해 반성하고, 그 다음에 율법과 동일시되는 지혜에 관해 명상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 진행 과정은 한 동작처럼 연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바룩서의 통일성은 그 전례적 기능에 있다. 바룩서는 아마도 참회를 위한 단식일의 안내서처럼 읽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실제로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 전례 독서로 자리잡은 것은 기원후 2세기 이후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기원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추모하는 단식일에 이 책이 읽혀졌을 법하다. 유다 전승, 특히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와 미쉬나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예루살렘 함락과 기원후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점령이 똑같이 다섯째 달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랍비 문헌에도 기원후 70년 이후에 속죄하려고 단식을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데, 이 단식예식의 원래 형태는 이미 즈가 7,3; 8,19에 암시되었다. 사도헌장(V,20,3)도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의 파괴를 추모하는 기념일에 바룩서를 읽었다고 증언한다. 이처럼 바룩서가 참회를 위한 단식일에 읽혀졌다는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증언들은 많다. 가톨릭교회의 전례에서도 바룩서가 읽혀진다. 특히 바룩 3,9-15.32 - 4,4는 부활 성야 독서의 일부로 채택되었다.

 

4. 예레미야의 편지

 

예레미야의 편지는 번역본에 따라 애가 다음에 나오기도 하고 바룩서 다음에 나오기도 한다. 이 편지는 바룩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불가타에서는 이 편지가 바룩서 6장에 나온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애가와 편지를 포함한 예레미야서는 히브리말 경전 22권 가운데 하나이다(에우세비오, 교회사6,25 참조). 오리게네스와는 달리 예로니모는 이 편지를 위경으로 여겨, 불가타에는 이 편지의 옛 라틴말 번역을 옮겨놓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 본문의 구조와 내용

 

본문의 서두는 이 글이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의 사본임을 밝힌다. 이 편지의 수신인들은 바빌론에 유배살이하러 떠나는 사람들이다. 문학 유형으로 볼 때 이 글은 서간이라기보다는 설교로 분류해야 마땅하다. 그 전반적 내용은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데 역점을 두는데, 예레미야서와 제2이사야서와 맥을 같이하고(이사 44,9-20; 예레 10,1 - 16. 그리고 이사 40,19-20; 41,6-7; 46,1-9 참조), 그 사상이 궁극적으로는 지혜서(13 - 15)와 바오로 서간(로마 1,18-32)에까지도 이어진다.

 

바룩서 6장에 나오는 이 편지의 본문은 후렴처럼 반복되는 권고를(4. 14. 22. 28. 39. 44. 51. 56. 64. 68) 기준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서도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서론(1-6) 다음에 나오는 본론의 첫 번째 부분은 우상들을 무기력하고 썩어 없어질 피조물로(7.26), 경멸해야 할 예배 대상으로(27-32), 무능한 존재로(33-39) 단죄한다. 두 번째 부분은 같은 내용을 순서를 바꾸어 다시 소개한다. 곧 우상들에 대한 헛된 예배(40-44), 우상들의 특성(45-51), 그것들의 무력함(52-57) 순으로 소개한다. 세 번째 부분은 우상들을 쓸모있는 도구들과 자연 현상과 야생 동물들에 비교하면서 우상들이 열등함을 강조한다(58-68). 마지막으로 편지의 본문은 우상들을 허수아비와 가시덤불과 주검과 비교하면서 그것들은 전혀 쓸모없고 무기력하며 썩어 없어질 것들이라고 결론짓는다(69-71).

 

) 친저성과 원문의 언어

 

이 편지가 예레미야서와는 다른 정보를 제시하고(2절 참조) 예레미야 예언자 이후 시대에 나온 글들을 이용하며, 히브리말 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저자를 예레미야로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이 편지에 사용되었을 원래의 언어와 거기에 언급된 우상들의 정체에 우선적으로 착안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 편지를 헬라 유다교에서 나온 그리스말 문헌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바빌론의 유다 공동체를 수신인으로 삼아 히브리말로 쓴 원문을 후대 사람이 바빌론의 우상숭배를 셀레우코스 시대의 우상숭배와 비교할 목적으로 번역하였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원문이 그리스말로 쓰여지지 않았음을 주장하려고, 잃어버린 히브리말 원본의 번역자가 히브리말을 오해하거나 잘못 읽은 사례들을 논증으로 제시하려 하였지만, 이 논증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6,11.30.71 각주 참조). 특히 69절의 내용이 칠십인역에는 없는 예레 10,5의 히브리말 본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편지의 원문이 히브리말로 쓰여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이용된다. 히브리말 원문이 있었다면 이 원문의 그리스말 번역은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쿰란 제7동굴에서 발견된 이 편지의 파피루스 사본 단편은 그리스말 본문의 가장 오래된 증언이다(43-44절 참조). 이 사본의 연대는 기원전 100년경으로 추정된다.

 

) 역사적 배경

 

우상들에 대한 세부 묘사와, 경신례와 사제직에 연관된 기록들에는 우상숭배를 혐오하는 외부 사람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들은 대부분 예레미야서나 이사야서의 자료들을 이용한 것이지만 몇몇 기록들은 저자가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작성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기록들은 비교적 정확한데, 특정한 경신례 분위기를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주석가들은 이 기록들이 셀레우코스 시대에 부흥된 바빌론의 경신례를 전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기록들에서 논쟁 요소를 제거하고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바빌론 경신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의 몸단장(12)입 세척예식을 암시하고, 희생 제물을 팔아 이득을 챙기는 사제들의 행위(27)는 우상에게 동물의 기름진 내장을 바친 다음에 사제들이 서로 희생 제물의 몫을 나누어 가지던 관습을 암시한다. 바빌론의 최상 신 벨은 마르둑과 같다. 액운을 쫓는 사제들은 질병의 악령을 벨의 힘으로 몰아낸다고 주장한다(36). 마르둑은 치유의 신일 뿐만이 아니라 정의의 신(13), 전쟁의 신(14), 행운의 신(34), 비의 신(52)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30`-31절에 언급된 수레 행렬과 애도 예식은 새해 축제의 첫 번째 행사를 언급하는 것 같다. 새해 축제에서 마르둑과 그의 하급 신의 상들은 수레에 얹혀 신전 내부에서 나와 도성 밖으로 행렬해 나아간다. 신이 도성에서 사라짐은 고통의 상황을 뜻하는데, 그가 개선하여 돌아오면 고통은 끝난다. 그 밖에, 여사제직이나(28-29) 경신례적 간음과(10.42-43) 관련된 요소들은 전투와 사랑의 여신 이쉬타르 숭배를 암시한다. , 예레미야의 편지에서는 사랑의 여신으로서의 이쉬타르 숭배만 부각된다. 이 첫 번째 가설에서 이 편지의 히브리말 본문은 바빌론의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가 부흥된 바빌론 종교의 어떠한 혼합주의에도 휩쓸리지 않게 하려고 그들에게 보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편지에 나오는 우상들의 성격을 규명할 때 바빌론과 느부갓네살(1-3), 또는 갈대아인들(40)의 언급에 지나치게 매달려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언급들은, 이 편지의 저자를 예레미야로 가정하는 것과 똑같이, 이 편지의 배경을 가상의 역사적 지리적 틀, 곧 바빌론의 유배살이 안에 자리잡게 하려고 저자가 삽입한 요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번째 가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곧 편지의 논쟁적 요소는 시리아나 페니키아의 경신례를 공격하려고 생겨났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닷과 아쉬다롯의 숭배를 떠올릴 수 있다. 수레 행렬은 특별히 옛 시리아 동전에 자주 나타난다. 더 후대에 나온 사모아 루치안의 증언에 따르면(시리아 여신, 6), 아도니스의 죽음과 부활을 경축하는 예식들이 비블로스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예식들은 장례 때에도 거행되었다. 예식 참가자들은 머리를 밀었고 흔히 경신례적 간음이 곁들여졌다. 물론 이런 견해들은 가설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럴지라도 이들은 편지 안에서 우상과 맞서 형성된 헬라 유다 사상(특히 솔로몬의 지혜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몇몇 논쟁적 요소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17.45-47.59-67). 이 두 번째 가설은 편지의 원문이 히브리말로 쓰여졌건 아니건 관계없이 이 편지가 그리스 시대에 시리아나 페니키아의 유다 공동체들을 겨냥하여 쓰여진 것으로 전제한다.

 

) 작성 연대

 

마카베오 하권(2,1-2)은 예레미야에 관한 문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문헌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유배자들에게, 화려한 치장을 하고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의 모습에 현혹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 언급이 예레미야의 편지에 대한 암시라면, 이 편지는 기원전 2세기 후반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어떤 이들은 이 편지 2절과 예레 29,10 사이의 차이에 주목한다. 이들은 전자가 후자의 칠십년일곱 세대, 280년으로 바꾼 것은 일종의 현실 적용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편지의 저자가 살던 시대는 유배의 시작이 기원전 586(또는 597년의 제1차 예루살렘 침공)에 일어났으니 이로부터 일곱 세대를 헤아리고 난 기원전 4세기 말엽(306년 경)이 될 것이다. 이상 두 가지 가설의 논증들은 저마다 취약점이 있긴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편지의 작성 연대를 기원전 4세기 말에서 기원전 2세기 중반 이전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문 체

 

편지의 저자는 자기 선임자들처럼 논쟁 무기로서 냉소적 문체를 사용한다. 그는 자신의 논점을 날카롭게 하려고 우상숭배자들이 우상의 형상과 신성 자체를 혼동한다고 믿기를 좋아한다. 그는 우상들이 아무리 신성시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의 환영은 숭배자들의 눈에 무기력한 존재로 남아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짐짓 모르는 체한다. 실제로 저자의 우상숭배에 관한 날카로운 비판은 그런 비판의식을 견지하는 신학에 바탕을 둔다. 편지에서는 이 신학이 암시될 뿐이지만 여기에서 그 개요를 재구성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상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기능과 특성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발견된다(특히 33-37절과 52-53절의 부차적인 언급들을 참조). 만들어지고(7.45-46) 썩어 없어질(19.23.54.71) 우상들과는 달리 유다인들의 하느님께서는 창조됨 없이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은 피조물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대비된다. 우상들은 수없이 많지만 하느님께서는 한 분뿐이시다. 우상들은 생명이 없지만 그분께서는 살아계신 분이시다. 우상들은 감옥처럼 신전 안에 갇혀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공간의 제약 없이 어디에나 계신다. 우상들은 능력이 없어 사람들의 요구나 관심사를 채워주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섭리하시며 스스로 충만을 완전하게 누리시는 분이시다. 결국 편지의 저자가 논쟁의 무기로 사용한 이방신들의 부정적 묘사는 이스라엘의 초월자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와 섭리의 활동을 새롭게 긍정하는 구실을 한다.

 

 

 

 

에제키엘서 입문

 

 

1. 이스라엘 역사의 대전환기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와 함께 이른바 삼대 예언서를 이루는 에제키엘서는 제 삼십년 넷째 달 초닷샛날이라는 말로 시작한다(1,1). 이때 에제키엘이 계시를 받고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햇수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유다 왕국의 요시아 임금이 종교개혁을 실시한 해(기원전 621)를 기준으로 했다든가, 신바빌론 왕국 느부갓네살 임금의 통치 기간을 가리킨다는 등,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보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2절에는 여호야긴 임금의 유배 제 오년이라는 다른 연대가 나온다. 이로써 원래는 1절의 말만으로 충분했는데, 이 예언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떤 말마디가 빠졌든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해서, 2절의 설명을 보태야만 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한편, 3세기의 오리게네스 교부 때부터, 삼십이라는 숫자가 에제키엘의 나이를 가리킨다는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추측이 제시되었다. 이 추측이 맞을 경우, 에제키엘은 25살 때 여호야긴 임금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온 것이 된다. 이렇게 에제키엘은 성전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는 대신 이국 땅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유배의 햇수가 바로 에제키엘서의 시간의 기준이 된다. 12절 외에도 8,1; 26,1; 30,20 등 곳곳에 제 몇년 몇월 몇일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마지막 40,1에는 우리의 유배살이 제 이십오년 연초 초열흘날, 곧 성읍이 함락된 지 십사년째 되는 해라는 가장 길고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에제키엘은 유배 때의 예언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 유배는 처음이면서 작은 것에 불과하다. 그는 유다 왕국의 완전한 멸망과 더 큰 유배를 예고해야 한다.

 

에제키엘은 유배 제 오년에 유배자들과 함께 그발 강가에있다가, 하늘이 열리면서 ……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를보게 된다(1,1). 그발 강은 바빌론 남쪽의 성읍 니푸르 부근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의 수로 가운데 하나이다. 에제키엘을 위시한 유다인들은 -아비브라는 마을에 배치되어(3,15), 이 수로를 만드는 작업에 투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특히 1장에서 24장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이 유배지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문제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바빌론의 귀양살이가 틀을 이루지만, 안으로는 예루살렘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 또 장차 거기에서 일어날 사건들이 관심의 초점이다. 그런데 예루살렘과 바빌론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짧은 기간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유배자가 마음대로 장소를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에제키엘의 활동 무대가 문제로 떠오른다.

 

먼저 에제키엘은 바빌론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만 머무르면서 유다가 멸망할 무렵에 활동하였다는 설명이 제시된다. 그러나 이 주장이 만족스럽지 못하자, 이를 수정한 이른바 두 무대 활동 가설이 나온다. 에제키엘이 전기에는 예루살렘에서, 후기에는 바빌론에서(또는 거꾸로 전기에는 바빌론에서, 후기에는 예루살렘에서), 혹은 이 두 곳을 오가면서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에제키엘은 네 동포 유배자들에게 가서 일러라.라는 사명을 받는다(3,11). 그는 일차적으로 유배자들에게 파견된 예언자이다. 이 유배자들은 비록 한 지방에서만 살고 정해진 작업을 해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에제키엘의 경우에는 원로들이 모일 수 있을 정도의 집도 가지고 있다(8,1). 사람들은 이 유배살이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배자들은 언젠가는 돌아갈 조국의 땅을 그 무엇보다도 더 많이, 더 간절히 그리워하였다(시편 137 참조). 그 고국 땅은 격동의 혼란 속에 있다. 예루살렘과 바빌론 사이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서로 다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예언자는 지금의 유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서운 운명이 고국과 동족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유배자들의 관심의 초점인 예루살렘에 관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된다.

 

이렇게 유다의 운명적인 시간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것처럼, 에제키엘은 바빌론에서 활약한다. 예레미야는 유배자들에게도 편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예레 29). 에제키엘 역시 편지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예언하였다.

 

그렇다면 첫째 유배는 무엇이고, 다가오는 멸망과 더 큰 유배는 무엇인가?

 

이때 근동의 패자는 신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임금이다. 그는 이미 기원전 605년 왕자의 신분으로 근동 전역의 운명을 결정짓는 가르그미스 전투에서 경쟁국 에집트의 느고 파라오를 쳐부순 적이 있다. 이로써 이 지역의 양 축인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를 잇는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종주국도 바뀐다. 그러나 느고가 609년에 왕위에 올린 유다의 여호야킴은, 이러한 정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예언자까지 죽이면서 자기의 안락과 호사만을 좇는 이기주의자이면서 동시에(예레 22,13-17; 26,20-23), 국제 정세를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는 우둔한 군주였다. 그래서 이 폭군은 기회를 엿보다가 601년에, 드디어 대제국에 반기를 드는 무모한 모험을 단행한다(2열왕 4,1). 느부갓네살의 입장에서는, 유다가 비록 조그만 왕국이기는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저항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유다를 징벌할 여유가 없어, 이웃 여러 나라를 시켜 유다로 쳐들어가게 한다. 이 와중에 여호야킴이 전사하고, 열여덟 살의 여호야긴이 그 뒤를 잇게 된다. 마침내 598-597년에는 느부갓네살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면 공격을 단행한다. 즉위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여호야긴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다.

 

그리하여 기원전 597, 예루살렘을 함락한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왕궁과 성전의 기물들을 앗아가고, 임금을 비롯하여 모후와 왕비들도 잡아간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지도층 인사들도 많이 끌어간다. 그 가운데에는 사제 가문의 출신 에제키엘도 끼어 있었다. 이것이 1차 유배이다.

 

충격적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태는 이제 내리막길을 달린다. 그러나 유다 땅에서 새로운 지배 계급을 형성한 인사들은, 우유 부단한 시드키야 임금을 끼고 반바빌론-친에집트 정책을 편다. 그들은 에집트의 사주를 받아, 독립을 쟁취할 뿐더러 바빌론에 빼앗긴 기물들을 되돌려 받게 되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예레미야 예언자만이 이러한 정치적, 특히 종교적 오판, 광신적 민족주의에 맞서 고군분투한다(예레 27장 참조). 그러나 예레미야의 노력은 허사로 끝나고, 유다 왕국은 끝내 바빌론에 다시 반기를 든다. 결국 기원전 5878월에 예루살렘이 함락된다. 왕자들은 처형되고, 임금은 눈이 뽑힌 채 귀족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간다. 약탈을 당한 궁궐과 성전은 불에 타 파괴된다. 유다 왕국이 망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하느님의 성전은 이교도들의 손에 의해서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하느님께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보다 더 큰 충격과 비극은 있을 수 없었다.

 

2. 민족 비극의 한가운데에 선 예언자

 

에제키엘은 조국과 동족에게 거침없이 다가오는 이 큰 불행을 유배지에서 바라보며, 그리고 이 운명적인 587년 이후에는, 폐허가 된 조국과 뿔뿔이 흩어진 동족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예언자의 이름으로 모아진 에제키엘서는 상대적으로 긴 책이면서도, 그 안에 이 예언자 개인에 대한 사항은 별로 적혀 있지 않다. 그는 부지라는 사제의 아들이다(1,3).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이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사실 에제키엘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사제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는 또 혼인까지 했는데,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될 즈음에 부인이 갑자기 죽는다(24,18). 유배를 당해 끌려간 그는 또 자기 집에서 원로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말을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한다(8,1; 20,1).

 

그런데 에제키엘서 전체를 살펴보면, 그가 예언자들 가운데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여러 가지 환시를 보고 때로는 며칠씩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1,1.4 이하; 3,10-15; 3,22 이하; 37,1 이하 등). 그는 많은 상징 행동을 하고, 이따금 농아 증세와 마비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또 자기 집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을 돌아다니는 환시를 보기도 한다. 이런 특이한 현상을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으로는 에제키엘이라는 인물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는 내적 긴장 상태의 사람이다. 어쩌면 바오로 사도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처럼 몸이 성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경 쇠약에 걸린 것은 아니다. 그는 바오로처럼 하느님의 세계와 그분의 계획에 깊이 관여된 인간이다. 여기에서부터 내적인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심리적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에제키엘은, 어떤 학자가 지적하였듯이, 가슴 속에 두 가지 영혼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규범과 규정 속에 사는 사제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것을 초월하는 예언자이다. 또한 정열적인 설교가이면서, 모든 것을 아주 정확하게 기술하는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차없이 멸망을 선포하는 사자이면서, 구원을 예고하는 예언자이다. 그는 탈혼 상태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면서, 냉철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또 열정적이면서 동시에 심사숙고하고, 꿈꾸는 듯한 이상주의자면서 현실적이며, 냉정하면서도 동정심 많은 인간이다.

 

이러한 극단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 바로 그의 소명이다. 그리고 이 소명은 대전환기의 소명이다. 그는 멸망해 가는 세계와 새롭게 일어나는 세계의 중간에 선 예언자인 것이다.

 

3. 에제키엘 예언서

 

예언서를 통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방식, 곧 사건별이나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에제키엘서도 다른 예언서들처럼 일종의 선집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언뜻 보기에는, 같은 주제가 직접 관계가 없는 여러 갈래로 전개되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말씀들이 선택적으로 일관성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34장에서는 목자와 양떼의 주제들이(예레 23,1-6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여러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1장에는, 서로 잘 부합되지 않는, 분명 중복되는 요소들이, 또는 문법의 일관성을 무시하고 덧보태진 세부 사항들이 뭉쳐있다.

