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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오경 입문

dariaofs 2015. 2. 27. 18:24

창세기 입문

 

창세기는 오경의 첫 번째 책이다(오경 입문 참조). 이 책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세상의 기원,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시는 하느님 활동의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창세기는 토라(또는 모세의 율법)의 일부를 이루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민족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의 아버지들’), 그리고 신앙인들이 자기들의 선조로도 받아들이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창세기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며, 유다 민족과 그리스도의 교회와 더불어 온 인류와 관련되는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창세기는 선조들의 생애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전하는데, 이것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준비할 목적으로 아브라함과 그 가정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심을 드러낼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는 선조들의 이야기 앞에 나오는 일종의 서론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서론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세상의 여러 민족들 가운데 배치시키면서, 성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설화들을 담고 있다. 창조, 아담과 하와, 노아의 홍수, 바벨탑 등, 인류의 지상 여정 그리고 그들의 활동과 실패에 대하여 인상적으로 요약한 것들이다.

 

이러한 창세기,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이야기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그 역동성 안에서 파악해야 하고, 그 이야기들을 다른 것들과 관계없는 단편들로 분해해 버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 책의 널리 알려진 부분들 가운데 어떤 한 부분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경우에도 다음의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곧 오경 입문에서 강조된 것처럼, 창세기가 선조시대에 대한 일종의 역사서로서 독립적인 작품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당신의 증인으로 세우시려고 하느님께서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어떻게 당신의 백성을 뽑아 이루시는지를 이야기하는 광범위한 전체의 시작일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아울러 창세기가 단숨에 저작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 동안 계속된 문학적인 작업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자기네 선조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겪어야 했던, 때로는 고통스런 체험들도 반영한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성쇠와 관련해서 끊임없이 다시 풀어 읽히는 살아있는 전통을 전제로 한다.

 

현재의 창세기 본문은, 자기들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업적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필연적으로 되풀이해서 깊이 생각한 결과라는 사실을 함께 고려할 때에만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업적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본문의 여러 편집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 후대의 편집 작업들은 그 기초가 된 최초의 초고를 파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계시들과 더불어 그것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1. 창세기의 구성

 

창세기는 통상 두 부분으로 나눈다. 곧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게 된 인류의 시작을 다루는 창세 1-11장과 선조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창세 12-50장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다시 아브라함(12-25), 이사악과 특히 야곱(26-36),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에(37-50) 대한 세 개의 서로 이어지는 설화들로 세분된다. 이를 종적인 구분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구분은 창세기의 내용을 말해 주기 때문에 편리한 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구분, 곧 성서의 이 첫 번째 책이 창세기 50장을 넘어서는 여러 문학적인 지층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횡적구분을 선호할 수도 있다. 사실 현재의 창세기는 야훼계, 엘로힘계, 사제계라 불리는 여러 문학적인 지층들로 구성되어 있다(오경 입문 참조). 이들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서로 중첩되기는 하였지만 오경 전체를 통해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창세기라 부를 수 있는 야훼계 설화는 이미 현재의 창세기가 보여주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 야훼계 저자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동물과 식물 사이에서 살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말을 들음으로써, 에덴에서 쫓겨나 고통과 혼돈과 분열 속에서 살게 된다(2-4). 인류는 자기들 사이의 일치를 이루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1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진정한 모임을 준비하시고 또 그것을 실현하신다. 그렇게 해서 그분께서는 노아를 홍수에서 건져내시고(6-9)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 안에서 당신의 복을 받도록 하신다(12). 아브라함 선조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성소에서 저 성소로 옮겨다닌다. 그러면서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는데, 이스마엘의 탄생과(16) 이사악의 탄생이(18-21) 그 약속을 보증한다. 아브라함의 설화는 이사악이 메소포타미아의 아람 땅에 사는 친척 처녀와 혼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24).

 

아브라함의 이 상속자에 대한 전승은, 비록 자기 아버지에 대한 전승들보다 더욱 견고하게 대지와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수가 많지 않을 뿐더러 별로 두드러지지도 않는다(26). 이사악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장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통일을 이루게 되는 열두 지파의 선조인 야곱에 의해서 압도된다.

 

이 야곱은 생의 대부분을 약속의 땅 밖에서 지낸다. 그는 또한 일생 동안 하느님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투쟁을 벌여야 하는 인간이기도 하다(32). 실제로 야곱은 지속적으로 자기 부인의 민족인 아람인들, 이스라엘의 형제 민족인 에돔족의 조상인 에사오, 또 가나안의 주민들과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34). 그러다 그는 에집트에서 생을 마친다.

 

창세기는 야곱의 아들들의 역사와 함께 끝을 맺는다. 이들 가운데서 유다와 더불어 요셉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형들은 요셉을 제거하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에집트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을 굶주림에서 구해 낸다.

 

야곱은 숨을 거두기 전에 자기 자식들에게 축복하는데, 유다를 그들의 임금으로 지명한다(창세 49). 야곱에 이어 요셉도 죽는다. 이로써 요셉은 자기 가족들을 머지않아 노예생활을 하게 되는 땅에 그냥 놓아둔 채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에집트에서 살게 된 선조들의 해방은 창세기에 이어지는 책, 곧 출애굽기의 주제가 된다.

 

왕조시대에 저작된 것이 틀림없는 야훼계 설화는 지방 및 씨족 전통들 가운데서 첫 번째로 문학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 설화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약속, 그리고 이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겪게 되는 어려움을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상기시킨다.

 

왕국의 분열로 인한 하느님의 백성이 누리던 일치의 파괴, 그리고 그것에 이어지는 어려운 시기는 이스라엘에게 선조들의 역사에 대한 수정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보완을 요구하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엘로힘계 전승이 두 번째 문학적 지층을 이루게 되는데, 그 범위와 중요성을 밝혀내는 작업은 쉽지가 않다.

 

이 전승의 어조는 앞선 야훼계 문헌보다 더욱 간결하면서 그보다 덜 낙관적이다. 또한 이 전승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사에 덜 직접적으로 개입하시고, 당신의 종들에게서 무엇보다도 먼저 순종을 기대하신다. 이 전승 안에서 가끔 예언 현상의 영향을 알아볼 수 있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하느님 때문에 신앙의 시련을 겪게 되는(22) 예언자로서 받들어진다(20,7).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참혹한 몰락으로 선조들의 발자취에 대한 서술을 새롭게 수정해야 했다. 이 작업은 메소포타미아에 유배 간 사제들에 의해서 수행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사제계 문헌은 하느님의 업적의 제의적 그리고 법률적인 면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노아의 계약을 이어받고(9) 시나이 계약을 준비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강조하게 된다(17).

 

이 사제계 전승은 세상 창조와 더불어 성역사(聖歷史)를 시작하게 함으로써(1), 창세기의 이야기에 결정적인 짜임새를 부여하고, 족보와 연대기적인 자료를 통해서 인류 운명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계약 또는 특수 규약의 제정으로 표시되는 여러 단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단계 곧 창조에서 노아까지, 그리고 노아에서 아브라함에게까지 이르는 단계를 거쳐서 이스라엘은 결국 뭇민족들 사이에서 유일하신 하느님께 참다운 예배를 드리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2. 창세기의 전거(典據)

 

성서의 저자들은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대 근동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 그리고 페니키아-가나안 지방의 전통들을 망설임없이 직간접적으로 그대로 쓰고 있다. 사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루어진 고고학적인 발견은 창세기의 첫 부분, 그리고 수메르와 바빌론과 에집트 중부의 테베 또는 북부 시리아-팔레스티나에 있던 우가릿의 서사시와 지혜문학과 전례 문서들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이 자리잡은 지방이 외국 문물의 영향에 넓게 열려있었음을 안다면,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밖에도 하느님 백성 자신이 자기들의 역사를 통해서 근동의 여러 민족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다.

 

그러나 고고학의 발달은 동시에, 창세기 앞부분의 여러 장들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수정한 저자들이 기계적인 모방자들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이들은 고대 근동의 이야기들을 그냥 가져오지 않고, 자기 민족의 특수한 전통이라는 틀 안에서 그 자료들을 다시 작업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독창성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근동의 설화들을 이용하여 자기네 신앙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 수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성서 본문을 그 옛날에 널리 알려져 있던 세상 기원 또는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들과 비교하는 것은 성서의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일이다. 고대 근동의 수많은 문학적 증인들 중에서 여기에서는, ‘에누마 엘리쉬라 불리는, 마르둑 신이 이룬 창조에 대한 바빌론의 설화, 바빌론판 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웅 길가메쉬의 모험 이야기,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것으로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성읍 주민들이 자기네 신들을 위해서 지은 큰 탑들 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스라엘 선조들의 이야기는, 비록 거기서 말해지는 사건들이 일어난 뒤, 훨씬 후대에 와서야 편집 또는 저작되었지만, 그들이 살던 당시의 주변 환경에 실제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입증한다. 고고학자들은 다시 한번, 특히 우가릿과 마리에 대한 비교적 최근의 발견을 통해서 선조 전통들의 복합성과 동시에, 이 전통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원전 천년대의 생활상에 잘 부합됨을 인식하게 해준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관습은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를 잇는 비옥한 반달 지역을 따라 이주하면서 양과 염소를 치던 반유목민족의 관습을 상기시킨다. 이들은 농경지에 정착한 주민들과 다소 접촉하면서 살았는데, 때로는 평화적인 관계를, 때로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선조들의 가문들을 이루는 여러 집단들은(이들 사이의 정확한 관계를 우리로서는 잘 알지 못한다)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 있었는데, 이 땅은 그뒤 그 후손들의 땅이 된다.

 

선조들에 대해서 일관성있는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서의 문헌들과 이스라엘 선조들 사이를 넓게 갈라놓는 시간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 선조들이 자기네 집단과 더불어 정치적 역사 무대의 가장자리에서만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전통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굶주림으로 위협받는 지방에서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간다거나, 가축을 위해서 기름진 땅을 마련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관심들을 반영한다. 그리고 끝으로, 그들 생존에 관한 몇몇 일화들만이 우리들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도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선조들에 대한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그 전부가 당시 문화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민속적이고 가족적인 것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옮겨다니면서 살아야 하는 선조들과 늘 길을 함께하시고 그들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약속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을 드러낸다.

 

3. 창세기의 주제와 인물

 

창세기는 풍부한 주제와 인물들을 담고 있다. 이들은 성서의 다른 구절들에도 나올 뿐만 아니라, 유다교 전통은 물론 그리스도교 전통도 이들에 대한 깊은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창세기는 창조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이 이야기는 시편들에서 불려지고(시편 8; 104) 욥기의 저자에 의해서 상기되며(38 이하), 2이사야에 의해서 되새겨진다(이사 40 이하).

 

에덴 동산에서 보인 아담의 자세는 바오로 서간에서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자세와 비교된다(로마 5; 1고린 15). 노아 홍수의 이야기는 종말의 극적인 사건의 배경(마태 25) 또는 세례성사의 예형(豫形)으로 사용된다(1베드 3). 아브라함의 운명은 약속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 약속은 이후 하느님에 의해서 끊임없이 확인된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의 가까운 자손들, 그리고 먼 후손들의 미래를 밝혀주고 결정짓는다. 이러한 약속의 성취를 선조들, 그리고 여호수아 때와 다윗 때에 이스라엘 전체가 고대하였고, 사도 바오로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경축한다(갈라 3). 이사악의 희생제사는 선조들의 은덕을 기리는 랍비들의 주의를 끌었고, 초세기의 교회에서는 성금요일에 대한 예형이 된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신학은, 세상 기원의 신비와 그 운명의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 업적의 첫 단계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대대로 성서의 이 첫 번째 책을 읽고 또 읽는다. 사실 창세기는 개인과 민족들이,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하느님 사랑의 의지 안에 삶의 뿌리를 내리도록 해준다.

 

창세기의 몇몇 인물들이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야훼계 전승이 섬세하고 심오하게 그려낼 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도록 초대하는 아담과 하와 부부; 주님의 은혜를 받고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는 노아;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과 회교도들까지도 존경하는, 신앙인들의 선조로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투신한 믿음과 소망의 증인인 아브라함;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로 태어났지만 끊임없이 위협받고 결국 자기 가족들의 음모 앞에서 농간당하는 이사악; 가까운 친척들과의 끊임없는 대결 상태에서 속고 속이며 살았고, 하느님의 강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었으며, 하느님을 만난 결과로서 자기 몸에 계속 그 흔적을 지니고 산 야곱; 잊혀진 채 무죄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지만, 에집트의 재상이 되어, 결국 그러한 운명으로써 모든 것을 당신의 선택된 이들의 선에 기여하도록 만드시는 주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요셉 등이다.

