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는 어떤 성서인가요?
이 성서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모아 놓은 것이라 하여 그 이름을 따서 “이사야”라 불렀어요. 이사야란 말은 ‘야훼께서 구원하시다’ 또는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지요. 예언서 중에서 가장 길고 분량도 가장 많아 대예언서라 일컬어지죠.
누가 썼나요?
물론 예언자 이사야이지요. 그가 직접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적은 책이기에 그를 저자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일찍이 이사야서의 문학양식이나 기술된 내용의 역사적 상황, 문체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이사야서는 두 명 이상의 작품이라고 보았어요. 오늘날 이사야서는 크게 세 사람 이상의 공동작품이라 보아요. 즉 앞부분(1-39장)을 쓴 이사야, 가운데 부분(40-55장)을 쓴 제2 이사야, 끝부분(56-66장)을 쓴 제3 이사야가 그들이지요. 그렇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번째 이사야와 세 번째 이사야 모두 이사야의 후계자로서 그의 정신과 지향을 따랐기에, 이사야를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 보고 있답니다.
언제 쓰여졌나요?
쓴 사람이 셋이니까 쓰여진 시기도 각각 다르겠지요. 이사야는 유다의 요담, 아하즈, 히즈키야 왕이 재임하던 기원전 742년경부터 40여 년간 활동했어요. 제2 이사야는 바빌론 유배 기간 중에, 대략 바빌로니아가 멸망할 무렵인 기원전 550년에서 고레스 칙령(기원전 538년)이 내려지기까지 10여 년 동안 활약했어요. 제3 이사야는 유배에 돌아온 다음, 기원전 530-510년경에 일했구요. 이러한 여러 작품이 함께 편집되어 묶여진 때는 그 뒤인 기원전 4-3세기였어요.
왜 썼나요?
이사야의 활동시기를 보면 유다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하기 전,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암담한 시기였어요. 이렇게 캄캄한 때에 하느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불러 당신 백성들이 살아날 길을 알려주신거죠. 당시 지도층은 인간적 지혜를 써서 외세인 아시리아와 이집트에 빌붙어 살아나려고 했지만,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거룩하신 야훼 하느님을 굳게 믿고 따르는 길만이 삶의 길임을 역설하지요. 하느님의 힘은 엄청나므로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신다고 일러주지요.
유다가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멸망당하고 유배당했을 때, 제2 이사야는 다시금 하느님의 구원과 새로운 창조와 출애굽을 선포하면서 희망을 가질 것을 호소해요. 귀환 후 참담한 현실에 힘 빠져 있는 유다인들에게 새 하늘 새 땅을 선포한 제3 이사야도 그런 믿음과 희망을 강조했구요.
결국 이사야는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도움을 신뢰하며 그분 말씀대로 사회정의를 지킬 때 구원이 임함을 알려준답니다. 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시고, 참된 메시아가 오시면 온 세상에 하느님의 평화와 정의가 가득 차고 그분의 영광이 빛나리라고 예언하여, 신약성서에 자주 인용되지요.
<새김과 나눔>
벼랑 끝에 서 있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이사야는 인간적 지혜 대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강조했습니다. 삶의 고비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였는지 함께 의견을 나눠보십시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이사 1-27장)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사 1,1-12,6)
하느님의 심판에서 살아 남을 사람들을 무엇에 비겨 말합니까?(6,13)
맨 먼저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린 유다가 우상을 섬기고 불의를 저지르며 형제들을 괴롭히는 죄악을 고발하고(1,2-31; 3,1-31),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리라고 예고해요(3,13-4,1; 5,1-30). 아울러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들에게 임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도 선포하지요(2,1-22; 4,2-6). 이러한 내용은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라는 호소인 셈이죠.
한편 이사야는 놀라운 환시 중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요. 하느님은 당신의 거룩하심을 무시하는 유다 백성에게 심판과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할 예언자로 이사야를 택하여 그의 죄를 없애주신 거죠(6장). 우리가 미사 때마다 외치는 “거룩하시다”가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이사야가 활동할 당시 유다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처해 있었어요. 무자비한 나라 앗시리아가 노리고 있는 가운데, 시리아와 이스라엘 연합군이 함께 아시리아와 싸우지 않으면 침공하겠다고 을러댔습니다. 이 때 이사야는 그 어느 나라에도 의존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 굳건히 서라고 일러줍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실 것(임마누엘)이라고 약속하지요. 그러나 아하즈 왕은 아시리아의 봉신이 될 것을 약속하며 이사야의 충고를 거절해요. 그래서 이사야는 유다와 주변 국가가 당할 재앙을 선포하며, 믿는 자에게 임할 하느님의 평화를 다시금 밝혀요(9,1-6; 11,1-12,6).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7,9). “진정 하느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내가 당신을 의지하니,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야훼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십니다”(12,2).
이방 민족들에 대한 멸망의 예고(이사 13,1-23,18)
하느님께서 이방 민족들을 치시는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19,22)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협했던 주변의 강대국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불레셋, 모압, 다마스커스와 에브라임, 이디오피아, 이집트 등이 멸망당하리라는 예언이 선포되어요.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약한 나라들을 괴롭히며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죠. 지상에서는 그들의 힘이 강하여 누가 상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하느님의 능력은 그보다 훨씬 강하여 그분이 “생각한 대로 반드시 되고 그분이 정한 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14,24). 따라서 그런 나라에 의지하거나 희망을 두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다시금 강조된 것이죠.
심판의 그 날이 오면(이사 24,1-27,13)
밤낮으로 당신께 신실한 이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누구에 비깁니까?(27,3)
이 대목은 흔히 ‘이사야의 묵시록’이라 불립니다.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위력과 당신 백성을 돌보아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25,8)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한결같아 당신께 몸을 맡기는 그들을 번영과 평화로 지켜 주십니다"(26,3). 그렇기에 이사야는 혼란과 불안에 빠진 유다 백성들에게 “영원히 야훼를 믿고 의지하여라”(26,4)고 강력히 권고합니다.
용기를 내어라(이사 28-48장)
아! 네가 비참하게 되리라(이사 28,1-35,10)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길을 무엇이라고 일러줍니까?(30,15)
하느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계속해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죄악을 고발하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 당시 아시리아의 위협은 코앞에 당도했는데도 사람들이 그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꾸 이집트에 빌붙어 살 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 자세는 “군마에 희망을 걸고 많은 병거와 수많은 기병대를 믿는”(31,1) 일로서 “굽고 어긋난 것을 믿어 의지하려는”(30,12) 잘못된 행위지요.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강대국의 멸망을 일러주시고 당신의 보살피심과 새롭게 설 정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그분이 오시면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35,5-6). 이미 여러분은 알고 계시죠? 언제 이런 일이 이루어졌는지. 누가 그런 일을 이루셨는지! 잘 모르시는 분들은 마태오 복음 11,4-5와 루가 복음 7,22을 읽어 보십시오.
야훼여, 나를 구해주신 이는 당신(이사 36,1-39,8)
하느님께서는 히즈키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어떻게 하시겠다고 밝히십니까?(37,33-36)
기원전 701년경 유다의 히즈키야 왕 재위 14년에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을 뿐 아니라 주변 국가를 모두 제압해버린 아시리아의 위력은 엄청났죠. 그런 아시리아가 쳐들어와 유다의 주요 성읍들을 다 점령한 뒤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풍전등화, 절대절명의 위기였어요. 바로 이때 하느님께서는 히즈키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께서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산헤립은 어느 날 갑자기 포위를 풀고 돌아가 버렸어요. 아시리아 궁정 내부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죠. 그러나 유다는 이를 만민의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히즈키야 왕은 자신을 구원하여 주시고 병을 고쳐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렸죠. 우리도 신앙의 눈을 뜨고 바로 본다면, 세상사와 내 인생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사업을 이뤄가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너희를 해방시켜 주리라(이사 40,1-48,22)
하느님께서 고레스에게 부여하신 사명은 무엇입니까?(44,28-45,6)
마침내 억눌려 사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고함이 누리에 퍼집니다.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이시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새로 생긴 나라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당신의 도구를 택하시어 바빌로니아에 끌려와 있던 유다인들에게 광복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이것은 “야훼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에까지 알리려는 것”(45,6)이었어요. 그분은 “정의를 세워 구원을 이루는 하느님이시니, 온 세상 모든 인간들아, 머리를 돌려 나에게로 와서 구원을 받아라”(46,21-22)고 초대하십니다. 그 초대의 말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먼저 그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체험한 하느님의 백성이 해야 할 선교이지요.
야훼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르기까지(이사 49-66장)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49,1-55,13)
야훼의 종이 맞고 처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53,10-12)
이사야서에는 야훼의 종이 부르는 노래가 네 편 나와요. 그런데 각 노래마다 종의 처지는 달라요. 첫번째 노래에서 종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소명 같은 이스라엘이지요(42,1-23). 두 번째 노래에서는 “지배자들의 기막힌 멸시를 받으며 종살이하는”(49,7)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이 종으로 소개되지요. 그런데 세 번째 노래(50,4-9)와 네 번째 노래(52,13-53,12)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느라 고통받고 핍박받는 한 인물이 종으로 소개되어요. 그래서 그 종을 예언자 같은 한 개인으로 보기도 하고 야훼께 충실한 일단의 이스라엘 백성으로 풀기도 하지요.
여하튼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종의 정체는 분명치 않아요. 그래서 나중에 신약시대의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실현됨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기”(53,10) 때문이죠.
이 대목에서는 야훼의 종의 노래 이외에 시온에 전하는 하느님의 위로와 충고, 희망의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어요. “반가와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52,7). 그리하여 그분에게 “걸었던 희망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 줄을”(49,23) 알게 해 주시죠.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믿고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54,10)고 보장해 주신답니다.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55,3).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이사 56,1-66,24)
예언자가 전할 기쁜 소식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61,1-9; 참조 루가 4,16-21)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유배에서 귀환시켜주셨지만, 아직도 저만 잘 되겠다고 욕심부리며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여전히 있었어요(56,9-57,13). 형식적으로 하느님께 제의를 드리면서도 공평은 뒤로 제쳐 놓았고 정의는 얼씬못하게 하는 무리들이 있었지요(59,1-15).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외에 야훼께로 개종한 외국인이나 고자 같은 불구자도 모두 당신 백성으로 모아들이겠다고 약속하셔요. 그렇게 모인 하느님의 백성은 바른 제의로 그분을 섬길 것을 요구받죠. 그분이 기뻐하시는 단식은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 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는”(58,6-7) 실제적인 사랑의 나눔이지요.
비록 현실은 어둡고 힘들어도 언젠가 하느님은 만방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찬양하려고”(60,3-16) 모여들게 하시고, 정의와 평화로 다스려지는 새 세상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셔요. 그것을 위해 “우리 하느님의 봉사자”(61,6)로 불린 하느님의 백성은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61,1), 그분이 오실 “큰 길을 닦고 또 닦아야”(62,10) 합니다. 그분이 이룰 새 하늘과 새 땅은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65,25) “다시는 울음소리가 나지 않겠고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는”(65,19) 평화의 세상이죠. 왜 신약성서에서 이사야서를 자주 인용하였는지, 대림절의 독서가 왜 이사야서인지 이제는 잘 알게 되셨나요?
예레미야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이 책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과 그의 행적을 적은 책이라 하여 그 이름을 따서 ‘예레미야’라 했어요. 후기 예언서 중 이사야, 에제키엘과 함께 분량이 많아 대예언서로 분류되지요. 예레미야는 대략 기원전 640년경에 아나돗의 사제가문에서 태어났어요. 아직 소년에 지나지 않았던 기원전 627년에 예언자로 불림받아, 이후 40여 년 동안 예언자 활동을 했지요. 그의 이름의 뜻인 “야훼께서 던지다, 급히 보내다”처럼, 그가 활동한 시대에 유다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어요. 예레미야는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로 회개를 호소하며 하느님의 심판을 알렸지만, 결국 귀담아 듣는 이 없어 처참하게 멸망당하는 조국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아픔을 겪었지요. 뿐만 아니라 조국의 배반자, 거짓 예언자로 몰려 여러 차례 죽을 위험을 겪는 등 예언자로서 개인적인 고통도 심하게 받았답니다. 그래서 그를 눈물의 예언자’, 수난의 예언자’라 부르기도 하죠.
언제 누가 썼나요?
물론 예레미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서의 뼈대를 이루지요. 예레미야서는 제자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예언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해요(36,4). 그러니까 예레마야가 활동하던 시기에 많은 부분이 쓰여진 거죠. 하지만 예레미야서도 다른 성서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편집과정을 거쳤어요. 예레미야의 예언이 참된 하느님의 말씀임을 깨달은 바빌론 유배기 때 예레미야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이 그의 말을 수집해서 덧붙였어요.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시간 순서대로 되어 있지 못하고 왔다갔다하는 부분이 꽤 있답니다.
왜 쓰여졌나요?
요시아 왕이 죽은 다음 유다는 동쪽의 신흥 강대국 바빌론의 압력을 강하게 받았어요. 남쪽에는 비록 위축되긴 했지만 여전히 강대국인 이집트가 버티고 있었구요. 유다는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았지만, 왕과 대신들은 이집트에 빌붙어 바빌론과 싸우려고 하였죠. 이러한 혼란기에 예레미야는 먼저 우상을 숭배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법을 무시하는 유다인들의 생활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예언하죠. 아울러 그는 성전과 시온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에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거짓 믿음과 군사외교적인 정책으로 살 길을 찾으려는 지도층의 자세를 비판합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언제 어디서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고 그분의 말씀을 깨어 들으며 그대로 실천하는 삶이고, 이것이 궁극적인 살 길임을 알려주어요. 때로는 바빌론에 항복하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기억하시고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새 공동체를 이루시는 희망 찬 미래가 펼쳐진다고 알려주어요.악을 심판하시는 하느님과 새 계약으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유다 멸망이라는 처참한 역사를 통해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오늘 우리에게도 삶의 자세와 생활양식을 되돌아볼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죠.
<새김과 나눔>
종교적으로는 성전에, 정치적으로는 이집트에 의존한 유다처럼, 나와 내 주변의 공동체가 미래와 현재의 안전을 맡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 내 미래를 맡긴다는 신앙자세는 어떤 삶의 자세를 가리킬까요?