 

이러한 부조화에 대한 큰 책임은 에제키엘의 제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논리성에는 별 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스승의 신탁들을 토막낸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3,22-27; 4,4-8; 24,15-2733,21.22는 계속되는 한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들일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때로 서로 직접 관련이 없는 신탁들을 인위적으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예컨대 21장에서는 이 서로 무관한 단락들을 잇는 연결 낱말로 쓰인다. 곧 주님의 칼(6-12), 잘 갈아 날이 선 칼(13-22), 바빌론 임금의 칼(23-32), 암몬인들을 치는 칼(33-37) 등이 그것이다. 이 제자들은 또 같은 신탁을 되풀이한 것으로도 보인다. 예컨대 주님의 의로운 길에 대한 생각은 18,1-3233,10-20에 거의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그렇다고 에제키엘이 이 책의 이러한 현재 상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에제키엘 자신이, 자기가 이미 쓴 문장들에 갖가지 세부적인 내용들을, 그리고 기존의 장들에 갖가지 단락들을 때로는 너무 많이 채워넣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음에는 틀림없지만, 애초의 조화를 깨뜨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환시 이야기라든가(13; 811) 예언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4,4-17) 보충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문법적 문제들이 이 예언서를 읽기에, 그리고 우리말로 옮기기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에제키엘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간단한 구조로 정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루살렘 멸망 이전

(1) 환시와 소명: 1 - 3

(2)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 4 - 24

2. 이민족들에 관한 예언: 25 - 32

3. 예루살렘 멸망 이후

(1) 구원 예고: 33 - 39

(2) 새 예루살렘: 40 - 48

 

이렇게 세 단계로 이루어진 에제키엘서는 전체적으로 첫째 단계에서 셋째 단계로 넘어가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것은 곧 심판의 예고에서 약속의 예언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라는 일대 비극적 사건이 그 경계를 이룬다. 멸망과 불행을 통하여 구원과 행복이라는 새로운 시작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이웃 나라들에 대한 예언은 바로 이 비극적 사건과 연관이 있다. 유다 왕국에 불행을 끼치고 슬픔에 빠진 유다인들을 조롱하는 민족들에게 응분의 징벌을 예고하는 것이다.

 

4. 에제키엘의 가르침

 

에제키엘의 삶과 자세를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둘 있다. 하나는 하느님 영광의 현현으로서, 이것이 사제인 에제키엘을 예언자로 만든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서, 이것이 멸망의 선포자 에제키엘을 구원의 예고자로 변화시킨다.

 

(1) 하느님 영광의 현현

 

에제키엘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힌다. 이 영광은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나는데(1,28; 3,23; 8,4; 10,1; 43,2), 그때마다 에제키엘은 그 모습을 보고서는 대경 실색하며 실신 상태에 빠진다(3,15).

 

그렇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본 것인가? 먼저 폭풍이 휘몰아치며 거대한 구름 한가운데에서 번쩍거리는 불이 보이고, 딱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물들이 나타난다. 이 날아다니는 네 생물은 궁창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데, 그 위에는 어좌 하나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어좌에는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인 채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다. …… 이것이 주님 영광의 모습이다(1,4-28).

 

결국 에제키엘은 자기의 대선배 이사야가 본 환시와 같은 것을 본다. 그러나 이사야와는 다른 맥락에서 다른 특징을 지닌 환시를 보게 된다. 이사야는 주님의 초월성, 온 세상의 임금이신 분의 영광에 대한 숨막힐 듯한 계시를 받는다(이사 6,3). 그런데 온 세상의 임금이시라는 점이 에제키엘의 원래 서술에는 직접적으로 들어있지 않다. 그 대신, 그는 자기의 원초적 직감을 흐리게 할 수도 있는 부차적인 면들을 첨가시킴으로써, 이 진리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로써 바빌론의 동물 신화에서 따온 환상적인 짐승들에 대한 긴 서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언자는, 바빌론인들이 우주의 모든 힘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여겼던 이 짐승들을 주님을 섬기는 존재로 배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환각을 일으킬 듯한 바퀴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들도 나름대로 주님의 영광이 어떤 곳으로든 거침없이 움직이면서 전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계시로 압도당한 에제키엘은 자기의 왜소함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님의 영광 앞에서, 비천하고 하찮은 사람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는, 서있을 수조차 없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될 수밖에 없다(1,28; 2,2; 3,14-17.22-23). 그러한 그에게 주님의 손이 무겁게(3,14) 내리시고(1,3; 3,22; 8,1; 33,22; 37,1; 40,1), 또 그분의 영이 내리시어(2,2; 3,24; 11,5) 그를 들어올리신다(3,12.14; 8,3; 11,1.24; 43,5). 그러나 예언자는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나와 예루살렘에서 멀어지는 것을 본다(11,22.23).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거처인 시온을 떠나시는 것이다. 유다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듯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극적인 결별의 동기를,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땅의 풍토병과 같은 이 악의 중대함과 만연함과 깊이를 밝혀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다. 이 죄는 폭행이며 사람들의 피를 쏟는 범죄 행위이다(7,23; 9,9; 16,36; 18,10 ). 이러한 죄를 예언자는 적어도 한 번, 하느님에 대한 불경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36,18). 에제키엘이 가장 큰 죄로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이다(14,1-8). 그는 이 불경이 이스라엘 땅의 모든 언덕 위에서, 모든 큰 나무 밑에서(6,3.6.13; 16,16; 20,28.29) 자행되는 모습을 본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8). 그는 성전의 안뜰 대문 어귀(3-6), (7-13), 북쪽 대문 어귀(14.15), 안뜰 성소와 제단 사이(16) 등 곳곳에서 우상숭배가 벌어지는 표시들을 확인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또한 백성이 일상 생활에서 저지르는 부패와 부정과 부도덕이기도 하다. 이것을 예언자는 성소에서 사용되던 죄의 고백 형식을 빌려 서술한다(18,5-9; 22,3-12.23-30).

 

에제키엘은 죄가 역겨운 짓이며 혐오스러운 짓이라고(6,9; 16,22.52) 계속 되풀이하여 말한다. 그것은 배우자를 배신하는 부정이고 간통이며 창녀짓이다. 예언자는 이 주제를,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 버려진 아기의 비유에서 전개시킨다. 이 여자 아기는 받아주고 좋아해주는 이 없이 피투성이로 들판에 버려지지만, 주님께서 발견하여 살려주시고 양녀로 받아들이신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리신다. 그러나 이 여자는 종국에 가서 뻔뻔스러운 창녀로 전락하고 만다(16). 에제키엘은 오홀라(북부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와 오홀리바(남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라는 두 자매, 몰염치한 창녀짓에 자신을 내맡기는 이 두 여자의 역사로써, 이 주제를 되풀이하여 설명한다(23).

 

결국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빠져버린 이 추잡한 부정의 뿌리가 교만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소돔의 이방인들(16,49-50), 띠로의 임금(28,2.5.17), 에집트인들(30,6.18), 그리고 파라오들이(32,12; 35,13) 저지른 죄이며,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만하는(16,15.56) 아내 이스라엘이 범한 죄악이기도 하다(7,20.24; 33,28). 이는 또한 당신 뜻에 따라 당신 백성을 인도하라는 하느님의 분부를 저버린 유다 임금이 저지른 죄악이다(21,30-31).

 

한편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은,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이고 어머니는 헷 여자로서, 이교도적인 배경에서 생겨났다(16,3.45. 3절의 각주 참조). 예루살렘의 전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배신은(20) 결국 타고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에집트에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손을 들고 맹세하시면서,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하고 당신을 알려주셨지만(20,5), 이스라엘인들의 이 에집트 체류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곧 이스라엘인들은 그뒤 그 무엇으로도 포기시킬 수 없는, 우상숭배에 대한 열정을 지니게 된 것이다(20).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사명과 함께,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에 예언자로 내세워진다. 하느님의 말씀은 음식처럼 예언자 안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단맛으로 그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3,2.3). 그러나 그는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라고 외칠 때마다(3,11), 가시로 둘러싸이고 전갈 떼 가운데로 빠져들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2,6 참조). 그렇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사실은 유배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아무리 반항한다 하더라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2,5).

 

이런 에제키엘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한 파수꾼이다. 에제키엘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악인이 자기의 악한 길을 버리고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의인에게 생명을 지키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해야 한다(3,16-21). 이는,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과는 달리(18,1), 죄를 지은 자만 죽고, 아들은 아버지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으며, 아버지는 아들의 죗값을 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18,4-20). 의인이든 악인이든 저마다 자기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혼자 책임을 진다.

 

그러나 예언자가 만일 악인에게 경고하기를 게을리하면, 적절한 질책이 없어 죽어가는 이 악인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3,18). 예언자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 백성이라는 집단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 각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구원을 책임져야 한다. 이렇게 예언자의 책임 소재를 밝히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당시에는 예언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영감만을 따라,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말을 예언이라고 선포한다. 그래서 이들은 벽에 균열이 생겨 전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는데도, 거기에다 회칠만 하는 미장이와 비슷하다. 백성의 죄악을 치유하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않고, 평화의 메시지만 공포하는 예언자들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13).

 

(2) 예루살렘의 멸망

 

백성의 죄악은 무서운 심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이 심판이 다가옴을 보고서는, 말과(7; 9 - 11) 행동으로써(4 - 5) 그러한 사실을 지칠 줄 모르고 예고한다. 이 예고는 어떤 사람이 와서 불행이 완료되었다고, 곧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파괴되고 불에 타버렸으며, 생존자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하는 그 슬픈 아침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에제키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사건이다. 자기의 고통을 조금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분부를 받기는 했지만(24,15-27), 그는 동포 유배자들이 겪는 것에 결코 못지 않는 아픔을 느낀다. 사실 그들은 고통과 절망이 너무나 커서, 우리의 죄와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 우리가 그것들 때문에 스러져가는데, 어떻게 산단 말인가?(33,10), 그리고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하기에 이른다(37,11).

 

이러한 절망 속에서 에제키엘은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들고 나온다. 그는 우선, 불행에 처한 이스라엘인들을 빈정거림으로써 그들의 아픔을 더욱 크게 만든 나라들에게 징벌을 예고한다. 이스라엘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언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괴이한 말과 어려운 언어를 쓰는 많은 민족, 이스라엘보다 말을 더 잘 들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예감한 바 있다(3,6). 그러나 이제는 이 민족들이 하느님의 심판정으로 소환된다(25 - 32). 그 가운데에서 에집트가 으뜸 피고이다(2932). 에집트는 유다 왕국의 임금 시드키야가 맹세와 계약을 저버리고(17,19) 바빌론 임금에게 반역하도록 유인함으로써(17,15), 유다 왕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한편, 띠로는 적군에게 짓밟힌 예루살렘에 대해서 부당한 뜻을 품은 것으로 드러난다(26,2). 그리고 팔레스티나 땅에 있는 이웃 민족들, 곧 암몬, 모압, 에돔, 그리고 불레셋, 모두가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움을 품는 잘못을 저지른다(25).

 

그런데 지금까지 불행의 예표로서(12,6) 피할 수 없는 불행을 예고해야 했던 예언자는, 이제 구원의 선포자로 변모한다. 이미 이전의 신탁들에도 위로의 말마디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곧 심판과 멸망에서 살아남을 남은 자들의 주제가 여러 구절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주제는 스쳐지나가는 듯한 언급으로 그치기 때문에, 그것이 부차적으로 첨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예루살렘 주민들의 철저한 멸망을 암시하는 에제키엘의 상징 행동(5,1-2)12-13절에서 설명되지만, 예언자가 말하는 의도에 잘 들어맞지 않으면서 남은 자들을 가리키는 5,3-4절의 상징 행동에 대해서는 뒤에 어떤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이 구절이 원래의 신탁에는 들어있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반면에 9장에서는 이 주제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처형되기 전에,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구분해내는 작업이 선행된다는 것이다(9,4).

 

그래서 유다 왕국의 몰락과 예루살렘의 멸망 뒤에 남은 자들이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6,8-10; 9,4-8; 11,13; 12,16; 14,22.23). 그러나 이들은 보잘것없고 약할 뿐더러(11,3 참조), 어쩌면 예루살렘에 쌓아놓은 시체들에 불과한 자들이었다(11,7). 그래서 남은 자들에 대한 언급만으로써는, 유배자들이 지니던 그나마 가냘픈 희망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의깊은 파수꾼인 예언자 에제키엘은 결국 성벽이 무너진 곳으로올라선다(13,5 참조). 폐허 위에 올라서서 전혀 새로운 시작을 선포한다. 곧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이다. 바로 바싹 말라버린 해골들이 다시 살아나는 신기한 장면이다(37,1-14). 물론 이것은 개별적인 육신의 부활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가 줄어들고 또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생명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해골더미로 전락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당신 영의 그 뜨거운 을 불어넣으시어 그들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이다.

 

유배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생명을 다시 얻은 백성, 그러나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 생명을 받은 백성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하시는 주님께서(12,25.28; 17,24; 22,14; 36,36; 37,14)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리라.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너희의 모든 부정과 우상들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리라.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36,24-28).

 

이러한 이상적인 삶은 그동안 남북으로 갈라졌다가 이제 다시 통일된 나라에서 실현된다(37,15-28). 이 새 왕국의 백성은 더 이상 자격 없는 지도자들이 자행하는 억압과 착취의 희생물이 되지 않는다(34,1-10). 주님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어 당신의 양떼를 잘 돌보신다(34,11-16). 그리고 전에 임금으로 갖가지 특권을 누리던 다윗의 후손들은 그저 백성 가운데에 있는 한 제후가 될 뿐이다(34,24).

 

(3) 궁극적 전망

 

예언 활동을 마치면서 에제키엘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삶을 드러내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다. 우선 그는 이 백성이 마지막 때(38,8) 모든 원수들에 게서 승리를 거두게 됨을 본다.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스라엘과 맞선 적군 앞에는 호전적인 마곡 땅의 곡, 메섹과 두발의 우두머리 제후가 서고, 그 뒤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시대의 원수들이 서있다. 이스라엘은 이들과 전투를 벌여 그들을 멸망시킨다. 그리고서는 그들의 무서운 무기들을 땔감으로 쓴다. 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들의 시체들을 맹금과 들짐승에게 먹이로 내준다. 그리고 시체가 이스라엘 땅을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시켜 일곱 달 동안 적군의 주검들을 찾아 땅에 묻게 한다(38 - 39).

 

끝으로 에제키엘은 이렇게 승리한 이스라엘이, 역시 새롭게 된 팔레스티나 땅에 정착하리라고 예고한다. 이 땅은 엄격히 수학적으로 경계가 그어지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분할된다(4748). 그리고 생명에 가장 중요한 물은 이 땅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성전에서 흘러나온다(47). 이 성전은 매우 특별한 장소로서, 바로 이곳에서, 성전으로 돌아온 주님의 영광을(43,1-12) 찬미하는 전례가 모든 규정에 따라(40; 46) 거행된다. 그리하여 성전은 이제부터 이 새로운 백성이 영위하는 삶의 진정한 중심이 된다. 그곳이 어떤 신비의 심장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언자가 자기 예언서의 마지막 말, 야훼-삼마(야훼님께서 여기 계시다)라는 표현으로밖에 엿볼 수 없는 그런 신비이다(48,35).

 

 

다니엘서 입문

 

 

다니엘서는 그 문학 유형상 구약성서에서 유일한 책이다. 히브리 말 성서에서 이 책은 성문서에 속하는데, 에스델서로 끝나는 축제 오경다음, 그리고 에즈라서 앞에 들어 있다. 이러한 위치만으로도 이 책이 후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스 말 성서에서는 다니엘서가 예언서로 분류되어 에제키엘서 다음에 나온다.

 

1. 다니엘서의 구조

 

(1) 히브리 말 성서의 다니엘서

 

히브리 말 성서에서는 다니엘서가 두 가지 말로 쓰인 열두 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1에서 2,4?까지는 히브리 말, 2,4에서 7,28까지는 아람 말, 그리고 8,1에서 12,13까지는 다시 히브리 말로 쓰여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은, 아람 말로 된 작품(2 - 7)에 히브리 말로 쓰인 종결 부분(8 - 12)과 입문 부분(1,1 - 2,4?)이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 편집자가 자료를 다시 두 단락으로 편성하였다고 설명한다. 첫째 단락(1 - 6)은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2장과 4 - 6장에서는 다니엘이, 3장에서는 그의 세 동료가 주인공이고, 1장에서는 이 네 인물이 함께 등장한다. 둘째 단락(7 - 12)에는 다니엘이 혼자서 보는 환시들이 들어 있다. 이야기는 각각 연대순으로 배열된다. 그러나 이 연대는 문학적 발상으로서 이 작품의 저작 시기와는 무관하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자세히 알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관심 밖의 것으로 치부해서인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대 근동의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도 서슴없이 전개시킨다. 이는 다니엘서가 역사서가 아님을 말해 준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는 역사가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

 

(2) 그리스 말 성서의 다니엘서

 

그리스 말을 쓰던 유다인들은 초대 그리스도교에 두 개의 서로 다른 다니엘서 역본을 물려 주었다. 통상 칠십인역, 그리고 테오도시온이라 불리는 역본이다. 두 역본이 모두 히브리/아람 말 본문에 근본적으로는 서로 같은 부분들을 첨가한다. 3장에서는 이 이야기 틀에 맞춘 전례문, 곧 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찬미가를 삽입하고, 원래의 다니엘서 앞 또는 뒤에(13장 소제목의 각주 참조) 수산나 이야기를 배치하며, 끝으로 벨 신상과 큰 뱀의 일화를 덧붙인다. 그러나 히브리/아람 말 성서의 본문과 비교할 때, 이 두 역본은 서로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칠십인역은 특히 4 - 6장에서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칠십인역이 번역한 본문은 현재의 히브리/아람 말 본문과는 다른 셈족어(히브리 말 또는 아람 말) 원문이 아니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테오도시온은 이와는 반대로 현재의 히브리/아람 말 본문에 대단히 가까워, 이 히브리/아람 말 본문을 바로 측면에서 지원해 주는 상당히 오래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다니엘서의 인용은, 때로는 칠십인역, 때로는 (그리고 더 자주) 테오도시온에 따라 이루어진다. 3장의 초기 본문에 첨가된 전례문들은 본디 히브리 말로 쓰였을 것이다. 수산나의 이야기, 그리고 벨 신상과 큰 뱀의 일화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그 원문은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의 교정본(또는, 본문 형태)이었을 수 있다.

 

기원후 90년경에 고정된 히브리 말 성서에는 이 첨가 부분들이 들어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교에서 이 책을 사용하는 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니엘서의 첫 주석가인 로마의 히폴리토가 보여 주듯, 먼저 출간된 칠십인역이 곧바로 테오도시온으로 대체되는가 하면, 히브리 말 성서에 들어 있지 않은 그리스 말 부분들의 권위가 특히 성 예로니모에 의해서 부정되기도 한다. 예로니모는 3장의 전례문들은 그 자리에 그냥 놓아 두지만, 수산나의 이야기(13), 그리고 벨 신상과 큰 뱀의 일화(14)는 부록으로 배치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부분들을 제2경전으로 인정하지만, 개신교에서는 그 경전성을 완전히 부인하여 외경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이 제2경전 부분을 대중라틴말성서의 순서에 따라, 본문의 글씨체는 경전 부분과 같게, 난외의 절 표기는 다르게(이탤릭체) 하여 옮긴다.

 

2. 다니엘서의 저작 시기와 자료의 출처

 

(1) 저작 시기

 

현재의 다니엘서는 바빌론 유배 시대(기원전 587-538)에 활동하던 어떤 예언자의 작품으로 제시된다. 유다교 학자들과 초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바로 이러한 전망에서 이 책을 이해하였다. 그러다가 기원후 3세기부터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피리를 필두로 한) 이교도 비평가들이 이 책을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기원전 175-164)에 쓰인 작품으로 간주한다. 사실 10 - 11장에 나오는 대환시들은 기원전 162년까지 이어지는 근동과 유다교 역사의 표지들을 하나 하나 벗겨 나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구절(11,40 이하)에서는, 마지막 심판과 죽은 이들의 부활로(12,1-4) 이어지는, 관용적 문체로 쓰인 희망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 이 메시지가 바로 당시의 유다교가 직면한 영성적 문제들에 잘 들어맞는다. 이로써 기원전 190-180년에 쓰인 집회서의 이스라엘 예언자 명단(집회 48,22; 49,7-8.10)에 다니엘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된다. 반면에, 기원전 134년과 기원전 104년 사이에 저술된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는 이미 다니엘서를 알고 있었다(1마카 1,54 = 다니 9,2711,37). 그리고 칠십인역의 다니엘서는 기원전 145-140년경의 로마 신탁집에서도 이용된다. 더 나아가서 다니엘서의 저자는 기원전 167127일에 벌어진 성전의 유린(11,31 참조), 경건한 유다인들의 학살(11,33), 그리고 (11,34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마카베오 형제들의 궐기와 유다 마카베오의 첫 승리를 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기원전 164년 가을에 박해자-임금이 죽은 것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같은 해 1214일에 성전을 정화한 일만 암시할 뿐이다. 이로써 이 책 전체가 저술된 해를 기원전 164년으로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의 수수께끼 같은 절 하나가(12,12. 그리고 12,9 참조), 정화된 성전의 전례가 복구된 직후에 다니엘서가 출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한다. 이 때는 기원전 163년 초가 된다.

