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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설] 서간서

dariaofs 2015. 2. 27. 18:49

사도행전은 어떤 책인가요?

 

사도행전이란 성서 이름은?

 

사도행전은 요한복음서 다음에 나오는 성서입니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보았던 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언행을 태어나서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의 과정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기록하려 하였던 반면에,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이 성령의 힘을 받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교회를 세워나가던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행적이 담겨 있다 해서 사도행전(使徒行傳)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답니다.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질 수 있게 한 모태라 할 수 있는 초대교회의 창립과정을 상세히 그려내고 있는 셈이죠. 그렇다고 해서 12사도의 활동상이 모두 담겨 있지는 않아요. 실제로 사도행전의 앞 부분에서는 12사도를 대표하는 사도 베드로의 행적이 다루어지고 있고, 뒷 부분에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도 바오로의 행적이 주로 다루어지고 있어요.

 

누가 썼나요?

 

루가복음서를 쓴 사람이 복음서의 후속편으로 사도행전을 집필했을 거라고 봐요. 4복음서를 한데 모으기 전만 하더라도, 사도행전은 루가복음서와 함께 전해져 왔으니까요. 또 두 성서의 내용을 비교해 보더라도, 신약성서 중에서 이 두 권만 데오필로에게 바치는 헌정사가 실려 있어요. 두 책에 사용된 문체나 용어도 비슷한 부분이 많지요. 하지만 서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차이나는 부분도 상당히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성서는 예수님의 탄생서부터 교회가 창립될 때까지 벌어졌던 일들을 일관성있게 보여주고자 한 동일인물에 의해서 기획 집필되었을 거라고 봐요. 바오로를 따라다녔던 의사 루가가 저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지만, 편의상 그를 루가복음 - 사도행전의 저자로 부르고 있어요.

 

언제 썼나요?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은 한 사람의 신학적인 의도 아래 두 권의 책으로 쓰여졌어요. 사도행전은 80-90년경에 쓰여진 루가복음서의 후속편으로 대략 95년경에 완성되었다고 봐요. 사도, 장로, 부제 등 교계제도적인 모습과 세례, 안수, 성찬 등 원초적인 성사제도가 1세기 말엽의 교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거든요.

 

왜 썼나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로 교회가 어떻게 건설되고 성장했는지 일러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어요. 당시에는 이교적인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행전들이 많이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올바른 가르침이 스며들어 있는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던 거지요. 당시 커다란 힘을 떨치고 있던 로마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순조롭게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이끄셨기 때문임을 일러주며, 로마황제 숭배 및 유다인들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어렵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자 집필했어요.

 

<새김과 나눔>

 

사도들은 성령의 힘을 받아서 주님의 복음을 힘있게 전합니다. 세례 때 성령을 받은 우리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는 다 목격자들입니다

 

(사도1-12)

 

주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사도 1)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 대신 복음을 전할 사도로 뽑힌 사람은 누구입니까?(1,26)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성령의 힘을 받아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당신의 증인이 될 거라고 일러주어요. 예수의 승천 뒤에 사도들은 예루살렘 이층방에 모여,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써요.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는 유다 대신에 복음을 전할 사도를 새로 뽑자고 제안해요.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줄곧 자신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서 요셉과 마티아를 천거한 다음, 제비를 뽑아 마티아에게 사도직을 맡겨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 2-5)

 

사도 베드로는 아름다운 문 옆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누구의 이름으로 행합니까?(3,6)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를 말함으로써, 세계 각국에서 축제를 지내러 온 유다인들을 깜짝 놀라게 해요. 이어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자신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며 회개하라고 촉구해요. 이 말을 듣고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놓아요.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사도 6-8)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사람은 누구입니까?(8,26-40)

 

신도들의 수효가 늘어나자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 안수해요. 그중에서 유다인들과 논쟁을 벌이던 스데파노는 고발을 당해 의회원들의 재판을 받아 처형돼요. 이 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아 흩어지지만, 신도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해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개종시키는 개가를 올려요.

 

성령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사도 9-12)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11,26)

 

스데파노의 순교에 찬동하였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마스커스에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는 개종해요. 이로 말미암아 사울은 유다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돼요. 그동안 베드로는 리따와 요빠에서 놀라운 일들을 보이면서, 심지어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 고르넬리오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요. 이 일이 문제가 되자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이 이끄신 일이었다고 해명해요. 이런 사도들의 복음선포 노력으로 안티오키아에 그리스도교가 굳건히 세워져요.

 

<새김과 나눔>

 

초대교회는 열성껏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의 노력으로 굳건히 세워졌습니다. 나는 교회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사도13-28)

 

사도 바오로의 제1차 전도여행(사도 13,1-15,35)

 

전도 여행을 떠나도록 바르나바와 사울을 파견한 교회는 어디입니까?(13,1-3)

 

바르나바와 사울은 안티오키아 교회를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아,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요. 여기서 요한 마르코라는 협조자를 얻지요. 이어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에서 복음을 전해요.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비해 유다인들은 복음을 배척해요.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이방인들도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하는 새로운 문제가 생겨요.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신중하게 이 문제를 검토하는 중에, 사도 베드로의 제안에 따라 이방인들에게는 최소한의 규정만 부과하기로 의견을 모아요.

 

사도 바오로의 2-3차 전도여행(사도 15,36-20,38)

 

바오로가 작별인사를 하자, 바오로의 목을 끌어 안고 슬퍼한 교회는 어디입니까?(20,17-38)

 

2차 전도여행 때에 바오로는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두루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해요 . 여행 중에 신비로운 영상에 접한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아테네, 고린토 등지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해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서 점을 치지 못하게 된 주인이 고소해서 감옥에 갇히는 수난을 겪는가 하면, 베레아에서 성서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며 파고드는 유다인들을 만나 힘을 받기도 해요. 3차 전도 여행 때에도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해요.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오로(사도 21-26)

 

사도 바오로는 어디에서 체포됩니까?(21,27-36)

 

사도 바오로는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필립보의 딸들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것이라는 예언 말씀을 받아요.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오로는 교우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기도 하지만, 정결예식을 치르러 성전에 갔다가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이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로마군에게 체포됩니다. 이후 바오로는 의회의원 앞에서, 펠릭스 총독 앞에서, 신임총독 페스도 앞에서, 아그리빠 왕 앞에서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부활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에게 구원의 빛을 선포하실 분임을 전하였을 뿐이라고 밝혀요.

 

로마로 떠나는 바오로(사도 27-28)

 

사도 바오로는 로마에서 몇 년 동안 복음을 선포합니까?(28,30)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오로가 카이사르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바오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로마로 호송돼요. 도중에 태풍을 만나 조난당해 멜리데섬에 머물지만, 거기서도 추장의 아들을 고쳐주는 등 놀라운 일을 행해요. 그리고는 로마에 도착해서 만 이 년 동안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처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로마서는 어떤 책인가요?

 

로마서란 성서 이름은?

 

로마서는 첫번째 서간성서로 사도행전 다음에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주신 로마의 교우 여러분께 문안드립니다”(1,7)는 구절에 잘 드러나듯이, 이 편지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에 띄워진 것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불리워졌지요. 로마서는 그 줄임말이구요.

 

누가 썼나요?

 

사도 바오로가 썼어요. 로마서는 다른 바오로의 서간들에 비해서 부피도 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후대에 쓰여져서 사도 바오로의 신학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만큼 초대교회 내에서 문제로 삼았던 내용이 잘 드러나 있어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로마 1-4), 아브라함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된다는 논증(로마 4),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을 서로 대비시킴(로마 5,12-19),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마 12,4-8), 다른 사람의 양심을 고려해서 행동하라는 가르침(로마 14-15) . 물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씨름했던 사도 바오로의 고민의 흔적도 슬쩍 엿볼 수 있구요.

 

언제 썼나요?

 

아마도 바오로가 제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고린토에 체류하고 있었을 시절에 이 편지를 집필했으리라고 보아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다 전한 뒤(15,19), 때마침 예루살렘에 든 기근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서 모금한 것을 가지고(15,26)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고린토에서 석 달 간 체류하면서 썼을 것으로 보여요(사도 20,2-3). 바오로가 고린토에 체류한 시기를 언제로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대략 55-57년경에 썼다고 봐요.

 

왜 썼나요?

 

로마 교회는 사도 바오로가 직접 전도해서 세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판도 하에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복음을 선교해 나갔던 바오로가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를 염두에 두지 않을 리가 없었죠. 더군다나 이 편지를 집필할 즈음에는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면서 맞부닥치게 된 적대자들의 공격을 반박하고 자신의 사상을 옹호해야 할 필요성이 아주 고조되어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복음선교 여행을 떠나려 하였던 사도 바오로로서는, 앞으로 선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톡톡히 할 로마 교회에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을 거에요. 이런 까닭에 바오로는 각 선교지 교회가 당면한 문제점을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자 로마서를 쓰게 되었답니다.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 교회에 편지를 띄워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분명히 밝힙니다. 나는 내 신앙을 분명히 밝히는 편지를 누구에게 보내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복음은 누구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며(로마 1-4)

 

바오로는 자신이 누구에게 전도할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합니까?(1,14)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이 인성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자 신성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혀요. 그리고 자신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책무가 있는데, 이 복음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해요. 나아가 신앙인들은 유다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지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일깨워 줍니다. 사도 바오로가 보기에 우리의 믿음은 어떠할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로마 5-8)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해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8,26)

 

아담이 죄를 지어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받게 되었다고 선포해요. 따라서 이미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힌 신앙인들은 이제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해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주시는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니까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로마 9-11)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고는 어디에 달려 있나요?(9,16)

 

바오로는 동족인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지 않는다는 현실에 무척 가슴아파 해요. 하지만 하느님께 선택받고 안 받고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달려 있음은 분명해요. 따라서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듯이, 언젠가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느님께서 거두어 주시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아요.

