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구약] 역사서 입문

dariaofs 2015. 2. 27. 18:15

판관기 입문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구약성서를 모세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로 나눈다. 예언서는 다시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갈라진다. 전기 예언서에서 여호수아서에 이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판관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에서 가장 덜 알려진 시대에 지파들이 펼쳤던 생활의 일부를 엿보게 해 준다. 그 시대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때부터 왕정이 출현할 때까지이다.

 

1. 판관기의 구조

 

이 책의 구조는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첫째 서문(1)은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파들은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어 서로 협조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기보다는, 저마다 따로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파마다 영토를 나누어 받았지만, 그 안에는 계속 가나안인들이 성읍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지파들의 상황은 이러한 가나안인 성읍들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2,1-5에서는, 가나안 땅을 쉽고 빠르게 차지하게 해 주신다는 하느님의 약속에 반대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일차 설명이 주어진다.

 

가나안 정복 시대를 설명하는 이러한 예비 서술에 이어서, 판관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2,6 - 16,31). 이 판관 시대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역사 가운데에서 특별히 이 시기가 지니는 종교적 뜻을 밝히는 둘째 서문으로 도입된다(2,6 - 3,6). 모세에 이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여호수아의 시대는 하느님의 백성이 주님께 충성을 다한 시대였다. 그러나 판관 시대는 한 마디로 불충의 시대로 묘사된다. 이러한 내용의 서문에 이어, 판관들의 행적을 전하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판관들은 모두 열둘인데(아래에 소개되는 인물 가운데 바락과 아비멜렉은 판관이 아님), 그들에 관한 서술의 길이는 제각각이다. 그들의 이름과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곧 오드니엘(3,7-11), 에훗(3,12-30), 삼갈(3,31), 드보라와 바락(4 - 5), 기드온과 아비멜렉(6,1 - 9,57), 돌라(10,1-2), 야이르(10,3-5), 입다(10,6 - 12,7), 입산(12,8-10), 엘론(12,11-12), 압돈(12,13-15), 삼손(13,1 - 16,31)이다.

 

판관기는 왕정이 수립되기 전에 이스라엘에 팽배해 있던 무질서와 혼란을 보여 주는 두 개의 부록과 함께 끝을 맺는다. 첫째 부록은 단 지파의 이주와 단 성소의 기원을 이야기한다(17 - 18). 그리고 둘째 부록은 기브아 주민이 저지른 악행을 서술하고, 이어서 범죄자들의 처벌을 거부하는 베냐민 지파와 그러한 베냐민인들을 징벌하려는 다른 지파들 사이의 전쟁을 이야기한다(19 - 21).

 

2. 판관과 구원자

 

이 책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전체적으로 판관이라고 불리는데, 이 명칭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칭호의 복수는 2,16-18에만 나오는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려고 선택하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용례는 성서 본문 자체에서 흔하지 않다. 반면에, 왕정 이전의 시기를 판관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성서의 전통에서 잘 알려져 있다(2사무 7,11; 2열왕 23,22; 1,1). 사실상 판관들의 이야기 자체에서는 판관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 명사와 같은 어근에서 나오는 동사 fpv, 곧 우리말로 재판하다, 그리고 판관기에서는 특별히 판관이 되다, 판관으로 일하다로 옮길 수 있는 동사는, 이 책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활동을 서술하는 데에 상당히 자주 쓰임을 볼 수 있다(3,10; 4,4; 10,1-5; 12,7.8-15; 15,20; 16,31). 또 이 동사가 해당 판관 이야기의 틀을 이루는 부분에서 가장 흔히 사용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용도가 편집자들에게서 유래하는 것임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이 동사는 단순히 재판하다, 그래서 정의를 펼치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지휘하다, 지배하다라는 뜻까지 담고 있다. 그래서 이 동사를 일반적으로 재판하다로 옮기고, 판관기에서는 판관이 되다, 판관으로 일하다로 번역해 오고 있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넓게 이해해야 한다. 사실 히브리 말에서는 이 동사가 권위와 권한을 행사하는 실질적 직책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관으로 일한다는 것은 재판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지도와 통치까지도 내포한다. 이러한 용도는 이웃 민족들의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특정한 인물들이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재직하였다고 할 때, 이 판관기가 무공을 전해 주는 이들이 모두 실제적으로 이 직책을 가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판관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업적을 서술하는 또 다른 용어, 구원하다라는 동사가 있기 때문이다(3,31; 6,15; 10,1). 오드니엘과 에훗이 바로 구원자로 불린다(3,9.15). 일반적으로 말하면, 하느님 자신이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어떤 사람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구원을 실현시키신다(3,9; 6,36-37; 7,7; 10,13). 이로써 구원자 인간구원자 하느님이라는 표현의 이원성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판관기를 봉독할 때에 드러나는 인간적 전망과 신적 전망의 이중성을 가리키는 표지가 될 것이다.

 

이 책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우선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서로 직접적인 관련 없이 형성되어 내려오던 여러 전통 또는 이야기 모음들이다. 이른바 ()판관들에 관한 기술(10,1-5; 12,8-15)은 간략한 내용만 전하는 옛 명단에서 유래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소판관들의 명단 가운데에 자리잡은 입다의 이야기는(10,6 - 12,7), 어떻게 판관에서 구원자로 넘어갈 수 있었는지 확인하게 해 준다. 입다는 판관이면서 동시에 구원자였다. 다른 판관들의 이야기는 옛 전통들에 근거하여 확장되고 보충되고 합쳐진 것이다.

 

3. 신학적 틀

 

판관기는 단순히 이러한 전통들과 모음들만이 아니라, 그 너머로 우리의 주의를 끄는 신학적 틀을 제공한다. 그냥 사건들만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관한 종교적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 전망은 특별히 서문(2,6 - 3,6), 6장의 앞부분(7-10), 그리고 입다 이야기의 입문(10,6-1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신학적 전망은 일련의 도식적 표현 정식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첫 번째 정식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이다(2,11; 3,7.12; 4,1; 6,1; 10,6; 13,1). 이 말의 내용을,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2,11.13; 3,7; 10,6) 또 다른 표현 정식이 구체적으로 밝혀 준다. 그리고 이러한 불충의 결과는, 주님께서 그들을 이러저러한 적들의 손에 넘겨 버리셨다는 말로 서술된다(2,14; 3,8; 4,2; 6,1; 10,7). 이어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라는 표현 정식이 나온다(3,9.15; 4,3; 6,6; 10,10). 당신 백성의 이러한 탄원에 주님께서는 판관(2,16) 또는 구원자를 세우심으로써 응답하신다(3,9.15).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종결 부분에 또 다른 표현 정식들이 나온다. 원수는 이스라엘의 손 아래 굴복하였다(3,30; 8,28. 그리고 4,23-24 참조), 또는 이 땅은 몇 해 동안 평온하였다라는 정식이다(3,11. 30; 5,31; 8,28).

 

이러한 표현 정식들에서 네 단계로 된 종교적 논리가 나온다. 곧 죄--회개-구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은 하느님의 징벌을 불러 오지만,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의 회심은 구원자의 파견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역사 신학을 보게 된다. 이는 후대에 와서 판관들의 이야기에 보태진 것으로, 전체 이스라엘에 적용되는 신학이다. 그러나 이 신학적 틀은 판관들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과 항상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이 신학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우선은 옛 전통들과 이야기 모음들을 수집한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편집자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편집자들을 신명기계 저자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미흡한 가설일 뿐이다. 신명기에서 열왕기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신명기계 역사를 구성하는 다른 책들에서는(창세기오경 입문참조), 위에서 말한 네 단계로 된 신학적 명제가 바로 그 순서에 따라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없다. 이 밖에도 서문이 여럿이라는 사실, 가나안 땅 정복이 늦어진 사실에 대한 서로 다른 설명들(2,6 - 3,6),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판관들의 수도 열둘로 끝맺으려는 편집자들의 의도 등은, 이 책의 편집 작업이 상당 기간,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 아무튼 판관기에 나타나는 신학적 전망은 틀림없이 신명기계 편집자들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전망을 강화하였다고는 하더라도, 직접 창출하였다고는 단정할 수가 없다.

 

판관기의 두 부록(17 - 21) 역시 옛 전통들을 이어받은 것인데, 유배 중에 또는 유배 이후에 첨가되었다. 이 부록들이 사제계 문헌들에(창세기오경 입문참조) 나오는 어휘를 쓰고 있는 데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옛 사료들을 내포하면서 유다 지파를 옹호하는 경향으로 특징지어지는 1장의 서문이 어느 시대에 첨가되었는지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4. 판관기와 역사

 

이렇게 여러 가지 불확실성이 판관기의 편집 과정을 둘러싸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역사가에게 여호수아의 죽음에서 왕정의 탄생에까지 이르는 시대에 관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판관 시대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 보고, 이스라엘의 몇몇 지파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느슨하게 연결해 주는 열두 지파 동맹 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정치적 통일성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역사는 결국 특정 지파들 사이의 친근성 또는 적대감을 드러내는 여러 집단의 이야기, 이미 차지한 영토를 보존하기 위한 전쟁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단편적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좁게는 판관들을, 넓게는 판관 시대를 연대순으로 쉽게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이렇게 간략히 제시되는 연대순이 문제를 안고 있다.

 

판관기는 어떠한 역사적 연대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각 판관의 직무 수행 기간만 제시할 뿐이다. 각 판관이 활동하였다는 햇수를 합치면 410년이 되는데, 이 수치는 이스라엘 역사의 다른 연대 사료와 들어맞지 않는다. 대부분이 편집자들에게서 유래하는 각 판관의 활동 햇수는 나름대로 논리를 지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논리를 찾아 내어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 밖에도 한 사람이 일반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기간을 가리키는 40이라는 수가 자주 사용된다는 사실은, 판관기에 나타나는 자료들의 대략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사실 판관 시대의 연대는 왕정 시대가 시작하는 때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시기를 함께 고려하면서 계산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에 판관기에서 전해지는 전통들은 모두 기원전 1200년과 1020년 사이에 자리잡게 된다.

 

5. 이스라엘 신앙의 책

 

역사가에게는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난해한 문헌인 판관기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인들이 지녔던 신앙의 산물이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5)와 같이 이 책을 구성하는 가장 오래된 본문들에서부터 이미 이스라엘인들의 확신이 드러난다. 곧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어려운 때마다 당신의 백성을 도와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 전체의 뼈대를 이루는 신학적 틀은, 계속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져들려는 이스라엘의 나약성과, 억압당하는 당신 백성의 지파들을 구원하시려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보내시는 하느님의 인내를 먼저 강조하면서, 이러한 믿음을 더욱 강화시킨다.

 

물론 판관기의 주인공들은 단순히 성인도 아니고 군자도 아니다. 관습들이 어떤 면에서는 거칠고, 도덕적인 개념들이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시대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다. 에훗의 계략(3,12-30), 야엘이 시스라를 살해하는 일(4,17-22), 자기 딸을 죽여 희생제물로 바치는 입다의 행동(11,34-40), 그리고 삼손의 애정 행각(14 - 16) 등은 우리에게 놀람뿐만 아니라 당혹감과 불쾌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거친 현실을 부드럽게 하거나 부도덕한 현실을 미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당신의 영을 받은 지도자들, 인간적으로 볼 때에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보내시어(3,10; 6,34; 11,29; 13,25; 14,6.19; 15,14) 한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행동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의롭게 인도하기 위하여 주님의 영을 받아야 하는 이스라엘의 임금을 예시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은 다시 다양한 은사를 지닌 주님의 영을 충만히 받는 메시아를 예고한다(이사 11,2).

 

룻기 입문

 

 

1. 줄거리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구약성서의 [룻기]라는 책의 이름은 거기에 담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 이야기는 기근 때문에 유다 땅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간 베들레헴의 한 가정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 가정의 가장으로서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은 그 곳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그의 두 아들 마흘론과 길룐은 모압 출신인 룻과 오르바를 아내로 맞이하지만, 역시 일찍 이국 땅에서 죽게 된다. 이주한 후 십 년만에 나오미는 귀향하게 되는데,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온다.

 

여기서 룻은 이삭을 줍다가 보아즈를 만나게 되고, 그는 룻을 친절하게 대해준다. 그런데 보아즈는, 나오미가 시집의 땅을 가정 형편상 팔아야 할 경우에 그 토지가 다른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기가 사들이고, 또 동시에 자식 없이 죽은 마흘론의 아내인 룻과 결혼하여 고인에게 후손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닌 구원자’(2,20의 각주 참조)가 될 수 있는 친족이다. 이를 알고 있는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보아즈와 결혼하도록 권고하며 부추기고, 룻은 시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보아즈에게 접근한다. 이렇게 하여 보아즈는 나오미와 룻이 바라는 대로, 마흘론 집안에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구원자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자, 룻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리하여 룻은 아들 오벳을 낳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이고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가 된다.

 

2. 성서 안에서의 위치

 

히브리 성서에서 룻의 이야기는 커투빔(성문서)’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말 번역본인 칠십인역과 라틴말 성서는 룻기를 판관기 다음에 배열하는데, 이는 아마도 룻 1,1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에 관한 언급 때문일 것이다.

 

3. 저작 시기

 

이 책의 저작 시기에 대하여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우선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유다 왕국의 멸망과 예루살렘 및 성전의 파괴에 이은 바빌론 유배 이전에 저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책에서 서술되는 법적 관습들(‘구원자의 권리와 의무, ‘레비르 결혼’: 4,5의 각주 참조)은 신명기 법전 이전의 입법을 반영하고(신명 25,5-10 참조), 이 이야기의 문체는 구약성서의 고전적 산문에 가까우며, 아울러서 사람 이름들에 대한 연구는 이 작품이 오래 된 것임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럼에도 불구하고 유배 이후가 저작 시기로서 더 타당하다고 여겨지는데, 우선 저자는 사울-다윗과 함께 시작한 왕정 이전의 판관 시대를 먼 옛날로 이야기한다(“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1,1). 그리고 그때의 관습이 저자의 시대에는 이미 폐기된지 오래 된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이에 대하여 청중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옛날 이스라엘에는 ”: 4,7).

 

또한 언어상 특징적인 사항들이 늦은 시대를 시사한다. 더 나아가서 이 책의 신학(보편주의, 보상에 관한 개념과 고통의 의미)은 유배 이후 시대의 환경에서 더 잘 이해된다. (반대되거나 다른 의견들이 있기도 하지만) 에즈 9와 느헤 13에서 볼 수 있는 철저한 개혁에 반대하여, 외국인들과의 결혼에 호의적인 이 룻의 이야기에는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가 적합하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룻기가 논쟁적인 책은 아니다. 저자는 신앙심과 효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외국 여자인 다윗의 증조모를 본보기로 상기시킨다. ‘레비르 결혼으로써 주님에 의하여 섭리적으로 인도된 이 부인은 완전히 합법적으로 이스라엘의 한 가문, 더군다나 다윗의 가문에로 맞아들여진다. 그리고 1사무 22,3-4는 다윗과, 룻의 고향인 모압 사이의 호의적인 관계를 지적한다.

 

4. 문학 작품으로서의 룻기

 

추후에 첨가된 것으로 여겨지는 4,18-22의 족보(1역대 2,5-15에 다시 나온다)를 빼고서는, 이 책의 문학적 통일성은 흠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야기는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전개된다. 이렇게 예술적인 룻기의 구체적인 구성에 대하여서는 통일된 의견이 없지만, 연극의 용어를 빌려 다음과 같이 그 구성을 짜맞춰 볼 수 있겠다. 네 개의 장()이 가운데에 자리잡고(1,6-18; 2,1-17; 3,1-15; 4,1-12), 그 앞에는 도입 부분이 있으며(1,1-5), 그 뒤에는 결론 부분이 뒤따른다(4,13-17). 그리고 네 개의 장들 사이에는 세 개의 짧은 에피소드들이 있어 연결 고리 구실을 한다(1,19-22; 2,18-23; 3,16-18). 책 전체에 퍼져 있는 수많은 대구법, 운율을 갖춘 구절들, 낱말들 사이에 동일 또는 유사 모음이 되풀이되는 반해음(半諧音), 자음이 되풀이되는 자음운(子音韻) 또는 두운법(頭韻法) 등은 이 작품의 문학성을 돋보이게 한다. 룻기는 구약성서 이야기 예술의 걸작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아울러 사람 이름들에 담긴 의미에서 보여지는 언어 유희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엘리멜렉(나의 하느님께서는 임금님)’, ‘나오미(<나의> 사랑스러움, 또는, <나의> 사랑스런 여자)’, 때이른 죽음을 암시하는 그 아들들의 이름인 마흘론(질병)’ 길룐(허약)’과 기이하게 대립된다. 사정이 어찌되었든 결국에 가서는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버리고 친정으로 돌아간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그 이름의 어원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상대방을 두고 떠나면서 얼굴을 돌릴 때의 목덜미를 연상하게 함으로써 변절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강요하다시피 나오미와 함께 시집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온 첫째 며느리의 이름인 역시 그 어원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 여자 친구로 이해되어 왔고 요즈음에는 (수동형 분사로서) ‘원기가 회복된 여자로 알아듣기도 한다. 그래서 이 이름은 애정또는 원기 회복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베들레헴의 유력가 보아즈(‘그에게 힘이’)의 이름은 희망을 가지게 하고, 마라(‘쓰라린 여자’: 1,20과 각주 참조)비탄을 나타낸다. 그리고 룻의 아들 오벳(또는: 오베드)시중드는 사람, 하인, 을 뜻하는데, 어떤 특정한 신,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님의 하인 또는 종을 암시한다. 1,20에서 나오미가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하는 것은, 저자가 사람 이름들에 상징적 가치를 명백하게 부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5. 룻기의 의의

 

룻기는 기원후 시대에 유다인들의 주요 축제 때 봉독되었던 다섯 개의 축제 두루마리곧 축제 오경(룻기 / 아가 / 코헬렛<전도서> / 애가 / 에스델) 가운데 하나로서 오순절(또는, 수확절. 레위 23,15-21; 신명 16,9-11; 사도 2,1 참조)에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룻기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보리 수확 때로부터 시작하고, 오순절 역시 이 시기에 거행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더욱 발전된 의미로서, 유다인들은 오순절 축제에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부여하신 바를 기념하는데, 이 책이 야훼님께 대한 신앙과 함께 그분의 율법을 받아들인 룻의 이야기로써 주님의 율법 선물이 이방인들과 이방 국가들에게도 주어지도록 그 범위를 확장시키고, 또 책 끝머리에 있는 족보로써 다윗과 그를 통하여 장차 오실 메시아의 선조로 외국 여자를 내세우기에 이르는 때문인가? 이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랍비들의 전통은 룻을 개종자의 전형으로 간주하고, ‘주님의 날개 아래로 오다’(2,12 참조)라는 표현이 유다교로 개종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룻기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바는 주님의 인도하심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룻기를 주님의 섭리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이야기의 원 주인공은 주님이라 부를 수 있다(1,8-9.13.21; 2,12.20; 3,10; 4,11.13-14 참조).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의지할 데 없는 한 늙은 여인, 특히 외국인 과부와 당신 사이의 개별적 역사를, 다윗의 탄생을 통하여 당신 백성과의 역사로 수렴하신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룻과의 역사를 당신과 인류 사이의 구원 역사로 끌어올리신다(마태 1,1-17).

 

 

사무엘기 입문

 

 

1. 책 이름

 

사무엘서를 둘로 나눈 것은 요즈음의 일이다. 히브리말 본문은 1사무 28,24책의 절반이라고 표기하여, 이 구절이 사무엘서 전체의 중간임을 가리켜주었다. 그리스말 번역자들은 이 책을 두 개의 두루마리에 옮기면서 1 왕국기2 왕국기라는 이름을 붙였다(오늘날 우리가 열왕기 상권과 하권으로 부르는 책들은 칠십인역에서 각각 3 왕국기4 왕국기로 불린다). 불가타도 이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이 책을 1 열왕기2 열왕기로 불렀다. 이 구분은 1517년 첫 번째 랍비 성서가 출간될 때, 처음으로 히브리말 성서에도 적용되었고 1524/1525년에 두 번째 랍비 성서에도 적용된 이래,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히브리말 본문과 그리스말 번역본 사이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원본에 가까운가? 칠십인역의 역자들이 스스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말 본문과 히브리말 본문을 비교하는 가운데 확인할 수 있는 첨가와 삭제를 시도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부분적으로 이미 출간된 쿰란 수사본들의 히브리말 본문 단편들은 칠십인역이 대본으로 삼은 히브리말 본문과 매우 가깝다. 그러나 수사본이 아주 오래된 증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진짜 원본을 제시할 수는 없다. 칠십인역 본문이나 그 히브리말 대본이 중복되거나 모순된 일부 내용을 빠뜨리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칠십인역 본문은 마소라 학자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히브리말 본문보다 덜 까다로워 후대에 수정하지 않았나 의심하게 한다. 어떻든 칠십인역 본문과 마소라 학자들의 본문의 서로 다른 본문이 초세기 시작 전에 이미 공존하고 있었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사무엘서라는 책 제목은 이 책의 저자를 사무엘 예언자로 돌린 옛 랍비 전승을 반영한다(바바 바트라 14b). 후대의 랍비들은 1역대 29,29-30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사무엘의 위업이 그가 죽은 다음에 나단 예언자와 가드 예언자를 통하여 지속되었다고 여겼다(바바 바트라 15a).