 

다니엘서의 많은 세부 사항이 동시대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곧 음식과 관련된 율법의 금령들을 유다인들이 파기하도록 만드는 이교도 통치자들의 압력(1,5-8. 그리고 2마카 6,18-31 참조), 유다인들을 순교의 위기로까지 몰아넣는(3,19-21; 6,17-18) 우상 숭배와(3,1-12) 신격화한 군주 공경의 강요(6,6-10), 박해자의 죽음에 관한 예언적 예고(5,22-30; 7,11.24-26; 8,25; 9,26-27; 11,45) 등이다. 저자가 마카베오 형제들의 군사적 봉기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11,34), 현재의 상황을 뒤집으시는, 그리고 당신의 통치를 확립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는 유다 마카베오와 합류하기 전에 광야로 들어간 경건한 유다인들, 하시드인들의 자세와 일치한다(1마카 2,28-38.42-43 참조). 다니엘서의 저자는 필시 이러한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2) 다니엘서 전통의 출처

 

이렇게 이루어진 다니엘서에는 적지 않은 기존의 전통들도 모여 있는데, 그 가운데 몇몇은 이미 기록된 형태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을 것이다. 2장은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기원전 252년경) 또는 안티오쿠스 3세가(기원전 194년 이후) 실행한 혼인 정책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2,43 참조). 7장에서, 그리스 제국을 나타내는 네 번째 짐승은 뿔(= 임금)이 열 개나 달렸는데, 열한 번째 뿔에 관한 언급은 아마도 가장 오래 된 신탁(7,24-25)을 박해자-임금에게 적용시키는 첨가문일 것이다. 4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과 회개가 소개되는데, 2장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4,4-6. 그리고 2,48 참조) 이 이야기 역시 기원전 168년 이전부터 있어 온 하나의 독립된 설화이다. 이렇게 저자는 전통적 이야기들의 곳집에서 재료들을 끌어 내는데, 어떤 것들은 이미 정착된 문학 형식을 취하고 있었고, 다른 것들은 아직 구전(口傳)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구전의 원천은 바빌론에 살던 유다인 공동체에서 찾는 것이 옳다.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문화에 이어 그리스 문화와 차례로 접촉하게 되는 갈데아의 종교 관습이, 본토의 유다인들보다는 이 바빌론 공동체에 훨씬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아울러 다니엘서의 히브리/아람 말 어휘 속에 페르시아 낱말까지 들어 있다는 사실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신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임금에 관한 기억이 다니엘서에 생생히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잘 설명된다(2 - 4장 참조). 그리고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 나오는 일화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곧 다리우스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아람 말로 쓰인 일화와(6,11-29), 무명의 임금(칠십인역) 또는 고레스 시대를(테오도시온) 배경으로 해서 그리스 말로 쓰인 일화이다(14,31-42). 이렇게 구두 전통에는 같은 일화가 글자와 내용을 조금씩 달리하는 변형들도 있었지만, 전통의 수집가들은 그러한 것들을 별로 개의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벨사살 임금이 벌인 잔치에 관한 전통을(5)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벨사살이 아니라 나보니드라는 임금의 잔치로 이야기한다.

 

이 모든 요소는 다니엘서의 전사(前史)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전사의 흔적은 기원전 587년에 시작되는 유배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기원전 538년에 시작되는 페르시아 시대까지도 추적할 수가 없다. 저자가 독자적으로 이 책에 집성한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의 전통이 바빌론에 있던 동방 유다교의 구전에 속한다는 사실 외에는, 이 전통의 역사적 출처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다니엘서를 바탕으로 다니엘 예언자전기(傳記)를 쓴다는 것은 옳지 않다. 다니엘이 등장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본디 서로 관련이 없었다. 다니엘서의 최종 저자는, 이 이야기들을 전통적 방식에 따라 느부갓네살(1 - 4), 그의 아들 벨사살(5장과 7 - 8), 그리고 메대 사람 다리우스와(6장과 9) 페르시아 사람 고레스(10 - 12) 등 여러 임금의 통치 시대에 배치시키면서, 기원전 606년에 유배를 간 한 젊은 유다인이 세 동료와 함께 선택을 받아 왕궁의 시종이 되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1). 이 젊은이는 해몽을 잘 함으로써 벼슬에 오르게 된다(2).

 

그 뒤에 그와 세 동료는 일시적으로 생명까지 위협받는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3,6.14), 페르시아 제국이 시작될 때까지 출세 길을 달린다. 유배 간 유다인들이 벼슬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정승(6) 또는 지방 장관, 그리고 현인들의 총감독관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2,48-49; 4,6; 5,11), 저자는 그 가능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다. 이는 그의 의도가 역사적 설화와는 다른 차원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것이다.

 

3. 다니엘서의 문학 유형

 

글의 문학 형식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결정된다. 글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글이 그 특정 집단에서 수행하는 또는 수행해야 하는 구실이 그 문학 형식을 결정짓는 첫째 요소이다. 그리고 그 글을 둘러싼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관습이 둘째 요소이다. 저작 당시의 배경에서 볼 때, 다니엘서는 그 때의 유다교 문학에서 애용되던 두 문학 유형, 곧 유다인들이 하가다라고 부르는 교훈적 이야기와 묵시 문학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 교훈적 이야기

 

교훈적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신학적, 도덕적, 또는 지혜 문학적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이용되는 교육 방식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담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를 해석할 때와 마찬가지로 요점을 포착해야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 그의 행동이나 시련 등은 독자에게 자기 시대의 영성적 필요성과 관련하여 교화, 위로, 신앙 등의 메시지를 끌어 내게 한다. 유다교는 헬레니즘 시대에 주변의 여러 이교적 문화와 대립된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온갖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스-시리아 제국이 강제로 그리스화를 추진하자, 유다 땅에 살던 이 신앙인들은 갈등과 곤경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일부 귀족들은 이미 그리스적 생활 방식을 받아들여 익숙해진 터였다.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다니 1, 3 - 6, 13, 14장을 읽어야 한다. 때로는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의 행동이 다른 이들도 따라야 하는 본보기로 칭송되기도 한다(1, 3, 6). 그리고 때로는 인간적 교만이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교도들의 망상을 강력히 단죄하거나(4, 5) 풍자적으로 비웃기도 한다(14). 이러한 다니엘서의 이야기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되기는 하지만 역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2) 묵시 문학

 

기원전 587년에 시작된 바빌론 유배 때부터, 예언 문학은 점점 하느님의 심판과 또 그것에 이어지는 구원이라는 이중의 관심으로 특징지어진다. 아울러 이러한 종말론적관심에 부응하기 위하여 채택한 문학 양식도 점진적으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감추어진 것을 밝히는 점술과 묵시가 중시되는 문화의 맥락에서, 종말론이 묵시문학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변천의 발자취를 비교적 선명하게 추적할 수가 있다. 이미 에제키엘과 즈가리야 예언자는 환시와 그것에 대한 천사의 설명이 통상적 문학 전통으로 자리잡은 표현 방식을 이용하였다.

 

유배 이후, 무명의 저자들 손에 이루어진 즈가 13 - 14장과 이사 24 - 27장에서는, 역사의 최종적 위기가 그려진다. 묵시 문학은 이러한 변천 과정의 끝 부분에서, 때로는 성서적 회상을 곁들인 문체를 써 가며,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춘 메시지를 제시하기 위하여 앞의 것들과 똑같은 방식을 채택한다. 이 메시지가 빈번히 종말의 예고로 종결짓는 역사에 관한 신학적 해설을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저자들은 자기들의 시대와 거리를 두고 객관적 평가를 내린다는 의미에서, 자기들의 메시지를 과거의 인물이 말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그들의 명의인(名義人)이 바로 다니엘이나 에녹 같은 사람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모세, 에즈라, 이스라엘의 열두 선조, 바룩, 또는 아담 등도 등장한다. 이리하여 가명 사용이 이 문학 유형의 본질적 원칙이 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저자들은 한 작품 안에서, 자기들이 저술하는 때에 대단원에 다다르는 과거에 관한 신학적 해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지향해 나아가는 종말의 예고를 한데 묶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묵시 문학에서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중계된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적인 사항들은 분명히 구분된다. 위로의 메시지와 하느님 심판의 예고가, 이전의 예언자들에게서처럼 강력한 회개의 촉구를 동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묵시는 위에서 오는 지혜로 제시된다. 교훈적 이야기들이 실생활에 관한 권고로 끝을 맺는 반면, 묵시된 이 지혜는 하느님의 은밀한 계획을 알려 주는데, 사람들의 실생활은 바로 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에서는, 표현상의 변형들이 있기는 하지만 둘째 부분(7 - 12) 전체가 완전히 묵시 문학에 속한다. 그러나 이 부분의 본질적인 주제들은 제1부에서부터, 곧 다니엘이 해몽하는 느부갓네살의 꿈이라든가(2), 임금에 대한 심판을 뜻하는 큰 나무에 관한 꿈이라든가(4), 벨사살 임금이 자기 왕궁의 벽에서 본 글자의 해독(5)에서부터 이미 비롯된다. 환시와 꿈의 이러한 지속적 이용은, 당시 이교에서 애용하던 점술 문학과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상의 유사성은 이교 점술의 무능에, 하느님의 지혜에서 비롯되는 예언의 진실성을 대비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2, 4, 5). 다니엘이 상징적 환시의 수혜자가 되기는 하여도, 보이는 것의 뜻을 알려 주는 천사가 개입해야 한다. 네 마리 짐승과 사람의 아들 같은 이(7), 숫양과 숫염소(8), 그리고 페르시아 시대에서 기원전 164년까지의 역사를 그려 내는 거대한 벽화(10 - 12) 그러한 예이다. 또 미래에 관한 은밀한 계시로 간주되는 성서 본문이 있다. 예레 25,11-1229,10인데 거기에 나오는 칠십년의 해석이, 환시와 꿈의 해석과 비슷한 특수 기법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묵시 문학적 표현 방식은 특별히 어렵고 복잡하여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4. 다니엘서의 주요 주제

 

(1) 신앙과 종교 생활의 근본 요소

 

다니엘서는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시대가 제기하는 여러 문제를 명철하게 살핀다. 잡다한 신들이 가득하고 그 상들 앞에서 예배하며(5,4), 신성하게 여기는 짐승들을 공경하고(14,23) 또 임금 자신이 신처럼 공경받기를 요구하는(6,8) 여러 이교 문화 앞에서, 이스라엘의 유일신론은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낸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이교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내용이 그다지 깊지는 않아도 일종의 호교론을 구상해 낸다(14). 그뿐만 아니라 특별히 생명을 잃는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신앙의 위대함을 찬양한다(3; 5; 14,29 이하). 모든 피조물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탈신화한 세상에서(3,52-90), 정치 권력 역시 그분의 절대적 통치를 인정해야 한다(4,31-32; 5,22-23). 정치의 권위도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4,22.29; 5,18-19). 그분만이 시간과 역사의 주님이시며, 홀로 쥐고 계신 비밀들의 유일한 계시자이시다(2,20-23).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신앙의 언어는 독소가 제거된 옛 신화의 잔재가 존속하는 상징적 표현 방식을 이용한다. 곧 하느님께서는 시종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나이와는 무관하게 살아 계신 노인이시라는 것이다(7,9-10). 여기에서 천사 세계의 묘사는, 동부 메소포타미아 곧 현재의 이란 땅에서 쓰이던 상징들에서 새로운 요소들을 빌려 옴으로써 복잡해진다. 주님의 천사가 불가마 속에 있는 세 젊은이(3,49-92), 그리고 사자굴에 있는 다니엘을 구출하기 위하여 개입하는 것만이 아니다(5,23). 또 다니엘이 본 환시와 꿈을 해석하는 열쇠가 에제키엘과 즈가리야의 경우처럼 천사에게서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다(7,16 이하; 9,16 이하; 9,21; 10,9 - 11,2; 12,6 이하). 주님께서는 바로 이 초자연적 존재들을 통하여 세상을 통치하시고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시는 것이다(4,14; 10,13.20-21; 12,1).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사람은, 인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경탄스러운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깨닫게 된다(2,34.45; 3,11-13.20-22; 5,5; 8,25).

 

유다교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율법에 따라 실생활을 체계화한다. 이교인들로서는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율법의 규정들(예컨대 음식에 관한 금령들: 1,8)을 유다인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율법은 법 체계를 세울 뿐만 아니라(13,62), 모든 도덕적, 제의적(祭儀的) 책무에 의미를 부여한다(3,18.41; 13,23). 율법은 또한 전례력을 확정짓는다. 그리고 어떠한 인간적 권세도 그것을 변경시킬 권한이 없다(7,25). 율법은 유배의 땅에서도, 관습에 의해서 정착된 횟수와 자세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기도의 형식을 제시한다(6,11). 이렇게 일정한 형식으로 고정된 기도문들이 다니엘서 이전부터 많이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다니엘서의 운문들은 바로 그 표현법을 모방한다(2,20; 3,33; 4,34; 6,27-28; 7,27). 다니엘서에는 삶의 갖가지 상황에 직접 관련되는 개인 기도 외에도(13,42-43), 히브리/아람 말로 쓰인 본문과 그리스 말로 쓰인 첨가 부분에, 각기 해당 문학 유형의 표본이 되는 두 개의 참회 기도(3,25-45; 9,4-19)와 한 개의 찬미가(3,52-90)가 보존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으로 새롭게 열린 전망에 맞추어서 이 기도문들을 자기들의 기도로 받아들이는 데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게 된다. 유다교는 이렇게 하여 동방의 여러 문명과 종교를 병합한 헬레니즘의 혼합주의적 문화 속에서도 자기의 독창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다니엘서는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그 문학 양식 속에서, 유다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이 독특한 상황이 지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가능성을 드높인다. 곧 이 책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충실히 살아가는 유다인들이 크게 성공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1; 2,48; 3,30; 5,29), 그들 자신이 바로 자기들이 동화하여 살고 있는 사회를 구할 사람들임을 드러내며, 또 아무런 주저도 없이 참 하느님의 위대성을 고백하는 이교도 임금들이 회개하리라고 예상한다(2,46-47; 3,31-33; 4,34; 6,27-28). 이러한 전망은 바로 그 당시 이교도들을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인도하고, 때로는 율법을 지키게 하여 그들도 계약의 백성으로 동화시키는 선교의 전망이기도 하다.

 

(2) 역사 신학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당신의 신비한 계획을 실행하신다. 예레미야의 보편주의와(예레 25) 2이사야의 위로의 메시지는(이사 41,25-29; 45,1-6) 이제 폭넓게 구현된다.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다니엘서의 저자는 근동의 역사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가는 제국들을 보여 준다(바로 이 제국들과의 대결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파멸되는 것처럼 보인다). 신상에 관한 꿈에서나(2), 네 마리 짐승과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 관한 환시에서(7), 그 메시지의 핵심과는 무관한 전통적 표현 양식을 이용하여, 바빌론,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의 연이은 출현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는 일종의 비관론이 지배한다. 이러한 역사는 위기가 계속되면서 점진적 타락을,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인간 세계에 일어나는 악의 증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2장에 나오는 거대한 상()이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지만, 발은 흙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그리고 앞의 것들보다 더 큰 악행들을 저지름으로써 누구보다도 더 흉악하게 나오는 7장의 네 번째 짐승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역사는 대단원을 향해 나아가는 죄의 신비이다.

 

인간 역사는 또한 사람들에게 이로운 권세들(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끊임없이 도움을 주시는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 이를테면 이교도 제국들로 육화한 적대적 권세들(10,13; 10,20 - 11,1 참조) 마주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역사는 이미 여러 가지 상징으로 표현되는 마지막 심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거대한 상의 붕괴(2,44-45), 벨사살의 죽음(5,24-30), 짐승의 죽음(7,11.24-26), 숫염소의 파멸(8,23-25), 박해자-임금이기도 한(11,40-50) 파괴자의 종말(9,27) 등이 그 상징들이다. 이러한 심판의 예고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임금의 통치가 빚어 내는 비극적 상황과 직결된다. 그러나 그 뒤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장차 겪게 될 모든 시련이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러한 예언은 위기 때마다 항구한 현시성을 지니게 된다. 요한 묵시록은 같은 방식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제국을 그려 낸다. 로마에 정복당한 유다인들은 특히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된 뒤에 바로 다니엘서에서 위로의 메시지를 얻기도 한다.

 

(3) 희망의 메시지

 

거만한 이교도 권력자들뿐 아니라 불충한 유다인들에게도 내릴 하느님의 심판은, 하느님의 계획이 전개되고 공개되는 과정에서 극적인 한 순간일 따름이다. 예언자들의 약속으로 열린 희망의 전망들은, 그러한 심판을 넘어서서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현실적인 것이 된다. 다니엘서의 저자가 이 약속들에 준거한다는 사실은, 예레미야의 한 구절을 현재의 상황에 따라 현실화하는 9장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저자는 분명, 약속의 의미를 지닌 모든 성서 구절을 이와 비슷한 전망 속에서 재독하였을 것이다. 그는 유배 이후의 예언자들에게서 비롯된 과정을 그 마지막 결론까지 이끌어 가면서, 옛 약속들을 지상의 역사와 한시적 결과의 한계를 벗어나는 곳으로까지 옮겨 놓는다. 이스라엘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역사의 실질적 종말을 가져오는 하느님 나라의 수탁자이며 수혜자이다. 제국들의 승계가 끝나는 곳이 바로 이 초인간적이고 초역사적인 나라이다(2,44).

 

저자는 하느님 앞으로 인도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모습으로(7,13-14) 이 왕국을 표현함으로써 그 초월성을 강조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스라엘)은 이 나라를 지상에서 떠받치는 지주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명을 감당할 수 있으려면, 이 백성은 다시 시련을 겪으면서 단련을 받아야 한다(11,35; 12,10). 이것이 바로 팔레스티나에 사는 유다인들이 받는 박해의 뜻이다. 이 박해는 후에 라비들이 미래의 세상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에 곧바로 이어진다. 7장의 유비적 환시에서도, 12,1-4의 신탁에서도, 미래의 세상은 변모된 우주의 모습을 띤다. 유배 이후의 몇몇 종말론적 본문이 이미 이러한 생각을 예고하였다(이사 25,7-8; 30,26; 65,17-25; 즈가 14,6). 이러한 부분적 주제들이 이제, 거룩한 땅에서 영위하는 평화로운 삶에 관한 신명기의 약속을 훨씬 뛰어넘는 전체적 표현 속에 체계를 갖추게 된다. 사람들이 고대하는 바는 천상적 실재가 지상으로 밀려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자신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책에 쓰인 이들(12,1), 남은 자들만이 미래의 세계의 행복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시된 원칙은, 다니엘서가 저술되기 직전에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유다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로써 저자는 순교자들의 체험으로 제기되는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불가마에서도(3,28), 또 사자굴에서도 사람들을 구해 내실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6,22), 동시대인들에게 필요한 경우에 죽음과 맞서라고 격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의 희생물이 된 이들 안에서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 그 죽음의 권능을 쳐 이기리라는 사실을 원칙으로 제시한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억울한 죽음으로 인간의 공동 운명에 동참함으로써, 미래의 세상에 자리를 얻게 된다.

 

이로써 구약성서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부활에 관한 약속이 뚜렷이 나타난다(12,2-3). 그와 동시에, 예언서들과 시편에서 자주 사용된 고전적 표현을 빌리자면, 단순한 죽음의 영역인 저승은 이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 미래의 세상에서 배제되는 곳으로서의 저승이 된다. 마카베오 하권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보존하는 데에 이 희망의 메시지가 중요한 구실을 하였음을 입증한다(2마카 7,9.11. 14.23.29). 계시의 최종적 발전은 이 교의를 단순히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장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니엘서는 예언자들의 신학과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결부시키는 데에 이바지한다.