 

이러한 남성들과 더불어 선조 전통들 속에서 여인 또는 어머니가 수행하는 일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다. 뱀의 유혹에 빠지긴 하였지만, 전인류의 어머니가 되도록 부름을 받는 하와(3); 약속된 아들 이사악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을 듣고 웃는 사라(18); 자기가 더 좋아하는 아들 야곱을 위해서 음모를 꾸미는 리브가(27); 갈등 속에 살아가는 레아와 라헬(29장 이하); 보디발의 아내(39) 등등. 이들은 성서 전통이 제시하는 대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아담과 아브라함과 이사악 등과 함께 소개되는 여인들이다.

 

주제와 인물들과 관련한 창세기의 풍부함은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으로서 신앙인들은 그 앞에서 크게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탈출기) 입문

 

 

1. 책의 이름

 

오경 입문에서 우리는 토라라고도 불리는 이 다섯 책이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이 책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오경 가운데 두 번째 책에 눈을 돌릴 때, 먼저 부딪치는 문제가 책 제목이다.

 

우리 나라에서 출애굽기로 불리는 이 책은, 히브리말에서는 고대 근동의 전통 방식에 따라 그 첫 말마디인 그리고 이것들은 이름들”, 또는 이를 줄여서 이름들로 불린다(우리말에서는 첫 문장의 끝에 …… 이름은 이러하다.”로 옮겨진다). 반면에 히브리말 성서를 그리스말로 옮긴 에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번역자들은 이 책의 내용에 따라 나감, 탈출을 뜻하는 엑소도스(Exodo?’를 제목으로 붙였다. 이것이 라틴말에서 Exodus로 음역되었으며, 현대 서양 언어들에서도 이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자말로, Exodus에 해당하는 ()’과 에집트에 해당하는 한자 애굽(埃及)’, 일의 내력을 기록한 문서를 뜻하는 ()’를 덧붙여 이 책의 이름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자식 명칭은 이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을 맨 앞에 세우는 것은 명백히 중국식 어법이다. ‘애굽또한 문제를 안고 있다. 에집트에 해당하는 한자말은 애급(埃及)’인데(국어사전과 선종완 신부 번역본 참조), 우리는 현재 이 나라 이름을 애굽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를 우리말 어법에 맞게 고친다면 에집트 탈출기가 될 것이다(생명의 말씀사 판현대인의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그러나 Exodus는 과거에 한 번 이루어진 에집트 탈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미 구약성서 시대에 제2이사야는 하느님의 백성이 바빌론에서 귀향하는 것을 2Exodus’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영성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여정은 완전한 해방을 향한 Exodus라 말할 수 있다(아래 4 참조). 이러한 경우들을 보더라도 계속 출애굽출애굽기라는 개념과 제목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일정한 환경이나 구속에서 빠져 나감을 뜻하는 일반적인 개념인 탈출을 쓰는 것이 더 마땅하다고 여겨지므로, 우리는 Exodo?Exodus라는 말의 본뜻과 이 낱말을 제목으로 선택한 이들의 원의도를 살려 탈출기라 부르기로 한다.

 

2. 에집트 탈출의 의미

 

탈출기는 흔히 구약성서의 복음서로 일컬어진다. 사실 이 책은 하나의 복음서처럼, 하느님께서 한 무리의 사람들의 실존에 개입하셔서(4,31) 그들을 자유 속에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그들을 당신께서 마련하신 나라로 불러모으신다는 기본적인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

 

탈출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에집트 탈출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1) 하느님의 백성을 탄생시킨 사건

 

이스라엘인들은 에집트 탈출을 자기들의 일반 역사와는 달리 특별한 것으로, 역사의 여느 사건들과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여겨왔다. 실제로 이 탈출은 이스라엘을 창조한 사건으로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삶 전체가 그것에 종속되고, 많은 제도와 종교 의식과 신앙 조목들이 그것에 의거하여 만들어진다. 이스라엘이 지녔던 큰 민족적 희망들도 마찬가지로 이 사건과 관련된다. 또한 에집트 탈출에 대한 회상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 다른 사건들을 지배할 정도로 결정적인 것이었다.

 

,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점차 열두 지파의 통일성에 대한 의식을 갖추게 된 일(여호 24), 왕국을 설립하고 다윗의 통치 아래 팔레스티나 국가를 형성한 일, 그리고 더 나아가서, 유배와 이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이 여러 땅에 흩어진 공동체로 변화한 일 등이다. 이러한 일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무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에집트 탈출, 그리고 그것에 이은 광야생활에 비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신학적, 역사적 사고가 바로 이 탈출로써 조명되었다. 사실 그 시기는 하느님께서 당신 것으로 받아들이신 한 민족의 초년기에 해당한다(호세 11,1-4; 신명 8,11-16). 물론 이 민족은 이미 그때 처음으로 자기들의 하느님께 반항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14-17).

 

아울러 구약성서에 나오는 어떤 제도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할 때 에집트 탈출 사건은 흔히 그 준거점이 된다. 그래서 파스카(12,26), 무교절(13,6-812,39), 또는 맏아들과 맏물의 봉헌 의무(13,14-15)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느냐는 질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관습이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에집트를 나올 때 일어난 일을 회상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본보기를 들자면, 이방인들을 존중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이스라엘인들이 에집트에서 살면서 이방인의 삶이 어떠한지를 직접 겪은 그 체험에 바탕을 둔다(22,20; 23,9).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한 민족의 제도, 종교 의식과 법에 정신을 불어넣는 작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 사건은, 한마디로, 이스라엘 민족을 탄생시킨 일이었다.

 

(2)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만남의 사건

 

이스라엘을 탄생시킨 에집트 탈출 사건은 또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일에서 특권적인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관계를 환상적으로 그린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특히 현대의 독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에집트 땅에 내린 재앙들이나 바다 횡단같은) 기적들만을, 또 하느님의 일방적인 개입과 이스라엘의 무조건적인 수용만을 열거하는 것도 아니다.

 

주의 깊게 읽을 때, 이 책은 일련의 근본적인 물음들과, 더 나아가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4,1; 6,9; 14,31)?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17,7)? 그분의 이름은 무엇인가(3,13-15)? 사람이 그분을 뵐 수 있는가(33,18-23)? 모세는 왜 우리를 이렇게 위험하고 치명적인 모험 속으로 끌어들였는가(14,11; 16,3; 17,3; 32,1)?

 

이 책은 이러한 의문과 물음에 이스라엘의 신앙을 근거로 한 대답을 준다. 여러 세기 동안 그리고 탈출기의 최종 작업 때까지(오경 입문 참조) 이 신앙은 끊임없이 성숙하였다. 당신의 백성에게 홀로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 하느님, 곧 계약의 하느님을 모세가 알려준 그날 이후, 이스라엘은 민족적 생존의 첫 사건, 구체적으로는 이 탈출, 그리고 이 계약을 오랫동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역사 속으로 개입하셨음을 깨닫게 된다(13,9.16에 나오는 짧은 신앙고백참조).

 

그리고 에집트에서 백성을 이끌어내시고 그 행렬을 인도하신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그분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주님, 곧 모세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들에게 일깨우신 희망에 충실하신 분으로서, 노예가 되어버린 불행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분이시다(2,23-25).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고 결국 모든 장애를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7-11).

 

그리고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한데 모으고자 하시는 분으로서 그들에게 계약을 세우고 그 계약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다(19-24). 또한 그분께서는 죄를 저지르는 백성에게 당신의 인내와 자비를 드러내시는 분이시다(32-34). 끝으로 그분께서는 예언자 모세의 중개를 통하여(33,7-11; 34,29-35), 그리고 합법적인 성소에서 사제 아론이 거행하는 전례를 통해서 당신 백성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시다(25,8; 40,34-35).

 

(3) 오늘도 계속되는 사건

 

이렇게 에집트 탈출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있는 현실이 된다. 시편 114와 여호 4,22-24는 이스라엘인들이 모세와 함께 바다를 건넌 일, 그리고 여호수아와 함께 요르단을 건넌 일을 하나로 결합하여 한 축제로 경축한다. 시편 81축제날한데 모인 공동체에게 에집트 탈출 사건 당시에 울려 퍼진 목소리를 자기들의 선조들보다 더 귀여겨들으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시편 95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 목소리가 오늘이야기한다고 말한다. 사실 시편 111,4에 따르면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34,6 참조) 당신의 기적들을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원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전례 축제를 통해서(파스카를 하나의 기념으로 말하는 12,14 참조) 파스카의 구원에 온전히 참여하고, 시나이에서 체결된 계약에 계속 동참하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례는 주기적으로 에집트 탈출 사건들을 다시 체험하도록 해주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근간을 뒤흔드는 큰 위기의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그 한 본보기로서 아합 임금이 북부 왕국을 다스릴 때 백성을 자칫 배교로 이끌 뻔한 사건으로, 가나안인들이 일으킨 위기의 때에, 엘리야가 이스라엘 신앙의 원천인 호렙산으로 갔던 순례를 들 수 있다(1열왕 19). 마찬가지로 바빌론 유배 시대에 새계약을 선포한 예레미야와(예레 31,31-34) 에제키엘(에제 16,59-63; 37,20-28) 다음에 나타난 제2이사야는 새로운 탈출의 시간이 왔다고 선포한다(이사 43,16-21).

 

이 예언자는 유배의 땅에서 기적적으로 이루어지는 해방에(이사 48,20-22; 49), 더욱 기적적인 방식으로 죄에서의 해방이 더불어 이루어지리라 선포하며(이사 40,2; 44,21-22), 이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으로서 만민을 구원할 능력을 지니신 분께 돌아오라고 모든 민족을 향하여 호소한다(이사 45,4-25).

 

그러므로 우리가 탈출기를 이해하려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책의 본문을 점진적으로 작업해 나갈 때, 그들이 자기들의 신앙에 이끌렸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후대의 유다인들은 파스카 예식을 거행하면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직접 에집트에서 탈출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13,8과 각주 참조).

 

(4) 영원한 해방의 전망을 연 사건

 

여정 가운데 있는 백성의 책으로서 탈출기는 완결된 책이 아니다. 예전 사람들의 역사 속에 이루어진 구원 개입에 대한 증언으로서 이 책은 계속해서 더욱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자유에 대한 희망을 함양시킨다.

 

이러한 전망에서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이스라엘이 수행한 에집트 탈출의 완성으로 여겼다. 한편, 그리스도교 시대가 시작될 무렵 유다교에서 (예컨대 지혜서와 타르굼에서) 재 해석되기도 한 탈출기의 언어는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그분의 파스카로 이해되었다(루가 22,14-20; 요한 13,1-3; 19,36). 다른 본문들은(요한 6; 1고린 5,7; 10,2-4) 세례와 성찬을 이야기하려고 만나, 구름, 바다 횡단,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물, 누룩 없는 빵 등의 낱말들을 사용한다.

 

요한 묵시록은 그리스도를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경축한다(묵시 5,6). 같은 책에서,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들은 에집트에 내린 재앙들을 되풀이하는 것이다(묵시 15,5 16,21). 그리고 그 짐승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함께하는 이들은 다시 모세의 노래를 부른다(묵시 15,3). 끝으로 새 세상의 출현을 서술하려고 바다가 없어짐을 이야기한다(묵시 21,1). 탈출기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의 이 모든 주제들은 교부들에 의해, 특히 그들의 부활 강론과 교리 교수, 그리고 이보다는 덜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그들의 주석서들에서 많이 활용된다.

