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는 어떤 책이죠?
왜 신약성서라고 부르죠?
신약(新約)은 새 계약이란 뜻이에요. 따라서 신약성서(新約聖書)는 새 계약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성서를 가리키는 말이죠. 구약성서(舊約聖書)는 옛 계약에 근거를 둔 성서구요. 그러면 무엇이 새 계약이고 무엇이 옛 계약일까요?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야훼 하느님과 처음으로 계약을 맺어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완고한 마음에 사로잡혀 그 계약에 충실치 않은 역사를 거듭해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예레미야 예언자를 시켜 "새 계약을 맺을 날"(예레 31,31)이 올 것이라고 선포하게 하셔요. 이 예언 말씀대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새로운 계약의 잔"(1고린 11,25)을 마신답니다. 이로써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 "새로운 계약"(2고린 3,6)을 체결하게 된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새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랍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어떤 관계에요?
일찍이 성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말을 남기셨어요. "신약은 구약 속에 숨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완성된다." 아마도 지금까지 구약성서를 읽어 오신 분들은 구약에서 이야기되었던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연스럽게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셨을 거에요. 실제로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에 기술된 구원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증언하는 책예요. 따라서 구약성서를 읽지 않으면 신약성서의 깊이를 느낄 수 없고, 신약성서를 읽지 않으면 구약성서의 목표점을 찾을 수가 없어요. 한마디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하느님의 구원역사 안에서 서로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권의 총서랍니다.
신약성서는 일종의 총서랍니다.
신약성서는 모두 27권이에요.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잔잔하게 기록해 놓은 복음서가 4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세워나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해 놓은 사도행전, 몇 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떠났던 바오로 사도며 그외 사도들이 선교지에 생겨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애썼던 사랑의 마음이 진하게 배어 있는 서간집 21통, 로마제국 치하에서 고통을 겪는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묵시록 1권 등 아주 다양해요.
이렇게 27권이 아주 다양하면서도 모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데에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비록 처해진 상황이 다르다 해도, 공동체에서 관심 갖고 있는 문제가 천차만별이라 해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근거와 목표는 한 분이시지 않겠어요?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성서가족들이 처한 상황도, 각 개인의 사연도 서로 다를 거에요. 하지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걸어가는 것만큼은 공통될 거에요. 이런 마음으로 서로 다른 이웃들을 존중하면서 생활하시는 복된 시간 보내세요.
<새김과 나눔>
신약성서는 모두 27권이에요. 어떤 낱권성서가 있는지 생각나는 대로 써보세요. 혹시나 전혀 들어보지 못한 성서가 있다면, 한 번 시간 내어서 읽어보아도 좋겠지요.
마태오복음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마태오복음이라는 성서 이름은?
처음에는 이름없이 통용되었어요. 지금은 네 복음서가 신약성서 안에 가지런히 모아져 있어 서로 다른 이름으로 구분지어야 하지만, 복음서가 처음 생겨날 때만 하여도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한 공동체에서 하나의 복음서가 통용되던 시절에는 그저 ‘복음서’라고만 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다른 공동체에서 생겨난 복음서가 점차 널리 보급되면서부터는, 각 복음서에 고유한 이름을 붙여야만 했죠. 마태오복음서는 세리였던 마태오가 기록했으리라는 생각에, 그 이름을 따서 복음서의 이름으로 삼았어요.
누가 썼나요?
초대교회에서는 일찍부터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했으리라는 전승이 생겨났어요. 유세비우스는 그의 저서 “교회사”에서 “마태오는 말씀들을 히브리어로 차례대로 모아놓았고, 각자는 이를 자기 능력대로 번역하였다”는 파피아스(60-130년경)의 증언을 담고 있어요.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130-22년경) 또한 “베드로와 바오로가 로마에서 설교하며 교회를 세우고 있는 동안에 마태오는 히브리인들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의 말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로 말미암아 사도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했으리라는 전승이 형성되었지만, 오늘날 사도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했으리라고 보는 학자들은 거의 없어요. 하지만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편의상 저자를 마태오로 부르고 있답니다.
언제 쓰여졌나요?
