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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시서와 지혜서

dariaofs 2015. 2. 27. 18:11

욥기 입문

 

 

욥기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불의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것도,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 한 인간이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하여 자기의 자리를 찾으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1. 구 조

 

욥기는 서로 다른 다섯 부분으로 명확히 나누어진다.

 

1. 산문으로 된 머리말(1-2). 경건하고 부유한 주인공 욥은 한순간에 설명할 길 없는 재난에 휩싸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님께 대한 신뢰심을 잃지 않는다(1,1-2,13).

 

2. 운문으로 된 대화(3-31). 여기에서는 자부심이 강하고 반항적인 인간인 욥과, 고대 근동의 전형적 현인들인 그의 세 친구들(데만 사람 엘리바즈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바르)이 대결한다. 주인공의 독백이 앞과 뒤에서 일종의 테두리를 이룬다. 이 틀 안에서 주인공과 친구들은 서로 이어가며 저마다 세 차례에 걸친 담론을 펼친다(셋째 차례에서는 소바르와 욥의 담론이 빠져있다). 아래 세부 구조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대화 부분은 완만하고 장엄한 행보로 진행된다.

 

욥의 독백: 3

첫째 차례(4-14) 둘째 차례(15-21) 셋째 차례(22-27)

엘리바즈(4-5) 엘리바즈(15) 엘리바즈(22)

(6-7) (16-17) (23-24)

빌닷(8) 빌닷(18) 빌닷(25)

(9-10) (19) (26-27)

소바르(11) 소바르(20)

(12-14) (21)

(지혜 찬가 : 28)

욥의 독백 : 29-31

 

3. 운문으로 된 엘리후의 일련의 담론(32-37. 도입 부분인 32,1-5는 산문으로 되어있다). 예기하지 않은 제4의 친구인, 부즈 사람 바라켈의 아들 엘리후가 나서서 자기 의견을 내놓는다.

 

4. 운문으로 된 주님과 욥의 대화(38,1-42,6).

주님의 첫째 말씀(38,1-40,2) 주님의 둘째 말씀(40,6-41,26)

욥의 첫째 답변(40,3-5) 욥의 둘째 답변(42,1-6)

 

5. 산문으로 된 맺음말(42,7-17). 욥은 자기의 건강과 재산과 명예, 그리고 자식들을 다시 얻는다. 그는 성조들처럼(창세 25,7; 35,29) 수를 다하고 죽는다.

 

2. 통일성과 저작 시기

 

욥기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어휘와 문체, 문화적 배경과 종교적 개념의 다양성은 이 작품이 단 한번에 지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울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이 밖에도 다양한 가설들이 주장된다. 상대적으로 정설이라고 할 수 있는 확실한 가설이 없음은 욥기 안팎의 증거가 불충분하고, 있는 증거조차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의 가설도 피할 수 없는 약점들을 지니고 있음을 시인하면서, 조심스럽게 이를 제시한다).

 

산문으로 된 머리말과 맺음말은 본디 어떤 민속 설화를 이루고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1,1-2,13; 42,7-17). 이 설화는 동방인들”(1,3) 가운데에서 큰 명성을 누렸던, 우스지방(1,1과 각주 참조) 출신으로 욥이라 불렸던 한 인물의 모범적인 인내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비길 데 없는 신앙심을 지닌 이 욥에(1,8; 야고 5,11) 관한 설화는, 이미 기원전 2천년대 말기 근동지방의 현인들 사이에 구두로 퍼져있다가, 사무엘 - 다윗 - 솔로몬 시대(기원전 11-10세기)에 히브리말로 옮겨졌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587,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는 대환난 이후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은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혼란 때문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파기하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을 문제삼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유배(기원전 575년경) 2세대의 어떤 시인이 그의 선임자 에제키엘과(기원전 592-580년경) 비슷하게 사목적, 그리고 예언적 목적 아래, 당시 잘 알려져 있던 수난하는 욥 이야기를(에제 14,14. 20) 바탕으로 하여, 욥기 대화 부분의 시(3,1-31,40; 38,1-42,6)를 지었다(현재, 욥기의 저작 연대는 대체적으로 기원전 6-4세기로 잡는다. 그러나 욥기에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유배, 또는 유배 상황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시인해야 한다). 그는 인간 존재의 가치, 그리고 인간적 정의와 신적 정의의 관계 아래에서 인간이 지니는 권리를(31,35-37) 시적으로 토론하려고, 까닭없이 고통당하는 주인공과 그의 세 친구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주인공 욥에게 자신을 변론하고 당신의 처사를 단죄하는 기회를 주신다(40,8-14). 그러나 욥은 다시 도전하는 것을 사양하면서 자기의 자만에 대하여 참회한다(42,1-6).

 

이 시는 하느님의 신성, 곧 인간의 상상력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와 그분의 선성(善性)에 대한 관념까지도 한없이 넘어서는 그 신성을 수긍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또한 이 시 작품은 선과 악 사이의 지나치게 단순한 구분, 덕성스러운 인간의 자기 중심적 야망이 드러나는 그러한 구분을 초월하는 죄의 개념을 시사한다.

 

산문으로 된 맺음말은(42,7-17) 개인적 보상에 대한 대중적 신조를 주장하기 때문에, 대화 부분에서 욥을 통해 드러나는 저자 시인의 신학과 상반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 맺음말은 고대 근동의 일반 지혜문학에서 오래된 유산의 일부인 전통적 설화에 속하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대화 부분의 시를 후대에 전승시킨, 페르샤시대 유다교의 도덕적 전승가들에게 이 보상에 대한 교의가 훌륭하게 들어맞았을 가능성도 있다.

 

엘리후의 담론들은 욥기의 전통에 속한 후대의 한 제자가 아마도 호교론적인 목적 아래 첨가하였을 것이다(32,1-37,24). 사실 이 부분에서는 엄밀한 의미의 대화와는 매우 다른 어법과 문체와 수사학적 방법들이 눈에 띈다. 엘리후는 고통의 교육적인 가치를 강조하고, 엘리바즈와 빌닷과 소바르가 충분히 전개하지 못하였다고 전통적인 지혜학파 교사들이 유감스럽게 보아왔을 몇 가지 논증을 덧붙인다.

 

욥과 세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시적 대화의 세 번째 마당의 본문(특히 25,1-27,3)은 구두 전승이나 필사 과정에서 훼손을 입은 듯하다. 소바르의 세 번째 담론이 없고, 욥의 말로 된 어떤 구절들은 차라리 친구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24,18-25; 26,5-14). 어떤 비평가들은, 본디 소바르가 한 말을, 시 부분의 편집자들이 욥의 대담성을 완화시키려는 의도 아래 그의 말로 옮겼다고 설명한다. 많은 이들은 지혜 찬가도(28,1-28)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찬가의 문체는 주님 말씀(38,1 이하)의 문체와 매우 가까워서, 그것이 대화로 된 토론 부분과 욥기의 결론 부분을 분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3. 문학 유형

 

이미 오래 전부터 욥기가 성서에서 하나밖에 없는 문학 형식을 이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비록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은 욥기를 지혜문학 작품들 사이에 배열하고, 욥기 안에서도 지혜문학에서 유래하는 문장들이 많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는 유형별로 분류하려는 어떤 노력도 욥기에서는 별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점이 인정된다.

 

플라톤에 의해서 유명하게 된 대화 형식은, 이미 상고시대에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계곡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생성 시기가 기원전 3천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여겨지는 설형 문자로 된 어떤 문헌은 대담한 말투로 악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오늘날 수메르의 욥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바빌론말로 쓰인 다른 설형 문자 문헌은 고통받는 의인을 다루는데, 흔히 바빌론의 욥기라는 제목이 붙기도 한다. 이 밖에 바빌론의 신정론’, ‘바빌론의 전도서’, ‘인간의 비참에 대한 대화등으로 불리는 또 다른 문헌이 있다. 각 행의 첫 글자를 모으면 하나의 문장이 되는 특별한 시 형태로 이루어진, 변신론(辯神論)에 대한 이 대화의 사본 연대는 기원전 9세기 중엽까지, 생성 연대는 아마도 기원전 1400-1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리라 본다. 각각 11줄로 된 28개의 연이 전개되는 동안, 병자와 그의 친구는 신의 정의를 논한다. 이 친구는 욥기에 나오는 데만 사람 엘리바즈의 연설에 나오는 논조를 드러내기도 한다.

 

에집트의 어떤 문헌은 삶에 싫증이 난 사람이 자기 영혼과 전개하는 대화의 형식을 취한다. 비참한 병자인 이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처럼 가족들에게 쫓겨나서, 자살에 대하여 서정시풍으로 논한다. 욥이 히브리말 문학에서 눈앞에 다가온 자기 죽음의 매력에 대하여 이야기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지적되어 오고 있다. 더 나아가서, 욥기에 나타난 어휘와 수많은 암시들은 이 시 작품이 에집트 문명과 일정한 친분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욥기의 시인이 국제적 지혜문학의 세계에 속하고 대화의 문학적 형식을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상당한 개연성을 지닌다. 이러한 문학 유형은 체제 비판적 의견들이나, 또는 최소한 인습에 젖은 사회의 교조주의적 사상에 거역하는 생각을 공적으로 탈없이 드러내는 데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욥기의 시인은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4. 시인의 국적

 

욥기의 운문으로 된 대화 부분에는 이스라엘의 선택과 소명, 모세의 계약과 다윗의 계약, 거룩한 시온산, 성전, 제물 봉헌 의식, 메시아 희망 등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 밖에도 주인공 욥에 대한 민속적이고 고풍스런 이야기는 이스라엘적인 특색이 전혀 없는 이국적인 모습으로 표현된다. 히브리말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낱말들과 어법은 욥기의 예외적인 성격을 확인해 준다.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고찰에서 출발하여, 욥기의 저자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근동의 어떤 현인이었다고 결론짓기도 하였다. 또는 현존하는 히브리말 본문이 아람말이나 아랍말로 된 원본을 번역한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들은 근거가 없다. 예루살렘에서 쓰여졌던 히브리말과는 다른 방언의 채택과 시인이 취한 언어적 자유로써, 욥기의 문학적 특수성을 설명할 수 있다. 운문으로 된 대화의 저자는 유다인이었다. 이는 그가 대 예언자들의 신탁, 특히 예레미야의 고백록(예레 11,18-20; 12,1-4; 15,10-21; 17,12-18; 18,18-23; 20,7-18. 특히 예레 20,14-18과 욥 3장 비교)을 잘 알고 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불렸던 시편들과 유다 임금들의 궁궐에서 전해지던 잠언들을 암기하고 있었다.

 

성전은 약탈당하고 예루살렘 성읍은 불탔으며, 백성은 살륙을 당하고 생존자들은 흩어지거나 바빌론으로 끌려가던 때인 기원전 587년의 동란을 겪으며 살아남은 욥기의 시인은 최초의(예전의 이스라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다인들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에제키엘 예언자와는 매우 다른 자기만의 방법으로 유다교의 탄생에 공헌하였다. 예언자도, 사제도, 시편 작가도 아니었지만, 보편적 지혜문학의 이 상속자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예언적, 그리고 사목적 직무를 수행하였다. 종교의식을 박탈당하고 삶의 터전에서 뿌리가 뽑힌 공동체에게 극적인 형태로 일종의 문학적 유흥을 제시하려고, 시인은 여러 다양한 유형들, 곧 탄원시편, 찬미가, 금언, 풍자, 법적 논쟁, 저주, 예언자적 독설, 그리고 신의 현현에 대한 고대의 이야기 등을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문학을 창조하였다.

 

5. 저작 동기

 

이미 말한 대로 욥기의 저자,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대한 명확한 단서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작 동기에 대해서도 추측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에 전개되는 내용 역시 여러 가설 가운데 하나가 되겠다. 구약성서에 보존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는 처음부터 글로 쓰여진 문서로 여겨져 왔으나, 실제로는 구전을 통해 전승된 다른 시 작품들과 운율적 산문 작품들처럼, 욥기의 대화 부분도 의심의 여지 없이 먼저 구두로 발표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들의 생성 단계에는 사람이 들고 읽었던 필사본이 먼저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암송되거나 음악 반주로 높낮이를 붙인 시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겠다(우리 나라의 판소리 참조). 욥기의 탄식은 유배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전이 없어서임은 물론이고 더러운이국 땅이기 때문에 축제일이면서도 제대로 축제를 지낼 수 없는(시편 137 참조) 축제의 아픔 속에불리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뿌리가 뽑힌 동족 또는 동일한 종교를 신봉하는 집단은 자기들만의 전례력 준수에 완고하게 집착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빌론으로 유배 간 사람들은 성전은 물론 제단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의식을 거행할 수 없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혼돈과 불확실성의 이 시대에 유다인들은 새해 축일과 초막절 전의 대속죄일(레위 16 참조)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욥기의 시인은 이러한 기회에 대중의 기분을 전환시키고, 그들에게 유사 전례적 형태로 참 믿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일까?

 

바빌론의 새해 축제는 자연과 동식물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풍요다산의 쇄신이라는 틀 안에서, 임금의 상징적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강조점을 둔다. 그래서 욥기의 저자가 주인공의 고난과 긍지를 묘사하려고, 왕권 이념의 수많은 특성을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더 나아가서, 자기의 작품 여러 군데에서 세상의 창조를 시사한다. 그리고 오랜 건기 끝에 가을비가 다시 오는 시기를 정점으로 하여(38,37) 일년 절기의 순차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꾸미는데, 이는 엘리후의 담론을 지은 저자가 하는 것(36,27-37,24)과도 일치한다. 아무튼 시인의 의도는 전례력 존중 이상의 것을 지닌다. 그는 비유로써 경고와 희망의 예언적 신탁을 선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비할 데 없는 국난으로 인한 쓰라림(애가 3,15),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다고 여겨지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 시인은 우스지방에 살던 어떤 흠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욥이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하고 묻는데, 이것은 바로 유배자들에게 그들의 패배주의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세기 동안 온갖 부패를 저질렀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전례적 정결과 사회적 책임감을 어느 정도 성실히 유지하였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듯이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자기들을 정복하고 억누르는 자들과 비교하면서, 이스라엘은 지금 겪고 있는 운명을 스스로 불러들일 만큼 잘못을 하지는 않았다고 쉽게 주장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창조주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정한 권리를 지닌다고 믿었던 것이다. 욥기의 시인은 모든 자연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환상에 반대하여 자기의 목소리를 높인다. 대 예언자들과 시편 작가들처럼, 그는 참된 믿음에 타산적 사고방식은 끼어들 자리가 없으며, 은혜의 숭고함에는 오직 헌신적 감사의 정만이 상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6. 욥기의 신학

 

현대 독자는 시 작품이 탄생한 역사적 맥락과 작품 구성의 복잡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욥기의 신학도 이러한 면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논해야 할 것이다.

 

산문으로 된 이야기

 

이 민속 설화의 어떤 면들은 대화 부분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생각에 상응하지 않는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이 유다의 현인은, 겸손한 이들의 불운과 악인들의 번영이라는 걸림돌에 대하여 숙고하였다. 그는 아마도 까닭없는고통을 어리숙한 하느님과, 천상 조정 신하들 가운데에서 가장 냉소적인 존재 사이에 벌어진 내기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을(1,6-12; 2,1-6)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밖에도 시인은 이 신화적인 적대자-사탄’(1,6과 각주 참조)에 대한 언급을 가능한 대로 피한다. 오히려 그의 시적 천재성을 부양하고 그의 신학적 탐구의 엄정성을 촉진한 것은 이상적인 신심, 곧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까닭없는’(1,9) 신심이었다.

 

그러므로 시인은 산문으로 된 설화의 모든 세부 사항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대화 부분을 내세우려고, 이 산문을 일종의 발판으로 삼았을 따름이다. 신심 깊은 욥의 이야기가 이미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켰기 때문에, 시인은 그들이 자기의 방식에 따라 말하도록 한다. 그는 인간의 조건과 경신례 때의 주고받음’(2,4와 각주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 셈을 요구하지 않는 믿음의 순수성에 대한 토의를 유발하려고 민속 설화를 사용한다.

 

욥의 공언과 주님의 발언 내용과는 반대로, 산문으로 된 맺음말은 보상에 관한 전통 신조를 재확인한다. 바로 이것은 시인의 감성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그가 욥을 통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문학에서 유례없이 맹렬하게 공격하던 바이다. 여기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 성서 해설가들을 괴롭혀온 문제가 발생한다. 욥기의 대단원은 어떤 감추어진 방식으로 시인의 신학과 일치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여기에서 시 작품의 구두 암송과, 훨씬 후대에 이루어진 성문화(成文化)한 글 사이에 놓여있는 구분을 기억해야 한다. 욥기의 머리말과 맺음말의 바탕을 이루는 민속 설화는 민족 유산에 속하기 때문에, 민족 문학 보배의 보존가들이 페르샤시대(5-4세기)의 유다 후손들에게 물려준 수사본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운문으로 된 부분도 자기 자리를 얻게 되었으니, 이 역시 전통적 설화를 통하여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욥의 반항이 품고 있는 대담성과 하느님의 대답이 풍기는 냉소성이 하느님의 정의를 문제시하거나 적어도 하느님의 정의를 인간의 정의 밖으로 자리매김하는 대화 부분을 쉽게 전승하도록 해준 것이, 바로 산문으로 된 설화의 경건한 결론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운문으로 된 대화

 

대화 부분의 저자는 고통의 수수께끼에 직면할 때 늘 인간의 정신을 휘어잡는 격정이 거침없이 토로되도록 한다. 그는 유다교가 역사 안에 출현한 이후, 혼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계속 불안하게 만들어온 지성적-윤리적 걸림돌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는다. 욥기의 시인은 모든 시대의 인류에게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존재와 죽음의 걸림돌에 맞설 뿐만 아니라, 고뇌 속에서 거의 신성 모독에 이르면서도 동시에 자기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현존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재산을 약탈당하고 자녀들을 잃어버리고, 부인과 친우들의 몰이해 속에 사회에서 추방당하고, 또 치명적인 질병으로 단말마의 아픔을 겪기보다, 하느님의 침묵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다.

 

이것에 또 다른 주제가 덧붙여진다. 욥은 자기의 무고함이 공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자기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불행에서 구원해 주십사고 여러 모습으로 탄원하는 시편집의 탄원시편에 나오는 기도자들과는 달리, 욥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무죄를 시인해 주시기만 요구한다.

 

욥은 덕뿐만 아니라 긍지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질병과 윤리적 고통의 교활한 공격의 작용 아래, 그의 격화된 긍지는 점점 초인적 오만으로 변해 간다. 그는, 아카디아의 신화에 따르면 질서의 신이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의 경계를 보호하려고 사슬로 묶어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바다와 바닷괴물에 자신을 비유한다(7,12). 엘리바즈는, 도덕적 인간이 시련의 격정 속에서 자신을 반신(半神)으로 잘못 생각하도록 몰고 가는 (신에 대한) 교만의 새로운 차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원초적 인간에 관한 신화를 분명히 암시하면서 욥에게 묻는다.

 

자네가 첫째로 태어난 사람이기라도 하며

언덕보다 먼저 생겨나기라도 하였단 말인가?

(15,7. 그곳의 각주도 참조).

 

주인공은 결코 굴복하지 않고, 질병에서 낫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씌워진 비난과 고소로부터 무죄 선고 받기를 고집한다. 이는 그 역시 항상 찬동해 왔던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죽음의 절대적 성격에 대한 전통적 믿음을(7,21; 14,10) 한 순간 깨뜨리도록 그를 이끌어가는 완강한 갈망이기도 하다. 그는 하느님을 거스르면서까지 자기를 변론해 줄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고 선언한 다음(16,18-21), 마지막 숨 너머, 무덤의 경계에서 그가 산 채로 하느님을 뵙도록 해주시려고, 그를 구해 주실 분이 일어서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부르짖는다(19,25-27).

 

그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거나, 또는 그가 일종의 추방을 당하였기 때문에(19,13-22), 그가 죽은 다음에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상속자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신비한 존재가 자기의 상속자 구실을 해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확신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상속자 - 구원자는 구약성서에 의해서 잘 알려진 구원자와 맥을 같이한다. 고대의 관습법에 따르면, ‘구원자는 죽은 이의 친척으로서, 흘린 피에 대한 복수를 하거나(여기에서 피의 구원자/복수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는 조상의 땅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것을 법적으로 대신 사들여 보존하는 의무를 지닌다(2사무 14,11; 2,20 ).

 

이제 우리는 널리 알려진 19,26의 몇몇 낱말이 히브리말 수사본에서 잘 보존되어 있지 않고 고대 번역본들도 별다른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 둘째 줄의 히브리말 본문을 그런 대로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다. “이내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뵈오리라(또는, ‘내 몸으로부터 ……’, ‘내 몸이 없이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구절에서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의 서곡과 죽음을 이기실 구원자의 예시를 읽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내 몸으로(또는, 내 몸으로부터)”라는 표현은, 기원전 6세기에 아마도 자기의 온전한 구체적 정체성 속에 있는 인간을 뜻하였을 것이다. 이 해석은 이 말 다음에 따라오는 문장이 되풀이됨으로써 한층 더 명확히 확인되기도 한다(27). 더구나 이는 유다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후세의 삶에 대한 믿음과,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헬레니즘적 생각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부여한 것이기도 하다.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 안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체험을 전제하며, 이는 불멸의 영혼에 대한 비히브리적 사고의 실체가 없는 관념적 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더 나아가서 육신 부활의 이 믿음은, 불멸성을 인간 본성에 내재한 당연성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제하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의 지고한 행동을 그 전제 조건으로 한다.