 

새 사람이 되십시오(로마 12-16)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는 무엇입니까?(12,1)

 

신앙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며 서로 지체 구실을 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라고 당부해요. 그리고는 모든 권위는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므로 거역하지 말고 복종하라고 일러요.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생각해서 신중히 신앙생활하는 도량이 필요하다면서요. 끝으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면서, 주님 안에 한 형제인 모든 분들께 일일이 문안인사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문명인에게나 미개인에게나, 또 유식한 사람에게나 무식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복음을 전도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고린토전후서는 어떤 책인가요?

 

고린토서란 성서 이름은?

 

고린토서는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각 교회에서 생겨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고자 편지를 자주 띄웠지요. 그 중에서도 고린토서는 그리이스에 위치한 고린토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고자 띄운 편지입니다.

 

누가 썼나요?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썼어요. 오늘날 우리에게는 고린토 전서와 고린토 후서 두 통만 전해져 오지만,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최소한 4통이었다고 봅니다. 첫번째 편지는 분실되었고(1고린 5,9), 두번째 편지는 후대에까지 전해 내려와 고린토 전서가 되었고, 세번째 편지는 2고린 10-13장에 실려 있는 눈물 편지이고, 네번째 편지는 2고린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화해 편지라는 것이죠. 학자들 중에는 고린토 후서가 두 통이 아니라 여러 통의 편지를 한데 모아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답니다.

 

언제 썼나요?

 

고린토 교회는 사도 바오로가 2차 전도여행 때(50-52년경) 그리스에 세운 4개의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 칙령에 의해서 로마에서 쫓겨난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를 만나, 그 집에 머물면서 천막을 짜는 일을 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지요. 사도 바오로는 제3차 전도여행(53-58년경) 중에 에페소에서 27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고린토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고린토 교회로 띄운 편지가 고린토 전서죠. 따라서 대략 55년경에 고린토 전서가 쓰여졌을 거라고 봐요.

 

하지만 편지만 띄우는 것으로 고린토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을 염려한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를 방문합니다. 이때는 신도들 중의 일부가 이미 거짓 전도사들의 가르침에 넘어간 상태라, 사도 바오로에게 심하게 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2고린 2,5-11; 7,12). 이에 바오로는 속이 상한 채로 에페소에 돌아와 이른바 눈물편지로 알려진 2고린 10-13장을 디도 편에 띄웁니다. 그리고는 마케도니아로 가서 기다리다가 디도가 전해 주는 좋은 소식(2고린 2,5-13; 7,5-16)을 듣고는, 이른바 화해편지로 알려진 2고린 1-9장을 써서 보내요. 따라서 고린토 후서는 57년경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왜 썼나요?

 

고린토 교회에 생겨난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고자 했어요. 고린토 교회 신도들이 바오로파, 아폴로파, 게파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일러주어요. 또한 음행, 소송, 이혼과 독신,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 성령의 은사, 모금 등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조목조목 가르쳐 주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면서 신도들로부터 모진 대우를 받고 나서도 사랑의 편지를 띄웁니다.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하나요?

 

고린도 전서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1고린 1-4)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는 무엇입니까?(1,30)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신자들이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다고 칭찬하면서,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베드로파니 하면서 파당을 짓지 말고 단합하라고 촉구합니다. 이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강하므로,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라고 권유합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는 없다고 밝혀요. 그러니 부질없이 파당을 짓기보다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데 전력을 다하라고 당부해요.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1고린 5-6)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은 어디입니까?(6,19)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사실을 잘 명심해서, 사악과 음행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일러요. 아울러 교인이라고 하면서 음행이나 탐욕이나 약탈이나 우상숭배를 일삼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해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나 자기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무엇이든지 다 유익한 것은 아니죠. 더군다나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임을 잊지 말아야 하니까요.

 

사람마다 은총의 선물이 다르므로(1고린 7-14)

 

사람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8,1)

 

결혼은 죄가 아니니 서로 자유롭게 결혼해도 무방하지만, 결혼했거나 독신으로 살거나 간에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상태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상 앞에 놓였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예로 들어, 자신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해요. 이처럼 어떤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된다고 일러요. 주님의 성찬을 거행할 때에도 가난한 이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돼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니까요.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1고린 15-16)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맨처음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15,5)

 

사도 바오로는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믿음의 기초가 되는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 주어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것일 뿐이라면서요. 썩을 몸으로 묻힌 우리의 육신은 그 날에 눈깜빡할 사이에 불멸의 몸으로 변화될 거에요. 그러니 부활 신앙이 흔들리는 일 없이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고는 문안인사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사람을 향상시킨다고 말해요. 성서공부는 내게 지식을 늘려 줍니까 아니면 하느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만듭니까?

 

고린도 후서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2고린 1,1-6,10)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3,17)

 

먼저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환난을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면서, 고린토 교회를 방문했을 때 벌어졌던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해 화해하고자 하는 고린토 교회의 청원을 받아들여요. 아울러 자신에게 심하게 대했던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해 달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온 몸으로 겪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향해 눈을 돌리라고 권유해요.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도로서의 자기 심정을 솔직히 드러내면서요.

 

여러분이 뿌린 자선의 선물(2고린 6,11-9,15)

 

기부금은 어떤 마음으로 내야 합니까?(9,7)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 신도들에게 그들의 몸과 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되자고 권유해요. 바오로 자신은 그들을 전적으로 믿으며 크게 자랑한다면서요. 비록 자신이 디도 편으로 띄운 눈물 편지(2고린 10-13)가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해요. 더불어서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 활동에 기쁜 마음으로 적극 참여할 것을 당부해요. 그들이 낸 자선은 하느님께서 풍성한 열매로 되갚아 주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해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2고린 10,1-13,13)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위험을 겪었습니까?(11,23-28)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약하기 짝이 없고 말하는 것도 별것이 없다고 낮추어 말하지만, 사도로서 자신이 받은 권위는 모든 불순종을 처벌할 수 있다면서 서로 불미스러운 만남이 되지 않기를 고린토 교회 신도들에게 바래요. 고린토 교회 신도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이는 바로 자신이라면서, 자신이 했던 처신을 하나씩 들어 누가 참 사도이고 누가 거짓 사도인지를 분간하도록 촉구해요. 그동안 바오로는 사도로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 수많은 위험을 겪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다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몸을 가시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인격이 완성되기를 기원하며 살아왔다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온갖 아픔을 겪으면서도 신도들을 사랑으로 대하려고 애씁니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려 했을 때,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아픔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고린토전후서는 어떤 책인가요?

 

고린토서란 성서 이름은?

 

고린토서는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각 교회에서 생겨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고자 편지를 자주 띄웠지요. 그 중에서도 고린토서는 그리이스에 위치한 고린토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고자 띄운 편지입니다.

 

누가 썼나요?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썼어요. 오늘날 우리에게는 고린토 전서와 고린토 후서 두 통만 전해져 오지만,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최소한 4통이었다고 봅니다. 첫번째 편지는 분실되었고(1고린 5,9), 두번째 편지는 후대에까지 전해 내려와 고린토 전서가 되었고, 세번째 편지는 2고린 10-13장에 실려 있는 눈물 편지이고, 네번째 편지는 2고린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화해 편지라는 것이죠. 학자들 중에는 고린토 후서가 두 통이 아니라 여러 통의 편지를 한데 모아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답니다.

 

언제 썼나요?

 

고린토 교회는 사도 바오로가 2차 전도여행 때(50-52년경) 그리스에 세운 4개의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 칙령에 의해서 로마에서 쫓겨난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를 만나, 그 집에 머물면서 천막을 짜는 일을 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지요. 사도 바오로는 제3차 전도여행(53-58년경) 중에 에페소에서 27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고린토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고린토 교회로 띄운 편지가 고린토 전서죠. 따라서 대략 55년경에 고린토 전서가 쓰여졌을 거라고 봐요.

 

하지만 편지만 띄우는 것으로 고린토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을 염려한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를 방문합니다. 이때는 신도들 중의 일부가 이미 거짓 전도사들의 가르침에 넘어간 상태라, 사도 바오로에게 심하게 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2고린 2,5-11; 7,12). 이에 바오로는 속이 상한 채로 에페소에 돌아와 이른바 눈물편지로 알려진 2고린 10-13장을 디도 편에 띄웁니다. 그리고는 마케도니아로 가서 기다리다가 디도가 전해 주는 좋은 소식(2고린 2,5-13; 7,5-16)을 듣고는, 이른바 화해편지로 알려진 2고린 1-9장을 써서 보내요. 따라서 고린토 후서는 57년경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왜 썼나요?

 

고린토 교회에 생겨난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고자 했어요. 고린토 교회 신도들이 바오로파, 아폴로파, 게파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일러주어요. 또한 음행, 소송, 이혼과 독신,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 성령의 은사, 모금 등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조목조목 가르쳐 주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면서 신도들로부터 모진 대우를 받고 나서도 사랑의 편지를 띄웁니다.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하나요?

 

고린도 전서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1고린 1-4)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는 무엇입니까?(1,30)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신자들이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다고 칭찬하면서,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베드로파니 하면서 파당을 짓지 말고 단합하라고 촉구합니다. 이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강하므로,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라고 권유합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는 없다고 밝혀요. 그러니 부질없이 파당을 짓기보다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데 전력을 다하라고 당부해요.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1고린 5-6)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은 어디입니까?(6,19)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사실을 잘 명심해서, 사악과 음행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일러요. 아울러 교인이라고 하면서 음행이나 탐욕이나 약탈이나 우상숭배를 일삼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해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나 자기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무엇이든지 다 유익한 것은 아니죠. 더군다나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임을 잊지 말아야 하니까요.

 

사람마다 은총의 선물이 다르므로(1고린 7-14)

 

사람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8,1)

 

결혼은 죄가 아니니 서로 자유롭게 결혼해도 무방하지만, 결혼했거나 독신으로 살거나 간에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상태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상 앞에 놓였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예로 들어, 자신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해요. 이처럼 어떤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된다고 일러요. 주님의 성찬을 거행할 때에도 가난한 이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돼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니까요.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1고린 15-16)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맨처음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15,5)

 

사도 바오로는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믿음의 기초가 되는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 주어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것일 뿐이라면서요. 썩을 몸으로 묻힌 우리의 육신은 그 날에 눈깜빡할 사이에 불멸의 몸으로 변화될 거에요. 그러니 부활 신앙이 흔들리는 일 없이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고는 문안인사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사람을 향상시킨다고 말해요. 성서공부는 내게 지식을 늘려 줍니까 아니면 하느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만듭니까?