마태오복음서의 분량은 28장이나 돼요. 아무런 자료 없이 이 방대한 작업이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질 리는 없어요. 실제로 마태오복음은 50-60년경에 쓰여진 예수의 어록과 70년경에 완성된 마르코복음서를 참조해서 쓰여졌으리라고 봐요. 그리고 마태오 교회 안에 전해 내려온 전승들도 한데 모았을 거라고 봐요. 내용상 유다교와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고, 100년경에 쓰여진 디다케(12사도의 가르침)에 마태오복음서가 인용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대략 80--90년경에 쓰여졌을 거라고 추정한답니다.
왜 썼나요?
유다교의 여러 풍습이나 계율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고 있으면서, 간혹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그리스어로 풀이해 주는 것으로 보아(1,23; 27,33.46), 북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에 인접한 시리아 지방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졌다고 봐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점차 확립되어 나가면서 유다교와의 갈등도 생겨나는 시점에서, 어떠한 어려움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공동체 성원들에게 촉구하고자 했어요.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바탕을 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함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죠.
<새김과 나눔>
요즘처럼 인쇄기술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그 옛날, 복음서 작가들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서 모두 글로 써야만 했습니다. 그 노고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마태오복음서를 한 번 써보면 어떨까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1-9장)
그분의 별을 찾아(마태 1,1-4,22)
임마누엘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1,23)
마태오복음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1,1)는 말로 시작되어요. 구원사의 흐름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서부터 통일왕국을 이룩한 다윗을 거쳐 계속 이어져 오고 있음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죠. 이런 구원의 연속적인 흐름은 아마도 깨어 있는 자들만이 볼 수 있을 거에요. 동방박사들은 그분의 탄생을 나타내는 별을 보고 경배하러 가지만, 헤로데를 비롯한 율법학자는 미처 깨닫지를 못하니까요. 아마 우리를 그분께 이끄는 별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에요. 동방박사들만큼 깨어 있을 수만 있다면 말이죠.
예수의 탄생으로 시작된 구원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집트로 피신갔다가 다시 돌아와 나자렛에서 머물러 살며 성장한 다음,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는 과정을 통해 점차 소명의식을 틔우게 됩니다. 그리고는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인생의 흐름을 따라 지금까지 살아왔을까요?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이루려 하실 텐데요.
산상설교에 귀 기울이며(마태 4,23-7,29)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7,12)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주옥같은 말씀이라 하면, 누구나 산상수훈을 들 거에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5,3)로 시작되는 말씀은 언제 들어도 우리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거든요. 우리 신앙인이 꿈꾸어야 할 참된 행복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게 되구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전통적인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실제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나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안됨을 힘있게 일깨워 줍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들을 위해서 ‘주의기도’를 일러주시는가 하면, 겉꾸미기를 좋아하는 위선적인 삶을 살지 말도록 촉구하고 있죠. 이런 말씀들은 실제 살아가면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그렇게 살려는 지향만큼은 간직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싶네요.
놀라운 기적은 여기저기서(마태 8,1-9,38)
아주 강한 믿음을 지녔다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8,5-13)
마태오는 전해 받은 이야기를 주제별로 전개시키곤 해요. 그 중에서 8-9장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한데 모아 놓은 곳이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운 치유 이야기가 나와요. 나병환자, 백인대장의 하인, 마귀들린 사람, 중풍병자, 회당장의 딸, 소경, 벙어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요. 각 사람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서 풀려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느껴보시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을 듯 싶습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
(마태 10-18장)
가서 선포하여라(마태 10,1-12,50)
예수님의 열두 제자 이름을 써보세요(10,2-4).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시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당부하면서 말이죠.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일 거에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을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다 보면, 때로 예기치 않게 오해도 받고 고통도 겪게 되죠. 예수님도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는 모함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의 온 삶을 통해 복음을 선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늘 나라는 …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1-52)
어느 땅에 떨어진 씨앗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습니까?(13,8)
하늘 나라의 신비를 일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과 진주와 그물의 비유 등. 이런 비유는 모두 하늘 나라의 속성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어요. 처음에는 보잘 것 없었지만 나중에는 엄청나게 커지게 되는 모습,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귀중한 보물을 차지하는 모습, 하나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수많은 열매를 맺는 모습 등. 이런 모습이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실제로 드러나야 되지 않을까 싶네요.