나는 이렇게 심판하리라
(예레 1-19장)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예레 1,1-6,30)
하느님께서는 자신과 이방신을 무엇에 비유하십니까?(2,13)
예레미야는 사무엘처럼 소년이었을 때 예언자로 불림받습니다(1,6). 그가 모세처럼 부르심을 회피하려 하자, 하느님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의 사명은 ‘뽑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는’, 낡은 것을 무너뜨리고 새것을 심는 큰일입니다.
예레미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야훼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이는 간음한 짓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 오너라”(3,22)고 애타게 부르시며 회개를 호소하십니다. 마음에 수술을 받고 땅을 새로 갈아 엎고 씨를 심으라고 촉구하십니다(4,3).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적군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으리라고 일러주십니다. 회개인가, 심판의 재앙을 받을 것인가 여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달려 있다고 분명하게 일깨워주신답니다.
완고한 백성과 계약의 파기(예레 7,1-12,17)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7,23;11,4)
다시금 예레미야는 성전을 믿고 안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헛된 희망을 고발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생활태도를 고치고 정의를 실현하는 일, 번제와 친교제 같은 제사보다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7,23)입니다. “나의 뜻을 깨치고 사랑과 법과 정의를 세상에 펴는 일”이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9,23).
그러나 잘못을 뉘우치는 자 하나 없고 하느님이 세운 법을 아는 자 역시 하나도 없다고 고발합니다(8,6-7).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이 내가 내려준 법을 저버리고 내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그대로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9,12) 재앙을 당하리라고 다시금 선고하십니다. “그런 자들은 말로는 하느님과 가까운 체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떠나가는 것들”(12,2)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의 죽음을 슬퍼하며 밤낮으로 울고 싶어하지만(8,23), 고향인 아나돗 사람들은 불길한 예언을 한다하여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예언자의 삶은 하나의 상징(예레 13,1-19,15)
예레미야가 보여준 잠방이와 오지그릇의 상징은 무엇을 뜻합니까?(13,1-11;19,1-11)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계속 고발합니다. 그 결과로 닥칠 대기근과 무서운 전쟁도 예언합니다. 잠방이를 묻고 오지그릇을 깨며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런 예언을 전하는 예레미야는 “주님 때문에 수모를 받고” 끝없는 괴로움을 당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예언자가 의지한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저는 주님 한 분만을 기립니다”(17,14).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너를 도와 구하여 주리라”(15,20)고 약속하십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힘은 바로 하느님, 그분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예레 20-35장)
유다의 왕과 예언자의 운명(예레 20,1-24,10)
하느님이 세워주시는 참목자는 어떤 이름으로 불립니까?(23,6))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심판을 촉구하는 예레미야는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당시의 사제와 예언자들은 모두 유다에 별탈이 없으리라고 선포했으며, 백성들은 이들의 말을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를 혹세무민하는 거짓 예언자로 몰아 때리고 가둡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사람에게 “웃음거리, 놀림감, 사면초가”가 된 자신의 고통이 너무 커서 하느님께 애소합니다. 하지만 그의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그는 손을 들고 맙니다”(20,7-10).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 그가 예언자입니다.
요시아 왕 이후 유다의 왕으로 있었던 여호아하즈,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키야와 함께 거짓 예언자 모두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백성의 목자인 그들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저버리고 가난한 자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악행을 회개하지 않는 탓입니다. 아울러 그들을 대신하여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펼 메시아가 오리라는 희망의 복음도 선포됩니다.
참예언자 예레미야(예레 25,1-29,32)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을 전하다 살해당한 예언자는 누구입니까?(26,20)
하느님께서는 유다의 죄악에 대한 심판과 함께 칠십 년이라는 처벌기한도 밝히셔서, 당신의 구원계획이 계속 될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지도자나 백성들은 여전히 마이동풍격입니다. 예레미야가 “이십삼 년을 하루같이 전하였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25,3). 야훼 하느님은 “내 말을 따라 살아라, 내가 세워준 법대로 살아라,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26,4) 재앙을 내리겠다고 거듭거듭 일러주었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재앙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오직 우리의 회개만을 기뻐하시고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유다는 회복되리라(예레 30,1-35,19)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는 새 계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30,22; 31,1.33 ; 32,18)
예레미야 30-33장은 흔히 ‘위로의 책’ 또는 ‘구원신탁’이라 불립니다.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유다의 죄를 법대로 벌하시지만, 그 고난의 때를 겪은 다음에는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누구 하나 기억해주는 이 없어도 하느님은 잊으시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셔서 새 계약을 맺어 주시리라고 밝히십니다. 우리 인간들이나 하느님을 잊어 버리지,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심을 이사야와 함께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나는 한번도 잊은 일이 없었다”(31,20).
근위대 울 안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가 땅을 사서 옹기그릇에 넣어 봉인한 것도 하느님께서 장차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실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키야와 그 신하들은 위기가 닥치자 하느님의 율법대로 노예를 다 풀어주었다가, 위기가 사라지자 다시 잡아들여 종으로 삼는 죄를 범합니다. 몸에 밴 그릇된 생활양식을 뜯어 고쳐 바로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예레 36-52장)
마침내 성벽은 뚫리고(예레 36,1-45,5)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에디오피아 사람은 누구입니까?(38,7-13)
유다 왕 여호야킴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한 다음 단식일에 성전에 가서 읽어주라고 명하십니다. “내가 온갖 재앙을 내리기로 하였다는 말을 듣고 유다 가문이 그 못된 생활태도를 고칠지 아느냐?”(36,3)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씀을 다 듣고 나서도 겁을 내지 않았고 옷을 찢지도 않았습니다”(36,24). 오히려 예레미야와 서기 바룩을 잡아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렇지만 여호야킴의 아들 여고니야(여호야긴)는 즉위한 지 몇 달이 안돼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여호아하즈의 동생인 시드키야가 새 왕으로 앉혀졌습니다. 시드키야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바빌론에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바빌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 예레미야는 민족배반자로 몰려 구덩이에 갇혀 죽을 뻔 하다가 간신히 목숨만 구한 채 갇혀 지내게 됩니다.
마침내 시드키야 11년 4월 (기원전 587년 7월)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유다는 멸망당합니다. 주님께서 이십 여 년 이상 타일러주신 말씀을 듣지 않은 채 파멸의 길을 간 것입니다. 민족의 비극을 목격한 예레미야는 바빌론이 세운 지도자 게달리야가 암살당한 뒤, 요하난 일파에 끌려 이집트로 끌려갔습니다.
하느님은 만국의 운명을 결정하시니
(예레 46,1-51,64)
하느님께서는 어떤 자격으로 만백성의 운명을 결정하십니까?(46,18; 51,57-58)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주변 민족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일러주십니다 먼저 이집트가 바빌로니아에게 형편없이 당할 터인데, 이는 바빌로니아가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벌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야곱의 후손들은 고향에 돌아와 살게 되리라고 희망을 던져주십니다. 이어 불레셋족, 모압,암몬, 에돔, 다마스커스, 아랍 부족들, 엘람 등 주변 민족들의 몰락을 예언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최강대국 바빌론 역시 다른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리라고 밝히십니다. 한 때 바빌론은 “야훼의 손에 들린 금술잔, 무기, 망치”(51,7.20)로 쓰였으나, 이제 “벌을 면할 길 없는 바빌론의 죄가 하늘에 닿았고 구름에 미쳤기”(51,9)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뭇 민족의 왕이십니다.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 할지라도 그분의 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멸망은 국가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지켜 약한 이(나라)를 얼마나 돌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예레 52,1-34)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유대인은 모두 몇 명입니까?(52,28-30)
부록으로 덧붙인 이 마지막 대목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왕과 사제와 기술자 등 지도층은 바빌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이집트 등 주변 각 나라로 흩어져 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흩어짐(디아스포라)이 본격적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 바빌론 유배는 유대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자 하느님께 돌아온 위대한 각성의 시기였습니다. 끝모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새 삶을 가꾼 것입니다.
애가는 어떤 성서인가요?
<새김과 나눔>
주님, 이 비참한 몸을
보살펴 주십시오(애가 1-5장)
첫째 애가: 야훼여, 이 비참한 모습을(애가 1,1-22)
시인은 자신이 당한 재난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1,18)
시인은 먼저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처참한 모습을 슬피 바라봅니다. 이 백성이 알뜰히 아끼던 것은 원수가 모조리 손아귀에 넣었고, 주의 성역에 들여놓지 말라고 하신 오랑캐들이 성소에까지 밀어닥치는 꼴을 보게 된 시인은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시인은 “야훼께 거스르기만 하던 시온, 정녕 죄를 받고 말았구나”(1,5)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동시에 적군을 불러들여 나의 군대를 쳐부순 이는 주님이라 고백함으로써(1,15), 단지 적의 세력이 우월해서 진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적까지 관장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능력과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 일임을 밝힙니다.
둘째 애가: 주께서 진노하시던 날(애가 2,1-22)
시인은 어떤 자세로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라고 일러 줍니까?(2,18-19)
시인은 둘째 애가에서 한층 더 절절하게 예루살렘의 참상을 호소합니다. “들리는 것은 신음소리, 한숨소리뿐이고”(2,5), “시온에 축제와 안식일이 언제 있었던가 기억에서마저 사라지게”(2,6) 될 정도입니다. “울다 지쳐 눈앞이 아뜩하고 애가 끊어지는 것 같은”(2,11) 이 현실에 부딪혀, 그는 거짓 평화와 안정을 외쳐 제 구실을 못한 거짓 예언자를 규탄합니다. “네 죄를 밝혀 운명을 돌이켜 주어야 할 것을, 허황한 거짓 예언만 늘어놓다니!”(2,14).
셋째 애가: 야훼께 돌아가자(애가 3,1-66)
시인이 주님께 부르짖었을 때 주님은 어떻게 응답해 주셨습니까?(3,55-59)
셋째 애가는 앞의 두 애가와 달리 공동체의 시련보다 한 개인의 곤궁한 처지를 애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마치 예레미야의 고백에서처럼 주님으로 인해 날마다 뭇 사람에게 웃음거리 놀림감이 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 야훼의 사랑 다함 없고 그 자비 가실 줄 몰라라”(3,22)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고 야훼께 돌아가자”(3,40)고 권유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아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넷째 애가: 네 벌은 이제 끝났다(애가 4,1-22)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온 죄악은 무엇입니까?(4,13.17)
“자애로운 여인도 제 자식을 잡는”(4,10) 극도로 비참한 현실 앞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의 죄악이 소돔보다 크다고 고백합니다. 외세에 의존하여 구해주지도 못할 나라를 부질없이 기다린 불신과 어리석음과 불의를 저지른 탓임을 밝히면서도, 시온의 벌은 이제 끝났다고 희망을 던져줍니다.
다섯째 애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가 5,1-22)
시인은 마지막으로 무엇을 들어 하느님의 자비를 호소합니까?(5,22)
국가가 멸망당한 뒤 이스라엘 백성은 “아비 없는 고아, 과부”(5,2-3) 신세가 되어 모든 즐거움이 사라져버렸음을 애소합니다. 스스로의 죄 때문에 망했음을 고백하면서도, 죄인은 영원히 다스리실 야훼께 버리지 말기를 호소합니다. 그분은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심을 굳게 믿기에 말입니다.
바룩서는 어떤 책인가요?
바룩서란 성서 이름은?
바룩서는 제2경전 중에서 집회서 다음으로 나오는 성서입니다. 책의 첫머리에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은 바룩이 바빌론에서 쓴 것이다”(1,1)로 되어 있어, 그의 이름을 따서 바룩서라 불리게 되었어요. 당대의 집필 관행상 실제의 저자 이름을 밝히기 보다는 다른 유명한 사람이나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어서 책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별도로 전해 내려온 예레미야의 편지도 맨 뒤에 덧붙여지게 되었구요.
누가 썼나요?
일부 학자들은 바룩 1,1-3,8의 내용이 예레미야 예언자를 연상케 하는 용어나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597년에서 539년에 이르기까지의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이 언급된다는 것을 들어, 바룩이 집필했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해요. 그렇지만 나보니두스의 아들 벨사살을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들 벨사살”(1,11)이라고 그릇되게 제시하는가 하면, 본문 사이에 서로 모순되는 면도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팔레스티나의 유다인이 따로 전해 내려오던 시편을 모아서 머리말을 붙였을 것으로 보여요.
예레미야의 편지(6장) 부분도 예레미야가 바빌론에 유배된 사람들에게 최소한 한 차례 편지를 띄웠을 뿐 아니라(예레 29,1-23), 예례미아서와 유사한 어휘나 표상이 상당히 많이 나오긴 해요. 하지만 이 또한 유배 이후의 성서구절에 꽤 많이 의존하고 있으며, 종교적인 깊이나 감수성에 있어서도 예레미아서에 못 미치는 점을 보면 후대의 인물이 작성했을 것으로 보여요.
언제 썼나요?
머리말에 “이 책은 갈대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불살라 버린 지 오 년째 되던 해 바로 그 달 칠일에 기록된 것”(1,2)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바룩서는 몇 개의 구분되는 내용이 한데 묶여진 것이므로 최종 편집연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이 개진되고 있습니다. 유배 시기서부터 기원후 70년까지 폭넓게 논의되고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기원전 200-60년경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해요. 제2이사야·다니엘·욥기·집회서 등 후기 저작물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 거주 유다인들이 오랫 동안 살아왔다고 묘사되어 있으며(3,10),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에게 유순하게 처신하라고 권유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레미야의 편지는 기원전 540년에서 100년 사이에 원본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봐요.
왜 썼나요?
바룩서는 다양한 내용이 혼합되어 있어서, 어떤 한 가지 의도로 쓰여졌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과거에 지은 죄를 참회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온다는 희망 아래 외부 권력과 불필요한 마찰을 빚지 말고, 율법을 중심으로 굳게 뭉친 공동체로 성장할 것을 촉구하고 있어요.
<새김과 나눔>
바룩서 저자는 과거에 지은 죄를 참회하는 가운데 미래의 희망을 간직하라고 촉구합니다. 2000년 희년을 앞두고 있는 우리 가정, 우리 교회는 지난 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아 네가 행복하구나
(바룩 1-6장)
우리는 죄를 지어(바룩 1,1-14)
바빌론의 모든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읽어준 사람은 누구입니까?(1,3)
바룩은 바빌론에서 이 책에 담긴 말씀을 기록하는 한편, 바빌론에 사는 모든 주민들에게 그 내용을 읽어주어요. 그들은 눈물을 흘리고 단식하며 각자가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내어 예루살렘에 보내요. 예루살렘 주민들이 계속해서 제물을 봉헌하면서, 하느님께 죄를 지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격분과 진노를 받는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청하면서요.
