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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설] 시서와 지혜서

dariaofs 2015. 2. 27. 18:41

욥기는 어떤 성서인가요?

 

욥기는 구약성서의 세 번째 부분인 성문서에 속하는 지혜문학의 하나입니다. 욥기라는 성서 이름은 이 책의 주인공인 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구요. 그 이름의 뜻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2000년대 서부 셈족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다고 해요. 욥의 고향으로 나오는 우스가 어디인지도 확실치 않아요. 아람 쪽이라고도 하고 에돔 지역이라고도 해요.

언제 쓰여졌나요?

 

욥기는 여러 면에서 아주 해석하기 어려운 책으로 꼽혀요. 욥기의 저술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욥기 안에는 거의 없거든요. 게다가 언어들도 다른 성서에 잘 나오지 않는 단어들이 많구요.

 

학자들의 견해도 중구난방으로, 멀리 기원전 13세기의 모세 시대부터 가까이는 기원전 2세기의 마카베오시대까지 들고 있어요. 그래도 조금 의견이 모아지는 쪽은 바빌론 포로기의 전·후라는 쪽이에요. 헷갈리시죠? 아마도 욥기는 족장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서 드러나듯이, 상당히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의 복잡한 형성과정을 거쳐 후대에 오늘과 같은 꼴로 굳어졌을 거예요.

 

누가 썼나요?

 

이젠 독자 여러분도 어느 한 사람을 구약성서의 저 자로 못박는다는 게 상당히 곤란하다는 걸 알고 계실 거예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욥기는 여타 성서와 다른 특성을 여러모로 지녀 욥기의 뼈대를 잡은 저자를 추정하기가 참 곤란해요. 아마 욥기라는 독창적인 견해를 남긴 저자는 의인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해결책이 아닌 새로운 견해를 집요하게 추구했던, 유난히 고통과 하느님의 정의에 민감했던 사람으로 여겨져요.

 

왜 썼나요?

 

욥기는 고통에 관해 묻고 도전하고 항의하는 책입니다. 전통적으로 고통은 상선벌악 개념에 따라 이해되었습니다. 악한 자가 받는 벌이 곧 고통이라는 것이죠. 하느님의 보상적 정의를 가리키는 이 말이 전적으로 틀리지는 않지만, 고통의 모든 문제를 해명해 주지도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선한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적잖았으니까요.

 

욥기는 하느님의 정의와 함께 인간의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입니다. 욥기의 끝에 가서도 욥이 제기한 물음, 곧 고통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통은 인간 삶과 연관된 하나의 신비입니다.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입니다. 고통을 비롯한 모든 것이 시간 안에서 사라져 갑니다. 궁극적으로 그 문제의 답을 얻을 곳은 영원하신 하느님, 창조주 그분 안에서 입니다. 결국 남은 답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뿐입니다. 욥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현존을 체험하고 그분께 승복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바로 그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입니다.

 

<새김과 나눔>

 

욥기에 관해 자신이 들었거나 예전에 가졌던 느낌과, 이 번에 새로 읽고서 느낀 점을 비교하여 나눠 보십시오.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닦달하십니까?(욥기 1-28)

 

시험을 당하는 욥(1-2)

 

갑자기 불행하게 된 욥의 첫마디 반응은 무엇입니까?(1,21)

 

우스 지방에 사는 부유하고 의로운 사람 욥을 두고, 사탄이 하느님께 욥의 믿음을 시험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탄은 신약에 나오는 악마가 아니라 고발하는 이 또는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시자, 사탄은 욥의 재산과 자녀와 건강까지 모두 빼앗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큰 재난을 만난 욥은 아내와 달리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세 친구가 찾아옵니다.

 

욥과 친구들의 첫번째 대화(3-11)

 

엘리바즈는 고통을 하느님의 무엇이라고 말합니까?(5,17-22)

 

산문이 아닌 시적인 문체로 바뀐 첫머리에서, 욥은 자신이 당한 재난을 원망하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한탄합니다. 앞머리에 나온 욥의 모습과 사뭇 다르죠? 그 당시 주변세계의 지혜를 대표하는 친구 중에서 엘리바즈는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 내는 것”(5,7)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욥이 잘못한 것이 있어서 재앙을 자초한 것이니까 어서 잘못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빌닷 역시 하느님께서 욥에게 죄값을 물으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8,4). 소바르는 악에서 손을 떼고”(11,14) 나서면 하느님께서 다시 돌보아 주실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욥은 그 말에 위로받지 못하고 자신의 무죄를 계속 고집합니다.

 

욥과 친구들의 두 번째 대화(12-20)

 

욥이 하느님께 청한 두 가지 청원은 무엇입니까?(13,20-27)

 

욥의 세 친구는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을 비난합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 어찌 죄없을 수 있겠는가?”(엘리바즈:15,14). “악인의 빛은 결국 꺼지고”(빌닷: 18,5) “악인의 웃음소리란 금방 멎는 것”(소바르: 20,5)이라며 욥을 윽박지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흠없는 자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그들의 잘못한 정도에 따라 앞날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과 역사의 체험입니다. 자신이 그 경우를 당하고 있는 욥은 답답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변호인으로 하느님을 요청합니다.

 

욥과 친구들의 세 번째 대화와 지혜의 글(21-28)

 

욥이 친구들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21,2)

 

욥과 친구들의 세 번째 대화는 이미 나와 있는 각자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라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과부와 고아처럼 어려운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요구가 한층 강조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글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끼어든 28장은 후에 끼어놓은 것으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참된 지혜라고 밝힙니다.

 

<새김과 나눔>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인과응보는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서도 흔히 거론되는 가르침입니다. 나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요한 9,1-5)을 참고하십시오.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 29-42)

 

욥의 마지막 고백과 선서(29-31)

 

욥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 근거를 어떻게 제시합니까?(31,13-19)

 

세 친구들과의 대화가 헛된 공방전임을 깨달은 욥은 자신의 과거 모습과 현재 처지를 비교하면서 울부짖은 뒤, 자신의 결백을 선서합니다. 이 선서문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내용이 사실과 다를 경우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형태로 발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구체적으로 밝힌 다음 전능하신 분의 답변을 듣겠다고 마지막 말을 던집니다.

 

엘리후의 변론(32-37)

 

엘리후는 하느님께서 왜 사람을 고생시키신다고 설명합니까?(36,15-21)

 

욥의 최종 고백에 이어 갑자기 엘리후라는 젊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마지막 맺음말에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은 후대에 덧붙인 대목이라고 여겨집니다. 엘리후가 변호하는 하느님의 모습 역시 앞의 세 친구처럼, 전형적인 인과응보형입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고통을 통해 사람을 구하시고 교육시키신다는 내용을 좀더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나타나신 하느님(38,1-42,6)

 

욥은 하느님께 무어라고 대답하였습니까?(40,3-5; 42,2-6)

 

드디어 욥기의 절정에 이릅니다. 욥과 세 친구들이 고대해 마지 않던 하느님께서 폭풍 속에서 나타나시어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분은 어느 한 편을 옹호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대로 창조하신 자연세계의 각종 현상을 예로 들어 당신이 누구시며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를 밝히십니다. 인간의 온갖 지식으로서도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을 깨닫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가 없음을 느끼게 하여, 피조물인 인간 본연의 자세와 한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 글 속에 나오는 베헤못과 레비아단은 신화에 나오는 괴물을 가리킵니다.

