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6월 3일 나해 연중 제9주간 수요일(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dariaofs 2015. 6. 3. 01:00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 또는 가롤로 르왕가)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우간다에서는 극히 우호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추장의 도움으로 약간의 진전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는 자기 부족 가운데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뿌리 뽑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 같은 열심한 부하가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추장은 그의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참수하였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다.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추장 몰래 4명의 예비신자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중에는 13세의 소년 성 키지토(Kizito)도 있었다. 추장은 또 다시 박해를 일으켜 모든 신자들을 색출하여 잡아들였다.

 

체포된 모든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곳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지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등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또 다른 순교자로는 마티아 칼렘바 무룸바(Mattias Kalemba Mur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무룸바(Matthias Murumba)가 있다. 그는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 다른 사람은 키고와의 추장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인데,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개종한 후 주위의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도록 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성 마티아 무룸바를 포함한 총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하게 시복되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영세하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들이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1964년 10월 18일 로마(Roma)에서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아프리카 가톨릭 청소년 활동단체의 수호성인이다.

 

강론   :   (마르 12,18-27)

 

<부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5)."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7)."

 

이 말씀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마르 12,18)에게 하신 말씀인데,

뜻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부활은 있다.

2.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다.

3. 모든 사람이 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4.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말씀은,

'죽음'이라는 것이 하느님과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이라는 것에게 당신의 자녀를 빼앗기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고, '죽음'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하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됩니다(묵시 20,11-15).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 부활하고,

어떤 사람은 심판을 받기 위해서 부활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루카 20,35)"

이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게 된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인연, 관계 등을,

또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본성, 본능, 욕망 등을

모두 초월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글자 그대로 완전한 해방과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은

일곱 형제와 살았던 한 여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께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르 12,23)"

라는 질문을 했었습니다.

이 질문은, "만일에 부활이 있다면 아주 복잡한 문제가 많이 생길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일에 있다면 그 '삶'은 '이승에서의 삶'의 연장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한다고 해도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상에서 살던 그대로 살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도 하느님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부활을 안 믿었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은 사실은 신앙이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 바라보는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세를 믿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은 현세의 복만 바라는 미신, 또는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또 부활과 내세를 믿는다고 해도,

단순히 이승에서의 삶이 연장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역시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실제로 부활이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부활하지 않겠다고 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지상에서 가난과 질병과 여러 가지 억압과 차별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았는데,

부활한 후에도 똑같이 살아야 한다면, 부활하지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부활 후에도 똑같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겠지만...)

 

그래서 우리가 희망하는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부활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하느님 나라, 그런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우리도 가끔 한 번쯤은 생각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가족을 가족으로 만날 수 있을까?

만나게 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알아보고, 기억하고, 또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만일에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그래서 가족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또는 먼저 떠나서 저쪽 세상으로 가 있는 가족이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가족을 잊어버렸다면?

 

여기서 우선 '기억'에 관한 문제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에 저쪽 세상에 간 사람들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지옥에서의 형벌도, 연옥에서의 보속도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또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기억하고 있어야

후회를 하든지, 보속을 하든지 할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한다면,

당연히 자기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기억할 것이고,

자기와 그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받은 다음에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지상에서의 모든 인연과 관계를 초월한다는 말씀은,

모든 인연과 관계가 다 끊어진다는 뜻도 아니고,

기억이 다 지워진다는 뜻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간에

지상에서 사랑했던 사람을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금방 서로 알아볼 것이고, 크게 기뻐하게 될 것이고,

참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과 행복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아주 많이 다를 것입니다.

(어떻게, 얼마나 다를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