 

이 모든 것은 또한 어떻게 하여 탈출기의 주제들이 그리스도교 전례에 여기저기 들어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여기에서 이것들을 하나하나 대조하여 확인할 수는 없고, 다만 비잔틴 전례와 로마 전례에서 부활 성야 축제 때, 바다 횡단의 구절을 봉독하는 것과 모세의 노래를 부르는 것(출애 14 - 15. 이 노래에 다음과 같은 기도가 이어진다: “그 옛날 행하신 기적을 오늘도 빛내시는 천주여, 당신 전능으로 한 백성을 에집트 사람들의 박해에서 구원하셨음같이 재생의 물로 이교 백성들도 구원하시니, 세상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 이스라엘의 특전을 누리게 하소서.”), 또 경신례와 교회 교리 교수에서 십계명이 차지하는 비중만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3. 탈출기의 역사적 배경

 

탈출기가 이스라엘의 신앙을 표현하려고 쓰여졌다는 말은, 이 책이 허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성서 전통의 자료들과, 이제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알려진, 고대 근동 역사의 자료들을 비교하면서 역사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모세의 연대에 대해서 학자들은 기원전 15세기(에집트의 제18왕조, 특히 툿모시스 치하 때)13세기(19왕조, 특히 세토스 1, 람세스 2세 또는 메르넵타 치하 때) 사이를 오가곤 하였다. 그러나 제18왕조 때 에집트인들이 팔레스티나를 지배한 사실이 야훼계전승 안에 그 흔적을 남겼을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면서,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이른바 짧은’(, 13세기에 탈출이 이루어졌다는) 연대기를 채택한다. 그때 그 지역의 정치적인 상황들을 고려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에집트 탈출의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16세기, 에집트의 신왕국은 150년 전 아시아에서 침입한 힉소스족을 내쫓는다. 특히 15세기에 툿모시스 3세가 등장하면서 에집트는 가나안 땅을 더욱 굳건히 지배한다. 그러나 14세기는 (아멘호텝 4세 또는 툿안크아몬 때의) 이른바 -아마르나로 불리는 종교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에집트의 약화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때 가나안의 봉신들은 증대하는 히타이트인들의 위력, 그리고 고대 문헌들에서 하비루/하피루라 불리는 거친 유랑민들이 일으키는 소요로 위협을 받게 된다(‘하비루/하피루라는 낱말이 이방 난민이나 유랑민 집단과 같은 사회적 신분을 뜻하는지, 아니면 한 민족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하비루/하피루히브리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 학자들은 아직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을 호전시키려고 장군 하나가 (13세기에) 19왕조를 세워 수도를 나일강 삼각주로 옮기고 지중해변을 요새로 만든다. 그리고 람세스 2세에 와서는 히타이트 왕국과 맞서게 된다. 이때 이 삼각주에 살면서 에집트 정부에 일정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던 셈족 계통의 인력을 에집트인들이 끌어다 쓴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다른 셈족 사람들처럼 파라오의 대아시아 정책을 수행하려고 교육을 받았을) 모세는 성공리에 자기의 종족을 광야로 이끌어내어 그들의 종교생활을 정비하였다. 그들은 무엇보다 요셉 집안”(에브라임과 므나쎄 지파)과 레위 집안에 속한 사람들로서, 모세는 이들이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한 큰일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가나안에서 다른 지파들이 그들과, 그리고 당신 백성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내신 하느님과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한 유랑민을 당신의 소유”, “사제들의 왕국”, “거룩한 민족으로 만드시겠다는 뜻을 그들에게 밝히시며 개입하신, 당시의 인간적-역사적인 틀이다(19,5-6). 결국, 주님의 계약 안에 모든 인간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부터이다.

 

 

레위기 입문

 

 

1. 레위기의 위치와 역할

 

탈출기는 만남의 천막이 준공되는 것에(40,16-33) 이어 곧바로, 주님께서 구름 속에 내려오심으로써 그곳을 당신의 거처로 받아들이신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40,34-8).

 

주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다음, 만남의 천막에서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레위기의1) 첫 말마디(1,1) 역시 주님께서 이곳을 당신의 성소(聖所)로 받아들이셨음을 나름대로 드러낸다. 탈출기에서는 주님께서 시나이산 위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반면에, 이제는 만남의 천막에서 모세와 만나 말씀하시는 것이다(1,1).2)

 

모두 27개의 장으로 되어있는 이 책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규칙들과 법규들을내리신다. 이스라엘인들이 이것들을 실천함으로써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다(18,5). 결국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이 천막을 잘 이용하여, 그것이 당신과의 진정한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종교의식에 관한 실수나(1-10) 육체적인 부정(11-16), 또는 도덕적인 불충이(17-26)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 생명의 통교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3) 그러므로 모든 경우가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레위기는 이스라엘의 경신례 전체가 아니라 몇몇 부분만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경신례 때 바쳐진 기도와 노래는 시편집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예언자들과(예레 7,3?1; 호세 6,6 등등) 현자들은(집회 34,18-35,10 ) 이스라엘인들에게 종교의식의 다른 면, 곧 그 상대성을 역설한다. 그들은 예식의 거행 자체만으로는 구원을 가져오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가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신도들의 의식 속에 심어주고자 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예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통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진리라는 점이다.

 

2. 레위기의 저작 시기와 내용

 

레위기에는 때때로 아주 오래되고 서로 다른 여러 근원에서 유래하는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일관성있게 모여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 책에서 보고 있는 것은 유배 이후에 이루어진 편집 작업의 결과이다. 예언 현상은 사라져가고 왕정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사제직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증가하던 시대에, 예루살렘의 사제들은 제2성전의 필요성에 따라 여러 법과 예식서들을 수집하고 보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단락에는(1-7), 특정한 경우에 이스라엘인들이 드릴 수 있는 또는 드려야 하는 제사의 여러 범주가 소개된다. 그러나 이것은 문외한이나 초보자들을 위한 입문서가 아니라, 이미 사제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일종의 참고 도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편찬한 예식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여러 제사와 의식의 기원이라든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여기저기 내포되어 있는 뜻을 가려내고 이것저것을 비교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들에서 제사의 원칙을 빌려왔고, 그러면서도 그 예식의 틀을 자기들의 세계관,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의식에 따라 새로운 내용으로 채웠음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둘째 단락에는(8-10),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사제직에 임직될 때 거행되는 의식이 서술된다. 이 의식은 결국 탈출 29장에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내리신 지시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래서 이 단락 세 장이 본디는 탈출기에 곧바로 이어지는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특히 이 단락에서는 사제들이 수행하는 중개의 기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성성(聖性)이 요구된다. 그들이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에서 중개자로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단락에는(11-16), 사람이 하느님과 접촉할 수 없도록 하는 부정(不淨), 구체적으로는 성소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부정(不淨)의 여러 가지 범주들이 열거된다. , 부정한 음식의 섭취, 해산에 따른 여인의 부정, 나병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 남자나 여자의 성과 관련된 부정 등이다. 16장은 레위기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구약성서의 성금요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속죄일(히브리말로 욤-키푸르)”의 장엄한 전례가 서술된다.

 

넷째 단락에는(17-26), 일반적으로 성결법(聖潔法)’이라 불리는 규정들이 나온다. 주님께서는 살아계시고 거룩하신(히브리말로 카도쉬”) 하느님이시기 때문에(11,44-5; 19,2; 20,26),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그분의 소유로 성별된(히브리말로 카도쉬.” 11,44-5; 19,2; 20,7.26; 21,6-8) 백성은 그분과의 통교를 수월케 하는 모든 방도를 찾아야 하고, 또 물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이 생명의 통교에 지장을 주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는 피를 먹지 말아야 하고, 모든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거부하며, 하느님을 유일하신 하느님으로서 공경하고, 인간을 그러한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존중하며, 사제직과 제사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축일과 성년(聖年) 곧 안식년과 희년을 성실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레위기 전체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27장은 하느님께 사람이나 물건을 바치겠다고 서원하고, 돈으로 봉헌하거나 또는 그 서원을 무를 때 서원자가 내야 하는 값을 제시한다.

 

3. 레위기에 나오는 주요 개념들

 

문체가 때때로 매우 단조롭고 건조한 레위기는 봉독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다 적지 않은 수의 전문 용어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그 의미를 아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 동시에 히브리적 사고방식의 몇몇 특성과 이스라엘 민족의 제도에 대해서도 먼저 알아두어야 하겠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사제들을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사제들의 모습으로 그려서는 안된다. 명칭이 같다고 해서 이 두 실체가 동일하지는 않다.

 

이러한 레위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전식으로 몇 가지 주요 개념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이것 역시 레위기 전체의 구분에 따라 제사, 사제직, 정결과 부정, 성성의 순서를 따라가고, 첫째 부분에 나오는 제사의 전문 용어들은 가나다순으로 배열한다.

 

(1) 제사와 제물

 

거의 모든 종교에서 제사는 신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이루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래서 종교사에서는 근본적으로 세 가지 관점에서 제사에 관한 연구가 진행된다. 첫째는 신에게 바치는 예물로서의 제사이고, 둘째는 신과의 통교를 이루는 방도로서의 제사이며, 끝으로, ‘속죄(贖罪)’와 신이 베푸는 용서를 목표로 하는 제사이다. 이스라엘의 제사들은 매우 쉽게 이 세 범주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맏물 봉헌은 예물’, 친교제물은 통교’, 그리고 속죄제물과 보상제물은 속죄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정이 바뀌면서 이와 관련된 변화가 나타난다. ,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배라는 엄청난 종교적, 민족적, 정치적 재앙에 대한 숙고를 거듭하면서, 이스라엘은 죄악의 힘과 용서의 필요성에 대하여 더욱 생생한 의식을 지니게 된다. 레위기가 피를 통한 사죄(赦罪)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곡식제물을 희생제물의 보조물로 그 의미를 축소시키면서, 희생제사가 지니는 화해의 구실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가장 거룩한 것. ‘거룩한 것들의 거룩한 것이라 직역할 수 있는 히브리말 코데쉬 코다쉼은 흔히, “지성소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1열왕 6,16) 성소(또는 만남의 천막이나 성전) 안쪽을 특별히 가리키는 장소적인 뜻을 지녔는데, 레위기의 편집자는 이 표현을 하느님께 봉헌되어 어떤 세속적 용도로도 쓰일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데에만 사용한다. , 이 편집자에게 가장 거룩한 것은 근본적으로 사제들의 몫으로만 유보되는 속죄제물과 곡식제물의 일부분만을 뜻한다.

 

. 거룩한 것.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코데쉬는 사람, 장소, 시간, 물건, 제물, 자세 등 여러 가지를 가리키거나 특징짓는다. 아래 ‘(4) 성성(聖性)’ 참조.

 

. 곡식제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민하는 본디 예물통교의 범주에 속하는 제물 전체를 가리켰다(창세 4,3-5; 1사무 2,17). 그러다 후대에 와서는 동물을 잡아서 바치는 것 이외의 제물을 뜻하게 된다.

 

. 기념제물. 곡식제물 가운데에서, 제단 위에서 (향과 함께 또는 향 없이) 불에 태워 바치는 분을 가리킨다. 이 말의 뜻과 이 제물의 목적에 대해서는 2,2 각주 참조. +

 

. 번제물(燔祭物).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올라는 본디 ‘(제단 위에서, 또는 연기로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제사는 사실상 가죽을 뺀(7,8 참조) 짐승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에 살라 바치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굽다, 사르다를 뜻하는 ()’자를 붙여 이름지었다. 이렇게 거의 통째로 하느님께 바치기 때문에 이 번제물은 예물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제사는 고대 그리스, 그리고 기원전 2000년대 중엽까지 팔레스티나 북부지방에 존재했던 우가릿 왕국에서 바쳐졌지만, 다른 셈족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 보상제물(아래 속죄제물참조). 유배 이후에 세워진 제2성전 시대에 거행된 속죄제사와 보상제사는 둘 다 의식은 같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 보상제사에는 저질러진 잘못에 대한 보상으로, 본디 값어치의 오분의 일을 더한 값이 바쳐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제사는 속죄제사보다는 더욱 특수하고 개인적인 경우에 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보상제사는 이스라엘인들이 지냈던 대축제 때에는 드리지 않았다. 어쨌든 이 두 제사 또는 제물은 이스라엘의 독창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 주변의 민족들이나 동시대의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의 것을 찾아볼 수 없다.

 

. 속죄제물. 속죄제사를 보상제사와 실제적으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보상제물참조). 본디는 서로 다른 두 제사였다가 점차 혼합되었는지, 아니면 이름은 두 가지로 불리었지만 실제 제물 자체는 하나였다가 최종 단계의 편집자들이 이 둘을 인위적으로 두 개의 제물 또는 제사로 갈라놓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속죄제사의 제물은 범죄의 정도나 그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 이 제사에서는 피가 가장 큰 구실을 하는데, 그것은 피가 죄의 사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굳기름은 친교제물에서처럼 제단 위에서 불에 태운다. 제물의 살코기는 일반적으로 사제들의 몫이 되지만, 범죄자가 사제이거나 백성 전체일 경우에는 예외이다. 속죄를 받으려고 희생제물을 바치면서 동시에 그 제사의 혜택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제물로써 고의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는 없다. 오직 실수로 지은 죄나(4,2 각주 참조) 부정한 상태로 말미암아 짓게 된 죄 때문에(14,19 참조) 훼손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 예물(곡식제물참조). 히브리말로는 코르반이라 하는 이 명칭은, ‘사제계 법전에서는 모든 종류의 제물, 그리고 제사 외의 방식으로 바치는 것까지 가리킨다(민수 7장 참조). “코르반은 말 그대로는 하느님께(또는 제단에) ‘가까이 가져가는 것을 뜻하지만, 점차 봉헌된 예물또는 봉헌된 물건까지도 뜻하게 된다. 마르 7,11에서 코르반이 바로 이러한 뜻으로 사용된다.