 

고린도 후서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2고린 1,1-6,10)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3,17)

 

먼저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환난을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면서, 고린토 교회를 방문했을 때 벌어졌던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해 화해하고자 하는 고린토 교회의 청원을 받아들여요. 아울러 자신에게 심하게 대했던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해 달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온 몸으로 겪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향해 눈을 돌리라고 권유해요.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도로서의 자기 심정을 솔직히 드러내면서요.

 

여러분이 뿌린 자선의 선물(2고린 6,11-9,15)

 

기부금은 어떤 마음으로 내야 합니까?(9,7)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 신도들에게 그들의 몸과 심령을 조금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지켜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되자고 권유해요. 바오로 자신은 그들을 전적으로 믿으며 크게 자랑한다면서요. 비록 자신이 디도 편으로 띄운 눈물 편지(2고린 10-13)가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해요. 더불어서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 활동에 기쁜 마음으로 적극 참여할 것을 당부해요. 그들이 낸 자선은 하느님께서 풍성한 열매로 되갚아 주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해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2고린 10,1-13,13)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위험을 겪었습니까?(11,23-28)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약하기 짝이 없고 말하는 것도 별것이 없다고 낮추어 말하지만, 사도로서 자신이 받은 권위는 모든 불순종을 처벌할 수 있다면서 서로 불미스러운 만남이 되지 않기를 고린토 교회 신도들에게 바래요. 고린토 교회 신도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이는 바로 자신이라면서, 자신이 했던 처신을 하나씩 들어 누가 참 사도이고 누가 거짓 사도인지를 분간하도록 촉구해요. 그동안 바오로는 사도로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 수많은 위험을 겪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다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몸을 가시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인격이 완성되기를 기원하며 살아왔다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온갖 아픔을 겪으면서도 신도들을 사랑으로 대하려고 애씁니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려 했을 때,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아픔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갈라디아서는 어떤 책인가요?

 

갈라디아서란 성서 이름은?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오로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각 교회에서 생겨난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고자 편지를 자주 띄웠지요. 그 중에서도 갈라디아서는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의 중부에 위치한 갈라디아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고자 띄운 편지입니다.

 

누가 썼나요?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썼어요. 바오로가 직접 쓴 편지로는 보통 데살로니카 전서, 고린토 전후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필립비서, 필레몬서 등 7통이 꼽혀요.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나 실라 등 협조자들과 함께 복음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선교지 교회에 편지를 띄우곤 했지만, 대부분의 편지 내용은 협조자들이 바오로가 하는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지요. 마지막 인사만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써보낸다고 밝히는 것을 보면요(갈라 6,11).

 

언제 썼나요?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오로가 2차 전도여행 때(50-52년경) 소아시아에 세운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바오로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북서쪽으로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터키 남부 지방을 다시 방문합니다. 그리고는 소아시아 중부에 있는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가던 중에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체류하게 됩니다. 이 때에 갈라디아 지방에 이방인 중심의 여러 교회를 설립하게 되지요(갈라 4,13-15). 참 신기하죠? 하느님께서는 병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요. 우리도 건강할 때만이 아니라 병들었을 때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거에요.

 

이어 사도 바오로는 제3차 전도여행(53-58년경) 중에 에페소에서 27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주의를 부르짖으면서 할례를 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설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갈라디아 교회로 편지를 띄우게 됩니다. 아마도 54년경에 쓰여졌을 거라고 봐요.

 

왜 썼나요?

 

바오로가 교회를 세운 이후에 들어온 전도자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만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할례받기를 요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문제에 대해 교회창립자로서 사목적으로 대처하고자 편지를 집필했어요. 그리스도인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역설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내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일깨우고자 해요. 할례를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므로, 공동체 안에서 할례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자들 때문에 갈등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당부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역설하면서, 율법에 얽매이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나는 무엇에 얽매여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갈라 1-6)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갈라 1,1-11)

 

사도 바오로는 누구로부터 사도직을 받았습니까?

 

(1,1)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받은 사도직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역설하면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갈라디아인들이 또 다른 복음을 따라간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요. 아울러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격한 어조로 이야기해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갈라 1,12-2,21)

 

사도 바오로에게 주어진 사도직은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까?(2,8)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유다교 신자였을 때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선포하는 사도로 거듭 난 것은 주님께서 다마스커스에서 자신을 뽑아 세웠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혀요. 또한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자신의 사도직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인정받았다고 덧붙여요. 그 때 교회의 중심 사도들이 자신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뿐이었다면서요.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갈라 3,1-4,31)

 

우리들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4,6)

 

이어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인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촉구해요. 또한 아브라함이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해요.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으므로,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해요.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갈라 5,1-6,18)

 

사도 바오로가 서로 남의 짐을 져줌으로써 이루라고 하는 법은 무엇입니까?(6,2)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의 몸이 되었으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촉구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하니까요. 그러니 할례 여부에 더 이상 좌우되지 말고 서로 남의 짐을 져주면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고 당부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합니까?

 

에페소서는 어떤 책인가요?

 

에페소는 어디인가요?

 

에페소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에페소는 서쪽으로 지중해와 접해 있는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항구도시죠. 때문에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를 끝으로 제2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올 때 들르기도 하고, 3차 전도여행 때에 27개월 동안 머물면서 본격적인 전교활동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 곳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팔아서 수입을 올리던 상인들로 말미암아 로마군 부대 감옥에 갇히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갈라디아서·고린토 전후서·필레몬서 등 선교지 교회 앞으로 편지를 왕성하게 써보내기도 하죠.

 

누가 썼나요?

 

에페소서 서두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로가 그리스도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에페소)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1,1)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서를 썼다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당시에는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빌어서 편지를 쓰는 차명서한(借名書翰)이 크게 유행했어요. 더군다나 에페소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권위가 막강했으므로, 이 권위를 빌어서 신생교회 신도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요.

 

실제로 편지 내용을 보면, 저자는 에페소인들을 잘 알지 못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제대로 깨우치고 있었다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인상을 주어요(1,15; 2,11; 3,2-6; 4,21). 또한 바오로가 잘 쓰지 않는 어휘만도 100여 개에 달하고, 다른 서신들에 의존해서 논지를 전개시키는 경우도 많아요. 이로 볼 때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썼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언제 썼나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달라요.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서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가 로마에 수감되어 있을 시절(62)에 에페소서를 썼다고 보아요. 반면에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서의 저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100년 전에는 에페소서가 집필되어 있었으리라고 봐요. 110년경에 순교한 이냐시오 주교가 에페소서를 이미 알고 인용했을 뿐 아니라, 62년경에 쓰였으리라고 추정되는 골로사이서의 내용이 에페소서에 많이 인용되어 있거든요. 아마도 70-95년경 사이에 에페소서가 집필되었을 거에요.

 

왜 썼나요?

 

사도 시대로부터 멀어지면서 생기를 잃어가는 당대 교회에 교회의 기원을 명확히 제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강조하고자 해요. 보편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이자 성령의 궁전이지만, 완전한 조직체가 아니라 성장해야 할 조직체임을 일깨우면서 언제나 사랑하며 살 것을 당부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감옥에 갇혀서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일에 온 관심을 쏟아요. 나는 어떤 일에 늘 관심을 쏟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사랑으로, 은총으로(에페 1,1-2,22)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일까요?(1,23)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에페소인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작정하셨고, 에페소인들도 구원을 가져다 주는 복음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밝혀요. 더불어 하느님께서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시어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되기를 청하면서,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시라고 선포해요.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았던 담을 헐어버리셨으므로, 그분을 모퉁이돌로 하여 서로를 연결하고 성장하다 보면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될 거라고 일러 주어요.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에페 3,1-21)

 

사도 바오로는 누구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까?(3,1)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모든 성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된 것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기 때문이라고 밝혀요. 이처럼 누구나 믿음을 가지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된다고 이야기해요.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에페 4,1-5,20)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무엇과 한 몸이 되어야 합니까?(4,15)

 

사도 바오로는 감옥에 갇힌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고 촉구해요.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고, 평화의 줄로 하나가 된 상태를 보존하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해요. 각자가 서로 다른 은총을 받았지만 여러 면에서 자라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아 사랑의 생활을 하다 보면, 빛의 세계에 속하게 되어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맺게 된다고 알려주어요.

 

주님의 정신으로(에페 5,21-6,24)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은 무엇일까요?(6,2)

 

사도 바오로는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 간에 형성된 관계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정립하라고 촉구해요.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고, 어버이들은 주님의 정신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종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당부해요.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게 살아가라고 열성껏 권유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모든 인간관계를 주님을 사이에 두고 맺으라고 당부합니다. 나는 사람을 새로 사귈 때 그 사람에게 어떤 지향을 품습니까?

 

필립비서는 어떤 책인가요?

 

필립비는 어디인가요?

 

필립비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필립비는 남쪽으로 지중해와 접해 있는 마케도니아(현재의 그리이스)의 항구도시죠. 사도 바오로는 소아시아 트로아스에서 신비로운 영상을 보고는 주님의 뜻이 유럽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데 있다는 확신 아래, 필립비에 처음으로 교회를 설립합니다(사도 16,6-10). 이후 필립비 교회는 마케도니아에서 복음선교 활동을 하는 사도 바오로를 물심 양면으로 후원해 주었지요(필립 4,10-14). 사도 바오로도 필립비 교회에서만큼은 거리낌없이 후원을 받았구요. 사도 바오로와 필립비 교회 신도들 간에 오가는 우애가 그만큼 컸던 거지요. 우리 교회도 이런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누가 썼나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로와 디모테오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필립비의 모든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그 보조자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필립 1,1)는 편지 서두에서 사도 바오로가 필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요. 그렇지만 사도 바오로의 친서인지 아니면 후대에 사도 바오로의 이름을 빌어 쓴 차명편지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로 이야기가 되어 왔어요. 대다수 학자들은 편지에 담긴 사상이나 언어로 보아, 사도 바오로가 직접 쓴 편지라고 봅니다. 사도 바오로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세운 교회에 띄운 편지라, 특히 애정이 넘쳐 흐른답니다.