 

욥이 잘된다는 뒷 이야기(42,7-17)

 

어찌 보면 욥기의 끝마무리는 싱겁습니다. 도대체 치열한 논란이 되었던 고난의 의미에 대해 딱부러지는 답변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느님 체험과 그분께 대한 믿음 안에서 그 문제를 끌어안게 되었습니다. 욥기는 행복한 결말로 끝납니다. 재산을 두 배로 돌려받고 자녀도 원상회복됩니다. 이렇게 욥은 칭찬받고 세 친구는 솔직하지 못했다고 꾸중듣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께 불경스럽다고 느끼리만큼 도전했던 욥이 하느님께 칭찬받은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무조건 예스맨이 되기보다 하느님께 치열하게 물음을 던지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참으로 중요한 하느님 체험과 신앙을 키울 수 있으니까요?

 

<새김과 나눔>

 

욥기의 물음은 우리 삶과 신앙에서도 중요한 내용입니다. 내가 겪은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나의 신앙의 성장에 따라 어떤 변화를 보였습니까? 그에 따라 하느님관은 또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시편은 어떤 성서인가요?

 

 

시편이라는 성서 이름은 어떻게 생겼나요?

 

유다인들이 처음에 시편을 부른 이름은 기도(트필롯)’였어요. 그러다 후대에 가서는 찬양(트힐림)’ 또는 찬양의 책이라 불렀어요. 구약성서에서 찬양하라는 동사(hll)2/3 이상이 시편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아무튼 기도와 찬양은 시편의 두 측면이죠. 그리스어 성서는 시편이 현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그리스어 psallo)” 것이라 하여 프살모이(psalmoi, 찬미가)’라 불렀어요. 시편의 영어 이름(psalms)도 여기서 연유하였죠. 우리 말 성서 이름 시편은 시모음집이라는 뜻의 중국어 성서 이름 시편(詩篇)’을 딴 것이구요.

 

누가 썼나요?

 

시편 이외에도 성서에 나오는 노래는 적지 않아요. 이런 노래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었기 때문에, 원작가를 밝히기가 쉽지 않아요. 시편에도 첫머리에 다윗, 아삽, 코라의 후손, 모세 등의 작품이라고 나와 있으나, 이들의 작품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요. 시편은 사실상 하느님 백성 전체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만, 다윗은 음악을 즐기고 시와 노래로 하느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린 대표적인 인물이기에, 자연스럽게 시편의 대부분을 그의 작품으로 여기게 된 것이죠.

 

언제 쓰여졌나요?

 

시편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었어요. 아마도 대부분은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황금시기인 기원전 10세기와 가장 어려웠던 시대인 바빌론 포로기 전후에 생겨났을 거에요. 이런저런 시들이 한데 모아져 현재와 비슷한 꼴로 형성된 것은 대략 기원전 2세기경으로 여겨져요. 그때 모세오경을 모방해서 시편을 다섯 권(시편 1-41; 42-72; 73-89; 90-106; 107-150)으로 나누었을 거에요.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가리켜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책과 시편들”(루가 24,44)이라 했어요. 즉 시편은 그 때까지도 완결되지 못한 성문서를 대표하는 성서로 꼽힌 것이지요.

 

왜 썼나요?

 

예나 지금이나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두루 애송하는 성서는 아마도 시편일 거예요. 하느님의 백성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고 어려운 처지에서는 구원을 탄원해 왔기 때문이죠. 비단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가 드리는 전례에서도 시편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죠.

 

시편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응답의 성서라고 할 수 있어요. 오경 전체가 하느님이 하신 큰일을 전하고 예언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면, 시편은 하느님의 그 일과 말씀에 대한 하느님 백성의 응답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하느님이 하신 큰일들을 체험한 이들은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당신 백성을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아니 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사는 하느님의 백성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우리와 함께 해주시며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을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시편 19,14)라 고백해 왔던 것입니다.

 

<나눔과 새김>

 

마음에 드는 시편 하나를 암송하시고 자주 되새겨 보십시오. 그 시편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바꿔 서로 나눠 보십시오.

 

인간이 무엇이기에(시편 8)

 

시편을 읽는 방법

 

먼저 시편은 사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른 아야기식 성서처럼 그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자주 읽으면서(가능하면 외우면서) 단어와 구절에 함축된 깊은 뜻을 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그 시편 저자의 내면세계로 들어가 그것을 느끼고 공감하며 더불어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죠.

 

또 시편은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 나아가 신약성서를 포괄하는 성서 전체의 맥락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시편 한 구절, 또는 한 편을 이해하려면 시편 전체의 흐름과 함께 성서가 대변하는 이스라엘의 신앙 맥락과 연관시켜 보아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훼는 나의 목자”(시편 23,1)란 구절만 보더라도, ‘야훼라는 하느님 이름이 성서에서 드러내는 깊은 뜻과 그에 대한 다양한 신앙고백이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목자라는 말 속에는 자신이 양이라는 고백과 함께, 목축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생활양식은 물론 거기서 비롯된 목자와 양의 실질적 관계, 이 관계를 유비시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간의 관계를 가리켰던 다른 성서 표현 등이 다 담겨 있지요.

 

시편의 분류와 감상

 

시편은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크게 찬양시, 탄원시, 감사시, 그밖의 시로 나뉩니다. 여기서도 그렇게 몇 가지로 나눠 함께 감상해 보겠습니다.

 

1. 찬양시

 

유일하신 절대자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따르는 하느님을 기리고 찬양하는 시편들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권유로 시작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나열한 다음, 다시 하느님을 찬양하거나 짧은 축복문 및 기도문으로 마무리하는 꼴로 짜여 있습니다. 대개 시편 8; 19; 29; 33; 67; 95-100; 103-106; 111; 113-114; 134; 136; 145-150편 등을 찬양시로 봅니다. 일례로 시편 8편을 감상하겠습니다.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시편 저자는 왜 하느님을 찬양합니까?(8,3-6)

 

시의 첫머리와 끝머리에서 시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기립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너무나 크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서 중심이 되는 하느님의 업적은 창조사업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타나는 창조 업적이 시인의 입을 빌어 다시금 묘사됩니다.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당신 창조의 중심에 놓으시고 뭇 만물을 돌보게 하셨는지, 시인은 다만 감격하여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본래부터 그럴 만한 자격이나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의 히브리서 저자는 이 시편을 빌어 예수님을 노래합니다(히브 2,6-9). 이 시편에 나오는 인간상이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던 것이죠. 여하튼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새삼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의 위치와 사명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가득이나 생태계의 위기를 느끼는 이 시대에, 이 짧은 시편의 울림은 크게 크게 번져 갑니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노래하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편 22)

 

2. 탄원시

 

박해를 받거나 죽음이나 질병 같은 심각한 고통을 받을 때 하느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구원해 주실 것을 탄원하는 내용이지요. 시인은 먼저 자신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뒤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합니다. 이어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하느님께 구원을 간청합니다. 이러한 탄원은 한 개인이 드리기도 했고,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와 예루살렘의 파괴 같은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집단적으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 유형이 시편에서 가장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탄원시는 시편 3; 5; 22; 25; 28; 44; 60; 74; 78-80; 83; 85; 90; 94; 102; 123; 137편 등입니다.한 예로 시편 22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시인은 하느님을 나의 무엇이라고 부릅니까?(22,19)

 

이 시편은 울부짖음으로 시작합니다. 그 울부짖는 소리가 중반 이후까지 이어지다가, 구원자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마감됩니다. 지금 뼈 마디마디 드러나 셀 수 있는처지에 빠진 이 시인이 겪고 있는 곤경과 어려움은 몹시 심각합니다. 그런 처지에서도 시인은 끝끝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의 구원을 맡겨 드립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감사시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행위의 위대함을 노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입니다. 시작은 찬양시와 비슷한데, 본문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나열하면서 하느님께 영원히 찬미를 드리겠다는 약속과 지속적인 신뢰심을 표현한 다음, 끊임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함을 공동체에 권유하면서 미래지향적으로 끝맺고 있어요. 감사시에도 부분적으로는 탄원과 찬양의 내용이 들어 있어요. 사실 이 세 가지는 서로 어울려 다니거든요. 대표적인 감사시인 시편 18; 30; 32; 34; 40; 66; 92; 116; 118; 124; 129; 138편 등에서 18편을 살펴 보겠습니다.