 

 

호세아서 입문

 

 

호세아 예언서는 히브리 말 성서와 대중라틴말성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말 고대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도 열두 소예언서 첫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예레미야서라든가 미가서처럼 예언자의 이름이 직접 책 이름으로 쓰인 경우가 많다. 물론 이처럼 책 제목으로 나오는 이들만 예언자로 활동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예언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이 예언자들을 통상 저술 예언자라고 부른다. 호세아는 바로 처음 등장하는 저술 예언자 가운데 하나이다. 아모스 예언자만이 이 호세아보다 조금 앞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호세아는 기원전 8세기 후반기에, 야곱이라고도 하지만(12,3), 주로 에브라임이라고 불리는 북왕국(4,17 ), 곧 이스라엘에 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1. 역사적 상황

 

호세아서 1,1에는 이스라엘 왕국의 임금이 한 사람만 소개된다. 바로 여로보암이다. 예후 왕조에 속하는 이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상당 기간 번영을 누린다(기원전 787-747). 그러나 이 예후 왕조는 여로보암 다음 임금이 등극한 뒤에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끝을 고한다. 호세아는 이미 1,4에서 바로 이 왕조의 멸망을 예고한다(호세아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을 다스린 임금들과 그들의 통치에 관한 이야기는 2열왕 14,2317,23에 전해진다).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즈가리야는 임금이 된 지 여섯 달 만에 시해되고 만다. 왕위를 찬탈한 살룸도 사마리아에서 한 달밖에 버티지 못하고 므나헴에게 살해된다. 므나헴이 아홉 해 가량 통치한 뒤에,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계승하지만 등극한 지 두 해 만에 살해된다. 새 왕위 찬탈자 베가 역시 몇 년 뒤에 호세아라는 자에게 시살된다. 호세아 예언자와 이름이 같은 이 사람이 북부 이스라엘 왕국 최후의 임금이 된다. 세 해 동안 지속된 아시리아군의 포위 공격 끝에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됨으로써, 북부 이스라엘 왕국은 완전히 망하게 되는 것이다(기원전 721년 또는 기원전 722).

 

호세아서 1,1은 또 남쪽 유다 왕국의 여러 임금도 언급한다. 이들은 이스라엘 왕국이 혼란을 겪던 같은 시기에 유다를 통치한 임금들이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히즈키야의 치세는 사마리아가 멸망한 뒤에도 지속된다. 이 밖에도 특히 7장에는 여로보암 2세의 통치에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와 그 시기를 특징짓는 궁중 혁명을 시사하는 부분들이 나온다. 책 첫머리에 배치된 연대 표기는 북왕국이 비참하게 종말을 맞이한 다음에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호세아가 사마리아의 몰락을 직접 알았다는 확실한 표시는 없다. 사마리아의 파멸을 가리키는 표지들은, 호세아의 말씀을 책으로 만들려고 자료를 수집할 당시의 유다 왕국 출신 편집자가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로보암 2세 이후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임금들을 이 예언서가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호세아 예언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한 내용, 그들이 임금들을 세웠지만 나와는 상관없다.(8,4)는 판결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왕위 찬탈자로서 적법한 임금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이 후대에 전해질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북왕국의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은 국제 정세의 여러 불안정한 조건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시기는 아시리아가 근동의 패자로 부상하던 때이다. 디글랏-빌레셀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인 샬마네셀 5세와 사르곤 2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서부 지역 원정을 단행한다. 그리하여 시리아의 여러 아람 왕국, 페니키아의 도시 국가들, 이스라엘 왕국, 그리고 불레셋 도시 국가들이 이 강력한 팽창주의의 파고 속에 휘말리고 만다. 유다 왕국도 화를 완전히 면하지는 못하면서도(호세아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이사야의 가장 오래 된 신탁들에서 이 극적인 사건의 반향을 볼 수 있다.), 형제 나라이면서 동시에 적국인 북왕국보다 한 세기 이상 더 지탱한다. 이 시기에 근동의 또 다른 강대국 이집트는 쇠약한 가운데에서도, 아시리아가 정복한 여러 지역의 봉기를 선동한다.

 

호세아 예언서는, 에브라임이라고도 불리는 이스라엘 왕국이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계속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 준다(7,11). 그러나 그 균형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호세아는 그러한 노력의 비극적 결말을 날카롭게 직시한다. 지금 평온한 것은 아시리아라는 거대한 물결이 들이닥치기 직전의 평온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정복한 나라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하여 정복자들이 흔히 취하는 정책인 탄압과 지도층의 유배가 이스라엘 왕국에도 가해진다(8,8). 그리하여 난을 피할 수 있는 자들은 이집트로 달아나게 된다(9,6).

 

2. 종교적-윤리적 배경

 

국내외 정세만이 호세아 예언자가 개인적으로 내리는 비판의 대상, 그리고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심판의 유일한 대상은 아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깊은 도덕적 타락(4,1-2; 6,7-10; 7,1), 곧 온갖 사회 정의의 부재와 그것에 따른 지도층의 책임을 고발한다. 그는 바로 종교적 불충이 온갖 부패의 뿌리이고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호세아가 맨 먼저 이스라엘인들의 종교적 타협에 비판을 가하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분으로서 당신을 섬기는 이들의 마음이 갈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주 하느님의 요구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컨대 엘리야 시대와 비교해 볼 때에(1열왕 18) 호세아가 직면한 상황은, 이스라엘인들이 쉽게 분별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명확하지도 않고, 선택된 백성에게 뻗치는 유혹의 손길은 또 더욱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더 많은 위험을 안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러 유혹 가운데에서 가장 역겨운 것은 가나안 신들의 유혹이다. 사람들은 이 신들을 자기들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자리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그분 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마음이 끌린다. 가나안의 신들은 자연의 힘 곧 비와 뇌우, 그리고 땅의 풍요다산을 관장함으로써, 농경 생활의 여러 가지 필요를 채워 주는 전문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상들의 하느님을 버리지 않는 모든 예방책을 강구한다면, 이 가나안 지방 신들의 호의도 동시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종교적 타협은, 예전에 조상들이 세겜에서 계약을 맺을 때에 그만두었지만(여호 24) 그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던 옛 관습으로 돌아가는 것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타협이 쉽게 이루어진다. 가나안 신들을 모시는 산당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유혹에(4,12-13), 호세아는 대담하게도 당신 백성에게 하실 주님의 유혹을 대립시킨다(2,16-25). 그러면서 예언자는 결국 가나안 종교의 추종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논거를 들어 반박하기에 이른다. 당신 백성에게 땅의 풍요다산을 보장해 주시는 분은 가나안의 신들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이 아니시냐는 것이다(2,7-11.23-25; 14,6-9).

 

3. 예언자의 혼인

 

호세아 예언자의 대담함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는 주님과 그분의 불충한 백성 사이의 관계를 자기 자신의 삶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예언자는 이를테면 하느님의 입장에서, 그분께서 느끼시는 감정을 자기 것으로 삼아 표출한다. 이 예언서에서는 주님께서 상당히 자주 일인칭으로 말씀하신다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바로 그러한 사정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호세아가 창녀와 혼인 생활을 한다는 13장의 이야기는, 성서 해석에서 지속적으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켜 온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나중에 다시 거론되겠지만, 호세아 혼인 이야기의 일화적인 측면이 이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와 비교할 때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호세아가 실제로 자기의 혼인 생활에서 극적인 체험을 하였고,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는 표상으로서만 행동하였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는 점은, 결코 간과해 버릴 수 없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호세아의 혼인 생활은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실이다. 해당 부분의 각주에서도 보게 되겠지만, 호세아의 아이들은 상징적인 이름을 가지는 데 반해서, 아이들의 어머니 고멜은 그렇지 않다. 만일 혼인 이야기가 단순한 허구에 불과하다면, 이 은유의 중심 무게가 바로 호세아의 아내 고멜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이름 역시 평범한 고멜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지녀야 할 것이다.

 

호세아의 혼인은 허구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이면서, 그러나 동시에 하나의 상징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 일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밝혀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뿐더러 별소용이 없는 일이다. 이 혼인은 예언자들이 흔히 하는 것과 같은 예언적 행동으로서(이사 20,1-6; 사도 21,10-14 참조), 행동 그 자체에서 의미가 흘러 나온다. 호세아서의 경우에는 책 전체가 13장에 서술된 이 예언적 행동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3장이 호세아의 새로운 혼인, 고멜이 아닌 다른 여자와의 새로운 생활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그 동안에 많은 토론이 있어 왔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3,1은 번역상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 곳의 각주 참조).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세 3장이 계속 고멜과 관련될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고멜에 대한 호세아의 사랑, 곧 당신 백성에 대한 주님 사랑의 심화를 볼 수 있다. 호세아는 자기 아내가 그냥 부정(不貞)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절망적일 정도로 부정하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 1,2에서 창녀를 가리키는 일반 명칭이 아니라 흔하지 않은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 상징적이다(그 곳의 각주 참조). 그러나 고멜은 일반 창녀가 아니라, 가나안인들에게서 유래하는 풍요다산의 제의(祭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여자로서, 그것의 감각적이고 성적인 의식에 참여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다(이 사실을 암시하는 2,4.15; 4,13-14 등 참조).

 

이러한 부류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당신 백성에 대한 주님의 사랑 역시 그렇게 어리석은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도 호세아가 고멜에게 애착을 가지고 그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응답이 없는 일방적인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 사랑의 놀라운 심화를 뜻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오로지 남편과만 지내는 완전한 고립이라는 시련만이 고멜을 반성과 회개로 이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역시 자기의 모든 복, 곧 종교적 복, 그리고 하느님과의 특수 관계로 이해되는 모든 복을 완전히 박탈당함으로써만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세 3장은 동시에, 고멜이 부정을 저지르는 그 시간에도 호세아가 그 여자에게 품고 있는 애정을 드러내 보인다. 고멜이 바로 그렇게 부정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음에도, 바로 그러한 죄악에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 백성에게 품으시는 애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신 백성에게 갖는 주님의 이 사랑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일대 모험과 같은 부부 생활을 하는 호세아에게서, 하느님의 마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이해하게 해 주는 체험을 보게 된다. 시간이 찼을 때에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로마 5,6-8).

 

호세아는 고멜을 있는 그대로 사랑함으로써, 당신 백성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세아 예언서에서 사랑이 분개와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랑이 그저 순진하거나 무지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고통으로 다듬어진 사려 깊은 사랑이며, 어떠한 시련에도 주저앉지 않는 사랑이다.

 

4.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바알

 

사람들은 가나안의 신들이 여러 특권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러한 특권들이 사실은 주님, 그것도 그분 혼자만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가나안의 종교 의식뿐만 아니라, 그 어휘 그리고 상징과 관련해서도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는 우상 숭배자들과 자기가 쓰는 특정 낱말들의 유사점을 찾아 내어 빗대기도 한다(특히 14,9 각주 참조). 그러나 그러한 일은 암시적이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반면에 널리 퍼져 있는 관습은 사정없이 배척한다. 바알이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주인을 뜻하는 이 낱말은 본디 가나안의 어떤 신의 이름이다. 또 이 낱말은 아내가 남편을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주 하느님을 지칭하는 데에도 이 바알을 쓰는 관례가 자리잡게 되었다. 호세아는 이 바알이라는 말을 소리내는 것조차 싫어한다(2,19). 이렇게 다른 신들뿐만 아니라 바로 주님을 가리키는 데에도 이 이름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2,18).

 

신상을 세우는 것을 절대적으로 배척한 데에도 이와 유사한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신상이 신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상징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북왕국의 성소들에 있는 황소들도(호세아는 조롱조로 송아지라고 부른다.) 신의 재현이 아니라 그의 상징으로 내세우려고 하였다. 가나안에서는 신들을 어떤 짐승 위에 선 인간의 모습으로 재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그대로 두고 그분께서 베푸시는 도움만을 재현시켜, 주님의 초월성에 맞갖은 존경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친숙한 상징들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종교적 언어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 점에 대해서 매우 강경한 자세를 보인다. 바로 그러한 관습이 종교적 타협의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호세아의 이러한 태도는 1고린 8 - 10장에서 바오로 사도가 희생제물로 바친 짐승 고기와 관련해서 보인 태도에 비길 수 있다).

 

예언자의 이러한 자세는 호세아가 다른 데에서 주님과 관련하여 취하는 자세와 생생한 대조를 이룬다. 그 곳에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을 진정한 하느님으로 소개하면서, 바로 그분에게서 땅의 풍요다산을 기대해야 한다고 과감히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 주장을 암시적으로 조심스럽게 전개한다(14,9). 또한 그는 주님께서 단순히 자연의 힘을 지니신 분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유의한다. 더 나아가서 예언자는 2,23-34를 주의 깊게 읽을 때 드러나는 것처럼, 자연의 정상적인 진행 과정을 존중한다. 대조가 모순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격정적인 언어에서 대조는 여러 가지 뉘앙스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호세아는 주님을 인간의 종교적 사고 방식과 언어 너머에 두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종교가 어떠한 타협도 없이 순수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언자는 외적 종교와 제사와 제의(祭儀)에 관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여기에서 호세아가 문제 삼는 것은 미심쩍은 관행들만이 아니라(4,12-14), 매우 전통적이며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것들이다. 그가 단죄하는 것은 제의나 제사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종교 생활을 이끄는 정신, 곧 의식을 정확히 거행하면 하느님의 호의를 자동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6,1-814,2-4를 비교하라). 주님께서는, 그 순간에는 진지하다 하더라도 삶의 진리가 들어 있지 않은 신심 행위로 불러올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진정한 회개의 표현과, 일상의 행동들을 통해서 자신을 내놓는 사랑의 증거를 바라신다. 바로 여기에서 호세아는 부정적 논쟁을 넘어선다: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ꡓ(14,5). 죄인인 인간이 마침내 이러한 사랑의 진리를 생활화하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다. 2,20-22가 이러한 사실을 선포한다. 주님께서는 옛 계약에서 요구되는 정의와 공정에 애정과 자비를 보태실 것이다. 또 당신과 당신 백성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정립하실 것이다. 이는 진리, 그리고 애정 어린 친교의 표상들로 표현되는 관계, 온전히 내적 성실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호세아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예레미야는 이것이 바로 새 계약이며, 이러한 계약을 세우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바꾸시리라고 말하게 된다(예레 31,31-34).

 

호세아 예언서는 매우 어두운 시대를 드러내 보여 준다. 윤리적, 사회적 상황은 총체적 부패이고, 종교적 상황은 완전한 불충이며, 정치적 상황도 지각 있는 이의 눈에는 절망적이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질타와 위협으로 그득하다. 그러나 거기에 주의를 촉구하는 또 하나의 대조가 있다. 바닥 깊은 데에서는 호세아의 메시지가 자애와 희망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정황과 사람들의 태도는 어두운 모습만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질타는(그리고 이것은 실망한 사랑의 질타이기 때문에 그만큼 격렬할 수밖에 없다.) 홀연히 그 무엇도 좌절시킬 수 없는 사랑의 토로로 바뀌게 된다. 시작이 사랑이었던 만큼(9,10; 11,1) 끝도 사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분노를 이길 뿐만 아니라(11,6-9) 죄까지 없애 버릴 것이다(14,5).

 

5. 호세아서의 형성

 

호세아 예언서가 경이로운 약속의 말씀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예언서에서는 편집의 자취를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확실한 형성 과정을 밝혀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사실 호세아서는 특정한 여러 상황에서 선포된 신탁들과 말씀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그 상황들에 대해서 우리는 일부만 밝힐 수 있을 뿐이다.

 

앞부분의 몇몇 장은 예후 왕조가 머지않은 장래에 멸망하리라고 내다본다(1,4 참조). 이 장들은 호세아의 활동 초기에 속하는 것들로서, 아마도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때에 선포되었을 것이다. 5장의 둘째 부분은 통상 시리아-에브라임전쟁이라고 불리는 싸움을 시사하는데, 이 전쟁 중에 남부 유다 왕국이 북부 이스라엘 왕국 쪽으로 영토를 확장한다(5,10 참조). 예언서의 끝 부분은 사마리아의 파멸이 이미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임박한 것으로 소개한다(13,914,1).

 

이상 말한 사항들이 호세아서 연대의 틀을 이루는데, 이 연대는 기원전 8세기의 3/4분기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집트와 아시리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이스라엘의 노력에 대한 수많은 암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왕위 계승을 끊임없이 뒤집어 놓는 왕궁 내의 음모에 대한 신랄한 비난(이를 전하는 7장의 세부 사항들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 전체적인 뜻은 명백하다.) 등이 또한 이 책 전체를 같은 시대에 연결시키는 표지들이다. 아무튼 많은 신탁이 당시의 윤리적, 종교적 상황과 관련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이 예언서의 절정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이 전반적으로 풍기는 인상은 일정한 직선 구도를 따른다기보다는, 같은 주제를 꾸준히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서에서 호세아가 한 말 가운데 그 자신이 직접 기록한 부분을 구분해 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13장은 다른 부분보다 어조가 훨씬 더 개인적인 것으로 보아, 호세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탁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것들에서 이 예언자의 삶의 일부, 더 나아가서 그의 심층적 심리를 재구성하려는 의도로 전기적인 요소들을 밝혀 내려고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뿐더러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 자체를 지나쳐 버릴 위험이 있다.

 

호세아의 혼인 생활이 정확히 어떠하였든 간에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해서, 3장이 그의 두 번째 혼인을 말하든, 아니면 아내와 헤어졌다가 재결합하는 것을 말하든 간에), 그것이 그 자체로서, 또는 단순히 호세아와 그의 부정한 아내 사이의 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께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민족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상징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녀들의 상징적인 이름, 그리고 끊임없이 2인칭에서 3인칭으로, 단수에서 복수로 오가는 변화, 똑같은 질책을 하면서 그 대상을 어미에서 자식들로, 또 자식들에서 어미로 바꾸어 가는 의도적인 혼동 등, 이 모든 것은 호세아의 혼인과 관련된 이 비통한 이야기가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청중 또는 독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임을(1고린 10,11) 뜻한다(호세 14,10 참조).

 

이미 여러 학자가 말한 대로, 호세아서의 첫 절은 사마리아의 멸망 뒤에 유다 땅에서 쓰여졌음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이 밖에도 호세아서 전체에 걸쳐 이 책이 유다에서 편집되었다는 표시들을 볼 수 있다(1,7과 각주 참조).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본디 북왕국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하여 선포된 말씀들이 어떻게 유다 왕국에 적용되었는지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유다의 이름을 담은 모든 구절이 유다의 편집자에게서 유래한다는 뜻은 아니다. 끝으로, 글자로 기록된 이 예언자의 메시지 전체에 대한 반향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절 역시 편집자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문학 비평적인 고찰은 순전히 전문가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서의 저자들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도록 여건을 만들어 낸 명백한 역사적 상황 너머로, 그 말씀이 항상 지니는 생생한 현실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호세아가 말씀들을 직접 기록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충실히 전해졌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매우 개인적인 성격의 언어와 문체가 이 사실을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 그의 문체는 열정적이고 격렬하며, 그의 언어는 강력하고 힘이 넘친다. 그러나 특히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간결함 때문에, 그 언어는 종종 난해하고 그 문체는 때로 모호하기도 하다. 문장들은 빈번히 짧고 율동적이다. 표현의 간결성, 축약성, 부조화 등은 매혹적인 시의 모습을 부여하면서도, 또한 이것들은 호세아서를 히브리 말 구약성서에서 가장 난해한 책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 따라서 호세아서는 본문 비판과 관련해서 추측에 따른 수정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책이기도 하다.

 

6. 호세아 예언서의 영향

 

호세아 예언서의 영향은 성서 전체에 걸쳐서 넓게 나타난다. 구약성서에서는 예레미야가 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예레미야는 광야로의 귀환이라는 주제를 이어받고(예레 2,2-3과 호세 2,17 참조), 새 계약이라는 주제도 더욱 명확히 한다.

 

호세아 예언서의 표상 가운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주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를 혼인 관계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또 부정, 간음, 매음 등과 같은 명제가 뒤따른다. 이 표상은 예레미야서(2,23-24; 3,1; 30,14; 31,22), 에제키엘서(16장과 23), 이사야서의 후반부(50,1; 54,4-7; 62,4-5)에서 다시 볼 수 있고, 아가서에서는 해석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구약성서에서 혼인의 표상이 주님과 그분 백성의 일치를 상징하듯, 신약성서에서도 이 표상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게 된다(마르 2,19-20; 에페 5,25 ).