 

언제 썼나요?

 

필립비서는 감옥에서 집필한 옥중서간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언제 수감되었는지를 알면, 편지의 집필연대도 자연 명확해진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제3차 전도 여행 시 27개월 간 머물렀던 에페소(사도 19,8-10), 팔레스티나의 가이사리아(사도 24,27), 로마(사도 28,16-31) 등 여러 지역에서 감옥살이를 했어요. 이들 감옥에 있을 때 필립비서를 쓴 것만은 분명한데, 어느 감옥인지가 확실치 않아 언제 쓰여졌다고 단정을 내릴 수 없는 실정이랍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학자들은 에페소에서 55/56년경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보는 추세에 있어요.

 

왜 썼나요?

 

사도 바오로는 마케도니아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부터 감옥에 갇혔을 때까지, 늘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필립비 신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이 편지를 썼어요. 복음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쉽지는 않지만, 그들 안에 계셔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겸손되게 살아갈 것을 당부해요.

 

<새김과 나눔>

 

필립비 교회 신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를 물심양면으로 끊임없이 돕습니다. 우리와 함께 생활하는 선교사들은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6)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부터(필립 1,1-11)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 교회 신도들을 위해서 무엇을 기원합니까?(1,9-10)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와 공동으로 필립비 신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며, 그들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간구하고 있다고 밝혀요.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협력한 그들의 노력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완성될 것이라면서,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를 기원해요. 바로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일 거에요.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필립 1,12-3,1)

 

사도 바오로와 같은 마음으로 필립비 교회 신도들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2,20)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갇힌 일로 말미암아 많은 교우들이 주님을 더욱 확고히 믿게 되었고, 조금도 두려움없이 용감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해요. 또한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늘 바라는 희망임을 밝히면서, 필립비 신도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듯이, 필립비 신도들도 언제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라고 말이죠.

 

우리는 하늘의 시민(필립 3,1-4,1)

 

사도 바오로가 무엇보다도 존귀하게 여기는 지식은 무엇입니까?(3,8))

 

사도 바오로는 영적으로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세속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밝혀요. 세속적인 면으로는 자신도 내세울 것이 많지만,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장해물로 여겼다면서요. 그리고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뿐이라고 단언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필립 4,2-23)

 

무엇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필립비 교회 신도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줍니까?(4,7)

 

사도 바오로는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보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이릅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평화가 지켜줄 것이라면서요. 그리고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데 끝까지 함께 해주었음에 감사드리며,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기를 간구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무엇보다도 존귀하게 여깁니다. 나는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골로사이서는 어떤 책인가요?

 

골로사이는 어디에 있나요?

 

골로사이서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골로사이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남부 내륙지방에 위치해 있어요. 사도 바오로가 직접 전도해서 세운 교회가 아니라(골로 2,1), 바오로의 동역자인 에바프라가 라오디게이아와 히에라폴리스 등지에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골로 1,7; 4,12-13). 이들 세 도시는 안타깝게도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기원후 60-61년에 일어난 심한 지진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죠.

 

누가 썼나요?

 

하느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오로와 우리 형제 디모테오가 골로사이에 있는 성도들, 곧 성실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교우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골로 1,1)는 편지 서두를 비롯하여, “나는 친필로 서명을 하며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골로 4,18)는 말문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필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요.

 

그렇지만 사도 바오로의 친서임이 분명히 확인된 편지들에 언급되지 않은 단어들이 87개나 나오는가 하면 문장 길이도 훨씬 길고, 신학적인 관점도 크게 차이나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사도 바오로의 친서들에서는 의화와 연결시키는 데 비해, 골로사이서에서는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동일시하고 있어요(골로 1,13-14; 2,13; 3,13). 전해 내려오던 종말적인 언어나 동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가 하면(골로 1,22; 3,4·6·24-25), 자신의 사도직을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골로 2,1-2)이 아주 독특해요. 이로 말미암아 많은 학자들은 누군가 사도 바오로의 권위를 빌어서 썼으리라고 봐요.

 

언제 썼나요?

 

골로사이서는 감옥에서 집필한 에페소서·필립비서·필레몬서와 함께 옥중서간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골로사이서를 직접 썼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바오로의 사상이 점차 진전되었다는 전제 아래 사도 바오로가 비교적 뒤에 집필했으리라고 봐요. 골로사이가 기원후 60-61년경에 멸망한 것을 감안할 때, 57-62년 사이에 쓰여졌을 거라고 봐요. 반면에 골로사이서가 사도 바오로의 친서가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은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이후(64년 또는 67) 90년 사이에 집필되었으리라고 봐요. 90년 무렵에 쓰여진 에페소서가 골로사이서와 유사한 부분이 많거든요.

 

왜 썼나요?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동역자인 에바프라가 세운 골로사이 교회 신도들에게, 신앙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그릇된 철학에 현혹되지 말기를 당부해요. 그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이미 전해 받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튼튼한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기를 당부하고자 해요.

 

<새김과 나눔>

 

골로사이 신도들은 헛된 철학의 속임수에 넘어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고 권유받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해 받은 복음의 희망을 뒤흔드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데살로니카 전후서는 어떤 책인가요?

 

데살로니카는 어디에 있나요?

 

데살로니카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데살로니카는 에게해 북서쪽 해변에 위치해 있는 도시에요. 기원전 316-315년경에 새로 도시를 건설하면서,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이며 필립의 딸이자 카산더의 아내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어요.

 

누가 썼나요?

 

데살로니카 전서와 후서는 모두 사도 바오로와 실바노와 디모테오가 공동으로 편지를 띄웠다는 기록을 편지 첫머리(1데살 1,1; 2데살 1,1)에 명확히 밝히고 있어요. 그렇지만 두 편지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문체와 종말에 대한 생각이 달라요. 학자들 중에는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카 교회의 상황이 그만큼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사도 바오로가 두 편지를 모두 썼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데살로니카 전서는 사도 바오로의 친서이지만, 데살로니카 후서는 사도 바오로의 제자가 후대에 썼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언제 썼나요?

 

데살로니카 전·후서 모두 사도 바오로가 썼다면, 2차 전도여행(50-52년경) 중에 고린토에 머무를 때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전서의 집필연대는 50-51년경, 후서의 집필연대는 52년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데살로니카 후서를 후대에 사도 바오로의 제자가 썼다면 약 1세기 말경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어찌 되었든 간에 데살로니카 전서는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먼저 작성되었던 것이 분명한 만큼, 교회 안에서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지요. 교회 신도들에게 올곧은 신앙을 심어주려고 애썼던 사도 바오로의 애정과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거든요.

 

왜 썼나요?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에 교회를 세우고 추방당한(사도 16,11-40) 뒤 데살로니카로 가서 복음을 선포했지만, 유다인들의 방해로 또 쫓겨나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이런 사건을 연달아 겪으면서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신도들이 환난 중에 흔들리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디모테오를 보냅니다(1데살 2,3,1-5). 이어 디모테오로부터 데살로니카 신도들이 굳건히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종말을 넘어선 희망과 믿음을 가질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데살로니카 전서를 띄워요.

 

데살로니카 후서가 1세기경에 쓰여졌다면,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는 분위기가 팽배해짐으로 말미암아 아무 일도 안하면서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작성되었을 거에요. 주님의 재림 전에는 배교하는 사태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는 그 날이 오기까지는 현세의 생활에 열심히 일하며 충실하게 살 것을 당부하고자 해요.

 

<새김과 나눔>

 

데살로니카 신도들은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 시대에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주장하는 이들로 말미암아 어떤 일들이 벌어지나요?

 

 

데살로니카 전후서는 어떤 책인가요?

 

데살로니카는 어디에 있나요?

 

데살로니카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데살로니카는 에게해 북서쪽 해변에 위치해 있는 도시에요. 기원전 316-315년경에 새로 도시를 건설하면서,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이며 필립의 딸이자 카산더의 아내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어요.

 

누가 썼나요?

 

데살로니카 전서와 후서는 모두 사도 바오로와 실바노와 디모테오가 공동으로 편지를 띄웠다는 기록을 편지 첫머리(1데살 1,1; 2데살 1,1)에 명확히 밝히고 있어요. 그렇지만 두 편지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문체와 종말에 대한 생각이 달라요. 학자들 중에는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카 교회의 상황이 그만큼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사도 바오로가 두 편지를 모두 썼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데살로니카 전서는 사도 바오로의 친서이지만, 데살로니카 후서는 사도 바오로의 제자가 후대에 썼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언제 썼나요?

 

데살로니카 전·후서 모두 사도 바오로가 썼다면, 2차 전도여행(50-52년경) 중에 고린토에 머무를 때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전서의 집필연대는 50-51년경, 후서의 집필연대는 52년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데살로니카 후서를 후대에 사도 바오로의 제자가 썼다면 약 1세기 말경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어찌 되었든 간에 데살로니카 전서는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먼저 작성되었던 것이 분명한 만큼, 교회 안에서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지요. 교회 신도들에게 올곧은 신앙을 심어주려고 애썼던 사도 바오로의 애정과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거든요.

 

왜 썼나요?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에 교회를 세우고 추방당한(사도 16,11-40) 뒤 데살로니카로 가서 복음을 선포했지만, 유다인들의 방해로 또 쫓겨나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이런 사건을 연달아 겪으면서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신도들이 환난 중에 흔들리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디모테오를 보냅니다(1데살 2,3,1-5). 이어 디모테오로부터 데살로니카 신도들이 굳건히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종말을 넘어선 희망과 믿음을 가질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데살로니카 전서를 띄워요.