 

. 친교제물. 제물의 굳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 하느님께 바치고, 살코기 일부는 사제들의 몫이 되며, 나머지는 봉헌한 사람과 그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초청된 이들이 성소에서 일정 기간 안에 함께 먹는 제물이다. 이를 화목제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제사는 다른 제사들과는 달리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벌이는 잔치의 성격을 지닌다. 레위기에서는 예식 자체보다는, 봉헌자가 어떤 의향으로 제물을 바치는지에 따라 제물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종류가 있었을 수도 있다). , 감사 또는 찬미의 제물(7,12-15), 서원제물(7,16), 그리고 자원제물이다(7,16). 친교제물은 번제물처럼 우가릿과 고대 그리스에서는 볼 수 있지만, 다른 셈족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 . 만남의 천막과 성전의 지성소 안에는 분향제단이 놓여있었는데(4,7) 그 위에 특별히 만들어진 향을 피웠다(탈출 30,34와 각주 참조). 이 낱말과 같은 어근에서 파생한 것으로 레위기에서 자주 쓰이는 동사가 있는데(‘불에 살라 연기로 바치다’), 이는 번제 제단 위에서 희생제물을 사르는 것을 뜻한다. 이런 낱말의 사용은 하느님께서 향기로운 연기로 당신께 봉헌되는 제물을 매우 즐거이 받으신다고 여긴 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한다.

 

. 향기. 이 낱말은 화제물(火祭物)(아래 화제물참조) 밀접히 병행하여 쓰이는데, 불에 태워진 제물이 향기로운 연기로 하느님께 올라가서, 그분의 노여움을 풀어드림을 말한다(코를 분노의 자리로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의인화가 가능하였다). 이 표현은 본디 바빌론의 대홍수 이야기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제물을 바치는 장면에서 쓰인 아카드말 표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창세 8,21과 각주 참조). 이는 호의적인 신과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봉헌자의 갈망을 드러낸다.

 

. 화제물(火祭物). 히브리말로 이쉐라 불리는 이 말은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 하느님께 바치는 모든 것을 뜻하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넓게는 이런 식으로 거행되는 제사에서 바치는 제물 모두를 가리키기도 한다(이에 반해 번제물은 짐승만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속죄를 위한 제사에서 불에 태워 바쳐진 부분들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이 낱말이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말의 어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히브리말에서는 그 자음과 모음이 (히브리말로는 에쉬)’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화제로 번역함이 옳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본들 가운데에서는개역 한글판 성경전서현대인의 성경에서만 이 명칭을 채택하고(몇몇 우리말 사전에도 올라가 있다),공동번역 성서를 비롯한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살라 바치는 제사(제물, )’ 등으로 내용을 풀어 옮기고 있다. 물론 듣기에 따라서는 이 화제(火祭)’를 다른 말과 혼동할 염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번제처럼 구약성서의 제물과 제사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2) 사제직

 

레위기에 나타나는 사제직의 모습은 여러 세기에 걸쳐 발전한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 등 다양한 영향들의 결과이다.

 

처음에는 의식을 거행하고 하느님 뜻을 전달함으로써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중개하는 사제들의 구실이 어떤 특정 전문 계급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가문의 우두머리로서 직접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창세 8,20; 15,9-0; 22,1-4).

 

그러다 (예컨대 1사무 1-3의 실로, 판관 18,19-0.27-1의 단과 같이) 경신례가 거행되는 곳을 중심으로 성소의 종교예식을 집전하고 전통과 의식을 보존하는 사제 가문이 태어나게 된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사독이라는 사제 가문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가문은 이스라엘 선조 시대의 임금이며 사제였던 멜기세덱과(창세 14,17-20) 관련을 가졌을 수도 있다. 예루살렘이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중요성을 더해 가면서 다른 성소들의 많은 사제들이 그곳으로 모여들게 된다. 기원전 620년대에는 유다 왕국의 요시야 임금이 이스라엘의 경신례를 예루살렘으로 통합시키기로 결정하자, 지방에 남아있던 사제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렇게 여러 부류의 사제들이 모여들자, 이미 자리를 잡은 이들과 새로 온 이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2열왕 23,8-9).

 

이미 솔로몬이 통치하던 시절, 그 기원이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은 두 사제 가문, 곧 에비아달과 사독 가문 사이에 주도권 싸움이 일어난다. 이 대결은 사독 가문이 예루살렘 사제직의 경쟁자들을 거의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으로 우선은 결말이 난다(1열왕 2,26-27). 그러다 유배시대에, 레위 지파에 속하는 아론이 첫 대사제이며 모든 사제직의 출발점으로 제시되고, 위 두 가문을 이러한 아론과 관련지음으로써 이들 사이의 갈등은 모두 끝나게 된다(1역대 24,1-6).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뒤(기원전 538) 유다인들은 독립 왕국을 복구하지 못한다. 독립 국가의 정치 체제와 더불어 정치 지도자들이 사라짐으로써 백성의 운명은 이제 종교 지도자들 곧 성직자들의 손에 달리게 된다. 이와 함께 대사제로 불리는 사람이 점점 임금과 같은 구실을 하게 된다. 그는 왕관과 비슷한 것을 쓰고(8,9), 유배 이전의 임금처럼 기름부음을 받는다(8,12). 그러다 아리스토불 1(기원전 104-03) 때부터는 그때까지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던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사제가 결국 임금의 칭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사제직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발전을 거쳐오면서 변하지 않고 남은 것, 곧 중개자라는 사제의 특성이다. 사제는 축성을 받아 거룩함의 영역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권한을 지닌 중개자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정결과 부정

 

부정(不淨)의 개념은, 종교 역사가들이 서로 매우 다른 민족들에게서도 발견해 내는 터부또는 금기라는 개념과 상당히 비슷하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안정된 규칙들로 둘러싸이고, 미지의 것이나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로부터 보호받는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사람들은 온갖 예외적인 것이거나 비정상적인 것이거나 비관습적인 것, 그리고 모든 변화와 변천은 하나의 위협 또는 전염성을 지닌 부정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인간은 일정한 간격을 둠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거나, 또는 자기 몸을 정결케 함으로써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부정은 어떤 범법행위가 아니다. 사실 출산이라든가 죽은 이를 염습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행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의무가 당사자에게는 필연적으로 부정의 상태를 가져온다. 이러한 상태는, 경신례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신을 정결케 함으로써 그 부정을 벗어야 하는 것이다. 부정하면서도 정결의 상태에 있는 양 행동할 때, 비로소 범법행위가 성립된다(레위 15,31).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죄를 특징지으면서 이 부정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데, 여기에서는 본 의미의 도덕을 거스르는 행동, 곧 죄까지도 포함된다(에제 22,7 참조). 사실 죄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훼손시키는 가장 큰 부정인 것이다.

 

그런데 레위 11-15장에 나오는 금령들이 이처럼 법으로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이 계명들이 더 이상 자발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레위기는 이것들을 계약의 하느님, 곧 생명의 주님과 관련짓는다(11,44-45). 바로 이분을 위하여 사람은 자기의 정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이러한 금령들의 가치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마르 7,1-3; 사도 10; 1고린 6,12-20).

 

(4) 성성(聖性)

 

성성 또는 거룩함은 레위기만이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개념은 바로 앞에서 말한 정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성은 근본적으로 초월적이신 하느님, 절대적으로 다르신 분, 비교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으며 표현할 수 없으신 분, 인간으로서는 다다를 수 없이 완전히 타자(他者)이신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신비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도덕적인 본질을 규정하기보다는, 그분께서 인간이 알고 있거나 상상하는 모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신 분이심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초월적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께 접근하도록 허락하신다(23). 이것이 그분 성성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인간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게 해주시고 당신의 뜻을 알려주신다(19). 그분께서는 당신의 성성을 떨치시면서, 동시에 인간이 당신의 그 성성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9,2).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이 민족이 다른 민족들과는 다르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당신과 통교를 이룰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따로 떼어놓으시고,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고 구분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이 선택은 이스라엘이 수행해야 하는 도덕적인 의무를 내포하고 있다. 이 의무는 선택된 백성이 지니게 된 성성의 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과 이루는 이 생명의 통교 안에 계속 머무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 성성은 이러한 통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에게도 하느님의 성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을 지속적으로 성화시키도록 인도해 준다.

 

그런데 성성 또는 거룩함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제외하고,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만이 아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표현하는 모든 사람들과 물건들이 또한 거룩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하느님의 영역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고, 그래서 정상적이지만 세속적인 행동을 삼가야 하는 사제들과 같은 사람들 역시 거룩하다(21-22). 그리고 세속적인 일을 삼가야 하는 주님의 날, 곧 안식일과 같은 시간이나(탈출 20,80-11), 속된 것 또는 낯선 것이 들어와서는 안되는 성소와 같은 장소(히브 9,7-8; 사도 21,28), 그리고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없고 오직 축성의식에만 쓸 수 있는 성유와 같은 물건도 거룩하다(탈출 30,23-33).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성이라는 개념은 세 가지 근본 의미를 지니고 있다. , 모든 속된 것으로부터의 분리, 하느님과의 통교를 이루기 위한 축성,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한 봉사에 헌신함이다.

 

4. 레위기의 의의

 

레위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후대에 나타났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다른 책들에 현저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또한 이 책은 거의 이스라엘 제사의 기술적인면만을 서술하기 때문에, 신약성서에서도 그렇게 자주 인용되지는 않는다. 그 가운데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은 무엇보다도 성결법에(17-26) 나오는 도덕적인 법규들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9,18의 말씀을 신명 6,4-5에 나오는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사랑과 함께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제시하신다(마태 22,39; 마르 12,31; 루가 10,27; 로마 13,9; 갈라 5,14 참조). 그리고 예컨대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된다.”거나(19,17), 이방인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9,34) 계명은 이미 그리스도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책의 영향을 인용 횟수에 의해서만 헤아릴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비록 간접적이라 할지라도 레위기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사실 신약성서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그분의 희생제사에 대한 고찰의 배경에는, 레위기에 편찬된 규정들에 따라 수행된 예루살렘의 경신례가 있다. 레위기가 없었다면, 바오로 사도나 히브리서가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해석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많은 요소들이 결여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레위기는 오늘날 구약성서의 책들 가운데에서 가장 덜 읽혀지는 책일 수 있다. 사실 이 책은 가까이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때로는 신약 곧 새계약을 통해서 효력을 상실한 옛 관행들만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아직도 이런 옛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예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웃 민족들에게서 종교적 몸짓을 취하거나 또는 새로운 몸짓을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자기들이 거행하는 경신례를 자기들이 고백하는 신앙과 일치시키도록 노력하였다. 경신례는 거룩한 하느님과 거룩한 백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화해와 통교를 표현하고 또한 실현시켜야 한다. 예언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바로 이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투쟁하였던 것이다. 축제와 의식과 몸짓은 사람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그 실행 방법에 따라 시대와 장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공동으로 거행하는 축제를 통하여 자기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원의와, 그때 사용되는 몸짓 언어는 그대로 존속한다. 예언자들이 잘못 거행되는 경신례에 혹독하게 비판을 가했다는 사실도, 유다교가 성전을 상실하였다는 것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지니는 유일하고 결정적인 가치를 인식한 그리스도교에서 더 이상 레위기에 서술된 의식을 거행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 책이 성서 안에서 차지하는 그 위치와 의의를 폐기시키지 않는다.

 

레위기가 경전의 일부를 이룸은, 종교적인 몸짓으로 자기의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필요성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통교를 당신의 말씀 안에서 드러내시고, 또한 당신의 삶으로 실현시키시는 영원한 대사제,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히브 4,14 참조) 오심을 예고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1. ‘레위기라는 제목은 이 책이 근본적으로 사제들, 레위라는 사제 지파의 구성원들과 관련된 것임을 드러낸다. 이 책 전체가 사제계 전승에 속한다. 오경 입문 참조.

2. 그러나 레위기의 몇몇 구절에도 주님께서 계속 시나이산 위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있다(25,1; 26,46; 27,34).

3. 레위기에서는 경신례와 사제직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근본적인 중개를 한다. 구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임금이나 예언자에게서 이 중개의 역할을 찾기도 한다.