예수를 따르는 길(마태 13,53-17,27)
시몬 베드로는 예수를 누구라고 고백합니까?(16,16)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지만,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달라는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히 알아내어요. 비록 수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해도 말이죠.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인지를 잘 알면서도, 그 길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합니다. 그럴 때에 용감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뒤따를 수 있도록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마태 18,1-35)
누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까?(18,4)
예수님은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될지를 여러 모로 일러주시죠.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가면서, 죄의 유혹은 단호히 끊어내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죄를 지은 형제를 크나큰 사랑으로 용서해 주는 이들이야말로 참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음을 일깨워 주시죠.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교회 공동체의 모습일 거에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마태 19-28장)
권위있는 가르침(마태 19,1-22,46)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계명을 다 지켰다는 부자 청년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19,21)
예수님은 결혼과 이혼에 관한 문제를 비롯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길에 대해서 깊이 일러주시죠. 어떤 문제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는 삶을 살라고 초대합니다. 하느님은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 다섯 시에 와서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대하시는 분이심을 생각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그러니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데 방해가 되는 환전상들과 장수들을 몰아내는 과격한 행동을 하실 수밖에요. 우리 사회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제도나 관습이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를 바로잡도록 애써야겠지요.
너희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니(마태 23,1-25,46)
심판의 날은 누구만이 알고 있습니까?(24,36)
예수님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와 같은 유다교 지도자들이 무거운 짐을 꾸려 사람들에게 얹어 주면서도 자신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적인 삶을 살아간다며 호되게 나무랍니다.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예식만 강조하는가 하면, 정결례를 철저히 요구하고 있다면서요. 우리의 신앙도 실속이 없고 겉치레에만 흐르면 같은 비난을 받게 될 거에요.
이어 예수님은 이런 그릇된 관행이 뿌리깊이 박혀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그 날이 될 때면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속일 뿐만 아니라,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것이라고 일러주면서요. 하지만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므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처럼 깨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도 소홀하는 법이 있어서는 안되구요. 아가교를 비롯해서 사이비 신앙이 성행하고 있는 요즈음 세태가 시사해 주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분별해 보아야겠지요.
십자가의 길, 부활의 길(마태 26,1-28,20)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명패에는 어떤 죄목으로 쓰여 있나요?(27,37)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유다 이스가리옷이 은전 서른 닢에 예수를 팔아 넘기는 바람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한 후 게쎄마니 동산에서 붙잡혀서 대사제 앞에 서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장담과는 달리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구요. 빌라도 총독 앞에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고 조룡을 받은 끝에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두죠. 이 이야기로만 끝났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거에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시죠. 비록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시신을 훔쳐갔다는 낭설이 전해져 오지만요. 주님께서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셔서 부활의 새 빛으로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한 주간 사시기 바랍니다.
마르코복음서란 성서 이름은?
마르코복음서는 4복음서의 하나로 마태오복음서 다음에 나옵니다. 비록 성서에는 마태오복음서 뒤에 놓여 있지만,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집필되었으리라고 봐요.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복음서의 형태로 제일 먼저 기록한 관계로, 다른 복음서를 연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어요. 마르코복음서도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아요. 다른 복음서가 일체 없는 관계로 그저 '복음'이라고만 해도 사람들이 다 알 수 있었죠.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복음서가 생겨나 널리 퍼진 후에는 마르코복음서만을 가리킬 별도의 이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교회의 전승에 따라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의 협력자로 활동하였던 마르코의 이름을 따서 책이름으로 삼게 되었답니다.
누가 썼나요?
마르코복음서의 필자를 제일 먼저 밝힌 사람은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빠삐아스예요. 그는 베드로의 통역였던 마르코가 사도 베드로가 가르쳤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나는 대로 충실히 기록했다는 내용을 요한 원로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밝히고 있어요. 그래서 그동안 사도 바오로의 1차 전도여행 때 동반자이기도 하고(사도 13,5), 베드로의 일행으로 로마에 함께 있었던(1베드 5,13) 요한 마르코가 최초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거라고 믿어 왔어요.
하지만 마르코복음의 내용을 곰곰히 살펴 보면, 사도 바오로만의 특유한 사상이나 낱말, 표현 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구마 사화나 이적 사화의 경우 베드로가 전한 이야기 그대로 전수된 것이 아니라 당대에 통용되던 그리이스 사화 양식에 따라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사도들을 따라다녔던 마르코가 필자일 수는 없어요. 다만 교회에서 오래도록 통용되었던 전승을 존중해서, 편의상 마르코를 저자라고 부르고 있어요.
언제 썼나요?