고백의 기도(바룩 1,15-3,8)
주님의 영광과 정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2,18)
먼저 하느님 앞에 죄를 짓고 그분에게 순종하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털어 놓아요.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신 날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다른 잡신을 섬겼던 자신들에게 벌을 내리셨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고백해요. 하지만 하느님은 놀라운 힘을 지니신 분이시니, 이방인들 사이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자신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십사고 간청해요. 죽은 자들은 주님의 영광과 정의를 찬양하지 못할 것이니, 살아 있을 동안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요.
지혜 찬가(바룩 3,9-4,4)
무엇을 알게 되었을 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4,4)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에서 늙어가게 된 것은 지혜의 샘을 외면했기 때문이에요.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하는 지혜의 길을 찾아내셔셔 이스라엘에게 주신 분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요.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을 기록한 책이 바로 지혜이니, 그 지혜의 빛을 따라 밝은 길을 걸어가라고 촉구해요.
용기를 내어라(바룩 4,5-5,9)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백성은 어디로 몰려옵니까?(4,36-37; 4,5)
이스라엘이 이방으로 팔려간 것은 멸망시키려 한 것이 아니니 낙심하지 말라고 해요.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십 배의 열심으로 하느님을 찾으면, 그분께서 사방에 흩어진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블러 모으실 거라고 일러요.
예레미야의 편지(바룩 6,1-72)
하느님께 지은 죄 때문에 바빌론에 끌려가게 되면, 사람들이 은과 금과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섬기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 예고해요. 하지만 그런 우상은 스스로 걸어다니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하니, 그것들을 두려워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일러요.
<새김과 나눔>
바룩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니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나는 어느 경우에 사람들에게 행복하다고 말을 건넵니까?
에제키엘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이 책은 예언자 에제키엘이 말과 삶으로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적은 책이라 하여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에제키엘’이라 했어요. 후기 예언서 중 이사야, 예레미야와 함께 분량이 많아 대예언서로 분류되지요. 에제키엘은 본래 사독 계열의 사제인 부지의 아들로 태어난 예루살렘의 사제였어요. 그 이름의 뜻은 ‘하느님은 강하시다’ 또는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신다’입니다. 그는 바빌로니아가 여호야긴 왕을 잡아간 일차 유배 때(기원전 598년) 바빌로나아로 끌려갔다가, 오년 후인 기원전 593년경 바빌로니아의 그발 강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그 당시 시드키야가 다스리던 유다는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며 이집트에 의존하며 안일하게 살고 있었어요. 이미 예루살렘에서 예레미야의 활동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에제키엘은 예언자로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아울러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의 약속을 선포하였죠. 그는 기원전 571년까지 22년 동안 예언자로 활동하였답니다.
언제 누가 썼나요?
물론 이 예언서의 골격은 에제키엘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죠. 아마도 그가 활동하던 시기(기원전 593-571년)에 대부분의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여겨져요. 하지만 현재의 에제키엘서는 그의 정신과 사상을 잇는 일단의 사제들(에제키엘 학파)이 그의 예언을 시기별로 새롭게 배열하면서 가필하고 보완하여 편집 완성한 것이라고 추정해요. 적어도 바빌론 유배를 끝내고 돌아갈 때쯤(기원전 538년)에서는 그 꼴이 완전히 잡혀 있었을 거에요.
왜 쓰여졌나요?
에제키엘은 바빌론 유배시기를 전후하여 그 전에 활약했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맥을 잇고 유배기 후반부에 활동했던 제2이사야보다는 앞서는 예언자입니다. 다른 동포들보다 먼저 바빌론 땅에 끌려왔던 에제키엘은 남아 있는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는 동시에 끌려온 동포들에게 야훼신앙과 희망을 안겨주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먼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이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지 않는 죄 때문에 받는 하느님의 심판임을 분명히 밝혀요. 그러나 하느님은 의로우신 분이므로 의롭게 생활하면 살 길을 열어주신다고 알려주죠.
무엇보다도 사제이자 예언자인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온 세계에 미치는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특별히 강조해요. 그분이 이스라엘을 비롯한 각 나라의 불의와 불충을 심판하시는 뜻은 당신을 알게 하여 당신께 돌아와 바르게 섬기게끔 이끄시기 위힘이었어요. 궁극적으로 그분은 새 마음을 지닌 새 백성들이 당신을 섬기는 새로운 성전, 새 세계를 이루시려는 구원의지를 강하게 지니셨죠.
오늘도 에제키엘은 대변혁기에 처한 우리에게 새롭게 각성하여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과의 계약에 충실할 것과 모든 사람과 형제적 사랑을 나눌 것을 일러주고 있어요. 하느님의 심판은 언제든지 임할 수 있으니, 새 마음과 새 정신을 갖고 새롭게 열리는 하느님 백성의 미래에 동참하라는 촉구인 셈이죠.
<새김과 나눔>
각종 유사예언들의 목청이 높은 20세기 말 현재, 미래의 모습이 어떨 것인가를 알리기보다 현재의 우리 모습을 드러내며 회개를 촉구하는 에제키엘이 전하는 말씀을 들으며, 새해에 우리가 바꾸어야 할 삶의 지세는 무엇인지 묵상합시다 ?
너 사람아 일어서라
(에제 1-24장)
예언자로 불림받은 에제키엘(에제 1,1-3,21)
에제키엘이 받아 먹은 두루마리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습니까?(2,10)
바빌로니아에 끌려온 지 오 년째 되는 날, 에제키엘은 놀라운 환상을 봅니다. 사람과 사자 등 네 가지 형상을 한 신비로운 존재들이 이끄는 바퀴달린 수레 위에 어떤 분의 영광이 불처럼 환하게 비쳤어요. 광야시절에 있었던 계약의 궤를 표상하는 듯한 이 수레에 계신 하느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먹으라고 에제키엘에게 이르셔요.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파수꾼으로 그를 세운다고 밝히셔요. 에제키엘을 가리키는 “너 사람아”란 말의 원어는 “베네 아담”인데, ‘사람의 아들’, 곧 먼지처럼 약하고 쉽게 사라지는 허약한 인간임을 뜻해요.
이스라엘의 죄와 멸망의 예언(에제 3,22-7,27)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6,14;7,9.27)
에제키엘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몸짓으로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멸망당할 운명임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멸망당하는 까닭은 우상을 섬기고 불의를 저지르는 죄 때문이지요. 이미 코앞에 닥친 그 처참한 멸망의 운명을 맛보아야 그들은 참 하느님이 야훼이심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랍니다.
예루살렘의 죄와 벌을 알리는 환상과 예언(에제 8,1-19,14)
이스라엘 백성이 새롭게 하느님의 백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11,17-20)
마치 엘리야 예언자같이 에제키엘도 하느님의 기운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려갑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자리인 성소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우상숭배와 불법의 현장을 목격해요. 아울러 그들에게 내리는 처벌도 지켜보지요.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은 성전을 떠나지만 그분은 새로운 회복의 길도 일러주셔요. 예언자는 유배생활을 상징으로 보이면서, 지도자인 장로들과 거짓 예언자들의 잘못을 고발하지요. 그러면서 이 모든 죄의 책임은 개인이 지는 것이니 새 마음을 품고 새 뜻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18,32).
최후의 날은 다가오고(에제 20-24장)
하느님께서 이제껏 이스라엘에게 화풀이하지 않으신 까닭은 무엇입니까?(20,9.14.22)
하느님은 출애굽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범한 죄를 낱낱이 제시합니다. 그분이 부모처럼, 약혼한 인인같이 보살폈건만, 이스라엘은 조금도 회개치 않고 우상숭배로 몸을 더럽히고 죄없는 피를 흘리는 불법을 자행해 왔어요. 그 결과 예언자의 아내의 죽음이 상징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애타 사모하던 것들을 모두 빼앗기는 멸망의 날이 닥쳐 왔음을 알리죠.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그 의로우신 심판 속에 치열한 구원의지도 들어 있음을 깨우쳐 준답니다.
야훼가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리라(에제 25-48장)
주변 국가의 운명에 대한 예언(에제 22,1-32,32)
바빌론 왕이 각 나라를 치는 칼은 누구로부터 받은 것입니까?(30,25))
이스라엘에 이어 주변에 있는 각 나라의 잘못에 대해서도 하느님의 처벌이 임합니다. 암몬과 모압, 에돔과 불레셋에 하느님의 심판이 내려요. 그런 다음 띠로에 내리는 하느님의 선고는 상당히 길죠(26,1-28,19). 반바빌론 세력의 핵심 중의 하나였던 띠로는 험준한 바윗섬 사이에 있어 난공불락을 자랑했어요. 게다가 상업도시로 유명하여 신이라도 된 양 그 부유함과 풍요로움을 뽐냈죠. 이와 같이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교만한 띠로 역시 그것 때문에 멸망당하리라는 하느님의 심판말씀을 듣게 되어요.
시돈에 이어 이집트에 내리는 선고도 아주 길어요(29,1-32,32). 동방의 패권국가로 유다가 끝까지 희망을 걸었던 이집트 역시 하느님의 손길에 황폐해지고 말아요. 아마도 예루살렘의 멸망 당시에 쓰여졌으리라고 추정되는 이 대목은 세계 만방을 좌지우지하시는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자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믿고 그 힘을 마구 쓰는 어느 나라든지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성서와 셰계사는 보여주고 있답니다. 아울러 그 심판과 처벌은 모두 참 하느님을 바로 알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려주지요(25,5;26,6;28,26;; 32,15).
공동체의 회복을 알리는 희망의 예언(에제 33,1-39,29)
마른 뼈들을 살린 것은 무엇입니까?(37,1-14)
마침내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습니다(33,21). 일찍이 하느님께서 여러 예언자들을 시켜 경고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흩어지고 허약해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아 목자처럼 돌보아주고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목자의 표상과 비교해 보세요). 그들에게 새 마움과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조의 그 때처럼 하느님의 영은 마른 뼈들을 살리고 갈라진 두 민족을 하나로 회복시켜 주겠다고 이르셔요. 결국 하느님의 심판은 참다운 하느님의 백성공동체를 이루시려는 정화의 과정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또 하느님의 영에 힘입을 때만이 무능력하고 허약한 ‘사람의 아들’은 생명을 얻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피조물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답니다.
새 성전과 새 공동체(에제 40,1-48,35)
하느님이 세워주신 새 도읍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48,35)
새로운 공동체가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길 새 성전은 왕궁이나 왕의 기념비 같은 속되고 더러운 것들과 엄격하게 분리되어 세워집니다. 또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하게 지키기 위한 조치들로 자세한 규정이 정해져요. 낙원에서 흘러나온 강들처럼 성전에서 솟는 샘의 환상은 하느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입증해주어요.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 바르게 섬길 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회복시켜 주신 새로운 땅이 열두 지파에게 주어져요. 이제는 그 도읍지의 이름이 의미하듯 ‘하느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다니엘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이 책은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겪은 체험과 다니엘의 환시를 담은 책으로 그 중심인물의 이름을 따서 ‘다니엘’이라 불렸어요. 칠십인 역 성서에서는 이 책을 대예언서로 분류했지만(그래서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에제키엘 예언서 다음에 다니엘서를 놓았지요), 히브리 성서에서는 성문서에 포함시켜 에즈라서 앞에 놓지요.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느님은 나의 심판자’ 또는 ‘하느님의 심판자’입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으로 성서에 나오는 이는 다윗의 둘째 아들(1역대 3,1)과 바빌론에서 귀환한 이다말 일가의 지도자(에즈 8,2)뿐이에요. 즉 다니엘서에 나오는 유배기의 현자였던 이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다니엘은 옛날부터 현자로 유명했던 전설상의 인물 이름을 빌은 것이 아닌가 여겨져요. 왜냐하면 노아와 욥과 같이 언급되는 예가 있으니까요(에제 14,14; 28,3 참조).다니엘서는 구약성서에 실린 유일한 묵시문학서로서 신약성서에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마태 24장; 마르 13장 참조). 묵시문학서는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활발하게 쓰여졌던 하나의 독특한 문학유형이랍니다. 묵시문학은 이 세상의 종말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갖가지 상징과 환시가 풍부하게 나오지요. 다니엘서와 요한 묵시록은 묵시문학의 처음과 끝을 대표하는 성서이지요.
언제 누가 썼나요?
예전에는 이 성서에 나오는 대로 기원전 6세기에 예언자 다니엘(마태 24,15)이 썼다고 보았어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다니엘이란 고대 현인의 이름을 빌어 기원전 2세기, 즉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년)가 유다교를 없애려고 하던 마카베오 시기에 쓰여졌다고 보아요. 누가 썼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리스 종교에 대항하여 유다교를 옹호하려 했던 예루살렘 출신의 학자나 서기관이지 않을까 추정하기도 해요. 제2경전에 실린 네 가지 짧은 이야기는 그 후에 추가된 것이구요.
왜 쓰여졌나요?
다니엘서는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벨사살과 메데의 다리우스, 페르시아의 고레스 등 기원전 6세기의 왕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역사적 배경은 유다교를 극심하게 박해했던 안티오쿠스 4세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죠. 다시 말해 다니엘서는 어떤 희망도 없고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처지에서 그 고난의 때, 인간이 다스리는 세상은 멀지않아 끝나고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 차지할 하느님의 나라가 꼭 오리라고 선포하죠.
마카베오서에서 보듯 신앙을 지켜 순교하느냐 아니면 배교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다니엘서는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며 당신의 뜻대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전해오는 예언과 일화 및 환시 등을 통해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어요.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백성들이 늘 깨어 있어 예기치 않게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어 당신의 나라를 오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굳굳하게 버텨 나가도록 격려하고 있는 것이죠.
언제 어디서건 다니엘서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눈을 들어 시대를 분별하며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충직하게 신앙을 지켜갈 것을 촉구하고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힘을 주고 있답니다.
<새김과 나눔>
종말의 때에 대한 관심이 높은 요즘, 다니엘서에 따라 그 때를 인간의 시간표에 맞추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간표를 분별하며 기다릴 때,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은 무엇일까요?