 

야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시편 18)

 

* 시인이 하느님을 나의 무엇이라고 부른 열한 가지 표현을 찾아 보십시오(18,1-2. 28).

 

시인은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분이 베푸신 구원행위를 나열합니다. 하느님은 그를 원수의 손에서”(3,17), “거센 물 속에서 건져 주시고”(16), “어깨를 펴게 해 주시고”(19), “상을 내리시고”(20), “붙들어 주시고”(26), “적대자들 위에 높여 주셨습니다”(48). 그렇기에 시인은 그 고마움을 어찌 만민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당신의 이름을 노래하지 않으리이까?”(49)하며 토로합니다.

 

시인이 고백하는 하느님은 하늘을 밀어 제치시는”(9) 자연의 주재자이시고, “옳게 살았다고 상을 내리시는”(20) 정의의 하느님이십니다. 결국 시인은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인간이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뿐이시며(31), “한마음으로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한마음으로 위해 주신다”(25)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사무엘 하권 22장에서 다윗의 노래로 나올 만큼 오래 된 노래입니다.

 

복되어라,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1)

 

4. 그밖의 시편들

 

(1) 지혜시·교훈시

 

시의 주요 내용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사는 길을 일러주는 시편들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 곧 토라와 하느님의 말씀을 성실히 지키면 주님의 굄을 받지만, 그 말씀을 어기고 듣지 않으면 멸망에 이른다는 교훈을 심어 주지요. 대표적인 시편은 1; 9-10; 14; 19; 37; 73; 112; 119; 127-128; 133편 등이지요.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시편 1)

 

* 시인은 의인을 무엇에 비유합니까?(1,3)

 

1편은 지혜시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시편 전체의 서시(序詩)이기도 해요. 비록 여섯 줄밖에 안 되는 짧은 시이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이 시는 행복으로 가는 길과 멸망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요.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고 그것을 위해 온갖 애를 다 쓰지만, 누구나 행복하진 않죠. 또 참된 행복이 무언지도 아리송하구요.

 

1편이 보여주는 행복한 사람은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2)입니다. 여기서 법은 토라(율법)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전체, 곧 성서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지요. 되새기는 일 역시 머리 속으로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체험하고 고백하는 일이죠.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그 말씀에 젖어 사는 이들은 날마다 도처에서 자신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게 되죠. 그런 사람은 늘 싱싱하게 살며 제 철 따라 열매를 맺게 되어요. 반면에 아무리 부와 명예를 누려도 악인의 길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이”(1,4) 아무 소득 없는 멸망의 길이라고 일러 주어요. 마치 이 시편은 격렬한 일생을 마치고 인생의 황혼에서 던져주는 한 선배 그리스도인의 충고이자 유언 같지 않으셔요?

 

(2)왕도시(王道詩)

 

이스라엘의 왕이 지녀야 할 덕과 해야 할 바를 알려 주며, 아울러 당신이 세우신 그 왕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았지요.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께서 기름부은 자였는데, 포로기 이후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가 다시 올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 곧 메시야로 이해되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시편들은 메시야 시편이라고도 불려요. 주요 시편은 2; 20-21; 45; 72; 89; 101; 110; 132; 144, 1-11 편 등이지요.

 

너는 내 아들(시편 2)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의 통치자는 절대주권을 갖지 않고 하느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하느님의 주권을 벗어버리려는 헛일을 꾸미는가 묻습니다(1). 하느님의 주권 아래서 그분의 가르침을 좇을 때만이 통치자의 권한은 정당성을 갖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하느님의 가소로움과 분노를 사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시편은 사도행전 4,25-2613,33에 인용되었죠. 물론 하느님의 말씀이 메시야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밝힙니다.

 

이외에도 시편은 하느님의 현존장소인 예루살렘을 기리는 시온시(46; 48; 76; 84; 87; 122),순례시(121), 전례시 등으로 나뉘지요.

 

 

잠언은 어떤 성서인가요?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첫 구절(1,1; 10,1; 25,1)을 따라 책의 이름을 솔로몬의 잠언들”(미쉴레 쉴로모)라고 불렀어요. 그리스어 칠십인 역 성서는 금언 모음집이라는 의미에서 파로이미아이라 불렀구요. 라틴어 불가타 성서는 프로베르비아라 이름지었는데, 여기서 영어 이름 프로버브가 나왔지요. 우리말 성서 이름 잠언은 중국어 성서 이름 箴言에서 유래하였어요. ()은 병을 고치는 데 쓰는 ()’을 뜻하기도 하여, 잠언은 침과 같이 톡 쏘면서 생명을 주는 짧고 소중한 가르침이란 의미를 담고 있지요.

 

누가 썼나요?

 

유다 전승에 따르면 잠언은 솔로몬이 쓰고 히즈키야가 편집했다고 해요. 솔로몬은 삼천 가지 잠언을 지었고(1열왕 5,12)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죠. 그러나 실제로 솔로몬이 잠언의 일부를 썼을 가능성은 크나 전체를 썼다고 볼 수는 없어요. 아마도 잠언을 쓰고 수집해서 편집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현인들이라고 불리던 서기들일 거예요. 그러면서도 이 책을 솔로몬 왕의 권위 아래에 둠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온 계시로 받아들이게 되었죠.

 

언제 쓰여졌나요?

 

우리의 속담이 그렇듯, 지혜문학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기에 시대적 배경을 추정하기가 매우 곤란하죠. 잠언은 가정과 부족에서 차츰 생겨난 생활의 지혜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다가 왕조시대에 들어와 몇 차례에 걸쳐 한데 모아졌어요. 특히 외국과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외국의 지혜문학 등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솔로몬 시대가 기폭제 역할을 했을 거예요.

 

이렇게 모아진 잠언이 현재와 같은 꼴을 갖추게 된 때는 대략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짐작되고, 최종적으로는 기원전 2세기경에 앞의 표제가 붙어져 완성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왜 썼나요?

 

고대 근동국가에서는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갖가지 금언이나 충고, 권고 등이 중요시되었고, 이런 것이 여러 작품으로 모아져 있었어요. 대표적인 것으로 수메르의 슈룹파크의 지혜서와 이집트의 아메넴오펫의 지혜을 꼽을 수 있지요. 잠언의 일부가 이 책들의 내용과 퍽 비슷한 데서 드러나듯, 이스라엘은 주변국가의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전통적인 신앙체험 안에서 그들 나름의 지혜문학을 발전시켰지요.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길이 지혜라고 하면서도 다분히 실리적인 측면에서 설명한 주변국가와 달리, 이스라엘은 지혜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로 여겨 신앙과 연결시켰지요. 즉 이스라엘은 지혜의 핵심을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파악했던 거죠(잠언 1,7; 9,10; 15,33).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지혜만이 최고 최선의 지혜라는 깨달음이죠.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이 지혜를 깨달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옳은 길을 택하여 복을 받으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이런 지혜의 글을 묶은 것이 잠언이라 볼 수 있어요. 잠언을 시적인 글로 두 행씩 대구법으로 구성한 것도 잘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요.

