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8월 11일 나해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아시시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dariaofs 2015. 8. 11. 05:38

 

 



1194~1253년,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글라라수도회 설립, 수녀.

클라라는 ‘빛’이라는 뜻이다. 성녀의 어머니는 기도 중에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얻으리라’는 음성을 듣고 난 뒤 성녀를 얻어, 성녀에게 ‘빛’(클라라)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성녀는 귀족 집안의 장녀였다. 성녀 부모님은 좋은 혼처를 찾아 딸의 혼인을 성대하게 치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성녀는 혼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푹 빠져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터였다. 성녀는 1212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몰래 집을 빠져나와 프란치스코 성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성인의 배려로 아시시 근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지냈다. 성녀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부모와 친척, 친구들이 수도원을 찾아와 성녀를 설득했지만, 삭발하고 나타난 성녀를 보고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후 성녀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겨 봉쇄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세속을 떠난 성녀의 삶은 가난과 겸손, 단순함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그를 수도원장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지극히 비천하고 부당한 여성이며 가난한 자매들의 종’이라고 낮췄다.

 

수도원 형제자매들이 동냥해온 음식 중에 먹을 만한 빵과 괜찮은 음식이 있으면 가난한 수도자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슬퍼했고, 오히려 상하거나 부스러기에 가까운 빵 조각들을 먹을 때 더 기뻐했다.

성녀는 관상 기도에 머물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기쁨을 체험했다. 어느 날은 이틀 동안 탈혼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먹지 않아 동료 수녀들이 깨울 정도였다.

 

그는 침묵이 주는 내적 충만함을 깊이 누렸다. 성녀는 수도원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기도하는 수도자였다.

성녀는 생전 많은 기적을 보여줬다. 아시시에 사라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성녀는 성체를 들어 올렸다. 성체에서 발하는 빛을 본 사라센 군인들은 두려움에 도망쳤다.

 

기도를 통해 환자를 치유했고, 작은 빵 하나로 50여 명의 수녀를 배불리 먹이기도 했다.

성녀를 만나 지혜를 구하고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났다. 그중에는 교황과 추기경도 있었고 왕과 귀족들도 있었다.

 

 1255년 성녀를 시성한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은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고 말했다.

성녀는 마지막 순간에 “저를 창조하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바치고 눈을 감았다. 성녀가 살았던 성 다미아노 수도원과 성녀 유해가 모셔진 아시시의 성 클라라 대성당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신자들이 찾는 성지다.

 

강론   :     마태오 18. 1-5,1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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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녀 글라라는 자신을 작은 가지라고 하였는데

주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작은 가지가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자기는 주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성 프란치스코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이참에 저라는 나뭇가지는 어디에 붙어 있는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주님 외에 어떤 다른 나무가 있다는 말인가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주님께 붙어 있는 가지인지

그렇지 않은 가지인지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두 가지입니다.

떨어져나간 가지와 잘려나간 가지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떨어져나간 가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잘려나간 가지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가지가 스스로 떨어져나갈 수는 없고 나무에 붙어있거나

외부의 힘에 의해 잘리는 것밖에는 없기 때문일 것이고,

당신께 붙어있지 않으면 농부이신 성부께서 잘라내실 거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성부께서는 정말로 잘라내실까요?

자비로우신 분이 정말로 그러실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그러시고 다른 복음에서도 그러시는데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아버지께서 베어버리시고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버리신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붙어있기는 하되 죽어있는 가지는 잘릴 겁니다.

삭정이를 아시나요? 삭정이, 바로 그것은

붙어있어도 죽은 것이고 그래서 잘려 불에 태워지고 말지요.


그렇다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데

왜 삭정이가 되고, 어찌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까?

수액이 전달되는 것이 차단될 때 삭정이가 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이 수액의 차단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있어라.”


주님께서 사랑을 주시는데도 그 사랑을 원치 않고

자기 사랑 안에 갇혀 있거나 다른 사랑 안에 머물면

아무리 주님께서 사랑을 주셔도 그 사랑이 차단되겠지요.


글라라 성녀는 이렇게 주님을 찬미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매료시키고,

그분에 대한 관상은 우리에게 생기를 주며,

그분의 어지심은 우리를 채워주고,

그분의 감미로움은 우리를 가득 채워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신부가 신랑을 사랑으로 바라보듯

이런 주님을 매일 관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덕으로 자신을 치장하라고 권고합니다.


관상이란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머묾이고 주님을 바라봄이 아니겠습니까?

사랑 안에 머묾이고 사랑을 바라봄이 아니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방황하지 않으며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바라보지 않고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요 시선의 머묾이 아니겠습니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