 

이 괄목할 만한 신앙 고백’(19,23-27)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그렇지만 욥기의 시인이 유다교의 여명기에서부터, 멀리 계시면서 적대적으로 보이시는 하느님과 세상에 버려진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신학을 준비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희망을 그의 주인공을 통하여 토로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이 소망을 세 단계에 걸쳐 성공적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첫째, 하느님과 인간 위에 손을 얹고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화해자의 직무를 수행할 심판자에 대한 이룰 수 없는 꿈(9,33); 이어서, 욥이 살해당한 뒤에 최고 법정에서 자기의 증인에게서 사후(死後) 변론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16,18-22); 끝으로, 자기의 명예를 되찾아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보게 해주실 구원자의 지고한 현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19,25-27).

 

자기의 긴 변론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어떠한 죄의식도 지니지 않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간직한다. 그는 다만 젊은 날의 사소한 잘못들만 기억한다. 그는 왕적인 모든 위엄을 갖춘 채 하느님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후처럼전능하신 분께 마주 나아가리라는 것이다(19,27).

 

폭풍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현현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욥의 대답은 놀라우리만치 갑작스럽게 그 어조를 바꾼다. 여기에서 시인의 깊은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의도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인간적 도덕에 따라 하느님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너무나 인간적인 형태를 취한 모든 도덕주의를 순화하고, 신앙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초안을 마련하며, 흠없고 경건한 인간을 위협하는 죄의 교활한 성격을 지적하는 것이다.

 

욥기 운문 부분의 첫째 목적은, 정의에 관한 인간적 관념에서 하느님의 절대성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폭풍 한가운데에서 욥에게 대답하실(탈출 19장의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현과 1열왕 19장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현에 대한 암시와 함께), 주님께서는 사실 고통받는 인간의 질문들에는 어떠한 대답도 주지 않으신다.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시는 분은 오히려 하느님이시다. 질문들이 계속됨으로써 결국 인간에게 가장 당혹스런 물음에까지 이른다.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는 응답하여라(40,2).

 

욥이 이 도전에 응할 것을 사양하자(40,3-5), 주님께서는 싸움을 원하는 이 투사를 다시 한번 다그치시면서, 조금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최종 결판을 내기 위해 준비하라고 촉구하신다.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 하느냐?

네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느냐?(40,7-8).

 

이러한 이중 질문은 토론의 핵심을 꿰뚫으면서, 욥기 전체에 대한 이해의 열쇠를 제공한다. 시인은 하느님의 신비를 탐구하려고 고통의 신비를 이용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자기의 무죄를 선언하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불행이 하느님의 정의를 부정(否定)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지적한다. 사실,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의 무죄를 분명히 인정하시리라 여기고, 은연 중에 전능하신 분께 자기의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친구들은, 자기들이 변신론(辯神論)’, 또는 하느님의 정당화라는 정신적 과업에 투신하였음을 내보이면서, 하느님의 보상과 회심의 가치를 꾸준히 대변한다. 반면에 욥은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통하여 얻는 권리를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변인론(辯人論)’, 또는 인간의 정당화를 추구하는 데에 몰두한다. 시인은 이제 인간의 정당화가 하느님의 단죄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40,2에 드러나는 예언적 논쟁은 8절에 다시 나타나는데, 여기의 깨뜨리다라는 낱말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옛 계약의 파기를 말할 때에도 쓰이는 동사이다(예레 31,32). 이러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시인은, 욥이 사실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상호 의무에 대한 계약 사상과 연관된 응보에 관한 옛 신조를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욥은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1,9)하지는 않았다. 욥도 친구들처럼 함축적으로는 사고 파는 상업적 사고방식에 바탕을 둔 정의의 인간적 의미를 하느님께 부과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완전성과 그의 행복 사이에 직선적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바라는 것은, 하느님을 고객들과 상대하는 상인처럼 이해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주고받음이라는 표현은(2,4와 각주 참조) 산문으로 된 설화에 나오는 신화적 적대자의 사고방식일 뿐만 아니라, 운문으로 된 대화 부분에 나오는 인물들에게서도 똑같이 드러나는 특성이다. 이는 또한, 폭풍 한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욥에게 계시하시는 내용이기도 하다. 시인은 계약상의 의무에 대한 교의가 변질되어 하느님의 자유가 제한되었다고 믿게 될 때마다 드러나는 계약신학의 위험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처럼 욥도 근동의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한 자기의 무결성(無缺性)이 자기에게 하느님께 대한 권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주인공은 결국 자기의 입장이 지니는 미묘한 과오를 똑바로 주시해야 함을 깨닫는다. 그는 하느님을 단죄하지 않고서는(40,8. 또는 직역해서, 하느님께서는 악하시다고 선포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 친구처럼 자기도 같은 길에 들어서 있음을 이제 깨닫게 된다. 하느님을 변호함은 항상 인간을 변호하는 것이다. 변신론은 사실 일종의 변인론이다.

 

세상 창조주의 무한한 성성(聖性)을 염두에 두면서 욥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경건함을 행복과 안녕을 얻는 일종의 수단으로 여기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가 하느님을 진정 까닭없이”(1,9) 경외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 현존의 은혜로써 충분하게 된다. 그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의 두 번째 의도는 신앙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초안을 잡는 것이다. 야훼계전승이 이미 오래 전에,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두 인격체 사이의 단순한 신뢰관계로 표현하였음이 사실이다(창세 15,6). 그리고 대예언자들, 특히 이사야는 진정한 신앙에 내재해 있는 항구함의 비밀을 밝혀내었다. 그것은 아멘의 삶을 사는(이사 7,9: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있지 못하리라.” 히브리말의 믿다, 서있다, 신앙, 아멘은 모두 같은 어근에서 나온다), 또는 정의롭고 공정한 삶을 사는 능력이다(하바 2,4). 욥기의 시인은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하느님 현존의 기적이 고통에 대한 승리의 원천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세와 엘리야의 현현을 상기시키면서, 그리고 가을 축제의 찬미가에서 불리는 최후의 현현을 선취하면서, 이 시인은 같이 유배 간 동료들에게(곧 성전도 왕정도 조국도 국가적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는 이들에게)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계속하여 그들 가운데에 계시다고 말한다.

 

폭풍과 암흑은 가면 뒤에 가린 하느님 현존에 대한 옛 상징이다. 신화적 괴물들(레비아단과 베헤못)은 우주에 걸맞는 악의 수수께끼를 상징하는 반면, 천지만물의 건축가께서는 욥이라는 일개 개인에게 하느님 자유의 경이로움을 드러내 보이신다. 인간적 실용주의는, 인간이 살지 않는 광야에도 비가 내리는(38,26) 자연질서 안에서 어떠한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 믿음을 가짐은, 비록 가끔 반대의 모습을 취하시는 것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나약과 몰락에 이끌리는, 또는 당신의 피조물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의 긍지에 이끌리는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을 극적 진행의 도움을 받아 우회적 방법으로 전개해 나아가면서, 시인은 죄에 대한 옛 관념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섬세하게 찾고자 시도한다. 이것이 주님의 발언과 욥의 최종적 대답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세 번째 목적이다. 자기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성성(聖性) 앞에서 투사 욥은 결국 포기한다. 그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은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다. 지금까지 그는 풍문으로만 들어서 알아왔던 하느님을, 이제 자기 눈으로 직접 뵙게 된다(42,5). ‘성성을 봄으로써 그는 자기에 대한 죄의식을 얻는다. 비록 친구들이 비난하는 범죄 행위들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도덕적 인간의 죄악 그 자체를 범한 것이다. 그는 심판자 ?하느님이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피할 수 없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42,6).

 

욥은 자기의 명예를 변호하려고 하느님께 알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도덕성은, 그가 모르는 사이에, 초인의 자질을 획득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는 자신들을 신적 권리의 허식으로 치장한 고대 임금들의 그것과 유사하다(40,10-14).

 

욥의 유죄성은 도덕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가 제 운명의 주인이라고 믿으면서, 하느님께 대한 판단을 내림으로써 자신을 무의식 중에 신적인 존재로 들어올리는 그러한 인간의 유죄성이다. 주님의 말씀과 욥의 대답은 인간 사고의 규범에 따라 하느님을 규정짓는 인본주의적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욥기의 시는 하느님의 현실을 인간적 이성, 또는 인간적 도덕성의 제한에서 벗어나게 한다. 시인은 바오로 사도를 예고한다. 그는 주님을 뵈옴으로써 자기 정당화의 원천으로 이해되는 율법의 우상성을 타파하였기 때문이다.

 

7. 본문과 번역

 

1952년 사해 부근의 한 동굴에서 히브리말의 옛 글씨체로 된 욥기 수사본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 옛 글씨체는 그때까지 모세 오경의 책들에만 제한되어 있던 것으로 여겨졌었다. 이로써 이미 그리스도 탄생 이전부터 특정 계층의 유다인들이 욥기에 중요성을 부여하였음을 보게 된다.

 

욥기의 히브리말 본문은 난감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이미 고대 그리스말 번역자(칠십인역) 역시 이에 맞닥뜨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 번역자는 때로는 매우 느슨한 의역으로 어려움을 비껴가고, 때로는 여러 절들을 번역하지 않고 뛰어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욥의 고통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오리게네스의 비평적 작업과 번역자 예로니모의 재능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가끔 욥기 히브리말 본문의 특수성은, 우리가 성서의 다른 책들에서 알고 있는 고대 히브리말과 뚜렷한 대조를 드러낸다. 그래서 지난 한 세기 이래 많은 번역자들은, 습관적으로 욥기의 많은 구절들이 훼손되어 변형되었다고 판단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추측에 의한 수정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주석학은, 이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욥기를 격리시키지 않는 동시에, 이러한 추측들의 취약성에 대하여 점점 더 생생한 감각을 얻어왔다. 이 번역은, 비록 때로는 문제의 미해결과 이해의 어려움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본문 수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히브리말 본문에 대한 충실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였다.

 

 

시편 입문

 

 

1. 시편집

 

우리가 시편집이라고 부르는 구약성서의 책은 히브리말로 찬양가들또는 찬양가들의 책이라 불린다. 여기에서 찬양은 할렐루야[=‘()를 찬양하여라’]찬양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이다. 시편집은, 히브리어 성서의 세 번째 부분으로 율법서와 예언서 다음에 오는 성문서의 첫머리, 곧 욥기와 잠언 앞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 책과 함께 다른 책들과는 다른 악센트 체계를 지닌다. 시편집에는 150개의 종교적인 시가들이 실려있다.

 

자세히 보면 시편집이 다섯 권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1-41, 42-72, 73-89, 90-106, 그리고 107-150이다. 각권은 이른바 종결찬양으로 끝을 맺는다. 다섯 권으로 나뉜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세의 다섯 책, 곧 모세 오경에 상응한 조처라는 추측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구분 외에도 달리 나누어지는 (때로는 서로 중복되기도 하는) 부분적 모음집들이 있다. 시편 3-4190-150에서는 이스라엘 하느님의 특별한 이름인 야훼를(<히브리어 생략>영어식으로는 Yahweh 또는 히브리말의 네 자음을 따라 YHWH, 우리말에서는 주님으로 옮긴다. 1,3의 각주 참조) 주로 쓰고 있다. 반면에 시편 42-83에서는 거의 조직적이라 할 만큼 야훼가 엘로힘(<히브리어 생략>하느님)으로 대체되어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엘로힘 시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밖에도 이른바 머리글에(시편의 첫머리 괄호 안에 들어있는 부분. ‘표제, 제목등으로 부르기도 하나, 정확한 명칭이라 할 수 없다. 아래 참조) 나오는 사람 이름에 따라 세분하기도 한다 : “이새의 아들 다윗”(72,20 참조), “코라의 후손들”(42-49, 그리고 84-8587-88도 참조), “아삽”(73-83, 그리고 50도 참조) . 역시 머리글에 따라 120-134순례시편이라 불리기도 한다. 시편 113-118136, 그리고 146-150은 유다교에서 할렐(<히브리어 생략>)이라 부르는데(113의 각주 1 참조), 머리글과 시편 본문의 중간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전례적 환성이라 할 수 있는 할렐루야가 시편의 앞에, 또는 뒤에, 때로는 앞과 뒤에 자주 나온다.

 

시편 전체가 하나의 책으로 엮어지기 전에 이미 독립적이고 양적으로도 서로 다른 여러 작은 모음집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기원전 3세기 말에 이미 이 부분적인 모음집들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시편집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손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고, 또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편찬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컨대 중복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곧 시편 5314와 같고, 7040,14-18과 같으며, 10857,8-1260,7-14로 되어있다.

 

시편은 시편집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시편집이 이스라엘 또는 구약성서의 시나 시편을 전부 모은 시집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성서의 다른 책들에도 여러 시대에 속하는 시편들이 흩어져있다. 예컨대 1사무 2,1-10; 이사 38,10-20; 요나 2,3-10; 나훔 1,2-11; 하바 3,1-19; 애가 5; 다니 2,20-23; 토비 13 등이 있다.

 

시편 1(또는 2와 함께) 시편집의 서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곱 개의 악기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촉구하는 대찬양시편이라 부를 수 있는 시편 150은 제5권만이 아니라 시편집 전체를 끝맺는 종결찬양의 구실을 한다.

 

2. 머리글

 

히브리어 성서의 시편집에서 34개를 뺀 나머지 시편들에는 다양한 길이와 성격을 지닌 머리글이 붙어있다. 이것은 각 시편의 작가가 직접 쓰지 않고, 후대에 와서 수집자 또는 편집자들에 의해서 붙여졌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서의 머리글과 최초의 번역 성서인 그리스어 성서의 머리글이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번역본에는 그리스어 번역자들이 머리글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지 못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경우들이 가끔 있다. 이로써 히브리어 성서의 머리글과 그리스어 번역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방면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머리글의 생성시기는 물론, 그 정확한 의미와 용도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머리글에는 많은 경우 전통적으로 시편 작가라고 생각해왔던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있다: 모세(90), 솔로몬(72; 127), 아삽(50; 73-83, 그리고 1역대 16,4-7; 25,1-2; 느헤 7,44도 참조), 코라의 후손들(42; 44-49; 84-85; 87-88, 그리고 2역대 20,19도 참조), 헤만(88), 에단(89, 그리고 1역대 15,17-19; 25,5도 참조), 여두둔(39; 62; 77, 그리고 1역대 16,41-42; 25,1.3; 2역대 5,12; 29,14; 느헤 11,17도 참조). 이 이름들 가운데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다윗인데, 1(1-41)에 집중하여 모두 73개 시편의 머리글에 나온다. 이 가운데에서 13번은 다윗 임금의 생애에 일어났던 일들을 시사하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 시편의 작가로서(2사무 23,1, 그리고 집회 47,8도 참조) 다윗의 탁월성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시인으로서(2사무 1,17.19-27; 3,33-34), 음악가로서(1사무 16,16-23; 18,10), 그리고 악기 발명가로서(아모 6,5) 명성을 누렸다. 다윗이 종교 예식과 전례 음악을 체계화했다는 전통도 있다: 1역대 15 - 16; 23,5; 에즈 3,10; 느헤 12,36. 물론 이스라엘에는 다윗 훨씬 이전부터 시가가 있어왔다. 구체적인 예로서 라멕의 복수의 노래(창세 4,23-24), 우물 노래(민수 21,17-18), 모세의 찬가와 미리암의 노래(출애 15,1-21), 그리고 드보라의 승리 노래(판관 5,2-31) 등이 있다. 그러나 성서의 전통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시가에 비약적인 발전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전통은 더 나아가서 다윗을 가장 뛰어난 시가 작가로 보았으며, 고통받는 의인으로서, 용서받은 회개자로서, 그리고 메시아의 예형으로서 후대의 시편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대부로 여겼던 것이다.

 

시편의 작가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와 토의가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서 첫째로 문제되는 것은 머리글에 나오는 사람 이름 앞에 붙은 라메드(영어의 ‘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글자)라는 전치사이다. 이 전치사는 매우 다양하게 쓰여지는 까닭에 이러한 구체적인 경우에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시편의 저자를 뜻할 수도 있고, 이스라엘의 주변 문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떤 동일한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일련의 서사시에 소속됨을 지칭할 수도 있으며, 시의 주인공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여기에서 이 전치사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지금까지 해오던 바와 같이 단순히 로 번역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게 하면 의미상 다양한 가능성을 막고 여기에 해당하는 확실한 뜻도 모르는 채 그 의미를 한 가지로만 한정시켜버리게 된다. 두 번째 어려움은 우리말의 특성에 기인한다. 머리글에 이 전치사와 인명만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11; 14; 16 등등), 이를 예컨대 다윗의라고만 옮기면 어색하게 들린다. 우리말에서는 다음에 그에 따르는 무엇이 와야 하기 때문이다(이에 반해, 서양말에서는 그대로 쓰고 있다 : 예를 들면, 영어 Of David, 불어 De David, 독어 Von David ). 이러한 이유로 우리 번역에서는 머리글의 인명 앞에 나오는 전치사 라메드를 우리말로 옮기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머리글에 인명, 또는 코라의 후손들과 같은 호칭이 나올 때는 반드시 그 앞에 전치사 라메드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역시 머리글에 자주 나오는 동사의 명사형 지휘자는 예외로 취급한다(아래 참조). 이 낱말 앞에도 같은 전치사가 붙어있고, 그 확실한 뜻을 모르고 있긴 하지만 전통적인 번역에 따라 지휘자에게로 옮긴다. 이 전치사가 본디 무엇을 의미했든 간에 시편이 지니고 있는 생동력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은 세대들이 이 종교적 시가들을 단순히 반복해서 읽지 않고, 살아있는 시가로, 특히 기도로 불렀다. 기도자들은 그들에게 전해진 시편들을 자기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 재적용함으로써 옛 시편새로운 노래로 되살렸다. 시편들은 특히 전례를 통하여 계속 살아오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 본문이 자연스럽게 변화되기도 하였다. 물론 지금에 와서 이러한 변화의 정확한 범위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옛날에는 작가라든지 저작권 등에 대해서 지금과는 전혀 달리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편들을 이스라엘의 역사에 따라 구분한다거나 시편들의 연대를 작성하는 일은 거의 넘을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후대의 문서들은 이미 오래된 전통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후대의 편자들은 전대의 작품들을 알고 있으며, 옛 자료들을 채택하고 개작할 수도 있다. 그래서 후대 작품 속에 매우 오래된 요소들이 들어가기도 하고(문학적 복고풍), 때로는 주변 문화권에서 유래하는 유물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시편 본문의 연대와 외국 문학의 영향에 관한 문제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으로서 앞으로도 논의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한 일은 시편의 정확한 저작 시기를 아는 것이 곧 시편을 이해함은 아니며, 시편의 근본적인 뜻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 불가결한 전제 조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머리글은 각 시편의 성격과 성질을 시사하고 있다. 우선 해당 시편의 유형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현악기 반주와 더불어 부른다는 시편’(히브리말로는, <히브리어 생략>, 미즈모르: 57), ‘기도’(<히브리어 생략>, 터필라: 86; 90; 102; 142), ‘찬양()’(<히브리어 생략>, 터힐라: 145), ‘사랑 노래혼인 축가’(45) 또는 간단히 노래’(<히브리어 생략>, 쉬르: 30) 등이 나온다. 이 밖에도 뜻이 분명하지 않은 여러 용어들이 있다: 마스킬(<히브리어 생략>: 32; 42; 44; 45; 52 - 55; 74; 78; 88; 89; 142), 쉬가욘(<히브리어 생략>: 7). 다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전자를 교훈”, 후자를 고백또는 애가로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음역한다. 때로는 번역의 시도조차 포기하고 본문을 그냥 음역하여 우리말로 옮기는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예컨대, 미크탐: 16; 56; 57; 58; 59; 60). 비록 뜻이 불분명하더라도 이러한 전문용어들은 일정한 관심을 드러낸다. 곧 이스라엘에 여러 종류의 시편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주석가들에게 이른바 양식사학적인 방향으로 연구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이들에 의해서 지난 반세기가 넘는 동안 시편들을 그 문학 유형에 따라 분류하는 작업이 풍성하게 이루어졌다.

 

머리글에는 음악적인 표기들도 나온다. 우선 55번에 걸쳐 머나체아라는 낱말이 나오는데, 고대 번역본들은 이 히브리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뜻은 “(성가대, 합창단) 지휘자라 하겠다(1역대 15,21; 23,4 참조). 음악 악기들도 지칭된다: 피리(5), 현악기(4; 54; 55; 61; 67; 76, 그리고 6; 128; 81; 84도 참조). 합창단을 받쳐주거나 또는 반주하기 위하여 여러 음악 악기들이 사용되었다: 나팔과 뿔나팔, 십현금과 수금과 비파, 그리고 손북과 자바라 등. 시편 150종교 관현악단이라 할 정도로 여러 악기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 밖에 머리글에는 수수께끼 같은 표현들도 있는데, 해당 시편이 불려질 때 따라야 할 가락을 지시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새벽 암사슴”(22), “나리꽃”(45; 69), “부수지 마소서”(57; 58; 59; 75. 우리 번역에서는 그냥 음역한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부족한 그대로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9; 46; 53; 56; 60; 80; 88도 참조).