 

<새김과 나눔>

 

우리말 속담과 잠언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 봅시다. 가훈(家訓)과도 비교해 봅시다.

 

무엇이 옳고 바른지

 

(잠언 1-24)

 

머리글과 지혜시(1,1-9,18)

 

잠언이 쓰여진 목적이 무엇인지 적어 보십시오(1,2-4).

 

아마도 잠언 가운데 가장 늦게, 포로기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여겨지는 이 대목은 첫머리에서 잠언이 기술된 목적과 동기를 밝힙니다. 즉 사람을 깨우쳐 무엇이 옳고 바르며 떳떳한지 헤아리게 하려는 것이 잠언의 목적이지요. 지혜는 숨은 보화요 야훼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생명의 나무가 되고”(3,18; 4,22) 행복을 주니 있는 것 다 주고라도 지혜를 얻도록 권고해요.

 

반면에 지혜가 없는 악인들의 길은 멸망으로 끝나니, 탕녀를 조심하고 간음하지 말 것을 간곡히 호소해요. 또 일반적인 지혜문학의 가르침대로 함부로 보증서지 말 것과 게으르지 말 것을 가르쳐요. 이러한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지요(6,16-19).

 

끝부분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묘사된 지혜가 사람들 에게 바른 판단력과 예지와 능력, 재산을 안겨 줄 수 있다고 초대하지요(8,1-21). 구미가 당기신다구요? 그 지혜의 근본은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고 거룩하신 이를 깊이 아는 것이랍니다(9,10).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이라구요? 성서의 지혜는 어떤 비법(秘法)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은총이지요. 다만 사람들이 그대로 충실히 따르지 않는 게 문제죠.

 

지혜는 창조 이전부터 있었으며(8,22-31) 하느님은 지혜를 가지고서 세상을 만드셨다(3,19)고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해요. 후에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하느님의 지혜(1고린 1,24)로 보았죠.

 

솔로몬의 첫번째 잠언집(10,1-22,16)

 

의인과 악인의 길은 각각 어떻게 끝납니까?

 

(11,19.30; 12,28)

 

우리가 흔히 잠언 또는 속담이라 할 만한 짧은 경구들이 이제사 쏟아져 나옵니다. 서로 대조적인 모습을 두 행으로 표현한 이 잠언집은 아마도 솔로몬 시대까지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잠언들이라고 해요. 일정한 순서도 없이 각 절마다 독립적으로 제각기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지요. 물론 지혜는 올바르고 유익한 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지만 어리석음은 불행으로 이끔을 서로 대조시켜 지혜를 깨닫고 실천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 바탕을 이루고 있지요. 그 바탕의 근본은 참다운 지혜와 올바른 윤리생활의 기준은 바로 야훼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의인을 도와주시고 악인은 벌하신다는 하느님의 정의를 믿는 이스라엘의 신앙이구요.

 

현자들의 말(22,17-24,34)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의 핵심은 무엇입니까?(23,17-18)

 

이스라엘의 현인들이 들려주는 이 잠언들은 매우 일반적인 금언의 성격에 잘 맞습니다. 특히 앞부분(22, 17-23,14)은 이집트의 아메네오펫의 지혜와 상당히 비슷하여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 주지요. 그 뒤에는 아들에게 주는 어버지의 가르침(23,15-35)과 여러 가지 생활 규정들이 이어집니다. 내용들은 상당히 일반적인 교훈을 야훼신앙에서 정리한 금언들이지요.

 

사람은 이웃과 비비대며 살아야(잠언 25-31)

 

솔로몬의 두 번째 잠언집(잠언 25,1-29,27)

 

내 마음을 비추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27,19)

 

이 부분은 유다 왕 히즈키야(기원전 700년경 재위)가 현인들을 시켜 모은 솔로몬 왕의 잠언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앞에 나온 솔로몬의 잠언집과 비슷한 문체와 내용으로 짜여졌지요. 특히 28-29장의 잠언들은 첫번째 잠언집(10-22)에 나오는 잠언들처럼 대조법을 자주 사용하며 짧습니다. 그러나 25-27장에 나오는 잠언들은 좀더 길며 비유법을 많이 씁니다. 왕의 도리와 법률 처리, 말조심할 것, 우둔한 자와 게으름뱅이에 대한 경고, 교육의 중요성 및 갖가지 경우에 대한 짤막한 잠언들이 등장해요. 그러는 가운데 인과응보의 원칙과 함께 하느님만이 인간의 권리를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신다고 가르칩니다(29,25-26).

 

아굴의 잠언(잠언 30,1-14)

 

아굴이 하느님께 청한 두 가지 바람은 무엇입니까?(30,7-9)

 

아굴은 북아라비아에 사는 이스마엘 부족인 마싸 사람으로 소개됩니다만, 잠언의 내용은 상당히 이스라엘적입니다. 아굴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지 못했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며, 하느님을 잊거나 신성모독을 하지 않도록 정직한 말과 생활필수품만을 하느님께 청하지요.

 

숫자를 이용한 잠언들(잠언 30,15-33)

 

히브리 숫자를 자연 및 동물과 풍자적으로 연결시켜 올바른 생활로 용기있고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일깨우고 있어요.

 

르무엘 어머니의 잠언(잠언 31,1-9)

 

마싸의 왕인 르무엘에게 주는 그의 어머이의 교훈이지요. 동양의 임금들이 일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행 및 술과 여자에 대해 조심할 것,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할 것을 가르치고 있지요.

 

현숙한 아내(잠언 31,10-31)

 

참으로 칭찬을 받는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31,30)

 

잠언의 마지막은 훌륭한 아내가 받는 보답을 다루고 있어요. 우리말 성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 잠언을 이루고 있는 22개 구절은 히브리어의 알파벳 철자의 순서대로 시작되지요. 이 대목은 여자, 특히 안주인이 하는 일에 대한 존경이 가득 담겨 있어요. 그 여인은 부지런하고 경제생활도 지혜롭게 잘 처리하지만, 그보다 더 훌륭하게 평가받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비(20), 지혜로운 말과 친절한 가르침(26), 무엇보다도 야훼 하느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는 보답으로 큰 복이 주어지지요. 이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지혜로운 이에게 주어질 보답이 이러하다는, 잠언의 맺음말격이지요.

 

<새김과 나눔>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처세의 가르침, 나이든 분들이나 위인들의 가르침과 잠언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비교하여 보십시오. 참된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지 발표하여 보십시오.

 

 

전도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히브리어 성서는 이 책이 코헬렛의 말이라 하여 코헬렛이라 불렀어요. 이 말의 뜻은 확실치 않으나 대개 회중 또는 회중 앞에서 말하거나 가르치는 이를 가리킨다고 보아요. 그래서 그리스어 성서도 책의 이름을 회중이란 뜻의 에클레시아스테스(ecclesiastes)”라고 붙였어요. 이 이름이 널리 퍼졌지요. 우리말 성서 이름 전도서는 중국어 성서 이름 傳道書에서 유래하였어요. 오랫동안 코헬렛을 전도자로 옮겼던 교회전통에 따른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은 코헬렛을 전도자보다 설교자”(공동번역 성서), “교사”(NRSV), 또는 코헬렛”(NAB)으로 옮기면서, 책이름도 그냥 코헬렛”(구약성서 새 번역)으로 쓰기도 해요.

 

누가 썼나요?

 

전도서의 첫머리에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1,1)이라 하여 솔로몬을 저자로 암시하고 있어요. 하지만 글의 성격이나 내용, 사용된 어휘 등을 잘 검토한 결과, 이 성서를 쓴 이는 포로기 이후 그리스 시대에 활동했던 유다의 한 늙은 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해요. 그러나 그는 이 책을 이스라엘 지혜의 대표격인 솔로몬의 권위 아래에 둠으로써, 전도서가 어느 한 무명작가의 개인적인 지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에 근거를 둔 권위있는 가르침임을 드러냈답니다.