 

데살로니카 후서가 1세기경에 쓰여졌다면,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는 분위기가 팽배해짐으로 말미암아 아무 일도 안하면서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작성되었을 거에요. 주님의 재림 전에는 배교하는 사태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는 그 날이 오기까지는 현세의 생활에 열심히 일하며 충실하게 살 것을 당부하고자 해요.

 

<새김과 나눔>

 

데살로니카 신도들은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 시대에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주장하는 이들로 말미암아 어떤 일들이 벌어지나요?

 

디모테오 전후서는 어떤 책인가요?

 

디모테오 전후서란 이름은?

 

디모테오 전후서는 신약성서에서 열다섯번째와 열여섯번째로 나오는 편지로 데살로니카 후서 다음에 위치합니다. 필립비서, 에페소서 등이 각각 필립비 교회와 에페소 교회의 불특정 다수의 신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면, 디모테오 전후서는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였던 디모테오라는 한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죠. 개인에게 보낸 편지라 해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회람 낭독되다가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므로 훗날 서간성서에 한데 묶이게 되었답니다.

 

누가 썼나요?

 

디모테오 전서와 후서는 모두 사도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띄웠다는 기록을 첫머리(1디모 1,1; 2디모 1,1)에 명확히 밝히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들 편지에 쓰여진 문체가 바오로 친서와 현저하게 다른 것을 보면, 사도 바오로가 직접 쓰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여요. 학자들 중에는 바오로 주변에 있는 인물이 썼거나 바오로의 권위를 빌어 50-60년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썼으리라고 보는 이들도 있어요. 다른 학자들은 후대에 바오로를 추종하는 어떤 사람이 썼을 것으로 보아요.

 

언제 쓰여졌나요?

 

디모테오 전후서에 실린 교회 제도가 초대교회와 다른 것으로 보아, 사도 바오로가 죽은 후 한 세대 이상이 지난 다음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아요. 이냐시오가 117년경에 보낸 편지에는 감독과 장로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디모테오 전후서에서는 혼용되고 있거든요. 학자들에 따라서 집필연대를 신앙인들의 2세대(70-100)로 보기도 하고, 3세대(100-130)로 잡기도 해요. 디도서보다는 조금 늦게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요.

 

왜 썼나요?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은 사도 시대나 교회 시대나 늘 한결같음을 일깨우고자 해요.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과거 및 구약성서, 유다인들의 윤리 및 가정규례, 바오로의 사도직과 가르침, 헬레니즘과 로마 문화와도 연계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어요.

 

1세기 말 아시아 교회 전역에는 율법교사로 자처하면서도(1디모 1,7) 꾸민 이야기와 족보에 정신이 팔려(1디모 1,4) 결혼을 금하고 음식을 절제하며(1디모 4,3)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2디모 2,18) 이들이 여기저기서 늘어났어요. 디모테오 전후서는 이처럼 다른 이들의 신앙까지도 뒤흔들어 놓는 교회의 암적인 존재들과 맞서, 사도 바오로가 전해 준 그리스도교 사상만이 참된 삶의 길임을,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그리스 - 로마 철학의 문체와 어휘, 논증방식을 사용해서 일깨우고자 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가 선교지 교회 신도들과 주고 받은 일상적인 편지는 거룩한 성서로까지 인정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띄우는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한 주간 되십시오.

 

 

디도서는 어떤 책인가요?

 

디도는 누구인가요?

 

디도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도 바오로를 도와 복음선교에 협력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동반자로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에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할례 요청을 집요하게 받지만, 사도 바오로가 이 요청을 막아주죠(갈라 2,1-10). 고린토 교회 신도들이 바오로의 가르침을 배격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바오로보다 앞서 고린토를 방문하여(2고린 2,13) 자세한 사정을 사도 바오로에게 보고하는 역할(2고린 7,13-14)도 맡아 했답니다. 그렇지만 디도서에 나오는 디도의 모습은 사도 바오로의 유능한 심복이라기보다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바오로의 가르침을 받아야 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이 둘이 동일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어요.

 

누가 썼나요?

 

디도서 첫머리에 나 바울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디도 1,1)로 되어 있어, 초대교회로부터 오랫동안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썼으리라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바오로의 다른 편지들에 비해 신학적 용어나 어휘 등이 많이 다른 것으로 보아, 바오로를 따르는 후대의 사람이 썼을 것으로 보아요.

 

언제 쓰여졌나요?

 

디도서는 디모테오 전후서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 실린 교회 제도가 초대교회와 다른 것으로 보아, 사도 바오로가 죽은 후 한 세대 이상이 지난 다음에 생겨났을 거에요. 디모테오 전후서는 디도서보다는 교회의 직제에 대해서 보다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디도서가 사목서간 중에서는 가장 먼저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요. 이냐시오가 117년경에 보낸 편지에는 감독과 장로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디도서에는 혼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100년경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왜 썼나요?

 

그리스도교가 퍼져 나가던 1세기 말엽은 개척교회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어요. 교회를 조직하는 일에서부터 교회 구성원을 격려하고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전수하며, 이단자를 배척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사목자들이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죠. 이에 신설된 교회를 맡아 사목하는 이들이 이러한 갖가지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일러주고자 해요.

 

어떤 내용이 실려 있나요?(디도 1,1-3,15)

 

바오로는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사도로 임명되었습니까?(디도 1,1)

 

디도서는 3장밖에 안되어요. 그 안에서 사목자로서 디도가 그레데섬에서 해야 할 일들을 상세히 일러주고 있지요. 흠잡힐 데 없는 사람을 원로로 임명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진실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을 감독자로 임명할 것을 당부합니다. 누구를 헐뜯거나 싸움질을 하지 말고 온순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도록 신자들을 가르칠 것을 촉구하고 있어요.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남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사람이 되라고 권유합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채워준 은인들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필레몬서는 어떤 책인가?

 

필레몬서란 이름은?

 

필레몬서는 신약성서에서 열여덟번째에 나오는 편지로 디도서 다음에 위치합니다. 13개의 바오로 서간 중 마지막 편지인 셈이지요. 이 편지는 우리 동료 필레몬과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 여러분과 우리 자매 압피아와 우리 전우 아르킵보”(1,2) 앞으로 띄운 편지라, 맨처음 거론된 필레몬의 이름을 따서 편지 이름으로 붙인 것이죠. 필레몬서는 에페소서·필립비서·골로사이서와 함께 4수인서간(囚人書簡)’에 속해요.

 

누가 썼나요?

 

사도 바오로가 직접 썼어요. 골로사이서에도 오네시모와 아르킵보가 언급되는 등(골로 4,9. 17) 유사한 점이 많아 바오로 친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편지에 쓰인 언어나 문체, 논증구조 등으로 볼 때 많은 학자들은 바오로가 직접 썼으리라고 봐요. 오리게네스는 필레몬서를 바오로의 친서로 인정하여 최초로 자신의 작품에 인용하였답니다.

 

언제 쓰여졌나요?

 

사도 바오로가 어디에서 감옥살이를 했는지에 따라서 집필 추정 시기가 달라져요. 사도 바오로는 가이사리아, 로마, 에페소 등지에서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에페소 감옥에서 쓰여졌다면 58년경일 테고, 그외 감옥이라면 이보다 5년쯤 뒤로 추정되어요.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노예 오네시모가 골로사이 교회에서 도망쳐 숨어 지내기 좋은 항구도시 에페소에 머물다가 사도 바오로를 만났을 것으로 보아요.

 

왜 썼나요?

 

감옥에서 만난 노예 오네시모가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이자 자유인으로 거듭 날 수 있도록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촉구하고자 집필되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노예도 자유인도 한 몸인 셉이죠.

 

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교우로서(필레 1,1-25)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갇혀 있는 자신의 현실을 알리며, 기도할 때마다 필레몬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고 밝혀요. 가장 어려운 현실에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을 잊기 쉬운데,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라기 보다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도의 모습이 참 놀랍기만 합니다. 상대방이 주 예수를 굳건히 믿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베푼 사랑을 기억하면서 떠올려 주는 모습도 대단합니다. 이처럼 신앙인들은 언제나 상대방의 단점을 기억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장점을 떠올리면서 더욱 밝게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부추기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겠어요?

 

바로 이런 따뜻한 마음에서 사도 바오로는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주님 안의 한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지요. 그가 필레몬에게 끼친 빚과 손해는 사도 자신이 직접 다 갚겠다고 이야기하면서요. 이런 식으로 우리 주변에 어떤 이유로든 깨어진 관계, 불편한 관계를 서로 이어주고 부드럽게 만드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대랍니다.

 

<새김과 나눔>

 

사도 바오로는 상대방의 장점을 기억하면서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히브리서는 어떤 책인가요?

 

히브리서란 이름은?

 

히브리서는 서간집에 들어있지만, 서간이라기보다는 설교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서간은 보통 누가 누구에게 이 편지를 띄운다는 인삿말,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개진하는 본문, 그리고 축복과 안부인사를 동반한 맺음말로 구성되는데, 히브리서는 끝맺는 부분에서만 서간 형식을 띠고 있을 뿐이에요. 따라서 서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통적으로 바오로 서간으로 분류되어 왔고,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히브리인들이 다시 유다교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생각에서 히브리서란 이름이 붙게 되었어요.

 

누가 썼나요?

 

다른 바오로 서간과는 달리 누가 썼다는 말이 첫머리에 나와 있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저자로 거론되어 왔지요. 바오로가 썼다고 보기에는 문체도 다르고, 신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방식도 크게 차이가 났거든요. 바오로와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르나바, 고린토에서 천막일을 하며 바오로를 도운 브리스킬라, 바오로의 동역자인 에바프라와 실라 등의 인물들이 저자라고 제안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어느 경우에도 확증이 없어요. 오리게네스의 말대로 히브리서를 누가 썼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겠지요.