 

끝으로, 어떤 시편들은 일정한 전례 예식과 연결된다. 시편 92안식일(을 위한 노래)”, 그리고 100감사(전례)를 위한 노래로 되어있다(30,1과 각주도 참조). “기념으로”(38; 70)라는 표현도 어떤 전례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시편 120에서 134까지는 계속 오름/계단의 노래(또는, 오름/계단을 위한 노래)”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자리잡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곧 순례 중에 부른 노래라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순례의 노래라고 옮긴다.

 

3. 시로서의 시편

 

시편(詩篇), 이 한자 명칭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체가 운문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시편의 번역본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산문에서와는 달리 시편의 절 구분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의 시구와 실제적으로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절은 대부분의 경우 두 행, 가끔은 세 행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러한 절은 독특한 운율에 따라 구성된다. 히브리어 시의 운율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시에서 볼 수 있는 음절의 수에 따른 음수율 또는 길고 짧은 음절의 배합 곧 음의 양에 따른 그리스어와 라틴어 시의 장단율과는 달리, 강음(强音)에 따른 운율이다. 이는 영어나 독일어 시의 강약률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가장 흔한 운율은 절의 두 행이 각각 세 개의 강음으로 구성된 33이다. 가끔은 이 3박자의 음률이 절의 2행에 와서 2박자가 됨으로써 32가 되기도 한다. 이 경우, 2행이 1행보다 짧다. 그러나 우리말과 히브리말의 기본 구조 등이 다르기 때문에 번역문에서는 많은 경우 이러한 형태가 그대로 재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말의 특성 때문에) 원문에서는 짧은 2행이 1행보다 길게 옮겨지는 수가 많다. 어쨌든, 옛날 이스라엘 시인들은 운율의 선택과 배열에서 매우 자유로운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어떤 시들은 산문에 가까운 운문을 쓰고 있음을 아울러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어 시에도 후렴이 있다. 후렴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될 때(42; 43; 46; 49; 59; 67; 80; 99; 107) 절보다 큰 단락으로서 연()을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시편의 중간중간에, 특히 1권에서 3권 사이에, 셀라(<히브리어 생략>)라는 낱말을 볼 수 있는데, 명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본디 쉼표의 구실을 했으리라 추측하기도 하는데, 때로는 이를 기준으로 연을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주제나 내용의 동일성에 따라 시편들을 연으로 나눈다. 물론 판단의 기준과 구체적인 판단이 학자마다 다르기 때문에 한 시편이 달리 나누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시편에서는, 같은 시편 안에서도 하느님께 직접 2인칭으로 말씀드리다가 어떠한 외적인 변화도 없이 곧바로 3인칭으로 (또는, 그 반대로)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한 절 안에서도 인칭을 바꾸어 말하는 수가 있다. 이러한 인칭의 변화는, 우리말의 특수한 언어 예법으로 인해서 원문에는 없는 결과들을 초래한다. 또한 우리말에서는 하느님께 대해 연이어 2인칭과 3인칭으로 말하는 것이 거북스럽게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문에서는 2인칭으로 말씀드리는 부분과 3인칭으로 말하는 부분 사이를 띄움으로써 구분한다.

 

시편을 연으로 구분하는 데에 시편 119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가장 긴 시편인 이 노래에서 연의 개수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수와 일치한다. 곧 이 시편에서는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여덟 절이 같은 글자로 시작한다: 8()22(알파벳의 글자 수) = 모두 176(개의 절). 여덟 절로 된 한 연은 항상 같은 글자로 시작하고 연의 수는 22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전개되는 시편을 알파벳 노래라 부른다: 9-10; 25; 37 . 물론 이러한 시작(詩作) 기술은 번역문에서 도저히 재생할 수 없다.

 

넓게는 셈족 전체의 시, 좁게는 히브리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병행법 또는 대구법이라 불리는 현상에 있다. 이는 문장의 구성원들 사이에 병행 또는 대구를 이루게 하는 수사학적 기법으로서, 하나의 생각을 병행적 또는 대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병행법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우선 같은 생각 또는 같은 이미지가 동의적 표현을 통해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동의적 병행법이 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

자 이제 군왕들아, 깨달으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징계를 받아들여라.

 

시편 21절과 10절이다. 1절에서 민족들겨레들이 같은 사람들이고, ‘술렁거림헛일을 꾸밈이 같은 동작이다. 10절도 이와 마찬가지로 표현되었다.

 

또한 절의 1행에서 말한 내용에 대비 또는 반대되는 것을 2행에 내세우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반의적 병행법이라 한다.

 

그분의 복을 받은 이들은 땅을 차지하고

그분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뿌리째 뽑히리라(37,22).

 

여기에서 1행과 2행이 말하고 있는 바가 단순히 반의적인 것은 아니다. 반의적 병행법 역시 같은 사물 또는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한다. 하나의 두 면인 것이다. 위 구절에서는 하느님의 동일한 역사하심의 두 가지 양상이 대립적으로 서술된다.

 

하나의 생각이 사고의 전개와 더불어 점진적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를 점층적 병행법이라 한다.

 

주님께 노래하라,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노래하라, 온 세상아(96,1).

 

병행법이 항상 완벽하게 쓰이지는 않는다. 비록 이것이 히브리어 시의 가장 큰 특징이고 이 시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시편의 모든 절들이 계속해서 병행법으로 되어있지는 않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수사학적 기법들이 있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히브리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번역문에 그대로 살리기는 불가능하다.

 

4. 시편의 유형

 

일가 친척들 사이에는 용모, 외관, , 행동의 여러 유사점들, 그리고 사고, 감정, 전통의 공동체성 등등 서로 공통된 특징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한 혈족은 자체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른 혈족들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각 혈족에만 공통된 특징들을 서로 나누기도 한다. 물론 친척들간에 서로 전혀 닮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시편도 이와 비슷하다. 많은 시편들이 서로 그 구조, 어법, 어조 등의 유사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같은 주제를 다루는 공통되고 유사한 상황을 전제한다. ‘삶의 자리라는 전문용어로 불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 친척이라 할 수 있는 일련의 시편들이 탄생한다. 시편들의 이러한 혈족또는 일가‘(문학) 유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시편들을 각각의 유형에 따라 분류한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는 개연성에 의해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때로는 한 시편 안에 여러 유형들이 혼합되어있어서 그 시편을 어느 한 유형에 한정시킬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어떠한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일단은 아래와 같은 세 개의 큰 유형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학자마다 다른 분류와 설명을 내세운다. 여기에서는 프랑스 공동번역 성서의 분류와 설명을 거의 그대로 소개한다.)

 

(1) 찬양시편

(2) 탄원, 신뢰, 감사 시편

(3) 교훈시편

 

(1) 찬양시편

 

이 유형은 시편집에서 여러 전형들을 보이고 있으며, 시편집 전체에 골고루 퍼져있다. 널리 알려진 한 의견에 따르면, 대부분의 찬양시편들은 이스라엘의 축일을 기해서 전례 때 사용하기 위해 창작되었다고 한다. 찬양시편들 가운데에서 한두 시편은 어떤 특정한 장엄 축제에 속하리라는 추측을 수긍케 하는 근거를 지닌다. 그러나 시편에 있는 찬양 노래들에서 출발하여 여러 전례들에 대한 예식서를 다시 꾸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설이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 유형에서는 공동체성이 강하게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대화 형식을 취하는 부분, 합창단, 후렴, 환호와 환성, 아멘이나 할렐루야 같은 응답에서도 알 수 있다. 공동체의 참여는 행진, 행렬, 그리고 극적인 행동들(, 손뼉을 침, 무릎을 꿇음, 땅에 부복함)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찬양시편들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구상에 따라 이루어진다. 앞부분에서부터, 짧거나 긴 찬양에의 권유, 때로는 간략한 감탄이 도입부의 구실을 한다. 시편 작가는 자기 자신을 부르기도 하고(103; 104; 106), 더욱 빈번하게는 공동체, 여러 부류의 사람들, 자연의 피조물들(148), 또는 천상 존재들까지(29; 148) 자기의 찬양에 동참하도록 부른다. 이러한 서막 또는 도입부가 이미 시편 전체의 어조를 드러내며, 주위에 환희에 찬 분위기를 조성한다. 시편 작가는 때로 도입부에서 이미 앞으로 전개될 찬미의 동기들을 시사하기도 한다. 찬양시편은 여러 모양으로 끝을 맺는다: 도입부의 부분이나 전체의 되풀이, 찬양 동기들의 요약, 찬양, 간청 또는 기원. 이런 변형들은 결국 찬양시편의 틀이 획일적으로 동일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는 여러 다른 상황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찬양을 받는 주체가 항상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찬양 노래들은 하느님, 시온과 성전, 또는 임금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 계약의 하느님을 향한 찬양시편들은 나름대로 잘 짜인 무리를 형성하고 있다(8; 19; 33; 100; 103; 104; 111; 113; 114; 117; 135; 136; 145-150, 그리고 78105도 참조). 이스라엘은, 유일하고 영원하며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 창조주, 역사의 주인,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에게 항상 성실하신 하느님을 노래한다. 이러한 찬미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대답이며, 그들의 역사 안에서 계속 만나는 살아계신 하느님, 그들의 인도자, 재판관, 옹호자, 그리고 해방자이신 분께 대한 응답이다. 시편 78105와 같은 이른바 역사시편에서는 찬미의 형식으로 하느님의 업적, 곧 구원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노래한다. 이러한 하느님의 행동들은 말씀이고 표징이며 현현들로서, 결국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은 동일한 것이다. 이스라엘을 찬양으로 이끄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어떤 철학적 사고의 귀결이 아니라, 그들의 영성적인 체험의 결과이다. 자연을 서술함에 있어서 시편 작가들은 그 당시의 자연관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나아가 우주에 대한 어떤 시적인 시각보다는 삼라만상에 대한 그들의 종교적인 생각을 증언하고 있다. 대기의 여러 현상들, 계절의 변화는 하느님의 개입을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한다. 자연은 창조주의 현존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주석가들은 창조주에 대한 찬양가들을 당시 고대 근동의 찬미가들과 비교 연구하기도 한다. ‘천둥비의 노래라 할 수 있는 시편 29는 가나안의 신 바알에 대한 찬미가를 연상케 하고, 시편 19의 앞부분은 (에집트의) 태양신에 대한 기도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창조시편이라 할 수 있는 시편 104는 에집트의 신 아톤에 대한 찬미가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 작가들은 가나안, 바빌론, 에집트 등에서 유래했을 수 있는 모형들을 단순히 모작하지 않고 이들을 넘어선다. 구약성서의 시인들은 유일하신 하느님을 노래한다. 만일 그들이 주변 문학권에서 무엇인가를 빌려왔다면, 이는 자기들의 신앙에 따라 모든 것을 흡수, 정화, 동화시켰음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떠한 우주적인 힘과 결코 혼동될 수 없는 분이시며,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의 하느님이시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노래들은(93; 96-99, 그리고 47도 참조) 찬미시편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작은 유형의 시편들은 그들 사이의 독특한 유사점들, 보편주의적 어조, 이들 가운데 여러 노래에서 울려퍼지는 주님께서는 임금이시로다!”(93,1; 96,10; 97,1; 99,1, 그리고 98,6도 참조)라는 환성 때문에 시편집 안에서 한데 모아진다. 이 시편들은 당신 어좌에 좌정하신 하느님, 임금이시며 판관이신 분, 민족들의 주님을 열광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들의 뿌리는 전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96,8-9; 99,5). 임금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날과 같이 즐거움이 넘친다. 이스라엘, 뭇민족들, 멀리 있는 섬들, 그리고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이 환희의 소리를 지른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즉위식 노래로 불리는 이 시편들은 성전에서 거행되던 어떤 특정 전례 때(예컨대, 초막절, 예루살렘 축제, 새해 축일 등) 불려졌으리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편들과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이사 52,7 참조)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 새로운 노래들에 종말론적 전망이 담겨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례에서, 현재는 과거를 재현하며 동시에 미래를 앞당긴다(선취; 영어로는 anticipation). 전례는 과거를 재생시키고 희망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이 시편들은 다양한 학설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야훼 군왕시편’, ‘야훼 왕권에 대한 찬양시’, ‘등극시편. 우리는 하느님의 통치시편으로 부르기로 한다.)

 

() ‘시온의 노래들은 예루살렘과 거기에 있는 성전을 기린다(46; 48; 76; 84; 87, 그리고 24; 68; 132도 참조). 시온은 여러 화려한 명칭들을 지니고 있다: 다윗 왕조의 도읍, 종교 중심지, 지존의 거처들 가운데 가장 거룩한 거소, 하느님의 도성, 대왕의 도읍 등. 시온에 대한 이러한 찬양은 결국 시온산을 당신의 거처와 당신의 안식처로 선택하신 주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시편 132는 하느님에 의한 예루살렘과 임금의 이중 선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불려졌으리라 추측되는데, 사무엘 하권 7장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 같다. 시편 68의 작가는, 고대 시들의 잔재를 잔뜩 지닌 채 서사시의 양식으로, 승승장구하는 기마병들의 행진, 더 정확하게 말해서, 최종적 장소로 향하는 계약의 궤의 장엄한 행렬을 노래하고 있다. 거룩한 산 위에 자리잡은 새로운 도읍 예루살렘은, 가나안 신화에 따르면 바알의 처소에 부여되었던 명칭인 북녘의 맨 끝”(48,3)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된다(68,18도 참조). 전능하신 분께서 항상 현존하심으로써 이 도성은 안정과 안녕이 보장되고 함락될 수 없는 피신처가 된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어떠한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도 선택된 백성이 드러내 보이는 자신감이 나온다. 시온의 노래들은 장차 민족들의 도읍이 될(87) 이 도성을 이상화하는 하나의 신비를 구상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에서 종말론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번 더 말해서, 전례는 선취한다. 의식은 전례적 오늘 속에서 이미 내일의 개화(開花)를 경축한다. 예루살렘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있는 것이다(이사 2,2-4; 60; 미가 4,1-3; 즈가 8 참조).

 

동일한 영감 속에 이른바 순례시편들도 등장한다(120-134). 일반적으로 이 시편들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르면서(이사 2,3; 예레 31,6; 시편 84 참조), 특히 이스라엘의 삼대 축일(출애 23,14-17) 때 성전으로 순례하면서 불렀으리라고 생각된다. 상당히 후대에 생성되었다고 여겨지고 때로는 매우 짧은 이 시편들은 상호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내용면에서도 여러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 위에서 말한 바 있는 하느님의 통치시편들이 임금 그 자체이신 주님을 찬양하는 데에 반해, 이른바 군왕시편들은 현세적 왕국의 군주들을 노래한다(2; 1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4). 임금의 축성식, 즉위식과 대관식 및 그 기념일 또는 혼인식 때, 전쟁 수행 전이나 또는 승리한 후에, 그리고 국가적 영고성쇠 속에 궁전과 성전에서는 여러 가지 의식들이 거행되었다. 상황의 다양성은 노래의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임금과 그 왕조에 대한 칭송의 말, 찬양가, 감사가, 탄원가, 기원, 신탁 등등. 이렇게 여러 기회에 불려진 노래들이기 때문에 군왕시편들은 그 구조와 궁중 의전의 영향을 받은 어법 및 그 주제들로 인해서 풍부한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도 존재하는 그들의 공통된 유사성은 그 원래의 환경인 궁중과 그 중심 인물인 임금에게서 유래한다. 하느님께서 직접 통치하신다는 생각(신정주의)이 근본을 이루기 때문에 국가의 우두머리에게 부여되는 영광은 결국 하느님께 향한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임금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상속자이다.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는 지존의 오른쪽에 자리잡는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어좌”(1역대 28,5)이기도 한 다윗 왕좌의 안정성과 항구성의 혜택을 받는다. 나단의 중재를 통하여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2사무 7)은 군왕시편들의 여러 곳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2,6-7; 45,7; 89,4-5.20-38; 132,10-12). 군왕시편, 하느님의 통치시편, 시온의 노래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 모든 시편들은 그 안에 완전한 실현을 향한 약속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 하느님의 최종적 왕국에 대한 기다림, 그리고 이상적 도읍에 대한 기다림이다.

 

(2) 탄원, 신뢰, 감사 시편

 

이 시편들에도 찬양시편들에서처럼 전능하고 의로우신 주님, 최고의 은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 나온다. 그러나 이 세 범주의 시편들은 별개의 한 큰 유형으로 합쳐질 수 있다. 이들은 원래 곤경과 고통이라는 공통된 상황에 그 생성의 뿌리를 두고 있다. 위기를 맞아 기도자는 하느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하고 자기의 신뢰를 고백한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을 때는 구원해주신 분께 감사를 드린다. 때로는 한 시편에(22; 30; 31; 54; 56; 61) 탄원과 신뢰와 감사, 이 세 요소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시편들에는 개인 기도들이 들어있어 개인적인 신심들을 엿볼 수 있게도 한다. 또한 어떤 전례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모인 공동체에 의해서 드려지는 공동 기도들도 있다(요엘 1,13; 2,17 참조). 그러나 개인과 공동체 사이, 그리고 개인 신심과 전례 의식 사이를 너무 엄격하게 구분짓는 것은 좋지 않다. 어떤 이가 설사 홀로 기도한다 해도, 그는 혼자가 아니다. 그는 하느님 백성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있으며(25,22; 28,9; 61,7; 63,12; 69,36 참조), 동시에 공동체의 전례에도 합당한 구성원으로 참여한다(5,8; 28,2; 140,13-14 참조). 더 나아가서, 예컨대 사제나 임금과 같이 공직을 가진 사람이 집단의 이름으로 말하는 경우에, 시편 기도자의 는 때로 공동체를 뜻하기도 한다. 끝으로, 원래 고통 중에 있는 이 또는 감사드리는 이의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신심을 표현했던 시편들이 시편집에 모아짐으로써 공동체의 기도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는 반대의 움직임도 있었음이 또한 사실이다. 이스라엘에서 전례의 주체는 일차적으로 백성 공동체이다. 전례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시편들 역시 원래는 공동 시편들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위치가 점차 부각되면서 개인 시편들이 나오게 되고, 이 시편들은 이미 있어왔던 공동 시편들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 ‘개인 탄원시편또는 공동 탄원시편은 일반적으로 네 단계로 전개된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고, 이어서 자기가 처한 상황을 설명드린 다음, 본격적으로 간청을 드리고,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본 골격일 뿐 그에 따른 변형들이 많다. 시편 작가는 다른 것을 더 보태기도 하고 빼기도 하며, 뒤섞기도 하고 순서를 뒤집기도 하며, 또한 되풀이하기도 한다. 서정적이고 격정적인 토로는 엄격한 순서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또한 탄원 기도가 드려지는 가운데에 가끔 (사제 또는 전례 예언자를 통해서) 신탁이 주어짐을 볼 수 있다.

 

개인 탄원시편은 시편집의 거의 4분의 1을 차지한다(5; 6; 7; 13; 17; 22; 25; 26; 28; 31; 35; 36; 38; 39; 42; 43; 51; 54-57; 59; 61; 63; 64; 69; 70[=40,14-18]; 71; 86; 88; 102; 109; 120; 130; 140-143). 인간은 자기 운명에 대해 기뻐하기보다는 훨씬 더 자주 한탄한다. 고통에 처한 기도자들이 묘사하는 상황과 토로하는 하소연을 통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상태, 그들의 개인적인 또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어려움을 볼 수 있다. 곧 참회, 병고, 탄압, 고소, 강제 이주, 유배생활 등이다. 많은 탄원시편에서는 원수들의 무리가 횡행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이 적들은 그들의 제물이 된 사람들을 병자라 할지라도 사정없이 괴롭힌다. 자기들의 억압자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시편 작가들은 다채로운 어휘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시편 번역가들과 주석가들은 이 적대적인 사람들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당황할 정도로 적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시편의 기도자들은 원수들의 활동을 서술하기 위해서 지혜 문학에서 유래하여 어느 정도 관습으로 굳어진 표현양식과 다양한 은유들을 이용한다: 전사, 그물과 올가미로 무장한 사냥꾼, 피에 주린 맹수, 사자, 황소, 들소, , 독사 등등. 원수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특히 악의에 찬 독을 품은 언사(거짓 증언, 험담, 중상, 요술사들의 주술을 연상케 하는 저주 등)가 그들의 주무기이다. 곤경 속에서 시편 작가들은 하느님의 정의에 하소연한다. 그러나 때로는 수세에만 몰리지 않고, 그들 역시 적극적으로 저주의 말로써 적들에게 대항한다. 그들의 공포에 찬 부르짖음은 예레미야나 욥의 외침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기도들, 특히 병자들과 죽음의 위험에 처한 이들의 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불행한 이들의 상황 속에, 그리고 당시의 종교, 사회적 맥락 속에 서보는 것이 중요하다. 시편의 기도자들은 산 이들의 땅”(27,13) 곧 이승 밖에서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여긴다. 이러한 세계관은 인간의 육체적인 조건에 대한 생각(건강, 장수 등이 행복의 주요 요건들이 된다), 인생, 이승에서의 생활, 아직 불완전하게 알려진 하느님의 정의 등에 대한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다. 성서의 인간학은 현대 인간학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특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듯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흔히 영혼으로 옮겨지는 히브리어 낱말은 시편의 번역에서도 가끔 볼 수 있듯이 실제로는 목구멍, , 열망, 욕구, 숨결, 생명 등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로는 단순히 인칭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구약성서의 사람들은 생명 또는 생명력을 다양한 강도를 지닌 하나의 힘으로 생각한다. 질병이나 고통스러운 상태, 역경이나 원수들의 공격 같은 것들이 생명력을 감소시키고, 원수 그 자체인 죽음의 세력과 그 영역 속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병자들과 박해받는 이들이 암흑과 침묵, 그리고 망각만이 다스리는 죽은 이들의 땅으로 내려간다고 탄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땅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이곳을 저승(히브리말로는, 셔올)”이라 부른다(만일 우리말의 다른 번역에 지옥으로 되어있다면, 이는 천당/연옥/지옥의 세 차원에서 말하는 지옥이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여 해방시키신다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원기를 회복시켜주고 소생시켜주심을 뜻한다.

