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중심 교리 1046

[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9)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기적

곁에 아무도 없을 때 휘청이는 사람들 몇 년 전 24시간 상담 기관에서 야간근무 중 한 청년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청년은 난치병 투병 중이고,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이미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하려는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청년 주변에는 유일하게 어머니가 계셨으나 어머니마저 치매로 요양원에 계셨고 아들을 못 알아볼 뿐 아니라 심한 욕설과 공격성을 보이는 상태였습니다. 청년은 지금까지 가혹할 만큼 힘든 삶을 살아왔고 전화할 당시의 삶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청년은 어려서부터 마음 고생을 하며 살아왔고, 지금은 몸 고생까지 감당하게 됐다고 하면서 이제는 그만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청년에..

인간중심 교리 2023.10.20

[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7) 슬픔의 번지수를 찾는 일

억압된 기억, 삶을 송두리째 흔듭니다 자살 시도 후 찾아온 여고생 P는 상담자를 만나자마자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난 뒤 P는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기분이 가라앉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고 했습니다. 사실 할아버지와 별로 친하지 않았고 그렇게까지 슬퍼할 상황도 아니었는데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즈음부터 죽고 싶다는 생각도 강렬해졌다고 했습니다. 자신도 죽으면 할아버지의 장례 때처럼 많은 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멋지게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내내 P는 머리가 자주 아팠고 감정 변화가 심했습니다, 주의 집중이 안 돼 수업 시간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고 결석과 무단 이탈을 반복했습니다. 점차 노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담배, 술, 이성과의 성관계..

인간중심 교리 2023.10.09

[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6) 엄마의 눈

시기적절한 도움이 사람을 살립니다 J는 어린 시절 엄마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자살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딸의 출현에 당황한 엄마는 흉기로 J를 위협하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엄마 좀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아빠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엄마의 삶을 알기에 마음 한편에서는 차라리 엄마가 그렇게 생을 끝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엄마의 죽음 이후 J의 삶은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빠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너무..

인간중심 교리 2023.10.01

[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5) 말할 수 있는 죽음, 자살

“나 힘들어” 말하기도 어려운 사회 한 유명 방송인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전까지 대중들에게 공황장애란 미지의 영역이었고 사회적 책임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핑계로만 여겨졌는데, 그 사건 이후 공황장애란 무엇이고 어떤 고통을 받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공황장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이전까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못하던 환자들이 하나씩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가 바뀐 것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자는 한 해에도 1만3000명이 넘으며 이는 IMF 이후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자살의 고통은 자살자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에게 커다란 ..

인간중심 교리 2023.09.20

[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4) 사람을 살리는 R&D

몇 년 전 아주 우연한 기회에 ‘국가 R&D’(국가 차원의 연구개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R&D 참여자들을 인터뷰하고 정리한 결과 지금까지 국가 R&D의 경험은 한마디로 ‘산화(散華,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 R&D’라는 말로 정리되었습니다. 수주기관에서는 형식적 성과를 만들기 위해,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성과를 위해, 그리고 기업은 손쉽게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의 현실적 필요와 무관한 R&D를 하고 있었습니다. R&D를 발주하는 공공기관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채, 이미 했던 연구를 다시 하는 일도 있었고, 연구자나 기업이 기술개발을 하더라도 공공에서 후속 현실화 작업을 하지 않아 사장(死藏)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국가 R&D의 표면적인 성공률은 높지만, ..

인간중심 교리 2023.09.12

[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3) 오멜라스의 아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습니다. 자살 시도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파출소로 가 L을 만났습니다. 경찰은 L이 차도 주위를 한동안 서성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차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L은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30살이 넘은 나이였음에도 왠지 L은 길 잃은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그 후 매주 한 번씩 몇 개월간 L과의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L은 동해안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L이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L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몇 해가 지난 뒤, 어머니마저 인근 소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여동생만을 데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시골집에 L만 홀로 남겨졌습니다. 채 10살밖에 안 됐던 L은 집 앞 2차선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

인간중심 교리 2023.09.04

[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2) 어지러운 재난의 시기

재난 벌어진 사회 구조적 맥락 밝혀야 요즈음 뉴스에서 접하는 소식들은 그 소식을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입니다. 가뜩이나 정치인들의 기만과 위선, 무능과 패착(敗着)을 매일 접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충격적 사건들까지 더해지니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더 타들어 갑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들 가운데 일부만 떠올려보더라도, 이태원 참사, 현장 노동자들의 죽음(자살 포함),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자살, 잇따른 신생아의 죽음, 오송 지하차도 참사, 초등교사의 자살, 그리고 최근 반복되는 묻지마 살인 등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재난의 충격으로 생긴 트라우마는 감정을 기억하는 뇌 부위인 편도체와 정보를 기억하는 뇌 부위인 해마에 문제를 일으켜, 피해자가 사건이 일어난 고통스러운 시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

인간중심 교리 2023.08.24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30.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135항)

올바른 사랑의 기준은 바로 복음 참된 사랑의 기준은 복음에 있다. 우리는 식별과 판단의 상황에서 우리가 얼마나 ‘복음과 가까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신부님: 얘들아! 사랑이 뭘까? 베드로: 신부님, 우리 엄마는요, 맨날 맛있는 걸 많이 해 주세요! 그게 사랑이죠! 스텔라: 우리 아빠는 맨날 안아 주고 뽀뽀해 주세요! 그게 너무 좋아요! 마리아: 우리 가족은요, 맨날 하트 모양의 인사를 나눠요! ■ 올바른 사랑이란 간혹 어린이들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랑은 표현돼야 한다고 하죠? 일상의 다양한 사랑 표현은 삶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저는 간혹 아이들에게 이렇게 얘기를 해 줍니다. “얘들아, 사랑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행동이나 표현을 통해 드러난단다. 사랑을 통해 따스함을 느끼고 편안해..

인간중심 교리 2023.08.22

[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1) 어느 젊은 교사의 죽음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도 돌봄이 필요 얼마 전 한 젊은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자신이 수업하던 교실 한편에 있는 준비실에서 목을 매 사망했습니다. 대개 자살 장소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자신의 교실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교사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교사의 역할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음을 의미합니다. 자택이 아닌 교실을 선택한 것은 본인의 선택이 단순히 개인적인 죽음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라는 의지 표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살 방법으로 목맴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고 결연(決然)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상황에 대한 반응이고, 다른 행위들에 대한 응답일 수 있습니다. 젊은 ..

인간중심 교리 2023.08.13

[가톨릭신문-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0) 우리 사회의 카나리아, 자살 위기자들

약하고 민감한 이가 먼저 쓰러진다 어린 아기가 비행기 안에서 날카롭게 울음을 터뜨립니다. 이륙부터 시작된 찢어지는 울음은 비행 내내 간헐적으로 들리다가 착륙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비행기를 타면 어른에겐 잠시 귀가 멍해지는 기압의 변화이지만 민감한 아기에겐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귀가 아파 우는 아이는 달랠 수도 설득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기 부모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함께 감당해야 했습니다. 승객 모두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 도착할 때까지 아기의 울음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은 무척이나 피곤하고 짜증도 났습니다. 하지만 작은 아기의 울음을 접하게 됨으로써 그전까지는 무심히 지나치던 기압의 변화라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나도 저 아기보다 훨씬 어릴 적에 많..

인간중심 교리 2023.08.07