민수기 입문

 

 

칠십인역을 번역한 이들은 이 책의 첫머리에 이스라엘인들의 인구 또는 병적 조사가 나오기 때문에, 이 책에()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이것을 우리 나라와 일본에서는민수기(民數記)로 옮긴다.

 

1. 민수기의 구성

 

민수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1,1-10,10)에서는 주로, 탈출기와 레위기에서 서술된 제도들을 재론하여 그 설정을 완료한다. , 인구 조사(1-4), 성소의 봉헌과(7) 레위인들의 봉헌(8) 등이 그것이다. 두 번째 부분(10,11-25,18)에서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을 떠나(10,11) 광야를 횡단하는데, 그들은 이 곳에서 사십년 동안 떠돌아다니게 된다(11-14; 16-17; 20). 그들은 마침내 모압 땅 경계에 있는 요르단 강 동녘에 다다르게 된다(21). 바로 여기에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일이(22-24) 일어나고, 이스라엘이 브올의 신 바알을 섬기는 배교가 벌어진다(25). 새로운 인구 조사로 시작되는 민수기의 세 번째 부분(25,19-36,13)에는 무엇보다도 이미 정복한 땅(32), 또는 앞으로 정복하게 될 땅을 분할하는 지침이 들어 있다(27; 34-36). 또한 이 단락에서는 미디안족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원정과(31),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나와 요르단 강 가에까지 이른 그 여정의 요약도 볼 수 있다(33).

 

이렇게 볼 때, 민수기는 시나이 광야에서(1,1) 약속의 땅 문턱에까지 이르는(36,13)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은 가끔 복잡하고 세부적인 내용들로 가려진다. 그리고 이 책에는 법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것들은 이야기 속에 어우러져 있고(17,3-5; 31,21-47), 또 다른 것들은 후대의 편집자들에 의해서, 문맥과 관련 없는 듯이 보이는 여러 곳에 끼워져 있다(5; 6; 9; 15; 18; 19; 28-30).

 

오경 비평에 관한 학설들의 도움으로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세부 내용을 해설할 수 있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 본문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도 있다(오경 입문 참조). 그러나 이 학설들은 이 책의 통일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 통일성의 원칙은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이 책의 히브리 말 제목인 광야에서라는 말이 그것을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다.1)

 

2. 광야의 이스라엘

 

사실 민수기에 모아진 거의 모든 본문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티나의 남쪽 및 남동쪽과 경계를 이루는 광야에서 지낸 기간과 관련이 있다. 역사가들이 이 기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알아 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가장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바는, 반유목민 생활을 하는 여러 부족이 시나이 반도와 요르단 강 동녘 땅의 남쪽에서 만나 조금씩 합쳐져 한 민족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기원전 1200년대 후반에 이집트에서 도망쳐 나왔고, 일부는 다른 곳에서 모여들었다. 이러한 과정이 정확하게 얼마 동안 걸렸는지를 단정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성서를 따라 이 과정을 특정 장소들과 관련지을 수는 있다. 바로 이 곳들을 중심으로 민수기의 세 부분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 시나이 산의 거룩한 곳(1-10), 카데스 광야의 오아시스들(13-14; 20), 그리고 요르단 강 하류 계곡에 있는 모압 벌판이(21-36) 그것이다.

 

어떤 민족이 이러한 방식으로, 특히 상당히 고립된 장소에서 탄생하게 되면, 그 형성 과정은 일반적으로 이웃 민족들의 문헌에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래서 이집트의 문헌들과 고고학적 유물들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이라든가 광야 생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드러내 보여 주지는 않는다. 다만, 이스라엘 부족들의 움직임을 기원전 2000년대 내내 팔레스티나 쪽을 향해서 간 반유목민들의 이동이라는 전체적인 윤곽 속에 자리잡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기원은 이 백성을 이루는 부족들의 기억 속에 지속적인 추억을 남겼다. , 전쟁에서 거둔 승리와(21; 31) 패배(20,21; 21,1), 여러 가지 사건(11,1-3; 25,1-6), (14,23-24; 16,1; 32,6 등과 같은 곳에서 엿볼 수 있는) 부족들 사이의 갈등, 그리고 이스라엘 부족들이 걸어간 여정(21,10-20; 33,1-49) 등이다. 이 여행 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동 지방의 유목민들이 실제로 다니던 길과 일치한다.

 

이스라엘이 민족으로서 존재를 확고히 하기 시작하는 이 시기부터, 성서는 전체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데에 전념한다. 사막에서 머무른 것은 이스라엘에게, 이후 모든 세대에 가치가 있는 특권적인 종교 체험의 마당이었다. 그 때부터 이 시기는 때때로, 부분적으로라도 다시 돌아가야 하는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성서에는 이 특별한 시기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들어 있다. ,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약혼 시기라는 호세아의 해석(호세 2,16-25. 예레 2,2-3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교육 기간이라는 신명기의 해석(신명 8,2-6), 그리고 이스라엘이 자기 하느님께 계속해서 부정(不貞)을 저지른 시기라는 에제키엘의 해석(에제 20) 등이다. 구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전체적으로 이 주제만을 다루는 민수기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을 드러낸다. 첫째, 광야의 이스라엘은 한 곳에 지속적으로 정착하지 않고 여정을 계속하는 백성이었다. 둘째, 이스라엘은 외부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혼자 떨어져 사는 백성이었다. 끝으로, 이 백성은 아직도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형성 과정 중의 민족이었다.

 

3. 형성 과정 중의 민족

 

민수기는 탈출기의 이야기들을 계속하는 일련의 설화들로 그 틀이 짜여져 있다. 그래서 탈출기에서처럼 민수기에서도 세 가지 전승을 구분해 낼 수 있다. 곧 사제계, 야훼계, 엘로힘계 전승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잘 혼합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민수기의 이야기는 중복 없이 일관성을 유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전승은 무엇보다도 그 신학적 의도에 따라 서로 구분된다. 야훼계와 엘로힘계 전승의 관심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첫 세대의 역사를 설명함으로써, 이를 듣거나 읽는 이들이 자기들의 시대를 위한 교훈을 끌어 내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사제계 전승은(몇몇 경우에서는 엘로힘계 전승도 마찬가지이지만) 자기가 내놓는 제도들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들의 기능을 설명함으로써, 그 제도들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를 지닌다.

 

이 세 전승은 광야 횡단 중에 일어난 근본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한다.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은 가끔 극적인 위기를 동반함으로써, 이 시기는 결국 새롭게 초점을 맞추어 수정하기 위한 시간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처음 두 위기는 탈출기에 나타난다(탈출 17; 32). 그리고 민수기에서는 적어도 아홉 개의 위기를 볼 수 있다. , 11장에 둘, 12장에 하나, 13-14장에 하나, 16-17장에 둘 또는 셋, 20,2-13에 하나, 21,4-9에 하나, 25장에 하나 또는 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행진하기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모험을 계속하기를 거절한다. 그러한 모험 앞에서 그들은 겁을 먹고 그것이 성공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지도자들의 권위와 결정은 물론 하느님의 계획까지도 부정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직접 나서시어 그 지도자들, 나아가 그 세대 전체를 백성 가운데에서 잘라내셔야 하기에까지 이른다. , 한 세대 전체가 단죄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 계획의 실현이 한 세대만 늦추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마침내 주님께서 정해 주신 땅에 다다르게 된다.

 

민수기의 이야기 전체가 이 목표를 향해서 집중된다. 몇몇 시도가 실패로 끝나지만(14,39-45; 20,14-21),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의 주검이 광야를 뒤덮어도(14,29; 26,65), 이 민족은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을 계속한다(33). 여기에서 요르단 강 동녘의 점령이(21,21-35) 가나안 땅에 성공적으로 들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의 전주곡이 된다.

 

4. 모세

 

이 기나긴 여정은 모세라는 지도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모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는 세 전승이 일치한다. 그러나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 중요성을 드러낸다. 엘로힘계 전승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야훼계 전승도) 모세에 대해서 특히 생생하고 풍부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전승이 묘사하는 모세는 약점을 보이기도 하고(16,15; 20,10-12 참조) 실망하기도 하는 사람으로서(11,11-15 참조) 매우 인간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주된 특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힘들고 보답 없는 사명에 대한 철저한 성실성일 것이다. 보답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 반항까지 하는 백성을 위해서, 그는 여러 번 주님께 기도하여 그들을 구한다(12,13; 14,13-19; 16,22; 17,10-13). 그는 주님과 특별한 친교 안에서 살아가는, 기도하는 사람이다(12,6-8). 바로 이 점이 그를 모든 예언자 위에 있게 하고, 그를 예언자의 원형으로 내세우게 하는 것이다.

 

사제계 본문들이 그리는 그의 모습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경우, 모세는 단순히 주님의 뜻을 전달하는 비인격적인 대변인일 따름이다. 어떤 규정에 대해서 말할 때, 특히 그것이 후대의 것일 경우, 모세의 이름은 결국 그 규정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인장의 구실만을 한다. 사제계 본문들은 더 나아가서 모세 옆에 그의 형이면서 대사제인 아론을 세운다. 아론의 직무는 흔히 모세가 하느님의 지시를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릴 때에 그 옆에 서 있는 것으로 그치기도 한다. 사제계 본문들이 때때로 문법적인 수정도 거치지 않고(9,720,10과 그 곳의 각주들 참조) 모세 이름 곁에 아론의 이름을 그냥 덧붙인다는 사실은, 이 본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곧 모세가 죽은 뒤에 확정된 상황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아론의 아들로서 대사제인 엘르아잘이 하느님의 계시를 독점적으로 받으며, 백성에 대해서 가장 높은 권위를 지닌다는 사실이다(27,21).

 

5.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사제계 전승의 전망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를 쓰는 것이 바로 사제계 본문들의 특징이다. 이 본문들의 의도는 하느님 백성의 제도들을 서술하는 것이며, 이는 그 신학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제도들은, 여러 규정과 인구 조사(1; 4; 26), 여정 중의 출발과(10,13-32) 정지 명령(2), 모든 요소가 일치하여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는 이야기들,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서술 안에 들어 있다. 사제계 본문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제도가 이미 시나이 산을 출발하기 전에 만들어졌음을 전제한다. 반면에 야훼계와 엘로힘계 전승에서는 거의 모든 제도가 앞으로 설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써, 사제계 전승에서는 이스라엘의 존재가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되는 이 제도적인 틀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 밖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 제도들을 정당화하는 신학은 특히 풍부하여, 여기에서 그 몇 가지 요소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사제계 전승에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수행하는 민족도, 국제 정치적 생존에 얽매인 국가도 아니다. 다만 주님에 대한 경신례에 헌신하는 공동체일 따름이다.

 

둘째, 이러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결정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규정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통치되는 백성이다.

 

셋째, 이스라엘은 적어도 가나안 땅에 입주할 때까지는 여정 중의 백성이다. 그래서 사제계의 어떠한 본문에도, 본디 유목민 생활을 위해 구상된 성소가 한 곳에 정착되리라고 예상되지 않는다. 다른 어떤 거룩한 곳도, 한 곳에 고정된 어떤 성소도, 주님의 현존을 독점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현존하기로 약속하신 유일한 곳은, 당신 백성의 한가운데, 곧 어떤 곳에 임시로 설치된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 또는 여정 중에 있는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은 천막 안 거처이다.

 

넷째, 하느님의 이러한 항구적인 현존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그들에게 무서움을 불러일으킨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그 한가운데에 머물러 계시는데, 죄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순간마다 죽음의 위험에서 어떻게 무사할 수 있는가(17,28)?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제도가 바로 그 위험을 막아 준다. 특별히 선택된 이 사람들이 백성과 하느님의 현존 사이에서 보호막 구실을 한다(1,53; 17,11). 이들만이 유일하게, 하느님의 분노가 공동체를 짓누르게 만드는 죄에 대한 용서를 얻어 낼 수 있다(8,19; 17,12). 이 두 가지가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기능으로서, 이것들 없이는 공동체가 살아남지 못한다(16,3-8; 18,8-19).

 

6. 다른 전승들에 나타난 하느님의 백성

 

야훼계와 엘로힘계 전승에 속하는 본문들 안에서 이루어진 종합적인 신학을 발견해 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는, 사제계 전승이 제시하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충하고, 이 백성의 전체적인 역사를 설명해 주는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가 발견된다.

 

이스라엘의 지파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도 남쪽 지파의 전통들을 따르는 야훼계 본문들은, 역사의 인간적인 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창세기에서처럼 이 본문들은 하느님께 복받은 이 백성의 운명이 지니는 보편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22장과 24). 이것들은 다윗 왕조의 도입을 준비하기도 하는데(25,7.17.19), 이 왕조가 바로 이스라엘의 기원 역사를 마무리하는 제도인 것이다.