마지막 그 때가 오기까지
(다니 1-14장)
다니엘서는 제2경전을 포함하여 모두 14장인데, 그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지혜와 능력은 하느님의 것(다니 1,1-6,29)
이방 왕들은 다니엘의 하느님을 어떤 분이라고 고백합니까?(2,47; 3,28-33; 4,31-32; 6,26-28))
이 대목에서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가 삼인칭으로 기술됩니다. 유다가 멸망된 뒤 유다의 지도층과 함께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명도 바빌론으로 끌려 갔어요. 그들은 이방인의 땅에 가서도 부정을 타지 않게 음식을 가리는 등 율법을 충실히 지켰어요.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남다른 재능을 주셔서 관리로서 일하게끔 하셨지요. 특별히 다니엘에게는 어떤 환시나 꿈이든지 다 풀어낼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주신 그 은혜로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벨사살 왕에게 나타난 이상한 현상의 뜻을 풀어주어 고관이 되지요.
한편 우상을 숭배하라는 느부갓네살 왕의 명을 거역한 세 젊은이는 불가마 속에 던져지지만 하느님의 천사가 지켜주어 전혀 해를 입지 않아요. 또 다니엘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메대의 다리우스 왕의 금렴을 어긴 죄로 사자굴 속에 던져지지만, 그도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하게 되지요. 결국 다니엘의 지혜로운 풀이와 젊은이들의 충직한 신앙은 이방인 왕들에게 하느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일깨워 주었어요. 아울러 주께서는 신앙에 충실한 이들을 지켜주고 계심을 증거해주죠.
하느님께서 정하신 끝날은 오고야 만다(다니 7,1-12,13)
마지막 날에 사람 모습을 한 이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누구에게로 나아갑니까?(7,13; 마태 26,64))
다니엘의 환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대목은 모두 다니엘의 입장에서 일인칭으로 기술되어요. 이미 앞에서 다니엘은 모든 환시를 풀 수 있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이라고 소개된 바 있지요. 다니엘이 본 환시는 당시 근동의 패권을 다투던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앞날을 다룬 것이지만, 어느 특정한 나라의 운명을 알려준다기보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인간 권력의 최후 모습을 일러주는 것이지요. 마지막 날에는 모든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사람 모습을 한 이에게 맡겨지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되지요(7,13-14). 종말의 때까지 남은 삼년 반, 1290일, 1335일 등은 확정된 날짜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수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다니 3,24-90; 13,1-14, 42)
세 젊은이의 노래(3,51`-90)를 큰 소리로 읽으면서 우리의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그리스어 성서에만 실려 있어 제2경전이라 불리는 이 대목에는 “당신께 희망을 건 사람들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가 두 편 나옵니다. 진실로 하느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께 언제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일깨워줍니다. 수산나와 벨과 뱀 이야기는 독립적인 이야기로 하느님만이 참된 주님이시며 그분은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돌보아 주심을 입증하고 있지요.
호세아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호세아' 이라는 성서 이름은?
이 책은 호세아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적은 책이라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호세아’라 불렸어요. 호세아서는 12개의 소예언서 중 첫머리에 놓인 성서이지요.호세아란 이름의 뜻은 ‘야훼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북부 이스라엘에서 브에리의 아들로 태어나 예언자로 활동하다 죽은, 북부 이스라엘에서만 활동한 유일한 예언자이지요. 호세아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전성기 때인 여로보암 2세 시대에, 대략 기원전 745년경에 예언자로 불림받아 북이스라엘이 멸망(기원전 722/721)당하기 얼마 전까지 20년 가량 예언자 활동을 했다고 여겨져요. 그러니까 그는 남부 유다 왕국에서 활동하던 아모스와 같은 시기에 예언자로 일했던 거지요. 그 당시 이스라엘은 비탈길을 굴러 떨어지는 형색으로 혼란과 불의, 우상숭배가 심했어요. 그런 속에서 호세아는 자신의 상징적 삶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알려주었지요. 하지만 그의 예언을 끝끝내 듣지 않은 왕과 백성들 탓에 결국 나라는 멸망당하고 말았답니다. 특히 호세아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 부부간의 사랑에 빗대 나타냈기에, ‘사랑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었지요.
언제 누가 썼나요?
물론 기원전 8세기에 예언자 호세아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골격을 이루지요. 그러나 기록은 호세아가 죽은 다음에 그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추정해요. 북이스라엘이 망한 후에 그 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남 유다에서도 그의 예언은 계속 살아 있었거든요. 아마도 호세아서를 편집하여 현재 모습으로 만든 사람들은 남 유다 사람들일 거예요.
왜 쓰여졌나요?
북쪽에서는 아시리아가 무섭게 내리누르고 있는데, 약소국 이스라엘은 살아 남으려고 이 나라 저 나라의 도움을 빌러 다니고, 20여 년 사이에 왕이 다섯 명이나 바뀌는 혼란 속에서 백성들은 풍요의 신인 바알에게 매달렸지요. 이런 상황에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살아나려면 하느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는 회개의 길을 걸으라고 선포해요.
호세아가 증언하는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시고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연인 같은 분이에요.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호소하고 있어요.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몹시 꾸짖으시다가도, 마치 호세아가 바람난 아내를 다시 맞아들이듯당신께 돌아오면 너그러이 받아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이시라는 거예요.
하지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기도, 그분의 사랑을 맛보고 그분이 뜻대로 살아가기도 결코 쉽지 않지요. 그래서 호세아는 지혜와 슬기를 다해 이를 깨달으라고 촉구하지요(호세 14,10). 그의 가르침은 시대를 넘어 오늘 우리에게도 결코 사라지거나 약해지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그분 안에 머물 것을 일깨워주고 있답니다.
<새김과 나눔>
호세아는 혼인서약과 부부간의 사랑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나타냈습니다. 우리 각자의 혼인생활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엿보신 적이 있으면, 서로 나눠 보십시오.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호세 1-14장)
호세아서는 모두 14장인데, 그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네 아내를 다시 사랑해 주어라(호세 1,1-3,5)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시는 약혼선물은 무엇입니까?(2,21-25)
1장은 호세아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역사적 상황과 그의 결혼생활을 서술하고 있어요. 호세아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죠. 이러한 그의 결혼생활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비유로 나타나지요.
2장에서는 본격적인 이스라엘의 죄가 고발되고, 아울러 하느님이 구원해 주시리라는 약속이 주어져요. 하느님께서 “곡식과 햇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나 그것도 모르고”(2,10) 바알을 섬기는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은 어디서 왔을까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깨우쳐 주시려고 그 모든 것을 빼앗는 심판을 내리시죠. 게다가 그를 꾀어내어 사랑을 속삭여 주셔요(2,16).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적극적이고 뜨겁답니다. 나아가 하느님은 정의와 공평 등의 선물을 주시고, 자연을 통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세 계약을 약속하시죠.
3장에서 호세아는 다시금 가출한 아내를 찾아 와 사랑해 줍니다. 하느님도 회개하여 돌아오는 이스라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3,5)주시겠다고 이르셔요.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들을 갖고파 그것을 주겠다는 우상을 좇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요(마태 7,33 참조).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호세 4,1-14,1)
지금은 무엇을 할 때라고 일러주십니까?(10,12; 13,13)
본격적인 호세아의 신탁입니다. 사제와 예언자, 왕족들이 저질렀던 잘못과 함께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지은 죄들이 구체적으로 고발되어요. 십계명을 지키지 않고(4,2), 하느님을 믿기보다 외세에 의존하며(7,8-12), 우상을 섬기면서 헛된 예배를 드리는(8,11-9,9) 이스라엘의 죄는 혼인서약을 저버리고 바람 피우는 여자의 모습과 같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을 때처럼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일러주셔요. 그분은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시지만, 그 벌은 멸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시려는 견책이었답니다(11장).
슬기가 있거든 이 뜻을 알아라(호세 14,2-10)
호세 13,14과 1고린 15,55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와 용서를 빌면, 하느님께서는 “그 병든 마음을 고쳐주고 사랑하여 주시겠다”(14,5)고 약속하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싱싱하고 풍요롭게 해주시며 죽음에서 빼내주셔요.
결국 이 모든 일을 깨달아 알아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을 바로 알게끔 하는 게 호세아의 목적이었어요. 성서에서 하느님을 안다는 말은 어떤 지식이나 머리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 실천적으로 하느님을 인정하고 따르는 삶을 가리킨답니다.
요엘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이 책은 예언자 요엘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적은 성서라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요엘’이라 불렸어요. 요엘서는 후기 예언서에 속하는 12개의 소예언서 중 두 번째에 놓여 있는 성서이지요.
누가 썼나요?
예언자 요엘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성서의 주된 내용이지요. 요엘이란 이름의 뜻은 ‘야훼는 하느님이시다’ 또는 ‘야훼는 나의 하느님’입니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매우 흔했습니다. 예언자 요엘은 오직 “브두엘의 아들”(요엘 1,1)이란 소개말 이외에는 달리 언급된 내용이 전혀 없어 그 정체를 자세히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요엘서를 통해 보면 그는 경신례에도 밝았던 예언자이며, 뛰어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여러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도 나름대로 야훼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있게 선포했답니다. 그 중에서도 그 날에 이루어질 ‘하느님 영의 강림’을 밝힌 내용은 신약성서에 큰 영향을 미쳤지요(사도 2,17-24). 그래서 요엘은 ‘영의 예언자’ 혹은 ‘성령강림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요.
언제 쓰여졌나요?
예언자 요엘이 활동한 연대를 알 길은 막연하지요. 그렇지만 학자들은 요엘서의 내용과 문체, 어휘 등을 잘 따져서 여러 가지 견해를 제기하고 있어요. 대체적으로 예전에는 바빌론 유배 이전의 왕조 시기로 보았지만, 요즘에 와서는 유배 이후인 대략 기원전 400년경을 요엘서의 작성시기로 본답니다.
요엘서에는 다른 예언서들보다 경신례를 많이 강조하고 있어요. 단식과 성회, 사제와 제단에서 시중드는 자, 성전 제사 등에 대한 언급이 그것들이지요. 반면에 왕이나 북 이스라엘 왕국 및 사마리아인에 대한 언급도 없지요. 이런 모든 정황들은 바빌론 유배 이후 에즈라·느헤미야 개혁을 거치면서 기원전 5세기에 형성된 유다 경신례 공동체의 특성에 잘 들어맞는답니다.
왜 쓰여졌나요?
페르시야 시대 말기인 기원전 5세기경,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성벽도 쌓고 유다교도 형성하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어요. 그리하여 그 체제에 안주하려는 경향도 거세졌지요. 바로 이러한 때에 요엘은 메뚜기 재앙을 체험한 사실을 들어 ‘야훼의 날’을 일깨워주지요.
메뚜기떼나 가뭄 같은 재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의 표징이지요. 요엘은 이것을 보고 정신 차려 다시금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도록 촉구하는 것이지요(요엘 2,27; 4,17). 그는 하느님께서 뭇 민족을 심판하시지만, 만민에게 영을 불어넣으시고 그 심판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꿔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전하며 희망을 전해준답니다.
결국 공동체가 지금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가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 머물 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죠.
<새김과 나눔>
요엘은 메뚜기떼와 가뭄을 야훼의 날을 미리 알리는 표징으로 보았습니다. 내 삶에서 혹은 우리 시대의 어떤 사건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 경우가 있었으면 서로 나눠 보십시오.
그 깨달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습니까?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라(요엘 1-4장)
요엘서는 4장인데, 내용에 따라 뚜렷하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주께서 거둥하실 날이 왔다(요엘 1,1-2,27))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듣고 약속해 주신 내용은 무엇입니까?(2,21-24)
먼저 요엘은 모든 주민들이 귀를 기울여 자신의 말을 듣고 대대로 후손에게 전할 것을 요청합니다(1,2-3). 즉 자신이 전하는 말은 지금 당장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미래 세대들에게까지도 유효한 하느님의 말씀임을 밝힌 것이죠. 이와 같이 성서는 한 세대를 넘어 모든 세대를 위한 것이랍니다.
요엘은 뒤이어 메뚜기떼로 인한 엄청난 재앙을 애소합니다. 하느님께 드릴 제물조차 없을 정도로 피해는 극심하죠. 지금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메뚜기떼가 한 번 지나가면 푸른 초목이 다 없어질 정도로 피해가 막심하답니다. 요엘은 이를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야훼께서 거둥하실 날”이 오고 있다는 징조라고 풀이해요(1,15). 그는 사태를 적당히 무마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심각성을 직시하며 눈을 들어 하느님을 보라고 이끌죠. 바로 이것이 예언자의 모습이지요.
주께서 거둥하실 날에 벌어질 일은 온 우주에 미치며, 그 위력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거세요. 그러나 요엘은 온 백성이 모여 외적(단식·옷 찢음)으로뿐 아니라 내적(심장 찢음)으로 참회하여 울부짖으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약속을 전해요. 이 일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은 참 하느님을 깨닫게 되고 그분을 찬양하게 되리라고 밝히구요(2,26-27).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요엘 3,1-4,21)
마지막 날이 오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예언됩니까?(3,5; 참조 로마 10,13)
1장과 2장이 실제로 있었던 메뚜기떼와 가뭄으로 인한 재앙과 약속이라면, 3장과 4장은 앞으로 있을 일의 예언입니다. 무엇보다도 야훼의 날이 오면 만민에게 하느님의 영이 내려질 것이라고 밝혀요. 전에는 72인 장로에게만 영이 내렸지만(민수 11,24-29), 이제는 종들에게까지도 영이 내리죠(3,2). 이는 새로운 하느님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임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오순절 사건을 이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였던 것이죠(사도 2,17-21).
4장에서는 마지막 날 불의한 각 나라에 내릴 하느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나열되어요. 비록 유다 중심적으로 기술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보잘것 없고 약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강한 자들의 폭력을 심판하시는 것이죠. 이 심판은 전면전으로 벌어져, 하느님의 용사들도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어”(4,10; 비교 이사 2,4; 미가 4,3)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은신처, 산채가 되시어 그들을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세요(4,16).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야훼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4,17)이시라는 사실이죠. 결국 요엘은 일상에서 안일하게 사는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야훼의 날을 내다보며, ‘지금’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을 알아 섬기라고 호소하는 것이에요. 호세아서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서에서 하느님을 안다는 말은 실제 삶에서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따르는 삶, 곧 예수께서 일러주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삶을 가리킨답니다.
아모스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이 책은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적은 성서라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아모스’라 불렸어요. 아모스서는 유다 문학 사상 가장 먼저 쓰여진 예언서로 중요하지요. 비록 분량이 적어 후기 예언서에 속하는 12개의 소예언서에 속하지만, 다른 예언서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답니다.