 

신약성서에서는 호세아서가 17번 인용된다. 그러나 그 영향은 단순히 동일한 표상의 반복이나 인용 횟수에 따라 평가할 수 없다. 호세아의 신학은 하느님 사랑의 신학이다. 이 사랑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표상 안에서 정성과 자애로 표현된다. 호세아는 남녀간 사랑의 표상 속에 인간적 열정의 언어를 사용한다. 호세아가 이러한 표현을 대담하게 채택함으로써, 이 예언자 이후부터 주님께서는 열정적인 하느님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바람, 실망, 분개와 분노를,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날이 커져 가는 당신의 자애를 말씀하신다. 결국은 분노나 징벌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이 되어 버린 시련 너머로, 이제는 정결한 일치 속에 이루어지는 행복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애는 약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뿐더러 죄에 대한 기억마저 소멸시켜 버릴 수 있는 하느님의 힘이다. 이렇게 호세아서는 신학과 신앙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면서 바로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요한 복음서에서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의 계시 자체는 호세아서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호세아서가 그 메시지의 깊이와 열정을 통하여 신앙의 본질적인 것에까지 다다르기 때문에, 이 예언서는 과거처럼 오늘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당신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 된다. 호세아서의 마지막 절은 읽는 이에게 하느님 말씀의 현실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촉구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14,10?). 예수님께서도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신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르 4,9). 이렇게 성서의 계시는, 역사의 특정 상황에 깊숙이 끼워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듣는 모든 이에게, 그리고 성서를 펴는 모든 이에게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호세아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교회에 말씀하신다. 그것은 질책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자비의 말씀이고, 준엄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을 요구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너희에게서 모든 불의를 내쫓고, 우상의 속임수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이 요구는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요구이다. 그러나 이 요구는 또한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요구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유일하신 분이 되려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진실로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상은 무()일 뿐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사람들에게는, 인간에게서 구원을 바라는 것이 헛일일 따름이다. 오로지 주님에게서만 행복과 생명이 나온다.

 

이것이 호세아서를 마무리짓는 말씀이다. 그것은 신앙과 희망의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물론 호세아 예언서가 성서의 모든 계시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예언서가 그토록 멀리 또 깊이 나아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백성은 이 예언서를 읽으면서 희망의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또 자기 신앙의 순수성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요엘서 입문

 

 

1. 자연 재앙과 예언자 요엘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지만, 아프리카 같은 데에서는 메뚜기 재앙이 종종 일어난다. 가끔 크게 번식한 메뚜기 떼가 하늘을 까맣게 덮을 정도로 큰 무리를 지어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지상에 있는 식물을 닥치는 대로 먹어 없애 버리는 것이다(탈출 10,1-20 참조). 성서의 땅에서도 금세기 초까지 이러한 재난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곤 하였다.

 

언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 땅에 유례 없는 메뚜기 재앙이 벌어진다. 사태를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그 때에 이미 기근으로 땅이 황폐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식물마저 모조리 메뚜기 떼의 먹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생존이 온전히 땅에 매일 수밖에 없던 옛날에, 이러한 사태는 사람은 물론 짐승들에게조차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재앙의 때에, 요엘 예언자가 탄원 기도를 올리며 참회 예절을 거행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다. 우리는 이 예언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와 그의 아버지 이름만 확실히 알고 있을 뿐이다(1,1). 요엘이라는 이름은 신앙 고백을 담고 있다. 야훼의 준말이고, 하느님을 뜻한다. 그래서 요엘은 주님은 ()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이 이름은 역대기 같은 데에 드물지 않게 나온다.

 

요엘서 전체를 볼 때, 그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활동 시기를 알아 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이 예언서의 주요 배경이 자연 재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난의 서술을 바탕으로 그 시대를 맞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원전 9세기로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기원전 3세기로 잡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4,1-3은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유다 왕국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함락을 오래 전의 일로 전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그리스인들까지 나오는 4,4-8은 일반적으로 후대에 보태진 첨가문으로 판단한다).

 

곧 요엘 예언자의 시기를 유배 이후로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임금과 왕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 반면, 원로들과 사제들이 나라를 이끈다는 사실(1,2.13-14; 2,16-17 참조), 성전과 종교 의식의 거행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기원전 5세기 후반부에 활동한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이 전제된다는 점, 그리고 이 책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되는 다른 예언서들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기원전 400년 전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진다. 이 때는 정치적 안정 속에 예루살렘 성전이 유일한 성소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제사가 어려움 없이 바쳐지고 있었다.

 

2. 메뚜기 재앙

 

요엘 시대에 일어난 메뚜기 재앙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재난이었다: 이러한 일이 너희 시대에 있었느냐? / 이러한 일이 너희 조상 시대에 있었느냐?(1,2). 가뭄으로 흙덩이 밑에서는 씨앗들이 오그라들었고, 곳간은 빈 지 오래이다(1,17). 거기에다 이제 메뚜기 떼가 모여들었다.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 먹어 버렸다(1,4).

 

땅의 파란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메뚜기 떼의 그 게걸스러운 식욕은, 마치 그들의 이가 사자의 이빨 같다는 강한 인상을 사람들에게 남겼다. 그렇지 않고는, 그처럼 포도원을 짓밟고, 무화과 동산을 찍어내 버린 듯이 나무 껍질까지 하얗게 벗겨 버릴 수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1,6-7). 나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다른 곡식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밀과 보리를 생각하며

농부들아, 질겁하여라.

포도나무를 가꾸는 자들아, 울부짖어라.

들의 수확이 결딴났다(1,11).

 

이 이중의 재앙 속에서, 가축들도 먹을 것이 없어 타 버린 들판에서울부짖다 죽어 간다(1,18-20). 이런 불행의 정점은 하느님께 바칠 제물까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처녀가 젊고 건강한 약혼자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1,8-9.13). 사는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제사를 드리는 기쁨이 없어져 버렸다(1,12.16). 죽어 버린 자연과 함께 삶의 끝이며 세상의 종말과 같은 상황이다.

 

이 때 요엘 예언자가 금식과 참회를 외치며 등장한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신의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후회하여

뒤로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2,13-14)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슬픔이나 재난을 당하였을 때,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뿌리고 금식하였다. 그런데 이 의식은 자칫 외형적인 것으로 흐를 수 있다. 예언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백성이 하나가 되어(2,16), 진심으로 뉘우쳐 금식하며 가슴을 치고 우는참회(2,12), 금식과 참회가 하나인 탄원의 기도를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바치라고 촉구한다. 그러한 속마음을 보시고 하느님도 마음을 움직이시어, 이 재난을 멈추게 하시리라는 것이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가엾이 여기신다(2,18). 그리고 기적적으로 죽음과 불행의 땅에 생명과 기쁨을 내려 주신다. 이제 사람과 땅과 짐승이 모두 즐거워하며 되찾은 생명을 구가하게 된다(2,21-24).

 

3. 주님의 날

 

그런데 요엘은 하느님의 백성을 멸망의 문턱까지 몰고 간 이 재앙이, 한 번으로 그냥 끝나 버린 사건이 아니라고 외친다. 이 재난은 더욱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건, 이스라엘인들이 늘 생각하면서 두려움 속에 기다리는 사건, 주님의 날을 가리킨다(1,15 참조). 이것은 아모스서와 이사야서를 거쳐, 스바니야서와 에제 30, 그리고 오바디야서와 말라 3장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예언자가 오래 전부터 예고해 온 날이다. 그래서 요엘이 이 날을 거론할 때, 청중들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날은 종말의 날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 날, 또는 하느님의 백성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는 날이다. 그래서 단순한 끝 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기근이나 메뚜기 재앙이 아니라, 바로 이 주님의 날이 요엘 예언자의 관심사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예언서의 명확하면서 독특한 구조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요엘서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1,22,172,184,21이다. 첫째 부분에서 예언자는 금식하고 참회하며 탄원 기도를 올리라고 촉구한다. 그 배경은 1장에서는 이미 닥친 기근과 메뚜기 재앙이고, 2,1-11에서는 이제 막 시작하는 주님의 날이다. 그런데 요엘서의 관심사인 주님의 날은 이미 1장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다(1,15). 그리고 메뚜기 떼를 주님의 날에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게 될 셀 수 없이 많고 힘센 족속으로 표현하기도 한다(1,6).

 

첫째 부분에서 둘째 부분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은 2,12-17이다. 12-14절에서는 가뭄과 메뚜기 재앙, 그리고 15-17절에서는 주님의 날과 관련된 참회 예절을 말한다. 이 참회 예절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 둘째 부분에 나온다. 2,18-27은 참회 예절에 대한 첫째 응답이고(그러면서도 19-20절은 주님의 날과 관련된다.), 4,1-3.9-17은 참회 예절에 대한 둘째 응답이다. 이렇게 메뚜기 재앙과 주님의 날과 관련해서 계속 둘씩 대칭을 이루면서 배열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과 관련된 말들도 비슷하게 표현된다. 예컨대 참회 예절의 모임을 소집하는 1,142,15,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개입이 지향하는 백성의 참다운 앎도 서로 거의 같은 표현으로 이루어진다(2,274,17).

 

이렇게 볼 때, 메뚜기 재앙과 주님의 날이라는 두 주제가 병행을 이루면서 전개되지만, 중요하고 유일한 관심사는 주님의 날임이 분명해진다. 사실 요엘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고통 중에 겪어야 했던 재앙을, 예전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종말의 날이 시작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로써 요엘이 선포하는 메시지에는 주님의 날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새로운 점이 첨가된다. 첫째는, 이 날이 단순히 미래의 어느 날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날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둘째는, 이 종말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멸망과 함께(특히 2,3.11 참조)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이다(34). 주님의 날은 이렇게 이중의 모습을 지닌다.

 

이러한 주님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느님의 백성에 소속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율법이나 경신례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보장받지 못한다. 이는 특히 요엘서의 분기점을 이루는 2,12-17에서 잘 볼 수 있다. 예언자들의 말씀에 따라 마음을 찢는 참회를 해야,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준비를 순전히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의 모든 사람에게, 곧 아들과 딸, 늙은이와 젊은이,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 없이, 모든 이에게 당신의 영을 풍성히 내려 주신다. 그리하여 모든 이가 예언자가 된다. 저마다 예언자처럼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그분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3,1-2).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이제 주님의 이름을 참된 마음으로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3,5).

 

요엘이 선포한 주님의 날은 아직도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참회, 그리고 이 날이 지닌 현재성은 지금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아모스서 입문

 

 

1. 예언자와 그의 시대적 배경

 

구약성서에는 한 예언자의 언행만을 다루는 책들이 많다. 아모스는 이러한 예언자들 가운데에서 시대적으로 첫째이다. 아모스 이전에도, 특히 사무엘서와 열왕기가 전하는 것처럼, 다른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아모스는 예언자들의 새로운 계통을 연 사람이다. 곧 통상 저술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펼친 활동의 직접적 반향이 그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성서의 책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집이라 할 수 있는 이 책들은, 예수님의 활동과 설교를 전해 주는 복음서들처럼, 대개는 예언자 자신이 아니라 그 제자들의 작품이다. 그러나 아모스서 7, 8, 9장에 나오는 아모스의 다섯 환시 이야기처럼, 특별히 예언자가 자신에 관해서 단수 일인칭으로 말하는 부분들은 그가 직접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아모스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로 들어올리다, 나르다라는 동사를 떠올리게 한다. 아모스아모스야라는 이름의 단축형일 가능성도 있다. 주님께서 날라 주셨다라는 뜻을 지닌 아모스야, 다른 많은 이름에서도 그러하듯이, 주님의 호의적인 개입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이름이다. 아모스는 자신을 목양업자로 소개한다(1,1; 7,14 참조). 그는 목축을 하기에 알맞은 언덕들로 이루어진 고장, 베들레헴 부근 드고아라는 시골에 살던 유다인이다. 그의 메시지를 밝혀 주는 목축과 관련된 많은 표상이 이러한 예언자의 출신을 확인해 준다.

 

아모스는 기원전 8세기의 2/4 분기에 활동한다. 이 시기는 1,1의 머리글이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 2세와(기원전 787-747) 유다 왕국의 우찌야의(기원전 781-740) 유명한 치세가 돋보이는 때이다. 그리고 그는 호세아 예언자보다 약 10년 정도 앞서 활동한다.

 

선택된 민족의 열두 지파 가운데에서 열 지파로 구성된 북왕국은 국제 정치적인 면에서 무엇보다도 인접한 시리아 왕국의 쇠퇴 덕분에 태평 시기를 누린다. 북왕국의 강력한 경쟁국이었던 시리아가 동쪽에서 몰아치는 아시리아 제국의 팽창 정책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여로보암 2세는 예전에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살던 요르단 건너편 지역을 탈환한다(2열왕 14,25). 이러한 승리로 사람들은 새로운 영화를 꿈꾸게 된다(아모 6,13-14 참조). 왕국의 안녕은 이제 완전히 보장된 것으로 여겨진다(6,1-3). 그러나 사실은 치명적인 위협의 기운이 이미 이스라엘 왕국 위에 감돌기 시작한다. 아시리아의 군대가 팔레스티나에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외국과의 교역이 왕국에 번영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불균형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특별히 수도 사마리아에는 사치가 만연하고, 이른바 졸부들의 속물 근성이 확산된다(3,12; 6,4-7). 계약의 백성을 서로 결속시켜 주던 이전의 연대 의식은 변질되어, 약자들에 대한 강자들의 착취가 자행된다. 게다가 그러한 착취는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부정한 판결의 비호까지 받는다(2,6-7; 4,1; 5,7).

 

종교적인 면에서는 온 백성이 자랑스러워하는 화려한 의식 속에 경신례가 거행된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러한 종교 의식에 특별히 준엄한 비판을 가한다(4,4-5; 5,4-5.21-27).

 

아모스의 사명은 특수한 보편적중요성을 지닌다. 유다 왕국의 백성인 아모스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설교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다(1,17,15 참조).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현대에 비유할 때에, 아모스는 한 종파에서 다른 종파로 파견된 설교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북부로 간다는 것은 일치의 표지이다. 곧 이스라엘이 아무리 정치적이나 종교적으로 분리되었다 하더라도, 그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시는 하느님께는 여전히 한 백성인 것이다. 아모스는 북왕국의 성소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베델, 곧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릴 때에 예루살렘 성소와 경쟁하기 위해서 세워진 베델 성소에서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4,4-5의 신탁이 특정 종교 의식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모스는 그것들이 거행되는 연중 대축제들 가운데 하나를 계기로 개입한다. 그의 신탁들은 사마리아에도 해당된다. 사실 어떤 신탁들은 바로 이 수도에서 선포되었을 수도 있다(예컨대 3,9-126,1-7). 여하튼 나중에 등장하는 대예언자들과는 달리 아모스의 활동은 길어야 몇 달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아모스를 공공 질서의 교란자로 임금에게 고발하고 이어서 추방시킨 베델의 사제에 의해서 아모스의 활동이 중단된 것 같다(7,10-17). 이러한 예언 활동 금지에 대항하기 위하여, 아모스(또는 그의 제자단)가 자기의 환시들과 신탁들을 기록하고, 또 기록한 것을 백성 가운데 유포시켰을 수 있다. 아모스의 말씀은, 주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를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청중들 사이에서 전승됨으로써, 아모스의 말씀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 살아 있는 말씀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새로운 상황에서 예언자의 메시지를 현실화하기 위하여 몇몇 신탁이 첨가되었을 것이다. 유다를 거슬러 선포한 신탁(2,4-5), 그리고 저작 시대에 대해서 계속 논란이 이는 마지막 약속(9,11-15)도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2. 아모스서의 언어와 메시지

 

아모스는 시골 출신이기는 하지만,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문맹도 아니고 교양 없는 사람도 아니며, 거기에다 촌스러운 사람도 아니다. 그는 조국과 주변 민족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건들을 숙고한다. 그는 사마리아를 파괴시키게 될(기원전 721년 또는 기원전 722) 북쪽의 세력 곧 아시리아의 존재를 예감한다. 그는 또 하늘과 땅에서 비롯되는 위협에도 민감하였다. 그러한 위협 속에서 주님의 활동을 보았던 것이다. 아모스를 언어의 표현 양식을 무시하는 설교가로 여긴다면, 그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지혜 문학의 섬세한 표현뿐 아니라(3,3-8; 5,19; 6,12) 전례의 폭넓고 장엄한 표현도 잘 사용하고(1,32,16; 4,6-13; 5,4-6.14-15), 서정적 어조의 열정을 드러내기도 하며(4,1-2; 9,1-4), 언어 유희와 풍자도 구사한다(3,12; 5,5; 6,13; 8,1). 그의 언어는 무엇보다도 간결함이 인상적이다. 자기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에, 아모스는 번개처럼 빠르고 지진처럼(그의 활동은 지진에 대한 기억과 연결된다: 1,1) 환상을 깨뜨리는 몇 개의 낱말로 충분하다. 아모스의 이러한 문학적 재능은 큰 힘과 중요성을 지닌 주제에 담겨 있음으로써 더욱 잘 드러나게 된다. 이 주제는 바로 하느님의 호소와 성실성에도 계속해서 참회하지 않는 이스라엘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예언서의 마지막 세 장, 79장의 주요 대상인 다섯 환시를 통하여 아모스에게 나타나신다. 전통을 중시하고 둘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아모스에게, 이 환시들은 설교하라는 하느님의 자극이 된다. 자기 백성을 위하여 중개에 나서서 두 번에 걸쳐 용서를 받아 낸 아모스는, 이제 더 이상 용서가 베풀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7,8), 그리고 야곱 집안이 멸망하는데, 그래도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9,8) 하느님에게서 알게 된다. 이러한 계시가, 한편으로는 그를 신중하게 만들어 침묵하게도 하지만(5,13), 그에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3,8).

 

아모스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위대성, 모든 민족에게 퍼져 나가는 그분의 권능과 정의, 그러면서도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분의 영원한 우선적 사랑을 그 주제로 한다. 그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 특별히 경신례를 규정짓는 율법의 조항들,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의 권리를 밝히는 율법의 조항들을 상기시킨다. 아모스는 장엄하고 강렬한 어조로 부자들과 권력자들, 판관들과 사제들에게, 장차 복음서가 아래와 같이 표현하게 될 내용을 선포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아모스는 또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경신례가 어떠한 것인지도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인들의 경신례는 저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이러한 경신례가 겸손과 정의로써 표현되기를 하느님께서는 바라시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아모스는 다시 신약성서와 이어진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1고린 4,7)

 

아모스의 하느님께서는 불굴의 사랑으로써 정열을 지니신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악한 세상의 힘이 사람들을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도록 결정을 내리실 수 있는 분으로서, 사실 또 몇 번에 걸쳐 그렇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죄악의 무게가, 또 하느님 없이 살거나 당신의 법 밖에서 사는 죄인들의 요구가 당신을 압도하지 못하게도 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리고 영성적으로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이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죄악과 교만이 죄인에게로 모든 벌을 끌어오리라고 선포하기도 하신다. 그러면서도 또한 죄와 오만이 가득 찬 곳에 용서와 은혜가 충만하게 만들기도 하신다. 인간의 기도가 하느님을 감동하게 하고 그분께서 당신의 결정을 번복하시게 할 정도로 큰 효력을 지닐 수 있음을, 아모스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예언자의 이러한 중개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위하여 하신 기도에서 완성된다(요한 17).

 

그렇다고 아모스의 하느님께서 이중의 모습, 곧 벌하시는 하느님의 모습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말은 아니다. 아모스의 하느님은 벌을 내리시면서도 동시에 구원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똑같은 하느님이시며 주님이시다. 그분의 벌 자체가 예외 없는 정의의 엄격하고 차가운 논리를 넘어선다. 그분의 벌은 상처 받거나 배신당한 사랑의 표현, 징벌 너머로 그 마지막 외침 속에 아직도 회개를 호소하는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아모스보다 몇 년 뒤에 이스라엘에서 예언 활동을 하는 호세아는, 하느님의 이 극적인 사랑을 새로운 언어로 표현해 내게 된다.

 

그래서 아모스서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내포한다.

먼저 위협으로 가득 찬 계시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너무 늦게 찾음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죽어 갈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것이다(8,11).

다음으로, 희망을 향한 계시(5,15; 9,8), 다른 예언자들이 이어 받게 되는 계시이다. 곧 모든 것이 끝난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용서를 베푸실 수 있다는 것이다.

 

3. 아모스서의 구분

 

머리글(1,1)과 짧은 서론(1,2), 이스라엘 주변의 일곱 국가와 이스라엘 자체를 질타하는 일련의 신탁들로 이루어진 첫째 부분이 이어진다(1,3 - 2,16). 이 신탁들은 모두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신탁이 더욱 폭넓게 전개된다.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신탁들로 구성되어 있다(36). 일반적으로 짧을뿐더러 일정한 순서 없이 모아진 이 말씀들에서는 특별히, 참회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관한 연설(4,6-13), 베델의 경신례를 지적하는 말씀(4,4-5; 5,4-5.21-27), 사회적 불의와(3,9-11; 4,1-3) 교만과 잘못된 안전 의식을 단죄하는 말씀(3,1-2.12; 5,18-20; 6,1-7.13-14), 임박한 심판의 묘사(3,13-15; 5,1-3.13.16; 6,8-11), 주님께 돌아가라는 호소(5,4-6.14-15) 등이 돋보인다.