 

그러나 사무엘의 책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다소 인위적이다. 특히 사무엘 하권에서 21 - 24장은 문체나 내용이 일관된 다윗 왕가의 이야기를 방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무엘서의 본 내용인 다윗 왕가의 이야기는 이 왕가의 급변하는 내부 사정을 다루는데 솔로몬의 즉위에 관한 보고로 끝을 맺는다. 이 구도에 따르면 열왕기 상권의 처음 두 장은 위의 2사무 21 - 24장으로 중단된 옛 다윗 왕가의 이야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중간에 삽입된 이 사무엘 하권의 네 장은 구원자 판관들의 이야기를 방해하는 판관 17 - 21장과 같은 기능을 지닌다. 판관기의 구원자 판관들 이야기는 사무엘서에 나오는 다윗 왕가 이야기처럼 판관 17-21장을 건너 뛰어 1사무 1장에 다시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사무엘서의 내용

 

2사무 21 - 24장의 보충 자료를 제쳐두고 현재의 사무엘서를 있는 그대로 놓고 살펴보면, 연대순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1사무 1 - 7)는 사무엘이 태어날 때부터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위대한 판관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를 다룬다. 이야기의 배경은 실로에 있는 계약궤의 운명과 직결되는 불레셋인들과의 전투 상황이다.

 

사무엘이 늙어가자 외부의 위협으로 불안해진 백성은 그에게 임금을 요구한다. 백성의 왕정 도입 운동은 신정제도를 옹호하는 이 예언자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이스라엘 원로들의 요구에 양보하여 사울을 임금으로 내세운다. 일단 임금을 내세운 다음, 사무엘은 뒤로 물러난다. 왕정에 대한 논란과 사울과 얽힌 이야기들은 1사무 8 - 12, 곧 제2부를 차지한다.

 

3(1사무 13 - 15)는 사울이 불레셋인들과 아말렉족과 벌인 여러 싸움을 다룬다. 사울은 싸움에서는 이기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이미 그의 생애에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사울은 하느님께 두 가지 불순종을 저지르는데, 이 때문에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고 대신 다윗이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사무엘이 암시적인 말로 그에게 알린다.

 

사울 앞에 모습을 드러낸 때부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성별될 때까지의 다윗의 생애는 다윗의 왕위 등극 설화(1사무 16 - 2사무 5)라 불리는 이야기에 나온다. 이 대목이 제4부의 내용이다.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의 이야기를 다윗이 왕위에 등극하기까지와 등극한 이후로 나누어 이부작처럼 소개하는데, 다윗의 왕위 등극 설화는 이 이부작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다윗은 소년 시절에 사무엘에게서 성별을 받고 사울을 섬기게 되는데, 불레셋의 거인 장수를 쓰러뜨리면서 주목을 받는다. 그는 곧 위대한 장군이 되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비롯하여 모든 이의 호감과 애정을 얻는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사울에게 병적인 시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사울은 여러 차례 경쟁자 다윗을 없애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실패로 끝난다. 다윗은 자신을 해치려는 사울을 피하여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사울에게 쫓기는 동안 다윗은 불레셋인들을 섬기게 되지만 군대를 이끌고 자기 동족을 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불레셋인들에게 패하여 죽은 다음, 다윗은 사울의 추종자들과 계속해서 싸움을 벌이고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다. 반면에 사울의 집안은 점점 약해진다.

 

5(2사무 6 - 8)는 사무엘서에서 다윗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부작의 연결 부분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실로의 계약궤를 안치시킴으로써 자신이 정복한 이 성읍을 왕국의 수도로 성별한다. 나단의 예언은 다윗 왕조에게 호의를 보이며 이 왕조를 왕정 계승의 핵으로 확고히 다진다. 8장의 전쟁 기록은 예루살렘의 왕정 창시자가 실제 왕국의 정복자였음을 증언한다.

 

이부작의 후반부는 2사무 9 - 20장의 내용인데 1열왕 1 - 2장에 이어진다. 여기에는 여러 사건들이 나오는데 끝에 가서는 모두 솔로몬의 등극에 귀결된다. 솔로몬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와, 솔로몬의 왕위 계승에 장애가 되는 다윗의 두 아들, 암논과 압살롬(그리고 아도니야)이 제거되는 이야기가 이 후반부에 속한다.

 

다윗의 계승 설화 중간에서 잠깐 한숨 돌리는 사이를 이용하여 2사무 21 - 24장이 소개된다. 이 대목의 내용은 두 개의 서사시와 여러 인물들에 관한 기록, 그리고 두 가지 자연 재해와 그 액땜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엮어진다. 마지막 내용인 자연 재해와 액땜 사이의 관계는 역사적종교적으로 중요한데도 앞 장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

 

3. 사무엘서와 이스라엘의 역사

 

사무엘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오랜 기간을 다루지만 적어도 그 끝은 명확하다. 이 책은 기원전 970년 솔로몬이 출현하기 직전 다윗의 노년기까지 우리를 끌고 간다. 연대로 보아 판관기 역사와 같은 흐름을 지닌 초기 일화들을 정확하게 규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초기 역사에 속하는 사무엘서의 몇몇 전승 사료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실제 역사에 바탕을 둔다. 불레셋의 지배에 관한 정보, 특히 그들이 쇠 다루는 일을 독점했다는 정보(1사무 13,19-21), 세밀하고 정확하게 장소를 표기하면서 여러 가지 싸움을 묘사하는 이야기들(1사무 13; 17; 31), 도망자 다윗의 파란만장한 편력기 등이 이런 전승 요소들이다. 다윗과 사울 집안 사이에 얽힌 이야기와 압살롬이 반역하는 이야기 안에서 드러난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긴장관계는 또 하나의 순도높은 전승 사료이다. 2사무 8장이 전하는 다윗의 전투 이야기도 그 외적 증거가 없다 할지라도 거짓일 수 없다. 에집트와 아시리아가 방어태세를 취하던 시절인 기원전 천년기 초기의 다윗 제국에 대한 정보는 솔로몬의 전성기 통치를 잘 설명해 준다. 그의 통치력은 지중해와 홍해에까지 미쳤다. 다윗 신하들의 직책에 관한 기록(2사무 8,15-18; 20,23-26)2사무 24장에 언급된 인구조사는 통치구역의 조직을 확정지으려는 의지를 잘 드러낸다. 또한 이 인구조사는 왕홀이나 궁궐도 없이 한평생 전사로 살다가 죽은 사울의 시대 이래 중대한 변화를 가리켜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반면에 사무엘서에서 왕정제도의 발상에 관한 확실한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다. 불레셋의 위협이 사무엘에게 임금을 요구하러 온 이스라엘 원로들의 원초적 의도를 설명해 주기는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이런 왕정 도입 운동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사울을 암몬인들의 정복자요 야베스-길르앗의 구원자로 제시하는 1사무 11장의 전승은 깊이있는 연구로 그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전승은 그의 왕위 등극에 관련된 다른 이야기들과 조화될 수 있는가? 사울은 어디에서 왕위에 오르는가? 라마인가, 미스바인가, 길갈인가, 아니면 이 모든 장소에서 거듭 왕위에 올랐는가? 사울 왕국의 연대는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1사무 13,1의 기록은 그런 연대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3. 편집 요소들

 

사무엘서는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엮어놓은 기록이 아니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자료들을 한데 모은 문학 작품이다. 그 자료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아주 오래되었다. 이 작품은 사울과 다윗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구두 전승들을 결합시키지만 지금 우리가 대하는 이 책의 기록 뒤에 원초적인 사료가 어떤 형태로 그 바탕을 제공하였는지 밝히기 어렵다. 이 책은 아마도 솔로몬의 치세 아래 편집되고, 587년 왕국이 무너진 다음 신명기 계열(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서/ 열왕기)이라 불리는 역사학파의 손에서 수정과 보충을 거쳐 재편집되었을 것이다. 신명기계 역사학파의 문체와 어구는 쉽게 눈에 뜨인다. 이렇게 장구한 세월에 걸쳐 편집된 사무엘서에서 배경 사료의 원초적 형태를 읽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주석가들은 다윗의 왕위 계승 설화(2사무 9 - 201열왕 1 - 2)가 비교적 일관된 내용의 이야기로 이루어졌으며, 그 안에서 인간의 창조(창세 2)로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옛 민족사를 전해 주는 모세 오경의 야훼계 전승과 매우 비슷한 문학적 특성을 엿볼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풍부한 세부 묘사와 더불어 현장감있게 전개되는 압살롬의 반역 이야기는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의 기록으로서 후대의 편집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이야기는 솔로몬의 탄생 이야기(2사무 9 - 12)를 서론으로, 아도니야의 패배 이야기(1열왕 1 - 2)를 결론으로 삼으면서 왕위 계승 설화의 핵심을 이룬다. 솔로몬의 탄생 이야기와 아도니야의 패배 이야기를 다루는 2사무 9 - 12장과 1열왕 1 - 2장을 솔로몬의 왕위 계승 설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설화가 그 자체로 객관적 분위기를 드러낸다 할지라도 저자의 편집 경향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나단의 예언(2사무 7)과 계약궤 이야기(2사무 6) 가운데 몇몇 오래된 요소들을 거기에 연결시켜야 하는, 다윗의 왕위 계승 설화 이전의 기록(1사무 16 - 2사무 5)은 그 기원을 밟아 올라가기가 매우 어렵다. 다윗의 왕위 등극 설화또는 간단히 왕위 등극 설화라 불리는 이 기록은 생각보다 매끈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설화의 작성자와 편집자들이 이야기를 조화있게 꾸미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럴지라도 이야기가 중복되어 나오는 예들은 매우 예외적이다. 다윗이 사울을 섬기러 입궐하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나 번번이 실패하며, 요나단이 다윗을 위하여 중재에 나서고, 다윗이 불레셋인들에게 망명하는 이야기, 지브 주민들이 다윗의 피신처를 밀고하고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중복되어 나온다. 이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이 이 대목들을 두고, 원래 모세 오경을 구성한 문헌들을 확장시킨 것으로 믿었다.

 

이와 관련하여 대부분 우리가 할 일은 서로 다른 전승들, 곧 이미 고정된 구두 전승이나 기록 전승들을 밝히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은 서로 다른 전승들을 보존하면서 고정된 정식(定式)이나 틀을 유지시키고 각 대목마다 열쇠말을 이용하여 주요 주제들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런 중복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왕위 등극 설화는 왕위 계승 설화와 비슷한 점들이 아주 많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이 두 설화의 저자들이 같은 분위기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고 당연히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궁정의 묘사는 이미 다윗 임금을 찬양하는 방향으로 굳어진 구두 전승에서 그 내용을 뽑고 그 꼴을 갖추었다. 이 대목에서 볼 수 있는 다윗 임금의 이상화(理想化) 과정은 후대의 편집에까지 연장된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이야기를 전하는 1사무 16장은 이 두 번째 임금을 첫 번째 임금과 같은 틀 속에 넣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면서 이 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15장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사울의 여러 전쟁을 다루는 장들은 여러 사료를 한데 모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울시대에 불레셋인들과 치른 전쟁들에 관한 옛 전승들이 발견된다. 이 전승들에서 다윗의 친구 요나단은 참다운 영웅이다. 그리고 그 경향은 대체로 사울에게 적대적이다(1사무 13 - 14). 아말렉과의 싸움 이야기(1사무 15)는 옛 전승에 확실한 뿌리를 내린다고 볼 수 없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한 탓으로 사울 왕조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문학 기법으로 처리된 서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울의 폐위는 그를 직접 계승한 다윗의 이야기에 꼭 필요한 서막이다.

 

왕정제도의 기원을 다루는 1사무 8 - 12장도 꽤 복잡한 이야기에 바탕을 둔다. 이 대목에는 다양한 기원에서 나온 요소들이 모아져 있다. 어떤 것들은 덧붙여진 요소들인데도 오래된 전승에 바탕을 둔다. 베냐민 지파의 전설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는 암나귀 이야기(9,1 - 10,16), 미스바에서 나온, 제비로 임금을 뽑는 전승(10,17-27), 원수 나라 암몬을 쳐부순 영도력있는 판관으로 사울을 그리는 11장의 이야기는 그 좋은 예들이다. 8장은 왕정제도 자체가 일으킨 신학적 문제를 즉시 보여준다. 이 장은 비록 주님께서 이 제도를 허용하신다 하더라도 임금을 요구하는 백성의 원의를 단죄한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동족에게 경고한 임금의 소행들은 이스라엘 임금들의 악습을 미리 단죄한 것이라기보다 기원전 2천년대 말기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었던임금들의 관행을 지적한 것이라고 하겠다. 8장의 배경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담화는 사무엘서의 다른 담화들처럼 신명기계 학파의 손길을 거쳤다. 담화는 이야기의 내용을 부연하는 데 가장 알맞은 문학유형이다. 12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고별 설교도 신명기계 학파에게 돌려야 딱 들어맞는다. 이 설교에서 사울은 좋다 나쁘다 판단되지 않는다. 그는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라는 사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될 뿐이다. 왕권을 손에 넣은 사람보다 왕정제도 자체에 더 관심이 많다.

 

사무엘서의 첫 부분(1사무 1 - 7)은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데 역점을 둔다. 이 인물의 됨됨이는 신심깊은 사람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는 성소(聖所)와 연결되면서 예언적 사명을 받는다. 이 부분의 저자는 사무엘 안에서 그 시대를 위한 구원자의 참모습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모습을 사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저자는 사무엘의 선택을 강조한다. 두 임금을 성별한 사무엘은 주님의 마음에 드는 심부름꾼이었다. 1 - 7장의 다른 요소들은 사무엘서 전체의 주요 관심사들을 감안해야 그 의미가 드러난다. 계약궤와 얽힌 이야기들이 자세하게 나오는 이유는 그 이야기들이, 다윗이 새 도읍 예루살렘의 수호신으로 삼은, 이 궤를 영광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충직한 사제(2,27-36)의 언급은 솔로몬시대의 사독 가문 사제직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필요하다. 2,7에서 간결한 문체로 나타낸 들어높임과 내침의 반명제는 엘리와 그 아들들에 대한 사무엘의 관계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사울과 그의 집안에 대한 다윗의 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렇듯 사무엘 이야기는 이어지는 이야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1 - 6장을 구성하는 옛 전승들의 수집은 왕정 지지파에 돌릴 수 있다. 7장에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관심사와 문체가 나오는데, 이 역사가가 판관들의 역사를 매듭지으려는 뜻에서 7장을 재편집하였을 것이다.

 

4. 왕정에 관한 가르침

 

이야기 저자들의 정치적종교적 경향을 밝히는 일은 사무엘서의 집필과 관련된 몇 가지 가설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 사무엘서는 이스라엘 옛 역사의 한 부분이 가르쳐주는 것보다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그 가르침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밝힐 필요가 있다.

 

가장 주목할 주제는 왕정에 관한 내용이다. 사무엘서 저자는 이 제도의 모호함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신다. 그러니 인간적 통치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이 왕정 문제는 주님과 그분의 중재자인 사무엘이 사울의 선택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왕정제도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풀려 나갔다. 그러나 이 제도를 요구하는 백성의 주장은 단호하게 단죄를 받았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도 인간의 왕정 자체가 인간의 뜻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에서 나온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의 군주제도는 민주적이거나 전제적인 것이 아니라 신정(神政)에 예속된 채 남아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사울은 백성의 요구로 희생양이 된 인물이다. 그의 이름 자체가 요구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기리는 전설담은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한 종교인의 최상 권위를 드러낸다. 사무엘서에는 사울의 몰락을 가져오게 했던 잘못들의 종교적 성격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임금이라고 해서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나아가 사무엘서의 관심사는 예배의 대상과 관습과 인물에 연관된다. 만져서는 안될 계약궤(2사무 6,7)와 예루살렘의 제단(2사무 24)에 관한 언급은 그 좋은 예들이다.

 

사무엘서는 다윗을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내세운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시기에 이상적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는 여러 차례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사람들의 호감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관대함과 겸손을 잃지 않는다. 저자는 다윗이 군인으로서 성공한 생애를 보냈음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사무엘서에서 우리는 이 이상적 임금이 주님께 보인 순종의 태도, 그의 탄원, 그리고 역경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물어보려 한 사실 등을 놓쳐서는 안된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나단 예언자의 충고와 질책을 받아들였다. 나단은 이스라엘에서 임금이라 할지라도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윗에게 일깨워 주었다. 한편 사울과는 달리 다윗의 후손은, 죄악의 씨앗(바쎄바에게서 난 첫아들)만 죽을 뿐, 벌을 받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리를 물려받아 이스라엘을 통치하리라는 보장을 받는다. 이 아들은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서서히 부상한다. 사무엘서는 결국 이스라엘 왕국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기록이다. 나단의 예언에 따라(2사무 7), 다윗 집안은 몇몇 임금들이 잘못을 저질렀으나 예루살렘의 왕좌를 영원히 차지해야 한다. 이 예언의 골자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편집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스라엘의 군주제도가 오래도록 지속되리라고 믿었던 시기에 나왔을 이 종교적 이념은 사무엘서를 구원의 역사 가운데 자리잡게 하는 특별한 행운을 낳았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날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큰 잘못을 저질러 왕국 전체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패하고 왕족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사건이 바로 이를 결정적으로 증명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다윗 집안에 허락하신 영원한 보증을 계속 믿으면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약속된 인물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그분이 바로 이상적 임금인 메시아인데, 인성으로 볼 때 그분은 기원전 천년 경에 이미 주님께서 뽑으신 이의 후손이다.

 