 

곤궁에 빠진 이들은, 고통을 그들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여긴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히 이러한 결과를 인정하면서, 아울러 하느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방도를 찾는다. 죄의 고백은 용서를 부르고, 하느님의 은혜는 구원을 가져다 준다. 탄원시편 가운데 일곱 개의 기도가(6, 32; 38; 51; 102; 130; 143)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전통적으로 참회시편으로 애송되어왔다. 그 가운데 라틴어 번역의 첫마디를 따라 MiserereDe profundis로 불리는 시편 51130은 커다란 영성의 성숙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 탄원시편과 같은 구조를 지닌 공동 탄원시편(12; 44; 58; 60; 74; 79; 80; 83; 85; 90; 123, 그리고 126도 참조) 공동의 재앙을 전제한다: 전쟁에서의 패배, 외군의 침입, 학살과 파괴, 성전의 모독, 약자들에 대한 강자들의 박해, 의인들에 대한 악인들의 억압, 권세가들에 의한 폭정 등.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안과 공포를 하느님께 소리지르며 토로한다. 그리고 구원을 앞당기기 위해 주님께서 개입하셔야 하는 여러 이유들을 들면서 간청한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무죄를 내세우거나(44,18),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기도 하면서(79,8-9), 하느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구원(44,2-9; 74,2.12-17), 특히 계약을(74,20) 상기한다. 종국에는 하느님 자신의 명예(74,18; 79,10.12),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진실성과 성실성이 문제가 된다(44,27). 선택된 백성의 일이 주님의 일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 때로는 탄원의 원동력인 신뢰가 전면으로 부각되어 해당 시편의 주제가 된다(11; 16; 23; 62; 121; 131, 그리고 91도 참조). 영성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이 노래들은 아마도 레위인들의 환경에서 유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시편 작가들은 평화와 기쁨 속에서 그들의 안녕(23,4-5, 또한 27,1.3; 3,7; 4,9; 131,2-3도 참조), 그리고 하느님과의 지속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노래한다(16,5-11).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며(16,2.4-5; 62) 동포들에게 자기들의 경험을 따를 것을 촉구한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가져다 주는 기쁨과 안녕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고(11,7; 16,11),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의 청을 들어주시는 성전과 연결되어 있다(11,4; 23,6). 이 밖에 시편 115, 125129에서는 공동체의 신뢰도 고백된다.

 

() ‘개인 감사시편은 그 숫자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30; 32; 34; 40,2-12; 92; 116; 118; 138). 탄원시편에서 이미 감사가 예고되고 그 윤곽까지 잡혀있다(22,23-32; 56,13-14). 애원이 받아들여진 후에 기도자는 친척과 친구들을 동반하고, 서원을 채우기 위하여 성전으로 올라간다. 개인적이든 공동적이든 감사시편들은 바로 이러한 전례 의식에서 유래한다고 하겠다. 이 시편들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도입 부분 또는 때로 찬양의 주제를 발전시키는 선포 뒤에(92,2-7; 118,5-18) 시편 작가는 그가 처했던 위험, 고통 중에 바쳤던 기도, 그리고 하느님의 도움 덕분에 상황이 반전된 것을 상기한다. 그리고나서 회중을 공동의 감사로 초대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특히 시편 107에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 연출자의 지도 아래 특전을 받은 이들의 네 무리가 줄을 지어 행진한다: 사막에서 되돌아온 대상, 석방된 포로들, 치유받은 병자들, 바다에서 구조된 사람들. 동일한 구성을 지닌 이 시편의 각 연은 하나의 축소된 감사시편으로서 서술, 감사로의 초대, 그리고 후렴으로 되어있다. 개인 감사시편의 형태 아래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해방자를 향한 사은의 정을 노래했던 시편 118에서 우리는 아직도 그 감사 전례의 박동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3) 교훈시편

 

지혜 문학적인, 그리고 교육적인 요소들이 위에서 말한 두 개의 큰 유형 속에도 들어있다. 그러나 어떤 시편들은 특별히 가르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머리글에 있는 마스킬”[‘가르치다의 뜻도 지니고 있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60,1교훈을 위하여참조). 교육은 어떤 특정한 문학 형태에만 연계되어있지 않다. 사실 시편 작가들이 역사적 교훈, 예언자적 방식의 훈계, 전례적 충고, 도덕적 문제에 대한 지혜 문학적 반성 등 다양한 방법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자들의 본보기를 따라 이들은 잠언적 문학 유형을 사용하기도 하고, 기억을 쉽게 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는 의미를 지닌 알파벳 노래’(37; 112; 119 )와 같은 교육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 듯하다. 그래서 이 문학 유형의 단일성은 느슨할 수밖에 없다. 이 시편들의 공통점은 교훈적인 의도이다.

 

() 세 개의 시편(78; 105; 106)이 구원 역사를 길게 회상하면서 그 주요 주제들을 나열하고 있다: 약속과 계약이 이끄는 선조들의 전통(105), 기적이 선행되고 동반되는 에집트 탈출, 사막 횡단과 시나이에서의 계시, 약속된 땅으로의 입주와 그 소유(78; 105; 106). 그러나 시편 작가들이 사건 자체만을 열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의 의미, 주님의 명예 칭호(78,4; 105,1.5), 하느님의 성실과 신의, 인내와 자비에 대한 증거를 드러낸다. 이러한 역사 회고는, 신명기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구체적인 대답을 촉구한다.

 

() 교훈적인 관심은 이른바 전례시편에서도(15; 24; 134, 그리고 9195도 참조) 나타난다. 어떤 의식, 예컨대, 성전문에 도착하여 거행하는 예식은(24,7; 118,20 참조), 성전으로 들어가는 데에, 하느님의 현존 앞에 나타나는 데에, 그리고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데에 요구되는 조건들을 상기시키는 기회가 된다.

 

() 신명기적 작풍을 따른(81) 신탁과 약속과 경고를 골고루 갖춘 예언적 훈계(14; 50; 52; 53; 81, 그리고 75; 95도 참조) 진정한 신심과 계약이 요구하는 바를 강조하며, 사악과 배신을 고발한다(14; 52; 72). 시편 50은 도덕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제사의 기계적 효력에 대한 백성의 믿음을 단죄한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께 빚을 진 것이다.

 

() 마지막으로 몇몇 시편은 전적으로 교훈시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하다(1; 37; 49; 112; 119; 127; 133, 그리고 73; 128; 139도 참조). 이 지혜시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 가운데에서 율법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1; 119, 그리고 19,8-14도 참조). 애정과 함께 묵상되는 율법은 은혜의 무진장한 근원이다. 시편 작가들은 의인의 행복과 악인의 멸망을 선포하며 응보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현실은 전통적인 가르침과 항상 들어맞지는 않는다. 악인들이 성공하고 의인들이 실패한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마음을 괴롭힌다. 몇몇 시편 작가들은 이 위기를 거의 절망으로까지 몰고 가면서, 진정한 신앙의 위기를 거치기도 하지만(73), 고통을 통해서 자극을 받아 그들의 생각과 감성을 순화시키게 된다. 그들은 이승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균형이 저승에서 회복된다는 응보를 예측한 것인가? 아직은 분명치 않은 언명 속에 이러한 의미의 희망이 내비쳐보인다(49,16; 73,24, 그리고 창세 5,242열왕 2,1-11도 참조).

 

5. 시편집의 어제와 오늘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외국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을 위하여 히브리어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다. 칠십인역이라 불리는 이 번역본에서 시편집은 욥기와 잠언 사이에 위치하며 추가분의 시편 하나가 더 붙는다(151). 칠십인역 시편의 번호 매김은 히브리어 시편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두 번에 걸쳐 히브리어 시편 하나가(116147) 둘로 나누어진다. 거꾸로, 역시 두 번에 걸쳐, 히브리어 시편 둘(910, 그리고 113114)이 칠십인역에서 하나의 시편으로 모아진다. 이로써 번호 매김이 서로 어긋나게 되는데, 아래의 도표로 그 차이를 볼 수 있다.

 

히브리 시편 칠십인역과 라틴말의 불가타 번역

1 - 8 = 1 - 8

9 - 10 = 9

11 - 113 = 110 - 112

114 - 115 = 113

116 = 114 - 115

117 - 146 = 116 - 145

147 = 146 - 147

148 - 150 = 148 - 150

 

우리는 히브리어 성서의 번호 매김을 따른다. 그런데 교회 전례에서는 전통적으로 칠십인역을 따르기 때문에, 아래의 번역에서는 히브리어 성서 번호 옆 괄호 안에 칠십인역의 번호를 표기한다.

 

히브리어 성서에서 머리말이 없었던 시편들에 그리스어 성서에서는 새로운 설명들이 첨가된다. 84개의 노래들이 다윗과 결부되고, 다른 노래들은 예레미야, 에제키엘, 즈가리야, 하깨, 요나답의 후손들과 관련지어지며, 때로는 시편이 지어진 상황에 대한 새로운 설명도 첨가된다.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성서의 머리말의 뜻이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나름대로 해석한다. 그리고 히브리어 본문이 불분명한 곳에서(이런 부분이 시편에 상당히 많다) 그리스어 번역은, 비록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었지만, 때로는 더 올바른 본문을 복원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 번역은 아직도 그리스어를 쓰는 여러 교회에서 경전의 위치를 차지한다(그러나 일반적으로 유다교는 물론이고 가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교에서도 원문인 히브리어 성서만이 경전의 권위를 인정받는다). 기원후 2세기 중반에 아퀼라(Aquila), 심마쿠스(Symmachus)와 테오도시온(Theodotion)에 의해서 재작업된 다른 세 개의 그리스어 번역본은 교부들의 인용과 특히 3세기 초 오리게네스의 역작 헥사플라(Hexapla) 덕분에 우리에게 부분적으로나마 전해지고 있다.

 

시편집은 쿰란 공동체에서도 중요시되었다. 실제로 유다 광야의 동굴들에서 몇몇 개별 시편의 단편들이, 특히 제11번 동굴에서는 커다란 시편 두루마리가 발굴되었다. 더구나 이제 경전의 시편들을 쿰란에서 지어진 찬미가들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독창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고난에 가득 찬 역사를 거치면서 유다인들은 국가적 또는 종교적 축제 때에, 회당의 의식 때에, 그리고 가정에서 그야말로 시편집과 함께 태어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끊임없이 시편들을 낭송하고 묵상하며 노래해 왔다.

 

히브리어 성서를 아람말로 번역하여 설명한 시편의 타르굼(Targum)은 상대적으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것 역시 이븐 에즈라(Ibn Ezra)나 라쉬(Rash) 같은 중세 유다 학자(랍비)들의 대주석서들과 함께 현대의 번역자들이 참조해야 마땅하다.

 

시편은 신약성서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시편이 신약성서에서 100번 이상 인용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예수께서는 메시아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시편 110을 선택하신다(마태 22,41-46). 또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만찬을 종결짓는 할렐 노래를 부르시고(마태 26,30), 십자가 위에서는 시편 22의 첫머리를 외치신다(마태 27,46). 그리고 시편 31의 절 하나를 외우면서 숨을 거두신다(루가 23,46). 시편을 낭송하고 노래하는 관습은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으며(1고린 14,26; 에페 5,19; 골로 3,16; 야고 5,13), 일찍부터 개인 신심행위와 공동 전례에도 퍼지게 된다.

 

기원후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에 시편집은 시리아어로 번역되어 페쉬타(Peshitta)라는 이름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이 고대 번역본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성서에 가까운 히브리어 본문을 반영하고 있으며, 여러 시편에서는 특이한 머리말을 가지고 있다. 조금 후, 2세기 말경에 아프리카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라틴어 번역본이 탄생한다. 예로니모 성인은 4세기에 그리스어 본문을 바탕으로 한 라틴어 번역의 수정 작업에 들어간다. 그는 우선 칠십인역에 따라 개정하고(Psalterium Romanum) 다음에는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를 이용해서 개정 작업을 한다(Psalterium Gallicanum). 끝으로 직접 히브리어 성서를 바탕으로 하여 번역한다(Psalterion juxta Hebrae-os). 이 세 개정판들 가운데서 두 번째 것이 라틴어로 된 불가타(Vulgata)의 시편집이 된다. 이 불가타 번역본은 또 새로운 교정을 거쳐, 1971년에 발간된 로마 전례의 성무일도(Liturgia Horarum iux-ta Ritum Romanum)에 받아들여졌다.

 

우리 번역의 각주에서는 이런 칠십인역, 타르굼, 시리아어역(페쉬타) 아퀼라, 심마쿠스, 테오도시온, 예로니모, 불가타 등과 같은 고대 번역본들의 가장 특징적인 주요 이문(히브리어 본문과 다른 글)들만 열거한다.

 

간략하게 기술된 시편집의 이 긴 역사에 영성과 관련한 하나의 긴 역사가 상응한다. 사실 유다인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생활 속에서 시편들로부터 영감을 받아오고 있다. 교부 시대부터 시편들은 설교집과 주석서를 탄생시켰고, 개인적, 공동체적 신심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주석학적 연구를 유발시켜오고 있다.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새로운 전례를 통하여, 특히 제1독서와 복음 사이의 화답송을 통하여 시편들은 성무일도를 드리지 않는 신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친숙해지고 있다. 물론 진정한 신앙심은 각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문학적으로 고정된 언어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시편집이 이미 완성된 기도문을 우리에게 제공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또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 기도들을 제시한다. 시편은 우리에게 새로운 노래”(96,1)를 제안하는 것이다.

 

 

잠언 입문

 

 

우리말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 교훈이 되고 경계가 되는 짧은 말로 사전적 정의를 내리는 잠언은 히브리말로 마샬이라고 한다. 이 명사는 비슷하다또는 지배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어원과 뜻은 확실하지 않다. 히브리말에서 운문으로 된 잠언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문학적 방법으로 표현된다.

 

첫째는, 어떤 생각이나 표상을 다른 생각이나 표상에 대비시킴으로써 뚜렷하게 드러내는 비교이다: “악한 마음에 매끄러운 입술은 / 겉만 매끈하게 칠한 질그릇과 같다”(26,23). 그래서 칠십인역은 히브리말의 잠언을 그리스말의 비교라는 낱말로 옮긴다.

둘째는, 두 개의 생각이나 표상을 두 줄로 병행시켜 표현하는 것이다(물론 한 생각이 셋 이상의 줄로 전개되는 수도 종종 있다). 여기에는 서로 반대되는 경우와(“주님께서는 의인의 갈망은 채워주시고 / 악인의 욕망은 물리치신다”: 10,3), 서로 보완하는 경우가 있는데(“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 /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아라”: 1,8), 앞의 것을 동의적 병행법, 뒤의 것을 반의적 병행법이라 부른다.

 

이 밖에도 한 생각이 점진적으로 전개되거나, 둘째 줄이 첫째 줄의 생각을 설명하는 점층적 또는 종합적 병행법이 있다. “현인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라 /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한다.”13,14의 말씀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시편 입문참조). 잠언집의 모든 말씀을 이 세 가지 형식 안에 넣어 묶을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잠언은 이렇게 두 줄로 현인들의 생각을 나타낸다.

 

구약성서의 잠언집은 여러 시대와 여러 장소에서 유래하는 잠언들을 모은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러한 작은 묶음들을 한데 모은 책이다. 잠언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두 곳인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 그리고 이 둘을 잇는 이른바 비옥한 반달 지대에서 오래 전부터 발달해 온 문학 유형인 지혜문학또는 격언문학에 속한다.

 

이스라엘에도 이 동방의 아들들”(1열왕 5,10)의 지혜가 잘 알려져 있었다(특히 에돔의 지혜에 대해서는 예레 49,7; 오바 8; 바룩 3,22-23 참조). 그래서 성서의 잠언과, 그 밖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잠언과 아시리아-바빌로니아 잠언(이사 47,10; 예레 50,35; 51,57; 다니 1,20; 2,24), 에집트 잠언(창세 41,8; 1열왕 5,10; 이사 19,11.12; 지혜 17,7; 사도 7,22), 가나안 원주민들의 잠언,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티나 북부의 히타이트 잠언 사이에는 단순한 유사점 이상의 것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같은 주제를 동일한 표현 양식으로 나타내는가 하면, 때로는 다른 나라의 잠언을 직접 빌려온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들도 있다. 잠언집 안에 있는 두 개의 작은 모음(30,1-1431,1-9)이 외국 현인들의 작품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모든 것은 당시에 국제적인 문학 교류가 활발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1. 표제 - 잠언집 이해의 열쇠

 

상호 유사성과 직간접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잠언집을 단순히 국제 문학집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지혜문학 전체와 마찬가지로, 잠언 역시 보편적인 또는 국제적인 성격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특유한 산물임이 분명하다.

 

잠언집은 이스라엘 임금, /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잠언.”(1,1)이라는 표제로 시작한다. 솔로몬은 여기에서 두 가지 칭호로 불리는데, “이스라엘의 임금다윗의 아들이 그것이다. 솔로몬은 잠언집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이름으로, 잠언집 전체가 그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솔로몬을 꼽는가? 그가 통치자로서의 자질과 문학적 재질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금언을 지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1열왕 3,3-14.16-28; 5,9-14; 10,1-9.23; 집회 47,14-17 참조).

 

또한 잠언집에 들어있는 세 개의 작은 묶음에는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다(1,1; 10,1; 25,1). 그렇다고 해서 솔로몬을 잠언집 전체는 물론이고 이 모음들의 실질적인 저자 또는 편집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솔로몬 자신이 잠언집의 핵심 부분을 직접 지었거나 일부를 수집하였을 개연성을 부인할 수도 없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이 솔로몬과 그의 궁전을 중심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는 솔로몬의 국제 정치와 국제 무역 활동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특히 그는 당시에 지혜문학을 이미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던 에집트와 정식 외교 관계를 맺고, 파라오의 딸과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1열왕 3,1-2). 그래서 모세가 율법 전체를 제정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율법을 그의 권위와 전통 밑으로 결집시키듯, 그리고 시편들을 다윗에게 귀속시키듯(시편 입문참조), 솔로몬 역시 지혜문학의 대부로서 잠언집의 일부 또는 전체의 저자로 불릴 수 있는 정당성을 지니는 것이다.

 

잠언집의 수집가는 이 작품을 내놓으면서,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임금이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저자를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함으로써, 지혜가 임금에게서 유래한다는 당시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견해를 따른다. 이 생각은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임금은 바로 하느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금은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로서 하느님 신탁의 전달자로 여겨지기도 하였다(2사무 14,18-20; 잠언 16,10-15. 바로 직전의 16,1-9에서는 주님에 대해서 말한다. “신탁으로 시작하는 임금에 대한 구절을 주님에 대한 이야기 바로 다음에 배치한 것은 의도적이라고 하겠다). 물론 자기들에게 주어진 예언자적구실을 다하지 못한 불량한 임금들이 있었음이 사실이고, 잠언집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28,16; 29,4). “다윗의 아들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수집가는 세속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을 수도 있는 내용을 담은 잠언집에 일종의 신성을 부여한다. 다윗은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로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 백성에게 내리신 약속을 상기시킨다.

 

잠언집에서는 계약과 약속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의 권위 아래 선포되는 잠언집의 지혜는 매우 종교적인 신학을 통하여, 특히 이스라엘의 고유한 유일신 사상을 통하여 이 계약과 약속의 사실을 쉬 짐작하게 한다. 특히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이 근본 바탕을 이룸으로써, 구약성서의 잠언집은 다신론을 기조로 하는 고대 근동의 다른 잠언들과 구별된다. 이미 표제에서부터 독자는 잠언집의 이러한 성격을 느끼게 되고, 이는 이 책의 대부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31개의 장으로 되어있는 잠언집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 계시의 본질적인 부분임을 나타낸다. 물론 잠언들은 동시에 매우 인간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라는 큰 임금의 권위와 전통 아래 수집되고 선포되었기 때문에, 하느님 계시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2. 잠언집의 구성

 

(1) 잠언집은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설명하고, 11절의 표제를 정당화하는 짧은 글(1,2-7)로 시작한다. 잠언집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경험을 가르치려는 목적을 지닌다. 이는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젊은 세대가 생활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올바르고 지혜롭게 처신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이 경험은 과거와 현재의 스승들의 가르침 안에 들어 있으며, 이것이 말 그대로 일종의 교육을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의 시초에 이미 주님께서 존재하심을 잠언집은 강조한다.