 

셋째 부분(7 - 9)에는 다섯 가지 환시에 관한 이야기들이 모아져 있다. 그 가운데에서 앞의 네 환시는 둘씩 짝을 이룬다. 곧 메뚜기 떼(7,1-3)와 불(7,4-6), 그리고 다림줄(7,7-8)과 여름 과일 바구니(8,1-2)이다. 마지막으로 성전의 진동에 관한 다섯째 환시가 나온다(9,1-4). 이 환시들을 중심으로 아모스의 추방 이야기와 같은(7,10-17) 몇몇 신탁이 더해진다(7,9; 8,3-14; 9,7-10). 아모스 예언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관한 신탁으로(9,5-11) 끝나는데, 이 신탁을 아모스가 직접 선포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바디야서(오바드야서) 입문

 

 

오바디야서는 21개의 절로만 이루어진 소책자로서, 예언서 가운데에서 가장 짧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이 예언서를 별다른 가치가 없는 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 예언서는 거대한 영감이 흐르는 매우 아름다운 신탁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문학 유형은 예언자들의 민족들에 관한 신탁, 주님의 날의 도래를 선포하는 신탁들의 유형과 유사하다.

 

오바디야서의 구성을 살펴보면, 머리글(1?)에 이어서 환시가 소개된 다음(1-14), 어떤 편집자의 손에 이루어진 결론적 선언(15-18)이 뒤따른다. 그리고 익명의 서기들이 산문에 가까운 문체로 쓴, 앞부분 전체에 관한 해설이 첨가되어 있다(19-21).

 

이 예언서의 집필 시기와 관련해서는, 하나의 표지가 그 시기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언자는 환시에서, 예루살렘이 함락당할 때에, 에사오의 후손들인 에돔인들이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인들에게 한 행실을 고발한다(10). 그래서 이 예언서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해인 기원전 587년 조금 이후에 쓰여졌을 것이다.

 

오바디야 예언자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이름뿐이다. 주님의 종을 뜻하는 오바디야는 성서적 이름으로서 구약성서에 여러 동명이인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 예언자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그의 메시지이다. 하나밖에 없는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은 유배를 가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때, 오바디야는 환시를 본다. 거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당신께서 민족들의 주님으로서 역사 속에 개입하시어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신다. 이러한 메시지를 듣는 동안에 예언자는 에돔의 죄악을 설명하기 위하여 스스로 입을 연다(10-15). 그 죄악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에 대한 배신과 탐욕이며 현자들의 오만한 주장이다(10-15). 이 모든 것은 낙담한 생존자들의 공동체에 위안을 주는 하나의 신탁을 이룬다.

 

2-6절이 형식은 약간 다르지만 예레 49,7-16에 다시 나오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오바디야서가 예레미야서보다 앞서 저술된 책으로서 기원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에(기원전 587) 관한 시사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그러한 가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예레미야서의 구절과 오바디야서의 구절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지에 대해서도 어떤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두 개가 공통된 출전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요나서 입문

 

 

1. 구성

 

요나서는 히브리 말 성서에서 예언서들 가운데에 들어가 있지만, 언뜻 보기에도 다른 예언서들과 다르게 여겨진다. 일련의 신탁으로 구성된 일반 예언서들과는 달리, 요나서는 서로 연결된 세 장면의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거기에서 예언자는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 두 장면에서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과묵하고 고독한 사람으로 소개된다. 반면에 그의 상대자들, 곧 선원들, 그리고 이어서 니느웨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일뿐더러, 요나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자세를 보인다. 이로써 독자는 바로 그들에게서 자기들의 모습을 보고 또 그들의 모범을 따르도록 자극을 받는다. 드디어 세 번째 장면에서는 요나 혼자 하느님과 대면한다. 이 부분이 바로 요나서의 절정이다. 그것은 곧 요나 예언자의 가장 중요한 기도, 그리고 그의 사명에 관한 하느님의 가장 큰 계시이다. 이러한 전체 맥락에서, 영감을 받은 어떤 저자가 훗날에, 그러나 요나서의 상황에 꼭 맞는 방식으로, 이 책의 종교적, 예언적 가치를 더해 주는 시편을 2장에 삽입한다.

 

2. 목적

 

이러한 요나서는 두 가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첫째, 예언자가 전인적으로 겪는 내적 체험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려고 한다. 예언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것으로 자기의 직무를 시작한다. 동시대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이러한 사명은, 예언자에게 극히 고통스러운 일일뿐더러 그를 다른 이들에게서 소외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예언자가 자기가 전해야 하는 메시지의 중압에 억눌려서 두려운 나머지, 사람들에게 감히 말을 하지 못한다거나(1,1-16) 체념한 설교가로 전락한다 하더라도(3,1-10), 그가 전하는 또는 전해야 하는 말씀은 선원들과 바다, 바람과 큰 물고기, 니느웨인들, 그리고 짐승들과 초목이 보여 주는 것처럼, 의도하였던 효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 예언자는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자기의 사명을 벗어 던져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그가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하느님의 말씀은 동물과 자연을 포함한 온 세상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요나서의 두 번째 가르침은, 주님께서 선포하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의 내용과 그 말씀을 받는 자들의 자질을 통하여 드러난다. 이스라엘에게 자비롭고 너그러운분으로 당신을 계시하신 하느님(탈출 34,6-7), 달리 말하면 선하신 구원자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니느웨인들 곧 이방인들도 위하신다고 선언하신다. 여기에서 니느웨 성읍,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어림수, “사흘(3,3) 주민 십이만 명(4,11), 그러한 하느님의 구원 계시의 보편적 효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채택된 것이다.

 

3. 문학 유형과 집필 시기

 

요나의 이러한 이야기는 그것이 예언자들의 실제 체험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역사적 실존 인물과 연결된다(2열왕 14,25). 그러면서도 더욱 교훈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더러는 한 편의 우화처럼, 갖가지 표상들로 가득한 경탄스러운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여러 요소를 외국의 신화들에서, 그러나 특별히 예레미야서와 같은 성서 전통에서 빌려 온다(3,8과 예레 18,11; 23,22; 25,5, 그리고 3,10과 예레 18,8.10; 26,3.13.19 비교).

 

이러한 모든 요소는 요나서를 유배 이후의 작품으로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언어와 문체는 명백히 고전 히브리 말 시대 이후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메시지는 예컨대 유배에서 돌아올 당시의 제2이사야서(이사 4055)보다 더 폭넓은 보편주의를 반영한다. 이 이야기에서 약간 귀에 거슬리는 해학은 요나서를, 에즈라 시대에 너무나 자신들에게만 갇혀 있던 유다교의 경향을 비판하는 일종의 팸플릿으로 생각하게 한다. 끝으로 이 소책자에서 표상이 풍부한 문학 유형은 유배 이전 역사가들의 문체보다는, 얼마 뒤에 토비트, 에스델, 다니엘서를 저술하게 되는 현인들의 문체를 상기시킨다.

 

4. 복음서와 요나서

 

예수님께서는 요나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그의 이야기를 해석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께 기적을 요구하는 불신자들의 청을 거절하시면서, ‘요나의 징표를 지적하신다(마태 16,4; 루가 11,29-30). 이는 그분 기적의 의미가 무엇보다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실현하는 것임을 뜻한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요나의 징표의 의미는 바로 마태오 복음서 안에서 발전한 내용이 증언하는 것처럼 더욱 잘 이해된다(마태 12,40).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1고린 15,4)는 가장 오래 된 신경의 표현도, 요나의 징표와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당신 복음이 지닌 보편적 효력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신다(마태 12,41-42).

 

요나서의 해학적 요소는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적 예술을 하는 조각가와 화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어 왔다. 오늘날에도 요나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계속 호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특별히 흥미로운 요나라는 사람보다는, 그의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요나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내용, 곧 그분의 보편적이며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는 사랑이다.

 

 

미가서(미카서) 입문

 

 

1. 문학 유형과 언어

 

미가서의 자료들은 예언서 본문에서 이미 완전히 고전이 된 구성 방식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곧 단죄의 말씀과(유동적 단락인 2,12-13을 뺀 1 - 3장과 6,1 - 7,7) 구원의 약속이(4 - 5; 7,8-20) 규칙적으로 번갈아 등장한다. 이러한 배열은 신탁들이 집성된 뒤에 편집자들이 작업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이로써 그 안에 들어 있는 요소들의 친저성 문제가 제기된다. 1 - 3장과 6,1 - 7,6은 거의 모든 학자가 기원전 8세기에 살았던 모레셋 사람 미가가 선포한 말씀으로 판단한다. 다만 2,12-13의 시기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536년 이후, 유배에서 돌아온 때로 잡는다. 7,8-20의 전례도 마찬가지이다. 4장과 5장의 저술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활발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두 장을 유배 이후의 신탁들이 한데 모아진 것으로 본다. 다른 이들은 미가의 말씀을 기초로 후대의 사람들이 연이어서 자기들의 시대 상황에 따라 재작업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 문제는 아직도 결정적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미가 예언서는 예언 전통에서 물려받은 고전적 문학 유형들을 담고 있다. 곧 경고, 질타, 심판의 신탁, 논고 또는 계약 위반에 관한 소송, 구원의 약속, 전례 의식의 단편 등이다. 이러한 유형들이 미가서에서 단순히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다. 미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부분들을 가려 내다 보면, 미가 자신이 그것들에 자기의 개인적 표지를 남겨 두었음이 분명해진다. 예컨대 여러 번에 걸쳐 단죄가 탄식으로 바뀐다(1,2-167,1-7). 이는 예언자가 사명을 수행하면서 필요할 때에는 억제해야 하는데도, 미가는 그렇지 못한 그의 풍부한 감정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또 책임 있는 관리들과의 대립이 미가에게 소송의 문학 유형과(1,2-7; 6,1-8) 논쟁의 문학 유형을(2,6-11) 즐겨 사용하도록 하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때때로 대화 형식의 문장도 발견된다. 이 밖에도 가끔 생략형으로 여겨질 정도로 간결한 그의 문체는, 그 신랄함과 노골성으로 아모스의 문체와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2,6; 3,5). 다른 한편, 거의 체계적인 언어 유희 방식의 사용은 때때로 본문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한 이유로 언어 유희들이 가끔 변화된 상태로 전승되기도 하였다. 또한 적지 않은 구절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불분명한 때도 있다.

 

2. 예언자와 그의 고향

 

미가라는 이름은 누가 주님과 같으랴?라는(7,18 참조) 질문의 단축형이다. 그리고 전례 중에 백성이 지르는 탄성을 상기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시편 35,10; 89,7-9; 113,5; 이사 44,6 이하). 이 이름은 성서에서 자주 나타나지만, 저술 예언자인 이 미가와 1열왕 22(= 2역대 18)에 나오는 다른 예언자 미가와는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머리글(1,1)에 나오는 미가의 고향 모레셋이라는 작은 마을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직선 거리로 남서쪽 약 40킬로미터 지점에 있던 곳으로 생각한다. 이 곳은 팔레스티나 중심부의 남북으로 뻗은 산악 지방에서 지중해 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평원 지대이다. 유다 땅 모레셋의 이러한 위치는 이 책이 시사하는 시대와 역사적 사건들을 생각할 때에 나름대로 중요성을 지닌다.

 

3. 메시지

 

미가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유다의 윤리적, 종교적 상황을 그 대상으로 한다. 예루살렘 주민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자기들의 도성에 불가침성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안전 의식이라고 미가는 고발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에 계속해서 성실하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는 권력가들이 놀랄 정도로 쉽게 매수되고, 예언자들과 재판관들은 자기들의 책임 아래 맡겨진 진실과 공정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더 생각한다. 가진 자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의 틈은 더욱 커지고, 사회 상황은 통탄할 지경이 되었다. 경신례는 호화롭게 거행되지만, 마음의 회개는 전혀 가져오지 못한다. 이러한 악이 너무나 명백하여,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죄의 화신으로 불리게 된다(1,5). 그리하여 하느님의 심판에 이어지는 징벌이 그들의 반역의 정도에 따라 내려진다. 이러한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미가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불행만을 선포한 예언자로 기억된다(예레 26,18). 그러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미가가 예고하는 재앙은, 하느님의 어떤 맹목적이고 냉혹한 분노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불의를 참지 못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이다. 미가 예언자는 계약의 이상을 말한다. 그것은 6,8에 훌륭히 요약되어 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받은 선택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미가서가 이러한 어두운 전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징벌은 회심을 촉구하는 호소로도 바뀔 수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에브라다의 보잘것없는 씨족에게서 일어날 새로운 부흥을 준비하신다(5,1-5). 바로 거기에서 다윗의 후손 메시아 임금이 태어나리라는 것이다. 흩어진 지파들의 재결합은, 땅 끝까지 퍼져 나갈 위대한 평화의 시작을 알린다. 예루살렘은 온 세상의 중심지가 되어, 민족들이 주님을 만나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달려올 것이다(미가 4,1-5).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에서 소수의 남은 자들은 주님께 회개한 이 민족들이 받는 복의 원천이 된다. 그리고 반항하는 민족들에게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의 도구가 된다. 인간의 잘못된 안전 의식, 허위에 찬 경신례, 우상 숭배는 모조리 없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고, 하느님의 주도 아래 주어지는 구원만 기다릴 것이다.

 

머리글에 따르면, 미가는 유다 임금 요담과 아하즈와 히즈키야 시대, 곧 기원전 750년에서 대략 기원전 697년 사이에 임무를 수행한다.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 인물이다. 그러나 어떠한 본문도 그가 실제로 요담의 치세 때에 등장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 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 다음의 임금 아하즈 통치 말기를 생각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머리글이 이 예언자의 전체 활동 시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특별히 신랄한 내용을 담은 몇몇 구절은, 하느님께 불충한 므나쎄 임금과 그의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가설을 따를 경우, 미가의 활동 시기는 기원전 725년에서 기원전 680년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는 중요한 두 가지 사건으로 눈에 띤다. 우선 왕조의 위기가 줄곧 이어지다가 결국 기원전 722년에 발생한 사마리아의 멸망이다. 미가는 이 재난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1,6-7에서 이 사실을 선포한다. 또 다른 커다란 역사적 사건은 기원전 701년에 일어난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평원 지대 침공이다. 이 침략으로 미가 예언자의 고향은 아시리아 군대의 행동 반경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미가는 불행이 예루살렘으로도 다가오는 것을 본다. 그리고 멸망은 피할 수 없다고 여긴다(1,8-163,12).

 

이렇게 미가는 조국에 닥친 격랑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러나 이사야와 달리 미가는 사실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예컨대 책임자들이 전개시킨 외교적 행동에 어떠한 심판의 말도 가하지 않는다. 반면, 다가오는 사건을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악의 불가피한 결과로 본다. 그 죄악은 특별히 사회적 불의, 그리고 이방 종교 의식과 타협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악들과 싸워 나가는 미가는 외톨이처럼 보인다. 그는 백성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도 그들 앞에서 혼자이다. 사제들, 판관들, 제후들과 같은 권력자들 앞에서도 혼자이며(3장 참조), 행복하고 편안한 미래를 예고하는 분별 없는 예언자들 앞에서도 혼자이다(2,6-11). 그러나 미가는 자기에게 임무를 완수할 힘을 주시는 주님의 영이 인도해 주신다는 의식 아래, 그들과 용감히 맞선다(미가 3,8).

 

 

나훔서 입문

 

 

1. '위로자' 나훔

 

열두 소예언자 가운데에서 일곱 번째로 나오는 "나훔"'위로받은 이'를 뜻한다. 위로를 받았기에 다른 이들도 위로할 수 있는(2고린 1,4), '위로자' 나훔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구약성서에 없다. 어근과 뜻은 같으면서 그 변형꼴인 다른 이름이 하나 있기는 하다. 곧 므나헴이다(2열왕 15; 사도 13,1. 그리고 사도 4,36 참조). 나훔과 어근이 같은 유명한 이름으로는 또 '주님께서 위로하신다'를 뜻하는 느헤미야가 있다(느헤미야서).

 

나훔은 어두운 시대에 희망의 힘으로 지탱해 나아가게 하는 위로와 위안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다 준 예언자이다(로마 15,4-5 참조). 그를 움직일뿐더러, 그 자신도 신앙의 커다란 힘으로 확언하는 이 희망은, 사자처럼 무서우면서도(2,12-14) 동시에 큰 유혹의 힘을 지닌(3,4) 적들이 지금은 한창 융성한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기필코 승리하시리라는 것이다(1,12; 3,15-17).

 

2. 구성

 

나훔서는 이 근본 주제를 연이어지는 세 가지 형식으로 전개시킨다.

 

(1) 먼저 시편이 나온다(1,2-8). 다른 예언서들의 서론과 일부는 같은 방식으로(아모 1,2; 미가 1,2-4; 스바 1,2-3), 그러나 그것들보다 훨씬 강력한 방법으로, 이 시편은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분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께서 온 세상의 지고의 심판자로서 지니시는 두려운 면이 부각되지만, 그분의 다른 모습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1,3.7 참조).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나중에 더욱 생생한 빛 속에 드러나게 된다(1,3 각주 참조). 이 단락은 전체적으로 매우 일반적이며 초시간적인 바탕 위에 자리잡고 있다. 구원 역사에 관한 시사들은 은근하게 이루어질 따름이다(1,3-4 참조). 그러면서 결국 이 책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1,8).

 

(2) 두 번째 부분(1,9 - 2,3)에서 이 역사적 맥락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 제2부에 나오는 신탁들의 어떤 요소들은 이해하기에 까다로운 면들을 지니고 있다.

 

(3) 세 번째 부분은 니느웨 멸망의 경축이다(2,4 - 3,19). 더 정확하게는 니느웨의 멸망을 기원하는 것, 또는 그 위력의 절정에 다다른 니느웨의 파멸을 불러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저마다 단일성을 지니면서도 니느웨 성읍과 그 파멸의 여러 가지 면을 부각시키는, 특별히 시사적인 일련의 장면들이 이어진다. 이 성읍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1,8 각주 참조). 마찬가지로 이 도성과 그 임금에게 내린 벌도 보편적 교훈을 이룬다. 곧 하느님께서는 니느웨를 본보기로 만드시는 것이다(3,6). 주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은, 그것도 비상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은, 결국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해서(3,19),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1,7; 2,1.3).

 

나훔서 전체와 그 세 부분에 대해서는 이러한 개요적인 설명만 하고, 이 책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논거들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3. 나훔과 니느웨의 멸망

 

나훔서를 기원전 612년 가을, 주님께서 당신의 적들에게서 거두시는 승리를 특별히 돋보이게 하는 니느웨 멸망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신년 축제 때에 거행된 전례의 소책자로 제시하려고 애쓰는 가설이 있다. 물론 특히 나훔의 예언이 성취된 다음, 감사 전례 중에 이루어지는 재해독을 용이하게 하는 서두의 시편 덕분에 이 예언서가 지니는 어떤 경신례적 경향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예언자가 직접하였을 신탁들의 선포 시기, 또 이 소책자의 저술 시기까지도, 기원전 612년의 니느웨 멸망 이전, 더 나아가서 3장에서 시사되는 기원전 663년의 이집트 테에베의 약탈 이전으로 잡는 데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더 상세한 시점을 찾아 나아가는 과정에서, 1,13에 따르면 유다가 아직도 아시리아 제국의 폭정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것은 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이 때는 곧 아시리아 임금 아수르바니팔이 죽기 전이다(1,13 각주 참조). 그러나 다른 한편, 2장과 3장에 나오는 인상적인 장면들의 생생함과 그 현실감 때문에, 그것들이 바빌론인들과 메대인들의(2,4) 아시리아 침공(3,12-13), 곧 니느웨 포위를(2,2.4-5; 3,2-3.14) 최근의 사건으로 상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묻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추는, 환상적 서술에서 그것이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정확한 연대를 이끌어 내려는 것으로, 오히려 이 예언서 제2부가 더욱 확실하게 시사하는 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시도가 예언자의 의도, 그리고 예언자가 그와 같은 상상력을 동원하면서 상기시키려고 하는 내용을 잘못 이해할 위험성은 없는지 반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훔의 관심사와 역할은 단순히 주어진 정치적 상황을 피상적으로 분석하여 어떤 직접적 결론을 이끌어 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동족 앞에서 신앙의 전망을 펼쳐 보이고, 자기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효과적 말씀을 선포하면서 이러한 전망을 역사 속에 끌어들이는 데에 이바지하는 일이다.