열왕기 입문 열왕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긴 기간을 다룬다. 열왕기가 다루는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사건은 다윗의 말년에 일어난 일로서(1열왕 1 - 2,10), 그 연대는 기원전 972년경이다. 반면에 열왕기의 역사에서 가장 나중에 일어난 사건은 기원전 561년 여호야긴 임금이 바빌론 임금의 특전을 받은 일이다(2열왕 25,27-30). 그러나 열왕기를 전기 예언서로 분류한 히브리말 성서의 목록이 시사하듯, 이 책에 수많은 역사적 자료가 나온다 해서 독자들은 이 책을 단순한 역사기록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이 책의 내용은 이스라엘 임금들이 통치하던 이스라엘 역사의 일정 기간에 관한 신학적 반성이라 할 수 있다. 1. 열왕기의 내용 . 다윗의 통치 말년과 솔로몬의 통치(1열왕 1 - 11) 다윗과 수넴 처녀; 아도니야가 임금 행세를 하다; 나단과 바쎄바의 계책; 솔로몬이 다윗의 명을 받아 임금이 되다 (1열왕 1,1-53) 다윗이 죽다(1열왕 2,1-12) 아도니야가 죽다; 에비아달과 요압의 운명; 시므이가 죽다 다윗(1열왕 2,13-46) 솔로몬이 파라오의 딸과 혼인하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꿈을 꾸다; 솔로몬의 판결(1열왕 3) 솔로몬의 대신들; 솔로몬의 통치 아래 왕국이 굳건해지다; 솔로몬이 이름을 떨치다(1열왕 4,1 - 5,14)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준비하다(1열왕 5,15-32) 솔로몬이 성전을 짓다; 솔로몬이 자기 궁전을 짓다; 청동 기술공 히람을 데려오다; 청동 기둥; 청동 바다 모형; 물수레; 그 밖의 청동 기물; 성전 기물(1열왕 6 - 7) 계약궤를 성전에 모시다; 솔로몬의 기도; 솔로몬이 백성에게 축복하고 권고하다; 성전을 봉헌하다;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시다(1열왕 8 - 9,9) 솔로몬이 히람과 거래하다; 솔로몬의 건축 활동; 솔로몬의 무역 활동(1열왕 9,10-28) 세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오다; 솔로몬의 영화; 솔로몬의 병거대(1열왕 10) 솔로몬이 하느님에게서 돌아서다; 솔로몬의 적들; 여로보암의 반란을 예고하다; 솔로몬이 죽다(1열왕 11) . 왕국의 분열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까지나. (1열왕 12 - 2열왕 17) 북쪽 지파들이 반기를 들다; 남북이 정치/종교적으로 갈라지다(1열왕 12) 베델의 제단이 무너지다; 베델의 늙은 예언자(1열왕 13) 여로보암의 아들이 죽다; 여로보암이 죽다(1열왕 14,1-20) 르호보암의 유다 통치; 아비얌의 유다 통치; 아사의 유다 통치 다윗(1열왕 14,21 - 15,24) 나답의 이스라엘 통치; 바아사의 이스라엘 통치; 엘라의 이스라엘 통치; 지므리의 이스라엘 통치; 오므리의 이스라엘 통치; 아합의 통치가 시작되다(1열왕 15,25 - 16,34) 엘리야가 가뭄을 예언하다; 엘리야와 까마귀;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다; 엘리야와 오바디야;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다; 엘리야가 가르멜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하다; 가뭄이 끝나다;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가다;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다(1열왕 17 - 19) -하닷이 사마리아를 공격하다; 이스라엘이 승리하다; 아람군이 다시 쳐들어오다; 한 예언자가 아합을 저주하다(1열왕 20)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다; 아합이 뉘우치다(1열왕 21) 아합이 라못-길르앗을 되찾으려 하다; 미가야가 아합의 패전을 예언하다; 아합이 라못-길르앗에서 전사하다(1열왕 22,1-40) 여호사밧의 유다 통치(1열왕 22,41-51) 아하지야의 이스라엘 통치(1열왕 22,52-54) 엘리야와 아하지야 임금; 엘리야의 승천과 그의 뒤를 잇는 엘리사; 엘리사가 두 가지 기적을 일으키다(2열왕 1 - 2) 요람의 이스라엘 통치(2열왕 3,1-3) 이스라엘과 유다 동맹군이 모압과 싸우다; 과부의 기름병; 수넴 여자와 그의 아들; 독이 든 국; 백 명을 먹인 기적; 엘리사가 나아만을 고쳐주다; 엘리사가 잃어버린 도끼를 찾아주다; 엘리사가 아람 군대를 사로잡다; 포위된 사마리아가 기아에 빠지다; 엘리사가 자객들이 오는 것을 미리 말하다; 아람군이 진지를 두고 달아나다; 수넴 여자 이야기의 마무리; 엘리사와 아람 임금(2열왕 3,4 - 8,15) 여호람의 유다 통치; 아하지야의 유다 통치(2열왕 8,16-29) 엘리사의 제자가 예후에게 기름부어 임금으로 세우다(2열왕 9,1-13) 예후가 이스라엘 임금 요람을 죽이다; 예후가 유다 임금 아하지야를 죽이다; 예후가 이세벨을 죽이다; 예후가 아합의 아들들을 죽이다; 예후가 유다 임금 아하지야의 형제들을 죽이다; 예후와 여호나답; 예후가 바알 숭배를 없애다; 예후의 죄; 예후의 마지막(2열왕 9,14 - 10,36) 아달리야의 유다 통치; 여호야다 사제의 개혁(2열왕 11) 요아스의 유다 통치; 아람의 침입과 유다 임금 요아스의 시해(2열왕 12) 여호아하즈의 이스라엘 통치; 여호아스의 이스라엘 통치(2열왕 13,1-13) 엘리사가 죽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쟁(2열왕 13,14-25) 아마지야의 유다 통치; 유다 임금 아마지야가 죽다(2열왕 14,1-22) 여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 통치(2열왕 14,23-29) 아자리야의 유다 통치(2열왕 15,1-7) 즈가리야의 이스라엘 통치; 살룸의 이스라엘 통치; 므나헴의 이스라엘 통치; 브가히야의 이스라엘 통치; 베가의 이스라엘 통치(2열왕 15,8-31) 요담의 유다 통치; 아하즈의 유다 통치(2열왕 15,32 - 16) 이스라엘의 마지막 임금 호세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몰락에 대한 반성; 사마리아인의 기원(2열왕 17) . 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에서 유다 왕국의 마지막까지다. (2열왕 18 - 25) 히즈키야의 유다 통치; 사마리아가 함락되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유다를 치다; 히즈키야가 이사야에게 문의하다; 아시리아가 다시 위협하다; 히즈키야의 기도; 산헤립을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 히즈키야에게 내린 주님의 징표; 산헤립의 말로(2열왕 18 - 19) 히즈키야의 발병과 치유; 바빌론 사절단; 히즈키야가 죽다 (2열왕 20) 므나쎄의 유다 통치; 아몬의 유다 통치(2열왕 21) 요시야의 등극과 종교 개혁; 주님의 율법책을 발견하다; 요시야가 계약책을 봉독하고 계약을 맺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 요시야가 과월절을 지키다; 요시야의 나머지 개혁; 요시야가 죽다(2열왕 22,1 - 23,30) 여호아하즈의 유다 통치; 여호야킴의 유다 통치; 여호야긴의 유다 통치; 유다인들의 첫 번째 바빌론 유배(2열왕 23,31 - 24,17) 시드키야의 유다 통치; 예루살렘이 함락되다; 성전이 파괴되다(2열왕 24,18 - 25,21) 느부갓네살이 게달리야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다(2열왕 25,22-26) 여호야긴이 바빌론 임금에게 은전을 입다(2열왕 25,27-30) 2. 열왕기의 기원 우리에게 전해진 열왕기는 뚜렷이 둘로 나뉘어 있지만, 히브리말 성서는 한 작품이다. 두 권으로 나뉘게 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말 역자들이 그렇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 분리는 점차 굳어져, 유감스럽게도 아하지야의 통치 시대와(1열왕 22,52-54에서 시작하여 2열왕 1장으로 끝남) 엘리야 이야기를(1열왕 17장에서 시작하여 2열왕 1장으로 끝남) 갈라놓았다. 열왕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통일된 작품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책은 성서의 다른 책들과 완전히 독립해서 쓰여지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여호수아서, 판관기, 사무엘서, 열왕기가 본디 유일한 역사 문헌으로 한데 묶였으리라는 가설을 내세웠다(여기에 신명기도 포함될 수 있다). 한 가지 좋은 예로 1열왕 1 - 2,11은 다윗의 통치를 전하는 사무엘 하권과 곧바로 이어진다. 열왕기를 분석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책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다른 색깔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열왕기 저자 자신이 이전의 기록을 이용하였으며, 자기가 의존한 사료를 인용했음을 밝힌다. 이는 이 작품이 한 번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되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1열왕 11,41; 14,19.29 등은 망솔로몬의 행적맢, 망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맢, 망유다 임금들의 실록맢을 언급하는데, 이런 사료들은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본문을 편집할 때 출발점이 되었던 문헌들이다. 그러나 행적이나 실록을 언급하는 단편들은 이 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을 쓰면서 다른 사료들도 많이 이용하였다. 예를 들어 저자는 성전 문서고에 있던 자료도 알고 있었다(1열왕 4,1-6.7-19; 5,7-8 참조). 또 다른 부분에 나오는 일부 교훈들은 이미 문헌으로 정리되었거나, 아니면 그 정확한 성격을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구전 전승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세바 여왕의 이야기는(1열왕 10,1-13) 별도의 전승에 속한다. 아합 임금과 관련된 일화들은 전혀 다른 관점의 두 사료에서 나왔다. 한편에서는 그를 맹렬히 비판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를 용감한 임금으로 묘사한다(1열왕 22,9.35). 요시야 임금에 관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기록은(2열왕 22 - 23,30) 부분적으로 공식 실록이 아닌 다른 사료에서 나온 것일지 모른다. 임금들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어떤 대목들은 특별히 예언자들의 행적을 함께 다룬다. 이런 대목들은 예언자들의 제자들이 보전한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언자들의 일화들이 임금들에 관한 이야기와 합해진 이유는 그 둘이 같은 시대에 속해 있었고, 예언자들이 임금들 앞에서 조언과 중개 역할을 맡아했었기 때문이다. 열왕기 안에는 아히야나 이믈라의 아들 미가, 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들에 관한 짧은 일화들은 말할 것도 없고(1열왕 13; 2열왕 21,10-15), 엘리야와 엘리사와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있다. 그러면 서로 다른 이 사료들이 어떻게 하나로 모아졌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열왕기와 관련된 가장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여호야긴의 유배 모습을 전하는 2열왕 25,27-30의 저자와, 솔로몬과 동시대 인물로서 계약궤를 묘사하고(1열왕 8,7) 그 밖에 다른 사실들을 전하는(1열왕 9,21) 저자는 결코 동일 인물일 수 없다. 솔로몬시대와 유배 시대 사이에는 사백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다면 누가 열왕기를 썼을까? 여러 이론들이 나왔지만, 대다수 주석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대충 다음과 같은 가설이 가장 그럴 듯하다. 먼저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서 여호수아서와 판관기와 사무엘서가 있었다(어떤 학자들은 신명기도 포함시킨다). 첫 번째 편집자가 1열왕 1장에서 2열왕 20장을 저술하였을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유다와 이스라엘 임금들의 연대기에, 다른 한편으로 솔로몬의 행적기와 유다와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을 담은 문헌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이 편집자는 구전 전승의 요소들도 이용하고, 나아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의 파괴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 사건을 묘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팔레스티나의 한 사제가 기원전 580년경에 이 책을 썼다고 여긴다. 첫 번째 편집자보다 한 세대 뒤에, 곧 기원전 550년경 아직 바빌론 유배가 풀리기 전에 같은 팔레스티나에서 두 번째 편집자가 나타난다. 이 두 번째 편집자는 자기가 입수한 다른 일화들과 전승들을 이용하여 선임자의 작품을 보완하였을 것이다. 그가 첨가한 내용으로는 다윗과 그의 후계에 관련된 이야기와(1열왕 1,1 - 2,11에 계속되는 2사무의 왕위 계승 대목), 예루살렘 포위를 다루는 본문을(2열왕 18 - 19; 병행 이사 36 - 39) 들 수 있다. 세바 여왕의 방문에 얽힌 전승도 그가 이 책 안에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예언자들과 모세 율법이 그의 편집 안에서 각별히 중요하게 연결되는(여호수아서에서 열왕기 하권까지 이어진다)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두 번째 편집자를 예언자들의 집단에 속한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예레미야의 제자가 아니었나 추측한다. 3. 열왕기의 연대 열왕기에 나오는 연대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열왕기 연대는 이스라엘 역사와 고대 근동의 역사가 분명히 연결되는 몇몇 경우말고는 정확하게 정립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에집트 문헌들, 아시리아-바빌론 임금들의 실록과 그 관련 문헌들은 열왕기의 몇몇 사건들에 관하여 매우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점들말고도 열왕기의 자료들은 흔히 이해하기가 까다롭다. 우선 유다 임금들의 통치 연대를 보면 언제나 이스라엘 임금들의 통치 연대와 함께 언급되고, 이스라엘 임금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서로 모순되는 연대 체계를 끌어들이는 원인이 된다. 그 다음 필경사들의 오류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원래의 문헌에 나오는 숫자를 뒤바꾸어 놓거나 다른 숫자와 혼동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솔로몬과(1열왕 1) 요담의(2열왕 15,5) 통치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세자들이 선왕과 함께 나라를 통치하게 되는 경우, 임금들의 통치 연대를 정확하게 나누어 배치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이런 예는 솔로몬과 요담의 통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연대 측정이 어려운 원인은 열왕기 안에 서로 겹치는 여러 연대 체계 때문이다. 이 다양한 연대 체계는 저마다 다른 사료들에서 나왔다. 따라서 이 책을 대하는 사람들은 연대를 측정하는 데에 세 가지 서로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유다의 통치에 근거한 연대, 둘째는 이스라엘의 통치에 근거한 연대, 셋째는 둘을 조화시켜 얻은 연대이다. 예를 들어 왕국 분열에서 아합 통치의 끝에 이르는(기원전 933-853) 기간을 우리는 80년으로 보는데, 유다의 연대로는 84, 북왕국 연대로는 78, 그리고 둘을 조화시켜 얻은 연대는 75년이다.우리는 연대를 측정할 때 되도록 최근의 고고학 발견들을 참작하려고 한다. 남북 왕국 임금들의 통치 연대 사울 B.C. 1030-1010년경 다윗 B.C. 1010-970년경 솔로몬 B.C. 972년경-933

 남왕국 유다

 북왕국 이스라엘

르호보암 B.C. 933-916아비얌 B.C. 915-913아사 B.C. 912-871여호사밧 B.C. 870-846여호람 B.C. 848-841아하지야 B.C. 841아달리야 B.C. 841-835요아스 B.C. 835-796아마지야 B.C. 811-782아자리야 B.C. 781-740(우찌야) 요담 B.C. 740-735아하즈 B.C. 735-716?히즈키야 B.C. 716-687므나쎄 B.C. 687-642아몬 B.C. 642-640요시야 B.C. 640-609여호아하즈 B.C. 609여호야킴 B.C. 609-598여호야긴 B.C. 598-597시드키야 B.C.597-587  

여로보암 1B.C. 933-911나답 B.C. 911-910바아사 B.C. 910-887엘라 B.C. 887-886지므리 B.C. 7일간 오므리 B.C. 886-875아합 B.C. 875-853아하지야 B.C. 853-852요람 B.C. 852-841예후 B.C. 841-814여호아하즈 B.C. 820-803여호아스 B.C. 803-787여로보암 2B.C.787-747즈가리야 B.C. 747살룸 B.C. 747-746므나헴 B.C. 746-737브가히야 B.C. 736-735베가 B.C. 735-732호세아 B.C.732-724

 

 

  

4. 열왕기의 신학 열왕기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과 그 임금들의 역사에 관한 신학적 반성이다. 열왕기에 나오는 역사 자체는 대체로 매우 간결하다. 예를 들어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므리 임금의 통치를 매우 간단하게 다룬다(1열왕 16,23-26). 그리고 세 해 동안 계속된 사마리아의 포위와 북왕국의 붕괴는 불과 몇 절로 처리한다(2열왕 17,3-6; 18,9-12). 가장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신명기적 용어와 표현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이 작품을 신명기계 신학이 (그리고 이 신학을 통하여 예언자들의 신학도) 배어있는 위대한 역사 문헌으로 여길 수 있다. 여기에서는 열왕기의 중요한 주제 몇 가지만 강조하고자 한다. . 왕정제도 이 책은 신명기계 저자와 예언자들이 생각하는 왕정 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참다운 임금은 주님의 규정을 지키는 인물이다. 그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모세의 율법에 쓰여진 대로 그분의 법과 계명과 관습과 명령을 따른다(1열왕 2,3). 임금의 임무는 백성이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1열왕 3,8-9 참조), 그 백성을 지혜와 정의로 다스리고, 동시에 백성을 섬기는(1열왕 12,7) 것이다.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 예루살렘에서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데에 전념하는 일은 임금에게 부여된 의무이다. 열왕기 저자는 이런 의무를 기준으로 모든 임금의 통치마다 짧은 평가를 내린다. 불행히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임금들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엄격한 비판을 받는다. 열왕기 저자는 서른네 명의 임금들에 관해 주님의 눈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후렴처럼 되풀이한다. 그는 실례들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주님에 대한 불충은 여러 가지이다. 이를테면 우상을 숭배하고, 거짓 신들에게 신전이나 제단을 세워 바치며, 이방 신들에게 문의하고 온갖 억압과 불의로 백성을 괴롭히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하느님의 동의 없이 전쟁에 임하고 아이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 등이다. 저자의 가장 큰 비난은 율법을 거스르는 경신례를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임금들에게(특히 북왕국 임금들) 떨어진다. 때때로 어떤 임금들은 뉘우치고 용서를 받기도 하지만, 왕국의 전체적인 모습은 어둡다. 열왕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멸망은 결국 임금들과 그들에게서 책임을 부여받은 자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마땅하고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 다윗과 그의 왕조 유다 임금들의 맨 앞에는 가끔 하느님의 이라고 불리는(1열왕 3,6; 8,24; 11,13 ), 이 왕조의 창시자 다윗이라는 인물이 자리잡는다. 주님에 대한 다윗의 충성과 열심은 올바른 임금의 본보기가 되어, 그의 후계자들의 평가 기준이 된다.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의 규정을 따라 걷고(1열왕 3,3), 아사는 자기 선조 다윗처럼 주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으며(1열왕 15,11), 요시야는 자기 선조 다윗이 걸어간 길을 정확하게 따라갔다(2열왕 22,2). 요시야에 관해서는 저자가 1열왕 13,2에서, 다윗의 자손들 가운데 요시야라는 인물이 이스라엘의 불충을 그치게 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러나 역대 임금들에게 적용된 다윗과의 일치라는 평가 기준은 매우 엄격하다. 아히야 예언자는 여로보암이 다윗과 같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1열왕 14,8). 열왕기 저자는, 다윗 후계자들의 불순종을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분열과(1열왕 11,9-11) 유다 왕국의 멸망을(2열왕 23,26 이하 참조) 가져온 직접 원인으로 본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1열왕 2,4에서 경고하는 위협에도 다윗 집안에 내리신 주님의 약속은 영원하리라고 믿는다.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너에게서 이스라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으리라(1열왕 2,4. 그리고 2사무 7,12-16 참조). 주님께서는 다윗을 생각하시어예루살렘에 등불을하나(다윗 왕조의 왕자) 남겨두신다(2열왕 8,19. 그리고 1열왕 15,11 참조). 마침내 열왕기는 한 가닥 희망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다윗 왕조의 마지막 후손은 비록 갈대아에 유배된 몸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둘러싼 상황이 바뀌어가는 것을 체험한다. 바빌론 임금은 그에게, 죄수복을 벗고 날마다 임금의 식탁에서 음식을 들 수 있는 은혜를 베푼다.. 예루살렘과 성전 신명기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열왕기는 예루살렘과 성전 안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특별한 자리를 부여한다. 우선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성읍이다(1열왕 8,12). 그리고 그곳은 성전의 성읍이다. 1열왕 8,15-19에 따르면 이 성전 건축은 원래 주님의 이름을 위한집 한 채 짓기를 간절히 바라던 다윗의 소원이었다(2사무 7,1-16 참조). 성소의 중요성은 성전 봉헌 때에 솔로몬이 바친 기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열왕 8,23-53).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의 어떠한 생존 환경에서도 하느님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이다(탈출 33,7만남의 천막참조). 요시야의 종교 개혁도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2열왕 22 - 23).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한 것도 성전 안에서이다. 그리고 종교 개혁의 첫 시도는 성전을 정화하는 일이다. 이후 성전은 이스라엘의 모든 경신례 생활에서 중심이 된다. 열왕기 저자가 미리 예루살렘 밖에서도 제사가 바쳐졌음을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은(1열왕 3,2; 22,44; 2열왕 12,4; 14,4; 15,4.35) 종교 개혁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사전 포석이다.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제사를 바친 실례로 가르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친 제사를 들 수 있다(1열왕 18). 성전을 예배의 중심으로 부각시킨 까닭에, 사제들은 경신례 안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따라 제사를 바치는 권한은 오로지 사제들, 곧 레위 지파에 속한 사제들에게만 귀속된다. 1열왕 8,1-6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 때부터 이미 그들이 본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묘사한다. 열왕기 저자는 나중에 아달리야가 다윗 가문의 혈통을 끊어버리려 할 때에 다윗 왕조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 일도 사제들의 공적으로 돌린다(2열왕 11). 저자는 요아스가 주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게 된 것도 여호야다 사제가 그를 잘 지도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힌다(2열왕 12,3). 사실 솔로몬을 도유한 사람도 사제였다(1열왕 1,39). 예루살렘 중심으로 레위 지파 사제들의 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예배를 철저히 강조하면서, 열왕기 저자는 다른 한편 여로보암의 주도로 단과 베델 같은 다른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완전히 배척한다. 저자는 여로보암의 죄또는 여로보암의 길(이런 표현은 스무 번 가량이나 나온다)을 엄하게 단죄하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여로보암 자신과 그를 따른 그의 후계자들의 잘못을 고발한다(역시 스무 번 가량). 열왕기 저자의 견해로는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를 바치라는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한 왕국에 총체적인 단죄와 심판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비록 그 왕국의 임금이 바알의 제단들을 철거하여 주님께 충성을 보인다 할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2열왕 3,1-3 참조). 이같은 실제적 분열은 사마리아가 함락되기까지 한탄의 대상이 된다(2열왕 17,23 참조). . 예언자들의 개입 예언자들과,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통한 개입은 열왕기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승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엘리야와 엘리사뿐 아니라, 나단, 스마야, 아히야, 미가야, 이사야, 여예언자 훌다도 큰 권위를 지닌 이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기적들(특히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들) 못지않게 그들의 정치적 행동도 매우 중요하게 드러난다. 나단은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1열왕 1,11-17). 엘리야는 하자엘을 아람의 임금으로, 예후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도유하라는 명령을 받는다(1열왕 19,15 이하. 그리고 2열왕 9,1-3; 8,11-13 참조). 죽음의 신탁을 전함으로써 임금과 그 가문의 파멸을 선언하는 것도 예언자들의 몫이다. 아히야 예언자와 여로보암 임금(1열왕 14,10-11), 엘리야 예언자와 아합 임금의(1열왕 21,21-24) 경우가 그 좋은 예들이다. 이 밖에 이사야는 바빌론 임금의 승리를 예고한다(2열왕 20,14-19). 그런가 하면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임금의 승리를 알려주거나(엘리사: 2열왕 7,1; 13,17-19. 이사야: 2열왕 19), 군사 행동에 개입하기도 한다(이름모를 예언자: 1열왕 20,13-14. 미가야: 1열왕 22,19-28. 엘리사: 2열왕 3,9-19; 6,8 - 7,20).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에 얽힌 이야기에서 스마야 예언자는 동족 사이의 전쟁을 막는 자로 나타난다(스마야: 1열왕 12,22-24).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아합 임금 앞에서, 임금이 포도밭 주인 나봇의 조상 대대로 이어오는 권리를 짓밟았다고 비난한다(1열왕 21,3-17 이하). 이 모든 경우에 예언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 그분께 순종할 것을 호소하고, 그분께서 충성하는 이들을 보호하시리라는 약속도 선언한다.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과 규정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예언자들의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을 유도한 법전이 발견되었을 때, 여예언자 훌다가 한 역할이 그 좋은 예이다(2열왕 22,14-22). 이처럼 열왕기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종교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윤리와 정치 영역에서도 탁월한 자리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이런 영역들이 다같이 이스라엘의 한 분 임금님께 속하기 때문이다(이사 6,5; 44,6; 즈가 14,16. 시편 입문 19-20,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노래들참조).