 

언제 쓰여졌나요?

 

전도서는 포로기 이후에 나온 후기 히브리어로 쓰여졌어요. 사용된 어휘는 페르시아의 아람어와 그리스어의 영향을 짙게 받았구요. 또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쓰여진 전도서의 필사본 단편이 쿰란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기원전 2세기 말에 살았던 집회서 저자가 전도서를 알았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당시에는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크게 보아 전도서는 기원전 3세기경에, 아마도 기원전 250년 전후에 완성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어요.

 

왜 썼나요?

 

잠언을 읽고 뒤이어 전도서를 읽은 분들은 좀 헷갈리지 않으셔요? 전도서가 잠언의 지당했던 내용들을 상당히 비판하고 있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코헬렛은 헬레니즘 같은 외래사조가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에서 기존의 지혜문학이 지닌 헛점을 보완하고,이스라엘의 신앙을 바로 세우려고 애를 썼어요. 그가 자주 쓰는 말은 나는 보았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는 틀이지요. 즉 코헬렛은 실제적인 경험과 냉정한 관찰을 통해 잠언류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지혜의 한계와 단순한 인과응보 논리의 허구성, 세상의 불공평과 왜곡된 현실 등을 지적하고 있어요. 특히 인간의 종말인 죽음에 부딪쳐 좌절해 있는 인간의 갖가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모든 업적과 소유가 궁극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 상대적인 것임을 알려 주지요.

 

그리하여 코헬렛은 창조주 하느님만이 절대가치를 지니시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시니, 그분을 경외하면서 그분이 주시는 시간과 장소에서 그분의 선물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기쁘게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인간의 한계에 몸부림치면서도 신앙에 매달린 코헬렛에게 궁극적으로 빛과 구원을 던져주시는 이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새김과 나눔>

 

역사와 인생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도서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구절은 무엇입니까? 그 내용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비춰 서로 의견을 나눠 보십시오.

 

헛되고 헛되다(전도 1-6)

 

머리글(1,1-18)

 

전도서의 기본관점인 다음 두 구절을 적어 보십시오(1,2.9).

 

전도서는 첫머리에서 책 전체의 기본 기조를 밝힙니다. 세상만사 헛되다는 것이죠. ‘헛됨의 원어는 으로서 쉽게 사라지는 걸 말하죠. 즉 인간의 삶, 세상일에 어떠한 의미나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목적 없이 되풀이되고 인간사도 새로운 것 없이 반복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허무주의 선언이 아니예요. 이 이야기 뒤에는 과연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그 의미와 답을 찾으려는 처절한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죠.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 보았더니(2,1-26)

 

향락의 결과는 어떠했다고 고백합니까?(2,10-11)

 

코헬렛은 행복해지기 위해 술에도 빠져보고 각종 향락에도 몰두하는 등 부귀와 쾌락을 즐겨 보았으나 결코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혜로운 자도 죽음 앞에서는 어리석은 자와 다름이 없고, “제 아무리 애를 태우며 수고해 보들 돌아올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에 절망하지요. 그리하여 결국 일시적인 세상 것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 삶을 즐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깨달음에 이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지혜로운 이가 현실을 직시하며 들려주는 인생의 적나라한 실정과 불안한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어요.

 

무엇이나 때가 있다(3,1-4,16)

 

모든 것이 제 때에 맞게 들어 가도록 만드신 이는 누구입니까?(3,11)

 

모든 현상과 사물의 진행과정에는 하느님이 정하신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때를 온전히 알 수 없어요. 게다가 세상을 관찰해보니 인간의 운명도 짐승보다 특별하지 않고, 세상엔 불의가 판치고, 남과 경쟁하며 더 성취해 보아야 소용이 없고, 명예와 권력도 일시적임을 알게 되죠. 그리하여 코헬렛은 다시금 하느님을 주목합니다. 때를 정하시고 사람의 정의를 심판하시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물로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 인간의 결함과 노력의 한계를 일깨우며 하느님께 눈을 돌리라고 호소하는 거죠.

 

여러 짧은 잠언들(4,17-6,9)

 

코헬렛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5,17)

 

코헬렛은 계속해서 인간 삶의 여러 영역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일을 드러내면서 지혜롭게 충고합니다. 성전에는 제물 봉헌보다 겸허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러 갈 것이며 하느님께 성급하게 서원하지 말라고 일러요. 또 왕정체제의 한계를 보여주고 재산 축적과 부귀영화의 헛됨도 강조하죠.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해주신 지금 여기에서 그분을 경외하며 열심히 사는 것이랍니다.

 

<새김과 나눔>

 

코헬렛은 계속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내용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비춰 서로 의견을 나눠 보십시오.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라

 

(전도 7-12)

 

누가 알겠는가? 무엇이 좋은 일인지(6,10-8,15)

 

참으로 지혜로운 이는 누구입니까?(8,1)

 

코헬렛은 결정적인 운명 앞에 서 있는 인간의 한계와 무기력함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구부려 놓으신 것을 펼 사람은없기 때문이죠(7,13). 그리하여 죽음 앞에서는 절대적인 행복이 없음을 잠언 형식으로 들려줍니다(7,1-9). 그가 덧없는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만사를 겪어보니, 세상은 인과응보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중용(中庸)을 지켜 살기를 권해요. 또 정치의 양면성과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의 불공평함도 지적하지요. 그렇지만 코헬렛은 비록 사람의 지혜에 한계가 있으나 그래도 때와 방식에 맞게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충고해요. 아울러 하느님을 향해 즐겁게 사는 것이 좋은 것임을 다시금 강조해요.

 

모든 사람이 같은 운명을 당하는데(8,16-11,6)

 

저자는 죽은 사자보다 무엇이 더 낫다고 합니까?(9,4)

 

이 대목에서 코헬렛은 사람의 운명이 똑같음을 계속 지적해요. 다같이 죽을 운명에 처해진다는 것이죠. 또 아무도 죽을 날을 몰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악으로 차고 넘친다는 사실도 이야기해요. 그러니 살아 있음이 무척 소중한 것이고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몫을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요. 사실 이러한 코헬렛의 주장은 죽음을 극복하는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깊은 심정과 운명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죽으셨다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이 꼭 필요한 거죠.

 

그 밖에 코헬렛은 전통적인 지혜의 한계를 밝히면서도 여전히 인간 생활에서 지혜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충고하고 있어요. 인간이 노력한 앞으로의 결과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고 말이죠(로마 9,16).

 

맺음말(11,7-12,14)

 

금언집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12,11)

 

코헬렛의 마지막 말은 젊음과 늙음(또는 죽음)에 대한 묘사와 충고입니다. 젊음과 늙음은 햇빛과 어둠, 봄과 겨울처럼 대조적인 모습으로 비교되어요. 청춘을 즐기라는 코헬렛의 권유는 어떤 향락이나 방종을 부추기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이 삶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자유롭게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권유이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을 맞기 전에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며(12,1), 그분의 뜻에 따라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히 사는 것이죠. 생명이신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말이죠.

 

전도서의 끝부분(12,9-14)은 코헬렛의 제자들이 나중에 덧붙인 내용이에요. 그들은 코헬렛이 지혜를 깨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이었음을 밝혀요. 그리고 그러한 금언들은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죠. 그들의 마지막 결론은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12,13)는 한마디예요. 지혜문학의 핵심이자 지혜문학과 오경이 이어지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결국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오랜 전승을 보완하는 가르침인 전도서는 신약성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갈구하는 고백이기도 한 셈이죠.