 

(2) 잠언집은, 1,2-7의 머리글 다음에, 다양한 길이와 내용을 지닌 아홉 개의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구분이 본디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잠언집이 번역되어 오는 과정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루어졌고, 때로는 같은 목적으로 소제목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분과 각 단락의 간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8-9,18 : 나쁜 친구들과 낯선 여인을 삼가라는 아버지 또는 스승의 훈계가 나오고, 여기에 지혜에 대한 찬양과 지혜 자신의 말씀이 첨가된다(1,20-33; 8,22-35). 의인화된 지혜와 이에 맞서는 우둔함9,7-12를 가운데 두고 마치 균형을 이룬 두 개의 저울판같이 나란히 제시된다(9,1-69,13-18).

 

. 10,1-22,16 : 376개에 달하는, 도덕적 삶에 관한 솔로몬의 잠언들을 한데 묶은 것이다. 이 두 번째 모음은 매우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며, 주님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 잠언집 안에서 가장 오래된 잠언들이 들어 있다는 데에 학자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 22,17-24,22 : 현인들의 잠언들을 묶어놓은 첫 번째 모음이다. 이 모음에는 다른 요소들과 함께 에집트의 아멘엠오페의 지혜와 매우 흡사한 단락(22,17-23,14)과 술버릇에 대한 괄목할 만한 풍자가 들어 있다(23,29-35).

 

. 24,23-34 : 24,23이 말하는 바와 같이 현인들의 잠언들을 묶어놓은 두 번째 모음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게으름뱅이의 초상화라 할 수 있는 게으른 자에 대한 묘사가 주목된다(24,30-34).

 

. 25-29: 127개의 잠언들을 묶은 것으로서, 10,1-22,16에 이어 솔로몬의 두 번째 잠언 모음으로 불린다(25,1). 솔로몬의 첫 번째 잠언 모음에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대부분의 잠언이 한 쌍을 이루는 두 줄로 되어있다. 첫째 모음과 같지는 않지만, 25-29장의 잠언들도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 30,1-14 : 마싸 사람 아굴의 잠언들인데, 아굴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외국의 현인이다.

 

. 30,15-33 : ‘() 잠언이라 불리는 부분이다. ‘수 잠언은 수의 점진적 나열, + 1 (예컨대, ‘이 셋은 , 이 넷은 ’)의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수사학적 방식은 아모스 예언서 첫째 장에서도 볼 수 있다.

 

. 31,1-9 : 마싸의 임금 르무엘의 말로서, 외국 현인의 금언을 모은 묶음으로는 30,1-14에 이어 두 번째 것이다.

 

. 31,10-31 : 훌륭한 여인을 노래하는 유명한 알파벳 시이다(시편 입문참조). 이는 9장에 일종의 여인으로 의인화되어 나오는 지혜에 대한 묘사와 한 쌍을 이룰 수 있는 단락이다.

 

3. 지혜와 지혜로운 이들(현인들)

 

잠언집에서 주제가 되는 지혜는 사람이 지니는 자질로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혜는 사람보다는 하느님께 더욱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 지혜는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도 동참한다(3,19-20; 8,22-31). 여기에 지혜가 생명의 탁월한 근원으로 제시되는 근거가 있다. 이로써 지혜는 인간을 악과 죽음에서 보호하고, 하느님을 경외함과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좋은 것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잠언집에서 지혜는 육적인 것으로부터 유리된 순전히 영적인 존재로만 나오는 게 아니다. 8장에서 지혜가 하느님 앞에있는 존재로 소개된 뒤, 9장에서는 여자 집주인 구실을 하는 인격체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지혜를 일종의 독립된 인격체로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은 고대 근동, 특히 에집트에서와 같이 지혜를 하나의 신으로 여긴다거나, 또는 어떤 신적 존재를 지혜의 신으로 받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또한 모든 경우에 엄격하게 구분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른바 실재 인격체와 시적 인격체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주님의 손(민수 11,23; 신명 2,15; 이사 59,1), 주님의 팔(시편 98,1; 이사 51,9; 59,16), 주님의 칼(이사 34,5; 예레 12,12; 즈가 13,7), 주님의 영(이사 32,15; 63,11.14) 등은 시적으로 마치 하나의 인격체와 같이 묘사된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도덕적 바탕이 요구된다. ,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주의를 기울이는 자세이다. 결국 잠언집의 교육이 추구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인간 존재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지 않는 성서의 사고 방식에 따라, 정신과 육체, 종교적인 면과 세속적인 면을 동시에 지닌 전인적 인간을 말한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성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지혜로운 이는 예술과 기술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출중하게 활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능숙한 뱃사람(에제 27,8), 조각가, 가구 제조인, 세공인(탈출 31,5; 이사 40,20; 예레 10,9), 방적공(탈출 35,25), 전문 곡()(예레 9,16) 등이다. 특히 임금의 서기, 보좌관, 고문 등 정치 전문가들을 지혜로운 이또는 현인이라 한다.

 

예레미야 예언서는 사제와 예언자와 함께 현인을 이스라엘의 정신적 권위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로 본다(예레 18,18). 비록 예레미야 자신은 이른바 현인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판단하지만(예레 8,8-9; 9,11. 그리고 이사 29,14도 참조), 위의 말은 당시의 통념을 그대로 반영한다. 또한 이들 가운데에서, “유다의 임금 히즈키야의 신하들이잠언집 25 29장에 들어있는 이른바 솔로몬의 잠언을 수집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육 활동에 종사하는 이들도 현인이라 불린다. 잠언집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경험을 토대로 한 이들의 가르침은 사실 지혜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기술자나 예술가들의 자질면에 비추어 볼 때, 잠언집은 문장의 전문가들, 서기관들의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서기관은 정부 관리들을 지칭하는 일반적 명칭이다). 이들은 넓은 의미의 문학적 작업을 할 수 있는 많은 여유와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솔로몬의 둘째 잠언 모음은 이렇게 시작한다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으로서 유다의 임금 히즈키야의 신하들이 수집(또는, 필사)한 것이다”(25,1). 히즈키야의 신하들이바로 서기관들로서, 이 구절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이미 다른 이들이 말한 것들을 수집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들은 외국인들, 그리고 외국 문학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외국 도덕가들(아굴, 르무엘)의 금언들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모방하기도(‘아멘엠오페의 지혜’) 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하기 전에 이미 상당한 문화를 이루었던 가나안의 지혜문학의 영향에 대해서는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임금과 제후의 직무, 그리고 임금의 고문들에 대한 많은 구절들이 잠언집의 편자들이었던 바로 이 서기관들의 배려로 그 안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4. 잠언집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믿음

 

지혜의 근본, 또 지혜가 추구하는 교육의 근본은 주님을 경외함이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요 /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이다”(9,10. 그리고 1,715,33 참조). 이로써 현인들은 비록 자기들과 방법은 달리하였지만, 같은 경외심을 지니고 살면서 같은 경외심을 설교하였던 이들과 똑같은 생각이었음을 드러낸다. 이들은 곧 레위기와 신명기의 설교가들, 예언자들, 시편작가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세의 법에 호소하고 그것을 가르치며 설명한 이들이다. 이들 사이의 공통점 몇 가지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잠언집 첫 부분의 정열적이고 이성적인 훈계는 이 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여기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것은 신명기적 선택의 도식으로서(신명 11,26-28; 30,15-20), 생명과 거기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고, 죽음과 거기에 이르는 내리막길을 피하라는 것이다.

 

또한 두 개의 강한 표상이 율법과 예언서에 나오는 전통과 잠언집 사이의 깊은 일치를 드러낸다. 곧 생명의 나무와 생명의 샘이다(3,18; 10,11; 11,30; 13,12.14; 14,27; 15,4). 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낙원 이야기가 어떻게 이해되고, 또 어떻게 실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갔는지 말해주기도 한다.

 

지혜가 설교하는 성읍은 예루살렘을 연상케 한다(1,21; 9,3). 그런데 예루살렘은 그 자체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은 올바른 이들에게는 주어지고, 악인들은 쫓겨나는 땅이다(2,21-22; 10,30. 그리고 신명 4,26 참조). 이렇게 해서 집회서 24,8-17에서 선언될, ‘지혜-율법이 시온에 뿌리를 내린다는 표현이 마련되는 것이다.

 

시나이산에서 일어난 원초적인 사건(율법, 석판 위에 적힌 십계명의 부여) 역시 예언 사상과의 연계 아래 현인-교육자들에 의해서 실생활 속에 동화되고 전승된다. 이들도 예언자들처럼 가르침을 마음의 판에”(3,3 각주 참조) 새길 것을 촉구한다(3,37,3을 예레 31,33과 비교). 이 밖에도 이스라엘의 믿음과의 관계에서 두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첫째, 2,17에 의하면 혼인의 계약이 깨질 때 하느님과의 계약 자체가 깨진다는 것이며, 둘째, 5,14에서는 회중공동체라는 특별한 용어로써 이스라엘의 거룩한 공동체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5. 작가와 저작 시대

 

간략한 입문에서는 서로 다른 여러 부분의 생성 시기와 작가 등에 관해서 상대적으로 중요한 사항만을 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잠언의 뿌리가 이스라엘의 공동체 생활의 기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데에는 학자들이 대체로 의견을 같이한다. 구약성서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글자로 쓰여지기 전에 이미 구두로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관리 양성과 교양 교육을 담당하던 조정의 서기관 사회에서 잠언의 수집과 기록이 일찍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이 구약성서의 잠언집에서는, 이보다 훨씬 오래된 에집트의 교육에서처럼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아무튼 특별히 왕정 시대를 잠언 수집의 초기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배 이후 시대에 이에 대한 중요한 작업이 수행되었고, 주변 문화권으로부터 지혜문학을 수용하였음이 틀림없다 하겠다. 잠언들 역시, 시편들처럼, 구약성서의 거의 전역사를 통하여 형성되고 다듬어지고 전승되었다.

 

6. 우리말 번역의 문제

 

잠언이 일상 생활과의 밀접한 관계 아래 형성되고 말해지고 전해졌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해당 민족의 총체적 문화 배경이 큰 영향을 끼친다. 사실 구약성서 잠언 본문의 배경과 번역문인 우리말의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해에 어려움이 따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그 배경까지도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잠언은, 금언이나 격언 또는 속담처럼, 어떤 생각을 압축된 언어와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번역에 있어서도 이러한 잠언의 특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잠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되새겨야 한다는 사실, 비록 처음에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지만 곱씹을수록 제 맛이 난다는 데에 바로 잠언의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전도서(코헬렛) 입문

 

 

1. 저자와 시대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로 전해진다(1,1). 그런데 코헬렛은, 앞으로 자세히 말하게 되겠지만, 인명이 아니라 직책 또는 직능의 명칭이다. 1,1의 말은 의도적으로 임금의 이름을 직접 대지 않고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청중이나 독자는 그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곧 솔로몬 임금을 지칭하는 것이다(전도 1 - 21열왕 3 이하 비교). 그래서 전통적으로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쓰인 히브리말은 언어적으로 구약성서에서 가장 후대의 저술들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곧 구약성서에서는 이 책에 단 한 번만 나오면서, 성서 후대의 히브리말에서는 자주 쓰이는 어휘들이 많다는 점과 여기 쓰인 히브리말이 어휘에서뿐만 아니라 형태론과 구문론에서도 아람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전도서에서는 더 나아가서 드물기는 하지만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벌로 시작된 지중해 동쪽 언어들의 그리스화한 흔적들도 보인다. 또한 전통적인 지혜의 가르침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특히 이 가르침의 중심 사상인 현세적 응보 체계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 내용등은 이 책을 기원전 6세기의 유배 귀환 훨씬 후대에 자리잡게 한다.

 

집회서의 저자는 전도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쿰란(4동굴)에서는 기원전 2세기 중엽에 필사된 전도서의 몇 줄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전도서 저자의 활동 시기는 마카베오 시대 이전, 곧 기원전 3세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활동장소로 에집트 등이 제안되기도 하지만, 이 책에 담긴 제반 생활 양식 및 성전과 제사에 대한 언급(4,17; 9,2)등은 팔레스티나(예루살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도서는 전 시대의 임금을 저자로 내세워 문학 양식(樣式)의 일종인 픽션의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기법은 잠언에서도 마찬가지이다(잠언 1,1 참조). 이스라엘 지혜의 정점이며 대부이고 지혜와 부의 원형인 솔로몬의 입을 통하여, 그의 권위 아래 지혜의 가르침을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서에서 일곱 번(1,1.2.12; 7,27; 12,8.9.10) 언급되는 코헬렛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저자가 임금이었다는 말은 1 - 2장으로 끝나고 3장에서부터는 더 이상 그의 왕위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왕실과도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코헬렛의 제자이었을 사람이 붙인 발문(跋文)에 따르면 그는 직업적인 현인으로서 백성에게 지혜를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잠언들을 수집 정리 기록하였고 스스로 새로운 잠언들을 지어내기도 하였다(12,9-10). 이는 전도서의 저자에만 한정된 특수성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현인들은 모두 이러한 활동을 하였다(잠언 25,1과 집회서 맛머리말맜 참조). 다만, 12,9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보다는 성인들에게 자기의 인생관을 설파하는 일종의 철학자를 연상하는 것이 적합하리라 본다.

 

전도서는 허무로다, 허무! - 코헬렛이 말한다`- /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1,2)라는 말로 시작하고,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12,8).``

 

첫머리에 이미 결론을 내세우고, 책 전체를 통하여 설파한 내용을 끝머리에서 재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 부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논리적인 사고 전개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전도서는 예컨대 인생의 허무성과 사물의 불가해성에 대한 논문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논문이 갖는 어떠한 논리적 구조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이 책의 바탕에 깔린 사상과 거기에 쓰이는 언어는 전체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통일성을 드러낸다. 한 가지 사상을 동일한 문체로 표현하면서, 논리를 직선적으로 펼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의 단일적이고 통일적인 맥락은 저자가 오직 한 사람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저자의 손에 의해서 또는 스승의 사후 제자의 손에 의해서 발간되었는지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12,9 이하의 맛발문맜은 제자가 덧붙인 것이 확실하다. 반면에 이 편집자의 손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또 코헬렛의 말 중에서 이스라엘의 전통적 신앙과 지혜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사항들에 대한 수정이 있는지, 있다면 그 수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구절들에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가설로 머물 수밖에 없다.

 

2. 책 이름

 

전도서(傳道書)’라는 한자로 된 책 이름은 1,1의 코헬렛이라는 히브리말에 기인한다. 유다교에서 시작하여 예로니모를 거쳐 루터에 이르는 전통 중의 하나는 이 낱말을 전도자’, ‘전도사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동양권에서도 받아들여 이 책을 전도서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붙여진 책 이름은 논리적이라 할 수 없다.

 

본디 전도자/전도사를 붙여 전도자서또는 전도사서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냥 전도서라 이름지음으로써, 이 책이 이를테면 종교의 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집필된 책으로 오해될 여지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맛공동번역 성서맜는 코헬렛을 전도자라 하지 않고 설교자로 번역하였다. 이에 따라 이 책의 이름은 설교서”, 또는 더 정확하게는 설교자서가 됐어야 했다.

 

그러나 코헬렛의 뜻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이 낱말은 집회’, ‘회중’, ‘국민 공동체등을 뜻하는 카할의 동사형 모이다의 단순형 여성 단수 분사이다. 그래서 이 낱말은 집회를 이룬 공동체 안의 어떤 직책이나 직능, 더 나아가서 이 직책/직능을 맡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칠십인역은 (우리말로 음역하여) 에클레시아스테스(이대로 책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회중’, ‘교회의 구성원으로, 히브리 성서를 라틴말로 번역한 예로니모는 concionator ‘연사(演士)’로 옮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코헬렛은 집회의 의장또는 집회의 연사라는 뜻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밖에도 수집가’, ‘수집 책임자’, 또는 대변인으로 옮기는 학자들도 있다. 원뜻이 어떠하였든간에 코헬렛은 일반명사에서 출발하여, 이 명칭을 지닌 이의 가명 또는 제자들이 부르던 호칭이 되고, 그럼으로써 이 현인의 이름처럼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뜻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는 코헬렛을 번역하지 않고 음역하는 경향이 짙은데, 이는 옳은 추세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도 책 이름이자, 동시에 본문에도 나오는 이 명칭을 일관성 있게 코헬렛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전도서라는 책 이름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당분간 이 명칭과 코헬렛을 함께 쓰기로 한다.

 

3. 개괄적 내용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전도서는 분명한 순서와 구조에 따라 주제들을 전개해 나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이 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볼 수 있겠다.

 

우선 사물의 순환(循環) 운동에 관한 맛머리말맜(1,3-11)이 나오고 이어서 세 부분이 뒤따른다. 첫째 부분에서 코헬렛은 일종의 자기 반성을 하는데(1,12``2,26), 인간이 설사 그 누구보다도 많은 소원을 채웠다 하더라도 인간의 조건을 탈피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는 확인으로 끝을 맺는다. 즐기는 것밖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쓰디쓴 맛만이 입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무라고 코헬렛은 말한다.

 

둘째 부분에서(3,1 - 6,12) 코헬렛은, 시간의 영속성과 일시적 순간 사이의 대립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모든 현실이 부정적인 면과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것들의 상대성을 인식하면서 이 또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운명의 신비 앞에서 철학적 번민을 토로하게 된다(3,22; 6,12; 7,14; 8,7; 9,12; 10,14). 인생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1,3; 2,22; 3,9; 5,15)? 누가 인생과 세상사를 알 수 있는가? 인간은 자기 실존의 부조리를 탈피할 수 있는가? 완전한 진퇴양난 속에 자포자기만이, 또는 (현대의 어떤 실존철학자와 관련지어) 구토증만이 남는 게 아닌가? 자살과 향략에로의 욕구 사이에서 코헬렛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자세를 발견하고자 시도한다.

 

셋째 부분(7,1 - 12,7), 두번째 부분이 열네 번에 걸쳐 ? (또는, 하기 위한 때)’라는 말로 시작했듯이(히브리말에서는 이 글귀가 문장 앞에 온다), 비교의 형태를 취하는 일련의 일곱 가지 생각들과 함께 출발한다. 이어서 저자는 지혜, 이것과 정의의 관계, 여자 문제, 권력의 행사, 운명의 비밀, 현세적 정의에 대한 전통적 주제, 사회적 관계 및 전도되고 폭력적인 사회에서 이들이 취하는 명백히 비정상적인 형태 등을 다룬다. 이전의 욥처럼(9,22; 21,7 등 비교; 또한 시편 37; 49; 73; 예레 12,1; 말라 3,14-15도 참조) 코헬렛은, 사람들을 실존에 투신하도록 격려하는 현인들의 언행을 타협주의이며 공허한 수사학(修辭學)에 불과하다고 반발한다.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며,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10,14). 역설적으로 코헬렛은 비효율성으로 귀결되는 극단적인 입장들을 고발한다(일례로 7,16-17 참조: “너는 너무 의롭게 되지 말고 / 지나치게 지혜로이 행동하지 마라.`너는 너무 악하게 되지 말고 / 바보가 되지 마라”). 그러나 그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다. 동시에 그를 단순한 양분법에 따라 비관론자 또는 낙관론자라 부르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그는 현실적이고 냉철한 정신과 이성의 소유자이다. 그는 진실과 사실에 대한 정열을 지녔다. 결국 삶은 그에게 좋은 것이다. 그것은, 천사나 금수처럼 굴려는 시도없이, 기쁨과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하느님의 선물이다(3,13; 5,17; 8,15; 9,9 참조).