 

그래서 1971년에 출판된 어떤 나훔 주석서에서는 신탁의 선포와 나훔서의 집필 시기를, 기원전 612년 가까이로 잡는 것이 아니라, 기원전 663년의 대사건 직후 몇 개월로 보려고 한다. 각주에서도 부분적으로 지적되겠지만, 이 책이 제시하는 자료를 전체적으로 볼 때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4. 예언자 나훔

 

나훔서의 제목이라고도 할 수 있는 머리글의 "환시"라는 말은(1,1) 매우 시사적이다. 나훔은 자기가 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게 해 주는 예언자이다. 그런데 그의 환시에서 주의를 가장 많이 끄는 것은, 그를 움직이는 열정, 그의 믿음의 열성이다. 현실은 비록 반대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결국 하늘에서 주어지는 불굴의 확신 속에, 주님께서 승리하시리라고, 아니 이미 승리하셨다고 힘차게 확언한다.

 

예레미야와 같은 대예언자들과 나훔 사이에는 상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그러한 피상적 상반 관계를 넘어서서, 바로 나훔 예언자에게서도 살아 계신 주 하느님, 역사와 모든 인간의 주님, 바로 그러한 분과 이루어진 특별한 통교에서 비롯되는 똑같은 역동성이 드러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1,13에 나오는 나훔의 말과 예레 28,11에 나오는 하나니야의 말에는 비슷한 점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다른 것들을 자세히 비교해 보기도 전에 곧바로, 나훔을 예레미야의 적수였던 거짓 예언자 하나니야와 엇비슷한 부류로 분류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책장을 조금 더 넘기다 보면, 예레미야 자신도 비슷한 용어들을 써 가면서, 징벌 뒤의 해방을 예언하였음을 알 수 있다(예레 30,8). 이는 예레미야 이전의 이사야도 마찬가지이다(예컨대 10,5-19.24-27). 나훔서는 세 장, 마흔일곱 절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소책자에서 예레미야서와 같은 대작에서 볼 수 있는, 예언자들의 설교의 거의 모든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경탄할 일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그 열정 때문에 여러 가지 모습을 취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1,2 각주 참조).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 보내시는 사자(使者)들의 목소리도 그 어조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동일한 전통의 원천에 속한다는 연대 의식 속에, 예언자들은 조심스럽게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서로 확장시키고 보완할 줄 안다. 그래서 예컨대 요나서는 나훔의 지평을 이어받아 그것을 더 넓혀 간다. 그리고 간혹 나훔의 니느웨 멸망의 서술에 들어 있는 어떤 요소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요엘은(요엘 2,4-9. 그리고 나훔 2,4-5.11; 3,2-3 참조), 나훔서의 내용을 확장시키는 가운데 더욱 보편적 효력을 지닌 사건을 선포하기 위하여 "주님의 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비교는 다른 예언서들과도 많이 할 수 있다. 금세기 중반부에 사해 부근의 쿰란에서 '나훔 주해서'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약 100년경에 집필된 이 주해서는, 신앙인들이 나훔서에서 역사의 모든 순간을 비추는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름대로 증언해 준다.

 

 

하바꾹서(하바쿡서) 입문

 

 

1. 하바꾹서

 

(1) 본문

 

모두 세 장으로 이루어진 하바꾹서의 히브리 말 본문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많이 안고 있다. 그래서 고대 번역본들은 가끔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늘 흥미로운 독해를 제시한다. 유다 광야의 여러 동굴에서 발견된 쿰란 공동체의 수사본들(일명, 사해수사본) 가운데에는, 하바 1 - 2장의 본문이 거의 다 들어 있으면서 기존의 본문을 확인해 주고 때로는 보충해 주는 하바꾹 주해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 주해서는 기원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 주해서가 단연코 하바꾹서 히브리 말 원문의 가장 오래된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하바꾹서를 봉독하는 것은 여러 목소리를 지닌 본문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예언자 자신의 목소리가 서로 다른 여러 방식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목소리는 여러 고대 번역본에 의해서 이루어진 변형들, 그리고 이 자그마한 예언서가 불러일으킨 다른 반향들 위에서 들려 오기도 한다.

 

(2) 구조

 

머리글(1,1)에 이어서, 예언자가 자기 하느님께 올리는 탄원이 두 번에 걸쳐 나온다(1,2-41,12-17). 이 탄원에 따라 하느님의 응답도 두 번 주어진다. 첫 번째 응답(1,5-11)은 정복군, 곧 갈대아 군대의 거침없는 행군에 관한 환시이다. 역시 환시라는 제목을 단(2,2) 두 번째 대답(2,2-19),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라는 명령에서 엿볼 수 있듯이(2,2), 이 예언서의 핵심이 되는 신탁으로(2,2-4) 시작된다. 그리고 나서 불행하여라라는 말과 함께 어떤 적에게 쏟아 붓는 다섯 연()불행 선언이 이어진다(2,6-19). 두 개의 연결문도 있는데, 첫째 연결문은 예언자를 파수꾼으로 소개하고(2,1), 둘째 연결문은 이제 이 예언자가 다섯 번에 걸쳐 질책하게 되는 적을 소개한다(2,5-6?). 그리고 또 다른 연결절(2,20)3장의 시편을 예고하는데, 이 시편은 하느님의 개입을 서술하고 그분에 대한 찬미로 끝을 맺는다.

 

2. 예언의 배경

 

(1) 역사

 

갈대아인들에 대한 언급은(1,6) 하바꾹의 예언을, 이 신바빌론인들이 아시리아 제국을 와해시키고 근동 지배에 성공하는 기원전 7세기 말로 자리잡게 한다. 하바꾹 예언자는 기원전 660년에서 기원전 610년까지 이어진 갈대아 군대의 원정, 유다의 점령, 그리고 예루살렘의 포위와 유배 등(2열왕 2325), 유다 왕국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 이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하고 해설한다.

 

그러나 하바꾹 예언서의 편집과 저작을 둘러싼 상세한 배경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의 견해가 갈라진다.

 

* 이 책의 각 부분은 갈대아 군대가 수행한 정복의 각 단계에 해당되고, 그럼으로써 이 책의 저작도 그것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그러한 순차적 저작은 크든 작든 중요성을 지닌다.

 

* 1 - 2장의 대화 형식과 3장의 찬미가 형식은, 이 시가들이 지닌 전례적 성격을 가리키는 표지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경신례 거행의 핵심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가들이 사후(事後)에 전례 형식을 취하게 된 예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예언으로 제시된 본래의 전례적 창작인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문제가 어떻게 풀리든, 하바꾹서의 이러한 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독자는, 본문의 배후에서 알아볼 수 있는 사건들의 그 순간, 그리고 그 사건들에 이어지는 불안한 시기에 12장의 대화와 3장의 시편을 이끌어 간 집단적 격정의 감정을 함께 느끼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2) 예언자

 

하바꾹 예언자에 대한 연구도 별다른 성과가 없는 형편이다. “하바꾹이라는 그의 이름은 가끔 정원의 식물 이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히브리 말 성서의 다른 경전들은 물론, 하바꾹서 자체도 그의 생애나 인물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하나도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하바꾹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이 예언서가 널리 퍼진 다음에는, 하바꾹이 이를테면 전설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에 관한 제2경전의 장면에서는(다니 14,33-39) 특정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3) 거만한 사람(2,5)

 

하바꾹의 설교는 이중의 상황을 그 대상으로 하였을 수 있다. 그가 갈대아인들이라는 외적, 특히 무자비하고 탐욕스럽게 다른 나라들을 정복해 나아가는 그들의 군주를 주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동시에 2장에 들어 있는 질타에서는 또 다른 인물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이 인물은 바로 유다의 임금인데, 틀림없이 여호야킴일 것이다. 그가 바로 자기의 왕국 내부에서, 적어도 예언자의 시각에서는, 갈대아인들이나 마찬가지로 불의의 커다란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2,6-12를 예레 22,13-19와 비교할 때에 그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3. 메시지와 그 해석

 

국내적, 국제적 상황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바탕까지 문제시되자,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극적인 사건들이 전개된다. 하바꾹의 예언은, 그러한 가운데에서 당혹감에 빠졌으면서도, 이제 역사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시는 것으로 보이시는 하느님을 거슬러 바로 그 하느님께 탄원하는 충실한 이들의 증언이 된다. 이 탄원에 응답이 주어지는데, 거기에 핵심 낱말로서 성실함이 나온다(2,4). 신앙인의 삶에 근거가 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 성실함, 비록 겉모습은 그렇지 않게 보여도 분명히 실재하는 하느님의 성실함에 관한 환시가 주어진다. 본문의 각주들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3장의 시편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를테면 당신께서 그러하시다는 것을 이미 과거에 입증하셨음을 상기시키는 표현들로 짜여져 있다. 이제 바로 그 하느님께서 오신다(3,3). 여기에서부터 확고한 결론이 나온다. 주님께서는 나의 주님, 바로 그분께서 나의 힘이시다.’라는 것이다.

 

역사가 흐르면서, 사람들은 어려운 시대에 바로 이러한 신앙의 시각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하바꾹서의 도움을 받는다. 쿰란 공동체는 이 예언서를 자기들이 겪은 혼란스러운 사건들을 비추어 주는 결정적 조명으로 해석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 대한 신도들의 신분을 정의할 때, 이 예언서에서 도움을 받는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하바 2,4를 인용하면서(로마 1,17; 갈라 3,11; 히브 10,38), 이 예언서의 핵심 용어인 성실함의 의미를 확장시켜 믿음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한다. 이러한 강조는 하바꾹서의 이 절을 인용하는 교부들의 저술 대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스바니야서 입문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가? 그분께서는 역사를 이끄시는가? 재앙의 시기에 회의론자들이 스바니야 예언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1,12).

 

1. 역사적 배경

 

스바니야서의 배경은, 다른 예언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언자에게 역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는 매우 극적인 시대이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아시리아 제국이 다른 나라들을 파멸시키고 잔학 행위를 저지르면서 팽창해 나아가던 때이다. 유프라테스 강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아람족 국가들의 붕괴에 이은 기원전 732년의 다마스쿠스 함락, 기원전 722년의 사마리아 함락과 백성의 유배, 기원전 701년의 띠로 함락, 띠로와 함께 함락된 시돈의 완전한 파괴(기원전 671), 기원전 663년의 이집트 테에베의 약탈, 그리고 다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홍수가 닥친 것보다도 더 험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호언하던 기원전 689년의 바빌론 약탈 등이 일어난 시기이다.

 

그런데 몇십년이 지난 뒤에는 상황이 뒤바뀐다. 기원전 612년에 메대인들이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멸망시킨다. 이어서 바빌론의 신갈대아인들이 서쪽으로 밀려든다. 그리하여 세 차례나 포위 공격을 당한 예루살렘은 결국 기원전 587년에 멸망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치고 받는 가운데 일종의 균형을 유지하는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서, 3의 물결이 또 들이닥친다. 28년 동안(기원전 639-611) 근동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스키타이족의 침략이다. 흑해 북부 지방에서 내려온 그들은 메대인들을 밀어 내고 소아시아를 빼앗은 다음,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집트를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집트 임금 프사메티쿠스의(기원전 664-620) 간청과 선물을 받고서야 그들은 되돌아 간다. 그러나 아시아와 이집트 변방까지 이르는 지역의 주인이 된 스키타이인들은, 자기들이 점령하거나 통과하는 지방을 약탈하고 철저히 파괴시킨 다음, 피정복민들을 제멋대로 자기들의 지배 아래 묶어 놓는다. 이러한 스키타이족의 통치는 기원전 611년경, 불레셋 땅에 있는 아스클론 약탈과 아스돗의 함락으로 종말을 고한다.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 2세가 불레셋의 다른 도시 국가인 가자를 빼앗고 므기또에서 시리아인들을 쳐부순 다음, 메소포타미아의 하란까지 진군한 것도 바로 이 때이다(기원전 609/608).

 

이 기간 내내, 특히 므나쎄의 오랜 통치를 특징짓는 아시리아 시대에, 예루살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근동의 북서와 남서를 잇는 이른바 팔레스티나 회랑옆에 붙어 있는 예루살렘도, 국제 정치의 음모,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 자리잡은 군소 국가들의 동맹 놀이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다가 유다 임금 아몬이, 아시리아의 멍에를 벗어 던지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이는 일단의 관리들 손에 살해되기도 한다. 이러한 친이집트 동향에 곧바로 나라 백성이 반혁명을 일으킨다. 그 덕분에 여덟 살밖에 안 된 요시야가 왕좌에 오르게 된다(2열왕 21,24;22,1).

 

이렇게 요시야 임금이 아직 어릴 때에 이루어진 아시리아 지배에 대한 저항의 선상에서, 스바니야의 활동, 그리고 임금의 측근 고관들과 제후들, 또 외국 복장이나 종교 의식을 따르면서 외국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가하는 그의 정치적, 종교적 비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스바니야서의 구성

 

예레미야서나 에제키엘서 같은 곳에서 예언은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3부 구조로 정리되어 있다. 곧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민족들에 대한 심판, 복구의 약속이다. 스바니야서 역시 이 구조에 따라서 세 부분으로 정리되는데, 이는 이 책의 편집자들의 작업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배열되어 있다.

 

. 편집자들에 의한 머리글(1,1)

. 유다에 대한 경고와 위협 신탁(1,2-13)

. 주님의 날(1,14-18)

. 남은 자들, 겸손한 이들에 대한 권고(2,1-3)

. 유다의 적인 민족들(불레셋, 모압, 암몬, 에티오피아,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과 위협(2,4-15)

. 배척되고 이방 민족들과 같아지는 예루살렘(3,1-8)

. 복구의 약속(3,9-20)

 

3. 스바니야서의 주제

 

묵시 문학적인 하늘과 주님의 겸손한 이들의 , 이것이 스바니야의 두 지평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핵심적 실재가 있다. 곧 당신 백성 한가운데에계시는 하느님이시다(3,5.12.15). 그분 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억눌린 이들을 구원하신다.

 

(1) 주님의 날

 

이것이 스바니야의 예언을 유명하게 만든 주제이다. 이 예언자의 사고에는 두 극을 지닌 중력의 축이 있다. 한 쪽의 극은 이스라엘이고 다른 쪽의 극은 민족들이다. 이 두 적대적 힘이 충돌할 때에 남은 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날의 주제는 당시의 거대한 정치적 혼란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의해서 결정된다. 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보복하시는 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날, 이집트 탈출 때처럼 그들을 구원하시는 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민족들에게 당신의 무서운 이적들을 다시 행하시는 날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스바니야의 지평은 역사의 좁은 틀을 넘어선다. 그가 예언하는 것은 우주적 대이변이다. 그 어떠한 주저도, 어떠한 감정의 여운도 드러내는 일 없이, 예언자는 이 진노의 날(라틴 말로, dies irae)과 파멸의 날을 선포한다. 겸손한 이들은 계속하여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역사는 하느님께서 친히 주재하시는 피의 축제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미 아모스, 나훔, 요엘도 이야기한 주님의 날은 총체적 전복(顚覆)의 날이 될 것이다. 스바니야는 공포와 파멸 속에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생명체까지 휩쓸어 가는 일종의 창조의 붕괴가 될 심판을, 그 누구보다도 폭넓게 서술한다(1,2-3.15).

 

그러면서도 스바니야 예언서에서는 주님의 날이 근본적으로 세상과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변형과 개조, 죄악의 시대의 종말로 나타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남은 자들이 부르는 기쁨의 노래로 흘러들어간다(3).

 

(2) 예루살렘과 민족들을 질타하는 신탁

 

예루살렘 성읍이 불충하고 완고하기 때문에, 그 우두머리들과 판관들, 예언자들과 사제들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가 막힌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심판 아래 놓이고 불행에 빠지리라고 예고한다. 주님께서는 심문하고 단죄하고 벌하실 것이다. 그리고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우상 숭배자들, 관리들, 상인들, 불신자들도 고통을 당할 것이다. 성전에서 시장에 이르기까지 이 성읍의 모든 것이 이러한 하느님의 행동 반경 안에 들어갈 것이다.

 

이방 민족들 역시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된다. 다른 예언자들처럼 스바니야도 사방으로 몸을 돌려, 불레셋(서쪽), 모압과 암몬(동쪽), 에티오피아(남쪽), 아시리아(북쪽)에 파멸과 멸망을 예고한다.

 

이 예언서는 시대의 징표들을 읽는 예언자적 독해를 제시한다. 이 독해가 바로 묵시 문학의 탄생을 준비하는 것이다.

 

(3) 겸손한 이들

 

예언자는 한 편으로는 청천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지만, 다른 한 편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작은 이들에게는 애정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이 겸손한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진노가 일으키는 대이변을 피할 희망이 있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다.

 

(4) 주님의 거룩한 산

 

하느님께서는 자격을 갖춘 이스라엘 곧 남은 자들을 모으시어, 민족들 앞에서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흥겹고 자유롭고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데, 그분 친히 임금으로 이 예루살렘에 거처하실 것이다. 이처럼 스바니야서는 구약성서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이루면서도, 몇 쪽만 더 넘기면, 희망과 기쁨의 말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춤판을 전망하면서 끝을 맺음을 볼 수 있다.

 

4. 집필 시기와 친저성

 

스위스의 유명한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예언자들은 전기(傳記)가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스바니야의 경우, 자기 시대의 역사를 시사하는 그의 표현은 매우 분명하고, 아울러서 정치 세계에서 오랜 경험을 쌓았음을 전제한다. 이로써 그의 작품 시기를 대략으로나마 추정할 수 있다. 우선 요시야 임금이 아직 어릴 때에 그가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므로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스바니야가 기원전 630년쯤에 활동을 개시하였다면, 그가 기원전 612년의 니느웨 몰락 소식을 직접 듣고, 게다가 예루살렘에 대한 두 번의 포위(기원전 597년과 기원전 587/586), 그리고 이 도성의 함락까지 직접 겪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은, 불행의 예언을 그렇게 많이 한 스바니야가 왜 유배자들에게 귀향과 복구를 약속하는 신탁들을 선포하였는지를 설명해 준다.

 

스바니야 예언자의 실존 여부나 이 예언서의 경전성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의문이 제기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나중에 손질한 흔적들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일부 절이나 구절이 그의 친저가 아니라는 비판을 그냥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신중히 고찰해 보아야 한다. 친저성이 불분명하다는 본문들 가운데에서는, 앞뒤로 이어지는 애가 운율(히브리 말로는, 키나)이 중단되는 2,8-11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깨서(하까이서) 입문

 

 

하깨서는 단 두 장, 서른여덟 절로 되어 있다. 그러나 구원 역사의 흐름에서 이 소책자는 짧지만 큰 역할을 수행한다.

 

기원전 537년에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 공동체가 성전 재건축을 시도하지만(에즈 3,7-12),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사마리아 주민의 적대 행위로 작업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기원전 522년 캄비세스 황제가 죽은 뒤, 격렬한 내부 혼란이 페르시아 제국을 뒤흔든다. 캄비세스에 이어 왕좌에 오른 다리우스의 집권 초기에 일어난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예루살렘에도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하깨,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즈가리야 예언자는 그것을 공동체를 일깨우는 기회로 삼는다.

 

정확히 기원전 5208월에서 12월 사이에 선포된 하깨의 메시지는, 동시대인들에게 시대의 징표를 해석해 주려고 한다. 빈곤과 흉작은 그들의 영성적 혼수 상태에 대한 벌로서, 이제 신앙의 열성을 되찾고 주님께 합당한 집을 지어 드리는 작업을 재개하면, 많은 복을 받고 구원의 시기가 결정적으로 시작되리라는 것이다.

 

민족들의 동요는 이미 주님의 날을 가리키는 전조이다(2,21-22). 구원은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다윗의 혈통을 이어 받은 즈루빠벨이 잠깐이나마 이 메시아적 희망을 구현할 이로 여겨진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이전의 것보다 더 영화로운 성전, 그리고 임금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 이후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의 백성을 힘차게 지탱해 준다. 그리고 이 이중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즈가리야서(즈카르야서) 입문

 

 

즈가리야 예언서도 이사야서처럼 한 예언자의 작품으로 간주할 수 없다. 즈가 1 - 8장이 9 - 14장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반부와 명백히 구분되는 전반부만 확실히 통일된 하나의 책으로서,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던 때의 하깨와 동시대인인 즈가리야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9 - 14장은 통상 제2즈가리야라 불리는 훨씬 후대의 저자에게서 비롯된다. 이러한 두 작품의 특성 때문에 이 둘을 따로 살펴보기로 한다.