마르코복음서가 언제 쓰여졌는지는 복음서의 내용을 통해 추정해 볼 수밖에 없어요. 마르코복음서에는 집필시기를 엿볼 수 있는 단서가 하나 있어요. 13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전 파괴 사건이에요. 유다인들이 로마 제국의 압제 하에서 벗어나려고 벌인 독립전쟁(66-70) 말기에 성전이 함락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기원후 70년경에 쓰여졌으리라는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에 예언으로 쓰여졌는지, 멸망 후 사건 보도로 쓰여졌는지는 단정하기가 어렵답니다.
왜 썼나요?
교회에서 전해 내려오던 여러 가지 전승을 한데 모아서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생생하게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서 집필했어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만을 믿을교리로 받아들이던 당대 교회에, 예수님께서 사셨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일 또한 중요함을 일깨우고자 했답니다.
<새김과 나눔>
마르코는 예수님의 삶을 세례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록합니다. 세례로써 새롭게 새 삶을 시작한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갈릴래아 호숫가에서(마르 1,1-8,21)
세례 받으시는 예수(마르 1,1-15)
예수께서 세례받고 나오실 때 하늘에서 어떤 말씀이 들려옵니까?(1,11)
마르코는 복음서를 통해서 증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첫머리서부터 분명히 밝혀 주고 있어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분의 삶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福音]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순간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을 듣는가 하면, 갈릴래아에서 곧바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알려주지요.
예수는 놀라우신 분(마르 1,16-3,6)
제일 먼저 예수의 제자로 불림받은 네 사람은 누구입니까?(1,16-20)
복음 선포와 더불어 예수님은 곧바로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불러 모으셔요. 그리고는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에서 악령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는가 하면, 나병환자며 중풍병자를 고치는 놀라운 이적을 행해요. 사람들이 기쁘게 살지 못하게 하는 악령과 병마들을 쫓아냄으로써,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해 주셨던 거지요. 우리에게도 이 기쁨을 선사해 주시기를 ……
정처없는 떠돌이 생활(마르 3,7-6,6)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씨는 어떤 땅에 떨어진 씨앗일까요?(4,8)
놀라운 이적을 벌이는 예수님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온갖 지역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 왔으니까요. 예수님은 그 중에서 열둘을 사도로 뽑아서 당신처럼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게 하셔요. 그리고는 군중들에게 비유 말씀을 들려 주심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그들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셔요. 하지만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해요.
제자들의 몰이해(마르 6,7-8,21)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 주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 ‘에파타’는 무슨 뜻입니까?(7,34)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받아 회개하라고 촉구하며 사람들의 병마를 고쳐주어요. 그 소문을 듣고 헤로데 왕은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며 놀라기도 해요. 예수님을 따르는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오천 명을 먹이는 놀라운 빵의 기적을 베풀고 물 위를 걷는 놀라운 기적을 보이지만, 기존의 유다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해요. 예수님은 이들이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중시하는 반면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서, 이들의 가르침에 말려들지 말라고 당부해요.
<새김과 나눔>
마르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자체가 ‘복음’이라고 선포합니다. 나는 그분의 삶 중에서 특히 어느 부분에서 기쁨을 느낍니까?
갈릴래아로 가시오(마르 8,22-16,22)
예루살렘을 향해 가며(마르 8,22-10,52)
베드로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8,29)
예수님께서 베싸이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듯이,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아차리게 해줘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하죠.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처형되셨다는 사실은 신비 중의 신비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일깨워 주면서도, 틈나는 대로 수난 예고를 통해 제자들의 눈을 트여 주려고 하셨던 것처럼, 저희의 무딘 눈을 틔워 주십사 청하는 마음자세를 늘 지녀야만 할 거에요.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란 간절한 소망으로 예수님께 달아들어야겠지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르 11,1-13,37)
모든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 2개는 무엇입니까?
(12,28-33)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산 근처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해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란 군중들의 환호성을 받으면서요.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예수님은 성전 뜰 안에서 사고 팔고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는 과격한 행동을 하시죠. 성전은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면서 말이죠. 이런 일이 문제가 되어서 유다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우려고 해요. 그래서 당대 예민한 문제였던 세금 문제며 죽은이들의 부활에 관해서 물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음모에 직접적으로 말려들지 않고, 필요한 가르침을 주셔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12,17) 하면서요. 세금과 같은 인간적인 문제에만 신경쓸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그에 맞갖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새로운 차원을 열어보이셨던 거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마르 14,1-16,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무엇입니까?(15,34)
예수님께서는 수난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져요. 당신을 배반할 제자 유다가 겪을 운명에 대해서 마음아파 하고, 감정에 휩싸여 헛되이 장담하는 베드로의 한계도 짚어 주셔요. 그리고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아요. 그리고는 십자가형에 처해져 숨을 거두지요. 바로 그 모습을 보면서 백인대장이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15,39)고 고백하는 것이 참 역설적이죠. 수난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아니겠어요?