누가 썼나요?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성서의 주된 내용이지요. 아모스란 이름의 뜻은 ‘주님을 짊어진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남 유다 사람으로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아모 7,14)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는 아니고 상당한 자기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주변의 국제정세나 유다와 이스라엘의 국내 사정에 밝은 걸 보면, 그는 꽤 많이 배운 사람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모스는 본래 예언자 가문에 속하지도, 왕실 예언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와 베델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전한 뒤, 그는 남 유다로 추방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구약의 위경들이 전하는 전설에는 아모스가 베델의 사제 아마니야의 아들에게 살해되었다, 또는 남 유다의 왕 우찌야에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모스는 하느님의 현존과 정의를 크게 강조하였기에 ‘정의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요.
언제 쓰여졌나요?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6-746) 시절로서 대략 기원전 76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아모스의 예언활동이 그친 얼마 뒤에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아모스가 선포한 신탁들을 모우고, 또 자신이 직접 밝힌 자서전적인 내용(7,1-9; 8,1-3; 9,1-4)을 덧붙여 아모스서의 골격이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남 유다에서도 계속 살아 움직여서 유다에 관한 내용이 뒷부분에 덧붙여졌지요. 아마 최종적인 아모스서의 형태는 다른 예언서들처럼 유배기나 그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추정합니다.
왜 쓰여졌나요?
아모스가 예언자로 등장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저물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이 위축된 탓에 기를 펴고 살면서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북 이스라엘의 부유층은 가난한 동족을 괴롭히는 불의를 자행하며, 자만과 향락 속에 빠져 안일하게 살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았으므로 그분의 보호를 받아 아무 일도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의 환상을 지니고, 자기식의 예배행위에만 열중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태평스레 있는 백성들에게 아모스는 무서울 정도로 엄하고 가혹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 심판은 그들의 잘못에 대한 처벌을 넘어,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실제로 계시며 그분은 정의를 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일깨워주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하느님 중심적인 생활로 되돌아갈 것을 강하게 일러준 것이죠.
<새김과 나눔>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될 때, 우리는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며 현실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불과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실현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살고 싶으냐? 야훼를 찾아라
(아모 1-9장)
아모스서는 9장인데,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나 야훼가 선고한다(아모 1,1-2,16)
하느님께서 심판을 선고하신 나라는 모두 몇 나라입니까?(2,21-24)
하느님께서 외치시면 가르멜 산마루의 푸른 초원이 말라버릴 정도로, 말씀의 힘은 살아 있고 대단합니다. 이제 그 하느님께서 다마스커스, 불레셋 등 여러 민족의 죄상을 드러내며 그들에게 멸망을 선고합니다. 그들의 죄는 다른 민족 사람들을 마구 다루고 죽인 잘못입니다. 그 누구라도 형제를 괴롭히고 생명을 짓밝는 자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욕보이는 짓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역시 죄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우상을 섬겨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힌 잘못을 범했다고 고발되죠. 그들은 자신들의 전존재를 하느님께 맡겨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규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게 된 것이에요.
네 하느님과 만날 채비를 하여라(아모 3,1-6,12)
아모스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두 가지 송가를 크게 읽어 보십시오(4,13; 5,9-8)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아모스의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아모스는 자신이 원하거나 자의 적인 판단에 따라 예언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의 왕실과 부유한 세도가와 그들의 귀부인들이 저지르는 불의를 규탄하며 멸망을 선고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다른 형제들을 자기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삼아 무시하고 괴롭히며, 오직 자기 중심적으로 허영심과 자만심에 빠져 살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도 성소에서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봉헌하며 감사예물을 끊임없이 바치지만, 아모스는 이
것 역시 살아 계신 하느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과 순종함이 없는 자기 기만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에 결국 하느님과 떨어져 죽음의 길을 가는 그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돌아와 살 길을 찾으라고 부르짖습니다.
다시는 뿌리뽑히지 않으리라(아모 7,1-9,15)
아모스가 본 다섯 가지 환시의 내용과 뜻은 무엇입니까?(7,1-9; 8,1-3; 9,1-4))
아모스가 본 환시들은 심판의 말씀을 한층 더 생생하게보완해 줍니다. 그러나 베델의 사제 아마지야는 그를 추방하여 그 말씀을 무시하려고 하죠. 하지만 먹을 양식은 넘쳐도 참된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리는 처지는 외적인 불행보다 더 심한 내적인 고통이요 심판입니다.
결국 아모스가 선포하는 요점은 하느님을 무슨 안전장치 쯤으로 여기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되고 결정적인 힘이신 하느님의 실재를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가(회개하여) 하느님만을 유일한 주님으로 섬기고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형제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 때, 그분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오리라는 선포랍니다. 누구든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습니다.
이 나라는 야훼의 왕국이 되리라(오바 1장)
‘오바디야’라는 성서 이름 "오바디야가 받은 계시”(오바 1,1)라는 첫머리에서 그 이름을 따 후대에 붙인 것이에요. 오바디야가 예언자의 이름인지, 다른 고유명사인지는 확실치 않아요. 오바디야서는 12소예언서의 하나로 구약성서 가운데서 가장 짧은 성서에요.
언제, 누가 썼나요?
오바디야서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어 꼬집어 말할 수가 없어요. 다만 그 내용으로 추정해 볼 때, 유다가 바빌론에게 멸망당한 뒤(기원전 587년) 얼마 되지 않아 에돔을 저주하는 예언(1-15절)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런 다음 유배기를 거치고 유다가 회복되면서 유다의 회복을 예언한 뒷부분(16-21절)이 덧붙여졌을 것이라고 보아요.
아마도 이 성서를 지은 이들은 바빌론에 유배갔다가 유다로 돌아온, 하느님 신앙이 독실했던 무리들 가운데 일부였을 거예요.
왜 썼나요?
유다와 유다의 동남쪽에 있는 에돔은 서로 티격태격했지만 서로를 형제국가로 여겼어요. 더구나 바빌로니아가 유다를 처음 쳐들어왔을 때(기원전 597년) 유다와 에돔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할 정도로 가까웠지요(예레 27,3). 그런데 막상 유다가 침공을 받아 멸망할 지경에 이르자, 에돔은 돕기는커녕 오히려 유다에서 제 몫을 챙기려고 나섰지요. 그래서 유다인들은 에돔을 미워하며 그들도 같은 꼴을 당하리라고 외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 성서에서 에돔에 대한 심판과 유다에 대한 구원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복수심이 아니라, 공의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로 갚아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국가의 멸망이라는 엄청난 파국을 겪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한 유다인들은 유다의 정치적인 회복을 넘어 하느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비전을 함께 담아 이 성서를 구성했던 것이지요.
무슨 내용인가요?
에돔에 내린 심판의 선고는 유다인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서 직접 내리십니다.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에돔인들은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이라고 자신들의 안전을 자부하지요. 이렇듯이 자신이 갖고 있는 그 무엇에 의존하고 신뢰를 두며 하느님 없이 사는 이들의 모습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자만하는 이들은 형편없이 낮아질 것이라고 예언되지요.
하느님의 능력은 무한하기에 모든 인간적인 예상치를 뛰어 넘습니다. 그 날, 야훼의 날이 오면, 에돔인들은 그들이 꽁꽁 숨겨둔 재화까지 약탈당하고 믿었던 동맹국의 공격을 받고 자취없이 사라질 정도로 망해버릴 것이에요. 왜 그렇게 될까요? 오바디야는 에돔이 곤경에 빠진 형제 국가를 돌보지 않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죠. 이는 비단 에돔과 유다라는 두 나라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형제관계로 엮어진 보편적인 모든 관계에 다 해당되는 것이죠.
마지막에 뭇 민족이 벌받고 유다인들은 다시 회복될 날이 오리라고 예언되어요. 이는 유다인 중심적인 내용이라기보다, 궁극적으로 역사를 지배하는 이는 하느님이시며 그분의 정의라는 믿음의 표현인 셈이에요. 그런 면에서 뭇 민족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의 정의와 영광의 표현인 것이구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야훼의 왕국”이란 약속은 구약을 넘어 신약까지 이어지지요.
요나는 어떤 책인가요?
요나란 성서 이름은? 요나는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다섯번째에, 그리스어 성서에서는 여섯번째에 나옵니다. 그런데 몇 번째에 나오느냐에 관계없이 언제나 ‘오바디야’ 다음에 나와요.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요나서의 내용이 “야훼께서 만방에 전령을 보내시어 하시는 말씀”(오바 1,1)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지요. 요나는 12 소예언서 중의 하나이지만, 다른 예언서와는 많이 달라요. 예언서는 보통 하느님께서 그 예언자를 통해 들려 주시는 말씀이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언자들의 행적도 간간히 들어 있긴 하지만요. 그런데 요나가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3,4)는 한 마디뿐이어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전하시는 뜻은 말만으로 한정되지는 않지요. 오히려 삶으로 드러내는 하느님의 뜻이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많으니까요. 대부분의 책 내용이 요나의 삶에 관한 것이라서, 책 이름도 요나라고 했답니다.
누가 언제 썼나요?
다른 예언서와는 달리 어느 왕 시절에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아서, 예전에는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7-747) 시절에 활약한 예언자 요나(2열왕 14,25)와 동일인물로 여겼지요. 그래서 12소예언서 묶음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안에서도 연대적으로 보아 중간에 위치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요나가 예언자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을 비롯하여 사용된 문체로 보아 여로보암 시대의 작품으로 볼 수가 없게 되었어요. 더군다나 본문 중에 “니느웨는 …… 곳이었다”(3,3)로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니느웨가 이미 멸망한 기원전 612년 이후에 요나서가 쓰여졌으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니까요.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원전 6-4세기경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보아요.
왜 썼나요?
요나는 자기 민족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백성이라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지만, 다른 민족은 그럴 수 없다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유다인들의 시야를 트여주기 위해서 쓰여졌어요. 그래서 첫 장면서부터 야훼를 공경하는 히브리 사람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주지요. 반면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한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살던 이방인들은 요나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곧바로 단식을 선포하며 왕에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베옷을 입고는 하느님께 탄원하는 경건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마음을 고쳐 먹고 행실을 바꾸기로 한 니느웨 주민에게 징벌을 내리실 수는 없지요. 하지만 요나는 여전히 징벌만을 요구하는 편협하고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편협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웃 민족을 배척하는 것이 과연 합당하느냐는 물음을 제기하고자 쓰여졌답니다.
<새김과 나눔>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때 누구에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
야훼의 눈앞을 벗어날 셈으로(요나 1,1-16)
요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1,9)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고는 하느님의 눈앞에서 벗어나려고 다르싯(=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타요. 바다에 풍랑이 일자 모든 뱃사공이 짐을 바다에 던지면서까지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하는데, 요나는 오히려 배 밑창에 내려가 잠들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인간의 일에도 무관심해지는 법이죠.
이렇게 눈앞의 현실을 보지 않고 자기 안에만 숨어드는 요나를 깨운 이는 바로 함께 배를 탄 선장이었습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 요나의 잘못 때문에 풍랑이 일게 되었음이 확실히 밝혀지게 되었죠. 뱃사공들은 달리 방도가 없어 마침내 요나를 바다에 집어 던지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을 보고 야훼 하느님께 제물을 잡아 바쳐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요나 2,1-10)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몇 일을 보내죠?(2,1)
바다에 떨어진 요나는 큰 물고기에게 삼켜져 컴컴한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면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요. 그 기도를 듣고 하느님께서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꺼내 주셨지요. 하느님을 떠나 사는 생활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죽음만을 느낄 뿐이지만, 정신이 가물가물거리는 데도 야훼님을 잊지 않고 빌면 주님께서 다시 살려주신다고 찬미 노래를 불러요.
니느웨에 말씀을 선포하니(요나 3,1-10)
요나가 니느웨에서 선포한 말씀이 뭐죠?(3,4)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만에 극적으로 살아돌아온 체험을 한 요나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다시 내려요. 이번에는 곧바로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가서 사십 일 후에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선포하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해요. 심지어 니느웨 임금이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라는 칙령까지 내려요. 이렇게 온 국민이 합심해서 나쁜 행실을 뉘우치는데, 하느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리가 없지요.
사랑이 한없으신 하느님(요나 4,1-11)
요나가 화난 이유를 짧게 이야기해 보세요(4,2-3).
하느님께서 니느웨에 내릴 재앙을 거두셨다는 것을 알아차린 요나는 화가 치밀어 하느님은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왜 몰랐겠느냐면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투정을 부려요. 앞으로 니느웨가 어떻게 될 건지 두고 보겠다며 초막을 치는 요나의 머리 위로, 하느님은 아주까리가 자라나게 해서 더위를 막아주게 한 뒤에, 그 다음날에 말라 죽게 만들어요. 그리고는 아주까리가 죽었다고 아까워 하는 요나에게 하느님께서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는 니느웨를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일깨워 줍니다.
<새김과 나눔>
하느님으로부터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보아도, 결국에는 하느님 품에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체험을 때때로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나요?
미가란 성서 이름은?
미가는 12 소예언서 중에서 여섯번째로 나오는 성서에요. 예언자 ‘미가’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책이라, 그 이름을 따서 붙였어요. 미가는 ‘누가 야훼와 같은 사람인가?’를 뜻하는 ‘미가야’ 또는 ‘누가 하느님(엘)과 같은 사람인가?’를 뜻하는 ‘미가엘’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지요. 하느님은 그 누구하고도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심을 이름에서부터 잘 드러내고 있답니다.
누가 언제 썼나요?
“야훼께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어찌 될 것인지를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보이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때는 유다 왕 요담과 아하즈와 히즈키야의 시대였다”(1,1)는 내용으로 보아, 예언자 미가가 유다 왕 삼대에 걸쳐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내용이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미가 예언자 혼자서 모든 내용을 다 기록하지는 않았어요. 대부분은 미가가 활동하던 시절인 기원전 734-700년경에 쓰여졌지만, 바빌론에서 포로생활(기원전 587-538)을 하는 중에 후대의 예언자들이 덧붙이고 편집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완성했어요.
미가가 예언활동을 하던 시기는 “유다 왕 우찌야, 요담, 아하즈, 히즈키야의 시대”(이사 1,1)에 활동한 아모쓰의 아들 이사야가 활동하던 때와 같은 시기지요. 이사야가 귀족 출신으로 궁정에서 주로 활동했던 반면에, 미가는 농촌 출신으로 재야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보여요. 다른 예언자들에 비해 소농(小農)들이나 가축 사육자들이 억압받는 상황에 대해서 민감하면서도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야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우뚝 솟는 날 만민이 야훼의 산으로 밀려올 것이라는 미가 4,1-4의 내용은 이사 2,2-4의 내용과 거의 똑같은 것을 보면, 동시대에 사는 예언자들끼리 어떤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요.