 

언제 쓰여졌나요?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95-96년경에 쓰여진 클레멘스 1서에 히브리서의 내용이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95년경에는 쓰여졌을 거에요. 또한 구원의 말씀이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은 이들을 거쳐 전달되었다는 내용(2,3)으로 보아, 60년 이전에 집필되지는 않았을 거에요. 따라서 60-95년의 어느 시기에 집필되었다고 추정되어요. 12,1 이하에 언급된 시련이 도미티아누스 황제(81-90) 때 일어난 그리스도인 대박해를 가리킨다고 보아서, 80-90년경에 쓰여졌다고 주장되기도 해요.

 

왜 썼나요?

 

12,1 이하에 언급된 시련이 도미티아누스 황제(81-90) 때 일어난 그리스도인 대박해를 가리킨다고 보면, 박해로 불안해 하며 배교의 위기를 겪는 이들의 믿음을 북돋워 주기 위해 쓰여졌어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연륜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 모임에 자주 빠지고 선행과 봉사생활에서 멀어지는 등 나태한 신앙행태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주고 있어요.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 귀를 기울여 순종하도록 촉구하면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해 드러난 구원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세우신 새로운 약속을 일깨워요. 그럼으로써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신앙을 간직한 채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 나가도록 이끌고 있답니다.

 

<새김과 나눔>

 

히브리서 저자는 초보적인 믿음에 머물지 말고 더욱 성숙해 지라고 권유합니다. 내 신앙은 어느 면에서 더 성숙해져야 할까요?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히브 1,1-13,25)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히브 1,1-2,18)

 

예수께서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2,18)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을 하시다가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음을 먼저 선포해요. 그러니 그분에 관해 들은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더욱 더 굳게 간직하라고 당부해요.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고, 예수는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셨으므로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도와주실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주님께 하나씩 말씀드리면서 헤쳐나가면 든든할 거에요.

 

신앙의 대사제이신 예수(히브 3,1-5,10)

 

신앙인들이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지켜 나가면 그리스도와 함께 무엇이 될 수 있습니까?(3,14)

 

성도들은 하느님의 집안 사람들이므로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며 처음의 확신을 잃지 않도록 당부해요. 그렇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주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이 사그라들곤 하지요. 그 열정을 꾸준히 지켜나가려면 살아 있고 힘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열려 있어야 해요. 우리가 매주 사막의 성서공부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메마르고 기쁨이 없어진다 싶을 때에는 더 이상 늦기 전에 성서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어나가는 습관을 들여보세요. 주님께서 바로 곁에 살아 계심을 생생하게 느끼실 거에요.

 

그리스도는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히브 5,11-10,39)

 

계약의 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9,4)

 

성숙한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실생활에서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해요. 가정이나 직장, 사회에서 성서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다 보면, 주님께서 모든 이를 용서해 주는 대사제라는 이야기도 훨씬 생생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지 않겠나 싶어요. 성서를 공부하는 작은 모임을 결성해서 이 체험을 다른 이와 함께 나누면 더욱더 좋겠지요.

 

믿음으로(히브 11,1-13,25)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는 누구입니까?(12,2)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준다고 이야기해요.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의 신앙상의 위인들도 믿음으로 하느님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가 있었던 것을 보면, 오늘 우리 신앙인도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길에 충실할 수 있을 거에요.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살 수 있다면 말이죠.

 

<새김과 나눔>

 

맨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와 비교해서, 지금 나의 신앙생활에서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야고보서는 어떤 책인가요?

 

야고보서란 이름은?

 

야고보서는 공동(catholic)서간에 속하는 첫번째 편지입니다. 13개의 바오로 서간은 모두 이 편지를 받는 개인이나 교회 앞으로 편지를 띄우지만, 공동서간은 이 편지를 받는 지역이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 편지를 띄우는지만 첫머리에 밝혀져 있지요.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를 드립니다”(야고 1,1)는 내용에 따라 야고보서란 현재의 책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어요.

 

누가 썼나요?

 

야고보서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한 최초의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이 서간의 저자를 단순히 야고보또는 사도 야고보라고 밝히고 있어요. 유세비우스는 이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사도 15,13; 21,18)주님의 형제”(갈라 1,19)로 여겼지요.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야고 1,1)이라고 야고보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며,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야고 1,25)을 지키라는 권유가 유다교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야고보(사도 15,13-21; 21,18-24)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죠. 나아가 사도 15장에 나오는 야고보의 설교와 문체가 서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팔레스티나의 기후현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가을비와 봄비”(야고 5,7)라는 언급도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아요. 서간에 쓰인 그리스어 문체가 갈릴래아 농부 출신치고는 너무 유창할 뿐 아니라, 주님의 형제로 오래도록 생활해 온 것에 비해서는 예수 자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율법의 효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서 믿음과 행동을 다루고 있음이 의아하다는 점을 들어, 익명의 저자가 야고보의 이름을 빌어 집필했을 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어요.

 

언제 쓰여졌나요?

 

야고보서의 집필연대는 저자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크게 달라져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썼다면 야고보가 순교하기 전에는 집필되었을 거에요. 야고보는 페스도와 알비누스가 유다 총독으로 이취임하던 62년 또는 베스파시안 황제가 팔레스티나를 점령해 들어오던 67년에 숨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요. 반면에 야고보서가 차명서한이라면,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왜 썼나요?

 

교회는 지역상으로도 도시와 농촌에 걸쳐 있고, 직업상으로도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그 안에 모여들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생김새나 차림새를 보고 박대하거나, 선행은 뒷전에 밀쳐놓은 채 믿음만이 최고라는 환상을 갖기 쉽지요. 이에 야고보는 진정 하느님의 자녀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야 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일러주고자 이 서간을 집필했어요.

 

<새김과 나눔>

 

야고보는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나는 내 주변의 신앙인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참 신앙인임을 느꼈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야고 1,1-27)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과 같습니까?(1,23)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인내력을 한껏 발휘하면 완전하고도 원만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권유하면서,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느님께 채워주시기를 청하라고 당부해요. 이처럼 살아가면서 부족한 면을 느낄 때마다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주님께서 채워주시기를 청한다면 조금더 맑고 밝게 생활하실 수 있을 거에요.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야고 2,1-26)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2,5)

 

옷이 날개라는 우리 나라 속담이 있지요. 조금 화려하게 입으면 돋보이고, 누추한 옷을 입으면 초라해 보이게 마련인데요. 그리스도인은 그런 가치기준으로 사람들을 차별대우해서는 안돼요. 입으로만 선행을 말할 뿐 실제 행동으로는 반영되지 않는 믿음도 곤란하겠지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야고 3,1-18)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3,2)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을 함부로 해서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실수를 곧잘 범하지요. 말의 홍수라 하는 이 시대에도 침묵의 가치를 깨닫고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소리를 헤아려 듣는 지혜가 필요하답니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십시오(야고 4,1-17)

 

사람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착한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4,17)

 

분쟁과 갈등은 욕심에서 비롯된다면서,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도록 촉구해요. 만일 욕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주님께서 허락하실 리 없고, 이웃들과도 불필요한 다툼을 하게 될 뿐이에요. 그러니 이웃을 심판하거나 헛된 장담을 하지 않으면서 주님 안에서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야겠지요.

 

믿고 구하는 기도는(야고 5,1-20)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어떻게 해야 합니까?(5,9)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까지 끈기있게 비를 기다립니다. 이처럼 신앙인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쓸데없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당부해요. 상대방을 내 구원의 동반자로 삼아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면 모두 온전해질 것이라고 일러주어요.

 

<새김과 나눔>

 

야고보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병을 낫게 해준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어느 때 내 기도가 응답되는 체험을 했습니까?

 

베드로 전후서는 어떤 책인가요?

 

베드로 전후서란 이름은?

 

베드로 전후서는 야고보서, 요한 1·2·3, 유다서와 함께 공동(catholic)서간, 또는 가톨릭 서간으로 불리웁니다. 바오로 서간과는 달리 수신인이 한정되어 있지 않아서, 여러 교회에서 공동으로 읽어볼 수 있기 때문이죠. 서간 머리말에 베드로가 편지를 띄웠다고 언급되어 있어서 베드로 전후서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돌입니다

 

(1베드 2,4)

 

여러분은 새로 난 사람들입니다(1베드 1,1-2,10)

 

지금 겪는 시련은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1,6)

 

시련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쁨과 희망에 찬 삶으로 이끌고 있어요.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듯이, 우리들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야만 순수해져요. 그러니 어느 상황에서든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되겠죠.

 

자유인답게 사십시오(1베드 2,11-3,12)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을 지닌 아내는 어떤 방법으로 신앙을 증거하라고 권유받나요?(3,1-2)

 

낯선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육체적인 욕정을 멀리 하고, 억울하게 받는 고통도 감내하라고 권유해요. 믿지 않는 남편을 말로 설득하기보다는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로써 신앙을 증거하라고 일러요.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1베드 3,13-5,14)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요?(4,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셨듯이, 그분을 믿는 이들도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라고 당부해요.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은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할 때에만 진가를 발휘하거든요. 이렇듯 겸손의 옷을 입고 이웃을 섬길 때에 우리 사회가 좀더 명랑하고 밝아지지 않겠나 싶네요.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2베드 1,1-21)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1,17-19)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어요. 그러니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사랑을 더해야 돼요.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요? 신앙은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끊임없이 완덕을 추구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2베드 2,1-3,18)

 

주님께서 진노하시지 않고 오래 참으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3,9·15)

 

거짓교사들을 주의하라고 촉구해요.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며, 대낮에 흥청거리며 노는 것을 낙으로 삼고, 욕심을 채우는 데만 잘 훈련이 된 자들이니 하느님의 저주를 받을 거라고 경고해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재림의 날이 늦어지는 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도록 모두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라고 밝혀요. 그러니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고 권유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새김과 나눔>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은총의 선물을 받았습니까? 또 그 은총을 이웃을 섬기는 데 쓰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누가 썼나요?