 

역대기 입문

 

 

역대기 상/하 두 책에는 히브리 말 성서에서 나날의 말씀(행적)’, 나날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책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 책을 하느님의 역사 전체의 연대기로 부르기를 제안하였다. 이렇게 볼 때, 우리말 이름 역대기는 예로니모 성인이 제안한 제목을 간단하게 줄인 것이라 하겠다. 칠십인역에 따라 교회의 전통 안에 오랫동안 자리잡아 온 이름은 파랄리포메논(paraleipomevnwn)”인데, ‘옆에 놓아 둔 것, 곁들여 전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 책의 내용이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보충으로 여겨진 데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역대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여러 가지 보충 자료와 더불어 신명기계 문헌의 기록과는 다른 역사 신학적 전망 안에서, 많은 부분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내용을 옮겨 놓은 것임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역대기 상/하는 본디 에즈라-느헤미야서처럼 하나의 통일된 책이다. 따라서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는 역대기를 상권과 하권으로 구분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나아가 역대기 마지막 몇 구절과(2역대 36,22-23) 에즈라서의 처음 몇 구절은(에즈 1,1-3) 그 본문이 서로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여, 역대기-에즈라-느헤미야서를 하나로 묶어 생각할 수도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히브리 말 성서의 경전 안에서 이 책들의 순서가 바뀌었다. 곧 내용으로 보아서는 역대기가 에즈라-느헤미야서보다 앞서야 하는데도, 편집 순서에서는 에즈라-느헤미야서보다 나중이다. 역대기가 유다교 경전 안으로 에즈라-느헤미야서보다 늦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역대기의 내용이 사무엘서와 열왕기를 되풀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번역본들과 주요 현대 번역본들은 이 책들의 내용에 바탕을 둔 논리적 순서에 따라 역대기를 에즈라-느헤미야 앞에 둔다. 우리말 번역에서도 이 순서를 지키기로 한다.

 

1. 역대기의 구조

 

역대기는 인간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바빌론 유배 이후 기원전 5세기까지 이어지는 대()역사를 다룬다. 성서의 역사 문헌 가운데에서 역대기만큼 오랜 기간의 역사를 다룬 책은 없다. 신명기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이른바 신명기계 역사 문헌도 가나안 정복부터 바빌론 유배까지만을 다룰 뿐이어서, 아담부터 고레스의 해방령까지 이어지는 역대기의 역사 범위에는 훨씬 못 미친다.

 

역대기 역사의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1) 1역대 1 - 9: 아담부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거쳐 다윗에 이르는 조상들의 족보. 그러나 어떤 족보 목록에는 다윗 이후 시대의 인물들도 나온다(3장 참조).

2) 1역대 10 - 29: 다윗의 통치. 사울의 죽음부터 다윗의 죽음까지 다룬다.

3) 2역대 1 - 9: 솔로몬의 통치.

4) 2역대 10 - 36: 솔로몬의 죽음부터, 바빌론 유배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직전에 이르는 유다 왕국의 역사. 유배 이후 유다인들의 귀향과 유다교의 복구에 관한 이야기는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에 이어진다.

 

2. 저자와 집필 연대

 

보통 역대기 상 하와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저자, 역대기 저자또는 역대기 편집자의 작품으로 본다. 이 책들을 여러 저자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에는 아무도 동조하지 않는다. 이 책들 여기저기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내용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저자가 입수한 다양한 문헌들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에 따라 생겨난 결과이다.

 

역대기 문헌들의 최종 편집 시기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건들로 결정된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은 실제로 기원전 5세기까지, 아마도 기원전 4세기 말까지 계속되다가 끝났을 것이다(에즈라 느헤미야 입문 참조). 따라서 이 문헌들의 편집 시기를 기원전 4세기 중엽, 곧 기원전 350-330년 이전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다.

 

또한 이 편집 시기를 후기 유다교 시대, 곧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형제들이 박해를 받고 전투를 벌이던 시대까지 끌어내려서도 안 될 것 같다. 집회 47,8-10(기원전 190년경) 다윗에 관한 역대기의 묘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시련의 시대를 맞기 이전, 가장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기에 이 책들이 쓰여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역대기 문헌들의 편집 시기는 기원전 330-250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어떻든 역대기 저자의 책들 안에는 정확한 편집 시기를 결정할 만한 분명한 단서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도의 집필 연대 제시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3. 집필과 편집 방법

 

역대기 저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의 작품이 정확하게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더라도, 그가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편집하고 집필하였는지, 그 작업 방법에 관해서는 좀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구약성서 가운데에서 역대기는 그 집필 과정과 방법을 스스로 분명히 드러내 준 유일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역대기 저자는 겨레의 옛 역사에 대한 자기 나름의 지식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를 엮어 나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문헌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옮겨 적었다. 물론 때때로 책의 목적에 맞추어 인용문의 순서를 정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문헌들이나 자신의 역사 개념에 따라 일부 내용을 수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역대기 저자는 자기가 입수한 사료를 인용하는 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가 입수한 사료가 비록 불완전하고 때로는 불분명하더라도, 가능한 한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였다.

 

역대기 저자가 역대기를 쓰기 위하여 이용하였다고 밝힌 사료들은 아래와 같다.

유다와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2역대 16,11)

이스라엘과 유다 임금들의 실록(2역대 27,7)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1역대 9,1)

이스라엘 임금들의 역사(2역대 33,18)

열왕기 주석(2역대 24,27)

다윗 임금의 실록(1역대 27,24)

사무엘 선견자의 실록(1역대 29,29),

나단 예언자의 실록(1역대 29,29),

가드 환시가의 실록(1역대 29,29),

스마야 예언자와 이또 선견자의 실록(2역대 12,15),

하나니의 아들 예후의 실록(2역대 20,34),

환시가들의 실록(2역대 33,19)

실로의 아히야가 한 예언(2역대 9,29)

예도 선견자의 환시(2역대 9,29),

아모쓰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의 환시(2역대 32,32)

이또 예언자의 주석(2역대 13,22)

아모쓰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쓴 기록(2역대 26,22)

 

이상의 문헌들 가운데 상당수는 서로 제목만 약간 다를 뿐 같은 문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두고 주석가들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지만, 대체로 역대기 저자가 적어도 세 종류의 문헌을 이용하였음에는 동의한다. 먼저, 그가 가끔 이야기 전체를 그대로 옮겨 놓은 사무엘서와 열왕기를 꼽을 수 있다. 그 다음, 그가 위 책들의 내용을 보충하는 데에 이용하였을 다른 역사 문헌들(‘왕조 실록의 주석같은 문헌)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문헌들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예언 전승들을 포함한 문헌들을 꼽을 수 있겠는데, 역대기 저자는 이 문헌들에 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이 예언 전승들은 사무엘서/열왕기(사무엘에 관한 전승)나 구약의 예언서들(이사야서), 아니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료들에 바탕을 둔 것일 수 있다.

 

역대기의 이야기 전체를 구성하는 이 모든 자료에, 저자가 그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이용한 다른 자료들도 덧붙여야 한다. 그 자료들은 저자가 익히 알고 있고, 또 자주 참조한 구약성서 다른 책들의 본문들이다. 역대기의 족보들은 대부분 창세기와 탈출기와 민수기와 여호수아기, 그리고 룻기에 나오는 족보들과 같은 성격을 띤다. 역대기의 어떤 장들은 시편의 전례 본문을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시편 96; 105; 106이 역대기 상권에 인용된다).

 

우리는 역대기가 옛 문헌들을 단순히 모아 놓은 기록이 아니며, 어떤 부분은 이 책이 다 완성된 다음에 후대의 자료들이 덧붙여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분명히 이 작품에서는 저자 자신의 개인적인 공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역대기가 구약성서에서 유일하게 그 집필 과정과 편집 방법을 자세히 분석할 수 있는 책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책의 편집 방법은 무엇인가? 이 작품의 세세한 내용에 들어가지 않고 사무엘서/열왕기와 역대기를 대충 비교만 해 보아도, 역대기 저자가 자기 책을 집필할 때에 따랐던 몇 가지 원칙적인 지침을 알아 낼 수 있다.

 

첫째, 저자는 생략법을 이용한다. 그는 자기가 입수한 사료에서 자신의 집필 의도에 따라 쓰고 싶은 이야기만 골랐다. 저자가 볼 때에 다윗의 통치와 그 왕조에 관한 역사는 하느님 백성과 그 운명에 관한 참된 역사였다.

 

따라서 왕국의 분열 다음에 이어지는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북왕국의 역사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유다 왕국과 그 수도 예루살렘에 관한 역사만 다루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영광을 들어높이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불리한 사건들이나 사실들도 한쪽에 제쳐놓았다.

 

예를 들면 다윗의 간통, 압살롬의 반역, 솔로몬 통치 말년의 사치와 우상 숭배 등은 역대기에서 생략되었다. 이 밖에 바빌론 유배 시절에 관한 역사가 역대기에서 통째로 빠진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역대기에는 바빌론 유배부터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재건까지 한 세기가 넘는 긴 기간을 두고 한 마디 언급도 없다.

 

둘째, 역대기 저자는 입수한 자료들을 다루면서 적용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이야기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들을 자기의 개인적 체험과 자기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묘사한다. 그것은 그가 정확한 연대에 관심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역대기 저자는 언제나, 임금들과 백성에게 재앙이 닥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복은 사람들이 성전과 예배에 관련된 모든 일에 열성을 가지고 충실하게 임한 결과로 여겼다. 저자가 왜 때때로 연대의 순서를 바꾸었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역사적인 이유보다는 신학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역대기 저서들을 경향 문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역사 신학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저자에게 일종의 모독이며 부당한 평가이다. ‘역사 신학은 객관적이고 완전한 역사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역대기 저자의 저서들은 단순한 역사가의 작품이 아니라, 신앙인과 신학자의 작품이다. 그는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항구한 위업에 관한 증언과, 하느님 나라의 현실적(아직은 불완전하지만) 표상에 관한 증언을 발견한다.

 

역대기 저자가 사용한 또 다른 집필 방법은 보충이다. 저자는 자기의 주요 사료인 사무엘서와 열왕기에 나오는 자료들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그는 다른 문헌들과 기록이나 구전 전승들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 역사에 관하여 성서의 다른 책들에는 없는 내용을 상세하게 전한다. 그래서 역대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하는 데에 상당히 유익하고 정확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역대기에서 어떤 대목들은 저자의 개인적 반성이나 사물에 대한 저자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수많은 세부 사항이 모두 저자의 창조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사료들에서 저자가 발견한 내용일 수도 있다.

 

한편, 우리는 역대기와 사무엘서/열왕기의 병행 대목들을 비교함으로써 역대기 저자가 자신이 입수한 사료들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도 알 수 있다. 역대기에는 신학적 또는 문학적으로 재편집한 요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지만, 병행 대목들에서 나타나는 세부적인 변형들은 십중팔구 우연히 일어난 것이다. 역대기 저자는 사무엘서/열왕기의 히브리 말 본문을 우리가 사용하는 본문보다는 더 오래된 형태로(이를 원 본문이라 부르겠다) 알고 있었고, 사무엘서/열왕기와 역대기는 그 나름대로 필경사들의 피할 수 없는 잘못을 거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이 책들의 본문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성서의 다른 책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필사 과정의 오류들을 매우 정확하게 가려 낼 수 있다. 동시에 이런 비교 분석을 통하여 역대기 저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자기 사료들을 옮겨 적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사료들을 옮겨 적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때로는 입수된 사료들을 솜씨 있게 삭제 정리하고 때로는 다른 보충 사료들을 덧붙이기도 하면서, 이야기 전체를 조화 있게 엮어 나갔다.

 

한 마디로 역대기 저자의 집필 방법은 그의 역사 개념과 신학 사상에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에 대해 좀더 상세히 살펴보자.

 

4. 역대기 저자의 신학

 

역대기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역대기 신학 전체를 다 파악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책의 중요한 몇 가지 신학적 관점을 간추려서 강조할 수는 있다.

 

첫째, 역대기 저자는 다윗 왕국의 역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자기 책의 중심에 놓았다. 다윗 시대 이전의 모든 역사는 아담까지 올라가는 족보로 처리하였다(1역대 1-9). 그 다음, 사울에서 다윗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10장에만 짧게 나온다. 사울의 죽음도 다루는 이 10장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왕국을 선호하시어 사울의 왕국을 배척하셨다. 역대기 상권의 나머지 부분 전체는(11-29) 다윗 왕국의 역사를 다룬다.

 

이 대목을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병행 대목과 비교해 보면, 적지 않은 차이점들이 발견된다. 역대기에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변덕스러운 통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다윗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 그리고 다윗이 사울과의 갈등으로 쫓겨다니던 몇 해 동안의 유랑 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빠져 있다. 게다가 다윗의 궁정에서 일어난 잘 알려진 사건들, 곧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와 정을 통하고 저지른 좋지 않은 일들,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왕위 계승 분쟁, 압살롬의 반란 등은 역대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모든 사건은 2사무 9 - 23장에 간략하지만 생동감 있는 문체로 소개되는데, 고대 근동의 궁중 생활을 엿보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역대기 저자는 다윗 임금을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인물로 그린다.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임금으로서, 언제나 다윗 왕조의 시조로 남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성도로 만드는 데에, 그리고 성전 건축과 그 곳에서 거행될 전례를 세세히 기획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모세 오경의 사제계 전승 안에 그려진 모세의 모습과 역대기에 그려진 다윗의 모습이 닮았다고 주장한다. 사실 두 인물은 비록 그들이 살던 시대는 다르다 하더라도, 둘 다 백성의 수장이요 하느님의 위임을 받은 입법자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윗의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솔로몬 임금도 다윗처럼 이상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역대기 저자는 그의 인물 됨됨이를 손상시킬 만한 사건은 하나도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곧 그의 통치 초기에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사건들, 그리고 말년에 궁중을 어지럽혔던 사치와 우상 숭배와 방탕한 생활에 관해서는 역대기에 전혀 언급이 없다. 솔로몬은 부왕 다윗의 지시와 세세한 계획에 따라 성전을 지어 낸 임금이다. 역대기 저자는 열왕기 저자보다 훨씬 더 장엄하고 풍부하게 성전 봉헌을 묘사한다.

 

성전과 전례는 역대기 저자의 주요 관심사이다. 그래서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이 예루살렘 성도와 성전, 그리고 그 곳에서 거행되는 전례의 역사를 정확하게 제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책의 시작에 나오는 족보들을 보면,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족보가 다른 지파들의 족보보다 더 장황하다. 이 두 지파가 다윗의 가문과 예루살렘 지역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후계자들의 역사는 성전에 집중되고, 성전의 재건이나 전례의 개혁에 우선 순위를 두는 임금들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아사와(2역대 14-16) 여호사밧(2역대 17-20), 특히 히즈키야와(2역대 29-32) 요시야가(2역대 34-35) 그런 임금들이었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유배가 끝난 다음에도 같은 관심사가 드러난다.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성전의 폐허 위에 제단을 다시 세우고(에즈 3) 성전을 다시 지었으며(에즈 4-6), 성도 예루살렘을 재건하고(느헤 1-4) 전례를 복구하였다(느헤 8-9).

 

이와 관련하여 역대기 저자는 레위 지파에서 전례를 주관하는 이들을 특별히 선호한다. 이들은 아론 가문(역대기에서는 아론 가문도 레위 지파에 속함) 출신의 사제들이거나 다른 가문 출신의 레위인들이다. 모세 오경 전체는 사제들에 관하여 27번 언급하는 데 반하여, 에즈라-느헤미야서는 53, 역대기는 무려 76번이나 언급한다. 레위 1,5와 민수 10,8의 전통을 받아들여, 역대기 저자도 나팔을 부는 임무와(1역대 15,24; 2역대 13,12) 제단에 희생제물의 피를 뿌리는 임무는(2역대 30,16) 사제에게 맡겨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단순한 하급 직원이 아니다. 그들은 계약 궤를 옮기는 이들이요 성전을 지키고 보호하는 문지기들이며, 성가와 악기 연주를 담당하는 이들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사제들을 도와 제사를 준비하기도 한다(2역대 29,34; 30,16-17). 그러나 제사를 거행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역대기가 소개하는 전례 예식들에는 기쁨과 찬미와 감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역대기 저자 자신이 레위인들과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레위인들의 평가절하된 직능을 재확립하려고 전례를 높이 끌어올린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다른 흥미로운 가설은 역대기 저자가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과 그 곳에서 거행되는 예배의 유일한 합법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그리고 저자 자신의 시대에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서 다른 성소들을 세우고 다른 예식들을 거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특별히 사마리아인들처럼, 분열을(이 분열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처음 일으킨 사람들에 대한 논쟁의 성격을 띤다. 이와 관련하여 역대기 저자가 솔로몬의 죽음에 이어진 왕국의 분열 다음부터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가능하다.

 

역대기 저자의 견해로는 다윗 왕조로 유지되는 유다 왕국만이 합법적이다.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왕국의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참된 백성을 대표할 수 없는 분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의 수도 사마리아와 그들의 전례 예식들은 바알 숭배로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일어난 그 땅의 백성과 유다 백성 사이의 갈등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그 땅의 백성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지만, 참 하느님 백성인 유배자들의 후손들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에즈 4; 느헤 2,19-20; 4; 6).

 

역대기의 특이한 관점들과 신학관은 신정(神政)’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일종의 종합적 개념이라 하겠다. 저자에게 하느님 백성의 역사란 곧 유다 공동체 안에서 펼쳐지는 신정 왕국의 이상적 표상과 같다. 이 신정 왕국은 하느님께서 세우셨고, 그 머리에는 다윗이 자리를 잡았다. 실제로 하느님만이 참 임금이시고 다윗은 그분의 왕좌 위에 앉아 그분을 대리할 따름이다. 흘러간 역사의 현실들을 재조명함으로써 역대기 저자는 하느님의 왕국을 그 시대에 맞추어 재현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성도 예루살렘의 유일한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전례는, 하느님의 백성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임금이신 하느님께 충성과 기쁨과 찬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일은 그분의 백성이 매일의 삶 안에서 지켜야 할 첫 번째 의무였다.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지속적인 관계는 철저한 상선벌악의 개념에 바탕을 둔다.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모든 충성, 특히 예루살렘 왕좌에 앉은 임금들의 충성은 당연히 그분의 복을 불러들이는 데에 반하여, 모든 잘못과 불순종, 특히 성전이나 전례와 관련된 잘못은 하느님의 징벌을 끌어들인다.

 

상선벌악 개념의 철저한 적용은 다윗을 계승하는 임금들의 긴 역사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열왕기에는 백성의 행복과 불행에 원인을 제공하는 동기들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도 없는 데 반하여, 역대기 저자는 하느님의 상선벌악의 논리에 바탕을 둔 정의의 개념에 따라 모든 사건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제시하려고 애쓴다. 므나쎄는 온갖 죄악을 저질렀지만 긴 세월 동안 나라를 통치하는 복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우상들을 치우고 성전을 정화시켰기 때문이다(2역대 33). 반면에 요시야는 그토록 주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충실하였음에도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는데, 이는 그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이집트 군사들이 지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무모하게 전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2역대 35).

 

묵시 문학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리기 위하여 지상의 현실에서 표상을 끌어 내어 미래에 투사한다. 이와 반대로 역대기 저자의 작품은 현실 안에서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기 위하여 과거를 이상화한다. 저자는 유다인들에게 다윗 시대의 신정 왕국을 끊임없이 상기시킴으로써 전례는 어떻게 거행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율법에는 어떤 자세로 순종해야 하는지, 상선벌악에 바탕을 둔 그분의 정의는 어떻게 바라야 하는지 알려 준다.

 

이처럼 역대기 저자의 책들은 과거 지향의 신학 전망을 표명하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그 책들은 곧바로 메시아 희망의 기초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역대기 저자의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저자는 하느님과 그분의 율법과 그분에 대한 예배에 어떻게 충실해야 하는지, 그 지침을 마련하는 데에 온갖 노력을 기울인 듯하다.

 

 

느헤미야서(느혜미야기)와 에즈라서(에즈라기) 입문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본디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기원후 15세기까지 이 둘은 히브리 말 성서에서 한 작품으로 나타나다가, 라틴 말 번역본인 대중라틴말성서의 영향으로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로 나뉜다.

유다인들은 기원전 587년 국가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이어진 유배라는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된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유다인들이 기원전 538년에 바빌론 포로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뒤, 한 세기가 넘는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서술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두 주인공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이 구약성서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만일 이 두 책이 없었다면, 유배 이후 유다 종교와 사회의 복구를 알려 주는 사건들을 알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1. 두 책의 내용

 

이 두 책의 서로 다른 부분들은 별 어려움 없이 구분해 낼 수 있다. 에즈라서는 먼저(1-6)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샤 임금 고레스의 칙령으로(기원전 538) 예루살렘에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유배자들의 첫 귀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야기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점령지 관리들과 유다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만들어 내는 갖가지 큰 난관을 이겨 내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전에, 먼저 폐허가 된 옛 자리에 제단을 다시 쌓는다. 우선 그 동안 중단되었던 경신례만이라도 거행하기 위해서이다. 성전 자체는 20여 년이 지난 뒤 다리우스 임금 치세, 하깨와 즈가리야 시대에 와서야 완전히 재건된다(5,1-2).