왜 썼나요?
요담(기원전 747-742)과 아하즈(기원전 742-725)와 히즈키야(기원전 725-697)가 유다를 다스리던 시기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발흥한 대제국 아시리아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역사의 격동기였지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3년 동안 포위공격을 받은 끝에 기원전 721년에 함락당함으로써 북왕국이 완전히 멸망했는가 하면, 남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 또한 시리아 -팔레스티나의 군소국가들과 연대하여 아시리아에 항거하다가 기원전 701년에 포위당하는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인해서 총체적인 위기감이 온 사회에 팽배하게 되었지만,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아시리아에게 충성하는 길이 살 길임을 역설하였고, 다른 쪽에서는 전쟁에서 진 댓가로 바쳐야 하는 조공이 너무 막중하다며 이집트의 세력을 등에 업고 다시 한 번 항거해 보자고 부추겼어요. 이렇게 사분오열된 정치권에 환멸을 느낀 미가는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기만 한 지도층들의 죄상을 폭로하면서, 사마리아가 초토화되었듯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날이 멀지 않았음을 경고하고자 했어요. 비록 그런 재앙을 겪을지라도 훗날 예루살렘이 민족들의 평화를 지켜내는 중심 역할을 하리라는 희망찬 전망도 열어주고요.
<새김과 나눔>
우리 시대에도 농촌은 피폐되고 수많은 농민들이 살 길을 찾아 도시로 떠나갑니다. 이들을 대변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는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너희 죄를 밝히시려 나서신다
(미가 1,1-3,12)
하느님께서 심판을 내리시는 것은 누구의 죄 탓 때문일까요?(1,5)
하느님께서 심판하러 당신 전에서 나서시면, 산들이 그 발 밑에서 녹고 골짜기가 갈라지는 엄청난 일이 벌어져요. 그 재앙이 이제 예루살렘에까지 밀려 왔으니, 예언자로서는 가슴을 치며 우는 수밖에 없었죠. 이 재난은 권력을 쥔 사람들이 탐나는 집이나 밭을 마구 빼앗고, 그 주인마저 종으로 부려먹는 불의를 일삼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일이니 피할 길이 없지요. 야곱과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들 그리고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는 날에 자신들의 그릇된 처신을 탓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일러줍니다.
그날이 오면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미가 4,1-5,14)
뿔뿔이 흩어진 이스라엘을 한데 모아 평화를 누리게 해주실 인물이 태어날 곳은 어디지요?(5,1-4)
하느님께서 모든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의 날이 오면, 예루살렘 멸망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절름발이들이 다시 모여와 예루살렘의 주권을 다시 되찾을 거구요. 그러니 비록 지금은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아우성이지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고 촉구해요.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알지 않느냐?(미가 6,1-7,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는지 세 가지로 이야기해 보세요(6,8).
하느님은 번제 보다는 정의를 실천하고,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며,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을 더 좋아하시지만, 유다 지파는 남을 등쳐 치부하거나 부정한 되로 부정축재하기만 했으니 하느님의 진노를 사지 않을 리가 없어요. 하느님의 은덕에 보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고 정직한 사람 하나 찾아 보기 힘든 이 나라에서, 예언자만은 야훼를 우러르며 하느님께서 구해 주시기를 기다리겠다는 소신을 밝혀요.
야훼께서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실 날이 온다(미가 7,8-20)
하느님의 기쁨은 어디에 있나요?(7,18)
하느님께 죄를 지어서 쓰러졌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날이 올 것임을 바라는 희망을 잃어서는 안돼요. 지금은 어둠 속에서 지내지만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시는 주님께서 오시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날에는 도시놈들의 비행 탓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회복해서, 기름진 동산에서 다시 풀을 뜯게 될 거에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못할 짓을 했어도 용서해 주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일을 기쁨으로 삼으시는 분이시거든요.
<새김과 나눔>
하느님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일을 기쁨으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어떤 일을 기쁨으로 삼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나훔은 어떤 책인가요?
나훔은 12 소예언서 중에서 일곱번째로 나오는 성서로, 예언자 ‘나훔’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책이라, 그 이름을 따서 붙여졌어요. 나훔은 ‘위로 내지 연민’이라는 뜻이에요. 대제국 아시리아에 짓눌려 고통을 겪는 유다인들이, 니느웨가 멸망하리라는 나훔의 예언에서 하느님의 위로와 연민을 느낄 수 있었을 거에요.
누가 언제 썼나요?
“엘코스 사람 나훔이 니느웨가 받을 벌을 내다보고 적은 책”(1,1)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나훔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쓰여졌음을 알 수 있어요. 나훔이 예언자로 활동하던 때에는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아직 건재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구요. 니느웨가 멸망한 직후에 쓰여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학자들은 대부분 메대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니느웨가 함락당하던 기원전 612년 이전에 나훔서가 쓰여졌을 거라고 보아요.
그리고 본문에 기원전 663년에 있었던 이집트의 수도 데베스(노 아몬)의 약탈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3,8-10), 집필연대가 아무리 빨라도 기원전 663년을 넘지 못할 것은 분명해요. 따라서 기원전 663-612년 사이에 나훔서가 집필되었다고 포괄적으로는 말할 수 있지만, 더 정확한 연대를 밝히기는 어려워요.
학자들 중에는 압제자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구심축이 된 나보폴라살이 바빌론 왕으로 즉위한 625년경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하기도 하고, 니느웨가 멸망한 612년에 근접한 연대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답니다.
왜 썼나요?
2세기 가량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대제국 아시리아는 기원전 7세기에 접어들면서 약해지기 시작했어요. 아시리아 최후의 위대한 통치자 아슈르바니팔이 기원전 626년에 죽고, 갈대아인 나보폴라살이 기원전 625년에 바빌론 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지금까지 아시리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제정세가 재편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동안 여러 나라를 잔인하게 정복하고 엄격하게 다스려 온 정책 때문에 아시리아를 극도로 미워해 온 피정복 민족들은, 아시리아와 맞서 싸우면서 새롭게 일어나는 바빌론에게서 자기 민족의 해방을 꿈꾸어 볼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무찌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아시리아 제국도 바빌론 및 메대 제국과의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니까요.
나훔은 바로 이렇게 아시리아의 위세가 한 풀 꺾이게 된 국제정세를 지켜보면서, 오랜 세월 강대국에 짓눌려 위축된 삶을 살아야 했던 백성에게 희망에 찬 전망을 열어주고자 했어요. 그래서 다른 예언자들처럼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악을 고발하며 회개할 것을 외치는 대신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소리높여 외침으로써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어요. 그동안 쌓였던 아시리아에 대한 미움을 분출시키는 동시에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대제국도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야훼 하느님의 권능을 다시 한 번 높이 천명하려고 했던 것이죠.
<새김과 나눔>
우리 시대에도 국력이 약한 나라는 통상이나 무역에서 불이익을 당하곤 합니다. 이스라엘을 억눌렀던 대제국 아시리아의 힘을 오늘날 우리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체험하게 되나요?
하느님께서 폭풍 속을 뚫고 오신다(나훔 1,1-8)
야훼 하느님은 어떤 신이신가요?(1,2)
야훼 하느님은 죄 지은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서, 발길로 구름을 먼지처럼 일으키시며 태풍과 폭풍 속을 뚫고 오셔요. 그분 앞에서는 강도 마르고 언덕들은 비틀거리며 세상과 그 안에서 숨수는 모든 것이 꺼져 버리죠. 이렇게 놀라운 권능을 지니신 분이 분노하시면 바위도 깨지는 만큼 당해낼 사람이 없어요. 하느님은 당신께 바라는 사람이 곤경에 빠졌을 때 따뜻하게 돌보아 주시는 자상한 분이시만, 당신께 대적하는 자들은 순식간에 빛 없는 곳으로 몰아내시는 엄한 분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거에요.
아시리아에는 벌을, 유다에는 구원을(나훔 1,9-2,3)
유다를 억누르던 적의 멍에를 부러뜨리시는 분은 누구세요?(1,12-13)
야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적들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끝장을 보는 분이셔요. 그러니 원수를 갚고야 마시는 하느님께 음모를 꾸미다가는 가시덤불처럼 태워 없애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 하느님이 유다에게 적의 병력이 아무리 많고 강하여도 당신께서 낫질하듯 없애버리리라고 약속해 주시니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니느웨의 이름을 이을 자손을 남기지 않으리라는 야훼 하느님의 판결이 내려졌으니, 머지 않아 광복의 소식을 전하는 발길이 산을 넘고 넘어 달려올 거에요. 그러니 이제는 축제 준비를 하면서 하느님께 서원제물을 바쳐야지요. 적들이 짓밟고 털어간 야곱의 포도덩굴, 이스라엘의 자랑을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실 테니까요.
저주받을 도시 니느웨의 멸망(2,4-3,19)
야훼 하느님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한 도시의 이름은 무엇이죠?(2,9)
침략자들이 치러 올라오는 날에는, 파수꾼이 성루에 올라가 눈에 불을 켜고 길을 지켜본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미친듯이 날뛰는 적의 기마며 거리를 누비는 적의 병거바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니까요. 정예부대를 앞세워 돌격하는 적의 기세 앞에 마침내 성문이 활짝 열리고, 대궐은 아수라장으로 변모될 수밖에요. 이제껏 도시를 지켜왔던 여신상은 바깥으로 들어내지고, 금은과 값진 세간을 털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떨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에요.
이제 니느웨를 칠 것이라는 야훼의 말씀이 떨어졌으니, 그동안 약탈을 일삼고 노략질을 해온 니느웨가 끝장날 날이 멀지 않았죠. 그때에는 완전히 망한 니느웨를 보는 사람마다 피해가며 비웃을 거에요. 이집트의 서울 데베스의 시민들을 사로잡아 종으로 부려먹던 그 옛날의 영화는 한순간의 꿈으로 그치고, 쳐들어 오는 원수를 피해 살 수 있는 구멍을 찾아 헤매게 될 테니까요. 성채들이 하나하나 떨어지며, 굳게 닫힌 성문 빗장은 불타 없어질 터이니 그에 대한 대비를 아무리 한들 소용이 없을 거에요. 목자들은 잠들고 용사들은 흩어지게 될 아시리아의 임금을 애도할 수밖에요.
<새김과 나눔>
하느님은 압제를 일삼은 강대국을 하루 아침에 없애버리시는 분이시죠. 요즘처럼 모든 인류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핵강대국들의 횡포는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하바꾹은 어떤 책인가요?
하바꾹이란 성서 이름은?
하바꾹은 12 소예언서 중에서 여덟번째로 나오는 성서입니다. 예언자 ‘하바꾹’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책이라, 그 이름을 따서 붙여졌지요. 하바꾹은 ‘합바쿠쿠 내지 함바쿠쿠’란 정원식물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거라고 봐요.
누가 썼나요?
예언자 하바꾹이지요. “예언자 하바꾹이 환상으로 받은 말씀”(1,1) 내지 “예언자 하바꾹의 기도”(3,1)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아요. 많은 학자들은 하바꾹서에 반영된 전례적인 형태를 바탕으로 성전의 제의 예언자였을 거라고 추정해요.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 기다려 보리라”(2,1)는 상황도 유배 이후에 성전에서 거주하던 레위인과 사제들의 상황(느헤 13,30; 2역대 7,6)과 비슷하거든요. 일부에서는 제의와 무관하게 환시를 받은 예언자로 여기기도 하고, 이사야 전승과의 연계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해 보기도 한답니다.
언제 썼나요?
하바꾹서에는 예언자 하바꾹이 활동하던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아요. 따라서 하바꾹서가 언제 쓰여졌는지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해요. 아시리아의 산헤립 왕이 유다를 침입한 기원전 8세기 말서부터 알렉산더 대왕이 근동 지역을 점령한 기원전 4세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제기되고 있어요.
대부분의 학자들은 “내가 바빌론을 일으키리니”(1,6)란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7세기 말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일어나던 시기에 쓰여졌을 거라고 보아요. 요시아 왕(기원전 640-609) 통치 말기서부터 여호야킴 왕(기원전 609-598) 치세 내지 여호야긴 왕(기원전 598) 시절에 집필되었을 거라는 거죠. 하지만 하바꾹서의 연대 추정은 ‘정의’(1,4. 13; 2,4)라든가 ‘못된 자’(1,4. 13; 3,13), 화를 입으리라는 신탁(2,6-20)과 갈대아인들에 대한 언급(1,6)을 바탕으로 추정한 연대라 확실하지가 않아요.
왜 썼나요?
대제국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기원전 612년에 메대와 바빌론의 연합군에 의해서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아시리아에 예속되어 온 유다 왕국이 독립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죠. 아시리아 제국이 쇠퇴해 갈 무렵에 즉위한 요시아 왕(기원전 640-609)은 개혁을 통해 유다가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꾸준히 닦아 왔으니까요. 하지만 아시리아 세력이 물러가기가 무섭게 팔레스티나 지역을 넘보고 있던 이집트 왕 느고와의 므기또 싸움(기원전 609)에서 요시아가 전사함으로써, 유다 왕국은 이집트의 세력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여호야킴 시절에는 신흥대국인 신바빌로니아 군대에 또 다시 점령당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지요.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도 강대국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다 왕국의 비참한 현실을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고자 쓰여졌어요.
<새김과 나눔>
유다 왕국은 역사가 흘러도 주변의 강대국에 의해서 예속받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강대국들의 협상으로 나라가 두 동강난 우리나라가 강대국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야훼여, 어찌하여 잠자코 계십니까?(하바 1,1-2,4)
의로운 사람은 무엇으로써 살게 될까요?(1,2)
하바꾹은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 먹고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다면서,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 하시느냐고 야훼께 항의해요. 이에 야훼 하느님은 사납고 날랜 바빌론 족속을 일으켜서 제 힘을 하느님처럼 믿다가 죄를 지은 자들을 바람에 날려가듯 사라지게 할 것임을 밝혀요. 그러자 하바꾹은 어찌하여 그들을 재판관으로 세우셨느냐고 다시 항의해요. 그들 민족은 그물을 쳐서 사람을 끌어내고 좽이로 사람을 잡아내며 칼을 빼어들고 무자비하게 뭇 민족을 죽이는 자들이라면서, 어찌하여 그들을 채찍으로 삼아 벌하시느냐고 의문을 제기해요. 그리고는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 기다려 보겠다는 하바꾹에게, 야훼 하느님은 그가 받은 말씀과 환시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면서 의로운 사람은 신실함으로써 살리라고 약속해 주셔요.