 

베드로 전서와 후서 첫머리에는 각각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집필했다고 나와 있어요(1베드 1,1; 2베드 1,1). 그래서 사도 베드로를 이 두 편지의 저자로 생각하기 쉽지만, 당대에는 이름있는 사람을 저자로 내세워 집필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초대교회에서도 이 두 편지의 저자가 누군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어요. 먼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파피아스가 베드로 전서를 인용했었다고 밝히면서, 베드로 후서에 대해서는 논란은 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오리게네스는 베드로가 남긴 편지 한 통은 공인되었지만, 두번째 편지는 의심스럽다고 밝히고 있어요. 예로니모 또한 베드로가 공동서간이라고 불리우는 편지 두 통을 썼다고 언급하고 있어요. 대체로 베드로 전서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베드로 후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에요.

 

오늘날 학자들은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어 문장도 세련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베드로 전서를 베드로의 친서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많아요. 베드로 후서 또한 사도 시대 이후에 쓰여진 유다서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 친서가 아니라고 봐요.

 

언제 쓰여졌나요?

 

각 서간이 담고 있는 상황과 사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집필연대가 달라져요. 베드로 전서는 5,13바빌론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로마 당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70년 이후에 집필되었어요.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로마는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빌론과 동일시되었거든요. 그리고 125년경에 파피아스가 이 서간을 인용했던 것으로 보아 90년대 초를 넘지 않았을 거에요. 대략 70-92년경에 쓰여졌다고 보아요.

 

반면에 베드로 후서는 바오로 서간들이 널리 알려져 권위있게 받아들여지고 또 사도성의 기준이 드러나기 시작한 2세기 초쯤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늦게 쓰여진 성서에요. 그런 만큼 초대교회에서 2세기의 교회로 전환되는 시대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어요.

 

왜 썼나요?

 

베드로 전서는 전 교회가 겪는 고난과 박해의 상황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불러 일으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용기있게 생활해 나갈 수 있도록 촉구하기 위해 쓰여졌어요. 상대적으로 후대에 쓰여진 베드로 후서는 주님의 내림을 비웃는 이단자들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내림에 대한 희망과 주님의 계명을 다시 기억할 것을 일깨우고자 쓰여졌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돌입니다

 

(1베드 2,4)

 

여러분은 새로 난 사람들입니다(1베드 1,1-2,10)

 

지금 겪는 시련은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1,6)

 

시련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쁨과 희망에 찬 삶으로 이끌고 있어요.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듯이, 우리들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야만 순수해져요. 그러니 어느 상황에서든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되겠죠.

 

자유인답게 사십시오(1베드 2,11-3,12)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을 지닌 아내는 어떤 방법으로 신앙을 증거하라고 권유받나요?(3,1-2)

 

낯선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육체적인 욕정을 멀리 하고, 억울하게 받는 고통도 감내하라고 권유해요. 믿지 않는 남편을 말로 설득하기보다는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로써 신앙을 증거하라고 일러요.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1베드 3,13-5,14)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요?(4,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셨듯이, 그분을 믿는 이들도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라고 당부해요.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은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할 때에만 진가를 발휘하거든요. 이렇듯 겸손의 옷을 입고 이웃을 섬길 때에 우리 사회가 좀더 명랑하고 밝아지지 않겠나 싶네요.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2베드 1,1-21)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1,17-19)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어요. 그러니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사랑을 더해야 돼요.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요? 신앙은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끊임없이 완덕을 추구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2베드 2,1-3,18)

 

주님께서 진노하시지 않고 오래 참으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3,9·15)

 

거짓교사들을 주의하라고 촉구해요.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며, 대낮에 흥청거리며 노는 것을 낙으로 삼고, 욕심을 채우는 데만 잘 훈련이 된 자들이니 하느님의 저주를 받을 거라고 경고해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재림의 날이 늦어지는 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도록 모두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라고 밝혀요. 그러니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고 권유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새김과 나눔>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은총의 선물을 받았습니까? 또 그 은총을 이웃을 섬기는 데 쓰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야고보서는 어떤 책인가요?

 

야고보서란 이름은?

 

야고보서는 공동(catholic)서간에 속하는 첫번째 편지입니다. 13개의 바오로 서간은 모두 이 편지를 받는 개인이나 교회 앞으로 편지를 띄우지만, 공동서간은 이 편지를 받는 지역이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 편지를 띄우는지만 첫머리에 밝혀져 있지요.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를 드립니다”(야고 1,1)는 내용에 따라 야고보서란 현재의 책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어요.

 

누가 썼나요?

 

야고보서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한 최초의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이 서간의 저자를 단순히 야고보또는 사도 야고보라고 밝히고 있어요. 유세비우스는 이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사도 15,13; 21,18)주님의 형제”(갈라 1,19)로 여겼지요.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야고 1,1)이라고 야고보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며,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야고 1,25)을 지키라는 권유가 유다교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야고보(사도 15,13-21; 21,18-24)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죠. 나아가 사도 15장에 나오는 야고보의 설교와 문체가 서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팔레스티나의 기후현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가을비와 봄비”(야고 5,7)라는 언급도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아요. 서간에 쓰인 그리스어 문체가 갈릴래아 농부 출신치고는 너무 유창할 뿐 아니라, 주님의 형제로 오래도록 생활해 온 것에 비해서는 예수 자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율법의 효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서 믿음과 행동을 다루고 있음이 의아하다는 점을 들어, 익명의 저자가 야고보의 이름을 빌어 집필했을 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어요.

 

언제 쓰여졌나요?

 

야고보서의 집필연대는 저자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크게 달라져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썼다면 야고보가 순교하기 전에는 집필되었을 거에요. 야고보는 페스도와 알비누스가 유다 총독으로 이취임하던 62년 또는 베스파시안 황제가 팔레스티나를 점령해 들어오던 67년에 숨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요. 반면에 야고보서가 차명서한이라면,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집필되었을 거에요.

 

왜 썼나요?

 

교회는 지역상으로도 도시와 농촌에 걸쳐 있고, 직업상으로도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그 안에 모여들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생김새나 차림새를 보고 박대하거나, 선행은 뒷전에 밀쳐놓은 채 믿음만이 최고라는 환상을 갖기 쉽지요. 이에 야고보는 진정 하느님의 자녀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야 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일러주고자 이 서간을 집필했어요.

 

<새김과 나눔>

 

야고보는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나는 내 주변의 신앙인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참 신앙인임을 느꼈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야고 1,1-27)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과 같습니까?(1,23)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인내력을 한껏 발휘하면 완전하고도 원만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권유하면서,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느님께 채워주시기를 청하라고 당부해요. 이처럼 살아가면서 부족한 면을 느낄 때마다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주님께서 채워주시기를 청한다면 조금더 맑고 밝게 생활하실 수 있을 거에요.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야고 2,1-26)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2,5)

 

옷이 날개라는 우리 나라 속담이 있지요. 조금 화려하게 입으면 돋보이고, 누추한 옷을 입으면 초라해 보이게 마련인데요. 그리스도인은 그런 가치기준으로 사람들을 차별대우해서는 안돼요. 입으로만 선행을 말할 뿐 실제 행동으로는 반영되지 않는 믿음도 곤란하겠지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야고 3,1-18)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3,2)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을 함부로 해서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실수를 곧잘 범하지요. 말의 홍수라 하는 이 시대에도 침묵의 가치를 깨닫고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소리를 헤아려 듣는 지혜가 필요하답니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십시오(야고 4,1-17)

 

사람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착한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4,17)

 

분쟁과 갈등은 욕심에서 비롯된다면서,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도록 촉구해요. 만일 욕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주님께서 허락하실 리 없고, 이웃들과도 불필요한 다툼을 하게 될 뿐이에요. 그러니 이웃을 심판하거나 헛된 장담을 하지 않으면서 주님 안에서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야겠지요.

 

믿고 구하는 기도는(야고 5,1-20)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어떻게 해야 합니까?(5,9)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까지 끈기있게 비를 기다립니다. 이처럼 신앙인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쓸데없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당부해요. 상대방을 내 구원의 동반자로 삼아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면 모두 온전해질 것이라고 일러주어요.

 

<새김과 나눔>

 

야고보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병을 낫게 해준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어느 때 내 기도가 응답되는 체험을 했습니까?

 

베드로 전후서는 어떤 책인가요?

 

베드로 전후서란 이름은?

 

베드로 전후서는 야고보서, 요한 1·2·3, 유다서와 함께 공동(catholic)서간, 또는 가톨릭 서간으로 불리웁니다. 바오로 서간과는 달리 수신인이 한정되어 있지 않아서, 여러 교회에서 공동으로 읽어볼 수 있기 때문이죠. 서간 머리말에 베드로가 편지를 띄웠다고 언급되어 있어서 베드로 전후서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돌입니다

 

(1베드 2,4)

 

여러분은 새로 난 사람들입니다(1베드 1,1-2,10)

 

지금 겪는 시련은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1,6)

 

시련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쁨과 희망에 찬 삶으로 이끌고 있어요.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듯이, 우리들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야만 순수해져요. 그러니 어느 상황에서든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되겠죠.

 

자유인답게 사십시오(1베드 2,11-3,12)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을 지닌 아내는 어떤 방법으로 신앙을 증거하라고 권유받나요?(3,1-2)

 

낯선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육체적인 욕정을 멀리 하고, 억울하게 받는 고통도 감내하라고 권유해요. 믿지 않는 남편을 말로 설득하기보다는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로써 신앙을 증거하라고 일러요.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1베드 3,13-5,14)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요?(4,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셨듯이, 그분을 믿는 이들도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라고 당부해요.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은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할 때에만 진가를 발휘하거든요. 이렇듯 겸손의 옷을 입고 이웃을 섬길 때에 우리 사회가 좀더 명랑하고 밝아지지 않겠나 싶네요.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2베드 1,1-21)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1,17-19)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어요. 그러니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사랑을 더해야 돼요.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요? 신앙은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끊임없이 완덕을 추구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2베드 2,1-3,18)

 

주님께서 진노하시지 않고 오래 참으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3,9·15)

 

거짓교사들을 주의하라고 촉구해요.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며, 대낮에 흥청거리며 노는 것을 낙으로 삼고, 욕심을 채우는 데만 잘 훈련이 된 자들이니 하느님의 저주를 받을 거라고 경고해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재림의 날이 늦어지는 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도록 모두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라고 밝혀요. 그러니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고 권유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새김과 나눔>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은총의 선물을 받았습니까? 또 그 은총을 이웃을 섬기는 데 쓰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누가 썼나요?