 

코헬렛은 학파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혜라는 큰 흐름의 가장자리에 서서 정통 신앙과 전통적 지혜의 가르침에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몇몇 시편들을(39; 62; 88; 90) 전도서에 근접시킬 수는 있겠다. 그리고 전도서가 나온 다음 몇십 년 후에 등장하여 코헬렛의 사상을 잘 알고 있었던 집회서는(특히 집회 14 참조), 전통적 사상에로의 복귀를 드러낸다. 또한 하느님과의 미래 생활에 대한 새로운 전망 속에 코헬렛과는 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는 지혜 2,1-10은 역으로 전도서에 의하여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4. 성서 밖의 유사한 전승

 

전도서는 헬레니즘이 전 중동 지방을 풍미하던 시대에 편찬되었다. 자연히 그리스 철학 사상들과 접촉이 있었으리라 추측되지만, 그것은 막연하고 불명확하다. 코헬렛의 사상, 그리고 에피큐리즘과 스토아 철학과 시니시즘[犬儒哲學] 사이에 공통된 분위기가 상존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도서의 저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팔레스티나를 다스리던 때 곧 기원전 3세기에 살았다. 그는 아마도 헬레니즘의 사상가들과 함께 대화를 하려고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코헬렛과 그리스 철학자들 사이에는 유사점보다는 상이점이 더 많으며, 그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그리스적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중동적, 더 분명하게는 이스라엘-유다적이다. 전도서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직접적 영향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원천 중의 하나는 오래 전부터 정치 문화적으로 팔레스티나에 영향을 끼쳐온 에집트이다. 예컨대 잠언 22,17``23,14는 에집트의 맛아멘엠오페의 지혜맜와 매우 흡사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 맛지혜맜의 구절을 직접 인용하기도 한다. 전도서와 관련해서는 맛절망에 빠진 자와 제 영혼 사이의 대화맜, 맛하프 연주자의 노래맜 등이 비교된다.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접촉점은 메소포타미아의 전승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도서의 주제들이나 표현 방법들은 맛바빌론의 코헬렛맜으로 불리는 문헌과, 특히 고대 중동 전역에 공동의 정신 문화 유산으로 전해오던 맛길가메쉬 서사시맜와 큰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일례로 9,9?의 각주 참조). 그러나 전도서가 이러한 성서 외 전승들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저술되었거나, 또는 그들이 코헬렛으로 하여금 전도서를 집필하도록 자극을 준 것은 아니다. 코헬렛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제기하는 문제점은 이스라엘의 사상적 맥락 안에서, 특히 전통적 지혜의 가르침과의 상관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5. 문학 양식

 

전도서 역시 지혜문학서로서 전통적인 지혜문학의 양식들을 사용하며, 다른 지혜문학서들에서와 같이 운문으로 되어 있는 잠언 양식이 기본을 이룬다. 이 밖에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는 말투인 의 호칭을 자주 쓰고, 또 자신의 직접적 또는 가상적 경험을 독백 형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유다인 성서 전승가들은 전도서를 운문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시편-욥기-잠언의 악센트 체계와는 다른 일반 체계를 이 책에 적용하였다. 그러나 전도서의 문장은 대구법을 위시한 히브리 시()의 특성들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12,1-7에 나오는 인간의 말년(末年)에 대한 묘사는 성서 시문학의 최고 절정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코헬렛은 어떤 일정한 운율에 얽매이지 않고, 이를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구사한다. 어쩌면 그의 사상이 전통에 얽매이지 않듯, 코헬렛은 문장의 형식도 일정한 틀에 묶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거의 호칭기도와 같은 단조로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러한 반복 형식 또한 저자가 역설하고자 하는 바를 뒷받침하고 있다. 사실, 코헬렛이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주제들이 구약성서 자체나 고대 중동의 문헌들과 비교해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들을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주제들이 더욱 강력한 형태로 새롭게 전달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번역 성서들은 전도서를 운문과 산문 형식으로 나누어서 옮긴다. 그러나 그 구분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책의 문장들 중에는 명백한 산문들도 있지만, 우리는 일괄적으로 운문 형태로 옮긴다. 전도서의 산문도 일정한 운율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운문으로 옮겨놓는 것이 우리말에서 읽고 이해하는 데 더 수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 전도서와 이스라엘의 신앙

 

코헬렛은 정통 신앙 및 전통적 지혜와 거리를 두고 이것들에 따른 선입견 없이 자기만의 냉철한 눈과 냉엄한 판단력으로 인생과 세상사를 관찰한다. 그 결과로 전통적 지혜가 가르치는 윤리적 세계 질서가 그에게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세상의 윤리적 바탕이 상실된 것이다. 윤리 도덕적 행동에 상응하는 응보없이,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야 할 바를 겪는 의인들이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야 할 바를 누리는 악인들이 있다(8,14).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어떠한 구분이나 차이도 없는 동일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9,2). 지혜를 추구하는 이나 어리석음으로 일관하는 자나 모두 같은 종말을 겪게 되고(2,15), 인간이나 짐승도 같은 운명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것도 없다(3,19). 인간들은 이를 알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에는 악과 어리석음만이 자리한다(9,3). 인생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세상사의 불가해성으로 이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일정한 질서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불가해한 세상에 사는 인생의 모든 것이 결국 허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선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추구해 왔던 지혜 역시 소용이 없다. 물론 빛이 어둠보다 낫듯이, 지혜가 우매함보다는 낫지만, 지혜를 찾음은 근본적으로 헛수고이다(2,15). 전통적 지혜가 그 윤리적 세계관적 바탕으로부터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허무성과 사물의 불가해성은 결국 코헬렛의 신관(神觀)과 하느님께 대한 생각에 기인한다. 그는 야훼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의 이름을 채택하지 않는다. 오직 하느님또는 더 정확히 말해서 ”(정관사가 붙은 엘로힘)만을 사용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하늘 위에 계시는 존재이다(5,1).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내려오셔서 인간과 대화를 나누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것을 주재하시면서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지 않으신다(8,16-17). 코헬렛에게 있어 하느님께서는 인격적 신이 아니시다.

 

코헬렛의 근본적인 딜레마는 하느님께 대한 문제를 신앙의 입장이나, 신학적 견지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것들을 배제한 채 오직 인간적 지혜와 이성으로만 해결하려고 한 데에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스라엘의 인격적-실존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알지 못한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상실은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의미한다. 결국, 결론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코헬렛은 삶 자체를 싫어하게 된다(2,17). 살아 있는 사람보다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고인들이 더 행복하고, 더더욱 낫기로는 아예 태어나지 않아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불의와 허무한 일들을 보지 않는 인간이라고 말한다(4,2-3).

 

그렇다고 코헬렛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 자체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자기 민족의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있어서도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다(11,5; 또한 8,17도 참조). 그분께서는 창조주로서(12,1) 세상을 아름답게(3,11), 그리고 사람을 올바로 만드셨다(7,29). 사람들은 그분을 경외해야 하고(3,14; 5,6; 7,18; 또한 8,12도 참조) 그분께 영성적 경신례를 드려야 한다(4,17). 그분께서는 각자를 그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3,17; 11,9; 또한 9,7; 12,14도 참조). 이러한 최종적 심판이 내려질 때까지, 인간에게는 제한적이기는 하나 실제적인 행복이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된다(8,15; 9,7; 11,9). 그리고 인간은 너무 집착함 없이 이러한 행복을 누리도록 해야 한다. 코헬렛은 또한 선인들처럼 현인으로서 이러한 사항들을 지혜문학적 언어로 백성들에게 가르친다.

 

전통적 지혜의 파산, 존재의 환멸, 모든 선의 무상함 앞에서 인간은 만족스럽게 될 수 없다. 코헬렛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향수를 품는다. 그는 우주 안에서의 자기 존재에 대한 계시와 자기 운명의 의미에 대한계시를 갈망한다. 코헬렛은 자신의 전존재를 투신하면서, 그리고 거의 학문적으로전통적 신앙이 열어둔 채방치해 놓은 심연을 드러낸다. 오직 그리스도의 오심만이 그것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아가 입문

 

 

1. 아가의 문제점

 

여덟 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책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들 중의 하나를 안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아가가 구약성서 안에서 갖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이 사랑의 시(또는 연애시집)는 도대체 구약성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무슨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아가는 매우 관능적인 표현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느님이나 어떤 신앙 조목, 또는 사랑의 윤리적 의미라든가 사랑의 결과로서의 출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오로지 육체적인 아름다움에만 전념한다. 그 안에는 타민족들의 연애시에 가까운 내용과 형태뿐만이 아니라, 이교(異敎)와 신화의 잔재들도 들어 있다. 게다가 해석을 위한 명백한 열쇠는 하나도 제공되지 않는다. 이 책은 누구에 의하여 언제 쓰여졌는가? 독립적인 노래들의 모음인가, 아니면 하나의 노래인가? 민속 노래인가 아니면 서정시인가? 또 무엇 때문에 쓰여졌는가? 만일 아가가 단순한 실수로 인해서 성서 속으로 흘러들어 간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후대에 유다인들의 과월절 축일 전례 때 불리워졌을 정도로 경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는가? (아가는 기원후 시대에 유다인들의 주요 축제 때 봉헌되었던 다섯 개의 축제 두루마리곧 축제 오경 가운데 하나이다.)

 

2. 구조

 

이 책의 구조는 절과 주제 및 이미지와 상황이 되풀이되고, 연결이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없으며 현대적 의미의 문학적 구성이 결핍되어 있어 규명해 내기가 어렵다. 어떤 이들은 혼인 잔치 때 쓰이는 시가들의 모음일 따름이고, 거기에다 반드시 결혼 노래만은 아닌 사랑의 노래들을 단순하게 배열한 것이라 본다. 다른 이들은 몇 개의 긴 개별 시가들 사이의 일정한 순서와 질서를 구별해 낸다. 또 다른 이들은 아가의 시 전체를 관통하는 연계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지는, 예컨대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행동의 전개라든가, 아니면 남녀 사이에 전개되는 사랑의 경과를 구성해 내는 것은 본문의 내용과 순서에 대한 과감한 수정과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확실한 바는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아가의 많은 노래들도 전부 단일한 주제 곧 관능적 사랑을 다룬다는 사실이다.

 

3. 저자와 시대

 

아가의 저술 시기를 솔로몬 시대 또는 그 조금 후인 고대 왕정 시대로까지 올리려는 시도가 없지 않지만, 여기에 쓰인 언어와 문체는 매우 후대의 것으로 보여 페르샤 시대(기원전 5세기) 또는 헬레니즘 시대(3세기)까지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곧바로, 문학의 발전 경과로는 반드시 설명될 수 없는 바로서, 낱말과 표현의 선택에 있어서 자주 드러나는 의고주의(擬古主義)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설사 후대에 저술되었다 하더라도 아가는 고대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아울러서 전원 또는 도시, 북부 이스라엘 또는 남부 유다에 속하는 매우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으로 잠언, 코헬렛<전도서>, 그리고 지혜서와 같이 아가도 1열왕 5,12와 아가 자체의 1,1; 3,7.9.11; 8,11.12에 솔로몬의 이름이 나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전통적으로 솔로몬이 저자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솔로몬이 저자가 아님은 분명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아가 1장의 경우에서 솔로몬은 총칭적인 명칭으로서 쓰였거나, 또는 잠언과 코헬렛<전도서>과 지혜서에서와 같이 문학 양식의 일종인 픽션으로 쓰여졌을 뿐이고, 3장의 경우는 옛날의 결혼 축가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가 있으며, 8장은 이상적인 임금은 역사의 솔로몬이 아니라는 아가의 근본 의도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아가는 부분적으로는 유배 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노래들, 그러나 최소한 그 주제에 따라 크게 한 작품을 이루는 노래들을 유배 시대 이후에 편집하여 편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4. 경전화와 해석

 

선입관 없이 읽었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세속적이고 관능적으로 여겨지는 아가가 어떠한 근거와 까닭으로 경전에 속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확실하게 알 길이 없다. 외적으로는 당시 오래된 솔로몬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용상으로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전거가 없기 때문에, 아가가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사랑을 노래하였다고 우유(寓喩;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된 때문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하간 이 책의 원 뜻이 이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시가는 본디 혼인 잔치 때 불렸는가? 기원후 1세기 말에 아키바 랍비가 이를 반대한 바도 있지만, 연회장에서 이 노래를 불렀던 관습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아울러 유다인들의 과월절 전례 때의 사용은 기원후 5세기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원뜻이야 어떠했던간에,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온 아가는 거룩한 노래인가, 아니면 세속적인 노래인가? 달리 표현하여, 이 책은 구약의 경전으로서 제자리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잘못해서 들어온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아가의 해석은 구약성서의 그 어떠한 책에 대한 해석보다도 변화가 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설명들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네 가지를 다시 우유적 해석이냐 사실적 해석이냐에 따라 둘씩 구분지을 수 있다.

 

. ‘우유적 해석은 경우에 따라서는 적어도 기원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방법으로서,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당혹감을 불러일으켰던 이 관능적 연가(戀歌)의 이해에 대한 걸림돌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해석은 아가에 나오는 젊은 남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또는 신비주의적으로 이해한다. 역사적 이해의 경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제시된다. 첫째 가능성은 역사상 일정 기간에 이루어진 하느님 백성과 다른 민족 사이의 만남이다. 두번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중 유배에서 귀환했을 때와 같이 특정한 시대나 구원의 역사 전체를 통한 야훼 하느님과 당신의 선택된 백성 사이의 관계, 또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대변되어 온)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 사이의 관계이다.

 

신비주의적 이해 역시 두 가지 길을 제공한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 또는 그리스도와 인류 사이의 집단적 관계와(이것이 신비주의적 이해를 앞의 역사적 해석 방법과 연결시키는 구실을 한다),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와 인간의 영혼, 더 나아가서는 성령과 마리아 또는 그리스도와 마리아, 또는 솔로몬과 지혜를 결부시키는 개별적 관계이다.

 

. ‘제의적(祭儀的)-신화적 해석은 우유법(알레고리)의 또 다른 형태라 할 수 있다. 이 해석은 아가를 수메르`-`아카디아의 종교적 신화의 배경에서 이해한다. 이 종교에서는 겨울에 모든 자연이 죽은 듯이 보였다가 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종교-신화적으로 이해하였다. 겨울은 탐무즈라는 신이 죽어감을 뜻한다. 죽어 사라진 이 신을 그의 애인인 이쉬타르라는 여신이 찾아나선다. 온갖 난관을 거치면서 저승까지 가서 애인을 찾고 결국 둘은 결혼하게 된다. (신들 사이의 이 특별한 결혼을 그리스말로 된 전문 용어로 히에로스 가모스라 하는데 성혼<聖婚>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이 결합의 결과가 봄 곧 자연의 소생이다. 이는 비단 메소포타미아만이 아니라 에집트를 포함한 고대 중동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신화로서, 지방에 따라 두 신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신화는 제의를 통하여 재현된다. 곧 임금과 여자 대제관 또는 남녀 제관에 의하여 구현되는데, 이들의 성혼은 신들의 결합을 상징하고 새해에 자연의 풍요다산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성적(性的) 결합이 더 이상 그 자체로서 목적을 지니지 않고,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일이 되어 아가의 관능이 지니는 걸림돌이 제거된다고 하겠다. 가나안에서는 이쉬타르와 탐무즈 대신 아세라 여신과 바알 남신 사이의 관계로 변형되는데, 이 제의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므나쎄 임금 시대 유다가 아시리아에 예속되던 8세기에 예루살렘에 정식으로 도입되었다고 추측된다(2열왕 21 참조). 이러한 이교의 풍요다산을 비는 제의가 후대에 와서, 마치 농경 사회의 축제였던 누룩 없는 빵의 축제가 과월절의 역사적 신앙을 표현하기 위하여 재해석되었듯이, 다소간의 수정을 거쳐 이스라엘의 신앙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 ‘극적 해석은 장면과 상황의 변화 그리고 제삼자들을 포함한 연인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창(對唱)을 근거로 해서 이 책을 일종의 연애극(戀愛劇)으로 이해하고, 예컨대 솔로몬과 수넴 출신 처녀 아비삭(7,1과 각주 참조) 또는 여타의 가상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이 해석은 아가의 성적(性的)인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배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감으로써 걸림돌이라고 염려되는 바를 피해간다. 외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성적 묘사를 피하기 위하여 이 책을 구태여 신비주의적이나 우유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가가 성() 그 자체보다는 사랑에의 충실과 성실성에 더 관심이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이 책을 솔직담백한 사랑의 묘사로 이해한다. 더 나아가서, 둘이 아니라 세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곧 자신을 강탈하려는 솔로몬에도 불구하고 남자 애인에게 충실한 여인의 드라마를 보여줌으로써, 관능적 욕구에 대하여 일정한 불신의 눈길이 던져지게 한다. 이렇게 일종의 대표적인 유형들을 등장시키는 유형론적(類型論的) 형태 아래, 이 해석은 우유법의 일정한 요소들을 취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리스도교적-우유법적 해석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오리게네스(253/254년 서거)는 아가를,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인간의 영혼과 하느님 말씀 사이의 사랑의 종교적 신비로 이해하는데, 구체적으로 아가를 배역에 따라 할당하고 연극 감독과 같은 지시 사항을 덧붙이기도 한다.

 

. ‘자의적(字義的) 해석역시,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기원후 1세기 말에 연회장에서 아가의 일부를 있는 그대로 노래하였다는 에피소드가 말해 주듯, 적어도 민속적인 형태 아래 부분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이에 반대한 아키바 랍비는 이 책을 우유법적으로 이해하였다). 현대적 방법으로서의 자의적 해석은 현재 아랍인들의 연애 또는 결혼 노래에서 출발하여, 아가를 쓰여진 그대로 현실적인 사랑 노래들의 모음으로 이해한다. 아가는 이와 유사한 점들을 드러내는 에집트의 세속적 연가 또는 아랍의 민속가 모음처럼 사람들이 보존해 온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또는 지난 세기 말까지도 요르단 동부 지방과 레바논에서 볼 수 있었던 시리아인들의 혼인 잔치 예식(결혼식이 끝난 후 일주일 동안 신랑 신부는 임금과 왕비와 같이 행세하고 축하객들과 동네 사람들도 그들을 그렇게 대해 준다) 순서에 따라 배열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예컨대 솔로몬과 파라오의 딸 사이의 결혼을 정당화하기 위한, 세속적인 작품일 뿐이라고 여기고(이 견해의 창시자는 이미 안티오키아 학파의 지도적 학자였던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르 주교<350-428>라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외설적 노래가 잘못해서 경전에 속하게 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다른 이들은 아가를 순진무구한 민간 시가로 받아들이고, 솔직한 사랑의 윤리적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유형론 또는 예형론(豫型論)이나 극적 해석을 통하여 위에서 언급한 입장들을 자유롭게 보태기도 한다.

 

. 어느 한 가지만 정당하고 다른 것들은 틀리다고 제거해 버릴 수 없는 이상의 여러 요소들이 달리 결합되어서 다섯번째 해석 방법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네번째 설을 이어받아, 아가는 인간적 연가인데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을 결혼으로 서술하는 예언자들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 예언자들의 언어 대신 성혼의 묘사에 쓰이는 언어의 영향을 강조한다.

 

이상의 네 가지 주요 학설들의 두 그룹은 아래와 같이 접목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첫째와 둘째 학설에서 아가의 일차적 의미는 종교적이고 우유적인데, 이는 이 책이 단순하게 성적(性的)이고 세속적인 의미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셋째와 넷째 학설에 있어서 아가의 일차적 의미는 성적이며 세속적인데, 이는 우유법의 도움을 피하고자 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그러나 종교와 세속의 영역을 분리시켜 종교적 연가와 세속적 연가가 서로 독립적으로 생성 발전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둘 다 하나의 공통된 시가(詩歌) 전통에서 유래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되었던 것이다.

 

구약성서 전체를 볼 때, 아가의 중심을 이루는 신부(新婦)의 주제(모티프)’는 대충 두 개의 영역에서 익히 사용되는 바이다. 첫째, 예언자들은 야훼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결혼으로 묘사한다(예컨대 이사 54,4-10; 62,4-5; 예레 2,2; 에제 16,8; 호세 2 ). 둘째, 지혜문학서에서 지혜는 여인-신부로 서술된다(잠언 4,6-8; 7,4-5; 집회 15,1-8 등 참조).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아가를 우유적으로 이해함이 전혀 근거가 없는 작업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유적으로 아가가 말하고 있는 모든 사항들을 만족할 만큼 설명할 수가 없음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자의적으로만 이해할 수 없음도 분명하다. 예컨대 아가에서는 여자가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데, 이는 고대 사회의 현실 또는 당시의 세속적 연가의 관점에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점이다. 또한 아가를 종교와는 무관한 극() 노래로 이해하는 극적 해석에서도, 결과론적으로 볼 때, 자의적-세속적 이해의 열쇠로 충분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이 해석 방법에 따라 아가를 극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본문의 많은 부분들의 순서를 뒤바꾸어야 하는데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의적-신화적 해석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아가에 제의적-신화적 요소들이 상당히 들어 있고 또 이 해석 방법이 많은 부분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정통 신앙과 부합할 수 없었던 이교의 우상숭배적인 풍요다산의 제의에서 유래하는 노래 모음을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는 상상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아가 안에 들어 있는 노래들을 구체적으로 누가 불렀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또한 이 노래들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도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번역에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두 주인공을 남자”, “여자로 구분해 보았다. 아울러서 제삼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누구인가는 더욱 불분명하기 때문에 항상 물음표를 덧붙인다. 그리고 누가 불렀는지 모른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물음표만을 찍는다.

 

5. 아가의 의미

 

아가의 사랑은 인간적인 것으로서 성적이며 동시에 거룩한 것일 수 있다. 이 두 가지 면 중에서 하나를 인식하지 못할 때, 한편으로는 세속적 의미에만, 다른편으로는 우유적 의미에만 이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아가는 - 창세 2,23-24에 대한 일종의 주석으로서 - 인간적인 사랑을 하느님의 선한 창조 사업 안에서 그 자체로서 목적을 지닌 것으로 서술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책은 다소간 의식적으로 에집트의 연가라든가 당시 중동 지방에 두루 퍼져 있었던 이교적 성혼의식의 요소들을 채택한다.

 

그러나 아가는, 사랑의 진실한 기능은 하늘과 땅이 또는 두 신이 종교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상호보완적으로 창조하신 두 창조물이 결합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연의 풍요다산을 비는 제의(祭儀)를 철저하게 탈신화화한다. 당시 이스라엘을 둘러싼 민족들과 문화들은 대부분 성()을 신성시하였다. 이들은 성을 신성한 신비와 신적인 현상으로 여겨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를 재현하였다.