 

7 - 10장에 따르면, 첫 귀향이 있고 나서 수십년이 지난 뒤, 아르닥사싸 임금에게서 공적 임무를 부여받은 사제이며 율법 학자인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 그는 특히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의 혼인으로 유다교 전통에 어긋나는 여러 상황이 벌어졌음을 보고 몹시 슬퍼한다. 그래서 그는 백성의 지지를 받으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고, 이방인들을 유다 지방 경계 밖으로 내보낸다. 물론 당시 유다는 조그마한 지방으로 전락해 있었기 때문에, 추방된 이들은 멀리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전반부(1-7), 아르닥사싸 임금의 고위 관리인 느헤미야가 고국에서 온 동포들에게서 고향 소식을 듣고 슬픔에 빠진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애향심에 불타는 느헤미야는 유다 지방의 수도 예루살렘을 시찰하고, 그 도시를 성벽부터 재건하는 허락과 권한을 임금에게서 부여받는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벽은 느헤미야의 지휘 아래 오십이일 만에 복구된다.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성벽 복구를 반대하고 나서는 유다의 적들과 싸우면서, 동시에 온 주민의 용기를 북돋우고 규율 준수를 촉구한 느헤미야의 열성 덕분이었다.

 

8 - 9장에서는 에즈라가 다시 전면에 나서서, 바빌론에서 가지고 온 모세의 율법에 상응하는 경신례와 축일 거행을 복원시킨다.

 

그리하여 느헤미야서는 백성의 서약과 여러 가지 명단, 그리고 성벽 봉헌과 관련된 몇 개의 단락에 이어, 십여 년 뒤에 예루살렘에 두 번째로 머무르게 된 느헤미야가 수행한 일련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10-13).

 

이렇게 해서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에즈라서

 

1바빌론 유배의 끝

2돌아온 유배자들의 명단

3경신례의 복구와 성전 건립의 시작

4,1-5유다의 적들에 의한 성전 건축의 방해

4,6-24성전 건축 방해자들과 두 임금 사이의 서신 교환

5성전 건축의 재개

6,1-12고레스 칙령의 발견과 성전 건축 재개에 관한 다리우스의 명령

6,13-22성전 준공과 봉헌 및 과월절의 거행

7,1-10율법 학자 에즈라

7,11-28아르닥사싸 임금의 칙령과 에즈라의 찬양 기도

8,1-14에즈라와 함께 돌아온 이들의 명단

8,15-23성전 일꾼들의 모집과 에즈라의 청원 기도

8,24-30성전을 위한 예물

8,31-36에즈라의 예루살렘 도착

9,1-15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의 혼인과 에즈라의 참회 기도

10,1-17백성의 맹세와 이방 아내들의 축출

10,18-44이방 여자와 혼인한 자들의 명단

 

느헤미야서

 

1고향의 슬픈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기도

2느헤미야의 예루살렘 도착과 성벽 시찰 및 성벽 복구 결정

3,1-32작업 책임자들의 명단

3,33 - 4,17방해를 무릅쓴 작업의 계속

5사회 불의에 대한 느헤미야의 개입과 사욕 없는 느헤미야

6느헤미야에 대한 음모와 성벽 공사의 완료

7,1-72ㄱ:예루살렘의 경비 조직과 귀환자들의 명단 및 수

7,72- 8,18율법의 봉독과 초막절의 거행

9참회 예절

10맹약 체결 및 그 규정

11예루살렘과 지방 주민의 분할

12,1-26사제들과 레위인들의 여러 가지 명단

12,27-43예루살렘 성벽의 봉헌

12,44-47성직자들에 대한 백성의 후원

13이방인들의 분리와 느헤미야의 여러 개혁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이렇게 비교적 간단한 구조를 지녔지만, 그 문학적 형성 역사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구약성서의 그리스 말 옛 번역본에는, 이 두 책이 하나로 묶여 번역될 뿐만 아니라 히브리 말 성서의 에즈라서와는 상당히 다른 또 하나의 에즈라서가 들어 있다. 이 그리스 말 에즈라서는 가끔 제1에즈라서라 불리고, 히브리 말의 에즈라-느헤미야서가 번역된 책은 제2에즈라서라 불린다. 그리스 말 에즈라서에는 역대기와 에즈라서의 몇몇 구절, 예컨대 다리우스의 세 시동의 이야기와 같은 외경적인 설화들도 들어 있다. 더 나아가서 라틴 말 전통에는 네 개의 에즈라서가 알려져 있다.

 

1서는 히브리 말 에즈라서, 2서는 히브리 말 느헤미야서, 3서는 그리스 말 에즈라서에 해당되는 책이다(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그리스 말 에즈라서가 때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제1에즈라서로, 때로는 제3에즈라서로 표기되는데, 우리는 후자를 택하기로 한다). 끝으로 제4서는 에즈라를 저자로 내세우면서도 구약성서의 에즈라-느헤미야서와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후대의 묵시록이다. 대부분의 현대 성서 번역본에는 히브리 말로 된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만 포함되고, 경전에 든 적이 없는 그리스 말 에즈라서와 에즈라의 묵시록은 제외된다.

 

2. 문학적 문제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역대기 상하권, 그리고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역사의 종합은 한 저자에 의해서 편집되고 구성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견해를 밑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역대기 하권의 마지막 두 절(36,22-23)과 에즈라서의 첫 세 절(1,1-3)이 같다는 사실로서, 이는 한 이야기가 계속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책에서는 서로 다른 몇 가지 구성 방법을 볼 수 있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저자는 오래된 여러 문헌을 자료로 이용한다. 그는 이 자료들을 직접 인용하면서 서로 관련지어 편성한다. 그럼으로써 서로 다른 요소들이 하나로 연결되고 합쳐져 한 작품이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옛 문헌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히브리 말로 된 공식 문서와(에즈 2; 느헤 7; 10,3-30; 11,3-36; 12,1-26과 같은 명단과 통계 등) 아람 말로 된 공식 문서(에즈 4,9-6,18; 7,12-26과 같은 행정 서신과 공식 명령서).

 

(2) 에즈라의 회고록(에즈 7-10; 느헤 8-9). 여기에는 에즈 7,27-9,15와 같이 1인칭으로 쓰인 부분과 에즈 7,1-10; 10; 느헤 8 - 9장처럼 3인칭으로 쓰인 부분이 있다.

 

(3) 느헤미야의 회고록(느헤 1-7; 12,27-13,31).

에즈라서의 대부분은 히브리 말로 쓰여 있지만, 어떤 부분은 아람 말로 쓰인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에즈 4,8-6,187,12-26). 다니엘서에서도 볼 수 있는(2,4-7,28) 이러한 언어의 이중성도 이 책에서 여러 가지 문헌이 이용되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문헌들에서 시작되는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의 편집 과정은 해결이 결코 쉽지 않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의 명단이 에즈라서 2장에도 나오고 느헤미야서 7장에도 나온다. 똑같은 명단이 매우 다른 두 역사적 상황에 쓰인 것이다. 첫째 경우(에즈 2)에는 이 명단이 기원전 538년 고레스의 칙령에 이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오만 명 이상 되는 유배자들의 첫 무리에 적용된다. 둘째 경우(느헤 7)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다음, 곧 기원전 445년경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된 뒤에 느헤미야 시대에 실행된 인구 조사에 해당된다. 이렇게 두 곳에서 인용된 이 명단은 원래 귀환 직후에도, 느헤미야 시대에도 작성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중간의 어느 시기, 곧 명단 첫머리에 나오는 즈루빠벨과 예수아 시대의 상황을 드러내는 명단일 수 있다. 그래서 귀향이 이루어지고 이십여 년이 지난 뒤, 적어도 두 번째 성전 건축(기원전 520-515) 이후에 수행된 귀환자들의 인구 조사를 생각할 수 있겠다.

 

이 두 책의 편집 연도는 역대기-에즈라서-느헤미야서 작품 전체를 함께 헤아려야 하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 큰 작품의 내용, 그 안에 표현된 종교적 생각, 저자의 출신 환경 등을 고려할 때, 이 방대한 역사 작품은 기원전 4세기 말엽에서 3세기 중엽 사이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두 책의 최종 편집에만 해당될 뿐, 거기에 사용된 문헌 사료들은 분명히 그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 역사적 문제

 

에즈라-느헤미야서를 분석해 보면 역사적 사건들 자체와 관련되는 또 다른 문제들이 제기된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중요한데, 이 두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제시되지만, 어떤 것도 확실한 해결책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첫째 문제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의 중단에 관한 것이다(에즈 4). 성서 본문에 따르면, 유다인들에게 반대하는 그 지방 이방민들이 불평함으로써 페르샤 임금 아르닥사싸가(기원전 465-424) 명령을 내려 작업이 중단된다(에즈 4,6-24). 그러나 이 사건은 연대적으로 가능하지가 않다. 실제로 성전 재건축이 속개된 것은 기원전 520년 다리우스 제2년이고(에즈 4,24; 하깨 1,15), 완료된 것은 같은 임금 제6, 곧 기원전 515년경이다(에즈 6,15). 이로써 작업의 중단과 속개-완료의 시대순이 거꾸로 된다. 에즈 4,6-23이 말하는 아르닥사싸 임금 시대의 일들, 곧 성전 재건축의 중단은 성전의 완공에서 적어도 50 내지 60년 뒤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에즈 4,6-23에 들어 있는 문서들을 성전 건축이 아닌 다른 작업의 중단에 관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곧 아르닥사싸 시대에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 시도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같은 아르닥사싸 치하에서 느헤미야가 이 작업을 재개하고 끝내려고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잘 설명된다(느헤 1-4; 6). 에즈 4,6-23에 나오는 행정 서신의 내용 자체도 분명히 성전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읍과 성벽의 복구에 대해서 말한다(12, 13, 16). 그렇다면 이 문서가 어떻게 해서 훨씬 이전 시대의 성전과 관련된 이야기 중간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모른다. 같은 페르샤 임금의 명령으로 중단된 작업이기 때문에, 에즈라-느헤미야서가 편집될 때에 다리우스 시대의 성전 건축 작업과 아르닥사싸 시대의 성벽 건축 작업을 혼동하였을 수도 있다.

 

둘째 문제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각각 언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느냐는 문제이다. 현재의 본문이 말하는 연대순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에즈라가 아르닥사싸 제7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에즈 7,7) 개혁 활동을 한다(에즈 8-10). 그 뒤 아르닥사싸 제20년에 느헤미야가 와서(느헤 2,1) 예루살렘 성벽 건축 활동을 수행한다(느헤 1-7). 그런데 느헤 8장에 따르면, 그 이전 느헤 1-7장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던 에즈라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 백성 앞에서 율법을 장엄하게 봉독한다(느헤 8-9). 끝으로 느헤미야는 바빌론으로 돌아갔다가, 아르닥사싸 제32년에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와서 다시 활동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느헤 13,6). 그래서 이 두 사람이 같은 기간에 예루살렘에 살면서 서로 관련 없이, 서로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일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둘 다 같은 아르닥사싸 임금에게서 공적인 사명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에즈 7,11; 느헤 2,7-8).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에즈라가 아주 잠깐 동안만 그 곳에 머무르고서는 곧바로 페르샤 임금에게 돌아갔다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두 사람 사이에 본격적인 임무 교대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해야 한다. 느헤 8 - 9장에 따라 에즈라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고, 느헤미야는 페르샤 궁궐로 돌아갔다가, 십여 년이 지난 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게 된다는 것이다(느헤 13,6).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 밖에 느헤미야가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머무르는 동안에 에즈라가 귀향하였다고 설명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한다. 이렇게 하면 두 인물이 동시에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느헤 8,9도 설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에즈 7,8에 나오는 연대가 수정되어야 한다. 곧 아르닥사싸 제7년이 아니라, 27년 또는 제37(곧 기원전 438년 또는 428)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설 역시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끝으로 느헤미야의 활동 전체를 에즈라의 활동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명이 제시되는데, 이것이 가장 그럴듯한 가설일 수 있다. 느헤 1 - 7장과 10 - 13장이 바로 느헤미야의 재건축과 개혁 활동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 후 상당 기간이 지난 뒤, 아르닥사싸 일세가 아니라 이세 제7, 곧 기원전 398-397년경에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에즈 7,7) 개혁을 수행하고(에즈 7-10), 율법의 장엄 봉독에 이어 경신례를 복구하였다는 것이다(느헤 8-9). 그러나 이 가설 역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에즈라가 율법을 낭독할 때에 느헤미야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느헤 8,9).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말하고자 했던 마지막 편집자에게서 나왔을 수 있다. 이 편집자는 두 인물의 체류 기간과 개혁 연대를 계산에 넣지 않은 채, 무엇보다도 평신도인 느헤미야보다 사제-율법 학자인 에즈라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신학적 동기가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연대들을 흐트러트려 놓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의 가설일 뿐, 완전히 만족할 만한 해결책은 아니다.

 

4. 종교적 전망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자주 읽히는 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많은 성서 봉독자들이 이 두 책을 잘 알지 못할뿐더러, 성서 역사와 관련해서는 흥미롭지만 오늘날에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문서 몇 가지만을 그 안에서 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정확하지 못한 편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이 두 책을 종교적 내용이 훨씬 더 풍부하게 담겨 있는 시편이나 욥기 또는 예언서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토록 풍부하고 다양한 성서 전체에서 이 두 책이 지니는 종교적 중요성과 항구한 가치를 찾지 않는다면, 이 두 책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관현악단에서 모든 악기가 같은 자리에 있거나 같은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교향악이 완전하게 울려 퍼지기 위해서는, 중요하든 덜 중요하든 제 소리를 내는 갖가지 악기가 다 필요한 것이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엄격한 의미의 신학적 내용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서술하는 매우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서 그 주인공들을 이끄는 주된 신학적 사상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 두 책에서 분명하게 돋보이는 관심의 중심이 셋 있다. 곧 성전과 예루살렘 성읍,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이다.

 

성전의 재건축은 유배에서 돌아온 백성의 첫 과제이다. 그뿐만 아니라 에즈 1장과 2장에 따르면, 고레스 임금이 칙령에서 명령한 이 성소의 재건축이 바로 귀향의 목적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집은 당신 백성 한가운데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의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징표이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을 이어 주는 경신례가 거행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제직(에즈 2,26-39), 레위인과 그 밖에 성소에 소속된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에즈 2,40-63), 경신례 기구들과 제물들(에즈 1,9-11; 2,68-69), 특히 새 성전이 건축되기 이전에 우선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복원된 제단과(에즈 3,1-7) 접촉하는 모든 것, 한마디로 선택된 백성의 근본인 종교의 중심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하느님의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저마다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성전의 재건축이 늦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이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적들의 적대감 때문이다(에즈 4). 하깨 예언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1,2-5), 그 어느 곳에서도 이 과업에 대해서 유다인들이 태만하거나 무관심하였다거나, 또는 의기 소침하였다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성전 재건에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자기들의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에즈 6장이 말하듯, 성전이 완공되어 봉헌식을 거행할 때, 그들은 그것이 인간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하면서(22) 더할 나위 없는 기쁨에 젖는다.

 

성전의 현존은 예루살렘 성읍 자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현재와 미래의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바빌론 궁궐의 고위 관리로 편안한 삶을 누리던 느헤미야는 폐허가 된 이 유다인의 도성으로 가서 그것을 복구하고 그 중요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윤허를 아르닥사싸 임금에게서 받아 낸다(느헤 1-2).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이러한 노력은, 온 백성의 협력 아래, 부서진 성벽을 다시 세우고자 힘쓴 그의 애국심과 종교적 열성을 설명해 준다(느헤 2-6). 예루살렘 성읍의 복구는 하느님께서 느헤미야에게 부여하신 사명이며, 여러 가지 어려움과 분쟁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 백성을 위해 싸워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완수해 나가야 하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사명이었다. 많은 이가 버리고 떠나 버린 이 성읍의 인구를 다시 늘리려고(느헤 11), 또는 안식일을 존중하도록 하려고 그가 취한 조치들은(느헤 13,15-22),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읍의 위치를 되찾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파괴와 백성의 유배로 거의 중단되다시피 한 하느님 백성의 유구한 역사를 속개하는 것, 곧 인간의 잘못으로 훼손된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역사를 회복해서 다시 예전처럼 속개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과 예루살렘 성읍은 그 안에 사는 이들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는 이들에게만 실제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유배로 말미암아 그 뿌리부터 뒤흔들린 이 공동체가 복구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 공동체의 참 바탕, 곧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이룬 업적의 중요성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유다 백성은 현실적으로 더 이상 자주 국가를 복원할 가능성도 희망도 없다. 이 백성은 이제 종교 공동체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집단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종교 전통을 현 상황의 요구에 결부시키는 복구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구 작업은 여러 영역에서 드러나야 하는데, 그 첫째가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관계를 가시화하고 촉진시키는 경신례이다. 에즈라는 초막절을 지내기 전에, 모세의 율법을 엄숙하게 봉독하고 그 내용을 백성에게 설명해 준다(느헤 8). 지금까지 경신례는 주로 축일과 제사의 거행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제 유배 이후라는 변화된 여건에 따라 율법이 경신례 안으로 들어와서 그 의미를 확대할 뿐만 아니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움직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에즈라가 시작한 율법 봉독과 해설은 후대에 가서,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예컨대 루가 4,16-22) 유다교 회당에서 거행되는 전례의 주요 요소들이 된다. 율법은 이렇게 유다교 생활의 근본 바탕이 되는 것이다.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백성이 다시 축일과 안식일을 준수하고, 예물 및 경신례와 사제직을 위한 십일조와 관련된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려고(느헤 10; 12; 13,1-22), 그리고 이방 여자들과의 혼인으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려고(에즈 10; 느헤 13,23-29) 때로는 가혹한 조치들을 취한다. 이 역시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려는 열성에서 나온 것이다. 유배 이후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다에서는 경제력의 차이와 불평등 관계 때문에,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 사이에 구분이 생긴다. 여기에서부터 생겨난 백성의 분열과 불화를 느헤미야는 자기의 언행과 표양으로 해결하는데, 이 역시 율법에 대한 그의 충실성 덕분이었다(느헤 5).

 

이렇게 율법이 중시되는 시대 상황에서도,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추구하는 종교에서 우리는 흔히 종교의 전망을 축소시키고 그 본질을 왜곡시키는 옹색한 율법주의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들에게 율법은 항상,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느님, 진실된 경신례와 자발적 기도로써 찾을 수 있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율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글로 고정된 율법에만 매달리지 않고, 조언과 도움과 보호를 청하기 위하여, 또는 기쁜 감사의 정을 드러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다(에즈 3,11; 6,21-22; 7,27-28; 느헤 1,4-11; 4,4-5; 5,19 ). 특히 이들이 기도의 사람들이었음은 그들이 직접 하거나 주관한 긴 기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에즈 9; 느헤 9). 이 두 기도 안에는 이후 유다교의 경신례를 이루는 주요 전례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참회, 죄의 고백, 하느님께 드리는 용서의 간청, 백성의 지난 역사와 그 속에서 드러난 불충의 회상,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뢰 등). 이 기도문들은 어떻게 유배 이전 예언자들의 설교가 결국 열매를 맺게 되었으며, 백성을 겸손된 참회와 용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었는지 잘 보여 준다.

 

이 밖에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의 일부로서, 부차적이기는 하지만 고려할 만한 가치를 지니는 한 가지 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종교 생활을 너무 약하고 예사롭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반대 논쟁이다. 경계를 분명히 긋고 그것을 엄격히 지키지 않으면, 결국 이민족들의 여러 종교와 타협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종교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방 여자들과 한 혼인에 대해서 느헤미야가 혹독하기까지 한 조처들을 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한 혼인이 바로 큰 죄악의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죄를 지은 것도 바로 그런 여자들 때문이 아니오? 수많은 민족 가운데에 그만한 임금이 없었소. 그는 자기의 하느님께 사랑을 받았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셨소. 그러한 그를 이방 여자들이 죄짓게 한 것이오”(느헤 13,26). 솔로몬이 이럴 정도이면, 느헤미야 당시의 유다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관계를 가차없이 근절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느헤미야의 생각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에 협조하겠다고 나서면서도 사실은 유다인들에게 적대적이던 그 지방 이민족들과는 어떠한 형태로도 손을 잡지 않겠다는 그의 단호한 자세에서도 잘 드러난다(느헤 2,19-20; 4; 6 ).

 

여기에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일어나는 대립의 징조를 보게 된다. 이른바 사마리아인들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기원전 721) 이후 유배에서 제외된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 곳으로 이주한 이민족들이 섞여서 형성된 백성이다. 자연히 이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이방 종교들이 뒤섞인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혼혈로서 혼합 종교 생활을 하는 사마리아인들과 종교 및 혈통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유다인들 사이에는 대립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 말엽에 이 두 백성은 완전히 분열하게 된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서로 매우 다르면서도, 무엇보다도 민족과 종교 생활의 복구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같은 원의에 가득 찬 두 인물을 드러내 보여 준다. 사제이며 율법 학자인 에즈라는 경신례의 부흥에 영감과 힘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고, 이방 민족들과 타협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이스라엘의 종교와 혈통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엄격주의자이다. 그리고 평신도 느헤미야는 정열적이며 꺾이지 않는 용기의 소유자로서, 사심 없는 인간의 본보기이며 기도와 믿음의 사람이다.

 

그러나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어떠한 가치와 중요성을 지니든 간에, 인물이 업적에 앞서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한 사람들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들이 수행한 다른 일들은 어떠하였고,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뒤에는 어떻게 되었으며, 또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인물이 아니라 활동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다. 그들의 임무 수행 이전과 이후는 그냥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이 또한 당시 유다교 종교 생활의 한 특색이기도 하다.