 

다른 두 전승보다 훨씬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엘로힘계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치에 대한 깊은 의식, 온갖 분리주의적인 경향에 대한 단죄(16,12-34; 32),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언 제도에 대한 첫 윤곽을 지적할 수 있다.

 

7. 민수기의 현시성

 

이렇게 민수기는 거룩한 백성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는 동시에, 이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 오른 그 첫 단계에 대한 매우 사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로 이 두 가지 이유로 민수기가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을 이상적으로 그린 모습에서 새 계약의 하느님 백성도 항상 하나의 표본을 보게 된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낸 그 제도들을 맹목적으로 모방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들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항구적인 원칙이 있는데, 하느님 백성의 삶은 바로 이 원칙들에 따라 영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여정 중에 있는 백성이고 예언자들의 백성이며,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통치되고 주님을 위한 경신례에 헌신하는 공동체임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민수기를 계속 필요로 한다.

 

형성 과정 중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일으킨 반항과 반역의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 백성은 자기들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여러 시편과 예언자가 광야 시절에 일어난 사건들을 상기시킨다(시편 78,17-40; 81,12-17; 95,8; 106,14-33; 에제 16; 20; 23; 미가 6,3-5 ). 그리고 같은 뜻에서 바오로 사도도 고린토의 신자들에게 탈출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이 이런 일들을 당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고가 되었으며 그것이 기록에 남아서 ……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었습니다”(1고린 10,11. 이 밖에 히브 3,7-4,13; 유다 5.11 등도 참조). 물론 오늘날의 교회가 민수기의 이야기들 속에서 자기 역사를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위기는 일정한 법규들과 관련된 것들로서, 이 법규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모여든 신앙인들의 모든 공동체에게도 분명히 유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러한 위기들에 대한 민수기의 숙고는 교회가 이제 나름대로 겪어야 하는 위기들에 더욱 잘 대응해 나아가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사제계 본문들이 말하는 제도들의 체제는 백성의 죄에 대한 예리한 의식에 그 바탕을 둔다. 백성의 반항은 이러한 죄의 상태를 드러내 보여 준다. 그러나 죄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인 현실이며 만성적인 악이다. 민수기가 전하는 가장 두드러진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죄인들로 이루어진 이 백성을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당신의 복을 온 인류에게 전하고 당신께서 직접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따로 떼어 놓으신 백성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구성원들의 죄스러운 현실을 간과하지 않고 자기의 성화(聖化) 소명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하여, 늘 새롭게 상기해야 하는 메시지이다.

 

 

1) 유다인들은 일반적으로 히브리 말 본문의 첫 낱말을 책의 제목으로 삼는다. 그래서 민수기의 경우에는 (그리고) 말씀하셨다가 제목이 된다. 그러나 현대의 히브리 말 성서에서는 이 첫 낱말이 아니라, 위와같이 그 넷째 낱말을 제목으로 쓴다.

신명기 입문

 

 

1. 오경 안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신명기 신명기는 거의 대부분, 오경을 이루는 사대 전승 가운데 하나인 신명기계 전승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전승들은 신명기의 끝부분인 31장에서부터 다시 나타난다.

 

신명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 사건의 발전 과정은 찾아볼 수 없다. 시작하는 장소도 요르단 강 건너편 모압 땅이고(1,5), 모세가 죽는 곳도 마찬가지이다(34,5). 신명기는 내용상 오경의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부분적인 단절과 반복을 제외하면 130장은 모세가 백성에게 한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 곧 모세가 약속의 땅 문턱에서 죽기 전에 남기는 일종의 영적 유언과 같은 것이다.

 

특히 신명기의 권고적, 교훈적 문체에서 이 책의 통일성과 독창성이 잘 드러난다. 똑같지는 않지만 매우 비슷한 표현들이 신명기 안에서 자주 나타난다. ‘주님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을 차지하여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선택하시는 곳에서 주님을 찾아라’,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준 계명과 율법과 규정들을 지켜라’,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겨라등이다. 이와 같은 문장들은 여호수아서, 판관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등, 신명기계 역사서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들이다. 이러한 문학적 유사성은 신명기와 오경의 다른 부분들 사이의 통일성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런데도 신명기가 오경의 앞선 네 책과 연결된 이유는, 모세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하나의 거대한 문학 작품을 형성하려는 데에 있다.

 

2. 계약에 관한 설교

 

신명기는 그 독특한 수사학적 문학 양식으로 특징지어진다. 1226장은 실천해야 할 일종의 법률과 규정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신명기(申命記)”라는 제목, 곧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이 붙인 두 번째 법(deuteronomion)’(17,18과 각주 참조)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작품에 썩 어울리는 제목은 아니다. 신명기의 중심 부분이 법령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법전의 문학 양식을 지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명기가 다루는 다양한 주제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탈출 2023장의 이른바 계약의 책의 반복으로서, 거기에 나오는 가르침이 권고, 호소, 경고 등의 형태로 제시된다. 예컨대 히브리인 종의 해방에 관한 가르침은(15,12-18) 탈출 21,2-6의 법을 되풀이하면서도, 그 어조는 법률가보다는 교리 교사 또는 설교가의 것이다.

 

가르침의 대상은 온 이스라엘 백성이다(1,1; 34,12). 그런데 특이한 점은 대상을 너희로 번갈아 부르는데, 자주 같은 문단 안에서, 심지어는 같은 문장 안에서까지 뚜렷한 이유 없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6,1-3을 보면, 우리말 번역에서는 선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너희(1) 시작하여 (2-3) 바뀌었다가 다시 너희(3), 그러고서는 다시 (3) 바뀐다(다음 쪽 윗부분 참조). 창세기가 여러 전승이 혼합하여 이루어진 산물인 것처럼, 신명기 역시 두 가지 병행 전승이 합쳐진 결과일까? 그러한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 쓰인 단락들을 따로 떼어 놓을 경우, “너희가 쓰인 단락들 자체만으로는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희-단락-단락을 보충하고 발전시키는 첨가 부분으로 보인다. 이 같은 현상은 여러 단계를 거치는 문학 형성 과정을 잘 보여 주는 표시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라고 하는 설교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대화 상대자로 불린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는 점이다(예컨대 6,4-5 또는 9,1 참조). 이렇게 큰 집단을 라고 부르는 용법은 가르침의 문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온 백성이 마치 한 사람처럼 마음을 모아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전례에서 유래한다는 설명이 더 가능성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짐 산과 에발 산 아래에 있는 세겜 성소에서 거행되는 전례에 관한 언급이라든가(27,11-14), “일곱 해마다, 곧 탕감의 해로 정해진 때마다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주 너의 하느님 앞에 나아가려고 그분께서 선택하시는 곳으로 모여 올 때, 너는 이 율법을 온 이스라엘 앞에서 똑똑히 읽어야 한다.”는 명령에는(31,10-11), 온 백성이 세겜에 모여 주님의 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기로 다짐하면서, 주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하는 축제의 기억이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너희의 혼용은 우리말 번역에서 사정을 잘 모를 경우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 성서에서는 일관되게 너희로 수정하여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명기의 이러한 특성을 가능한 대로 존중하기로 한다. 다만 한 문장에서 너희가 뒤섞임으로써 우리말의 흐름을 막거나 이해를 어렵게 할 때에는, 때때로 각주에 사정을 밝히고 문맥에 따라 또는 너희로 통일시켜 번역한다.

 

여호 24장이 마치 단 한 번 일어난 일처럼 들려 주는 세겜의 집회도 실제로는 정기적으로 되풀이된 계약 갱신의 전례를 회상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전례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 백성의 역사 회고(2-13), 주님만을 섬기라는 권고(14-15), 백성의 약속(16-24), 법률의 선포와 계약 체결(25-26), 증인의 채택(26-27). 그런데 신명기의 전체 구조도 이와 매우 비슷한 순서를 따른다 : 과거의 회고와 권고(1-11), 법률의 선포(12,1-26,15), 상호간의 약속(26,16-19), 축복과 저주(27,1-30,18), 증인의 채택(30,19-20). 그런데도 신명기의 설교가 세겜에서 행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세가 요르단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는 전승을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긴 설교는, 왕정 시대 이전에 세겜에서 거행되었던 예식을 잘 반영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왕정의 등장과 함께 이 계약의 축제는, 특히 예루살렘에서 다른 축제들 때문에 그 중요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계약의 법에 관한 가르침은 계속되었다. 이 가르침이 공동체적 성격을 띤 를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의 책임이 강조되는 너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원래의 전례적 상황에서 벗어날 때였을 것이다.

 

이 가르침을 전하는 이의 말투를 보면, 그의 역할이 예언자의 역할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예언자는 주님께서 직접 내리신 말씀을 그분의 백성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곧 하느님께서 로 말씀하시는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모세는 자신을 가리키려고 일인칭을 쓰고, 주님을 부를 때에는 삼인칭을 사용한다(예컨대 9,9 이하). 신명기의 본문들은 서슴없이 모세의 중개자 직분을 강조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법을 계시하시려고 상대하는 사람이 바로 모세이며, 이 법을 백성에게 전달하고 설명하라는 명령을 받는 이도 모세이다(5,6; 6,1; 9,910,5). 그런데 모세의 이 중개 역할은 이스라엘에서 레위인들에게 계승된다. ‘열두 지파에게 내린 축복, 레위인들이 야곱에게 법규를,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33,10). 계약 갱신 축제 때에 율법을 봉독하라고 모세가 명령한 이들도 레위인들이고(31,10-11), 성대한 전례에서 모세와 함께 설교자로 등장하는 이들도 바로 그들이다(27,9). 분명 모세는 계약의 법을 가르치는 데에 창시자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레위인들이 충실히 이 직무를 계속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모세의 이름으로 전함으로써 지속성과 권위를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후대의 상황들을 살펴보면, 레위인들이 새로이 나타나는 여러 가지 유혹과 관련하여 전승을 발전시키고 늘 새로이 현실화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약속의 땅에 자리잡은 백성의 교만(8,11-20), 가나안 종교 의식의 유혹(12,2-3), 임금의 전제주의(17,14-20), 절망적인 유배 상태(4,25-31) 등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유효한 법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근본과 핵심적인 요구를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해를 돕고 마음을 열어 주며, 그들이 주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한 생활 자세를 가지도록 하려고, 신명기는 지혜 문학적 가르침을 사용한다(4,5-8과 잠언 2,6; 4,40과 잠언 3,2; 8,5와 잠언 3,11-12; 16,19와 잠언 17,23 등 참조).

 

이렇게 신명기는, 모세에게 그 근원을 두고, 약속의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바빌론 유배에 이르기까지 권고와 경고와 약속의 말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한 레위인들의 설교가 점차적으로 문서화한 거대한 작품이다.

 

3. 개혁 문서

 

이 긴 문학의 주요 형성 단계는 어떠한 것들인가? 이미 교부들도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던 중요한 발견에 의해, 신명기가 처음 알려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다. 2열왕 22장은 요시야 임금 제18년에, 곧 기원전 622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책”(2열왕 22,8.11) 또는 계약 책(2열왕 23,2.21)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이 책에 담긴 경고에 충격을 받은 임금은 온 백성을 불러모아 장엄하게 계약을 갱신하고, 종교 개혁을 선포한다. 그런데 이 개혁의 내용은(2열왕 23,4-20) 신명기의 기본 요구와 일치한다. 곧 지방에 있는 모든 성소를 파괴하고 모든 예배를 예루살렘으로 집중시키는 것이다(신명 12). 따라서 요시야가 선포한 문서는 원래의 짧은 신명기 원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 책의 발견이 사람들의 놀라움을 불러일으킨 점으로 보아, 분명히 발견된 때와 가까운 시기에 형성된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이보다 1세기 이전 히즈키야 임금이 행한 예배의 정화 역시 예루살렘으로 예배가 집중됨을 보여 주고 있는데(2열왕 18,4.22), 이 예배 정화의 기초가 되는 문서는 없다. 따라서 신명기의 초본은 아마도 히즈키야의 개혁이, 다시 우상 숭배를 번성하게 한 므나쎄의 치명적 통치 아래 실패로 돌아간 시기인(2열왕 21) 기원전 7세기 전반부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옛 이스라엘의 정통 신앙 전승을 근거로, 종교 혼합주의와 사회적 무질서에 대항하여 싸우는 수많은 레위인들의 개혁적 성향을 드러낸다.