 

베드로 전서와 후서 첫머리에는 각각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집필했다고 나와 있어요(1베드 1,1; 2베드 1,1). 그래서 사도 베드로를 이 두 편지의 저자로 생각하기 쉽지만, 당대에는 이름있는 사람을 저자로 내세워 집필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초대교회에서도 이 두 편지의 저자가 누군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어요. 먼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파피아스가 베드로 전서를 인용했었다고 밝히면서, 베드로 후서에 대해서는 논란은 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오리게네스는 베드로가 남긴 편지 한 통은 공인되었지만, 두번째 편지는 의심스럽다고 밝히고 있어요. 예로니모 또한 베드로가 공동서간이라고 불리우는 편지 두 통을 썼다고 언급하고 있어요. 대체로 베드로 전서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베드로 후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에요.

 

오늘날 학자들은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어 문장도 세련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베드로 전서를 베드로의 친서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많아요. 베드로 후서 또한 사도 시대 이후에 쓰여진 유다서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 친서가 아니라고 봐요.

 

언제 쓰여졌나요?

 

각 서간이 담고 있는 상황과 사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집필연대가 달라져요. 베드로 전서는 5,13바빌론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로마 당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70년 이후에 집필되었어요.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로마는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빌론과 동일시되었거든요. 그리고 125년경에 파피아스가 이 서간을 인용했던 것으로 보아 90년대 초를 넘지 않았을 거에요. 대략 70-92년경에 쓰여졌다고 보아요.

 

반면에 베드로 후서는 바오로 서간들이 널리 알려져 권위있게 받아들여지고 또 사도성의 기준이 드러나기 시작한 2세기 초쯤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늦게 쓰여진 성서에요. 그런 만큼 초대교회에서 2세기의 교회로 전환되는 시대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어요.

 

왜 썼나요?

 

베드로 전서는 전 교회가 겪는 고난과 박해의 상황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불러 일으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용기있게 생활해 나갈 수 있도록 촉구하기 위해 쓰여졌어요. 상대적으로 후대에 쓰여진 베드로 후서는 주님의 내림을 비웃는 이단자들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내림에 대한 희망과 주님의 계명을 다시 기억할 것을 일깨우고자 쓰여졌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돌입니다

 

(1베드 2,4)

 

여러분은 새로 난 사람들입니다(1베드 1,1-2,10)

 

지금 겪는 시련은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1,6)

 

시련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쁨과 희망에 찬 삶으로 이끌고 있어요.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듯이, 우리들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야만 순수해져요. 그러니 어느 상황에서든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되겠죠.

 

자유인답게 사십시오(1베드 2,11-3,12)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을 지닌 아내는 어떤 방법으로 신앙을 증거하라고 권유받나요?(3,1-2)

 

낯선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육체적인 욕정을 멀리 하고, 억울하게 받는 고통도 감내하라고 권유해요. 믿지 않는 남편을 말로 설득하기보다는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로써 신앙을 증거하라고 일러요.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1베드 3,13-5,14)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요?(4,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셨듯이, 그분을 믿는 이들도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라고 당부해요.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은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할 때에만 진가를 발휘하거든요. 이렇듯 겸손의 옷을 입고 이웃을 섬길 때에 우리 사회가 좀더 명랑하고 밝아지지 않겠나 싶네요.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2베드 1,1-21)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1,17-19)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어요. 그러니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사랑을 더해야 돼요.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요? 신앙은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끊임없이 완덕을 추구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2베드 2,1-3,18)

 

주님께서 진노하시지 않고 오래 참으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3,9·15)

 

거짓교사들을 주의하라고 촉구해요.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며, 대낮에 흥청거리며 노는 것을 낙으로 삼고, 욕심을 채우는 데만 잘 훈련이 된 자들이니 하느님의 저주를 받을 거라고 경고해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재림의 날이 늦어지는 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도록 모두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라고 밝혀요. 그러니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고 권유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새김과 나눔>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은총의 선물을 받았습니까? 또 그 은총을 이웃을 섬기는 데 쓰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요한 1·2·3서는 어떤 책인가요?

 

요한 1·2·3서란 이름은?

 

요한 1·2·3서는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유다서와 함께 공동서간, 또는 가톨릭 서간으로 불리웁니다. 수신자를 특정 인물이나 교회로 한정시키지 않아서, 여러 교회에서 공동으로 읽어볼 수 있기 때문이죠. 사도 요한이 썼다는 교회 전승으로 말미암아 요한 1·2·3서란 이름이 붙여졌어요.

 

누가 썼나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요한 1·2·3서를 동일 인물이 집필했는지,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이 집필했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논란이 일고 있어요. 비슷한 부분도 꽤 많지만 상이한 부분들도 있어서, 이를 두고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죠.

 

특히 요한 2·3서는 편지의 시작과 끝에서 하는 인사말이 거의 같아서 동일저자가 집필했거나, 아니면 요한 2서의 저자가 요한 3서를 모방했다고 이야기되어요. 그렇지만 요한 1서는 편지 형식을 띠고 있지 않은 데다가 어휘와 문체와 사상이 요한복음서와 비슷한 면이 많아, 요한복음을 쓴 사람이 썼다는 주장도 제기되는 실정이어요. 어찌 되었거나 요한계 학파에서 생성된 서신들로 보아요.

 

언제 쓰여졌나요?

 

요한 1·2·3서는 거의 동일한 시기에 쓰여졌어요. 요한복음서가 쓰여진(90년경) 이후 영지주의가 퍼져 있었던 약 100년경에 쓰여졌다고 보아요. 요한 1서에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며(2,22-23) 예수의 육화를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내용이 나오는가 하면,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가 110년경 아시아의 교우들에게 예수의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을 조심하라는 편지를 보내거든요.

 

왜 썼나요?

 

당시 요한계 교회에는 예수의 육화를 부인하며(2요한 7)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반그리스도, 거짓 예언자들이 생겨나 교회를 떠나는가 하면 많은 신자들을 현혹하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생겨났어요(1요한 2,18-19·22-23; 4,2-3). 심지어 어느 지역교회에서는 원로가 써보낸 서간을 무시하고(3요한 9) 원로가 파견한 순회 전도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등 원로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도 생겨났지요.

 

이러한 현실에서 그들의 신앙이 정통 신앙인지를 가늠해 보라는 지침을 내리고자 편지를 썼어요. 즉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절대 선이라고 믿으면서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지, 또 예수는 인간이면서 온전히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는지 점검해 보라고 충고해요. 더불어 이단자들의 그릇된 사상에 동조되지 말라고 당부해요.

 

<새김과 나눔>

 

요한계 서신은 예수를 인간이면서도 하느님이신 분으로 받아들이라고 권유합니다. 나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과 하느님적인 면 중에서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둡니까?

 

요한묵시록은 어떤 책인가요?

 

요한묵시록이란 이름은?

 

요한묵시록은 전체 성서 중 마지막 책으로서, 유다서 다음에 위치해 있어요. 요한복음, 요한 일··삼서와 함께 요한 공동체에서 쓰여진 성서로, 요한계 문헌으로 분류되어요. 사도 요한이 집필했다는 교회 전승에 따라

 

요한묵시록이라 불리우게 되었답니다.

 

누가 썼나요?

 

요한묵시록 첫머리에는 하느님께서 곧 일어날 일들을 당신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리스도에게 계시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당신의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려 주셨습니다.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신 것, 곧 내가 본 것을 그대로 증언합니다”(묵시 1,1-2)고 밝혀져 있어요. 초대교부 대부분은 이 요한이 복음서와 요한 서간들도 쓴 사도 요한이라고 보았어요.

 

그렇지만 현대 학자들은 사도 요한이 요한계 문헌 전체의 저자라고 보지 않아요. 요한계 문헌이 전해 내려온 공동체에 속한 서로 다른 저자들이 집필했을 거라고 봐요. 더군다나 요한묵시록은 문체나 성격이 복음서나 서간들과는 현저하게 차이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묵시록을 집필했다기보다는 바르나바의 동역자인 요한 마르코(사도 15,37·39)나 원로 요한(2요한 1), 잘 알려지지 않은 요한이라는 사람 내지 사도 요한의 이름을 빌은 익명의 저자가 집필했을 거라고 봐요.

 

언제 쓰여졌나요?

 

요한묵시록의 집필연대는 시대별로 큰 차이를 보여요. 초대교회 저술가들은 도미티아누스(81-96)가 다스리던 시절에 기록되었으리라고 보는가 하면, 후대의 저술가들은 클라우디스(41-54), 네로(54-68), 트라야누스(98-117) 황제 시절에 집필되었으리라고 봐요. 현대 학자들 중에는 베스파시아누스(69-79) 시절로 잡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도미티아누스(81-96) 통치 시절에 집필되었다고 봐요.

 

왜 썼나요?

 

로마 제국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스스로 신이요 황제라 자처하면서,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어요. 곳곳에 황제 신전을 지어 참배하도록 하면서요. 복음서에 자주 언급되는 복음(유앙겔리온)은 당대에 태자 탄생과 같은 황제의 근황을 알리는 소식을 뜻했어요.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복음으로 삼아버리는 한편, 황제 숭배를 거부했어요. 이에 도미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했답니다.

 

이 때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당하기도 하고, 순교에 대한 두려움으로 배교하거나 신앙이 흔들리기도 했지요. 이런 현상을 주목해 온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환시를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받는 어린 양임을 일깨움으로써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북돋우고자 했답니다.

 

<새김과 나눔>

 

고통이나 시련을 당할 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회피하기 쉽죠? 나는 살아오면서 어느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 안기를 거부했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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