 

토비트기(토빗기) 입문

 

 

토비트서는 유다 문학의 보물과 같은 책이다. 이 책은 주변 이교도 세계의 지혜 문학 전통을 본받은 대중적 설화이자, 당시에 이미 꼴을 갖춘 기존 성서의 내용을 풍부히 담은 교훈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토비트서는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함락, 성전의 파괴,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시작하여 50년 동안 지속된 유배 시대에 펼쳐진 유다교의 인간적, 종교적 생명력을 잘 보여 준다.

 

1. 토비트서의 줄거리

 

친족 관계에 있는 두 유다인 집안이 유배를 가서, 한 집안은 현재의 이라크에 있는 니느웨에서 살고, 다른 집안은 현재의 이란에 있는 엑바타나에서 산다. 이 두 집안은 유배의 땅에서도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모범적인 가정이었다. 그런데 둘 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그만 불행에 빠지고 만다. 첫째 집안의 가장인 토비트는 임금의 호의와 귀염(1,13) 받으며 높은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동포들에게 자선과 선행을 베풀다가, 마침내는 사형감으로 수배를 받아 벼슬은 물론이고 재산도 모조리 압수당한 채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얼굴도 모르는 동포를 장사지내 주고 난 직후에는 눈까지 멀게 된다. 다른 집안의 외동딸 사라는 악령에게 붙들려, 혼인만 했다 하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악령이 신랑을 죽여 버린다. 그러한 일이 벌써 일곱 번이나 일어났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로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를 뜻하는 라파엘천사를 통하여 토비트와 사라를 고쳐 주기로 결정하신다. 토비트는 아직 하느님의 결정을 모른 채 아들 토비아의 장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를 메대 땅으로 보내어 자기가 전에 맡겨 놓은 돈을 찾아오게 하리라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먼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일종의 노자로서, 조상들에게서 내려오는 지혜의 가르침들을 일러 준다. 그리고 사람 모습을 한 라파엘 천사가 여행 안내자로 나선다. 라파엘은 모험 가득한 이 여행길에 토비아를 동반하면서, 마침내는 이 총각이 자기의 친족 사라와 혼인하여 사라를 구하도록 이끈다.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토비아는 다시 라파엘의 인도에 따라 늙은 아버지의 병도 고치게 된다. 그리하여 두 집안은 행복을 되찾는다. 라파엘은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나서 사라진다. 그리고 이야기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미래의 구원에 관한 전망 속에서 끝을 맺는다.

 

2. 대중적 설화

 

이 이야기에는 시간, 장소, 등장 인물, 그리고 기원전 734년부터 612년까지 아시리아와 이스라엘을 아우르는 큰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된 세부 사항들이 숱하게 나온다(1; 14). 그래서 언뜻 보면 이 설화가 엄밀한 의미의 역사 이야기라는 인상을 준다. 토비트와 그의 집안은 납달리 지파와 함께 유배를 갔다고 한다. 2열왕 15,29에 따르면, 이는 이스라엘 왕국의 임금 베가가 일으킨 반란을 징벌하려고 아시리아 임금이 이 북왕국의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겉으로는 이렇게 역사적으로 정확히 서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 나오는 많은 사료를 비판적으로 조사해 보면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자기가 말하는 임금들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1,2 첫째 각주; 1,15 각주 참조), 또 자기가 서술하는 지방에 가 보지도 않았음이 분명하다(5,6 각주 참조). 그가 자기 시대에서 볼 때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조상들의 먼 옛날, 곧 기원전 8세기와 7세기를 이야기의 시대 배경으로 삼은 것은, 자기의 설화에 사실성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사실 토비트서의 저자는 그림을 그리는 듯한 서술과 생생한 세부 묘사를 좋아하는 이야기꾼이다. 토비아가 먼길을 떠나는 것을 눈물로 바라보며 따지는 아내를 타이르는 토비트의 모습이라든지(5,18-22), 개가 젊은 주인을 따라갔다가 함께 돌아오는 장면(6,2; 11,4), 또 하녀가 한밤중에 손에 등불을 들고 신랑 신부의 방에 살짝 들어가서 그들을 살피는 장면이라든지(8,12-14), 귀향길이 늦어지는 아들을 걱정하는 늙은 부모의 모습(10,1-7) 등은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일상의 체험일 수 있다. 그리고 서술되는 사실들은 서로 충돌하는 일 없이 매끄럽게 연결될뿐더러,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결말로 순조로이 모아진다. 이러한 모습들은 토비트서 전체를 조금은 콩트처럼 보이게 한다. 예컨대 토비아가 동행자를 찾기 시작하자마자 라파엘이 그 앞에 나타나고(5,4), 또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큰 물고기를 잡음으로써 여행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약이 미리 마련된다(6,2-6). 이로써 토비트서의 저자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이였고, 그의 청중은 전혀 바쁠 것 없이 그의 이야기를 느긋이 들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3. 토비트서의 출처: 지혜 문학 전통

 

토비트서의 저자는 자기의 이야기가 현인 아히칼의 이야기또는 아히칼의 지혜라고 불리는 문학 작품에 근거를 둔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 작품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의 유명한 이솝이 우화를 지을 때에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그리스 사람들까지도 이 작품을 알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아히칼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유다인들이 모여 살던 이집트 남부 엘레판틴에서 발견된 기원전 5세기의 것이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과 그 뒤를 이은 에살하똔의 대신이었던 아히칼은, 전설적 요소가 덧붙여져서 미화되기는 하였지만 본디 역사적 인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22. 그리고 2,1.10 참조). 아히칼은 자식이 없어서, 자기의 궁정 일을 이어받게 하려고 조카 나답을 양아들로 삼는다. 그는 금언의 형태로 된 일련의 충고로써 나답을 현인이 되도록 교육한다. 그러나 나답은 양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나서는(11,19 참조) 자기가 받은 지혜를 멸시하고, 게다가 중상까지 하여 자기의 은인이며 양아버지인 아히칼을 형벌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까지 내몬다. 그러나 어떤 형리가 지혜를 자기 형제처럼 여기는 아히칼을 숨겨 준다. 마침내 복권된 아히칼은 조카에게 비유로 된 꾸지람을 퍼붓고 나서 그를 감옥에 던지고, 나답은 그 안에서 최후를 맞이한다(14,10).

 

토비트서에서는 이 유명한 아히칼이 바로 토비트의 조카로 나온다(1,22). 이렇게 하여 이 유명한 아히칼이 당시 근동인들 사이에서 누리던 특별한 지위와 권리를 삼촌인 토비트와 그의 백성인 유다인들에게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비트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아히칼의 지혜의 구조를 본뜬 것으로 보인다. 아히칼처럼 토비트도 아시리아 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노여움을 산다(1,13-20). 그리고 토비트도 아히칼이 한 것처럼 아들에게 두 번에 걸쳐 일련의 금언을 들려 주는데(4,3-19; 14,8-11), 그 가운데에서 어떤 금언들은 바로 아히칼의 것들을 빌려 온 것으로 여겨진다(4,10.15.17.19). 그러나 나답은 배신을 하는 반면, 젊은 토비아는 지혜 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답게 행동한다. 이는 늙은 토비트가 가르친 지혜가 아히칼 현인의 지혜보다 뛰어남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로써 이 책의 문학 양식이 분명해진다. 곧 대중적 설화이면서 동시에 교훈적이며 지혜 문학적인 의도를 지닌 이야기이다.

 

4. 유배로 흩어져 사는 유다인들을 위한 가르침

 

저자가 유배자들의 전형인 토비트와 토비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러 나라에 퍼져 사는 동포들에게 주려는 것은 종교적 가르침이다.

 

(1) 하느님의 섭리와 천사

 

토비트서가 다루려는 문제는 하느님께서 과연 곤경을 겪고 있는 당신의 성실한 백성을 배려하시는가 아닌가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하신다는 것은 분명하다(3,17). 이 책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배려가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는 그 방식이다. 곧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통하여, 미리 확정된 계획 또는 끝에 가서야 밝혀지는 비밀을 성사시켜 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토비트와 사라의 기도를 들어 주심(3,16`-17)과 라파엘이 비밀을 털어 놓음(12,11-15)이 이 이야기의 두 기둥 구실을 한다. 하느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이는 천사들이다. 토비트서는 유배 시대에 특히 페르시아의 영향 아래 이 신앙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보여 준다. 천사들은 이제 수가 많아지고 저마다 이름을 가졌을뿐더러 특수한 직무를 부여받는다. 하느님의 행동이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일 없이, 천사가 이처럼 인간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은 구약성서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2) 행동 규범

 

토비트가 아들에게 해 준 충고(4,3-21; 14,8`-11)는 이 책을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이다. 아히칼의 지혜에서 빌려 온 계율들은 이보다 더 뛰어난 지혜 곧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계명들과 섞인다. 이것들의 내용이 이 책의 핵심을 밝혀 준다. 유다인이 이국 땅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의인으로 계속 남아 있도록 해 주는 원칙들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다. 토비트의 영적 유언에 들어 있는 계명들은(4,3 첫째 각주; 14,3 각주 참조) 대부분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행동에서 구체적인 예증을 볼 수 있다.

 

(3) 가정과 혼인

 

가정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회 조직의 근간으로서 한 민족의 정신적 유산이 전승되는 곳이다(1,8; 4,19; 14,3.8-9). 그 때문에 토비트서에서는 가족들의 단결, 특히 부모 공경을 잘하게 해 주는 모든 덕이 강조된다(1,8; 3,10.15; 4,3-4; 6,15; 14,12-13). 혼인은 한 가정의 삶에서 결정적인 일이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는 혼인에 한 인간의 미래가 달려 있다. 특히 유배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다인들에게는, 현지인들과 혼인함으로써 종교가 다른 그들에게 동화될 위험이 크다. 그래서 토비트가 아들에게 준 충고의 핵심에(4,12-13), 그리고 이 책의 한가운데에(68) 왜 하필이면 혼인 또는 혼인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토비트서는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혼인 이야기인 것이다.

 

(4) 선행

 

가정에서 대대로 전승되는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에 대한 충실성이다. 그 가운데에서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이 기본이다(1,12; 2,2; 4,5; 14,8-9).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 행동으로, 또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율법의 세심하고 면밀한 준수로 표현되어야 한다(1,8 넷째 각주). 여기에서 이미 장차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서 보게 될 열성을 예감하게 된다(1,8 넷째 각주; 3,15 둘째 각주). 성전과 그 전례에서 멀리 떨어져 산다는 사실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개인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의무들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토비트의 이웃은 아직도 그의 친척과 동족으로 한정되어 있다(1,3.16.17; 2,2 ). 여러 형태의 도움(1,17; 2,2.10; 4,16), 올바른 보상(4,14; 5,3.7.10.15; 12,1), 장례(1,17-18; 2,3-8) , 참다운 가정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을 유다인 동포들도 빠짐없이 받아야 한다. 그 가운데에서 자선과 기도가 다른 모든 의무보다 더 중요하다.

 

공동체를 결속시켜 주는 방도인 자선은(1,16; 4,7-8.16; 14,8-9) 또한 하느님의 은혜를 받게 해 주는 보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선은 그것을 행하는 이에게 보물이 되고 속죄가 되며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된다(4,9`-11; 14,8-11).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에 모든 것을 거는 의인은 당연히 기도에 의지한다. 이러한 기도는 일련의 형식적 의식이 아니라 언제라도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로 여겨진다(4,19). 실망(3,1-`6.11-15), 불안(8,5-8), 그리고 기쁨(8,15-17; 11,14-15) 등 갖가지 상황에서 올려지는 기도는 하느님을 찬양하고(3,11 둘째 각주), 또 그분께 감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분께서 의로우시고 그분의 모든 행동이 올바르며, 그분의 모든 길이 자비와 진리이기 때문이다(3,2).

 

(5) 성조들의 삶의 회상

 

토비트서의 장면들은 성조 이야기의 장면들과 흡사하다. 토비아도 이사악이나 야곱처럼 여행 중에 배우자를 얻는다. 또 야곱이 다른 자식들의 말만 듣고 요셉이 없어졌다고 믿은 것처럼, 토비아의 부모도 한동안 그가 어디에 있으며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른 이유에서이기는 하지만, 토비트서의 사라도 성조들의 부인들처럼 자식 없이 살 운명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천사의 방문을 받았듯이, 토비트에게도 사람 모습을 한 천사가 찾아간다.

 

토비트의 이야기와 성조들의 이야기 사이의 유사성은 이러한 상황들에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에서 쓰이는 용어들까지 비슷하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세부 사항도 거의 말 그대로 창세기에서 빌려 온다. 곧 만남(7,3-4와 창세 29,4-6), 싹터 오르는 사랑(6,19와 창세 24,67), 그리고 혼인(7,11과 창세 24,33.50-51) 등이다.

 

성조들의 유랑은 유배자들의 방랑으로 이어진다(4,12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은 채 은밀히 이루어지는 당신의 섭리로 조상들을 보살피셨듯이,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까지 보살펴 주신다. 이러한 섭리는 만남을 주선하고, 구원과 혼인을 통해서 하느님의 약속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며, 마침내는 아브라함의 땅으로 돌아가는 날을 맞게 해 준다(14,7).

 

(6) 예언자들의 빛

 

토비트는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뿐만 아니라 유배를 당한 동포들의 운명도 예언자들의 빛으로 해석한다. 나단이 다윗에게 전한 예언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토비트서 안에는 예루살렘과 그 임금에 관한 열렬한 회상도 자리잡고 있다(1,4. 그리고 5,14 참조). 토비트가 동포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겪는 불행은, 아모스 예언자가 죄 많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예고한 징벌을 채우는 것이다(2,6). 선택된 백성의 미래는 아직도 닫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토비트가 눈이 멀게 되었다는 사실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가문을 이을 토비아를 통하여 육적인 눈만이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 열어 주신다. 그리고 눈이 멀었던 토비트 자신이 예언자가 되어, 민족 전체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된 구원을 예고한다(13). 니느웨가 황폐하게 되리라는 나훔의 예언이 성취되면, 예루살렘 성전은 시간이 다 찰 때까지 임시로 복구될 것이다. 토비트는 더 나아가서 이사 60``62장과 흡사한 어조로, 때가 되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은 눈부시게 화려한 모습으로 재건되리라는 밝은 전망을 펼쳐 보인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민족들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13,10-18; 14,3-7).

 

이러한 성조 이야기와 예언의 배경에서, 모세와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에 대한 나날의 충실성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그 의미는 선조들이 들어간 바로 그 길로 아브라함의 땅에 돌아감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5. 본문과 원어

 

토비트서의 본문은 번역본으로만, 그것도 서로 매우 다른 세 가지 형태로 전해 내려온다.

 

1. 첫째는 시나이 사본이라고 불리는 기원후 4세기의 그리스 말 수사본에 들어 있는 본문이다. 이 본문은 다시 예로니모 성인이 옮긴 대중라틴말성서 이전의 고대 라틴말역에 상당히 충실하게 번역되어 있다. 이를 긴 본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본문은 셈족(곧 히브리 말, 또는 아람 말)의 어조를 띠면서 때로 조금은 장황하기도 하지만 문장이 화려하면서 일관성이 있다. 쿰란에서 하나는 히브리 말, 넷은 아람 말로 쓰인 토비트서 단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대개의 경우 이 긴 본문을 지지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본문을 지금은 잃어버린 원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간주하는 추세이다. 우리도 이 본문을 번역하기로 한다.

 

2. 둘째는 위의 것보다 간략한 본문으로 가장 많은 수의 그리스 말 수사본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를 짧은 본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는 부차적인 세부 사항들을 제거하고 더욱 분명한 형태가 되게 간추린 내용을 더 정확한 그리스 말로 제시하기 위하여 이미 있던 본문을 개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이 본문을 채택하고 있으며, 현대의 번역본들에서도 더러 이 본문을 대본으로 삼는다. 긴 본문에는 4장과 13장에 명백하게 누락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이 짧은 본문의 도움을 받아 채운다.

 

3. 학적으로는 덜 중요하지만 토비트서의 셋째 형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기원후 5세기부터 라틴 교회의 전통에서는 이 본문만 알았고, 현재도 가톨릭 교회의 전례에서는 이 본문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로니모가 아람 말로 쓰인 원문을 번역한 대중라틴말 성서이다. 예로니모는 토비트서를 경전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할 마음이 없었지만, 몇몇 주교가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면서도 마지못해 번역하였다. 그리고 그가 아람 말을 몰랐기 때문에 어떤 유다인이 아람 말 본문을 즉석에서 히브리 말로 번역해 주면, 자기가 다시 서기에게 라틴 말로 불러 주는 방식으로 단 하루만에 토비트서 번역을 끝냈다. 이렇듯 짧은 시간에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이 번역본에서는 원문의 의미만이 아니라 번역자의 금욕주의적인 개성과 혼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등도 엿볼 수 있다.

 

토비트서는 본디 무슨 말로 쓰였는가? 긴 본문은 그리스 말로 쓰여 있지만 그 안에는 아람 말 또는 히브리 말에서 나온 셈족식 표현들이 허다하다. 그것들을 살펴볼 때에 아람 말이 원어였다고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토비트서가 본디 히브리 말로 쓰였으리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6. 저작 시기

 

토비트서에 담긴 종교적인 생각이라든가 후대 예언서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이 유배 시대 이후의 작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더 나아가서, 기원전 190년경에 쓰인 집회서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 또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예고하는 신앙, 그리고 이 책에서 제시되는 이상적 신심 등을 볼 때, 토비트서의 저작 시기는 기원전 200년경일 것으로 여겨진다.

 

 

유딧기 입문

 

 

유딧서는 토비트서나 에스델서처럼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던 끝에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자세히 서술하는 이야기이다.

 

이 유딧서의 소재는 팔레스티나 땅의 조그마한 성읍이면서도,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다른 지방으로 가는 길목들을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인 베툴리야가 포위되는 사건이다. 그 때에 신심 깊은 한 과부가 이 성읍에서 나가 적군의 진지로 간다. 유딧이라는 이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적장 홀로페르네스는 그를 꾀려고 연회를 여는데, 자기가 술에 잔뜩 취하고 만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유딧은 적장의 목을 베어 버린다. 이로써 침략군이 패주하게 된다.

 

1. 이야기의 역사성

 

이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기원전 604년에서 562년까지 바빌론을 다스린 느부갓네살 임금이 여기에서는 기원전 612년에 그의 부왕 나보폴라사르와 메대인들의 연합군에 점령된 니느웨의 임금으로 나온다. 이 느부갓네살은 본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파괴시키고 나서 예루살렘의 주민을 유배지로 끌고 가기도 한 자이다. 그러한 그가 유딧서에 따르면 자기 군대를 팔레스티나로 원정 보내는데, 이 군대가 유배에서 막 돌아온 이스라엘인들에게(4,3; 5,19) 패배하고 괴멸하게 된다. 그리고 침략군을 지휘하는 홀로페르네스와 그의 내시 바고아는 페르시아 이름인데, 이 이름들은 아르닥사싸(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기원전 359-338) 파견한 이집트 원정대를 기술하는 어떤 문헌에도 나온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유딧이 속한 시므온 지파의(유딧 9,2. 그리고 8,1과 각주 참조) 영토 안에 있는 브돌이 언급된다(여호 19,4). 반면에 유딧서의 베툴리아는 사마리아 지방, 곧 도다인과 에스드렐론(또는, 이즈르엘) 평야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가파른 산비탈 위에 세워졌으며 아래 계곡에는 샘물들이 솟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베툴리아라는 이름과 이 곳에 대한 유딧서의 묘사에 들어맞는 지역이 달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가 베툴리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딧서 이야기에는 니느웨, 다마스쿠스, 띠로, 예루살렘처럼 널리 알려진 이름들과 함께 다른 지명들도 나오는데, 주석가들이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곳들이 지리적으로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1,5에는 라가오 경계 안에 있는 대평야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이 라가오는 현재의 라이, 곧 토비트서에서도 언급되는(4,1; 5,6), 메대 땅 엑바타나 북동쪽에 있던 라게스의 변형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지명들의 문제가 모두 이런 식으로 쉽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움은 유딧서의 내용이 역사 기술이 아니라, 어떠한 가르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자유롭게 구성한 이야기임을 말해 준다. 그러면서도 이 이야기 전통은 실제 사건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예컨대 이와 비슷한 경우로 에스델 왕비 이야기가 있는데, 이 왕비는 결국 삼촌 모르드개의 지도를 받아 큰 일을 이룬다. 반면에 유딧은 고대 사회에서 예사롭지 않은 방식으로 에스델보다 더욱 현저하게 주도적 구실을 해낸다. 저자가 이러한 여인의 이야기를 몽땅 창작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종의 교화적 성서 해설로서 미드라쉬라고 불리는 유다교 문헌에도 유딧 이야기와 비슷한 설화가 꽤 자주(열두어 번) 등장한다. 그런데 이 설화는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임금이 이교 제단과 그 의식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지 3년 만에, 곧 기원전 164년에 거행된 성전 봉헌식을 기념하는 하누카 축제와 관련된다. 그리고 여주인공의 활약은 안티오쿠스 임금의 그리스 군대 또는 셀류코스 왕국의 군대가 포위한 예루살렘에서 펼쳐진다. 이 여주인공은 또 종종 무명으로 나온다.