<새김과 나눔>
백인대장은 수난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나는 어느 때 신앙을 고백합니까?
루가복음서란 성서 이름은?
루가복음서는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 이어서 세번째로 나오는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제3복음서로 불리워지기도 하죠. 한편 이 복음서는 교회 전승 초기서부터 사도 바오로와 선교여행을 함께 떠났던 의사 루가가 집필했다고 알려져 왔어요.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루가복음서라고 명명되었답니다.
누가 썼나요?
정확하게 누가 썼는지는 몰라요. 다만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라서, 바오로 사도와 동행하였던 루가가 썼으리라고 추정할 뿐이죠. 기원후 2세기 말엽에 리옹의 이레네오를 비롯해서 200년경의 무라토리아 파편의 기록을 초대교회서부터 의심없이 믿었던 것이죠. 지금처럼 누가 썼느냐 보다는 어떤 내용이 실려 있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던 시기였으니까요. 실제로 겉보기에도 루가복음서에는 병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루가 4,38; 5,12; 8,44; 13,11), 마르코를 인용하면서도 의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배제하고 있어요(마르 5,26 비교 루가 8,43).
반면에 바오로 사도의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뚜렷한 증거를 복음서 내용에서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당대에는 의학적인 전문용어나 표현을 사용해서 글의 품위를 높이려는 문학적 성향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3복음서의 저자를 루가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그동안 통용되었던 교회의 관습을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편의상 루가를 저자로 일컫고 있답니다.
언제 썼나요?
루가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희랍어 문장이 아주 정교해요. 어휘 또한 고전희랍어에 속한 것이 1/3이나 될 정도로 언어실력이 탁월해요. 70년경에 쓰인 마르코복음서와 50-60년에 집대성된 예수 어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70인역 성서를 많이 참조했기 때문으로 보여요.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기원후 81-96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호되게 박해받았던 일들이 반영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얌니아에서 바리사이파가 유다교를 재건한(기원후 85-90년) 후에 생겨났던 교회와 회당 간의 반목도 들어 있지 않는 것을 보면, 대략 기원후 80-85년경에 루가복음서가 집필되었을 거에요.
왜 썼나요?
복음서 서두에 나온 대로, 루가는 시간적으로 지리적으로 예수 시대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일러주기 위해서 쓰여졌어요. 아마도 헬라계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다시 말해서 데오필로를 중심으로 한 가정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언행을 바탕으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 집필되었을 거에요.
<새김과 나눔>
루가는 각양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서를 집필합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루가 1,1-9,50)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
(루가 1,1-2,52)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어린 아기 예수를 받아 성전에 봉헌한 사제는 누구입니까?(2,25-28)
루가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맨먼저 데오필로 님에게 책을 봉헌하면서, 세례자 요한이 사제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나게 된 극적인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어요. 이어 마리아에게서도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릴 이스라엘의 왕이 태어날 거라고 알려요. 이에 마리아는 처녀이면서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놀라운 신앙의 응답을 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응답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천사와 마리아가 서로 주고 받았던 세 차례의 대화로 삼종기도를 드리죠.
세월이 흘러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고, 이어 아우구스토 황제의 호구조사령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갔다가 방을 구하지 못해서 마굿간에서 예수를 낳아요. 우리가 성탄 때 꾸미는 구유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이 대목에서만 언급돼요. 아기 예수는 여드레째 할례를 받고 성전에 봉헌된 다음 나자렛이라는 동네에서 성장해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루가 3,1-4,13)
예수는 요르단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온 후 누구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게 됩니까?(4,1)
요한은 성장해서 요르단강 부근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회개하며 세례를 받을 것을 요청해요. 하지만 영주 헤로데의 잘못을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도 세례를 받고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광야에 나가서 사십 일 동안 생활해요. 거기에서 빵의 유혹, 권력의 유혹, 명예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친답니다. 사실 이런 유혹이 우리 삶에서도 늘 제기되곤 하는데,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거에요.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루가 4,14-9,50)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선언한 네 부류의 사람은 누구입니까?(6,20-23)
광야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은 예수는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했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밝혀요. 이어 마귀들린 사람들과 병자들을 고쳐주면서 전도 여행을 시작해요.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열두 사도를 선정하는가 하면, 온갖 제도와 관습에 굳어 있는 유다교 지도자들에게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해도 무방함을 일깨워 주어요. 나아가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를 자세하게 일러주면서, 신앙인으로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 복된 삶을 살라고 촉구해요.