화를 입으리라! 화를 입으리라!(하바 2,5-20)
어떤 이들이 화를 입으리라고 선포되나요? 기억나는 대로 말해 보세요(2,7. 9. 12. 15. 19).
재물은 조금도 믿을 것이 못 되어서,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라지고, 뭇 민족을 끌어들인다 해도 비웃음만 당할 것임이 선포되어요. 남의 것을 먼지까지 긁어 모아 치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빚장이들이 달려들 날이 있을 거구요. 저만 잘 살겠다고 남을 등쳐 먹는 자들도 재앙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려고 애써 보았자, 뭇 백성을 망친 죄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돼요. 그리고 죄없는 사람의 피를 빨아 성읍을 세우고 남의 진액을 짜서 성을 쌓는 이들도 화를 피할 길이 없어요. 홧김에 이웃에게 술을 퍼먹여 곯아 떨어지게 하고는 그 알몸을 헤쳐 보는 자들도 똑같은 능욕을 받게 될 거구요. 끝으로 나뭇조각을 보고 일어나시라고 하며, 말 못하는 돌멩이를 보고 주무시라고 하는 우상숭배자들도 아무 이익을 못 볼 것임이 선포되어요.
야훼여, 우리 시대에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바 2,4-3,19)
밭곡식과 양떼·소떼가 없어도 우리는 누구 안에서 환성을 올릴 수 있을까요?(3,18)
훼께서 하신 일들을 자신들의 시대에도 보여주시기를 바라면서, 아무리 노여우셔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잊지 마시라고 간청해요. 역신이 앞장서고 열병이 뒤따르는 하느님께서 발길을 멈추시면 땅이 흔들리고 노려 보시면 민족들이 떨 만큼 큰 위력을 떨치시는 분이시니까요. 주께서 오시는 소리를 들으면 입술이 떨리고 뼛속이 녹아 내리며 아랫도리가 후들거리지만, 자신들을 덮쳐 오던 백성에게 재앙이 떨어지는 날만 기다리는 희망에는 변함이 없어요. 비록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뛸 수 있을 테니까요.
<새김과 나눔>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에서도 의로운 사람은 신실함으로써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나요?
스바니야는 어떤 책인가요?
스바니야란 성서 이름은?
스바니야는 12 소예언서 중에서 아홉번째로 나오는 성서입니다. 예언자 ‘스바니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책이라, 그 이름을 따서 붙여졌어요. 스바니야는 ‘하느님께서 숨기신다’ 내지 ‘하느님께서 소중하게 간직하신다’는 뜻이에요. 온 세상에 심판을 내린다 해도, 당신을 믿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소중히 여겨 보호하신다는 책 내용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누가 썼나요?
예언자 스바니야입니다. “스바니야에게 내린 야훼의 말씀”(1,1)이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 사람이 다 쓰지는 않았아요. 대부분의 내용은 스바니야가 썼지만, 후대에 첨가된 내용도 조금 있어요. “스바니야의 아버지는 구시요, 그 웃대는 게달리야, 그 웃대는 아마리야, 그 웃대는 히즈키야”(1,1)라고 명시된 족보 내용을 바탕으로, 스바니야는 히즈키야 왕의 후손으로서 기존 정치와 종교권에 몸담고 있었던 개혁주의자였으리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어요. 대부분의 학자들은 스바니야가 왕손이라는 주장은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고 여겨요. 하지만 기원전 8세기에 활약했던 이사야나 미가의 예언 전통을 이어 받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스바 3,1-3 비교 이사 1,21-23; 스바 3,3-5 비교 미가 3,1-12).
언제 썼나요?
스바니야는 요시아 왕(기원전 640-609)이 다스리던 시절에 예언자로 활동했을 거에요. “스바니야가 말씀을 받은 것은 아몬의 아들 요시아 왕이 유다를 다스릴 때였다”(1,1)고 언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신명기적 특성을 많이 보여요. “지붕 위에서 하늘의 별들을 예배하는 것들”(1,5 비교 2열왕 23,12; 예레 19,13; 32,29)을 비롯하여 풍산에 대한 저주 내용(1,13 비교 신명 28,30)이 비슷하거든요. 나아가 기원전 622년에 있었던 개혁의 기미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스바니야는 요시아가 아직 성년이 되기 전에 예언자로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돼요.
왜 썼나요?
기원전 8세기에 히즈키야(기원전 715-687)는 산당들을 철거하고 석상들을 부수는 등 야훼 종교를 바로 세우려는 일련의 개혁을 했지만,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은 히즈키야의 후임자인 므나쎄(기원전 687-642)와 아몬(기원전 642-640) 왕이 혼합주의 정책을 펼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어요. 바알을 섬기는 예식이 다시 성행하는가 하면(1,4), 지붕 위에서 하늘의 별들을 예배하고 암몬신 밀곰에게 맹세하는 등(1,5) 이교제의가 백성 사이에 널리 퍼뜨려지게 되었습니다. 고관들과 왕족들은 이방 문화에 동화되어 남의 나라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가 하면(1,8), 압제와 억압 현상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게 되었죠(3,1-4). 이런 상황에서 스바니야는 공변되신 하느님께서 유다 왕국이든 주변 국가든 거만을 떨며 흥청거리는 자는 모두 쓸어 버리겠지만, 하느님의 법대로 살면서 겸손하게 사는 사람은 화를 면하리라고 선포하고자 했어요.
<새김과 나눔>
어떠한 경우에도 겸손한 마음으로 바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실 거에요. 겸손하게 살아갈 수 없도록 하는 유혹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애써라
유다에 내릴 심판(스바 1,1-2,3)
야훼께서 크게 노하시는 날에 화를 면할 사람은 누구입니까?(2,3)
야훼 하느님은 유다 국민과 예루살렘 성민을 쳐서, 바알의 신상들을 없애고 사제라는 것들을 이름도 없이 쓸어버리리라고 밝혀요. 남의 나라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 고관들과 왕족들을 비롯하여, 장사아치들이며 야훼를 불신하던 사람들을 벌하겠다면서요. 야훼께서 오실 무서운 날은 역마보다 날쌔게, 군인보다도 잽싸게 닥칠 거에요. 야훼께서 몰아쳐 사람들이 피를 땅에 뿌리고 배알을 거름덩이처럼 쏟게 된 것은 그들이 하느님께 죄를 지은 탓이에요. 그러니 야훼께서 진노를 터뜨리시기 전에 바로 살도록 힘써야 돼요.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애쓰는 사람들만은 화를 면할 테니까요.
다른 나라에 내릴 심판(스바 2,4-15)
하느님께서는 모압과 암몬족을 무엇처럼 만들리라고 말씀하시나요?(2,9)
야훼께서 오실 날에는 유다 왕국뿐 아니라 온 세상이 처벌되리라고 예고돼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가자와 아스클론은 쑥밭이 되고, 아스돗과 에크론은 뿌리째 뽑힐 거에요. 불레셋 온 나라를 굴복시켜 주민이 하나도 없게 멸하리라고 야훼께서 언도하셨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벡성에게 거만을 떨며 욕설을 퍼부었던 모압과 암몬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어 잡초가 우거지고 소금이나 캐는 곳으로 변모할 거구요. 하이집트에 사는 에디오피아 사람들도 북녘에 사는 아시리아도 야훼의 징벌을 피할 길이 없어요. 쑥밭이 된 니느웨는 사막처럼 메마른 곳이 되어 온갖 짐승들이 깃드는 곳이 될 거에요. 지나가는 사람마다 천하를 호령하던 도시가 어찌 이 모양이 되었느냐며 혀를 차며 주먹질을 하게 될 정도로요.
징벌 후에 구원하시는 하느님(스바 3,1-20)
하느님께서 광복을 안겨줄 때, 세계 만방에서 이름을 떨치게 될 이는 누구입니까?(3,20)
야훼께 반항이나 하고 압제나 일삼는 예루살렘 도성에서는 판사들도 사람들을 씹어 삼키고, 예언자들은 제 잘난 멋에 사람들을 속이고, 사제들은 성소를 더럽히며 법을 짓밟는 일이 생겨요. 그러나 그 안에 거하시는 야훼께서는 공변되시어 부당한 일 없이 햇빛처럼 밝은 판결을 내려요. 뭇 민족을 뿌리뽑아서 사람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돌무더기로 만들다가도, 뭇 민족의 입술을 정하게 하여 모두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당신을 섬기게 하셔요. 그 때에는 에디오피아강 저편으로 추방되었던 자들도 예물을 가지고 강을 건너 야훼를 예배하러 오게 될 거에요. 그러니 그 날에는 수도 시온도 환성을 올리고,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게 될 거에요. 하느님 또한 예루살렘을 보고 반색하시며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실 테구요. 포로생활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도 세계 만방에서 이름을 떨치게 될 거에요.
<새김과 나눔>
예루살렘이 잘 되는 모습을 보고 하느님은 더덩실 춤을 추실 정도로 기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어떤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실까요?
하깨는 어떤 책인가요?
하깨란 성서 이름은?
하깨는 12 소예언서 중에서 열번째로 나오는 성서로, 즈카리야, 말라기와 함께 바빌론 유배 이후에 수집된 예언서 중의 첫번째 책입니다. 예언자 ‘하깨’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책이라, 그 이름을 따서 책이름이 붙여졌어요. 하깨는 ‘축제’라는 뜻이에요. 생계를 유지하기에 급급하면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 안에서 축제를 지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전을 재건하기를 촉구하였던 책 내용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누가 언제 썼나요?
다른 예언서와는 달리 예언을 선포한 연대가 아주 명확하게 나타나 있어요. “다리우스 왕 제이년 유월 초하루였다. 야훼께서 예언자 하깨를 시켜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사제에게 말씀을 내리셨다”(1,1)고 첫머리서부터 분명히 언급되어 있으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성전재건이 진행되면서 있었던 중요한 일들이며 예언 말씀이 시간별로 정리되어 있어요(1,14-2,1. 10. 20).
성서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볼 때, 하깨 예언자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는 다리우스 왕 제이년, 곧 기원전 520년이었을 거에요. 그 해에 이루어진 예언 활동 외에는 아무것도 전해 내려 오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가 바빌론에 의해서 무너진 옛 예루살렘 성전을 본 적이 있을 정도로 나이들었기 때문일 거에요(2,3). 기원전 515-516년에 완공된 성전 재건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기원전 520년에 선포된 예언 말씀이 518년경에 후대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을 거에요.
왜 썼나요?
기원전 538년에 페르샤의 고레스가 바빌론을 함락시킴으로써, 바빌론에 유배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고국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바빌론에서 안정된 터전을 잡은 사람들은 귀환하기 보다는 바빌론에 눌러 살기를 희망했어요. 바빌론에 함락된 채 반 세기가 다 되도록 버려져 있어서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예루살렘에 돌아간다는 것은, 바빌론에서 닦아놓은 기반을 모두 포기하는 것을 뜻했으니까요. 물질적인 안정보다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던 사람들도 계속되는 흉작을 겪으면서, 민족 공동체를 재건한다는 희망은 다 사라지고 오직 생계유지에만 급급했지요(1,5-9).
이 때에 하깨 예언자는 사람들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자 했어요. 흉년으로 먹고 살 식량마저 없는데 무슨 성전을 짓느냐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에, 하느님의 성전을 짓지 않고 생활하는 까닭에 풍성한 수확이라는 축복을 받지 못함을 일깨웠던 거지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성전을 세울 때 그 옛날처럼 뭇 나라들이 조공을 가져다 바치는 다윗 시대의 영화를 다시 누리게 될 것임을 선포했던 거지요. 실제로 하깨가 본격적으로 예언활동에 나섰을 때에는 다리우스 왕의 취임을 기해 페르샤 제국 전역에서 봉기활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죠. 이러한 제국의 불안정한 정국이 이스라엘의 민족국가 수립을 꿈꾸게 해주었어요.
<새김과 나눔>
이스라엘은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힘을 모읍니다. 날마다 바쁘게 생활해 나가는 우리는 어떤 일에 내 힘을 쏟고 있습니까?
주의 성전을 짓기 시작한
이날부터
주의 성전을 지을 때가 되었다(하깨 1,1-11)
아무리 애써도 소출을 별로 거두지 못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1,9)
야훼 하느님은 아직 주의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하깨 예언자를 시켜 당신의 말씀을 전하시죠. 씨는 많이 뿌렸어도 수확은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성이 차지 않는 생활을 그동안 해온 것은, 무너진 성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집만 지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탓이 아니겠냐고요. 하느님은 생각지 않고 자신만 돌보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온 땅에 가뭄이 들게 되었으니 사람도 짐승도 모두 배를 곯게 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어요.
지도자들과 백성의 응답(하깨 1,12-15ㄱ)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부터 야훼의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까?(1,15ㄱ)
유다 총독 즈루빠벨과 대사제 여호수아와 그밖에 살아 남은 모든 백성은 하깨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성전을 지을 마음이 움직여요. 그래서 다리우스 왕 제이년 유월 이십사일에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해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리라(하깨 1,15ㄴ-2,9)
하느님께서는 성전이 지어지는 곳에 무엇을 주리라고 약속하시나요?(2,9)
물자도 부족한 상태에서 재건되는 성전이 솔로몬 때 세운 예전의 성전보다 화려할 리가 만무하지요. 그래서 이 따위 성전은 있으나 마나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 사로잡힌 즈루빠벨과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고 성전 재건을 계속할 수 있도록 북돋워요. 비록 지금은 보잘 것 없다 해도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날에는 뭇 민족이 보화를 가지고 와서 성전을 가득 채울 것이라고요. 그렇게 되면 지금 짓는 이 성전이 예전의 성전보다 더 영화로울 것이고,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 날부터 복을 내리리라(하깨 2,10-23)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일을 한 다음부터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기로 결심하시나요?(2,18-19)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싼 옷자락에 다른 음식이 닿았을 때에는 거룩해지지 않지만, 부정을 탄 사람이 어떤 음식을 만지면 그 음식도 부정하게 되는 것이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죠. 하지만 성전 주초를 놓은 날부터는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니, 수확물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눈여겨 보라고 일러요. 또한 하느님께서 뭇 나라 옥좌를 뒤엎게 되는 날에는 즈루빠벨이 하느님의 종으로 들어 높여지리라고 선포해요. 하느님께서 뽑으신 인물이니만큼 그를 옥새처럼 소중하게 여기실 테니까요.