 

비잔틴의 두 연대기 저자, 곧 기원후 6세기의 요한네스 말랄라스와 이 저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는 기원후 11/12세기의 게오르기오스 케드레노스도, 유딧서와 내용은 같으면서 형식은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이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임금 때에 예루살렘이 포위된다. 그 때에 유딧이라는 여인이 자기 민족을 배신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적진으로 간다. 그 뒤에 자기의 미모에 반한 홀로페르네스와 함께 외따로 떨어진 천막에 함께 머무르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홀로페르네스가 자기와 함께 잘 때에 그를 죽인다. 이어서 유딧은 별 어려움 없이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고, 그가 잘라 간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는 창에 꽂혀서 성벽 높은 곳에 효시된다. 이 설화는 여주인공이 적장에게 몸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반면에 유다교 문헌에는 여주인공이 적장의 뜻에 따르겠다는 약속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유딧서는 더욱 조심스럽다. 유딧은 애매한 말을 하는데(12,14), 이는 완곡한 표현으로서 사실상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정중한 대답에 불과한 말일 수 있다.

 

이렇게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같다는 사실, 그리고 대중라틴말성서와 유다교의 여러 문헌에 따르면, 관건이 되는 공적을 기념하는 축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설화 전통의 기원에 실제 사건이 자리잡고 있음을 드러내는 새로운 표지가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이 근동 지방을 다스릴 때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된다. 유딧의 무공 덕분에 평화가 상당 기간 지속되는데, 그러한 상황은 페르시아 시대에 가장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딧서가 말하는 사건의 정확한 연대와 정황과 규모 등을 이 이상으로 자세히 알아 낼 방도는 없다.

 

2. 문학 유형

 

이러한 유딧서의 문학 유형은 현대의 분류에서 어느 한 유형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이미 본 바와 같이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역사의 틀을 조심스럽게 유지하면서 상상의 사건들을 그 안에서 전개시키는 역사 소설도 아니다. 또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 부차적인 사건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상상을 동원하여 소설로 엮은 역사 이야기도 아니다. 유딧서의 이야기는 일종의 미드라쉬이다. 이 교화적 해설에서는 실제로 일어났을 수 있는 핵심 사건이 상당히 자유롭게 다루어지고 새로 지어지는 여러 가지 일화로 확대되며, 여기저기에 성서 본문을 시사하는 말들이 뒤섞인다. 저자는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에서 영감을 얻는다. 곧 다말의 꾀(창세 38), 에훗 판관이 이스라엘을 못살게 구는 모압 임금 에글론을 죽인 일(판관 3,12-30), 야엘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적군의 장수 시스라를 죽인 일(판관 4),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1사무 17),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호소한 일(1사무 25) 등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실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건으로 이루어진 밑그림을, 기존의 성서에서 끌어온 자료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윤색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작업은 최종 목적인 교화를 목표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를 비유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곧 그 출발점이 어떠한 교의에 관한 교육적 예증을 제시하려는 원의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라는 것이고, 이 책의 가르침이 한 가지에 제한되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유딧서가 일종의 묵시록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 둘은 거리가 멀다. 물론 유딧서에도 사건들이 확대되거나 과장된다. 그러나 예컨대 다니엘서나 신약성서의 묵시록, 그리고 이 책들과 유사하면서도 경전에는 들지 못한 제4에즈라서 같은 작품들처럼 상상의 괴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딧서는 묵시 문학에서처럼 종말의 대재앙이 아니라 긴 평화 시대로 결말을 맺는다(16,25).

 

3. 저자와 저작 시기

 

유딧서의 원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디 셈족 말 곧 히브리 말이나 아람 말로 저술하였을 것이다. 그 뒤 기원전 2세기 또는 그보다 후대에 그리스계의 각색자가 칠십인역을 이용하면서 그것을 그리스 말로 번역한다. 그래서 칠십인역과 히브리 말 성서가 서로 다를 경우에는 그리스 말 번역본을 따른다. 곧 유딧 6,2 = 이사 28,1; 유딧 8,16 = 민수 23,19; 유딧 9,716,2 = 탈출 15,2; 유딧 10,4 = 창세 38,14; 유딧 10,4 = 이사 3,20; 유딧 14,18 = 1사무 13,3; 유딧 16,12 = 1사무 20,30 등이다. 이 그리스계 편집자는 셈족 말, 아마도 히브리 말로 된 본문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히브리 말 문체를 충실히 반영하는 여러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본문을 때로는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 그러나 예로니모 성인이 (히브리 말에서 번역된?) 아람 말 본문을 라틴 말로 옮긴 대중라틴말성서와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사실이 말해 주는 것처럼, 때로는 자유롭게 각색하기도 한다.

 

셈족 말로 쓰인 원작은 그리스계 셀류코스 왕국의 박해에 항거하여 마카베오 형제들이 봉기하던 시대에 최종적인 꼴을 갖추었을 것이다. 자기가 온 세상의 유일한 신이라는 느부갓네살의 주장은(3,8; 6,2)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악한 임금, 셀류코스 왕국의 안티오쿠스 4세가 떠벌이는 호언에 비길 수 있다(다니 11,36-37). 이 유딧서 원작의 저자는 틀림없이 자기보다 훨씬 이전의 이야기를 이용하면서 종교와 율법과 성전과 관련하여 위협을 받는 동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는 과거의 예들을 들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아무리 큰 위험에 빠져도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또 당신을 믿는 이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 당신께 등을 돌리지 않는 한 그들의 적들이 어떠한 일을 꾸미든지 그것을 좌절시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의 여주인공 유딧유다인 여자를 뜻한다. 그리고 유다는 히브리 말과 아람 말, 또 그리스 말에서도 여성이다. 그래서 유딧은 이교도 박해자들에게 항거하라고 촉구되는 유다민족이나 나라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4. 본문과 고대 번역본들

 

유딧서의 기초 본문은 셈족 말로 쓰인 원문을 자유로이 번역 또는 개작한 그리스 말 본문이다. 우리는 한하르트가 여러 종류의 수많은 수사본과 고대 번역본들을 대조정리한 것을 이용한다: Robert Hanhart, Septuaginta. Vetus Testamentum Graecum. Auctori-tate Academiae Scientiarum Gottingensis editum. VIII/4, Judith, Vandenhoeck & Ruprecht 1979.

 

그리스 말에서 번역된 고대 라틴말역은 적어도 여섯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이것들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라틴 말 역본들은 완전히 새로운 번역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매우 깊숙이 손질된 교정본들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번역본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 말 본문과는 거리가 있는 원문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부류의 수사본들을 대조정리한 고대 라틴말역의 종합판은 아직도 준비 중이다.

 

시리아말역은 고대 라틴말역에서 볼 수 있는 본문 형태와 가깝다. 대중라틴말성서는 예로니모 성인이 기원후 400년경에 어떤 아람 말 원문에서 새로 번역한 것이다. 성인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이 번역은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은 채 상당히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 작업을 하면서 그는 기존의 라틴 말 번역본들을 이용하는데, 아람 말 본문에 상응하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변경하거나 삭제하였다. 이렇게 이루어진 라틴 말 번역본은 칠십인역보다 현격하게 짧다. 그리고 이 대중라틴말성서에는 칠십인역에 없는 부분도 들어 있고 일화들의 배열 순서도 썩 만족스럽지 않다. 이로써 예로니모가 칠십인역의 바탕이 된 셈족 말 원본과 같지 않은 아람 말 원문을 따랐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이 아람 말 원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5. 경전성

 

유다교의 라비들은 구약성서의 범위를 정할 때에 유딧서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는, 같은 경우에 속하는 토비트서, 지혜서 등처럼 유딧서도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를 망설였다. 특히 유다교 경전을 잘 아는 학자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이 책을 자주 인용하며 폭넓게 이용하였다. 유딧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부정하는 저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노센스 1세 교황이 405년에 작성한 경전 목록에는 유딧서가 포함된다. 그리고 이 목록은 1442년의 피렌체, 1546년의 트리엔트, 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재확인된다.

 

16세기의 종교 개혁가들은 구약성서의 범위와 관련하여 유다인들의 이른바 좁은경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개신교 성서 학자들은 유딧서를 비롯하여, 유다인들에게 신뢰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경전에는 들지 못한 책들을 외경이라는 이름 아래 분류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책들을 2경전이라고 부르게 된다.

 

신약성서에서는 유딧서가 인용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생각이나 표현 방식이 유딧서와 비슷한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첫 세대 역시 이 책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곧 유딧 1,11과 루가 20,11; 유딧 8,6과 루가 2,27 1디모 5,5; 유딧 8,141고린 2,11; 유딧 8,25와 야고 1,2; 유딧 13,18과 루가 1,42; 유딧 13,19와 마태 26,13 등이 서로 관련된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유사 구절은 대중라틴말성서에서만 발견되는데, 유딧 8,24-251고린 10,9-10이다.

 

6. 종교적 의미

 

유딧서는 유다인들이 이교도 세계의 위협에 직면하던 시대에 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저술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때에는 나라의 존립만이 아니라 참된 하느님을 섬기는 경신례까지 위험에 처하였다.

 

유딧서에는 구약성서 전체에 공통된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상당히 독창적인 관점들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사건들이 극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들이 쉽게 가려질 수 있는데, 그것들을 부각시키는 것이 유딧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초월적인 존재이시다. 그분의 계획은 사람들과 관련해서 볼 때에 자비로 충만하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끌어들이시는 시련의 기간과 범위도 확실히 예견할 수 없다(8,14). 사람들이 그분께 바치는 제물들은 그분의 위대함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다(16,16). 또 그분의 섭리는 부차적 요인들을 통해서 실현된다. 곧 유딧서 이야기에는 어떠한 기적도 비상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한쪽에서는 야심과 관능 또는 공포로, 그리고 유딧 쪽에서는 반대로 신앙과 용기에서 나오는 인간적 정열의 결과로 펼쳐진다.

 

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서 온 백성의 구원을 이룬 사람은 한 여인이다. 모두 어찌 할 바를 모를 때에 이 여인만은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지혜로 베툴리아의 지도자들인 남자들의 용기를 북돋운다. 그리고 그들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혼자서 대담한 일을 꾸며 실행에 옮긴다. 그렇게 무공을 이룬 다음, 이 여인은 아내와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다른 일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생활을 한다. 이는 구약성서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일종의 여성주의이다.

 

유딧이 꾸민 계략은 그 자체로서 어떠한 덕의 표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옛 계약의 불완전성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어야 하는 저급 도덕에 따른 행동도 아니다. 유딧 이야기의 많은 세부 사항이 시사하는 대로, 성서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사람들의 꾀나 계략의 여러 본보기와 비교해 보면, 유딧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평가가 나온다. 아시리아 군대의 장수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이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다고 그 땅으로 들어가, 민족의 생존과 종교의 존립을 위협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유딧은 정당 방위로 적군의 장수를 죽이는 것이다. 유딧과 가장 유사한 예는 야엘의 경우이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을 침략한 시스라를 죽인다. 자기 남편의 씨족과 하솔 임금으로 시스라의 주군인 야빈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시스라가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판관 4,17-22).

 

유딧은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자질이나 용모에 대해서 어떠한 자신이나 환상도 품지 않는다. 그리고 홀로페르네스 앞에서 신중하고 품위 있게 행동할 따름이다. 이교도 홀로페르네스가 강인하고 정결한 이 여인에게 빠져든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정염 때문이다. 유딧은 하느님의 도움을 확신하면서, 자신을 잘 다스리게 해 주는 기도와 고행 생활에 힘입어 위험이 가득한 상황과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딧서에는 모세의 율법에 관한 엄격주의적 해석의 흔적도,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을 피하려는 다니엘과 그 동료들의 세심한 노력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다니 1,8-16). 신심 깊은 이 과부의 금식은 어떠한 계명의 준수가 아니라, 애도하고 참회하는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축제 때에는 금식을 중단하기도 한다(8,6).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에게 한 말은 저자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한 어떤 명제가 아니다. 이야기 속에서, 베툴리아의 주민이 아주 사소한 것들에나 온갖 신경을 쓰는 사람들로서 보잘것없는 적이라고 믿게 만듦으로써 적군을 속이려는 것일 따름이다. 사실 유딧서는 율법의 세부 사항들에 관하여 일종의 무관심을 드러낸다. 여주인공은(16,24 참조) 자녀가 없는데도 신명기의 규정(25,5-10)에 따라 수숙혼(嫂叔婚)을 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또 율법이 금하는데도(신명 23,4. 그리고 느헤 13,1-3 참조) 암몬 족인 아키오르가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진다(유딧 14,10). 이러한 사실은 율법 준수라는 울타리로 선택된 백성을 보호하기보다, 모든 사람이 참되신 하느님 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을 터 주려고 애쓰는 개방적 성향이 이 이야기의 주를 이루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 바탕에는 율법에 관한 유연한 이해가 깔려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율법의 그 어떠한 부분도 손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또 부차적인 사항들을 언제든지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성서의 저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는 고통은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백성이나 개인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징벌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내리시는 시련이며, 또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8,25-27). 유딧은 자기 민족이 과거처럼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심을 잃지 않는다. 자기들이 포위되어 겪는 곤궁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진노하신다는 징표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백성의 구원과 거룩한 성읍의 보호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더 높은 덕을 실천하라는 그분의 부름이다(8,21-24). 유딧은 바로 이 몫을 선택한다(13,20). 고통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배려의 표시로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8,25).

 

대제국의 임금들은 종종 교만에 부풀어 자신을 신격화하기에 이른다. 모든 민족이 자기를 유일한 신으로 받아들인다는 느부갓네살의 호언은(3,8),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계자들과 같은 역사적 임금들 또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가공의 다리우스 임금의 주장보다 더하다(다니 6,8). 이와 관련하여 유딧서의 저자는 이사 14,13-14, 에제 28, 그리고 다니 11,36의 무도한 임금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에스델서(에스테르기 ) 입문

 

 

1. 내용

 

이 책은 페르샤 왕국에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들 중의 한 처녀인 에스델이 어떻게 왕비가 되었고, 그의 사촌 오빠이며 양부인 모르드개가 어떻게 임금의 목숨을 노리는 역적 모의를 알아내었는지를, 그리고 총리 대신 하만이 어떻게 유다인들을 절멸시키려 하였고, 모르드개의 권유를 받은 에스델이 이에 맞서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개입한 끝에 하만이 어떻게 처형되었으며 유다인들은 어떻게 임금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또한 하만이 유다인들을 절멸시킬 날을 결정하기 위하여 주사위를 던진 것을 기념하는 주사위 축제부림절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모르드개에 대한 찬사와 함께 끝을 맺는다.

 

2. 저작 시기 및 장소

 

이러한 사건들은 에즈라, 느헤미야, 집회서(기원전 190년경)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쿰란에서는 히브리 성서의 모든 책들이 부분적으로나마 발견되었지만, 유일하게 에스델서의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에 2마카 15,36에는 모르드개의 날이 언급되는데, 이는 기원전 1세기 전반부에 팔레스티나에서 이 축일을 지냈음을 가리킨다.

 

에스 3,8에 따르면 페르샤 왕국의 총리 대신인 하만이 유다인들에 대해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임금님 왕국의 모든 주에는 민족들 사이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저희들끼리만 떨어져 사는 민족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의 법은 다른 모든 민족들의 법과는 다를 뿐 아니라, 임금님의 법마저도 그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둠은 임금님께 합당치 못하옵니다.” 그런데 정복민들에 대한 페르샤 왕국의 정치종교적 관용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에즈라-느헤미야 참조). 그래서 위의 말은 오히려 유다인들을 강경하게 탄압한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임금의 정책에 더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이러한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에스델서는 2세기 말엽 곧 크세르크세스 1(1,1과 각주 참조) 3세기가 지난 다음 아마도 메소포타미아의 디아스포라에서 저술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9,20-32에는 여타의 부분들과는 다른 문체 및 상반되는 내용이 나타나는데, 이는 이 구절이 후대의 첨가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3. 그리스말 번역본

 

이보다 더욱 큰 첨가는 167개의 절로 된 히브리 본문에 93개의 절을 보태는 칠십인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첨가 부분은 다음과 같다: 모르드개의 꿈(1,1- ), 임금에 대한 음모(1,1- ?), 아하스에로스 임금의 조서 내용(3,13- ), 모르드개가 에스델에게 한 말(4,8), 모르드개의 기도(4,17- ), 에스델의 기도(4,17- ?), 에스델이 임금 앞에 나아간 장면에 대한 확장된 서술(5,1- ?; 5,1의 각주 참조), 아하스에로스 임금의 두번째 조서(8,12 - ?), ‘부림절’(아래 참조) 날짜와 관련한 부가 설명(9,19 ), 모르드개가 꾼 꿈의 해석(10,3 - ), 끝으로 그리스 번역본의 기원에 관한 붙임말’(10,3 )이다. 붙임말, 히브리말로 된 에스델서가 이 번역본에서 문제가 되는 프톨레마이오스 임금(10,3 과 각주 참조) 이전 시대에 저술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칠십인역 에스델서의 첨가 부분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오로지 권력과 계교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경전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 히브리 원본에 더욱 종교적인 성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신약성서에서는 한 번도 직간접적으로 인용되지 않으며, 교회 전례에서는 그리스말 첨가 부분만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역사의 주인은 이러저러한 인간의 권능이 아니라 유다 백성을 선택한 분이심을 상기하는 데에는(적어도 유다인 청중 또는 독자에게) 4,14의 말로써도 충분하다. “그대가 이런 때에 정녕 침묵을 지킨다면, 유다인들을 위한 해방과 구원은 다른 데서 일어날 것이오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6,134,1.16도 참조). 하느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증인들의 행동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말 번역본은 히브리 성서가 암시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표현해 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칠십인역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는 번역본에서 이 그리스말 첨가 부분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시키느냐는 것이다. 원래 칠십인역은 첨가 부분을 히브리 본문 사이사이에 삽입시켰다. 반면에 예로니모는 라틴말 번역본에서 히브리 본문이 끝난 다음, 일종의 부록과 같이 히브리 성서에 연이어지는 장절 수에 따라 첨가 부분을 한데 모았다. 현대 번역본들은(개신교에서는 이 부분의 경전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를 번역하지 않는다) 칠십인역 전통이나 예로니모의 전통을 따르기도 하고, 또는 칠십인역의 배치를 따르면서 예로니모의 장절 수나 독자적인 장절 수를 이용하기도 한다. 칠십인역의 배치를 따를 때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글씨체를 사용함으로써 히브리 성서에만 들어 있는 부분과의 구별을 쉽게 한다. 우리의 번역본에서는 칠십인역의 전통을 따르면서 히브리 성서 번역 부분과는 다른 글씨체(이탤릭체)를 사용하며, 장절 수는 바로 직전의 히브리 성서 장절에 , 등으로 표기한다. 예를 들면 1,1; 4,17; 5,1? 등과 같다.

 

4. 에스델서와 역사

 

에스델서가 페르샤 왕국 도성들 중의 하나인 수사 왕성의 지리, 연대, 행정에 대한 지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야기 자체도 연대와 장소 및 등장 인물들을 명시함으로써 일종의 역사화를 꾀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이 전하는 바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적 보고가 아니다. 사실 임금을 제외한 다른 모든 등장 인물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왕국의 왕비는 항상 페르샤 사람이었다. 1,1의 아하스에로스 임금이 그리스식의 이름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라면, 그의 왕비는 1,10이 말하는 바와 같이 와스디가 아니라 후타오사(또는 그리스식으로 아토싸;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메스트리스)라는 여인이었다. 자신들에 대한 말살 정책에 대항하는 유다인들의 조직적 반격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에스델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유다인들의 소망을 소설의 형태로 전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과 같은 이야기의 핵심에(비록 에스델서의 배경보다 후대의 것이라 할지라도) 유다인들의 실제적 체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다인들을 말살하려는 시도는 역사상 여러 번 있어 왔기 때문이다. 에스델서에 담긴 말살 시도는 그중의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사육제적인 경향을 보존하고 있는 부림절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9,24-26이 설명하고 있듯이, “주사위를 뜻하는 외래어 부림은 유다인들의 이 축제가 본디 이교도들의 축제였는데, 유다인들이 이를 자기네 축제로 받아들였음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이 이교 축제를 바빌로니아의 신년 축제 또는 원초적 혼돈에 대한 승리자로서 운명의 신들을 통괄하는 마르둑 신의 축제라 생각하였다. 또는 바빌로니아의 신인 마르둑 및 이쉬타르와 엘람의 신인 후만 및 마스티 사이의 투쟁, 또는 다리우스 임금에 의한 제관들의 학살 등을 이 축제의 배경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가설도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영향을 처음부터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신화론적 요소들을 지닌 이교도들의 축제,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겪어야만 하는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은 이러한 축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 축제를 자신들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도로 삼을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다른 축제들에서처럼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신화를 받아들여 이를 역사 속으로 삽입시켰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바로 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또 이들을 바로 그 속에서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교가 예수 성탄 대축일과 관련하여 그렇게 했듯이, 자신들의 역사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이교도들의 축제를 수용하여 탈신화화함으로써 자기네 전설을 정당화한 것이다.