<새김과 나눔>
마리아는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천사의 전갈을 받고도 굳센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굳센 믿음을 보였던 신앙인들을 주변에서 찾아봅시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루가 9,51-24,53)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올라(루가 9,51-19,27)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이는 누구입니까?(10,25-37)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여러 모로 제자들이 따라야 할 길에 대해서 일러주셔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되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화를 빌어주고, 곤란한 처지에 빠진 이웃을 보면 다른 이유를 내세우기보다는 곧바로 도와주워야 한다고 일깨워요. 그리고 많은 일에 마음을 쓰기 보다는 실상 필요한 것 한 가지에 몰두하면서, 일상생활에 얽매여 걱정에 휩싸이기 보다는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으라고 촉구해요. 이렇게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이 시대의 뜻을 깨닫게 되어 열매를 맺지 못해 내쫓기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알려줘요.
예루살렘 입성(루가 19,28-21,38)
벳파게와 베다니아 가까이에서 나귀를 타고 입성할 때에, 수많은 제자들은 무어라고 찬양합니까?(19,38)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예수님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내려다 보시며 한탄하고는, 성전에 들러 상인들을 쫓아내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요. 이로 말미암아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를 꾸며, 예수의 권한을 트집잡으려 하는가 하면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물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때마다 그들이 더 이상 트집잡지 못할 적절한 대답으로 빠져나가요. 그리고 과부가 낸 헌금이 어떤 부자가 낸 헌금보다도 더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가운데, 재난이 시작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상세히 일러줘요. 그 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르니 쓸 데 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해요.
이 사람이야말로 죄없는 사람(루가 22,1-24,53)
예수를 무덤에 모신 이는 누구입니까?(23,50-54)
예수님은 과월절이 다가오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과월절 음식을 준비하게 해요. 그리고는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면서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을 배반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요. 그런데도 제자들이 누가 더 높은지를 따지며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고는, 남을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라고 당부해요. 그리고는 올리브산에서 기도하다 유다의 배반으로 잡혀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 후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 앞에서 부활하여, 성서의 말씀을 풀이해 주고 빵을 나누는 가운데 당신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음을 체험케 해주어요. 이어 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나타나셔서 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맡겨요.
<새김과 나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내가 사는 도시를 바라보면서는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요한복음서란 성서 이름은?
요한복음서는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과 루가복음에 이어서 네번째로 나오는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제4복음서로 불리워지기도 하죠. 한편 이 복음서는 교회 전승 초기서부터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이 집필했다고 알려져 왔어요.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요한복음서라고 명명되었답니다.
누가 썼나요?
초대교회의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이 요한복음서를 즐겨 원용하였으므로, 요한복음서가 정경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도적인 전승과 연결되어야만 했어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요한복음서가 이교 집단들에게 잘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세 복음서와도 아주 달라서 미심쩍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거든요. 이 시기에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는 소아시아 일대에서 떠돌아 다니던 풍문을 들어, 요한복음이 사도적 전승을 계승하고 있다고 옹호했어요. 요한이라고 불리우는 사랑받던 제자가 말년에 에페소에 거주하면서 요한복음서를 썼다는 것이죠. 이 요한이 2세기 초에도 살아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덧붙이는 것으로 보아, 이레네오는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과 소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사제 요한을 혼동했나 봐요.
요즈음 학자들은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이 요한복음서의 저자라고 보지는 않아요. 문학적으로 잘 짜여진 구성에다 일관된 시각을 지니고 있어 한 개인이 썼을 수도 있지만, 요한계 전승을 형성시켜 온 공동체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사랑받던 제자’를 추종하던 제자들이 집필했으리라고 추정해요.
언제 썼나요?