 

이에 반하여 아가는 완전히 탈신성화한 사랑 곧 극히 인간적인 현상으로서의 성과 사랑을 노래한다. 이는 성의 신성화, 또는 신을 성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구약성서적 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신학적으로 큰 중요성을 갖는 공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시 사람들이 갈구하던 자연의 풍요 역시 인간들에 의하여 대행된 신적인 성의 재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과 사랑의 계약을 맺으신 야훼 하느님, 그분 혼자만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가는 진정한 육적 사랑(잠언 2,16-17; 말라 2,14)을 계약의 언어와 함께 서술하는데, 이는 당신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 마치 에페 5,25에서 바울로가 다시 말하는 바와 같이 - 모든 사랑의 전형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렇게 아가의 영성적 의미는 이 책의 자의적 의미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지혜서 입문

 

 

1. 제목과 저자와 저작 시기

 

지혜서에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내용상으로는 유다교에서 현인그 자체로 여겨졌던 이 임금이 많은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에는 이 책을 솔로몬의 지혜라고 불렀다. 그러나 솔로몬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것은 이 작품의 저작 당시에 흔히 이용되었던 문학적 수단이다. 그 목적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권위 아래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혜서는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유다교 문헌들과 관련이 있는 작품으로서, 무명의 어떤 저자가 그리스 말로 쓴 것이다.

 

저작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특별히 이 책에서 사용되는 어휘, 그리고 당시 이집트에 살던 유다인들이 동등한 시민권을 주장한 사실을 시사하는 표현(19,16) 등에서 제시되는 단서들을 바탕으로 저작 시기를 대충이나마 잡아 볼 수 있다. 곧 위로는 기원전 5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밑으로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기원전 30년부터 시작되는 로마 제국 시대까지 내려갈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단 한 번에 쓰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저작 작업이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11,4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집트 탈출에 관한 숙고는, 기원전 20년경에 출생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작품인 모세의 생애와 수많은 유사점을 드러낸다. 지혜서와 모세의 생애가 똑같이 일종의 교화적 성서 해설인 미드라쉬가운데 하나를 이용하였을 경우에도, 이 두 저자는 시간상 서로 많이 떨어진 것 같지는 않다.

 

2. 저자와 저작의 단일성

 

지혜서를 처음 읽어갈 때에 그 문체와 주제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우선 성서의 시를 모방한 문체가 사용되지만, 특히 11,4에서부터는 문장이 점점 길어져 운율 있는 산문에 가까워진다. 또한 610장에서는 지혜의 창조적이고 섭리적인 역할이 강조되는 반면에, 그 다음부터는 지혜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학자들은 지혜서의 저자가 여럿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제시한 가설 가운데에서 두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5장은 본디 히브리 말로 쓰였는데 다음 부분을 저술한 저자가 그리스 말로 옮겼다는 것이다. 둘째, 지혜서 전체가 처음부터 그리스 말로 쓰여지기는 하였지만, 1119장은 그 앞부분의 저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 손에 저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저자의 단일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데로 의견이 모아지는 추세이다. 이 책이 전체적으로 동일한 문화와 동일한 문학적 인격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두 가지 방식이 지속적으로 이용됨을 볼 수 있다.

 

(1) 대조 또는 비교

 

예컨대 의인들의 영원한 생명과 악인들의 헛된 삶, 덕의 불모성과 악의 다산성, 이스라엘인들의 운명과 이집트인들의 운명 등이 대비된다.

 

(2) 사고의 점진적 전개

 

저자는 연속적 터치 기법을 이용한다. 예컨대 이 책의 앞부분(1,11-13.16)에서 제기되는 죽음이라는 주제는 이후 여러 번에 걸쳐 되풀이되며 발전된다(2,20.24; 3,2-3; 4,7-14 ). 저자는 이 주제가 지니는 내용의 풍요성을 바탕으로 때로는 육체적 죽음을, 때로는 영적 죽음을, 또 때로는 둘 다를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그의 사고는, 다른 주제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조직적인 요약을 피해 가는 듯하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낱말들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진귀한 어휘를 사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 또 수많은 구문 형태나 수사학적 표현들을 부단히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러 용어에 부여된 생소한 의미, (우리말에서는 그대로 옮길 필요가 없는) 그리고, 그러나,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등 접속어의 단조로운 반복도 들 수 있다.

 

3. 구조와 내용

 

지혜서는 서로 다른 상황과 관심을 반영하는 세 개의 대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인간의 운명(1 - 5)

 

이 단락에서는 의인들의 운명과 그들을 박해하는 악인들의 운명이 대조된다. 이러한 첫 단락의 목적은 유다인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곧 그들이 겪는 여러 가지 시련은 장차 내세에서 받을 영광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유다인들에게 죽어 없어지지 않는 정의를 실천하라고 권면한다(1,1-15). 물론 물질주의에 빠져 탈선한 악인들은 의인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면서 박해한다(1,162,20).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면서, 하느님께서 순수한 영혼들을 위하여 불사불멸을 준비해 놓으셨고 지혜의 적들은 합당한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2,213,12). 자식을 많이 낳으면서도 행실이 무도한 여자는 징벌만 받는다. 반대로, 아이를 낳지 못하면서도 덕성스러운 여자는 찬미를 받아 마땅하다(3,134,6). 의인들은 더러 때이른 죽음을 맞는 반면에 악인들은 오래 살 수도 있는데, 악인들이 오래 산다는 사실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긍정적 의미도 갖지 않는다. 악인들의 장수와 의인들의 단명으로 이 두 부류의 인생이 뒤바뀔 위험은 없다. 악인들은 심판을 받고, 의인들은 하느님에게 영광을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 가서 후회해 본들 소용이 없다(4,75,14). 의인들은 영원히 살면서, 심판 뒤에는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5,15-23).

 

(2) 지혜 찬가(6,1 - 11,4)

 

이 찬가는 솔로몬이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임금은 직접 거명되지 않는다. 사실 지혜서의 저자는 고유 명사의 사용을 피한다(10,6펜타폴리스<다섯 성읍>, 10,1819,7홍해만이 예외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지혜가 베푸는 가르침에 마음을 열라고 다른 임금들에게 권고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유다인이 아닌 군주들, 또 그들을 통하여 이교도들의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듯하다. 이렇게 임금들에게 권유한 다음(6,1-11), 솔로몬은 사람들이 알고 실천해야 하는 신비스러운 실체인 지혜를 소개한다(6,12-21). 이어서 그는 지혜의 본성과 기원을 밝힌다(6,22-25). 솔로몬이 인간적 조건에 얽매여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고 또 지혜가 그에게 모든 좋은 것을 가져다 주었으므로(7,1-14), 그가 그러한 일을 할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는 또 모든 지식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간청하고 나서(7,15-22?), 지혜의 본성을 점진적으로 서술한다(7,22- 8,1). 지혜는 솔로몬에게 나중에 함께 살게 될 이상적인 배우자이기도 하다(8,2-16). 그러나 이러한 친밀성은 하느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다(8,17-21). 그래서 솔로몬은 임금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지혜가 도움을 베풀고 또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를 다시 올린다(9,1-12). 지혜만이 하느님의 뜻을 알고, 또 그럼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9,13-18). 창조 때부터 이집트 탈출에 이르기까지, 지혜는 창세기가 전하는 모든 일화를 통하여 자기가 역사의 주인임을 드러낸다(10,1 - 11,4).

 

(3) 이집트 탈출에 관한 숙고(11,5 - 19,22)

 

이 마지막 단락은 앞의 것들보다 더 길 뿐만 아니라 특히 복잡하다. 탈출기의 재앙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인들의 운명과 이집트인들의 운명을 연이어 비교하는 것이 이 단락의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비교들은 자주 본론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와 우상 숭배에 관한 논쟁으로 중단된다. 아무튼 엄격한 대조와 냉혹한 어조는 저자가 유다교의 가치들을 옹호하면서, 누가 되었든 자기의 공동체를 괴롭히는 모든 자를 경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가 따라가는 원칙을 제시한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적들을 벌하는 데에 사용하시는 도구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혜택을 가져다 주는 데에 이용된다는 것이다(11,5). 이 원칙에 따라 이집트인들을 징벌하는 물(피로 변한 나일 강)이 광야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의 갈증을 풀어 준다고 말한다(11,4-14).

 

이어서 저자는 동물 숭배에 관한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곧바로 하느님께서는 알맞게 벌하시고 또 참회로 이끌기 위하여 벌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1,15 - 12,2). 저자는 바로 이러한 전망에서 가나안인들이 전멸당하기 전에 말벌들이 수행한 기능을 해석한다(12,3-11). 어쨌든 하느님께서는 더없이 공정하게 심판하신다. 그리고 그분께서 징벌을 알맞게 내리신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이스라엘인들에게 득이 되라는 것이다(12,12-22). 동물 숭배에 관한 논쟁은 풍자적인 말로 계속된다(12,23-27). 그 다음에 저자는 우상 숭배의 두 가지 큰 형태를 구분해 낸다. 곧 자연을 신격화하는 것과(13,1-9)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들을 경배하는 것이다(13,1014,11). 교활한 방식으로 도입된 이 둘째 형태의 우상 숭배는(14,12-21) 사람들의 삶을 더할 나위 없이 부패시켰다(14,22-31). 이스라엘인들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민족은 진흙으로 신을 빚어 내는 도공 자신처럼 우상 숭배에 떨어지고 만다(15,1-19). 저자는 16장에서 다시 이스라엘인들과 이집트인들을 비교하기 시작하는데, 여섯 가지를 연이어 비교한다. 곧 메추라기 기적과 개구리 재앙(16,1-4), 이스라엘인들의 상처를 고친 구리뱀과 이집트인들을 물어 죽인 치명적인 해충들(16,5-14), 만나와 우박(16,15-29), 암흑의 재앙과 불기둥(17,118,4), 이집트 맏아들들의 죽음과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겪은 죽음(18,5-25),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홍해에 빠져 죽은 일과 이스라엘인들이 그 곳을 마른 발로 건넌 일이다(19,1-12). 이집트인들은 이방인들을 소돔 주민보다 더 거칠게 대하여 벌을 받은 것이다(19,13-17).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집트 탈출의 기적들을 다시 한 번 거론하면서 그것들을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에 관한 학설과 관련짓는다(19,18-21). 지혜서는 이어서 찬미가 형태로 된 짧은 결론과 함께 끝을 맺는다(19,22).

 

4. 지혜서에 영향을 끼친 문헌들

 

지혜서의 저자는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을 창작할 줄 아는 시인이며 영성의 대가이다. 그는 많은 자료를 이용하면서도 그것들을 그냥 되풀이하지 않고 자기 작품 속으로 부드럽게 융합시킨다. 구약성서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작업한다. 지혜서에는 그 이전 성서 본문들에서 따온 인용구들이 별로 많지 않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이 작품은 기존의 성서 본문들에 관한 깊은 지식과 묵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에서 창세기, 탈출기, 이사야서, 잠언, 집회서 등이 돋보이는데, 저자는 성서를 그리스 말 번역본인 칠십인역으로 읽은 듯하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지혜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종의 교화적 성서 해설로서 전설적인 부연 설명들을 폭넓게 덧붙이는 어떤 미드라쉬의 영향을 분별해 내기도 한다.

 

헬레니즘의 문학과 문화도 마찬가지로 지혜서에 영향을 끼쳤다. 저자는 자기의 식견을 바탕으로 그리스의 시, 수사학, 과학, 특히 철학을 자유롭게 이용한다. 예외적으로 호메로스나 플라톤의 작품이 거의 말 그대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보통은 간접 인용이나 단순한 시사로 그친다.

 

저자가 이전의 성서 본문들과 동시에 그리스 문헌들에서도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세계의 한 특징이다. 그 곳에서는 성서적 주제들과 개념들이 모든 신학적 숙고의 바탕을 이룬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리스적 관념의 힘을 빌려 점검되고 해석되며 발전되고, 때로는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여기에서 지혜서의 독자들이 두 부류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히브리 말을 거의 또는 전혀 모를뿐더러 자기처럼 헬레니즘 문화에 젖어 있는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 독자들이 있다. 저자는 이들에게 유다교 지혜의 절대적 우월성을 확신시키고 싶어한다. 이 두 부류의 독자들이 이스라엘의 특수한 유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저자는 그리스적 관념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다른 문명권에서 빌려 온 요소들을 쇄신하거나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유다교 전통의 충실한 증인이 되려는 뜻만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뿐이다. 그래서 그가 모든 형태의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철학을 분명히 단죄하고, 천체에 따른 결정론이나 디오니소스제()와 같은 비의(秘儀) 종교에 단호히 반대한다.

 

5. 지혜서의 가르침

 

중요한 두 가지 사항, 곧 의인들의 영혼의 불사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와 관련하여 이 책은 지혜 문학에 더욱 새롭고 자세한 해설을 보탠다.

 

(1) 의인들의 불사불멸

 

저자는 보상을 받지도 못한 채 죽어 가는 의인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리하여 그는 욥기에서 제기된 괴로운 질문에 답한다. 지상에서 박해를 받은 덕성스러운 사람들의 영혼은 하느님 곁에서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심판날에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2,22; 3,1-9; 4,7-14; 5,15-23). 저자가 영혼의 우위성과 불사불멸성을 강조하는 방식에서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플라톤의 이원론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그에게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존재이다. 그리고 다니 12,2-32마카 7,9에서 확언되는 육신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지혜서의 몇몇 구절에 전제되는 것으로 여겨진다(특히 3,75,15-16 참조). 전형적인 두 그리스어 낱말이 지혜서에서 의인들이 장차 받을 보상에 관한 생각을 요약한다. 불사(1,15; 3,4; 4,1; 8,17; 15,3) 불멸이다(2,23; 6,18-19). 저자는 의인들의 생명이 육체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그리고 영광스럽게 지속된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반대로 악인들은 자기들의 못된 행실로써 지금부터 벌써 불사를 포기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다. 지혜서의 저자에게 불사불멸이란 누구에게나 구분 없이 적용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의인들의 영혼과만 결부된다.

 

(2) 지혜의 의인화

 

지혜를 의인화함으로써 지혜서의 저자는 잠언 19장의 본문을 이어받아 나름대로 발전시킨다. 그는 지혜의 창조적 활동과(7,12.22; 8,5-6) 우주적 기능을 강조한다(7,24; 8,1). 그리스인들에게는 지혜가 무엇보다도 신적인 것들의 인식과 관조에 이르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저자에게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그래서 지혜는 하느님의 뜻과 의향을 드러낸다(9,13.17). 또 지혜는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면서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과 관련된다(8,3-4). 지혜는 세상을 자비롭게 다스리며(8,1), 특별히 의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영혼 안에 머무르면서 그들을 하느님의 벗이 되게 해 준다(1,4; 7,27). 끝으로 지혜는 모든 지식과 인식의 원천이다(7,16-21).

 

이러한 지혜의 의인화로 미묘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 의인화가 단순히 문학적, 더 정확히 말해서 시적 작업의 방식인가, 아니면 저자가 지혜를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중개자 구실을 하는 어떤 실체 곧 신적 인격체로 생각하는 것인가? 지혜서 본문에서는 명백한 답을 얻지 못한다. 지혜는 하느님의 활동의 기본적인 면들을 드러내는 존재로, 그리고 동시에 그 활동을 담당한 존재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과 이루는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1,6; 7,7.22-23; 9,17), 어떤 학자들은 지혜를 성령의 예형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근거를 대기가 어렵다. 지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모든 계시와 동일시되는 경향을 지닌다. 더 나은 표현을 쓰자면, 지혜는 만물을 훌륭히 통솔함으로써하느님의 사랑을 실현시킨다고 할 수 있다(8,1). 이러한 의미에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정점에 다다르는 하느님 은혜의 활동을 예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끝으로 여러 번에 걸쳐 전개되는 축약된 다른 가르침들을 볼 수 있다.

 

- 전통에서 이어받아 독창적으로 펼쳐 가는 고통받는 의인의 주제(2,10-20).

- 군주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권력을 행사할 때에 가지는 특별한 책임(6,1-11).

- 특히 영적인 것과 관련된 인간 인식의 한계에 관한 숙고(9,13-18).

- 피조물에서부터 출발하여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인식하는 능력(13,1-9).

- 옛 성서 이야기들과 관련된 하느님의 섭리적 통치에 관한 독창적 숙고(11,21 - 12,1; 12,15-18).

-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된 아론 대사제의 중개 역할(18,20-25).

 

지혜서는 이스라엘의 전통적 종교에 대한 충실성과 함께 이 종교를 활성화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특징지어지는 유다교 문헌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에 나오는 몇몇 가르침이 신약성서에 다시 나오고(로마 1,20-23; 골로 1,12.15.17; 히브 1,2-3 참조) 교부들에게도 널리 인용된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집회서 입문

 

 

집회서가 번역자들과 독자들에게 던지는 중대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집회서는 지혜문학에 속한 책으로서(잠언의 입문 참조) 그 구성과 내용이 오랜 세월에 걸쳐 복잡하게 완성되었다. 집회서의 전수 과정은 파란곡절을 겪었다. 가톨릭에서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이 책을 제2경전으로 받아들였으나 개신교에서는 팔레스티나 유다교의 전통에 따라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고 외경으로 다루었다. 집회서의 히브리어 본문은 유실되어 오랜 세기 동안 잊혀졌다가 19세기 말엽부터 단편들로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집회서의 역본들도 오랜 세월을 거쳐 완성되어 가면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풍부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 책이름과 저자

 

집회서는 구약성서에서 (예언서들은 제외하고) 저자가 자기 책 안에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유일한 책이다. 저서에 저자 자신의 소개를 담는 풍습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보인다. 집회서의 저자는 자기 이름을 시라의 아들 예수(50,27; 51,30)라 밝힌다. 히브리어 이름으로는 벤 시라요 그리스식 이름으로는 시라키데스이다. 늦어도 성 치프리아노 시대 이후부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책의 이름을 라틴어로 에클레시아스티쿠스(Ecclesiasticus, 교회의 책 또는 모임의 책)라 부르면서 새로 입교한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데 이 책의 가르침을 이용하였다. 우리말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한다. 한편 유다 문학 전통에서는 이 책의 이름을 벤 시라의 잠언또는 단순히 벤 시라의 책이라고 불렀다. 전자의 이름은 이미 예로니모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주요 그리스어 수사본들은 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또는 시라의 지혜라는 책이름을 전해 준다.

 

우리가 벤 시라로 알고 있는 이 책의 저자는 젊은 시절부터 율법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예루살렘의 명문 율사로서 학교를 열어(51,23) 자신의 오랜 명상의 결실(32,15)과 삶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 특별히 귀족 집안의 젊은이들에게 전해 주고자 고심하였다(24,34; 33,18). 그 자신이 지혜의 열렬한 탐구자로(51,13 - 30) 외국을 돌아다니며 숱한 여행 경험을 통하여 귀중한 교훈들을 많이 얻었다(34,9 - 11). 그가 외국생활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외교에 관련된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39,4). 그는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를 맞았으나 그때마다 주님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34,12; 51,1 - 7).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일생은 현모양처(36,21 - 27)와 가정교육을 올바로 받아 훌륭하게 자란 자녀들(30,7 - 13; 42,5)에 둘러싸인 비교적 평탄한 삶이었다. 어떤 대목을 보면(33,19) 그가 한때는 예루살렘에서 고위 관직에 올라(39,4) 대사제의 감독하에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조직체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성전과 사제직과 경신례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50,5 - 21)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제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는 말년에 인생살이와 관련된 수많은 교훈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로 결심하고 사람들이 율법에 따른 삶 안에서 더 큰 정진을 이룰 수 있도록(머리글 10) 자신의 가르침을 글로 적어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그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는 그 당시 유다교가 직면한 역사적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2. 저술 연대와 역사적 상황

 

벤 시라는 기원전 200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살았고 그의 저서는 기원전 180년경에 기록되었다. 이 사실은 집회서의 그리스어 본문이 전해 주는 두 가지 정보에 의해서 확인된다. 본문 머리글에 보면 이 책의 번역자인 벤 시라의 손자는 프톨레매오 7(170 - 116)인 유에르게테스 임금 치세 38, 곧 기원전 132년부터 에집트에 머물면서 이 책을 번역하는 일에 손을 댄다. 따라서 그와 할아버지 벤 시라의 나이 차이를 감안하면 이 책이 그로부터 50년 전에 쓰여졌을 것이라는 추정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다른 한편 벤 시라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을 거론하면서 대사제 시몬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50,1 - 24). 시몬은 안티오쿠스 3세가 예루살렘을 점령할 당시(198)에 대사제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 안에는 시몬의 아들 오니아 3세가 폐위된(174) 후에 일어났던 비극적 상황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175 - 164) 치하의 극심한 박해에 대한 어떤 암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사실은 집회서의 저술 연대를, 유다인들이 외세의 지배에 있었지만 아직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시절과 마카베오 집안의 봉기(167)로 시작된 격렬한 저항 시절의 중간으로 잡게 만든다.

 

팔레스티나는 1세기가 넘는 기간을(301년 이후부터) 에집트의 프톨레매오의 지배를 받았고 그뒤 기원전 198년에 시리아의 셀류코스 집안에 주권을 빼앗겼다. 안티오쿠스 3(223 - 187)와 그의 후계자 셀류코스 3(187 - 175)는 유다인들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폈다. 여러 가지 특권을 그들에게 허락했고 세금을 감면해 주었으며 성전의 재건과 경신례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2마카 3,3). 성전의 재건에 대한 50,1 - 4의 기록은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알렉산더의 정복 사업은 헬레니즘이라는 말로 묶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새로운 생활 양식에 적응하려는 보편적인경향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헬레니즘은 다양한 문화의 혼합, 종교적 통합주의, 종족과 종교의 경계를 없애려는 보편주의, 그리고 자연의 위력과 인간의 문화를 찬양하는 경향들 때문에 그 자체로서 유다교의 생존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벤 시라는 스토아 철학의 개념들과 같은 그리스 문화의 유익한 관습들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사상과 풍습 안에서 자신의 종교가 요구하는 본질적인 규범이나 원칙에 위배되는 요소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휩쓸리지 말라고 경고한다(2,12 - 14). 그는 당대의 경건한 유다인들이 느끼던 불안을 함께 나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안목과 사상이 더 이상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시간이 임박했음을 깨닫는다. 또한 그는 가까운 장래에 예루살렘 자체 안에서 사제 계급과 고위 관직에 속한 사람들이 배교로 치닫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들이 두 세계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게 된다(1마카 1 - 2 참조).