 

I. 즈가리야서 1 - 8

 

1. 즈가리야 예언자

 

이 책의 1 - 8장에 담겨서 우리에게까지 그 메시지가 전해진 즈가리야 예언자의 활동은, 하깨 예언자의 활동에 거의 곧바로 이어진다. 이 즈가리야의 첫 번째 등장은 기원전 52010-11월에(1,1), 곧 하깨가 마지막 신탁을 선포하기 한 달 전에 이루어진다(하깨 2,10.20). 그리고 즈가리야 예언자의 활동은 적어도 기원전 51811월까지(7,1), 곧 새 성전이 기원전 515년에 봉헌되기 삼년 전까지 이어진다.

 

하깨는 종교적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한다(하깨 1,14). 즈가리야는 동포들의 성실성에 호소함으로써,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약속을 선포함으로써 하깨가 시작한 운동을 강화한다. 다리우스 황제의 제국을 뒤흔든 정치적 소요가 가져온 상황을 기회로(하깨 예언서 입문 참조), 유배자들의 여러 집단이 희망을 가득히 품고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2,10-13; 6,10).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통합상의 어려움으로, 그들은 곧바로 용기를 잃게 된다(5,3-4; 8,16-17). 또 근동 전역이 점점 평온해지면서(1,11) 신속한 변화를 바라던 그들의 희망도 무너지고 만다. 그리하여 실망만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는다.

 

즈가리야 예언자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거의 없다. 즈가리야라는 인물은 그의 작품 뒤에 숨겨져 있다. 이또의 손자로(1,1; 1,7), 또는 바로 이또의 아들로(에즈 5,1; 6,14) 소개되는 그는, 기원전 500년경까지도 이또 사제 집안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느헤 12,16). 그의 사제로서의 특성이 성전의 역할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를 설명해 준다. 또한 즈가리야가 기념 금식의 존폐 여부에 관한 자문을 받아 하느님의 대답을 전하는 것이나(7,1-3; 8,18-19), 제의적 자문에 응하는 일 역시 사제의 임무에 속한다. 끝으로 거룩한 땅의 정결과 성성에 관한 그의 염려도 그의 사제적 사고 방식에 잘 상응한다(2,16; 5,1-4; 5,5-11).

 

이 사제는 결연히 옛 예언자들의 노선을 따른다. 그들처럼 즈가리야도 회개를 호소하는데(1,3-6; 7,4-14; 8,16-17), 때로는 그들의 표현을 빌려 오기도 한다. 환시의 경우에도 그는 이전의 예언자들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곧 환시의 전반적인 내용은 아모 7, 측량줄을 쥔 천사는 에제 40,3-4,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에제 2,9-10과 연관된다. 즈가리야 예언서의 전통은 그가 전한 메시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그의 예언적 자질을 여러 차례에 걸쳐 역설한다(2,13.15; 4,9; 6,15). 전해 내려오는 어떤 이야기는 이러한 즈가리야의 매력에 이끌려 결국 그가 순교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마태 23,35). 그러나 이는 요아스 임금에게 살해된, 여호야다의 아들 즈가리야 사제와 혼동한 데에서 비롯된다(2역대 24,20-22).

 

2. 즈가리야 예언서

 

이 예언서는 일인칭으로 작성된 일종의 일지로서, 공동체의 완전한 복구를 미리 서술하는 여덟 개의 환시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후(事後)에 완성된 이 이야기는 예언자 자신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1,7에서, 기원전 5192월 중순이라는 정확한 날짜와 함께 도입되는 이 환시 이야기는, 그 때가 예언자의 설교에서 중요한 시기이고, 이 예언서 전체가 발전하게 되는 중심임을 드러낸다.

 

이 환시의 소책자에는 중간중간에 신탁들이 삽입되는데, 그것들은 환시를 당시의 사건과 연결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처럼 2,10-17은 유배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읍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하는데, 이 성읍의 새로운 상황이 둘째와 셋째 환시에서 분명하게 설명된다(2,1-9). 3장에서는, 예수아 대사제의 임직식에 관한 환시에 이어서(3,1-7.9?), 그에게 특별한 약속이 주어진다(3,8.9?.10). 4,6-10?에는 즈루빠벨 총독을 위한 언질이 나오는데, 이는 새로운 공동체의 우두머리들과 관련된 환시에 삽입된 말씀이다.

 

이 소책자의 구조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처음 세 환시는(말 탄 기사, 뿔과 대장장이, 측량줄) 메시아적 복구의 준비 단계를 제시한다. 중간의 두 환시는(예수아 대사제, 등잔대와 두 올리브 나무) 새 공동체의 통치와 관련되고, 마지막 세 환시는(두루마리, 뒤주, 병거) 최종적 복구의 조건들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대사제의 착복식에 관한 넷째 환시가 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특별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 환시에서는 예수아 대사제에게 더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는 반면, 그 다음의 환시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예수아와 즈루빠벨, 두 사람이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원래의 소책자에는 환시가 일곱 뿐이었는데, 나중에 가서 넷째 환시가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변경은 다윗 가문의 제후 즈루빠벨이 사라진 다음에, 사제들이 무엇을 중시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똑같은 변화를 6,9-14에서도 볼 수 있다. 본디는 즈루빠벨이 왕관을 쓰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예수아 대사제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환시의 소책자는 설교(1,1-6; 7,4-14)와 미래에 관한 약속(8,1-17.20-23)이 그 기본 골격을 이룬다. 이 설교와 약속은 기원전 587년의 대참사를 기념하는 금식의 지속 여부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7,1-38,18-19) 모아진다. 이 설교들과 신탁들에는 8,20-23처럼 상당히 나중의 것들까지도 수집되고 요약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즈가리야의 메시지가 후대의 세대들에게도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3. 즈가리야의 메시지

 

즈가리야 예언서의 메시지는 이중의 내용을 지닌다.

 

이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개입하시는 방식에 어떤 변화가 있음을 증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유배 이전의 대예언자들과 직접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또는 친히 개입하시는 환시를 통하여 통교하신다.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고 초월적인 분이시며, 동시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손수 전개하고 관장하시는 분이시다. 반면에 즈가리야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일이 벌어지는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처럼 보인다. 예언자가 환시를 보게 해 주실 때에도, 그분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또 하느님의 뜻을 설명하는 임무를 띤 존재로 천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은 천사나 기사(騎士) 같은 중개자들을 통하여 실현된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세상과 멀리 떨어져 계시다는 것은 분명히 영성화의 노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또한 더욱 실존적 체험, 곧 하느님의 어떤 부재(不在)의 체험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배의 시련과 귀향 후에도 부딪히는 가난의 어려움으로 하느님께서는 정말 우리의 운명에 관여하시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제 신앙은 이러한 표면상의 공허를 메워 주고, 천상 세계와 시련 중에 있는 사람들을 가깝게 이어 주는 중개자들을 많이 소개함으로써 그러한 질문에 대답한다. 이 중개자들이, 후대의 묵시문학에서는 신비로 가득한 상징으로써 하느님을 가리게 되겠지만, 즈가리야서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일치시키는 끈이 된다.

 

다른 한편, 즈가리야서 역시 전체적으로 희망을 증진시킨다. 물질적 어려움과 실망으로 회의나 수동적 체념에 빠지는 공동체에, 예언자는 행동을 이끌어 내는 희망을 불어넣는다. 성전의 재건축과 적법한 경신례의 복구가 바로 구원을 바라는 구체적 방식이라는 것이다.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다른 민족들도 이러한 새 시대에 동참할 것이다(2,15; 8,20-22.23). 즈가리야는 이 구원이 벌써 문 밖까지 와 있다고 말한다. 즈루빠벨이 이 구원의 시대를 열어갈 인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의 상징적 대관식이(6,9-1) 그러한 사실을 가리키는 표지이다.

 

그러나 제2의 인물 곧 대사제가 즈루빠벨과 조화를 이루는데, 이 둘은 대등한 입장에서 공동 작업을 펼쳐 나간다(4,14; 6,13). 이로써 사제와 제후가 분담하는 이원 체제의 통치에 관한 기대가 일어난다(이러한 생각은 중세의 신학에서 국가 권력과 교회 권한의 분리 원칙을 정당화시키는 데에 쓰이기도 한다). 즈루빠벨이 사라진 뒤에 이 기대는 수정되어 메시아의 역할이 사제에게 집중된다. 넷째 환시(3,1-7), 그리고 예수아와 징조가 되는 사람들인 그의 동료들에게 내린 특별한 약속이(3,8-10) 그러한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희망은 다시 새로운 형태로 구약성서의 다른 부분(유배 이후의 본문인 예레 33,14-26)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외경과 쿰란의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또 히브리서는 이 희망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히브 3).

 

II. 즈가리야서 914(2즈가리야)

 

1. 2즈가리야서

 

즈가리야서의 이 둘째 부분은 첫째 부분과 동일한 저자의 작품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특징들을 드러낸다.

 

우선 역사적 상황이 바뀌었다. 공동체와 예루살렘과 성전의 복구는 더 이상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다. 성전의 재건축과 즈루빠벨이라는 인물과 결부된 메시아 희망은, 가난한 임금-메시아(9,9-10), 배척당하는 선한 목자(11,4-14), 찔려 죽은 신비로운 존재(12,1 - 13,1) ,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들의 등장으로 사라진다. 첫째 부분에서는 분명하게 거명된 사람들이 둘째 부분에서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되는 포로들은(9,11-12; 10,8-11), 이제 기원전 587년에 끌려간 사람들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사는 이들을 일컫는다.

 

문학적인 면에서도 두 부분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 환시들, 그리고 즈루빠벨이나 예수아, 또는 백성 전체에게 하는 짧은 메시아적 신탁들은, 더욱 폭넓게 확장되고 독특한 서사시적 영감에 의한 말씀들로 대체된다. 첫째 부분에서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가 둘째 부분에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해석하는 천사도 마찬가지이다. 첫째 부분에 나오는 어떤 개념들과 특징적 표현들이 둘째 부분에서는 더 이상 쓰이지 않거나, 쓰이더라도 아주 조금밖에 쓰이지 않는다. 둘째 부분의 개념들이나 표현들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첫째 부분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들이다. 이 밖에도 제2부는 신탁이라는 머리글로 시작된다(9,1). 12,1과 말라기서의 첫머리에서도 되풀이되는 이 머리글은, 열두 소예언서 마지막 부분의 특별한 유래를 드러내는 표지이다.

 

2. 9 - 14장의 문학적 수수께끼

 

현재의 즈가 9 - 14장을 구성하는 다양한 단편들의 복합적 배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이 서로 독립된 조각들이 모자이크처럼 한데 모아진 것일 따름이며, 그것들을 서로 묶어 주는 것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즈가리야서의 이 제2부에서 복잡하지만 균형이 잘 잡힌 구조를 찾아 내려고 노력한다. 9 - 11장의 시는 공통된 특징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역사와 관련된 시사, 그리고 유다 공동체와 다른 민족들 사이의 관계가 특정한 성서 저자 또는 일정 집단의 관심사를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산문으로 편집되어 있으면서 공동체의 내적 변형을 위하여 고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뒤의 나머지 장들은, 다른 데에서 기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끝으로 마지막 편집자가, 어떤 것들은 유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9,9-10; 10,1-2; 11,1-3) 이 모든 단편을 활용하여 상당히 일관된 통일체를 구성하였을 것이다.

 

이 소책자의 저작 시기와 관련하여 제기된 가설들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곧 위로는 기원전 7-6세기 유배 이전 시대부터, 밑으로는 기원전 2세기까지 제시된다. 기원전 2세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대사제 오니아스 3(2마카 4,34) 또는 대사제 시몬의 살해가(1마카 16,11-17), 찔려 죽은 이라는 독특한 인물 상을 떠올리게 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할 때에 이 소책자의 저작 시기를, 그리스 시대가 시작하는 기원전 330년과 기원전 300년 사이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 기원전 332년 지중해 연안을 따라 전개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그리고 띠로의 파괴가 9,1-8에서 비교적 정확히 서술된다. 9,11-1210,8-11에서 언급되는 포로들은 상징적으로 아시리아와 이집트라고 불리는 여러 지방에 갇혀 사는, 유다인들의 모든 디아스포라의 구성원들을 말한다. 이 밖에도 기원전 312년에 프톨로매오 1세 소테르가 예루살렘을 함락한 다음, 유다인 포로들의 무리가 이집트에 이르게 된다. 이로써 9,13에서 그리스를 하느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인 세력으로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즈가리야서의 저자는 이전의 대예언서들을 매우 독창적으로, 그리고 아주 능란한 솜씨로 이용한다. 이러한 기법은 이 예언서의 저술 시기를 기원전 587년의 유배에서 상당히 떨어진 시대로 잡게 한다.

 

즈가 9 - 14장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승리에 이어지는 종교적, 지적 동요를 명백히 드러낸다. 이러한 동요는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 산헤립이 침입하였을 때에 이미 있었고, 그 다음으로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 종교적으로 각성하던 때에도 있었다. 또한 이러한 동요나 불안은 마카베오 시대의 대박해에 뒤이어 일어나기도 한다.

 

3. 구조

 

현재 상태의 이 소책자는 구원 사업이 이중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두 부분이 대칭을 이루면서 구성되어 있다. 곧 백성이 실패의 늪으로 빠져드는 움직임,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는 완전한 쇄신이다.

 

첫째 부분: 9,1 - 11,17

 

마치 승전보의 문구처럼 예언자는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을 예고한다. 정복당한 이웃 민족들은 정화된 다음에 신앙인들의 공동체에 통합된다(9,1-8). 곧바로 이어서 겸손한 모습으로 이상적 통치를 시작할 임금-메시아가 나타난다(9,9-10). 그리고 큰 전투들이 벌어지는데, 그 덕분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하느님 백성의 재결집이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전통적 국경들이 허물어진다(9,11-1710,3 - 11,3). 이 두 단락 사이에 자리잡은 중간 구절인 10,1-2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 혼자 하시는 일로서, 그분 외에 다른 것이나 다른 존재에 의지하는 것은 헛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준비 작업이 이루어진 다음, 이번에는 목자로 소개되는 메시아가, 호의일치라는 목자의 두 지팡이로 상징되는 자기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일에 착수한다. 그러나 우두머리들과 양 떼의 종교적 타락은, 결국 이 메시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배척받은 이 선한 목자는 쓸모없는 목자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그 목자는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양 떼를 돌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잡아먹기까지 한다(11,4-17).

 

둘째 부분: 12,1 - 14,21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때, 찔려 죽은 이의 희생이 복구를 가져온다. 외적에게서 구원된 백성이 새 영을 받는 것이다(12,1 - 13,1). 그리고 정화가 이어지고 계약의 갱신이 이루어진다(13,2-9).

 

이제 구원은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모든 민족은 주님의 왕권을 고백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과 결합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14장은 후대의 작품일 수 있지만 즈가리야서 제2부 전체의 훌륭한 결론 역할을 한다.

 

4. 2즈가리야서의 메시지

 

이 소책자의 전체 내용은 메시아 도래의 서술이라는 말로 종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메시아 사상을 서로 보완하는 두 개의 개념이 책 전체에, 또 각 부분에 나란히 배열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 메시아 없는 메시아 사상

 

9,1-8; 9,11-17; 10,3 - 11,3; 14,1-21에서 소개되는 메시아적 이상은, 이사야의 묵시록과 가깝다(이사 24 - 27). 구원의 모든 업적은 주님께서 손수 이루신다. 그분께서는 적들을 진압하시고 당신의 온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신다. 이러한 조건이 채워져 나아갈 때, 이민족들도 이 공동체에 온전히 통합되기를 희망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이 이방인들은 유다의 씨족들 사이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들도 율법의 모든 요구 사항에 복종해야 한다. 이 요구 사항은 구체적으로 제의적 규정과(9,7) 예배 실천 규정으로(14,16-19) 표현된다. 이는 한편으로 관대한 조치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제한을 담고 있다. 곧 이방 민족들의 합류는 유다 공동체에 흡수되고 편입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여러 모습을 지닌 메시아

 

하느님께서 혼자 이루시는 이 업적이 다른 단락들에서는 특별한 인물의 업적과 겹쳐진다. 이 인물은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셋 가운데 어떤 것도 다른 두 모습과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 임금-메시아: 9,9-10. 이와 관련된 용어들의 일부가 이 임금-메시아를 그 원형인 다윗이나 솔로몬과 연관짓지만, 다른 것들은 가난한 이와 의인이라는 예언자적 이상과 연결된다. 이는 바로 주님의 가난한 이들의 종교적 이상으로 표현되는 메시아이다(시편 22,27; 69,33-34; 이사 49,13; 57,15; 61,1-2; 66,2; 스바 2,3; 3,11-13).

 

. 선한 목자: 11,4-1713,7-9. 임금-메시아보다는 분명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 메시아는, 왕정 사상과 덜 밀접하게 관련되는 대신에, 에제 34,11-22.31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주님 자신이신 목자의 표상에는 더욱 확실하게 연관된다. 사실 제2즈가리야서에 나오는 은유에서는, 예언자가 표현해 내는 목자가 여러 번에 걸쳐 어떠한 중간 과정도 없이 곧바로 주님 자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밖에도 이 선한 목자, 배척을 당하고 팔아 넘겨져 제거되며 또 그의 희생이(13,7) 계약의 복구에 이바지함으로써(13,9), 이미 찔려 죽은 이의 모습을 향하기도 한다.

 

. 찔려 죽은 이: 12,9-14. 메시아의 이 모습은, 전혀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사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이어받는다. 이 주님의 종처럼, 이 메시아의 희생 역시 마음의 변화와(12,10) 정화의(13,1) 근원이 된다. 옛 임금과의 연결은 은근하게만 이루어진다. 이 연결선은 다윗과 그 혈통을 되풀이하여 상기시키는 사실로써만 나타난다(12,7-8.10.12; 13,1). 메시아의 영광은 약탈당함과 패배로 대체된다. 그러나 이것들이 바로 구원의 원천이 된다.

 

2즈가리야의 이렇게 심도 있는 메시아 사상은 후대의 사고에 풍성한 양분을 제공한다. 이러한 연유로 복음서 저자들 역시 특별히 수난하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역할을 제시하는 데에, 그토록 폭넓게 이 예언자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마태 21,4-5와 요한 12,15; 마태 26,31과 마르 14,27; 마태 27,9-10; 요한 19,37).

 

 

말라기서(말라키서) 입문

 

 

말라기서는 대예언서에서 소예언서에 이르는 예언서집 전체를 마감한다. 예언서 가운데 마지막이라고 하여 이 예언서의 중요성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 예언서의 저자는 말라기라고 불린다. 이 히브리 말은 3,1에 나오는 나의 사자(使者)”를 뜻한다. 그래서 예언자의 이 이름은 일종의 가명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마지막 예언서를 우리에게 남긴 이 예언자는 같은 절에서 예고되는 메시아의 선구자와 동일시된다. 그리하여 구약성서의 증언 전체에서 말라기 예언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예언서에서 발견되는 여러 표지를 종합할 때, 말라기 예언자의 활동 시기를 기원전 480/46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실 이 예언서에 따르면, 백성은 이미 유배에서 돌아왔고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지어졌으며, 경신례를 다시 거행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기원전 515년에 성전 재건축이 완료되고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특히 이방인과의 혼종혼 문제에 관한) 에즈라의 대개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개혁은 기원전 440년경에 가서야 실행된다.

 

말라기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회의론이 팽배하던 때이다. 하깨와 즈가리야 예언자가 성전 재건과 결부시켰던 희망은 기대하던 대로 성취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실망으로 신앙이 식어간다. 그리고 전례를 등한시하고 사람을 매수(買收)하며 여러 가지 불충 또는 부정을 저지름으로써, 다시 과거의 잘못으로 빠져든다. 이러한 현실에 말라기 예언자는 강력하게 대응한다. 그는 사제와 일반인을 막론하고 저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 지니는 책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예언자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유배 이후 유다교가 결정적인 모습으로 꼴을 갖추던 중요한 시기에, 그는 개인의 종교적, 도덕적 생활의 개혁자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온 유다 공동체의 안내자가 된다.

 

훨씬 후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말라기 예언서의 메시아적 내용에 감명을 받고, 이 예언자가 기다리던 이가 바로 나자렛의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유다교는 오늘날까지도, 말라기가 명확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종교적 가치들을 그 바탕으로 삼는다.

 

말라기서는, 때로는 냉혹하게 들리지만, 결국은 크고 두려운날이 오기 전에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리라는 사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에게, 곧 동일한 메시지의 상속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경고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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