 

다음 주에는 아가를 읽겠습니다. 짧고 아름다운 성서이니 꼭 읽고 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그림 성서와 함께]

 

<새김과 나눔>

 

변화하는 이 시대에 코헬렛처럼 하느님의 절대성과 영원하심을 가르치기 위해 젊은이나 자녀들에게 충고한다면,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아가는 어떤 성서인가요?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솔로몬의 노래”(아가 1,1)라는 구절을 따, 가장 뛰어난 노래를 뜻하는 쉬르 하쉬림이라 불렀어요. 또는 줄여서 솔로몬의 노래라고도 불렀죠. 이런 작명법은 다른 성서에도 이어졌어요. 그리스어 성서는 아스마(노래)”라 불렀고, 라틴어 불가타 성서는 깐띠꿈 깐띠꼬룸(노래 중의 노래)”이라 이름지었어요. 우리 말 성서 이름 아가는 중국어 성서 이름 雅歌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뜻 역시 지고하고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이지요. 아가는 구약성서의 분류 중에 성문서에 들어가지요. 성문서 중에서도 에스델, 룻기, 애가, 전도서 등과 함께 축제 때 읽혀지는 다섯 두루마리(축제 오경)에 속해요. 아가는 6세기부터 파스카 축제 때 봉독되었지요.

 

누가 언제 썼나요?

 

아가서는 곳곳에서(1,1; 3,7.9.11; 8,11.12) 솔로몬을 저자로 제시하고 있으나, 문체와 여러 내용을 검토해보면 사실로 볼 수 없어요. 단지 솔로몬이 많은 노래를 지었다는 전승과 지혜와 사랑의 본보기로 알려진 점을 고려하여 솔로몬을 저자 이름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성서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사람에 의해 쓰여졌을 거예요. 몇몇 노래는 솔로몬 시대와 기원전 8세기 왕정시대에 쓰여졌다고 보여지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은 바빌론 유배시대 이후에 기록되었어요. 이런 여러 노래들이 한데 모아져 현재와 같은 꼴을 갖춘 것은 대략 기원전 5-3세기경이었답니다. 그러니까 페르시아 시대 말기부터 그리스 시대 초기에 해당되지요.

 

왜 썼나요?

 

아가는 여덟 장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퍽 파격적이지요. 아무 선입견 없이 그 책을 읽는 사람은 뛰어난 한 편의 연애시를 읽는 기분일 거예요. 더구나 그 표현들이 상당히 솔직하고 관능적이어서, 어떻게 이런 책이 성서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 거예요. 게다가 최근에 와서 중동의 옛 문헌을 발굴하여 읽어본 결과, 아가의 모티브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신화에서 영향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합니다. 즉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겨울을 거쳐 봄이 와 계절의 생산력을 높이는 순환과정을, 담무즈 신을 찾아다니던 이쉬탈 여신이 마침내 그를 찾아 연인이 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사실 아가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옛날부터 줄곧 논의되어 왔답니다. 그래서 아가를 이스라엘의 사랑노래 모음집이나 연애극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메소포타미아처럼 봄을 기리는 제의적 노래가 수용된 것이라고 보기도 해요. 하지만 교회는 아가를 성서의 일부로 받아들여서 계시 역사 전체와 연관시켜 풀이해요. 아가에서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적인 사랑과 성, 넘치는 생명력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선물로 인식하는 거죠. 이는 사랑과 성을 신화적인 것으로 보았던 주변 민족들의 성향과 완전히 다른 자세이죠. 나아가 흔히 혼인관계로 표상되던 하느님과 당신 백성간의 관계를 연인의 관계로 빗대어 표현한 노래로 보기도 해요. 우리는 이 노래에서 상대에 대한 충실성과 지극한 사랑을 읽으면서 인간 서로간에, 하느님과 인간간에 오가는 사랑의 진실을 여실히 알아볼 수 있답니다.

 

<새김과 나눔>

 

사랑하는 상대방(남편, 아내 등)과 하느님께 보내는 사랑의 고백을 글로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함께 아가를 읽으며 나눠보십시오.

 

그대 내 사랑(아가 1-8)

 

사랑하는 남녀의 대화 형식으로 된 아가를 크게 갈라보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지요.

 

그대 내 사랑(아가 1,1-2,7)

 

우리가 기쁘고 즐거운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1,4)

 

연인(신부)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그의 이름을 높이며 그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남녀는 자연과 여러 동식물, 향내 왕궁 등을 소재로 하여 서로의 아름다움을 기리죠. 사랑에는 서로를 보호하는 힘과 생명력이 있음을 느끼게 하지요.

 

님을 찾아(아가 2,8-3,5)

 

신랑은 신부를 어느 동물에 비기는가?(2,14)

 

사랑하고 있으나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애틋함을 노래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신랑을 찾는 모습과 발견하지 못하는 모습이 대조를 이루어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연인을 애타게 찾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자신을 투신하는 사랑을 엿볼 수 있어요.

 

아름다워라, 그대(아가 3,6-5,1)

 

신랑은 신부를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4,12.15)

 

합창단이 솔로몬 왕의 혼인행렬을 노래하는 가운데, 신랑은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 없는 신부의 아름다움을 노래해요. 사랑을 하면 상대방의 결점도 달리 볼 수 있게 되지요. 신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신랑은 그 신부의 생명력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의 신비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을 고백한답니다.

 

내 님은 어디로(아가 5,2-6,3)

 

신부는 신랑을 레바논의 무엇에 비겨 노래합니까?(5,15)

 

신부를 찾아온 신랑의 부름에 주저하다가 늦게 문을 열었지만 그 사이에 신랑을 가버리고 말았어요. 뒤쫓아갔지만 찾지 못한 신부는 사랑으로 병들어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에게 자기 님을 찾아달라고 호소하면서 그 님의 아름다움을 여러 가지로 빗대 노래하지요. 사랑은 인간의 마음대로 얻어지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닫게 하지요.

 

보고픈 님이여(아가 6,4-8,4)

 

신랑이 다시 등장하여 신부를 보고파 하는 애절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어요. 신부도 역시 자신의 사랑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신랑을 만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어요. 연인간에도 그렇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분을 만나고픈 간절한 열망이 필요하답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아가 8,5-14)

 

드디어 사랑하는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힘이 있고 새상의 온갖 재물보다도 커서 한없는 기쁨의 삶으로 초대한다고 노래하지요. 사랑하는 남녀는 그 사랑이 참되고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인간의 모든 사랑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참되고 영원할 수 있답니다.

 

 

지혜서는 어떤 책인가요?

 

지혜서란 성서 이름은?

 

지혜서는 제 2경전 중에서 유딧 다음으로 나오는 성서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많고 많지만, 하느님의 지혜를 능가하는 것은 없음을 일깨우기 위해 쓰여진 만큼 지혜서란 책이름이 붙여졌어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여겨지는 솔로몬 왕이 썼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가타 성서와 70인역 성서에서는 솔로몬의 지혜서로 부르기도 해요.

 

누가 썼나요?

 

솔로몬이 지혜서의 저자라고 생각되는 것은 아주 이른 시절부터 의문에 처해졌어요. 오리게네스, 유세비우스, 아우구스티누스,예로니모 등의 교회학자들은 지혜서의 문학적인 표현방식이나, 당대에 유명한 사람을 저자 이름으로 내세웠던 관습으로 보아서 솔로몬이 저자일 수 없음을 밝혀냈지요. 현재도 누가 지혜서의 저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헬레니즘의 철학과 수사학과 문화가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어를 말하는 학식있는 유다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돼요. 앞부분의 내용과 문체가 뒷부분과 다른 점을 들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나누어서 집필했을 거라고 여기는 학자도 있어요.