 

5. 에스델서의 의의

 

역사와 일상 체험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다름에 대한 권리를 흔쾌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새롭게 지적해 준다(에스 3,8 참조). 유다 백성이 여러 나라에 퍼져 살게 된 이후, 이들은 여타의 소수 민족들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이로써 박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14세기 유럽의 대흑사병을 계기로 한 유다인 학살(일본에서 일어난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참조) 또는 독일의 나치당과 그 공범자들이 채택한 최종적 해결은 이에 대한 비극적인 실례들이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말살하려는 그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존속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보이기 위하여 이 민족을 선택하신 하느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만에 의해서 모의된 유다인 말살도, 모르드개에 의해서 조직된 -말살활동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맹목적 폭력은 또 다른 복수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유다인들의 원수들이 유다인들을 매단 십자가나 또는 유다인들이 비유다인들을 매단 십자가 밑에서가 아니라, 비유다인들과 유다인들이 하나 되어 못박았지만 비유다인들과 유다인들 모두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만이 화해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두 편을 하나로 만들고 자신의 몸으로 장벽 곧 적개심을 없애셨으며, 자신 안에서 적개심을 죽이셨습니다”(에페 2,14-16).

 

 

마카베오기 입문

 

 

마카베오 상하권은 유다교 경전에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예로니모 성인은 이 책을 외경으로 여겼고 나중에 개신교에서도 그렇게 분류하였다. 그렇다고 교부들이 마카베오서를 덜 인용하거나 낮게 평가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4세기 말부터서야 경전 목록에 나타나는데, 가톨릭교에서 이 책이 경전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논란이 끝나는 것은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때였다. 루터는 마카베오 상권이 경전에 속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였다.

 

마카베오 상하권은 헬레니즘 시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려 주는 유일한 책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셀류코스 4세 통치 말기인 기원전 176년부터 유다의 대사제 요한 히르카누스가 즉위하는 기원전 134년까지 반세기 가량의 역사만을 다룬다. 그 때에 유다 땅은 셀류코스 왕조의 속국이었다. 안티오키아를 수도로 하는 셀류코스 제국은 지중해에서 이란의 평원 지대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으나, 로마인들과 파르티아인들의 압박과 끊임없는 왕위 계승 분쟁으로 급속히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마카베오 상권과 하권은 주제가 비슷하다. 유다 마카베오와 그 형제들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유다 민족의 자주 독립을 되찾고,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기원전 175-164) 말살하려던 종교의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책은 서로 독립적이면서 다루는 시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카베오서는 전부 그리스 말로 전해진다. 그리고 하권은 본디부터 그리스 말로 쓰여졌다.

 

이 두 책에서는 셀류코스 왕조의 태양태음력(太陽太陰曆)에 따라 사건들을 기록한다. 곧 태양의 한 해 주기와 달의 한 달 주기를 혼합하여 계산하는 달력으로 춘분이나 추분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달력이다. 상권은 일반적으로 가을을 기준으로 하는 계산법을, 반면에 하권은 봄을 기준으로 하는 계산법을 따른다. 가을 기준 달력에 따르면 셀류코스 왕조가 안티오키아에서 시작한 것이 (기원전 46년부터 사용되는 율리우스력으로) 기원전 312107일이 되고, 봄 기준 달력에 따르면 기원전 311년 니산 달(춘분 다음 첫째 달) 초하룻날 곧 (율리우스력으로) 43일이 된다. 셀류코스 왕조의 이 태양태음력은 바빌론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이용되었다. 이렇게 하여 봄 기준의 달력은 1마카 1,54; 2,70; 4,52; 9,3.54; 10,21; 13,41.51; 14,27; 16,14에 해당된다. 여기에서는 성전과 관계된 일이나 유다 내부의 역사와 관련된 연대들이 제시된다.

 

우리말 번역은 W. Kepler, Septuaginta. Vetus Testamentum Graecum. Auctoritate Academiae Litterarum Gottingensis editum. IX/1, Maccabaeorum Liber I, Vandenhoeck & Ruprecht 1990, 그리고 같은 곳의 W. Kepler - R. Hanhart, Maccabeaorum Liber II(IX/2) 19762를 대본을 삼았다.

 

마카베오 상권

 

1. 내용

 

마카베오 상권은 유다 마카베오, 그리고 그의 두 형제 요나단과 시몬의 무용담을 차례로 엮은 삼부작이다. 시몬은 유다 땅에 하스몬 왕조를 창시한 사람이다. 저자는 알렉산더 대왕과 그 후계자들, 특히 유다 지방에 그리스 관습과 문화를 강요하려고 했던 에피파네스의 시도를 입문으로 간략하게 소개한 다음(1), 마따디아 사제와 그 아들들의 반란 이야기로 들어간다(2).

 

첫째 부분은 마따디아의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베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유다 군대의 장수로 임명된 마카베오는 기원전 166년부터 160년까지 여섯 해 동안 독립 투쟁을 지휘한다(3- 9,22). 그는 먼저 에피파네스라고 불리는 안티오쿠스 4세가 페르시아에 원정을 가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역을 담당한 리시아 총독을 공격한다(3- 4,35). 마카베오 상권은 이어서, 에피파네스가 더럽힌 성전을 유다가 정화시킨 일과 주위 민족들을 굴복시킨 사실을 다루고(4,36 - 5), 에피파네스의 죽음도 알린다(6,1-17). 같은 내용을 마카베오 하권도 전하는데, 먼저 9장에서 에피파네스의 죽음을, 그리고 10장에서 성전 정화를 이야기하는 이 하권의 순서가 더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하권에도 순서의 혼동이 없지는 않다. 11장에 나오는 편지들이 그 좋은 예이다.

 

에피파네스의 아들 안티오쿠스 5세의 통치 때에 리시아가 시도한 제2차 원정은 마카베오에게 이로운 쪽으로 결말이 난다(6,18-63). 그 뒤에 셀류코스 4세의 아들 데메드리오 1세는 자기 조카 안티오쿠스를 밀어 내고 왕위를 차지한 다음, 리시아를 바키데스로 교체한다. 그리고 데메드리오 1세와 바키데스는 유다의 대사제 알키모스의 사주를 받고, 유다 마카베오의 유격 부대를 추격하게 한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데메드리오 1세가 유다 지방 담당 장수로 임명한 니가노르에게 대승을 거둔다(7). 바로 이 날에(기원전 160328) 니가노르가 죽는데, 하권은 이 사건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상권은 로마인들에 관한 특이한 찬사에 이어(8), 바키데스가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와 전투를 벌이는데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마카베오가 명예롭게 전사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9,1-22).

 

둘째 부분에는 요나단이(기원전 160-143) 등장한다(9,23 - 12). 요나단은 데메드리오 1세와 그의 아들 데메드리오 2세가 처음에는 에피파네스의 손자(?) 알렉산더 발라스와, 다음에는 트리폰과 싸우는 기회를 적절히 이용한다. 트리폰은 먼저 알렉산더의 어린 아들 안티오쿠스 6세의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직접 다스린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152년에 대사제로 임명한 요나단은 트리폰과 동맹을 맺지만, 트리폰이 배신하는 바람에 붙잡혀 포로가 되고 만다.

 

그래서 시몬이 요나단의 뒤를 잇는다. 그러나 트리폰이 시리아로 돌아가기 직전에 요나단을 처형하는데(기원전 143년 말; 13,23-24) 시몬은 이 일을 막지 못한다. 이 불행한 사건을 빼면, 대사제이며 영주인 시몬의(기원전 143-134) 업적을 다루는 셋째 부분의(13 - 16) 시대는 평온한 때였다.

 

시몬은 유다의 성읍들을 튼튼하게 하고 요빠와 가자라, 그리고 예루살렘 성채를 점령한다(기원전 1416; 13,51). 기원전 1425월에 시몬이 데메드리오 2세와 다시 관계를 맺는데, 데메드리오 2세는 기원전 145년에 가서야 협약 내용을 인준한다(13,35; 11,30). 데메드리오 2세의 동기로서 파르티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안티오쿠스 7세도 기원전 139년에 유다인들에게 특전을 인정하지만(15,1), 트리폰을 제거한 다음에는 시몬에게 등을 돌린다(15,25-41). 시몬은 나이를 먹자 자기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에게 전권을 이양한다. 이 요한은 안티오쿠스 7세가 해안 지역 수장으로 임명한 켄데베우스를 패배시킨다(16,1-10). 얼마 뒤에 시몬은 사위 프톨레매오에게 살해되지만, 요한 히르카누스는 자기까지 죽이려는 프톨레매오의 흉계를 미리 알아차려 암살자들을 처단하고 정권을 장악한다(16,11-24). 그 전에 시몬은 스파르타와 로마와 맺은 계약을 갱신하고(14,16-24; 15,15-24), 지중해 동쪽 전 지역의 왕국들과 성읍들과 관계를 맺어 놓았다(15,22-23).

 

2. 저작 시기와 문학 종교적 특성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는 이 책을 끝맺으면서, 요한 히르카누스의 나머지 행적과 업적은 대사제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기원전 104년 히르카누스가 죽은 뒤에 이 사료를 이용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 나오는 사건들에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도 그가 이 책을 쓴 때는 기원전 100년경일 것이다. 집필 시기를 아무리 늦게 잡아도 로마가 유다 땅을 지배하기 전이어야 한다.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데, 마카베오 상권이 이 시점 이후에 저작되었다면, 8장의 로마인들에 대한 찬사가 괴이하게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팔레스티나에 살던 유다인인 저자는 고대 역사 문헌들의 문체를 본뜬다. 그리스 말 본문은 셈족 말로 쓰인 원문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 이 셈족 말은 거의 틀림없이 히브리 말이었을 것이다. 하스몬 시대에 일어난, 구약성서가 쓰인 히브리 말의 부흥은 쿰란 문학으로 여실히 입증된다. 아람 말도 쓰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미드라쉬 문학과 유언 문학으로 대표되는 대중 문학에 한정된다. 일종의 언어적 보수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보수주의를, 유다 민족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사적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마카베오 시대에 예언 운동은 끝났고 종말론적, 그리고 메시아적인 전망들도 나타나지 않는다(이러한 전망들은 마카베오 시대에 대중적이고 묵시적인 문학에만 겨우 존속할 따름이다). 마카베오 하권이 무엇보다 성전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 반하여, 상권은 계약과 분리될 수 없는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고심과 염려를 드러낸다. 유다인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고, 또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교 풍습을 거부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책에서는 경외심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지만, 승리가 오는 곳은 하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하스몬 가문의 지지자인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는 철저한 율법 준수를 요구하면서도,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및 권력층 사이에 일어난 갈등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또 하시드인은 찬사의 말로 언급하지만, 이제 막 태어난 에세네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유다인 저술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과 에세네파는 요나단 시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처럼 광신주의와 거리를 두는 신심이야말로 옛 계약의 영구적 가치를 드러내는 진정한 증언 구실을 한다.

 

마카베오 하권

 

1. 저자

 

마카베오 하권은 상권의 연속이 아니다. 하권의 이야기가 안티오쿠스 4세의 즉위 전에 시작하여 유다 마카베오의 죽음 전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권에서는 마카베오가 등장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들이 상권에서보다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이 하권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사건들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곧 기원전 160년경에 키레네 출신 야손이 다섯 권으로 펴낸 것을 요약한 책이다. 야손은 1,7에 나오는 반역자 야손과는 다른 인물로서, 아프리카 북부에 있던 키레나이카의 수도 키레네에 살던 저술가였다. 그는 예루살렘, 셀류코스 왕국의 행정, 그 관리들과 그들의 칭호를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리스식 교육을 철저히 받았으면서도 믿음이 매우 깊은 유다인이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나, 특히 전투 전후의 기도에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유다교를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격렬한 독설을 퍼붓는다.

 

야손과 마찬가지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무명의 사람이 두 가지 문학 기법을 동시에 이용하여 야손의 책을 요약한다. 먼저, 야손이 서술한 역사에서 나타나는 단절 부분들을 짧은 이야기를 덧붙여 잇는 기법을 쓴다. 그리고 야손이 서술한 사건들과 그 해석을 유지하면서도, 자기에게 매우 익숙한 그리스 말 구문법에서 이용되는 생략 방식들을 적용하여 이야기체의 흐름을 이를테면 압축한다. 그러나 이 요약 기법은 야손의 책이 지닌 근본적 특성, 곧 내용상으로는 종교적이고 문체상으로는 비장하다는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권의 본문에서 어느 것이 야손의 글이고 어느 것이 요약자의 손에서 나온 글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 책 본문에 삽입된 일곱 편지 가운데 처음 두 편지도 이 요약자가 아람 말이나 히브리 말에서 그리스 말로 옮겼을 것이다. 마카베오 하권의 시작 부분에 배치된 이 두 편지는 책 전체의 중심을 이루는 성전 봉헌(10,1-8) 기리는 구실을 한다. 두 편지 가운데 더 나중에 쓰인 편지의 연대가 기원전 124년에 상응하기 때문에, 마카베오 하권은 이보다 조금 늦게 저술되었을 것이다.

 

2. 역사 개념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역사를 신들이 세상의 균형을 통시적(通時的)으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마카베오 하권의 저자도 역사를 목적론적 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는 모든 사건을 하느님 뜻의 결과로 해석한다. 박해자들과 배반자들에게 내리는 징벌과 사악한 원수들이 당하는 패배뿐 아니라, 유다인들을 올바른 길로 돌려 놓는 사건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저자에게 유다 마카베오의 승리는, 순교자들의 수난 공로로 하느님께서 다시 호의를 베푸신다는 징표이다. 사건들의 서술에 이어지는 설교에서는 유다교의 전통에서 가르침을 이끌어 내기도 하고 새로운 교훈을 내놓기도 한다.

 

3. 창조

 

셈족의 우주관과 신학을 그리스의 우주관과 갈라 놓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창조이다. 그리스 사상은 이와 관련하여 질량 보존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기원후 1세기 로마의 시인이며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가 무에서 무가 나올 수 없다.고 표현해 낸 이 원칙은, 탈레스 이래 스토아 학파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체계에 관한 생각을 지배하였다. 이는 원자론자들처럼 무와 공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상가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마카베오 하권 이전의 유다인들은 우주 생성론과 관련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을 무에서창조하셨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 창조는 한처음(창세 1,1) 완전한 무,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창세 1,2) 혼돈에서 존재를 불러 내시는 첫째 행위와, 빛이 생겨라(창세 1,3) 같은 명령으로 원초적 혼돈을 체계화하시는 둘째 행위를 포함한다. 구약성서의 저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이전에 이미 창조된 혼돈을 정돈하는 이 둘째 단계의 창조를 이야기한다. 마카베오 하권보다 상당히 늦게 저술된 지혜서는, 애초의 혼돈의 창조에 관한 언급 없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무형의 물질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지혜 11,17-18). 마카베오 하권의 저자는 일곱 순교자 어머니의 입을 빌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무에서 만드셨다고 밝힌다(2마카 7,28). 이로써 저자는 창세 1,1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 창조의 근본 문제를 더욱 명확히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에 관한 신약성서의 말씀을 예고한다(골로 1,15-20; 요한 1,3 참조).

 

4. 의인들의 부활

 

마카베오 하권의 저자는 다니엘서의 종말론을 발전시킨다. 이 종말론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의인들의 영혼이 누리는 영원한 행복만을 말하는 지혜서보다,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까지 포함한 의인들의 부활을 가르치는 바리사이들의 종말론에 더 가깝다. 엘르아잘 노인의 경우에는,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두가이들의 전망 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6,23), 죽은 다음 죄인이 받게 될 징벌을 배제하지 않는다(6,26).

 

5. 중개 기도

 

마카베오 하권은 또 다른 신학의 발전을 보여 준다. 곧 죽은 이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 이들이 바치는 기도와 제사가 효력을 지니고(2마카 12,40-45), 또 반대로 오니아스와 예레미야처럼 죽은 의인들이 산 이들을 위하여 중개 기도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15,11-16). 이 교리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도 이어받아 자기의 저술에서 성조들도 중개자로 거명한다. 히브 7,25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약성서의 저자들에게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개자이시다(그러나 묵시 5,8도 참조). 나중에 개신교에서는 죽은 이들의 운명은 오로지 하느님의 결정 사항이라고 하면서,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통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동방과 서방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성인들의 중개 기도는 큰 역할을 해 왔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모든 은총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성인들의 중개 역할을 인정한다. 죽은 이들을 위한 산 이들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루터는 2마카 12,44에 나오는 유다 마카베오의 견해를 원칙으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와 관련하여 개신교에서는 마카베오 상하권을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6. 둘째 편지와 축제

 

마카베오 하권의 일부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사건들을 한데 모아 놓으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 앞부분에 자리잡은 둘째 편지가(1,10 - 2,18) 특히 중요하다. 이 편지는 틀림없이 유다 마카베오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옛 문헌에 정통한 한 사제가 이집트에 사는 유다인 공동체의 학자 아리스토불로에게 쓴 것이다. 이 편지의 구체적인 목적은 마카베오와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의 이름으로, 이집트의 유다교인들에게 자기들과 함께 성전 정결 예식을 거행하라고 권면하면서, 148년 기슬레우 달 스무닷샛날로(기원전 1641215) 확정된 이 축제의 거행 방식을 상세히 기술하는 것이다. 편지의 저자는 이 축제의 일반 예식으로 초막절 예식을 제시한다(1,18). 이 예식은 이미 솔로몬이 첫 성전을 봉헌할 때에 채택한 것이다(2,12. 그리고 1열왕 8,65; 2역대 7 참조). 그러면서 이 기슬레우 달의 봉헌식에 특별한 강조점을 덧붙이고 또 그동안 잊혀져 왔던 옛 전통과 연결짓기 위하여, 저자는 봉헌식이 거룩한 불로 거행되기를 바란다. 그는 자기의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여 느헤미야와 예레미야의 외경 문헌에 나오는 이 두 예언자들의 기록, 곧 이른바 제2성전의 제단 봉헌식 때에 느헤미야가 보인 본보기와(2마카 2,131,18-36), 유배자들에게 거룩한 불을 가져가라고 한 예레미야의 예를 듦으로써(2,1), 거룩한 불의 이용을 정당화한다.

 

7. 일곱 형제의 순교와 그들에 대한 공경

 

이 이야기의 비장한 문체는 일곱 형제에 대한 야손과 요약자의 감동에 찬 관심을 드러낸다. 이 가정의 고난은 역사적 사건임이 분명하다(1마카 1,62-63 참조). 그러나 이 이야기가 마카베오 하권에 자리잡기 이전에, 일곱이라는 상징적 수라든가, 임금이 직접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라든가, 형벌의 잔혹성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설화의 특징적 표지와 더불어 이미 하나의 민간 전승이 되어 있었다. 저자는 순교의 장소와 일곱 형제의 이름에 관하여 어떠한 구체적 단서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에 관해서는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와 요세푸스도 침묵을 지킨다. 마카베오 하권을 바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형벌의 장소가 유다 땅에 있었으리라는 것이 전부이다(2마카 6,8-11 참조). 하권보다 한 세기 반이 지난 다음에 나온 제4마카베오서의 저자도 같은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유다인들을 박해하기로 임금이 결정을 내린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4마카 4,23; 5,1; 8,1 참조). 이와는 달리 이른바 안티오키아 전승은 순교 장소를 유다로 보는 전통에 반대하여, 일곱 형제와 엘르아잘의 전설과 함께 오랫동안 전해 온 안티오키아를 그들의 순교지로 내세운다. 안티오키아가 순교지라는 가설은 마카베오서 자체에서 추론해 낸 것이다. 유다 땅에서 박해가 벌어질 때에 에피파네스 임금이 안티오키아에 있었기 때문에, 일곱 형제를 처형하기 위하여 안티오키아로 이송하였으리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안티오키아 전승은 기원후 390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이 바로 안티오키아에서 이 일곱 순교자들에 관하여 설교하면서, 이 도시 부근의 성소에 보전된 그들의 유해를 언급한 것이다. 이보다 조금 뒤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어떤 설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안티오키아에 세운 …… 마카베오 성인들의 대성당을 상기시킨다. 기원후 6세기 어떤 연대기의 저자인 안티오키아의 요한네스 말랄라스는 야손이 주도한 유다인들의 봉기와 안티오쿠스 4세의 진압을 이야기한 다음(2마카 5,5-10), 안티오쿠스가 엘르아잘과 마카베오 집안 사람들을 안티오키아에 끌고 가, 그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처형하였다고 덧붙인다. 말랄라스는 자기의 연대기 조금 뒤쪽에서, 유다라는 이가 데메드리오 임금의 허락을 받고 마카베오 집안 사람들의 시신을 가져다가 안티오키아의 케라테온이라는 곳에 장사지냈다고 말한다. 그리고 10세기 안티오키아의 한 아랍인 안내자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언급한 대성당, 곧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의 주민들이 옛 유다교 회당을 개조하여 만든 대성당이 실피우스 산 비탈, 그 지하 경당에는 에스라와(= 엘르아잘)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의 무덤이 들어 있는 곳에 지어졌다고 말한다.

 

이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은 안티오키아에서 서방으로 전해졌다. 이미 4세기부터 갈리아에서는 마카베오 성인들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제4마카베오서의 라틴 말 의역본(意譯本)이 나와 널리 유포되었다. 이들의 유해는 밀라노와 쾰른으로 옮겨지고, 로마와 리옹과 빈에는 그들의 기념 성당들이 들어섰으며, 축일은 81일로 정해졌다.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생기기 전의 그리스도인으로 여겼던 교부들은 이들에 관하여 많은 설교를 하였다.

 

'문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약] 오경 입문  (0) 2015.02.27
[구약] 예언서 입문  (0) 2015.02.27
[구약] 시서와 지혜서  (0) 2015.02.27
구약입문 4  (0) 2015.02.27
구약입문 3  (0) 201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