기원후 125-150년경으로 추정되는 요한 18,31-33. 37-38이 쓰여진 파피루스 부스러기가 이집트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기원후 100년경에는 요한복음서가 집필되어 이집트 전역에 통용되고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공관복음서와 무관하게 자체 안에서 예수 전승이 발전되어 나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당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내어쫓기는 듯한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기원후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유다교 경전이 확정된 이후인 기원후 90-95년경에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많아요.
왜 썼나요?
요한복음서의 집필목적은 복음서 뒷부분에 잘 나와 있어요.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유다인들의 박해를 받아 회당에서 내어쫓기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 요한 공동체 성원들의 신앙을 더욱 북돋워 주기 위해서 쓰여졌어요.
<새김과 나눔>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더욱 북돋우기 위해 복음서를 집필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어떤 방법으로 격려하고 북돋워 줍니까?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요한 1-12장)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1,1-18)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1,1)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이 생겨났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말씀의 찬미가로 시작되어요.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선포 안에서 더 확실히 드러나요. 말씀이 곧 참 빛이고, 그분만이 일찍이 하느님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일러주실 거라고 말이죠. 말씀의 빛으로 보면 아무래도 세상이 달리 보이게 마련이니까요.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요한 1,19-4,54)
예수님께서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해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1,47)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계시다고 사람들에게 일러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예수께 인도해요. 또한 안드레아는 형 시몬을,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각각 제자단으로 끌어들여요. 그 며칠 후 예수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술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고는 성전을 정화해요. 니고데모라는 학자는 예수님께 와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느냐고 감탄해요.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 나야 된다고 일러주는가 하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샘솟는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고 초대해요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5,1-10,42)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처단하기를 촉구하는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8,1-11)
예수님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베짜타 못에서 삼십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를 치유해 주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아주 친밀함을 드러내 보여 주어요. 자신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요. 오천 명을 먹이고 나서는 당신이 생명을 주는 빵임을 일깨우고, 간음한 여인을 구해 준 다음에는 당신이 세상의 빛이며 그리스도임을 천명해요. 아울러 눈먼 사람을 고쳐줄 때에는 당신이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참된 목자임을 계시해요. 기적을 베풀 때마다 당신이 누구신지 새롭게 보여주시는 모습이 참 놀랍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한 11,1-12,50)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바른 여인은 누구입니까?(12,3)
라자로의 죽음 사건에 접해서도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않고 그를 죽음에서 소생시킴으로써,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극적으로 선포해요. 이로 말미암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대사제 가야파와 공모하여 예수를 죽이려 음모를 꾸미기 시작해요. 이런 가운데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음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예비해요. 이어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그리이스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오도록 허용하고는 당신의 죽음을 예고해요.
<새김과 나눔>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빛으로, 생명의 빵으로, 착한 목자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지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요한 13-21장)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1-17,26)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은 무엇입니까?(15,13)
과월절을 앞두고 세상을 떠나실 때가 다 된 것을 알아차린 예수는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시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가 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겠다고 장담하고, 토마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려달라고 하며,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는 그들의 반응에 관심을 보이면서 세상에서 썩지 않을 열매를 맺으라고 권유해요. 그리고는 제자들과 그들의 말을 듣고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청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려요.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요한 18,1-19,42)
대사제의 종 말코스의 귀를 칼로 잘라버린 제자는 누구입니까?(18,10)
예수는 올리브 동산에서 체포된 후 대사제 관저에 끌려가요.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동안에, 예수님은 총독 관저에까지 끌려가 자신이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음을 분명히 밝혀요. 이어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 주자는 총독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선 군중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선고받아요.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박혀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는 세상을 떠나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1-31)
요한복음서를 쓴 목적은 무엇입니까?(20,31)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을 찾아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졌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사도들에게 알려요.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달음박질쳐서 무덤을 확인하는 동안에,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뵈어요. 그 날 저녁에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시며 성령을 받기를 당부해요. 이 때 의심많은 토마는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며 우기다가 마침내 주님이심을 고백해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25)
갈릴래아 호숫가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누구입니까?(21,7)
7명의 제자가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는 동안에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셔요. 이 때 주님임을 알아본 사랑받던 제자의 말에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서 곧바로 달아들어요. 아침식사를 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을 진정 사랑하느냐고 세 차례나 재우쳐 물어요. 그리고는 당신의 어린 양들을 잘 돌보라고 거듭 당부해요.
<새김과 나눔>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십니다. 내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더욱더 사랑을 쏟아야 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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