 

언제 썼나요?

 

학자들 간에 의견이 완전히 일치되지는 않지만, 대략 기원전 220년서부터50년 사이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아요. 70인역본 성서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으로 보면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집필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해요. 나아가 땅의 끝에서 끝까지 다스리는 통치자들”(6,1)이란 말이 언급되어 있고, “너무 멀리 살기 때문에 직접 경배할 수 없는 군주”(14,17)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 쓰여지지 않았을까 추정해요. 또한 필로(기원전20-기원후50)의 저작물에 대해서는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지혜서에 담긴 언어적인 표현이 기원전 1세기에야 나타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아우구스티누스 통치기간보다 그리 앞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사해 주지 않나 싶어됴. 기원전 1세기말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거에요. 만일 그렇다면 지혜서는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늦게 집필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썼나요?

 

이교적인 문화권에 사는 동료 유다인들이 전통적인 믿음에 긍지를 가지고 지켜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쓰여졌어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게 마련이므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꿋꿋이 지켜나가라고 촉구하고자 해요. 그런 면에서 현재 겪는 고통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으로 받아 안으라고 권유해요. 나아가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 이방인 왕들은 그에 따른 추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해요. 숨을 거두면 그만일 뿐인 한낱 인간에 불과한 왕들이 하느님으로 신격화되어 숭배를 받는 일은 가당치 않으므로, 거기에 말려들어 참된 하느님을 못 보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도록 촉구해요.

 

<새김과 나눔>

 

지혜서 저자는 왕을 신으로까지 받들던 당대 분위기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추구해야 함을 촉구합니다. 모든 것이 정치논리로 펴나가는 사회에서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바는 무엇입니까?

 

지혜를 찾으려면

 

(지혜 1-10)

 

정의를 추구하여라(지혜 1,1-2,24)

 

* 지혜는 누구를 사랑하는 영입니까?(1,6)

 

지혜는 한 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책임을 맡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필요한 법이죠. 그래서 지혜서는 첫머리서부터 지상의 통치자들이여 정의를 사랑하여라”(1,1)고 힘있게 선포하고 있어요. 더 많은 책임을 맡은 만큼 하느님을 대신해서 모든 것에 정의를 세우고, 자신들의 힘을 정의의 척도로 삼으려는 악인들로부터 약자를 보호해야 할 커다란 책무를 지고 있으니까요(2,11). 어느 곳이든 악인과 의인이 섞여 있기 마련이지만, 지혜는 죄로 물든 사람들 안에는 깃들이지 않아요.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며 모든것울 포괄하시는 분이시기에, 불의를 지껄이는 자는 반드시 탄로나게 되고 그에 따라 정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어요. 혹시라도 우리 주변에 그런 이웃들이 보이면, 바판하고 흉보기 보다는 언젠가는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좋겠지요.

 

지혜의보상은 불멸(지혜3,1-6,21)

 

* 거룩한 사람이 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6,10)

 

누구나 일생에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의인으로 살았느냐 악인으로 살았느냐에 따라서 아주 다른 대우를 받아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 손에 있어서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지만(3,1), 악인들은 자신들의 죄가심판대 앞에서 낱낱이 세어질 때에 몸둘 바를 몰라 할거에요.(4,20). 그러니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는 생각으로 정욕에 빠지거나 악에 현혹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거예요. 하느님 앞에서 아무리 후회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땅의 끝에서 끝까지를 다스리는 통치자도 예외가 될 수는 없지요. 정의로 다스리지 않았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처신하지 않았으면 주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세상의 군주들도 지혜를 배워서 죄에 빠지지 말라고 당부해요.

 

지혜의 본성(지혜 6,22-11,1)

 

* 하느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형상은 무엇입니까? (7,26)

 

지혜를 얻은 사람은 지혜의 가르침 덕분에 하느님의 벗이 될 수 있어요. 하느님은 바로 지혜의 인도자이시며, 우리의 모든 현명함과 생활의 지혜 또한 그분께 달려 있으니까요. 지혜는 비록 홀로 있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면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어요. 그래서 솔로몬 왕처럼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아서 생활해 나가면, 고통이 없고 오직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거라고 이야기해요. 맨 먼저 조성된 인류의 아버지 아담서부터 노아, 아브라함, 야곱, 요셉,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 주고 인도해 준 것도 지혜거든요.

 

<새김과 나눔>

 

지혜서 저자는 구원사의 큰 인물들 안에서 지혜의 힘이 작용했음을 일깨워 줍니다.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지혜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까?

 

역사 안에 드러난 지혜

 

(지혜 11-19)

 

멸망과 구원의 갈림길(11,2-14)

 

*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실 때는 어떤 심정이실까요?(11,10)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똑같은 물의 작용도 달라져요. 황야를 헤쳐 나가면서 목말라 간청하는 이스라엘에게는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물이 되지만, 이집트인들에게는 죽음을 가져다 주는 재앙의 물이 되어요. 마찬가지로 주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할 때에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하지만, 원수들에게는 무서운 왕처럼 엄격히 다스린다는 것을 일러주어요. 우리에게는 어떤 방법으로 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열심히 따르려고 하는지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 우상숭배자들을 유여하시는 까닭은

 

(지혜 11,15-16,15)

 

*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조금씩 조금씩 처벌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12,9-10)

 

이집트인들은 뱀들과 추한 짐승을 경배하지만, 그들을 한꺼번에 없애버리시지는 않아요. 다만 이성없는 생물들의 떼를 보내심으로써,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일깨워 줄 뿐이죠.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것이 그분 것이기에 모든것을 용서하시는 분이시니까요. 비단 이집트인들만이 아니라 인신제사를 드리는 가나안 사람들도 조금씩 처벌하심으로서 회개할 기회는 주셔요. 이와 같은 관용을 보이심으로써 당신을 믿는 백성에게 의인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죠. 태어날 때부터 어리석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보고도 그것을 만드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 자체를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우상들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들은 참 가련한 사람들이죠. 더군다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으로서 존경하던 자를 신으로 경배하기까지 하구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러한 우상을 숭배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일러주어요.

 

징벌과 용서(지혜 16,16-19,22)

 

* 사람은 언제 겁을 먹게 됩니까?(17,11)

 

출애굽 당시에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악인들은 주님의 힘센 팔에 얻어 맞았다고 일러주어요. 이상한 비와 우박과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 등의 피조물들은 악인들을 벌하는 데에는 힘을 다하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힘이 부드러워집니다. 실제로 암흑의 죄수로 살던 이집트인들에게는 불기둥을 보며 공포에 떨었지만, 이스라엘인들은 그 불빛의 인도를 받아 이집트를 빠져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놀라운 힘은 이집트인들이 거룩한 백성의 젖먹이를 죽이려 했을 때 한 아이를 살려내는가 하면, 출애굽 당시 수많은 이집트인들 가정에서 아이 잃은 슬픔에 잠기게 하는 데서 잘 드러나요. 이스라엘인들이 홍해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구요.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지 않겠어요.

 

<새김과 나눔>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내 삶 중에서 하느님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을 더듬어 봅시다.

 

집회서는 어떤 책인가요?

 

집회서란 성서 이름은?

 

집회서는 제2경전 중에서 지혜서 다음으로 나오는 성서입니다. 집회는 모임이라는 뜻이죠. ‘집회서는 초대교회에서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용한 책이라서, 교회의 책이란 뜻으로 이 이름을 붙이게 되었던 거죠. 그전에는 저자의 이름을 붙여서 벤 시라의 잠언혹은 시라라고도 불리웠답니다.