 

이 레위인들은 대부분,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기원전 722년에 수도를 함락하기 직전, 그 곳을 떠나 피신한 사람들이었다. 바로 이들이, 기이하게도 잊혀져 있다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알려지고 이어서 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전승을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집중시켜, 세겜에서 행하여졌던 옛 계약 의식을 새로이 함으로써, 신명기는 모세에게 내린 계시에서 비롯된 계약의 윤리를 왕정 시대에 복구시켰던 것이다.

 

4. 신명기의 완성과 구조

 

요시야가 행한 개혁의 기초가 되었던 문서는 계속해서 보충된다. 이러저러한 계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다양한 권고들이 펼쳐지고, 경고가 강화되기도 하며(28,45-68 참조), 설교가 삽입되고(4,15-31 참조), 동일한 주제와 관련된 오래된 단편들이 덧붙여지기도 한다(5,6-22 또는 27,11-26 참조).

 

그리고 룻기를 빼고 여호수아서에서 열왕기까지를 포함하는 이른바 전기 예언서의 틀을 잡은 이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신명기계 편집자가, 이 책의 서론 구실을 하는 설교를 덧붙이고(1-3) 새로운 결론 부분을 보탠다(31-34). 이 결론은 모세에서 유배까지 이르는 선택된 민족의 역사, 곧 열왕기까지 펼쳐지는 긴 역사로 넘어가는 것을 수월하게 해 준다.

 

이렇게 완성된 신명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그리고 이어서 오경 전체의 종결 구실도 하는 결론 대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두 개의 설교로 시작되는데 하나는 서술적 문체(1,6-4,44), 다른 하나는 훈계적 문체로 되어 있다(4,45-11,32).

2 법령들과(12-26), 몇몇 전례문(27-28).

3 마지막 훈계(29-30).

신명기와 오경의 결론모세의 죽음에 관한 전승들(31-34).

 

5. 신명기의 주제들

 

신명기가 비록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자료로 형성되었지만, 이 책은 일관되고 전통에 충실한 한 집단의 묵상과 가르침을 드러낸다. 따라서 신명기 안에 다양한 자료들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의 주요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신명기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에 열쇠가 되는 구절은 아마도 29,28의 말씀일 것이다: “감추어진 것은 주 우리 하느님의 것이지만, 드러난 것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것이니, 우리는 이 율법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신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 민족의 선택, 생활 전반에 걸친 실천의 요구 등, 신명기의 중심 주제를 요약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1)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6,4). 이 말씀 안에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의 출발점이자 중심이 되는 기본 내용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우리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신명기에서 인류의 창조자로 소개되시기도 하지만(4,32), 그분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 백성의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분으로 인식된다. 신명기는 이러한 역사에 관해서 몇몇 일화밖에 들려 주지 않지만, 설교 내용 안에 언제나 중요한 과거의 일들이 언급된다. 성조들에게 내린 약속(4,31), 이집트 탈출(7,19), 호렙 산에서의 율법 부여(5,5), 광야의 횡단(8,2), 그리고 행복한 삶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4,40; 1,25). 모세의 연설에서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로 나타나는 이 마지막 단계가, 신명기 저자에게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명심해야 할 하느님 행동의 일부이다(4,9). 이 사건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섬기는 하느님의 권능을 똑똑히 보았다. 아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과 당신의 행동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신 것이다(29,3). 그래서 먼 옛날부터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삶 안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회고하는 신앙 고백이 신명기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신앙 고백은 때로는 명시적으로(6,21-23; 11,2-3; 26,5-9), 때로는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건들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성을 드러내는 큰 표지이다. 또 다른 표지는 주님의 대변인을 통해서 주어진다. 모세는 이 대변인 역할을 유일하게 수행한 인물이다(34,10.11). 그리고 모세가 선포한 법이 그 역할을 영원히 계속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지속적인 생활 안에서는 예언자들(18,15), 그리고 예언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레위인들이(33,8) 주님의 증인이자 해석자이며, 그분과 사람들 사이의 중개자이다. 이러한 표지들 덕택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 하느님이시며, 자기들을 사랑하시어(6,5) 자기들과 계약을 맺으신(26,17) 분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유일한 분이시다. 다른 거짓 신들은 나무나 돌에 불과하다(4,28). 그리고 이 유일성은 명백히 표현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신명기는 처음으로 성소의 유일성 원칙을 도입하는 것이다(12,5). 이 유일한 성소에서 이스라엘 회중은(5,22) 호렙에서처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주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분산시키는 모든 요소가 제거될 수 있다(6,4). 법 역시 일치의 표지이다. 신명기는 규정과 법규를 길게 나열하는 가운데에서도 율법과 계명에 관해서 말하기를 좋아한다(1,5; 5,31; 6,1). 율법은 온 백성이 정성을 다하여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을 명시한다. 결국 신명기의 일신론은(한 분이신 하느님, 하나밖에 없는 성소, 하나뿐인 법, 한 백성 등) 이스라엘인들이 영위하는 전체 삶의 유일 개념으로 귀착된다.

 

(2)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주님께서 자기를 당신의 것으로(7,6 ; 28,10),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음을(7,6), 그리고 자기가 보잘것 없는데도(7,8) 은혜로 채워 주셨으며(9,5), 자기를 아들처럼 대해 주셨음을 안다(1,31). 과거의 사건들에서 기원하는 하느님의 이 선택은 모든 세대에도 해당된다(11,2; 29,14). 그리하여 백성은 언제나 자기들의 하느님께서 오늘(1,10) 자기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온 백성의 능동적인 응답을 전제한다. 중요한 것은 백성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10,16), 곧 계약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민족들, 그리고 그들의 신들과 일체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4,19; 17,3). 그리하여 말씀으로 살아야 하고(6,8), 말씀을 듣고 지키며, 세세한 조항에 이르기까지 율법에 충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주님을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6,5).

 

그렇게 함으로써 의로워질 수 있고(6,25), 자기의 생활도 신앙을 증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전쟁과 관련해서도 예외가 아니다(20,1.4).

 

이뿐만이 아니다.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구원의 사건들을 되새기게 된다. 이스라엘의 순종은 결국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여러 결실을 이끌어 냄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5,15). 이스라엘이 햇곡식을 예물로 바쳐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비옥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다(26,5-10). 축제들을 지내야 하는 이유는 이집트 탈출 때를 기억하기 위함이다(16,1.3.12).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5,15). 이스라엘이 가난한 이들을 존중해야 하고(10,18), 누구든지, 심지어 이집트인이라 할지라도 억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24,18-22; 23,8), 그들도 이집트에서 억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이렇게 이집트 탈출을 상기시킴으로써, 공동체에서 이방인을 제외시키려는 편협된 생활 태도를 없애려고 노력한다(14,21; 15,3; 23,21; 28,12).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전체가 그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결국 자기 구원의 사건들을 기리는 기념 그 자체가 된다.

 

가난한 이들을 존중하라는 법은 그 가운데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은 삼 년마다 바쳐야 하는 십일조(14,28), 빚의 탕감(15,1), 종의 해방(15,12-18), 이삭과 포도에(23,25-26) 관한 규정들을 읽어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임금 역시 가능한 대로 평민처럼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17,15). 이러한 가르침은 특별히 신명기의 가장 오래된 부분이 편집될 때에 삽입된다. 백성의 일치가 사회적 불평등으로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갈수록 힘을 더해 가는 부유층과 나날이 더 비참해지는 소시민층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이가 공동의 유산으로 지닌 과거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모두 형제였음을 상기시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투쟁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일이 시급하였던 것이다(15,4). 하지만 이 시기의 설교가들은 낙관적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호소에 응답하고 실생활로 구원의 사건들을 재현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12,28; 26,16-19 참조).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생활에 극적인 요소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신명기가 이해하는 생활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연속이다. 이 생활은 인간에게 매 순간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하며, 이 충성은 원칙적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30,14). 백성에게는 두 가지 길이 열려 있다. 하나는 충성과 행복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배반과 불행의 길이다(11,27-28; 28). 여기에 선택이 요구된다(30,15-20). 그러나 실제는 어떠한가? 이 물음에 대해서도 역사가 대답하는데, 그 답은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이집트 탈출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배반하였고, 모세는 줄곧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청을 드려야 했다. 이스라엘은 자기 죄악으로 하느님의 분노를 일으켰으므로, 멸망해야 마땅하지만(9,7), 그분의 지칠 줄 모르는 성실성 때문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선택의 요구를 받는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구원 역사의 다른 시기들은 어떠하였는가? 이미 첫 설교가들은 이 상황의 극적인 특성을 예고하였다. 그러나 모든 환상이 사라지게 될 때가 다가왔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선택하여 생명을 얻을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고, 또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다. 유배 시기에 활동하였던 신명기의 마지막 저자들은 이 점을 분명히 말한다(28,15; 29,21).

 

그러나 신명기의 생각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죄가 마지막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백성을 회개시켜 용서를 받게 하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30,3). 그러나 그 동안에 사람들은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며, 거기에서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6. 성서에서 차지하는 신명기의 위치

 

신명기는 성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유다인들이 신명기에서 자기들의 기본 신앙인 셔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6,4)“을 발견하였기 때문만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을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만도 아니다(“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6,5). 이 신명기 전승은 그 안에 담겨 있는 독특한 사상으로 구약성서의 다른 작품들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신명기와 요시야의 개혁 정책을 가까이에서 지원하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비교해 보면, 용어나 주제상의 유사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잊지 마라’(6,10-13; 예레 2,4-7), 마음의 할례(10,16; 예레 4,4 참조), 새 계약(30,1-10; 예레 31,31-34 참조). 이러한 것들은 신명기의 전형적인 주제들이다. 신명기의 문체, 그리고 여호수아서(1장과 23), 판관기(2,63,6), 사무엘서(1사무 12), 열왕기(1열왕 8; 2열왕 17)를 관통하는 역사의 주요 단계들을 표시하는 설교와 반성의 문체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이 거대한 역사서의 저자에 대한 신명기의 영향을 드러내 준다. 신명기와 마찬가지로 이 역사서의 저자도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계명과 법에 대한 순종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그는 신명기의 법이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열쇠라고 생각한다.

 

생명으로 이끄는 길과 죽음으로 이끄는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주제는(30장 참조), 후대 유다인들의 윤리 가르침뿐만 아니라 복음서에도 계속 나온다(마태 7,13-14). 신명기의 일관된 관심사이며 유다인 공동체 생활의 누룩이 되는,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적극적인 연대감이 복음서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7. 오늘날의 신명기

 

신명기가 오늘날의 그리스도 신자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신명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법령들은 우리 시대와는 다른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해당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믿음과 은총과 성령의 나라를 세우신 뒤로는(로마 3,28; 6,14; 갈라 3,23; 5,18 참조), 율법이 무효가 되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신명기가 계명들의 모음이기 전에,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순종, 곧 하느님 백성의 삶과 역사 안에서 일어난 그분의 활동에 대한 묵상이라는 점을 말해 둘 필요가 있다. 믿는 이들의 실존을 지배하는 것은 인식, 곧 현존의 발견과 선물에 대한 응답이라는 이중의 인식이다.

 

그리고 계명들 자체도 더 이상 우리에게 문자 그대로 따를 것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비추어 줄 수 있게 표현된 것들이다. 사실, 이 모든 가르침은 변화하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참된 충성을 찾으려는 의지에 달려 있다. 모든 종파의 신앙인들이 윤리의 근본에 관하여 질문을 제기하는 오늘날, 신명기는 밖에서 부과되는 법이 아니라, 묵상과 마음의 결단 안에 뿌리박고 있는 의 본보기를 제공한다. 그것은 이성적이고 명쾌하고 성숙한 윤리이며 참된 지혜이다(4,5-8).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역사 안에서이기 때문에, 구원 사건 안에서 매일의 행동 지침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사랑의 실천 윤리를 가르쳐 준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다 적용된다. 정치에서 시작하여 보건에 이르기까지, 사회 또는 가정 생활에서 다른 형제와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동물이나 식물에 대한 존중에 이르기까지(22,7; 20,19), 주님에 대한 사랑과 관련이 없는 것이 없다. 개개의 상황은 모두 우리에게 주님을 위하든지 거스르든지 선택을 하게 하며, 이 선택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가 받을 심판은 우리의 행위,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또한 하느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순종의 무조건성과 진지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사실, 신명기의 법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채워야 하는 조건이 아니라, 선택을 받고 또 가나안 땅에서 상속 재산을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저절로 흘러 나오는 결과를 일러 준다. 이 결과가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신명기의 설교가는 동시에 순종의 진지성을 강조한다. 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행복을 약속하고, 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행을 경고한다. 그것은 계약의 법이 백성 앞에 생명 또는 죽음의 문제를 내놓기 때문이다(30,15-20).