 

3. 저술 목적

 

이런 위험 앞에서 벤 시라는 유다이즘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애국심, 하느님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 및 선민의식을 변호하기 위하여 집필에 손을 대었다. 그는 동료 종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계시된 율법을 통하여 참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 만연된 헬레니즘 문명의 불명료한 사상을 조금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전통적인 종교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지혜를 종합하고 여기에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덧붙여 논증을 한층 심화시킨다. 이처럼 자신의 종교적 전통에 충실한 한 유다인의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지침서는 그리스어 역자의 노고로 이국 땅에 살면서 배우기를 즐겨하고, 율법에 맞는 생활습관을 익히고자 하는 이들(머리글 30)에게까지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생존과 정기를 말살시키려는 헬레니즘 앞에서 협약을 맺어야 한다고 부추긴 민족 내부의 반역이나 어떠한 외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1마카 1,11 - 15)!

 

집회서의 저자는 변화된 세상 안에서 새로운 위험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유다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다 전통의 총체적 가르침을 전수하고자 한다. 그는 유다교의 본질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이면서도 현실이 어떤 것인지, 새로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이 책에 언급된 수많은 사상들을 간단하게라도 소개하기란 매우 어렵다. 인생의 문제들 중 다루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우정, 자선, 자녀 교육, 여성 또는 아내, 의학과 질병, 부와 가난, 종을 다루는 법, 잔치와 밥상 예법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옛 역사, 제사와 경신례, 하느님, 율법, 창조, 인간의 자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모든 주제에 앞서 이스라엘 안에서 이미 옛 전통의 상속자로 자처하는(33,16 - 18) 지혜에 대한 글(1,1 - 10; 24; 50,27; 51,13 - 30)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와 관련하여 집회서가 욥기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보다는 이 책이 잠언을 주석해 주는 구실을 맡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18,29 참조). 집회서는 간결한 이행시로 되어있는 잠언의 사상을 해설하고 부연 설명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집회서는 지혜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선보이고 있다. 조상들에 대한 칭송(44,1 49,16; 바룩 3,9 - 4,4 참조)에서 보듯이, 시대를 뛰어넘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24장에서 지혜가 인격화되어 있는데 이 대목은 잠언 8장 및 욥기 28장과 비교할 수 있겠다. 이 인격화 속에서 앞으로 지혜와 정의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 앞에 같은 실재로 나타날 것이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주제는 집회서에서 너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그것이 이 책의 중심 사상을 이루지 않나 여길 정도이다. 이 주제는 종교적 삶을 강조하는 2,15 - 17에 분명히 표현된다. 이 대목에는 지극히 선하신 절대자 앞에서 취해야 할 개인적 신심이 언급되는데 그분의 성덕 자체가 순명을 통하여 올바른 길로 나아갈 것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주님을 경외함은 율법에 대한 충성으로 표현되고 넓은 의미에서 지혜의 개념과 동일시된다. 이 경외심 안에서 지혜의 길을 보는 전통적인 사상은 이제 율법이 명시한(1,26; 6,37) 구체적인 삶의 규범을 따르는 것으로 수렴된다. 율법과 지혜에 대한 연구는 유다이즘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기서 집회서 저자는 지혜의 특성과 기능, 즉 하느님께 기원을 두는 것, 창조 안에서 하는 역할, 인격화 등을 율법에도 적용시킨다. 랍비 문학에서도 지혜의 선재사상과 연관시켜 율법의 선재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집회서 저자가 표현한 개념을 좀더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율법에 집착하는 벤 시라의 태도를 놓고 그를 율법주의적 종교의 사도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하느님에 대한 그의 개념과 그분이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사변적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체험에 기초를 둔 것이고, 따라서 그의 진솔한 신심을 충분히 밝혀주고 있다. 집회서 저자는 당시 유행하던 사조에 맞서서 전통적인 신앙을 변호한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하고 유일하시며(18,1; 36,4; 42,21) 그분께서는 완전한 창조의 주인이시다(42,21.24). 창조의 감추어진 신비와 명백하게 드러난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벤 시라는 시편 작가처럼 피조물 앞에서 감탄과 경의를 남김없이 표현한다(16,24 18,14; 39,12 - 35; 42,15 43,33).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신다(42,18 - 25). 그분은 전부라는 낱말로 표현된다(43,27). 그분께서는 우주를 정의와 섭리로 다스리시고(16,17 - 23) 만물의 제 시간을 미리 정해 놓으시고 정확하게 그 가치를 평가하신다(33,13). 그분께서는 또한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다(2,11). 한마디로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시며 이스라엘만을 위한 아버지가 아니라(24,12; 27,17) 인간 각자의 아버지도 되신다(23,1).

 

이 마지막 관점은 유다교 신학에서 중요한 발전으로 볼 수 있다. 창조에 대한 집회서 저자의 태도는 그의 기도 안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신앙심은 근본적으로 낙관주의적이다(30,21 - 25). 그는 객관적으로 드러난 온갖 어려움과 인생과 그 운명에 장애가 되는 제약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당대의 철학적 사조는 인간의 자유와 악의 실존을 전선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접목시키려고 고심하였다. 이에 대해 벤 시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이 두 가지 상반되는 실재를 동시에 받아들였다. 인간은 자유롭게 창조되었다(15,14). 악의 근원(21,27; 25,24)은 인간 안에 있는 것이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15,11 - 13). 인간의 마음에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생각은 랍비 문학의 인간론 안에서 죄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통제하는 주인으로 남을 수 있으며(31,10) 그가 승리할 때 하느님께 정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집회서 안에서 이 보상의 개념은 전통적인 사조에 따라 아직 지상의 물질적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보상은 건강과 장수와 많은 자녀들과 안락한 생활과 명예를 의미한다. 저자는 그의 선대 사람들처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인간이 죽으면 셔올(지하세계)에 머물면서 생명의 빛으로 나아갈 희망을 상실한 채 허약해진 목숨을 희미하게 연명해 갈 뿐이다. 불사불멸과 부활에 대한 개념은 그가 죽은 지 오래지 않아 그리스 사상과 페르샤 사상의 영향 아래서, 그리고 극심한 종교박해라는 시대적 배경 아래서 한층 명백하게 떠오르게 된다(2마카 7,9; 다니 12,2 - 3). 그리스어 역자가 자기 할아버지의 저서를 재해석할 때 이 같은 개념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48,11). 저자의 손자는 저세상에서 불경한 자들이 받게 될 벌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7,17). 그러나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강조(8,7; 14,17; 28,6; 41,3)와 인간의 비참한 실존에 대한 반성(40,1 - 11), 히브리어 원문의 저자인 벤 시라 자신이 불사불멸에 대한 확고한 기대(지혜 3,4)를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잘못이다.

 

벤 시라의 종말론적 기대 역시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주의적인 지평을 넘어서지 못한다. 메시아 사상이 이스라엘 안에 폭넓게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다윗식 메시아 사상의 흔적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메시아 사상은 36,1 - 17의 기도에만 반향되고 있을 뿐이며 이 대목의 해석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집회서 저자가 경신례와 사독 집안의 사제직(히브리어 본문 51,12 참조)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고 다른 한편 바리사이파 안에서 중요하게 부상하게 될 부활 사상과 메시아 사상을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은 사실은 학자들이 그를 사두가이 사상의 선구자로 간주하게 만든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쓰여진 율법에 집착한 보수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들의 대열에 그를 놓는다. 그러나 그를 복음서 저자들과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소개한 본격적인 의미의 사두가이들과 단순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유다교 안에 아직 독특한 성격을 지닌 파당이 생겨나기 이전이었다.

 

벤 시라는 이방 민족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 이미 유다식으로 굳어진 태도를 견지한다. 예언자들이 고취시킨 보편주의가 퇴색하고 유배 이후 시대의 어려운 상황이 이스라엘을 특권주의로 몰고 갔다.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은 율법에 따른 생활 관습들(할례, 금식일 준수, 음식 규정과 정결례 등)을 점점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인간을 우주의 한 시민으로 보는 헬레니즘의 인간관도 저자의 선민의식에 대한 긍지를 침해하지는 못했다. 저자는 지혜가 이스라엘 민족 안에 자신의 안식처를 마련했다(24,7 이하)고 생각한다. 그는 선민과 불경한 자들을 근본적으로 분리시킬 것을 주장한다(11,33; 12,14; 13,17). 이러한 분리는 쿰란의 에센파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발전시켰고 바리사이들(분리된 자들)도 여기서 자신들의 이름을 끌어내었다. 이 세상은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선한 이들의 세상과 악한 자들의 세상, 또는 지혜로운 이들의 세상과 어리석은 자들의 세상이 그것이다(21,11 - 28). 다른 한편 집회서 안에는 유다이즘에서 볼 때 새로운 생각(사상의 자취)들이 드러나 있다. 용서에 대한 저자의 진보적인 생각(27,30 28,7)은 복음서의 내용과 흡사하다. 죽을 몸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이 서로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28,4 - 5)은 이미 사해동포 개념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위 19,18)는 옛 율법서의 계명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서 나온 반성일 것이다.

 

5. 집회서의 구조

 

주석가들마다 이 책의 구조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는 집회서 저자가 셈족으로서 우리 시대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원칙에 따라 지혜의 말씀들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가 저술을 위해서 사료를 수집할 때 주로 구전을 모았고 구전에 포함된 사료들을 같은 주제로 분류하면서 본 주제에서 벗어나는 사료들도 함께 모아들였다. 사료들을 배열하는 데에도 저자는 일정한 구조를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회서 안에서 조직적인 구조의 틀을 찾아내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크게 구분하면 1 23장과 24 - 50장으로 나눌 수 있다. 각 부분의 첫머리에는 지혜에 대한 찬미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51장은 감사 찬미가와 지혜의 탐구에 관한 시를 담고 있는 부록이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지혜에 대한 칭송(1,1 - 20; 4,11; 6,18; 8,8 )을 중심으로 지혜와 관련된 온갖 주제들을 모아 첫 부분(1,142,14)으로 분류하고, 창조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명상(42,1550,29)을 두 번째 부분으로 정한다. 이 번역에서는 집회서의 구조를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머리글

1 지혜와 현명과 기타 금언(1,116,23)

2 하느님과 창조와 기타 금언(16,2423,28)

3 지혜와 율법과 기타 금언(24,132,13)

4 하느님 경외와 처세(32,1442,14)

5 하느님의 영광(42,1550,29)

부 록(51,1 - 30)

 

6. 집회서의 중요성

 

집회서는 이스라엘이 구약성서의 종교에서 발전하여 유다교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증언하는 중요한 책으로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유다교의 특징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집회서 안에는 성서의 종교와 유다교의 특징들이 서로 조화되어 나타난다. 벤 시라는 우리에게 복합적 양상을 띤 유다교의 근본 요소들을 전해 주고 있는데 이들 안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집회서는 바리사이파에 큰 영향을 미쳤던 랍비 유다교와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구약성서의 묵시문학과 유다 사막에서 발견된 쿰란 문헌과 공통된 요소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문헌들과 함께 연구해야 한다.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대치 상황에서 집회서는 한편으로 헬레니즘적 요소들을 빌려오기도 하고 다른 한편 그 요소들을 경계하고 극단적으로 배척하기도 한다.

 

벤 시라는 또한 구약성서의 거의 완성된 경전의 구조에 대하여 중요한 증언을 하고 있다. 머리글에서 그는 히브리 성서의 전통적 구분, 율법서와 예언서와 그외의 기록들(39,1 - 3 참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한 모세오경, 여호수아서,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욥기(히브리어 본문 49,9),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열두 소예언서(명시적으로 말라기서와 하깨서), 그리고 느헤미야서 등으로부터 다소 분명하게 인용하고 있다. 그는 시편의 저자를 다윗으로, 잠언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주장한다.

 

벤 시라는 유다교에서 가장 인기있는 저자들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의 책은 탈무드에 자주 인용되었고 중세의 저자들에 이르기까지 유다 문학의 결정적인 고전으로 평가되었다. 고대 근동의 지혜문학에 대한 폭넓은 언급과 유다 옛 고전들의 풍부한 인용은 집회서 저자가 전통주의자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창고에서 옛것과 새것을 꺼낼(마태 13,52) 줄 아는 지혜로운 율법학자였다.

 

또한 집회서 덕분에 속죄일 축제와 같은 유다교의 각종 경신례를 다룬 중요한 성서 본문들이 새롭게 재인식되었다. 36,1 - 17의 기도문은 십팔축복기도와 매우 유사하다. 신약성서 안에도 집회서와 연결된 수많은 병행구들이 등장하는데(특히 야고보서), 이는 이 책이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집회서라는 이름 자체가 시사하듯 일찍부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약간의 망설임 끝에 교회의 책으로 인정받고 경전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 책이 종교서적의 모음집에 정식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이 책은 성서의 다른 책들에 비해 그 기원이 늦다는 점과 아마도 이 책의 내용이 기원후 70년 이후에 정립된 정통 유다교리와 여러 가지 면에서 완전하게 부합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바리사이파에 의해서 배척되었다. 바리사이파의 이 결정은 초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잠시나마 이 책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를 망설이게 한 요인이 되었다. 망설임의 또 다른 요인은 집회서 본문의 복잡한 전수과정이다.

 

7. 본문의 전수과정

 

집회서 원문은 히브리어로 작성되었고 적어도 4세기에 예로니모 성인이 그 필사본 하나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후 히브리어 수사본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었고 유다교 랍비들의 문헌과 시선집에서나 그 단편적인 본문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말엽(1896 - 1900) 카이로에 있는 유다 회당의 부속건물인 게니자(쓸모없다고 버린 수사본들을 모아놓은 창고)에서 그리스어 본문 3분의 2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본문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 단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10년 캠브리지 대학의 탈무드 히브리어 전문가 쉐흐터(S. Sche-chter)에 의해 출판된 수사본 AB이다.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수사본의 작은 단편들도 뒤이어 수사본 C, D로 분류되었다. 이 수사본들은 10 - 12세기에 쓰여진 것이다. 1931년 마커스(J. Mar-cus)는 미국 유다 신학교(The Jewish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의 아들러 게니자 수사본 보관소에서 집회서의 또 다른 히브리어 수사본을 발견하였고 이 수사본을 수사본 E라 이름지었다. 카이로 수사본들은 1962 - 1965년에 베이예(M. Baillet)와 샌더즈(J.A. Sanders)에 의해서 출판된 쿰란 수사본들과 1965년 야딘(Y. Yadin)에 의해서 출판된 마사다 요새(73년 로마인들에게 함락된 유다 최후의 항전지)의 수사본들(39,27 - 44,17을 포함)이 그 진정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들 수사본들은 본질적인 면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다.

 

이제까지 입수된 히브리어 본문의 수사본들을 바탕으로 복원한 대목들은 다음과 같다.

 

1,19 - 20(쿰란)

3,6 - 16,26

18,31 - 19,2

20,5 - 7.13

25,8.13.17 - 24

26,1 - 3.13 - 17

27,5 - 6.16

30,11 - 34,1

35,11 - 38,27

39,15- 51,30

 

발견된 히브리어 본문의 수사본은 두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나는 매우 오래된 수사본으로서 벤 시라의 손자가 에집트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G I) 대본으로 삼았던 기원전 130년경의 수사본(H I)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후 130 - 215년에 나온 그리스어역 수정본(G II)이 참고 대본으로 삼았던 기원후 50 - 150년 사이에 만들어진 히브리어 수정본의 수사본(H II)이다. 이 두 번째 수사본에서는 바리사이파의 사상적 편린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 히브리어 수정본은 시리아어 역본으로 입증되었다.

 

그리스어 본문 G I은 대자 수사본 A(알렉산드리아 수사본), B(바티칸 수사본), C(에프렘 수사본), S(시나이 수사본)들과 같은 계열의 흘림체 수사본들에 포함되어 있다. 다른 그리스어 본문 G II는 히브리어 본문을 새롭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이미 번역된 G I을 충실히 전달하면서 히브리어 본문의 보충판(H II)을 참고삼아 필요한 부분을 G I에 삽입하였다(A. 치글러의 견해). 한두 낱말을 바꾸거나 첨가시키는 것 이외에 G IIG I에 없는 약 300개의 행을 덧붙였다. G II의 수사본 증인들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오리게네스의 육경에 등장하는 O - 그룹과 루치안의 수정본 L - 그룹(주요 그룹), l - 그룹(가지 그룹)L(L l 이 일치하는 경우)이다. O - 그룹에 속하는 수사본들로는 흘림체 253, Syh(시로헥사플라), 대자 수사본 V(베네투스 수사본)Sc(7세기의 시나이 수사본의 수정본)가 있고, L - 그룹에는 248, 493, 637이 있으며, l - 그룹에 속하는 수사본들로는 106, 130, 545, 705가 있다. G I은 전반적으로 히브리어 본문에 충실하지만 벤 시라의 손자가 히브리어 표현과 어법을 잘못 이해한 경우가 적지 않고 본문의 전수 과정에서도 필경사들의 수많은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후에 히브리어 본문의 수정본 H II를 참조하여 펴낸 G II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동시에 히브리어 수정본들을 대본으로 G II를 참고삼아 번역한 시리아어 역본과, 자매 역본들 가운데 G II의 중요한 증인으로 알려진 불가타의 전신인 고대 라틴어 역본과 아람어 역본의 증언도 중요하다. 본 역자는 필요할 경우 이 역본들의 내용도 번역하여 각주에 소개하였다.

 

그리스어 역본은 히브리어 본문의 가장 중요한 증인이다. 유다 전통과 그리스도교 전통이 후대에 전수시킨 수사본은 바로 이 그리스어 역본이었다. 이 그리스어 본문을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하여 관찰해 보면 이스라엘의 신학적 사상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변천하는 신학적, 역사적, 지정학적, 사회적 맥락에 부응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을 그리스어 수사본들 안에서 엿볼 수 있다. 역자는 이런 다양한 시도의 동기가 무엇인지 각주 안에서 힘닿는 데까지 밝혔다. 이러한 시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공동체의 요구에 맞추어 구체화시킴으로써 성서를 미라로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미드라쉬적 경향에 힘입은 것이다.

 

우리말의 번역 대본은 랄프스(A. Rahlfs)가 편집한 슈투트가르트 판(1935)이 아니라 철저한 본문 비평을 바탕으로 새롭게 편집한 치글러(J. Ziegler)의 괴팅겐 판(1965)이다. 이 치글러의 그리스어 본문에는 위에서 언급한 G II의 첨부된 내용들이 본문 안에 들어와 있는데, G I과 구별하기 위해 작은 글자로 나타난다. 이 번역에서는 이를 기울어진 자체로 바꾸어 구분하였다.

 

치글러의 괴팅겐 판은 각 장의 절을 구분하는 데에서 대부분 랄프스의 슈투트가르트 판과 일치하지만 30 - 36장에서 매우 다르다. 이 대목에서 랄프스가 대다수 그리스어 수사본들의 장/절 구분을 무시한 반면 치글러는 그것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아래 표에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어 수사본들은 33,13ㄴ―36,163024절과 25절 사이에 놓고, 30,2533,133616절과 16절 사이에 놓았다.

 

<랄프스> <치글러>

30,24 30,24

30,25 33,13

31 34

32 35

33,1 - 1636,1 - 16

33,16- 33 30,25 - 40

34 31

35 32

36,1 - 1033,1 - 13

36,10- 27 36,16- 31

37 37

 

이 번역은, 각 장의 순서는 히브리어 본문과 시리아어 역본과 불가타를 따른 랄프스의 것을 받아들이되 같은 장 내의 절 구분은 치글러의 것을 받아들였다.

 

히브리어 본문의 단편들은 그리스어 본문이 문법적으로 또는 의미상으로 모호할 때, 그리고 자체로서 그리스어 본문의 내용과 전혀 다른 종교적 견해를 드러낼 때 우리말로 번역하여 각주 안에 소개하였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 곧 그리스어 역자가 명백하게 히브리어 본문을 잘못 읽었거나 도무지 해독할 수 없는 표현을 담고 있는 경우에는 그리스어 본문 대신 히브리어 본문을 취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 범위를 낱말 한두 개로 국한시켜 되도록 그리스어 본문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진정한 대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유다교 고유의 문헌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오랫동안 유다교 전통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왔던 이 지혜의 책, 집회서 안에서 그리스도인들 역시 2,000년 동안 명상과 기도의 주제들을 무수히 발견해 왔다. 또한 집회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서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더구나 서구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동방의 다양한 고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이 책은 그것이 입고 있는 이질적인 문화와 표현의 옷에도 불구하고 오랜 인생경륜과 깊은 지혜를 전달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메시지가 매우 친숙하게 전달되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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