 

누가 썼나요?

 

집회서 말미에 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51,30)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요. 이처럼 저자가 자기 책에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예언서를 제외하고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어요. 아마도 자기 저서에 자기 자신의 소개를 담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여요. 집회서에 소개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벤 시라(=시라의 아들)는 젊은 시절부터 율법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오래도록 명상하고 외국여행도 하면서 쌓은 지혜를 젊은이들에게 전해주고자 학교를 열었던 예루살렘의 명문 율사로 여겨져요. 원래 히브리어로 쓰인 이 책은 저자의 손자에 의해서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서 널리 읽혀지게 되었답니다(머리말).

 

언제 썼나요?

 

기원전 180년경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여요. 저자의 손자가 유에르게테스 왕 삼십팔 년에 이집트에 가서 그곳에 머무를 때에 고상한 교훈이 담긴 책을 한 권”(머리말) 번역했다는 기록에 비추어, 비교적 정확하게 집필연대를 추정할 수 있어요. 유에르게테스는 프톨레매오 7(기원전 170-116)를 가리키므로, 유에르게테스 왕 삼십팔 년은 기원전 132년이죠. 따라서 번역자와 할아버지 벤 시라의 나이 차이를 감안하면, 이 책이 50년 전에 쓰여졌으리라는 추정이 충분히 가능해요. 또한 벤 시라는 대사제 시몬을 높이 찬양할 뿐 아니라(50,1-24), 시몬의 아들 오니아 3세가 페위된 이후(기원전 174)에 벌어진 비극적인 상황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 치하의 극심한 박해에 대한 어떤 암시도 찾아볼 수 없거든요.

 

왜 썼나요?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에 의해서 더욱 널리 퍼진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 살면서, 전통신앙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회의하는 유다인들을 붙들어 주고자 했어요. 율법을 통하여 계시된 참 지혜를 지니고 있으므로, 헬레니즘을 무작정 따라가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올바른 지혜의 길을 추구하라고 촉구해요. 워낙 방대한 내용이라 인생의 문제들중 다루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에요. 하지만 모든 주제에 앞서서 이스라엘 전통 안에서 이미 전해 내려오는 지혜를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있답니다.

 

<새김과 나눔>

 

집회서 저자는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전통신앙을 지켜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세계화의 바람 속에 휘말리고 있는 요즈음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지혜의 완성은

 

주님을 두려워함에 있으니(집회1-23)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집회 1,1-4,10)

 

* 지혜는 어디에서 옵니까?(1,1)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어요. 따라서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자 완성이에요.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해요.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황금을 불 속에서 단련하듯, 하느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신다는 믿음으로 참고 견디면서요. 실제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마음에 들도록 애쓰며 그분의 율법으로 만족해 합니다. 궁핍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고 고아들을 아비처럼 보살펴 주면서 말이죠.

 

지혜의 보상(집회 4. 11-6,17)

 

* 어떤 사람이 참된 벗을 만들 수가 있을까요?(6, 17)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의견을 내야 할 때 잠잠하지 않고, 죽기까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요. 손을 내밀어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베풀기도 하면서요 또한 의욕과 정력만을 믿고서 탐욕에 빠지지 알도록 조심해요. 주님의 자비가 크시니 내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용서하시리라고 자만하는 일이 없도륵 조심하구요. 이처럼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사는 사람은 참된 벗을 만들게 돼요.

 

지혜로운 처세(집회 6,18-14,19)

 

*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배우는 것이 많게 되지만, 귀를 기울일 줄 알면 무엇이 될까요?(6,33)

 

젊을 때부터 교양을 많이 쌓는 것이 좋아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듯이 지혜를 가꾸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되니까요. 그러나 처음에는 속박처럼 여겨지더라도 지혜의 족쇄와 칼을 스고 전력을 기울여 지혜의 길을 가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러다 보면 자녀와 부모들에게 지성을 다하게 되고, 사제들을 섬기고, 친구와 우정을 지켜가는 데 만전을 기하게 되죠,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을 들이고, 일을 할 때에도 늘 주님께 신뢰를두며, 친구들을 가려 사귀면 좋겠지요.

 

참 지혜와 거짓 지혜(집회 14,20-23,27)

 

* 주님께서는 무엇을 옥새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아끼십니까?(18,22)

 

지혜를 따라 사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자기 자녀들을 지혜의 보호 밑에 둘 뿐 아니라, 지혜를 의지함으로써 망신을 당하지 않으니까요. 주님은 인간의 선행과 자선을 귀하게 여기시는 분임을 깨닫고, 이웃에 대한 의무에 소홀히 하는 일이 업어요. 인간의 말로가 비참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용서를 주님께서 용서를 많이 베푸시는 다는 것을 믿고, 생명의 아버지신 주님을 부르며 헛된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곤 해요.

 

<새김과 나눔>

 

집회서 저자는 지혜를 따라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동안 어떤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생각해 왔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역사 안에 하느님의 영광이

 

(집회 24-51)

 

지혜의 찬미(짐회 24,1-33,18)

 

주님과 사람들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새 가지는 무엇입니까?(25,1)

 

지혜는 주님께서 영원으로부퍼 정해 주신 자녀들의 어머니로, 지혜를 완전히 터득한 사람은 일쩍이 아무도없었으며, 그 깊이를 알아낸 사람도 고금에 없었죠 그러니 젊었을 때 아무것도 모아두지 않으면 늙어서 찾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만큼 더 행복한 사람은 찾기가 힘들어요. 장사며 차용 등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서 자신을 경계하는 일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길임을 일러주어요.

 

율법과 제사, 하느님의 정의(집회 33,19-38,23)

 

*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생명이며, 그것을 빼앗는 것은 살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34, 21)

 

꿈은 어리석은 자에게 환상의 날개를 달게 해서 미혹시키므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 마음을 쓰지 말라고 당부해요. 또한 제물을 많이 바친다고 해서 죄를 용서받는 것은 아니며, 일꾼에게서 품삯을 빼앗는 것은 그의 피를 빨아 먹는 것이라고 일러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많은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으니,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대로 능력껏 아낌없이 바치라고 당부해요. 주님의 이름을 받드는 백성들에게 회망을 채워주시기를 기도드리는 가운데,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을 단련하라고 일러요.

 

지혜를 쌓으려면(집회 38,24-43,33)

 

* 사람은 어떻게 해야 현명해집니까?(38,24)

 

학자가 지혜를 쌓으려면 여가를 가져야 하고, 사람은 하는 일이 적어야 현명해진다고 일러요. 온 정력과 정신을 기울여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온 마음을 바치는 사람으로, 깨우침의 영감을 충만히 받을 거에요.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불러요.

 

역사적 인물에게서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

 

(집회 44,1-51,30)

 

*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늘로 불려 올라가서 후대를 위하여 회개의 모범이 된 사람은 누구입니까?(44,16)

 

주님께서는 역대 선조들을 통하여 당신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셨으므로, 역사적 인물들에게서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요. 왕권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슬기로운 사람도 있었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예언자도 있었다면서, 온 회중이 그들의 지혜를 칭송할 것이라고 밝히는 가운데 에녹, 노아, 다윗, 솔로몬 등 구체적인 인물을 들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요. 끝으로 지혜를 추구하면서 살아왔던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의 노래를 바쳐요.

 

<새김과 나눔>

 

집회서 저자는 자연과 역사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나는 지금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 안에서 무엇을 봅니까? 지나간 우리 역사, 나 개인의 인생 안에서 무엇을 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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