 

신명기는 이렇게 순종의 두 가지 특성, 곧 무조건성과 진지성 사이에 균형을 유지한다. 이 균형은 지키기가 힘든 것이다. 이미 후기 유다교뿐만 아니라 여러 그리스도교 종파에서도 가끔 순종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공로의 윤리, 또는 생명과 죽음을 결정짓는 순종의 진지성을 무시하고 이른바 순수한순종만을 강조하는 도덕 지상주의로 흐름을 볼 수 있다. 성서의 모든 증언 가운데에서 신명기는 성숙하고, 균형 잡히고 생동력 있는 윤리를 재발견하는 데에 더없이 중요한 기초를 제공해 준다.

 

 

여호수아기 입문

 

 

모세 오경에 이어지는 여호수아서는 우리 앞에 이스라엘 역사의 한 시대를 펼쳐 보인다. 이 시대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의 땅에 첫발을 디디고,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중요한 시기이다.

 

유다교에서는 구약성서를 율법서(토라), 예언서, 성문서로 나눈다. 예언서는 다시 전기 예언서후기 예언서로 갈라지는데, 여호수아서는 이 전기 예언서라는 큰 단락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1. 여호수아서의 구조와 내용

 

여호수아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1 - 12장과 13 - 21). 여기에 특이하게도 각각 맺음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 개의 장(22,23,24)이 이어진다.

 

1) 가나안 땅의 정복(1 - 12).

 

먼저 1장은 책 전체의 서론 구실을 한다. 2장에는, 이제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 정복을 시작하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예리고에 정탐대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정탐대는 라합의 환대를 받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리고 쪽으로 요르단 강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친다(3 - 4). 그리고 광야를 건너오면서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인들이 이 길갈에서 할례를 받고, 이어 약속의 땅에서 처음으로 과월절을 지낸다(5). 예리고의 함락과(6) 아이의 점령으로(8) 이제 중부 팔레스티나에서부터 정복 사업이 개시된다.

 

그 와중에 하느님의 명령을 거스른 아간의 죄악이 드러나기도 한다(7). 그 뒤에 여호수아가 기브온인들과 평화 조약을 맺게 되는데(9), 이로 인해 예루살렘 임금을 주축으로 한 반이스라엘 연합 세력이 형성되고, 이어 기브온에서 전투가 벌어진다(10). 북부 팔레스티나에서도 하솔 임금이 이끄는 새로운 연합군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스라엘군은 이 군대도 물리치고 하솔 성읍을 불살라 버린다(11). 12장은 이스라엘이 정복한 지방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한다.

 

2) 가나안 땅의 분배(13 - 21).

 

이 부분은 먼저 열두 지파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일을 자세히 전해 준다(13 - 19). 그 다음,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이가 피신할 수 있는 도피 성읍들과(20) 레위인들이 살 성읍들이 열거된다(21).

 

3) 맺음말(22,23,24).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정복에 참여하였던 요르단 동쪽 지파들을(1,12-16) 그들의 상속 재산이 있는 요르단 건너편으로 돌려 보낸다(22,1-6). 이 첫 번째 맺음말에 일화 하나가 덧붙여진다(22,7-34). 곧 이 요르단 동쪽 지파들이 제단을 세우는데, 그것이 열두 지파 사이의 일치를 엄숙하게 재확인하는 계기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23장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을 담고 있다.

23장의 내용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하는 듯한 24장은, 여호수아가 세겜 집회를 소집하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만 섬긴다는 내용의 계약을 백성과 함께 맺었다고 전한다.

 

2. 여호수아

 

이렇게 여호수아서의 구조와 내용을 요약해 볼 때, 이 책 전체 이야기를 주도해 가는 한 인물이 부각된다. 곧 에브라임 지파 소속으로(민수 13,8.16) 눈의 아들인 여호수아이다. 주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를 뜻하는 이 이름은 그가 일생을 통해서 보여 주게 될 일들의 청사진과 같은 것이다(특히 23,14 참조). 성서의 어떤 전승에 따르면 모세가 그의 이름을 호세아에서 여호수아로 바꾸어 준다(민수 13,16). 이름이 바뀌었음은 운명이 달라졌음을 뜻한다.

 

성서에 보면 다른 이들도 이 이름을 지녔는데, 신약성서 시대에 와서 그리스 말을 하는 유다인들에게는 이 이름이 예수가 된다(히브 4,8 참조). 이러한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께서 구세주로서 하신 행동과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을 안식의 땅으로 이끈 행동을 쉽게 연관시킬 수 있게 해 준다.

 

모세 오경에서는 여호수아가 늘 모세 곁에 있으면서도 그의 그늘에 가려 있다. 탈출 24,13에 따르면 그는 모세와 함께 하느님의 산으로 올라간다. 그는 또 만남의 천막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탈출 33,11). 때로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탈출 17,8-16). 그러나 여호수아는 항상 모세의 젊은 시종일 뿐이다. 모세가 요르단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여호수아는 드디어 모세에게서 하느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중대한 사명을 받게 된다(민수 27,13-18; 신명 31,7-8).

 

3. 여호수아서의 저작 과정과 의도

 

여호수아서를 단순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곳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순서대로 기술하는 보고서로 이해할 수는 없다. 물론 현대의 성서학은 이 책이 근거로 한 전승들, 곧 그러한 과정을 담고 있는 전승들의 중요성을 점점 더 크게 인식한다. 그렇지만 여호수아서가 이야기하는 사건들이 일어난 때(기원전 13세기 말경)와 이 책이 최종적으로 편집된 시기 사이에는 여러 세기의 간격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연맹 전체가 가나안 땅 전부를 정복하였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인들의 땅 가나안은 다윗 시대(기원전 10세기)에 와서야 완전히 정복된다.

 

그 이전에는, 여호수아서 자체도 자주 시사하듯이, 가나안인들이 전멸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주로 산악 지방만 내주었을 뿐, 계속 평야 지대에 살면서 이스라엘인들과 공존하였다(5,63; 16,10; 17, 12.18 참조). 여호수아가 죽을 때, 가나안 땅 전체가 이미 열두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많은 부분이 정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13 - 23. 특히 13,1-7 참조).

 

그렇다면 이 책을 어떻게, 어떤 전망에서 읽어야 하는가? 여호수아서는 어떠한 의도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가? 이 책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2 - 10장이 베냐민과 에브라임, 곧 중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던 두 지파에 고유한 전승이면서, 동시에 길갈, 그리고 이어서 베델 성소와 관련된 전승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서의 이 첫 부분은 기원전 10세기 말에 편집되었다. 이 단계에서는 여호수아가 백성 전체를 지휘한다. 이 백성은 아직 뚜렷한 체제를 갖춘 집단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집트 탈출에 참여한 몇몇 지파의 전사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군사적인 면이 계속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그 너머로 경신례적인 차원이 보인다. 그리고 이 책의 자료 자체가 전례적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갈대바다 횡단과 짝을 이루는 요르단 횡단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3 - 4). 이스라엘인들은 성전 전례에 참석하기 전에 하듯이 자신들을 정결하게 한 다음, 하느님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을 앞세우고 요르단 강을 건넌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사실을,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계약 궤를 모시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전례 행렬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5장에는 할례에 이어서 가나안 땅의 소출을 가지고 과월절을 지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명백히 전례적 순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신명기를 저술한 학파에 속하면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최근(기원전 7-6세기)의 체험에 비추어 묵상하려는 편집자가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해서, 그 때까지 형성된 여호수아서의 자료들을 재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묵상은, 이전 작품에 가한 수많은 손질 외에, 특히 1장과 23장에 나오는 긴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이로써 가나안 땅의 정복은 이제 일부 이스라엘인들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일로 제시된다(10, 28-39 참조).

 

그리고 이 책에서는 요르단 동쪽 지파들이 계속 언급되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치가 위협받는 시대에 그것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다(1,12-16; 12,1-6; 13,8-32; 22,1-6 참조).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이스라엘에게 나뉘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그분을 위하여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다른 신들을 섬기는 민족들과 공존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충성이 언제든지 훼손될 수 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 이 충성에 관한 생생한 관심이 배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나안 땅에 사는 민족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곧 그들을 모두 완전 봉헌물로 바쳐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망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6,17.21; 11,12.14).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이러한 조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이 책이 쓰일 당시의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인 설명이다.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피할 수 없었던 우상 숭배의 위험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난 뒤의 생각을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에 투영시킨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저자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면보다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이유로, 신명기계 편집 작업의 손질을 훨씬 덜 받은 13 - 19장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개개의 경계선과 각 지파에 속한 성읍 명단이 나열된다. 우리에게는 지루하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부분은 이스라엘 지파 연맹의 구성원들이 가나안 땅을 나누어 받은 전통적 배분에 관한 아주 값진 문헌이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다윗 왕조 이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왕조 시대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는 후대의 첨가문들도 있다.

 

여호수아서의 편집 과정에서 신명기계의 편집 이외에 사제계의 영향도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몇몇 장에서는 엘르아잘 사제와 그의 아들 비느하스의 역할이 여호수아의 역할을 대신하기까지 이르는데(14, 1; 19,51; 21,1; 22,13.30.32), 이 이야기들은 대부분 실로의 성소와 연관된다.

 

4. 여호수아서와 역사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편집 작업을 염두에 두면, 여호수아서의 역사적 관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 혼자 지휘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료들을 그러한 방향으로 체계화시킨 데에서 기인한다. 실제의 사건들은 그러한 단순화-체계화 이전에 상당히 복잡하고 복합적으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베델의 정복은 여호수아서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판관기에 가서야 다루어진다(1,22-26). 세겜을 빼앗았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는데,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이 성읍의 원주민과 평화적인 협정을 맺고 그 곳에 자리잡았음을 드러내는 표시일 것이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헤브론과 드빌의 함락이 여호수아가 한 일로 나오지만(10,36-39), 다른 곳에서는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하고, 오드니엘이 드빌을 정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15,13-14.17; 판관 1,11-13).

 

이 시기의 역사를 더 잘 알기 위해서 가끔 고고학적 증거들이 원용되기도 하였다. 사실 고고학의 발굴로, 기원전 1200년경에 끝난 후기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팔레스티나의 몇몇 도시가 격렬한 방식으로 파괴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시기를 대략 기원전 1230년경으로 잡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이 이 땅을 정복하면서 그렇게 파괴한 것이라고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떠한 통일 왕국도 이루지 않았던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 사이에 지속된 적대적 경쟁 관계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으리라는 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느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도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다른 침략자들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모습만 보여 줄 뿐 구체적인 사실이나 사건을 지목하여 설명하지 않는 고고학적인 논증을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고고학자들이 기원전 13세기 말경에 파괴되었다고 확신하는 하솔과 같은 성읍은, 여호 11,10-11에 나오듯이 실제로 이스라엘인들이 불살라 파괴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반면에 예리고의 경우, 이 시대와 관련된 고고학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럽다. 예리고 함락을 이야기하는 6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떠한 자료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로써 이 이야기를 좀더 깊이 살펴보게 된다. 그러면 복잡한 과정과 복합적 구성을 드러내는 이 6장이 예리고라는 성읍의 포위 공격에 관한 자세한 보고서가 아님이 드러난다. 6장의 이야기는 일종의 종교 의식, 전쟁 전례로 제시되는 것이다(6,2 각주 참조). 성서 본문이 우리가 제기하는 의문이나 질문에 항상 시원한 대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5. 약속의 땅

 

이 책의 중심 인물인 여호수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이다. 모세 오경에서 이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대상이었다. 그 약속이 이제 여호수아서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이들은 이 책까지 포함해서 오경이 아니라 육경이라고 말한다.

 

땅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성과 자기의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이 실현되는 곳이다. 땅은 또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가시적 보증이다. 그리고 이 보증은 생기 없는 상징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피조물들과 만나고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그것들을 성화시켜 나가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생생하고 간절한 초대이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나누어 가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선조들에게 주시고 또 모세를 통해 새롭게 하신 약속의 실현이다. 그래서 수많은 지명이 나열될 때에 그 가운데 서서 무미건조하게 관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나누어 주신 상속 재산을 꼼꼼히 기술하는 성서 저자의 기쁨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약속의 땅은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늘 새롭게 정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호수아서는 말한다. 그래서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이 제거되지 않고 늘 존재한다. 이 긴장은 또한 하느님 백성의 실존을 구성하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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