<새김과 나눔>
하깨는 기근이 들어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곳에 성전을 세울 것을 촉구하지요. 우리의 성전은 주로 빈민지역에 위치해 있을까요? 아니면 부유한 곳에 있을까요?
즈가리야는 어떤 책인가요?
즈가리야란 성서 이름은?
즈가리야는 12 소예언서 중에서 열한번째로 나오는 성서입니다. 하깨, 말라기와 함께 바빌론 유배 이후에 수집된 예언서 중의 두번째 책이죠. 예언자 ‘즈가리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책이라, 그 이름을 따서 책이름이 붙여졌어요. 즈가리야는 ‘야훼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없이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신다는 책 내용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누가 언제 썼나요?
즈가리야는 1-8장과 9-14장이 서로 구분되어요. 1-8장은 “다리우스 제이년 팔월에 야훼의 말씀이 예언자 즈가리야에게 내렸다”(1,1)고 첫머리에 분명히 밝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즈가리야가 자신에게 내린 예언 말씀을 기록했을 거에요. 즈가리야는 “베레기야의 아들이요, 이또의 손자”(1,1)로, 바빌론에서 팔레스티나로 귀환한 사제 가문의 한 사람이죠(느헤 12,4.16). 기원전 520년(다리우스 제이년; 1,1.7)에서 518년(다리우스 왕 제사년; 7,1) 사이에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성전을 재건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되었을 거에요.
반면에 9-14장은 구사된 언어 특성을 비롯하여 그 안에 담겨 있는 신학사상과 역사적인 배경이 다른 것으로 보아, 1-8장을 집필한 즈가리야가 아닌 다른 사람이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돼요. 묵시문학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기원전 4-2세기에 쓰여졌을 것으로 생각돼요.
왜 썼나요?
기원전 538년에 페르샤의 고레스가 바빌론을 함락시킴으로써, 바빌론에 유배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고국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서 겪어야 했던 현실은 참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죠. 몇 년째 든 가뭄으로 인해 먹을 식량도 턱없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드러내 주
는 성전조차도 폐허가 된 지 오래였습니다. 더군다나 고국 땅 팔레스티나는 자치권도 확보하지 못한 채 페르샤에서 파견되는 총독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지요. 여호수아 대사제를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성전이 재건되지 않아서 그들을 한데 묶어줄 뚜렷한 구심점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동족인 즈루빠벨이 총독으로 부임해 오자, 종교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협력해서 성전을 재건해야 할 때가 도래했음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알리고, 성전이 재건되면 예전의 영화를 다시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 일으키고자 했어요. 또한 성전을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가 곧바로 열의가 사라져서 작업을 그만두려는 사람들을 부추기는 동시에, 성전 재건 작업을 진두지휘한 즈루빠벨이 총독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야훼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러 오시리라고 촉구함으로써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 주고자 했답니다.
<새김과 나눔>
이스라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자신들의 삶 가운데에 모시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나 그렇지 못할 때나, 주님을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 모시려고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환상으로 말씀하시는 주님
나에게로 돌아오라(즈가 1,1-6)
지난 날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악한 행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외쳤던 이들은 누구입니까?(즈가1,4 )
다리우스 제이년 팔월에 즈가리야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는,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그들이 주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느님도 그들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하면서요. 예언자들을 통해 악한 길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않았다가 벌을 받은 조상들처럼 되지는 말라고 촉구해요.
여덟 가지 환상(즈가 1,7-6,15)
야훼의 성전을 세울 사람은 누구라고 제시됩니까?(6,15)
처음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회개하라고 촉구한 지 3개월이 지난 후에, 즈가리야는 여덟 가지 환상을 받아요.
첫째 환상은 세상을 순찰하는 기마대가 세상의 실정을 보고하는 가운데,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사고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둘째 환상에서는 예루살렘을 흩뜨린 네 개의 뿔을 혼내 주러 네 명의 대장장이가 오고, 셋째 환상에서는 예루살렘에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 성을 둘러치지 않고 살게 되리라는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더불어서 바빌론에서 살고 있는 시온 백성에게 어서 도망쳐 나와,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예루살렘으로 오라고 권유합니다.
넷째 환상에서는 야훼의 천사가 대사제 여호수아를 고발하는 사탄을 나무라며 여호수아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주지요. 다섯째 환상에서는 등잔대 좌우에 하나씩 서 있는 올리브나무 두 그루가 온 세상의 주를 모시도록 기름부어 성별한 두 사람을 뜻함을 일러주고 있어요. 즈루빠벨이 성전의 주춧돌을 놓았으니, 그가 손수 그 일을 이룰 것이라고 이야기되어요.
여섯째 환상은 두루마리 책 한 권이 날고 있는 장면이죠. 거기에는 도둑질하는 자들과 맹세하면서 사기치는 자들은 모두 나라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지요. 일곱째 환상에서는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이 담겨 있는 말을 시날 땅으로 날라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여덟째 환상에서는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점박이 말들이 끄는 4개의 병거가 온 세상으로 순찰을 나가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여요.
이어서 바빌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서 포로민이 바치는 예물을 받아 가지고 즈루빠벨에게 면류관을 씌우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요. 아울러 먼데서 온 사람들이 성전을 세울 것이라고 선포되고 있어요.
새날이 오리라(즈가 7,1-8,23)
하느님께서 시온으로 돌아가는 날 예루살렘은 무엇이라고 불리우게 되나요?(8,3)
앞으로 단식을 계속해야 되느냐고 묻는 베델사레셀 총독에게, 공정한 재판을 하고 동족끼리 열렬히 사랑하라고 일러주어요. 성전을 세우려고 주춧돌을 놓은 날에는 품값을 제대로 못 받거나 소출이 시원찮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해요. 계속해서 해오던 단식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어 축제로 지내게 될 것이라고 이릅니다.
<새김과 나눔>
즈가리야는 환상을 통해 주님께서 원하신 바를 알아차립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있나요?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메시아 시대가 오리라(즈가 9-11장)
병거와 군마를 없애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실 메시아는 무엇을 타고 오시나요?(9,9)
주님께는 아람의 수도도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것임을 밝혀요. 그러니 아무리 요새를 세우고 은과 금으로 치장한다 해도 주님의 손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가자며 에크론, 아스클론과 아나돗도 모두 쑥밭이 되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살아 남아서 유다의 한 부락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되어요. 이제 시온은 한껏 기뻐하고 환성을 올리면서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해요. 그분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병거와 군마를 없애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는 분이시니까요. 군비경쟁에 휘말려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핵무기를 보유하려 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주님께서 오시면 비무장과 핵무기 폐기에 제일 먼저 손을 대시겠지요.
그 날이 오면 주님의 백성은 면류관에 박힌 보석처럼 빛날 거에요. 당신께서 직접 유다 가문을 돌보시어 지휘관들이며 날쌘 용사들을 길러내실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아시리아도 콧대가 꺾이고 에집트는국권을 잃는 일까지도 벌어질 지 모르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목자들이 양떼를 올바로 길러야 하죠. 하지만 그동안 목자들의 행색을 보면 양들을 아낄 줄 몰랐죠. 주님의 사랑을 받는 귀염둥이요 단짝인 이스라엘과 유다를 서로 갈라놓는가 하면 못된 목자 노릇만 하고 있으니까요.
예루살렘이 새날을 맞으리라(즈가 12-14장)
예루살렘에 쳐들어 왔다가 살아 남은 백성이며 세상의 모든 민족이 몰려와 해마다 지키게 될 축제는 무얼까요?(14,16-19)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포위당하는 날 예루살렘을 바위처럼 끄떡도 하지 않게 하리라고 약속해 주셔요. 예루살렘 성민 중 가장 약한 사람들도 다윗처럼 강해지게 해서,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뭇 민족을 멸하리라고 일러요. 그렇게 되면 다윗 가문과 예루살렘 성민들에게 주님께 용서를 빌려는 마음이 들어, 하느님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을 자기 자식을 잃은 양 슬퍼하며 곡할 거에요. 그러면 주님은 그들의 죄와 때를 씻어 주는 가운데, 죄를 짓게 한 우상을 없애고 더러운 영을 받은 예언자들을 쓸어버릴 거에요.
아울러 칼을 일으켜 목자를 쳐서 양떼를 흩뜨릴 뿐만 아니라, 가련한 양떼들도 쳐서 셋 중에서 둘이 죽고 하나만 남았다 해도 그 하나마저도 불 속에 넣어 깨끗하게 할 것이라고 일러요. 하지만 그 후에는 당신의 백성으로 뽑으신 사람들을 이끌고 오실 것이므로 성읍의 주민들이 끊어지는 날은 없을 거에요. 이렇게 주님께서 온 세상의 임금으로 오르시는 날부터, 사람들은 온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만을 부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은 다시는 벌 받는 일 없이 튼튼히 서게 될 거구요. 그러면 세상의 모든 민족이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 초막절을 지키며 주님을 만군의 주로 예배하게 될 거에요.
<새김과 나눔>
즈가리야는 메시아가 오시면 뭇 민족의 평화를 위협하는 군마와 병거들을 없애실 거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시대에 메시아가 오시면 무엇부터 없애시려고 할까요?
말라기는 어떤 책인가요?
말라기란 성서 이름은?
말라기는 12 소예언서 중에서 열두번째로 나오는 성서로, 하깨·즈가리야와 함께 바빌론 유배 이후에 수집된 예언서입니다. 예언자 ‘말라기’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책이라, 그 이름을 따서 책이름이 붙여졌어요. 하지만 말라기가 사람 이름인지는 알 수 없어요. ‘말라기’는 ‘나의 사자, 나의 천사’라는 뜻이거든요. 어느 특정 예언자를 간접적으로 가리키는 호칭일 수도 있어요.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3,1)는 본문의 내용과도 잘 어울리지요.
누가 썼나요?
책 첫머리에 “야훼께서 말라기를 시켜 이스라엘에 내리신 경고”(1,1)라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라기’라고 불리우는 예언자가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요. 하지만 말라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어요. 다만 ‘나의 사자’란 이름으로 통칭되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예언자였을 거라고 추정하기도 해요. 요나단의 타르굼이나 예로니모는 율법학자며 선비인 에즈라일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오늘날의 학자들은 뚜렷한 증거없이 제기되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아요.
언제 썼나요?
유배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요. 성전에서 이미 예식이 거행되고 있있던 것으로 보아, 유배 이후 제2성전이 완성된 기원전 516-515년 이후에 쓰여졌을 거에요. 그리고 집회서에 “열두 예언자들”(집회 49,10)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기원전 180년 이전에 쓰여졌을 거에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기록한 귀환 공동체의 종교·정치·사회 상황과 유사한 것을 들어 기원전 480-500년경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왜 썼나요?
기원전 538년에 페르샤의 고레스가 반포한 칙령으로 인해 바빌론 유배지에서 팔레스티나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깨와 즈가리야 예언자의 촉구를 받아서 기원전 516-515년에 두번째 성전을 재건해요. 하지만 성전을 재건하면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예언자의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았죠.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릴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배간 유다인들이 물밀듯이 몰려 오지도 않았습니다. 유다 왕국을 재건하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즈루빠벨 총독은 해임되었고, 성전의 완성과 더불어 도래하리라고 기대하였던 메시아 시대의 징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신정국가를 건설한다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이상도 점차 사그라들었고, 페르샤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인 팔레스티나에서 오직 생존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에 당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이방 여인과 혼인함으로써 안정을 찾으려는 시도까지도 일어나고 있었죠. 이런 상태에서 말라기는 하느님께서 특사를 보낼 날이 멀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면서, 이방여인과 재혼하는 등의 그릇된 행동을 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자 했어요.
<새김과 나눔>
이스라엘은 성전을 재건하고서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신앙에 냉담한 태도를 보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 신앙생활에 소홀히 하게 되나요?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나 야훼가 너희를 사랑한다(말라 1,1-5)
죄받은 땅이라고 불리게 될 지방은 어디인가요?(1,4)
주님의 사랑에 회의를 품는 이스라엘에게, 주님은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계심을 일러주어요. 부서지고 허물어져서 폐허가 된 에돔 지방을 보면, 에사오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시는 주님을 알 수 있다는 거죠.
너희 사제라는 것들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다(말라 1,6-2,9)
주님의 이름을 기릴 생각이 없는 사제들에게는 무엇이 내려지나요?(2,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제단 위에 더러운 빵을 바치는 불경한 행위를 계속할 셈이면 아예 성전 문을 닫아 걸라고 이야기해요. 사람들에게 참된 법을 가르치며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될 사제들이 바른 길을 떠났으니, 동족에게 멸시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일러요.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도록 하여라(말라 2,10-16)
약조를 맺고 혼인한 아내와 남편 사이에 증인으로 나서시는 분은 누구신가요?(2,14)
남의 나라 신을 섬기는 여자와 결혼하는 일은 주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과 똑같다고 이야기해요. 주님께서 남편과 아내를 혼인시킬 때에는 후손을 주시기 위한 것이니, 변심하여 조강지처를 버리지 말라고 해요.
특사를 보내어 길을 닦으리라(말라 2,17-3,5)
레위 후손을 순금이나 순은처럼 깨끗하게 만드실 이는 누구이십니까?(3,3)
공변되신 하느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특사를 보내어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그 때에 주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드리는 제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인권을 짓밟는 자들의 죄를 당장에 밝히리라고 선포해요.
이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말라 3,6-12)
왜 뭇 민족이 이스라엘을 부러워하게 되나요?(3,12)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이 하느님을 속이는 행위임을 일깨우면서, 제대로 십일조를 바칠 때 농사를 망치지도 않고 그들의 땅이 낙원이 될 거라고 이야기해요.
내가 나서는 그 날이 오면(말라 3,13-24)
부모들과 자식들의 마음을 돌려 화목하게 만들 사람은 누구인가요?(3,24)
하느님을 섬겨보아야 쓸데없는 일이라고 푸념하는 사람들은 모두 검불처럼 타버릴 것이지만, 주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잊지 않고 계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실 거라고 약속해요. 아울러 그 날이 오기에 앞서 엘리야 예언자가 와서 어른들과 자식들의 마음을 서로에게 돌려 화목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고한답니다.
<새김과 나눔>
말라기는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어른들과 자식들의 마음을 서로에게 돌려 화목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우리 가정은 부모와 자식 간에 정감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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