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9,23-26)
<순교>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4-25)"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현세의 인생만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라는 말은, "예수님을 위해서" 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이 말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현세의 인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는
"이 세상에서의 목표와 희망을 모두 이룬다고 해도
(바라는 것들을 모두 얻는다고 해도)"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출세, 성공 등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 얻는 모든 것들은 다 허무할 뿐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게 된다고 해도, 그것들이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또는 예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것들이라면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애쓴 일은 허무한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에 급제하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만 희망했습니다.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신분 상승을 먼저 희망했을 것이고.)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자기 이름이 역사에 남는 것,
그런 정도가 그 시대 사람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허무하지 않은 것, 즉 영원한 것을 희망하고 추구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열심히 찾아다니다가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종교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믿게 되었고, 스스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조선시대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순교자들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분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버린 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박해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죽은 것을 순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순교할 각오를 하고(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때가 되었을 때 각오한 대로 실행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안 죽어도 되는데 일부러 죽은 것도 순교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순교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순교자가 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리는(바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는 사람들의 희망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희망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직장, 더 풍요로운 생활... 출세, 성공, 부귀영화...
그런 것들을 얻어서 일생 동안 잘 살다가 죽는, 그런 정도의 희망.
그러나 신앙인의 희망은 다릅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희망하고 추구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저쪽 세상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무엇이 허무한 것이고,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를 알고,
영원한 것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버리는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
출세, 성공,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동시에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저 세상에서도 잘 살면 더 좋은 일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안 된다."입니다.
두 가지 희망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귀영화를 누린 다음에
저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하는 것은
한 가지 희망이 아니라 두 가지 희망입니다.
영원한 것은 허무한 것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것과 허무한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만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영원한 것을 외면하고 허무한 것을 선택하는 일 자체가 악입니다.
하느님의 반대쪽에 있는 것은 악이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죄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박해를 받을 때, 신앙을 지키면서 죽을 것인가? 신앙을 버리고 살 것인가? 를
선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박해가 없을 때 꾸준히 신앙을 지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박해도 시련도 고난도 없을 때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에는, 즉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에서는
문제가 단순해서 선택하는 일도 단순해지지만,
박해가 없고 편안할 때에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거나, 아니면 문제가 무엇인지 아예 모를 때도 많고,
방심할 수도 있고,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는 조선시대보다 지금이 더 어려운 시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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